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미행꾼 발견. 당분간 새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말 것.]
제인이 낮에 루의 다리에 묶어 주었던 쪽지였다.
“제인, 너는 참 여러 가지 의미로 감동스러워.”
그가 이어서 말했다.
“귀엽기도 하고.”
추위를 많이 타는 제인은 불쾌한 표정으로 발코니 문을 닫았다. 그 바람에 방안으로 스며들어오던 냉기가 잘려 나갔다.
“귀여움받는 데에는 취미가 없는데.”
“받아 본 적은?”
말문이 막혔다.
어릴 적부터 귀여운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그녀는, 자라면서 예쁨이나 사랑받는 법 또한 익히지 못했다.
“뭐 하러 왔어.”
그녀의 물음에 루가 재차 종이를 흔들며 느긋하게 말했다.
“귀여운 강아지를 부를 방법이 없어서.”
물어본 내가 등신이지.
“……나가.”
제인이 발코니 문을 다시 열자 뭉쳐져 있던 찬 바람이 훅 들어왔다.
루는 제인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한 손으로 자연스럽게 문을 닫았다.
“모르는구나. 순종적이어야 하는 건 네 역할이라는 걸.”
한 뼘.
제인은 고작 그 정도 거리에 있는 존재가 제 숨통을 쥐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편하게 숨을 쉬기가 어려운 탓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고 고개가 돌아갔다.
이어서 목마름이 느껴졌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키고 그를 지나쳐갔다.
탁자 위에 놓인 차를 따라 마셨는데도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연거푸 한잔 더 마시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등 뒤에서 무언가 흥미로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쁜 짓을 하더니 재미있는 대가를 받았나 보군.”
루는 책장 사이에 숨겨 놓은 현금보관증서를 귀신같이 찾아서 손에 들고 있었다.
제인은 이마를 짚었다.
미치겠네.
검은 새 한 마리가 자신의 머리와 방 안을 모두 헤집는 듯했다.
“그건 또 어떻게 찾아낸 거야?”
“데시안은 은닉된 걸 좋아하거든. 의도를 가지고 숨겨 놓은 것만큼 재미있는 게 없으니까. 하지만 제인.”
그 새가 이번에는 현금보관증서를 손에 쥐고 여유롭게 말했다.
“그건 너희 인간들도 마찬가지일 테니 빼앗기거나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면 여기에 두지 않는 게 좋아.”
“하…….”
제인은 적어도 오늘만큼은 더 이상 그 어떤 것에도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쫓아내지 못한다면 제 발로 나가게 할 수밖에.
“루.”
그녀가 쌕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즐거워 보이네? 왜? 어리석고 하찮은 인간에게 그럴싸한 조언이라도 한 것 같아?”
제인은 루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전혀.”
그리고 미간을 좁히며 이죽거렸다.
“그따위 어쭙잖은 말이 어떻게 조언이 되지? 그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말이잖아. 아니면 애석하게도 네 수준이 그 정도인가?”
제인이 생글거리며 생각했다.
불쾌하지? 문은 저쪽이고 너는 나가면 돼.
“……제인.”
그러나 상황은 그녀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루의 푸른 눈동자에는 즐거움이 한껏 깃들어 있었다. 뒷짐을 진 그가 나른한 미소를 흘리며 제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사랑스러운 인간.
이러니 어찌 품에 가두고 싶지 않겠는가.
그녀가 제 발로 걸어 들어 왔기에 벽으로 몰아세우는 건 쉬웠다. 은근히 압박하듯이 다가가기만 했는데도 벽에 부딪힌 제인은 꼼짝없이 그의 시선 아래에 갇혔다.
언제 보아도 즐거움을 안겨주는 잿빛 눈동자가 저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으니 웃음이 나와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물어 가는 목덜미에 다시 생채기를 내어서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일 정도로.
루는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고 그녀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제인.”
그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 이름이 달았다. 흙냄새 나는 그녀의 체취가 달았고, 제게로 걸어오는 걸음 소리가 달았다.
“나는 내게로 걸어오는 네 모습을 보는 게 무척 좋아.”
제인은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
이 악마는 이런 존재였다.
저항을 기꺼워하고, 종국에는 원하는 대로 휘두르고 마는.
동시에 비아냥거릴수록 더 즐거워하는 악마.
들릴 듯 말 듯, 조그맣게 욕을 내뱉은 제인이 큰 저항 없이 조용히 빠져나갈 틈을 찾았다.
낌새를 눈치챈 루가 그녀와 몸이 겹쳐질 정도로 느릿하게 몸을 밀착시켜 왔다.
“오늘 귀여운 짓을 두 번이나 했으니.”
그의 숨이 닿은 제인의 귓가에 스산한 소름이 끼쳤다.
“그만큼 예뻐해 주지.”
예쁨받는 것.
그것만큼 제인에게 낯선 일이 또 있을까.
그녀 안에서 저항하고 싶은 욕구와 무력감이 충돌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여전히 나긋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한 번은 조언으로. 또 한 번은 악몽을 꾸지 않는 밤으로.”
약간 몸을 떨어트린 그는 제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왼손으로 벽을 짚었다.
