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 오빠 2권
7. Mad About You(2)
유연의 생일날 점심이었다. 오늘도 날씨가 좋았다. 오랜만에 준오와 프렌치 코스를 먹고 와인도 마실 생각 하니 더 기분이 좋았다. 준오만큼 자신의 입맛과 취향을 잘 아는 사람도 없을 테니.
‘오늘은 어디로 가는 걸까.’
어젯밤 기우와 했던 키스가 떠올라 새벽 늦게나 겨우 잠들었지만, 싫지 않았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는 마음이지만. 그래서 키스도 거부하지 않았고.
강준오와 키스는 해 보지 못했지만, 그 집 핏줄은 다 잘하는가 싶었다. 잔뜩 능숙한 느낌으로 끌려가 머릿속이 붕 떠오르는 것처럼 기분 좋았다. 대답은 천천히 해도 된다고 했으니 나도 이제 제대로 마음을 지켜보겠다고 생각했다.
몇 주, 한 달쯤 만나보고 고민해 보고 대답할 때까지 키스는 금지해야겠다. 공정한 선택에 방해가 될 것 같아. 반칙이야.
오늘 생일이니까 준오한테도 은근슬쩍, 너무 싫어하지 말아 달라고 이야기해 봐야지. 좋은 사람이라고, 이번에 나 진짜 정말 많이 도와줬다고. 조금만 좋은 눈으로 봐 달라고 부탁해 봐야지, 하고. 강준오는 고집불통이긴 하지만 유연에겐 물렁한 편이라는 걸 유연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응, ‘관대하게 봐주세요.’ 해 볼 생각이었다.
[준오 오빠, 몇 시에 만나?]
주현과 지아 언니의 성대한 생일 축하를 마친 후 유연이 메시지를 보냈다. 주현 부부가 선물한 M 브랜드의 캐시미어 코트를 입어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유연의 머리카락 색과 닮은 브라운 컬러의 얇고 가벼운 코트에서 차르르 윤기가 흘렀다. 이따 준오 만날 때 입고 가야지.
친구들의 인사와 언제 보느냐는 독촉에, 이제 한숨 돌렸으니 어서들 보자고 대답을 해주곤 화장도 다 마쳤는데, 답이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유연이 준오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한 유연이 2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문을 두드리려다 손잡이를 쥐니 스르륵 열렸다.
‘잠가 놓지도 않고….’
굳이 잠가 둘 필요는 없겠지만. 열고 들어가니 거실에는 아무도 없고 커다란 스피커에서 음악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백조의 호수가 흐르는 것 같았는데 계속 듣다 보니 후버포닉의 Mad about you 오케스트라 버전이었다. 일요일 오후 다섯 시의 거실. 설핏 약해진 햇볕이 남은 방향으로 옅은 먼지 조각들이 유영하는 공간, 그 틈새를 파고들어 흐르는 간절하고 끈적한 노래라니. 최근 어디서 애끓는 감정이라도 느끼셨나, 강준오 씨. 불 꺼진 침실 문이 열려 있어 그 방향으로 걸었다. 걷는 걸음걸음 귓가에 노래의 가사가 내려와 앉았다.
Are you the fishy wine that will give me a headache in the morning.
넌 내게 아침에 두통을 일으키는 수상한 와인일까.
Or just a dark blue land mine that explode without a decent warning.
아니면 경고 없이 폭발하는 검푸른 지뢰일 뿐일까.
방으로 가 보니 아무도 없는 듯해서 고개를 돌리려다 검은 기척을 느꼈다. 암막 커튼이 쳐진 어두운 방 안, 준오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앉아 유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짧은 순간 유연은 커다란 검은 뱀이 똬리를 튼 채 그녀를 기꺼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한 환영을 보았다. 아주 오랜만에 본 환영이었다.
Give me all your true hate and I'll translate it in our bed.
등 너머로 계속 음악이 흘러내렸다.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멍하니 준오를 바라보았다. 준오가 유연을 보고 옅게 웃는 듯했다.
“왔어?”
살얼음 같은 긴장감이 흩어졌다.
“뭐야, 나 생일 밥 먹여준다고 잔뜩 기대하게 하고 답도 없이.”
“미안해, 막상 준비 다 하고 피곤했는지 잠깐 졸았나 봐….”
그러고 보니 검은색 셔츠에 브라운 컬러의 바지, 벨트까지 모두 하고 긴 다리를 뻗은 채 앉아 있었다.
“지금 출발할까? 조금 이른가?”
“오 분만 있다가 가자. 잠깐 앉아. 이리 와.”
피곤할 법하지. 매일 일도 많고. 어제는 라운딩도 갔다고 주현에게 들었다. 주현도 참석했어야 했는데 지아 언니와 있겠다고 다른 이사님을 자기 대신 보내는 것 같았다. 기운이 다 어디서 나오는 건지, 준오의 얼굴에 피곤함이 비치는 것 같기도 하고. 쪼르르 걸어가 침대 헤드 앞, 준오의 옆쪽에 걸터앉았다.
“오빠 많이 피곤해? 그냥 집에서 밥 먹을까?”
“무슨 소리야. 내가 이날 얼마나 기대하면서 그 많은 일을 다 해치웠는데.”
준오가 유연의 등에 머리를 기댔다. 등 뒤에서, 알싸한 준오의 향이 올라온다. 유연은 왜인지 긴장이 되어 숨도 잘 못 쉬고 참다가 얕게 천천히 내려 쉬고 준오에게 말했다.
“그럼 지금… 갈까?”
유연이 묻자 준오가 얼굴을 기댄 채로 손을 뻗어 그녀를 안았다. 가는 허리가 두 팔 안에 감겼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면서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잠깐만, 충전 좀 하고.”
“무슨, 충전을 나한테 해.”
피식, 웃는 숨소리가 났다.
“그럼 누구한테 할까, 유연아?”
“…그 많던 여자들은 다 어디에 두고. 요새 안 만나?”
“예전에 네가 싫어하길래 안 만났지.”
대체 언제 적 소리를 하는 거야. 거짓말쟁이. 그럴 리가.
“그때가 대체 언제인데 지금 얘기를 해. 나 스무 살 적 얘기를. 나 내일모레면 서른이야.”
푸핫, 준오가 웃는 소리를 냈다.
“유연아.”
“…응?”
“그럼 우리 유연이 어른이야?”
“당연하지, 말이라고.”
준오가 잠시 생각하는 듯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배에 감겨 있던 손이 유연의 옆구리를 약하게 쓸어 올렸다.
“옛날에, 네가 도와 달라고 해서 오빠가 도와줬던 거 기억해?”
으음, 본인이 날 도와준 게 한두 가지일까. 지금도 아프면 죽 끓여 먹이고 열 체크하고 다니면서. 일 터지면 자기가 다 끌어안아 막아주기 바쁘고. 생일이면 선물 날라줘, 비싼 밥 사줘…. 대체 어떤 걸 말하는 걸까. 알 순 없지만, 그의 도움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오빠야 나 항상 도와줬지 뭘.”
“…그럼 이제 오빠가 도와 달라고 부탁해도 들어줄 거야?”
정말 별걸 다 물어본다 싶었다. 내가 어떻게 제 부탁을 거절할까.
“말이라고 해? 말만 해. 다 들어줄 테니까.”
준오가 유연의 등에 기댔던 얼굴을 떼어 유연의 왼쪽 얼굴 옆에 붙였다. 등 뒤에서 끌어 안겨진 손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었지만 호흡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귀와 귀 사이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순간 준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유연의 볼에 입을 맞췄다. 부드럽고 건조한 입술이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뇌가 점멸하는 느낌이 났다. 입술이 닿았을까, 지금. 강준오의.
“꼭 들어줘야 해 유연아. 오빠 많이 힘든 것 같아. 알았지?”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딱히 앓는 소리를 한 적 없었던 냉정한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생경해 볼에 닿았던 입술도 잊을 지경이었다. 뭐라 말할 새도 없이 그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유연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 고개를 내려 유연의 눈을 마주 보고 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가자. 배고프겠다.”
어두운 방 안의 공기에 미세한 균열이 느껴졌다. 아니겠지. 장난이겠지. 어린아이에게 하듯, 그런 것이겠지. 뭐라 한마디 할 틈새를 찾지 못하고 유연이 그를 따라 대문 밖으로 향했다. 조금 멍한 기분이 들었지만 따뜻한 것으로 배가 차면 사그라질 거야. 이마에서 볼로 이어진 입맞춤에 이다음이 있지는 않겠지.
불안의 씨앗이 바르작거리는 느낌에 유연은 걷다 잠시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준오가 유연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저렇게 검었던가, 그런 생각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검은 반타블랙의 색과 같이. 깊이도 알 수 없는 검은 눈.
