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17)화 (17/168)

17.

제인은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낯선 것들뿐이었다.

전창의 무늬도, 곁에 있는 여자도.

“정신이 드세요?”

“……누구?”

제인의 날 선 물음과는 다르게 여자는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밀리타. 제 이름이에요.”

“여긴 어디야?”

제인은 주변을 훑어보다가 여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붉은 다갈색 머리의 여자는 수수하면서도 고와서 누구에게나 호감을 살 법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딘가 묘하게 서늘한, 무척 묘한 인상이기도 했다.

밀리타가 말했다.

“수면 중에 과호흡이 와서 깨웠어요.”

“어딘지는 말해 줄 생각이 없나 보네. 그럼 손이라도 풀어 줄 생각은?”

두 손이 묶인 채로 엉거주춤 침대에서 일어나 앉는 제인에게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없어요.”

“응. 나도 그냥 한번 말해 봤어.”

“…….”

제인은 살짝 얼굴을 구기며 가볍게 숨을 후, 하고 몰아 쉰 뒤 묶인 손으로 목덜미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았다.

그사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밀리타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보통 이런 경우에 한 번 더 부탁하지 않나요?”

“됐어. 안 풀어 줄 거잖아.”

“…….”

그리고 제인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너 질척대는 거 좋아하는구나. 해 줘?”

밀리타는 무엇이 그리 재미 난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인은 다시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 보니 온통 고가의 물품들로 채워진 호화스러운 방이었다. 그렇다고 사치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품마다 고풍스럽고 고고한 품위가 느껴졌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이곳이 어딘지 말씀드릴 수는 없어도 당신을 이곳에 가둔 사람이 누군지 곧 알게 될 테니까요.”

제인은 하나도 기쁘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와. 그것참 기쁜데.”

“……상상했던 것보다 더 유쾌하시네요.”

유쾌.

지금껏 살아오면서 제인에게는 해당한 적 없는 단어였다.

“비꼬는 거라면 훌륭했어. 백 점 줄게.”

“소문보다 재미있으시고요.”

제인은 자신에 대한 소문이 어떤지 대충 알고 있었다.

“네가 나에 대해서 어떤 소문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맞아, 그거.”

제인이 밀리타를 보며 말갛게 웃었다.

“내 소문은 대체로 맞는 편이거든.”

밀리타는 잠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가 한 번 더 웃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미세하게 떨고 있는 제인의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면 장애가 심하던데요. 평소에 복용하는 약이 따로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부작용이 없도록 해독제 지어 드릴게요.”

“신경 쓰지 마.”

“쓰여요.”

“재미있네.”

제인이 웃었다.

“납치나 가담하는 주제에.”

“수면 장애가 이 정도로 심한 줄 알았다면 알토가 아닌 다른 걸 고려했을 거예요.”

제인은 조금 놀랐다.

알토는 요리에도 쓰일 만큼 평범한 약초지만 뿌리는 독성이 있어서 대체로 버려졌다.

그러나 거기에 허브 계열의 식물을 세밀하게 배합하면 마취제로도 활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알토 뿌리를 마취제로 사용할 줄 안다면 머리가 좋은 사람일 것이다.

배합 자체가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은밀한 일에 평범한 재료를 사용할수록 출처가 묘연해진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거니까.

“예쁜 얼굴로 꽤 나쁜 짓을 하는구나?”

“그런 편이죠.”

제인이 깔깔거렸다.

“너 정말 재미있다. 짜증도 나고.”

이전보다 더 유심히 밀리타를 보던 제인이 순식간에 그녀를 밀치고 올라탔다. 그리고 목덜미와 쇄골 사이로 삐져나온 명찰 끈을 잡아당겼다.

교황청 직속 명찰이었다.

직위는 약제사.

그와 동시에 닫혀있던 방문이 열렸다.

마드리안이 거리낌 없이 들어오다가 동그래진 눈으로 웃으며 흰 침대 위에 뒤엉킨 두 여자를 향해 물었다.

“내가 방해했나?”

* * *

밀리타는 따듯한 차 두 잔을 내려놓고 나갔다.

먼저 정적을 깨트린 건 마드리안이었다.

“도망이라.”

그녀가 슬며시 웃었다.

“앙큼하다고 해야 할지,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눈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하던 제인이 고개를 들고 말문을 열었다.

“교황님만 괜찮으시다면…… 앙큼한 거로 하는 게 어떨까요.”

“…….”

“딱히 순진한 편도 아니고, 그게 취향도 아니라서요.”

마드리안의 시선은 제인의 은사 같은 머리카락 끝에 닿아 있었다.

속절없이 떨리는 그 끝에.

“말에 농이 섞인 걸 보니 그대가 나를 두려워하여 떠는 건 아닐 테고.”

제인은 조용히 묶인 두 손을 꽉 쥐었다.

손가락이 부러질 듯이 잡아도 떨림은 잦아들지 않았다.

“독의 후유증인가?”

비슷한 맥락이었으나 정확하게는 중독 현상이었다.

제인은 악몽에서 깰 때마다 습관처럼 독을 찾았다.

