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31)

운명

“손가락 안 아파요?”

“별로 안 아픕니다.”

“미안해요. 설마 그 타이밍에서 그렇게 영화같이 손을 벨 줄은 몰랐어요.”

“영화같이 멍청해서 죄송하군요.”

“네드가 사과할 일은 아니죠. 저야말로 로맨스 영화같이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아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아서 그냥 시도 안 했어요. 남이 먼저 닿는 거, 특히 손에 닿는 거 싫어한다고 해서 안 그랬어요.”

“잘했습니다. 그런 짓을 했으면 당장 쫓아냈을 겁니다.”

“남의 입에 손가락 집어넣는 게 그렇게 싫어요?”

“그런 식으로 물어보면 당연히 싫습니다. 지저분하고 불쾌하잖습니까?”

“그럼 반대로 내 손가락이 네드의 입에 들어가는 건요? 그것도 불쾌한가요?”

“샘, 어린애도 아니면서 왜 자꾸 손가락을 입에 넣으려고 하는 겁니까?”

“그냥 궁금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순간이 왔을 때 모르고 분위기 깨는 것보단 미리 알고 조심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손가락을 입에 넣으면 그 어떤 순간이라도 분위기는 깨질 겁니다.”

“글쎄요. 모든 순간이 그렇지는 않을 텐데요?”

“젠장, 이 이야기를 꼭 지금 해야 하는 겁니까?”

“안 될 건 뭐예요? 손가락 다친 김에 손가락 이야기 하는 건데.”

“그냥 손가락 이야기가 아니잖습니까!”

“좋아요. 그럼 무슨 이야기 할래요? 네드가 원하는 부위를 골라 봐요. 되는 거랑 안 되는 거 미리 알아 두게.”

“……됐습니다. 당신은 나랑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이런 식으로 자꾸 건드리는 게 재미있습니까?”

“글쎄요. 일일이 반응해 주니까 재미없지는 않아요.”

“하. 그래요. 마음껏 가지고 노시죠. 다 놀면 제자리에 돌려놓기만 해 주세요.”

“그건 싫은데요.”

“왜 싫다는 겁니까?”

“그게, 네드가 한 가지 오해하고 있는 게 있어요.”

“제 오해가 아닐 것 같지만 들어는 보죠.”

“난 네드랑 그럴 생각 있거든요. 생각해 보세요. 손도 내가 먼저 만지라고 했었고, 키스도 내가 먼저 했잖아요? 그건 키스가 아니라 뽀뽀였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거짓말하지 마시죠! 본인 입으로 남자한테 관심 없다고 말한 데다, 얼마 전까지 여자와 약혼까지 하고 있었잖습니까. 그냥 재미로 집적대는 게 빤히 보이는 사람을 제가 어떻게 믿습니까?”

“뭐라고요? 내가 재미로 집적댄 거라고 누가 그래요? 이고르 그 새끼예요?”

“그러면, 설마 진심으로 나랑 어떻게 해 볼 생각이 있다는 겁니까?”

“진심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겠죠.”

“그것 보세요.”

“아니, 네드가 생각하는 그런 방향은 아니고요. 음, 이건 좀 설명하기 어렵네요. 난 원래 별로 진정성 있는 성격이 아니라서요. 보면 알잖아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히 해 두자면, 난 의미 없이 같은 남자 옆에 붙어서 시간 낭비 하는 취미도 없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그리고 난 필연을 믿거든요.”

“무슨 뜻입니까?”

“내 돈은 좋지만 날 참지 못한 리즈가 떠나자마자, 날 참을 만큼 내 얼굴을 좋아하는 닥터를 발견한 데에는 어떤 필연적인 운명의 개입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뜻이에요.”

“당신의 고약한 성격을 참고 있다는 걸 알면서 계속 그런 식으로 굴었다는 게 제일 충격적입니다만…….”

“그건 내가 말하기 전에도 알고 있었잖아요. 새삼스럽게 충격을 왜 받아요?”

“그렇긴 하죠.”

“곰곰이 생각해 보면 꽤 로맨틱한 이유 아닌가요? 지금 나 닥터한테서 운명을 느꼈다고 말한 건데.”

