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누가 보면 소풍이라도 가는 줄 알겠…….”
제인은 하임을 가볍게 타박하려다가 그의 팔에 두른 완장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복귀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발령이에요?”
“변경 근처에서 끝난 전쟁을 아직도 수습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가 봐. 그래서 급하게 발령받았어.”
하임이 궁정 중앙을 가리켰다.
“좀 있으면 발령식 시작할 거야.”
마드리안이 얼마 전에 치르고 온 전쟁이었다. 교황청에서 치른 전쟁의 수습은 늘 궁정의 몫이었다.
그래도 궁정에 약제사가 하임만 있는 건 아닌데.
제인은 또 먼 길을 떠나는 그가 다소 걱정스러워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하임이 품에서 꺼내는 종이 꾸러미를 본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들기 한 시간 전에 뜨거운 물에 한 숟가락씩 풀어서 마셔.”
그녀는 하임이 쥐여주는 종이 꾸러미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이런 것으로는 악몽도, 수면 장애도 어쩌지 못하리란 것을 제인은 알고 있었다.
하임이 말했다.
“몽유병, 더 심해졌다며? 주변에서 말이 많아. 얼마 전에도 궁정 숲 앞까지 잠옷 차림으로 다니는 걸 본 사람이 있다고 하던데.”
“……하임. 저에 관한 얘기는 언제나 끊임없었어요. 제가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뒷말은 계속 나올걸요.”
제인이 고개를 들고 말을 덧붙였다.
“그것들 목청을 따지 않는 이상.”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하임은 그녀의 거친 언변에 살짝 아연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 커버린 제인을 바라보았다.
아홉 살배기 어린아이.
유난히 눈매가 날카롭던 그 아이는 절벽에서 일어났던 사고 이후에 말을 잃었고, 하임은 사랑하는 여자를 잃었다.
사랑하는 여자…….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끝끝내 마음을 고백하지 못했던 하임은 동굴 속처럼 어둡고 길게 드리워진 날들을 허망하게 보냈다.
지나가듯이 했던 그녀의 말이 문득 떠오르기 전까지는.
절뚝거리는 다리를 끌고 보육원을 찾은 하임은 단박에 제인을 알아보았다. 항상 아무에게도 곁을 허락해 주지 않고 저 홀로 담벼락에 기대어 앉아있던 아이였기에 찾기 쉬웠다.
누가 옆에 앉기라도 하면 보란 듯이 일어나서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던 아이.
고양이처럼 굴었던 아이가 유일하게 곁을 허락한 사람이 다이애나였다.
-다이애나는 네가 약제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어.
아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사고 이후 극심한 충격으로 언어 장애를 앓고 있던 탓에, 태양을 가로막고 선 하임을 멍하니 올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다이애나가 네 얘기를 자주 했었거든. 한 번 알려준 약초는 네가 잊어버리지 않고 다 기억하고 있어서 기특하다고 했지.
-…….
-네가 궁정 약제사가 된다면 다이애나가 기뻐할 것 같은데.
-…….
-궁정으로 가고 싶으면, 나를 따라오렴.
하임의 절뚝거리는 다리가 멀어져가던 그때였다.
담담히 담벼락에 기대어 있던 고양이 같은 아이가 그의 그림자 끄트머리에 따라붙었다.
제아무리 가문에서 외면받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귀족이었다. 가문의 허락 없이는 멋대로 입양 절차를 밟을 수가 없었다.
약제사 시동.
제인은 하임을 통해 궁정에서 받은 첫 역할을 어려움 없이 똑 부러지게 완수해냈다. 그가 시키는 심부름은 그다지 말이 필요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고작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는 것밖에 하지 못하던 아이는 해가 바뀔수록 목소리를 되찾아갔다.
하임은 시간이 날 때마다 제인에게 약학을 가르쳤다. 다이애나의 말대로 아이는 약초와 관련해서 한 번 가르쳐준 건 여간해서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휴일에는 아이를 들과 산에 데리고 가서 온갖 약초와 독초를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그리고 틈틈이 가난한 마을을 찾아가서 작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만 골라 제인에게 진료를 보게 했다.
언젠가는 제인이 가르쳐주지 않은 치료법을 스스로 터득해서 그를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그때는 하임이 출장을 다니기 시작한 시기였다.
제인이 그에게 약학을 배우는 날이 줄어들자 저녁마다 궁정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하면서 익힌 치료법이었다.
최연소 궁정 약제사.
그리고 페브리아 최초의 명예 연구원.
어쩌면 당연한 수식어였다.
스물하나.
제인은 그 어린 나이에도 인생의 반을 약학에 갖다 바쳐 왔다.
그래서였을까.
약학을 제외하면 무지한 일이 더 많았다.
제인은 바느질은 물론이고, 요리도 할 줄 몰랐다. 하임이 지극히 간단한 감자수프 만드는 방법 하나를 알려주려다가 부엌을 통째로 날려 먹을 뻔한 적도 있었다.
약초는 그렇게 잘 달이면서.
도대체 왜.
좀처럼 풀리지 않는 난제는 제법 아가씨 태가 나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컸나.
하임은 제인이 훌쩍 자란 모습을 체감할 때면 다이애나가 더욱 애틋해지곤 했다. 새싹이 푸른 잎으로 자라고, 꽃들이 만발하는 봄과 닮은 사람.
다이애나.
당신이 지금의 제인을 봤다면 조금은 기뻐하려나.
