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흉
[오, 새미! 네가 먼저 전화를 다 하는 날도 있네. 뭔 일 있냐?]
“이고르, 네가 추천해 준 테라피스트 말인데.”
[네드? 근데 내가 언제 네드를 테라피스트라고 했었냐?]
“아직 그렇게 부를 만큼 친해지지는 않아서 닥터 와이트라고 부르고 있어. 좀 더 친해지면 애칭도 도전해 보도록 할게.”
[넌 안 친해도 막 부르지 않았냐? 그리고 네드는 닥터 아니라니까?]
“닥터 와이트가 낯을 가리는 것 같아서 배려하는 중이지.”
[……사람 직업을 막 바꾸는 게 배려라는 건 둘째 치고, 네드가 낯을 가린다고?]
“그렇던데.”
[‘그’ 에드먼드 와이트가?]
“그랬다니까?”
[그 인간이 절대로 그런 인간이 아닌데……. 혹시 금발에 파란 눈에 키는 나랑 비슷하고 너네 건물에 사는 에드먼드 와이트가 둘이나 셋쯤 되는 건 아니지?]
“내가 확인한 바로는 한 명뿐이었어.”
[그러냐…….]
“어쨌든, 닥터 와이트한테 협조를 얻으려면 어떻게 환심을 사는 게 좋을까?”
[이도 튼튼한 놈이 치과 의사한테 환심 사서 뭐 하게?]
“하하, 넌 내일 확실하게 죽을 예정이라서 사망 보험 넣어?”
[……죄 없는 네드한테 깔작대지 마. 그냥 얌전히 네가 다 망쳤다는 거 인정하는 게 낫지 않냐? 가족들한테 먼저 머리 숙이고 들어가서 당분간 납작 엎드리든지. 너 어차피 인생에 목표 같은 것도 없잖아. 애쉬처럼 배우가 하고 싶어 죽겠다거나, 조쉬처럼 막 사는 게 좋아서 자유를 위해 지분도 포기하고 그런 것도 아니면서 왜 어쭙잖은 반항을 해?]
“나도 인생에 목표 있어.”
[뭔데?]
“게으르게 살다 평화롭게 죽는 거.”
[…….]
“게다가 내 쪽에서 숙이고 들어가 봤자 이번에야말로 뼈까지 발라 먹으려고 들 게 정해진 결말인데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하겠어? 네 말처럼 시키는 대로 살아도 봤지만 결국 리즈랑 잘 안 됐잖아.”
[그건 너한테 문제가 많아서였지 리즈나 너네 가족 탓은 아니잖냐? 넌 가족이니까 좀 봐주시겠지.]
“이고르, 네 눈에는 그 사람들이 가족이 상대라고 봐줄 만큼 너그러워 보여?”
[난 네 가족이 아니라 모르겠는데?]
“그 사람들이 가족한테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지? 내가 너랑 결혼해서 우리 가족을 너희 가족으로 만들어 줄까?”
[……부탁이니까 그렇게 살벌한 말은 농담으로라도 하지 말아 주면 안 되겠냐?]
“나도 부탁이니까 가족이라고 봐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는 농담으로라도 하지 마.”
[안 하면 되잖아! 근데 너 설마 리즈한테 차인 것 때문에 수습하려고 네드한테 집적대는 건 아니지? 그건 아무리 너라도…….]
“그럼 안 돼?”
[……야, 그건 아무리 너라도 좀 심하게 인간쓰레기 같거든?]
“그렇게 태어난 걸 새삼스럽게 들으니까 쑥스럽네.”
[아니, 야, 잠깐만! 너 진짜 네드한테 집적대고 있었던 거냐?!]
“네가 말해 줄 때까진 몰랐는데, 생각해 보니까 집적대고 있었던 것 맞기는 해. 그런데 너도 알잖아? 나 남자한테 관심 없어.”
[말은 바로 하지 그래? 넌 여자한테도 별로 관심 없었잖아.]
“너야말로 말 바로 해. 나는 사람한테 별로 관심이 없어.”
[자랑이다, 자랑이야. 그러면 네드한테도 관심 안 두는 게 서로를 위한 일 아니냐?]
“서로, 누구?”
[글쎄……. 너 빼고 모든 인류?]
“그럼 닥터 와이트 대신 너한테 관심 가져 볼까? 내 생각에 너도 꽤 쓸모 있어 보이거든. 너 내가 리즈랑 왜 약혼했는지 기억하지?”
