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10)화 (10/168)

10.

제인이 눈앞에 있는 기밀 연구서를 보고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으려 애쓰는 사이, 마드리안이 말했다.

“여기엔 그대가 수습 자격이었을 때부터 수년에 걸쳐서 지금까지 복용한 독초의 종류와 차츰 늘려나간 용량, 그에 따른 반응과 해독제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

“귀한 연구 자료라고 생각한다.”

……연구 자료?

전혀 아니었다.

마드리안이 가지고 있는 건 제인 외에는 아무도 몰라야 할 사적인 연구서였다.

마드리안이 이어서 물었다.

“그런데 이 연구서를 관점을 달리해서 보면 어떨까.”

“……관점이요?”

“그래. 연구서가 가지는 실효성보다 연구자를 중심으로 말이다. 삶의 모든 건 어디에 관점을 두느냐에 따라 달리 해석되니까.”

“그것참 궁금하네요. 저를 어떻게 해석하셨을지.”

마드리안 교황이 제인과 눈을 맞추었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그렇지. 겁 없는 맹랑한 인간.”

여유롭게.

산 정상에서 풍경을 내려다보듯이.

“겁이 없다는 것은 용기로 해석될 수 있지만 글쎄, 과연.”

제인은 그즈음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대를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엔 아쉬운 듯하니 사족을 붙여서 이렇게 설명하고 싶은데.”

직책 뒤에 가려진 자신의 본 모습은 사실 약해 빠진 인간에 불과하다고.

“삶의 기쁨도, 앞으로의 미래도, 이상적인 꿈도 찾아볼 수 없는 주제에 연구인지 자학인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성실하게 자신을 학대하는…… 나약한 인간, 정도로.”

그리고, 그런 자신을 이 여자가 알고 있다고.

그것도 너무나, 잘.

“제인. 그대가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 마드리안, 교황의 직함을 걸고 약속하지. 빠른 시일 내에.”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맹독에 적응할 다른 인간을 택할 것을.”

빠른 시일 내에, 다른 인간을 택.

단 두 어구만으로도 제인의 상체가 앞으로 쏠리기 충분했다.

“그러면 독에 내성이 생기기도 전에!”

“죽겠지. 단지 한 명일까?”

미친 여자.

제인은 진심으로 교황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끔찍했다.

자신이 교황의 실체를 밝히려 한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기에.

마드리안은 페브리아가 사랑하는 샤의 최고위 성직자였고, 자신은…….

너무나 뻔한 말로였다.

“……제안. 받아들이죠.”

하지만.

약해 빠졌다고 한들, 흠집 하나 내지 못할까.

“대신, 교황님.”

마드리안이 정해진 절차처럼 미소를 짓던 그 순간이었다. 제인의 말에 앞에 놓인 찻잔을 잡으려던 중후한 손길이 잠시 멈췄다.

“천만 프랑크를 제게 주세요.”

찻잔을 손에 쥔 마드리안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 자리에는 전보다 더욱 즐거운 얼굴로 말갛게 웃는 계집애가 있었다.

“그 정도는 주실 수 있죠?”

가문도, 가족도 없는 어린 계집애.

교양 머리 없는 천애 고아.

소문과 딱 들어맞는 맹랑한 계집애가 감히 페브리아의 교황에게 경고 따위를 한 것이다. 저를 건드린다면 흠집 하나쯤은 각오하라는 경고.

“……그대가 나를 제법, 웃게 하는구나.”

뒤틀어졌던 웃음기를 바로 잡은 제인이 이어서 두 가지 조건을 더 제시했다.

마드리안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마.

모든 조건을 수용하겠다는 뜻으로.

대화가 마무리되었을 무렵, 제인이 조그맣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낙시오니아의 은총을.”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문 쪽으로 돌아서려 할 때였다.

“……!”

교황청 집무실 창문 쪽으로 날아오는 새들의 날갯짓이 제인의 잿빛 시야에 걸렸다. 거리가 점점 좁혀져 오자 제인의 몸은 한겨울 추위에 내던져진 듯 오싹한 한기로 뒤덮여갔다.

-숲의 새들을 네게 보낼게. 그 새들을 따라서 내게로 와. 그리고…….

제인은 귓속으로 파고드는 달콤한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게 나의 발버둥이라는 걸 기억해.

궁정 숲에서 만난 검은 새.

지독하리만치 아름다운 현혹의 데시안.

루.

그의 부름이었다.

* * *

“안 됩니다. 천만 프랑크라니요!”

제인이 돌아간 뒤, 교황의 집무실에서 말렌 추기경은 고개를 내저었다.

“제정신이 아닌 겁니다!”

마드리안 교황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모습에 말렌 추기경이 혀뿌리까지 차오르는 오만가지 말들을 삼켜냈다.

정적이 먼지처럼 가라앉고 나서야 마드리안 교황은 제인이 요구한 두 가지 조건을 다시금 곱씹었다.

-그날 있을 행사에서 얼굴을 가리게 해주세요. 제가 하는 연구에 대해 아는 자들이 있으니 의심할 여지를 주어선 안 되니까요.

이미 고려한 지점이었다. 문제는 다음 조건으로 천만 프랑크를 요구한 것이었다.

천만 프랑크.

가히 비공식적으로 처리하기에는 골치가 아픈 금액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제 정체가 탄로 나게 된다면 저는 이 땅에서 발 딛고는 못 살지 않겠어요? 그러니 망명에 필요한 만큼의 보수는 챙겨주셔야 한다고 보는데 말이죠.

아니꼬우면 죽이시던가.

그 말이 환청으로 들릴 법한 오만방자한 어조였다.

