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루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부르면 오니까.”
그리고 저따위 대답이 돌아오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사람이 제인이었다. 그녀는 심각하게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앙디스에서 쿠드칸을 죽이려던 걸 말렸을 때?
아니면 궁정 숲에서 마주쳤을 때?
그래, 궁정 숲.
연구원 직책을 수여 받던 날, 약초를 캐다 말고 무화과를 먹겠다고 설치지만 않았어도.
아니면 덫에 걸린 새를 풀어주는 오지랖만 부리지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엮이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그게 작년 가을이었다.
그때부터 루는 숲의 새들을 보내어 제인을 불렀고, 제인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그에게 오곤 했다.
정확히는 올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숲의 새들은 그녀의 옷깃이든 머리카락이든 뭐든 물려고 했으며, 실내에 있을 때면 창문을 부술 듯 부리로 쪼아댔다.
그런 이유로 교황의 집무실에서 나오던 제인은 루가 보낸 새들을 보자마자 한기를 느꼈던 것이었다. 한 발만 늦었어도 교황청 유리창 하나가 엉망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저를 향해 날아왔겠지.
-부르면 오니까.
그 말을 곱씹던 제인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주 개새끼지?”
제인이 신랄하게 말을 이었다.
“궁정에 늑대 닮은 개가 한 마리 있거든. 브로디라고. 귀엽게 부르면 멍멍이고, 상스럽게 부르면 개새낀데 딱 그거잖아. 그렇지?”
루는 제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무화과 한 알을 툭 떨어뜨렸다.
나무 밑동에 앉아있던 그녀는 떨어지는 무화과를 반사적으로 받아냈다.
“…….”
제인이 굳은 채 아무 말이 없자 루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키득거렸다.
“아무렴. 닮았지.”
제인은 소매로 무화과 표면을 닦아내고는 한숨을 내쉬면서 조그맣게 욕을 뱉어냈다. 곧이어 무화과의 반질거리는 부분을 크게 베어 물었다.
달큼함이 입안 가득 씹혔다.
“……무화과라서 받은 거야.”
루는 나무 아래에서 무화과를 쥐고 오물오물 먹는 제인을 샅샅이 바라보았다.
제인의 상태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지금 당장 쓰러져 죽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인 상태.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몸속에 점철된 맹독 때문이지, 검붉은 피가 붕대에 덕지덕지 말라붙은 외부적인 상처 때문이 아니었다.
“말해 봐, 제인.”
루의 눈매가 요요히 접혔다.
“오늘따라 유독 불행해 보이는 이유.”
제인이 고개를 들었다.
위에는 즐거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악마 하나가 있었다.
제인은 저 악마를 더 즐겁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입을 닫는 것.
그리고 입을 열고야 마는 것.
무엇이든 아무리 부정하고, 외면하고, 거부하더라도 결국에는 항상 빌어먹을 악마의 뜻대로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런 개 같은 일련의 과정을 저 미친 악마가 즐거워 마지않는다는 것이었다.
제인은 조금 전까지 마드리안을 상대하고 왔기에 무척 피곤했다.
그녀는 순순히 입술을 떼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이내 무화과를 마저 삼키고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말했다.
“나쁜 짓을 하게 될 것 같아.”
* * *
보름이 지났다.
페브리아의 보름은 여느 날과 다르게 흥분으로 들끓었다.
교황청에서 공격적으로 퍼트린 단 한 줄의 축제 홍보 문구 때문이었다.
[아낙시오니아의 신성력을 발현한 신의 사자]
신성력!
그 얼마나 숭고한 힘인가.
페브리아는 마법이 금지된 나라였기에 관심과 열기가 더욱 드높았다.
자국민뿐만 아니라 여러 국가에서도 마드리안의 신성력을 확인하기 위해 외교 사절단을 파견하여 동태를 살피도록 했다.
그렇게 거리마다 축제를 즐기러 나온 시민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퍼지고 각국의 언어가 한데 섞인 소란함으로 가득 찼을 때였다.
울림통이 큰 나팔 소리가 들렸다.
교황 마드리안의 행차를 알리는 소리에 사람들은 광장의 널따란 단상 앞으로 벼락같이 모여들었다. 교황청 직속 기사들이 교황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거칠게 가로막았다.
그 시각.
제인은 그늘진 천막 안에서 가쁜 호흡을 뱉어내며 사제의 종소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머리카락이 한 올도 비치지 않는 흰 가면을 쓰고 남색 망토를 두른 그녀의 상태는 처참했다. 그녀의 온몸에는 오프리제의 맹독 현상으로 인해 흉측한 푸른 무늬가 얼기설기 그어져 있었다.
보기에만 흉측한 게 아니었다.
