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연극이 끝나고 나면 마드리안은 병들고 죽어가는 이들의 몸에 천 번, 만 번을 손을 대더라도 오늘과 똑같은 모습은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교활하고 간교한 뱀의 혀로 비밀을 지켜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리라.
일 년도 못 가서 들통날 거짓이라는 걸 그녀가 모르지 않을 것이다.
“제인.”
마드리안이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제인의 이름을 불렀다.
“페브리아의 교황으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아니? 진실? 거짓? 아니란다.”
“…….”
“믿음.”
마드리안과 제인의 시선은 여전히 함성을 향해 있었다.
“교황인 내게 중요한 건 진실도, 거짓도 아닌 오직 믿음뿐이야.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눈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공기와 같아서 그만큼 흩어지기도 쉽지. 그래서 사람들에겐 ‘눈에 보이는 믿을 것’이 필요해.”
들키고야 말 거짓으로 믿음을 산다? 그게 가능한 건가.
“영웅 심리인가요.”
“역할 놀이를 한다면 영웅은 따분하구나.”
마드리안이 국민들에게 인자한 미소를 보내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제인에게 말했다.
“신이라면 모를까.”
제인은 코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신이 이렇게나 구지레한 연극을 하는 게 더 시시하지 않나요.
그녀는 마지막 말을 삼켜내며 뒤돌았다.
거대하고 징그러운 함성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제인은 함성을 뒤로한 채 교황청 기사의 호위를 받으며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왔다.
아카란을 섭취하면 최소 삼십 분 후 급격하게 졸음이 쏟아진다.
그곳에서 쓰러지면 낭패였다.
완벽한 기적이 되어야 했으니까.
* * *
보름달이 크게 뜬 밤.
아직도 축제가 한창인 시가지의 열기가 숲에 드문드문 닿을 듯했다.
루는 반딧불이들을 모아 제 앞에 걸어가는 제인의 앞을 비추어주었다.
“제인.”
루의 부름에도 타박타박 잡초 밟히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가 조용히 웃었다.
몽유병이 또 도졌군.
루는 한 발자국 뒤에서 느긋하게 따라가면서 제인의 몸에 묻은 포도주 자국을 바라보았다.
시선은 곧 그 아래, 맨발로 향했다.
달빛이 번지는 고요함 속에서 금방이라도 엉켜 넘어질 것 같은 발걸음이었다.
위태로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째서인지 궁정 숲에서 제인을 다시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의 석양은 유난히 붉었다.
발목에 걸린 허술한 덫을 핑계 삼아 나태를 즐기고 있을 때 인기척이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 인간이 무화과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고 있었다. 작정하고 안 맞추려는 듯이.
그러다 얼결에 떨어진 무화과를 주운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아. 저 여자는…….
루의 입가에 얕은 미소가 번졌다.
약간의 놀라움, 약간의 반가움, 그리고 약간의 호기심이 섞인 미소였다.
잠시 인상을 찌푸리던 여자가 다가왔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루의 가슴을 뭉근하게 울렸다.
어느새 곁에 앉은 여자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죽은 게 아니었잖아? 하고.
그는 여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불현듯 목마름을 느꼈다. 갈증은 의문이 되어 그의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이렇게 목이 타는 이유가 뭔가.
같잖은 문장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그는 생각하기를 관두었다.
이어서 가진 힘을 사용했다.
현혹을 인간에게 쓰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제 여자는 검은 새의 힘에 홀린 채 낡고 오래된 덫을 풀리라.
-있잖아.
하지만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그렇게 죽은 듯이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구해주지 않을걸.
여자가 이어서 말했다.
-아무도.
루의 푸른 눈이 커졌다.
보고 있으면서도 믿어 지지가 않았다.
현혹의 힘이 통하지 않는다니, 지금까지 그런 존재는 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루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는 당장 자기 심장을 꺼내서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뛰는 게 제 심장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궁금했다.
자신의 힘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그때였다.
산 중턱에서 사선으로 떨어지는 붉은 빛이 이 여자를 스쳐서 검은 새에게 내려앉았다.
여자가 말했다.
“……그러니까, 발버둥 쳐.”
그건 빛이었다.
“구해주고 싶게.”
그리고 구원이었다.
그것 말고는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발버둥 친다면 형벌과도 같은 공허로부터 자신을 구해 줄 것만 같았다.
그는 기뻤다.
여자가 원하는 것이 발버둥 치는 것이라면, 그래서 저를 구해줄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몇 번이고.
기꺼이.
그렇게 날개를 움직였고, 낡고 오래된 덫에서 풀려났다.
이후, 루는 조금씩 여자에 대해 알아갔다.
여자는 자신 만큼이나 가혹한 지옥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주 악몽을 꿨다.
겨우 잠들었다가도 죽을 것처럼 잠에서 깼고, 습관처럼 독을 복용했다. 이따금 수면 장애를 겪기도 했으며, 오늘처럼 몽유병이 도지기도 했다.
