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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25)화 (25/168)

25.

실종 사망서가 이렇게 빨리 발행된 건 아마도 ‘누군가’의 압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망서 앞에 ‘실종’이 붙은 건 시체가 없었기 때문일 테고.

프시오가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습니까?

제인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안 괜찮을 건 뭐죠? 이깟 종이에 뭐가 적혀 있든, 전 살아있는데.

프시오는 제인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중요한 건 루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가족이 없다는 사실과 페브리아를 도망치게 된 경위 같은 것들.

프시오가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고 자란 땅에서 당신의 죽음을 슬퍼할 소중한 사람이 있을 텐데, 걱정되지 않습니까?

제인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단조롭게 말했다.

-없어요.

-…….

-슬퍼할 사람, 없어요.

그렇게 제인은 페브리아에서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아쉬운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개같이 벌어두었던 재산도, 악착같이 올라갔던 직책도 루가 주는 편안한 밤에 비해서는 조금도 탐나지 않았다.

루는 ‘열흘마다’라는 말이 무색하게 사나흘에 한 번씩 와서 제인을 재워주었다.

덕분에 그녀는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았다.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맹독의 고통에 빠져 허덕이지 않아도 되었고, 유령처럼 걸어 다녔던 몽유병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지금까지의 불행이 머나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혹은 거짓말처럼.

태어나 처음 가져보는 안식이었다.

제인이 상념을 떨쳐내며 입안에 초콜릿을 막 집어넣었을 때였다.

머리 위로 그림자 하나가 졌다. 통통한 드래곤이 날갯짓하는 형상이었다.

햇볕에 제인이 살짝 눈을 찡그리며 입술을 뗐다.

“……솜브?”

“덥지는 않으세요?”

솜브는 프시오와 함께 사는 아기 드래곤이었다.

“응. 안 더워.”

사막의 낮은 가을이라는 계절의 이름이 무색하게 뜨거운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프시오의 집은 그녀가 장막처럼 쳐둔 마법 결계 덕분에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

“그렇죠? 프시오 님 마법은 정말 대단하다니까요!”

솜사탕 같은 연분홍색 피부에 팔다리가 올록볼록하게 튀어나온 솜브는 무척 귀여웠다.

“사과주스 드시라고 가져왔어요! 프시오 님이 잘 챙겨주라고 하셨거든요, 헤헤.”

다만, 그 귀여운 생명체의 치명적인 흠이라면.

“루 님께서 돈을 퍼부어주고 가셨으니 그만큼 돈값을 해야 한다고요!”

머리가 조금 꽃밭이라는 것이었다.

제인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사과주스를 받아서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솜브는 해맑게 웃으며 옥상 문을 닫고 나갔다.

“돈값…….”

제인은 솜브의 노골적인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녀는 프시오의 집에 머물게 되었던 그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대화의 시작은 마나였다.

-마나……요? 저한테, 그런 게요?

마나니 마법이니 하는 것들은 제인에게 바다에 사는 세이렌처럼 다른 세상의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프시오. 착각하신 것 같아요. 제게 그런 힘이 있을 리가 없어요.

-있습니다.

단호하게 대답한 프시오가 설명을 이어갔다.

-페브리아에는 마나의 힘을 구속하는 결계가 존재합니다. 웬만한 마법사들은 페브리아 안에서 마법을 쓰지 못해요. 그러니 당신이 가진 힘을 몰랐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

-페브리아에 살면서 억압되어있던 마나를 회복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때까지는 이 집에서 지내세요.

제인이 사양하려고 입을 뻥긋거리려 할 때였다. 프시오가 얼른 한 손으로 돈을 나타내는 제스처를 보이며 덧붙였다.

-비용은 이미 루가 처리했습니다.

비용? 무슨 비용?

제인이 루를 보며 재차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이번에도 프시오가 더 빨랐다.

-아주 많이 받았습니다. 내 집이다,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많이 받으셨구나. 내 집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제인, 참고로 전 환불은 진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몸이 회복될 때까지는 여기서 잠자코 지내세요.

얼떨결에 그러겠노라 대답한 제인이 루를 보며 물었다.

-……회복되면?

-내 거처로 데려갈 거야. 그땐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언제든지 말해.

그가 웃으며 말했다.

-어디든 데려가 줄 테니까.

이상하게도 제인은 그의 말이 거짓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눈보라가 빗발치는 한겨울 속에서도 봄의 꽃밭에 가고 싶다고 하면 데려가 줄지도 모른다는 동화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두려웠던 바다를 아름다운 것으로 기억하게 해준 그였으므로.

제인이 초콜릿을 집어 먹으려 손을 휘저었으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어느새 초콜릿 통이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사과주스를 쭉 들이켜 마신 후 집안으로 내려갔다.

무척이나 평온한 오후였다.

솜브는 낮잠을 자는 중이었고, 프시오는 부엌 식탁에서 각국의 화폐와 보석들을 올려놓고 가계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제인은 프시오의 곁을 지나쳐서 설거지한 그릇들의 물기를 닦아 놓았다.

