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31)

침묵 서약[50]

뚜르르르르르.

“뭐야? 이 전화기 장식품 아니었어?”

뚜르르르르르.

“받아야 하나?”

뚜르르르르르.

“음.”

뚜르르르르르.

“안녕하세요, 닥터 와이트의 집입니다.”

[미스터 베넷,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저는 닥터가 아닙니다. 점점 제 이름이 닥터고 성이 와이트인 것처럼 들리니까 차라리 이름을 불러 주세요.]

“에드먼드 와이트, 나한테 그렇게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어요?”

[……닥터라고 부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닥터가 아니니까요. 설마 매번 풀네임을 부를 생각입니까?]

“알아들었어요, 네드.”

[대체 당신은 왜 스타트 라인에 서자마자 결승점에 골인하는 겁니까?]

“그러면 에디?”

[하…….]

“에드? 테드? 테디?”

[뭐가 됐든 닥터만 아니면 되니까 마음대로 부르세요. 어차피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뭘로 부르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렇게 나오면 섭섭한데요? 우리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이는 아니잖아요?”

[우리라고 부를 만한 사이가 아닌 것만은 확실합니다만?]

“내 손 만지면서 가 놓고선.”

[간 적 없습니다! 가긴 어딜 간다는 겁니까?!]

“아, 그래요? 하기야, 만지다 도망쳤으니까 기술적으로 말해서 만지면서 간 건 아니네요. 만지면서 세우고 딴 데 가서 쌌죠.”

[……그런 말 좀 안 하면 안 됩니까?]

“왜요? 이젠 목소리만 들어도 세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게 아니라…….]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좀 이상하네요. 네드는 날 미스터 베넷이라고 부르는데 왜 나는 네드라고 불러야 하나요? 네드도 날 이름으로 불러야죠.”

[저는 네드라고 부르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닥터는 잘못된 호칭이라는 말을 한 거죠. 닥터가 아니고, 박사 학위도 없으니까요.]

“좋아요. 그럼 공평하게 네드도 날 새미라고 부르는 건 어때요? 아니면 샘이라든지. 포드는 싫어요. 자동차 팔 것 같잖아요.”

[……‘공평하게’ 말입니까?]

“불공평하게 부르고 싶다면 말리진 않을게요.”

[대체 불공평하게 부르는 건 뭡니까……?]

“그거야 저도 모르죠. 공평한 호칭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알아내서 저한테도 가르쳐 주세요.”

[알겠습니다. 새미라고 부르면 되는 거 아닙니까?]

“네. 그런데 갑자기 전화한 게 그거 때문이에요? 닥터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려고?”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그럼 내 목소리가 듣고 싶으셨나?”

[정말 황당한 착각이로군요. 절대로 아닙니다!]

“아하, 얼굴은 마음에 쏙 들지만 목소리는 별로 취향이 아니시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럼 취향인가요?”

[……왜 당신은 모든 걸 흑백 논리로 끌고 가려는 겁니까? 세상에는 그레이 존이라는 게 있다는 걸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 나 지금 깨달은 건데, 닥터 와이트는 ‘절대로’라는 표현을 주로 반어법에 쓰시는 것 같아요. 사실 긍정하고 싶은데 부끄러울 때마다 절대 아니라는 식으로 말을 하네요.”

[절대 아닙니…….]

“보세요. 또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고 하잖습니…….]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들 하는데 네드의 화법은 오해를 사기 쉬운 것 같아요.”

[…….]

“할 말이 없어지면 금세 입을 다무는 것도 별로 좋은 습관은 아니고요.”

[누가 변호사 아니랄까 봐…….]

“안타깝게도 나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기 전과 취득한 후에 별로 달라진 점이 없답니다. 태어나고 말문이 트인 뒤로 줄곧 이런 식이었거든요.”

[당신 가족이 왜 당신을 위협하는지 진심으로 이해가 되려고 합니다.]

“저도 이해되는데요. 그 사람들 마피아잖아요. 마피아는 무식하고 폭력적이라 위협하는 걸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어요. 나쁜 습관이죠.”

[그 무식하고 폭력적인 사람들의 범주에 당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건 알고 계시는 겁니까?]

“난 양지바른 곳에 사는 건실한 변호사인데요.”

[절대 양지도 아니고 절대 바른 곳도, 심지어는 건실한 사람도 변호사도 아닌 것 같습니다만.]

“또 ‘절대’라고 하시네.”

[빌어먹을 혀…….]

“혀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우리 다음에는 혀를 넣는 키스도 시도해 보는 건 어떨까요?”

[……네? 갑자기요?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나 사실 지금까지 남자랑 키스해 본 적은 없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이상한 건 아니더라고요. 남자도 입이 있고 남자랑 남자면 입이 두 개니까 얼마든지 키스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족력을 따져 봐도 그렇고요.”

