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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나의 바다 (10/13)

9. 나의 바다

아무리 거절해도 이것만은 안 된다는 듯, 지아가 유연을 기차역에 데려다주었지만, 강릉 가는 기차에는 혼자 올랐다. 덜컹거리는 한낮의 기차 안 뽀얀 볕이 맴돌았다.

지아는 호텔에 디파짓 따로 해 두었으니 실컷 먹어야 한다고 했다. 걱정 말고 혼자 나가 먹기 신경 쓰이면 뭐든 다 룸서비스로 시키고, 치킨도 시켜 먹고, 회도 시켜 먹으라며. 잘 먹는 사람인 건 알고 있지만 기운 없을 땐 더 잘 먹어야 한다고, 유연에게 몇 번이고 잘 먹겠다는 말을 다짐시켰다.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전화하고, 지금 어디에 가는지는 자신만 알고 있으니… 언제라도 올 테니까 꼭 말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한 후에야 유연이 플랫폼 안으로 들어가는 걸 허락해 주었다.

결국 어떻게 해도 자신은 평생 사랑받으며 자라왔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유연을 얼마나 무르게 만들었나. 강준오의 얼굴이 차창 밖으로 떠오른다.

당신의 사랑을 닮은 집착에 나는 얼마나 휘청여 왔던가. 다시 눈을 감았다. 겨울의 공기는 여전히 건조했다. 출발하는 길, 오늘도 전화를 받지 않으면 저녁에 찾아가겠다는 준오의 메시지가 둥둥, 머릿속을 유영했다. 찾아가도 나는 없을 텐데.

전면이 투명하다 싶은 호텔이었다. 강릉에 언제 이렇게 좋은 호텔이 들어왔지…. 친구의 SNS에서 언뜻 봤던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며 체크인을 하고 위로 올라갔다. 룸에 들어서니 유명 체인이 아닌데도 체인 호텔보다 더 좋아 보였다.

이그제큐티브 룸 안은 들어서자마자 강릉 바다가 둥둥 떠 있듯 눈앞에 펼쳐졌고, 거실과 테라스가 별도로 딸려 있었다. 욕실의 흰색 욕조 밖으로 또 푸른 강원도의 바다가 두둥실 퍼져 있었다.

삼 일간 바다는 원 없이 보겠구나. 짐을 내려두고 테라스로 나가 겨울의 바다를 만났다. 바닷바람이 머리를 때리고, 얼굴을 강타해왔다. 와, 이거 혼나는 기분이네.

낮엔 산책을 하고, 주변의 예쁜 카페를 찾아다녔다. 오랜만에 SNS에 사진도 올리고 밤엔 새언니가 당부했던 룸서비스도 실컷 시켜 먹었다. 아아, 세상이 이렇게 평안했던가….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있자니 고민도 다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언제 이렇게 지쳐 있었지. 밤마다 울리는 준오의 전화에 지쳐 차단을 눌렀다. 꼴좋다 강준오, 나한테만 두 번째 차단당하네. 버석하게 지친 와중에도 어쩐지, 작게 고소한 기분도 들었다.

배달시킨 회와 창밖에 들리는 파도 소리로 혼자 투명한 와인에 취한 밤, 묻고 싶었다. 대체 왜 나와 사람들을 속이고 진실을 밝혀주지 않았냐고. 내가 얼마나 억울하고 힘들었는지 당신은 알고 있었을 것 아냐.

정말 단지, 기우가 나에게 접근하는 게 싫어서 그렇게까지 한 건지. 그런 게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그것 말고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가장 서러운 것은, 그렇게까지 자신에게 기우를 떨어뜨리고 싶어 하면서도, 강준오는 사귀자고 하지 않았다는 거다. 값비싼 보석을 목에 걸어 채워줄 때에도, 당신의 아래에 안겨 있었던 수없는 밤에도.

울리는 전화 한 통에 마음이 헤집어지고, 예쁜 바다를 보면 그에게 사진을 보내고 싶은데. 사실은 미치도록 울리는 집착적인 전화가 받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는데. 목소리가 듣고 싶어. 지금 당장 여기에 와 달라고 하고 싶어.

아무리 소중히 여겨져도 나는 강준오의 연애 상대도 결혼 상대도 될 수 없어서, 8년의 시간 동안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서 서러웠다. 몇 시간 전까지 안겨 있었던 게 무색하게도 다른 여자와 선을 보던 모습이 방심하면 툭툭 튀어 나타났다.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게 견디기 힘들어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소리 내어 울었다. 창밖으로 하얀 눈이 부서져 바다로 추락했다. 저렇게 흔적도 없이 마음이 사라질 수 있다면.

* * *

평일도 가끔 붙어먹고는 했지만 주말까지 열심히 기다리면 유연을 안고 잘 수 있다는 그 기대감이, 한 달 하고도 보름 동안 삶의 원동력이었다. 이러니까 손대면 안 되는 건데…. 예전에도 느꼈지만 유연을 한번 안고 나면 제어가 잘 되지 않았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굴곤 하니까.

원래는 가장 잘하는 짓이라고 생각했었던 게 적당히 즐기고 빠지는 일이었는데. 왜 유연에게는 그게 잘 되지 않는지 자신도 의문이었지만 당연히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고 그 아이는 특별하니까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안 비서마저 지나가는 말로 상무님, 요새 신규 가입자가 늘어나서 그런 건지 기분 좋아 보이십니다. 하고는 했으니.

유연과의 관계는 두 달로 부족하니까 두 달 다 되었을 때 아직 안 나았다고, 더 도와 달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 착한 아이가 자신을 외면할 리는 없으니. 얼마 전 자신이 채워준 다이아 목걸이를 한 유연을 떠올리며, 그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만 해주면 질릴 테니 몇 개 더 사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예 날을 잡아 백화점을 한번 갈까. 주현 부부가 사준 코트를 잘 입던데, 코트를 몇 개 더 해줄까. 구두도 좋고…….

한 달 반 정도, 요 몇 년 중 가장 기분이 좋았다. 붙어 있어야 하는데 불러낸 외가의 호출이 짜증 날 정도로. 그러니까 시간만 때우고 되돌아가 유연에게 저녁을 해 먹일 참이었는데, 난데없이 선까지 보다니. 어서 주어진 시간을 채우고 데려가려고 연락했건만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안리를 만난다더니, 안리가 유연을 보고 사심이라도 채우고 있는 건 아닐까. 유연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보는 걸 몇 번 봤는데. 딱히 성별을 가리지 않는 자유로운 사상의 교포 타입이라고 들었다.

불안한 마음에 주현과 일 얘기하는 척 넌지시 물어보니 집에 일찍 들어왔다는 말에 겨우 안심했다. 어제 너무 심했나, 다음부터는 네 번 정도 선에서 멈춰야겠다. 밤에도 전화를 받지 않을 땐 세 번 정도 선에서 멈추자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평일에 어떻게든 짬을 내서 좀 더 채워야겠다고.

그리고 출근해 정신없이 일했고, 유연이 계속 연락을 받지 않자 조금쯤 화가 나기 시작했다. 뭐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말을 해야 알지. 역시 주말에 외가는 가지 말았어야 했다.

