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6)화 (6/168)

06.

옴푸푸스가 종식되자마자 앙디스에 주둔하고 있던 페브리아의 교황청 인력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쿠드칸이 입술을 비틀며 소리 없이 웃었다.

드디어 가는구나……!

앓던 이를 뺀 기분이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미친 광신도들과 지옥 같은 풍토병이 휩쓸고 가버린 후 앙디스 땅에 남겨진 건 대체로 참담한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진절머리 나게 넘쳐나는 환자들부터 산짐승에게 먹힌 채 썩어가던 시체 무덤, 흉물스러울 정도로 거대한 아낙시오니아 조각상, 정화 작업이 한창인 여러 우물.

그리고…….

“장로님. 왼쪽 다리 좀 들어보시라고요. 왼쪽요, 왼쪽.”

싹수 노란 궁정 약제사, 제인까지.

쿠드칸은 수첩을 든 손으로 왼쪽 무릎을 툭툭 쳐대는 제인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그녀를 대하기가 퍽 껄끄러운 그였기에 아무 말없이 왼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왼쪽도 잘 올라가네요. 아쉽게.”

“…….”

“앞으로는 약만 잘 챙겨 드시면 되시겠어요. 진료는 오늘로 끝이에요. 이제 얼굴 마주할 일 없을 테니 그거 하나는 좋네요. 나가보세요.”

“…….”

“뭐 하세요? 안 나가시고.”

“……약제사 선생.”

그대는 왜 이렇게 싹수가 없소?

쿠드칸의 목울대에 걸린 물음은 그것이었으나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쿠드칸은 아니꼬운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제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이번에도 낙오된 거요?”

낙오.

쿠드칸의 말에 무심하게 웃던 제인이 말렌이 남기고 간 말을 떠올렸다.

-훌륭하신 수석 약제사께서는 약제를 싣고 온 배를 타고 오는 게 어울리지 않겠나? 안타깝게도 자네를 위한 자리가 내 배에 없기도 하고.

노골적으로 자신을 두고 가겠다는 가시 돋친 말이었다.

하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말렌의 말대로 말리마호니를 싣고 온 배를 타고 돌아가면 되었으니.

그렇게 교황청의 배가 떠났고, 제인은 또다시 낙오되었다.

그녀는 오히려 이 상황이 흡족했다.

좋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하자. 그래서 이 일에 교황청의 누구도 숟가락 하나 얹지 못하게 하자.

제인이 약제를 싣고 왔던 배를 타고 곧바로 돌아갈 수 있었음에도 앙디스에 조금 더 머물기를 택한 이유였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뭐, 비슷해요.”

쿠드칸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그럼, 수고해 주시오.”

“네, 네. 알아서 할게요. 수고든 뭐든.”

“…….”

“가세요.”

쿠드칸이 문고리를 잡으며 한스럽게 생각했다.

그때 뺨을 내려쳤어야 했는데. 그때가 기회였거늘!

“참! 그런데요.”

주름진 손이 문고리를 꽉 잡고 당기려 할 때였다.

제인이 물었다.

“정말 해적들 짓이라고 생각하세요?”

말리마호니 약제를 한가득 실은 배가 앙디스로 들어왔던 날, 제인은 앙디스인들 앞에서 옴푸푸스의 원인을 밝혔다.

우물에 대해서까지.

그녀가 독이 퍼진 경위에 대해서 입을 떼려던 찰나, 페브리아의 추기경 말렌 렌드만이 앞으로 나서서 그녀의 말을 잘라냈다.

-해적의 소행이 분명하다.

해적!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렌을 향해 적대감을 내비쳤던 앙디스인들이 크게 술렁거렸다.

예로부터 앙디스는 해적의 침입이 잦은 섬나라였다.

특히 6개월 전에 들이닥쳤던 해적은 앙디스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떠났다.

말렌은 그들이 다음에 침입할 때 더 수월하게 노략질하기 위해서, 혹은 앙디스 섬을 노략질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서 우물에 독을 풀어 놓았을 거라고 말했다.

그 시기와 옴푸푸스가 발병한 시기가 너무나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기에 자리에 있던 앙디스인들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동요했다.

-정말 해적들 짓이라고 생각하세요?

제인의 질문을 곱씹던 쿠드칸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렇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문고리를 잡은 손아귀만큼은 힘이 꽉 들어갔다. 쿠드칸이 진료실에 있는 제인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러나 해적 놈들에게 배후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달칵.

문 닫히는 소리에 적막이 따라 들어 왔다.

홀로 남은 잿빛 눈동자가 고요한 창밖을 응시했다.

해적.

그건 제인이 조금도 가늠하지 못한 수였다.

그녀는 그날, ‘우물 안에 독을 퍼트린 날벌레들이 있었던 것 같다.’ 정도로만 두루뭉술하게 설명하려 했다.

심증만 있는 교황청의 계략을 낱낱이 밝히기에는 위험했으니까.

그런데 해적이라니.

해적은 페브리아가 오래전부터 경계해오던 주적이었다. 바다와 가까운 속국마다 보호라는 이름 아래 성기사 군부대를 보냈었던 명분이기도 했고.

그런 해적의 동향이, 페브리아의 계략을 덮어주었다…….

교황청의 계획이 어디서부터 진행된 건지 더는 가늠할 수 없었다. 아니, 가늠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제인은 그날 소박한 목표를 하나 가슴 깊이 새겼다. 페브리아로 돌아가면 교황청은 물론, 교황인 마드리안 데 칸과 마주치지도, 얽히지도 말자고.

절대로.

