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Our Problem (6/13)

6. Our Problem

짧은 단비 같은 점심의 음료 타임을 마치고 유연이 자리에 앉았다. 오늘도 점심시간의 마감과 함께 메신저 알림이 바탕화면에 퐁퐁 솟아올랐다. 개발 팀이었다.

[유연 대리님 마지막으로 MMS랑 오로라 톡 나갈 거 체크 부탁드립니다. 공유 주신 문서 그대로 나가면 되는지 확인해 주세요.]

유연이 자신의 드라이브에 있는 문서를 다시 읽어보며 별문제 없음을 확인했다.

[네! 문제없습니다. 2시 정각에 발송 부탁드립니다.]

확인을 마친 유연이 다른 업무를 하던 중이었다. 두 시 정각, 사람들이 핸드폰을 들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금방 잦아들겠거니 했는데, 소음은 점점 더 커졌다. 모두가 핸드폰을 보고 있기에 이상한 생각이 든 유연이 뒤늦게 문자를 읽었다.

“뭐지, 이벤트 포인트 대상은 만 명 아닌가요? 십만 명이라고 쓰여 있는데요?”

“네? 분명히 만 명이라고 적었는데…….”

“유연 씨? 잠시 제 자리로 와주세요.”

팀장님이 급한 목소리로 유연을 불렀다. 팀장님께 보냈던 서비스 마케팅 팀 공유 폴더의 문서를 확인해도 분명 만 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서둘러 팀장님 자리로 간 유연이 애써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진정시켰다.

“잠깐, 우리 팀 전용 공유 폴더 말고, BPM 전사 공유 폴더 주소로 문서 한 번 더 봅시다.”

같은 문서를 복사해서 넣어 둔 건데 다를 리가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유 폴더의 문서를 열었다. 팀장님 자리 뒤에 서서 모니터를 보는 유연의 얼굴이 불안으로 굳어 있었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불안에 떨며 공유 폴더의 문서를 열었다. 단체 MMS와 메신저용 발송 문서에 있는 문서의 문구에는…….

[선착순 십만 명]

단어 딱 한 글자만이 다르게 써져 있었다.

순간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눈을 깜빡거렸다. 왜? 대체 어떻게? 내 폴더엔 분명히 만 명이라고 쓰여 있는데. 컨펌까지 다 받았던 건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유연이 얼어 있는 사이, 팀장님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연 대리. 자, 정신 차리고. 이슈가 터졌으면 정신 똑바로 챙기고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해 봐야지.”

언제나 온화한 느낌이었던 팀장님의 얼굴이 어쩐지 단호하게 변했다. 그러나 유연을 탓하거나 하는 느낌은 전혀 없이, 다독여 주는 듯한 말투였다.

“일단 팀장급들 모여서 긴급회의 한번 합시다. 지금 바로 집합 가능한 각 팀 팀장님들 1번 회의실로 2시 30분까지 와달라고 해주세요. 단체 메신저로 보낼 테니까 유연 대리가 각 팀들 자리로 가서 팀장님들께 메시지 보셨냐고, 회의 참석 30분만 부탁드린다고 말하고.”

“네, 팀장님.”

유연이 울 것 같은 마음을 다잡고 손톱을 눌러 주먹을 쥐었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내가 어떻게 썼든 간에 이미 사건은 터졌으니까. 팀장님 말씀대로 해결을 해야 한다.

“아영 씨, 1번 회의실에 회의 준비 좀 해주세요. 병 음료수 열 개 정도 단걸로 좀 깔아 놔요.”

“넵.”

“이 과장은 나랑 같이 회의 들어갑시다.”

팀장님이 일사불란하게 대책 마련을 위해 회의 준비를 시작했다. 순식간이었다. 유연이 회의 참석 체크를 위해 뛰어나가자 기우가 왼쪽 에리어는 본인이 갈 테니 유연에게 오른쪽만 체크하라며 같이 움직였다.

각 팀 팀장들이 회의를 하는 내내 부서가 웅성거렸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3년 차 공채 출신 대리의 삶은 녹록지 않았어도 나름 원활하게 이루어져 왔었다. 딱히 모자란 부분도 없었고 적당히 인정받으며 깔끔한 일 처리를 하던 자신이었는데.

왜 확인을 자신의 폴더로 했을까. 공유 폴더에 공유했으니 공유 폴더 문서도 직전에 체크했어야 했는데. 메신저로 다른 이슈 처리하느라 정신없어서 크로스 체크를 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십’만 명의 ‘십’은 어디에서 왔을까. 내가 나도 모르게 그렇게 썼던 걸까? 일이 터지고 불안해지니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다.

글자 하나에, 단어 하나에 구천만 원의 손해가 났다. 자리에 앉아 대책 회의 결과를 기다리며 울먹이고 있는데 기우가 유연의 자리에 수박 주스를 슬쩍 놓고 갔다. 곧 꺼져 있는 핸드폰 화면에 기우의 메시지가 하나씩 떠올랐다.

[유연 씨 지금 식은땀 흘리고 있으니까 달고 수분감 있는 것 챙겨 마셔야 해요.]

[걱정하지 말아요. 해결될 거예요.]

[나도 옆에서 같이 도와줄게요.]

검은 핸드폰 화면에 떠오르는 기우의 말이,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핑 돌았다. 빨대를 입에 물어 수박 주스를 마시는데 짠맛이 돌았다. 눈물 맛 나는 수박 주스는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다.

주스를 반쯤 마셨을 때 팀장급들이 회의를 마치고 문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자, 우리 팀. 회의실로 잠깐 갑시다.”

