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다양하지 못한 취향 (5/13)

5. 다양하지 못한 취향

“아가씨, 일어나세요.”

똑똑, 문을 두드리는 지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새언니 목소리에 기쁨이 가득했다. 무슨 일 있나.

“…네에.”

아아 이 속은 내 속인지 남의 속인지 쓰리기도 하다. 유연이 다 잠긴 목소리로 지아에게 대답했다.

“점심만 먹고 자요. 응? 콩나물 해장국 끓여 놨어요.”

천사 같은 새언니의 가호를 받으며 멍한 상태로 주방에 가니 주현이 갓 끓인 콩나물국을 퍼서 식탁에 놓고 있었다. 아아, 거울을 보지 못했지만 띵띵 부었을 얼굴이 그려졌다. 취하도록 마신 건 꽤 오랜만이었다. 나 어제 집에 어떻게 들어왔더라…….

“대견한 내 동생. 어이구, 살아나셨네?”

“응… 오빠, 나 물 줘.”

“네 숟가락 옆에 있잖아. 얼른 마시고 밥 먹어. 어휴, 내가 상전을 둘이나 모시고 살지.”

“응, 맞아, 앞으로도 두 분 잘 모셔.”

1번 상전인 지아가 웃으며 답했다. 멍하니 버석거리는 입 안에 뜨거운 콩나물 해장국을 담아 넣었다. 아, 속이 뚫리고 세상이 뚫리는 기분.

“아가씨, 근데 어제 키 크고 잘생긴 남자분은 누구예요?”

아… 콩나물국의 염분과 함께 슬근슬근 어젯밤의 기억이 올라오려고 했다. 차 안에서 잠든 나를 부축해서 기우가 문 앞에서 벨을 눌러줬던 것 같은데.

‘유연 씨, 집, 여기 맞죠?’

‘응…. 여기, 여기가… 집이에요…….’

내 팔을 제 어깨에 두르고 허리를 잡아 힘겹게 이동하던 기우가 떠올랐다. 무거웠을 텐데. 그가 대문 옆의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헉, 아가씨?’

새언니가 인터폰에 비친 날 봤는지 놀라서 오빠와 함께 달려 나왔다. 대문 앞까지 나온 부부에게 기우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었지.

‘안녕하세요, 저 유연 씨 같은 팀 동료 진기우라고 합니다. 오늘 팀 회식이 있었는데 유연 씨가 조금 취해서요.’

‘유연아. 세상에, 얘는 뭘 이렇게 많이 마셨어.’

오빠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것도 기억났다.

‘아휴, 너무 감사드려요. 수고하셨어요.’

‘실례가 안 된다면 집 안까지 같이 부축하겠습니다.’

그렇게 기우와 오빠가 정원을 지나 나를 거실에 앉혀놓고……. 아, 새언니가 고맙다고 인사를 또 하고…….

소파에 널브러진 나를 두고 오빠가 기우를 쳐다보는 것 같았고 기우가 말했다.

‘유연 씨 친오빠가 반 이사님이신 거 알고 있었습니다. 걱정 마세요. 어디 가서 말을 전하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요. 나도 기우 씨가 엔터 대표님 아들인 것 준오에게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피차 마찬가지니, 이 부분은 서로 모르는 척 지내죠. 알려져 봐야 서로 피곤하기만 할 테고…….’

‘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뭐야, 서로 커밍아웃 잘만 했네. 생각이 다시 밥상으로 넘어왔다.

“직장 동료예요. 저랑 같은 대리.”

“너, 내가 부산에서 그 직장 동료랑 비키니 입고 아침부터 수영하는 거 다 봤는데.”

풉, 콩나물 두 개가 입 밖으로 떨어졌다. 그 얘기를 듣는 새언니의 입꼬리가 솟아올랐다.

“아가씨, 내가 어제 보니까… 나는 찬성이에요. 그 정도 인물과 몸과 키는 흔치 않으니까. 역시 우리 아가씨야.”

“언니, 그런 사이 정말 아니에요. 오빠는 또 그걸 어디서 봤어?”

그 수영장엔 전국구로 방송되는 CCTV라도 있었던 걸까? 아주 못 본 사람이 없네.

“그 호텔 바로 건너편에 묵었잖아. 준오랑 나랑.”

아… 범인은 건너편 호텔이었구나. 이제야 좀 납득이 된다.

“정말 사귀는 건 아닌 거지?”

“아니야. 어제 팀 회식했어. 그게 다야.”

일단은 알겠다는 듯 주현이 다시 식사를 하기 시작했고, 새언니는 묻고 싶은 게 많은 듯 보였지만 아직 단계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했는지 애써 참으며 토요일 점심 식사를 이어 나갔다.

아… 쪽팔리네. 부끄럽네. 다음 주에 기우 씨 얼굴을 어떻게 본담.

* * *

일요일 오전이었다. 문 쪽으로 사람 두 명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중년 여성 뒤를 쫓는 남자의 양손엔 보자기에 싸인 네모난 짐이 여러 개였다.

‘반찬 들고 오셨군.’

별도로 나 있는 2층 대문을 열어 마중을 나가니 깐깐해 보이는 고운 여성이 문 앞의 준오를 바라보았다. 나이에 맞지 않게 잘 관리된 아름다운 몸매와 누가 봐도 고급스러운 옷과 재킷. 매끈한 흰 피부가 그녀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게 했다. 작은 다이아가 촘촘히 박힌 목걸이가 하늘색 셔츠 깃 사이로 유난히 반짝였다.

“고얀 놈, 본가에 한 번을 안 오지.”

“어머니가 오늘 오실 줄 알고 그랬죠.”

씩 웃으며 어머니를 맞이한 준오의 뒤로 비서가 뒤따라와 식탁 위에 보자기를 풀고는 냉장고에 반찬을 넣기 시작했다. 전에 가져다주었던 반찬통을 다시 챙기는 비서의 등이 분주해 보였다.

준오가 거실 소파에 앉아계신 어머니 앞에 따뜻한 커피를 놨다.

“QL 있어 보니 어떠니?”

“회장님과 큰외삼촌은 여전히 잘 대해 주시고, 예상대로 중원 삼촌은… 많이 견제하시네요. 그 집 둘째가 엔터에 관심 있다며 넣어 달래서 들어와 있는 건 어머니도 알고 계시고.”

“있어 봐야 뭐 얼마나 있겠어. 그냥 간만 보다 나갈 거다. 문제는 몇 년 후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준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인간 성격으로 봐선 네 측근부터 건드릴 텐데, 주현이 찔러보려고 하지 않던?”

커피를 마시던 준오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일단 같은 팀에 있는 유연이에게 먼저 접근하는 걸로 보이긴 하는데…….”

어쩐지 팽팽한 느낌의,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중년의 귀부인이 갑자기 통쾌한 표정으로 크게 웃었다.

“아하하, 기우 취향 너랑 비슷한 건 여전한가 보구나?”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지, 진지하게 듣던 준오의 얼굴이 조금 무너져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정아를 바라보았다.

