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14)화 (14/168)

14.

제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적포도주 수출 계약의 계약금인가요?”

마드리안은 대답 대신 종을 울렸다. 바로 시종 한 명이 들어와 술병을 내려놓고 되돌아 나갔다.

둘 사이에 침묵이 기워졌다.

마드리안의 손톱 끝이 병을 두드리자 정적에 얇은 금이 갔다.

“그날 물었었지. 빌어먹을 포도주는 무어냐고.”

“…….”

“그대가 손에 들고 있는 서류가 그 연유란다. 천만 프랑크를 교황청 자금으로 운용하기엔 명분이 마땅치 않더구나. 그래서 약간의 장치를 더 해 보았지.”

“……하하.”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던 제인이 말문을 열었다.

“그렇게 서면상의 공식적인 계약금은 연합국과의 이해관계를 반영해서 수정하셨겠군요.”

마드리안은 흡족한 듯 빙긋 웃으며 크리스털 잔에 술을 따랐다. 적포도주가 거침없이 차올랐다.

제인이 이어서 말했다.

“그 과정에서 붕 떠 버린 천만 프랑크가 제게는 이익이 되면서 교황님께는 조금도 손해나지 않는 증서로 만들어진 거고요.”

검붉어진 잔이 제인 앞에 놓였다.

마드리안의 고요한 미소와 함께.

“부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제인은 손을 뻗어서 크리스털 잔을 잡은 채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러니까 마주 앉은 이 미친 여자는 저를 겁박했듯이 연합국의 숨통을 조이며 압박한 것이다.

제인은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포도주잔을 가볍게 빙글 돌렸다. 잔 안에서 검붉은 소용돌이가 일었다. 소용돌이에는 아무런 소음이 없어서 또다시 정적이 덧칠되었다.

짧은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마드리안 교황은 제인을 바라보았고 제인은 소용돌이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시선이 엇갈려 있었다.

“고맙구나.”

제인은 고개를 들고 마드리안을 응시했다.

“그대의 작고 귀여운 오기가 페브리아에 또 다른 기회의 활로를 열어주었으니.”

제인이 웃으면서 이를 으드득거렸다.

저건 조롱이다.

마드리안이 제인의 앞에 놓인 잔을 가리키며 손짓했다.

“끝 향이 좋으니 마셔보렴.”

“……이 잔에는 어떤 목적이 들어있을까요.”

“목적보다는 소망이랄까.”

마드리안은 옆에 있던 서류 봉투 하나를 제인에게 밀어 넣었다.

“그대의 분별력이 조금이나마 상실되길 바라는.”

제인이 바로 봉투를 개봉했다.

안에는 교황청 직속 연구원 계약서와 연구실 신청서가 연달아 나왔다.

“……교황청 소속이 되라는 말씀이시군요.”

마드리안이 빙그레 웃었다.

제인은 입안이 바짝 말라서 자연스레 포도주를 마셨다. 마드리안의 말대로 끝 향이 향긋했다.

“거부하면 또 배덕감을 이용해서 겁박하실 건가요?”

“두 번은 재미없지.”

무던하고도 중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회유해볼까 싶은데.”

제인은 앞으로 내민 상체를 등받이에 기대며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리고 무릎 위로는 두 손을 느슨하게 맞잡았다. 거기에 해사한 웃음까지 더하자 영락없이 오만한 모습이 되었다.

“들어볼까요, 회유.”

그러면서 되뇌었다.

터질 듯한 심장 소리가 교황에게 닿지 않길.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말해다오.”

손에 차는 땀을 들키지 않길.

“원한다면 비단 너뿐만 아니라.”

그러나 작은 바람은 물기 어린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만다.

단 한 사람의 이름만으로.

“하임 바트르센의 원까지 들어주마.”

마드리안 교황이 적의 없는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고아인 널 거둬준 그 궁정 약제사 말이다.”

* * *

“제인.”

하임의 부름에 제인이 움찔거렸다.

“아까부터 왜 자꾸 멍하게 있어.”

궁정 식물원 벤치에 하임과 나란히 앉아있던 그녀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밝은 금안과 완만하게 휘어지는 눈매가 제인을 향해 있었다.

하임 바트르센.

그를 지칭하는 수식어는 다양했다.

궁정 제1 약제사.

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귀족 가문의 자재.

그리고, 버림받은 절름발이.

하임은 어릴 때부터 다리 장애 탓에 정서적으로 힘든 유년 시절을 보냈던 터라 일찍이 궁정에서 생활하며 가문에서 독립한 사람이었다.

제인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보다 빨리 오셨네요. 복귀하실 날이 남았잖아요.”

하임은 북부지역 요새에서 기승을 부렸던 돌림병으로 6개월 동안 출장 가 있을 예정이었으나 2개월 정도 앞당겨서 궁정으로 복귀한 상황이었다.

“능력이 있으니까.”

제인은 어린아이처럼 키득키득하다가 뚝 멈췄다.

“재수 없어요.”

