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SCENE
도착하니 오빠 부부가 먼저 와 리조트를 만끽하고 있었다. 창밖에 우거진 소나무와, 객실 아래의 커다란 온천 수영장과 노천 온천이 보였다. 이미 이곳으로 오던 길에 강원도의 바다를 보며 설레던 마음이 도착하니 더 터져 올라 마냥 즐거워졌다.
내부 식당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다 같이 노천 온천에 나갔다. 준오 앞에서 수영복을 입기가 좀 부끄럽긴 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어떻게 저 너른 온천에 몸을 담그지 않고 갈 수가 있을까. 밖은 추웠지만 급히 탕 안에 들어가니 마냥 행복해졌다. 복근이 빨래판 같은 남자들은 지아와 작당해 카메라맨을 시키고 정신없이 놀다 밖으로 나왔다.
상을 차리는 새언니와 주현을 두고 준오와 잠시 근처 시장에 회를 뜨러 나왔다. 회도 몇 종류 포장하고, 전도 사서 네 명이 부어라 마셔라 하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예전에 둘이 CC일 때 이야기라든가, 유연의 어릴 적 이야기 등. 같이 보낸 시간만큼 이야깃거리도 끝이 없어 왁자지껄하게 한창 즐거운 와중, 핸드폰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여행 잘 갔어요? 프로필 사진 너무 예쁘다]
온천 안에서 아까 물 안에서 찍었던 사진으로 바꿔 뒀는데, 기우가 그걸 본 모양이었다. 유연이 답장하려고 핸드폰을 들자 주현이 말했다.
“너, 기블리지, 응. 걔랑 어떻게 됐어.”
“헉, 아가씨…. 그러고 보니 한창 만나는 중인데 우리가 데이트 방해하고 오라고 한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언니,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냥 친구예요.”
서둘러 대답하고 있는데 준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핸드폰 메시지 창을 봐 버린 걸까. 워낙 싫어하는 걸 알고 있으니 어쩐지 조금 불안해졌다. 적당히들 취해 슬슬 마무리하고 가위바위보에 진 유연과 준오가 부엌을 치우기로 했다.
주현 부부가 방 안으로 들어가고 둘이 정리를 거의 마무리할 즈음이었다. 준오가 싱크대에서 설거지하고 있는 유연을 뒤에서 안아왔다.
“오빠?”
“진기우 보라고 메신저 사진도 바꿨어?”
“무슨 소리야, 아까 찍은 거 잘 나와서 그냥 올린…. 흣.”
준오가 등 뒤에서 유연의 고개를 돌려 입술을 삼켰다. 아래위로 뒤엉킨 커다란 혀에 유연의 연약한 혀가 정신없이 휘둘렸다. 준오가 유연의 원피스 잠옷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까지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가슴의 정점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고 문지르는 그에게 끝없이 빨리던 입술이 겨우 떼어지자 유연이 붉어진 얼굴로 화를 내며 속삭였다.
“미쳤어? 오빠나 언니 나오면 어쩌려고 이래.”
“그럼 애들 나와도 바로 안 보일 만한 자리면 되겠네.”
준오가 싱크대 아래로 무릎을 대고 앉아 유연의 팬티를 끌어 내렸다. 유연이 급히 팬티를 잡아 봤지만 속수무책으로 벗겨졌다. 바로 양쪽 엉덩이를 쥐고 벌린 그가 벌어진 음부를 보며 말했다.
“목소린 화내는데 여긴 왜 질질 흘리고 있어.”
뭐라 할 틈도 없이 준오가 혀를 세워 회음부부터 음핵까지 길게 핥아 올렸다.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 싱크대를 잡은 채 엉덩이가 조금 내려앉았다. 준오의 커다란 손에 두 갈래로 벌려진 음부가 수치스러웠다.
“편하게 빨아 달라고 엉덩이도 내리고, 착하네.”
혀를 넓게 펴 아래부터 위로 거듭해 핥아 올리던 그가 굵은 혀를 음부에 넣고 쿡쿡 쑤셔대기 시작했다. 축축하고 긴 촉수 같은 것이 안에 들어가자 물이 질금거리며 흘러나왔다. 벌려진 두 덩이 사이로 혀가 계속해서 들어왔다 나갈 때마다 음부가 아쉬워하며 벌름거렸다. 쑤셔질수록 머릿속이 하얘지며 애액이 흘렀다. 머리가 멍해져 화내는 것도 잊고 몸을 바르르 떨자 그가 혀로 음핵 주위를 둥글게 굴렸다.
“흐… 응…. 앙, 오, 오빠.”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를 움직여 준오의 입 안으로 더 가까이 가져가고 있었다. 몸이 붕 뜨는 것 같았다. 준오가 유연의 반응을 느끼고 음핵을 뽑아낼 듯 쭉쭉 빨아먹기 시작했다. 유연의 엉덩이가 아래위로 자꾸 움직였다.
“오빠, 흑, 흐윽.”
입술과 혀가 음핵을 개처럼 집요하게 핥아 댔다. 유연이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다가 준오에게 빌기 시작했다.
“오빠, 오빠 나… 흑, 하앙, 못 참을 것 같아, 소리 못, 흐아, 오빠 내가…. 흐응.”
“네가 뭐.”
그가 유연의 젖은 입구에 입을 대고 말했다.
“잘못했… 으응, 준오…. 하악!”
그대로 준오의 손가락 두 개가 유연의 입구에 꽂혔다. 준오가 인정사정없이 손가락으로 유연의 안을 때리듯 이겨 넣었다.
“하지 말란 거 자꾸 하면 혼나야지.”
얼굴을 유연의 음부 앞쪽으로 들이밀고 구슬을 입술에 넣어 죽죽 굴리며 손가락을 박아 넣었다.
“쟤들 안 나와, 지금 한창 우리처럼 바쁠 거니까.”
박던 손가락을 굽혀 안을 둥글게 굴리기 시작했다. 뭔가 다른 느낌이 드는지 축축한 내벽이 꿀렁거렸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끙끙 앓는 소리만 흘리는 걸 보던 준오가 손가락 끝을 더 빠른 속도로 쳐올리며 속에서 문지르자 유연의 전신이 발발 떨렸다. 커다란 손바닥이 다 젖도록 질척하게 물이 흘렀다. 절정이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바닥으로 주저앉는 것을 받아 안고 준오가 위층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 지아 언니의 억눌린 신음이 잠시 들린 것 같았다.
유연을 침대에 눕히고 준오가 다급하게 옷을 벗었다. 한 번 가 버린 상태로 넋이 나가 늘어져 있던 유연이 준오가 드로어즈까지 벗어내는 것을 보고 몸을 움찔거렸다. 준오가 침대 옆 테이블에 콘돔을 꺼내 올려 두고 유연의 위로 올라가 기다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괜찮아, 많이는 안 무서울 거야.”
이게 처음도 아닌데 처음 같았다. 그리고 준오의 것은 다시 봐도 도망가고 싶었다. 준오가 왜 항상 삽입을 참고 뒤로 미뤄주었는지 알 만한 경악스러운 크기. 경험이 없지는 않았지만 예전 남자 친구의 것이 저것과 비슷한 크기였던 적은 없었다. 불안해하는 유연의 눈가에 키스한 준오가 입술을 내려 가볍게 아랫입술을 물었다 여린 혀를 빨고 떨어졌다.
“넣어도 괜찮아?”
아까 세상 못되게 굴던 남자는 어디로 가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하는 남자만 남아 있었다. 유연이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몇 초간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콘돔 포장을 이로 찢고 제 성기에 껴 넣고는 유연의 입구에 대고 아래위로 움직였다. 물기 어린 소리가 났다.
“잠깐만, 참아.”
입구에 커다란 게 들어오는 느낌이 났다. 놀라서 긴장으로 몸이 굳는 유연을 보고 준오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가득 찬 것 같은데, 다 찬 것 같은데 멈추지 않고 커다란 게 밀려 들어왔다. 터질 것 같아 고여 있던 눈물이 흘렀다.
“흐으윽, 오…빠. 으흑.”
“하… 씨…….”
준오가 저절로 터져 나오는 욕을 삼키고 터질 것 같은 아랫도리를 진정시켰다. 아직 반만 넣었는데도 예상대로 좁아터져서 넣자마자 싸 버릴 것 같았다. 이것만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시간들이 이젠 무효가 된 게 우습고, 결국 자신이 정한 금기를 깬 배덕감에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욕망에 무너진 하반신은 허리를 살살 쳐올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계속하면 쾌락에 미쳐 머리가 어디로 날아가 버리겠지. 이젠 유연이 울며 빌어도 멈출 수 없었다. 허벅지를 잡아 벌려 퍽퍽 박아 넣기 시작했다. 긴장으로 경직된 입구가 점점 풀리더니 곧 유연이 준오의 엉덩이에 다리를 감아 올렸다. 처음 들어올 땐 크고 고통스럽기만 하던 것이 반복될수록 달아오르는 기분을 주어 질구 안쪽부터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흣…. 준오 오빠, 아, 흣, 아!”
쑤셔 넣을수록 철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유연의 안이 꽉꽉 물어 조여왔다.
“무서워서 벌벌 떨더니, 후, 뭘 이렇게… 맛있게 먹어.”
준오가 유연의 두 발목을 한 손으로 잡아 올리며 퍽퍽 밀어 넣었다. 다리가 탓에 민감해졌는지 유연의 신음 소리가 더 깊어지다 제 입을 막았다 했다.
“안 들려, 하…. 아까 걔네 소리 들었잖아. 한번 하면 몇 시간은 할 텐데.”
“아, 흑, 안 돼, 내 소리 들, 리면 안 돼. 아, 아!”
준오가 멈추지 않고 유연의 속을 짓쳐 올렸다. 너무 커서 고통스러웠던 시간은 잠시였고 가득 차 버린 음부에 정신이 몽롱할 뿐이었다. 커다란 것이 쑤셔지는 느낌이 좋아 기분이 점점 고조되었다.
유연의 안이 전부 강준오였다. 내벽이 그의 것이 빠져나갈 때마다 아쉬워하며 조였다 들어올 때는 입을 벌려 맛있게 받아먹었다. 꽉 막힌 질구 밖으로 애액이 찰박거리며 튀어 올랐다.
준오가 그대로 유연을 자신의 허리 위로 올렸다. 큰 것이 끝까지 박힌 채 앉게 되자 유연이 몸이 부들거렸다. 다리를 벌리고 무릎을 비스듬히 세워 유연을 기대게 하고 양 허벅지를 잡아 허리를 쳐올렸다.
유연의 몸 전체가 쾅쾅 울렸다. 낭창한 허리가 뒤로 뻗어져 준오의 허벅지가 지지하고 있지 않으면 그대로 꼬꾸라질 것 같았다. 갈라진 사이가 계속해서 꿰뚫리며 가슴이 음란하게 출렁거렸다.
“아흑, 너무 세, 너무, 응, 아, 아!”
질척거리는 물이 준오의 음모를 적셔갔다. 그가 쉴 새 없이 올려 치던 허리를 멈추고 유연을 바라보며 양손에 가슴을 잡아 쥐고 흔들었다.
“네가 움직여 봐.”
잠시 망설이던 유연이 준오의 가슴에 손을 얹고 엉덩이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찌꺽거리는 소리와 함께 깊이 준오의 성기를 먹고 있는 유연이 점점 더 강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자가 오르가슴을 느끼기 가장 쉬운 자세라 그런지 처음엔 머뭇거리며 움직이던 유연이 점점 준오의 성기를 빨아내듯 조이며 엉덩이를 빠르게 휘저었다.
“오빠…. 하아, 아, 이상해, 으응, 으흑, 아!”
열심히 손을 준오의 가슴에 짚고 엉덩이를 흔들던 유연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더니 온몸을 경련하며 절정에 올랐고, 준오도 함께 사정했다. 경련하던 유연이 준오의 가슴으로 엎어져 흘러내렸다.
준오가 자신 위에 엎어진 유연을 꼭 안았다. 몸을 움찔거리며 품 안에 쓰러진 모습이 가엽고 기꺼워 머리를 쓰다듬는 와중 유연의 몸이 준오의 복부에 문질러졌다. 바르작거리는 몸짓과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여전히 꽂혀 있는 아랫도리가 다시 움찔거렸다.
안겨 있던 유연이 눈치채곤 놀라 고개를 들었다. 준오가 유연의 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이제 시작했는데 뭘 놀라.”
유연을 안아 베개에 눕혀 두고 그가 콘돔을 갈아 끼웠다. 사정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뻣뻣하게 서 있는 물건이 어이가 없어 유연은 기가 차다는 듯 준오를 바라보았다. 준오가 키스하며 동시에 유연의 입구를 벌려 귀두를 넣었다. 애액이 넘쳐 녹진해진 입구가 가쁘게 성기를 삼켰다.
“8년 기다려서 넣었으면 최소 다섯 시간은 하게 해 줘야지.”
빌면서 원할 때는 쳐다봐 주지도 않고는. 누가 들으면 내가 못 하게 한 줄 알겠네.
“그, 건 오빠가, 해 달라고 해도 안, 흐아앗.”
말하고 있던 유연에게 대답이라도 하듯 준오가 성기를 끝까지 쑤셔 넣었다. 몸이 찌릿해지는 것을 느낀 유연의 눈가가 다시 벌게졌다.
“해 달라고 했는데 안 해줘서 속상했어?”
준오가 유연의 안에서 제 것을 빙그르르 돌리며 말했다. 꽉 차 젖어 있는 안이 헤집어지며 움찔거렸다. 정신이 나가서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준오의 다정한 말에 대꾸라도 하듯 내벽이 주르륵, 물을 흘려냈다.
“그때 안 해준 거 두 달 동안 몰아서 다 해줄게.”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퍼지고, 준오가 아래를 박아 올리며 유연의 목을 물었다. 같은 곳이 집요하게 박힐 때마다 몸에 찌릿하게 전기가 일고 아릿한 쾌감에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감각에 고개를 젓다 손톱으로 준오의 등을 긁어내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에 처넣는 것만이 제 일인 듯 유연의 몸 안에 집요하게 제 것을 새겨 넣었다.
이미 한 번 간 탓에 예민해져 히끅거리며 발발 떨고 있는데 한 올의 자비도 없이 무식하게 커다란 것이 몸 안을 죽죽 왕복했다. 커다란 귀두가 오갈 때마다 내벽을 주륵 긁어 물을 끌어 올렸다 다시 넣었다 하며 질척한 소리를 냈다.
너무 벅차 눈물을 흘리며 두 손으로 등을 긁자 입을 맞추는 바람에 숨까지 막혀왔다. 이대로 미쳐서 죽어 버리는 게 아닐까. 막힌 입에서 침이 흘렀고, 아래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박힐 때마다 그의 성기를 꾹꾹 씹으며 벌렁거렸다. 자신이 너무 음란한 여자처럼 느껴져 자꾸 올라오는 너무 좋다는 말을 이를 악물고 삼켰다.
