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부모는 자식에게 그런 걸 해줍니까.”
“교황님!”
그녀가 농담이라도 하는 것으로 생각한 말렌이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가 돌연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도대체 그 또라, 연구원에게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라……. 말렌.”
“예.”
“질문이 틀렸습니다. 그대가 알고자 하는 이유라는 게 제게 있지 않아요.”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그녀는 벗어 두었던 안경을 다시 쓰고 서류를 넘겼다.
그리고 즐거운 듯한 어투로 아리송한 말을 했다.
“답은 제인에게 있으니 시간이 되면 가서 물어보세요.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이죠. 저도 알고 싶군요.”
말렌이 골치 아픈 신음을 내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껏 내 사람이 되라는 제안을 이토록 쉽게, 그리고 끝끝내 거절한 자가 있었던가.”
“……!”
“그래서 이유를 제게서 찾으면 안 된다고 한 겁니다. 유독 다르게 행동하는 건 제가 아니라 그녀니까요. 제 안목을 믿으세요. 곁에 두면 분명 쓰임이 탁월한 재목입니다.”
“……예.”
“물론, 손에 잡히는 칼이 된다는 전제하에.”
마드리안은 제인이 꽤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사람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쓸지 아는 눈이었다. 그러니 어찌 탐나지 않을 수 있을까. 한편으로 아쉽기까지 했다.
연구서만 족족 빼내지 말고 처음부터 교황청으로 데려왔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가 내려놓았던 펜대를 잡고 다시 업무에 집중하려 할 때였다. 밖에서 뜀박질하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노크 소리에 뒤이어 호위 기사 한 명이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교황님, 지금 제9 탑으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마드리안 교황의 물음에는 고저가 없었다.
곁에 있던 말렌 추기경은 그 탑에 갇힌 또라이가 난동을 부렸겠거니 싶어서 고작 그런 일로 이 시각에 찾아온 호위 기사를 타박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조금도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 여자가…… 자결했습니다.”
* * *
나무에 앉은 루는 성탑을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서 제인이 바닥을 구르며 웃고 있었다. 다름 아닌 자신이 보낸 마지막 쪽지를 읽은 직후였다.
“꼴사납게 웃는군.”
루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곧이어 문지기들이 제인을 가둬놓은 방으로 들이닥쳤다. 곳곳을 둘러보던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제인에게로 향했다.
하나같이 황당한 표정이었다.
분명 저런 얼굴이 될 만한 말을 했을 테지.
그로부터 기묘한 정적이 이어졌다.
무언가 낌새를 눈치챈 루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던 찰나였다.
“!”
눈 깜짝할 새였다.
제인이 성탑 아래로 은발 머리를 부드럽게 휘날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자유로운 새처럼 미소를 띤 채.
다음은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루가 떨어지는 그녀를 품에 안은 건 이성이 아니라 본능이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품에 안긴 제인이 턱을 들어서 느긋하게 성탑 위를 관찰하고 있었다.
조명에 비친 기사들의 그림자 덩어리들이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다.
“하.”
루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한숨인지 웃음인지 그사이 것을 뱉어내었다.
“안녕, 루.”
성탑에서 루에게로 시선을 옮긴 제인은 조금은 인정해야 했다.
아무 미련도 없는 이 땅에 무엇을 두고 가려 해서 그토록 찝찝했는지.
그녀의 조그마한 손이 그의 옷깃을 잡아 끌어당겼다. 익숙한 박하 향을 맡자, 그녀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 발버둥, 마음에 들었어?”
허구한 날 숲의 새들을 보냈던, 이제는 자신의 일상이 되어버린, 놓고 가면 허전하기까지 한 데시안의 옷깃을 잡으며 속삭였다.
“그렇다면 너도 내 마음에 들만한 짓을 했으면 하는데.”
이윽고 운명의 시계가 한 칸 옮겨졌다.
그와 그녀 모두 다.
“같이 도망가자. 지옥이든 어디든 상관없어.”
* * *
문지기들은 여전히 아찔하도록 높은 탑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 사이 루는 근처 숲에 있던 구더기와 같은 벌레들을 불러들였다.
빠르게 모여든 벌레들은 사람의 형상처럼 뒤엉키다가 제인과 똑같은 모습으로 다듬어졌다.
정확하게는 보는 이들을 홀려서 제인의 시체로 착각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후에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문지기들과 더불어 적은 인원의 호위 기사들을 대동한 마드리안 교황까지 가짜 시체를 차례대로 확인하러 모여들었다.
신의 계시를 전하는 교황청에서 납치와 자결의 흔적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시체를 처리하리라.
제인의 예상은 적중했다.
문지기들과 호위 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가짜 시체를 숲속 낭떠러지로 밀어서 타살인지 자살인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가짜 시체는 떨어지는 순간 벌레로 뒤바뀌어서 본래 있던 습한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어둠에 가려져서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드리안 교황만이 절벽 아래를 유심히 보다가 돌아갔을 뿐이었다.
