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8)화 (8/168)

08.

앙디스 땅에 풍토병이 지나간 후, 제인이 남은 환자들까지 보고 페브리아로 돌아왔을 땐 넉 달 정도가 지나 있었다.

그녀는 복귀 즉시 궁정 제1 약제사보다 높은 직책을 수여 받았다.

이름하여 명예 연구원.

그 와중에 개 같은 황제가 직책을 수여하면서도 ‘서기관만 없었다면 약조 따윈 나 몰라라 했을 텐데!’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제인이 보고 싶었던 얼굴은 이미 지천으로 깔려있었다.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하얗게 질린 동료 약제사들을 쓱 훑어본 제인은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짜릿했다.

아아.

내가 저 낯짝을 보기 위해서 악착같이 수석 약제사가 됐었지.

그런데 오늘에서야…… 보게 되네?

제인은 궁정 화가를 불러서 망연자실한 동료들을 한 명 한 명 정성스럽게 그려달라고 하고 싶었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그림이었기에 자꾸만 새어 나오는 키득거림을 애써 참아야 했다.

모든 게 만족스러웠으나 딱 한 가지가 아쉬웠다.

하임의 부재.

제인이 페브리아로 돌아오기 전에 복귀했다던 하임은 오자마자 또 다른 전쟁터로 출장을 간 상황이었다.

하임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제인의 상념이 낮게 가라앉을 때였다.

“……이로써 수여식을 마친다.”

황제의 마지막 언사를 끝으로 명예 연구원 수여식이 마무리되었다. 단 한 번의 박수 소리도 없이 조용히 끝난 수여식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었다.

제인은 배정받은 단독 연구실에 들어가 수여 받은 상패를 정리했다.

양쪽 창문을 열자, 가을 냄새가 훅 밀려들어 왔다. 그녀는 흰 벽에 기대어 섰다. 깨끗한 연구실은 한 눈에도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제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너무 넓은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일해야지, 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궁정 숲으로 향했다.

자신의 앞날을 송두리째 바꿀 무언가가 그곳에 있는 줄도 모르고.

* * *

붉은 해거름이 궁정 숲을 바지런하게 물들여 가는 동안, 제인은 나무 밑동에 쪼그려 앉아서 약초를 캐고 있었다.

바구니가 어느 정도 찼을 때쯤 뻐근한 듯 목을 뒤로 젖혔다. 주렁주렁 맺힌 무화과가 눈에 들어왔다.

제인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었다.

그녀는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다가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를 주워서 힘껏 던졌다. 돌멩이는 야무지게 비켜 갔다.

제인은 몇 번 더 돌멩이를 던졌다.

발을 헛디디며 던진 돌멩이에 무화과 한 알이 굴러떨어졌다. 무화과를 소매에 문지르고 한 입 베어 먹으려 할 때였다.

어디선가 느껴지는 시선에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새……?

눈길이 닿은 곳에는 덫에 걸린 검은 새 한 마리가 수풀에 누워 있었다.

일순간 제인의 눈살이 묘하게 찌푸려졌다.

그녀는 옆에 있던 약초 바구니를 힐끗 보다가 땅에 머물러 있던 발을 떼어 검은 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제인이 검은 새 옆에 앉았다.

그리고 새의 발목에 걸린 덫을 유심히 살폈다. 낡은 덫이었다. 손대면 툭 하고 풀어질 정도로 오래된 덫.

덫에 머물렀던 제인의 시선이 검은 새의 푸른 눈동자에 닿았다.

“……죽은 게 아니었잖아?”

새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건가 싶었다. 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특히 눈동자.

죽음에 이르렀다고 하기엔 너무나 반짝였다.

청명한 하늘을, 눈 부신 햇살을 머금은 호수를, 이 세상 모든 푸름을 신의 권능으로 만들어낸 듯한 보석 같은 눈동자였다.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듯한.

하지만 시선 아래에 쓰러져있는 새는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종류의 새였다.

제인은 꺼림칙한 기시감을 무시하고 쥐고 있던 무화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은은한 달큼함이 씹혔다.

그러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나아지기는커녕, 불쾌하기 이를 데 없이 나빠졌다.

불쾌함의 원인은 검은 새였다.

제인은 검은 새를 보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렸다.

그늘.

거미줄에 걸린 벌레.

앙상한 겨울나무.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에는 나름의 이유가 존재했다.

그늘이 있는 곳에는 빛이 있었고, 거미줄에 걸린 벌레에게는 살고자 하는 본능이 있었으며, 앙상한 겨울나무에는 봄의 새싹이 돋으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검은 새에게서는 그런 걸 찾아볼 수가 없었다.

덫에 걸린 주제에 인간이 다가와도 꿈쩍도 안 하는 새의 모습에서 살고자 하는 본능이나 몸부림이, 발버둥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도.

그리고 그 행태가 제인의 무언가를 긁어댔다.