“너네는 만화영화에 여자 전사가 열 명, 스무 명이 나와도 희한하게 예쁘다고 고르는 건 똑같았는데. 그때만 그런 거겠지 했는데 가끔 어디 가문끼리 애들 동반한 작은 파티 같은 걸 가도 똑같은 여자애한테만 말 건 거 대답해주고. 나머진 대꾸도 안 했지. 뭐 마음에 든다고 하는 법이 거의 없는 까다로운 꼬맹이 둘이 신기하게 여자 보는 취향만 똑같더라고. 안 그래도 기우가 엔터로 간다고 했을 때 유연이 생각이 났었는데. 역시 괜히 났던 건 아닌가 보구나.”

듣고 있던 준오의 표정이 점점 찌푸려졌다. 어머닌 이제 날도 시원해졌는데. 이제 더위 먹을 계절도 아니건만. 어떻게 지신과 그 애송이를 비교하시는 건지.

“기우가 유연이한테 접근하는 건, 단지 취향이라서지 꼭 유연이 끼고 뭘 가져가려 그러는 이유는 아닐 거야. 그 고약한 둘째 영감 생각은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준오가 말도 안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커피 잔을 테이블에 내려 두었다.

“아들, 넋 놓고 있다가 정말 뺏긴단다? 넌 잘 자라줬다고 생각하지만, 어려서부터 네 마음 깨닫는 건 서툴렀으니. 아마 네 컨트롤 아래 마음 약한 유연이가 맞춰 머물러 줬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진정아는 외관만은 걸작인데 감정 표현이 서툴고 부족해 걱정이 되던 아들이, 오래전 주현과 유연을 집으로 데려왔던 날을 떠올렸다.

정아가 봐도 요정같이 생긴 오밀조밀한 여자아이였는데, 예쁜 것은 그렇다 치고 준오가 그렇게 시선을 놓지 않고 꾹꾹 눌러 담아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을 본 건 처음이었다.

‘아줌마, 갈비찜은 고기 최대한 부드러운 걸로 해 주시고, 동치미도 흰 걸로 한 삼 일 정도 전에 담가주세요. 금태도 살 많은 걸로 가시 발라내고 구워 주시고. 케이크는 서래마을 마리에에서. 초콜릿이랑 바닐라 무스 하나씩. 에클레어랑 마카롱도 두 개 정도요.’

생전 제가 먹고 싶은 것도 말하지 않던 아이가 밥에, 간식까지 일일이 다 지정해서 며칠 전에 준비시키는 걸 봤을 때의 그 배신감이란. 아들 키워봐야 말짱 헛거라는 말이 진짜인가 보다 했다.

한편으론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 좋다는 애들이 한 트럭이어도 쳐다도 안 보는 게 걱정도 되고, 여자를 마음에 담지 못하는 아이로 커버린 건 아닌가 많이 고민했었는데. 맛있는 걸 찾아 먹이고 그걸 눈에 담아 바라보는 것이 바깥 수컷들의 구애와 별다를 바 없기에 안심이 되었다.

다만, 자신의 행위가 사랑의 감정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그저 제 품에 가둬 두고 예뻐하며 숨겨놓고만 싶어 할 뿐. 그 감정 자체에 대한 생각이나 이름을 부여해서 관계를 만드는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또, 본능처럼 유연의 곁을 떠돌며 가능한 근처에 있으려 했다. 저 자신은 왜 본인이 주현의 2층에 머무는지, 왜 굳이 주현의 옆집을 샀는지도 모르겠지.

본능만 따를 뿐 애달픈 감정에 관한 생각을 하는 걸 시간 낭비로 여기는 습관이 있었다. 그건 기업을 경영할 땐 냉정한 데이터와 객관적인 눈으로 이끌어 가는 큰 힘이 되겠지만, 사람을 사랑할 땐 머물지 못하는 결말만을 남기게 될 텐데.

“넌 잃어버리고 나서야 겨우 깨닫게 될 것 같아서 정말 걱정이야.”

일요일 아침부터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나이 먹고 연애 안 하는 아들이 어지간히 걱정이 되시는 모양이었다. 도통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앉아 있자니 정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까지 배웅을 하는데 정아가 창문을 내리며 말했다.

“준오야, 왜 네가 돌아오자마자 주현이 위층에 사는지, 옆집을 사서 공사까지 하고 있는지 꼭 깊게 생각해 봐.”

미간을 찌푸려 어머니를 바라보는 준오를 두고 정아가 떠났다. 어머니, 최근 너무 한가하신가. 아니면 자신이 선을 몇 년째 거절해서 그런 건가. 한 번이라도 나가는 시늉을 해야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다 방으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틈나는 시간에 반유연이랑 밥이나 먹고 작곡이나 해야지.

* * *

“반유연 대리, 하여간에 짜증 나. 얼굴 믿고 기우 대리한테 꼬리나 치고 있고.”

준오가 화장실에서 나오려다 입구에서 잠시 멈췄다. 옆의 여자 화장실에서 나는 소리 같은데. 이 목소리는… 예전 BPM 디자인 팀의 팀장 추천으로 입사했던, 근태 불량하고 스캔들도 많아 주현과 함께 골치 아파한 무슨 무슨 대리… 그 여자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 이름을 뒤로하고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진기우 대리는 내가 술 먹자고 조른 지만 두 달인데 쳐다도 안 보고. 카톡 하면 다 씹고.”

나라도 안 쳐다보겠다. 기우 놈, 폭탄 거르는 눈은 있네.

“하는 수 없이 아는 오빠 불러서 회사 근처에서 소주 한잔하고 나왔는데, 유연 대리랑 누가 봐도 서너 잔은 한 얼굴로 걸어가는 거야. 반유연은 술 취하니까 얼굴 더 야해 보이더라. 하여간에.”

“헐… 아닌 척하더니 결국 둘이 눈 맞은 거야?”

“몰라, 분위기 묘해 보였어. 걔는 그 얼굴로 조신한 척 고상한 척은 다 하더니 뒤로 호박씨 까고 다니는 거 봐.”

“QL 공채 출신이라고 유세 떠는 거 같기는 해. 거기다 얼굴이나 몸매나… 남자들은 걔만 지나가면 뒷모습 보면서 난리도 아니더라. 옆에 진기우 대리 정도나 있으니까 기죽어서 말 못 붙이는 거지.”

“내가 뻔히 기우 대리한테 목매고 있는 거 뻔히 알면서 일부러 그런 거 아냐? 나 너무 속상해…….”

복도로 걸어가는 그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멀어져 갔다. 유연이 잘나서 평생 시샘의 대상이 되는 거야 오래도 봐 왔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적당히 거슬리지 않게 처리는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반유연. 그렇게까지 얘기했는데 둘이 술을 마셨나 보네.’

머리에 열이 슬슬 고였다. 준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상무실로 향해 걸어가는데, 바깥 자동문 너머에서 유연이 보였다.

* * *

환절기는 환절기인지, 어제 가을밤이 좋다고 창문을 열고 잤더니 목이 깔깔했다. 그래도 금요일이니 몇 시간만 힘내면 된다. 퇴근까지 두 시간, 아직 별다르게 아프진 않은지라. 가벼운 몸살기인 듯했다.

