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9)화 (9/168)

09.

제인이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진짜, 날 개새끼로 보는 것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그래요.”

저도 그중의 하나이긴 한데요…….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전령이 울상을 지으며 제인을 불렀다.

“연구원님, 저라고 매번…….”

전령이 입을 닫아버렸다.

하마터면 ‘저라고 매번 이 지랄을 겪고 싶겠습니까?’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기 때문이었다.

제인이 멀뚱멀뚱하게 바라보았다.

“매번?”

“저, 저라고 매번…… 예. 이런 소식으로 찾아뵙고 싶겠습니까?”

전령의 표정이 순식간에 불쌍해졌다.

“하지만 보십시오. 전 교황님의 명령을 전하는 9급 전령에 불과합니다. 연봉도 연구원님의 반의, 반의, 반도 안 됩니다…….”

“내 연봉이 얼만 줄 알고요.”

“모르셨습니까? 연구원님 연봉이 궁정에서 제일 높다고 소문났습니다.”

모르긴, 개뿔! 알잖아! 네가 네 입으로 소문내서 알잖아!

전령은 그 말이 혀끝까지 차올랐으나 끝끝내 내뱉지 못하고 삼켰다. 그는 그녀에게 받아야 할 것도, 전해야 할 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져가요. 이번 달 연구서.”

제인이 옆에 있는 서류 더미를 시원찮게 밀어주었다. 전령은 그녀의 연구서를 평소보다 더 소중히 품에 안았다.

이어지는 정적.

“왜 안 나가요? 나가요.”

제인의 재촉에 연구서를 품에 안고 심호흡하던 전령이 입술을 뗄락, 말락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연구원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주어 없는 말에 제인이 누가요, 라고 묻기도 전이었다. 전령이 바들바들 떨면서 한껏 고양된 목소리를 내었다.

“교황님께서 연구원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이번이 처음이었다.

교황이 제인의 연구서만이 아니라 제인이라는 사람까지 호출한 것은.

1년 동안 제인에게 시달려왔던 전령은 그녀가 페브리아의 교황청은 물론, 이 나라의 종교 샤부터 교황 마드리안까지 전부 다 거북해한다는 것을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엔 얼마나 욕을 해댈까.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외의 당혹스러운 목소리였다.

“……네? 누가, 누구를요?”

“그러니까, 교황님께서…….”

전령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는 이 연구실에 올 때마다 한 번씩 생각했다.

“……누구를요?”

누구를요? 하고 묻는 저 여자, 사실은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교황의 부름에 지금처럼 높게 트인 1층 창문을 넘어서 도망가려는 품새만 봐도 정상은 아니지 않은가.

전령이 조용히 다가가서 그녀의 바짓가랑이를 대충 붙잡았다.

“대제국 페브리아 궁정에 연구원님이라고 불리는 분이 또 누가 있습니까?”

“…….”

“페브리아 궁정 최초이자 유일한 명예 연구원 직책을 가지신, 화려한 업적에 명석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궁정 연봉 1위. 누구입니까?”

“…….”

“명예 연구원님, 당신 아니십니까.”

창문에 걸쳐져 있던 제인의 몸이 바닥으로 주르륵, 떨어졌다.

그리고 멀쩡하게 일어나서 옷을 툭툭 털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심하게 말했다.

“가죠.”

“…….”

전령은 정말이지, 먹고살기 더럽다고 생각했다.

* * *

전령이 제인에게 안내하고 나간 교황의 집무실은 높은 고층에 창이 탁 트인 구조였다.

제인은 창밖을 보는 순간 절실하게 체감했다.

이곳이 바로, 페브리아에서 가장 높은 위치구나.

그녀는 문득 시동부터 시작하여 지금의 자리에 앉기까지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무척 치열한 나날들이었다.

가진 것 하나 없이 궁정에 왔던 그녀는 무시도 동정도 받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오늘날까지 책이 닳도록 공부하고 손이 부르트도록 일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눈에 띄는 성과를 보이면서부터는 너저분한 질투와 시샘을 기꺼워하며 긁어모았고, 보란 듯이 자근자근 짓밟아 왔었다.

그렇게 실력 하나로 올라선 위치였다.

그녀는 스스로 일구어낸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을 퍽 마음에 들어 했다.

누군가를 경시하는 시선은 대체로 그녀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시선을 가진 이는 불행히도 제인이 아니었다.

바로,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여자.

마드리안 데 칸이었다.

제인은 1년 전에 했던 자신의 다짐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 상기했다.

교황과 얽히고 싶지 않다니.

얄팍한 웃음이 나왔다. 애당초 그건 제인에게 주도권이 있는 일이 아니었다.

교황이 궁정 연구원인 제인에게 연구서를 갖다 바치라면 바쳐야 하는 것이었고, 부르면 와야 하는 것이었다.

제인은 우스운 상념을 끊어내고 소파에 묻었던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자 등 뒤로 뭉쳐져 있던 은발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미소를 문 입술 끝에서 즐거운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니까, 교황님 말씀은.”

잿빛 눈동자가 느릿하게 깜빡거리는 속눈썹 아래로 휘어졌다.

“오프리제의 맹독 현상부터 아카란의 해독 작용까지 전부 다 국민들에게 낱낱이 보여주라는 거죠? 마치…….”

은근히 낮춘 목소리의 끝이 전보다 더 또렷해졌다.

“교황님의 손이 닿아서 병이 나은 것처럼 보이도록.”

교황 마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귀를 제법 잘 알아듣는구나.”