“그걸 로맨틱함으로 포장하려는 시도 자체가 로맨틱이라는 단어에 사과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자, 치료 다 했어요.”

“……당신 때문에 다친 거긴 하지만, 어쨌든 치료 고맙습니다.”

“앞에 건 말 안 해도 괜찮을 뻔했는데. 그 손으로 계속 요리하는 것도 그런데, 우리 피자라도 배달시킬까요?”

“됐습니다. 이 정도론 안 죽어요. 금방 만들 테니까 조금만 참아 보시죠.”

“아니, 네드가 요리하다 죽을 것 같아서 한 말은 아니고요. 나 때문에 다쳤는데 요리까지 시키는 건 너무 비인간적인 것 같아서요.”

“당신 입에서 비인간적이라는 말이 나오는 게 신기하긴 합니다만, 어차피 하던 거니 끝까지 하는 게 낫습니다. 재료도 자르다 말았고.”

“정 그러면 어쩔 수 없고요. 나도 시켜 먹는 것보단 네드 요리가 더 좋거든요.”

“……정말입니까?”

“네. 나 먹으라고 일부러 만들어 주는 거잖아요? 설마 내가 그 정도 고마움도 모르는 인간쓰레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죠?”

“…….”

“생각했나 보네요.”

“……네.”

“너무하시네. 난 네드가 요리해 주는 게 고마워서 어떻게 보답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보답이라고요?”

“네. 제가 알기로 보답이란 말이 그렇게 나쁜 뜻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싫은 얼굴을 하시죠?”

“……반사적으로 그만.”

“마음이 아프네요.”

“당신한테 마음이란 게 있긴 합니까?”

“그야, 일단은 저도 빨간 피가 흐르는 사람이니까 여기 어디에 있겠죠?”

“피는 제가 흘린 거고요. 정말로 빨간 피가 흐르는지 확인하기 전까지 못 믿습니다.”

“그래요? 이왕 칼 들고 있는 김에 좀 흘려 드릴까요? 네드가 원한다면 내 다친 손가락을 입에 넣고 원하는 만큼 빨아도 괜찮아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사양하겠습니다. 정말 영화 본 거 맞습니까? 포르노가 아니라?”

“흠. 방금 되게 하고 싶어 하는 얼굴 같았는데.”

“착각이니까 칼이나 넘겨주시죠.”

“네, 이번엔 조심해서 비트만 자르세요. 손가락은 자르기 위해 달고 있는 게 아니니까요.”

“당신만 닥치면 그렇게 할 겁니다.”

“알겠어요. 그런데, 네드.”

“네.”

“얼굴이 비트 뿌리 같은 색이에요. 대충 내 손가락 빨아도 된다고 했을 때쯤부터?”

“…….”

“내 거 빨고 싶으면 언제든 말만 하세요. 난 칼 맞는 데 익숙해서 얼마든지 흘려 줄 수 있거든요. 요리해 준 데 대한 보답으로.”

“…….”

“뭐, 꼭 손가락 아니라도 상관없고요. 기왕이면 서로 즐길 수 있는 게 좋으니까?”

“……칼질할 때는 제발 좀 닥치세요.”

“네.”

데이트의 정석

“네드는 집에서 영화 볼 때 이야기하는 거 싫어하는 쪽?”

“전 어느 쪽이든 괜찮습니다. 대화하는 편이 즐거울 때도 있으니까요.”

“다행이에요. 나도 그렇거든요. 닥치고 가만히 영화만 보는 건 너무 힘들어요.”

“당신은 확실히 닥치는 데 문제가 있어 보이긴 합니다.”

“하하, 제가 좀 말이 많죠?”

“그게 조금이란 말입니까……?”

“우리 집에 나보다 말 많은 사람이 둘이나 더 있거든요. 난 조금인 편이죠. 상대적으로요.”

“심각하군요. 가족 모임을 상상하기가 무서울 지경입니다.”

“걱정 마세요. 네드한테 함부로 지껄이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시켜 둘 테니까.”

“……네?”

“사실 굳이 경고하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입 닥칠 것 같긴 해요. 그 사람들, 고학력자 앞에서 주눅 드는 경향이 있거든요. 자존심 때문에 아닌 척하지만.”

“그렇습니까? 그건 정말 쓸모없는 정보로군요.”

