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황제는 제인에게 약조했다.
속국인 앙디스 섬에 퍼진 옴푸푸스 풍토병의 원인을 밝히고 온다면 궁정 제1 약제사보다 더 높은, 유례없는 직책을 주겠노라고.
앙디스 섬에 온 제인은 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어려움 없이, 물 흐르듯.
하지만 위기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현듯 찾아오는 법.
제인이 환자들이 있던 병실에서 나와 뻐근한 목을 양쪽으로 기울이며 복도를 걸어갈 때였다.
멀어져가던 병실에서 쿠당탕,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
필시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였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다급하게 뛰어가 병실 문을 활짝 여는 순간, 제인은 눈앞이 까마득해지면서 털썩 주저앉았다.
숨…….
수, 숨이 안 쉬어져…….
기이할 만큼 숨 막히는 공기였다.
그녀는 바닥만 짚은 채 달뜬 호흡만 내쉬었다.
도무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여기저기서 컥, 컥 대는 소리만 들렸다.
주변을 둘러볼 수는 없어도 환자들 역시 목을 조르는 공기에 질식할 듯 괴로워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제인이 속으로 욕을 씹을 때였다.
“꽤 재미있는 게 굴러들어 왔군.”
낯선 저음이었다.
제인은 숨이 막히는 가운데 서늘하게 소름까지 끼쳐서 몸을 떨었다.
그때 느긋한 몸짓으로 다가온 누군가가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기울였다. 살결에 코끝이 닿을 듯 말 듯 했다.
“이렇게 벌벌 떠는 주제에, 공포가 맡아지지 않는 걸 보니…….”
이어서 포식자 특유의 여유로운, 한편으로는 언뜻 즐거움이 실린 목소리가 꽂혔다.
“내가 두렵지 않은가 본데.”
정체불명의 남자가 걸음을 뒤로 물렸다.
이내 사람들이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면서 숨통을 틀어막았던 공기가 한층 가벼워졌다.
마치, 제인에게 고개를 들라는 듯이.
제인은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가까스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
그러나 또다시 숨이 턱 막혔다.
검은 머리카락조차 밤의 파도를 닮은 남자는 실로 무자비하면서도 극한의 아름다움을 지닌 자였다.
특히, 푸른 눈.
온 세상의 푸름을 쏟아낸 듯한 눈동자는 나른하면서도 색기가 흘러넘쳐서 어떤 덫보다 훨씬 더 위험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위험한 건 그뿐이 아니었다.
남자는 의식을 잃고 침상에 쓰러진 앙디스의 장로, 쿠드칸 옆에 걸터앉아 있었다.
길고 우아한 손끝에 달빛을 받은 단검을 들고서.
퍼뜩 정신을 차린 제인이 상황을 파악하고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환자들이 여기저기 마구잡이로 쓰러져 있었다.
……이런, 미친.
조금 전만 해도 숨이 꼴깍 넘어갈 듯 헐떡거렸던 제인이었으나 지금은 욕이 절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녀에게 앙디스 환자들은 소중했다.
한 명 한 명이 약제사로서 더없이 높은 직책에 앉게 해줄 디딤돌과 다름없었으므로.
제인이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남자는 그녀의 존재를 파악하려는 듯 집요하게 살폈다.
그가 낮게 웃었다.
“앙디스인이 아닌가 보군.”
제인은 대답 대신 쓰러져 있는 쿠드칸을 보다가 다시금 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가 입술을 천천히 떨어뜨렸다.
“……죽이려고 했나 봐?”
옆으로 툭 떨어뜨린 그의 얼굴에 미소가 묻어났다.
“말리고 싶다면, 그러도록 해.”
얼핏 장난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던 웃음기는 삽시간에 사악한 미혹이 되었다.
“네 목숨을 대신 가져갈 수도 있으니.”
제인은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조금 전,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폐를 터트릴 듯 압박했던 공기도.
미치도록 아름다운…… 그것보다, 어딘가 미친 것 같은, 정체불명의 남자도.
하지만 그는 알았을까.
“아니.”
“…….”
“죽이려던 거였으면.”
어느새 그의 앞에서 잿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입꼬리를 당기고 있는 여자 역시 은근하게 돌아있다는 사실을.
“일단 내가 먼저 낫게 하고, 그다음에 죽이면 안 될까?”
생각지도 못한 제인의 한 마디에 남자가 재차 웃음을 흘렸다.
여유롭게.
자못 흥이 돋은 얼굴로.
본디 악마라 일컫는 데시안인 루와 페브리아의 궁정 수석 약제사 제인.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01.
페브리아력 776년.
페브리아의 교황, 마드리안 데 칸이 대대적인 종교 전쟁을 선포했다.
