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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마른 꽃 (15/15)

외전 3 마른 꽃

서재희의 방문은 뜻밖이었다.

적어도 차예원에게는 그랬다. 혁명 이후, 둘은 쭉 공식적으로만 마주쳐 왔다. 공문으로 동향을 주고받고, 비서의 입을 빌려 일정을 조율했으며, 축사 순서를 선점하기 위해 연단에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엎치락뒤치락했다. 오찬에서 마주 앉을지언정 마주 보는 법은 없었고, 카메라 앞에서 정중히 호칭하면서도 반드시 상대를 아래로 보아야 했다.

긴밀한 협상도 마찬가지였다. 서재희가 방문했다는 소리에 회의도 중지하고 달려갔건만 비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서의 말에 의하면, 회의에 들어갔냐고 묻는 모양이 일부러 이 시간대를 골라서 온 것 같다고 했다. 서재희가 남기고 간 메모리에 지문을 인식하자 얼굴을 보고 이야기했어야 할 내용이 떴다. 차예원이 발의했으나 김서혁이 저지하여 계류 중인 건을 조건부로 통과시키는 대신, 앞으로 공식 석상에서 ‘신도시’란 용어를 자제해 달라는 제안이었다.

차예원은 이 모든 것에 빠르게 적응했는데, 그녀에게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적성에 맞았기에 가능했다. 김서혁의 노선을 타면 죽은 아버지가 우스워질 테고, 정윤환과는 서로 생각하는 정의가 달랐으며, 유은우를 지지하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리고 서재희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더는 안 된다. 혁명의 순간 한배를 탔다 하더라도, 그건 서재희의 판이었지 차예원의 선택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어차피 버릴 난파선이었다고 해도, 대중이 정부에 등을 돌렸다고 해도, 원흉은 서재희였다. 그가 움직여서 이렇게 되었다. 그토록 자기편으로 만들고 싶어 탐을 내던 서재희에게 등을 떠밀려 대중에게 먹잇감으로 던져진 아버지의 끝을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했다.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과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동일 선상이 아님을 깨닫기까지 냉철한 고민을 거쳐야 했다. 오답 노트를 복기하듯 낯선 감정을 살피고 또 살폈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와 수없이 정당한 오류가 있었다. 말도 안 되었지만, 그래서 사랑이었다. 눈물보다는 한숨이 어울렸다.

어딘가 어긋난 그 느낌은 서재희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서재희가 보좌하는 김서혁의 주위는 지나치게 따뜻하고 간지러웠다. 어차피 오래 있을 곳은 아니었다. 신중히 사위를 살폈다. 몸을 의탁하고 세력을 키워 옛 영광을 되찾을 발판은 하나였다. 어리고 거친 혁명의 놀랍도록 매끄러운 반대편. 유구한 역사를 지닌 옛 도시의 귀족들. 여전히 건재한 명성과 그보다 견고한 부. 그들은 명분을 찾고 싶어 했고, 차예원이 그 적임자였다.

배신은 어렵지 않았다. 필요했으니까. 애초에 서재희는 건드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틈이 있다면 김서혁이나 정윤환. 차예원을 믿고 곁을 내준 둘의 뒤통수를 차례로 후려치며 단숨에 등을 돌렸다. 증거 부족으로 풀려난 전범자들이 마련해 놓은 왕좌에 앉기까지 순식간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김서혁의 그늘에서 벗어나 같은 눈높이로 마주 볼 수 있었다.

실수는, 제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했을 때 나왔다.

유은우가 처음으로 계약자를 상징하는 의복을 갖춰 입고 온 날이었다. 차예원은 귀빈석에 앉아 신년 축사를 하는 유은우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유은우는 호흡과 억양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이제 제법 공인의 태가 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와는 거리가 먼 눈을 하고 있었다. 유은우가 마이크를 고쳐 쥘 때, 그녀의 망토 주름에 가려져 있던 것이 반짝이며 드러났다. 은색 체인이었다. 시선을 지나쳤다가 다시 고정했다. 평범한 세공이 아니었다. 눈부시게 떨어지는 오후에 차예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름. 낯익은 이름들. 알던 이의 죽음도 있었고, 죽고 나서 알게 된 이도 있었다.