[대체 여기서 가족력은 왜 튀어나옵니까?]

“우리 패밀리는 안 그러지만 리즈네 패밀리에는 비슷한 전통이 있거든요. 침묵하는 걸로 조직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맹세의 의미로 키스하는 거요. 물론 남자끼리 하는 키스예요.”

[저와 당신의 사이에 지켜야 할 조직의 비밀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만. 그리고 그런 키스는 상징적인 건데 왜 혀가 끼어듭니까? 말이 안 되잖습니까?]

“말 되는데요. 그거 진짜 엄청 진하게 해요. 혀만 넣으면 다행이게요. 뭐, 표정이 쓸데없이 진지하긴 한데 그건 살벌한 상황이라 그런 거고. 어쨌든 혀도 넣는 건 확실해요.”

[당신은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압니까……?]

“직접 봤으니까요.”

[…….]

“그 키스는 체포당할 때 입 닥치고 얌전히 감방에 들어가서 형 살면 밖에 있는 가족은 패밀리에서 챙겨 줄 거고, 다 살고 나오면 한자리 주겠다는 의미로 하는 거잖아요. 마피아 가족으로 살다 보면 한두 번쯤은 보게 돼 있어요.”

[……두 사람이 원래 그런 사이였을 가능성은 없는 겁니까?]

“원래 그런 사이 아니라는 걸 알고 본 건데요. 그 친구들 각자 다른 상대랑 결혼했고 애도 있었거든요. 그리고 가족한테 되게 헌신적이었어요. 만약에 그런 완벽한 이중생활을 연기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마피아가 아니라 배우를 했겠죠.”

[하. 정말이지 말세로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고작해야 비밀 엄수를 위해 키스하는 건 아무래도 좀 그렇죠? 리즈가 배우자였으면 목 따였을지도 몰라요. 정절을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저는 지금껏 마피아들은 호모포빅한 집단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정말 충격적이군요.]

“꼭 그렇지만은 않은데요. 요즘은 시대가 바뀌고 있잖아요? 우리 가족만 해도 동성 결혼보다 나만 즐거운 내 독신 생활에 거부감을 느껴서, 네드를 데리고 간다고 해도 남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 의견 없어 보였는…….”

[잠깐만요. 지금 저를, 가족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이런! 전화 연결 상태가 별로네요. 네드? 잘 안 들려요, 네드.”

[쇼하지 마시죠! 당신 지금 분명히,]

“안 들려요.”

[지금 나랑 장난치는 겁,]

“아, 이제 들리네요! 어쨌든, 입 다물라고 키스까지 하는 건 저도 그다지 좋아하는 문화는 아니에요. 일종의 침묵 서약 같은 거라서 옛날부터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하지만 네드 생각처럼 호모포빅한 패밀리도 있죠. 남의 패밀리 문화에 간섭해 봤자 전쟁만 나니까 서로 모르는 척 넘기는 것뿐이고요.”

[말 돌리지 말고, 방금 한 건 무슨 헛소린지 설명을…….]

“그런데 네드.”

[……뭡니까?]

“오늘 왜 전화한 거예요? 자기 집에 전화까지 했으면 뭔가 용건이 있을 거 아니에요?”

[오늘 늦게 들어갈 예정이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주무시라는 말을 하려고 했습니다.]

“저런. 오늘은 또 뭐 때문에 늦는데요?”

[일입니다.]

“흠. 일 때문 아닌 것 같은데요?”

[일 맞습니다. 제가 왜 당신에게 늦게 들어가는 데 대한 변명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같은 집에 있으면 예의상 할 수도 있는 거죠. 그나저나, 나 피하는 거 아니고 정말 일 때문인 거 맞아요?”

[절대로 피하는 거 아닙니,]

“피하는 거 맞구나.”

[……젠장!]

“그래서, 어제도 늦었고 오늘도 늦을 거고 내일도 늦을 거고 모레도 늦을 거고 그런 거예요? 아침에도 나보다 일찍 일어날 거니까 앞으로 나 쫓아낼 때까지 얼굴 못 볼 거고?”

[설마 이고르가 그것까지 다 고자질했습니까?]

“아뇨, 그 새끼는 성질 못 이기고 나한테 욕한 다음 폰 번호까지 바꾸고 튀어서 네드가 어떻게 날 퇴치하려고 드는지 일일이 알려 줄 방법도 없을 거예요.”

[그럼 대체 어떻게…….]

“네드는 생각하는 게 참 귀엽거든요.”

[…….]

“그리고 네드, 그렇게까지 해서 나 쫓아내고 싶은 거면 얼굴 보고 직접 말해요. 굳이 자기 집에 있는 사람한테 밖에서 전화 걸고 그러는 거, 너무 비겁하지 않아요?”