그녀가 일으킨 전쟁은 들불처럼 빠르게 번져나갔고, 17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단 한 번의 패전도 허락하지 않은 채.
전쟁의 연패는 페브리아를 강대국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나라의 권위는 완벽하게 교황청에 귀속되었다.
페브리아인 모두가 교황을 칭송하고 따랐다.
이를테면 신처럼.
바로 지금, 제인과 마주 앉아있는 허수아비 황제까지 전부.
“약제사 제인에게 출장을 명한다. 교황청으로부터 협력 요청이 왔으니 앙디스로 가서 옴푸푸스 풍토병의 원인을 밝히고 오라.”
“……수석이요.”
“…….”
황제의 얼굴에 일말의 피로감이 묻어났다.
짧게 한숨을 쉰 그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설렁설렁 내저으며 입술을 다시 떼었다.
“어, 그래그래. 수석이었지.”
그녀의 직책을 고쳐주고자.
“수석 약제사, 제인.”
황제가 고쳐 불렀는데도 제인은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말없이 갈라진 손톱 끝을 다듬었다.
그러다 일순,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런데 정말 옴푸푸스의 원인을 밝혀도 되는 거…… 맞아요, 폐하?”
그녀가 아닐 텐데, 라는 얼굴로 이어서 말했다.
“약제사든 기사든 뭐든지 궁정보다 훨씬 더 많은 인력을 보유한 교황청에서 협력 요청을 하는 경우는 대게 두 가지죠.”
오후 두 시가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황제는 제인이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만 슬슬 침실로 가서 눈을 좀 붙이고 싶었다. 조금 전에 점심 식사를 마쳤던 터라 식곤증이 몰려고 오기도 했고.
“하나는 전쟁이 끝난 곳마다 개처럼 쫓아가서 궂은일을 도맡아 수습해야 할 때.”
어젯밤 미녀들을 옆구리에 끼고 밤새도록 진탕 술을 퍼마신 탓이기도 했다.
“또 하나는 겉치레가 필요할 때죠.”
황제가 이마를 긁적거렸다.
낮잠이 아니면 뜨끈한 욕조에서 몸을 풀어도 좋겠다 싶었다.
“전 이번 출장 명령이 후자라고 보는데요.”
뜨끈한 욕조라…….
생각만으로도 노곤해지는 기분에 황제의 눈이 가물가물 감기려 할 때였다.
“폐하의 고견은 어떠신지요.”
“…….”
“폐하.”
동태 눈을 끔뻑거리던 황제는 대각선에 앉아있는 서기관을 힐끗 보다가 자세를 고쳐 앉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짐 또한 그리 생각한다.”
“……역시 그렇죠? 그러니까…….”
제법 진지하게 끄덕이던 제인이 돌연 고개를 기울이며 방긋 웃었다.
“안 갈래요.”
“그래그래, 안 가…… 뭐? 안 가? 어디를? 앙디스를?”
“네. 안 갈래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황제는 잠이 싹 달아나 버렸다.
이걸 어쩐다?
얘는 목을 치겠다고 하면 ‘시체는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실 건가요?’라고 물을 녀석인데.
그는 최대한 구슬려 볼 속셈으로 한껏 상체를 낮추고 그녀만 들을 수 있게 속닥거렸다.
“못 들었는가? 무려 교황님께서 직접 보내오신 협력 요청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자 제인이 가볍게 탄식했다.
……아아, 무려 교황님께서 직접 보내오셨구나.
그때 제인이 대화의 흐름에서 벗어난 질문을 했다.
“폐하, 수석 약제사가 진급하면 뭐가 되죠?”
황제가 상체를 일으키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제1 약제사이지 않은가.”
“그다음은요?”
“……없을걸?”
그러자 제인이 허리를 곧게 세우고 미소를 지었다.
잿빛 눈동자에 오만함을 가득 채우고서.
“제게 그다음을 주세요.”
현재 궁정 제1 약제사는 고아인 제인을 거두어준 하임 바르트센이었다. 그녀는 지금, 그 하임 바르트센 보다 더 높은 직책을 황제에게 요구한 참이었다.
그사이 황제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그도 알고 있었다. 교황청에서 궁정에 협력을 요청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하지만 안다고 해서 달라질 일은 없었다.
마드리안 데 칸.
그녀는 페브리아의 교황이었다.
그러니 고작 궁정 약제사 따위가 교황의 계획을 어찌할 수는 없을 터. 명령과도 같은 협력 요청에 응하는 게 먼저였다.
머리를 다 굴린 황제가 어깨를 으쓱였다.
“약속하마.”
그러더니 냉큼 품에서 교황청 문양이 비치는 서류를 꺼내어 주섬주섬 펼쳤다.
마치 심부름 쪽지라도 확인하듯이.
