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교황 마드리안 데 칸의 재위가 3년 차에 접어들었을 무렵.
제국 콜드리센의 붉은 장미라 불리던 대기사 테라얀 로디테가 해상 무역의 중심인 자유도시 셀로느를 독점하고자 전쟁을 일으켰다.
콜드리센은 드래곤 나이트 군부대를 보유하고 있던 막강한 제국이었다.
여러 소국, 왕국들이 다급하게 손을 잡았으나 공중전에서 당해 내지 못하고 연이어 패배를 기록했다.
그렇게 셀로느가 테라얀 로디테의 손에 들어가기 직전.
마드리안이 이끈 군부대가 콜드리센의 수도인 란톰을 습격했다.
모든 주요 병력을 셀로느에 집중했던 콜드리센의 군부대는 뒤늦게 방향을 틀어서 수도로 이동했으나 그사이 테라얀 로디테가 전사하고 말았다.
마침내 잘 짜인 한 편의 비극처럼 콜드리센의 황제는 페브리아의 교황 마드리안의 발등에 입을 맞추고 복종을 맹세했다.
붉은 피를 내며 지독하고도 화려한 장미길로 향하던 제국 콜드리센의 야심이 대기사 테라얀 로디테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린 것이다.
이후, 페브리아의 교황 마드리안은 패전국인 콜드리센부터 자유도시 셀로느까지 모조리 독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갑자기 페브리아에 귀속된 타국민들의 저항?
놀랍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실상 콜드리센의 내부는 전쟁 대금을 충당하기 위한 과도한 세금으로 반란이 꿈틀거리기 직전이었다.
셀로느 역시 여러 국가의 압력으로 맺은 평화 무역협정으로 인해 군사 보유권을 박탈당해 해적들의 잦은 침략으로 분노가 쌓여가고 있었다.
이에 마드리안은 자국에 편입한 나라마다 물가에 맞춘 세금법을 적용했다.
그뿐 아니라 예술과 기술을 비롯한 각 분야의 경제적 전환이 가능하도록 각국 국민의 생계 활동에 세밀하게 힘썼다.
또 교황청 군부대를 배치하여 해적과 적국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해 주면서 그들이 원하는 안정된 삶의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그렇게 두 나라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빠르게 페브리아에 흡수되었다.
대제국 페브리아!
아낙시오니아의 은총을!
커다란 함성과 눈부신 명성이 끝없이 이어질 때쯤, 교황 마드리안의 지휘 아래 종교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 대륙에 퍼져나간 종교 전쟁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찬란하게.
“내가 온 마음을 바쳐 사랑하는, 나의 사명.”
그러니 마주한 그녀의 말을, 제인은 그저 부정할 수만은 없었다.
중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의 사명은 봄이 시작되는 곳으로부터 불어 들어 오는 서풍조차 의심하는 것. 페브리아의 교황으로서 그렇게 사랑하는 것들을 수호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의심하며 사랑한다.
이것이 페브리아를 향한 마드리안의 사명인 건가.
자리에서 일어난 마드리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대답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아낙시오니아의 은총을.”
그녀는 고개 숙인 제인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문을 나섰다.
제인은 그 틈에 바깥의 문지기들을 엿보았다. 저 하나 감시하는데 장정이 몇이나 늘어서 있었다.
엄청난 인력 낭비네.
한숨을 쉬면서 식어버린 차를 마시는데 다시 문이 열렸다.
밀리타였다.
그녀는 빈 찻잔을 치우고 식사를 올려주었다.
마드리안이 돌아가자마자 긴장이 확 풀리면서 진이 빠져버린 제인은 밥을 먹네, 마네 하며 씨름할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요리가 담긴 그릇을 밀어내자 밀리타는 웃으며 그릇을 재차 제인 앞에 두었다.
밀리타는 그릇 안에 든 리소토를 한 숟가락 퍼서 제 손등에 살짝 떨어트리고 먹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독 없어요.”
“아, 독이 없어?”
제인이 야트막하게 웃었다.
지금 그녀에게 당장 필요한 건 오히려 독이었다.
“아쉽네. 있었으면 먹었을 텐데.”
다시 그릇을 물리자 밀리타가 제인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주었다.
“드세요. 저랑 밤을 보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도대체.”
제인이 몹시 피곤한 표정으로 그릇과 숟가락을 들었다. 손이 묶여있어 불편하긴 했으나 식사를 아주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도대체 그런 요망한 협박은 어디서 배운 거야? 아니, 교황청에서 공갈론이나 협박론을 필수로 가르치기라도 했나 보지? 그런데 이거…… 뭐야? 엄청 맛있잖아.”
납치된 처지에 맞지 않을 정도로 요리는 지나치게 맛있었다.
키득키득 웃으며 제인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밀리타는 빈 그릇을 확인하고 나서야 밖으로 나갔다.
“잠들기 어려우면 불러요.”
그런 상냥한 말을 남기고서.
