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
“미스터 베넷, 아침입니다.”
“…….”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잠깐 일어나 보세요.”
“…….”
“5분이면 됩니다.”
“……으응.”
“제발, 3분만이라도. 다시 자게 해 줄 테니까 잠깐만요.”
“대체 뭔데 아침부터 그래요……? 자면서 들을 테니까 말하세요…….”
“…….”
“……닥터 와이트? 말하라니까요.”
“…….”
“하. 진짜 일어나기 귀찮은데…….”
“…….”
“알았어요. 나 눈 떴어요. 이제 뭔지 말해 보…… 어?”
“……아침 먹고 잠깐 올라올 테니까 그때 이야기합시다.”
“어디 가요? 들켰다고 냅다 도망치면 다예요? 먹고 튀는 거예요?”
“놔주시죠!”
“싫어요. 고개 돌릴 때까지 안 놓을 거예요.”
“절대 안 돌릴 겁니다!”
“왜 안 돌리는데요? 나한테 얼굴 못 보여 줄 이유라도 있어요?”
“……그런 거 없습니다.”
“있을 텐데요?”
“…….”
“와. 정말 어이없네요. 내가 뭐, 닥터 와이트를 괴롭히기라도 했어요?”
“…….”
“진짜 너무하신다. 잘 자던 사람 깨운 건 닥터 와이트면서 왜 그런 얼굴로 날 노려봐요?”
“노, 노려보는 거 아닙니다. 원래 이렇게 생겨 먹었습니다.”
“그럼 왜 도망치려는 건데요?”
“아무것도 아니라잖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왜 남의 얼굴 앞에 손을 대고 벌벌 떨고 있었던 거죠?”
“수전증이 있어서요.”
“거짓말. 만지려고 했으면서.”
“자는 사람 앞에 두고 그런 파렴치한 짓 안 합니다!”
“손이 내 뺨 근처에서 수전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만지려고 한 거 아니면 대체 왜 거기 있었던 건데요?”
“만지, 만지려고 한 게 아니라…….”
“아니라?”
“만지지 않으려고 한 겁니다!”
“……네?”
“그건, 만지지 않으려고 노력한 흔적이었습니다.”
“저, 닥터 와이트? 일단 진정하고 침착하게 생각한 다음 최소한 말이 되는 변명을 해 보는 건 어떨까요?”
“…….”
“자. 천천히 심호흡하시고요.”
“…….”
“이젠 빨개지는 대신 창백해지시네요. 숨 제대로 쉬고 있는 건 맞죠?”
“……쉬고 있습니다.”
“좋아요. 그럼 처음부터 다시 변명해 볼까요?”
“…….”
“입을 다물어 버리면 대화가 진행이 안 되거든요.”
“당신 자는 얼굴이…….”
“네, 저의 자는 얼굴이?”
“……잘못하면 손에 닿을 것 같아서, 만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알겠어요. 이해했어요. 그럼 우리 이제 표현을 좀 정확한 걸로 바꿔 봐요.”
“어떻게 말입니까?”
“‘에드먼드 와이트는 샘포드 베넷의 자는 얼굴을 만지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노력하는 모습을 들킨 게 부끄러워서 도망치려고 했다.’”
“소, 소, 손 좀 놔주…….”
“혈색은 돌아왔네요. 그런데 너무 많이 돌아온 것 같으니까 적당히 섞는 법을 배워야겠어요. 아까는 새하얗더니 지금은 너무 빨갛잖아요.”
“……그, 그건! 당신이 남의 손을 덥석 집어다 희롱하니까!”
“그 비싼 손 뺨에 좀 가져다 댄 것 가지고 희롱이란 말까지 들어야 하나요? 자는 사람 만지작거리려고 한 사람한테? 저런, 이젠 손가락까지 떠시네요. 가련하기도 해라.”
“제, 제발 그만……!”