제인과 루는 멀찍이 떨어진 산 중턱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들 깜빡 속았잖아!”
제인이 손으로 그곳을 가리키며 킥킥거렸다.
루는 이상하게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원했던 건 제인의 애원하는 얼굴이라던가 구차하도록 발버둥 치는 모습이었다. 전부 제 뜻대로 되었다는 듯이 킥킥대는 얼굴 따위가 아니었다.
루는 그녀의 손을 당겨서 제 품에 들어오도록 했다.
제인이 몸을 떨어뜨리려 하자 루가 느긋하게 팔을 두르며 더 가까이 안았다.
“재미있나 보군.”
그리고 미소를 띤 채 다른 손으로 제인의 이마부터 눈썹, 눈가까지 살짝살짝 건드렸다. 그러다 흰 뺨을 어루만지면서는 나른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제인.”
그녀가 대답하려 살짝 입을 벌리자, 루는 그 틈으로 엄지를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말랑하고 따뜻한 그녀의 혀가 느껴졌다.
그녀의 얼굴이 당혹스러워하며 붉어짐에 따라서 입 안의 온도가 더 올라가는 듯했다.
“여기가 이토록 따뜻한 건.”
그가 나른하게 웃었다.
“네가 죽지 않고 살아있기 때문이겠지.”
제인은 도무지 그의 손길에 저항하기가 어려웠다. 저항은 생각도 못 할 정도로 몽롱하게 몸의 근육이 이완되어 갔다.
제인의 입술이 전보다 더 벌어졌다.
그의 엄지가 그녀의 치아와 잇몸 사이부터 입 안쪽 내벽까지 느릿하게 구석구석 만지고 있었다.
제인은 그 감촉이 간지러우면서도 이상야릇해서 침이 더욱 고여갔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에는 붉게 상기된 열기만이 꽃처럼 피어났다.
“예쁘네.”
루는 엄지를 천천히 빼내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방긋 웃었다.
“그럼 이제 도망가 볼까.”
“…….”
멍했던 그녀의 정신이 돌아왔다.
그제야 제인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온몸의 혈액이 두 뺨부터 귓불과 목까지 모두 붉은 칠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곱씹었다.
빌어먹을. 이 망할 놈의 악마가 대체 어디까지 홀리려 하는 거지?
제인은 비아냥거리고 싶은 욕구가 치미는데도 어떤 말로 신경을 긁어야 좋을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루는 여전히 산뜻하게 웃고 있었다.
제인은 이를 꽉 물고 미소를 지었다.
“……너야말로 기분이 좋아 보이네.”
“넌?”
루는 제인의 목덜미에서 아물어 가는 상처를 만지며 되물었다.
“이렇게 내 손이 닿는 느낌이 어떻지?”
그의 오만함을 수긍할 수 있는 황홀한 눈동자.
사악한 미혹.
타고나길 색정적인 현혹의 데시안.
루.
그는 사막의 마법사의 엉뚱한 마법에 걸려 낮에는 검은 새가 되는 데시안이었다. 물론 그 마법을 엉뚱하다고 표현한 건 제인이었다.
페브리아는 마법이 금지된 나라였기에 그녀는 마법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다. 마법 도구부터 마법사까지 마나가 깃든 것들은 모조리 이 땅에 들어올 수 없었다.
다만, 딱 한 가지 마법 서적은 예외였기 때문에, 책을 통해 아주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마법사라고 해도 인간일 것이다.
인간이 데시안에게 마법을 걸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굉장한 마나를 지녔거나 둘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으리라 짐작했고, 제인은 후자에 더 무게를 싣고 있었다.
루는 심장이 있는 것들이라면 무엇이든 홀릴 수 있는 현혹의 데시안이었기에.
“제인.”
그가 말을 이었다.
“내 품에 들어온다면 더 기분 좋게 해줄게.”
누군가의 품에서 행복하게…….
제인은 그 말이 제 인생에서 허락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기에게 아주 오랫동안 벌을 주면서 살아왔다.
행복하게 살아서도, 편하게 죽어버려서도 안 된다고 지독하게 몰아세웠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그때 루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제인의 이마가 자기 이마에 닿도록 끌어당겼다.
“기다려 주지. 언제든 좋으니 내 품으로 들어와.”
얼굴이 무척이나 가까웠다.
“네 발로 직접.”
밝은 달 아래,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깨끗한 박하 향을 싣고서.
그렇게 보고, 듣고, 맡는 모든 게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
“……있지.”
지독하리만치 아름다운 어느 데시안에게 시선을 사로잡힌 한 여자가 말했다.
“어쩌면 내 묘비명에 이런 문장이 새겨질지도 모르겠어.”
살가운 조소를 띄운 채.
“악마에게 홀려 죽은 인간.”
그러자 사악한 미혹이 답했다.
“근사한 묘비명이군.”
“……퍽이나.”
루의 이마가 가볍게 밀쳐졌다.
주변에서 소리 없이 눈만 깜빡이던 부엉이들이 우흥 우흥 웃었다.
깊은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