유치하긴. 코로 웃었다. 그러나 시선은 쉬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름. 그리고 이름. 매캐한 유황. 재를 피워 올리던 불. 그보다 뜨거운 피. 손닿을 거리에 죽음이 도사렸던 찰나가 순식간에 덮쳐 왔다.

차예원은 눈을 깜박였다. 그때였다. 하필 서재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표정을 읽을 생각은 없었다. 먼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나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차예원은 서재희가 자신을 꽤 측은한 눈으로 보고 있었음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게 되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이 기사로 가공되어 일파만파 퍼진 탓이었다. 혁명을 위해 아버지를 버리고, 직후 김서혁을 등진 전철이 무색하도록, 사진 속 자신은 지나치게 감상적이었다. 젖은 눈으로 옛 약혼자를 응시하다니. 화가 나다 못해 허탈했다. 그 후로 차예원은 더욱 서재희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넓은 접견실에 단 둘뿐이었다.

왜 왔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대신 차예원은 서재희를 깊이 살폈다.

“손이 왜 그래?”

핏기가 서린다며 바투 깎던 손톱을 이제 남들만큼 기르는 것은 그렇다 치고, 손이 거칠어 보여 물었다. 서재희는 대답 없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칵이는 소리도 없었다. 무엇이든 조용히 다루는 건 여전한 모양이었다. 그래,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바뀔 리 없지. 그러나 다음 순간 서재희가 맑게 미소 지었다. 처음 보는 뿌듯한 얼굴로 그가 대답했다.

“흙을 만져서.”

“……임시정부 조경을 네가 직접 했다고?”

“응. 취미라 어디 보일 솜씨는 아닌데 감사히 기회가 와서.”

그러고 보니 제8도시 출신이었지. 촌부의 아들이었어. 그래서 차예원은 서재희의 어린 시절을 모른다. 동갑내기 남자아이가 연합대회에서 날고 긴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엮일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랬기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나간 식사 자리에서 처음 서재희를 봤을 때 크게 놀랐다. 출신은 낙인과 같은데 그게 어디 쉬이 세탁할 수 있던가. 그러나 뼛속까지 제1도시 시민처럼 보이는 고상한 분위기에, 처음으로 무언가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말을 걸었더니 우아하게 경계를 그어, 더욱 안달이 났다. 흥미로웠다. 시간과 품을 들여 가질 만한 것이 생겨서. 그때까지만 해도 가능하리라 믿었는데.

“겨울에도 아름답도록 공을 들였어. 봄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지.”

서재희가 재차 눈으로 웃었다. 낯선 얼굴로 그가 말을 이었다.

“언제 한번 보러 와. 아, 결혼 전에 우리 쪽 방문은 삼가는 중인가?”

“결혼 축하한다는 인사 먼저 하는 게 예의 아니야?”

“글쎄. 축하는 이른 것 같아서. 안기헌의 부모가 아등바등 쥐고 있는 인사권을 네게 넘겨야 내가 축하를 해 줄 수 있지 않겠어? 그래야 네 결혼에 의미가 있으니.”

비난은 아니었다. 서로가 알고 있는 진부하고 뻔한 얘기일 뿐. 차예원은 식어 빠진 찻잔에서 손을 떼어 냈다. 한숨처럼 말했다.

“윤환이하고 했으면 훨씬 보기 좋았을 텐데.”

서재희가 탁 터지듯 웃었다.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소리 내어 웃는 서재희를, 차예원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빤히 바라보았다. 서재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되겠냐, 그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제안한 거야?”

“그냥 물어볼 수도 있지 뭘 그래. 감정 다 배제하고 상황만 볼 때 그쪽에서도 나쁜 패는 아니었을걸. 나중에 후회하지나 말라 그래.”

