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31)

직업 정신

“그런데 닥터 와이트는 매일 같은 시간에 나가서 어디에 가는 건가요?”

“너무 당연한 질문을 해서 당황스러울 지경이군요. 당연히 일하러 나가는 겁니다.”

“하지만 진료는 안 하고 경영만 하신다면서요? 엄밀히 따지면 나도 CEO인데 출근 같은 거 안 하거든요. 서비스 아파트먼트 임차 사업 CEO.”

“모든 CEO가 당신처럼 방만하게 경영한다면 지구상의 비즈니스는 지금보다 더 엉망진창일 겁니다.”

“나 경영 엄청 잘해요. 내 연 수입 되게 높거든요. 얼만지 궁금해요?”

“가구당 렌트 평균 내면 4만 달러 정도에 나처럼 옵션 비용 내는 것도 따지면 가구 수로 계산해서 월 최소 500만[36]쯤 되겠군요. 연간 6,000만 달러쯤이겠네요. 거기서 실질적으로 빠지는 비용 생각하면 연 수입은 한, 3,000만 정도 됩니까?”

“와. 진짜 계산 빠르시네? 그런데 사실 그보다 좀 더 돼요. 작년 순수익만 5,000만[37]은 넘는걸요.”

“……정말 경영하는 게 이 건물 하나밖에 없는 거 맞습니까?”

“당연하죠. 내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 것도 아닌데 귀찮게 다른 건물을 왜 경영해요? 난 집은 편하고 아늑한 곳 한 군데면 충분하다는 주의거든요.”

“정말 놀랍군요. 아무리 로열 마케팅이 유행이라지만 이 터무니없는 렌트비 책정에도 빈집이 없는 것부터 그렇고…….”

“하하. 닥터 와이트 같은 소수의 수요를 잘 공략한 거죠.”

“거짓말 마시죠. 본인의 게으른 니즈를 충족시키다 얻어걸린 거 다 압니다.”

“알겠어요. 거짓말 안 할게요. 어쨌든 임대업이 예상과 달리 성공해 버려서 평생 먹고살 걱정은 없다고 볼 수 있어요. 게다가 이건 내가 살기 위해서 시작한 거라 일종의 기대하지 않은 부수입 같은 거고, 진짜는 다른 데 있거든요.”

“무슨 진짜가 있단 겁니까?”

“내 재산요.”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가 되는지 쫓아갈 수 없습니다만? 뜬금없이 돈 자랑이라도 하려는 겁니까?”

“자랑이 아니에요. 굳이 따지면 자기 어필 같은 건데.”

“미스터 베넷의 재산이 나한테 무슨 어필이 되는데요?”

“지금부터 그걸 알아보려고요.”

“……이해할 수 없네요.”

“일단 들어 보세요. 나 사실, 가족 사업 합법화하면서 챙긴 게 꽤 되거든요.”

“가족 사업이라고 하시면, 그 스펠링 M으로 시작하는 분들 말하는 겁니까?”

“그렇죠!”

“마약 제조, 마약 거래, 인신 매매, 무기 밀거래 같은 걸로 사업하시는 분들요?”

“하하, 요즘은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그러니까, 그쪽 사업을 합법화하면서 대체 뭘 챙겼다는 겁니까?”

“그야, 이런저런 사업을 양지로 옮겨 오는 과정에서 돈세탁[38] 수수료를 챙겼죠.”

“……뭐라고요?”

“아, 모르셨어요? 저 변호사거든요.”

“네?”

“직업 변호사라고요.”

“…….”

“로스쿨도 컬럼비아에서 나왔어요. 그러고 보니까 신기하네요. 우리 계속 같은 도시에 살았고 같은 대학까지 다녔던 거잖아요. 그런데 대학 시절에 로스쿨까지 합쳐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네요. 그런데 내가 변호사인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다들 잘 어울린다고 하던데.”

“그, 잘 어울리는지 아닌지를 따지면 어울리긴 합니다만……. 다른 것도 아니고 변호사라니……. 대체 왜 변호사가 자기 건물 임차 계약서를 로펌에 맡기는 겁니까?”

