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호엘리반이 입가에 조소를 띄웠다.
“재촉하는 거지.”
“전쟁을?”
세실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 달 전쯤인가. 앙디스에 침입한 해적들이 노략질을 심하게 했었나 보더라고. 그걸 빌미로 페브리아 교황청 인력이 옴푸푸스 종식 이후에 다시 배치됐거든.”
“테러 수위가 점점 더 심해지는 걸로 보이는데.”
“신경 쓰지 마.”
호엘리반이 문에서 몸을 떨어뜨렸다.
그는 그대로 세실을 지나쳐서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불에 그을린 창가에 손을 대자 밝은 빛이 번졌다.
이윽고 창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가 말했다.
“고작 이런 걸로 내 몸에 상처 하나라도 낸다면 개뼈다귀라도 던져주면서 칭찬해 줄 생각이니까.”
“……준비는? 잘 돼가니?”
앞에 전쟁이라는 말이 빠졌는데도 호엘리반은 지체없이 대답했다.
“어. 잘 돼야지. 프시오까지 보내고 하는 건데.”
프시오.
그 이름을 부를 때 호엘리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는 걸 세실이 모르지 않았다.
그녀는 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루에게 의뢰했던 건?”
호엘리반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불 난 곳에서 피우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이 정도 복구는 네 연금술로 금방 할 수 있으면서 뭘. 대답이나 해. 그건 어떻게 됐어? 의뢰한 지 꽤 되지 않았니.”
호엘리반이 침묵했다.
루에게 페브리아의 결계에 대해 의뢰한 지도 벌써 1년이 되었으나 이렇다, 저렇다 하는 말을 들은 게 없었다.
“호엘리반, 그는 데시안이야.”
세실이 휴대용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어내며 물었다.
“그를 믿니?”
* * *
제인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어슴푸레한 새벽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연구실에 돌아와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던 제인은 지끈한 두통을 느끼며 신음을 흘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은 찰나, 맞은편 책상에 기대어 느긋이 서 있는 루와 눈이 마주쳤다.
얼굴을 찡그린 그녀가 무어라 말을 하려는데 호흡이 이전보다 더 불규칙해졌다.
“제인.”
“부르지…… 마.”
두통은 곧바로 멎었으나 과호흡이 일어나면서 이명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맹독은 이렇듯 후유증을 동반했다.
그 순간, 한겨울 공기 같은 차가운 숨이 제인의 뺨에 닿았다.
“지금 네 몸이 얼마나 엉망인지는 알까.”
루의 말에 제인이 작게 몸을 떨며 웃었다.
무엇으로부터 떨림이 오는지 가늠할 여력이 없었다.
“모를 리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도 잠시, 제인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편안하게 숨을 쉬었다.
루가 그녀의 이마를 짚고 미약하게 졸음을 느끼도록 만들어 준 덕분이었다.
제인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앉았다.
땀투성이긴 했으나 몸에 얼룩져있던 포도주의 흔적도, 발바닥을 까맣게 칠했던 흙먼지도 모두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한쪽 무릎을 굽히고 마주 앉은 루가 제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내 땀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러지 말고, 제인.”
다정한 손길이었다.
“나랑 같이 지옥에나 갈까.”
몽롱한 가운데 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달았다.
꼭, 귓가에 설탕을 바른 것처럼.
그래서였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알잖아.”
제인은 웃고 있었다.
“내가 이미 지옥에 있다는걸.”
그도 즐거운 듯한 얼굴로 끄덕였다.
“그렇지.”
제인은 입가에 호선을 그리고 있는 존재에게서 눈을 떼고 싶었다.
하지만 좀처럼 뗄 수가 없었다.
새벽 달빛마저 그를 위해 존재하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아름다운 그였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창문이 덜컹거렸다.
제인은 그 소리에 겨우 고개를 돌렸다.
“괘씸하다니까. 덫에서 구해줬는데 지옥에나 가자고 하고.”
“너무 괘씸하게 여기지는 마.”
몸을 일으켜 세운 그가 제인의 턱 끝을 살짝 잡고 저를 보게 했다.
“나는 데시안이고, 그 말은 너와 함께하고 싶다는 뜻이었으니까.”
제인은 졸음과 피로가 뒤섞인 얼굴로 차디찬 손을 잡고 끌어내렸다.
“사악한 말을 다정하게 하진 말아 줄래?”
“어째서? 좋아하잖아.”
루가 장난스레 말했다.
“다정한 거.”
제인은 이번에는 루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차피 피하면 방금처럼 다시 그를 보게 할 테니까. 그녀는 그렇게 몽롱한 정신을 붙잡아 가며 그에게 홀리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다.
루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푸른 눈동자에 빠짐없이 가득 담았다.
새벽에 물든 제인을 보는 게 즐거웠다.
새벽뿐일까.
밤에도, 낮에도, 그녀를 보는 건 지루한 적이 없었다.
그에게 제인은 그녀가 가지고 있던 머리끈과 다름없었다.
우스운 것.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는 것.
세상에 수많은 모조품이 널리고 널렸지만 그건 루의 비위를 상하게 할 뿐이었다. 그토록 웃음 나게 하는 건 그녀의 머리끈 장식이 유일했다.
혹은 제인.
보기만 해도 좋았다.
공을 들이는 시간만으로도 달았기에 그 이상의 욕구는 충분히 억누를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 구원이 필요한 자에게 고통과 질병으로부터 해방하오니, 페브리아의 시민이여! 아낙시오니아의 샤여! 모두 함께하는 영광을 누리기를!