마드리안 교황은 슬며시 미소 지으며 감았던 눈을 찬찬히 떴다. 시간은 이제 완연한 오후가 되어서 햇빛의 농도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제게는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말렌 추기경이 기가 차서 물었다.

“유익이 언제부터 해롭다는 의미로 변질하였습니까?”

마드리안 교황은 깍지 낀 양손 위로 턱을 걸쳤다.

“어떻게 유익하지 않을까요. 능력은 출중하나 상당히 지랄 같다는 한 젊은이의 소문을 눈으로 직접 보았는데 말이죠. 소문을 눈으로 확인할 때의 즐거움은 항상 큰 법이니까요.”

지랄, 유익.

말렌 추기경은 두 단어를 강조하며 발음하는 그녀의 태도에 섬찟함을 느꼈다.

이렇게나 노골적인 단어를 사용했다는 건 제인이 마음에 들었다는 거다. 마음에 들어 버린 것이다.

대체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왜?

마드리안이 말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심경 변화의 속도랄까. 그것이 생각보다 빨랐습니다. 변심이.”

“그것참 의심스럽군요. 더 강경하게 의심해 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애석하게도 말렌 추기경의 간절함은 한 떨기 꽃이 되어 사뿐히 짓밟히고 말았다.

“가까이 두고 조금 더 지켜보도록 하죠.”

미심쩍은 부분마저 안고 가겠다는 의미임을 눈치챈 말렌 추기경은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교황님! 그 또라, 아니, 그 연구원과 한배를 탈 수 있다고 믿으시는 겁니까? 진정으로요?”

약간의 틈.

이전과는 성질이 다른 적막.

종종 내뱉고 나서야 실체를 알 수 있는 말이 있다. 그런 말들은 대체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사실에 통감하도록 만든다.

“제게 믿음을 물었습니까?”

하루를 통틀어서 가장 아찔한 순간이 가뜩이나 굳은 말렌 추기경의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아셔야 하지 않습니까.”

마드리안 교황의 턱을 괴고 있던 깍지 손이 책상 위로 고스란히 내려갔다.

두 사람 모두 어깨와 척추를 폈다.

창밖으로는 어느새 붉은 노을이 내려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게서 믿음이란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 그러니, 말렌.”

이제 곧 밤이 올 것이다.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합니다.”

* * *

궁정 숲 깊은 곳.

덫에 걸린 검은 새 한 마리가 아무렇게나 자란 나무의 무화과를 보며 생각했다.

녀석이 오면 저 열매를 나눠 먹자고.

발목이 덫에 걸려 있는데도 검은 새는 유순한 가을바람을 여유롭게 만끽했다.

어느 순간 검은 새의 시선이 무화과에서 하늘로 옮아갔다. 서너 마리의 새들이 위치를 알려주려는 듯 붉은 석양으로 물든 하늘 위를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곧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커지는 땅의 울림이 세상 무엇보다 달았다. 나무에 맺힌 무화과보다도 더.

“취미지? 덫에 걸리는 게.”

여자의 무심한 물음에 검은 새가 야트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제인.”

“안녕 못한데. 네가 보낸 멍청한 새들이 교황청 창문까지 부수려고 했었거든.”

“……그러게. 안녕이 아니군.”

검은 새가 제인의 목덜미에 두른 검붉은 붕대를 가만히 보았다.

그사이 쪼그려 앉은 제인은 새의 발목에 걸린 덫을 이리저리 살폈다. 늘 그렇듯 낡고 헐거운 덫이었다.

도대체 이렇게 오래된 덫은 어디서 찾아내는 걸까.

그녀는 지겨운 얼굴을 하고서 덫을 풀어주었다. 케케묵은 덫은 건드리자마자 툭 떨어져 나갔다.

자유로워진 검은 새가 굵직한 나뭇가지 위로 날아올라 갔다.

신비롭고 고혹적인 새였다.

제인이 새에게 시선을 빼앗긴 틈에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한낮의 반대편으로부터 어둠이 숲에 밀려 들어오던 찰나, 검은 새 주변이 푸른 빛으로 휘감겼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새는 푸른 눈의 사내로 변해버렸다.

제인의 시선은 이제 그에게 완벽하게 사로잡혔다.

석양의 잔상이 희미하게 남은 보랏빛 하늘 아래, 매혹적인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가두듯 담아내고 있었다.

루.

한 음절밖에 되지 않는 그의 이름이 제인의 입안에서 맴돌다가 소리 없이 삼켜졌다.

느긋하게 웃는 눈꼬리와 입술 끝은 배꼽 밑을 간지럽힐 정도로 야릇하고 퇴폐적이었다. 뒷걸음질 치고 싶게 만들면서도 도무지 발을 떼지 못하게 했다.

그러니 앞으로도 없으리라.

저렇게나 위험할 만큼 아름다운 존재는.

더군다나 그는 현혹의 데시안이었다. 제인을 데리러 온 숲의 새들처럼 그는 심장이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홀릴 수 있었다.

제인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나까지 홀리고 있을지도…….

사로잡힌 시선이 루에게 달라붙듯 떨어질 줄 모르는 사이, 나무에 등을 기댄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오늘따라 유독 더 불행해 보이는군.”

웃음이 맞물린 말이 이어졌다.

“보기 좋게.”

조금 전까지 홀린 듯이 사내를 응시했던 제인은 고개를 돌리며 한 손으로 짜증스레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미쳤지.

저 빌어먹을 존재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니.

제인은 짜증이 묻어난 손으로 은색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왜 불렀어?”

다듬어지지 않은 물음이 튕겨 나가자 제인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해서는 안 될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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