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죽음까지 독점하려는 악마에게 (3)화 (3/168)

03.

쿠드칸의 빛바랜 시선이 궁정 약제사와 교황청 추기경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거리가 있어서 그들의 대화 내용이 들리진 않았으나 작당 모의를 하는 게 분명했다.

-일곱.

쿠드칸은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지팡이에 힘이 뿌득, 들어가곤 했다.

-사망자는 그게 끝일 거예요.

잠깐이나마 페브리아인의 말을 믿는 게 아니었다.

기대하는 게 아니었다.

특히 저 낙오한 궁정 약제사.

사람을 기만하는 재주가 아주 탁월한 계집애였다.

처음에는 그녀가 신중하게 환자들의 증상을 살펴보았기에 먼저 가버린 약제사들과는 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진료라고 하기에는 무색하게 대충 둘러보다가 병실을 나서기 바빴다.

한번은 쿠드칸이 쫓아가서 부글거리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그대는 먼저 가버린 페브리아의 궁정 약제사들과 무엇이 다르오? 정녕 여기 옴푸푸스에 걸려서 산 송장이 되어가는 자들이 안 보이시오?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진 서늘한 음영을 마주한 것은.

-……분명, 마지막이라고 했죠.

-…….

-여덟은 없다고.

제인은 이내 쿠드칸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갔다. 빛바랜 그의 눈동자를 빤히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손 씻으러 안 가세요?

-……손?

-아까 옴푸푸스 환자의 손, 잠깐 스치셨잖아요. 그럴 때마다 손 씻으러 가시는 것 같던데. 제가 분명히 그런 식으로 옮는 병이 아니라고 했는데도.

-…….

-더럽다는 듯이.

-…….

-참 이상해요. 가만 보면 장로님께서는 환자들 곁에 가는 일이 없는데 어째서 앙디스인들은 장로님께서 보살펴 주신다고 하는지.

쿠드칸은 제인의 표정이 너무나 낯설었다.

-뭐에 홀린 것처럼.

이날 이때껏 그 누구도 자신을 그 계집애처럼 우습게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페브리아의 추기경도 저에게는 예의를 차리거늘!

그날부로 쿠드칸은 제인을 붙잡지 않았다.

다만 멀리서 그녀의 동태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시간 대부분을 밖에서 보냈다. 그리곤 무언가를 관찰하듯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 끝은 주로 페브리아의 교황청 인력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그들의 작당이 시작된 듯싶었다.

그때였다.

제인이 말렌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 올리는 걸 본 것은.

지팡이를 잡은 쿠드칸의 손에 재차 힘이 들어갔다.

“장로님, 뭘 보고 계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네. 그것보다, 드호아망으로 간 자들은 어떻게 되었나?”

“지금쯤 도착해서 호엘리반을 만나고 있을 겁니다.”

쿠드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다려 봄 세나.”

호엘리반.

그 이름 하나에 지금껏 빛이 바랬던 쿠드칸의 탁한 눈동자가 이채를 번뜩이며 시뻘건 탐욕을 드러냈다.

“그가 전쟁을 일으키기를.”

날카롭게 날이 선 목소리와 함께.

“앙디스를 위하여.”

* * *

바로 그 시각.

드호아망의 호화로운 마탑 꼭대기에 자리한 한 사내가 몹시 심각한 살인 충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호엘리반, 네가 다른 앙디스인들이 마법사가 될 기회를 전부 빼앗아 갔다는 사실을 잊지 마.”

“맞아. 네가 드래곤의 피를 독차지했잖아!”

“너만 아니었으면 우리도 너만큼 강한 마법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애처로울 정도로 짖네.

죽여 달라고.

호엘리반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서랍에서 마법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앞에서 왈왈거리는 앙디스인들을 무시하며 유려한 글씨를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프시오. 나 살인해도 될까?]

그러자 양피지 위로 빠르게 회신이 나타났다.

[안 됩니다.]

[많이는 아니고 한 서넛 정도.]

[안 됩니다.]

[프시오. 내 앞에서 정신 나간 개들이 짖고 있어.]

[같이 짖으세요.]

호엘리반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지끈거리는 이마에 주먹을 슬며시 갖다 대었다.

참자. 지금까지 잘 참아 왔잖아.

참지 않으면 저녁에 있을 프시오와의 데이트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호엘리반이 안정을 되찾기 위해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 내쉬길 반복할 때였다.

앙디스인들은 눈물겨운 그의 노력을 보란 듯이 처참하게 때려 부쉈다.

전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개소리로.

“우리가 네게 희생한 거야.”

……희생?

앙디스인들의 망발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니까 앙디스를 위한 책임과 의무를 다해, 호엘리반.”

“전쟁을 일으켜. 앙디스를 페브리아로부터 구해내.”

“우리가 희생한 네 힘으로.”

호엘리반이 웃었다.