뚝.

“이제 막 끊네?”

뚜르르르르르.

“음?”

뚜르르르르르.

“안녕, 네드?”

[누가 나가랬습니까? 내가 안 들어가겠다고 했지. 나가지 말고 내 집에 얌전히 들어앉아 있어요.]

뚝.

“하하,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갈 거였는데 귀엽게 굴기는.”

블러디 비트[51] 나이트

“늦는다더니 되게 일찍 왔네요?”

“생각해 보니 내일부터 주말이었습니다. 게다가 이틀 연속으로 위생 상태가 의심되는 바에 앉아서 죽치는 것도 생각 외로 스트레스가 심하더군요.”

“음, 내일이 주말인 건 일러진 퇴근 시간이랑 뭔가 상관관계가 있는 건가요?”

“주말을 앞둔 금요일은 일반적으로 시중의 위생 상태가 140퍼센트 정도 악화됩니다.”

“혈중 알코올 농도같이 주변의 위생 상태를 측정하는 능력이 있으시다니. 좀 대단하네요.”

“요는, 저는 금요일 저녁에 외출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평소보다 늘어나는 머릿수에 비례해서 더 지저분해지니까요.”

“그렇군요. 세상이 더 더러워지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게 전투적으로 칼질을 하시는 건가요?”

“그다지 전투적으로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평범하게 깍둑썰기 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칼날이 잘 안 드는 모양이네요. 새 식칼을 사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러다 다칠 수도 있잖아요. 아, 기왕 말 나온 김에 우리 같이 주방 용품 쇼핑할래요? 내가 사 줄게요.”

“밖에 나가기 싫어서 임대업까지 시작한 사람이 쇼핑은 간다는 겁니까?”

“세상에, 쇼핑을 왜 나가서 해요? 집에서 하면 되는 걸.”

“집에서…… 쇼핑을 합니까?”

“그럼요. 네드는 아마존 몰라요? 나 아마존 프라임[52] 써서 프라임 상품은 배송료 공짠데.”

“아마존이라니. 연간 부수입이 5,000만 달러나 되는 분이 왜 그런 데서 쇼핑을 합니까?”

“그런 데라뇨? 아마존은 인류의 보물이에요.”

“남아메리카의 아마존[53]이라면 맞는 말인 것 같기는 합니다만.”

“북아메리카의 아마존[54]을 말하는 거예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녁 메뉴는 뭔가요?”

“구운 비트 샐러드와 구운 농어 요리입니다.”

“죄다 구운 요리뿐이네요. 설마 디저트도 굽는 건 아니겠죠?”

“소르베[55]를 구울 수 있다면 구워 드리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재주가 없다 보니 안 굽습니다.”

“무슨 맛 소르베예요?”

“비트[56] 맛입니다.”

“왜 그런 짓을 하시는 거죠?”

“무슨 짓을 말하는 겁니까? 불청객에게 매일 저녁마다 정성 가득한 수제 요리를 먹이는 짓 말입니까?”

“비트로 소르베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인데 그걸 먹이려 들잖아요!”

“비트는 건강에 좋고 맛있기까지 한 훌륭한 재료입니다.”

“세상에……. 채소에 맛있다는 단어를 접붙이다니…….”

“어린애도 아니고 웬 음식 투정입니까? 직접 해결할 거 아니면 주는 대로 먹으세요.”

“하지만 네드,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의 미국인은 음식을 가려요. 한 98퍼센트 정도? 정부가 푼돈에 국민 건강을 팔아먹은 탓이죠.”

“국가 정책[57]에 문제가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 터무니없는 퍼센테이지의 근거는 대체 뭡니까?”

“감이요.”

“알겠습니다. 직접 요리할 게 아니면 주는 대로 입에 넣으세요.”

“좋아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앞으로 네드가 주는 건 뭐든 불평 없이 입에 넣을게요. 기대해도 좋아요. 난 옛날부터 입으로 하는 건 뭐든 잘하거든요. 특히 혀를 쓰는 건…….”

“…….”

“……음, 이번 건 내가 잘못했네요.”

“…….”

“앞으로 칼 들고 있을 때는 안 놀릴게요. 맹세해요.”

“…….”

“네드, 상비약 어디다 둬요?”

“……서재의 책상 서랍에 있습니다.”

“금방 가지고 올 테니까 흐르는 물에 씻어요.”

“저도 자상 드레싱 정도는 합니다. 구급상자나 가져다주세요.”

“미안해요. 그래도 비트가 원래 빨간색이라 다행이죠? 피 좀 흘렸다고 엄청 눈에 띄진 않으니까 그냥 먹어도 될 것 같잖아요.”

“새미, 당신 인격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굳이 더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소리 그만하시고 약이나 가지고 와 주시면 정말로 고마울 것 같습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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