방 안이 음란한 신음과 철벅거리는 물소리로 가득해졌다. 안쪽이 흐물흐물하게 풀려 그가 쑤셔 넣는 모양대로 내벽이 짓이겨지는 게 느껴졌다. 아래가 강준오의 것에 맞춰 새로 만들어질 것 같았다. 아득한 기분에 이젠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며 준오의 목을 끌어안았다.
단지 지금은.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고 해도, 이성 같은 건 다 죽어버리게 되었다고 해도 이 남자가 주는 지옥 같은 쾌락에 매달려 울 수밖에 없어서. 나를 제발 살려줬으면, 나를 그냥 이대로 죽여줬으면. 이중적인 마음이 넘실거리며 머릿속이 점점 새하얗게 되었다.
* * *
“…거실 소파에서 자고 있길래 방에 데려다 눕히는 거야.”
차마 눈도 뜰 수 없는 무거운 몸 상태. 잠결에 누군가에게 들어 안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뒤이어 새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른 아가씨 눕히고 나와.”
유연은 귀로 새언니와 준오의 대화를 듣기는 했지만 몸이 물먹은 솜처럼 늘어져 차마 입도 눈도 뗄 수가 없었다. 곧이어 조심스럽게 준오가 자신을 침대에 눕히는 게 느껴졌다.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고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려 덮어주었다. 곧 닫혀 있는 방문 너머로 아주 작게 목소리가 넘어왔다.
“진짜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강준오 너 우리 아가씨 넘보지 마. 너 같은 망나니 놈한테 우리 귀한 아가씨는 못 줘.”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받을 일 없고, 그럼 애가 소파에서 자고 있는데 그냥 내버려 둬? 아직 이른 아침인데 이 층은 왜 올라왔어.”
“위층 욕조만 대형 히노키탕이잖아. 아침 해를 보면서 목욕해야지.”
“그래, 푹푹 삶아질 때까지 실컷 해라. 난 한두 시간 더 잘 거야.”
핀잔하는 듯한 준오의 말소리와 함께 건너편 방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깨어 있었으면 새언니를 보고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 했을 텐데. 일어날 수가 없어 차라리 다행이었다.
강준오, 나 받을 일 없어? 새벽까지 물고 빨고 죽어 넘어가기 직전까지 제 걸 넣어 놓고는, 나쁜 새끼…. 그만한 미친놈이 또 있을까. 끝도 없이 서는 준오의 물건이 나중엔 징그럽게 느껴져 이젠 제발 그만하라며 울면서 빌 때야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멈춰주었다. 잠결에도 잠시 욕을 하다가 다시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몸이 침몰해 침대에 꿰인 것만 같았다.
느지막이 일어나니 주현이 준오는 먼저 본가로 돌아갔다고 했다. 좀 전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오늘 아버지 생신이시라던데, 어떻게 양양까지 올 생각을 했는지 신기하다며. 하여간에 강준오도 꽤나 망나니 아들이라고 주현이 빈정거렸다. 오랜만에 바람이라도 엄청 쐬고 싶었나보다 하면서, 요새 뭐 답답했나? 하긴 걔가 따라나서겠다고 한 것 자체가 신기하긴 했지, 하면서.
돌아가는 길 셋이 오붓하게 대게도 먹고, 겨울 바다도 잠시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하도 죽은 듯이 자서 놀랐다고 많이 피곤했냐며 새언니가 걱정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까무룩 잠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피곤하고 온몸이 쑤신 건 둘째 치고 밤에 욕실에 들어가서 여기저기 발긋한 몸을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대체 얼마나 빨아먹은 건지. 그렇게 많이 먹고 마셨는데 살도 1kg 빠져 있었다.
* * *
“드디어, 사실상 BPM의 궁극적인 목표 두 가지 중 남은 하나였던, 음원 비딩 사이트를 새해에 오픈합니다. BPM 초창기부터 계셨던 직원분들은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의 첫 번째 목표인 디지털 스트리밍 음원 서비스는 국내에서 가장 큰 음원 사이트로서 QL과 한 몸이 되어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구요, 두 번째 목표인 음악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음원 판매와 작곡, 작사가 컨택 사이트 론칭을 위해 아티스트 전문 섭외 팀이 신설되었습니다. 우리는 아티스트와 업체 연결하면서 받는 커미션 10%를 구매자를 통해 받게 됩니다.”
유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음원 비딩 사이트 이름은 BPM Ade로, 신규 음원을 자판기에서 달콤한 탄산을 뽑아 마시듯 쉽게 구매한다, 톡톡 튀는 신선함을 유지한다는 뜻의 합성어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완전히 인력 섭외가 끝날 때까지 우리 서비스 기획 마케팅 팀에서 해당 프로젝트를 서포트해야 하는 건이 있을 겁니다. 업무에 참고 부탁드립니다.”
아, 지금도 바빠 죽겠는데. 강준오 나랑 같이 논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그러고 보니 못 보던 얼굴들이 있기는 했지만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대형 기획사에서 어렵사리 섭외해 온 사람들이라던데, 대체로 인물이 좋아 지나만 가도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음원 관련 일은 연예 기획사에서 연습생 하던 사람들도 많이 흘러들어 오다 보니 BPM의 인물들도 워낙 좋았지만, 신규 부서 사람들은 정말로 훤칠했다. 영업까지 뛰어야 하는 일이라 더 그런 듯했다.
특히 그중 팀장인 한강우와 과장으로 입사한 안리는 누가 봐도 튀는 수준이라 어쩌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면 다들 곁눈질하느라 정신없는 게 보였다. 아무리 대기업 분위기가 변했다고 해도 엔터 산업과 다른 산업은 온도 차이가 크게 날 테니까…….
“진기우, 왜 여기서 일하고 있어? 케미컬은 어쩌고.”
살갑게 눈웃음치며 웃는 미스코리아 스타일의 섹시한 미녀, 안리가 기우에게 다가와 말했다. 유연이 눈만 모니터에 두고 귀를 쫑긋거렸다. 미녀님이랑 기우 씨랑 아는 사이였구나…….
“누가 할 말인데. 넌 왜 여기에 있어?”
“준오 오빠가 아티스트 계약 삼백 명만 채우고 나가라던데. 난 신규 팀 계약으로 잠깐 5, 6개월만 일하고 다시 기획사 실장 자리로 돌아가. 용병이야. 신규 팀 자리 잡힐 때까지 서포트해주는 걸로….”
준오 오빠라니, 아는 사이였구나. 저런 미녀랑 알고 지내면서 왜 나한테 그래 하는 생각에 좀 뾰로통해졌다. 몸매 좋은 미녀와 기우가 서서 이야기하는 모습이 누가 봐도 선남선녀였다. 이제 점심시간이라 내려가야 하는데. 유연과 아영이 일어서 눈치를 살피자 기우가 금세 눈치채고 나중에 이야기하자며 안리를 보냈다.
“기우 씨, 에이드 팀 안리 씨랑 아는 사이야?”
구내식당으로 내려가는 길 기우가 웃으며 과장님께 대답했다.
“아, 네. 어머니들끼리 친구셔서. 저랑도 친구 사이예요.”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끼리 친하시네요. 아까 그쪽만 드라마 세트인 줄 알았어요.”
아영이 한술 더 떠 말했다. 아, 사람들 생각하는 건 다 똑같구나. 구내식당 메뉴 중 한식을 고른 유연이 고추장을 슥슥 비벼 신나게 비빔밥을 먹었다. 팀장님이 그런 유연을 보며 말했다.
“유연 씨는 엄청 말랐는데, 어쩜 저렇게 복스럽게 잘 먹을까.”
“유연 씨, 먹방을 한번 해 봐요. 유연 씨 유튜브 하면 먹방의 역사를 새로 쓸 거야.”
내가 오늘도 너무 잘 먹었구나 하는 생각에 주춤한 표정을 짓자 기우가 옆에서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것이 보였다. 아, 민망해….
팀장님과 과장님은 먼저 올라가고 젊은이들은 카페를 향해 걸었다. 가다 다른 팀 동기를 만난 아영이 양해를 구하고 따로 커피를 마시러 나갔다.
“고마운 아영 씨. 따로 자주 나가라고 커피 쿠폰 한 달 치 보내주고 싶은데 오해할까 봐 못 하고 있어요.”
기우의 말을 들은 유연의 웃음이 터졌다. 못 말려.
“주말 동안 왜 살이 빠진 것 같지. 재밌게 놀고 왔어요?”
귀신같은 진기우. 고작 1kg 차이인데 알아보는 그가 신기했지만 살이 빠진 이유를 말할 수는 없었다. 사실 오늘은 그와 가까이 있고 싶지 않았다. 뭔가 부정을 저지르고 만나는 것처럼… 그를 볼 때 희미한 죄의식을 느꼈다. 애써 생각을 누르고 기우에게 답했다.
“네, 리조트 정말 좋더라구요. 기우 씨도 나중에 거기 꼭 가봐요. 온천탕도 진짜 크고, 도서관까지 해 놨어요.”
“싫어요.”
“네?”
“사진 보니 어딘지 바로 알겠던데, QL 임원 지원 리조트니 나도 아버지 아이디로 어렵지 않게 갈 수 있겠지만…. 거긴 앞으로 영원히 안 갈 거예요.”
기우가 스카프에 쌓인 유연의 목덜미를 잠시 응시하고는 말했다. 설마….
“토요일, 전에 유연 씨가 보고 싶어 하던 전시회 이제 오픈했던데 거기 갈까요? 서촌에.”
아…. 밥 먹고 들어오던 길, 붙어있는 포스터 보고 보고 싶었던 전시인데 한다고 말했던 걸 기억하나 보다. 그러자고 답했다. 그날 만나서 좋게 이야기하자고 생각했다.
“열두 시 반에, 집 앞에 데리러 갈게요.”
기우가 유연을 열기가 일렁이는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 잘 거절할 수 있을까.
자리에 돌아오니 아영이 급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리님, 들으셨어요? 임빈아 대리 퇴사한다는데요. 바로 이번 주에.”
친척 덕에 손쉽게 인맥으로 BPM에 입사하고, 인수합병으로 편하게 대기업까지 입성했다며 여기서 말뚝 박아 넣겠다는 말을 지나가면서도 몇 번이나 들었던 것 같은데 놀랍기 그지없었다. 임빈아가, 그 문제의 임빈아가 퇴사를 한다고?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거예요? 우리보다 좋은 조건의 이직처는 어렵지 싶은데…….”
“이유는 말 안 하는데 자진 퇴사라는 것 같아요. 뭔가 사고를 친 것 같은데 디자인 팀 팀장님도 내용을 정확히 모른다고 해요. 근데 윤리위원회 사람들이랑 몇 차례나 면담하는 걸 사람들이 회의실 지나가며 봤대요…. QL 윤리위원회 면담이면 보통 심각한 사안이니까 다들 무슨 일이냐고 궁금해 미치려고 해요. 대형 사고 친 거 아니냐고. 근데 임빈아 대리 진짜 한마디도 안 한다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나를 싫어하던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급하게 나간다고 하니 속 시원함보다는 묘한 마음이 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회사는 정말 좋아하는 걸로 보였는데…. 조금만 본인 손해 보는 게 있어도 말부터 퍼트리는 사람이 한마디도 못 한다고 하니 뭔가 어마어마한 일이 있었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기우 씨에게도 물어봤지만 본인도 아무것도 모르겠다며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오후에 화장실에서 나오는 임빈아 대리를 잠시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니 잠시 주춤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급히 밖으로 나갔다. 항상 자신을 굴러온 돌 취급하던 사람이 자신을 보곤 도망치듯 나가는 게 조금 이상했지만, 더 이상 얼굴 붉힐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속이 좀 편해졌다. 다른 곳에 가서는 부디 남에게 그런 식으로 상처 주고 살지 않는다면 좋을 텐데.
* * *
토요일, 주말이었다. 오늘은 더 늦잠 자고 싶었지만 애써 일어나 화장을 하고 머리도 말았다. 거절한다고 해도 기우에게 자신이 좋은 모습으로 남았으면 했다. 자신도 기우에게 미련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인생의 반을 같이 지낸 강준오가 저렇게 진저리를 치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오 말대로라면 자신을 이용한다는 건데…. 자신이 정말 그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주현과 떨어진 준오. 둘이 서로의 곁에 없는 모습은 상상이 가지 않는데, 사실 그게 거절하려는 가장 큰 이유였다. 자신의 마음도 중요하지만, 저 둘의 관계 역시 유연에게 소중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과 함께 있던 시간은 제 어린 시절의 큰 기둥이자 기쁨이었다. 단단한 사람들의 애정을 받으며 정신적으로 가장 나약한 시절에도, 누군가에게 이유 없는 괴롭힘을 받을 때도 바닥까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바쁘신 부모님의 빈틈을 촘촘히 채워준 자신의 귀한 사람들을 위해 이 정도의 호감과 관심을 접는 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다만, 준오와 보낸 밤 이후 몸에 그의 그림자가 깃들어, 새겨지는 기억들이 두려웠다. 조금만 방심하면 온 일상에 깃드는 자극적인 생각들을 떨치는 게 꽤나 고역이었다. 두 달. 자신은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석고 가루처럼 잘게 무너지고 깎여진 속내에 그가 파고드는 것이 두렵다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그 앞에서 속수무책인 자신이 하찮게 느껴졌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어 의자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테라스에 나갔다. 12월의 바람이 낮인데 왜 이렇게 찬 걸까. 일 초 만에 정신 다 차려졌네, 하는 참에 대문 틈 사이에 은색의 차가 보였다. 설마 벌써 온 건가, 아직 삼십 분 전인데. 코트위에 머플러를 두르고 급하게 밖으로 나가니 기우의 차가 있었다. 조수석 문을 똑똑 두드리자 바로 잠금이 풀렸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아직 삼십 분 전인데.”
“나 와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요? 춥죠?”
기뻐서 설레는 눈동자가 가슴에 닿는 것 같았다. 그가 히터 온도를 높이며 유연에게 말했다.
“잠깐 테라스 나갔는데 대문 아래 문틈 사이로 은색 차가 바로 보이던걸요? 기우 씨겠거니 하고 바로 나왔어요.”
“나 아니었으면 추운 날에 나왔다가 도로 들어가야 했을 거 아니에요. 전화를 먼저 하지.”
순간 왼편에 둔 유연의 손을 잡으려던 그가 애써 참는 듯 손을 되돌려 운전대에 놓았다.
“유연 씨 뭐 먹을래요?”
“오늘은 흠, 미술관 근처에서 적당한 브런치 먹어요. 볕 좋은 곳에서 간단하게….”