하지만 대개는 독을 복용하고 고통스럽게 몸부림을 치다가 기절하듯 까무룩 잠드는 게 그녀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일상을 유일하게 아는 존재가 루였다.
알면 알수록 제인은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인간이었다. 그가 희망 따위를 걸기에는 너무나 나약한 인간.
그럼에도 루는 제인에게 시간을 들였다.
숲의 새들을 보냈고, 그 새들을 따라서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제게 오도록 만들었다.
루는 그 시간과 과정이 조금도 지겹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1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갈 만큼 즐거워서 조금 더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좋겠다 싶었다.
분명, 제인이 말했던 나쁜 짓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탁…….
그때, 초점 없이 걸어가던 제인이 발이 꼬여서 넘어지려 했다.
루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가냘픈 몸이 단숨에 그의 품 안에 안겨 들어왔다.
이름 모를 만족감에 그가 어렴풋이 웃었다.
“제인, 맨발로 다니면 안 되지.”
차가운 손이 손목을 잡은 순간, 잠에서 깬 제인이 여전히 몽롱한 기분으로 맨발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지 무의식적으로 저를 끌어안은 팔을 밑으로 내리눌렀다. 포박하듯이 안고 있던 팔이 약간의 틈을 내주었다.
제인은 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곁에서 빙빙 맴돌고 있는 반딧불이만이 빛나는 깜깜한 숲이었다.
그녀는 낮에 있었던 일이 꿈처럼 느껴져서 이 순간도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때, 어깨에 차가운 숨결이 닿았다.
“……뭐해?”
제인의 셔츠를 살짝 벗긴 채 그녀의 어깨에 묻어 있던 포도주의 향을 맡던 루가 나긋하게 말했다.
“평범한 포도주로군.”
제인은 루의 막돼먹은 희롱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얼마만큼 틀려먹었는지 하나하나 짚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독의 후유증 때문에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제인은 어깨에 남아 있는 포도주의 흔적을 보다가 속으로 욕을 곱씹으면서 옷을 추슬렀다.
하지만 두통 때문에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뒤에서 얼음장 같은 손가락이 느릿하게 그녀의 단추를 채워나갔다.
이내 제인이 추운 듯 몸을 떨자, 그는 겉옷을 벗어서 덮어주었다.
“……이렇게 엉망인 꼴을 하고서.”
루의 나직한 목소리에 제인이 핑 도는 머리를 짚으며 말을 더듬거렸다.
“걱정, 이라도 하는……, 후, 하는 줄, 알겠어.”
“했지.”
그가 웃었다.
“나만 보고 싶은 그 꼴을 다른 인간들에게도 보여줬으니.”
땅바닥이 움직이는 듯한 기분에 제인은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는 와중에 루가 한 말뜻을 똑똑히 알아들었다.
“……미친 새끼.”
루가 슬며시 웃으며 한 손으로 제인의 두 눈을 가려주었다.
“좀 자도록 해.”
어쩌다 이런 미친 새끼한테 걸려서…….
그녀는 하고 싶은 욕이 아직 더 남아 있었다.
하지만 눈앞이 자꾸만 어둑해졌다.
루는 자기 품에 쓰러진 인간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짓다가 그녀의 무릎 밑으로 손을 넣어서 가볍게 안아 들었다.
* * *
그 시각.
호엘리반의 공개 집무실을 쭉 둘러보던 세실이 말했다.
“실내장식 멋진데.”
드호아망의 마탑주인 그의 공개 집무실은 실로 멋졌다.
벽지부터 소품 하나까지 호엘리반의 미학과 감각이 묻어 있었기에 2년에 한 번 일반인들에게 개방되는 날이면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로 근사했다.
다만, 문제라면 저녁쯤에 일어난 화재를 진압하기 전의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팔짱을 낀 호엘리반은 사방이 까맣게 그을린 집무실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문짝에 기대어 섰다. 이어서 세실을 향해 상냥하게 말했다.
“그래? 앙디스인들을 만나면 꼭 전해줄게. 그 벌레 같은 놈들이 네 집도 이렇게 만들어줄지도 모르잖아.”
“날 생각해주는 건 역시 너밖에 없네.”
“하나뿐인 오빠로서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세실은 ‘오빠’라는 호칭이 귀에 꽂히자마자 중지를 들었다.
이내 서로 기다렸다는 듯이 형편없는 욕지거리를 주고받으며 훈훈한 가족애를 나눴다. 꽤 한참을.
소담한 소란이 끝나갈 무렵, 세실이 그을린 벽을 향해 몸을 틀었다.
문을 등진 그녀의 표정이 사뭇 어두웠다.
호엘리반을 향한 앙디스인들의 테러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볼 때마다 마음이 더 착잡해지곤 했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앙디스인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호엘리반 앞에서만큼은 앙디스인을 힐난하지 않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의붓남매인 그에게는 앙디스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므로.
그가 혐오하는 피를 함께 손가락질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왜 테러당했니?”
표정을 갈무리한 세실이 호엘리반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앙디스인들이 그렇게나 원하는 전쟁을 네가 대신해주기로 약조했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