멍한 정신을 부여잡고 유연이 회의실로 향했다. 자리에 앉으니 다들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나 역시 분명히 만 명이라고 봤던 것 같은데……. 내 기억력도 다 된 건지. 그렇지만 공유 폴더에 그렇게 적혀 있고, 그렇게 나갔으니 할 말이 없네요. 그저 상황을 타개하려고 노력하는 수밖에는. 그렇죠? 내가 최종적으로 확인 한 번 더 하고 보냈어야 했는데 유연 대리에게 그냥 MMS용 문서 분리해서 보내라고 했으니 사실 나 역시 최종 확인을 했다고는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 서비스 마케팅 팀 팀원들에게도 미안합니다. 곤혹스러운 상황 모두 걱정될 거라고 생각해요.”

팀장님의 탓은 없다고, 그저 죄송하다고, 공유 폴더 마지막 확인을 안 한 건 나라고 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딘가 지면 그 아래의 바닥으로 가라앉고 싶었다. 속이 꽉 막힌 것 같다.

“이미 벌어진 일, 최선을 다해 좋은 방향으로 해결해 보려고 노력해 봅시다. 일단 나온 이야기는 첫 번째는 MMS와 오로라 톡 재발송해서 메시지에 오류가 있었다고 사과문을 보내고 원래 예정대로 만 명만 받도록 하는 거고요. 두 번째는 문자 발송한 그대로 가는 겁니다. 만이 아니라 십만 명 그대로 포인트 발급해서 이벤트 지원 대상 확대하도록. 유저 결제 수도 올라갈 테니 마냥 마이너스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로 상무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모두 지금 이슈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해결될 때까지, 잘 부탁합니다.”

“네, 팀장님.”

여기저기서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휴가였던 강준오 상무가 방금 급하게 출근했다는 얘기가 등 뒤로 들려왔다. 성수동에 있던 반주현 이사까지 방금 상무실로 들어갔다면서.

아, 피가 마르는 것만 같다. 순식간에 면목 없는 동생이 되어버렸다. 오늘 집에 들어가서 오빠를 어떻게 보지. 준오는 또 어떻고.

* * *

“두 번째 방침, 애초 기획의 열 배인 십만 명으로 포인트 발급 인원 변경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급하게 상무실을 다녀온 팀장님이 말했다. 바뀐 이벤트 방침을 위해 서비스 마케팅 팀은 열 배로 변경되면 어떤 부분을 추가로 수정하거나 지원해야 할지 찾느라 밤낮으로 바쁘게 다녀야 했다. 서버 팀에선 애초의 기획보다 열 배의 트래픽을 갑자기 감당해야 했으니 앓는 소리가 나왔고, DB도 QA도 마찬가지였다.

유연과 무던한 사이의 다른 부서원들의 대부분은 걱정과 응원을 보내 주었지만, 평소에도 유연을 좋아라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유연을 비꼬며 다녔다.

“반유연 때문에 뭐 하는 짓이야, 수령 인원 열 배로 바뀐 대규모 이벤트가 됐으니 시안도 더 화려하게 업그레이드해 달라고 추가까지 왔어, 지금. 이미 올라간 프로모션에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몰라.”

가장 선두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임빈아였다. 빈아는 보란 듯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화두를 던졌다.

“서버 팀은 트래픽 올라간 거 처리하느라 어젯밤에 새벽에 들어갔다던데.”

“QA도 아무래도 참여 인원 늘어나니까 문의도 쏟아져서… 죽겠다고 난리 치고 있더라. 반유연은 아무리 봐도 머리가 아니라 얼굴로 공채 뽑힌 거 아냐? 신입도 아니고 무슨 그런 실수를 해?”

유연과 함께 점심을 먹고 엘리베이터를 올라가던 기우가 멈춰 서더니 화장실에 들렀다 가겠다며 팀원들을 먼저 보냈다. 저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어깨가 축 처지고 당장 도망가고 싶었지만 지금을 무사히 버텨야 했다. 나중에 징계를 받더라도 일단은 지금의 최선을 다 하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기우는 사람들의 불편한 마음을 부채질하고 있는 사람들의 리스트를 머릿속으로 작성했다. 일단 유연을 가장 미워하는 디자인 팀 임빈아 대리에게 찾아갔다.

“임빈아 대리님, 저랑 커피 한잔하실래요?”

몇 달을 쫓아다녀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피하기만 했던 기우 대리가 먼저 찾아오다니. 이게 무슨 횡재일까. 그녀가 솟아오르는 잇몸 미소를 주체하지 못한 채 커피를 마시러 나갔다.

옆에서 걷기만 해도 심장이 두 근 반 세 근 반 하는 느낌이었다. 커다란 키에 딱 벌어진 어깨, 캐주얼 슈트 차림의 그가 걷자 여기저기서 눈 굴러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뭐야, 진짜. 심 봤어. 오늘 나 꿈을 잘 꿨나?

“뭐 드실래요, 임 대리님? 오늘은 제가 사고 싶어요.”

임빈아가 기우의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골랐다. 진동 벨이 울리자 기우가 일어나 음료를 임빈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대리님, 요새 저희 팀 이슈 때문에 이벤트 규모가 커져서 많이 바쁘시죠? 수정도 들어오고…….”

사실 디자인 팀에선 대규모의 트래픽이나 이슈에 대응해야 하는 타 팀의 상황과 달리 추가 퀄리티 업그레이드 정도로 큰 추가 업무가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일단은 달래야 했기에 힘든 사정 다 이해한다는 듯 임빈아에게 말했다.