유연이 말한 그대로, 햇살이 잘게 부서져 들어오는 서촌의 작은 가게에서 그림 같은 브런치를 먹었다. 딸기가 잔뜩 얹어진 귀여운 브런치 플레이트들은 사진 찍기 딱 좋았다. 이 사람은 이런 걸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는 건지. 데이트 많이 해 봤을까?
예쁘다며 신나게 브런치 사진을 찍는 유연을 기우가 가만히 지켜보았다. 따뜻하고 행복한 시선이 닿았다. 좋아하는 친구와 즐겁게 노는 것 같은 기분. 어느새 기우 씨와도 많이 편해진 건지 다정한 눈빛에 마음이 녹는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공기 속 서촌의 예쁜 길을 걷고, 전시회장에서 그가 유연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유연과 기우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키에 세미 정장을 입고 코트를 걸친 그가 어디 잡지에서 튀어나온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딱 정갈한 부잣집 도련님같이 생기긴 했지, 진기우 씨.
“유연 씨 사진 찍어주는 거 되게 좋네요.”
“응? 왜요?”
“내가 유연 씨 사진 가질 수 있잖아요.”
어휴, 정말. 하고 가려는데 옆에 있던 커플이 기우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그가 이런저런 포즈까지 요구하면서 열심히 찍어주고 핸드폰을 돌려주자 남자가 유연과 기우도 찍어주겠다며 핸드폰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기우가 자연스럽게 유연을 이끌어 그림 앞에 서서, 유연도 멍하니 함께 웃으며 사진을 찍으려 섰다.
“두 분 싸우셨어요? 옆으로 좀 붙어 보세요. 사귄 지 이제 세 시간 된 커플 같네.”
웃기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자 기우가 유연의 허리를 감았다. 어쩌지 싶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기우가 남자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눈짓을 보내는 게 어쩐지 우스웠다.
“그렇게 좋아요, 기우 씨?”
“네, 저 커플한테 치킨 기프티콘 열 개 보내주고 싶어요.”
이 사람은, 여기저기 퍼 주고 싶은 게 많아서 큰일이야. 실컷 전시를 보고 나니 다리가 아파 근처의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했다. 자연스레 회사 이야기도 하다가 어제 퇴사한 임빈아 대리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임빈아 씨, 인사도 안 하고 어제 물건 정리해서 가더라구요.”
“음…. 난 유연 씨 자꾸 괴롭히던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잘 됐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나도 전혀 들은 바가 없어요. 무슨 짓을 했길래 윤리위원회에까지 회부된 건가 싶고. 근데 그러면 보통 인트라넷에 사건 내용이랑 결과 올라와야 하는데 그런 게 없더라구요.”
기우 역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으음…. 이번 일 진짜 이상하죠.”
“아, 공지 올라온 건 이것밖에 없네요. 앞으로 BPM 문서 공유 시 공유 폴더로 공유하지 말고 모든 수정 히스토리 파악할 수 있는 공유 툴에 업로드해서 경로 입력하라고….”
공지가 혹시 올라왔나 하고 회사 인트라넷 앱을 켜고 살펴보던 기우가 말했다. 으음, 사건 이야기는 역시 없구나.
“임빈아 씨가 기우 씨 열심히 유혹하는 거 자주 봤어요.”
유연이 재미있다는 듯 해맑게 웃자 기우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유연에게 말했다.
“아니, 재밌어요? 난 혹시라도 유연 씨가 오해할까 봐 얼마나 식은땀을 흘리면서 밀어냈는데….”
“물론 그것도 재미있게 잘 지켜보고 있었구요. 기우 씨 난처해하는 거….”
마주 보며 실컷 웃다가, 저녁을 먹자는 기우를 말리며 오늘은 가족들과 식사해야 한다고 했다. 사실 그렇진 않았지만 저녁까지 먹으면 더 미안해질 것 같았다. 늦게 들어가다가 준오를 마주칠까 걱정도 되고. 즐거운 시간이 아쉬워 나중에 이야기해야지, 조금 이따 해야지 하다 보니 집에 갈 때가 되었다. 근처 주차장으로 돌아가 차에 오르자, 수다스럽던 둘 다 어쩐지 말이 적어졌다. 차들이 느릿느릿 서행하는 주말의 고속도로에서, 기우가 말을 건넸다.
“나 유연 씨가 오늘 무슨 말 할지 알아요.”
유연이 운전하는 그를 돌아보았다.
“나 오늘 거절하려는 거, 눈치채고 있었다구요….”
언제나 자신을 향해 웃던 남자의 낮게 깔린 목소리를 들으니 유연의 심장이 쿵쿵 뛰어올랐다. 눈치채고 있었구나. 기우의 기민한 시각이나 촉각 같은 것들은 일에만 발휘되는 게 아니었구나.
“기우 씨, 기우 씨가 싫거나 한 건 아니….”
“유연 씨 바보예요?”
기우가 유연의 말을 가로막고 말했다.
“내가 그랬잖아요. 천천히 하라고. 나 오래 잘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겨울이라 그리 늦지 않은 시간에도 이미 강가의 고속도로는 어둑해져 불빛이 가득 일렁거렸다. 한강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따뜻한 차 안인데, 한강의 바람이 일렁이는 것 같다고. 기우의 목소리가 자신을 나무라는 12월의 한강 같았다.
“유연 씨 당장 어디 가서 연애하기로 했어요?”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그런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급해요. 내가 당장 사귀어 달라고 하지도 않는데. 막상 나 완전 거절하고 나면 회사에서도 어려워할 거면서.”
맞다. 맞는 말이긴 한데….
“마냥 기다리게 한다고 내가 뭐 화낼 것 같아요? 난 유연 씨가 사귀는 사람도 없으면서 나 그냥 이렇게 놔 버리는 게 더 싫어요. 희망 고문이라고 하던데, 희망이 왜 고문이야. 거절이 고문이지. 천천히 해요. 다른 연애 시작한다면 그때 거절하는 건 받아 줄게요. 지금 나 밀어내 봤자 괜히 관계만 어색해져요. 안 보고 지낼 것도 아닌데. 그렇지 않아요?”
낮은 목소리로 설득하는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납득하고 있었다.
“기우 씨, 그래도….”
“그래도는 뭐가 그래도예요. 난 유연 씨와의 관계 단기전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유연 씨 물고 더럽게 구는 인간 누군지도 너무 뻔하고. 다 아는데. 나 손 안 대고 가만히 지금처럼 있을 테니까….”
잠시 말을 멈추고, 그가 유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놀다 와요. 뭘 하든 간에. 나 이런 상황 올 거 생각 안 했던 거 아니니까. 그냥 나 있다는 것만 까먹지 말고 지금처럼 있어요. 한동안 데이트 못 한다고 해도 괜찮아요….”
꽉 막힌 도로에서 빨간 자동차 불빛이 감정의 경고등처럼 일렁거린다. 유연이 기우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집 앞에 도착해서야 내린 뒤 문 앞까지 데려다주려는 기우를 붙잡듯 말했다.
“기우 씨 말대로 할게요. 다만, 차 내려서 집 앞까지 데려다주진 말아요….”
잠시 숨을 고르고 그를 바라보았다. 기우가 유연을 눈으로 쓰다듬듯 훑었다.
“조심히 들어가요, 기우 씨. 월요일에 만나요.”
그는 유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은지 잠시 입을 악물었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연이 대문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집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은색 기블리가 계속 집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차가 이동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 * *
“상무님, 말씀하신 대로 임빈아 대리는 자진 퇴사하도록 권했고 어제부로 퇴사 처리되었습니다.”
“수고했어요. 퇴사 사유 퍼지지 않게 입막음은 잘 됐습니까?”
준오가 쌓여 있는 서류 더미를 처리하다가 잠시 안 비서를 향해 눈길을 주었다. 과하게 일이 많은 상사를 따라서 주말 출근까지 했음에도 이제 비서 생활이 익숙해져 체념한 모습이었다.
“네, 상무님께서 따로 불러서 언질까지 주셨으니, 윤리위원회와 인사 팀과는 이야기가 잘 되었습니다. 다만… 디자인 팀에서 본인도 말을 안 하고, 위에서도 이야기를 안 주신다고 많이 답답해하는 느낌입니다. 뭔가 심각한 사안인 건 알겠는데 팀장인 자신이 어떻게 이유를 모를 수가 있냐면서요. 게다가 임빈아 대리와 친인척 관계이기도 하니까요.”
“한 팀의 팀장이 대형 폭탄까지 끌고 오고, 대형 사고 쳤을 거라는 건 본인도 당연히 눈치로 알 텐데. 연대 책임 지고 싶은 거 아니면 상부의 방침에 너무 따지고 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같이 문책받겠다면 알려주겠다고 해요. 나로서는 책임 같이 묻고 물갈이하고 싶은 심정이니까.”
언제 보아도 칼같이 냉정한 사람이었다. 타 회사에서 비슷한 직무를 하는 지인들에 비하면 자신은 인격적인 대우와 좋은 연봉을 보장받고 있지만, 스타트업 출신 대표들은 그래도 좀 융통성이 있는 타입이 많다던데 자신의 상사 강준오의 경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전형적인 재벌 자제 출신의 오너 느낌이라 때때로 간도 쓸개도 내놓아야 한다는 스타트업 운영을 어떻게 했던 건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외척이라 소문이 안 나서 그렇지 사실 재벌가 출신이 맞긴 하니, 아마 반주현 이사님의 케어 덕이 크겠지….
좀 과하다 싶게 잘생긴 얼굴에, 저 정도 직위면 어떻게 득 좀 보겠다고 아첨 떠는 인간이 한 트럭 붙을 법도 한데 냉정한 성품과 그것보다 더 냉정한 말투에 아첨꾼이 붙을 틈도 없이 대부분 겁부터 먹곤 했다.
멀리서는 그의 외모를 찬양하던 여직원들도 너무 긴장돼서 잘 쳐다도 못 보겠다 하는 앓는 소리를 하는 걸 안 비서가 몇 번을 받아주었으니.
“네 상무님. 그리고 윤리위원회에서 반유연 대리가 억울하게 몰린 부분이 있으니 이 부분은 오해를 풀어줘야 하지 않겠냐고…. 조용히 처리하시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 부분은 재고의 여지가 없으시냐고 한 번만 더 확인해 달라고 하더군요. 전사 공지까진 아니어도 BPM 내부 팀만이라도 히스토리 공개해서 알아야 하지 않겠냐고 하시네요.”
“아니요. 그건 그냥 기밀에 부치고, 다시 묻지 말아 달라고 해주세요. 내가 반유연 대리와 따로 면담을 하겠습니다. 안 비서 주말인데 수고했어요. 먼저 들어가세요.”
“네, 상무님 뜻 잘 전달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안 비서가 대답하고 뒤돌아서 상무실을 조용히 나갔다. 따로 위로해 주시고 어떻게 할지 의향을 물어보시려는 걸까. 가끔 너무 냉정하다 싶긴 하지만 대체로 명석하게 법인을 이끌어 나가는 자신의 상사에게 뭔가 생각이 있으시겠거니 하고 무심히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모니터를 보던 준오에게서 냉정한 조소가 새어 나왔다. 유연을 마음고생시킨 인간은 조용히 없애버렸고, 억울한 부분은 제가 좋은 성과를 남겨 주었으니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었다. 유연에게 붙은 벌레만 아니었다면 다 밝혀 풀어주었을 텐데 그 부분은 저도 안타까웠지만 별수 있나. 앞으로도 제가 유연을 감싸고 잘 지켜주면 될 테니까.
유연이 열네 살 때부터 알았고 지금 스물여덟이니, 벌써 십사 년이나 됐구나. 언제 이렇게 시간이 살 같이 흘렀는지, 그 집에서 처음 봤던 유연의 살구같이 말갛고 예쁜 얼굴과 맑은 눈동자가 떠올랐다가 지난주 양양에서의 시간이 오버랩되었다.
생각하면 마냥 아찔하다가도, 그 얼굴을 만약 그딴 놈에게 보였을 거라고 생각하면 화가 차올라 당장 유연을 어디 가둬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반년 안에 저 악질적인 새끼가 나갈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게 그저 아쉬울 뿐.
그리고 제 예상대로, 손을 대고 나니 하루에도 몇 번씩, 징그러울 정도로 치밀어 오르는 저열한 생각들을 억제하는 게 고역이었다. 마음 같아선 일이고 뭐고 매일 유연을 찾아가서 붙어먹고 싶었다. 그 말간 얼굴이 자신의 아래에서 무너지던 장면을 떠올리면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워 아랫도리가 부지불식간에 턱턱 쳐 올라 업무를 보다 곤혹스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신의 부서진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처럼. 거절하겠다고 나갔으니 제대로 거절하고 와야 할 텐데, 진기우를 따로 만나는 게 마뜩잖았으면서도 간절하게 저를 바라보며 설득하는 유연에게 결국 지고 만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남은 일은 적당히 내일 처리하고 어서 들어가서 유연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새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유연이 좀 없는 집 아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옷도, 목걸이도 액세서리도 다 제가 사준 것으로 두르고 그런 것으로 좀 가둘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면 돈 버는 맛도 좀 더 날 테고. 햇빛 도는 곳에서 햇살처럼 자란 유연이니 더 사랑스러운 것이겠지만.
역시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다 전화기를 들어 유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여러 번 가도 받지 않자 아직도 만나고 있나 초조해지는 마음이 들었는데 열 번의 신호가 지나자 겨우 목소리가 들렸다.
“집에 들어갔어?”
-응, 방금 들어왔어. 배고파.
목소리가 들리자 금세 마음에서 초조함이 녹아내리는 소리가 났다.
“그 새끼는 뭐 하느라 너 밥도 안 먹였어.”
-저녁까지 먹고 왔으면 더 뭐라고 할 거였잖아. 안 먹고 들어오겠다고 했어.
“그건 그렇긴 한데…. 잘했네. 뭐 먹을래? 나가서 먹을까? 아니면 내가 해줘?”
벌써 여섯 시인데 배가 고프겠다 싶어 외투를 들고 나가는 제 발걸음이 바빠졌다. 더 서둘러 나올 것을. 유연이 언제 돌아올지 마냥 생각하고 있을 자신이 싫어 일이나 하러 나온 것이 조금 후회되었다.
-오늘도 출근했으면서 무슨 음식을 해. 시켜 먹자. 곱창 시켜 놓을게.
“곱창이 무슨 밥이 된다고…. 알았어. 내가 지금 집에다 시켜 놓고 들어갈게. 받아서 이 층 올라가 있어….”
밥 안 먹고 영양가 없는 기름 덩어리나 먹는 게 맘에 들진 않았지만 그게 먹고 싶다니 어쩔 수 없지. 오늘따라 엘리베이터가 느려 바뀌는 숫자를 쳐내 버릴 듯 바라보다가 아, 하고 급히 배달 앱부터 켰다. 마음이 바쁜지 가슴이 뛰어 주차장에 내리자마자 차를 향해 뛰어가듯 걸었다.