제인의 얼굴에 피어난 미소는 좀처럼 옅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입매를 정돈하는 대신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녀가 약제사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모르게 개발한 맹독과 해독제의 종류만 해도 수백 종이 넘었다.

그중 치사율이 극도로 높은 맹독이 오프리제였고, 오프리제의 해독제가 아카란이었다.

해독제? 웃기지도 않는 소리.

치사율이 극에 달하는 독을 복용하면 해독하기도 전에 목숨을 잃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고로, 자국민 앞에서 오프리제를 복용하라는 교황의 명령은 본디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지시일 것이다.

여기, 한 사람.

제인을 제외하고는.

그녀는 오프리제를 포함해서 수백 종에 달하는 독에 내성이 있었으니까.

해독제가 없으면 없는 대로 죽지 않고 버틸 수 있는 몸이었다. 그러니 교황의 명령에 이토록 웃음이 나는 것이리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제인이 교황청에 바친 연구서에는 마드리안이 콕 짚은 아카란과 오프리제의 내용이 ‘없었다’라는 사실이었다.

제인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앞에 마주한 여자와 눈을 맞추었다.

마드리안 데 칸.

그녀는 페브리아인 모두가 신처럼 따르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제인의 눈에는 그저 간교하기 이를 데 없는 뱀과 같았다.

“……하긴, 오프리제는 약학을 다루는 자들도 잘 모르는 희귀한 맹독이니까요.”

제인이 키득거리며 이어서 말했다.

“오프리제의 중독 현상이 발현된 몸을 보이는 순간 시민들의 입에서는 ‘저 병신 새끼 좀 봐!’라는 말이 절로 나올 테고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마저 비아냥거렸다.

경외한다는 듯한 가증스러운 얼굴로, 손뼉 치는 시늉까지 덤으로 얹어서.

“어쩜, 탁월한 안목이세요.”

정돈되지 않은 무례함 투성이었다.

곁에 앉아있던 추기경 말렌의 눈짓에 성기사가 단숨에 제인의 목덜미에 검을 겨누었다.

“예를 갖춰라.”

네 목에 검을 겨누는 날이 오늘이었구나.

말렌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더.”

자리에서 일어난 제인이 성기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그렇게 검날이 종이 한 장 차이로 제인의 목을 그을 듯 말 듯 했다.

이윽고, 제인의 손이 검을 쥔 성기사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

당장 자신의 목을 베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더 들어오셔도 되는데.”

말갛게 웃으며.

“부디 제게 평온을.”

“!”

“이, 무슨……!”

캉!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제인이 제 목덜미 쪽으로 검을 당기려는 찰나였다.

날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성기사의 검이 반으로 뚝 부러졌다.

말렌과 성기사가 놀란 얼굴로 검을 쥔 마드리안을 바라보았다.

검을 뻗은 마드리안이 빙그레 웃으며 서 있었다.

사위가 고요해졌다.

마드리안은 쥐고 있던 검을 테이블 바닥에 놓인 검집 안에 집어넣고 자리에 앉았다.

“……얼마나 다행인가요.”

그리고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말했다.

“나이가 들어도 실력이 녹슬지 않으니 말입니다.”

제인은 여러 생각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으며 마드리안을 응시했다.

마드리안은 시동을 불러서 제인의 목에 얕지 않게 그어진 생채기를 지혈하도록 했다.

소임을 끝낸 시동이 물러나자 마드리안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웃음을 잃지 않고 있는 제인을 가볍게 훑었다.

“궁정 소속 명예 연구원, 제인.”

“네.”

“소문을 들으니 맹독성 식물과라는 전에 없던 연구 분야까지 만들게 한 인재라지.”

“네.”

오만한 대답이었다.

마드리안이 입꼬리를 살짝 띄웠다.

“오늘 부른 이유를 확실히 알려주어야 할 것 같구나.”

이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의 능력으로 이 나라 페브리아를 위해.”

불길한 직감이 제인의 심기를 건드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마드리안의 마침표에 지금껏 휘둘리지 않으려 단단히 물고 있던 제인의 미소가 맥없이 뒤틀려버렸다.

“이 나라의 종교, 샤를 위해 일해다오.”

“!”

샤.

교황이 페브리아의 근간이자 본질인 샤를 거론했다는 건 한낱 궁정 연구원으로서 어떠한 방식으로도 빠져나갈 틈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제인이 물었다.

“……이 나라와 종교를 위해 일해 달라는 그 말씀을 외면한다면 저는 무엇이 될 예정인가요?”

마드리안은 자신이 어떻게 될지가 아닌, 무엇이 될지 묻는 제인이 꽤 기특했다. 곁에 두고 시간을 들이면 좋은 칼로 다듬어지리라.

침묵이 이어졌다.

그 고요함을 깨트린 것은 제인이었다.

“……반역자, 그리고 이단인가요.”

“영리하구나.”

제인의 선택지는 결국 두 가지였다.

페브리아의 반역자이자 샤의 이단이 되느냐, 사람들을 기만하는 사기꾼이 되느냐.

그때, 마드리안이 다시 한번 더 종을 울렸다.

그러자 곧바로 시동이 두꺼운 서류 한 묶음을 내려놓고 나갔다.

마드리안이 서류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이건…….”

서류를 확인한 제인은 하마터면 깔깔깔, 웃을 뻔했다.

와, 놀랍네. 아카란과 오프리제를 어떻게 아시는가 했더니.

……언제 기밀 연구서까지 훔치신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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