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쿼시[14]
“미스터 베넷, 슬슬 진짜 테라피스트를 찾아가는 게 어떻습니까? 이런 식으로 매일 아침 저만 괴롭히면서 살아갈 수는 없을 텐데요.”
“와, 닥터 와이트. 오늘은 두 시간 만에 처음으로 나한테 대답해 준 거 알아요?”
“두 시간인지 세 시간인지 세지는 않았지만 오늘 처음 대답했다는 건 압니다.”
“무시가 특기신가 봐요. 정말 훌륭한 무시 능력이시네요.”
“조상 중에 영국인이라도 있습니까? 왜 그렇게 음침하게 돌려 말합니까?[15]”
“아마 되짚어 보면 어디선가는 유럽 이민자 출신인 조상이 나오겠지만 꼭 그래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동부 출신은 다 이런 식으로 말할걸요.”
“쯧. 전부터 말씀드렸지만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건 정치적으로 옳지 못합니다.”
“저는 리버럴[16]들의 PC[17]함에 유감이 많은 사람이라서요.”
“어째서죠?”
“저희 부모님이 공화당 지지자시거든요.”
“저런…….”
“공화당 지지자라고 해서 나쁜 일만 생기는 건 아닌데요.”
“하지만 여긴 뉴욕이잖습니까?[18]”
“어퍼 이스트 사이드인데요.[19]”
“됐습니다. 그래서, 테라피스트는 찾기 시작했습니까?”
“아니요. 아직 닥터에게 희망을 걸고 있어서요. 전 옛날에 학교 다닐 때도 이렇게 부지런했던 적이 없는 사람인걸요.”
“혹시나 해서 묻는 겁니다만, 어릴 때 홈스쿨링이라도 했습니까? 학교는 보통 평일에는 거의 매일 나가야 하는 걸로 아는데요?”
“그렇긴 하죠…….”
“설마 대학을 말하는 겁니까?”
“대학으로 해 두는 게 닥터 와이트가 안심이 된다면 그렇다고 쳐도 괜찮아요.”
“……미스터 베넷이 학교를 잘 갔든 안 갔든 제가 괜찮거나 안 괜찮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니죠. 우리 사이니까 그 정도는 영향은 받을 수 있어요.”
“일단 정확히 해 두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우리’라는 말로 묶을 만큼 미스터 베넷과 저는 가까운 사이가 아닙니다. 정말이지,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섭섭하게 왜 그러세요? 대학 동문이잖아요.”
“이런 데서 의미 없이 반지 내밀지 마세요. 대체 누가 평소에 대학 반지[20]를 끼고 다닙니까?”
“반갑지 않아요? 저도 어제 찾아냈어요. 버리진 않았으니까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까 정말 있더라고요. 놀랍지 않나요?”
“아직도 가지고 있는 건 놀랍지 않지만 끼고 다니는 건 굉장히 놀랍습니다. 경악스러운 수준으로요.”
“닥터 와이트도 같이 껴요. 커플링 같고 좋지 않나요?”
“미쳤습니까?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 그런 무서운 소릴 합니까?”
“아, 커플링을 끼려면 먼저 커플이 돼야 하는 거죠?”
“그런 문제가 아니라, 1년에 어림잡아도 천 명씩 늘어나는[21] 커플이 세상에 어디 있답니까?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루에 세 명씩만 만나도 1년은 걸리겠습니다?”
“휴, 누가 닥터 아니랄까 봐 바로 산수부터 시작하시네요. 알겠어요. 그럼 다른 반지 준비할게요.”
“그러니까, 우린 반지를 나눠 낄 사이가 아니라는 말을…….”
“앗! 아까는 우리 아니라더니 이젠 우리가 됐네요?”
“……잠깐만요. 설마 내가 미스터 베넷의 개소리를 참지 못하고 분노 조절 장애에 걸려서 유능한 테라피스트를 만나러 가면 그 사람을 가로챌 생각으로 매일 아침 식사 시간에 맞춰서 괴롭히러 내려오는 건 아니겠죠?”
“와우. 닥터 와이트는 생각보다 똑똑하네요. 전 그런 방법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껄이는 겁니까?”
“이론적으로 말하면 그렇게 돼요.”
“이론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무 생각 없이 지껄이고 있어요.”
“젠장, 당신이 왜 그 재산을 가지고도 약혼녀한테 차였는지 알겠습니다. 나 같아도 당신 같은 인간이랑 결혼식장에 들어가라고 하면 차라리 내 머리에 총을 쏠 테니까요.”
“하하, 연방 법원에서 동성혼을 허용해서 참 다행이죠? 닥터 와이트는 결심만 하면 저랑 결혼식장에 나란히 걸어 들어갈 수 있어요.”
“하. 내가 분명 얼굴 믿고 으스대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요?”
“미안해요……. 이고르가 게이 조크로 분위기를 띄우라고 조언해서 한번 따라 봤는데, 정말 쓸모없는 조언이었네요.”