도착한 곳은 가족들과 일이 년에 한 번 정도 방문했었지만 사람이 많아 매번 앉지 못했던 호텔 프렌치 레스토랑의 창가 자리였다. 주말에 이 자린 잡기 힘들었을 텐데, 대체 언제 예약해 둔 건지. 어제오늘 먹은 걸로 마음고생 해서 빠졌던 살은 다 원상복구될 것만 같다. 배부르게 먹고, 샴페인도 한잔하고 집에 돌아왔다. 코스의 마지막으로 나온 디저트 접시에 ‘happy birthday’가 써져 있었다. 생일이라고 따로 말하고 예약했구나. 기특한 강준오 같으니.
배가 차고 나니 나오기 전의 미묘한 불안 따위는 다 날아가 있었다. 왜 이상했지, 음악 때문에 그랬던 걸까. 항상 앉고 싶었던 창가 자리에 앉아 야경을 보며 마신 샴페인에 기분이 달아올랐다. 대리를 불러 돌아오고 집 앞에서 헤어지려는 참이었다.
“와인 한 병만 같이 마시고 가.”
아까 힘들다더니, 취하고 싶은가. 그럴 수도 있지. 알겠다고 하고 그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유연을 채도 낮은 자신의 거실에 앉혀 두고 준오가 치즈와 건조 과일, 견과류 같은 것들을 적당히 담아 왔다. 미약한 취기를 느끼며 소파에서 준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검은 셔츠를 입은 채 살짝 넘긴 검은 머리를 숙여 접시에 멜론을 담고 있는 모습. 단정한 정수리나 팔을 움직일 때마다 엇갈리는 섬세한 뼈의 움직임 같은 것들.
그냥 동생 사이인 내가 독점하기는 조금 아까운 걸까. 그래도 생일이니까 독점 좀 하면 어떤가 싶어 얕게 입꼬리를 올려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고개를 들었다.
“왜.”
“아니 그냥, 좋아서.”
그가 다시 고개를 내려 도마에서 치즈를 옮기며 말했다.
“나이 든 오빠 부려먹으니 기분이 좋지, 응?”
“응, 너무 좋아.”
안 좋을 리가 있나. 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나 먹이겠다고 상 차리고 있는데. 게다가 회사 상무님을 항상 부려먹고 있으니. 헤실헤실 웃고 있자니 준오가 고개를 들어 유연을 보고 살짝 웃고는 다시 내렸다. 거실 테이블 위에 안주를 놓고, 그가 셀러에서 레드와인을 한 병 꺼내 왔다.
“언제 마시나 아껴 뒀던 거란다, 꼬맹아.”
“하, 오빠 네 꼬맹이 오늘 스물여덟 생일이거든요….”
스템이 붉은 예쁜 와인 잔에 준오가 와인을 따라 주었다.
“생일 축하해, 스물여덟 살 꼬맹아.”
잔을 부딪치며 그가 유연에게 말했다. 스피커에는 작게 재즈가 흘러나오고, 아껴 뒀다는 와인은 입 안에 온갖 과실과 젖은 숲의 맛이 켜켜이 쌓여 맴도는 듯했다. 맛있다며 홀짝홀짝 잘도 마시고 있자니 금세 취기가 도는 것 같았다.
“오빠.”
부르니 그가 눈짓으로 대답했다.
“기우 씨… 예쁘게 봐주면 안 돼? 나 이번에 진짜 도움 많이 받았는데….”
준오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역시 언짢은 걸까.
“이번에 일 터졌을 때 사람들 찾아가서 밤마다 야식도 먹이고, 나도 매일 마실 것 챙겨주고, 같이 팀들 돌면서 QA도 하고 그랬어. 그리고….”
“그리고, 또?”
“나 밥도 잘 사주고… 또….”
저를 보는 준오의 눈동자가 차게 변하는 느낌이 들었다. 왜일까. 화를 내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무서운 기분이 들어 말을 점점 제대로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유연아.”
“응…?”
“오빠 너한테 차마 말은 못 했지만 이번 일로 다른 계열사 대표님들한테 말 많이 들었어. 엔터 설립한 지 반년도 안 돼서 이런 일 만들었다고. 그중에 기우 아버지가 제일 난리였지. 그것 보라고. QL 출신도 아닌 스타트업 출신 대표가 보고했던 범위의 열 배 넘는 실책을 만들었다고. 사실 액수 자체는 얼마 안 되는데 그렇게 말하니 무슨 엄청난 일이라도 일어난 것같이 들리더라. 이슈 자체는 원만하게 해결했지만, 그룹 임원 회의에서 조용히 넘어가지는 못했어.”
술과, 야경과, 맛있는 음식과 다정한 준오의 시간에 취해 있던 유연의 표정이 굳었다.
“회장님도 내일 텔레콤 쪽 대표님과 찾아오실 거야. 아마 이런 일 두어 번 더 있으면 내 자리 기우 아버지에게 뺏길 수도 있어. 그러면 몇 년 후엔 기우가 내 자리에 앉겠지.”
유연의 마음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나 때문에 생긴 일인데 해결해 줄 테니 기다리라는 달콤한 말만 들으며 의지했던 건가, 나는. 그의 자리를 노리는 기우를 잘 봐 달라고 부탁하면서. 적절한 온도의 방일 텐데 발아래 서리가 내린 듯 손과 발이 차가워졌다.
“나 요새 마음이 너무 힘들고, 눈치 보느라 되지도 않는 골프 접대 같은 데 끌려가는 것도 지치네.”
유연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준오가 자리를 옮겨 유연의 옆자리에 앉아 유연을 바라보았다.
“미안해, 오빠….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마냥 괜찮은 줄 알았어. 나 때문에 생긴 일인데…….”
준오가 손을 뻗어 유연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냈다.
“유연아, 유연이가 오빠한테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는데… 들어줄래?”
다 자신의 잘못으로 비롯된 일인데. 혼자 힘들어하던 준오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니. 그게 무엇이든 해 줄 마음이 들었다.
“말해. 내가,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할게. 뭐라도 할게….”
유연이 간절한 눈으로 준오를 바라보며 급박하게 말했다. 정말로 그게 뭐든 다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항상 내 일이라면 앞에서든 뒤에서든 다 돌봐주고 아껴주던 사람에게, 나는 어떻게 해만 입혔지.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있다면 그게 뭐라도 당장 그를 위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빠 밤에 잠을 못 자. 너무 스트레스받아서 그런 것 같아….”
이렇게 힘든데 잠도 못 잤구나. 얼마나 힘이 들까. 결국 참았던 눈물이 한쪽 눈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기억해? 너 스무 살 때, 유연이 네가 나한테 부탁했었잖아. 도와 달라고.”
갑자기 생각지 못한 옛날이야기가 쏟아져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설마….
“네 부탁이었긴 했지만… 나 그때, 유연이 너랑 자고 나면 잠이 잘 왔어. 그때도 사실 사업 처음 시작할 때라 스트레스도 불면증도 심했는데, 신기하게 너를 안고 나면 잠이 오더라고….”
준오가 한 손을 들어 유연의 얼굴을 쓸었다. 자신이 뭘 듣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눈이었다. 내 고양이가 많이 놀랐구나. 긴장했구나. 당장이라도 저 파르르 떨리는 입 안에 혀를 밀어 넣어 자신으로 전부 채워 넣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어제의 잔상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나로 모두 바꿔 넣으리라. 손도, 얼굴도, 몸도.
“내가 들어줬던 것처럼, 유연이도 오빠 부탁 들어줄 수 있어? 두 달만. 두 달이면 될 것 같아. 잠을 너무 못 자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아. 누가 나 좀 안아줬으면 좋겠어.”
그의 말을 들어내는 유연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쓸던 손을 멈춰 유연의 턱선을 잡고 엄지로 볼을 쓸었다. 유연의 미세한 떨림이 그의 손끝에 닿았다.
“다른 여자는 싫어. 네가 해 줬으면 좋겠어. 그때 내가 그랬듯이. 나 너무 자고 싶어.”
준오의 두 눈이, 칠흑 같은 어두움에 선연한 광채가 돌아, 아름답고 두려웠다. 유연의 다른 쪽에 고여 있던 눈물이 마저 떨어지는 것을 준오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눈물마저 삼켜버릴 것만 같은 검은 눈이 유연만을 바라보았다.
* * *
“어, 15분만 있다가. 비서 팀에 얘기해 놓을 테니까 계셔도 들어와. 같이 할 말이 있어.”
QL엔터 비서 팀에 긴장이 흘렀다. 바닥은 깨끗한지, 들어오는 동선에 막히는 곳은 없는지 몇 번이나 체크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화분의 잎까지 닦고 있는 비서 팀을 뒤로하고 준오도 상무실 문을 열어 두고 대기 중이었다.
