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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4)화 (4/168)

04.

작위적인 의도의 민낯은 끔찍했다.

독초 리렐트.

리렐트의 해독작용으로 쓰이는 약초 말리마호니.

두 식물 모두 악 건조 지역에서만 자랐다. 즉,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인 앙디스에서는 자랄 수 없는 독초와 약초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앙디스인들은 독의 중독 현상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리라.

더불어 약초를 구할 수도 없었겠지.

제인은 기분이 더러웠다.

옴푸푸스의 원인을 찾았는데도 쉽사리 움직이기 어려운 탓이었다.

현재 앙디스에 주둔하고 있는 페브리아인들은 그녀를 제외하고는 모두 교황청 소속이었다. 그녀의 짐작대로라면 옴푸푸스는 교황청에서 계획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므로, 궁정에 전령을 보낼 방법이…… 없다.

제인은 침상에 벌러덩 누웠다.

앙디스에 주둔하는 그 어떤 페브리아인도 제인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궁정에 보내는 전령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리라.

궁정에서 전령을 받기도 전에 문서가 파쇄될 확률이 높았다.

잘 도착한다고 하더라도 교황에게 빌빌거리기 바쁜 황제가 신나서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제인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탄식이 터져 나왔다.

황제가 옴푸푸스 풍토병과 교황청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동태 눈으로 허수아비처럼 굴어도 황제 자리에서 잘만 호의호식하는 그였다. 교황청과 관련된 일이라면 개처럼 냄새를 맡고 바짝 엎드린 처세 덕분이었다.

기라고 하기 전에 기었고, 구르라고 하기 전에 굴렀다.

결국, 황제는 이 모든 정황을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을 앙디스로 보내기 위해 대충 직위를 약조한 것이다.

개새끼.

빌어먹을 새끼.

한참 동안 황제를 욕하던 제인이 불현듯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전령을 궁정으로 보내는 게 아니라면?

제인은 다급하게 달력 날짜를 확인하면서 궁정 소속 제1 약제사, 하임의 일정을 떠올렸다. 그리고 곧바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임은 종종 일정보다 빠르게 복귀하곤 했으나 그런 변수까지 고려하더라도 여유가 있었다.

전령이 그에게 가는 시간까지 어림잡아도 꽤 넉넉할 정도로.

제인은 즉시 하임에게 전령을 보냈다.

고아인 저를 거둬준 하임에게 안부를 묻는 것처럼 꾸며서, 무사히.

그의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제인은 페브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교황청 소속 기사들과 추기경 및 사제들의 동태를 눈이 빠지도록 관찰했다.

잠도 안 자고, 밤낮으로.

사실은 안 잔 게 아니라, 못 잤던 것이지만…….

숙면을 떠나서 그녀가 감시 아닌 감시를 했던 이유는 분명했다.

이 정도로 자연스럽게 독을 퍼트리는 일은 흔치 않았다.

분명 공통된 접점이 있을 터.

그리고 한 가지 접점을 발견했다.

물이었다.

앙디스에 주둔하는 페브리아인들은 앙디스의 우물가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특히 사제들.

뒷간까지 따라가서 전도한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앙디스인들을 쫓아다녔으나 어쩐 일인지 우물가 근처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다.

성기사들은 또 어떻고.

세상 어떤 금은보화도 성수가 있다는 물 창고보다 더 귀중하게 지키지는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아낙시오니아의 수호를 받는 우리에게 교황청에서 성수를 보내주셨으니, 오직 성수만을 마시도록.

말렌 역시 성수가 떨어질 틈을 주지 않고 페브리아인들에게 넉넉히 공급했다.

그토록 꼴사나워하는 제인에게까지도.

그녀는 말렌이 자신에게 거칠게 던진 물통을 빤히 보며 생각했다.

한 번 시험해 볼까.

그녀는 일부러 물통의 물을 쏟아버렸다. 그리고 보란 듯이 우물가로 가서 물을 떠서 마셨다. 그러면서 말렌의 사소한 행동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놀란 표정.

다급하게 다가오려던 몸짓.

새하얗게 질리는 얼굴.

그 순간 제인은 교황청에서 우물에 독을 푼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결국, 옴푸푸스 풍토병의 원인과 병이 퍼지게 된 경로까지 모조리 찾아낸 제인의 입가엔 웃음꽃이 만발했다.

그날 저녁.

쿠드칸이 그녀를 찾아오기 전까지는.

* * *

“약제사 선생. 그게 사실이오? 내가…….”

제인이 쿠드칸을 보지도 않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네. 옴푸푸스 증상 맞아요.”

“…….”

“병실로 가세요. 침상이 남아 있으니까.”

쿠드칸의 시선이 자기 다리로 향했다.

낮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다리였다. 그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다가 힘이 쭉 빠지면서 털썩 주저앉았다. 걸을 수가 없었다.

마치 다리가 사라진 듯한 공포스러운 감각이었다.

십여 분이 지났을 때쯤, 조금씩 다리의 감각이 돌아왔다. 하지만 평소보다 수 배는 더 후들거렸다.

쿠드칸은 할 말을 잃은 듯 멍한 얼굴로 현실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 그럴 리…….”

그러다 갑자기 제인의 멱살을 잡으며 욕지거리를 퍼부어 댔다.

“종식은 무슨 종식! 내가 옴푸푸스에 걸릴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한 년이! 개 같은 년! 지옥에 떨어져 죽을 년!”