* * *
올라가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 보니 유연이 소파를 등받이로 쓰고 거실 테이블에 앉아 곱창이 쌓여 있는 곳에 젓가락을 대고 예쁘게 다듬어 놓고 있었다. 몇 개 먹어 놓고 안 먹은 척하려고 저러고 있지.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꾹 잡아 내렸다.
“그렇게 다듬으면 몇 개 먹은 거 티 안 날 줄 알아?”
“하, 뭐래. 그냥 예쁘게 먹으려고 정리하는 거거든?”
“그래? 나 손 씻고 올 동안 네 입에 묻은 기름이나 닦고 다시 말하자.”
준오의 말을 들은 유연이 화들짝 놀라며 손에 입을 대보더니 묻은 기름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는 똑똑한 애가 왜 먹을 것만 앞에 두면 정신을 못 차려서는. 그래서 더 열심히 먹이곤 했지만. 손을 씻고 돌아오니 안 먹은 척하는 건 포기한 듯 오물오물 곱창을 씹고 있었다.
“매운맛 순한 맛 다 시켰네.”
“그래서 싫어?”
“아니 좋다구…. 무슨 말도 못 해.”
유연이 입을 내밀고 뾰로통한 표정으로 준오를 보며 말했다. 입가엔 여전히 다 닦지 못한 곱창 기름이 반지르르하게 올라 있었다. 으이구. 와인 꺼내 줄까 하니 오늘은 맥주라기에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잔에 따라 가져다주었다.
“설거짓거리만 나오게, 그냥 캔으로 주지.”
“맥주는 잔에 따라 먹어야 향이랑 풍미가 살아나는 거야. 먹을 땐 맛있게 먹어야지.”
신나게 맥주에 곱창을 먹고 있는 유연을 보고 있자니 덩어리진 마음이 또 좀 풀어져, 옆에서 김 가루와 맨밥으로 주먹밥을 동그랗게 말아 접시에 얹어 두고는 자신도 맥주를 한 입 마셨다.
네가 좋으면 나도 좋으니. 내 어두움의 단면을 모두 가려서, 천진하게 나에게 웃어주는 네가 언제나 지금처럼 이렇게 머물러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나 결국 어린 날 유연의 뒤에서 그녀를 괴롭히던 아이들을 가끔은 잔인하게 짓밟아주던 자신이나, 진기우처럼 다른 마음을 품고 접근하는 빌어먹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두의 입막음을 해 두고 자신의 울타리 안에 유연을 두는 저를 보고 있자면, 자신은 이미 글러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여주지 않았던 자신의 일부를 보여 혐오 당하느니, 보여주지 않고 이대로 머무르게 하면 되지 않을까. 네가 머물러 줄 날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세어 볼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조금이라도 더 늦춰 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자고 가.”
맥주를 두 캔째 마시던 유연이 준오를 보다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고 싶은가 보다, 하는 표정. 당연히 자고 싶지. 사실 안 자고 싶은 때는 없었는데, 그저 응당히 참았을 뿐. 테이블 대각선에 앉아 있다가, 옆자리로 가니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맥주에 양 볼이 발개져 가지고.
“오빠 나 방금 맥주 먹었…. 흡.”
입을 벌려 맞추고 혀끝을 넣으니 축축한 맥주가 고여 있었다. 입천장이며 볼살과 잇몸을 스르륵 핥아주니 준오의 손에 잡힌 손가락들이 움찔거린다. 아직 마르지 않은 맥주라도 입 속에서 찾는 듯 혀를 훑어내니 유연의 혀도 준오를 따라나섰다.
“자고 가라니까 왜 이렇게 순순하게 끄덕여. 자고 갈 때만 기다렸어?”
맥주로 약간 온도가 올라간 말캉한 몸을 꼭 안아 귓가에 말을 하니 몸짓이 후들거린다.
“그런 거 아니…. 흐읏.”
커다란 손이 멋대로 후드 티 안으로 들어가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봉긋한 가슴에 닿는 촉감에 유연은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귀 아래 목을 혀로 더듬으며 양쪽 유두를 만져주자 유연의 호흡이 조금씩 가빠졌다.
“오빠…. 목에 지난주에 자국 나서… 하…. 오늘은 안 돼.”
“자국 나라고 한 건데. 남들이 보라고.”
미친놈의 말이 어이없어 짜증이 날 법한데 상반신 여기저기가 희롱당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뭘 크게 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강준오가 버튼이라도 누른 건지. 저도 모르게 허벅지를 조였다. 벌써 젖어 들기 시작한 아래가 준오 말대로 기다리기라도 한 것 같아 원망스러웠다.
유연의 허벅지가 조이는 것을 본 준오가 허벅지를 만지다 반바지 안쪽까지 손을 넣어 만지작거렸다. 커다란 손이 점점 더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뜨거운 손의 열기가 허벅지에 고스란히 닿았다. 곧 얇은 천 안으로 손가락이 들어와 통통한 두덩을 약하게 쓸어내렸다.
“그러고 보니 조금만 남기고 다 밀었네. 양쪽 살엔 만져지는 게 없고.”
몇 년 전, 수영장 가기 전에 아예 영구 제모를 한 걸 말하는 듯했다. 질구 바로 옆을 쓰다듬는 손길이 야릇해서 애가 탄다.
“맛있게 먹으라고 정리도 다 해놓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지와 팬티가 한꺼번에 내려갔다.
“잠깐, 왜 갑자기 여기서…. 응?”
핑그르르 몸이 젖혀지며 유연이 거실 러그 위에 눕혀졌다. 다 벗겨져 버린 하반신이 민망할 틈도 없이 앉아 있던 준오가 유연의 엉덩이를 제 입 앞까지 들어 올려 음부를 보고 말했다.
“잘 젖어서 안 빨아주고 바로 넣어도 되겠다.”
음부 앞에서 동굴 같은 목소리가 울리자 아래가 저절로 저릿해졌다. 아래로 꺾인 유연의 고개가 차마 준오를 바로 보지 못하겠다는 듯 소파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오빠는 유연이 보지 맛있으니까 일단 좀 먹을게.”
어떻게 저런 말을 할까 하는 생각에 다시 고개를 돌리자 준오의 입에 음부가 박혀있었다. 그가 클리토리스부터 혀로 잘게 굴려주기 시작했다. 다리가 오므라들며 발가락이 말렸다.
“흐응… 오빠…. 하, 흣….”
클리토리스 아래를 잘게 쳐올리던 혀가 둥글게 주변을 맴돌았다. 허리가 자꾸 비틀어지며 준오가 맛있게 먹는 곳 바로 아래가 벌름거리는 느낌이 났다. 아래엔 입도 대지 않았는데 물이 줄줄 흘렀다.
“으응… 느낌 이상해…. 아… 응.”
클리토리스를 핥던 혀가 길게 아래로 회음부까지 내려와 흐르는 물길을 핥았다. 입구를 혀로 반복해서 쳐올리는 느낌이 들며 물이 찰박이는 소리가 났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민망해 느끼는 와중에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흐읏… 소리 일부러 내지 마. 철벅이는, 앙, 소리…. 흐읏.”
“유연이 보지가 음란해서 나는 소리인데, 이걸 어떻게 안 내….”
말을 끝내자마자 작은 동굴에 혀를 쑥쑥 박아 넣었다. 자지러지며 엉덩이가 자꾸 들렸다. 축축한 촉수가 음부에 들어올 때마다 물이 흐르는 버튼이라도 눌린 듯 액체가 질질 흘러나왔다. 준오가 흐르는 음액에 입을 대고 빨다가 클리토리스와 요도까지 한입에 넣고 죽죽 빨아먹었다. 전신이 요동쳤다.
“오빠, 아, 흐응, 오빠, 거기 하응… 아!”
쥘 것도 없는 단모 러그를 손톱으로 긁으며 고개를 저었다. 준오의 입 앞에 들린 엉덩이만큼 몸이 다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입으로 음부를 물고 있는 채로 준오가 급하게 셔츠 단추를 풀어 헤치다 유연을 내려놓고 바지를 벗어 내렸다. 드로어즈를 벗자 잔뜩 성난 것이 고개를 쳐들었다. 바지 주머니에 있던 콘돔을 꺼내 바로 제 것에 감쌌다. 여전히 저 크기가 눈에 익지 않았다.
“오늘은 좀 빨리… 하… 넣을게.”
후,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것이 유연의 입구를 꿰뚫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잔뜩 흥분해 지난주만큼 힘들게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허리가 저절로 버둥거렸다. 음부가 과하게 커다란 것을 꾸역꾸역 잘도 삼켜냈다. 거실 바닥에 눕혀진 채로 허벅지가 붙잡혀 페니스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흑, 오빠, 아! 아!”
몸이 그가 넣는 대로 밀렸다가 뺄 때는 조금씩 따라 당겨졌다. 가득 찬 것이 왕복할 때마다 야릇한 느낌을 내며 온몸이 짜릿해졌다. 유연의 긴 다리가 준오의 어깨에 걸쳐지더니 그가 몸을 실어 안으로 퍽퍽 박아 넣기 시작했다. 커다란 것이 가득 차 교성이 좀 더 커졌다. 아래위로 페니스가 움직일 때마다 안이 점점 조이며 뜨거워졌다. 음부에 성기가 박히는 행위가, 원래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 행위였구나.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던 때 그의 손에 몸이 뒤집혔다. 고개가 옆으로 돌려져 엎드린 채 엉덩이가 들리자, 그가 손으로 다시 유연의 음부를 벌려내 안쪽을 보았다. 연분홍빛 음부가 오물거리며 다시 제가 먹던 것을 달라고 움찔거리고 있었다. 준오가 환상적인 미술 작품이라도 보듯 느긋이 음부를 응시하다가 제 것을 찔러 넣었다.
“하…….”
밝은 거실 바닥에서, 엉덩이만 올려놓고 준오가 제 것을 박아 대는데 몸은 기분이 좋아 준오의 성기를 꽉꽉 물어왔다. 러그에 눈물도 침도 줄줄 흘렀다.
“오, 빠… 오빠, 흑.”
손톱으로 러그를 북북 긁었다. 달아오른 내부가 커다란 것에 속수무책으로 범해지고 있었다.
“후…. 유연아, 엉덩이가 왜 이렇게 커. 너 엉덩이 볼 때마다 후… 자지가 얼마나 벌떡벌떡 서는 줄 알아?”
그가 올라간 엉덩이 사이로 성기를 박아 넣으며 엉덩이를 짝 소리 나게 때렸다. 정말 내 엉덩이를 보며 그가 그런 생각을 했을까. 치욕스러운데 음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준오의 물건을 꽉 조여 올렸다. 준오가 하… 하고 한숨을 쉬다가 다시 퍽퍽 박아 넣었다.
“음란하네, 응? 엉덩이 맞으면 더 쭉쭉 조이고.”
다른 쪽 엉덩이에 다시 찰진 소리가 났다. 눈물이 질금거렸다.
“아, 흑… 아, 아, 준오 오빠, 아!”
치욕을 항의할 새도 없이 커다란 것이 죽죽 들어왔다. 음부가 움찔거리며 애액을 성기에 잔뜩 발랐다. 박힐 때마다 질척이는 소리도 같이 커져 갔다. 그가 개처럼 유연의 몸을 뒤에서 감싸고 유연의 팔 옆에 제 팔을 내려선 등을 감싸 안듯 박아 넣기 시작했다. 고양이 자세로 몸을 바르르 떨면 등 뒤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왔다. 거실에 커다란 것이 박히는 소리가 철벅이며 울렸다.
“오, 오빠, 나 이상, 아 오빠 너무… 흐윽… 아, 좋아, 으흑, 아, 아!”
온몸이 바르르르 떨리더니 정신이 어디로 날아가는 것 같았다. 비닐 막 너머 뜨거운 것이 움찔거리며 사출하는 게 느껴졌다. 상반신은 무너져 바닥을 짚고 엉덩이만 쳐든 자세 그대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준오가 뒤에서 멈추지 못하고 경련하는 유연을 안았다. 오르가슴이 너무 강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그저 빠진 몸이 펄떡거리는 게 멈출 때까지 얼굴을 바닥에 두고 누워있었다. 한참 넣은 채로 안고 있던 준오가 유연의 등에 잘게 입을 맞추자, 힘이 다 풀린 동물처럼 몸이 바닥에 퍼졌다.
유연의 온몸에 입을 맞추며 제 고양이를 쓰다듬듯 몸을 만지던 준오가 다시 새 콘돔을 껴 넣은 건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다음 날 준오의 집을 나서던 유연은 거실 소파를 보며 당분간 민망해서 앉지도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 * *
“이제 곧 연말이네요. 해의 마지막 날은 종무식 후에 조기 퇴근하는 걸로 확정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모두의 웃음꽃이 피었다. 아, 저는 그럼 연차 썼던 거 취소하겠습니다! 하며 숨 가쁘게 말하는 아영의 대사와 함께. 유연은 새삼 며칠 전의 크리스마스를 떠올렸다. 크리스마스라고 호텔 패키지를 예약한 오빠 부부가 밖에 나가고, 친구들과 약속이 있었던 유연은 결국 자신을 데리러 온 준오의 손에 이끌려 한 시간도 넘기지 못하고 돌아와 인테리어를 마친 준오의 새집으로 향했다. 그 후엔….
그날을 떠올리던 유연의 얼굴이 급하게 화끈거렸다. 그렇게 잘 해 놓고 그 집으로 왜 이사는 안 하고 있는 건지. 자신이 인테리어에 잔뜩 관여한 탓에 제 취향으로만 꾸며진 집을 감탄하며 볼 수 있었던 건 다음 날 오후가 한참 지나서였다. 그 전까진 준오 몸에 매달려 그의 것이 넣어진 상태로 엉엉 운 기억밖엔 없는 것 같아 갑자기 부끄러웠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핑크색의 작은 다이아가 쪼르르 박혀 있는 귀여운 목걸이를 받았고, 그게 지금 유연의 목에 걸려 있었다. 자신은 괜찮은 브랜드의 머플러나 달랑 준 것치고는 민망할 정도로 좋은 선물을 받았는데, 네 월급과 내 월급은 많이 다르니 다음부터 이런 건 들고 오지 말라는 말만 들었다.
준오는 마지막 날엔 뭐 하려나. 물어볼 수도 없고. 이도 저도 아닌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면서, 8년 전의 어느 날 했던 생각들이 떠올랐다. 벌써 약속한 날짜에서 한 달은 지났고, 이제 한 달도 안 남아 버렸네….
