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22)화 (22/168)

22.

동이 트는 동안 검은 새가 된 루는 수면 위에 뜬 귀마개를 부리로 물었다.

그는 그대로 날아서 다시 배 위에 앉았다.

귀마개에는 이상이 없었다. 안에 깃든 마력도 그대로였다.

“……몽유병.”

그는 작게 중얼거리며 잔잔해진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는 제인에게서 살려고 버둥거리는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죽으려고 작정했군.”

루는 곧장 바닷속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는 고래 한 마리를 깨웠다.

고래의 꿈틀거림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음파를 내며 기지개를 켜는 듯했다.

잠시 후.

폭풍과도 같은 파도가 몰아치면서 혹등고래 한 마리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고래의 등 위에는 제인이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루가 주변에 있던 갈매기 떼들을 향해 고개를 까딱거리자 부리로 그녀의 옷깃을 물어서 배로 옮겨 주었다.

혹등고래는 다시 수면 아래로 내려가면서 재차 거대한 파도를 일으켰다.

배가 심하게 요동쳤으나, 루의 마력에 의해서 난파되거나 뒤집히지 않고 빠른 속도로 파도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그 틈에 세이렌들이 사는 절벽을 무사히 지나갔다.

주변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루는 제인을 관찰했다. 숨이 붙어있었다.

우선 그녀가 삼킨 바닷물을 빼내야…….

“루!”

그가 고개를 돌리자, 세 명의 인어가 배 아래에서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다.

“당신, 맞는군요!”

“어떤 정신 나간 미친 새끼가 잠든 혹등고래를 깨우나 했어요.”

“그 모습은 뭐예요? 까마귀도 아니고.”

인어의 진주라면.

루가 상냥한 목소리로 인어들에게 물었다.

“진주가 필요한데, 있을까.”

새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루는 루였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그의 눈매를 본 인어들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조용히 질색했다.

그는 결코 기분 좋은 얼굴이 아니었다. 잘못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일이었다.

바짝 굳어있던 인어들이 허둥지둥거리며 서로에게 진주 없냐고, 얼른 꺼내라고 아우성쳤다.

“뭐라도 꺼내 봐! 한 알도 없어?!”

“나 없어, 진짜 없어! 다 털어봐, 진주 한 알 나오나!”

“루! 이거라도 괜찮으시면……!”

그중 인어 하나가 귀걸이에 장식된 진주 한 알을 서둘러 떼더니 루에게 주었다.

루는 부리로 문 진주에 마력을 주입하고는 제인의 입에 넣었다.

그녀는 곧바로 기침과 함께 바닷물을 토해냈다. 미약했던 호흡이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이제 얼마간 자고 나면 일어나리라.

루는 쌓인 줄도 몰랐던 한숨을 깊게 뱉어냈다.

그의 행동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본 인어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인간을 타락시키는 것.

그것만이 데시안이 존재하는 이유였다.

그런 데시안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인간의 목숨을 구해준 것도 놀라운 일인데, 그게 루라면 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인간들로 인해 백 년 동안 봉인되어 있던 데시안이었다.

데시안의 관점으로 보면 죽이고도 남을 존재를 살려낸 것이었다. 그것도 도무지 믿기 어려운 표정으로.

인어 한 마리가 옆에 있던 인어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거 아니지?”

“……어. 아니야.”

“저거, 그런 얼굴 맞지……?”

“……맞아.”

인어가 말을 이었다.

소름 끼친다는 얼굴을 하고서.

“소중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 맞아…….”

그 순간, 루가 인어들을 돌아보았다.

루의 푸른 눈동자가 한 번 더 싱그럽게 좁혀졌다.

“부탁 하나 더 하지.”

“…….”

그건 전혀 부탁이 아니었다. 불복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인어들은 닭살이 오소소 돋은 기분으로 그에게 화답하듯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결심했다.

앞으로는 어떤 미친 새끼가 잠든 혹등고래를 깨우든 말든 그냥 지나가리라고.

* * *

사막 한가운데.

한밤중에 귀가한 프시오는 우체통에 꽂힌 편지 봉투들을 챙겨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따뜻한 차를 끓이는 동안 편지들을 일일이 확인했다. 그러다 호엘리반의 이름으로 온 편지만은 미개봉 상태로 휴지통에 처박았다.

“주소지까지 변경했는데 어떻게 알고 보내는 거야.”

프시오는 사막에서 홀로 사는 마법사였다.

주변에 집이라고는 프시오의 집만 있는 터라 담당 마법 배달부가 본래 주소에 수신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프시오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서랍에서 낡은 지도 한 장을 꺼냈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지도에 두 손을 올리고 조용히 집중하자 빛나는 마법진이 그려지면서 한 겹이었던 결계가 네 겹으로 변모했다.

마지막 결계는 무언가 진득하게 흘러내리는 형상을 띄었다.

“이제는 못 보낼 테지.”

프시오는 지도를 다시 수납장에 넣고 기지개를 켰다.

이윽고 차를 마시던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카드를 잘 섞어서 둥그렇게 펼쳤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내쉬다가 일곱 장을 골라서 뒤집었다.

카드를 조용히 해석하던 그녀는 입술을 작게 움직였다.

“솜브.”

어둠 속에서 꾸벅꾸벅 졸던 드래곤이 고개를 돌렸다.

