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로맨틱한 자태로군요.”
꼴 보기 싫게.
때마침 귀가한 프시오가 뒷말이 들릴 듯 말 듯 작게 말하며 루를 지나쳐갔다.
프시오의 집은 일 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녀가 집안에 촛불을 켜는 동안 루는 잠이든 솜브의 옆을 지나 가장 안쪽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나무 책상과 침대가 전부인 단출한 방이었다.
제인을 눕힌 루는 나무 의자에 비스듬히 앉았다. 프시오가 주전자와 컵을 담은 쟁반을 가져왔는데도 루의 시선은 계속 제인을 향해 있었다.
프시오는 말없이 제인을 살펴보았다.
불규칙한 마나의 흐름, 안정적이지 않은 호흡, 식은땀.
그녀는 오한에 떠는 제인의 몸을 찬찬히 훑다가 양쪽 손목에 그려진 각인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각인이라니…….
프시오의 얼굴에 얼핏 당혹스러움이 그려졌다.
루와 가장 가까운 인간인 호엘리반과도 맺지 않은 계약의 표식이었다.
프시오는 루를 보며 의뭉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웬 인간입니까?”
루가 새삼 기억났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고맙군, 프시오. 네가 새로 만들어 준 덕분에 덫에 걸렸으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고, 뭐가 고맙다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인사 받지 않겠습니다. 소름 끼치니까 넣어두세요.”
루가 프시오의 말을 산뜻하게 무시했다.
“이 녀석이 날 덫에서 구해줬거든. 그런데 재미있는 게 뭔지 알아?”
“모르고 싶습니다.”
“내 현혹이 안 통해.”
프시오의 눈이 다소 커졌다.
“……그게…….”
사실이냐고 묻기도 전에 루가 대답했다.
“사실이야.”
프시오의 시선이 다시 제인을 향했다.
가만히 응시하던 프시오는 잠시 모호한 표정을 짓다가 제인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열이 상당했다.
루가 말했다.
“감기인 듯싶은데.”
프시오는 곧바로 몸을 돌려서 쟁반 위에 올려두었던 잔에 물을 따랐다.
이내 제인의 목덜미를 받쳐 들고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 안으로 물을 조금씩 흘려보냈다.
“해열제를 탔습니다. 차츰 열이 가라앉을 거예요.”
약을 다 먹인 프시오가 방문을 나서며 말했다.
“차나 한잔하시죠.”
얼마 후, 거실은 산뜻한 꽃차 향으로 가득 찼다.
“드세요. 당신 취향은 아니겠지만.”
“이 집 주변 결계만 할까. 대체 뭘 발라 놓은 거지? 다른 의미로 페브리아의 결계보다 더 끔찍했어.”
“메로코 진액이요.”
메로코는 달팽이과 벌레 괴물이었다. 코끼리 정도의 크기에 진득한 진액을 마구잡이로 쏟아붓는 게 특징이었다.
루는 단박에 인상을 썼으나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귀찮게 해서.”
프시오가 지칭한 ‘누가’란 호엘리반일 것이다.
그녀의 스승이자 동료이며 친구이기도 한 드호아망의 집권자이자 마탑주.
“아무래도 그 녀석이 네게 미움받고 있는 건 확실하군.”
“미움도 애정이 있어야죠. 실망한 겁니다.”
“……상대에 대한 무례한 기대, 믿음, 그리고 오만함. 실망에 이르는데 필요한 것들이지.”
루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너 따위가 하는 짓치고는 꽤 훌륭한 자세라고 생각해.”
프시오는 조용히 미간을 좁혔다.
“호엘리반에겐 늘 호의적이군요.”
루가 꽃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나를 깨워주었으니 호의적일 수밖에.”
“……당신의 호의가 인간에게 이롭습니까?”
루는 프시오와 눈을 맞추었다. 이내 식탁 위에 찻잔을 내려놓고서 여유가 낙낙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내 호의를 받고 싶어서 발발거리는 걸로 들리는데.”
“호의도 적의도 필요 없습니다.”
“그럼 오늘은 내가 받도록 하지. 네 호의.”
루가 두 팔을 옆으로 벌리며 단조롭게 말했다.
“풀어. 마법.”
“……착각하지 마세요.”
그녀는 일말의 웃음기도 없이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고 나머지 손가락을 쭉 펼쳤다.
돈을 의미하는 제스처였다.
“그건 호의가 아닙니다. 권리죠. 당신은 제게 정당한 비용을 지급했어요. 물론 임의였지만 말씀하신 석 달이 지나고 일 년이 되도록 오시지 않길래 새총에 맞아 죽었나 싶었지만요.”
“마지막 말은 바라던 바인가 본데.”
“들켰습니까.”
“작정하고 들키는데 모를 수 있을까. 그런데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걸 들켜 줄 생각은 없는 건가? 치부라던가, 약점이라던가. 이왕이면 끔찍한 것으로.”
프시오는 질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풀죠. 마법.”
이윽고 향초를 피우고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루를 앉혔다.
“탈의하세요.”
그녀의 말에 루가 몸에 걸치고 있던 로브가 부드럽게 아래로 떨어졌다.
팔을 빼지 않은 소맷자락 덕분에 옷은 완전히 벗겨지지는 않았으나, 그의 등에 새겨놓은 프시오의 마법진은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는 마법진에 손을 내밀었다.