“아닐걸요?”

“내가 그런 정보를 알아서 대체 어디에 쓴단 말입니까?”

“예를 들면, 가족 모임에서 놀릴 때 참고하실 수 있잖아요.”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는지 정말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 가족 모임에 제가 참석하게 되는 이유도 모르겠고요.”

“그야, 놀리면 재미있으니까?”

“고작해야 재미에 목숨까지 거는 건 거의 병 수준입니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테라피스트를 찾아가세요.”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긴 한데, 진짜 재밌어요. 건드리면 건드리는 대로 일일이 반응하는 점들이. 생각해 보면 다들 엄청나게 머리가 나쁜 건 아닌데 왜 이상한 열등감을 가지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가업이 가업이다 보니 형들은 일찌감치 일선에서 뛰느라 학업을 소홀히 한 건 사실이지만 지능 지수는 평균치거든요. 그래도 우리 집에선 내가 제일 고학력자지만.”

“새미, 간과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당신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해도 상당한 고학력군에 들어갑니다.”

“그런가요? 그렇게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당신은 아이비리그 로스쿨을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썩 괜찮은 돈벌이 수단?”

“……하. 지금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어두운 단면을 훔쳐본 기분입니다.”

“어디든 어두운 면이란 건 존재하는 법이죠. 아, 네드는 핫도그랑 팝콘이랑 나초 중엔 뭐가 좋아요?”

“전 둘 다 별로입니다.”

“그럼 나도 안 먹을래요.”

“드시고 싶으면 드셔도 괜찮습니다. 저도 사 먹는 음식에는 그렇게까지 까탈스럽게 굴지 않습니다. 게다가 제가 먹는 것도 아니니까요.”

“아니, 네드의 강박증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요.”

“그럼 왜 절 따라 안 먹는단 겁니까?”

“글쎄요. 미러 효과를 의식적으로 노려봤는데 네드의 반응을 보니까 실패한 것 같기도 하네요.”

“미러, 뭐라고요?”

“미러 효과. 상대방의 행동을 흉내 내는 걸로 호감도를 올리는 심리 효과요.”

“……그걸 본인 입으로 설명하면 효과가 사라지는 거 아닙니까?”

“어필될 것 같아서 말이라도 해 봤는데 별론가요?”

“뭐가 별로인지조차 모르겠습니다만…….”

“좋아요, 그럼 영화를 골라 봐요. 일단 이거 두 개 사 놨는데 뭐가 더 좋아요? 〈윔블던〉은 로맨틱 코메디고, 〈매치 포인트〉는 그냥 로맨스래요. 네드의 취향도 충분히 고려해서 골랐어요.”

“제가 테니스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왜 굳이 테니스가 나오는 로맨스 영화 중에 골라야 하는 겁니까?”

“네드는 테니스를 좋아하고 난 로맨스를 보고 싶으니까?”

“이 건물에서 가장 로맨스와 안 어울리는 신경의 소유자가 말입니까?”

“그러니까 영화의 힘이라도 빌려 보려고요. 아무래도 시작부터 같이 포르노를 보자는 건 너무 앞서 나가는 게 아닐까 싶어서. 혹시 게이 데이트적으로는 그런 단계를 생략하는 편이 매력적인가요? 그럼 게이 포르노를 찾아볼까요?”

“그러니까, 이건 당신의 그 망할 디너 데이트의 연장선이라는 뜻이로군요.”

“포르노는 무시하는 건가요?”

“내 집에서 내가 요리한 저녁을 먹고 내 씨어터 룸에서 영화를 보는 것도 데이트가 된다니, 새로운 발견입니다.”

“무시로군요. 매번 같은 수에는 안 넘어간다 그거죠? 좋아요.”

“전 둘 중 아무거나 상관없지만, 〈매치 포인트〉는 아마 당신이 생각하는 로맨스가 아닐 것 같습니다. 최소한 포르노를 대신해서 볼 영화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죠. 당신이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같은 것에 발정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뭐야, 설마 벌써 본 거예요?”

“둘 다 봤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보지도 않은 영화를 추천하는 겁니까?”

“보통 영화는 한 번 보면 끝이잖아요? 당연히 안 본 영화를 같이 보려고 하겠죠.”