그러자 네모난 사각형의 선이 그어지면서 푸른빛이 발했다. 팔을 내리자 빛 사이로 동그란 고리 모양이 나타났다.
“어……?”
생전 처음 보는 현상이었다.
마법이 금지된 나라에서 살아온 제인은 당혹감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때 루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대뜸 질문했다.
“좋아하는 과일은.”
“…….”
“대답.”
제인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무화과?”
“더 자세히. 길게.”
눈을 도로록 굴리던 그녀가 갸웃거렸다.
“구 월 하순의 무화과…….”
그녀의 대답을 들은 동시에 루가 문고리를 당기자 텅 비어 있는 공간이 드러났다.
“방금 그게 암호이니 잊지 말도록.”
루는 이어서 자신이 오른손에 들고 있던 현금보관증서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책장 쪽으로 고개를 까딱거리며.
“훨씬 은닉하기 좋을 거야.”
제인은 조금 전까지 악랄하게 그를 비꼬았던 자신이 순순히 그의 조언을 듣는다면 무척 우스워지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조언?
그는 조언이 아니라 보다 훌륭한 방법을 제시했다.
“뭐 하고 있지? 넣지 않고.”
“네가 날 얼마나 우습게 볼까 가늠하는 중.”
“조금.”
루가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고 많이.”
“…….”
“데시안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제인이 루에게 지금까지 가장 지겹도록 많이 들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말뿐만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그는 앞에서 거짓을 고하기 보다는 진실을 가지고 속을 긁어대는 편이었다.
제인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우스워지는 건 한순간이고 증서는 더없이 안전하게 보관되리라.
어차피 무화과 어쩌고라고 대답한 순간 이미 체면은 저 멀리 날아간 셈이었다.
제인은 증서를 조심스럽게 금고에 넣었다. 문을 닫자 푸른빛이 점차 사그라들더니 본래의 벽으로 돌아왔다.
루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어.”
“와. 칭찬까지 들으니 아주 좋은데.”
그녀가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수치스럽고.”
그러자 루가 큼지막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더니 저와 눈을 마주치게 했다.
민망함에 붉어진 제인의 얼굴은 온기라고는 없는 루의 손안에서 흠칫거렸다.
루가 말했다.
“마음에 들어. 이 표정.”
제인이 속으로 욕을 곱씹었다.
취향은 한결같이 지독하지.
그때, 루가 얕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목덜미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루는 그녀의 얼굴을 감쌌던 손을 내리고 흰 목덜미를 가볍게 쥐었다. 목덜미에 루의 냉랭한 숨결이 닿자 제인은 이전처럼 다시 편하게 숨쉬기가 어려웠다.
곧 그의 입술이 제인의 어깨에 그어진 자상에 맞물렸다.
가볍고 긴 입맞춤이었다.
제인은 더 숨이 막혔다. 호흡이 느려졌고 머리가 핑 도는 듯했다. 게다가 피로감까지 극에 달해 있었다.
“……쉬고 싶어.”
오늘만큼은 악몽에 괴로워하며 잠에서 깨더라도, 혹은 잠이 덜 깬 상태로 걸어 다니더라도 당장 이불 속으로 파고들고 싶었다.
“아. 예뻐해 줄 게 남았지.”
제인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루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악몽을 꾸지 않는 밤을 줄게.”
내게 그런 밤이 존재할 리가…….
그녀는 헛웃음을 지었으나 곧 저항하기 어려운 졸음이 쏟아졌다.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루는 풀썩 쓰러지는 제인의 몸을 안아 들고 침대 위에 눕혔다. 그대로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폭신한 이불을 덮어주었다.
주변이 고요했다.
공허.
그에게는 무엇보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루의 푸른 시선이 잠든 제인에게 눈처럼 내려앉았다.
차가운 손끝이 그녀의 머릿결을 쓸어내리다가 이마에 엉킨 잔머리를 정돈했다. 오똑한 코와 도톰한 입술을 지나서 조금 전까지 발그레했던 뺨에 닿았다.
함께 있던 인간 하나가 잠들었을 뿐인데 세상 어디에서도 인기척을 느낄 수 없는 듯했다.
루는 속절없는 공허함에 가볍게 얼굴을 쓸다가 마른 웃음을 지었다.
* * *
며칠 후.
제인은 개인 연구실 창가에 앉아서 야심 차게 세운 망명 계획을 되짚었다.
계획은 간단했다.
하나, 아무도 쓰지 않는 지하 연구실에 볼일이 있는 척 슬쩍 내려간다.
둘, 몰래 숨어 있다가 마드리안의 끄나풀이 따라붙으면 최면에 쓰이는 약물을 뒤집어씌운다.
셋, 해롱거리는 끄나풀을 묶어두고 여유롭게 달아난다!
얼마나 완벽한 시나리오란 말인가.
성공을 확신한 제인은 잔뜩 일그러질 마드리안의 얼굴이 떠올라서 혼자서 키득키득 웃기까지 했다.
똑똑똑.
창문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하임이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제인이 얼른 일어서서 창문을 열어주었다.
하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연구원님, 아직 도망가지 않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