고통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어야 떨림과 불안, 자꾸만 덧칠되는 악몽의 공포로부터 달아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오늘 악몽은 유독 더 생생했다.

제인은 점점 더 숨이 막혀왔다.

이마와 목덜미, 등허리에 송골송골 맺혀있던 땀이 주르륵 흘러내릴 때였다.

“……?”

바닥을 향해 있던 잿빛 눈동자가 테이블 위로 시선을 옮겼다.

마주 앉아있던 마드리안이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온유하게 웃으며 묶인 그녀의 손을 잡고 찻잔을 쥐여주었다.

“마시려무나. 다 식어버리기 전에.”

제인은 저도 모르게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쥐었다. 떨림이 잦아드는 기분이 들었다. 이내 숨을 깊게 내쉬고 차를 마시자 전보다 편안해졌다.

그녀는 찻잔을 쥔 채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병 주고, 약 주고.”

“오해 말거라.”

자리에 앉은 마드리안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직 어느 것도 준 적이 없으니.”

……그게 더 최악인데요.

제인은 재차 숨을 깊게 내쉬었다.

“저를 곁에 두시려는 이유가 뭐죠?”

“그건 너무 쉬운 질문이구나.”

마드리안이 이어서 단조롭게 대답했다.

“인재 등용.”

제인은 작고 도톰한 입술로 조소를 그렸다.

“이제 와 굳이 등용하실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지금까지 교황청에서 요구했던 연구서는 빠짐없이 전부 다 드렸으니까요.”

궁정 소속인 제인은 교황청의 요구에 따라서 모든 연구 서류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걸 문제 삼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문제 삼을 수가 없었다.

궁정의 권위는 몇 해 전이나 지금이나 허울뿐이었기에.

그때 마드리안이 웃으며 되물었다.

“빠짐없이, 전부 다?”

제인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교황의 권위가 강하다고 한들, 제인은 엄연히 궁정 소속이었다.

마드리안이 그녀에게 하는 짓은 갈취였다.

그러니 마드리안의 물음은 ‘정말 하나도 빼놓지 않고 털린 게 맞느냐.’였다.

안타까운 건 그 와중에 제인의 대답이 ‘아니오’라는 것이었고.

“……기밀 연구서는 제외하고 말이죠.”

제인은 불현듯 억울한 듯 울컥거렸다.

“그런데 그것까지 보란 듯이 훔쳐서 복사본까지 만드셨지 않아요? 전 사실 그것도 이해가 안 돼요. 차라리 무력으로 빼앗아 가지 그러셨어요.”

마드리안이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듯한 어조로 부드럽게 말했다.

“원하는 건 되도록 쉽고, 빠르고, 조용하게 가질수록 좋으니까. 소란하게 탐내면 그만큼 처리해야 할 게 많아진단다.”

“……그래서 이렇게 납치까지 하셨군요.”

“그 표현도 썩 나쁘진 않다만은, 이왕이면.”

마드리안이 손톱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귀한 곳으로의 초청이라고 하자구나.”

초청…….

전후 사정을 모르는 이가 제인을 가둬놓은 방만 본다면 그럴 수도 있을 법했다.

특히 빼곡하게 진열해놓은 고가품들은 단순히 페브리아 안에서 구할 수 있는 물품들이 아니었다. 대다수가 페브리아와 전쟁했던 패전국들의 국보급 보물들이었다.

각 나라의 고상하고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한 방에서 마드리안과 마주 보고 있자니 이상한 착각이 들었다.

교황의 측근이 되면 이 모든 것들이 일상이 될 것만 같은, 그런 구역질 나는 착각.

마드리안은 그로부터 한 시간이 넘도록 제인을 회유했다. 그녀답게 협박을 적절히 섞어서 심리적으로 몰아붙였다.

정말이지 마지막 순간까지.

“오늘은 초청이었다만.”

마드리안이 조용히 물었다.

“다음은 무엇이 될까?”

“…….”

“또 도망갈 생각은 말거라. 그대 하나 찾는 것, 죽이는 것, 살려 두는 것……. 내게는 농담 같은 일이니.”

마드리안은 마지막까지 제인의 숨통을 쥐고 흔들었다.

“꼭 그대의 목숨이 아니더라도.”

마드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제인이 그녀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교황님께 페브리아는 무엇이죠?”

제인은 망명을 준비하는 동안 줄곧 생각했다.

페브리아의 권위를 독점한 교황이 무엇을 위해 한낱 약제사이자 연구원인 그녀의 연구서를 갈취하고, 훔친 것도 모자라서 종국에는 사기극까지 벌였나.

처음 사기극을 종용받았을 때도.

사기극을 벌였을 때도.

그리고 지금, 한 시간이 넘도록 회유를 받는 동안에도 제인의 직감은 오직 하나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랑.

페브리아를 향한 사랑이었다.

그 터무니없는 직감을 그녀는 도무지 믿고 싶지 않았다.

마드리안이 사붓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내게 페브리아는 사명이지. 내가 온 마음을 바쳐 사랑하는, 나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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