“우리 연구원님만 할까 싶은데 말이죠.”

제인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분발하라는 농담을 던졌다.

그 말에 쿡쿡 웃으면서도 제인의 안색을 살피던 하임이 조용히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구나.”

제인은 잠깐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그의 상의 주머니에서 자연스럽게 수첩과 펜을 꺼내며 주변을 가볍게 훑었다.

조용히 눈살을 찌푸린 그녀는 한 글자씩 또박또박 써 내려갔다.

[교황청 소속이 되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하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시잖아요. 제가 아낙시오니아도, 샤도 전부 거북해하는 거요. 앞으로 미친 광신도들이 얼마나 달달 볶아댈지 생각하니까 토할 것 같아요.]

교황청의 제안을 거절한다는 건 샤를 배반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적어도 페브리아에서는 이단으로 낙인찍히는 길이었다.

하임의 표정을 본 제인이 다시 수첩의 끝에 짧은 문장을 덧대었다.

[그래서 한동안 페브리아를 떠날 생각이에요.]

“……어디로?”

[아직 정한 건 없어요. 인사도 못 하고 떠날 수도 있고요. 혹시라도 섭섭하면 그건 알아서 푸세요.]

“…….”

[그 정도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어른이잖아요?]

말도 안 되게 그녀다운 작별이었기에 하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사이 제인은 자신이 쓴 수기를 모두 불로 태웠다.

검은 재가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멀리서 보면 검은 나비 떼처럼 보일 것 같았다.

하임은 제인을 가만히 보았다. 늘 삐뚤어진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경계하던 꼬마가 자신이 나고 자란 땅 밖으로 나가려 한다…….

“네게 날개가 생겼구나. 세상 밖으로 날아갈 수 있는 날개.”

제인은 문득 루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또다시 새가 될 거고, 너에게 날개가 되어줄 텐데.

그때였다. 하늘 위로 서로 어울리지 않는 크고 작은 새들이 날아와서 그녀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 * *

제인은 새들을 따라 걸으며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걷자.

하지만 그 생각 때문에 놀라울 정도로 걸음걸이가 더 부자연스러워졌다. 동시에 그녀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임과 대화를 나누는 중간에 그림자 하나를 발견했다.

쪽지로 말을 대신하고 그 자리에서 불에 태워버리기까지 한 건, 그림자가 교황청 끄나풀로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그 끄나풀이 지금도 계속해서 자신을 따라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제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욕이 새어 나왔다.

“……빌어먹을.”

처음, 마드리안이 하임을 언급했을 때 제인은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물론 그녀가 하임의 존재를 알고 있으리라는 것은 예상했던 바였다.

제인의 주변 인물이라고는 하임밖에 없는 데다가 둘 다 다른 의미로 눈에 띄었다.

한 명은 귀족 가문 출신의 절름발이 약제사였고, 또 다른 한 명은 궁정의 유일한 고아이자 최초의 약제 연구원이었으니.

그러나 루는 달랐다.

존재 자체가 인간이 아니었다.

게다가 해가 지고 뜰 때마다 새와 데시안의 모습으로 변하지 않는가.

정신 나간 교황이 루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어떻게 이용하려 들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제인은 다리에 잔뜩 힘을 주고 걸어서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뻐근해져 왔으나 속도를 늦출 수 없었다. 걸음도, 호흡도, 심박수도 모두 빨라져 갔다.

그렇게 낮은 산 중턱에 다다르자 덫에 걸린 검은 새가 제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검은 새를 향해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갔다.

‘쉿.’

이어서 소리 없이 입술을 뻥긋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마.’

* * *

모두가 잠든 자정.

간만에 연구실에서 쪽잠을 자지 않고 자택에 온 제인이 물기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욕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벽면 거울에 비친 거울 속, 목덜미에 난 자상에 눈길을 멈췄다. 자연스럽게 차디찬 입술과 혀의 감촉이 떠올랐다.

-너만 허락해 준다면.

허락을 구하는 말이었음에도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강압적인 명령 같이 들리다가도 한편으로는 매혹적인 유혹처럼 들리기도 했다.

불가항력의 무언가가 그녀를 옭아맸다.

만약 제인이 그때 다시 잠들지 않았다면 정말 그에게 저를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친 거지.”

제정신이라고 볼 수 없는 상념에 빠져 있을 때였다.

똑똑.

제인은 발코니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움찔거렸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없었기에 경계심을 가지고 유리창 사이로 바깥을 확인했다.

푸르스름한 빛을 띤 보름달 아래, 지금은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존재가 서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아주 살짝 문을 열고 소곤거리다시피 말했다.

“나타나지 말라고 했잖아.”

“그랬지.”

그는 말릴 틈도 없이 자연스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새의 모습으로.”

제인은 청량한 박하 향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 서서 휑한 발코니를 보았다. 얼결에 불청객을 집으로 들인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았다.

여유롭게 벽면에 기대어 선 루가 쪽지 한 장을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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