매일 점심 유연이 보일 때마다 불만을 뿜어 대던 임빈아가 기우의 앞에서 세상 조신하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사실 이번 이슈에 디자인 팀 업무는 크게 과중된 건 없어서요. 있어도 제가 팀원들이랑 과장님들 잘 달래서 처리할게요, 대리님!”

기우의 얼굴을 앞에 두고 보자 모든 불만은 사라지고 그저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만이 남았다. 이렇게 둘이 따로 만날 수만 있다면 반유연이 몇 번의 사고를 더 쳐도 그저 고마워질 것 같았다. 기우가 여유로운 얼굴로 미소 지으며 임빈아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임 대리님. 이번 이벤트 다 끝나면, 제가 술 한잔 살게요. 팀에서 불만스러운 이야기가 나와도… 대리님이 잘 막아 주실 거라고 믿어도 될까요?”

이 정도 여자를 달래는 일이야 뭐, 기우에겐 별로 힘쓸 만한 일도 아니었다. 좀 성가시긴 하지만.

어제는 유연이 먼저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야근을 하던 서버 팀에 피자와 치킨 몇 마리를 시킨 걸 들고 찾아가 저희 팀 때문에 고생하시는 것 잘 알고 있다고, 이왕 이렇게 된 것 유저 수 파격적으로 늘려서 좋은 방향으로 결과 내겠다고, 이벤트 끝나면 또 사겠다며 그쪽 팀원들을 달랬다. 그날 이후로 매번 서비스 마케팅 팀만 지나가면 째려보던 사람들도 점차 잠잠해졌다. 남자들 많은 팀은, 기름기 있는 걸 먹이면서 달래는 게 최고지.

매년 과대나 학생회장, 아니면 아버지 주변의 노친네 임원들 비위 맞추며 삼십여 년을 살았던 기우에게 이 정도 또래 달래는 거야 뭐 딱히 힘들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좀 성가시긴 하지만 이러다 내 공주님 도망이라도 가지 싶어서. 아직 꾀어내지도 못했는데 이런 머저리들 때문에 놓치면 엔터를 먹는 게 아니라 부서 박살 내고 싶어질 것 같았다. 그러니까 좀 수고롭지, 뭐.

* * *

한편 유연이 친 사고로 죽을 맛인 건 유연의 팀원들만은 아니었다. 준오야말로 언제든 자신이 실수하기만 바라고 있던 하이에나들에게 좋은 먹이를 던져 준 셈이라 여기저기서 건수 잡은 영감들의 두근거리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이지 욕이 절로 나오는 일상이었다. 씨발, 구천, 꼴랑 구천. 영감탱이들 얼굴에 던져주며 이거나 처먹고 떨어지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 밖으로 기어오르는 걸 꾹꾹 눌렀다.

알고 있다. 고작 이 금액의 문제가 아니란 것을. 틈만 보이면 법인을 홀랑 주워 먹고 싶어 하는 하이에나들의 엉덩이를 발로 차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오늘은 큰아버지이자 텔레콤 대표인 진정아의 큰오빠, 진일원까지 법인 상무실로 찾아왔다. 불려 가는 것도 아니고 사실상 실질적인 수장인 텔레콤 대표님께서 친히 찾아오니 부서 전체가 들썩거렸다. 준오가 그를 반갑게 맞았다.

“대표님, 그냥 절 부르셨으면 직접 갔을 텐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구경은 한번 해야 할 것 아니냐. 엔터 생기고 구경도 못 한 게 말이 되겠니? 텔레콤보다 인테리어는 훨씬 좋은 것 같다만…….”

구경이야 좋지만, 이런 때 오면 직원들이나 반유연은 어디서 불호령이라도 떨어지는 건가, 우리 문 닫는 건가 한다는 게 문제인데요. 그러나 이걸 대표님께 말할 수 있을 리가.

“뭐 소소한 사건 터졌다고 해서 겸사겸사 와 봤다. 너도 알다시피 그 정도야 뭐, 신규 TFT 하면서 수백 수천억씩 말아먹는 것에 비하면 콧방귀도 안 뀔 액수긴 하다만.”

준오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말하고 싶은 건, 이번에 너도 느꼈을 거다. 네 자리를 노리는 게 비단 둘째만이 아니라는 걸. 이 정도 실수에도 달려드는 승냥이들이 있다는 걸 항상 기억하라는 얘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전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지난달보다 신규 가입자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이 여세 몰아서 영감님들께 3분기 회의 때 확실하게 상승된 지표 보여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진일원이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고 BPM 상무실을 나왔다. 대놓고 잘했다 하진 않았지만 원했던 대답이었다. 대미지를 시너지로 바꾸는 힘. 외척이 아니라 제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아가 왜 자신의 판을 벌이지 않고 아들에게 쥐여줬는지 알 것 같았다. 될 만한 놈에게 쥐어 준 것이리라.

* * *

요사이 유연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회사에서야 어떻게 괴로운 티 숨기며 숨 가쁘게 일하고 있다고 해도, 돌아오면 그저 눈물바다였다. 주현이 걱정 말라며, 준오나 자신이나 큰 걱정 안 하고 작은 이벤트 큰 이벤트로 변경했을 뿐이라고 말해도 요지부동이었다. 입맛이 없다고 계속 저녁을 굶어 어느새 야윈 볼을 볼 때마다 주현의 속이 아려왔다.

유연은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해서 업무량이 늘어난 만큼 이 팀 저 팀 돌면서 하나라도 더 돕고,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매일 저녁에 자신이 꼭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이슈 체크를 QA 팀과 같이 하고 있다고 가까운 팀장에게 들었다.