출출한 세 시쯤, 간단한 회의를 하며 간식을 나눠 먹고 있던 중 너무 멀리 가 버린 생각을 유연이 도로 집어왔다. 아영이 요새 썸남과 베이킹 클래스에 다니고 있다며 어제 구운 모카빵을 가져왔다. 다섯이 단란하게 앉아 커피 머신에서 뽑아온 커피와 함께 빵을 삼켰다. 탄수화물은 역시 행복의 맛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과장님이 갑자기 말했다.
“유연 씨… 요새 연애하지? 얼굴도 분위기도 묘해졌어. 눈빛 촉촉한 것 좀 봐….”
갑자기 무슨 말씀이지? 에…? 하는 눈으로 과장님을 보고 있으니 옆에서 팀장님도 거들기 시작했다.
“엊그제 서버 팀 윤 팀장이랑 얘기하는데, 윤 팀장이 나랑 친하다니까 팀 애들이 자꾸 유연 씨 남자 친구 있냐고 물어봐 달라고 한다네. 근데 요새 세상엔 이런 거 물어보면 좀 그런가?”
맘씨 좋은 팀장님이 조금 고민하다가 이야기를 꺼내셨다. 뭐라고 해야 하지…. 없다고 해야겠지라고 잠시 생각하는 찰나 기우가 끼어들어 말을 막았다.
“팀장님, 요새 그런 거 물어보면 안 되는 거 맞구요! 대신 제가 말씀드릴게요. 저 여자 친구 없습니다.”
생뚱맞게 껴들어온 기우 씨의 고백에 모두 빵 터져서 즐겁게 웃었다. 팀장님이 머쓱해하며 시무룩하게 이야기하셨다.
“그래… 앞으로도 안 물어볼게요….”
어쩐지 죄송스럽기도 하고. 과장님이 혹시 둘 다 소개팅 필요하면 말해요. 하고 진지하게 권해주셨다. 아영이 어, 과장님? 저는요? 하고 급하게 과장님을 불렀다.
“아영 씨는 썸남 있잖아, 썸남.”
“아, 맞다. 그리고 대리님 두 분은 안리 씨랑 한강우 팀장이랑 같이 외부 미팅 갈 일이 몇 번 생길 것 같아요. 개인 미팅은 직접들 갈 텐데, 대형 기획사 계약은 우리 팀원도 같이 가서 미팅한 뒤에 원하는 부분들 체크해서 사이트랑 프로모션에 반영하려고 하거든요. 어차피 메인은 에이드 팀 둘이 알아서 할 거고, 다음 달에 한 다섯 번 정도만 기획사 미팅 참여한다고 생각해 둬요.”
오오, 대형 기획사 미팅이라니. 설렌다. 가면 연예인도 마주치고 그러나?
“네, 알겠습니다 팀장님.”
“팀장님… 저는 왜…. 저도 가고 싶어요.”
아영이 서글픈 눈으로 말했지만 팀장님은 단호하게 아영 씨가 나중에 대리 달면 꼭 기획사 미팅에 보내주겠다며 말을 아꼈다. 아마 아영이 너무 좋아해 외부 미팅하다 흥분할까 봐 명단에서 빼신 것 같기도 하고. 자신도 기획사로 미팅 가서 너무 두리번거리지 않게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은 시무룩한 아영 씨를 잘 달래줘야지.
기우는 마지막 데이트 이후로 전과 다름없이 유연을 대했다. 본인이 예고했듯 여전히 예의 바르고 다정했으며, 데이트를 권하지도 않았다. 예전에 잘 하던 미묘한 말들도 자제하는 듯 보였다.
이게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불편함 없는 사이에 그가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가끔 자신을 바라볼 때 어쩐지 슬퍼 보이거나 안타까움 서린 표정이 스쳤지만 제게 별말 없이 웃어주었다.
* * *
한 해의 마지막 날 밤이었다. 유연과 주현 부부가 치킨을 시키고 샴페인을 칠링해 놓고 있자니 준오가 늦게야 내려왔다. 이 층에 들러 외투만 놓고 온 모양이었다. 그가 피곤이 스민 얼굴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겼다. 이미 몇 잔 들어간 모습이었다.
“으이구, 너 다른 법인 영감들한테 여태 붙들려 있었냐. 적당히 하고 얼른 들어오라니까.”
주현이 나무라는 목소리로 준오에게 말했다.
“카운트다운도 영감들이랑 할 뻔한 거 겨우 들어왔다…. 넌 성수동 있는 게 진짜 운 좋은 줄 알아.”
“안 그래도 몇 달 있다 광화문 들어갈 생각하면 어휴, 속이 다 답답하네.”
영감들 비위 맞추는 자리 딱 질색이면서, 올해 가끔 저런 모습을 마주치는 걸 보면 역시 대기업에서 버티는 게 어렵긴 어렵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주현과 새언니가 잔과 안주를 가지러 간 동안 유연이 준오에게 말했다.
“…수고했어.”
준오가 유연을 의외라는 듯이 보다가 피식 웃고 유연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유연이 쑥스러운 듯 아주 작게 고개를 돌리며 머리를 부볐다.
“고생하고 와서 고양이 응원 받으니 일할 맛 나네.”
그는 유연의 눈을 바라보다 목에 걸린 목걸이를 가만히 응시했다. 제가 달아준 것을 하고 있는 게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예쁘다.”
얼굴을 붉힐 새도 없이 새언니와 주현이 돌아왔다. 준오가 테이블 밑으로 유연의 오른쪽 손등을 가만히 쓸다 갔다. 가슴이 작게 두근거리는 사이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새해도 이렇게 시작이구나.
샴페인으로 건배를 하고 케이크와 치킨을 먹으며 모두 왁자지껄하게 신년 인사를 했다. 친구들이 정동진에서 펜션을 잡고 카운트다운을 하자는 걸 거절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닌가, 혹시 정동진까지 준오가 데리러 왔을까? 자신과 같이 있기 위해 찾아왔을까?
요사이 자꾸 들어차는 혼란한 감정의 실오라기가 불안해져 샴페인을 한 입 삼켰다. 그냥 지금을 즐기면 될 텐데…. 왜 행복의 뒷자리엔 언제나 불안이 업혀 있을까. 준오와 같이 시간을 보낼수록 그를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게 두려웠다.
한 시간 좀 넘게 마시고 떠들다 슬슬 자리를 정리했다. 주현 부부는 차리느라 고생했으니 들어가라고 방으로 들여보내고 준오와 유연이 함께 식탁을 치웠다. 간단히 샴페인 마시는 자리였던지라 치울 것은 많이 없었다.
유연이 샴페인 잔 설거지를 하려 했지만 준오의 손에 막혀 조용히 상이나 닦아야 했다. 다 치우고 자신은 방으로, 준오는 올라가려던 참이었다. 유연이 방문 앞에서 인사하려고 준오를 향해 몸을 돌리자 준오가 그대로 문을 열어 유연을 방으로 밀고 문을 닫았다.
놀라 준오를 바라보는 유연의 입술에 준오의 입술이 닿아와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혀가 부드럽게 들어와 입 안을 감쌌고, 유연도 같이 따라 얽어 나갔다. 혀가 감길수록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숨이 점점 가빠오도록 키스가 멎지 않다가 준오의 손이 유연의 허리를 감싸 안으면서 입이 떨어졌다.
발개진 얼굴로 준오의 가슴 아래서 숨을 고르고 있자니 어깨를 꼭 감싸 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배에 닿은 단단한 것이 배를 쿡쿡 찌르며 유연을 부르는 듯했다. 준오가 유연의 목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것만으로도 달아오른 몸이 작게 오므라들었다.
“이따 낮에 애들이랑 부모님 댁 간다며.”
낮은 목소리가 정수리 위로 울렸다. 차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답했다.
“으응…. 점심 먹고서.”
볼에 닿아 있는 셔츠 속 심장 소리가 따뜻해 계속 기대어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고 가려나. 그가 같이 올라가자고 할까. 휴일이니까….
곧 볼에 숨이 닿아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준오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곤하겠네. 잘 자고, 집에 잘 다녀와. 갈게.”
자신을 잠시 바라보다 문을 닫고 나가는 발소리가 울렸다. 그냥 가 버리는 준오가 아쉬워서, 설마 자신을 안는 게 그새 질려 버린 걸까. 많이 피곤할까. 곧 계단을 올라 이 층 문을 닫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여전히 두근거리며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이 원망스러웠다. 혹시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서 안지 않은 건 아닐까. 내 가슴이 뛰는 걸 느껴버려서. 그래서 그냥 가 버렸을까.
* * *
“오늘은 청담동의 제이 엔터 계약이고요, 업체에서는 에이드 사이트 오픈해서 아티스트 서칭하고 구매할 때 어떤 기능들이 더 있었으면 하는지, 그런 부분들 체크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이미 에이드 회사 소개서는 pdf로 파일 다 전달된 상태구요. 다 확정된 상태에서 직접 사인하고, 추가 인터뷰만 하시는 거니까 크게 긴장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예고되어 있던 외부 업체 미팅에 가는 길, 한강우 팀장이 말했다. 세심한 관리가 된 것 같은 얼굴에서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어쩐지 기우가 한 팀장의 눈길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은데 과한 생각이겠지. 한 팀장의 SUV를 타고 이동하기로 하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멀리서 볼 땐 다가가기 힘든 느낌의 미인이었던 안리는 유연이 마음에 드는지 몇 번 회의하고 나니 항상 호의적이었다. 이 정도의 미녀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적이 딱히 없었기에 유연도 안리에게 호감이 생겼다. 또래기도 하고, 회사에 좋은 친구가 생길 것 같은 예감.
다만 기우는 유연과 한동안 외부 미팅 다니게 된 걸 분명히 기뻐하는 눈치였는데, 막상 나가면 표정이 복잡해 보이긴 했다. 왜 그러지…? 한 팀장은 기우에게 무척 잘해주는 것 같은데. 안리가 유연에게 잘해주는 것도 마냥 편하게 보지는 않는 것 같고. 기우의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성공적으로 계약을 마치고, 좀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갔다. 버섯 칼국수 집에서 유연이 열심히 면을 쪼록쪼록 먹고 있다가 시선이 집중되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오늘도 그 말을 듣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연 씨 진짜 맛있게 먹는다. 새초롬하게 생겨서 파스타만 먹을 것 같은데.”
“생긴 것과 달리 말해 보면 유한 느낌이에요, 유연 씨는. 앗, 이거 나쁜 말 진짜 아니구요. 많이 먹지는 않지만 뭐든 맛있게 먹는달까.”
안리가 당황하며 말했다. 기우는 어쩐지 유연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게 싫은 듯 보였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넘어가야 했다.
“유연 씨, 진짜 잘 먹어요.”
얼굴이 붉어져 앞을 잠시 보다가 다시 고개를 내려 칼국수를 먹었다. 사람들이 솜사탕 먹는 너구리를 보듯 유연을 보는 것 같았지만 자신은 지금 바쁘니까… 그냥 두자.
* * *
아영이 동기와 가끔 커피 타임을 가질 때면, 그 시간에 아영 대신 안리가 함께하게 되었다. 기우는 유연과 둘이 있는 시간에 방해를 받는 듯해 안리를 째려보곤 했지만 그녀는 유유히 기우의 눈빛을 무시하고 유연에게 팔짱을 꼈다. 기우의 시무룩한 표정에 어쩐지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거절 아닌 거절을 한 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고,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자신에게 잘해주니 어쩐지 황송하고 기분이 좋았다.
교태로울 것 같지만 사실은 애교라는 걸 어떻게 부리는지 잘 모르는 유연과 달리, 안리는 남자고 여자고 성별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인 미소와 눈웃음을 뿌렸다. 그 와중에 단호하기는 또 칼날 같았고. 그녀가 ‘유연 씨’라고 이름을 부르면서 다가올 때면 왜인지 기분이 좋아졌다. 준오가 그녀를 왜 QL엔터 용병으로 데려왔는지 지내면 지낼수록 점점 더 이해가 되었다. 아아, 영업은 이런 사람들이 하는 거구나.
오늘도 추운 겨울의 한낮, 회사 근처의 카페에 나간 셋이 옹기종기 수다를 떨다 유연이 잠시 화장실에 가느라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너, 침 흘리지 마. 유연 씨 탐내지 말라고.”
“하, 진기우. 너 유연 씨 앞에서 무슨 순한 사슴이더라? 나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인 줄 알았네.”
“됐고, 네가 남자 여자 안 가리고 만나는 거 유연 씨도 알아야 하는데. 너의 호의가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하는데….”
“넌 뭐 바이는 보기만 하면 다 만나자고 하는 줄 알아? 물론 유연 씨한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의 순수한 호의 좀 모욕하지 마. 지금 나 우리 자기도 있고….”
“헛소리 그만하고, 너네 팀장, 한강우 어쩔 거야. 볼 때마다 나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하…. 내가 진짜 일하다 소름이 버쩍버쩍 돋아서 뒤돌아보면 항상 그 인간이 당장 나 녹여 먹을 듯한 얼굴로 쳐다본다고.”
기우 씨, 안리 씨 하며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차리던 우아한 이들은 어디로 가고, 신경 쓰이는 준 라이벌이 되어 서로 째리고 있었다.
“한 팀장은 어차피, 여기 올 때도 준오 오빠가 얼굴로 들이대고 면접 봤으니까 온 거지. 안 그러면 미쳤다고 여기까지 오겠어. 게이가 기획사 있는 게 편하지 대기업 엔터 있는 게 편할 리가 없잖아. 기획사야 워낙 소수자 많고 그러려니 하는 환경인데. 근데 너까지 있으니까 양손에 꽃이라고 아주 그냥 웃음꽃이 피어서… 연예인 다 필요 없다며 아주….”
한창 말하던 중 유연이 다가오자 둘 다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연은 뭔가 미묘한 느낌에 아방하게 둘을 쳐다보다가 헤헤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라테, 다 식은 것 같아요. 바꿔 올까요?”
“아니에요, 딱 적당한데요 뭐.”
오늘도 상냥한 기우 씨네. 사람들 앞에선 잘 안 그러는데, 안리 씨는 역시 편한가 보다.
“그래요? 유연 씨 추우면 말해요. 내가 안아주면 되니까.”
안리가 유연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머리를 기대자 유연이 조금 부끄러운 듯한 얼굴로 안리를 보며 웃었다. 하아…. 이걸 아웃팅 시킬 수도 없고. 기우가 테이블 위의 영수증을 가루 낼 듯 쥐어 잡으며 안리를 째려봤다. 유연이 기우의 표정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라테를 한 입 마셨다.
다시 칼바람을 뚫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사실 사내 카페 이용하면 될 텐데 왜 점심시간만 되면 갑갑해서 바깥세상의 커피를 마시고 싶은 걸까. 일 층 엘리베이터 앞에 준오가 보였다. 순간 좀 망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 오늘 혼날까….