“로펌 CEO들도 변호사지만 변호 안 하고 경영하는 거랑 비슷하죠?”

“당신은 로펌 CEO가 아니라 건물 임대 사업자잖습니까?”

“그러니까 계약서 문제는 로펌에 맡기고 임대업만 하는 거죠.”

“그 임대업도 다른 사람들한테 떠넘기고 있으면서 무슨 소립니까?”

“그야, 임대업은 처음부터 돈 벌려고 시작한 것도 아닌데 열심히 일해서 뭐 해요?”

“변호사는 뭡니까? 변호 안 하는 이유도 있습니까?”

“정의 구현 같은 건 원래 관심 없고, 게다가 변호사는 원래 정의 구현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클라이언트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이잖아요. 재미없으니까 안 하는 거죠.”

“아니, 그런 사고방식으로 로스쿨엔 왜 간 겁니까?”

“로스쿨 잘 다니고 변호사 자격 따 오면 사업 합법화할 때 돈세탁 수수료 40퍼센트 챙겨 주겠다고 꼬드기더라고요.”

“그러니까, 가족들이 말입니까?”

“네. 닥터 와이트는 잘 모를 수도 있지만 돈세탁 수수료는 평균적으로 20에서 30퍼센트 정도예요. 거의 사기 수준으로 뜯으면 35퍼센트 정도고요. 그런데 40퍼센트를 준다잖아요? 당연히 혹하죠.”

“……하지만 범죄잖습니까?”

“혈연에 친지가 죄다 마피아인데 고작해야 돈세탁을 가지고 합법 불법을 따질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죠?”

“그렇기는 하지만…….”

“사실 가족들 입장에서도 사람 잘못 썼다가 합법화 과정에서 당국에 걸리고 다 쓸려 나가는 것보다는 나은 데다, 내가 직접 하면 사기 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도 있어서 윈-윈이었어요. 좋은 거래였죠.”

“당신이라는 사람은 대체 어디까지 바닥을 보여 주려는 겁니까? 그리고 왜 그렇게 솔직한 겁니까? 보통 그런 건 좀 더 철저하게 숨겨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닥터 와이트에게는 솔직하고 싶었어요.”

“제발 그러지 말아 주시죠…….”

“어쨌든, 조금 노력해서 한탕 뛰고 평생 편하게 먹고살 수 있다는데 혹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요? 게다가 저는 굉장히 유능해서 세차장이나 현금만 받는 로컬 레스토랑이나 자동판매기나 게임 센터같이 찔끔찔끔 들어오는 거 말고, 옆 동네 월 스트릿에서 제대로 해 먹었죠.[39]”

“그걸 준법 시민들은 금융 사기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만?”

“하하, 월 스트릿에 있는 금융 회사들이 늘 하는 짓인데요, 뭘. 저번 달에는 합법이었다가 이번 달에는 불법이었다가. 쫓고 쫓기는 괴상한 금융 사기에 슬쩍 얹혀 간 것뿐이죠.”

“설마 요즘 마피아들이 전부 당신 같은 건 아니겠죠? 이 나라는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겁니까?”

“닥터 와이트도 참. 저는 마피아가 아니라니까요.”

“지금 마피아 밑에서 돈세탁을 했다고 자백하신 것 같습니다만?”

“제삼자에게 맡기기 곤란한 가족 사업을 조금 도와준 대가로 약소한 수고비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한 거죠. 더 정확하게는 모아 놓은 재산이 있으니까 앞으로 먹고살 걱정은 없다는 이야기를 한 거고요. 정말 좋은 배우잣감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대로 감옥에 들어가서 재산만 남겨 준다면 좋은 배우자가 될 가능성도 없진 않겠습니다.”

“안타깝네요. 요즘은 이런 걸로는 감옥 못 가요. 잡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요. 신문 되게 열심히 보시던데 금융 지식은 별로 없나 봐요? 하기야, 그 바닥이야 워낙 복잡한 개판인 데다 너무 자주 바뀌고 계속해서 새 사기 수단을 만들어 내니까 따라잡기 어렵긴 해요.”

