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신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조금씩 떼어서 저와 닮은 존재를 만들었다.
그게 인간이었다.
“이것 보렴. 아름답지 않니?”
신의 물음에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아는 인간은 신에 대한 감사와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로, 벽화로, 시로, 때로는 춤으로 대답했다.
신은 무척이나 감탄했다. 신이 생각지도 못한 또 다른 아름다움을 인간이 창조했으므로.
신은 인간을 몹시 사랑하게 되었다.
인간도 신을 사랑했다.
세상 어디에나 빛이 닿았고, 사랑이 있었으며, 웃음이 깃들었다. 매 순간 채워지는 아름다움은 곧 축복이 되어 천계의 신의 사자, ‘르젤’을 탄생시켰다.
인간의 축복으로 태어난 르젤들은 신과 함께 세상을 보살폈다.
빛으로 충만한 나날들이었다.
인간이 아름다움 이면에 있던 추악함을 알기 전까지는.
인간이 추악함을 알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반짝거리는 생명에 부패하는 죽음이 따라오는 것처럼.
추악함은 어둡고 음침했으며, 더러웠고, 냄새 또한 고약했다. 아름다움이 축복으로 이어졌듯, 추악함은 죄악이 되었다.
그 죄악이 뭉쳐져 태어난 존재가 바로 ‘데시안’이었다.
인간을 타락시켜야만 생을 존속할 수 있는 데시안들은 본능적으로 인간을 유혹하여 지옥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세상은 죄악으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번졌고, 행복이 있는 곳에 불행이 따라왔다. 웃음이 있는 곳에 눈물 자국이 생겨났으며, 안식이 자리한 곳에 고통이 범람했다.
인간들은 절망 속에서 기도했다.
원망과 애원이 뒤섞인 절규가 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신이라는 존재는 인간과 세상을 창조했음에도 전지전능하지 않았다.
사랑을 주관하는 르젤, 그레데엘므가 말했다.
“인간을 없애야 합니다.”
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데엘므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인간은 세상의 균열입니다. 균열에 혼돈이 깨어나 지옥문이 열린 겁니다. 그러니 신이시여, 인간을 없애야 합니다.”
신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인간에게 자신이 아는 것들을 하나씩 알려주었다. 마침내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영원’이라는 관념 하나만 남았을 때였다.
신이 그레데엘므에게 말했다.
“너희를 통해 인간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들은 다 가르쳐 주었구나. 마지막으로 영원을 가르쳐 주려고 한단다.”
그레데엘므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인간은 영원을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레데엘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영원함을 알기에는 인간의 삶은 찰나와 같았다.
하지만 신은 빙그레 웃었다.
그레데엘므는 신의 미소를 보자마자 그가 무엇이 되려 하는지 알았다. 신을 사랑하는 그레데엘므의 눈동자에 마른 슬픔이 비쳤다.
신이 다정하게 말했다.
“내가 영원한 존재가 되면 된단다.”
영원한 존재.
그것은 영원히 침묵하는 존재가 되겠다는 말이었다.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면서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영원이자 동시에 죽음이었다.
그렇게 신은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인간에게 영원을 가르치고 침묵하는 존재가 되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헤아릴 수 없이 무수히 많은 인간이 태어나고 죽음에 이르던 어느 날, 아름다운 데시안 하나가 눈을 떴다.
현혹의 데시안, 루.
그의 눈짓 하나, 손짓 한 번에 인간들은 속수무책으로 현혹되곤 했다.
그런데도 루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기쁨은 고사하고 현혹의 힘을 사용할수록 몸 어딘가 텅 비어 있는 느낌을 받곤 했다.
공허라는 감각이었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은 공허는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공허한 이유도, 공허를 채우는 방법도 알 수 없었던 그는 조금이라도 텅 빈 느낌을 채우려 닥치는 대로 인간들을 현혹해갔다.
그로 인해 어느 정도 균형 잡혀있던 명계와 천계의 질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현혹의 데시안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린 인간들을 구원하고자 천계의 르젤들이 세상에 내려왔다.
하지만 아무도 르젤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되려 돌을 던지며 쫓아내기 바빴다.
결국, 르젤 하나가 루를 추종하던 인간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 일을 계기로 신의 제1 대리자가 찾아왔다.
윤기 나는 연보라색 머리카락에 백금빛 눈동자를 가진 르젤, 그레데엘므였다.
“천계에서는 너를 봉인하기로 결정했단다.”
루가 웃었다.
“언제까지?”
“주어진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것은 쾌락과 향락, 나태와 권태, 탐미를 추구하는 현혹의 데시안에게 그리 가혹한 형벌은 아니었다.
가혹한 건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공허였다.
루가 대답했다.
“뭐, 뜻대로.”
“뜻대로?”
루를 조용히 살펴보던 그레데엘므가 말문을 열었다.
“천계의 대리자인 나, 그레데엘므의 뜻대로 너에게 기회를 주고 싶구나.”
“기회라. 구미가 당겨야 할 텐데.”
그레데엘므가 입가에 매끄러운 미소를 그렸다.
“아름답고도 공허한 데시안아. 무엇이 너를 공허하게 하는지 알고 있니?”
“…….”
“현혹.”
“…….”
“네가 공허한 이유는 인간을 현혹하기 때문이란다. 데시안에게 현혹된 인간은 꼭두각시 인형처럼 무의미한 껍데기에 불과하지.”
“…….”
“그러니 아무리 너를 따르고, 원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여도 공허할 수밖에 없는 거란다.”
현혹하기 때문에.
루는 태어나길 현혹하는 데시안이었다.
생을 지속하는 본능과 존재적 이유가 공허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니, 그렇다면 살아있는 삶 자체가 형벌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존재하는 이유가 우스워서 소리 내어 웃자, 그레데엘므가 엷은 미소를 띠었다.