슬쩍 스치기만 해도 불에 타는 듯이 아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열이 들끓다가도 뼛속까지 오한이 들어 턱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까딱 잘못하면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아낙시오니아의 부름을 받아…… 그러므로 찬란한 기적을 샤와 함께…….”
젠장, 이제 좀 그만 닥쳤으면.
단상 위에서는 자질구레한 연설을 하고 있었다. 고통 속에서 개소리를 듣자 하니 신경이 더 예민해졌다.
십 분.
정확히 십 분 후면 몸에 해독제가 퍼져서 통증이 끝나리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일 분 일 초가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의 연속이었다.
드디어 사제가 종을 울렸다.
시종들은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제인을 부축하려 했다.
제인은 건드리지 말라는 듯, 신경질적으로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제인의 몸에 손에 손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교황인 마드리안뿐이었다. 지금 그녀 외에 다른 누군가 손을 댄다면 다음에 수습해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의 시종들을 지나 겨우 단상에 올라선 제인은 남색 벨벳 망토의 끈을 천천히 풀었다.
해독까지 육 분.
망토가 피부를 스치며 떨어지자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제인은 덜덜 떨리는 턱을 굳게 다문 채 신음을 삼키며 고통을 참아냈다.
생경한 것은 인간에게 꺼림칙한 공포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민소매 튜닉을 입은 제인의 팔다리에 오프리제의 맹독 현상이 드러난 것을 보자마자 예상대로 불쾌한 파장이 시민들을 뒤덮었다.
잠시 후 교황이 말문을 열었다.
“신 아낙시오니아의 가호 아래.”
단 한 마디에 광장을 빽빽하게 채운 술렁임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넓은 광장이 고요로 채워지자 매섭게 다물었던 교황의 입술이 다시금 떨어졌다.
“교황 마드리안 데 칸의 이름으로 그대들에게 고한다. 여기 구원이 필요한 자에게 고통과 질병으로부터 해방하오니, 페브리아의 시민이여! 아낙시오니아의 샤여! 모두 함께하는 영광을 누리기를!”
거리에 빽빽하게 들어찬 시민들의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
어린 사제들이 제 키만 한 성물을 조심스럽게 들고나왔다.
교황청 소유의 용품 중에서도 고가로 알려진 황금 다리 장식의 크리스털 성수 병이었다.
사제들이 적포도주를 그 안에 쏟아붓자 크리스털 성수 병은 순식간에 검붉은색을 띠었다.
마드리안은 성수 병 안에 담긴 적포도주로 손을 느릿하게 적시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제인이 작게 실소했다.
저기요, 교황님.
그건 예정에 없었던 겉치레잖아요?
교황은 검붉은 액체가 흐르는 손을 제인의 양어깨에 올렸다. 피부에 짓이기는 듯한 통증이 일면서 달콤하고도 아득한 술 향이 코끝에 풍겼다.
바람만 스쳐도 고통스러운 상태였기에 방울진 포도주가 교황의 손끝을 타고 흐르자 칼로 긋는 듯한 고통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결국 참고 또 참았던 신음이 제인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윽…….”
“쓰러지지 마라.”
교황이 들릴 듯 말 듯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제인의 입술 사이로 쇳소리와 덜 삼켜낸 욕설이 간간이 새어 나왔다.
“……이 빌어먹을, 포도주는, 뭐죠.”
“설명은 다음에. 앞으로 얼마나 남았지?”
“……일 분.”
숨을 쉴 때마다 멀쩡한 살갗 위로 피와 고름이 흘러넘치는 듯한 통증이 따라왔다. 그녀가 너무나 잘 아는 고통이었다.
하지만 그 고통을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그것도 기만하기 위해 이용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맹독 현상이 너절하게 발현한 제인의 피부 위로 포도주와 식은땀이 뒤엉켜 흘러내렸다.
호흡이 더 가빠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는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고통에 잠시 비틀거렸다.
교황은 그녀가 쓰러지지 않도록 제 팔목을 잡게 했다. 이어서 특유의 낮고 중후한 음성이 제인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견뎌라.”
제인은 이를 악물고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교황의 얼굴 뒤편으로 교황청 위에 세워진 아낙시오니아 동상이 눈에 어른거렸다. 미사포로 가려져서 얼굴조차 볼 수 없는 그 신을, 제인은 믿은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어느새 귓가에 다가온 마드리안이 기특하다는 듯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낙시오니아의 은총을.”
“……하.”
해독 작용은 계산된 시각에 확실히 발현되었다.
제인의 몸에서 푸른 무늬가 기적처럼 사라지는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한 페브리아 시민들은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교황 마드리안이 하늘이 선택한 신의 사자임을 공고히 하는 순간이었다.
제인이 숨을 쌕쌕거리며 겨우 말했다.
“아시죠? 영원한 비밀은 없다는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