계속 끼고 있었다면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치를 챘을 텐데. 전화 몇 번 하다 보면 풀리겠지 하는 마음이었지만 벌써 며칠째 받지 않으니 인내도 모두 바닥났다.

결국 화가 나 주현에게 연락해 갈비를 사서 1층에 내려갔다. 휴가 내고 여행을 갔단다. 반주현은 지 동생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도 못하질 않나, 윤지아는 어쩐지 아는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절대 대답하지 않았다.

재차 물으니 날 선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게 까딱하면 자신의 만행이 들켜 버리겠구나 싶은 것이… 저건 대학 때도 그렇고 눈치 하나는 귀신같아 도무지 방심할 수 없었다.

유연 없는 하루하루가 쌓일수록 환장할 것 같았고, 결국 사람이라도 써야 하나 생각하던 즈음이었다. 아니, 며칠 있으면 휴가 갔다 당연히 돌아올 것을. 그래도 그렇지 여자애 혼자 여행을 보내다니 싶어 오만 걱정을 다 하던 중 제 전화를 차단했다는 걸 알았다. 반유연. 미쳤지 아주.

실적 보고와 내부 임직원 회의를 하는 와중이었다. 동남아 담당 PM이 열심히 PT를 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 죄송합니다. 다음 분기에는 꼭… 매출 회복하겠습니다.”

왜 저렇게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갑자기……. 하고 있는데 팀장급이나 이사들이 모두 벌벌 떨며 자신의 눈치만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 반유연이 저를 차단한 걸 자꾸 곱씹고 있었더니 표정이 썩어 있던 모양이었다.

그쪽은 얼마 전 캐나다 유명 음원 업체가 오픈해 3개월 1달러 프로모션을 진행하고 있으니, 한동안 매출 하향은 불가항력이라 어쩔 수 없다는 걸 본인도 잘 알고 있었는데, 자신의 표정이 좋지 않으니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지금 동남아 쪽은 All MU에서 공격적인 무료 마케팅을 하고 있다는 것 저 역시 인지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에 대해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니고… 어차피 그쪽도 손해 감수하면서 하고 있는 것이니, 맞불 할 거 없이 BPM은 3개월간 기존 수준의 마케팅 유지 진행하는 방향으로 가면 됩니다. 보고 수고하셨습니다.”

다시 평상심을 유지하여 인상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회의를 마쳤다. 외부 미팅에 가기 위해 차에 타 눈을 감고 있자니 안 비서가 뒤를 슬쩍 보고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상무님, 회의에서 뭔가 언짢으신 내용이라도 있으셨습니까? 회의 참석자분들께서 어떤 부분이 마음에 안 드시는지만 알려주시면 최대한 시정하겠다고 걱정하면서 물어보셨습니다…….”

유연과 연락되지 않던 요 며칠, 기분이 유쾌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티가 날 정도였던가. 그대로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안 비서에게 이야기했다.

“안 비서는 여자 친구나 친구들 연락 잘 안 되면 불안하지 않나?”

전혀 생각도 못 한 질문이었던지 차 안에 정적이 흘렀다가 겨우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긴 한데, 싸워도 메신저나 SNS에 저 보라는 듯이 잘 지내며 노는 모습 올려놓으니까요. 프로필 사진을 바꾸거나, 스타그램에 자기 친구들이랑 만나서 놀고 있는 거 일부러 올려두니까 아, 화는 났지만 잘 놀고 있구나 안심하고 화 풀릴 때까지 좀 두는 편입니다.”

여섯 살인가 어린 여자 친구를 사귄 지 곧 400일이라더니 어느 정도 관계에 노하우가 생긴 모양이었다. SNS….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준오가 핸드폰을 들어 급히 앱을 열어보았다.

몇 달 전 유연이 빨리 아이디 만들어서 자신의 사진 좋아요를 눌러달라고 재촉하던 통에 아이디를 만들어 그때만 쓰고 들어가 보지 않고 있었다. 앱을 열자 바로 강릉의 바다와 호텔 사진이 보였다.

하, 반유연. 사람 죽으라고 마음고생 시켜 놓고 차단까지 해 두고선 저는 이러고 잘도 놀고 있었단 말이지. 순간 안도와 함께 열이 올라왔다. 그래도 얼굴 보니 마음이 좀 놓이는 것이….

“그러게, 잘 놀고 있네.”

안 비서가 앞자리에서 놀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표정 정리를 했다. 설마 이 스케줄로, 저 성정으로, 연애라도 하고 계신 건가. 놀랄 일은 아니긴 한데, 아니, 놀랄 일이지…. 설마 기분이 며칠 내내 안 좋았던 것도….

도는 소문과는 달리 주현과 준오가 진짜 친구인 걸 알고 있던 안 비서는, 가만히 앉아 누군지 알 수 없는 여자 친구분과 상무님의 사이가 회복되기를 두 손 모아 빌었다. 모두가 떨고 있습니다, 여자 친구님. 제발요. 아닌가, 남자 친구분인가? 누구든 간에 제발.

저녁에 늦은 퇴근을 하고 씻은 뒤 맥주 한 캔을 깠다. 덜 마른 머리를 신경 쓸 틈도 없이 또 SNS 앱을 열어 유연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낮에 본 사진을 보고 또 보고, 사진 아래 혼자 여행 왔다는 글을 몇 번이고 읽어 내리며, 왜 혼자 갔지. 가자고 했으면 같이 갔을 텐데. 평일은 무리지만 주말이라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여러 장 중 한 장은 저 혼자 타이머를 설정해 찍었는지 바다가 배경인 방 안에서 작게 유연의 얼굴이 보였다. 확대해서 몇 번을 봤나 모르겠다. 좀 마른 것 같은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음 날 저녁 인트라넷에서 직원들 출퇴근 기록까지 살펴보았으나 기우가 출근한 것을 보고 안심했다. 같이 간 거라면 아마 지금 강릉에 찾아갔겠지. 진기우 새끼 멱살 잡으러.

* * *

휴가 삼 일째 되는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아름답게 뜨는 해를 보다가, 자다가, 맛있는 걸 먹다가… 밤에는 또 술을 한잔하고 울고 또 웃고. 여기서 울 때는 남에게 보이지 않을 수 있어 좋았다. 오빠도 언니도 없고, 부은 눈으로 걱정시키지 않아도 되니까.

낮에도 잠시 나왔었지만,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니 아쉬워 밤에도 패딩을 여미고 밖으로 나왔다. 호텔 근처는 강릉 시내라, 길게 늘어선 카페와 식당 불빛이 반짝거리고 파도 소리가 이어져 내렸다.

조금만 걸어도 어쩐지 생각보다 바닷가의 바람이 시려 역시 빨리 돌아가야 하나 하는 중 작은 횟집 겸 술집 하나를 봤다. 아주머니가 쓰레기를 내놓으려 밖에 나왔다가 가게를 살피는 유연을 보고 화색을 띠며 말을 걸었다.

“아가씨, 들어와서 뭣 좀 먹고 가. 날이 이렇게 추운데. 뜨끈한 거 한술 뜨고 가면 좀 낫지.”