그때 제인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임, 웃는 게 낫겠어요.”
상념에 잠겼던 그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은 웃고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 같거든요.”
“…….”
“별로예요.”
하임이 제법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거 아니? 보통은 이유 없이 계속 웃고 있는 사람을 미친놈이라고 한다는 거.”
그의 말에 제인이 눈썹을 팍 뭉그러뜨렸다.
하임의 입가엔 항상 부드러운 미소가 베여있었다.
그걸 말했던 건데. 누가 미친놈처럼 웃으랬나?
하지만 이미 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파동처럼 번지고 있었기에 제인은 장난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거대로 별로네요.”
그때 멀리서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하임이 속한 부대에서 발령식을 알리는 소리였다.
그가 돌아왔을 때 제인은 이미 페브리아에 없을 터였다.
제인이 잘 다녀오라는 말 대신 어떤 인사를 건네야 할지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하임이 먼저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날개가 생긴 작은 나비에게 부디.”
다소 장난기가 묻어 나는 목소리로.
“아낙시오니아의 은총을.”
제인이 곧바로 토하는 시늉을 하곤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어 그의 등을 떠밀었다.
유쾌하게 웃던 하임이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 걸려있던 미소는 말끔하게 지워져 있었다.
* * *
제인은 망명 계획을 세운 날부터 주변을 차곡차곡 정리해왔다.
착실하게 모아두었던 연구서와 실험 재료들을 눈에 띄지 않게 여러 번 나눠서 소각 처리했다. 재산 일부를 금화로 바꿔서 짐가방에 챙겼고, 혹시 몰라서 금화 몇 닢을 옷 속에 숨겨 놓았다.
우선은 수중에 있는 금화만으로도 얼마간은 부족함 없이 넉넉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돈이 부족해지더라도 걱정은 없었다. 어디서든 약제사로 일하면 될 일이었으니.
마지막으로 현금보관증서는 그대로 두고 가는 게 좋을 듯싶었다.
연구원으로 일하게 되면서 그녀 명의로 받은 자택이었기에 증서가 필요할 때 언제든 다시 찾으러 오면 될 터였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떠나기 전날 밤.
제인은 발코니에 서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지? 뭘 안 챙겼길래 이렇게 찝찝하지?
그녀는 무언가 잊은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으나 아무리 떠올려봐도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고민만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생각해두었던 계획을 실행하려면 새벽에 일어나야 했으므로 일찍 자야 했다. 그런데도 이유 모를 찝찝함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잠이 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며칠간 악몽도 꾸지 않고 푹 자서인지 이제는 밤만 되면 금세 졸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부러 차가운 바깥 공기를 쐬는 중이었다.
악몽이 없는 나날들.
지금껏 그녀에게는 있을 수 없는 꿈같은 일이었다.
-악몽을 꾸지 않은 밤을 줄게.
귓가에 맴도는 달콤한 목소리에 제인의 어깨가 흠칫 떨려왔다.
……설마. 이상하고도 꿈같은 나날을 그 악마가 주었던 건가?
아름다운 그의 얼굴이 의문에 대한 정답처럼 두둥실 그려지자 제인은 솜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부정하듯이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휘휘 젓다가 돌아서려는 찰나.
“……!”
뒤에서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림자는 삽시간에 제인의 코와 입을 손수건으로 틀어막고 몸을 결박했다.
제인은 머리가 아찔했다.
숨구멍을 짓누르는 손수건에서 익숙한 향이 맡아졌다.
알토 향……!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눈앞이 어두워져만 갔다.
멀리서 울음소리를 내던 부엉이만이 두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 * *
악몽은 항상 절벽 끝에서부터 시작된다.
공포에 사로잡힌 아홉 살배기 제인은 그곳에서 꿈틀거리는 검은 안개에 집어삼켜지는 다이애나를 바라본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다이애나가 사시나무처럼 떨면서도 도와달라는 말 대신 도망가라고, 뒤돌아보지 말고 어서 뛰어가라고 소리를 지른다.
어린 제인은 그녀와 그녀를 삼키는 검은 안개를 보며 슬그머니 뒷걸음질 치다가 뒤돌아서 달려간다.
아니다.
달려가는 게 아니다.
달아나는 거다.
저를 살려준 그녀를 버려두고.
이윽고 등 뒤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울려 퍼진다. 바닷속에 풍덩 빠지는 소리와 함께 심장도 내려앉고 만다.
끝나지 않은 악몽 속, 다리에 힘이 풀린 제인이 엉금엉금 기어서 절벽으로 향한다.
절벽 아래에는 언제나처럼 어둠에 칭칭 감긴 다이애나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녀가 천천히 손을 뻗어서 제인의 목을 조른다.
-네가 죽었어야 하는 건데.
-네가 죽었어야 하는 건데.
-네가 죽었어야 하는 건데……!
그곳의 제인은 이제 더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다 큰 어른이 된 모습으로 절벽에 묶여서 셀 수 없이 들었던 원망을 받아낸다.
그렇게 한 사람의 죽음이 악몽으로 새겨져 몇 번이고 되풀이되고 있었다.
“……기요.”
목이 더 조여오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까지.
“저기요!”
“하아……!”
숨을 몰아쉬며 깨어난 제인이 자기 목을 더듬으며 습관처럼 독을 찾으려 했다.
그런데 몸이 평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등골이 오싹거렸다.
두 손이 밧줄에 묶여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소름이 목덜미까지 타고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