“아, 강박증? 미안해요. 입에 넣으려고까지 한 건 아니었는데 장난이 너무 나갔네요……. 설마 나 때문에 또 샤워해야 하는 건 아니죠? 그럼 좀 미안한데.”
“…….”
“또 입 다무시네.”
“…….”
“알았어요, 알았어. 앞으로 조심하면 되잖아요. 너무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
“어쨌든, 닥터 와이트도 다음부턴 없는 수전증까지 만들어 내면서 자기 학대 하지 말고 만지고 싶으면 그냥 만져요. 이미 만져 봐서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누가 만지는 거 별로 신경 안 써요.”
“빌어먹을…….”
“왜 갑자기 욕을 하고 그래요?”
“…….”
“닥터 와이트, 출근하려면 반대쪽 문으로 나가야 하는데요.”
쾅!
“새벽부터 건강도 하시지.”
사랑의 시련
[미안해 샘. - 이고르]
[네드가 밤새도록 괴롭혀서 나도 어쩔 수 없었어……. - 이고르]
[난 진짜 아무 말 안 하려고 했거든? - 이고르]
[너한테 원한 사고 싶어 하는 멍청이가 세상에 어디 있겠냐고? - 이고르]
[나 여행 간다. - 이고르]
[당분간 연락 안 될 거임. - 이고르]
[둘 다 제발 나한테 연락하지 마. 씨발. 개 같은 자식들. - 이고르]
[아니, 방금 건 지워 줘. 씨발! 왜 안 지워지는 건데? 좆같은 아이폰! - 이고르]
[그래도 난 거짓말은 안 했어! 거짓말은 안 했으니까 정상 참작 해 줄 거지? - 이고르]
[새미, 우리 친구잖아? 나 용서해 줄 거지? - 이고르]
[안녕, 샘. 지금까지 좆같았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 이고르]
“뭐야, 이건?”
[메시지를 전송할 수 없습니다. 번호를 다시 한번 확인해 주세요.]
“나 참. 정상 참작을 원하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적어 놓고 튀어야 할 거 아니야?”
[메시지를 전송할 수 없습니다. 번호를 다시 한번 확인해 주세요.]
“하룻밤 사이에 번호까지 바꿨네?”
[메시지를 전송할 수 없습니다. 번호를 다시 한번 확인해 주세요.]
“……흠. 아무래도 불길한데?”
[메시지를 전송할 수 없습니다. 번호를 다시 한번 확인해 주세요.]
“뭐, 닥터 와이트야 살살 찔러 보면 뭔지 나오겠지.”
툭.
가십
“오늘은 아침 식사 되게 빨리 끝났네요? 오늘의 타임즈 지에 나온 어제의 세계는 재미가 없었나 봐요?”
“빨리 올라오려고 안 읽었습니다. 그보다 일어날 거였으면 같이 식사하러 내려가지 그랬습니까? 같은 집에 있으면서 매일 혼자만 아침을 먹는 것도 불편합니다만.”
“싫어요. 난 그렇게 부지런한 인간이 못 되거든요. 그보다 어제는 대체 몇 시에 들어온 거예요? 아침부터 할 이야기 있다고 깨워 놓고 도망가 버려서 하루 내내 궁금해 죽는 줄 알았는데 외박까지 하다니. 나 궁금하라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죠?”
“그런 거 아닙니다. 그저, 어제는 조금 놀라서…….”
“아침에 내가 손가락 먹으려고 한 것 때문에요?”
“…….”
“그게 아니면 고작 그걸로 아침부터 세운 게 부끄러워서?”
“……그런 적 없습니다.”
“제가 머릿속에 뇌 대신 타조 알을 넣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자꾸 왜 없었던 일로 만들려고 해요.”
“어쨌든,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어제는 일이 바빴습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이고르가 뭐라고 했기에 아침부터 날 깨웠던 거예요?”
“이고르가……, 뭐라고 합니까?”
