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제인이 나룻배 위로 빙그르르 날고 있는 새들을 가리키며 루에게 물었다.
“너의 새들이야?”
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한 마리씩 가깝게 날아오더니 발고리에 달려있던 몇 개의 주머니와 통을 바닥으로 툭툭 떨어트렸다.
그리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루는 부엉이들이 떨어트린 물건들을 설명해 주었다.
“이건 물통이고, 이건 먹을 거.”
“와.”
제인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삶은 감자, 볶은 견과류, 쿠키와 비스킷, 과일, 치즈, 육포가 각각의 주머니에 들어있었다. 심지어 세 개의 물통 중의 하나는 포도주가 담겨 있어서 열자마자 달콤한 향이 번져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약간 갈증이 일었던 제인은 제일 먼저 무거운 생수통을 들어서 벌컥벌컥 마시고는 아이처럼 웃었다.
그녀는 차츰 긴장감이 풀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대로 바다에 익숙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루가 로브 안에서 꺼낸 작은 물건을 제인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루를 바라보았다.
“이걸 왜 줘?”
루가 준 것은 귀마개였다.
“끼고 자도록 해.”
“너 코 골아?”
루는 제인의 물음을 가볍게 무시하고 설명해 주었다.
“동이 트는 새벽쯤에 암석으로 된 절벽을 지나가게 될 거야. 그곳에 세이렌이 살고 있어. 데시안인 내게는 타격이 없지만 넌 인간이니까.”
제인도 세이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노랫소리로 유혹해서 바다에 빠트려 죽인다고 알려진 님프들이었다.
세이렌은 사람들이 잘 들어가지 않는 뱃길 쪽에 서식했고, 제인은 그런 길로 바다를 지나간 적이 없었다.
바다…….
주변의 소음이 먹먹해져 갔다.
풍덩, 하는 이질적인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법 적응했던 바다가 갑작스레 아찔하게 느껴졌다.
손이 떨려왔다.
“제인?”
“…….”
“제인.”
제인은 움찔거렸다.
어깨에 차갑고 흰 손이 얹혀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느릿하게 루에게로 옮겨갔다.
그가 물었다.
“귀마개, 끼워 줄까?”
“……아니. 내가 할게.”
루는 잠시 그녀의 안색을 살피다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착하네.”
* * *
깊은 밤, 루는 잠든 제인의 곁에 누워서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얼굴에 흘러내리는 은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면서 그녀의 콧대를 쓸어내렸다.
그러다 루의 눈도 슬그머니 감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세이렌들의 황홀한 노랫소리가 들렸다.
루는 눈을 감은 채 옆자리를 짚었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것 없이 딱딱한 나무 바닥만이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평선 너머로 동이 트려 하는 것이 보였다. 그가 찾는 제인은 배의 벽 쪽에 서서 허리를 숙이고 바닷속을 보는 듯했다.
“제인.”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마력이 깃든 귀마개를 귀에 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제 목소리만이 들릴 것이었다.
세이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텐데도 그녀는 무엇엔가 홀린 듯 보였다.
루가 제인의 팔을 잡으려 할 때였다.
풍덩!
꼼짝하지 않고 서 있던 그녀의 상체가 앞으로 꼬꾸라지면서 수면 위로 수천 개의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하?”
검은 새 한 마리가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모양새로 날갯짓했다.
수평선 위로 막 동이 트고 있었다.
제인을 삼킨 버린 바다 위로 그의 귀마개만이 소리 없이 둥둥 떠올랐다.
* * *
제인은 바다에 빠지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건 악몽 같은 꿈속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어둑한 바다 밑에서 저를 끌어당기는 다이애나를 보며 점점 더 심해로 가라앉고 있었다.
제인은 눈을 감았다.
오래전의 다이애나가 떠올랐다.
햇살 같던 사람.
웃는 얼굴이 반짝반짝 빛이 나서 다른 사람의 그늘진 부분까지 밝혀주던 사람.
몸의 상처는 물론, 마음의 상처도 헤아릴 줄 알았던 그녀는 제인이 지냈던 보육원으로 자주 봉사활동을 왔던 약제사 중 한 명이었다.
어릴 때부터 속이 꼬인 아이였던 제인은 봉사활동 하러 온 사람들을 보면 노려보기 바빴다.
그 사람들은 애정과 동정을 구분하지 못하는 멍청이들 같아서였다.
부모가 없는 게 뭐.
버려진 게 뭐.
그게 나의 전부가 될 수는 없는데.
하지만 다이애나는 다른 봉사자들과는 달랐다. 부모가 보고 싶냐는 멍청한 질문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의 곁에서 가끔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어떤 꽃이 폈는데 아주 예뻤다거나 하는 등 소소한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언제부턴가 제인은 그녀가 곁에 오면 옆자리를 내어 주기도 했다.
다이애나는 밝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강한 사람은 아니었다.
몸이 약하고 겁도 많아서 주변에서 그녀를 보호해 준다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했다.