17층 엘리베이터에서 보좌진 한 무리가 먼저 내려 준비를 마치고 준오의 비서 팀에 전화해 도착을 알렸다. 곧 엘리베이터에서 얼굴만 마주쳐도 뒤로 물러나고 싶을 만큼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인 한 명과 그의 이목구비를 조금 더 온화하게 빼닮은 중년 남자가 내렸다. 뒤로는 커다란 덩치의 수행원들과 함께. QL 그룹 왕들의 행차였다.
그들 무리가 오피스 동의 유리문을 지나쳐 상무실로 직행하자 사무실이 들썩거렸다. 유리문 너머의 긴장이 사무실 안까지 느껴졌다.
“뭐야, 무슨 일인데 회장님까지 오셨어? 얼마 전엔 텔레콤 대표님도 오시더니…. 나 사보에서 말고는 회장님 얼굴 처음 봐. 헐.”
“강준오 상무님 회장님 외손자라는 소문 있던데 진짜일까?”
“에이…. 상무님 스타트업부터 시작하셨는데 무슨 소리야. 반주현 이사님이랑 대학 창업 센터부터 같이하셨는데…. 손자면 스타트업 안 하시지 않았을까?”
“설마 BPM 프로모 이슈 때문에 오신 건 아니겠지? 좋게 풀리긴 했어도 설립한 지 얼마 안 돼서 사고 친 거라…….”
임빈아가 옆 팀에 기획 문서를 들고 상의하러 왔다가 유연을 힐끔거리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아직 흉이 가라앉을 시기는 오지 않았으니. 그녀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창백해진 얼굴 아래 펼쳐진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맺힌다.
어제 준오의 말이 진짜였구나. 혼내러 오신다더니…. 마음 같아서는 제가 달려 나가서 자신의 실수라고, 잘못했다고 빌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손톱으로 엄지의 살을 꾹꾹 누르며 초조함을 억눌렀다. 도망가지 않고 견뎌낸 나 자신에게 후회는 없지만, 준오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
“오셨습니까.”
어느새 상무실 앞으로 나와 대기하고 있던 준오가 회장 일행을 맞이했다. 상무실 안에 들어선 두 손님을 상석으로 안내한 뒤 저도 소파에 앉았다. 상석에 앉아 지팡이를 옆에 두고 준오를 바라보는 노인은 안광으로 사람도 찌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비서가 진 회장이 항상 즐겨 마신다는 브랜드의 루이보스티를 준비해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투명한 갈색 빛깔의 차 위에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비서가 나가며 조심스레 상무실 문을 닫았다.
“어떻게 여기까지 귀한 걸음 하셨습니까. 부르셨으면 제가 바로 달려 나갔을 텐데요.”
“강준오.”
“네, 회장님.”
“어제 맞선 결국 한 시간 전에 거절하고 나가지도 않았다 들었다.”
“저는 선 안 본다고 가족들과 회장님께 10년을 말씀드렸습니다.”
“누가 나가서 결혼하라고 하던? 강일 셋째 손녀가 어디서 네 얼굴을 봤는지 그렇게 한 번만 만나게 해 달라고 빈 지가 몇 년이다. 내가 그 집 회장이랑 50년 친구야. 50년. 그 영감이 부탁하고, 작년엔 그 집 아비가 부탁하고, 얼마 전엔 그 집 어미까지 제발 한 번만 만나게만 해 달라고 비는 걸. 내가 네 어미한테 일러두고, 일원이한테도 언질 해 두라고 그렇게 몇 번을 당부한 일을.”
진 회장의 호통에 상무실이 울렸다. 이 정도 호통은 각오했던 일이라 큰 감흥은 없었지만 준오는 일단 수긍하는 척 고개를 숙였다.
“내가 지금! 체면이! 저 구석에 구멍 난 난 같은 꼴이다. 이놈아!”
진 회장이 옆에 있던 지팡이를 손으로 쥐어짜며 말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지팡이를 보며 아직 정정하시니 새로 선도 보고 둘째 부인 얻으셔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저건 구멍 난 난이 아니라 싱싱한 몬스테라였다. 평생 난만 키우며 사신 할아버님이니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저는 결혼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예전에도, 지금도.”
“네놈이 그러니까, 자꾸 재벌가에 헛소문이 도는 거 아니야. 네놈이! 학창 시절부터 만난 남자랑, 같이 사업하다 회사까지 차려서, 그놈이 유부남이 돼서도 만나고 있다고. 어?”
곧 정말 지팡이를 던질 기세의 노인이 걱정되어 준오가 말렸다.
“회장님, 그러다 정말 혈압 올라 쓰러지십니다. 진정하세요. 그리고 이젠 포기하실 때도 되셨다고 생각합니다.”
진 회장이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지팡이 가운데를 쥐었다. 순간 상무실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준오가 일어서 문으로 다가서자 진 회장은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회장과 대표가 다 와서 앉아있는데 들어올 손님이라니. 준오가 주현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들어와.”
그가 주현의 허리를 감싸고 안쪽으로 이끌었다. 아무 소리 하지 못하던 진일원도, 진 회장도 대체 누구인가 하고 문을 바라보았다. 주현이 당황한 얼굴로 준오의 상무실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BPM 이사 반주현입니다….”
주현이 난처한 얼굴로 진 회장과 일원에게 인사하며 들어왔다. 강준오 이 새끼는 왜 굳이 이렇게 어려운 자리에서 인사를 시키는 거야. 의중을 알 수 없었지만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주현이 긴장한 얼굴로 고개 숙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리니 자신과 준오를 보는 회장의 눈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옆에 있던 진일원 대표 역시 대체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손을 이마에 올리고 있지를 않나. 내가 중요한 대화를 끊은 건가 하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네놈들이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고 하지만 어떻게 이 늙은이 앞에서… 이렇게 버젓이… 인사를…. 헉.”
진 회장이 신음하며 뒷목으로 손을 뻗었다. 준오가 급히 진 회장의 팔을 붙들고 밖의 수행원들을 불렀다.
“밖에, 당장 들어오세요! 회장님께서 위급하십니다.”
문이 열리고 수행원들이 들어와 분노로 손을 떨고 있는 진 회장의 팔을 잡고 부축했다. 진 회장이 그들의 팔을 뿌리치고 노기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이… 세상이 어떻게…….”
허망한 목소리로 진 회장이 고개를 휘저으며 상무실 밖으로 걸어 나가고 일원이 준오를 돌아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곤 뒤를 따랐다. 수행원들이 앞서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두었다. 마침 흘러나오는 눈물을 훔치며 화장실에 가던 유연이 회장 일행을 보고는 벽 쪽으로 몸을 붙였다. 얼핏 봐도 진 회장의 격노가 넘쳐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근처에 서 있던 유연과 눈이 마주친 진 회장 부자가 잠시 유연의 얼굴을 보다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 안에서 진 회장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일원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준오는, 저렇게 인형같이 생긴 여자들이 회사 안에, 지 코앞에 돌아다녀도 아까 그 반주현인가 뭔가 하는 놈만 십 년이 넘게 좋아 지낸다는 거냐. 데려와서 할아비한테 인사까지 시킬 정도로.”
난처한 표정의 일원이 말했다.
“아버지…. 그러니까 그게 요새는…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정아가 아들이 둘이나 더 있어서 후손은 걱정이 없긴 합니다….”
진 회장 부자가 참담한 얼굴로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오래 살았나. 진 회장은 돌아가자마자 혈압약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화장실에 들어간 유연이 주저앉아 눈물을 뚝뚝 흘렸다. 준오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저 정도로 준오가 혼나고 있었구나. 회장님이 직접 사무실에 찾아오실 정도로. 어젯밤 준오가 유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유연이 마음먹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자신은 천천히 유연의 결정만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하던 다정한 표정이 떠올랐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다정할 수가 있을까, 강준오는. 나라면 힘들어서 그저 원망할 텐데. 왜 이렇게 나를 고생시키는 거냐고 울었을 텐데.
잠들기 전 너무 미안하다는 마음과,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하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어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그의 부탁을 들어주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준오를 볼 수 있을까.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미 아무렇지 않게 지내고 있지만.
지금 남자 친구는 없지만 기우와는 그럼 어떻게 하면 좋지. 그렇지만 지금은 기우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준오를 저렇게 힘들게 한 자신이 기우와 연애를 할지 말지 고민이나 하고 있는 게 가당치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점심도 거르고 책상에 엎드려 있던 유연이 졸다 일어나니 책상 위에 크루아상 샌드위치와 자몽 주스가 놓여 있었다. 샌드위치를 멍하니 보다 고개를 돌리니 기우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유연을 바라보고 웃어주었다.
자신은 이 샌드위치를 받을 자격이 없는 것 같았지만, 밤새 이어진 고민과 수면 부족으로 떨리는 손을 뻗어 샌드위치를 입에 가져다 넣었다. 어쩐지 다정한 맛이 났다.