“조만간 손님들이 오려나 봐.”

* * *

제인이 깬 것은 밤이 되어서였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멀뚱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나…… 죽은 건가?

얼굴부터 목과 팔을 더듬으면서도 확신이 없던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을 깨달은 건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은하수가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평생을 페브리아에서만 살아왔던 제인은 황홀한 눈으로 은하수를 올려다보았다.

“……하하.”

그녀가 허탈하게 웃었다.

죽도록 따라다니는 악몽은 이제 꿈 바깥까지 나와서 자신을 질식시키려 하는데, 세상은 이토록 아름답다니.

제인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배 난간에 손을 짚고서 그녀가 멍하니 밤하늘을 구경하는 사이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제인.”

황홀한 밤하늘 아래, 그보다 더 아름다운 루가 서 있었다.

난간 끝에서 바람의 방향을 읽던 그가 제인의 곁에 다가와 미소 지었다. 늘 그렇듯 다정하고 오만한 미소였다.

제인은 소리 없이 탄식했다.

어디까지가 밤하늘인지, 어디서부터 밤바다인지 가늠할 수 없는 어둠과 별들 속에서조차 가장 매혹적인 것은 다름 아닌 그였다.

“루.”

제인이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그거 알아? 여기에서 제일 아름다운 게 너야.”

루는 아무 말없이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바람이 불었다.

그때 제인이 두 손으로 루의 로브를 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루의 푸른 눈동자에 제인의 잿빛 눈동자가 가득 담겼다. 그녀는 말갛게 웃고 있었으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너에게 나를 줄게.”

“…….”

“내 절망을 줄게. 전부 다 가져.”

루는 그녀의 달라진 태도에 눈빛이 흔들렸다.

불현듯 그녀가 달아나려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녀에게 절망이란 제 목에 단검을 겨누면서까지 빼앗기지 않으려 했던 게 아니었던가.

루가 그녀의 손을 잡으려 할 때였다.

제인이 말했다.

“조건이 있어.”

“……들어주지. 무엇이든.”

그녀가 담백한 목소리를 내었다.

“악몽을 꾸지 않는 밤을 줘.”

루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침묵을 깨뜨리고 되물었다.

“그게 조건인가?”

“응.”

제인에게 절망이란 밤마다 그녀를 옭아매던 악몽을 의미했다. 그 악몽 하나 때문에 수년간 독을 복용했고, 고통에 허덕이다가 결국 몽유병까지 생겼다.

제인은 죄책감에 평생을 그렇게 만신창이로 살아가려고 했었다. 심해 아래에서 다이애나라는 환각을 보기 전까지는.

무엇을 택하든 절망밖에 없다면.

그렇다면.

제인은 루의 로브를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네가 원하는 절망을 줄게. 내 고통도 슬픔도 모두 네 것으로 만들어도 돼. 그러니까.”

검은 로브를 잡은 손이 하얗게 질린 채 작게 떨리고 있었다.

“너는 내게…… 악몽을 꾸지 않는 밤을 줘.”

루는 로브를 쥔 그녀의 두 손을 감쌌다. 그리고 이내 한 손을 느리게 당겨서 희미하게 떨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내가 원하는 네 절망이, 네가 가진 악몽보다 더 끔찍하면 어쩌려고 그러지? 그때도 달아나려고?”

“아니.”

인간들의 감정은 파도와 같다.

당장은 동하지 않아도 끝에서부터 밀려드는 물살에 일렁이고 만다. 이는 넘쳐흐르는 눈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제인 역시 물기 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루는 그 웃음이 곧 방울진 눈물이 되리라 생각했다.

분명 그랬는데.

“왜냐하면, 루.”

그녀는 언제나 그의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끝까지 보란 듯이 웃고 만다.

“너는 내가 선택한 절망이 될 테니까.”

자신의 절망을 선택한다…….

이 얼마나 지독한 발버둥이란 말인가.

루는 기쁨이 묻어나는 얼굴로 그녀의 한쪽 뺨을 어루만졌다.

“알려주지. 내가 원하는 절망이 무엇인지.”

이어서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춤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사랑.”

“…….”

“목숨을 바칠 정도로 지독하고 맹목적인 사랑.”

제인의 잿빛 눈동자에 혼란이 어지럽게 얽혔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랑이라는 마음을…….

“……줄 수 없을 텐데.”

만약 인간에게 사랑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을 주었다면 제인의 그릇은 언제나 바닥을 드러냈으리라.

다이애나가 가르쳐 준 일말의 흔적만이 물 자국처럼 남은 채.

루는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럴지도.”

당연하다는 듯이 수긍하던 루가 애살스럽게 웃었다.

“그럼에도 걸어보는 거지. 작고 볼품없는 희망을.”

이내 사랑과 희망을 말하던 입술로 말했다.

악마처럼.

“네게서 아름다운 절망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제인은 그제야 온 세상 푸름이 한데 모인 것 같은 그의 눈동자 속에 무엇이 들어차 있는지 똑바로 마주했다.

공허였다.

도무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끔찍한 공허.

그녀의 잿빛 눈동자까지 모두 흔적 없이 집어삼킬 듯이, 압도적인.

“도망치고 싶으면, 지금 말해.”

루가 제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와 계약한 뒤에는 돌이킬 수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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