지금은 제가 부모님 대신 돌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출근하는 아침마다 땡땡 부은 눈을 한 아이를 보면 지아 또한 속상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지금 모두 바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퇴근길 주현이 준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너 요새 유연이 본 적 없지.”

“이슈 처리하느라 정신없었으니 원…. 요새 맨날 새벽에 들어갔잖아.”

그러고 보니 좀 만나서 달랬어야 했다 싶었다. 굳건하지만 여린 곳은 한없이 여린 아이인데. 그 애 달랠 생각보단 더 당황하지 않게 사고 수습하는 데만 정신이 팔렸었구나.

“오늘은 제때 좀 들어가. 2층 불러서 애 좀 달래줘.”

“그렇게 큰일도 아닌데……. 하긴 뭐 유연이 성격에 놀랄 만은 하네. 무슨 말인지 알았어. 그렇게 할게.”

주현의 말을 듣고 준오가 퇴근 준비를 서둘렀다. 가던 길 가끔 유연에게 사줬던 디저트 가게에 가서 케이크와 바움쿠헨 같은 것들을 골라 담았다. 오랜만에 유연이 제가 사 온 걸 먹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본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기분이 들떴다.

같은 디저트 가게에서 산 샌드위치를 대강 먹고, 씻고 유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열 번쯤 갔을까, 아직 안 들어온 건가 생각했는데 겨우 전화가 걸렸다.

“…여보세요.”

유연의 잔뜩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고 있구나. 쯧, 진작 전화할 것을.

“유연아, 잠깐 2층 올라와 봐.”

“……네.”

대답하고 전화를 끊는 목소리에 풋, 웃음이 나왔다. 회사도 아닌데 ‘네’라니. 얼마나 졸아있으면. 덜덜 떨며 혼날 것 각오하고 올라올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애써 웃음을 참고 거실 테이블에 디카페인 커피와 사 온 디저트를 접시에 올려두었다. 오 분 후쯤인가, 계단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연이었다.

“2층 계단 문 열어 놨어. 들어와.”

자신은 일인석 소파에 앉고 유연을 널찍한 자리로 앉혔다. 거즈면 같은 얇고 헐렁한 면티에 짧은 반바지 차림으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자리에 앉아 테이블 바닥만 바라보았다.

어이구, 이게 그럴 일인가. 하긴 저에겐 그럴 수도 있겠다만. 가만히 보고 있자니 숙인 고개 아래로 투명한 액체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소리도 안 내고 방울방울 떨어져 유연의 허벅지를 적셨다.

준오가 보다 못해 유연의 옆자리로 옮겨 앉아 두 손으로 자그마한 얼굴을 잡아 고개를 올렸다.

“유연아, 나 좀 봐봐.”

눈물로 엉망인 얼굴을 준오가 제 엄지로 쓱 닦아주었다. 준오를 보는 유연의 눈가가 마냥 서러웠다.

“미안해……. 오빠 나 때문에 힘들지. 흑…….”

누가 보면 세상 무너진 줄 알겠네.

“주현이도 말했을 텐데, 괜찮다고 했어, 안 했어.”

“…했, 어.”

“네가 잘못한 일이 없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수습 전혀 못 할 정도의 잘못은 아니야. 애초에 고작 구천 가지고 회사가 흔들릴 거면 사업 접어야지. 무슨 구멍가게도 아니고.”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면목이 없어서. 준오를 볼 낯이 없었다. 정말 너무 미안해서 연락조차 하지 못했다. 사실 마주칠까 봐 너무나 두렵고, 그러나 보고 싶었다. 만나서 미안하다고, 내가 정말 잘못했다고,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내 잘못이라고. 나 때문에 고생시켜서 너무 미안하다고 하려고 했는데. 너무 절박하게 미안하니 입조차 떨어지지 않았다.

준오가 쉴 새 없이 떨어지는 유연의 눈물을 계속 닦아주었다.

“오빠 고양이가 그새 왜 이렇게 말랐어.”

“흐윽, 흑, 미안해. 정말 미안해…….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문서 아무리 확인해도 ‘만’으로 적혀 있는데…. 왜 전사 공유 폴더에만 그렇게 있는지.”

다독여도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유연이 안타까워, 준오가 옆에서 떨고 있는 몸을 꼭 끌어안았다. 가냘픈 작은 새를 안은 것 같았다. 훌쩍거리는 얼굴을 가만히 제 가슴에 담아 안았다.

히끅거리느라 작게 경련하는 가느다란 몸이 부서질까 세게 안을 수도 없었다. 정수리에 턱을 괴고 콧물을 훌쩍거리는 가련한 생명을 안고 있으니 마음이 일렁거린다. 얼마 전에 유연이 감기 걸려서 품에 넣고 자던 날도 그렇고, 왜 이 아이를 안으면 우주라도 안고 있는 듯한 충만한 느낌이 날까.

손으로 등을 다독이고 있자니 들썩이는 숨이 좀 잦아들었다. 정수리에 코를 대고 유연의 냄새를 맡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옮겨 유연의 뺨에 볼을 맞대었다. 눈물로 젖은 보드라운 살결이 닿아 가만히 대고 있었다.

“나 볼 다 젖었거든…?”

준오가 피식 웃으며 그대로 고개를 내려 코를 목에 가져다 댔다. 코끝에 유연의 얇고 창백한 피부가 느껴졌다. 옅게 유연의 체향이 나는 목에 코를 박고 고개를 이리저리 젓자 가련한 몸이 작게 파들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대로 숨을 내쉬자 유연의 손끝이 준오 등의 옷가지를 꾹 잡아 쥐었다.