* * *
“너 내가 언젠가는 죽여 버릴 거야.”
“그럼 너는 내가 이대로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여자에게 팔려갔으면 좋겠냐.”
강일 셋째 손녀라면 주현 자신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무슨 스타트업의 밤인가 뭔가 파티를 하던 3년 전의 밤, 시상을 하러 온 자신의 아버지를 따라 나온 여자는 주현을 보고 눈을 찡긋거리더니 일 때문에 좀 늦게 나타난 준오를 발견하자 천년의 사랑에라도 빠진 듯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준오에게 번호까지 바꿔가며 연락을 해 대는 통에 결국 그가 모두 차단한 뒤에 다시 연락하면 스토커로 신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었지….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니 대단한 열정이다 싶다.
“너 잠깐 놀 때는 그런 타입도 가끔 만나지 않았어?”
“그 여자는 손가락만 스쳐도 할아버지한테 책임져야 할 일이 생겼다고 전화할 여자야.”
그건 좀 그렇다고 생각하던 표정의 주현이 다시 생각을 돌려 짜증을 냈다.
“이제 회장님이랑 진일원 대표님 볼 때마다 대체 날 어떤 표정으로 쳐다보겠어? 넌 왜 요 몇 년 잘만 갈아타던 여자애들조차 만나질 않고…. 진짜 뭐 이태원 뒷골목이라도 다니는 거 아니야?”
“야. 개소리는 됐고, 미안하긴 하다. 이 은혜는 어떻게 든 꼭 갚을게. 이 정도로 안 하면 나 진짜 올해 꼭 팔려갈 것 같아서 그랬어. 지아가 알면 나 찌르러 올 테니 비밀 지켜줘.”
“…걔는 그 소문 들은 지만 십 년이 넘었는데 뭘. 너라면 치를 떨잖아. 너 주말에 유연이 밥 먹인다고 나갈 때도 나에 이어서 우리 요정 같은 아가씨까지 저런 불한당에게 보내기 싫다고 부들부들 떨었는데…. 뭐 여튼, 너 이 건은 내가 꼭 크게 받아낼 거야.”
주현이 이를 박박 갈며 상무실을 나갔다. 이로써 한동안은 좀 조용하겠다 싶었다. 어제가 어떤 날인데 내가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여자랑 맞선을 보러 나가. 그 자리에 반유연 앉히려고 6개월 전에 예약해 둔 곳인데. 어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준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던 유연을 떠올리니 뇌가 저릿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 찾아올까. 내가 깔아 둔 덫과 먹이를 먹으며 제 발로 찾아와 안길 내 고양이를 생각하니 갸륵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러니까 오빠가 안 된다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서 혼날 일을 만들어. 그냥 내 곁에서 내가 선별한 좋은 먹이를 먹으며 내가 주는 일을 하고 안전하게 지내면 좋을 텐데. 그런 뒤틀린 놈에게 너를 뺏길 바엔 내가 잘 안아 통제해 줘야지. 내 눈 닿는 곳 안에 있으면 알아서 가장 좋은 것만 입에 다 물려줄 것을. 워낙 순진한 아이라 그런 간악한 인간에게 휘둘리는 거겠지.
한창때의 아이니 잠시 잠깐의 성욕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제 이름 부르면서 가던 것도 봤으니…. 그럼 그것만 제가 잠깐 채워주면 될 것 아닌가. 자신만큼 유연의 몸을 잘 아는 사람도 없을 텐데.
어떤 티도 내지 않고, 어떤 나쁨도 내보이지 않고, 그저 알아서 네가 내 품에 안겨 오도록. 준오가 유연을 떠올리며 선득하게 웃었다. 언제쯤 찾아오려나. 아주 오랜만에 설레는 기분이었다.
* * *
어떻게 하루가 지나갔는지도 잘 모르겠다. 업무를 하기는 한 것 같은데. 기우가 메시지로 유연이 피곤해 보인다며 데려다주고 싶다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특히나 당분간은 더 기우가 준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요새 오빠가 내가 연애하는 것 같다고 유심히 관찰 중이라 신경 쓰여서 데려다주는 건 안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 토요일에 데이트할 수 있냐고 기우가 물어 일단 다음 주 일요일에 만나자고 미뤄 두었다. 당장은 좀 어려우니 시간을 두고 아무래도 우리 만나는 건 어렵겠다고 말을 꺼내는 게 좋겠지….
유연으로서도 아쉽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곁에 오래 머물며 날 도와준 사람을 지켜야 했다. 비난받는 상황에서도 제 탓을 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을 지켜준 준오를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에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도와 달라는 그 말은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어린 날의 반유연은 좀 미쳤던 게 아닐까. 거절해야 하나 싶다가도 자신은 유연의 말을 들어주었다는 준오의 말이 퇴근길 내내 메아리쳤다. 고민하는 것 자체가 은혜를 모르는 짐승 같았다. 자신 역시 그에게 억지 같은 요구를 한 적이 있지 않나.
퇴근 후 준오에게 토요일 저녁에 준오의 집으로 올라가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일단 자신도 준오를 위해 뭐라도 하지 않으면 이 죄책감을 해소할 수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이 빚을 갚아야 했다.
* * *
장을 봐 온 유연이 다섯 시 좀 넘어 2층으로 올라갔다. 두 손에 한가득 짐을 든 유연을 발견한 준오가 아이패드로 책을 보다 놀라서 달려 나왔다.
“이만큼 장을 볼 거면서 나를 부르지도 않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을 했어야지.”
유연이 온다는 소리에 아스파라거스와 야채도 사 두고 스테이크 에이징까지 다 해 두었는데 이게 웬 것들인가 싶었다.
“오늘은 내가 요리해 줄 거야.”
요리를 하겠다고? 준오가 뭔가 마땅치 않은 얼굴로 유연을 바라보았다.
“설거지도 잘 못해서 그릇 다 깨 먹는 애가… 음식을 한다고?”
“매번 오빠가 다 했잖아. 나도 할 수 있어.”
그래, 가끔은 이런 정체 모를 의욕이 생길 수 있지. 유연의 요리를 남이 먹어 놀림감이 되느니 제가 먼저 먹고 견뎌 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어쩌다 멀쩡한 게 나올 수도 있고.
“…뭐 하고 싶은데?”
“볶음밥. 나 볶음밥 할 거야. 만드는 법도 유튜브 봤어. 내가 해줄게!”
다행히 즉석밥을 사 온 것을 보고 안심했다. 밥을 짓는다고 하면 둘 다 저녁을 굶어야 할 테니 말릴까 했는데, 이 정도면 뭐 무던히 할 수 있겠지. 좀 도와주려고 주방 근처를 서성이니 유연이 만류하며 준오를 거실로 몰아냈다. 제가 도와줘야 유연도 밥을 먹을 수 있을 텐데 싶다가도 서른이 다 된 아이인데 즉석밥으로 볶음밥 정도야 만들 수 있겠지 하며 애써 힘들게 고개를 돌렸다. 등 뒤로 요리를 하는 건지, 프라이팬에 잡아먹히는 건지 모를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참고 모른 척했다. 이게 은근히 고역이구나.
이미 삼십 분도 더 지난 것 같은데, 지지고 볶는 것도 다 끝난 것 같은데 아무 소리 없는 게 이상해 부엌을 슬며시 돌아보았다. 유연이 볶음밥 같은 것을 접시에 담아두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안쓰러우면서도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맛있는 냄새 나는데?”
준오가 웃으며 성큼 부엌으로 걸어가자 유연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접시에 담긴 볶음밥은 밥이 아닌 조금 탄 계란죽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볶음밥에 왜 물을 넣었을까. 계란 껍데기도 데커레이션인지 몇 개 섞여 보이고. 자꾸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고 볶음밥을 숟가락 위에 얹었다.
“오… 오빠…. 그냥 우리 치킨 시켜 먹자…….”
한없이 작아진 유연을 두고 한 입 삼키자 짜고 단 조미료 맛이 올라왔다. 소금도 설탕도 아닌 미원을 넣었구나. 잘 쓰지 않아 처박아 둔 건데 멀쩡히 조미료 통에 있는 소금 설탕 두고 어떻게 이걸 찾아내 넣었을까. 십 년을 넘게 봐도 참 새롭게 대견한 아이다 싶었다. 입 안에서 자그작, 계란 껍데기를 씹는 소리가 났다. 그냥 삼켰어야 소리가 안 났을 텐데…. 아차 할 틈도 없이 유연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며 웃음을 참아 삼켰다.
“유연아.”
“응… 오빠….”
“사람이 못하는 게 있는 건 너무 당연한 거야.”
평생 가정부를 두고 살았고, 없을 땐 아저씨, 아주머니나 주현과 자신이 했다. 걱정이 되어 유학조차 못 보내고 저 비슷한 친구랑 여행이나 몇 번 보낸 게 다인 아이인지라 요리를 제대로 할 줄 알 리가 없었다. 예상했던 결과라 놀랍지 않았다.