“그…… 몇 명이더라. 아. 여기 있구나.”
“…….”
“수석 약제사 한 명과…… 그래, 약제사 세 명을 더 데리고 오라고 하는구나.”
“……교황님께서는 이번 겉치레에 참 많은 머저, 아니고, 인력을 동원하시네요. 기간은 따로 안 정해져 있어요? 대충 얼마 만에 복귀하라는.”
황제가 크게 반색했다.
“그렇지, 그렇지. 그것도 여기 적혀 있었는데.”
“…….”
“찾았다. 일주일이라는구나.”
……일주일이라.
잠시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 제인이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충분해요.”
아주 자연스러울 것 같네요.
덧붙이는 제인의 말을, 황제는 놓쳐버렸다.
교황청에서 요청한 일도 해결되었겠다, 뜨끈한 욕조에 얼른 들어갈 요량으로 재빨리 제인을 물렸다.
“참.”
집무실을 나서려던 그녀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복귀는 제가 원할 때 할게요.”
황제는 말문이 턱 막혔다.
“자네 복귀는…….”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항상 엉망진창이지 않았던가?
이를테면 낙오라던가.
그러니 낙오나 되지 말게나, 라고 말하려다가 알아서 하겠지 하는 낙관 반, 귀찮음 반으로 입을 다물고 손을 휘휘 저었다.
“어, 그래그래. 이제 그만 가 보아라.”
며칠 후.
황제는 결국 익숙한 전갈을 전해 듣고야 마는데…….
“폐하, 약제사 한 명이 앙디스에서 낙오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이번에도? 라는 어조로 물었다.
“……제인?”
시종장이 이번에도, 라는 어조로 대답했다.
“……예, 폐하. 어떻게 할까요.”
“뭐, 본인 말마따나 알아서 복귀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앙디스에는 페브리아 교황청의 사제들과 성기사가 깔려 있으니…….”
하품하던 황제가 기지개를 쭉 켰다.
“아무것도 못 하고 돌아오겠지.”
* * *
“하아……!”
제인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잠에서 깨어났다.
악몽이라도 꾼 얼굴이었다.
이마에 반짝거리는 식은땀을 훔쳐내고는 떨리는 손으로 습관처럼 무언가를 찾으려 할 때였다.
“그대는 미움을 받고 있나 보오.”
“…….”
의식을 되찾자마자 듣기에는 썩 유쾌한 말이 아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앙디스의 장로, 쿠드칸이 점잖게 앉아있었다.
“함께 온 약제사들은 벌써 떠났소.”
“…….”
“그대를 남겨두고서.”
제인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평소에 출장을 자주 가는 편은 아니었지만, 낙오는 자주 되는 편이었다.
페브리아 안팎으로 오갈 때면 유난히 격한 몸살에 시달렸다. 그 사이 동료들은 그녀를 내팽개치고 가버릴 때가 많았었고.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오늘처럼.
제인은 벽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목과 어깨가 뻐근한지 고개를 좌우로 당기며 마른 입술을 떼었다.
“……미움받는 건.”
이어서 조소를 흘리며 느지막이 대답했다.
“앙디스도 마찬가지 아닌가. 페브리아는 물론, 모든 주변국에서도.”
쿠드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빛바랜 눈동자로 앙디스에 홀로 남겨진 앳된 약제사를 말없이 응시할 뿐이었다.
제인이 옆에 있던 짐가방에서 머리끈을 꺼내며 물었다.
“며칠이 지났죠?”
쿠드칸은 질문의 의미를 빠르게 눈치챘다.
“열흘이오.”
열흘.
제인이 사경을 헤맸던 시간이다. 정확히는 이틀을 꼬박 더 앓았다.
페브리아 밖에 나왔을 때부터 정신을 잃다시피 했었기에.
그녀가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은사 같은 긴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 묶으며 질문을 이어갔다.
“환자 수는요.”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사백스물둘이오.”
“사망자는요.”
“……오늘 아침 부로 일곱이 됐소.”
“그 머저리들은 뭘 했죠?”
“…….”
쿠드칸은 말을 골라내기가 쉽지 않았다.
제인이 가리킨 머저리들이 누군지 몰라서도, 그들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없어서도 아니었다.
단지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였다.
“페브리아에서 온 약제사들이 뭘 했는지 묻는 거라면…… 시간을 보내다가 갔소.”
제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망자 발생 주기가 꽤 일정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맞나요?”
“그렇소.”
“대략 얼마나 되죠?”
“……한 달하고도 일주일쯤 될 거요.”
어림잡아 5주.
제인이 조용히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잿빛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일곱.”
그러고는 쿠드칸의 빛바랜 눈을 마주 보며 씩 웃었다.
“사망자는 그것으로 끝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