멈추지 않고 이대로 다 핥아 먹어버렸으면. 저열한 욕망이 오르는 게 짜증스럽다. 순간 강한 힘으로 유연을 두 손으로 끌어안았다. 보지 않아도 유연의 놀라 커진 눈이 그려졌다.

“준오 오빠?”

“정말로 괜찮다고 했으니까 이제 울지 마. 내가 한 달 내로 다 해결할 거야. 더 좋은 방향으로. 네가 욕먹을 일 없게.”

“…으응.”

그제야 계속 안고 있던 몸을 떼어 낸 준오가 유연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유연이 깜짝 놀라 바라보았다. 준오가 지그시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그새 말라서 더 못생겨졌네. 사 온 거 좀 먹고 있어. 화장실 다녀올게.”

준오가 순식간에 일어나서 화장실로 사라졌다. 갑자기 이마에 뽀뽀를 하는 건지. 놀라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냥 뭐 우는 게 애 같았나 보다 싶었다. 잔뜩 울고 또 울어 탈진한 몸에 준오가 사다 둔 케이크를 넣었다.

전에 맛있다고 했던 거네. 달고 부드러운 초콜릿 크림에 마음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준오를 만나고 나니 이제야 뭐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그렇지. 살 좀 빠졌다고 못생겨졌다니. 흥, 당분간 먹기만 해야지.

준오가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안 비서를 불렀다. 안 그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서비스 마케팅 팀 팀장의 말도 그렇고, 왜 한 글자가 더 들어가게 되었을까. 달래주긴 했지만 저렇게 다 말라갈 때까지 힘들어하고 있었다는 것도 화가 났다.

“보안 팀에 연락해서, 포인트 프로모션 일주일 전부터 시작일까지. 그 위치의 공유 폴더 접근 기록, 해당 문서 수정 기록 체크해 달라고 해주세요.”

설마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신경 쓰이는 건 깔끔하게 처리하는 편이 좋겠지.

“최대한 조용하게 보안 팀 팀장이 직접 체크해서 보고하도록.”

“네 상무님. 확인 후 보고드리겠습니다.”

업무량이 늘어난 건 비단 직원들만의 일이 아니었다. 늘어난 가입자와 트래픽, 오류나 신규 이슈만큼 결재거리도 쌓여가고, 설립한 지 몇 달 안 돼서 이슈 나왔다며 빈정대는 영감들 비위도 가끔 맞춰 주러 나가야 했다.

해치우고 나면 반유연 들고 프렌치 코스나 먹으러 가야지. 프렌치 렉에 헤비한 느낌의 레드와인을 곁들이고 싶었다. 반고양, 앞에서 오물오물 얼마나 잘 먹을까. 쌓여 있는 전자결재의 개수를 보며 준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랜선 좀 안 끊어지나.

* * *

예상치 못한 변수가 많긴 했지만 이번 사건은 의외로 반등의 기회가 되었다. 애초 기획한 열 배의 포인트를 주었다고 해서 열 배의 유저가 늘어난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사용하지 않으면 그대로 세이브되는 포인트이기에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았고, 가입률은 짧은 기간 동안 평소의 두 배가량 늘어났다.

이미 한국에서 가장 큰 음원 사이트인지라 다른 곳에 빼앗기지 않으면 다행인 방어전만 한창이었는데, 방어전이 아닌 신규 유입으로 인해 부서 분위기가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되었다는 느낌으로 바뀌었다. 이제 몇몇 사람들은 유연을 마주치면 우리 법인 키우려는 상부의 스파이 아니었냐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사건 한 달째, 만연한 가을 색이 넘치는 계절. 팀원들은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는 복지 포인트 백만 원을 받았다. 짧은 기간 수고 많았다는 격려금이었다. 급작스러운 야근들을 좀 하긴 했지만 발전적인 결과와 콩고물에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복지 포인트를 지급한다는 메일 하단에는 모두의 수고를 치하하기 위해 근처의 한우집 한 층을 빌려 BPM 단체 회식을 하겠다고 적혀 있었다. 그 주의 금요일 모두 정시에 퇴근을 하고 광화문 뒷길의 대형 한우집으로 몰려 나갔다.

유연의 팀도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회식 장소로 향했다. 한우가 지글지글 구워지는 소리가 한창이었다. 준오가 회식 자리에 잠시 들러 격려사를 하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서가 옆에서 휴대용 마이크를 켜서 준오에게 건네주었다.

“이번에 갑작스러운 이슈가 있어, 모두 평소보다 수고해야 했던 부분들 알고 있습니다. 실수에서 비롯된 일이었지만 모두가 함께 참여해서 위기를 기회로 바꿔 주셔서 저 역시 BPM 구성원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같이 일을 해 나가면서 좋은 일도 어려운 일도 이렇게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게 어떤 일이든 간에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도 함께 헤쳐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각 팀원들은 팀장 컨펌하에 12월 중 연차 하루씩 원하는 날에 사용하실 수 있도록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받으신 복지 포인트 알차게 사용하시고, 한 달 수고 많으셨습니다. 지금 다 같이 건배 한번 하시죠.”

보너스와 추가 연차에 분위기가 더 달아올랐다. 다 같이 술잔이나 음료수 잔을 들어 건배했다. 모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평소보다 흥겹게 마시고, 자리를 바꿔가며 각자에게 격려 인사를 전했다. 다들 유연에게 고생 많았다며 한마디씩 건네주었다. 그리고 덧붙여…….