“아름답고도 공허한 데시안아. 무엇이 네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는지 나 그레데엘므는 알고 있단다.”
“그게 무엇이지?”
“맹목적인 사랑.”
그것은 루가 탐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지금껏 자신이 가진 현혹의 힘으로 인간들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쉽게 얻어 내었으므로.
그레데엘므가 말을 이었다.
“네게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인간의 맹목적인 사랑만이 네 공허함을 채울 수 있단다.”
“…….”
“아름답고도 공허한 데시안아. 궁금하지 않니? 네가 현혹하지 않고도 인간으로부터 맹목적인 사랑을 얻을 수 있을지. 그래서 네 공허가 채워질 수 있을지.”
루의 심장이 꿈틀거렸다.
형벌보다 가혹한 공허함을 채울 수만 있다면…….
맹목적인 사랑을 탐내기를, 손에 쥐기를, 갈구하기를 바랐다.
“정말로, 공허를 채울 수 있나?”
“그렇단다.”
“현혹하지 않은 맹목적인 사랑이라는 건…… 아름다운가?”
“아름답고말고.”
루는 무척 기뻤다.
아름다운 것으로 공허를 채울 수 있다니.
이 세상에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니.
그때, 그레데엘므가 심연과도 같은 루의 눈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내 조그맣게 웃었다.
“아름답고 공허한 데시안아. 너는 쾌락과 향락, 나태와 권태, 그리고 탐미를 쫓는 데시안이구나. 그중에서도 제일은 아마도.”
“탐미.”
“그렇지. 탐미를 무엇보다 탐닉하는 데시안아. 맹목적인 사랑의 아름다움에 대해 알려줄 테니 내 질문에 답해보렴.”
그레데엘므가 속삭이듯이 물었다.
“내 것이 아닐 때 가장 아름다운 게 무엇일까?”
“…….”
“비극.”
“…….”
“세상 모든 시와 노래, 이야기가 존재하는 서사에는 아름다운 비극이 가득하지. 맹목적인 사랑처럼. 그러니 아름답고 공허한 데시안아!”
그레데엘므의 백금빛 눈동자에 광기 어린 이채가 희끗거렸다.
“나와 함께 아름다운 비극을 써보자꾸나.”
그 순간 루는 생각했다.
마주 보고 서 있는 르젤은 천계가 아닌 지옥에 있어야 할 존재라고.
언젠가, 등 뒤에 숨겨진 날개가 부서지든 찢기든 지옥으로 떨어질 존재.
“신에게 사랑받는 인간이.”
그레데엘므는 기쁨을 절제하듯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목숨을 다하여 데시안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비극을 부디 내게 보여주렴. 그러면 나 그레데엘므, 내 운명을 걸고 네게 주어진 형벌을 거두어 주마.”
“당신의 운명을 걸고서라도 아름다운 비극을 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일말의 침묵 후, 그레데엘므가 답했다.
“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 거짓이 이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신을 잃고 미쳐버린 한 르젤이 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느 데시안의 심장에 작은 희망을 심은 이야기.
작은 희망은 신이 틔운 새싹처럼 무럭무럭 자라서 심장을 잠식했다. 그리고 심장의 주인은 미쳐버렸다.
아주 조용히.
오직, 인간의 맹목적인 사랑 하나만을 바라며.
* * *
라트올은 여전히 얼빠진 얼굴로 루를 가만히 보았다.
평소에는 눈길도 주지 않던 모조품이었다.
그런 게 떡하니 박힌 싸구려 머리끈을 만지작거리며 즐거운 듯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기가 들어서 몸을 살짝 떨었다.
잔소리고 뭐고 그대로 욕실에서 나가려다가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루는 라트올에게 주인님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목숨까지 바치고 남았을, 하나뿐인 주인님.
뒤를 돌자 욕조에 머리를 기대고 나른하게 눈을 감고 있는 주인님이 시야에 들어왔다.
“……루. 미치셔도 좋은데요.”
진심이었다.
루가 제정신이 아닌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앙디스인들에 대한 미련은 버리세요. 아시잖아요. 그들은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는 걸요.”
정적이 견고하게 쌓여갔다.
“다른 인간을 찾으셔야 해요. 당신을 위해서…….”
라트올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무거운 입술을 다시 떼었다.
“……을요.”
무척이나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가시처럼 심장을 찔러서 듣지 않을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그럼 쉬세요.”
라트올이 욕실을 나가자 적막감이 더욱 선명해졌다.
루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도 알고 있었다.
고작 백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뿐이거늘, 앙디스에는 그가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쿠드칸 역시도 그 시대의 인물은 아니었으니.
쿠드칸 마호프 드누.
그는 자신의 내력을 희미하게나마 가지고 있는 앙디스인이자, 리만 르프손 드누와 똑 닮은 그의 자손이었다.
그러나 쿠드칸이고 리만이고 간에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앙디스에는 내력을 가진 자를 죽이려고 찾아갔던 것이 아니었다.
핑계였다.
그곳에 들릴 작은 핑계.
그런데도 쿠드칸을 보는 순간 죽이고 싶다는 욕구가 동했던 건, 리만과 똑같은 낯짝으로 편안하게 잠든 모습 때문이었다.
나는 여전히 형벌과도 같은 공허에 갇혀있는데, 편안히.
-다른 인간을 찾으셔야 해요.
문득, 귓가에 남겨진 라트올의 목소리가 적막을 무너뜨렸다.
-당신을 위해서 죽어 줄, 단 한 사람을요.
루가 느슨한 웃음을 지었다.
아름다운 미소가 어설프게 빛나는 싸구려 모조품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