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사망자는 그것으로 끝일 거예요.”
침묵이 이어졌다.
제인이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긴 했으나 움직이기 어려운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가 문고리를 잡고 방을 나서려 할 때였다.
쿠드칸이 물었다.
“이곳에 온 페브리아인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그대들의 신을 믿지 않아서라고 하던데,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시오?”
날이 서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언제든 날을 세울 수 있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앙디스.
옴푸푸스 풍토병으로 인해 3개월 전부터 페브리아 교황청 인력이 주둔하고 있는 속국이었다. 동시에 대제국 페브리아가 유일하게 미워하는 속국이기도 했다.
“무례한 질문이네요.”
고개만 슬쩍 돌린 제인이 쿠드칸의 깡마른 뒷모습에다 대고 말했다.
“그보다 먼저 신을 믿는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대 역시 페브리아인이지 않소.”
“장로님.”
그녀가 다소 성가시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이번에 진급할 거라서요. 그것도 궁정에서 유례없던 직책으로요.”
그러자 쿠드칸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뒤늦게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이 섬에 퍼진 옴푸푸스, 제가 종식할 거란 뜻이에요.”
매우 놀란 표정을 짓는 쿠드칸과는 달리 제인의 얼굴은 전과같이 무덤덤하기만 했다.
그녀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빙빙 돌려서 말하지 마세요. 장로님 말씀, 하나하나 해석해서 대답해 드릴 만큼 제가 한가하지 않아요.”
“…….”
“바쁘거든요.”
제인은 이어서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능청스레 마침표를 찍었다.
“아시다시피 미움받느라.”
쿠드칸이 주억거렸다. 그녀의 말에 전적으로 수긍한다는 듯이.
그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며 말했다.
“……환자들이 있는 병실로 안내하겠소.”
“그러시던가.”
그는 제인을 두고 먼저 가버린 그녀의 동료들을 조용히 이해했다.
* * *
페브리아의 추기경, 말렌 렌드만은 무언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는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니었다.
다만 성질이 가볍고 교활하며 간사했다.
그래서 자신에게 불리한 일은 뒤늦게라도 알아차리는 편이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잘잘못을 가려서 손톱만큼도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이 철칙이었다.
교황 마드리안의 명을 받고 앙디스에 주둔한 지 3개월째.
이곳에 있는 동안 그의 신경을 이토록 긁어 대는 존재는 결코 없었다.
“저 궁정 약제사 말이야.”
군용 막사 앞을 지키던 성기사 하나가 나직이 운을 떼었다.
막사 안에 말렌이 있는 줄도 모르고.
“확실해.”
말렌의 귀가 쫑긋거렸다.
자신이 은연중에 느끼고 있는 찝찝함을 영리한 성기사 하나가 눈치챈 건가, 하고 갸륵한 마음이 들려던 찰나.
“우리 중에서 누군가한테 반한 게 확실하다고.”
“개소리.”
개소리!
말렌이 속으로 역정을 내는 사이 성기사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개소리라니! 잘 생각해 봐라.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우리를 빤히 쳐다볼 이유가 없지 않냐? 안 그래?”
“……그런가?”
그런가는 또 무슨 그런가!
성기사라는 것들의 대화 꼬락서니 하고는!
그때였다.
이어지는 말에 사위가 조용해진 것은.
“그것도 매일매일. 잠도 안 자고.”
“…….”
매일매일. 잠도 안 자고.
그 말 만큼은 말렌도 부정하지 못했다.
제인은 정말이지 매일매일, 밤낮없이 교황청 소속 인력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으로 좇았다.
페브리아의 신 아낙시오니아의 거대한 석상을 제작하는 조각사들부터, 앙디스를 전도하는 사제들, 물 창고와 식량 창고를 지키는 성기사들까지.
그들이 무엇을 하든, 언제나 빤히.
아주 뚫어져라.
오죽했으면 앙디스의 장로 쿠드칸이 그녀를 쫓아 와서 한마디 할 정도일까.
-그대는 먼저 가버린 페브리아의 궁정 약제사들과 무엇이 다르오? 여기 옴푸푸스에 걸려서 산 송장이 되어가는 자들이 정녕 안 보이시오?
그때 제인이 무어라 말했고, 쿠드칸은 학을 떼는 얼굴로 가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교황청 소속 인력들을 지켜보았다.
꼭 해충 속을 관찰하듯.
지금처럼.
“……후. 어떡하지?”
막사 바깥에서 들려오는 설렘 가득한 목소리에 말렌은 속이 터졌다.
“저렇게 예쁜 여자가 나한테 홀딱 반했다니까 갑자기…… 심장이 뛴다.”
“……태세 전환이 너무 정직해서 할 말이 없네. 왜 너라고 생각하냐? 그리고 네 심장은 아까도 뛰었을 텐데?”
“어쩐지…… 계속 눈이 마주치더라니…….”
“내 말 듣고 있냐? 아깐 개소리라며.”
“어쩐지…….”
“…….”
“가서 말이라도 붙여 볼…….”
애석하게도 분홍빛으로 물든 사내의 말은 끝맺지도 못하고 공중으로 흩날리듯 사라져버렸다.
성기사들은 막사 안에서 말렌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 허둥거리며 경례했다.
“……쯧.”