“기우 대리 얼굴만 잘생긴 줄 알았는데 뒤에서 외조가 아주 대단하더만.”

“이번 이슈 보조하면서 밤에 야식 정말 많이 챙겨줘서, 나 지금 3킬로 찐 거 알아요?”

“아니, 같이 먹지 않았어? 기우 대리는 왜 안 쪘어?”

“기우 대리님, 이번에 이슈 처리하면서 얘기도 한 번씩 좀 더 해보고, 음료수도 몇 번 쏴 주시고… 그래서 너무 좋았어요.”

“일 많아서 열받는데 기우 대리 커피 들고 찾아와서 슬쩍 웃으면 남자고 여자고 아무 소리도 못 했잖아. 어휴… 내가 진짜 남편만 없었어도.”

남자고 여자고 다들 유연의 팀 자리로 찾아와서 기우에게 한마디라도 더 걸려고 야단이었다. 유연은 쌓인 일만 하느라 잘 몰랐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냉랭함에서 점차 다독임으로 바뀌어 갔던 건 기우가 여기저기서 사람들을 다독이며 챙겨 준 영향도 컸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도와준 팀원들도 모두 고마웠지만, 사람들이 한잔하자며 기우에게 잔을 건넬 때마다 온갖 팀에 인사를 하고 다녔다는 걸 새삼 알게 되어서 나중엔 갈수록 목이 메어왔다.

유연에게도 사고는 쳤지만 고생 많았다는 격려가 쏟아졌다. 오히려 더 좋은 기회로 잘 된 것 같다고. 깍쟁이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근성 있었다며. 좋은 결과로 팀 모두 보답받게 되어 기쁘다고. 맥주잔 앞에서 자꾸 코끝이 찡해져 왔다.

몇 달 만에 드디어, 이곳의 일원이 된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BPM의 일원이 아니었던 유연이기에 더욱이 각별한 찬사였다.

고깃집에서의 길고 성대한 회식이 끝나고, 계속 주변 눈치를 보던 기우가 유연을 데려다주려고 할 때였다. 서버 팀에서 집에 가려고 시동을 거는 기우를 붙잡으러 왔다.

“한 달간 우리랑 얼마나 많이 야식을 먹었는데, 가긴 어딜 가. 한잔 더 해요. 오늘 우리 야식회 피날레야.”

기우가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서글픈 표정으로 2차 자리에 끌려가고, 완전히 지친 유연과 팀원들이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오늘이 금요일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도착해서 씻고 자리에 널브러진 유연의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집에 잘 들어갔어요?]

미리보기로 뜬 메시지만 봐도 울컥해 눈가가 흐릿해졌다. 이 고마움을 언제 다 갚지.

[저 잘 들어왔어요. 기우 씨 너무 고마워요. 그 정도로 뒤에서 서포트해 주고 있었는지 몰랐어요.]

[나는 아직 못 들어갔는데. 아저씨들한테 잡혀서 날 샐 것 같아요. 힘들다.]

순간 서버 팀 아저씨들의 환영이 보였다. 얼마나 또 신나게 먹이고 있을까.

[피곤할 텐데… 어떡해요.]

[유연 씨 고마우면 나한테 뭐 해줘야 할까요.]

[일단 ㅜㅜ 밥 사 줄게요.]

[그걸로 부족한데.]

[술도 사 줄게요.]

[음. 그럼 조금은 되겠다. 내일, 토요일 저녁 가능해요?]

[네, 다 가능해요.]

[다섯 시 반에 데리러 갈게요. 빨리 자요.]

내일은, 진기우가 아무리 지갑을 계산대에 들이밀어도 무조건 자신이 사겠다고 생각했다. 뭘 사줘야 그나마 은혜 갚은 티가 날까. 오늘 이미 한우 먹었는데.

“내일… 생각해 보자.”

몇 초 고민할 새도 없이 피곤에 젖은 유연이 까무룩 잠이 들었다. 고난의 시간을 지나 얻은 값지고 속 편한 잠이었다.

* * *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나 밥을 먹었다. 헤실헤실 웃으니 주현이 “어이구, 맹꽁이. 그러니까 내가 걱정하지 말랬지.” 하고 있고, 지아 언니는 오랜만에 유연이 잘 먹는 것을 보자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가씨,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하고.

내가 어떻게든 견디고 지내는 동안 가족들도 나를 지지해 줬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미안해서 어떻게 갚지. 내일은 준오랑 밥 먹으러 가기로 약속했으니 내가 맛있는 거 사 줘야지. 고맙다고 해야지. 어제 격려사도 좋았다고 해야지. 일단 오늘은… 기우 씨에게 고맙다고 해야지.

점점 차가워지는 날씨인데, 마음만은 따뜻해졌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내 생일이라 준오가 밥 먹자고 한 건가.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오전 동안 밥 먹고, 반신욕도 하고 팩도 했다.

작년 가을에 사뒀지만 한 번도 입지 않았던 트위드 투피스의 택을 떼어냈다. 하아, 일 년 만에 개시하네. 머리도 말고 오랜만에 눈 화장도 했다. 오늘은 어쩐지 기우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아직 자신의 마음은 잘 모르겠지만, 호감이 없다고 하면 그것도 거짓말일 거라 생각했다.

다섯 시 즈음부터는 자꾸 시계를 보다 말다, 그러니까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다섯 시 이십 분쯤이었다.

[조금 일찍 도착했네요. 앞에 있으니 천천히 나와요.]

문자를 보자마자 얇은 외투를 챙겨 들고 거실에 있는 부부에게 인사했다. 주현이 급하게 나서는 유연의 등에 대고 외쳤다.