제인은 말도 못 하게 피곤했다. 거기다 배도 부르고 방도 따뜻했다. 눈이 절로 감기려 했으나 불행하게도 잠을 잘 수는 없었다.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 독이 없으면 제정신으로 다시 잠드는 건 불가능했다.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서 다이애나가 목을 졸랐기에.
“젠장…….”
조그맣게 욕을 씹던 제인은 문보다 더 크게 나 있는 창문에 시선을 두었다.
천근같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서 아득한 밤으로 채워진 창문을 열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인간이라면 즉사하고도 남을 높이에 갇힌 걸 체감하고 있을 때였다.
푸드덕!
멀리서 날아든 부엉이 한 마리가 창가에 앉았다.
다리에는 작은 쪽지가 묶여있었다.
무심한 얼굴로 쪽지를 펼쳐서 읽던 제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 부엉이가 그러더군. 어떤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가 성탑에 갇혀서 옴짝달싹도 못 하고 있다고.]
루.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지였다.
제인은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로 부엉이를 날려 보냈을 그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창가 벽에 기대어 앉았다.
잠시 후 부엉이가 다시 쪽지를 가지고 왔다.
[도와줄 수도 있고.]
주변에 글씨를 쓸 수 있는 펜 같은 도구가 있을 리 없었다.
긍정의 답변으로 종이 가운데를 동그랗게 찢어서 구멍을 냈다. 그리고 부엉이 다리에 똑같이 묶어 주었다.
부엉이는 금세 돌아왔다.
허무맹랑한 문구가 적힌 쪽지를 가지고서.
[도와달라고 애원해봐.]
제인은 쪽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부엉이는 망부석처럼 가만히 앉아있는 그녀를 관찰하다가 밖으로 날아갔다.
제법 쌀쌀한 가을바람이 들어왔다.
가볍게 눈을 감자, 역시나 악몽이 덧칠되었다.
제인은 무거운 눈꺼풀을 올리고 쪽지에 시선을 두었다. 잠시 눈을 감았을 뿐인데 쪽지를 쥔 손끝이 다시금 떨리고 있었다.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일단은 여기서 나가는 게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했으나 지금껏 살면서 무엇에도 빌어본 적 없는 그녀였다.
조금도 절실하지 않은 얼굴로 고민했다.
무릎을 꿇으면 되려나.
소리치거나 살려달라고 엉엉 울면 만족하려나.
어떻게 빌어볼지 고심하는 사이 창밖으로 날아갔던 부엉이가 품에 안겼다.
이번에는 부리로 쪽지를 물고 있었다.
일부러 펼치지 않아도 쪽지의 내용이 한눈에 들어왔다.
[발버둥 쳐, 구해주고 싶게.]
“……아.”
제인은 단조로운 감탄사와 함께 등을 둥글게 말고서 고개를 숙였다. 부드러운 은발이 스륵 떨어지며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등허리가 미약하게 들썩거리고 있었다.
이내 못 참겠다는 듯이 깔깔거렸다.
부엉이는 놀라서 푸드덕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발버둥 쳐. 구해주고 싶게.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받은 그녀는 데구루루 구르며 웃어댔다.
좋아.
구해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발버둥 쳐 줄게.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소란스러운 웃음소리가 자연스레 밖으로 새어 나갔다.
그 소리를 이상하게 여긴 문지기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긴장이 역력한 태도로 안을 샅샅이 뒤졌으나 아무도 없었다.
그저 동그란 눈을 한 부엉이 한 마리만이 눈을 깜빡거리고 있을 뿐.
저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바닥을 구르는 제인을 보고 문지기들은 그거 좀 갇혔다고 실성했나보다,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웃음기를 닦아낸 제인이 느릿하게 얼굴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능청스레 물었다.
“나 도망칠 건데, 구경할 사람?”
* * *
집무실로 돌아온 마드리안은 검토해야 할 서류들을 보고 있었다.
그녀 곁에서 함께 업무를 보던 추기경 말렌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 소리를 냈다가 결심했다는 듯이 들고 있던 서류를 엎었다.
그는 요란하게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제인을 가두어 놓은 곳이 제9 탑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패전국의 보물들이 들어있는 방이라고요.”
마드리안은 업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느긋하게 물었다.
“그리고 또요.”
“예?”
“또 무어라 수군거리던가요.”
입가에 살짝 번진 그녀의 미소를 발견한 말렌의 낯빛이 회색빛으로 질려갔다.
자신의 머릿속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문들로 머리가 터져나갈 지경이건만 교황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느닷없이 데려온 계집애를 국보급 보물이 있는 방에 들이고 일급 요리사까지 붙여서 애지중지하고 계신다고요. 그 미친 것들이 교황님의 숨겨 둔 딸이 아니냐는 소리까지 합니다!”
말렌의 목소리에는 가시 같은 적대감이 한껏 박혀 있었다.
자그마치 천만 프랑크였다.
그런 어마어마한 돈을 달라고 한 미천한 계집애나, 그걸 또 만들어 준 교황이나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말렌의 사고로는 좀처럼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딸…….”
마드리안은 불현듯 안경을 벗었다.
그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부모는 자식에게 그런 걸 해줍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