그룹사 동기에게 전화가 와서 비상구에서 받고 들어가려는 길이었다. 멍하니 복도를 걷다 준오와 눈이 마주쳤다. 잠깐의 찰나, 뭔가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 잠시 눈썹을 올려 인상을 쓴다.

왜, 또 뭐가 맘에 안 들기에. 문득 기우와 술자리를 한 게 떠올라 조금 찔리는 마음이 들었다.

‘설마 주현 오빠가 그새 기우 대리 얘기한 거 아니겠지?’

괜히 졸아든 마음으로 퇴근을 했다. 오늘 오빠는 퇴근하고 바로 지아 언니네 가서 사돈 어르신 생신 챙겨 드리고 주말 보내고 오겠다 했고, 혼자 거실에서 티브이나 보며 자야겠다.

그런데 퇴근하는 길에 점점 몸이 싸해지는 게 느껴졌다. 아, 내 주말. 몸살이랑 잠과 함께 보내겠네……. 아깝다 아까워. 뜨거운 물로 샤워나 좀 해볼까 하며 현관문을 열었더니 달큼한 밥 냄새가 집 안에 가득 차 있었다.

‘사돈댁 가는 게 오늘이 아니었나?’

냄새가 나는 곳으로 향하니 준오가 주방에서 죽을 끓이고 있었다. 아니, 대체 언제 왔담. 그것보다 왜 1층에 와 있어?

“얼른 씻고 와. 한술 뜨고 약 먹자.”

참 나, 귀신도 강준오 눈썰미만은 못할 거다.

“어떻게 알았어?”

“너, 몸살 오려고 하면 얼굴색은 더 하얘지는데 볼만 발갛게 떠서 달아오르는 거 모르지?”

야채를 잘게 칼질하는 도마 옆으로 스테인리스 그릇 안 낙지가 꾸물거리며 생의 마지막 찰나를 기념하기 위해 몸을 휘적거리고 있었다.

“…대체 저 낙지는 뭐야.”

“입맛 없을 정도로는 심하지 않을 테니까 불낙죽 해줄게. 샤워하고 와.”

기가 막혔지만 입씨름할 기운도 없어 씻으러 들어갔다. 세상 냉정한 듯 굴다가도 어떤 날은 치맛바람 나부끼는 극성 엄마 같기도 하고. 가끔 무난하지 않은 메뉴를 직접 만들고 있는 것도 그렇고. 하긴 이제 준오 오빠는 자취한 지도 오래됐구나.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긴소매 면티에 반바지를 입고 나와 화장대 앞에 있으니 준오가 문을 두드렸다.

“응? 로션만 바르고 나갈게.”

“감기 기운 있는데 머리도 안 말리고 무슨 밥을 먹어.”

화장대 옆에 있는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고 드라이어를 켰다. 머리를 말려주는 손길에 눈을 감고 있으니 불현듯 옛날 생각이 났다. 마지막으로 잤던 날이었지. 결국 나에게 다시 여전해졌네, 이 사람은.

이렇게 생긴 사람이 매번 먹을 거 다 챙겨주고 아픈 것도 다 돌봐주며 특별하게 취급해 주는데, 세상 어떤 여자가 안 빠질까. 햇수로 8년 전이지만, 저 자신이 너무나 이해가 되었다.

이해가 안 되는 거라면 여전히 이 인간 아닌가…. 이러지 말라고 해 봤자 감기 기운 있는 내 말을 퍽이나 들어줄 리가. 정말로 크게 데어 봤으니 다른 생각이 드는 마음도 잘 누르며 살아가고 있지만, 참…….

‘극한 직업이야, 너무.’

다시 찾아온 강준오는 멀리하던 저에게 다시 느릿느릿 다가와 또다시 예전처럼 다정하게 군다. 의도치 않게 회사까지 같아졌으니 열 오른 볼때기 같은 걸 숨길 수 있을 리도 없고. 게다가 다가오는 남자들마저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쫓아내고 있으니.

이 인간, 내가 확 고백해서 혼내줘 버릴까 보다. 그 정도는 해 줘야 전처럼 멀리멀리 도망가 주려나. 머리를 말리는 따뜻한 바람과 커다란 손이 좋았다. 거리를 둬야 하는데, 닿으면 그저 이대로 몸을 맡기고 이 안온한 감옥에 몸을 맡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게 싫다.

‘지금은 남자 친구도 없으니까 뭐, 그냥 잠시만 이대로 두자’

아까 생의 마지막 몸짓을 하며 스테인리스 그릇에서 미끄러지던 낙지와 불고기가 들어간 죽은 너무나 당연히도 맛있었다. 입에 착착 붙어 낙지에게 미안한 마음조차 사라질 만큼. 엔터 말고 식품 사업이나 할 일이지.

이를 닦고 누운 유연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준오가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유연도 그 집요한 시선을 느꼈지만 뭐라 할 새도 없이 약 기운에 빠져 잠이 들었다.

* * *

세상모르게 잠들어버린 유연을 계속 바라보았다. 예쁜 것. 흰 피부도, 가지런히 감아 둔 눈에 딸린 촘촘한 속눈썹도, 곧고 가련하게 뻗어 올린 콧날도, 작고 앙증맞게 부풀어 오른 붉은 입술도. 어느 하나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손으로 가만히 이마 위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동그랗고 봉긋한 이마도 예쁘지. 내 빛. 내 예쁜 것. 내 고운 것. 이렇게 앞에 놓고 보고 있으니 진기우랑 술 마시고 있었단 그 대화가 생각나 슬금슬금 짜증이 피어올랐다.

‘…한 소리 하려고 했더니.’

그렇게 속 시커먼 놈이 순수하게 좋아서도 아니고 뭐 하나 더 얻어먹을 거 없나 하는 마음으로 다가가게 둘 수는 없었다. 이 아이를 알고 옆에 있던 시간, 아껴주지 않은 적이 없다. 먹이고, 챙기고, 지키고 얼마나 살뜰하게 돌본 아이인데.

내 마음의 빛 같은 것. 손을 대서 더럽히고 싶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없는 걸까? 자신의 저열한 욕구가 닿으면 내 빛이 불경해질까, 타오르는 것도 다 누르고 살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저 바라보며 소중하게 아껴주고 싶은 나의 빛.

예전처럼 제 손 닿는 곳에 두는 데 다시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결과적으론 당연히 더 좋은 일이긴 했지만. 사실 QL도 크게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일만으로 골치 아픈 것투성인데 그 큰 그룹 내에서 견제를 받으며 외가의 손까지 눈치를 보고, 비아냥거리는 말들까지 들으며 해 나가야 하는 것이라.

그러나 유연이 QL에 있던 건 자신의 선택에 꽤 큰 영향을 미쳤다. 유연도 성인이기에 직장을 함께 다닐 생각까진 없었지만, 집적거리는 파리 떼들을 보니 참고 넘길 수가 없어 더 가까이 품에 끌어넣었다.

이 예쁜 것의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 주현에게 접근 금지만 몇 년을 받았던가. 준오는 그 시간이 사막 한가운데서 모래바람을 먹던 시간과도 같았다고 느꼈다. 내 예쁜 것이 없던, 내 빛나는 것이 없던 날들. 이 아이를 바라보고 쓰다듬는 게 얼마나 자신에게 귀중한 일인데. 난 널 이렇게 보기만 해도 좋은데.