대답을 하고 나니, 당시 정윤환의 표정이 뒤늦게 떠올랐다. 코웃음 치며 덧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반응이 그게 뭐야. 나랑 결혼하느니 뭐라더라? 혀 깨물고 죽어 버리겠다? 그냥 하기 싫으면 하기 싫다고 하면 될 것을, 경호원들 다 뛰어나오게 문을 쾅쾅 닫고 말이야.”

“욕 안 한 게 다행이다.”

“말 안 하던? 욕도 했어.”

서재희가 가볍게 웃었다. 동시에 스스럼없이 손을 뻗어 와, 차예원은 저도 모르게 바싹 굳었다. 그러나 손은 둘 사이에 놓인 접시에 머무르더니 잘 구워진 과자를 두어 개 집어 들었다. 단것은 입에도 대지 않던 남자가 하나를 맛보고 이어 나머지 하나도 파삭파삭 잘만 먹는 모양을, 차예원은 이제 질려 바라보았다.

“너 과자 안 먹잖아.”

“그랬지.”

“은우 입맛 아니야?”

“옆에서 한두 개씩 먹다 보니 맛있어서.”

“너 많이 변했다.”

불쑥 뱉고 바로 후회했다. 지고 들어가는 꼴이 아닌가. 낯이 홧홧하게 달아올라 목을 가다듬다가 이 모양도 보이기 싫어 입을 꾹 다무는데, 서재희가 담담히 말했다.

“넌 여전하네.”

“내가 뭘?”

“전부 다.”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알지.”

왜 왔어? 이런 쓸데없는 사담을 나누려는 건 아니었을 테고. 묻고 싶었지만 그 물음은 겨우 삼켰다. 본론으로 들어가면 그만큼 빨리 자리를 뜨겠지. 이리 사적인 만남은 쉽지 않았고 앞으로는 더욱 어려워지리라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미련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그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으니까. 아버지의 처형을 목도하면서, 실은 그때의 심정을 곱씹으면서 서재희는 이제 차예원에게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미련이 아닌 무엇이냐 물으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서재희가 가진 특유의 단아한 선과 고상한 분위기를 보면서, 차예원은 이렇게라도 시간을 끌고 싶은 건 그가 가진 성질 때문이지 결코 내가 나약해서가 아닐 거라고 되뇌었다. 누구나 서재희를 좋아했으니까. 한때는 내가 서재희의 약혼녀이기 때문에 괜한 미움을 사는 건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은우는, 그런 차예원의 염려를 단숨에 우습게 만들어 놓았다.

유은우는 서재희와 별개로 대중에게 특별했다. 서재희나 정윤환이 받는 사랑과는 달랐다. 처음부터 선망의 대상이었던 다른 둘과 달리 유은우는 철저히 외면받은 희생자인 동시에 혁명을 성공시킨 핵심 인물이었다. 유은우는 유은우 그 자체로 오롯이 인정받았는데, 계약자라는 신분 때문도 아니었고 서재희와 정윤환의 사랑을 받는 대상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대중은 유은우에게 수많은 색깔을 입혔다. 때로는 김서혁의 언급으로, 가끔은 서재희의 의도로, 그러나 대부분은 유은우의 행보 그 자체로 의미가 부여되었다. 그 이미지가 날이 갈수록 확고해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차예원은 대중이 생각보다 예리하다고 생각했다. 시민들은 우둔하며 또 그리 만들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은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차예원과 서재희를 비롯한 몇몇은 여전히 함구하는 죄가 있었으나, 유은우는 없었다. 그 감춰진 간극을 대중이 감으로 읽어 내는 거라고 생각하면 뒤가 서늘했다.

그리고 그런 유은우가 서재희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디서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세월을 따라 모래알처럼 쓸려 오는 수많은 사랑 가운데 가장 단단하게 빛나 보였다. 그것이 차예원을 돌이키게 했다. 한때 서재희는 차예원의 소유였다. 그럼에도 단 한순간도 그를 끌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서재희는 가면도 껍질도 없었다. 그저 온전했다. 그는 유은우를 만나기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똑같은 미소를 지었지만 결코 같지 않음을, 수없이 부정해 왔으나 이렇게 마주 앉은 지금에 와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치미는 무언가를 삼켰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너흰 결혼 안 해?”

