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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20)화 (20/168)

20.

제인은 독기와 객기로 똘똘 뭉친 인간이었다.

그녀 사전에 하기 싫어서 안 하겠다는 말은 수두룩했어도 할 수 없어서 못 하겠다는 말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제인의 목구멍에는 못 해 먹겠다는 말이 꽉 들어차 있었다. 그녀는 새하얗게 질린 낯빛으로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응시하며 루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가고 싶은 곳, 있나?

-딱히.

-그럼 일단 바다를 건너지. 잠시 들려야 할 곳도 있고.

루가 그렇게 말했을 때만 해도 제인은 ‘내가 사실 바다를 되게 무서워하거든. 그래서 정박할 때까지 배 밖으로는 절대로 안 나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배 밖으로 안 나오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이건 나룻배잖아. 이걸로 어떻게 바다를 건너?

-건너.

-…….

-정말로.

-…….

-제인, 무서우면.

-내가? 그럴 리가. 넓고 좋네. 뭐해, 안 타?

그렇게 하등 쓸데없는 객기로 몸을 실은 배는 일반적인 나룻배보다는 확실히 크고 넓긴 했으나, 나룻배는 나룻배였다.

그리고 지금 그 나룻배는 지금 바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떠 있었다.

제인은 식은땀이 다 났다.

페브리아를 떠나서 지옥에도 가겠다던 여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이미 망망대해에서 떠다니고 있었기에 목 끝까지 차오르는 ‘무서워 죽겠으니까 돌아가자.’라는 말도 무의미했다.

“그래서, 우리 어디가?”

제인이 한참 늦은 질문을 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하지만 루는 이미 그녀의 쇄골까지 흐른 식은땀을 눈치채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머리카락 끝만 느슨히 잡았는데도 그녀에게서 날이 선 경계심과 두려움이 전달되었다. 땀으로 젖은 목덜미와 흐트러진 호흡, 미세하게 떨리는 살결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루가 대답했다.

“사막.”

“사막? 얼마나 걸리는데?”

“배를 타고 가고 있으니 금방은 아닐걸.”

마력을 써서 이동의 문을 열면 바다를 통하지 않고 사막까지 단번에 갈 수 있었지만 루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짓도 아니었다.

배를 타면 닷새 정도 걸리는 데다 몇 바퀴 더 돌면서 최대한 느긋하게 갈 생각이었으니, 금방 도착할 예정이 아닌 게 맞았다.

루는 제인의 머리카락 끝에 입을 맞추고는 낭랑한 목소리를 냈다.

“제인, 나는 네가 좋아.”

무척이나 즐거운 어조였다.

“네 치기도, 두려움도.”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제인이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루와 눈을 맞추었다.

제인이 조용히 말했다.

“너…… 알고 있었구나. 내가 바다를 무서워한다는 거.”

“데시안을 취하게 하는 감정이지. 공포, 불안, 두려움.”

루가 나른하게 웃었다.

“달아.”

제인은 대답 대신 얕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바다를 응시했다.

잔머리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반짝거렸다.

“이런 내가 싫으면, 제인.”

루가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이내 제인의 식은땀을 닦아주고는 턱을 살짝 쥔 채 저를 보도록 했다.

“지금이라도 도망가도록 해. 네 자유로운 두 다리로.”

제인이 기막힌 얼굴로 칠흑 같은 바다를 가리켰다.

“애초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선택지는 주는 게 아니야.”

“난 그런 걸 좋아하는 편이라. 네가 익숙해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배 난간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젖혔다.

푸른 하늘이 끝도 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또.”

“또?”

“나는 또 너의 무엇에 익숙해지면 돼?”

루는 헛웃음을 흘리며 제인을 바라봤다.

은발의 머리칼이 바람에 너울거렸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얼굴에 달라붙는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제인이 돌아오지 않는 그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듯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아직도 그 사랑스러운 질문에 응할 대답을 골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툭,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내 곁에 있는 것.”

* * *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허리를 반듯하게 세운 밀리타가 마드리안의 질문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인은 살아있습니다.”

“근거는.”

“죽음의 그림자가 아니었습니다.”

마드리안은 속눈썹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대도 알다시피 제9 탑과 야크만프 절벽은 한낱 인간이 떨어졌을 때 살아있을 만한 높이가 아니다. 그자에게 마나가 있다고 한들…….”

그녀가 낮게 말을 이었다.

“이 땅에서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을 테고.”

“시체를 찾으셨습니까.”

밀리타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해가 뜨자마자 백 명도 더 되는 수행 기사들이 이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 아래를 뒤졌는데도 없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마드리안은 다시 밀리타를 응시했다.

밀리타는 목소리만이 아니라 눈동자도 얼뜬 떨림이 없었다.

마드리안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제인이 떨어진 곳으로 추정되는 자리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피로 얼룩진 바위 하나가 있었다. 그 근처에는 이리떼가 살고 있고.”

마드리안이 제인을 제9 탑에 가둔 것은 손에 잡히는 칼이 되라는 의미였다.

그와 동시에 패전국의 보물이 쌓인 곳에 가둔 것은 지금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삶을 보장하겠다는 회유였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신성한 교황청에 납치로 인한 자결이라는 얼룩이 남는 것은 원하지 않았으나 제인이 원한다면 말릴 의향도 없었다.