“내가 말했잖아요. 그 새끼 입 싸다고. 뭔진 모르겠는데 이상한 메시지를 남기고 잠수 탔더라고요. 찔리는 게 있으니까 그런 짓을 한 거겠죠?”
“이야기가 있기는 하지만 별 내용 아닙니다. 오래 시간을 빼앗지는 않을 겁니다.”
“난 오래 걸려도 괜찮은데.”
“아닙니다. 길게 할 내용도 없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우리 꼭 여기 서서 말해야 할까요? 난 좀 앉고 싶은데.”
“그게, 제가 샤워를 안 해서…….”
“네? 아침에 샤워하고 나간 거 아니에요?”
“나갔다 왔잖습니까.”
“저, 2층에 아침 먹으러 내려갔다 온 거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나갔다 와서 더러워진 몸으로는 아무 데도 앉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평소엔 식사 끝나면 곧장 출근했던 겁니다. 어차피 나가는 길이기도 하고.”
“그랬구나. 그런데 닥터 와이트, 그 더러워진 몸이라는 표현이 굉장히 오해를 사기 쉽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어요?”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당신처럼 더러운 생각만 하고 살 리가 없잖습니까?”
“여기서 제일 음란한 건 닥터 와이트 같은데……. 뭐, 알겠어요. 앉히고 이야기했다고 샤워하고 나가야 하는 거면 어쩔 수 없죠. 금방 끝날 내용이라니까 서서 해요. 그래서, 무슨 이야긴데요?”
“당신한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좋아요. 무슨 부탁인데요?”
“이 이상, 날 당신 인생에 끌어들이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음? 하지만 닥터 와이트는 이미 내 인생에 어느 정도 들어와 계시지 않나요?”
“내 말은, 여기서 더 끌어들이지 말아 달라는 겁니다. 나가기로 한 날이 되면 나가 주세요. 저도 지금 열심히 다른 집을 찾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바로 튈……, 나갈 수는 없지만 최대한 빨리 준비하고 있으니까 협조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런. 갑자기 심각해지셨네요. 이고르가 뭐라고 했길래 집까지 찾아보고 있는 거예요?”
“글쎄요. 누구에게 들었는지 가르쳐 드릴 수는 없지만 요즘 세간에 몹시 흉흉한 가십이 떠돈다더군요.”
“어떤 흉흉한 가십이 떠도는 걸까요?”
“제가 들은 건 두 가지입니다.”
“그럼 하나씩 가 봐요.”
“첫 번째는, 미스터 베넷이 전 약혼녀분의 화가 난 가족들 마음에 쏙 들 새로운 정략결혼 상대를 데리고 갈 테니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는 내용입니다. 대신 미스터 베넷의 깨어진 정략결혼은 형제분이 하게 될 거라고 하던데, 거기까지는 내부 사정이라 확실하지 않은 모양이더군요.”
“그렇군요. 내부인인 제가 확인해 드릴게요. 그건 가십이 아니라 진실이에요. 가족들한테 리즈를 대신할 사람을 데려갈 테니 기다리라고 했어요. 리즈는 나 대신 형이랑 결혼할 예정이고요. 사실 그거 때문에 렉스가, 형이 날 노리는 거예요. 둘은 옛날부터 사이가 나빴어요. 그래서 렉스가 대가로 내 손모가지 하나쯤은 받아야 한다고 난리라 얼굴도 이렇게 된 거고요. 좀 귀찮은 사람이죠?”
“아니, 귀찮고 말고를 떠나서 그렇게까지 사이가 안 좋은 사람들을 결혼시키면 어떡합니까?”
“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아무리 정략이라지만 결혼이 싫어서 동생 손목을 잘라 가려고 할 정도로 서로 싫어하는 사람들을 결혼시킨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저는 닥터 와이트가 하고 싶은 말이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는데요. 렉스랑 리즈가 결혼하는 게 뭐가 어때서요?”
“그러니까, 사이 나쁜 두 사람을 억지로 결혼시키면 두 사람의 미래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들의 미래도 암담해지기만 할 게 틀림없고…….”