너희가 내게 무얼 했다고?

희생?

호엘리반은 아주 잠깐 자신과 엇비슷한 연배의 앙디스인들이 목숨을 걸 정도로 농담 따먹기를 좋아하는 건지 궁금했다.

희생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건, 적어도 이 자리에서만큼은 호엘리반 외엔 없었다.

아홉 살.

무려 아홉 살부터 열세 살까지 그는 앙디스를 위해 희생했다. 보통 사람은 한 모금만 삼켜도 죽어 나가는 드래곤의 피를 매년 마셔가며.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들의 희생으로 호엘리반이 강한 마법사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그의 상식으로는 목숨을 건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호엘리반의 시선이 책상 위에 머물렀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같이 짖으세요.]

심성만큼이나 반듯한 프시오의 글씨체였다.

……미치겠네.

호엘리반은 바닥이 드러나고 있는 인내심을 긁어모았다.

그리고 소박한 관용을 베풀며 물었다.

“드래곤의 피, 지금이라도 구해줘?”

깜찍한 궤변이 돌아왔다.

“앙디스가 독립하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어.”

“…….”

이후부터는 도돌이표였다.

그들은 앵무새처럼 자신들이 희생했다고 주장하며 호엘리반에게 책임과 의무를 강요했다.

호엘리반은 폭발하는 살인 충동을 억누르기가 무척 고되었기에 경비병들을 불러서 그들을 쫓아내 버렸다.

살려서.

살려서 내보냈다…….

호엘리반은 어느 때보다도 자기 자신이 기특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평온해진 집무실에서 깊은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할 때였다.

“재미있는 경우군.”

커튼 뒤 난간에 누워있던 누군가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호엘리반은 그곳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개 같은 경우겠죠.”

그의 말에 킬킬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탁, 하고 책을 덮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림자가 느긋한 몸짓으로 창문을 열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겹겹이 덧대어진 커튼이 살랑거리다가 완전히 걷혔다.

이윽고 아름다운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데시안.

그는 악마라 불리는 존재였다.

“재미있는 경우가 맞아.”

집무실 한가운데를 느릿하게 걷던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시집을 아랫입술에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흥미롭다는 듯이.

“흔적이 묻어 있어. 내 내력의 흔적이, 아주 희미하게.”

호엘리반이 목 끝까지 채웠던 셔츠 단추를 풀며 물었다.

“……제게 영향을 미칠 정도인가요?”

“전혀. 티끌도.”

“관심 있으시면 찾아서 죽이는 게 어떠세요?”

호엘리반은 이어서 반 박자 늦게 데시안의 이름을 불렀다.

“루.”

벽에 기대어 선 루가 조용히 들고 있던 시집을 펼쳤다.

정적 속에서 시집이 넘어가는 종이 소리만이 선명하게 울렸다.

딱히 죽일 생각은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약간의 흥미는 있었다.

“……인사나 하러 가 볼까.”

사락.

얇은 종이 소리에 달콤하고도 나른한 웃음이 더해졌다.

“오랜만에.”

* * *

지옥이다.

처음 앙디스의 수도를 둘러보자마자 느꼈던 제인의 감상이었다.

이곳에서 처음 발병한 옴푸푸스 풍토병은 적은 사망률에도 불구하고 악마의 병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불렸다.

이유는 다양했으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역시나 병의 증세였다.

온몸의 근육이 천천히 죽어가는 것.

종국에는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산 송장처럼 불구가 되어버렸다.

이 병이 앙디스에 불러온 결과는 끔찍했다.

산 송장 더미.

산이고 들이고 차마 죽지 못하는 송장들로 가득 찰 정도였다. 송장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어머니였으며, 자식이었고, 형제자매였다.

살아있어도 죽은 것과 다름없는.

끔찍한 시체 아닌 시체.

죽지 않았으니 땅에 묻거나 바다에 빠뜨리지도 못했다.

살아있는 자들은 살인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병균과 다름없었기에 집에 두기에는 두렵다는 이유로 그런 식으로 처리되어 갔다.

그 지옥 속에서 페브리아인들은 거대한 아낙시오니아의 조각상을 만들었고, 전도하러 다녔다.

-신 아낙시오니아를 믿으라.

-믿음이 있는 자만이 고통과 질병에서 구원되리라!

……지옥이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지옥.

재차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는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6개월 전부터 옴푸푸스가 발병했고, 3개월 전부터 교황청 인력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제인이 앙디스에 와보니 페브리아인들은 거짓말처럼 단 한 명도 병에 걸리지 않은 것이었다.

단 한 명도.

작위적인 의도가 없는 이상, 확률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인은 곧바로 환자들의 상태를 다시 점검했다.

근육이 죽어가는 병.

그건 병이 아니라 리렐트라는 독의 중독 현상이었다.

리렐트.

제인이 너무나 잘 아는 독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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