“안타깝지만 게이 조크는 게이만 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치면 차별적인 조크가 되는 거고요.”
“헉, 정말로 그런가요?”
“내가 미스터 베넷한테 거짓말을 해서 얻는 게 있을 것 같습니까?”
“글쎄요……? 저는 이따금 얻는 게 없어도 그냥 재미로 거짓말을 하니까 거기까진 모르겠어요.”
“……재미로 거짓말하고 다닌다는 건 자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사람들은 그런 짓 안 하고요.”
“닥터 와이트는 지금 제 주위에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건가요?”
“그렇게까지 비약하지는 말아 줬으면 합니다.”
“뭐, 대충 맞는 말이니까 괜찮아요. 이고르도 있고.”
“……이고르는 제 주변인이기도 합니다만.”
“닥터 와이트도 있네요.”
“…….”
“하지만 전 닥터 와이트는 비교적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날 누구랑 비교했는지는 굳이 묻지 않겠습니다.”
“그럴 줄 알고 아무랑도 비교 안 했어요.”
“그것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건 그렇고, 미스터 베넷.”
“네. 닥터 와이트가 먼저 말을 걸어 주니까 좋네요.”
“좋아하긴 이릅니다. 당신 혹시 보통 사람들이 보편적인 비유를 할 때 대화를 캐치볼에 빗댄다는 거 압니까?”
“그 정도야 저도 알죠.”
“그걸 알고 있으면서 왜 매일 아침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스쿼시를 합니까? 제가 스쿼시 벽으로 보입니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닌데요.”
“그러면 이유가 뭡니까?”
“그게……, 제가 구기 종목을 싫어해서가 아닐까요?”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릴 적을 떠올리면 제가 던진 공은 보통 글러브에 안 들어갔거든요.”
“공을 막 던진다고 말도 막 던질 필요는 없을 텐데요?”
“아니, 막 던진다는 건 아니고요.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던지긴 하죠.”
“그래서 지금도 열심히 던지고 있다는 건 아니겠죠?”
“……헤헤.”
“그 얼굴로 웃는다고 모든 게 원만하게 해결될 거라는 착각 하지 마세요.”
“네……. 그런데 닥터 와이트, 전 사실 잘난 얼굴보다는 돈을 믿는 편이거든요.”
“자기 입으로 돈밖에 없다는 말을 하면서 슬프지도 않습니까?”
“음. 그다지요? 부자라는 게 슬플 일은 아니니까요.”
“부자라는 걸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인생은 슬퍼야 할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전 얼굴도 있잖아요? 닥터 와이트도 좋아하는 잘생긴 얼굴인데.”
“……정말 짜증 나는 사람이로군요.”
“그래도 아니라는 반박은 안 하시네요? 얼굴 구경하고 싶으면 언제든 내 집에 놀러 오세요. 전 닥터 와이트랑 안 노는 시간에는 보통 집에 있거든요. 알죠? 여기 펜트하우스요.”
“지금 얼굴 구경하러 오라고 집까지 꼬시는 겁니까? 더 가면 아침마다 얼굴 구경한 값으로 임플란트라도 해 달라고 하겠습니다?”
“제 치아 건강해서 임플란트 필요 없는데요……. 혹시 금방 필요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협박이신가요……?”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이상한 곳에서만 진지하게 정색하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아하. 다행이네요. 맞는 데 이골이 나긴 했지만 이가 나갈 때까지 맞아 본 적은 없어서 좀 걱정했어요.”
“…….”
“어쨌든, 꼬시는 것보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거죠. 그런데 계속 얼굴 보여 주면 혹시 언젠가는 상담도 해 줄 건가요?”
“이제 말하기도 입 아프지만 저는 테라피스트가 아니고 제가 할 수 있는 상담은 미스터 베넷의 치아에 대한 것뿐인 데다 그것도 병원이 아니라 집에서 하고 싶은 일은 아니라는 걸 확실히 해 두고 싶습니다.”
“보는 걸로는 값이 모자라시면 만져도 괜찮은데요. 얼굴 좀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아까보다 더 저질스러워진 것 같습니다만……?”
“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자주 들어서 이제 신경 안 쓰거든요.”
“……제발 저질스럽다는 말에는 신경 써 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인간 대 인간으로 드리는 부탁입니다.”
“미안해요, 내가 좀 무신경한 인간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전 병원에 가 봐야 하니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이건 꽤 간절한 부탁인데, 매일 아침마다 마치 일하러 가는 남편을 배웅하는 와이프처럼 굴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아, 게이 커플도 와이프라는 말을 쓰나 봐요?”
“……보통은 둘 다 남편이라고 합니다.”
“잘 다녀오세요, 남편.”
“차라리 이혼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네, 하지만 이혼하려면 일단 결혼부터 해야겠죠?”
“빌어먹을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