나와서 혼자 밥을 먹는 건 낮에만 그랬고, 저녁엔 다 시켜 먹거나 룸서비스로 먹었는데. 관광지에서 혼자 먹는 건 역시 좀 위험할까 고민하던 순간 귀를 에는 칼바람이 불어 유연은 홀린 듯 안으로 들어갔다.

둥그런 스테인리스 재질의 원형 테이블에 앉았다. 성수기가 아니라 식당엔 유연 혼자 덜렁 있었다. 물을 가져다주러 아주머니가 오신 김에 주문을 했다.

“여기 해물 칼국수 하나랑… 소주 한 병 주세요.”

“아유, 아가씨가 뭘 좀 아네. 추운 날은 뜨끈한 칼국수가 최고지. 사람도 없는데 편하게 먹고 가.”

아주머니가 오늘 저녁 장사 공치진 않아서 다행이네, 하는 얼굴로 주방으로 들어가고 오래지 않아 칼국수 한 그릇과 소주 한 병이 나왔다. 유연은 다른 것들은 잘 마시는 편이었지만 소주는 영 받지 않아 어쩌다 소맥 딱 한 잔 정도 아니면 소주는 입에 대지 않았었다. 하지만 샷시로 마감된 유리문이 겨울 바닷바람에 쇠를 가는 소리와 함께, 밖에 늘어져 휘청이는 전등을 보고 있자니 소주를 꼭 한잔해야 할 것 같았다.

‘반병…. 딱 반병만 마시자.’

소주잔에 초록색 병을 기울여 홀로 잔을 채웠다. 아줌마는 칼국수를 가져다준 후로는 저녁 드라마에 빠져 정신이 없는 듯 보였다. 덜컹이는 바람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유연이 소주를 삼켰다. 항상 소주의 냄새가 역하게 느껴졌는데, 오늘은 단내가 났다.

한 잔을 삼키니 목이 타며 정신이 휘청거렸다. 심장 한복판에 올곧이 서 있는 강준오가 뜨거운 알코올에 휘청거린다. 사람들이 이 맛에 소주를 먹는 걸까. 한 잔, 한 잔 곧은 사랑이 휘청이다 꺾여 심장 아래로 매몰되길 바라며.

그렇게 소주를 세 잔쯤 먹다 핸드폰을 들어 통화 목록을 봤다. 대체 몇 번을 전화했던 건지 부재중 통화 목록에 강준오가 가득 차 있었다.

‘…전화 건 만큼만 나 좀 좋아해 주지….’

속여서까지 기우를 못 만나게 막아 놓고 자신을 취했다. 그를 이렇게 사랑하게 된 이상, 차라리 자신만 봤더라면 유연은 그를 이해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신이 나만 사랑해준다면. 나만 안는다면. 연애하지 않고 이렇게 휘둘린다고 해도….

그러나 또 거짓말을 하고 나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 선을 보는 거라면 언젠가 결혼할 생각이 있다는 말이겠지…. 이건 어떻게 해도 용서가 되지 않았다. 몇 년간 내가 싫어한다며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고 지나가듯 했던 그 말을 마음 한편에서 바보처럼 믿고 있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준오 오빠는 나에게 약하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를 언제나 위해주던 시간들이 사라지지는 않으므로.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나만 만난다면 제가 좋아하니 참고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버텼는데.

다… 다 거짓말이었다. 모든 게 다.

반병만 먹으려던 술을 한 잔 한 잔 더 삼켰다. 안 먹던 소주를 마시니 금세 취해버렸다. 휘청거리며 일어나는데 발을 잘못 디뎠는지 원형 의자가 성가신 소음과 함께 뒤로 넘어갔다.

“어머나, 아가씨, 취했나 봐. 바닷가는 밤에 위험하니까 조심해서 들어가요.”

“아니에요, 겨우 한 병 먹었는데…. 감사합니다.”

휘청이는 정신으로 카드를 받아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하, 잔뜩 열 오른 몸을 차가운 바닷바람이 때리니 정신이 퍼뜩 드는 것 같았다. 속이 다 시원했다. 양 볼에 찬 바람을 맞으며 방향을 틀어 밤의 검은 바다에게 갔다.

하얀 파도가 번개라도 내리친 듯 부서지고 있는 모양새가 아름답고 두려웠다. 밤의 바다에게 먹혀버릴 것 같아…. 왈칵 눈물이 고였다. 이제 먹히고 싶지 않았다. 그게 바다든, 강준오든. 검은 바다의 깊이만큼 서러워졌다.

“강준오 개새끼야!”

“으흑, 씨, 강준오… 강준오 개새끼… 개새끼야…….”

강준오에게 하지 못한 말을 밤의 바다에게 쏟았다. 눈물이 흐르는 순간 다 얼어버릴 것 같은데, 눈물도 콧물도 얼고 있는데 눈에서 뜨거운 게 끊임없이 쏟아져 얼어가는 볼을 덮어 내렸다.

개새끼, 이럴 거면 다시 오지 말지. 왜 내 근처에 다시 와서 내가… 또다시 너를 좋아하게 해. 바다를 보며 한참을 엉엉 울고 있는데 누가 제 손을 끌어당겼다. 순간 너무 무서워 온몸이 얼어버린 것 같았다. 이 밤에, 이 바다에, 대체 누구….

“나를 부르려면 어디 따뜻한 데서 부르든가.”

“…….”

“너는 가만 보면 나 없는 자리에서만 나 부르더라.”

파도 소리조차 멈춘 것 같았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짓무른 눈가로 다가와 고여 있는 눈물을 닦아내었다. 얼어 있는 볼에 온기가 닿아 살덩이가 싸르르 녹아내렸다. 멍하니 보고 있는 사이, 그가 자신을 끌어안았다.

“춥겠다.”

제 의지와 무관하게 커다란 품에 감싸 안겼다. 자신을 미친 듯이 때리던 칼바람이 잠시 멎었다. 그 역시 얼마나 밖에 있었던 건지 바닷바람 냄새가 나는 외투가 차게 굳어 있었다.

나를 찾았어? 찾아 헤맸어? 곁에 있으면 항상 나를 쫓지만 한결같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품에 안겨 차로 향했다. 하도 이성을 잃고 울어 밀어낼 틈도 없이 그에게 끌려갔다. 죽을 만큼 미웠지만 항의할 힘이 없었다.

호텔에 돌아오자마자 남자가 욕조에 받아 둔 물에 들어가 몸을 담그고 있었다. 욕실의 습기와 함께 머리는 계속 진공상태였다. 씻고 나가니 드라이어 코드까지 꽂아둔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내가 할 거야.”

드라이어를 빼앗으려 손을 내밀자 그가 손을 올려 가볍게 저지했다.

“너 지금 머리 말릴 힘 없어. 머리만 말리고 바로 자.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뜨거운 바람이 두피를 훑고 커다란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결대로 헤쳐 말렸다. 건조한 눈으로 화장대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키에 누가 봐도 혹할 만한 턱선과 콧대를 가진 남자가 자신의 머리를 말리기 위해 여기까지 온 듯이 세심하게 손을 움직였다.