스물다섯의 유연을 다시 만난 3년 전, 그 이후로 다시 적당히 놀고 지내던 여자도 만나지 않았다. 그때 같은 일이 없어야 할 테니. 나중에, 정말 나중에 반유연 곱게 시집보내기 전까지는 참을 수 있지. 근데 이 귀한 걸 어느 놈팡이한테 정말 보낼 수가 있을까. 누군지 몰라도 나타나면 반 죽여버려야지.

쌔근쌔근 잘도 자는 걸 보고 있자니 아랫도리가 솟아올랐다. 이 아이를 안을 때의 느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 욕정이 자주 차올랐다. 몇 달 전 방에서 혼자 저를 부르며 수음하던 유연을 목격했던 날은 대체 몇 번을 빼고 자야 했는지, 횟수도 다 세지 못하고 아래가 까지도록 빼다 지쳐 잠이 들었을 정도였다.

반유연이 그런 모습으로 내 이름까지 부르는 건 반칙이지. 이전에도 그 반칙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무릎 꿇었던 전적이 있지 않은가. 정신 못 차리고 참고 참다 참지 못하고 다리 사이로 기어 들어가 개처럼 이 아이의 아래를 빨던 날들이.

위층 욕실에서 적당히 빼고 애 상태도 볼 겸 1층 거실 소파에서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충 샤워하며 유연의 입술에 제 것을 물리는 상상을 했다. 감고 있는 눈의 그 촘촘한 속눈썹과 체리 같은 입술 위로 제 수음액을 뚝뚝 흘리는 유연을 생각하니 별거 안 해도 금방 달아올라 파정했다.

얕은 죄의식과 깊은 쾌감 어느 사이 즈음에 샤워기 물을 맞으며 숨을 골랐다. 다른 건 다 저를 자제시켜도 이 짓까진 도저히 멈춰지지 않았다. 아니, 이 짓까지 멈추면 제가 유연에게 무슨 짓을 할지 자신도 모르겠다.

그것만은 안 된다. 아무리 울면서 조르고 애원해도 멈춰주지 못할 테니까.

* * *

“오빠…….”

준오가 선잠을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유연의 방으로 갔다.

“왜, 안 좋아? 어디 아파? 병원 갈까?”

“나 추워.”

순간 2층에 올라가 이불이라도 가져올까 했지만, 자신도 여태 달랑 여름 이불만 들고 지내고 있는데 애 덮어줄 두꺼운 이불이 있을 리가.

“유연아, 겨울 이불 어디에 뒀는지 알아?”

“몰라… 지아 언니가 알 텐데…….”

유연이 잠이 가득한 목소리로 겨우겨우 가늘게 말을 이었다. 순간 안방에 들어가 이불을 찾아볼까 했지만 아무리 친구라도 이 새벽에 남의 집 안방 침실을 뒤지는 건 좀 고민되었다. 지금 전화하면 놀라서 달려올 텐데.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유연의 차가운 손끝을 잡고 제 두 손 안에 넣어 입김을 불고 조물거렸다. 일단 유연의 이불 위 제 여름 이불을 덮어주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옆에 누워 유연의 베개 아래로 팔을 넣자, 더 따뜻한 곳의 체온을 느낀 유연이 고개를 돌려 준오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얇고 가느다란, 낮은 체온의 몸이 준오의 가슴으로 자꾸 파고들었다.

“응… 이제 따뜻…….”

비몽사몽 눈도 못 뜨는 아이가 그대로 품 안에서 곯아떨어졌다. 춥지 말라고 품 안에 들어온 등을 남는 손으로 감싸 안고 유연의 정수리에 턱을 괴었다. 제철의 살구같이 말갛게 핀 얼굴이 보이지 않는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순간 반사적으로 기립한 부분이 짜증스러워서 속으로 욕을 삼켰다.

‘…하, 건강해서 짜증 나네. 그래도 두 번이나 빼고 왔는데.’

잠은 다 잔 것 같지만 품 안으로 작게 파고든 고양이가 그저 사랑스러워서 마음이 충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예쁜 것, 내 예쁜 것. 내 고운 것이 가만히 내게 안겨 있는 밤. 이 밤이 오래 그리워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쌔근쌔근 숨 쉬는 동물의 작은 숨소리도. 유연의 정수리에서 나는 체리 블라썸 샴푸의 향도. 어쩐지 애달픈 느낌이 나는 이 가느다랗고 한없이 기분 좋은 몸의 온기도. 시계 초침 소리조차 나지 않는 고요한 밤의 공기까지 모두. 오직 반유연이 내게, 이 세상의 전부인 밤.

* * *

새벽에 무척 추웠던 것 같은데, 정신이 드니 따뜻했다. 몸이 다 나은 건가 했는데 아직 좀 쑤시는 것 같고……. 그래도 어제 보양식 먹고 잘 자서 그런가? 한동안 앓을 줄 알았는데 몸살 둘째 날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뭔가 따뜻하고 단단한 것이 곁에 있는 게 기분 좋다고 생각하며 눈을 뜨니 흰색 면티가 보였다. 이게 뭐야.

“일어났어?”

고개를 올리니 어쩐지 좀 피곤해 보이는 강준오가 있었다. 뭔데, 당신이 왜 날 안고 누워 있는데.

“네가 춥다고 뭐라 하다 간밤에 나 침대로 끌어당겼다.”

사실 침대로 끌어들이기까지 하진 않았지만, 덮어줄 것도 없는데 나한테 춥다고 했으니 그게 그 말이다. 어차피 감기약에 취해 정확히 기억도 못 할 테니까.

얼어버린 유연이 열심히 지난밤을 떠올려 보았다. 가는 소리로 준오를 불러 추워, 나 추워 외친 게 생각이 났다. 커다란 남자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옆에서 제 손을 쥐고 입을 후후 불어가며 온기를 넣어주던 것도. 근데 내가 침대까지 붙잡아 들어오라고 끌어들였단 말이야?

‘응… 이제 따뜻…….’

잠결에 제가 뱉던 말이 급작스레 떠올랐다. 아, 나 새끼 왜 그랬을까……. 왜 항상 이 인간 앞에선 수치도 모르는 어린애가 된 것처럼. 어서 몸을 빼려는데 무언가 딱딱한 것이 유연의 배를 찔렀다. 이게 뭐야 싶다가 어쩐지 알 것도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아침이라 그래. 어쩔 수 없어.”

네가 뭘 생각하는지 다 안다는 듯 준오가 낮게 말하며 침대에서 일어서 등을 보였다.

“조금만 더 누워 있다가 씻어. 아침 먹고 다시 자. 밥해줄게.”

유연이 민망한지 이불 위에 눈만 내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준오가 침대 옆에 둔 핸드폰을 들고 나가며 주현에게 전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꺼운 이불 어디에 뒀냐고 물어보는 목소리가 방 안으로 흘러오는 것을 들으며, 부끄러움이고 뭐고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모르겠다. 내가 저 인간한테 부끄러운 모습 보인 게 뭐 한두 번도 아니고. 그래도 어떻게 좀 춥다고 이불 속으로 들어오라고 할 수가 있는지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다. 정말 구제 불능이지, 나.