“좋은 영화는 몇 번을 봐도 좋습니다.”

“전 같은 거 또 보는 게 제일 싫어요. 한 번 본 것만으로 충분한 시간 낭비인데 왜 두 번씩이나 그런 짓을 해요?”

“그런 사람이 대체 영화는 왜 보자는 겁니까……?”

“아까 말했잖아요. 로맨틱한 분위기를 위해서라고.”

“당신이 골라 온 영화에는 로맨틱한 분위기 같은 게 없다잖습니까?”

“〈매치 포인트〉가 왜 연쇄 살인마 이야기예요? 이거 장르 설명에 테니스 로맨스라고 적혀 있었는데요?”

“테니스 강사가 불륜에 양다리에 사람까지 죽이고 죄책감 없이 잘 살아가는 내용입니다. 찾으려고만 하면 로맨스도 있기는 하니까 붙인 거겠죠.”

“와……. 그게 무슨 테니스 로맨스예요? 완전 사기 아니야?”

“테니스 강사가 주인공이고 불륜을 저지른다는 점 아니겠습니까?”

“난 불륜을 로맨스로 포장하는 게 제일 싫은 사람인데요. 나 리뷰에 사기당했어요. HD[58]로 사서 13.99달러였는데!”

“당신 같은 부자가 13.99달러를 쓴 게 아깝다는 건 아니겠죠?”

“워렌 버핏[59]도 기분 별로인 날에는 2.61달러짜리 아침을 먹는데 내가 13.99달러를 아까워하는 게 무슨 문제인가요?”

“워렌 버핏의 아침 식삿값은 왜 기억하고 다니는 겁니까?”

“기분 좋은 날에는 3.17달러짜리 먹는대요.”

“확실히 그 기준으로 따지면 당신이 낭비한 돈은 워렌 버핏의 기분 나쁜 아침을 다섯 번 정도 보낼 수 있는 값어치긴 합니다만…….”

“농담이었어요. 그럼 〈윔블던〉 볼래요? 이건 연쇄 살인마는 안 나오죠? 설마 코메디 붙여 놓고 피와 살이 난무하진 않을 거 아니에요.”

“안 나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다지 로맨틱한 내용은 아닙니다. 〈매치 포인트〉에 비하면 테니스에는 충실하지만요.”

“젠장, 테니스 로맨스 영화는 원래 다 이 모양인가요?”

“저는 대체 뭘 어떻게 생각해야 테니스가 로맨틱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 건지가 더 의문입니다.”

“장르가 로맨스니까 당연히 로맨틱할 거라고 생각하죠!”

“장르가 코메디라도 안 웃긴 영화가 즐비한 건 어떻게 하시려고요?”

“…….”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나 봅니다?”

“없는데요. 전 원래 영화 안 보거든요.”

“그냥 〈윔블던〉 틉시다. 둘 중에 고르면 그게 낫습니다.”

“알겠어요. 참고로 윔블던은 12.99달러에 샀어요. 이것도 HD 화질이죠. 그런데 이 영화에 베드씬 나와요? 야해요? 근데 게이도 이성애자 베드씬 보면서 꼴려요? 나 사실 게이 포르노 한 번도 본 적 없어서 좀 궁금하긴 한데. 포르노기만 하면 다 세울 수 있는 건지 아닌지요.”

“전부터 생각했습니다만, 당신은 미국인이라는 걸 감안해도 지나치게 직설적입니다.”

“네드도 미국인인데요. 그리고 꽤 직설적인 편이잖아요?”

“저는 듣는 사람을 배려하는 미국인입니다.”

“영국 영화를 골라 왔다고 영국인처럼 말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게 아니라, 평소에도 문명인처럼 말해 달라는 뜻입니다.”

“알겠어요. 네드, 이 영화에서 남주인공이랑 여주인공이 떡을 치나요?”

“당신이 생각하는 문명은 무슨 잉카 문명쯤 되는 겁니까?!”

“네드는 주문이 너무 많은 데다 내용도 어려워요. 좋아요. 다시 해 볼게요.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은 작중에서 영화적 비유를 이용하지 않은 직접적인 성관계를 맺고 그 장면을 보여 주나요?”

“……보여 줍니다.”

“좋아요. 이걸로 가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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