뒤늦게 알고 보니 어릴 때 크게 앓은 적이 있던 사람이었다.
-지금은 아프진 않지만, 재발할 위험이 커서 조심해야 하긴 해. 건강하게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왜 약제사가 되었냐고? 사람들을 아픔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은데 수술할 엄두는 안 나서. 이유가 별로 안 멋있지?
-제인. 이 꽃은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 피를 빨리 멎게 해. 가다가 넘어지면 이 꽃잎을 조물조물해서 얹어 놔.
자신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열어 준 사람.
애정이 무엇인지 알려 준 사람.
다이애나는 제인이 태어나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
친구.
또래와 잘 어울리지 않던 제인은 그 단어를 속으로 몇 번이나 곱씹으며 남몰래 조그맣게 웃곤 했다.
그러나 어른인 그녀와는 나이 차가 클뿐더러, 자기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다.
시간이 흘러서 더욱 가까워진 두 사람은 함께 보육원 울타리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
그날은 다이애나가 제인을 데리고 수습 약제사들과 함께 산 정상에서만 자라는 약초를 캐러 갔던 날이었다.
필요한 약초를 모두 캔 수습 약제사들이 먼저 내려간 뒤에도 다이애나는 그곳에 자라난 식물들을 조금 더 관찰하다가 하산하기로 했다.
그녀는 관심 있는 식물에 한 번 집중하면 무섭도록 몰두해서 누가 곁에서 춤을 춰도 모르곤 했다.
그걸 알고 있던 제인은 조용히 곁에서 탁 트인 하늘을 보고 있었다.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든 것은 그때였다.
절벽 아래에서 검은 아지랑이 같은 게 피어오르는 듯했다.
제인은 저도 모르게 이끌리듯이 가파르게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다가갔다.
-……뭐, 뭐야?
절벽 아래의 무언가를 보고 얼굴이 희게 질린 제인은 뒷걸음질 치려다가 발을 헛디뎠다.
-제인!
순식간에 일어난 일들이라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절벽 밑으로 미끄러지려던 찰나였다.
다이애나가 다급하게 제인의 손목을 잡은 덕분에 겨우 매달려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본 제인은 공포에 휩싸여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손에서 자꾸만 땀이 나오는 통에 미끄러져 떨어질 것만 같았다.
다이애나가 소리쳤다.
-꽉 잡아!
다이애나는 죽을힘을 다해서 제인을 겨우 끌어올렸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제인이 다친 곳이 없는지부터 확인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널 혼자 두고…….
-밑, 밑에…….
다이애나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제인을 타이르던 바로 그 순간.
절벽 아래에 있던 어둠이 다이애나의 발목을 끌어당겼다.
-아아악!
절벽 아래에 있던 그것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어둠이었다.
검은 안개처럼 생긴 어둠은 소름 끼치는 눈을 빛내며 유기적으로 부풀어 들썩거리고 있었다. 사람도, 괴물도 아닌 것이 계속해서 다이애나를 절벽 밑으로 끌어당겼다.
다이애나는 두려움에 울부짖으면서도 제인에게 도망가라고 소리쳤다.
그렇게 어린 제인은 자신을 구해준 그녀를 뒤로하고 달아났다.
절벽 아래, 깊은 바닷속으로 다이애나가 떨어져 죽을 때까지.
벌써 십 년도 더 넘은 기억이었다.
그러나 마치 화상 자국처럼 남아서 지금껏 지워지지 않았다.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문득문득 떠올라서 제인을 괴롭게 했다.
제정신으로 지내기 힘든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반쯤 정신이 나간 제인은 소량의 독을 복용했다. 고통은 또 다른 고통을 잊게 해주었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숨을 쉴 수 있었다.
밤을 버텨낼 수 있었다.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는 지금, 제인은 정신을 잃기 직전에 가까스로 눈을 떴다. 죽은 다이애나가 여전히 그녀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나를 살리고 죽어버린 당신에 대한 미안함.
혼자만 살아있다는 죄책감.
자기를 불행하게 만들던 나날들.
이제는 모두 다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인은 발밑의 다이애나를 보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신체 곳곳에 물이 들어와서 고통스러우면서도 마음만큼은 편안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의식이 흐려져 갔다.
동시에 행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과거의 장면들이 눈앞을 스쳐 갔다.
착착착, 빠르게 지나가는 기억들 사이에서 단 하나의 장면이 멈추었다.
제인은 의문이 들었다.
-너를 내게 줘.
어째서 지금 네가 떠오르는지.
-지금보다 더 어두운 진창으로 데려가 줄 수 있게끔.
너의 목소리가 들리는지.
-네 심장과 영혼을 나에게 줘.
너의 쓸쓸함이 보이는지.
천천히 죽음에 가까워져 가고 있을 때였다.
조금씩 물살의 흐름이 바뀌었다.
희뿌연 시야 사이로 깊은 심해 아래에서 물살을 가르고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아주 빠른 속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