“기블리 만나러 가니?”

하여간에 눈치는 빨라 가지고. 앞에 나가니 처음 데리러 왔던 날처럼 기우가 차 앞에 등을 기대어 서 있었다.

“왔어요?”

차 앞에서 웃고 있는 기우를 보자 어쩐지 마음이 작게 덜컹,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어제 고기 먹었으니 속 좀 풀자며 일식을 고르니 그가 일식 가이세키 요릿집으로 향했다. 가게는 아담하지만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기다란 바 좌석 옆으로 작게 룸이 딸려 있었다. 직원이 유연과 기우를 룸으로 안내했다.

“술은 나중에 사줄 테니까 달아놔요. 기우 씨 오늘도 술 마시면 안 될 것 같아요.”

밤새 부어라 마셔라 했을 기우의 밤이 보이는 듯했다. 그 팀 아저씨들 술 좋아하는 거야 BPM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으니.

“나야 한 번 더 볼 수 있으니 좋기는 한데, 알았어요. 오늘은 내가 운전해서 데려다줄 수 있겠네요.”

“어제 몇 시까지 마셨어요?”

“네 시에 들어갔습니다. 에구구.”

으… 지독한 사람들인 건 알고 있었지만.

“기우 씨 오늘 나오기 힘들었을 텐데. 미뤄도 괜찮았는데….”

어쩐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된 유연이 기우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내가 이 약속을 얼마나 기다렸다 잡은 건데 미루겠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유연이 기우와 잠시 눈을 마주쳤다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회를 입에 넣었다.

“원래 일식은 카운터에서 먹어야 하지만, 둘만 있고 싶어서요…….”

회를 오물오물 씹던 유연의 볼이 붉어졌다. 하여간에 부끄러운 말은 오늘도 잘도 한다.

“요새 실컷 못 보기도 했고… 일이 많았으니. 유연 씨, 수고 많았어요.”

“저 열심히 도와주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타 팀까지 다 챙겨주고 있는지 몰랐어요.”

“저 사람들 달래는 것 잘해요. 학생회장도 여러 번 했고. 사실 그렇게 마이너스만 되는 일은 아니었는데, 급작스럽게 변한 상황에 사람들이 누군가의 탓을 하고 싶었을 거예요. 많이 놀랐겠지만 이제 걱정 좀 놔도 될 것 같아요.”

그가 유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대견하게 잘 버텨줘서 고마워요.”

고맙다니, 누가 할 말인지.

“너무 고마워서, 기우 씨에게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대답하자마자 곧 여러 가지 작은 한입거리를 모아 둔 핫슨 접시를 직원이 가져다주었다. 작고 정교한 모양의 요리 하나하나를 보며 감탄하고 있는데, 기우가 두 개쯤 먹더니 다시 유연에게 말했다.

“일이 빨리 정리돼야 유연 씨가 날 봐줄 거 아니에요. 정리되기 전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봐줄 것 같아서요. 내가 마음이 급해서, 열심히 뒤에서 여기저기 케어했어요. 이놈들아, 빨리 풀어져라. 그래야 유연 씨가 나 한 번이라도 더 봐줄 테니까. 응? 하고.”

상냥하게 바라보는 눈동자와 농담 같지만 어쩐지 진지한 말투. 기우를 보고 있으면 준오의 경고가 자꾸 아스러졌다. 아무리 흑심을 품고 접근했다고 해도 이렇게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사람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자신을 봐 달라고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물리쳐야 하나.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그저, 기우에게 고마운 일이 쌓일 뿐인데.

뒤이어 코스로 나온 한우 채끝과 솥밥을 먹었다. 좋은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자니 최근 이어진 여러 사건들의 포상 같다고 느껴졌다. 앞에 있는 사람의 다정한 얼굴까지 포함해서.

디저트까지 먹고 나와 커피를 마실 겸 드라이브를 했다. 야경이 반짝거리며 보이는 가을의 카페에서 기우와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있다는 게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한참 회사 사람들 이야기로 수다를 떨다가, 슬슬 일어날까 하는 즈음 그가 자꾸 재킷의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는 것이 보였다.

“주머니에 뭐가 있길래 계속 손이 갔다가 테이블에 돌아왔다가 하고 있어요?”

그러자 기우가 못 참겠다는 듯이 말했다.

“아, 도저히 못 참겠어요…….”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고급스러운 흰 박스엔 유명 주얼리 B 브랜드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생일 선물 하게 해 달라고 하더니 세상에.

“잠깐, 기우 씨. 그건 못 받아요. 주지 말고 도로 가져가서 환불해요.”

저녁 내내 상냥하던 유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럴까 봐 집에 갈 때 주고 도망가려고 했던 건데…. 유연 씨 나한테 고맙다고 했죠?”

“당연하죠. 그건 몇 번을 말해도 모자라요. 그러니까 선물을 해도 내가 해야 하는데.”

“나 그 바쁜 와중에도, 너무너무 주고 싶어서 백화점만 세 번 들렀던 것 알아요?”

그의 시원스럽게 뻗은 눈동자에 간절함이 맴돌았다.

“환불 못 해요. 백화점 주얼리는 환불 안 되잖아요. 내가 주고 싶어서 매일 이 흰 박스 주물럭거려서, 그리고 자꾸 만져 봐서 더 안 돼요. 게다가 한 달 전에 사자 브로치 보고 난 뒤 얼마 안 있어서 사서… 산 지도 한참 됐어요.”

세상에, 그때가 언제인데. 대책 없이 이걸 사다니. 한두 푼도 아니고.