“안녕하세요.”
셋이 모여 인사를 하자 의외의 멤버 구성이라는 듯 바라본 그가 짧게 묵례를 했다. 안리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준오의 표정이 또 그렇지만도 않아 보였다. 뭐지. 그래도 한 팀인데 기우가 껴 있으면 무조건 다 안 되는 건 아니겠지. 남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저 미약한 표정 변화를, 유연은 읽을 수 있었다. 같이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분명 난방이 잘 되고 있는데 함께 올라선 엘리베이터 안에 서릿발이 날리는 듯했다. 점심시간이라 만원인 엘리베이터 안, 우연찮게 모서리에 있는 그의 옆에 선 유연이 용기 내어 준오의 손가락을 쥐었다. 걱정이 되어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그저 앞만 바라보았다. 순간 움켜쥔 손이 자신의 손을 감싸 쥐었다. 밖에 나갔다 들어와 아직 차가운 손끝을 감싸주는 커다란 손이 따뜻했다. 심장이 붉게 튀어 엘리베이터 안을 도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돌아와 앉으니 핸드폰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혼날 줄 알아]
…손잡아주길래 괜찮은 줄 알았는데, 망했네. 망했어. 순간 잡았던 손을 바라보았다. 더한 것도 많이 했는데, 왜 잡힌 손의 온기가 가장 뜨겁게 느껴질까.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었다. 요새 외부 미팅이 많아 업무들이 밀려 있었다. 기우도 마찬가지인지라 아영과 셋이 함께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올라온 참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려 밖으로 나오자 화장실로 향하는 준오의 얼굴이 보였다.
오늘 두 번이나 마주쳤네? 얼굴이 왜 저리 뚱해? 잠시 생각하다가 아, 옆에 기우 있지. 하고 납득했다. 하지만 그래도 구내식당은 어쩔 수 없지 않나…. 그가 서늘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고 화장실에 들어가는 걸 보고 탕비실에 커피를 가지러 갔다.
키가 큰 테이블에 내린 커피를 두고 나란히 기대서서 아영이 공용 냉장고에서 간식을 꺼내는 걸 기다려 주었다.
“상무님 요새 미묘하게 표정이 좀 풀어지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다시 뵈니까 역시 착각이었나 봐요. 저 정도면 뭐 엘사 남편 후보로 보내도 될 듯요.”
“풋.”
엘사 남편이라니, 강준오가. 하긴 자신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대학 시절 저 오빠 잘생겼는데 얼음이 풀풀 날린다고. 너네 오빠랑 친하다던데, 네가 말 좀 걸어주면 안 돼?
좀 까탈스럽긴 해도 다정한 사람이라고 말하면 대체 무슨 헛소리인가, 하고 보다가 아… 혹시 너네 오빠한테 상냥한 거 말하는 거야? 그건 멀리서 봐도 보이긴 하더라. 하면서 얼굴을 붉히곤 했다.
“어휴, 다들 잘생겼다고 난리지만 전 뵐 때마다 무서워 가지구. 반 대리님은 상무님 같은 스타일 어떠세요?”
아영이 냉장고에서 꺼낸 간식을 테이블에 얹으며 말했다. 잠시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잠시 핸드폰으로 오늘의 날씨를 보던 기우도 고개를 돌려 유연을 바라보았다. 나는… 나는… 그러니까….
“뭐 저도 딱히 취향은 아니…구요.”
그 순간이었다. 아영이 갑자기 공포 게임 VR이라도 체험하는 것처럼 굳어 있는 표정이라 대체 왜 그러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내 등 뒤에 뭐가 있나?
등을 돌리자 강준오가 정수기에서 찬물을 내리고 있었다. 놀란 유연이 쳐다보는 것 따윈 알지도 못한다는 듯 고개를 돌리지 않고. 저 표정을 보니 다 들었구나…. 그가 찬물을 한 번에 다 마셔버리더니 얼음을 내렸다. 콰드득거리며 얼음 내리는 소리가 탕비실을 에워싸고 있었다. 대체 왜 여기에 왔어? 상무실 앞 비서실 안에 정수기 있잖아?
돌아서서 상무실로 향하는 걸음 소리가 유연의 귀에 자갈처럼 내려앉았다. 대체 어디부터 들었을까. 바사삭 멘탈이 가루가 되어 날리는 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아영이 어쩌죠 대리님, 어디서부터 들으셨을까요? 제가 상무님 같은 스타일 어떻냐고 하는 것도 들으셨을까요? 저 내일 잘릴까요? 하는 것을 달래주느라 제대로 제 멘탈을 챙길 수도 없었다. 기우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고….
아영이 먼저 퇴근하고 유연도 슬슬 들어갈 생각이었다. 기우랑 얼마 정도 남았냐고 분량을 체크하고 있는데 메시지가 왔다.
[그만하고 가방 챙겨서 내 방으로 와]
으음, 데려다주려면 주차장으로 오라고 하지. 왜 방으로 오라고 하는 거지. 지금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긴 하지만…. 인사를 하고 가려고 보니 기우도 화장실이라도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힐끗거리다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비서실을 지나 준오의 방문 앞에 섰다. 노크를 할까 하다 그냥 안으로 들어갔다. 준오가 모니터를 바라보다 유연을 보고 불렀다.
“문 닫고, 이리로 와.”
처음 들어와 보는 그의 방, 준오의 책상으로 가서 아래만 내놓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연이 몇 개 풀린 셔츠와 가슴 위로 밀린 브래지어를 책상에 붙이고 앉아 있는 준오에게 엉덩이만 내보이고 있었다. 스커트는 허리 위까지 말려 올라간 지 오래였다. 그가 엉덩이 사이의 질구를 슬슬 핥으며 손으로 음핵을 끈질기게 만져 대고 있었다.
“흐읏…. 오빠, 집에 가서… 응? 집에 가서 하자.”
밤이고 아무리 사람이 없다고 해도, 사무실 구역과 거리가 좀 있다고 해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려워졌다. 제가 소리라도 크게 내 버려서 누가 찾아오면 어쩌지. 비서님들이 뭘 놓고 가서 물건 찾으러 왔다가 목소리를 듣는다든가…. 그러나 요새 수차례 몸을 섞어 그의 손길에 길이 들었는지 준오가 키스할 때부터 이미 입구에선 액이 질척했다.
제 마음도 모르고 그가 핥을 때마다 입구가 벌름거렸다. 핥던 혀가 첩첩거리며 음핵을 집요하게 빨아내는 소리로 바뀌자 허벅지가 부르르 떨리며 엉덩이가 자꾸 바르작거렸다.
“반유연 대리는 딱히 취향 아닌 남자가 빨아줘도 이렇게 줄줄 흘리며 좋아하나?”
들었구나. 어쩔 수 없이 하는 말인 줄 알면서. 곧이어 볼기에 손바닥이 맞부딪쳤다.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입구가 벌름거리며 왈칵 물이 흘렀다. 너무 빨려서 물컹해진 안으로 그저 빨리 넣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잘못했어, 안 했어.”
“잘못, 했어요, 흐윽, 상무님.”
살구같이 보들보들한 엉덩이가, 제 책상 앞에 커다랗게 펼쳐져 있는 게 정말이지 장관이었다. 그가 다시 손을 벌려 질구에 코를 박고 구슬을 빨아내며 애를 태우다가, 유연의 신음이 더 짙어질 때쯤 콘돔을 뜯었다. 입구에 갖다 대고도 넣어주지 않고 위아래로 훑듯 귀두를 움직였다.
“어떻게 해줄까?”
유연이 엉덩이를 달싹이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넣어…주세요, 상무님.”
“어디에?”
정신 나간 인간. 너무 밉지만 쾌락에 굴복한 몸에선 제 마음과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보지에….”
그가 원하는 말을 듣고 입술 끝을 올렸다.
“네가 입구 직접 손으로 벌려봐.”
유연이 책상에 엎드린 채로 엉덩이에 손을 뻗어 두 손으로 입구를 벌렸다. 축축하게 젖어 분홍빛으로 헐떡이는 내부에 그의 것이 안으로 푹 박혀 들어왔다. 하반신이 단단한 것에 처박혀 달달 떨렸다. 드디어 기다리던 것이 들어와 내부에서 쾌락의 물이 흘러내렸다.
“하읏.”
준오가 유연의 엉덩이를 잡고 퍽퍽 찔러 대기 시작했다. 박힐 때마다 책상에 맞닿아 있는 젖꼭지가 위아래로 짓이겨지며 흔들거렸다. 그 와중에도 기다리던 것이 들어와 기쁜지 내부는 준오 것을 꼭꼭 쥐어 먹고 있었다. 흥분해서 정신이 나가 이상한 말을 할 것 같았다. 눈가도 벌게지며 쾌감이 차올랐다.
“오빠…. 하, 상무님, 아, 흑, 으흑, 아!”
회사에서 이런 짓이라니,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그럼에도 좋아 미칠 것 같은 자신에게 치가 떨렸다. 그가 끝없이 박아 넣으며 엉덩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물기 어린 곳에 박히는 소리와 엉덩이 맞는 소리가 함께 울려 퍼졌다. 처박힐 때마다 몸이 앞으로 밀려 나갔다 그의 것이 나갈 때 쫓아 뒤로 향했다.
“아, 아, 으흐윽… 아흑…. 거기 너무 세서….”
“세서 어떤데.”
“싫어…. 너무 느껴…. 아흑.”
너무 느껴 버린 게 잘못이었는지, 그가 같은 위치를 더 세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꺽꺽거리며 한번 가고 나서야 그가 페니스를 뽑아냈다. 허리가 바들바들 경련하는 와중에도, 비어버린 안이 허전해 벌름거리는 게 느껴졌다. 곧이어 유연의 몸을 돌려 눕힌 그가 허리를 잡아 제 앞으로 당겼다. 긴 머리카락이 늘어져 책상 위에 흐트러진 채 온몸이 고조되어 움찔거렸다. 성감이 올라 흐려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곧 허전해진 곳에 다시 커다란 것을 넣어주었다. 기다린 곳은 반가워서 안쪽이 저절로 조여지고 책상 위로 음액이 흘러내렸다. 그가 내부에 푹푹 제 것을 찔러 넣으며 흐느끼는 유연에게 말했다.
“내일 책상에… 하… 반유연 냄새로 가득 차겠네. 이래서 일하겠어?”
“아, 아흑, 내가, 닦고 갈… 하앙, 거야.”
그런 일은 없다는 듯이 그가 넣는 속도가 더 가빠졌다. 유연이 입을 막으며 흐느끼다 제 안에서 물건이 더 빳빳하게 커지는 느낌에 경악할 즈음, 뜨거운 것이 벌컥이는 느낌이 났다. 심한 절정에 오른 유연이 작게 흐느끼며 울어 버리자, 준오가 눈물을 혀로 닦아주었다. 아까부터 책상 끄트머리에서 유연의 휴대폰이 끈질기게 웅웅 울려 댔지만, 아까 준오가 흘끗 보고는 제 안을 더 쳐올려 대서 확인할 수 없었다. 그의 몸짓만으로,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한 시간이 더 지나서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까맣게 비어 있는 복도에서 다리를 후들거리며 그의 부축을 받아 엘리베이터에 탔다. 차 안에서 정신없이 잠이 들었다 멈춰 있는 느낌에 일어나니 준오가 제 볼에 손을 얹고 있었다. 정신이 잠겨버릴 듯한 짧고도 농밀한 키스 후에 그가 자신을 집으로 들여보냈다. 하고 나면 무조건 잠은 잘 자는 걸까. 잘 때는 내가 없어도 되나….
* * *
“요새 엔터는 분위기 어때. 반 이사와는 얼굴 좀 익혀 뒀고?”
아침 일곱 시엔 언제나 가족 모두가 참여해야 하는 아침 식사가 있었다. 큰형은 해외 지사 장기 출장 중이라 요사이 형제 둘과 어머니까지, 넷이서 식사를 했다. 입맛 까다로운 아버지 덕에 식사 준비해주시는 아주머니의 손맛은 정말 기가 막힌데도, 차라리 구내식당에서 먹는 밥이 더 맛있고 편안했다. 그걸 아는 최 씨 아주머니는 아버지 출장 때 식사를 하면 평소보다 기우에게 밥을 한술 더 얹어 주었다.
“예, 서로 어느 정도 알고는 있습니다. 제가 아버지 아들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쯧, 그런 소문은 조심을 해도 기가 막히게 퍼진단 말이지. 반 이사 동생하고는, 진척 좀 있고?”
입 안에 넘기는 뭇국이 국이 아니라 고구마같이 느껴졌다.
“많이 친해지긴 했지만… 이성으로 생각하는 사이는 아닙니다….”
기우의 대답을 듣는 중원이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 정도로 생기게 낳아 줬으면 뭐 하나. 어디 갖다 써먹지도 못하고. 강준오 그놈 게이라고 소문이 파다하던데, 네놈도 어디서 남자 만나고 다니는 것 아니냐?”
강준오는 왜 저런 소문이 떨어지질 않을까…. 이십 대 초반엔 여자 꽤나 만나고 다닌다고 건너 건너 몇 번 들었던 것 같은데. 지금도 한 여자에게 열 올리고 있고….
“준오 형은 소문이 잘못 난 거고 만나는 여자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프로모션 사고 났던 건,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수습이 잘 되어 이후로 더 활성화가 된 느낌이라, 그때 그 실수로 임원 회의에서 뭐라고 하셨으면 오히려 나중에 공격만 받았을 겁니다….”
얼마 전, 어디서 들었는지 직원의 실수로 9,000 정도의 미스가 났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가 당장 임원 회의에서 그 내용을 가지고 공격하겠다는 걸 열심히 뜯어말려야 했다. 그건 그다지 마이너스가 될 일이 아니고, 어렵지 않게 수습될 일이니 그걸로 공격해 봤자 나중에 성과를 들고 와 오히려 상대방만 멋쩍어지게 될 거라고 그가 열심히 설득해 겨우 막을 수 있었다. 괜히 건드려 유연이 팀에서 더 압박이라도 받을까 제 선에서 막느라 진땀을 뺐다.
“흠…. 얼마 전에 가족 식사 자리에서도 정아가 준오 여자 좋아한다고, 게이 아니라고 뻑뻑 우기던 게 회장님 앞에서만 하는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여자 만난다니 흠잡을 게 줄어들어 아쉽구나.”
그래도 뭐, 거기 있으니 들어오는 정보가 있긴 있군. 못 꼬신 건 어쩔 수 없으니 선이나 볼 준비 하라는 말에 이젠 정말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중원은 네 반반한 외모 덕에 선 시장에서 문의가 쏟아지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며, 반 이사와 얼굴 터 놨으니 나중을 기약하고, 몇 개월 있다가 슬슬 케미컬로 복귀할 준비나 하라고 덧붙였다.