* * *

루의 거처에는 그를 주인님으로 모시는 하급 악마, 메 데시안인 라트올과 데코토라 불리는 유령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앙디스에서 돌아온 루는 그림자 하나 비추지 않고 쏙 숨어버린 데코토들의 행동에 미간을 슬쩍 좁혔다.

데코토들이 숨는 경우는 딱 두 가지였다.

인간이 있을 때, 혹은 라트올이 무지막지하게 잔소리할 낌새를 보일 때.

그리고 지금은…….

“앙디스에 가셨었다면서요.”

안타깝게도 후자였다.

라트올은 무테안경을 위로 들어 올리며 심상치 않은 시선으로 루를 쳐다보았다.

루는 겉옷을 벗으며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자연스레 겉옷을 받아든 라트올이 욕실로 향하는 루를 따라가며 묻지도 않은 말을 이어갔다.

“드호아망 마탑에 마석을 납품하러 갔다가 호엘리반에게 들었어요. 그 녀석 말로는 죽이러 가는 얼굴이 아니라서 아쉬웠다고 하던데요.”

루는 욕조에 물을 받으며 걸치고 있던 나머지 옷가지를 툭툭 탈의했다.

“라트올은 좋겠어.”

그는 느긋한 투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걸 쉽게 감상할 수 있으니.”

라트올은 진심으로 ‘이렇게나 아름다운’이 무얼 말하는지 모르고 싶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너무나 잘 알았다.

라트올이 경멸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친 소리 하지 마시고요.”

나신이 된 루가 가볍게 웃으며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푸른 눈을 감고 머리를 뒤로 기대었다.

무감한 얼굴에 땅거미 같은 어둑한 감정들이 넘실거렸다.

마치 욕조를 채운 물처럼.

그 모습을 본 라트올이 입술을 딱 다물었다.

루가 집을 비운 사이, 할 말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그였으나 분위기를 보아하니 지금은 적절한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았다.

라트올이 들릴 듯 말 듯,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앙디스는 왜 가셔서…….

“너무 한숨 쉬지 마, 라트올.”

루가 말을 이었다.

“행패를 조금 부리긴 했는데, 앙디스인들의 기억은 지우고 왔으니 아무 일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야.”

“행패를…….”

부리긴 부리셨구나.

라트올이 목구멍을 간지럽히는 뒷말을 삼키고 바닥에 떨어진 루의 젖은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챙겨서 돌아서려 할 때였다.

툭.

라트올이 품에 안고 있던 루의 로브 안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이게 뭐예요?”

자세히 보니 머리끈이었다.

쪼그려 앉은 라트올이 떨어진 머리끈을 줍고 이리저리 살피자, 눈앞에 물기가 뚝뚝 흐르는 루의 오른손이 펼쳐졌다.

“이리 줘.”

라트올은 머리끈을 순순히 주면서도 의아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했다.

“페브리아도 다녀오셨어요?”

“……페브리아?”

“머리끈 원단이요, 페브리아에서만 판매되는 원단이거든요.”

라트올이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것보다 머리끈에 달린 장식이요, 모조품이잖아요? 그게 왜…….”

당신 옷가지 안에서 나오죠?

루는 보석이든 마석이든 모조품이라고 하면 그 누구보다 학을 떼고 치를 떨었다. 그런데 그게 루의 품에서 나오다니.

말을 마저 잇지 못한 라트올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때 루가 얼핏 웃었다.

“누가 줬어. 삼백 온트나 주고 샀다고 하면서.”

“……그거를요?”

준다고 받았다고요? 당신이, 그거를요?

라트올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심지어 삼 페렐츠도 안 할 것 같은데…….”

“그러니까.”

분명 얼핏, 이라고 생각했던 루의 웃음이 계속 이어졌다.

라트올이 멍하게 그를 응시했다.

“우습지 않나?”

즐거워 마지않아 보이는 주인님의 웃음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너무 우스워서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던데.”

라트올의 얼굴이 짐짓 심각해졌다. 루의 주머니에서 모조품이 나왔을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다. 마석과 보석을 다루는 루는 모조품을 오물처럼 여겼으니까.

그런데 주머니에서 나온 것도 모자라서 그걸 보고 웃는다?

합리적인 물음표가 라트올의 머릿속을 빠르게 채워갔다.

미친 건가? 그런데…… 여기서 더 미칠 수가 있나?

루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데.

아주 오래전.

신을 잃고 미쳐버린 천계의 어느 르젤과 맹약을 맺었을 때부터.

* * *

태초의 신이 새싹 하나를 틔웠다.

새싹은 자라서 수풀이, 나무가, 울창한 숲이 되었다. 숲에 이끼가 생기면서 곤충과 동물이 생겨났다.

그렇게 신이 틔운 새싹 하나가 싱그러운 생명과 아름다운 세상을 그려냈다.

하지만 신은 기쁘지 않았다.

안타까웠다.

빛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지는 찬란한 풍경을, 생명이 있는 그 무엇도 ‘아름다움’이라 표현하지 않았으므로.

신이 홀로 질문했다.

“이것 보렴. 아름답지 않니?”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기에 신이 홀로 대답했다.

“아름답구나.”

신은 처음으로 외로움을 느꼈다. 쓸쓸함이 무엇인지 알았다. 모순적이게도 아름다움이 신을 공허하게 만들었다.

신이 생각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 생각은 작은 돌멩이가 되어 신에게 파동을 일으켰다. 파동의 진폭은 날이 갈수록 커졌고, 욕심이라는 파도를 일으켰다.

신이 결심했다.

아름다움을 아는 존재를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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