“월 스트릿이 사기꾼 집합소라는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미스터 베넷도 그 일부라는 점을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럴게요. 별로 어려운 부탁도 아닌데 당연히 들어 드려야죠.”

“저는 고작 몇 마디 말로 사람을 지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신한테 존경심마저 들 지경입니다…….”

“과찬이세요. 변호사가 원래 그런 직업인걸요.”

“하…….”

“그건 그렇고, 닥터 와이트.”

“이번엔 또 뭡니까?”

“혹시 저한테 100달러만 주실 수 있을까요?”

“……갑자기 무슨 헛소립니까? 방금 전까지 돈 많다고 자랑하다 왜 갑자기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빌려 달라는 게 아니라 그냥 달라고요?”

“네. 그게, 제가 닥터 와이트한테 수임료를 받으면 제 의뢰인이 되거든요. 그러면 변호사-고객 간의 비밀 보장 의무[40]가 생기니까 빌리는 게 아니라 받아야 해요.”

“…….”

“우리 여기서 나눈 대화는 밖으로 가져가지 않기로 해요.”

“…….”

“혹시라도 닥터 와이트가 조직의 비밀을 알게 됐다는 이유로 내 가족한테 끌려가는 불상사가 생기면 안 되니까요. 닥터 와이트를 위한 보험 같은 거라고 생각해 주세요.”

“…….”

“어, 그런데 왜 두 장이나 줘요? 난 100달러면 충분한데.”

“팁입니다. 다 가지시죠.”

“고마워요! 그럼 이걸로 퍼니언즈[41]랑 애니멀 쿠키[42] 사 먹을게요.”

이성과 감성[43]

“이봐요.”

“네, 닥터 와이트.”

“사람을 한 시간 내내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는 건, 사회적 사인을 고려했을 때 보통 시비를 거는 거라고들 받아들입니다.”

“사회적 사인이라니! 닥터 와이트는 가끔 꼭 인문학도처럼 말하시네요.”

“지금 나한테 덴티스트인 주제에 감성적이라고 시비 거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되게 억울하게 매도하시네요. 게다가 인문학도에 대해 편견적이시기까지 하고. 오히려 바디랭귀지를 사회적 사인으로 받아들이는 점에 있어서 과학적이라고 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 것치고는 전혀 억울해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래요? 어쨌든 저는 계속 웃고 있었는데 그게 어떻게 시비가 되나요?”

“비웃는 걸 수도 있잖습니까?”

“닥터 와이트, 전 사람을 비웃는 것처럼 쓸데없는 곳에 시간 낭비할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에요.”

“미스터 베넷의 유니버스에서 한 시간 내내 절 쳐다보며 웃기만 하는 걸 시간 낭비라고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이 더 충격적입니다만.”

“오, 멋있네요. 저한테도 따로 유니버스 같은 게 있나요? DC[44]나 마블[45]처럼?”

“부디 없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런 세계관에서 사느니 토마스 모어[46]의 유토피아[47]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혀 노예가 되는 편이 나을 테니까요.”

“닥터 와이트.”

“뭡니까?”

“이번엔 정말 진짜 인문학도 같았어요.”

“…….”

“어쨌든 비웃은 건 아니에요. 저는 다른 사람을 비웃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거든요. 비웃을 수 있을 만큼 자세히 알아 가는 과정도 보통은 시간 낭비고요.”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야 내 집에서 뒹굴거리는 것밖에 없는 사람이 한가한 게 아니라는 겁니까? 한 시간 내내 날 쳐다보면서 용건 없이 웃기만 하는 게 시간 낭비가 아니고요?”

“네. 그건 다 필요에 의해서……, 잠깐만요. 그런데 닥터 와이트는 닥터 와이트가 나간 뒤에 내가 뒹굴거리는지 데굴거리는지 직접 본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아시죠?”

“직접 봤으니까 아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않은데요? 대체 어떻게 아는 거예요?”

“이렇게 압니다.”

“……이럴 수가. 세상에 자기 집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저는 자기 집이 아닌 곳에 쥐새끼처럼 몰래 설치하는 거야말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지만……. 그걸 왜 핸드폰으로 볼 수 있는 거죠?”

