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제인은 고작 옴푸푸스의 원인을 밝히러 이 땅에 온 게 아니었다. 더 나아가 종식까지 시켜버릴 작정이었다.
그래야만 역사적인 직책에 앉게 되었을 때 껍데기만 약제사인 귀족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않을 테니.
그런데 앙디스의 장로가 옴푸푸스에 걸린 채 죽는다?
그럴 수는 없지.
그러니 네가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낫게 하는 건 어떠냐는 물음이 그녀로서는 당연했다.
그때였다.
흉포할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가 웃었다.
무척 나른하고도 황홀하게.
“이유는.”
이유?
제인은 남자의 물음이 조금 황당했다.
그녀는 저와 환자들의 폐를 터트릴 뻔한 이상한 마법 같은 걸 쓰는 남자가 어째서 앙디스의 장로를 죽이려 했는지 딱히 알고 싶지 않았다.
공적인 이유라면 앙디스를 적대시하는 나라는 널리고 널렸고, 사적인 이유라면 앞뒤 다른 음흉한 노인네가 원한 살 만한 짓을 했을 것이다.
제인이 말했다.
“나는 그 쪽에게 살인 이유를 안 물어봤는데, 내가 살리려는 이유를 굳이 말해야 할까?”
“해.”
“…….”
그녀는 눈을 도로록 굴렸다.
문득, 폐가 터질 것 같은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순순히 대답했다.
“……살리는 중이었으니까?”
“또.”
“……살려서 진급하고 싶거든.”
“그리고. 또.”
“…….”
“또 있지 않나?”
제인의 잿빛 눈동자가 고요히 가라앉았다.
남자가 그녀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녀의 기분이 불쾌하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더럽게.
하지만 대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남자의 손에 있었다.
“안 좋아해.”
달빛을 반사하는 잘 벼려진 단검 한 자루.
“내 눈앞에서 누가 죽는 거.”
남자가 재차 웃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황홀하기만 했던 미소가 이제는 사악하고 위험천만하게 느껴졌다.
그가 물었다.
“내가 널 위해 죽이지 않으면, 너는 날 위해 뭘 해줄 수 있지?”
“그건 모르겠는데.”
제인이 어깨를 살짝 으쓱거렸다.
“남 좋은 일은 잘 안 해봐서.”
사실이었다.
옴푸푸스의 원인을 밝히고 종식시키려는 것도, 쿠드칸이 이 남자의 손에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려는 것도, 사실은 전부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자신의 진급을 위한 일이었고, 자신이 살려야 하는 환자였으며, 자신이 죽음을 목도하지 않기 위함이었으니.
바로 그때, 남자가 허리를 숙이고 제인과 눈을 맞추었다.
“대답을 예쁘게 해야 할 텐데.”
“…….”
“안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눈앞에서 누가 죽는 거.”
제인은 어쩐지 그와 자신의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졌다.
고양이 앞에 생쥐, 딱 그 꼴이었다.
어쩐지 화가 나기도 했다.
자기 뺨을 치려던 노인네 때문에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한다니.
그냥 신경 쓰지 말까.
어차피 살인자는 저자고, 방조는…….
……나구나.
제인이 약간 망연한 얼굴로 고민하는가 싶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남자가 기꺼이 기다려 주겠다는 듯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제인은 다시 홀린 것처럼 멍하게 그를 보다가 이게 아니지, 라고 생각하며 재차 옆으로 시선을 흘렸다.
“노인네 목숨을 가지고 나랑 장난…… 아니, 거래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녀는 손끝을 높게 올려 묶은 머리로 가져갔다.
일순, 풍성한 은빛 머리카락이 올올이 달빛을 머금으며 풀어졌다.
남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찰나의 순간이었는데, 몹시 느리게 보였다.
“물건으로도 괜찮다면 이건 어때?”
남자의 푸른 시선이 여자의 손바닥으로 향했다.
“이 보석 장식, 사파이어야. 삼백 온트 정도 주고 샀어.”
제인이 제법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물건은 파란 장식이 들어간 머리끈이었다.
“……삼백 온트?”
남자는 그 말이 조금 웃겼다.
제인이 손에 든 머리끈 장식은 사파이어가 아니었고, 삼백 온트나 주고 살 건 더더욱 아니었다.
삼 페릴츠도 안 할 것 같은데. 누군가가 저 여자를 제대로 등쳐먹었군.
아니면 날 등쳐먹으려 하는 건가.
“응. 삼백 온트.”
“…….”
그러기엔 여자의 눈동자에는 한 톨의 거짓도 없었다.
조금 있었으면 할 정도로.
남자의 시선이 여전히 여자의 손 위에 머물렀다.
그녀의 손은 다른 피부에 비해서 유난히 거칠어 보였다. 곳곳에 크고 작은 상처가 있었고, 손끝은 심하게 부르터 있었다.
제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거래, 할래?”
은은한 달빛이 가짜 보석을 비추었다.
가짜 보석.
그것만큼 남자가 형편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없었다.
그가 고개를 살짝 틀었다.
백발의 노인.
