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도망치고 싶으면.
루의 말에 잠시 시선을 아래로 향했던 제인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언제나.”
그녀의 입꼬리에 루의 것과 닮은 미소가 물려 있었다.
“언제나 도망치고 있어.”
루는 그녀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언제나 도망치고 있는 그녀가 이번에는 자신의 품으로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음을.
루는 그녀가 설탕으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토록 작고 가냘픈 인간을 안고 있는 이 순간의 달콤함이 설명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지, 제인.”
그가 즐거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원하는 밤을 단번에 줄 수는 없는데.”
루의 말에 제인의 손에서 약간의 힘이 풀렸다.
“하지만 나누어서 줄 수는 있지.”
“나누어서?”
“그래.”
그는 현혹하는 힘 외에도 여러 잔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며칠 전에 네게 악몽을 꾸지 않는 밤을 주었었지. 아마 넌 얼마간은 편안한 밤을 보냈을 거야. 몽유병 증세도 없었을 테고.”
그가 물었다.
“그게 얼마 동안이었지?”
제인이 도로록 눈을 굴렸다.
“……열흘?”
이윽고 그녀의 이마에 웃음기 서린 차가운 입술이 닿았다.
“열흘마다 나와 밤을 보내면 돼.”
생각지도 못한 그의 말에 제인의 입에서 보기 드물게 어벙한 소리가 나왔다.
“……어?”
“꼭 열흘이어야 할 필요도 없지. 열흘은 그저 유지 기간일 뿐이니까.”
제인이 화들짝 놀라서 한두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밤을 보낸다는 의미가…….”
“재우는 것 이상으로 바라는 게 있…….”
“없어.”
제인의 빠른 대답에 루가 키득거렸다.
그는 배 난간에 팔을 괴며 느슨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 태도를 유지하길 바라. 되도록 아주 오래. 네 꼿꼿함이 서서히 풀어지는 모습을 보는 게 훨씬 더 즐겁거든.”
“네 즐거움은 왜 항상 그따위야?”
“태어나길 데시안이라.”
제인은 헛웃음을 지었다.
미친 거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상황에서조차 저 악마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럼 계약할까.”
제인은 느긋하게 내민 루의 손을 쥐었다.
그의 손은 살면서 한 번이라도 따뜻했던 적이 있을까 싶은 정도로 냉기가 서려 있었다.
그가 말했다.
“먼저, 한 가지 약속했으면 하는데.”
“……내가 지킬 수 있는 거라면.”
“이제 자학은 그만둬.”
“…….”
까칠하게 부르튼 제인의 손을 물끄러미 보던 루가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네 절망은 오직 나만을 위한 거란 걸 잊지 마. 너를 두렵게 하고 상처받게 하는 것 역시 나뿐이라는 것도.”
그는 그대로 제인의 뒷머리를 지그시 감싸고서 무게를 실었다.
“이런 바다 따위가 아니라.”
제인이 당황할 새도 없이 휘청거렸다.
“루, 잠깐만, 이거…….”
이윽고 제인은 그대로 루와 함께 바다에 빠져버렸다.
그들이 빠진 자리에는 물방울의 파편들이 높게 튀어 오르다가 제자리를 찾아갔다.
밤의 바닷속은 훨씬 더 두려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인은 끝없이 밑으로 가라앉았다.
루는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표류하며 제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그의 형체만이 흐릿하게 보이는 가운데, 제인의 눈앞에 손톱만 한 푸른 빛이 희끗희끗 생겨났다.
챙!
순간,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면서 빛이 사방으로 팽창했다.
이윽고 화려한 푸른 빛의 진이 그려졌다. 진은 그녀의 손목에 걸친 채 빨려 들어가듯이 감겼다.
푸른 빛이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었을 때쯤, 저 멀리 있던 루가 어느새 그녀의 눈앞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제인이 움직일 때마다 먹먹하게 들리는 물소리와 루의 목소리가 귓가에 섞여 들어왔다.
“계약은 성립되었으니.”
제인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폐를 부풀리고 있던 숨이 뿌르르, 하고 공기 방울로 내뱉어졌다.
“이제 숨을 쉬게 해주어야겠지.”
어느새 코앞에 다가온 루는 제인의 허리와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고 입을 맞췄다.
그의 숨이 제인에게 불어 넣어졌다.
“제인, 숨 쉬어.”
“…….”
이거 진짜 미친놈 아니야?
제인이 속으로 온갖 욕을 뱉는 사이, 루가 한 번 더 말했다.
“숨.”
이 새끼가 진짜…….
제인은 분통이 터졌다.
말도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말을 듣는 것 외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숨이 꼴딱 넘어가기 직전.
루의 말을 따라 숨을 들이켜고 내쉬었다.
그런데 코와 입에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지는데도 하나도 괴롭지 않았다.
아니, 몹시 편안했다.
그 이전까지는 두려움투성이였던 바다가 거짓말처럼 안락하게 느껴졌다.
루는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잘했어.”
물속에서 말을 하지 못하는 제인은 그저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루는 그녀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자약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너의 두려움을 가져갈게. 그리고 약간의 유희를 주도록 하지.”
그가 말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형형색색의 야광 빛이 주변에 켜지기 시작했다.
제인이 자세히 보니 불가사리들이었다.
더 아래에서 아름답고 신비로운 빛깔의 산호초가 불가사리들이 내는 야광 빛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물고기들은 물론, 귀여운 돌고래들까지 모여들었다.
