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한 이성애자의 종말
종말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1]
* COUTION! *
- 이 작품은 미국식 유머로 구성된 시추에이션 코메디입니다.
- 인트로 이후 본편은 레제 드라마[2]와 흡사한 ‘서술 없는 대사’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 첫 번째 독서에서는 주석을 읽지 않으시기를 추천합니다. 대부분 주석이 없어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내용이며, 주석의 양이 방대하므로 처음 읽으실 때 모두 확인하고 지나가시면 독서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 소제목도 스토리의 일부입니다.
WELCOME TO THE END OF THE WOLRD, AND PLEASE DON’T PANIC![3]
Intro. Welcome to New York[4]
나태한 삶이 그렇게 나쁜 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바 아니나, 적어도 샘포드 베넷은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나태가 상종 못 할 죄악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에게는 아직 종교적인 해결책이 남아 있었다. 나태함에 대한 면죄부 정도는 샘의 재산으로 충분히 구입 가능한 가격일 것이 틀림없었다. 면죄부가 품절되지 않는 이상 나태같이 귀여운 죄악은 돈으로 해결 가능해야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태함 자체가 돈으로 해결 가능한 죄악이었다. 나태해지기 위해 하지 않기로 한 일을 대신해 줄 사람을 돈으로 구하면 끝나는 문제니까.
샘은 충분히 나태하게 살기 위해 재산을 탕진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삶을 살아온 남자였다.
그중에서도 미국에서 비싼 부동산 가격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서 건물을 구입해 서비스 아파트먼트 사업을 시작한 건, 샘치고도 제법 큰 도박이었다.
뉴욕에 즐비한 5성급 호텔에서 유능한 인재를 스카웃했다. 컨시어지·조리 팀·프런트 담당자·하우스 키핑 메이드에, 24시간 상주하는 3교대 도어맨·입주자 전용 주차 공간의 발렛 요원, 심지어는 애완동물 전문 키퍼까지 고용했다. 그의 건물에는 모든 것이 완비된 인테리어, 건물 안의 공용 피트니스 클럽, 수영장, 식사를 위한 다이닝 룸, 복수의 시어터 룸, 그리고 스크린 골프와 볼링·빌리어드나 테이블 포커 따위를 칠 수 있는 공용 엔터테이먼트 플로어에, 심지어는 연중무휴로 운영되는 슈퍼마켓까지 있었다.
샘의 서비스먼트 아파트는 호텔보다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철저한 사생활을 보장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확실한 신분 보장은 필수였으며 모든 집은 6개월 이상의 장기 렌트만 가능했다. 월세는 층수와 구조에 따라 다르지만 최저 2만 달러[5]부터 8만 달러까지 다양했다. 6개월 치 월세를 가지고 맨해튼의 집을 살 수 있는 층도 있었다. 그것도 썩 괜찮은 집을 말이었다.
어퍼 이스트 사이드의 특수한 주거 형태를 생각하면 샘의 임차 사업은 망할 확률이 월등히 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입성하고 싶어 하는 이들 대부분은 집을 소유하기를 원했다. 어퍼 이스트 사이드의 부자들은 월세를 내고 산다는 사실 자체를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샘 또한 이곳에서 나고 자란 덕에 그들의 습성을 잘 알았다. 하지만 어디든 예외는 존재했고, 자신처럼 프라이버시와 편리를 중요시 여기는 돈 많은 젊은이들에게 호텔 장기 투숙보다 편한 서비스 아파트먼트의 수요가 있을 것이라는 꿋꿋한 주장을 관철했다.
물론 샘도 사실은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서 6개월 이상 장기 거주자만 계약 가능한 월세형 서비스 아파트먼트가 무모하다는 걸 알았다. 맨해튼에는 그의 아파트먼트만큼 훌륭한 장기 투숙 서비스를 제공하는 호텔이 즐비했고 심지어는 훨씬 저렴한 가격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샘은 의지를 꺾지 않았다.
샘은 사람이 너무 자주 바뀌는 게 싫었다.
호텔처럼 누구든 드나들 수 있는 번잡한 공간도 싫었다.
놀랍게도 맨해튼에는 샘만큼 돈이 많고 샘처럼 이상한 사람들―혹은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 집을 사고 싶어 하지는 않지만 뉴욕에서 반년 이상 보내야 하는 성격 특이한 부자들―이 제법 되는 모양이었다. 임차 사업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샘의 건물 입주율은 70퍼센트에 육박했다. 3년 뒤에는 100퍼센트를 넘어서서 입주 대기자까지 나왔다. 4년째에는 렌트비를 올렸고 5년째인 현재, 샘의 건물은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지상 낙원이 되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샘의 관점에서는 지상 낙원이었다는 뜻이다.
대다수의 주변인들은 오로지 게으르게 살기 위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냐며 샘을 타박했다. 하지만 샘은 진지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나태하게 살고 싶었다. 가능한 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었고 그럴 만한 돈이 있었다. 서비스 아파트먼트는 그에게 있어서 사업이 아니었다. 생존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런 샘조차 단 한 가지,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는데.