가라고 소리쳐야 하는데, 그 추운 바다에서 얼굴을 보자마자 날 구원하러 온 구원자라도 되는 듯싶었다. 그런 자신이 자존심도 뭣도 없는 형편없는 인간으로 느껴짐에도, 얼굴을 보는 순간 얼어있던 방에 온풍기라도 켠 것처럼. 아닌데, 구원이 아닌데, 나를 낭떠러지로 밀어 저만 보게 만들고는 사랑은 주지 않는 남자인데….

사랑이 멈춰지지 않으면 사랑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쳐야 할까.

드라이어가 꺼지자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가는 유연을 준오가 저지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무작정 찾아간 호텔 로비에서 서성거리다가, 투숙객 중 반유연 씨를 찾는다고 하니 본인에게 직접 연락해 보라는 말에 적정한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아, 지금 연락이 안 되어서요, 하니 본인과 연락이 되기 전까지는 알려 줄 수 없다는데 직원이 룸에 전화를 아무리 걸어도 받지 않았다. 답도 없이 로비의 의자에 앉아 있다가 밤길이라도 헤매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무작정 시내로 나가서 서성인 것만 한 시간째.

어디선가 아주 가느다랗게 자신의 이름이 들린 것 같았다.

저 백사장 너머에서. 이 시간에.

바다에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는 유연을 보는 순간 어디서 뺨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너는 왜, 내가 없는 곳에서만 나를 불러.

유연이 방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자신도 씻은 뒤 거실 소파에서 잠을 청했다. 유연은 지금 당장 이야기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추운 곳에서 잔뜩 떨었던 데다 술기운도 올라 있으니 내일 가는 길에 이야기해 볼 수밖에.

새벽부터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하자마자 급하게 강릉으로 와 한 시간을 찾아 헤맸더니 자신도 좋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만나고 나니 안심이 되어 넋을 놓고 잠들 수 있었다.

* * *

방에서 잠을 자다 일어나니 푸른 새벽이었다. 전날 암막 커튼을 치고 잠드는 걸 깜빡했더니 반투명한 흰색 시폰 커튼 사이로 푸른 새벽의 바다가 고스란히 비쳤다. 일어나 물을 마시고 거실을 돌아보니 소파에서 준오가 노곤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며칠 만에 본 얼굴이 까칠했다. 전화를 그렇게 열심히 하더니 잠을 잘 못 잤나. 그의 가까이로 조심스레 걸어가 쪼그리고 앉아 감고 있는 눈과 속눈썹, 입술, 이마와 머리카락을 새기듯 바라보았다.

마음 한편이 찌르르, 울리는 것 같다. 손을 뻗어 이마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올리려는 순간 커다란 손이 손목을 붙잡아 냈다.

“잠이 안 와?”

쌍꺼풀 없는 무쌍의 길고 검은 눈이, 조심스레 눈을 떠 유연을 바라보았다.

“이리 와.”

손목을 끌어당겨 소파에 앉히고는 허리를 끌어당겨 자신의 옆에 눕혔다. 보통보다 큰 편의 소파였지만 빠듯하게 그의 몸에 붙어 눕혀졌다.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 수 없는 마론 인형처럼 그가 이끄는 대로 누웠다. 그가 유연의 몸을 돌려 손으로 가슴 위를 툭툭 토닥여 주었다. 자라는 듯 눈을 감고는 토닥였지만 유연의 무른 살결에 길고 단단한 것이 찔러오듯 파득거렸다.

“신경 쓰지 마. 자자.”

유연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주며 그가 말했다. 결국 나를 원하는 건 언제나 저 아랫도리밖에 없는 건가. 다른 곳에서도 이 물건은 앞에 있을 예쁜 여자를 좋아하겠지만, 내가 곁에 있을 땐 마치 나만의 개처럼. 절망스러운 웃음이 새어 나온다. 손을 뻗어 그의 가운 아래로 놓고 단단한 것을 쥐었다. 그가 놀라는 얼굴로 유연을 바라보았다.

“신경 쓰지 말라니까. 아침… 새벽이라 그래. 자.”

그가 손을 뻗어 유연을 끌어 올리려 하자 그녀가 몸을 내려 이불 속으로 들어가더니 뿌리 부분을 양손으로 쥐었다. 앞쪽은 언제부터인지 이슬이 맺혀 올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부분 위에 손바닥 가운데를 얹어 둥그렇게 굴렸다. 끈적한 이슬이 손바닥과 마찰하며 귀두가 휘저어지자 부드럽고 단단한 살덩이가 움찔거렸다. 손바닥을 떼고 이슬이 나오는 구멍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유연아, 뭐 하는… 유연아?”

입을 벌려 혀로 말캉한 윗부분을 핥았다. 몸체가 더 단단하게 솟아오르며 팽창하더니 기둥의 핏줄까지 단단하게 서 올라 마치 화가 난 것 같았다.

“하… 반유연…. 잠깐.”

유연이 이불 속에서 귀두를 입 안에 물고 사탕을 먹듯 입 안에 넣어 빨기 시작했다. 성기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며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 지금은 유연만의 개가, 유연을 보고 좋아서 날뛴다. 이 물건이라도 나를 온전히 좋아해준다면, 지금만이라도. 지금뿐이라도.

한 손으로 아래를 잡고 성기를 입 안으로 잔뜩 넣었다 빼며 다른 손으로 기둥을 잡고 천천히 흔들었다. 그가 체념한 듯 이불 속으로 들어간 유연의 머리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예뻐하듯 머리를 쓸었다.

입 안을 좁혀 볼우물을 만들고 성기를 연속해서 희롱하는 게 서툴지만 자극적이라 준오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맛있는 아이스크림이라도 되는 듯 너무나 정성껏 물건이 빨아 올려지는 게 느껴져 현기증이 났다.

원래도 유연의 입에 다 들이지 못하는 성기가 점점 더 빠듯해져 유연의 입이 터질 것 같았다. 입 밖으로 침이 줄줄 새어 나왔다.

“하…. 유연아, 잠깐, 헉.”

점점 능숙하게 빨아 올리는 반복된 입 장난에 사정감이 솟아올랐다. 급하게 이불을 거두고, 그가 헐레벌떡 유연의 머리를 빼내 눕혀 유연의 가슴 사이에서 흔들며 파정했다. 하얗고 진득한 것이 유두와 가슴골에 터져 흘러내렸다. 유연의 나른하게 지친 입가에 침과 쿠퍼액이 번들거렸다.

“하…. 너 진짜. 왜 그래.”

어느새 가운이 다 풀어 헤쳐지고 가슴 사이엔 제 정액을 뚝뚝 흘리고 있는 유연이 외설스럽고 색정적으로 느껴져 다시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간다.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하니 바라보니 유연이 낮고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지금 하고 싶어….”

살이 닿으면 몸이 동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고, 유연이 저렇게 무슨 이유인지 잔뜩 뿔이 난 상태인데 몸을 섞거나 할 생각은 정말로 없었건만. 유연의 입 안에서 잔뜩 희롱당했던 하반신이 유연의 말을 듣고 버튼이라도 눌린 듯 솟구쳐 올라 꺼떡거렸다.