“유연 씨, 나중에 내가 싫어져서 쳐다보지도 않게 되어도 돌려줄 일은 없어요. 어차피 유연 씨가 가져주지 않으면 집에 가다가 한강에 던져야 해요. 그러니까……. 나 유연 씨가 이거 한 거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어요. 삼 주 전에 사서 유연 씨가 이거 한 모습만 상상하면서 잠들었어요. 나중에 이거 버려도 좋으니까… 한 번만 착용해주면 안 될까요?”

하, 이걸 어찌해야 하나. 어떻게 사귀지도 않는 사람에게 이런 고가의 선물을 받을까. 이 브랜드는 저렴한 라인은 아예 팔지도 않는데. 순간 아영이 티아니 브로치를 이야기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자신도 생일 선물 하게 해 달라던 기우의 말이 떠올랐다. 어떻게 해야 하나 상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기우가 다시 애절하게 말했다.

“제발 받아 줘요. 나 오늘을 위해서 한 달간 열심히 유연 씨 보좌했어요. 너무 주고 싶었는데… 유연 씨 귀에 이거 달고 있는 모습 보면, 고생한 거 모두 쑥 내려갈 것 같아요.”

그가 손에 올린 흰색 주얼리 박스를 유연의 방향으로 해서 열었다. 작은 은색 물방울 모양의 귀걸이였다. 테두리를 따라 작은 다이아가 올망졸망하게 박혀 있었다. 준오가 줬던 브로치는 마치 어린아이들 장난감처럼 동물 모양으로 위장이라도 하고 있어 깜빡 속았지. 이건 아무리 봐도…….

유연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기우를 바라보다가, 귀걸이를 빼서 양쪽 귀에 꽂았다. 나무라듯 불퉁한 얼굴로 앞에 있는 그를 바라보니 입이 찢어질 듯 웃고 있다. 내가 자기가 준 귀걸이 한 게 저렇게 좋아 죽을 일인가. 그가 입을 가렸다가, 옆을 잠시 봤다가, 다시 유연을 보고 말했다.

“진짜 예쁘다. 브랜드에다가 이제 이 모델 팔지 말라고 해야겠다. 유연 씨 전용으로 나온 거라고 가서 말하고 올게요.”

“다시는 이런 고가의 선물 받지 않을 거예요. 이게 마지막이에요.”

유연이 눈을 흘기며 진짜 마지막이라는 듯 말하자 기우가 자신의 입가에 손을 대고 유연의 얼굴에 다가갔다. 으응? 갑자기 귓속말? 유연이 그가 말하기 편하게 귀를 갖다 댔다. 기우가 유연의 귀에 속삭여 말했다.

“키스하고 싶다.”

유연이 휴, 한숨을 쉬며 기우의 어깨를 때렸다. 아, 정말, 나 이 사람한테 속은 것 같아. 완전히.

신나게 웃고, 이야기하고, 한강을 또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술 한 잔 하지 않았는데 돌아가는 길 어쩐지 마음이 들떠 올랐다. 아주 잠깐 수다를 떤 것 같았는데 어느새 집 앞이었다.

열두 시 십삼 분, 검은 어둠이 내려온 집 앞에 가로등 불빛만이 옅게 비쳤다. 대문 앞으로 가는 길 깜깜한 벽 앞에서 갑자기 기우가 유연의 어깨를 붙들었다.

“잠깐만요.”

음, 무슨 일이지. 사뭇 기우의 표정이 진지했다. 그가 어깨를 잡은 채로 유연의 귀에 입을 대고 작게 말했다.

“키스하고 싶다.”

어이없어진 유연이 기우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

“아, 진짜 뭐예요. 기우 씨 이제 그 말 입에 붙었죠?”

순간 기우가 유연의 팔을 붙들어 당기더니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놀란 유연이 눈을 크게 뜨고 시간이 멈춘 듯 기우를 바라보았다.

“……기우, 씨?”

순식간에 다시 유연의 입술에 붉고 도톰한 입술이 내려와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놀란 유연의 입술이 벌어지자 그 안으로 혀가 들어왔다. 부드럽고 촉촉한 살덩이가, 유연의 입 안에서 혓바닥 끝을 아래위로 굴리다, 빨아들일 듯 삼켰다.

“흣…….”

벽에 유연을 붙이고 기우가 계속 입 안을 파고들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안쪽을 훑자 연약한 입 안의 살들이 바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유연의 혀 아래를 파고들어 혀를 들어 올려주듯 가운데를 살살 긁어 올렸다가, 다시 위로 올려 혓바닥을 감아올렸다 떼어 냈다.

입술을 떼어 낸 기우가 잡은 손의 가운데를 긁듯이 엄지로 부드럽게 긁으며 유연을 바라보았다.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한 눈가엔 숨이 가빴는지 작게 눈물이 고여 있었다.

“좋아해요.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답은 천천히 해 줘도 되지만, 데이트는 계속해 주세요…….”

기우가 놀라서 눈만 뜨고 있는 유연의 팔목을 끌어 올려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생일 축하해요. 유연 씨의 오늘도 내가 갖고 싶지만, 올해는 참을게요. 나 아직 짝사랑 중인 거 알고 있으니까. 오늘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좋은 하루 보내요.”

기우의 내려 뜬 눈빛 때문에 녹을 것 같았다. 차마 챙기지 못한 멍한 정신으로 대답했다.

“……네? 네, 네.”

그가 벨을 눌러 유연이 들어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유연은 지금 자기가 어떻게 걷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우 씨랑 지금, 방금 우리 대체 뭘 했던 거더라? 우리 지금 키스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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