말렌은 혀를 차며 그들 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물 창고로 가서 물통 하나를 거머쥐고는 맞은편 돌계단에 앉아있는 궁정 약제사에게로 갔다.
거슬려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예정대로라면 교황청의 협력 요청으로 이곳에 온 궁정 약제사들은 조용히 숨만 쉬다가 일주일 만에 돌아갔어야 했다.
다행히 궁정 약제사들은 제법 눈치가 있었다.
말렌이 어깨를 쥐며 ‘편히 머물다 가라’는 말로 살짝 압박만 줬을 뿐이거늘 무슨 의미인지 바로 알아챘다.
그렇게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돌아갔다.
모든 게 순리대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제인.
대체 그동안 어디에 처박혀 있었는지도 몰랐던 계집애 하나가 낙오된 것이었다. 앙디스는 페브리아에서 상당히 거리가 있는 섬이었다. 곧바로 돌려보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것도 잠시. 얼핏 생각해 보니 문제 될 것도 없어 보였다.
고작 계집애 하나.
있는 듯 없는 듯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밤낮으로 교황청 소속의 행적을 감시하면서 그의 심기를 잔뜩 긁어 놓는 것만 제외한다면.
“궁정 소속 약제사 제인.”
말렌의 부름에 제인의 입술이 달싹거리다가 곧바로 다물렸다.
그가 그녀에게 퍽, 소리 나도록 거칠게 물통을 집어 던진 덕분이었다.
“출중한 능력에 비해 품위와 교양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는 건 소문으로 익히 들었다만, 없어도 이만큼 없을 줄은 몰랐군.”
“…….”
“사람을 그렇게 쳐다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이날 이때껏 아무도 안 가르쳐 주던가? 그게 아니면.”
말렌이 한껏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비수 같은 말을 꽂았다.
“천애 고아라더니 티를 내야 속이 시원한 건가.”
제인이 자신의 품에 던져진 물병을 빤히 보다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추기경님.”
순간, 말렌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앞에 빠뜨리신 게 있는데요.”
그녀가 진심으로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로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석요. 수석 약제사요.”
방긋거리며.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그 수식어도 조만간 끝일 거라 웬만하면 많이 들어두려고요.”
말렌은 그녀의 태도를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가 어려웠다.
오만방자함을 넘어서 어딘가…….
그래.
어딘가 은은하게 미친 듯한 태도였다.
순식간에 말렌의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제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 없다는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물통 뚜껑을 열었다.
그러고는 말렌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물통 입구를 바닥으로 향하게 두었다.
꼴꼴꼴…….
“……지금, 이게.”
추기경, 말렌 렌드만.
그는 페브리아에서 교황 다음으로 권위를 가진 자였다.
“뭐 하는 짓인가……?”
그는 자신이 준 물통에서 물이 고의로 쏟아지고 있는 걸 눈앞에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물통 입구 끝에 맺힌 물방울이 처연하게 똑똑 떨어질 때까지도.
“아아, 모르셨구나.”
제인은 너무나 멀쩡해 보이는 손으로 물통을 성의 없이 바닥에 떨구었다.
“제가 품위와 교양은 없는데.”
그녀는 여전히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수전증은 있어서요.”
말렌은 그녀의 태도만이 아니라 자신의 태도를 정하는 데에도 곤욕스러움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녀의 머리채를 쥐어 잡고 싶었다. 폭언해대고 싶었다. 바닥에 쏟아낸 물통의 물 만큼 눈물을 흘리도록.
그러나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감히 자신이 준 물을 보란 듯이 쏟아내었는데, 겨우 그깟 일로 벌을 내린다면 도리어 교황청의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속상하네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실실거리던 계집애가 다시 무릎에 턱을 괴더니 얼핏 들으면 상심이 큰 듯한 투로 말했다.
“매번 꼴 보기 싫어 죽겠다는 얼굴로 꼬박꼬박 챙겨 주시는 교황청의 성수인데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다 쏟고 말았으니…….”
……미끄러져?
내 손도 어디 한번 네 머리 채로 미끄러져 봐?
말렌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제인이 은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목마른데.”
비소 섞인 말을 하면서.
말렌의 등허리에 소름이 쫙 끼쳤다.
다급하게 몸을 돌리자마자 그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제인이 근처에 있던 우물가로 가서 물을 긷는 시민에게 다가가 살갑게 굴고 있는 게 아닌가.
“물 좀 주시겠어요?”
“……!”
말렌은 머리가 아찔했다. 동시에 몸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제인을 말려야 했다.
필시 말려야 했으나 쩍 굳어버린 그가 발을 한 걸음 내딛기도 전이었다.
“시원하네요.”
제인의 한 모금이 더 빨랐다.
그녀는 말렌을 흘끗 보더니, 청동 물통에 담긴 물을 마저 꿀꺽꿀꺽 마셨다. 그 광경을 보고 말렌은 정말이지 현실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이건 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페브리아인이 앙디스의 우물물을 길어 마실 줄이야…….
물 창고에 샤의 성수가 차고 넘치거늘, 역병이 돌고 있는 앙디스의 우물물을……!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고, 목덜미엔 땀이 주룩 흘렀다.
이윽고 머릿속에서 경고의 목소리가 웽웽 들려왔다.
일이 잘 못 되었다고.
그것도 제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