“하지만 세상의 모든 부부들이 대체로 사이 나쁘잖아요?”
“…….”
“사이좋은 부부라는 게 존재하긴 해요? 난 뭐 래플리컨이나 유니콘 같은 건 줄 알았는데.”
“…….”
“생각해 보세요. 불행한 결혼 생활을 보내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결혼하지 않는 거란 말도 있을 정도라고요. 걱정하는 만큼 시간 낭비예요. 게다가 원래 정략결혼이 연애결혼보다 더 오래가는 법이라고요. 서로 잃을 게 얼마나 많은데 그걸 깨겠어요?”
“그 정략결혼을 한 번 깬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에 위인을 인용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버나드 쇼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 사람 내가 알기론 모욕당하는거 좋아했는데요. 어쨌든, 엄밀히 따지면 깬 건 내가 아니라 리즈가 깼죠. 게다가 리즈한테는 백업이 있었잖아요? 그냥 깨지고 끝날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럴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 형이 당신 정략결혼이 깨졌을 때를 대비한 백업 플랜이었단 말입니까?”
“네.”
“……본인의 가족을 좀 더 소중히 여기면 안 되는 겁니까?”
“내 가족들도 내가 그들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만 날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그 조언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설마 당신도 수틀리면 그들의 손목을 노리겠다는 뜻은 아니겠죠?”
“하하, 닥터 와이트는 재미있는 말을 하네요. 난 손목처럼 귀여운 건 안 노리죠. 내가 막내인데 여기서 더 귀여우면 어떡해요?”
“…….”
“그래서, 쥐새끼 같은 이고르에게 들은 두 번째 가십은 뭔가요?”
“……두 번째는, 미스터 베넷이 화가 난 가족들 마음에 쏙 들 만한 정략결혼 상대를 찾아냈다는 겁니다. 직업은 사업가라고 하더군요. 물리적으로 따져서 말이 안 되는 소리죠. 미스터 베넷은 전 약혼녀분과 깨진 뒤로 매일같이 저만 만났고, 심지어 최근에는 제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으니까요.”
“그게 말이 안 되는 가십인가요?”
“안 돼야 합니다. 그 흉흉한 가십이 더 커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부디 기한을 채우면 각자 자기 인생을 살았으면 합니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이고르 그 새끼가 닥터 와이트한테 죄다 고자질했다는 거네요.”
“정보원의 안전을 위해 묵비권을 행사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고르가 범인인 건 사실입니다.”
“이고르는 다 좋은데 입이 싸서 탈인 녀석이죠. 게다가 가끔 거짓말도 하고요.”
“두 번째는 거짓말이란 뜻입니까?”
“궁금한가요?”
“……아뇨, 됐습니다. 나가는 날이나 잘 지켜 주세요. 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아, 벌써 5분 다 됐네요. 우리 이야기 끝난 거죠?”
“네. 그리고 나가는 날은 꼭 지켜 주…….”
“닥터 와이트, 분명 외출할 때는 손만 깨끗하면 된다고 했죠? 다른 곳은 어느 정도 포기하고 있다면서요?”
“분명 그렇게 말하긴 했습니다만, 갑자기 그건 왜……, 헉!”
“잘 다녀와요.”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샤워하지 말고 그냥 나가요. 고작해야 가벼운 키스잖아요. 생화학 테러가 아니니까 괜찮을 거예요. 아, 그리고 손 더럽혀지는 게 제일 싫다고 해서 입술에 했어요. 입술은 괜찮은 거 맞죠?”
“…….”
“왜 출근 안 하고 거기 멀뚱하니 서 있어요? 아쉬워요? 혀도 넣어서 다시 해 줄까요?”
“…….”
“닥터 와이트, 대답 좀 해요. 닥터 와이트? 나갈 때 나가더라도 문은 닫고 가야……, 그래요. 내가 닫을게요.”
달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