준오가 인내심 많은 인간이고 자신을 마냥 동생으로만 보니 다행이지 사실 무슨 일이 있었어도 자신은 할 말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 내가 한 짓이 얼만데. 이불에 남아 있는 온기에 얼굴을 묻으니 준오의 냄새가 난다.

이 익숙하고 안심되는 냄새에 마음이 작게 들썩거리는 게 싫다. 나를 안고 밤새 누워 있어도 손가락 하나 건들지 않을 수 있는 남자.

그가 어디서 찾아냈는지 두꺼운 이불을 가져와 유연 위에 덮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더 잤나, 준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연아, 밥 먹자. 토마토 스튜 끓여뒀어.”

“……귀찮아, 더 잘래.”

“이거 소화 안 되는 거 아니니까 먹고 자자, 응?”

들은 척도 안 했더니 준오가 이불을 몸에서 떼 내고 누워 있는 유연의 몸을 덥석 안아 일으켰다. 아기를 안듯이 한 팔에 엉덩이를 받치고, 한 손은 등을 휘감아 고개를 제 가슴에 기대어 안았다.

“아, 진짜, 놔줘. 알았어. 걸어갈게, 응?”

“우리 동생님 힘들어서 말도 안 듣는 것 같은데, 내가 도와줘야지.”

들은 척도 안 하는 미친놈. 내가 앓느니 죽지. 앞으로 남은 인생 얼마나 나를 더 쪽팔리게 할까. 강준오랑 계속 있다간 수치스러워서 죽을 거야, 아마.

강준오는 식탁 의자 앞에 와서야 나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아침 겸 점심으로 만들어준 토마토 스튜 맛도 좋아서 결국 한 그릇을 다 먹었다. 네가 그럼 그렇지, 하는 눈으로 다 먹은 그릇을 치우며 입꼬리를 올리는 표정에 어쩐지 약이 올랐다.

매일 강준오에게 지고, 먹을 것에 또 지고. 내 자존심 따윈 이 지구상에 5그램도 남아 있지 않을 것 같다.

스튜를 한 솥 끓여두더니 저녁에 유연이 아프다고 하루 일찍 온 주현과 지아 언니가 도착해 남은 솥을 다 털어먹었다. 주현이 열심히 스튜를 떠먹다가 준오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엔터 이제 그만하고, 우리 음식 사업이나 하자.”

어, 나도 어제 그 생각 했는데. 역시 내 핏줄.

* * *

“이번 이벤트는 이미 상무님 결재까지 다 떨어진 상태고요, 이벤트 페이지의 버튼을 선착순으로 클릭한 유저 만 명을 대상으로 한 달 정액권 결제 시 사용할 수 있는 1,000포인트를 증정할 예정입니다. 1,000포인트는 현금 천 원과 동일합니다.”

팀장님은 잠시 목을 고르며 주변의 반응을 살피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미 사용하고 있는 유저의 재결제와 신규 유저 추가 유입 유도를 위해 마련한 이벤트이고, 해당 이벤트 기획서와 캐시 사용 기한 안내문이랑 프로모션 페이지 기획서는 유연 씨가 맡아주세요. MMS랑 오로라 톡으로 보낼 메시지도 따로 뽑아 주시고.”

“네 팀장님. 작성 후 컨펌받겠습니다.”

만 명이면 천만 원 정도 쓰는 건가. 문구는 또 뭘로 써야 하나 고민되었다. 오늘 또 야근해야겠네. 우음.

“유연 씨, 저 지난달에 쿠폰 이벤트 했던 양식 좀 바꿔서 사용하시면 될 것 같아요. 문서 메신저로 공유 드릴게요.”

천사 같은 기우 대리가 오늘도 도움을 주었다. 이 사람은 영어 이름이 미카엘인가……. 항상 천사 같다. 그러고 보니 전에 데려다준 거 보답도 제대로 못 했는데. 내가 밥 사준다고 했었지. 그러고 보니 아영이랑 셋이 마셨던 술값도 기어코 본인이 계산했다. 그날 많이 나왔을 텐데.

[유연 대리님, 파일 보내드립니다.]

[감사해요 대리님! ㅜㅜ 대리님은 진짜 천사예요]

[사주시기로 한 밥만 기다리고 있어서요. 대가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천사는 아닌 것 같아요.]

마침 생각하고 있었는데, 많이 기다렸나 보다.

[헉… 맞다. 제가 너무 늦었죠. 언제 살까요? 기우 대리님 되시는 시간으로 제가 맞출게요!]

[그럼 혹시,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되세요? 평일은 당분간 대리님이나 저나 한동안 야근이지 싶어서요.]

어… 주말… 어……. 순간 정말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서 싱가포르로 출장을 간 강준오 생각이 났다. 마침 강준오도 월요일이나 올 테고, 한동안 정말 평일은 어려울 것 같고, 이번 주는 마침 주말 약속도 펑크 났는데.

이건 기우에게 은혜를 갚으라는 하늘의 계시 아닌가? 뭐가 이렇게 딱 떨어지지? 한 삼 분쯤 고민하던 유연이 다시 메신저를 보냈다.

[네. 토요일 가능해요. 대리님 뭐 드시고 싶으세요?]

[만나서 정해요. 제가 토요일 다섯 시 반에 유연 씨 집 앞으로 데리러 갈게요.]

…괜찮나 싶은데 괜찮겠지 뭐. 어차피 집도 알고 같은 팀인 거 주현도 알고 강준오도 없고. 뭐 어때 뭐. 이제 날도 쌀쌀해지기 시작했는데.

[네! 토요일에 맛있는 거 사 드릴게요.]

[네. 진짜 맛있게 먹는 거 보여 드릴게요.]

약속을 하고 열심히 또 일의 세계로 떠났다. 기우 대리가 기획서도 깔끔하게 잘 써 놔서 일을 크게 덜겠네 싶었다. ‘고마워요, 기우 대리!’를 마음으로 외치며 유연은 불꽃처럼 기획서를 썼다.

* * *

정신없는 평일이 지나 어느새 토요일이었다. 도착했으니 천천히 나오라는 기우의 말에 저녁 약속 있다며 집을 나설 때였다.

“데이트니?”

“데이트는 무슨, 친구 만나러 가는데.”

“내 동생 복장이 친구 만나러 가는 복장이 아니야.”

주현이 갑자기 인터폰을 켜고 대문 앞 CCTV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날렵하게 잘빠진 은색 준대형 세단 외제 차가 나왔다. 오늘은 다른 차 가져왔나 보…네, 가 아니라.

“친구가 돈은 좀 있네, 유연아? 일단 뭐 나가 봐. 얼굴은 나중에 보자.”

하아, 귀신을 속이지. 일찍 들어와야겠다. 네에, 네에. 나가 보겠습니다, 오라버니.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말고.”

“아가씨~ 천천히 들어와도 괜찮아요! 파이팅!”

나의 새 연애를 기대하는 새언니의 응원을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가을 저녁의 잔뜩 미묘한 날씨가 좋았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아스라한 차가운 공기. 마당을 지날 때 느껴지는, 이제 조금 건조해진 바닥. 대문을 나서니 기우가 차 앞에 서서 유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왔어요?”