“하…. 너 후회하지 마.”

냉정하게 갈라진 낮은 목소리와 달리 열띤 눈으로 소파 아래 개어둔 옷의 주머니에서 콘돔을 빼 씌워 넣고 유연에게 다가갔다. 제 것을 빨다가 흥분했는지 아래는 이미 젖어 있었다.

“그냥… 지금 넣어줘.”

꽉 잠긴 목소리가 준오를 채근했다. 해 달라면서 왜 서러워 울먹이는 목소리인 건지. 페니스를 쥐고 입구의 위아래로 움직였다. 제가 풀어준 이후처럼 흥건하진 않았지만 삽입하기엔 충분한 정도였다.

위태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유연을 바라보며 안으로 페니스를 깊이 밀어 넣었다. 더 녹여 놓고 싶지만 자신이 더 급해 여유가 없었다.

“…아!”

좁은 내부에 푹 제 것이 꽂혔다. 뇌가 마비되는 것 같은 촉각이었다.

“하…. 씨발.”

유연의 안에 제 성기를 푹푹 꽂아 처넣었다. 부드럽게 해야 했지만 분노와 화, 어이없는 상황이 겹쳐 감정적인 몸짓이었다. 대체 왜 화가 났는지 모르는 답답함이 모두 성기로 쏟아진 것같이 강하게 아래를 밀어 넣었다. 머릿속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하반신에 모든 정신머리가 옮겨 간 것처럼 몸에 찌릿한 성감만이 느껴졌다.

“아, 흑, 오빠, 아흑!”

유연의 몸이 힘겹게 꿰뚫리며 애액이 질금질금 흘러나왔다. 몸을 맞춘 지 좀 되었더니 이젠 넣기만 해도 금세 애액이 흘러나와 제 것을 감쌌다. 이 안은 이렇게 뜨겁게 나를 반기는데, 왜 너는 계속 날 밀어내. 유연이 연락을 받지 않고 저를 피한 며칠이 떠올라 더 세게 꽂아 내릴수록 유연의 목소리가 자지러졌다.

“아, 아, 아흑… 응…!”

격하게 꿰여 늘어진 몸을 일으키고 제 몸 위에 앉혔다. 연속해 꿰뚫린 자극으로 유연의 몸이 잘게 발발거렸다. 휘청이는 와중에도 배에 붙을 만큼 솟은 자신의 물건을 유연이 자신의 안으로 받아 넣었다. 눈물 고인 눈이 처연했다.

“흐윽….”

유연이 준오의 어깨를 잡고 커다란 물건을 제 몸에 다 쑤셔 넣었다. 힘이 드는지 손톱으로 제 어깨를 찍어 눌렀지만 제 몸은 하반신에 주어진 쾌감만이 가득해 그것조차 짜릿하게 여겨졌다.

발개진 눈가에 눈물이 한 방울 흘러 내리는 게 한없이 야하고 예뻐 멍하니 유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가 바라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유연이 앞뒤로 엉덩이를 흔들며 맛있게 제 것을 삼켰다. 무너지지 않게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고 눈앞에서 출렁이는 가슴을 빨아 쭙쭙거렸다.

“오빠…. 하응…. 아, 준오 오빠, 아흑.”

유연이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물기 어린 것이 접합하며 찌꺽이는 소리가 음탕했다. 올록볼록한 내벽이 좆을 꾹꾹 물어 삼키고 있었다. 커다란 것을 제 몸에 다 담아 음탕하게 허리를 돌리며 움직일 때마다 배까지 물이 질질 흘러내렸다. 음란하게 휘젓는 엉덩이를 짝 소리가 나게 때려주자 내벽이 바르르 떨렸다.

“맛있게 먹네…. 유연아, 좋아?”

음탕한 말을 뱉자 안쪽이 다시 꽉 조여왔다. 저도 정신이 나가 유연의 허벅지를 받쳐 잡아 놓고 아래에서 퍽퍽 쳐올렸다. 좌우로 흔들리던 가슴이 위아래로 털썩거렸다.

“으흑… 흐윽, 오빠, 아, 오빠! 나 죽을 것…. 흐윽.”

“대답해. 유연이 보지 기분 좋아?”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며 더 강하게 유연의 안에 추삽질을 했다. 성기가 깊은 곳의 입구까지 닿는 듯했다. 자극이 심한지 고개를 저으며 손톱으로 등을 길게 긁었다. 그래 봐야 정신이 없어 간지럽지도 않았다.

“으… 흐응, 좋아요, 유연이…. 흐윽, 좋아.”

“자다가도 일어나 오빠 좆 찾아 넣을 거면서…. 후, 왜 전화도 안 받고 사람 속을 까맣게 태워.”

꿀물을 줄줄 흘려내는 내벽이 꿀렁거리더니 유연의 허리가 달달 떨렸다. 풀린 동공에서 눈물을, 입가에선 침을 흘리는 유연을 바라보자 제 것도 터지기 직전이었다. 곧 경련하는 가느다란 몸이 느껴졌다.

“준오…오빠, 흐윽, 아앙, 아! 흐아앙.”

정신없이 저를 부르다 힘이 빠진 건지 제 앞으로 쭉 꼬꾸라졌다. 어깨에 유연의 눈물이 닿는 것을 느끼며 안에 사정해주었다. 힘이 들었는지 아주 작은 소리로 흐느끼며 우는 유연을 틈 없이 꽉 껴안았다. 제 것의 내음이 났다.

이제야 조금 안심이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 안심하고 싶은 욕심에 혀를 옭아매 입을 맞추고 유연을 다시 흐느끼게 했다. 목이 다 쉰 채 매달려서 앙앙 울고 있는 걸 봐도 도무지 분이 풀리지 않아 멈추고 싶지 않았지만, 또 차단이라도 당할까 애써 멈춰주었다. 전신에 모든 힘이 빠져 그대로 잠든 유연이 예쁘고 사랑스러워 잠도 오지 않았다. 오전에 그녀가 깰 때까지 숨을 쉬고 있는 것을 그저 벅차게 바라보았다. 왜 사람을 숨넘어가게 애를 태워. 대체 왜.

조식을 먹이고 밖으로 나왔다. 아무것도 안 먹겠다고 우기는 유연을 억지로 끌고 가 수프에 빵, 과일을 조금 먹였다. 고작 저걸 먹는 게 아쉬웠지만 별수 있나.

체크아웃 하고 유연을 차에 태워 집으로 향했다. 차에 타고 얼마 되지 않아 유연이 곧 잠이 들었다. 왜 자신을 차단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새벽 내내 괴롭혔으니 피곤하겠다 싶어 내버려 두었다.

운전하는 내내 신호가 걸리면 고개를 돌려 자는 유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깨에 잔 손톱자국이 가득할 때까지 유연을 안았음에도 이해할 수 없는 불안이 흘러 심장이 움찔거렸다. 왜일까, 왜 이렇게 불안할까.

집에서 멀지 않은 동네에 도착했을 즈음, 유연이 게슴츠레 눈을 뜨더니 바깥을 바라보았다. 깨어난 유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아이가 꺼낼 말이 두려워 저 역시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집 앞에 도착해서야 유연이 입을 열었다.