“……있잖아. 그렇게 죽은 듯이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구해주지 않을걸.”

이어서 낡은 덫을 응시했다.

“아무도.”

그사이 산등선으로 넘어가는 붉은 석양이 손톱만 해져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인이 무화과를 한 입 더 먹었다. 무화과는 달콤했으나 불쾌감은 여전했다.

“발버둥 쳐, 구해주고 싶게.”

그녀의 입가에 돌연 자조적인 웃음이 걸렸다.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목 끝까지 차오르는 불쾌함에 속이 미식 거릴 때였다.

검은 새는 꼭 말귀를 알아들은 것처럼 커다란 날개를 펼쳐서 낮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물론, 발버둥이라 하기에는 절박함이 조금도 묻어나지 않은 날갯짓이었지만.

제인은 웃는 듯 한숨을 쉬며 낡아빠진 덫을 풀어주었다.

바로 그때였다.

붉은 석양이 산골짜기 사이로 완벽하게 사라졌다. 동시에 검은 새 주변에 푸른 빛이 발하더니 순식간에 아름다운 사내로 변했다.

“!”

제인은 석고처럼 굳어버렸다.

너무 놀라서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코끝에 맴도는 청량한 박하 향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러이 헤집었다.

“안녕, 제인.”

“너…….”

놀랍게도 그 사내는 제인이 아는 얼굴이었다.

앙디스에서 만났던 사악한 미혹의 사내, 루.

그 사내가 어째서 페브리아 궁정 숲에, 그것도 새의 모습으로, 심지어 새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바뀌었는지 제인의 머리로는 도무지 따라갈 수 없었다.

쿵쿵쿵.

제인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 입술을 더 굳게 다물었다.

그가 말했다.

“나를 검은 새로 만들어 준 사막의 마법사에게 고마워해야겠군.”

잿빛 눈동자를 집요하게 바라보던 루가 제인의 마른 손목을 잡고 반쯤 남은 무화과를 제멋대로 베어 물었다.

“널 다시 만나게 해주었으니.”

제인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꿈인가? 이게 꿈이라면…….

해가 진 탓에 온기가 식은 바람이 불어왔다.

사내의 흰 피부와 상반되는 검은 머리카락이 밤의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나부끼는 바람을 따라 이내 그의 검은색 로브 사이가 벌어졌다. 매끄러운 턱선과 목울대를 지나자 곡선을 이루는 근육이 도드라졌다.

그녀의 눈이 닿는 그의 모든 것이 한 폭의 명화와 다름없었다.

“제인, 잘 들어.”

……쿵쿵쿵.

이토록 울리는 심장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저 각자의 귓가에 고동 소리만이 어지럽게 울릴 뿐.

“숲의 새들을 네게 보낼게. 그 새들을 따라서 내게로 와. 그리고…….”

루가 무화과보다 더 달콤한 목소리를 덧대었다.

“그게 나의 발버둥이라는 걸 기억해.”

제인은 끊어질 듯 말 듯 하는 생각을 이어 나갔다.

만약 이게 꿈이라면 적어도 악몽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하지만 그건 꿈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동시에 악몽보다 더 진득한 운명이었다.

그녀의 앞날을 천천히, 송두리째 뒤바꿔 놓을 빌어먹을 운명.

* * *

그로부터 1년 후…….

개인 연구실에서 연구서를 작성 중이던 제인이 앞에 서 있는 교황청 소속 전령을 몹시 심드렁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다 턱을 괴고는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책상 앞에 있는 명패를 성의 없이 가리키며 물었다.

“뭘로 보이세요, 이게?”

전령은 글을 읽을 줄 알았다.

명패에 적힌 글자를 묻는 게 아니더라도 그녀의 직책이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근 1년간 이 망할 연구실에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렸으니.

“……그거야.”

제인이 명패를 재차 가리키며 전령의 말을 톡 잘랐다.

“개새끼?”

“…….”

제인의 짧은 욕지거리에 전령은 눈앞이 아득해져 갔다.

오늘도 어김없이 지랄하는구나.

교황청 소속 9급 전령 1년 차인 청년은 먹고사는 일이 녹록지 않았다.

하지만 앞에 있는 또래 여자에게 교황님의 말을 전할 때보다 더 더럽고 치사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제인이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명패를 잘 못 제작했나 봐. 매달 교황청에 개처럼 연구서를 가져다 바치고 있으니. 안 그래요? 심지어 난 궁정 소속인데.”

전령은 아낙시오니아를 찬양하는 절실한 모태 샤였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고귀하고 숭고한 페브리아의 신, 아낙시오니아를 찾지 않았다.

“제 명패에 개새끼라고 적힌 거, 맞죠?”

그는 지랄 같은 연구원의 물음에 불지옥에서 웃고 있는 악마를 상상했다.

마귀는 뭐하나?

이 여자 안 잡아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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