[야, 잘됐네! 네드 취향이 딱 너거든? 물론 네 정신머리에 문제가 많긴 하지만 네드가 의사잖냐? 치과 의사도 의사는 의사지. 그러니까 어떻게든 해 줄 거야. 너 같은 얼굴이 흔한 것도 아니고. 더 찾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있는 거 주워다가 고쳐 쓰면 되는 거지! 네드도 잘됐네! 이상형한테 집적임도 받아 보고!]
“우리의 행복을 빌어 줘서 고마워. 넌 진정한 친구야.”
[……새미, 너 비꼬기가 무슨 뜻인지 알지?]
“남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기 위해 빈정대는 거?”
[아는데 왜 모르는 척하냐?]
“네가 무시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면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야.”
[하여튼 개자식…….]
“리즈도 마지막에 꼭 너처럼 말하고 갔는데…….”
[걘 그럴 자격 충분하지.]
“내 생각도 그래. 그래서 찍소리 안 하고 다른 방법을 찾고 있는 거잖아. 근데 넌 그런 자격 없지 않나? 혹시 잠재의식 속에서 줄곧 나랑 리즈만큼 친밀한 사이가 되고 싶었던 거야?”
[……목소리 톤도 안 바꾸고 협박하는 거 좀 그만하면 안 되냐? 나 진짜 무섭거든? 인생 소중한 줄 모르는 너 같은 자식이 나 엿 한번 먹여 보겠다고 진짜 청혼이라도 할까 봐 소름 돋거든?]
“걱정하지 마. 지금 네드한테 집적대느라 바빠서 너한테 그럴 여유 없으니까. 나중에 생각이 바뀔 수도 있긴 하지만.”
[씨발! 바꾸지 마! 절대 바꾸지 말고 네드한테 들러붙어!]
“말버릇 한번 상스럽기는. 어쨌든 닥터 와이트 소개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어떻게 하면 호감을 살 수 있을지, 조언하는 김에 더 자세히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저기, 새미? 너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데, 난 네드를 너네 건물 입주민으로 소개했던 거지 다른 용도로 쓰라고 한 적 없거든? 게다가 그건 3년도 더 전이라고!]
“다용도로 쓸모가 있다는 건 그 사람한테도 좋은 일이잖아?”
[너같이 피도 눈물도 없는 개자식한테 이용당하는 게 좋은 일이면, 미친놈아, 세상에 안 좋은 일이 없겠다!]
“하지만 닥터 와이트는 진심으로 날 좋아하잖아. 리즈처럼 잘 참으면 내 재산을 떼어다 받을 것도 아니면서 리즈보다 잘 참더라고.”
[너, 리즈가 그 돈으로도 결국 못 참고 널 죽여 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다 청부업자까지 고용할 뻔한 거 기억하지? 며칠 전 일인데 잊어버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뭐…….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생기고 저런 일도 생기는 법이잖아?”
[그 일이 너한테는 있을 만한 일이냐?! 넌 거기서 아무런 교훈을 못 얻었어?!]
“다음부터는 쓸데없이 노력해서 기대치를 올리지 말고 내 본성까지 전부 포용해 줄 수 있는 사람과 정략결혼 하자?”
[……허.]
“근데 리즈는 나보고 불쌍한 여자 인생 망칠 생각 말고 혼자 늙어 뒈지라더라.”
[나도 거기 한 표.]
“그래서 망치는 인생이 여자 게 아니면 되는 건가 생각했지. 예를 들면, 남자 인생 같은 거 말이야.”
[야……. 너, 그거 완전히……!]
“생각해 보니까 나는 꼭 애칭을 불러야 한다면 네드보다 에디가 더 마음에 들긴 해. 네드는 닥터 와이트의 애칭으로 쓰기엔 너무 쿼터백[22] 같은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이미지는 인텔리한 에디인데 어쩌다 네드가 된 거래?”
[야, 그 인간 대학 리그에서 뛰었던 진짜 쿼터백이었거든?]
“풋볼 하는 사람이었다고?”
[쿼터백을 그런 식으로 설명하는 건 너뿐일 거다…….]
“어쨌든 조건은 괜찮으니까 한번 집적여 보고 있었어. 네 말대로 되게 얼굴에 약하긴 하더라. 화낼 것처럼 굴다가 얼굴 한 번 쳐다보고 그냥 입 다물어 버리는 게 너무 노골적이던데?”
[너 같은 놈 눈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불쌍해 죽겠는데 최소한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제대로 알아보고 관심 가져 줄 생각은 없는 거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인다는 증거로 매일 아침 상담 세션을 이어 나가고 있잖아.”
[테라피스튼지 뭔지 하는 헛소리는 왜 지껄여 대나 했더니, 정말 너라는 인간은…….]
“그래서, 닥터 와이트가 뭘 좋아한다고?”
[니 얼굴, 싸이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