“오빠.”

“응, 말해.”

준오가 시동을 끄고 앞을 바라보았다. 이제 기분을 풀 때가 됐을 텐데, 왜 나는 네가 뱉을 말이 불안한 걸까. 유연의 방향으로 차마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나 오빠한테 질렸어.”

준오가 고개를 돌려 유연을 바라보았다. 내가 듣고 있는 말이 맞는 건지, 순간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나 이제 연애하고 싶고… 오빠한테서 벗어나고 싶어. 앞으로 내 일에 참견하지 말아줘. 부탁할게. 다음 주까지 있어야 부탁한 두 달이지만, 그건 내가 아니어도 되니까…….”

마치 영원 같은 몇 초의 정적이 흘렀다.

“이제 오빠랑 하는 것도 싫어.”

고개를 돌려, 준오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멈출 수가 없어.

“앞으론 되도록… 마주치지 말자. 잘 지내.”

강준오의 눈동자가 겨울밤 나뭇가지 끝자락처럼 파리하게 떨렸다. 당신도 당황할 때가 있기는 하네. 유연이 차 문을 열고 나가 집으로 향했다.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직진하는 유연을 준오가 그저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어 멍하니 삼십 분쯤 차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 * *

할 말은 아흔아홉 가지였고, 사실은 준오의 가슴이라도 때리며 따지고 싶었지만. 그냥 모든 게 다 부질없이 느껴졌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당신을 안았다. 그래도 그가 내 몸만은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 시간만큼은 정신을 잃고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내 몸이라도 온전히 좋아해주어서 다행일까.

얼굴을 보면 준오가 하자는 게 무엇이든 좀처럼 거절이 되지 않았다. 가슴이 뛰고, 데리러 와준 것도 사실 마음 구석에서 기쁘게 느껴지는 자신이 가망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차가운 겨울의 밤바다에서 울면서 이름을 부를 때 닿아온 손가락과 얼굴, 얼음 섞인 소금 바람을 막아주는 당신의 커다란 가슴 같은 것들이 서러울 만큼 좋아서.

그러나 8년 동안 발전이 없었던 우리 사이는 언제까지나 평행선일 것이다. 준오가 결혼할 상대는 그 선 자리의 여자들 중 하나일 테고 언젠가 제게 소개한다면 그저 까무러치고 싶을 테니까. 그 시간을 어떻게 견딜까, 나는. 차라리 영영 곁에서 떠나고 말지. 질투가 나서 죽느니 안 보는 게 나을 거야.

유연에겐 자기 자신이 중요했고, 무엇보다 가족들과 자기 자신에게 면목이 없었다. 언제까지 이런 관계로 지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좋아서 미칠 것 같아도 언제까지 자기 자신에게 면목 없이 지낼 수가 없었다.

나 진심으로 충분히 사랑했어. 다시 만나도 또 강준오에게 가득 잠겨 들 정도로. 숨도 쉬지 못할 만큼이나. 벗어나게 해주지 않는다면 일단 곁을 떠나는 수밖에.

그렇게 생각하고 이를 악물고 집 안으로 향했다. 언니와 오빠에게 잘 놀고 온 얼굴로 웃어 보이고, 그들이 해 둔 밥을 먹고, 잔뜩 참았다 잠이 들기 전에나 울자. 나는 사랑받는 사람이니까. 그들에게 귀한 존재니까. 나에게 가장 귀중한 존재는 나 자신이니까.

유연이 마음을 달래고 또 달래, 준오를 보고 싶은 마음을 삭이고 손톱으로 손바닥 살을 헤집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 준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빠, 나 퇴사하고 싶어.”

“응……. 응?”

애가 갑자기 여행을 갔다기에 대체 무슨 일인가 했었는데, 지아는 본인이 행선지를 안다며 여자들끼리의 비밀이라고, 어디에 갔는지도 말해주지 않았다. 아니 뭔 놈의 비밀이 동생이 어디로 여행 갔는지도 말 못 하게 한단 말인지. 돌아오는 날 아무리 전화를 해서 데리러 간다고 해도 거부해서 그냥 두긴 했는데 무슨 일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부모님이랑 떨어져 지낸 지도 오래됐고, 몇 달 정도 부모님 집에 가 있을래.”

연속으로 충격적인 유연의 말을 들으며 부모님 생각이 났다. 원래 고등학교 때까지는 부모님 닦달이 좀 심했던 편이었다. 특히나 유연의 경우는, 열심히 공부를 하라든가 하는 종류의 압박은 아니었지만 금이야 옥이야 기른 탓에 부모님의, 특히 어머니의 간섭이 사사건건 꽤 심한 편이었다. 바쁘신 와중에도 틈틈이 전화하고 운전기사 보내고 뭐 하고 있는지 일일이 체크하시고.

그러다 고 2 때쯤 유연이 울며불며 반항을 했던 적이 있었다. 자기는 큰 엇나감 없이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작은 일까지 간섭과 통제를 받아야 하는 거냐고. 딴엔 좋은 것만 해주려던 어머니는 그때 큰 충격을 받았고, 사이가 틀어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당시 깨달은 바가 많으셨는지 유연이 스무 살이 되자마자 아버지와 함께 타운하우스로 들어가 버리셨다. 어차피 본사가 지방에 있다 보니 그게 일적으로도 좋기는 했지만.

그랬는데 이젠 제 발로 집에 들어간다고 하니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뭔가 제가 부족했나 싶기도 한 것이. 어머니야 두 팔 벌려 환영하며 방에서 혼자 춤이라도 추실 거다.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겠지만.

“유연아, 오빠가 뭐 잘못했어? 집이 불편해서 그래? 그런 거면 오빠가 회사 근처에 오피스텔이나 아파트 얻어줄게.”

주현이 저렇게 말하자 지아는 갑자기 집에 벼락이라도 내리친 것처럼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아가씨…. 지내면서 뭐 불편했어요? 내가 다 고칠게요….”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이고, 이렇게 오해할 것 같긴 했다만…. 유연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언니, 무슨 말씀이세요. 원래 몇 달만 신세 지려던 게 지금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가는걸요. 언니 오빠랑 지내는 게 생각보다 너무 좋더라고요. 그런 건 아니고, 회사 일이 저랑 안 맞는 것 같아서요. 반년 정도 푹 쉬다가 다른 일을 알아볼까 해요.”

“너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누가 괴롭히던? 누가 그랬어. 말해 봐.”

주현이 격양된 얼굴로 말했다. 아, 뒤로 준오와 만나던 게 들키면 BPM 공중분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그것만은 안 돼…. 이제 사원 수가 한둘도 아니고 대기업 계열사인데, 유연은 부디 자신의 일로 서로 감정 상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자신과의 일들을 알면 준오의 말대로 오빠가 기우 아버지와 손을 잡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8년 전 동업 계약을 파기하며 갈라지자고 말하던 오빠의 격노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자신은 아주 오랜 시간 둘이 어떻게 회사를 만들어 일으켰는지 가장 가까이에서 본 사람이었다. 온갖 위기와 갖가지 문제들을 다 뛰어넘어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BPM은 준오와 주현 두 사람만의 회사가 아니었다.