마치 제 인생의 봄방학 같던 시간들이, 지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눈앞에 칼국수를 오물오물 먹던 유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신이 내게 와준다면, 아마 나는 매일매일 업고 다닐 거야.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겨 줄 텐데. 왜 자신의 사랑은 원하는 방향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나에게는 왜, 너를 먼저 만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까.
함께 야근을 하다 유연이 갑자기 사라졌던 밤, 전화를 받지 않는 유연이 누구와 있는지 알 것 같아 회사 앞 바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혹시 유연이 나중에 부재중 전화를 보고 전화를 걸어주지 않을까 몇 시간 동안 회사 앞을 떠나지 못하고, 한 잔 한 잔 커다란 양주병의 중량이 훌쩍 줄어드는 것을 바라보면서.
기우에겐 정말 아름답고 또 혹독한 겨울이었다. 그러나 당신 곁을 떠나게 될 봄이 오는 것이 더 두려웠다.
* * *
어제 은행 비밀번호를 세 번 틀려 팀장님 허락을 받고 시간 반차를 쓰고 나왔다. 누르고 나온 시간은 두 시간…. 천천히 하고 카페에서 따뜻한 라테 한잔하고 돌아가야지.
꽝꽝 얼어버린 일월, 빙판을 피해 조심조심 걷고 있는데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중학생 때 친구들과 눈썰매장에 가기로 했는데, 유연이 독감에 걸려 도저히 갈 수가 없어 종일 시무룩하게 누워있었다. 그다음 주 준오가 어디서 구해 왔는지 플라스틱 썰매를 가져와 유연을 데리고 눈 쌓인 학교 운동장에 갔다. 유연을 태워 운동장을 돌고, 돌고 또 돌고…. 유연이 꺄르르 웃으니 점점 더 빠르게 썰매가 움직였다. 나중에 학교 운동장에 포대 같은 걸 들고 아버지와 운동장에 놀러 온 아이들이 자기도 저 썰매가 타고 싶다며 펑펑 울어서, 결국 빨간색 플라스틱 썰매는 아이들에게 주고 나왔었지.
그날 썰매 타고 나서 먹었던 짜장 떡볶이 맛있었는데…. 떡볶이 먹는다고 하면 항상 잔소리를 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몸에 좀 나쁘다 싶은 음식 먹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흥, 내가 무슨 지 마누라야 뭐야. 하여간에 옛날부터 잔소리는….
은행에서 나와 엉금엉금 회사 근처 카페로 걸어가는 길, 빵 가게에 밤 식빵이 갓 구워져 매대에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아, 강준오 밤 식빵 좋아하는데…. 지금 사줘도 어차피 제때 못 주겠지? 아직 따뜻할 때 사서 바로 먹게 갖다주면 좋을 텐데…. 그건 아무래도 어려울 거야. 한겨울에 매대 앞에 서서 하얀 콧김을 뿜으며 밤 식빵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르바이트생이 들어오라는 듯 웃으며 바라보았다. 헉, 남의 가게 앞에서 너무 넋 놓고 있었나. 나 이상해 보였겠지? 볼이 붉어진 유연이 꾸벅 인사하고 얼른 카페로 향했다.
걷고 있자니 볼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뭐야, 또 눈인가. 오늘은 어제만큼 춥지는 않아서 하나둘 내리는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걸음을 내디딜수록 점점 덩어리가 커지며 함박눈으로 바뀌어 버리는 풍경이 환상적이었다. 핸드폰을 들어 눈 내리는 거리의 사진을 찍고 전송을 누르려다 정신이 멈칫해 닫기를 눌렀다.
후-.
입에서 하얀 입김을 내뿜었다. 하얀 눈송이에 입김이 섞여 사라진다. 입 안에 스며드는 차가운 공기에 조금 개운해졌지만 눈앞은 뿌옇게 흐려졌다. 눈가에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아, 망했네. 나, 또….
나 또 강준오 좋아하는구나.
머리를 고무망치로 펑, 하고 맞아 버린 기분이었다. 사람 없는 한낮의 광화문 카페에 들어가 창밖으로 함박눈이 쌓이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떡하지. 나. 이제 안 그러기로 했는데. 내가 누구 더 사랑하지 않기로 했는데. 왜 또 하필…. 언제부터였을까 생각하다가, 별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아파서 잠들 수조차 없었던 8년 전의 밤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연애하는 것도 아닌 남자를 사랑하는 의미 없는 일을 8년 만에 또 해내는 과업을 이루다니. 정말 발전이 없네, 나.
달콤한 마카롱을 아무리 입 안에 욱여넣어도, 볼을 타고 자꾸만 내려앉은 눈물이 입가에 고여 와 달고 또 짠맛이 났다. 카페를 나서던 아주머니가 조용히 혼자 울던 유연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유연의 옆에 휴지를 잔뜩 두고 가셨다. 타인의 상냥함이 서러워, 어쩐지 더 울어버렸다.
* * *
토요일이었다. 벌써 잔뜩 시달려 밭은 숨을 뱉으며 준오의 품에 안겨 누워있었다. 완전히 지쳐 뻗어버린 몸에 어쩐지 집착적인 손길이 이어졌다. 가슴에서, 허리, 볼, 그다음 머리카락으로 이어지는 집요한 손과 눈길. 정말 징하다 싶어 다시 내려가는 손등을 찰싹 때렸다.
“…왜.”
“잘 거야, 만지지 마.”
“너는 자고 나는 만지면 되잖아.”
“응. 헛소리 그만하고. 퍽이나 잠이 오겠다.”
…어떻게 참고 살았대, 진짜. 대견하다고 칭찬이라도 해줘야 하는 건지. 다시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을 애써 무시하고 있자니 그가 유연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일 오전에 나갈 거야. 밥 차려 둘 테니까 먹고 내려가.”
“또 주말에 일하러 가? 그냥 좀 쉬지….”
일중독도 이 정도면 만성이다. 그나마 요샌 자신과 있느라 주말 출근을 덜 했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는데.
“그건 아니고… 외가에 점심 먹으러 갈 거야. 반유연이나 내내 괴롭혀줘야 하는데.”
아무리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고 해도 내일도 이러면 올해 내로 체력이 달려 사망하지 싶었다. 정말 꼭 이렇게 몇 번씩이나 해야 준오는 잠이 오는 걸까? 하다 달아올랐을 때 자신도 참지 못하고 더 해 달라고 하긴 했지만….
“나 이러다 죽을 것 같아. 밥은 됐고, 나도 내일 나가봐야 해.”
“누구랑?”
별걸 다 물어본다. 집착하는 구남친도 아니고. 그러나 미간에 주름이 진 것이 그냥 지나갈 수는 없겠다 싶었다.
“안리 씨랑 밥 먹기로 했어. 점심 약속이라, 밥 안 먹고 나갈 거야.”
아침을 안 먹고 간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안리랑 밥을 먹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건지 모르겠지만 미간에 진 주름이 풀리지 않은 채로 알겠다는 대답이 나왔다. 흥, 모르면 지가 어쩔 거야. 며칠 전 그렇게 서럽게 울었으면서, 막상 붙어 있으니 사실 그저 좋았다. 유통기한이 있어도 좋은 걸 어째. 그냥 지금을 기뻐하는 수밖에. 그렇게 그의 향기를 맡으며 팔을 베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오전에 일어나니 준오는 없고, 눈을 비비며 나가니 식탁에 꼭지 뗀 딸기가 예쁘게 그릇에 놓여 있었다. 어이구, 나 딸기 뷔페 갈 건데. 안 먹고 나간다고 분명 말했음에도 과일을 놓아둔 것을 보고 정말 극성이다 싶었지만 잠시 앉아 그가 씻어둔 딸기를 먹었다. 달콤한 딸기즙이 죽죽 터져 입 안을 맴돌았다.
점심시간쯤 도착한 호텔의 유리 통창에 펼쳐진 서울의 풍경이 마냥 아름다웠다. 애프터 눈 티 세트와 함께 딸기 뷔페를 즐길 수 있는 세트로 안리가 이미 예약을 해 둬 예쁘다 그저 감탄하며 사진을 찍고 놀았다. 오랜만에 동성 친구와 이런 데 오는구나. 실컷 수다 떨고, 회사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 기획사 대표의 딸인 안리는 한창 경영 수업을 받는 중이라고 했다. 이번에 용병으로 QL에 온 것도, 돈 벌러 온 게 아니라 대기업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고 오라는 부모님의 권유가 있어서였단다.
자란 환경이 비슷해서인지 접점이 많아 유연은 마냥 즐거워졌다. 잘생긴 남자 좋아하면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소개해줄 수 있다는 안리의 대단함이란. 몸을 우리면 딸기탕이 될 것처럼 배가 차 버려서 딸기 뷔페를 나오는 길이었다. 가운데 계단을 내려오니 아래층 라운지가 보였다.
“음, 이 호텔 라운지도 예쁘네요.”
“약간 올드하긴 한데 그래도 여전히 뷰가 좋아서…. 어? 저기 준오 오빠 아닌가?”
안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차라리 비슷한 사람이 있다면 좋을 텐데, 그만한 키와 저런 얼굴을 가진 사람은 없으니까. 정말로 아쉽게도 없어서, 저 사람은 분명 강준오가 맞았다. 그 앞에는 멀리서 봐도 예쁘고 우아한 여자가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고.
바로 오늘 새벽까지 잠도 못 잘 만큼 자신의 얼굴과 머리카락을 끝도 없이 쓸어 대던 남자가, 지금은 저기에서 선을 보고 있구나. 언제부터 그의 본가가 이 호텔이었을까? 당장 저 자리로 가서 강준오 너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자신에겐 아무런 자격이 없었다.
“딱 봐도 선보고 있네. 가서 놀려주고 싶지만 장가갈 나이 됐으니 참는다……. 유연 씨?”
어느새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자신을 보고 안리가 놀란 눈으로 불렀다. 아, 저 잠깐 현기증이 나서요. 단걸 너무 많이… 먹었나 봐요. 데려다주고 싶다는 안리를 만류하고 로비에서 택시를 잡았다.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 택시가 로비를 벗어나는 순간,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뭘 기대했니 나는, 정말 바보같이…. 자신의 어리석음에 치가 떨려왔다. 마음을 자각하자마자 낭떠러지에서 밀쳐져 거부당한 것 같아서.
* * *
영 가고 싶지 않았지만 신년에도 가지 않았으니 명분이 없었다. 이번에도 안 오면 할아버님이 17층에 불이라도 질러 버리겠다 했다고, 귀에 못이 박힐 것 같다며 어머니의 전화를 받은 참이었다. 말이 좋아 평창동이지 왜 이런 산꼭대기에 사시는 건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외가에 올 때마다 이 부촌의 골목 경사가 끔찍했다. 아래 저 좋은 평지들 두고. 눈이 오면 사실상 고립되는 수준인 이 집을 고집하는 할아버님의 마음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커다란 저택에서 내려다보이는 산 아래의 광활한 풍경을 보면 아주 조금쯤 이해되었다.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한마디라도 더 하고 나오고 싶어 죽은 듯 제 품에서 잠들어 버린 유연을 깨우고 싶은 걸 꾹 참고 결 좋은 머리카락을 쓸다 볼에 입을 맞추고 나왔다. 참는다고 참았는데 어제 너무 괴롭혔던 건지 어떻게 이렇게 죽은 듯 잘 수가 있나 싶었다.
그러니까 왜, 주말에 내가 귀한 걸 두고 이 산동네에 와야 하는 건지. 워낙 무표정이라 어른들 앞에서 티가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긴 했는지 식사를 하다 준오의 어머니가 준오 등을 툭툭 쓸었다. 아끼는 셋째 딸이 손주와 함께 오는 날이라 식탁엔 온갖 진귀한 요리가 이것저것 많이도 깔려 있었다.
“낯 꽤나 좋아 보이는구나. 반질반질한 것이, 누가 보면 연애라도 하는 줄 알겠어.”
전에 주현을 보고 가셨지만 애써 외면하고 싶으신 모양이었다. 만나본 손주며느리가 185cm면 싫으실 수도 있지 그래. 그 정도까지 했는데도 아직 미련을 못 버리신 모양이었다.
“식사 끝나고 나가면 최 기사 대기하고 있을 거다. 그거 타고 가서 H호텔에서 한 시간만 이야기 나누고 와. 이것만 하고 오면 일단 올해는 더 이상 선 관련 이야기하지 않으마. 이 정도 시늉마저 안 하면 반주현 이사 북미 지사로 발령 내버릴 줄 알아라. 잡스러운 소문 때문에 내가 쪽팔려서 고개를 못 들고 다닐 지경이다….”
어이가 없어 가지 않겠다고 대꾸하려다, 어머니의 난처한 표정과 할아버지 뒤로 대기하고 있는 가드들을 보고 있자니 그냥 한 시간만 참고 시늉이나 하고 오는 게 낫겠구나 싶었다.
얼마 전에 상무실에서 주현과의 연극을 보고 혈압 올라 쓰러질 뻔하셨는데, 지금 또 반항해 정말 쓰러지시면 답도 없고 어차피 강제로 준비된 차에 태워지게 될 일이었다.
“약속하셨습니다. 오늘만, 한 시간입니다.”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뒤로하고 준비된 차를 타고 H호텔로 향했다. 가는 길 유연에게 어디에 있냐고 놀고 나면 데리러 가겠다고 했지만 노느라 정신이 없는 건지 답이 없었다. 선 자리에 나온 여자는 알 만한 집안 여자였는데, 관심이 없어 적당히 대답해주며 열심히 한 시간을 기다렸다. 이 정도면 뭐, 영감님 소원이야 풀었겠지.
연락처도 뭣도 묻지 않고 한 시간이 되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강준오 얼굴을 보고 라운지 안에선 애써 표정 관리를 하던 여자는, 그가 한 시간이 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헤어지며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을 보고는 쎄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소문이야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네요. 여자한테 관심도 없으신 정도면 선 자리는 나오지 않으시는 게 좋겠어요”
새벽까지 여자랑 붙어먹고 있다가 나온 거라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 3초 정도 들었지만 애써 누르고 묵례를 했다. 그래도 뭐, 한 시간이면 서로 큰 손해는 아니지. 숙제를 끝마친 그가 핸드폰을 들어 끈질기게 유연의 번호를 눌렀지만, 받지 않았다. 새벽에 너무 심했다고 시위하는 건가. 도착해서 일 층에 내려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좀 놔두지 않으면 화를 낼까 싶어 애써 참고 남은 일요일을 마저 보냈다. 역시 너무했나? 그렇지만 평일엔 애써 참고 있는데, 그 정도면 적당한 거 아닌가?