“오빠가 스테이크 구워 줄게. 저기 가서 티브이 보고 있자.”
한껏 작아진 유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실 소파로 향했다. 주방은 베이킹이라도 한 것처럼 온갖 집기가 다 꺼내져 있었다. 어휴, 고양이 손으로 수고 많았구나. 무슨 생각으로 요리를 시도한 건지는 알만 해서, 고기를 굽고 있는 내내 삐죽 웃음이 샜다.
시무룩한 고양이는 준오가 요리하는 내내 시무룩하게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저 얼굴에 고양이 귀라도 달려 있었다면 축 처져 접혀 있었겠지. 이번 기회에 깨닫고 앞으로도 요리를 안 했으면 좋겠는데, 아닌가, 볶음밥 정도는 가르쳐야 할까 잠시 고민이 되었다.
* * *
“맛있어….”
“주방에서 안 하던 씨름을 했으니, 더 맛있겠지.”
대답하지 못하는 유연의 표정이 어쩐지 슬퍼 보였다.
“줘 봐, 썰어서 줄게.”
“나도 고기 써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어.”
볶음밥 실패한 게 저렇게까지 충격이었을까. 그냥 좀 둬 보기로 했다. 먹고 나서 같이 부엌을 대강 정리하곤 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치우는 것 정도는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장도 보고 요리도 시도했던 유연이 지쳐 소파에 널브러졌다. 집에서 영화나 보자며 남은 와인에 멜론을 썰고 하몽을 얹어 내었다. 유연이 가만히 멜론 프로슈토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나중에 가르쳐 줄게.”
유연이 물끄러미 보던 멜론 프로슈토를 포크로 집어 입에 넣었다. 하몽의 짠맛과 설탕같이 달콤한 멜론이 입 안에서 터져 혀를 적셨다. 맛있어….
“이게 다, 오빠들이 오냐오냐해서 그래.”
시무룩한 표정으로 유연이 말했다.
“그러게, 내가 잘못했네.”
눈앞에 틀어진 신작 공포 영화를 보며, 준오가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주현이는?”
“지아 언니네 친척 어르신 상갓집 간다고 그랬어. 무슨 지방에 있는지 사돈댁 모시고 가서 그쪽 호텔에서 자고 온다 그러던데….”
영화의 배경음이 점점 더 스산하게 치달아 가자, 유연이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돌렸다. 왜 잘 보지도 못하면서 보고 싶어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딱 귀신 나오기 직전의 배경음인 듯해 준오가 제 팔을 유연의 목 뒤로 뻗어 감싸 유연의 눈앞을 덮었다.
“유령 나오는 거 지나가면 그때 치워. 아직 나올 때 손 치우면 안 돼.”
손가락에 감기는 유연의 속눈썹이 겁에 질려 파들파들 떨렸다. 커다란 손바닥에 닿는 코끝이 찼다. 저런 게 뭐가 이리 무서울까.
“나 언제부터 도와줄 거야?”
갑자기 나온 본론에 유연이 잠시 숨 쉬는 걸 멈췄다. 준오가 손을 떼고 유연의 얼굴을 바라보자 눈빛이 맞닿았다.
“오…빠, 그게 그러니까, 그러면 조금만 천천히.”
“천천히 했으면 좋겠어?”
준오가 웃으며 유연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먹을 것을 둔 뱀의 기꺼운 웃음이었다.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
그가 유연의 가슴 앞에 손을 두었다.
“다음 주는 여기까지.”
손이 미끄러져 복부 아래로 내려갔다.
“그다음 주엔 다 할게….”
“…….”
“이렇게 하면 천천히 하는 거잖아, 그치?”
영화에서 귀신이 나온 건지 꺄악 하고 괴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준오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와 유연은 소파 뒤로 엉덩이를 밀었다. 등이 소파에 푹 들어가 오갈 곳이 없어질 때쯤 그의 축축한 입술이 닿았다. 대답을 고민할 순간도,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었다.
준오의 입술이 유연의 입술을 먹어 치울 듯 벌려 덮어 빨더니 그대로 혀를 넣어 유연의 혀끝을 굴렸다. 몸을 움찔거리자 두 손에 깍지를 껴 소파에 매어 놓고는 더 깊이 파고들어 유연의 입 안을 헤집었다. 입 안이 파헤쳐져 점점 녹진해지다 유연은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같이 혀를 감았다. 입 안의 혀 두 개가 엉켜 쭙쭙거리는 소리가 방 안에 영화와 같이 울려 퍼졌다.
“읍… 흣….”
이 사람에게 이대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이 숨이 가빠 눈물이 고였다. 깍지 낀 준오의 손등을 손톱으로 꾹 쥐어 긁었다. 계속 키스하면 그가 자신의 혀를 다 녹일 것만 같아서.
“벌써 숨 쉬기 힘들면 어떻게 해.”
작게 귀에 대고 말하니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만큼 닿아 왔어도 입술이 닿는 건 처음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포식자가 초식 동물을 달래는 키스가 이런 걸까. 혼이라도 내듯 몰아세우면서도 자신의 입 안 곳곳을 탐닉하듯 맛보고 있었다.
귓바퀴를 잘근잘근 깨물자 몸이 파들거렸다. 그대로 귀 안에 혀가 들어와 둥글게 굴리기에 흐읏 하고 신음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가 그대로 붙잡아 귀 아래 목에 입을 맞추듯 혀끝으로 돌리며 핥더니 약하게 빨아 당겼다.
“응…. 오빠…. 흣….”
그는 목에서 쇄골로, 쇄골에서 왼쪽 목으로 연신 입을 맞춰 빨아먹으며 손을 니트 안으로 쑤셔 넣었다. 화들짝 놀라는 몸의 반응을 뒤로하고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바짝 서 있는 유두를 반기듯 손가락으로 살살 굴려주며 목을 연신 핥았다. 전신이 움찔거리며 허리가 바르작거렸다. 벌써 이러면 넣을 땐 어쩌려고. 준오의 입가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셔츠와 브래지어를 한꺼번에 벗겨 올리자 맛있게 부푼 흰 가슴이 튕겨 올라왔다. 그가 그대로 가슴 사이에 얼굴을 넣고 비비며 유연의 몸 냄새를 맡았다. 반갑고 그리워 마냥 코를 파묻고 싶은 이 살의 냄새를 오랜 시간 그리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오빠 잠깐만… 나…. 흣.”
“하지 말까?”
지금 멈춰도 될까. 멈출 수 있을까. 너무 갑자기라 놀라긴 했지만 유연은 이 사람의 손길이 싫은 적 없었다. 키스와 손길만으로 흥분해 축축한 속옷이 민망했다. 왜 나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변한 것 없이 이 사람에게 안기면 이성을 다 잃어버리는 걸까.
“…아, 니.”
“……유연아, 가슴 빨아도 돼?”
준오가 젖꼭지를 손바닥으로 짓이기며 말했다. 미친놈. 뭐라고 말할지 뻔히 알면서 제 대답을 이끌어 종용하는 건 여전했다. 부끄러움도 치욕스러움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나 그가 멈추지 않기를 바랐다.
“흐으… 응…. 빨아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얼굴을 파묻었던 가슴에 매달려 혀로 유두를 돌려 대기 시작했다. 성난 유두를 가운데 두고 둥글게 굴리다 입 안 가득 베어 물고 쭉쭉거리며 다른 손으로 남은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한쪽은 빨리고 한쪽은 어그러졌다. 제 몸 아래 준오가 매달려 음탕하게 젖을 먹고 있었다.
유연이 손을 뻗어 준오의 머리를 잡았다. 가슴은 자국이 남아도 티가 나지 않아서인지 그는 닿는 살을 쭙쭙대며 빨아 흰 가슴 곳곳에 자국을 남겼다. 입이 닿는 부위마다 살갗이 징징 울렸다.
그렇게 가슴을 한참 입으로 짓이기다가 준오가 유연을 안아 들고 침대로 갔다. 유연은 계속 신음을 내지르며 헉헉거리느라 벌써 몸이 축 늘어져 있었다. 제 몸에 닿는 유연의 물컹거리는 젖가슴에 안고 걷는 와중에도 계속 아랫도리가 서 올랐다. 하, 씨발, 이 좋은 걸 어떻게 안 하고 있었을까.
침대에 유연을 눕히고 옷을 벗어 던졌다. 드로어즈 앞섶이 다 젖어 터질 듯이 팽창해 있었다. 너무 오랜만이니 하반신도 정신을 못 차리는 듯했다. 달려들어 유연이 입고 있던 모직 스커트를 벗겨 침대 밖으로 내던졌다. 유연을 뒤에서 안고 검은 스타킹이 감겨 있는 허벅지를 쓸어 올렸다.