누가 봐도 데이트하러 나온 아이보리색 셔츠에 베이지색 긴 바지를 미끈하게 차려입고 심플한 가죽 벨트를 매고, 머리를 살짝 넘긴 커다란 남자가 유연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유연의 심장이 움찔하는 소리가 났다. 다정한 잘생김도 좀 건강에 위험한 것 같아.

다가가니 기우가 조수석 차 문을 열어주었다. 조수석으로 들어가 앉자 부드럽게 차 문을 닫아주곤 운전석으로 앉은 기우가 말했다.

“혹시 먹고 싶은 거 생각난 거 있어요?”

“음? 오늘은 기우 대리님 먹고 싶은 거 먹기로 했잖아요.”

“그래도 혹시나 해서… 그럼 제가 예약해 둔 이탈리안 레스토랑 가도 괜찮을까요?”

무난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딱히 싫을 리가. 그나저나 메뉴 만나서 고르자더니 결국 또 내가 먹고 싶은 거 생각해온 거 아닌가 싶었다.

기우의 차가 청담동 한복판의 파인 다이닝이 모여 있는 거리로 향했다. 발렛을 맡기고 들어가니 예쁘고 온화한 가게 분위기가 좋았다. 고급스럽지만 과한 화려함을 절제한 인테리어와 민트와 옐로가 포인트로 섞인 벽, 깨끗하게 정렬된 분위기와 따뜻한 컬러의 조명이 마음에 들었다. 이탈리아 현지의 인기 있는 식당에 간 느낌. 하여간에 센스 있지.

“괜찮아요? 더 좋은 곳 데려가고 싶었는데, 좀 부담스러워할까 봐서요. 열심히 생각은 했는데…….”

“대리님, 오늘은 제가 사기로 한 날인데 기우 대리님 먹고 싶은 걸 골랐어야죠.”

아아, 뭔가 이럴 줄 알았다 싶기도 하고. 내가 그냥 무난한 식당으로 고를 걸 그랬나. 눈을 크게 뜨고 조금 꾸짖듯이 말했다.

“유연 대리님 전에 프렌치 좋아한다 그랬던 건 기억하고 있는데, 프렌치로 고르면 가봤던 곳일까 봐. 오늘은 나랑 처음 오는 레스토랑이었으면 해서요. 너무 유명하진 않은데 괜찮아 보이는 곳 열심히 찾았어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대놓고 말할 순 없었지만.

“어린양 사태 찜 맛있다고 했어요. 괜찮아요? 파스타도 하나 시키고, 피자? 샐러드? 수프?”

“대리님, 오늘 제가 사기로 했잖아요.”

“어… 저 요새 야근을 너무 많이 해서 머리가 나빠졌나 봐요. 잘 기억이 안 나요. 그랬나요?”

뭐야, 멍멍이같이 웃기는.

“와인은요? 여기 포트와인 리스트도 괜찮아요.”

“도수 높은 거 먹여서 나 취한 거 구경하려고 그러죠?”

“네, 유연 대리님 취해도 예쁘더라고요.”

술 한 잔도 안 했는데 왜 벌써부터 술 마신 기분이 들지. 이 사람 이렇게 플러팅을 잘했었나. 무슨 오늘 각오하고 나온 건가 싶다.

예쁜 가게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도수 있는 포트와인을 마시고 있자니 죽은 사랑도 관에서 되살아날 것 같았다. 둘이 와인 한 병을 나눠 마시고, 조금 아쉽나 싶은 차에 식당 앞에 있는 와인 바로 2차를 가서 화이트와인 한 병을 더 주문했다.

와인 바의 잘게 반짝이는 금빛 조명과 어두운 그림자가 둘의 자리에 부드럽게 일렁거려서 묘한 느낌이 들었다. 스며든 취기와 함께 잡다한 수다가 무르익은 즈음이었다.

“…밖에서 만날 땐 대리님 빼고 불러주면 안 돼요? 나 유연 씨라고 부르고 싶은데.”

그치, 주말 저녁에 대리님, 대리님 하는 것도 좀 묘하다 싶었다.

“으음… 네, 기우 씨.”

잠시 망설이다 그를 바라보며 이야기하니 기우가 눈을 못 마주치고 고개를 돌렸다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굵고 커다란 손에 정맥들이 묘하게 느껴져 바라보았다. 술이 오르는지 팔까지 걷어 올린 셔츠 아래로 라인이 굵은 일직선 모양의 뼈대가 보였다.

진한 밤색 눈동자가 가만히 유연을 응시하는 걸 마주 보고 있자니 눈빛에 붙들릴 것 같아 순간 숨을 가다듬었다.

“기우 씨, 운동 열심히 하나 봐요.”

“요새 더 열심히 해요. 나 좀 봐줬으면 하는 사람이 있어서. 알죠? 수컷 공작들이 암컷 공작한테 잘 보이려고 화려하게 깃털 펼쳐서 뽐내잖아요.”

설마, 보이고 싶은 암컷 공작이 나는 아니겠지…….

“유연 씨, 나 강준오 상무님이랑 외사촌이라는 거……. 알고 있죠?”

술 취했을 때 주현에게 말하는 것도 들었는데. 이상하게 긴장되는 질문이었다.

“네, 알고 있어요. 얼마 전에 들었어요.”

“저희 아버지와 이모가 아무래도 남매이자 경쟁 관계다 보니, 유연 씨나 형 입장에서는 제가 다가가려는 게 뭔가 목적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하실 수 있다는 거 알고 있어요. 유연 씨 오빠분인 반 이사님이 준오 형이랑 오랜 친구고 동업자이시기도 하고.”

이렇게 직구로 이야기해 줄 줄은 몰랐는데. 조금 당황스러웠다.

“다른 사람들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저에게는…….”

기우가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쉬다 말했다.

“그냥 순수한 호감이에요.”

항상 자신과 둘이 있을 땐 조금씩 부끄러워하는 듯 말했던 기우가, 유연을 잡아먹을 듯이 강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온순한 짐승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의 속에 들어 앉아 있는 맹수가 느껴졌다. 사람을 현혹시키는 강한 눈빛은 저 집안 혈통인 걸까.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상관없어요. 저에겐 중요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으니까. 그렇지만 유연 씨는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유연 씨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요.”

조금 놀란 눈으로 기우를 바라보다가 뭔가 이끌린 듯 유연이 답했다.

“알았어요, 그렇게 생각 안 할게요.”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기우가 작게 미소 지었다. 가만히 유연을 바라보던 그가 테이블에 한쪽 팔을 괴고 말했다.

“키스하고 싶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유연이 눈을 크게 뜨니 그가 웃었다.

“도망가지 마요. 일단은 잘 참을 테니까.”

항상 그가 당황하며 부끄러워하고, 그런 그의 모습에 묘한 안심을 느꼈던 관계였는데. 갑자기 그의 본능이 밖으로 꺼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박스에서 내용물을 꺼내 개봉한 것처럼. 유연을 바라보는 눈과 얼굴에 욕망이 일렁거려서, 어쩐지 사냥꾼의 눈에 띈 사슴이 된 듯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럴까 봐 도망가지 말라고 한 걸까.