* * *
퉁퉁 부은 눈으로 출근하니 팀 사람들이 다 놀라서 한마디씩 했다. 차라리 점심을 먹지 말 것을. 가까이에선 부어 있는 눈이 더 잘 보이니 다들 무슨 일이냐고 묻다가 유연이 대답을 못 하니 눈치만 보았다. 유연 역시 눈치가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또래인 아영이나 기우는 괜찮지만 팀장님이나 과장님께는 송구스러운 기분이었다. 그러나 별로 둘러댈 말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르는 건 오직, 아나운서 스타일의 예쁜 여자와 대화하고 있던 준오의 모습뿐. 누가 봐도 선 자리가 분명했다.
그럴 거면, 최소한 그날 자신을 안지 말았어야지. 다른 여자는 싫다며. 아, 혹시 결혼할 여자는 아껴주고 자신과는 즐기겠다는 이야기였을까. 게다가 외가에 간다고 거짓말까지 한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좋아한다고 깨닫자마자 목격해 버린 그 장면이 사라지지 않아 새벽까지 몸을 옹송그리고 있다가 어스름한 시간에야 잠시 잠이 들었다. 출근하니 온몸이 버석거리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속해서 울리는 그의 전화를 받고 싶은 제가 싫었다. 스무 살에도, 스물여덟 살에도 강준오가 가까이에 있으면 자꾸 혹했다. 마치 언제나 그를 위해 준비된 마음인 것처럼. 어차피 마지막 주엔 준오가 출장을 갈 테니 마음이 좀 쉴 틈이 있지 않을까. 조금만 더 견뎌보자고 마음먹을 뿐이었다. 피곤해서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던 중, 메신저가 깜빡거렸다.
[반유연 대리님 안녕하세요. 사회 공헌실 윤희지 주임입니다. 보육원 어린이 설날 선물 임직원이 함께 포장 봉사하는 이벤트 지원해주셔서 메시지 드립니다. 메일도 먼저 보내 드리긴 했지만 이따 4시에 지하 2층 미디어 별관으로 오셔서 함께 포장해 주시면 됩니다. 봉사는 1시간 30분 예정이고요, 근무시간 일시 정지하시고 내려오시면 됩니다.]
맞다…. 인트라넷에 올라온 봉사 활동을 2주 전에 자원했던 일이 떠올랐다. 왜 하필 정신이 쏙 빠져나간 오늘인가 싶었지만, 어찌 보면 이 정신으로 일하다 실수하느니 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임님. 4시에 뵙겠습니다.]
억지로 넋을 부여잡고 일하다가, 팀장님께 자리를 비운다고 보고하고 지하로 향했다. 단순 포장이라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머리 복잡할 땐 단순 작업만큼 고마운 일도 없으니. 오후라 부어 있던 눈도 좀 가라앉았고, 도착하니 참석자 확인과 함께 자리 안내를 해 주었다.
“테이블 위의 포장할 물건 때문에 자리가 부족하실 테니 2인이 한 테이블 사용하시면 되고요, 지정해드린 좌석에 앉아서 진행해 주시면 됩니다. 목마르거나 출출하실까 봐 뒤에 다과도 준비해 두었으니, 편하게 간식 드시면서 진행해 주세요!”
워낙 이벤트가 많은 사회 공헌실이다 보니 사회도 잘 본다 싶었다. 앉아서 처음 보는 여성분과 인사를 나누었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여성분인데 키가 조금 큰 편에 마른 체형이었다. 한눈에 느껴지는 포스에 아, 다른 팀의 임원이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BPM 서비스 마케팅 팀 반유연 대리입니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기운은 없었지만 애써 힘을 내어 웃으며 인사를 하니 상대방이 어쩐지 반가우면서도 놀란 표정이었다. 난 처음 뵙는 분인 것 같은데 왜일까. 내가 혹시 기억을 못 하나?
“안녕하세요. 윤리위원회 안진아 팀장입니다. 저도 오늘 잘 부탁드릴게요.”
상냥했지만 어쩐지 위엄이 느껴지는 말투였는데, 인사에서 마치 아는 사람 같은 조심스러움과 호의가 느껴져 괜한 기분 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엄청 높은 사람이구나….
윤리위원회…. 얼마 전 임빈아 대리가 그렇게 윤리위원회에 시달렸다던데. 흐릿하게 생각이 스쳐 간다. 자리에 앉아 아이들에게 선물할 과자와 인형들을 상자에 넣고, 작은 카드에 일일이 아이들의 이름과 행복한 설날을 보내라고 메시지를 썼다.
오랜만에 손 글씨를 쓰자니 삐뚤빼뚤한 것이 좀 아쉬웠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위한 일에 손을 보탤 수 있다는 게 기분이 좋았다. 테이프나 펜, 풀 같은 것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작게 이야기하며 선물을 포장하고 있자니 점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대리님, 점점 선물 포장하는 속도가 쑥쑥 올라가시는데요?”
그녀가 유연을 바라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 손재주 정말 없는데, 그래도 선물 포장은 무난하게 해서 다행이에요….”
어떤 여섯 살 여자아이의 갖고 싶은 선물 리스트에 있던 마론 인형을 포장하며, 그녀가 우리 딸도 이 인형을 좋아하는데 새 시리즈가 나온 줄 몰랐다고. 퇴근길에 마트에 들러야겠다는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 반이 훌쩍 지나 버렸다. 덕분에 좋은 시간이었다고 감사 인사를 하고 헤어지려는데, 그녀가 망설이는 표정으로 유연을 불렀다.
“반유연 대리님, 잠깐… 딱 20분만요. 시간 내줄 수 있을까요?”
어차피 두 시간 정지해 두고 나왔던 참이라 별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계단을 올라가 지하의 사내 카페로 갔다. 아직 한창 근무시간이라 딱히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게 유연 대리님의 상처를 다시 들쑤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걱정이 돼서요….”
유연이 대체 무슨 말인가 해서 당황한 표정으로 안 팀장을 바라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거지, 상처…?
“물론 임빈아 대리 문책은 잘 끝났고, 자진 퇴사도 하게 했지만 사실 그분은 징계를 받고 해고됐어야 하는 게 맞기도 하고…. 그리고 유연 대리님은 당연히 많이 억울했을 텐데, 강준오 상무님께서는 일 크게 키우지 않고 본인과 면담해서 따로 처리한다고 하셔서요. 물론 다 뜻이 있고 대리님께서 사건이 소문나는 게 부담스럽고 싫으셨을 수도 있다는 것 당연히 이해합니다….”
유연이 멍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사람을 잘못 안 것 같은데 자신의 이름이 나오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내 이름이 나오는데, 내가 연관된 일인데, 나는 모르는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건을 키우고 싶지 않으신 마음은 이해하지만, 정말로 BPM 부서원들에게 사건 공유해서 대리님의 억울한 부분 밝히지 않으셔도 괜찮으신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억울하실 것 같아요. 정말 이대로 덮으면 되는지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마침 대리님을 만나게 되어서요. 상무님께선 외부에 발설 금지라 하셨지만, 오늘 피해당사자를 만나게 되니 꼭 한번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정말로 사건 개요와 피해 사실을 공유하지 않아도 되는지요….”
유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니 안 팀장의 표정도 의아해졌다.
“안 팀장님, 지금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인지를 잘 못 하고… 있는데요.”
“대리님 혹시… 임빈아 대리가 유연 대리님 프로모션 문서 숫자 단위 몰래 수정해 놓은 게 발각되어 자진 퇴사 권유받은 일, 모르고 계신가요?”
유연을 바라보는 안진아 팀장의 눈동자에 불안이 맺혔다. 대체 내가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 건지, 뭘 들어버린 건지. 순간 주변의 공기가 멈춰 버린 것 같았다. 공간이 우주 청소기에 빨린 것처럼 일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몇 시간 잠들지도 못한 버석버석한 낙엽 같은 상태의 자신을 누군가가 짓밟고 지나간 기분이 들었다. 바스락, 마음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니까 안 팀장님 말씀은, 전에 프로모션 이슈 있었던 것… 임빈아 대리가 제가 공유한 문서의 숫자를 조작했던 거고, 조작이라는 게 밝혀졌는데 강준오 상무님께서 사건 진위 밝히는 걸 저지하셨다는… 말씀이신 거죠?”
“저지하셨다고 표현해도 될진 모르겠네요…. 그래도 사건 조사도 상무님께서 직접 지시하셨거든요. 사건 커지는 걸 원치 않는다고, 반유연 대리님과 따로 면담할 테니 임빈아 대리 퇴사 권유만 하고, 조용히 처리하자고… 하셨었는데….”
윤리위원회 팀장이면 별 산전수전 다 겪어봤을 텐데도, 안진아 팀장의 얼굴엔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스쳤다. 분부대로 외부에 발설하진 않았지만, 당사자가 사건 내용을 모르고 있다는 경우의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안 팀장의 얼굴이 초조하다 못해 노랗게 바뀔 것 같았다. 이 난리인 와중에도 자신을 생각해준 그녀가 고마워졌다.
“유연 대리님, 저…….”
“강준오 상무님께서 일이 워낙 많으시니 저랑 이야기를 마쳤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조만간 면담하시겠죠. 이렇게 따로 살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팀장님.”
알 만했다. 강준오가 지시했다면, 아무 말 못 하게 모두의 입을 틀어막았으리라. 그 결벽증 같은 철저함을 봐 온 게 하루 이틀이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곤 상상하지도 못했지만….
“상무님께서도 뜻이 있으셨을 거예요.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다시 한번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지금 상황에서 이분을 탓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억울함을 밝혀주려는 팀장님의 마음이 고마울 뿐. 윤리위원회에 그래도 윤리가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일까.
텅 빈 표정의 유연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하는 안진아 팀장에게 넋이 나간 얼굴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카페 밖으로 나왔다. 일하던 자리로 돌아가 자리에 앉았다가 화장실에 갔다.
아까 봉사 가기 전에는 마네킹 같았는데, 지금은 종이 인형 같구나. 하얗네. 거울 위로 겨울나무의 흰 껍질 같은 자신이 비치고, 지금은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잘 됐어. 지금 울지 말고, 나중에 혼자 울자. 유연이 삐꺽거리는 걸음으로 작게 비틀거리며 자리에 돌아갔다. 퇴근하는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퇴근길에 나섰다. 그래도 다행인 일이 있네. 정신이 터져버릴 것 같은데 돌아오니 퇴근 시간이라서, 응.
마침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식탁 위엔 쪽지와 함께 데우기만 하면 되는 음식이 차려져 있었지만. 유연은 일단 자기로 했다. 지금 먹으면 다 토할 거야. 화장도 지우지 않고, 외투와 셔츠를 대강 벗어 던져두고,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말자. 까무룩, 죽음과도 같은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검은 새벽이었다. 겨울의 아침은 느리게 찾아온다. 심장을 바닷가 소금물에 절여 한여름 모래사장에 내놓은 것처럼 아팠다. 심장 혼자 백사장에서, 물기도 없이 뒹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욕조에 물을 받아 유자 향 입욕제를 넣고 들어가 앉았다.
눈물이 나지 않는데 자신이 마르게 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강 뭔가를 바르고, 부엌에 가서 물을 한 입 마시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거실 커튼 틈으로 푸르스름한 어둠이 작게 보였다. 오늘은 그냥 밝아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멍하니 있는데, 안방에서 문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물 마시러 나왔…. 어디 아파요?”
유연이 바싹 마른 입으로 답했다.
“아니요, 언니. 저 말이에요.”
“네 아가씨…….”
“오늘만 출근하고… 내일 수요일이니까. 혼자 여행 좀 다녀오고 싶어요. 수목금 연차 쓰고… 강릉에 좀 다녀올게요.”
어스름한 새벽에 혼자 부엌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새벽의 유연이, 버석버석한 나무껍질같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이야기하지 않으니 차마 물어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제가 어디로 여행 갔는지는 언니만 아셨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어요. 주현 오빠도요.”
“음…. 알겠어요 아가씨. 무슨 일인지 나중에라도 꼭 얘기해 주고, 대신에 호텔은 내가 잡아 줄게요….”
물어볼 수 없다면 만약을 위해 위치를 알 수 있게 숙소를 잡아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아는 왜인지 순간 강준오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금방 생각을 지워냈다. 유연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고마워요 언니.”
우리 요정 같은 마냥 예쁘고 귀여운 아가씨를 누가 괴롭힌 건지. 썸남이랑 잘 안 된 건가. 사회생활 하다 보면 별일이 다 있고 설사 일이 없다고 해도 마음의 공허는 곧잘 찾아오곤 하니 이유가 수백 가지라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지아는 오늘 유연이 퇴근하고 돌아오기 전까지 강릉에서 가장 좋은 숙소를 예약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다가 잘 보이고 보안이 좋은 곳으로. 사랑스러운 아가씨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픈 마음을 달랬으면.
* * *
오늘도 초췌한 모습으로 출근하니 어쩐지 자신을 본 팀원들의 분위기가 작게 술렁이는 것 같았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올라가는 길 팀장님이 유연을 불러 밖의 카페에 데려갔다. 혹시 일적으로 힘든 부분 있으면 편하게 말하라는 팀장님에게 그런 건 아니고, 연차 며칠만 쓰겠다고 하니 흔쾌히 들어주셨다.
지금 바쁜 일들도 대부분 끝났고, 작년에도 연차 사용률 너무 낮아서 인사 팀에서 한 소리 들었으니 이렇게 바쁘지 않을 때 소진해주면 고마운 일이라며. 3일간의 휴가 안내 메일을 협업하는 사람 몇몇과 팀 내부에 보내 놓았다. 인사를 나누고 회사 정문으로 나가 버스 정류장을 향해 가려는데 횡단보도 앞에서 웬 차가 멈춰서 창문을 내렸다.
“유연 씨, 빨리 타요….”
멍하니 바라보다 어쩌지라고 생각하는 찰나 뒤에서 바로 경적을 울렸다. 유연이 당황하자 기우가 움직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차가 경적을 더 울리기 전에 유연이 급히 기우의 차에 올라타 문을 닫자, 그가 지체 없이 출발했다.
“뒤차 경적 울려줘서 고맙다고 하고 와야 하는데. 그렇죠?”
여전히 고마운 일 참 많은 사람. 그러나 애써 웃을 기운이 나지 않아 가만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잠은 잘 잔 거 맞아요? 좀 쉬어요. 어제오늘 유연 씨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아무 말 안 해도 되고, 그냥 집까지만 데려다줄게요.”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기우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지금은 남의 기분을 배려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몇십 분 후 집에 도착해 내려주며 며칠 잘 쉬고 어디서든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그가 말했다. 그게 어디든 정말 상관없으니까, 가능하면 꼭 써줘요. 푹 쉬어요. 그의 기도 같은 바람이 귀를 타고 다른 귀 밖으로 흘러내렸다. 오늘도 제가 집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의 차가 움직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