“미안한데 하나만 바꾸자.”
“흐… 응?”
“아래까지, 대신 내 건 안 넣을게.”
준오가 뒤에서 제 것을 엉덩이 사이에 비비며 말했다. 축축하고 단단해서 터질 것 같은 게 드로어즈를 뚫을 듯 유연의 엉덩이를 적시고 있었다. 유연도 제정신이 아니라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오가 유연의 엉덩이를 들어 스타킹을 벗겨 내리고 팬티 위에 손을 얹었다.
“유연아, 팬티가 왜 이렇게 다 젖었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가락이 얇은 천 사이로 들어가 질구 위에 얹어졌다. 축축하게 물을 흘리던 질구가 달싹거렸다. 질구 위의 물을 만지며 팬티를 한쪽으로 밀어내고 입구를 툭툭 쳐냈다. 물이 찰박거리는 소리가 흘렀다.
“하읏.”
“이게 뭐야, 왜 이렇게 됐어. 응?”
애가 닳았는지 엉덩이가 움찔거리며 준오의 아래에 비벼졌다. 당장이라도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빠가….”
“오빠가 뭐.”
“오빠가 나 만져서…….”
“오빠가 만져서 이렇게 됐어? 그럼 오빠가 막아 줘야겠네.”
말과 동시에 손가락이 쑥 들어갔다. 질 입구가 반갑게 손님을 맞으며 조여들었다.
“하응! 오빠, 아, 아.”
뒤에서 유연을 안고 있는 준오가 한 손으론 가슴을 주물럭거리고 한 손은 열심히 구멍에 박아 넣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침실에 울려 퍼져 부끄러운 와중에도 커다란 손가락이 음부에 박히는 게 기분 좋은지 유연은 고개를 휘저으며 아래로 손가락을 조였다.
“오빠… 흑… 아. 으응….”
M 자로 벌려진 다리 아래 박힌 손가락이 열심히 물기 어린 곳을 박아 넣다가 둥글게 내벽을 긁었다. 뭉근하게 돌리는 감각이 자극적이라 순간 유연의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다른 방법으로 그를 어떻게든 달래 보려던 자신은 어디에 가고 몸이 달아 미칠 것 같은 자신만 남아 있었다.
“하나 더 넣어줄까?”
대답을 못 하고 있자 손이 더 빠르게 철벅거리며 쑤셔졌다. 이미 발간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대답.”
“네….”
“부탁할 때는 공손하게 해야지.”
“네…. 하나 더, 흑, 끅, 으응, 넣어주세요.”
“착하게 부탁도 잘하네.”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 그가 유연의 귀 아래를 혀로 핥으며 두 번째 손가락까지 쑤셔 넣었다. 유연의 온몸이 바르르 떨리며 손가락을 맛있게 받아먹었다. 잠시 멍해진 머릿속을 정리할 틈도 없이 두 손가락이 푹푹 질 내부를 쑤셨다. 너무 좋아서 흐물흐물해진 아래가 물을 질금질금 쏟은 탓에 침대 시트가 점점 더 젖어갔다.
“아, 오빠, 아, 아, 아흑, 아, 나 어떡해, 오빠 나, 흑.”
유연의 신음 소리가 점점 높아지자 기다렸다는 듯 두 손가락이 더 깊이 쑤셔졌다. 쑤걱쑤걱 하는 소리가 더 크고 빈틈없이 귀에 닿았다. 엉덩이가 제멋대로 들렸다.
“아, 오빠, 나, 아, 아, 악!”
부들거리는 몸과 함께 유연이 물을 줄줄 흘렸다. 손가락을 박아 넣은 질구가 덜덜 떨리며 경련하는 게 느껴졌다. 그대로 유연의 고개가 꼬꾸라져 뒤통수가 준오의 가슴에 떨어졌다. 그제야 준오가 손을 빼내 자신의 입에 넣고 빠는 소리가 들렸다.
“유연아, 갔어?”
어떤 상태인지 가장 잘 아는 남자의 악질적인 질문에 답할 정신도 없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넣었던 손가락은 대체 왜 빨아 먹고 있는 건지 뭐라 하고 싶지만 입을 뗄 정신이 없다. 어떻게 잊고 지냈더라 나는. 이 사람이 주는 나락에 닿은 쾌락을. 멍하게 있는 사이 눕혀진 자신을 느낄 새도 없이 아래에 축축한 것이 닿았다. 준오가 질구에서 뱉은 물을 혀로 쳐올리며 아래에서 위로 핥고 있었다.
“잠… 잠깐만…. 오빠… 나 씻고…. 응?”
그는 감로수라도 마시는 듯 음핵에 코를 박고 질구에 입을 맞춰 쭉쭉 물을 빨아 마셨다. 그러고는 잠시 고개를 떼 질구에게 말해주듯 입을 대고 말했다.
“지금 내가 빨아서 씻겨주고 있잖아.”
거짓말, 빨수록 질질 흘리기만 하는데. 엉덩이를 움찔거리며 위로 올라갔지만 침대 헤드에 막혀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몸의 수분이 다 애액이 된 듯 그가 빠는 대로 물이 질금거렸다. 코를 박고 음핵을 움직이자 발끝이 절로 곱아들었다. 방금 전에 가 버린 예민한 몸이 감전된 듯 발발 떨렸다.
잠시 그가 일어나 드로어즈를 벗어내자 잔뜩 발기한 성기가 튀어 올랐다. 계속 흥분해 있었는지 쿠퍼액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크단 건 기억하고 있었지만 기억보다도 더 거대해 두려워졌다. 준오가 유연의 손을 끌어 자신의 성기를 잡게 하고 제 손을 유연의 손 위에 얹었다.
“유연아, 다음 주엔 이거 먹자.”
그가 성기를 잡은 유연의 손을 위아래로 잡고 흔들며 말했다. 유연은 두려움에 차 입을 떼지 못했다.
“대답해야지.”
“…네….”
떨고 있는 유연의 손을 부여잡고 계속 수음시켰다. 잔뜩 화나 있는 성기의 움찔거리는 떨림이 그대로 느껴졌다. 준오가 침대 위에 누워 겁먹은 표정으로 제 것을 잡고 있는 유연을 잡아 삼킬 듯 바라보다 큿 하는 신음과 함께 사정했다.
유연의 가슴에 진하고 뜨거운 정액이 한가득 떨어져 내렸다. 엄청난 양의 흰 정액으로 젖은 유연의 젖꼭지를 질척한 소릴 내며 희롱했다. 예쁘고 뽀얀 두 덩이 위에 제가 뱉어낸 것을 올리고 가쁘게 숨을 쉬고 있는 유연이 기껍다. 제 것으로 전신을 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억누르고 휴지로 가슴에 떨어진 제 것들을 일단 거둬냈다.
끈적해서 불편할까 욕실에서 뜨겁게 적신 수건을 가져와 유연의 몸을 닦아주었다. 유연이 넋이 다 빠진 채 누워 준오가 닦아주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곱고 애처로웠다.
겨우 끝인가 했는데 그가 유연의 뒤로 누워 몸을 옆으로 돌리고 유연의 허벅지 사이에 자신의 것을 끼워 넣더니 골반을 잡아 박아 넣었다. 유연이 한바탕 울며 신음하고 나서야 또 준오의 것이 클리토리스 위에 정액을 뿜어냈다. 뜨거운 것이 질척하게 덮인 걸 뭐라 할 정신도 없이, 유연은 그대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새벽에 잠시 눈을 뜨니 그녀는 커다란 반팔 면티를 입은 채 준오의 팔을 베고 반쯤 품에 안겨 있었다. 가지고 있는 모든 이성을 잃었던 밤이었다. 다시 하면 그만큼 좋지는 않을지도 모른다고, 상상으로 부풀려진 쾌감의 기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좋은 정도가 아니라 이성이 다 뽑힐 것만 같았다.
예전보다도 더 온몸이 달아올라 도중에 멈춰 달라고 울면서 빌고 싶었다. 너무 좋아서 두려운 것만은 변하지 않았구나. 너무 큰 쾌감은 두려움과 닿아 있는 게 신기했다.
준오가 정신을 잃은 자신을 잘 닦아주었는지 몸이 찝찝하지 않았다. 그리고 눈앞에, 그가 잘 자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새벽의 파람을 먹은 남자가, 암막 커튼 옆으로 새어 나오는 옅은 빛 한 줄기를 받고 누워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베고 있는 팔에서 준오가 쓰는 스피어민트 바디 샴푸 향이 난다.
미안해, 나 때문에 그렇게 여기저기서 치였구나. 내가 오빠네 할아버지께 찾아가서 잘못했다고, 오빠를 한 번만 봐 달라고 빌어 보는 건 안 되겠지. 정말 당신은 이 두 달의 밤으로 불면도 고충도 해소할 수 있을까.