“왜냐니요. 그게 경비 업체에서 제공하는 서비스의 일환인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지금까지 닥터 와이트는 밖에 나가서도 내가 뭘 하는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는 건가요? 내가 씻고 옷을 갈아입는 것부터 시작해서, 소파에서 뒹굴거리다가 서재를 어지럽히고 다시 정리하다가 원래 자리가 어딘지 잊어버려서 도서 십진법[48]에 따른 분류로 완벽한 순서를 맞춰 놓는 걸 전부 다요?”

“……왜 남의 서재에 있는 책을 죄다 꽂았다 뽑는 건가 했더니 그런 짓을 하고 있었던 겁니까? 순서가 기억 안 나면 그냥 아무 데나 두세요. 서재를 죄 뒤집는 것보다 한두 권쯤 방치해 두는 게 낫습니다.”

“하지만, 닥터 와이트는 강박증이라면서요?”

“제 강박증은 도서 십진법으로 분류되어 있으면 만족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제기랄, 다 보고 있었으면 좀 빨리 가르쳐 주시지 그랬어요…….”

“왜 그러는 건지도 몰랐는데 가르쳐 주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었겠습니까?”

“닥터 와이트가 눈치 없는 덕분에 닥터 와이트의 서재는 도서 십진법으로 분류됐어요.”

“그것참……, 쓸데없고 감사한 일이로군요. 그리고 여전히 놀라울 만큼 한가해 보입니다.”

“저는 나름대로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한 시간 내내 날 쳐다보면서 비웃느라 바빴다는 건 아니겠죠?”

“그것도 절 바쁘게 만드는 일 중에 하나긴 했죠. 그리고 비웃은 거 아니라니까요. 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요즘 제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닥터 와이트인데.”

“…….”

“게다가 좋아했잖아요. 내가 쳐다봐 주는 거.”

“……대체 누가 좋아했다는 겁니까?”

“나랑 눈 마주치고 웃어 줄 때마다 닥터 와이트가요.”

“착각입니다.”

“표정 관리 안 돼서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리셨는데요.”

“화가 나서 그런 걸 수도 있잖습니까?”

“만약에 그런 얼굴로 화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어떤 면에서 놀랍네요. 혹시 닥터 와이트는 화가 난다는 감정이 뭔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요? 행복하고 기쁘다는 거랑 반대로 알고 있다거나?”

“……한가하게 남의 입꼬리나 관찰하고 말꼬리 잡는 성격 나쁜 사람한테는 누구든 화날 겁니다.”

“전 닥터 와이트보고 화내지 말라고 한 적은 없어요. 닥터 와이트가 얼마나 내 얼굴이 마음에 들었으면 지난 한 시간 내내 좋아 죽겠는데 티 내기 싫어서 숨기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 것뿐이죠.”

“빌어먹을, 당신은 내가 당신 얼굴을 찬양하는 소네트[49]라도 지어다 바치길 바라는 겁니까?”

“네?”

“그 망할 눈동자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단정한 이마가 얼마나 완벽한지, 날카로운 콧대나 육감적인 입술이 황홀하다는 것 따위로 시라도 지어야 하냐는 뜻입니다!”

“……어, 글쎄요?”

“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 건지 말로 하시죠!”

“그럴게요. 일단 확실한 점 하나는……, 전 문학에 관심 없어서 소네트까지 지어 오실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껏 살면서 내 외모에 대해 이렇게까지 자세히 찬사한 사람은 닥터 와이트가 처음이라 놀랍긴 하네요.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신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요.”

“…….”

“그런데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마음에 들어 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요…….”

“…….”

“저런, 아직 8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 자러 들어가나요?”

“…….”

“아니면 오늘도 즐거운 자기 위로 시간을 보내게요?”

“닥치고 일찍 처자세요. 아침에 못 일어나서 배고프다고 징징거리지 말고.”

“네. 닥터 와이트도 들어갈 때 침실 문은 부드럽게 닫아 줘요.”

달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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