한 뼘 정도 되는 거리에서 주문을 외우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손에서 흰 빛살이 뿜어져 나왔다. 얼마간 주문이 이어졌고, 점차 빛살이 사그라들었다.
태양이 뜨면 검은 새로 변하던 마법은 그렇게 간단하게 풀렸다.
루가 성의 없는 어조로 말했다.
“수고했어.”
그녀는 뒤늦게 의아했다.
이곳까지 찾아와서 마법을 푸는 것은 번거롭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성가신 일이라곤 볼 수 없었다.
그가 옷매무새를 고치는 동안, 프시오는 향초를 껐다.
“루, 이제야 온 이유가 뭐죠? 마법에 강제성이 섞여 있어서 불편했을 텐데요. 일 년 가까이나 유지했다는 게…….”
루가 프시오의 말끝을 잘랐다.
“호엘리반이 의뢰한 건이 생각보다 가닥이 안 잡혀서.”
말하는 동안 그의 시선은 문 닫힌 작은 방을 향해 있었다.
“저 녀석이랑 놀기도 했고.”
데시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인간들을 타락에 빠지게 하는 유혹까지도 모두 진실이었다. 이걸 하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즐거울 거야, 재미있을 거야, 하는 말들까지 말이다.
그러므로 호엘리반과 작당한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면 거짓 없이 말했을 것이다.
아니면 침묵을 선택했던가.
프시오는 안심한 듯이 얕은 숨을 뱉어내다가 일순 갸웃거렸다.
노느라?
“가지고 논 게 아니라요?”
“그게 그거 아닌가.”
“……전혀 아닙니다.”
“상관없지 않나. 난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놀 생각이거든.”
루는 여전히 문 닫힌 작은 방을 보고 있었다.
“귀여운 내 강아지랑.”
“…….”
“제인. 내 강아지 이름이니 기억해 둬.”
즐거운 듯한 루의 미소에 진심으로 아연하던 프시오가 조용히 말했다.
“……저 방에 누워있는 건 강아지가 아니라, 마나를 가진 페브리아인이겠죠.”
루가 흥미로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재미있군. 너 정도 되는 마법사라면 마나의 기운을 읽을 수 있겠지. 하지만 뭐 때문에 페브리아인이라고 단정 짓지?”
“당신도 겪어봐서 알겠지만.”
지금까지 고저 없던 프시오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페브리아의 결계는 매우 독특합니다. 여러 설계가 복잡하게 변형되어 있으니까요. 마나를 가진 인간은 그 결계의 안과 밖을 드나들 때마다 저렇게 앓아눕고 말죠. 그리고…….”
프시오가 살짝 뜸을 들였다가 이어서 말했다.
“혹시 현혹의 힘이 통하지 않았을 때가 새의 모습이었던 낮이었지 않습니까?”
“……맞아. 짐작되는 게 있나 본데.”
눈을 가늘게 좁힌 그가 프시오에게 무언가를 가볍게 던졌다.
“들어보도록 하지.”
루가 던진 걸 바로 낚아챈 프시오의 손바닥에서 금화 한 닢이 반짝거렸다.
그녀는 금화를 바로 주머니에 넣고 계속해서 설명했다.
“제인에게 당신의 현혹이 통하지 않았던 건, 아마도 제가 당신께 걸어드렸던 마법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프시오가 루에게 마법을 걸었던 이유는 호엘리반의 의뢰를 받은 루가 독특한 결계가 쳐진 페브리아에서 숨을 쉬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낮.
데시안의 기운이 강해지는 밤에는 괜찮았으나 낮에는 산소가 부족한 느낌이 들 정도로 호흡하는 게 답답했다.
강한 마력을 지탱하는 기운이 약해지는 낮에 활동하기 위해서는 그의 마력까지 압축시켜야 했다.
그런 이유로 걸었던 마법이 새 변신 마법이었다.
그렇게 몸도, 마력도, 부피를 줄인 루는 확실히 숨을 더 편하게 쉬었었다.
프시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즉, 낮 동안에 압축되어 있던 당신의 마력에 비해서 제인의 마나가 더 강하게 활성화되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루가 모호한 표정을 짓자 프시오는 한 번 더 되짚듯이 말했다.
“더 강하게 활성화되었다는 건 힘의 강도가 아닙니다. 보호막에 가까운 성질로서 말씀드린 겁니다.”
“지금은?”
“……루, 당신이 가진 힘을 모르십니까? 마법을 푼 지금은 비할 바가 못 됩니다.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프시오가 페브리아인이 잠든 방을 바라보며 말했다.
“순식간에 현혹될 겁니다.”
* * *
한낮의 옥상에서 단단한 초콜릿을 깨물어 먹던 제인의 머릿속에 낯선 문장이 떠올랐다.
평화롭다…….
잠 못 이루던 밤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던 그녀의 인생에 이토록 평화로운 시간이 있었나, 하고 차근차근 되돌아봤으나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는 그녀가 죽은 목숨이 된 후에야 주어졌다.
-제인. 페브리아에서 당신의 실종 사망서가 발행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프시오의 집에 머문 지 일주일이 되던 날.
제인은 프시오가 내민 종이 한 장을 물끄러미 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 종이는 페브리아에서 실종된 지 최소 삼 년은 지나야만 발행되는 서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