“괴롭히기는 무슨…. 나 휴학한 적도 없고, 유학 다녀온 적도 없고…. 이제 이십 대의 끝자락인데 그런 것들 생각하니 아쉬워져서 그래. 지금 업무가 나랑 잘 맞는 거 같지도 않고, 좀 쉬고 싶어.”

거짓말. 사실은 적당히 자유롭고 신선한 BPM의 업무가 좋았다. 그러나 이제 강준오의 발치에서 벗어나야 했다.

“부서를 옮기고 싶으면 BPM 내부에서 문제없이 바꿔줄 수 있어.”

“아니야 오빠, 부서 사람들도 좋고… 다 좋은데. 그냥 잠시 멈추고 싶은 때 있잖아.”

주현이 고민하다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유연아, 너 재작년에 공황장애 진단 받고 약 먹었던 적 있었지.”

“아, 응….”

생각해 보니 그랬었지. 출근하다 갑자기 지하철에서 숨이 막혀서. 하늘이 노래지고 앞으로 걸어 나갈 수가 없었다. 의자에 기대어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다가 어떻게 겨우 문자만 보내고 택시를 잡아 응급실에 갔었다.

두세 번 그러다가 요새는 잠잠한 편이긴 한데. 그래도 몇 달에 한 번씩 가서 약을 받아와 기미가 보이는 것 같으면 챙겨 먹곤 했다.

“진단서 떼서 회사에 제출하고, 2월부터 병가 썼다가 6월에 다시 원래 QL 서비스 기획 팀으로 복귀하자. 어차피 돌아갈 수 있도록 선택지 있었던 거고…. 휴직 중에 정말 아니다 싶으면 그때 퇴사해도 되니까. 공채로 들어가서 여태까지 경력 쌓은 거 아깝잖아. 안 그래?”

생각해 보니 괜찮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 일단은 쉴 수도 있고….

“알았어, 오빠. 다만 이거 준오 오빠에겐 말하지 말아 주라. 어차피 다음 주에 북미 출장 가지? 보름 정도 걸리는 걸로 아는데… 그동안 상무 대행 오빠가 할 테니까, 오빠가 조용히 결재까지 다 해줘. 준오 오빠 잔소리 듣기 싫어서 그래. 알면 꼬치꼬치 캐물을 텐데…. 공황장애 얘기하면 걱정할 거고. 지금은 딱히 큰 증상도 없으니까….”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면 크게 의심하지 않고 처리해주겠지…. 듣는 새언니의 표정이 좀 더 어두워졌다. 한낱 일반 사원의 병가는 어차피 결재 전까지 강준오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테니, 결재만 주현이 해준다면 조용히 집으로 떠날 수 있었다.

“내일부터 면담해서 팀 내에도 공유하고…. 공석은 QL 내부에서 지원자 빨리 데려오는 쪽으로 해야겠다. 어차피 진기우도 좀 빠르게 BPM 빠질 예정이라 공고 준비하고 있어서 금방 추릴 수 있을 것 같아….”

“기우 씨가? 벌써?”

“예정보다 빨리 4월에 케미컬 돌아갈 것 같다던데…. 모르지 뭐. 우리 부서 들어온 이유가 궁금했는데 염탐할 거 다 했나 보다 싶기도 하고…. 곧 2월이니까 인수인계하려면 지금 뽑아야지. 바로 두 명 뽑아야겠다.”

기우도 참, 고민이 많겠구나 싶었다. 팀 사람들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벌써 마음이 아려왔다. 이렇게 다정한 팀은 아마 또 만나지 못할 거야. 결국은 자신의 실수가 아니었지만, 그 당시 자신을 질책조차 하지 않았던 고마운 팀을 떠나려니 그저 아쉬운 마음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준오의 곁을 떠나야 했다. 이대로라면 점점 바스러져서 내가 아닌 무언가가 되어버릴 테니. 그가 수많은 잘못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올라가서 얼굴을 보고 싶은 충동이 사라지지 않았다. 떨어져야 정리도 할 수 있을 테니까….

또르르,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일찍 자리에 누운 유연의 베갯잇에 눈물이 쌓여 금세 얼룩이 되었다. 울고 싶지 않아…. 강릉에서 다 흘려내고 온 줄 알았는데, 얼마나 더 울어야 할까. 마음이 쓰라리다 못해 욱신거렸다.

* * *

출근 후 점심을 먹고, 팀장님을 만나 면담을 했다. 쉬고 나오자마자 이런 말씀 드려 면목이 없다고 말하며. 공황장애 이야기와 함께 팀장님에게만은 사실을 밝히고 싶은 마음에 이야기를 했다.

“팀장님, 문서에 만 명이 십만 명으로 변경되어 있던 부분, 그거 임빈아 대리가 수정했다고 해요.”

팀장님이 놀란 눈으로 유연을 바라보았다.

“공유 폴더의 문서를 열어서 변경했고, 보안 팀에서 확인 마쳤다고 합니다. 잘 끝난 일 더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에 강준오 상무님께서 히스토리 공유는 별도로 하지 않으신 것 같아요.”

“이렇게 중요한 내용을, 세상에. 그럼 그렇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분명히 내가 만 명으로 읽었는데….”

팀장이 드디어 미스터리가 풀렸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이야기했다.

“유연 씨는 누명을 썼던 건데, 이걸 왜 공표하지 않으신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네요.”

“강준오 상무님의 간곡한 요청이 있으셨습니다. 이미 좋게 잘 마무리된 일인데, 타 팀 의심하면서 또다시 문제가 불거지는 게 싫으실 수 있죠. 이해해요.”

“그래서 유연 씨가 그렇게 충격받은 얼굴이었구나…. 사람이 싫어졌겠어요. 많이 힘들었겠네.”

어디 가서도 이렇게 사려 깊은 팀장님을 또 만날 수는 없겠지. 유연의 마음에 아쉬움이 가득 찼다. 그리고 상냥한 팀원들 역시….

“네, 충격을 많이 받아서 공황장애가 다시 도진 것 같아요. 한동안 출근이 어려울 듯해서… 어차피 BPM 올 때 일 년 후에 복귀할지 팀 유지할지 정할 수 있다고 했으니, 병가 후 원래 팀으로 복직할 생각입니다….”

팀장이 십분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유연을 보며 말했다.

“유연 씨, 충분히 공황장애까지 올 만한 사건이었다고 생각해요. 모두 이해하고…. 얼마나 억울했겠어요. 그러나 팀 옮기는 건 한 번만 더 생각해 봐요. 우리 같이 이슈도 잘 이겨냈는데…. 이건 어차피 5월까지만 정해줘도 되는 거니까. 병가는 먼저 수리할게요. 본인이 하지 않은 일로 책망당해서 많이 억울했을 텐데, 풀려서 다행이에요.”

“네 팀장님, 그리고 임빈아 대리 일은 상무님께서 특별히 요청하신 부분이니, 외부 발설하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릴게요.”

강준오가 그렇게 바란 것이니, 들어주리라. 어차피 쉬고 팀도 옮기기로 했는데 미련 둬서 뭐 할까.