제인이 말했던 나쁜 짓을 직관한 순간, 그는 밑바닥에서부터 강한 욕구를 느꼈다. 그 욕구는 명백히 독점욕이었다.
오로지 제인을 독점하고 싶다는 욕구.
한 번 욕구가 들끓자 순식간에 목이 타는듯한 갈증이 일었다.
이 순간까지도.
루가 정적을 잇는 사이, 제인의 눈가에는 졸음이 잔뜩 묻어 있었다.
“제인.”
루가 말했다.
“나는 인간이 원하는 것은 모두 줄 수 있지. 지금보다 더 빛나는 명예와 넘치는 재물은 물론이고 욕망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너에게 다 줄 테니.”
속삭임이 이어졌다.
“스스로 애써 엉망이 되지 말고…….”
너무나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그가 악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제인을 녹아들게 할 만큼.
“너를 내게 줘.”
이대로 그에게 저를 주고 싶다고 생각한 그 순간.
“지금보다 더 어두운 진창으로 데려가 줄 수 있게끔, 네 심장과 영혼을 나에게 줘.”
졸음에 가물거렸던 제인의 눈동자가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니지.”
그녀는 루가 준 미약한 졸음에서 깨어났다. 또다시 뭉근한 고통이 스멀스멀 몰려들었다. 그녀에게는 몹시 익숙한 감각이었다.
“……악마인 네가 바라는 게 누구에게나 있는 심장과 영혼 따위일 리가 없잖아.”
푸른 눈이 고요하게 흔들렸다.
“실은 내가 가진 절망을 달라는 거야, 그렇지?”
그 사이 제인은 왼손으로 침대 아래에 숨겨둔 작은 호신용 단검으로 제 목 끝을 찔렀다.
아물어 가던 자상의 좁은 틈으로부터 흐르는 피가 여린 목덜미를, 은색의 머리카락을, 흰 베개를 적셨다.
제인이 말했다.
“이거 하나만큼은 잊지 마.”
“…….”
“내 고통은 오직 나의 것이라는 걸.”
마디조차 아름다운 희고 차가운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이내 목덜미를 찌르고 있던 날 선 단검이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루가 말했다.
“네 것이면 네가 지켜야지.”
“걱정하지 마. 그럴 생각이니까.”
“궁금하군. 네가 널 어떻게 지킬 수 있을지.”
그가 말을 덧대었다.
“특히 그 여자로부터.”
루가 그녀의 손목을 지그시 눌러 쥐자 제인이 괴로운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마드리안과 마주치지도, 얽히지도 말자는 목표는 이미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제인은 마드리안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페브리아를 떠나야겠다고 결심했었다.
“……도망가려고. 되도록 멀리.”
“도망.”
루는 하얗게 질려가는 그녀의 손목에 여유를 주었다. 몰려있던 피가 확 돌면서 이전처럼 열기를 더했다.
“원한다면 함께 가주지.”
농담 같은 그의 말에 제인은 여전히 잡혀있는 손목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승냥이를 피해 이리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멍청이는 아니라서.”
“이리일 리가.”
제인의 시선이 틀어진 틈을 타, 루는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벽이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또다시 새가 될 테고, 너의 날개가 되어줄 수 있는데.”
제인이 실소했다.
“심장까지 뜯어먹을 까마귀는 아니고?”
“그러고 싶은데.”
허리를 숙인 루가 피에 젖은 그녀의 목덜미에 느릿하게 입을 맞추고 그녀를 응시했다.
“너만 허락해 준다면.”
제인은 저항해야 하는 이 순간마저도 황홀하게 아름다운 그의 인영을 보며 생각했다.
악마다.
나를 망치러 온, 빌어먹을 악마.
* * *
며칠 후.
마드리안의 집무실에 다시 발을 들인 제인은 앞에 놓인 서류와 교황의 얼빠진 얼굴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정말이지 대단하세요, 교황님.”
제인은 마드리안이 건네준 서류인 현금보관증서를 물끄러미 보다가 못 참겠다는 듯이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재미있는가 보구나.”
“네. 아주 재미있네요.”
처음부터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마드리안이 제게 제안이라는 단어를 썼을 때 겉치레로만 사용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래서 걸었던 조건이 말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그렇게는 못 주겠으니 금액을 조정해보자며 아쉬운 소리를 하겠지. 아니면 일정 부분 조정하더라도 차후 교황청 자금 횡령으로 꺼내 들 수 있는 카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속내를 가지고 막무가내로 던졌던 액수였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금액이었기에 정말로 그 돈을 받으리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설마 했어요.”
“무엇을?”
제인이 한 번 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면 졸부가 되는 건 아닐까 하고요!”
단상 위에서 보여주었던 적포도주가 신의 술로 불리며 교황청의 성물로 지정되었을 때도, 네 개의 연맹국으로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지를 읽었을 때도 설마 했었다.
제인은 손에 든 현금보관증서를 재차 살폈다.
페브리아를 포함해서 다섯 국가의 은행에서 언제 어디서나 최대 천만 프랑크를 찾을 수 있는 서류였다.
거의 걸어 다니는 작은 은행을 받은 셈이었다.
그렇다는 건…….
일순 웃음기를 닦아낸 제인이 느리게 운을 뗐다.
“……교황님, 이 증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