공개 집무실과 가까우면서도 유독 창이 크게 트인 제9 탑에 가둔 건 그러한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얼룩이 지기 전에 흔적도 없이 닦아버리면 그만이었다.

다만, 다음 날 이른 새벽부터 시체를 찾아 나섰을 때 그녀 시체의 행방이 묘연했던 것은 마드리안이 생각해둔 여러 예측 중에서도 확률상 희박한 전개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한들, 뭐가 달라질까.

시체의 행방불명?

그리 큰일은 아니었다.

살아있다고 해도 몸이 온전하지 않을 것이다. 회복될 수 없는 뼈마디와 장기에 문제가 있을 터였다. 틀림없이 그녀의 몸과 삶에 장애를 가져다줄 것이다.

손에 쥐고자 하는 칼이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면 그 칼날을 무뎌지게 하는 것만으로도 목적은 이룬 셈이었다.

그때 밀리타가 명료한 어조로 말했다.

“머리요.”

마드리안이 이어서 말해 보라는 듯 침묵을 유지했다.

“이리떼가 물어뜯었다고 한들, 머리는 남아 있어야 합니다. 동굴 속까지 찾아보지 않았습니까? 다시 한번 더 말씀드립니다.”

밀리타가 목에 힘을 주었다.

“제인은 분명 살아있습니다.”

“……그대의 의견은 고려해 보도록 하지. 나가보게나.”

밀리타의 생각은 이 정도만 들어도 충분하다 싶었다.

마드리안이 옆에 두었던 안경을 쓰고 책상에 쌓인 서류로 손을 뻗칠 때였다.

“찾아오겠습니다.”

밀리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가 찾아올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마드리안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 * *

밀리타가 방에서 나간 후, 마드리안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처리해야 할 서류들을 훑어보았다.

그녀의 공개 집무실에는 한낮이 되면 세상 모든 빛이 쏟아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햇볕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말렌은 이토록 아늑한 공간과 이 공간의 주인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꽁꽁 언 얼음으로 지어진 궁전 같은 곳에 계신다면 이질감이 덜하지 않을까.

마드리안은 제인의 자결이라는 변수까지 생각했다는 듯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그녀의 시신을 절벽 아래로 내다 버렸다.

짐승 사체 다루듯이.

-내게 쓸모가 되지 않을 바에는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그렇게 희미하게 웃으며.

말렌은 오랫동안 곁을 지켜 왔으나 마드리안의 속내를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그녀의 명령은 대부분 ‘성스러운 교황의 지시’라고 받아들이기에는 이해하기 힘들거나 위험한 것들투성이였다.

그런데도 결론적으로는 매번 마드리안이 생각하고 원하는 방향대로 일이 진행되었다.

단 하나.

옴푸푸스 풍토병만은 마드리안의 예상에서 완전히 벗어났었다.

하지만 예상을 벗어나게 한 요주의 인물이었던 제인이 이렇게 된 이상 결국, 마드리안이 원하는 방향대로 매듭이 지어진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렌의 표정은 쉽게 풀어질 줄을 몰랐다.

밀리타의 요구를 들어주시다니…….

한편, 마드리안 교황은 말렌을 힐끗 보며 생각했다.

표정에 생각이 여실히 드러나는 사람.

놀라운 건 그것이 그가 숨긴다고 숨긴 표정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말렌의 그런 면모를 꽤 마음에 들어 했다. 투명한 민낯은 때때로 추악하지만, 거짓도 쉽게 드러나는 법이니까.

마드리안은 언제나 진실보다 거짓을 경계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교활하고, 간사하고, 가벼운 성질이 다분하면서도 민낯이 도무지 숨겨지지 않는 인간을 곁에 두는 이유이기도 했다.

“오늘은 무엇이 그리 탐탁지 않으실까요.”

고저 없는 마드리안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즐거움이 깃들어 있었다.

“밀리타의 요청을 받아들이신 연유가 무엇인지 저로서는…….”

“소문이란 참 재미있는 거지요.”

말렌은 당혹스러웠다.

설마, 그 알량한 소문 하나 때문에?

“교황님, 밀리타는 사생활과 별개로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자입니다. 소문만으로 페브리아 밖으로 보내는 것은 인력 낭비입니다.”

“사생활, 소문, 별개로 역할을 충실히 한다…….”

마드리안 교황은 쿡쿡 웃는가 싶더니 거짓말처럼 웃음기를 지워 냈다.

“교황청에서 ‘고위 직급’, ‘여성’들만 골라서 잠자리를 가지는 게 과연 사생활이고, 소문일 뿐이며, 역할을 충실히 하는 거라고 보십니까.”

“!”

말렌은 간과했던 사실을 깨닫고 눈살을 찌푸렸다. 직급까지 하나하나 운운하기에는 여성끼리의 잠자리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뜬 소문이었다.

문득, 지난날 마드리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잊지 마세요, 말렌. 더러운 걸 손에 묻히지 않으려면 칼을 버리는 것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그게 어떤 칼이든.

말렌은 뒤늦게 깨달았다.

처음부터 밀리타를 잘라낼 생각이셨구나……!

“말렌. 전 손에 쥘 칼이 필요하지, 스스로 칼을 쥐려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필요로 하는 건 언제든 ‘무엇’이 되는 자예요.”

그는 이제 얼음 궁전 같은 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있는 곳이라면 그게 어디든 한낮의 햇살마저 서늘해지는 공간이 되었기에.

“그러므로, 이 일은 여기서 마무리 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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