“하…. 그건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긴 하지만.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유연 씨 수고 많았고… 공황장애로 힘든 상황이면 쉬어야 할 테니,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 볼게요.”

유연도 너무 급박하다는 걸 알고 있고 기우까지 빠지는 와중에 남은 팀원들이 고생할 걸 생각하니 걱정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강릉에서 그 추운 날 몇 시간이고 바다를 바라보며 이제는 정말 끝내자고 다짐했다.

넘치는 미움의 바닥에 미련이 찰박거려서, 만나면 뺨이라도 때리고 싶으면서도 아둔하게 마냥 보고 싶어 괴롭다. 그러나 결심한 것은, 이 관계를 청산하자는 것. 이 길고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을 접어 버려야 했다.

더 이상 강준오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며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기약 없는 짝사랑을 끝내야 했다. 멈춰지지 않는 마음이라면 잘라내고 싶었다.

* * *

[유연 씨, 시간 될 때 얘기 좀 해요]

점심을 먹고 나니 기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긴 면담과, 착잡한 팀장님의 표정을 보고 뭔가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제 나 예비 자유의 몸이니까, 기우와 저녁이나 먹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오늘 저녁 사주실래요?]

“…헉.”

갑자기 유연의 자리 너머로 헉 하는 소리가 넘어와서, 다들 기우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기우가 잔뜩 올라간 입꼬리를 가린 채 자리에서 핸드폰을 보고 웃고 있었다.

“기우 대리 무슨 일이야, 주식이라도 올랐어?”

요새 주식에 빠진 과장님이 자신에게도 당장 정보를 공유하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그냥… 친구가 웃긴 사진을 보내서요. 죄송합니다.”

설마 자신이 밥 사 달라고 했다고 저렇게 못 참고 웃어버린 건지. 기운이라곤 없는 와중에도 그의 표정과 행동이 웃겨서 조금은 미소가 샜다. 회사 앞 주차장으로 오라는 그의 메시지를 보고 기우가 먼저 도착해 있을 주차장을 향했다.

회사 근처의 야외 주차장에 들어서자 자동차의 불빛이 깜빡거렸다. 저 차겠구나. 다가가자 그가 팔을 뻗어 안에서 문을 열어주었다.

“왔어요? 나 오늘 무슨 날인가?”

기우가 막 어른이 된 소년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전히 기운은 없었지만, 기우에겐 따로 만나서 이것저것 말하고 싶었다. 유연의 BPM 생활에서 한 축을 담당하는 중요한 사람이니까….

“뭐 사줄까요? 유연 씨 얼굴이 까칠해 보여서, 보양식 먹었으면 좋겠는데.”

“으음…. 그러면, 오늘은 오리백숙 먹을래요….”

“어쩜 그렇게 메뉴도 잘 골라요? 완전 딱이네, 건강한 거.”

따뜻하고도 사소한 대답에, 그냥 이 사람을 그때 그대로 좋아하게 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어쩐지 더, 기우의 변하지 않는 다정함이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회사에서 삼십 분 정도 거리의 오리백숙집으로 향했다.

“퇴근 시간만 아니면, 어디 파주 같은 데로 데려가서 먹일 텐데. 교외에 그런 곳 많잖아요.”

“어차피 날도 추워서 별 구경도 못 하는데, 뭐 하러 멀리까지 나가요.”

“유연 씨는 데이트할 때 왜 드라이브할 만한 거리로 멀리 나가는지 모르는구나. 그 핑계 대고 오래 같이 있으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아, 그런가?”

“추운 데로 가면 손잡아주고, 추워 보이니까 뭐 덮어주고, 볼도 한번 만져주고. 손 간 김에 뽀뽀도 한번 하고. 그러려고 가는 거예요.”

“아아, 기우 씨 그러려고 나 교외로 데려가고 싶구나?”

“네.”

항상 놀랄 만큼 솔직하니 뭐 할 말이 없다 싶어 가만히 웃었다. 금세 오리백숙집에 도착했다. 토속적인 분위기인데 꽤 크고 깔끔한 집이었다.

“여기 아버지 친구분들이랑 라운딩 갔을 때 들렀던 곳인데… 깔끔하고 괜찮더라고요. 룸도 있고.”

룸에 마주 앉아 기우에게 말했다.

“기우 씨랑 가면 뭘 먹어도 룸 안 간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흠.”

“네, 저 엉큼해서요.”

직구가 인간으로 태어나면 진기우일 것 같아. 맛있게 백숙을 먹고 이야기를 했다.

“저… 회사는 병가 내기로 했어요. 휴직하다가 6월에 다시 QL 텔레콤 서비스 기획 팀으로 가려고요. 뭐 원래 있던 곳이니까요.”

“유연 씨 BPM 많이 좋아하는 것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심한 이유가 있겠죠. 조금이라도 더 같이 못 있어서 아쉽긴 한데, 저도 4월에 케미컬로 옮길 것 같아요.”

주현에게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케미컬로 가면 자회사 에코라인 본부장으로 들어가요. 그러면 이제 흠흠.”

으음? 하는 얼굴로 유연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임원이기도 하고, 차도 대놓고 맘 편히 더 좋은 걸로 바꾸고… 그러니까 유연 씨가 나 좀 더 괜찮아지는 거 꼭 알아줬으면 좋겠다고요.”

유연이 빙그레 웃었다.

“네, 지금부터 꼭 알고 있을게요.”

“BPM 노린다는 둥… 뭐 그런 이야기 아버지께 듣지 않았던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그건 아버지 희망 사항일 뿐이고…. 그렇게 하는 건 유연 씨도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유연이 말없이 기우의 눈을 바라보았다. 내가 괜찮다고 하면, 당신은 온갖 정치 싸움 끝에 BPM의 수장 자리를 가지게 될까?

“저 휴직하면, 부모님 계신 세종시 타운하우스에 있을 거예요. 놀러 와요.”

“말 바꾸면 안 돼요? 엄청 자주 갈 거니까… 그때 가서 귀찮다고 해도 나는 몰라. 주말마다 가 버릴 거니까. 근처에 호텔 잡아 놓고.”

어차피 준오와 만나지 않을 텐데, 기우가 놀러 오면 뭐 어떤가 싶었다. 울 엄마 미남 놀러 온다고 좋아하시겠네. 강준오도 그렇게 예뻐하셨는데….

“참 나, 놀러 안 오기만 해 봐요.”

저녁을 먹는 내내 기우가 행복해 보였다. 오리 다리를 다 유연에게 담아주며 퍽퍽한 가슴살이 좋다고 말하는 기우가 신기했다. 어떻게 퍽퍽살이 좋지? 난 좋긴 하지만….

집에 돌아와 기우와의 저녁을 떠올렸다. 기우 씨, 요새 본 중 가장 행복해 보였지. 나 휴직한다는 말에 마냥 슬퍼할 줄 알았는데 어차피 본인도 인사이동하기도 하고, 주말에 가끔이나마 유연을 따로 볼 수 있으니 그게 무척 좋은 듯 보였다. 기운이 바닥을 쳤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작게 웃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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