놀랍게도 그 순간마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철저히 계산적인 인간.

제인은 멱살을 잡힌 채 실소했다.

“이럴 줄 알았지.”

“뭐……? 그럼 처음부터 네년은 내가 옴푸푸스에 걸릴 줄 알았다는 것이냐? 그걸 알면서도 지금까지 요망하게 입을 닫고 있었……!”

“아니, 그것보다.”

쿠드칸은 저도 모르게 손에서 힘이 탁 풀릴 뻔했다.

무엇이 그리도 재미난 지 그녀가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파들거리면서 달려들 인간이라는 거, 진작부터 알아봤다고.”

“…….”

“내가 감이 좋거든.”

“…….”

“그거 알아요? 장로님, 옴푸푸스는 한참 전부터 걸려있었을 거예요. 이제야 증상이 발현된 것일 뿐. 그러니까 애먼 사람 멱살 그만 잡고.”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쿠드칸이 손찌검하기 위해 팔을 높이 들어 올린 순간, 제인이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푹.

따끔거리는 통증을 느낀 쿠드칸이 제인의 뺨을 내려치려던 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기 팔뚝에 꽂힌 굵은 바늘을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좀 주무세요.”

제인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눈앞이 순식간에 핑 돌았다.

“시끄러우니까.”

쿠당탕!

요란하게 쓰러진 쿠드칸을 병실로 옮겨 놓았다. 독한 수면제를 바른 바늘로 찔렀으니 적어도 스무 시간 이상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스무 시간…….

그 와중에 쿠드칸이 부러웠다.

제인은 언제나 수면 부족과 수면 장애, 악몽, 몽유병과 같은 것에 시달리고 있었다.

수면제는 이미 치사량을 넘을 정도로 내성이 생겨서 들어 먹질 않았다.

수면과 관련된 모든 게 그녀에게 고문이었다.

그녀가 불면증의 고문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고통뿐이었다. 약제사인 제인이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방법은 간단했다.

독을 복용하는 것.

그러니 내성이 생긴 게 비단 수면제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앙디스의 우물에 독이 풀어져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마실 수 있었던 이유였다.

제인이 얼핏 자조적으로 웃었다.

* * *

루가 앙디스로 찾아온 건 깊은 밤이었다.

자신의 내력이 남아 있는 앙디스인을 찾는 건 무척 쉬운 일이었다. 생과 죽음 사이 경계의 냄새가 짙게 퍼져있지만 않았다면.

종종 역병이 도는 곳에서나 맡을 법한 냄새가 앙디스 수도 전역에 퍼져있었다.

역병.

앙디스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루는 역병의 냄새가 진하게 모여있는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잠든 채 다닥다닥 누워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쭉 훑어보던 그는 가장 구석에 박히다시피 누워있는 백발의 노인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

이름이 뭐였더라…….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아, 하고 즐거운 감탄사를 터트렸다.

쿠드칸.

쿠드칸 마호프 드누.

루의 시선이 비스듬하게 떨어졌다.

평온하게 잠든 모습을 보자니 얕은 불쾌감이 일었다. 자연스럽게 주변 공기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잠들어 있던 자들이 저마다 컥, 소리를 내며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여기저기서 목이 졸리는 듯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쿠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죽음을 앞둔 공포의 냄새로 가득 채워졌다.

“커흑……!”

쿠드칸 역시 죽을 것처럼 사지를 뒤틀며 괴로워했다.

루는 그런 그의 곁에 앉아 느긋하게 창밖을 구경했다.

지루하군.

그사이 자기의 모가지를 부여잡으며 끅끅 몸부림치던 쿠드칸의 품에서 단검이 툭 떨어졌다.

루가 나직이 웃었다.

약한 것들은 항상 이렇다.

눈매와 혓바닥으로 날을 세우거나, 이렇게 날이 선 것을 품에 지니고 다닌다.

루가 잡은 단검의 검집이 침상 위로 소리 없이 떨어졌을 때였다.

다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여자였다.

높게 올려묶은 은색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곧장 아래로 푹 꺼졌다. 여자는 밀도 높은 공기에 숨을 헐떡거리며 바닥을 짚은 채 얼굴을 들지 못했다.

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에게서 그 어떤 공포도 느껴지지 않아서.

“……꽤 재미있는 게 굴러들어 왔군.”

가까이 다가가 목덜미에 코를 대 보아도 두려움이 맡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의 분노랄까.

짜증도 조금.

루는 즐거운 듯 몸을 물렸다.

나머지 인간들의 의식을 잃게 한 뒤 마력을 낮췄다.

루가 쿠드칸이 쓰러진 침상에 다시 걸터앉는 순간, 여자는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들었다.

잿빛.

여자의 눈동자 색이었다.

루는 여자를 샅샅이 살폈다. 머리카락 한 올도 놓치지 않을 것처럼.

“앙디스인이 아닌가 보군.”

여자는 쿠드칸을 슬쩍 보다가 여전히 단검을 쥐고 있는 그와 눈을 맞췄다.

“……죽이려고 했나 봐?”

어째서인지 루는 퍽 즐거웠다.

겁 없는 강아지 한 마리와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말리고 싶다면, 그러도록 해. 네 목숨을 대신 가져갈 수도 있으니.”

여자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아니,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루에게 생각지도 못한 것을 주었다.

“죽이려던 거였으면.”

예를 들어 작은 웃음.

그리고 호기심.

“일단 내가 먼저 낫게 하고, 그다음에 죽이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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