그러나 사실 제게는 거부권이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 역시 같은 부탁을 했던 때가 있었고 그때 그는 들어주었으니. 그래서 결국 와 버린 밤이 끔찍하다거나 곤혹스럽다기보다는 차라리 해 버리고 나니 고민의 여지가 없어 편하다는 우스운 생각을 했다.
우리의 시간에 공백이 있었다 해도 대부분의 날들은, 그가 자신의 오랜 고집과 어리광을 들어주며 지낸 세월이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든 뭐든 마음 깊은 곳에선 나도 언젠가는 당신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에 얼토당토않은 것을 알지만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나마 지금 연인이 없는 게 다행인 걸까.
아주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과거 기억의 파편에서 유리 조각 같은 것 하나가 뚝 떨어져 나와 팔뚝 아래를 얕게 긁으며 유연에게 경고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엔, 그런 식으로 당신이 좋아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땐 준오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줬다면, 이번엔 내가 들어주는 쪽이니까. 그래도 좀 낫지 않을까….
감고 있는 눈가나 날카로운 사선을 그리는 콧대, 수려한 이마 같은 것들을 보면서 여전히 아름답다고 생각하다가, 8년 전에 그토록 원했던 입술에 닿은 몇 시간 전을 떠올리자 아랫배가 움찔거렸다. 자신에게 화를 내는 듯한 키스였다. 나빴어, 맹수에게 먹히는 줄 알았잖아…….
잠을 못 잔다더니 제 곁에서 잘 자는 모습을 보자 어쩐지 뿌듯했다. 그렇게 어스름한 새벽이 묻은 얼굴을 바라보다가 언제인지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 몇 시간 후에 누군가 자신을 쓰다듬는 기척을 느꼈다.
“유연아, 씻고 밥 먹자. 주현이 두 시간쯤 후에 집 도착한다고 하더라.”
남자가 침대 귀퉁이에 앉아 정신없이 잠든 저의 머리카락을 귀 옆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조금의 안쓰러움을 담은 남자의 표정과 부드러운 손길이 함께 닿았다.
“으음…. 몇 시야?”
“열 시.”
너무 자주 둘이 붙어 있는 모습을 주현이나 새언니에게 보여봐야 좋을 게 없기에, 자신도 지금 일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일어나니 밤새 부들거리며 떨어 댄 허리가 시큰거렸다. 안 쓰던 근육들이 작게 몸에서 삐걱거린다. 준오가 유연의 입가에 컵을 대고 가져온 물을 먹였다. 쩍쩍 마른 입 안에 물기가 돌았다.
“오빠.”
“응?”
“잘 잤어?”
유연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묻자 준오에게서 피식, 웃음이 샜다. 그러고 보니 자신도 유연만 닦아주고는 꼭 안은 채 정신없이 잠이 들기는 했다. 반유연이 목표 달성했네.
“응, 덕분에.”
유연의 머리 위에 손을 얹자 잠이 덜 깬 유연이 머리를 준오의 손에 비볐다. 오랜만이네.
“욕조에 좀 담갔다 나와. 몸 좀 풀리게. 꺼내 놓은 입욕제 넣고.”
“으응…….”
비몽사몽 유연이 일어나 욕실로 향하는 걸 보고는 아침에 사온 크루아상을 갈라 햄과 치즈, 야채를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옆에는 뜨거운 브로콜리 수프를 두고. 유연이 씻고 나와 보더니 말했다.
“나중에 나도 만들 수 있어.”
과연 그럴까. 부디 유연이 요리에 대한 의욕은 잃었으면 좋겠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유연이 허겁지겁 먹는 것을 바라보았다. 항상 잘도 먹지 너는. 잠시 눈이 마주치자 유연의 볼이 붉어졌다가, 다시 열심히 샌드위치를 야금야금 씹어 먹었다. 긴 밤 몇 시간 내내 울었으니 배가 고프겠지, 그래.
* * *
준오에겐 기분 좋은 월요일이었다. 결국 유연은 예상대로 제가 풀어 둔 덫 안으로 왔고, 자신은 덫에 걸린 유연을 그대로 감싸 안아 취하면 그만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안게 된 유연의 몸이나 체취, 머리카락과 표정, 흐르던 눈물, 제가 주입한 쾌락에 흐느끼던 얼굴, 그리고 일어나 눈 떴을 때 유연이 제 품 안에 잠들어 있는 걸 봤을 때의 충족감은 뭐라 표현해도 부족한 것이었다. 자신을 도발한 기우가 짜증스럽고 엿 같으면서도 고마운 마음까지 들 정도로. 손대지 않으려고 했지만 너무 고약한 것이 붙어 어쩔 수 없다고 그가 자위했다.
징그럽게 싫어하는 정기 임원 회의 중에도, 결재를 하다가도 문득, 막을 수 없는 잔상이 제 눈앞에 뛰어들었다. 여린 분홍색 정점에 뿌려진 자신의 정액을 흰 피부에 크림처럼 발라줄 때의 그 치기 어린 정복감이 떠오르다가, 잠도 덜 깬 와중에 일어나자마자 잘 잤냐고 마른 목소리로 묻는 그 아이 같은 얼굴이 연이어 떠올랐다. 유연에겐 자신을 재우는 게 중요한 과업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절로 웃음이 흘렀다. 생각에 빠져 있던 중, 상무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상무님, 지난주에 지시하셨던 BPM 전사 공유 폴더 접근 기록 리스트입니다….”
프린트한 문서를 전달하는 안 비서의 긴장된 표정을 보고 준오가 무언가 있겠다는 짐작을 했다.
“일주일 동안 서비스 마케팅 팀 폴더는 모두 해당 팀 내부에서만 수정 기록이 있었는데, 단 한 번 외부 팀원이 해당 문서를 열어 재저장한 기록이 있었습니다.”
예상대로였다. 안 비서에게 더 말해 보라 눈짓을 보냈다.
“PC 넘버 확인 결과 디자인 팀 임빈아 대리 자리로 확인되었습니다. 해당 프로모션 전날 밤 열 시 삼십 분경으로 확인됩니다….”
문득 화장실에서 유연의 뒷담화를 하던 직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지, 반유연이 그렇게 설렁설렁 일했을 아이가 아닌데. 왜 진작 폴더 접근 기록 체크할 생각을 못 했을까. 무사히 넘길 생각만 하던 자신의 어리석음이 답답했다.
“열 시 삼십 분이면 회사에 임빈아 대리만 있었을 가능성이 높네요. 그때 누가 회사에 있었는지 출퇴근 기록 확인해서 목록 뽑아오고, 임빈아 대리 퇴근하는 CCTV 영상 시간까지 표시해서 확보해 두세요….”
“네 상무님.”
“그리고, QL 윤리위원회 안진아 팀장이랑 엔터 인사 팀 윤건오 실장도 내일 오전에 시간 맞춰서 내 방으로 오라고 해요. 보안 팀 팀장에게는 말 새어 나가지 않게 입단속 잘 시켜주고….”
그렇지 않아도 유연의 곁에 거슬리는 것들을 치워주려 벼르고 있었는데, 알아서 파멸을 자초하는 벌레들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 나야 고마운 일이다만. 아무 일 없이 잘 빠져나갔다 생각했을 텐데 어쩌나. 준오가 자리에서 문서를 다시 읽어보며 조용히 조소했다.
* * *
월요일의 칼퇴근은 뿌듯한 마음이 든다. 이제는 완연히 차가워진 날씨에 코트 앞섶을 여미며 유연이 집으로 돌아왔다. 새언니와 주현이 퇴근한 유연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신혼부부 집에서 살면 눈칫밥 먹을 만도 한데 둘 다 어쩜 이렇게 잘해주는지 원. 이사는 역시 겨울 지나고 하자고 생각했다. 오늘 저녁 메뉴는 꽃게탕이었다.
“아주머니가 끓여 놓고 가셨어요. 아가씨 제때 와서 같이 먹으니 너무 좋아요.”
새언니는 천사야…. 감칠맛 나는 꽃게탕을 셋 다 열심히 씹어 먹고 있을 때였다. 기름진 쌀밥에 김 가루를 보송하게 올려 비비고 꽃게를 물어뜯고 있는데 주현이 유연에게 물었다.
“이번 주 주말에 약속 있어?”
“응. 일요일에 있어. 왜?”
“어지간하면 약속 취소하고 같이 여행 가자. 양평에 QL 임원용 리조트 지원해주는 거, 최 이사님이 됐는데 애가 독감 걸려서 못 갈 것 같다고 대신 내가 가라고 하시네. 여기 주말에 가려면 세 달은 기다려야 해. 2층짜리 스위트 독채야.”