마치 투명한 물감들이 빛을 내며 뒤섞였다가도 제 색깔을 유지하는 듯했다.
루는 제인의 손을 잡고 춤을 추듯이 우아하게 바닷속을 유영했다.
지나가던 문어가 제인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하기도 하고 주위를 뱅글뱅글 돌던 새끼 돌고래가 와서 뺨을 톡톡 두드리기도 했다.
바다에 익숙해진 제인은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속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웃음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을지도…….
그렇게 생각한 루는 뒤돌아서 옹기종기 모인 해마와 장난치고 있던 제인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물결에 따라 살랑이는 은색 머리카락 끝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제인은 그의 짓궂은 부름에 살짝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아보았다.
“제인, 무언가 숨이 막히도록 두려울 때면.”
바닷속.
부드러운 흑발이 아름답게 너울거리는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나를 떠올려. 나와 함께하는 이 순간만을 기억해.”
* * *
밀리타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짐 가방에 여벌의 옷가지를 챙기는 그녀 뒤에서 벽에 기대어 있던 카이가 물었다.
“제인이라는 여자, 정말 살아있다고 생각해?”
“응.”
“그래서 찾으러 가는 거야?”
“아니.”
평소와 다름없는 대답과 콧노래.
그러나 카이는 평소와 같이 차분해 보이는 밀리타가 사실 무척이나 들떠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무슨 생각이야?”
“카이, 너야말로 무슨 생각이니?”
카이가 물음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대답이 없자, 밀리타는 아래를 향해 눈짓했다.
“잡고 싶었던 게 내 속옷은 아니길 바라.”
“아.”
카이는 속옷을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을 놓고 뒤를 돌았다.
그의 귓가가 붉어져 있었다.
밀리타가 뒤에서 숨죽이고 킥킥거렸다. 그러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심하게 말했다.
“알면서.”
“…….”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카이는 밀리타가 드호아망에 가리란 걸 알고 있었다.
지금껏 그녀에게 수도 없이 들어왔으니까.
페브리아를 떠나서 얼마나 드호아망에 가고 싶어 하는지를.
드호아망이 마법 도시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어느 도서관 덕분이었다.
작지만 구하기 힘든 마법 서적을 가장 많이 보유한 이 도서관을 이용하기 위해서 마법사는 물론, 마법에 재능 있는 자들부터 동경하는 자들까지 모여들면서 마법 도시로 발달했다.
밀리타는 늘 그곳에 가기를 염원했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그나저나 어떤 무모한 사내가 대련 연습을 핑계 삼아 잭의 허벅지를 베었다던데, 알고 있니?”
카이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글쎄.”
“그래? 칼자국이 교묘하다고 해야 할까. 재활이 오래 걸리게끔 만들어 놨더라. 한동안 걷지 못하게 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처럼 말이야.”
카이는 말없이 짧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뒤에서 빙긋 웃던 밀리타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왜 그랬니? 내가 잭 정도는 충분히 따돌릴 수 있다는 걸 알면서. 윗선에서 처리하기 쉬운 감시자를 붙여 줘서 얼마나 기뻐했는데.”
밀리타의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그녀는 약제를 이용하든 검술을 쓰든 제 한 몸은 거뜬히 건사할 수 있는 여자였다. 만일 누군가가 그녀를 넘어뜨렸다면 그녀가 넘어가 주었을 확률이 높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페브리아를 떠날 수 있었다.
단지 마법이 금지된 페브리아에서 교황청 소속으로 드호아망에 갈 명분이 마땅치 않아 떠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래서 기회를 기다리고 또 기다려왔었다.
오늘날과 같은 기회를.
“바뀐 새 감시자를 다시 알아보려면 돈을 얼마나 써야 하는지 아니?”
밀리타의 장난스러운 타박에 카이가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카이는 소모적인 말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대개는 정말로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곧이어 밀리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설마.”
“재배정된 네 감시자가 바로 나니까.”
* * *
루는 제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도 몹시 하찮아 죽겠다는 눈으로.
이틀 전, 밤바다를 헤엄치고 난 뒤부터 감기에 걸린 그녀는 도통 일어나지 못하고 계속 누워있었다.
게다가 뱃멀미까지 생겨서는 잠깐 일어나기만 해도 헛구역질해대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 했다.
“……우으.”
제인이 잠결에 추운지 몸을 웅크리자 루는 도포를 끌어 올려 덮어주었다.
그는 며칠은 더 바다를 돌 생각이었다.
두려움이든, 바다든, 그녀 자신을 옭아매었던 어느 하나라도 극복하는 걸 보고 싶었다.
하지만 제인은 보통의 인간보다 훨씬 약했다.
틀어쥐면 그대로 짓무르고 마는 무른 무화과와 어떤 점이 다른가 싶을 만큼.
루는 바다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만 갈까.
그렇게 생각하며 무언가를 밀어내듯 팔을 뻗었다. 아지랑이처럼 투명한 일렁임이 일더니 점점 세로축이 긴 타원으로 넓어져 갔다.
이동의 문을 연 루는 제인을 품에 안고서 타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빛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공간이었다. 그는 그런 공간과 어둠에 익숙했다.
이윽고 발바닥에 고운 모래가 밟혔다.
몇 걸음 더 걸어간 이후엔 타원에서 완전히 벗어나, 밤이 삼킨 사막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프시오의 집 앞이었다.
그때였다.
그의 뒤에서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맨틱한 자태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