대리를 불러 돌아온 집 앞에 도착하자 그가 기사님께 말했다.

“오 분만 기다려 주세요. 기다리신 몫은 따로 드리겠습니다.”

흔쾌히 알겠다는 기사님을 뒤로하고 기우가 문을 열어 유연을 에스코트했다. 대문 앞까지 같이 걸어간 기우가 유연을 집요하게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유연의 손을 잡았다. 순식간이었다. 잡은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넣고 깍지를 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기우가 유연의 깍지 낀 손을 끌어 올려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래도 도망가지 말고, 일단은 지켜봐 주세요.”

벽에 붙어 있는 벨을 누른 그가 손가락을 스르르 풀고 유연이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았다.

술 때문에 가슴이 뛰는 건지 기우에게 뛰는 건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차마 뒤도 못 돌아보고 대문 안으로 들어간 유연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여태까지 유연은 기우의 겉가죽만 봐 왔던 게 아닌가 싶었다.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같은 종족이었구나.

* * *

“팀장님, 지난주에 업무 배정해 주셨던 선착순 이벤트 건, 확인 부탁드립니다. 경로는 메일로 공유 드렸습니다.”

“벌써 다 했어요? 반 대리 요새 열심히 하네.”

팀장님이 기특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유연은 지금의 팀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타 팀의 몇몇이 유연에게 이유 없이 적대적이거나 치근덕거리거나 하는 일도 종종 있긴 했지만, 과장님과 팀장님은 그렇지 않았다.

항상 일 잘 도와주고 다정하게 대해주는 아영과 기우 씨야 더 말할 것도 없고. 팀에 있다 보면 더 잘해서 이 사람들과 오래오래 일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 만큼.

“음, 버튼 눌렀을 때 ‘천 포인트 획득했습니다.’만 있으면 성격 급한 유저는 텍스트 안 읽고 문의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벤트 페이지 하단에 받은 포인트는 마이 페이지의 포인트 탭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별도로 추가 기입해 주세요.”

“네, 팀장님.”

“나머지는 뭐, 플로우도 빠진 것 없고 잘했어요. 레이아웃도 보기 좋게 배치 잘해줘서 디자인 팀에서 작업하기도 좋겠다. MMS 문서는 따로 빼서 개별 문서로 만들고, 디자인 팀이랑 개발 팀에 공유해 주세요. 수고 많았어요.”

“네, 팀장님! 감사합니다!”

으, 오늘은 문서 보내 놓고 칼퇴해야지!

유연의 마음에 기쁨의 축포가 팡팡 터졌다. 기쁨에 찬 얼굴로 자리에 돌아가니 건너편 자리의 기우 대리가 입꼬리를 올려 웃는 것이 보였다. 아, 토요일 이후로 뭔가 눈만 마주쳐도 긴장된다. 골든 리트리버인 줄 알고 귀여워했는데 사실은 사자였던 느낌이라.

첨부 파일로 넣기엔 PPT와 워드 문서 용량이 좀 컸다. 하는 수 없이 메일에 공유 폴더 경로를 넣어두고 발송 후 퇴근했다.

가을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퇴근길의 비가 성가시긴 하지만 어쩐지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도착하니 준오가 주현과 거실에 앉아 있었다. 오늘 귀국해서 위에서 씻기만 하고 내려와 출장 다녀온 일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편한 복장에 반들반들한 얼굴을 보아하니.

“다녀왔습니다……. 어, 내 선물은?”

오빠와 지아 언니의 몫인 걸로 보이는 홍차 상자가 테이블에 올라와 있었다. 호오, 올가을 홍차는 실컷 먹겠네.

“넌 출장 다녀와서 오랜만에 본 사람한테 할 말이 그것뿐이야?”

준오가 저 고얀 놈, 하듯이 말했다. 흥. 당연하지.

“아, 그럴 리가 없지. 너무 반가워하면 오빠가 부끄러울까 봐 그랬어.”

“퍽이나, 네가 너무 반가워했겠다, 응.”

“흥… 한마디 더 하는 걸 보니 아무것도 없나 보네. 볼일 보고 가렴?”

쳇, 내 몫이 없다니. 방에 들어가려는데 주현이 말했다.

“너 오면 같이 저녁 먹으려고 기다렸어. 지아가 매운탕 끓여 놓고 나갔다. 일단 밥이나 먹자.”

아,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는 날 저녁의 매운탕이라니. 환상 그 자체다. 새언니 사랑해요.

회사 앞 오피스텔 알아봐야 하는데 집이 너무 편해서 자꾸 나갈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안방 화장실 공사도 진작 끝나 부부의 시간도 이제 들리지 않고……. 둘 다 나가지 말라는데 이러다 눌러앉을 듯싶었다.

상 차리는 걸 도와주려고 부엌으로 가니 주현과 준오가 고개를 휘저었다. 하…. 그릇은 좀 깼지만 나도 할 수 있는데. 정말 너무한다.

“차릴 인원이 혼자면 고양이 손이라도 아쉬울지 모르겠지만, 셋이 있으니 넌 그냥 방해야. 그냥 식탁 앉아 있어.”

졸지에 고양이 손보다도 못하게 된 유연이 가만히 앉아 차려지는 식탁을 바라보았다. 준오가 뒤에서 “넌 왜 고양이 손을 모욕하냐.”라고 주현에게 말했다. 저 얄미운 인간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매운탕 국그릇이 식탁에 얹어졌다. 살이 뽀얀 생선 덩이가 무 조각과 함께 먹음직스럽게 얹어져 있었다. 입 안을 야무지게 헤엄치는 생선 살을 느끼며 신나게 저녁밥을 먹던 와중이었다.

“강준오. 너 옆집 산 거 인테리어 공사 다 끝나지 않았어?”

“…아, 뭐. 그렇긴 한데. 막상 집 옮기려니까 귀찮네. 너무 바쁘기도 하고.”

“하긴, 이사가 보통 일도 아니고 지금 워낙 바쁘기도 하니까. 2층도 급히 쓸 일 없으니 천천히 해. 원하는 만큼 있어도 아무 상관 없으니까.”

집을 아주 새로 짓듯이 공사하는 것 같더니 드디어 다 끝났나 보다. 나라면 신나서 바로 갈 텐데 뭘 미적거리고 있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니 준오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밥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연이는 그 은색 기블리 친구 잘 만나고 왔어?”

주현이 차 이름까지 들먹이며 말했다. 그래… 그날 늦게 들어와서 궁금한 거 못 물어봤겠지. 유연이 쿨럭거리며 물을 마셨다.

“얘 연애하려나 봐. 친구 만난다고 우기기에 현관 CCTV 켰더니 은색 중형 세단이 대문 앞에 딱 보이더라.”

아, 오빠. 눈치 좀……. 그런 거 말하지 말라고……. 유연이 입 나온 표정으로 주현을 잠시 째려볼 때였다. 눈앞 준오의 표정이 신통치 않았다. 유연이 기회다 싶어 말을 돌렸다.

“준오 오빠, 왜 그래? 생선 가시 걸린 거 아냐?”