사진을 보니 정말 아름다웠다. 새로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신축 리조트에 딸린 가장 비싼 독채 건물은 단아한 강원도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커다란 히노키탕이 있는 유리방에서 반신욕을 하며 설산을 볼 수가 있었다. 리조트 안의 정원이나 레스토랑도 넓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괜히 신혼부부 여행 방해하는 거 아니야?”
“아가씨, 여기 독채에 방만 세 개인걸요. 이렇게 넓은 곳 둘이 가서 뭐 해요. 여럿이 가야 좋죠.”
“얘기했더니 너 가면 준오도 가겠다고 하더라. 오랜만에 넷이 여행이나 가자.”
“강준오… 흠… 그래….”
새언니는 마냥 달가워하진 않았지만 뭐 어쩔 수 없지. 하는 목소리였다. 언니는 결혼 전에도 후에도 ‘남편의 남자’라는 소문을 듣고 지내게 만드는 준오를 언제나 탐탁잖아했다. 동기끼리 오래 잘 알고는 지내지만 언제나 유쾌하지는 않은 느낌이었다. 일적으로 깊게 묶여 있으니 언니도 이해야 하고 있지만, 강준오가 평생의 라이벌이라나 뭐라나. 그 소문이 회사까지 났으니 언니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둘의 비주얼 합은 동생인 내가 봐도 뭔가 사람들이 묘한 상상을 하게 만들기에 적합하달까….
다음 날 점심시간에 간 카페 안에서 기우에게 가족 여행을 간다고 약속을 미뤄야 할 것 같다고 양해를 구했다. 아쉬워하는 그의 표정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 평일에 저녁 식사도 안 돼요?”
아, 저 덩치에 시무룩하게 나라 잃은 표정이라니. 유연의 심장이 움찔했다. 강준오가 사람 잘 보긴 하네. 위험하네. 심장이 위험해지는 사람이다. 순간 약해진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최소한 준오와 약속한 두 달이라도 기우를 멀리해야 했다. 준오의 스트레스 지수가 낮아지고 마음이 풀려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을 때까지,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 덜어질 때까지는.
“정말 미안해요 기우 씨. 나 한두 달 정도는 바쁘지 싶어요. 집에 일이 생겨서…. 대신 다음 주 토요일은 가능해요.”
선약을 아예 깰 수는 없으니, 겸사겸사 다음 주에 만나서 고백은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우가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다가, 유연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연 씨, 나 되게 끈기 있고 오래 잘 기다려요. 난 갖고 싶은 게 잘 안 생겨서, 어쩌다 한번 그런 게 생기면 아주 천천히 느긋하게 지켜봐요. 어차피 금방 내 것이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서요. 원하는 건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말이 끝나고 어쩐지 처음 보는 듯한 차가운 표정이 되었다가 얕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여행 가서 잘 놀다 와요. 나 계속 여기 있으니까. 그것만 잊어버리지 말고.”
그가 유연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 쓰다듬었다가 유연의 귀까지 훑고 손을 다시 가져갔다. 곧 아영이 새 썸남과의 전화통화를 마치고 기쁜 얼굴로 카페로 다시 돌아왔다. 당장이라도 새 썸남 얘기를 하고 싶어 견디기 어렵다는 얼굴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기우가 아영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이야기 중인 두 사람의 앞에서 유연이 잘 놀다 오라는 기우의 말에 붙어 있던 묘한 악센트를 되새겼다. 심장이 덜컹거린다. 귓바퀴에 닿았던 손끝의 온도를 떠올리니 마치 찔리는 듯 심장이 얕게 일렁거렸다.
“그럼 양양에서 바로 만나. 유연이 너 옆자리에서 잠만 자지 말고.”
네 명이 가는데 뭐 하러 차를 두 대나 가져가느냐 주현이 툴툴거렸지만 준오가 일요일에 한두 시간 먼저 나와서 본가에 가야 할 수도 있다 하니 별수 없이 두 대의 차로 가게 되었다. 집 앞에 잠시 서 있자니 준오가 광택이 유난히 검다 싶은 스포츠카를 유연의 앞으로 가져다 댔다. 으이구, 화상. 두 대나 있으면서.
“아니, 차를 또 샀어?”
유연이 이 사치병을 어쩌면 좋아. 하는 표정으로 옆에 타며 말했다. 순간 준오가 유연의 몸 위로 다가갔다. 뭐야, 한마디 했다고 이러는 건가 긴장하는 순간 준오가 안전벨트를 빼서 매어 주었다. 괜한 생각 했네.
“돈은 죽자고 벌지, 쓸 시간은 없지. 가끔 뭐라도 사 줘야 내가 돈 벌고 있는 게 실감이 날 것 아냐.”
하긴, 항상 밤에 퇴근하면서 보면 준오의 집 앞에 차가 없을 때가 많았다. 유연이 준오의 옆얼굴을 보며 어디 가서 저 얼굴 활용도 못 해 먹고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준오가 옆을 흘끗 보고 말했다.
“아깝지?”
“응?”
“이 얼굴 어디서 쓰지도 못하고, 아깝지 않아?”
아, 정말. 생각도 맘대로 못 하겠네. 무슨 눈짓만 해도 다 알고.
“아깝긴 뭐가 아까워. 어디 나 안 보는 데서 잘 쓰고 다닐 텐데.”
창밖을 바라보며 유연이 네가 어련히 알아서 놀고 다니겠지, 하는 톤으로 말했다.
“나 지난주 주말에도 밤새 너랑 있었지.”
갑자기 그 얘기는 왜 해. 이번 주 내내 자꾸 민망한 생각 올라오는 거 애써 외면하며 생활하느라 죽겠는데.
“이번 주도 또 너네랑 여행 가고 있지.”
그건… 그렇긴 한데.
“게다가 반유연 수면 치료사 두 달 힘들게 예약했는데.”
하아, 수면 치료사. 어쩜 저렇게 잘 갖다 붙일까. 남에겐 절대 말할 수 없는 낯부끄러운 일만 하는 그 치료. 유연의 볼이 붉어졌다.
“평일 잘 참고 일했으니 오늘도 예약권 써야 하는데. 기회가 있을까 모르겠네.”
미쳤나봐…. 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오늘도 자고 싶어, 유연아.”
잠시 걸린 신호에 그가 유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미친놈. 뭐라고 하면 그냥 밤에 잘 자고 싶다는 건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냐고 몰아가겠지. 유연이 이를 악물고 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운전하는 준오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화장실은 가고 싶지 않은지, 배는 고프지 않은지, 휴게소는 갈 생각 없는지 준오가 틈틈이 유연의 상태를 체크했다. 하여간 자신의 상태를 항상 체크하고 있는 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질 않았다. 아니, 요새 더 극성인 것 같기도 하고…. 잠시 들른 휴게소에 커피를 사러 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안 돼, 12월이야. 따뜻한 거 마셔.”
“…그래서 강준오도 따뜻한 거 마신다고?”
유연이 어디 네가 뭘 시키나 한번 보자는 눈으로 준오를 보았다. 준오가 짧은 한숨을 쉬더니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개를 주문했다. 주문을 받던 아주머니가 흐뭇한 눈으로 둘을 보며 말했다.
“아유, 커플이 어쩜 이렇게 예쁘고 잘생겼어. 어디 연예인들인 줄 알았네.”
유연이 기겁하며 커플은 아니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준오가 웃으며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커피를 받아 나오며 뭐냐는 눈빛으로 준오를 바라보았다.
“그런 걸 일일이 대꾸해서 뭐 해. 그냥 아 네. 하고 웃고 넘기면 그만이지. 왜, 아줌마 인상이 너무 좋아서 서울로 돌아가면 펜팔이라도 할 거였어? 가서 정정해줘?”
흥, 유연이 손을 내밀자 준오가 고개를 저었다.
“차가워, 차에 들어가서 히터 틀고 마셔.”
아휴, 강준오를 누가 이겨. 유연이 차로 돌아가다 고동색으로 곱게 구워지던 군밤을 보았다. 준오가 조용히 그 앞으로 가 하나 달라고 주문을 했다. 이런 건 진짜 어떻게 다 아는 거야. 터덜터덜 차를 향해 걸었다.
“…내가 군밤 두 개 먹고 싶을 수도 있잖아.”
괜히 심통이 났다.
“가서 밥 먹을 거니까 하나만 먹어.”
단내가 폴폴 나는 군밤을 뽑은 지 한 달도 안 되어 보이는 새 차 안에서 먹고 있단 사실을 깨달은 건 이미 반쯤 먹은 후였다. 어쩌지라고 생각한 건 차 손잡이 옆면에 손을 댔다가 군밤 껍질의 검댕을 묻힌 후였고…. 유연이 헉 하는 소리를 내자 준오가 옆을 흘끗 보고는 네가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연이 콘솔박스에서 물티슈를 꺼내 검댕을 벅벅 닦았다. 아주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빠르게 껍질을 까서 준오의 입에 군밤을 밀어 넣었다.
“자, 맛있지? 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