“두 번 다시 여자 만나지 마, 이 좆같은 새끼야.”
오른쪽 뺨만 세 번 얻어맞은 샘이 우울한 얼굴로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는 리즈가 차라리 오른쪽과 왼쪽 뺨을 번갈아 때려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솔직한 심정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반대쪽 뺨에도 불이 날 게 뻔했다. 샘이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듣지? 너 같은 쓰레기는 평생 혼자 사는 게 인류를 위한 길이야. 제발 부탁이니까 혼자서 늙어 죽어. 죄 없는 여자들 네 인생에 끌어들여서 남의 인생 망칠 생각 말고!”
7년을 만난 약혼녀에게 쓰레기 취급을 받는 건 무던하기로 유명한 샘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넘길 만한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멀쩡한 인간을 악귀라도 되는 양 로사리오까지 흔들어 대는 리즈에 샘의 강철 같은 마음엔 스크래치가 생겼다. 아주아주 희미한 스크래치였다.
평소보다 심하게 화를 낸 리즈 때문에 거실이 난장판이었다. 부서지고 깨진 집기를 바라보며 샘은 부디 자신이 아니라 물건만 부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리즈는 복싱을 배웠다. 거의 아마추어 선수 레벨이었다. 뺨도 그나마 손바닥으로 맞아서 망정이지 주먹으로 맞았다면 911을 불러야 할 사태가 생겼을 것이었다.
게으름을 부리다가 어긴 데이트 약속이 끝없이 쌓이고, 상습적으로 파트너 없는 파티에 참석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결혼 준비를 위한 외출 약속도 잊어버렸으니 리즈가 길길이 날뛰는 건 당연했다.
샘도 그녀를 이해했다.
만약 자신이 리즈였어도 화가 났을 것이다. 아니, 물론 샘은 자신이 리즈였다면 집에서만 하는 데이트에 만족했으리라 생각하긴 했다. 그런 걸 다 따져도 결혼식 준비 약속까지 잊어버린 건 확실히 심각했지만.
샘도 거기에 대해 딱히 변명을 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잘못을 아는 샘은 닥치고 리즈의 폭언과 폭력을 받아들였다.
“리즈, 정말 미안해…….”
그리고 샘은 타이밍을 봐서 최대한 미안해하는 얼굴로 사과했다.
하지만 그의 그런 태도마저도 리즈의 화를 돋우기만 한 모양이었다.
“난 네 미안하다는 소리 더 이상 안 믿거든?”
“그것도 미안해.”
“그러니까 내가 진작에 병원에 가라고 했잖아! 집구석에 세상을 구겨 넣으려고 하지 말고, 밖에 나가서 테라피스트를 만나라고! 넌 정상 아니야. 제정신이 아니면 치료를 받든지, 뭐라도 대책을 세워야 할 것 아니야?!”
“그렇게까지 걱정해 줄 정도로 심하지는 않은데…….”
“하. 걱정? 거억정? 너 정말 정신 나갔니? 거기서 더 나갈 정신이 남아 있기는 했어? 내 말은, 다른 사람까지 미치게 만들지 말고 가서 상담받으라는 거잖아, 이 빌어먹을 또라이 자식아!”
씩씩 숨을 몰아쉬던 리즈가 헝클어진 금발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차갑게 식은 눈으로 샘을 응시하던 그녀가 마침 발밑에 있던 티 컵을 ‘콱!’ 밟아 부쉈다. 샘은 리즈의 발밑에서 산산조각 난 티 컵이 마치 자신의 머리 같다고 생각했다. 리즈의 시선이 티 컵 대신 밟아 버리고 싶다는 양 그의 머리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넌 끝이야.”
“리즈……!”
“이 결혼, 나는 못 해. 아무리 정략이라지만 도저히 안 되겠어. 세상에 너 같은 거랑 같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없어. 넌 그냥 평생 혼자 살아.”
샘이 슬픈 눈으로 리즈를 쳐다봤다.
안타깝지만 세상에는 돈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게 있었다.
“뒈져 버려.”
엉망으로 부서진 집기를 걷어차며 현관을 향하던 리즈가 배웅을 나가려는 샘에게 말했다.
쾅!
진심 어린 경멸과 요란한 소음 뒤에 너른 거실에 정적이 감돌았다.
만신창이가 된 거실을 바라보며 샘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당분간 잠수를 타야 할 것 같았다.
가족들과 친척들과 리즈의 가족들과 친구들의 손에서 무사히 살아남고 싶다면 말이었다.
*
에드먼드 와이트는 새벽 6시부터 7시 사이에 배달되는 타임즈 지를 정독하고 있었다. 그는 오늘 10시에 잠깐 자신이 소유한 병원에 들르는 것 외에는 용무가 없었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2층에 내려와 커피와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를 시켰다. 언제나와 같이 썩 괜찮은 맛이었다.