애초에 죽이려는 마음으로 온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평온하게 잠든 얼굴을 보는 순간, 조금 마음이 동했다.
죽여 버릴까, 하고.
사소한 변덕이었다.
변덕은 또 다른 변심이 되기 쉬웠다.
그때였다.
“……그렇지? 사람 목숨값으로 삼백 온트는 좀 아니지?”
방금까지의 의기양양함은 어디로 가고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죽어 있었다.
삼백 온트면 절대로 적은 돈은 아니었으나 사람의 목숨값으로 치기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 만한 액수였다.
물론 쿠드칸에게는 삼 페릴츠도 아까웠지만.
그렇게 제인이 슬그머니 손바닥을 쥐고 내리려 하는 찰나.
남자가 느슨하게 웃으며 그녀가 손에 쥐려던 머리끈을 잡았다.
“그러지.”
“……어?”
“이 인간에게 적당한 목숨값이라.”
남자는 삼 페렐츠도 안 할 것 같은 가짜 보석을 삼백 온트나 주고 산 여자에게, 그녀가 속았다는 걸 알려주는 대신 함께 속아 주기로 했다.
이 보잘것없는 모조품이 사파이어라고.
삼백 온트나 하는 사파이어.
적어도, 이 자리에서 삼 페렐츠 값보다는 많이 웃었으므로.
그는 이어서 단검을 검집에 넣고 침상에 가지런히 올려 두었다.
방금까지 그걸로 쿠드칸을 죽이려고 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곱고 예쁘게.
남자는 그대로 제인을 스쳐 지나갔다.
깨끗하고 좋은 향이 났다.
제인이 무의식적으로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남자가 그녀를 돌아보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
남자는 그게 자신의 이름이라고 말해주었다.
제인도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가 혼잣말처럼 “제인.”하고 짧게 부르다가 웃었다.
사악한 미혹이었다.
* * *
옴푸푸스가 종식되었다.
페브리아의 추기경, 말렌 렌드만은 그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꿈이라고.
꿈이어야 한다고.
옴푸푸스를 은밀하게 실행한 게 무려 반년 전이었다.
거기에 적절한 증상과 시기를 조절하기 위해서 진행했던 연구 기간까지 전부 합치면 1년이 넘는 계획이었다.
계획은 완벽했다.
그리고 모든 게 계획에 맞춰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딱 한 가지, 작은 숙제만 제외하고.
페브리아의 교황은 무엇보다도 교황청의 이미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평판이나 소문 같은 것들을 허투루 여기지 않았다.
그랬기에 옴푸푸스를 계획하면서 골칫덩이 속국을 대하는 대제국의 면모와 교황청 소속 약제사들의 위상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까지 고려했다.
그 결과가 궁정 측에 보낸 약제사 협력 요청 건이었다.
아량은 베풀되 무능함은 보이지 않는 것.
결론적으로 전자의 아량은 협력 요청을 한 교황청에서 가져가고 후자의 무능함은 궁정에 밀어 넣는 게 교황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 목적이 불러온 결과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궁정에서 말리마호니를 한가득 실은 배를 보내왔다니! 그런 전갈을 보낸 적도, 받은 적도 없는데!
말렌은 그날의 일을 잊을 수 없었다.
-저, 그게…… 궁정 제1 약제사, 하임 바트르센의 이름으로 왔다고 합니다.
-뭐……?
-하임 바트르센이 궁정에 앙디스로 말리마호니를 보내 달라 요청했고, 궁정에서 승인했다고 합니다.
말렌은 기가 막혔다.
황제가 승인해서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건 승인이라고 불릴 만한 일이 아니었다.
페브리아의 황제에게 승인이란 아무 생각 없이 잡은 도장을, 아무 생각 없이 서류에 ‘콩’ 찍는 일 정도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였다.
덜떨어진 황제가 서류를 눈으로 보지 않고, 콧구멍으로 보기로 유명했으므로.
누굴 탓하랴.
황족 중에서 그런 놈으로 고르고 골라 황좌에 앉힌 게 본인이거늘.
거기에다 말리마호니를 실은 커다란 배 앞에서 팔을 휘휘 휘두르면서 깔깔거리고 즐거워하던 궁정 소속 약제사.
문득 자신을 발견하고는 품위 있는 귀족 아가씨 흉내를 내며 인사하던 그 계집의 꼬락서니까지.
말렌은 눈만 깜빡여도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그럼에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종식이라니.
옴푸푸스가 종식되다니.
그 모든 게 페브리아의 교황 마드리안 데 칸의 계획이었다. 그녀의 계획은 지금껏 어그러진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고작 그 계집애가 일을 그르친 것이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말렌이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으드득, 갈 때였다.
“추기경님, 교황님께서 찾으십니다.”
“…….”
“추기경님?”
“……죽었다고 전해라.”
“……예?”
“아니, 지금 간다. 가…….”
옴푸푸스 풍토병이 종식된 후, 페브리아 수도로 돌아온 말렌은 자리에서 비실비실 일어나며 날카로운 다짐을 했다.
내 언젠가, 그 계집의 목에 검을 겨누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