“아주 단 것은 좋아하지 않나 봅니다.”

프시오는 가계부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무심한 듯이 이어서 말했다.

“이전에 사 온 초콜릿은 몇 개 먹다가 말더니 쓴맛이 나는 건 잘 먹으니까요.”

제인은 자신이 손에 들고 있는 빈 통을 보고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프시오가 말했다.

“찬장에 더 있으니 마음껏 꺼내 드세요.”

“……옆에 앉아도 돼요?”

“손버릇이 나쁜 편이 아니라면요.”

프시오 옆에 앉은 제인은 식탁에 엎드린 자세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한 쌍꺼풀, 새까만 눈동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그리고 칼같이 자른 검은 단발머리인…… 어린아이.

프시오의 겉모습이었다.

서른인 그녀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지내는 데에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듯했다.

제인은 그 사연에 대해 구태여 묻지 않았었다.

루가 귀띔하길, 스스로 저주를 건 것이라고 말해준 탓이었다.

제인은 천성이 남을 위로하는 일에 서툴렀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상처만으로도 버거운 인간이었기에 타인의 복잡한 사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프시오라는 사람 자체는 흥미로웠다.

목소리의 고저부터 표정 변화까지 편차가 거의 없는 그녀가 돈에 있어서 만큼은 거리낌 없이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지금처럼.

“또 잔돈으로 장난을 쳤어? 모가지를 따서 하수구에 처박아도 시원찮을 새끼들.”

그녀는 돈 봉투를 탈탈 털어대며 얼마간 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불순한 언어들이 조금도 막힘없이 그녀의 입에서 술술 나오고 있었다.

돈.

단 며칠이었으나 곁에서 지켜본 결과 돈은 프시오의 사랑이자 인생의 전부로 보였다.

그녀의 우체통에는 다양한 마법 의뢰가 하루가 멀도록 몇 통씩 채워졌다.

프러포즈나 파티 같은 각종 이벤트부터 변신술, 마물 퇴치 외에도 마법으로 가능한 건물 수리까지 돈이 될 수 있는 모든 의뢰를 다 받는 듯싶었다.

돈에 사활을 건 듯한 그녀의 성격은 살갑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위로하는 법을 아는 어른이었다.

유난히 잠이 오지 않던 어느 밤.

제인이 거실에서 사막의 밤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프시오는 그녀에게 다가와 데운 우유 한 잔을 건네주며 말없이 곁에 있어 주었다.

따뜻한 것.

그런 건 제인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닿는 건 대개 온도가 낮은 것들이었다.

사시사철 그늘진 지하 서고의 약학서, 땅속 깊이 뿌리 내린 식물, 궁정 식당까지 가는 시간이 아까워 차갑게 식은 수프로 때우던 끼니…….

그래서인지 그녀가 건네준 데운 우유 한 잔에 얼어붙어 있던 마음 한구석이 조금은 녹은 기분이 들었다.

그날 밤, 따뜻한 우유가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프시오는 그녀의 곁에 있어 주었다.

상념을 걷어낸 제인이 불쑥 물었다.

“돈이 왜 좋아요?”

“제인, 앞으로 살면서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람을 경계하세요.”

프시오가 고저 없는 투로 말했다.

“명백히 사기꾼입니다. 아니면 아주 치졸한 사기꾼일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고위험군 인간이니 멀리하길 바랍니다.”

제인은 식탁 위에 올려진 금화 하나를 거머쥐었다.

“……내가 궁금한 건 당신이에요.”

금화는 조명에 반사되는 각도마다 희게 반짝였다.

“당신이 돈을 좋아하는 이유요. 누군가가 바다를 좋아하는 이유처럼요.”

프시오는 제인의 말을 곱씹는 듯하더니 한참 만에 말문을 열었다.

“당신을, 나를, 사람을 먹이고 살리는 것이 다 돈이기 때문입니다.”

식탁에 엎드려 있던 제인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한 손으로 얼굴을 받혔다.

그녀의 눈이 초승달처럼 접혔다.

“여태껏 살면서 당신처럼 바람직하게 속물적인 인간은 본 적이 없어요.”

제인을 가만히 바라보던 프시오는 말없이 다시 가계부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제인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근사하다는 뜻이었어요.”

“압니다.”

프시오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제인이 바로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곧이어 가계부를 덮은 프시오가 무겁게 입술을 떼었다.

“저도 당신에게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제인의 손목에 닿았다.

“제가 함부로 관여할 게 아니라는 건 마땅히 알고 있지만.”

잠시 침묵했던 그녀는 이내 담담한 목소리로 예의 바르게 물었다.

“루는 데시안입니다. 악마예요. 그런데도 계약한 겁니까?”

제인은 말없이 그저 웃으며 부르트고 갈라진 손가락을 매만졌다.

손끝에 일어난 거스러미를 잡아당기자 새빨간 피가 올라왔다.

그 모습을 조용히 보고 있던 프시오는 안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제인의 손에 묻어나는 핏방울을 닦아주었다.

“그는 당신에게 상처를 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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