역시나 여느 때처럼 흉흉한 오늘 자 뉴스를 확인하며 아침 식사를 거의 끝마친 에드먼드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8시 12분. 여전히 출근을 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다시 제일 〈뉴욕 타임즈〉의 맨 앞장으로 돌아온 에드먼드가 타임즈 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선 합석을 해도 괜찮겠냐는 말 한마디 없이 맞은편에 앉아 버린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가 멋대로 맞은편 소파에 자리 잡고 앉은 지 장장 한 시간 만의 일이었다.
“닥터, 내 이야기 듣고 있어요?”
에드먼드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 샘포드 베넷이 말했다.
샘포드는 에드먼드가 이 코옵 아파트먼트[6]를 소개받았을 때 한 번 얼굴을 마주친 것 외에 아는 게 없는 낯선 건물주였다. 에드먼드는 척 보기에는 멀쩡하게 생긴 데다가, 심지어는 눈 돌아가게 잘생기기까지 했지만 소문이 더러운 부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에드먼드는 입주 계약을 할 때 이후로 얼굴조차 마주한 적 없는 건물주가 대체 왜 갑자기 자신에게 접근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를 둘러싼 소문을 떠올리면 상당히 불길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쫑알거리며 말을 걸어 오는데 계속 무시하는 것도 힘들었으니 적당히 대응을 해야 할 것 같기는 했다.
“글쎄요.”
에드먼드가 한 시간 만에 처음으로 대답을 돌렸다.
“그야, 저도 귀가 달려 있다 보니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확히 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계셨죠?”
“내 7년간의 연애요.”
“아하. 어쩐지 기억에 남는 게 없다 했습니다.”
“닥터가 듣기에는 어떻던가요?”
“구체적으로 어떤 대답이 듣고 싶은 겁니까? 그리고 저는 닥터가 아닙니다.”
“나랑 리즈의 마지막을 닥터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한데요.”
“그렇군요. 그런데 닥터가 아니라는 말은 안 들리는 겁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런 쓰레기 같은 이유로 헤어지는 경우도 있다니 대단하시군요. 그리고 당신은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시늉 정도는 하는 습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런, 닥터. 면전에 대고 사람을 쓰레기 취급 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요.”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드리죠. 하지만 사람이 당신처럼 쓰레기 같은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만?”
“아하. 그것도 그러네요. 쓰레기라 미안해요, 닥터.”
“닥터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합니까.”
“그게 끝인가요?”
“뭐가 말입니까.”
“내 연애에 대한 감상이요.”
“더 필요합니까?”
“그래도 7년인데, 뭐라도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두 분이 이루어졌다면 대단히 영문학적인 커플[7]이 됐겠습니다?”
“닥터치고는 감수성이 풍부한 분이로군요.”
“닥터가 아니니까요.”
“어쨌든 닥터, 약혼녀에게 차여서 상심한 사람한테 그런 말을 하는 것도 그렇게 좋은 습관은 아니에요.”
“그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약혼녀에게 차였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그야, 그녀가 저보고 꼭 테라피스트를 찾으라고 저주하고 갔으니까요.”
“그건 저주가 아니라 걱정처럼 들립니다만. 여전히 저랑은 상관없어 보이고요.”
“아니, 그건 확실히 저주였어요. 증조할머니께 물려받은 로사리오를 흔들었으니까요. 만약 근처에 성수가 있었다면 나한테 뿌렸을 거예요. 그녀는 다소 과격한 성격이거든요.”
“천사와 사귀었어도 당신 같은 놈과 헤어질 때는 성수를 뿌렸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저랑 상관없는 일이잖습니까?”
“상관있어요.”
“대체 어느 부분이 말입니까?”
“닥터는 닥터잖아요.”
“저,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테라피스트[8]와 닥터[9]는 매우 다른 직업입니다. 저는 닥터가 아니라 덴티스트[10]고요.”
“다 같은 의사인데요.”
“아닙니다. 닥터들이 말하길 닥터와 덴티스트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닥터와 테라피스트, 덴티스트와 테라피스트도 상당히 다릅니다. 그러니 덴티스트인 날 내버려 두고 당신에게 꼭 필요한 테라피스트를 찾아가세요.”
“하지만 저는 집에서 나가기 싫은걸요.”
“여기도 엄밀히 따지면 당신 집은 아닙니다. 공용 구역이죠.”
“제 건물이라서요.”
“……그러면 출장 테라피스트를 부르시든가.”
“닥터 같은 사람은 날 이해 못 해요.”
“맞는 말이기는 한데 묘하게 기분이 나쁘군요. 대체 뭘 이해 못 한단 소립니까?”
“출장 테라피스트를 찾으려면 얼마나 많은 과정이 필요한지, 그게 나한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요.”
“…….”
“닥터는 이해 못 할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