“뭐야, 가시가 걸렸어? 휴지 이거 써.”

“…안 걸렸어. 괜찮아. 맛있네, 매운탕.”

준오가 하나도 맛있지 않은 표정으로 매운탕을 떠 입에 넣었다. 하여간에 까다로워 가지고. 입에 안 맞나? 엄청 맛있는데…….

“왜, 홍차 마시고 올라가지.”

주현이 설거지를 하며 올라가려는 준오에게 말했다.

“아니야, 싱가포르도 비행거리 은근히 짧지는 않아서. 피곤하네. 나 내일 휴가인 거 알지? 급한 일 있으면 연락하고.”

알았다는 주현의 대답을 뒤로하고 준오가 내방 쪽의 2층 계단으로 향하기에 가며 인사하려는 참이었다. 유연이 제 방문을 열며 준오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빠 푹 쉬고, 나중엔 내 출장 선물 까먹지 말고.”

유연이 장난스럽게 말하는데 표정이 냉랭했다. 가시 박힌 거 아직 안 빠졌나? 준오가 고개를 숙이고 후- 하고 작은 한숨을 쉬었다. 저 얼굴로 냉정한 표정 짓고 있으니 무슨 드라마 주인공 같네.

“손.”

“응? 손…?”

멍하니 손바닥을 펴자 준오가 주머니에서 밝은 민트 컬러의 박스를 꺼내 그 위로 올려주었다. 박스에는 흰 리본이 예쁘게 묶여 있었다.

“주현이 보면 애 버릇 나빠지니 뭐니 할 테니까. 브로치야. 너 생일도 얼마 안 남았고.”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갔다. 유연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오빠, 고마워!”를 외쳤으나 듣는 건지 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민트 상자를 열어보니 로즈골드 컬러의 작은 사자 브로치에 큐빅 같은 게 잔잔하게 박혀 있었다. 엄청 반짝이는데 설마 다이아는 아니겠지. 입고 있던 카디건에 꽂으니 작고 심플한 게 무척 마음에 들었다.

‘후후, 이 사자 좀 작은 강준오 같아.’

이렇게 작으니까 엄청 비싼 건 아니겠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손바닥 위에 얹어 놓고 쓰담쓰담 해 주었다. 너는 강준오처럼 냉정하게 말하고 그러면 안 돼. 알았지?

준오에게 캐릭터가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 이모티콘과 함께, 거울에 대고 브로치를 한 사진을 전송했다.

[이 사자 강준오 님 닮았어]

이 인간은 읽기만 하고 답도 하지 않았다.

* * *

오늘의 구내식당 멤버는 서비스 마케팅 팀 젊은 3인조였다. 지하로 내려가 밥을 먹고 있는데 아영이 유연의 가슴에 달린 브로치를 보며 말했다.

“헐… 그 브로치, 티아니잖아요.”

“아, 네. 생일 얼마 안 남았다고 선물받았어요.”

“생일 선물로 티아니요? 대리님 남자 친구 생기셨어요?”

아영이 이렇게 중요한 일을 말도 안 했냐는 표정을 걸었다. 옆에서 기우 대리가 무표정으로 카디건 위의 사자 브로치를 바라보았다.

“에이, 그런 건 아니고. 작으니까 얼마 안 하지 않을까?”

그 말을 들은 아영이 이게 무슨 소금으로 달고나 구워 먹는 소리지, 하는 눈빛으로 자신의 팔찌를 가리키며 말했다.

“휴, 대리님……. 그나마 얼마 안 하는 건 제 팔찌랍니다. 이건 그래도 티아니 라인 중엔 저렴한 실버 78만 원짜리고요.”

“지금 대리님이 하신 그 사자 브로치는 500 좀 안 돼요…….”

유연이 야채 소시지 볶음을 입에 넣으려다 멈췄다. 힘 빠진 젓가락질에 소시지가 국그릇으로 추락하는 소리가 났다.

“아니… 이거… 큐빅 몇 개 박혀 있고 이렇게 작은데…….”

“그거 다이아라고 팔찌 사면서 매대 구경할 때 직원이 말해줬어요. 반지나 목걸이는 그렇다 치고 대체 저런 동물 브로치를 누가 오백 주고 사나 했는데, 바로 대리님의 지인이셨군요.”

하아, 내가 강준오 때문에 못살겠다. 이러니까 주현 오빠 몰래 줬지 싶기도 하고. 부모님이 하시는 주얼리 브랜드의 가격도 충분히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티아니에 비하면 애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작은 브로치가 오백여만 원 하진 않았으니. 커다란 원석이라도 박혔으면 또 몰라.

그 인간은 이렇게 비싼 걸 주면 나는 자기 생일에 뭘 선물하라고 진짜. 이 브랜드가 세일을 했을 리도 없는데. 분명 일부러 가격 티 안 나는 거 찾느라 애썼을 거다.

멍 때리며 밥을 먹고 있는데 오늘따라 분위기 풀어 주기로는 일등인 기우 대리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난주에 손도 잡히고 해서 그런가 이상하게 찔리는 마음이 들었다. 아니, 내가 고백을 받은 것도 아닌데.

그나저나 브로치 위에 안전띠라도 해야 하나. 갑자기 가슴 위가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귀엽다고는 생각했지만 너 이렇게 비싼 사자인 줄 몰랐어……. 아주, 응, 가격 건방지기가 강준오 뺨치네.

오랜만에 사내 카페가 아닌 외부 카페에 가자고 해서 나선 길이었다. 점심시간의 카페는 전쟁 통이라 사람이 좀 덜한 곳으로 좀 더 걸어갔다.

가위바위보 오늘의 패자 유연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진동 벨이 울리는 소리를 듣자 기우가 음료를 받아오는 참이었다.

‘무슨… 트렌치코트 모델도 아니고.’

음료를 가지러 간 기우의 옆모습을 보니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르바이트생이 진심을 담은 친절한 표정으로 기우의 진동 벨을 받고 음료를 건네주었다. 음료와 함께 자리로 온 기우가 자몽 주스를 유연에게 건넸다.

“아, 아영 씨는 잠시 전화받는다고 가게 앞에 나갔어요.”

“그래요? 고맙네요.”

기우가 주스를 먹는 유연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 사람은 뭐가 이렇게 갑자기 훅훅 들어올까.

“유연 씨 그런데…….”

“네?”

“가위바위보는 마실 거 사주고 싶어서 일부러 그렇게 못하는 거예요?”

아니, 맨날 지는 것도 서러운데.

“내가 사고 싶어서 매번 노력하는데, 유연 씨 따라잡기가 생각보다 힘들어요.”

“저 진짜 이기고 싶어서 최선을 다하거든요?”

“음료수 매번 못 사주니까, 나도 유연 씨 생일 선물 사 주면 안 되나요?”

기우가 사람을 녹일 듯한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유연의 손끝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이 사람은 이런 게 뭐가 이렇게 자연스러워. 같이 있으면 내 연애력은 중학생이 되는 기분이 든다.

순간 어쩔 줄 모르고 대답을 망설이는 찰나, 아영이 전화를 마치고 카페로 돌아왔다. 다행히 대답하지 않고 적절히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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