서재희는 옅게 웃기만 했다. 이내 대답하지 않겠다는 듯 매끄럽게 찻잔을 드는 그의 손가락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반지는 없었다. 분명 맞췄다고 했는데. 혁명이 수습되자마자 새 정부가 들어서기도 전에 서재희가 반지를 보기 위해 몇 군데를 돌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없다며 직접 주문하여 찾아간 지 오래라고. 그러나 어디에서도 둘의 결혼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혹시 유은우가 거절했나?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서재희는 죄가 있었으니까. 그걸 아는 유은우가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해도 죄까지 짊어지기는 부담이었을지도. 혹은 김서혁이 그리 권했을 수도 있다. 김서혁은 유은우의 선택권을 박탈하고 소유하는 것에 익숙할 테니. 또는 유은우를 끔찍이 생각하는 정윤환 때문에 결혼이 진행되다 스러졌을지도 모른다. 서재희는 늘 정윤환을 중요히 여겼으니까…….

그리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나아졌다.

“글쎄.”

서재희가 부드럽게 운을 떼어 차예원은 눈을 들었다. 몇 년 만에 마주 보는 서재희를 오랜 습관으로 샅샅이 뜯어보았다. 그는 여유로웠다. 마음을 거절당하거나 원하는 것을 가로막힌 흔적은 어디에도 없어 가슴이 철렁했다. 서재희가 부드럽게, 그러나 힘을 주어 말했다.

“말하고 싶지 않아. 은우에 관해서는.”

“왜?”

“왜냐하면,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니까. 함부로 여기저기서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아.”

“……결혼이 어려운가 봐.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거창한 대답을 하는 거 보면.”

“너만큼 쉽지는 않지. 넌 정치적인 이득만 생각하고 결정했겠지만 난 아니거든.”

그래, 이래야지. 이래야 맞지. 우리 관계는.

“우리 아버지 보러 갔었다며?”

날카로이 뱉고 나서 차예원은 되레 자신에게 놀랐다. 서재희는 천천히 얼굴을 굳혔다. 그가 한숨처럼 대답했다.

“그래. 갔어.”

“뭐 하는 짓이야.”

“차예원.”

“네가 죽였잖아.”

침묵이 감돌았다. 차예원은 천천히 호흡을 눌렀다. 서재희는 아래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 그저 차분했다. 저 얼굴로 뻔뻔하게 다녀왔단 말이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보이기 위한 행보였을까 짐작해 보았으나 극히 비밀에 부친 것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제1도시 부근 사해 어딘가에서 아버지는 외로운 죽음을 맞았다. 시민들이 직접 도시연합 본부에서 차인호를 끌어내어 제1도시 철책 너머로 밀어냈다. 축제를 치르듯 환호하던 시민들의 표정에 차예원은 그저 섬뜩했다. 보호칩은커녕 총도 뺏긴 채 쫓겨난 차인호는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악랄한 시민들이 띄운 드론을 피해 건물에 숨어 든 후 행적이 묘연해졌기 때문이다. 괴물에게 당했을 것으로 짐작하나 어쨌든 죽은 것만은 확실했다. 어쩌면 마지막 모습이 촬영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리 필사적으로 달렸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사라진 그 부근을, 차예원은 무덤이라고 여겼다.

“후회한다고 말한다면 믿겠어?”

서재희가 낮게 말했다. 그는 표정이 없었으나 온기가 있었다. 예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정권 교체에 정녕 그 방법밖에 없었냐고 묻는다면 결코 아니야. 내가 그리되도록 의도했지. 그리고 지금 후회해. 그렇다면 어떻게 차인호를 단죄해야 했을까? 아니, 그 칼자루를 감히 내가 쥐어도 되는지, 그 또한 대답이 어려워. 개인 간의 복수가 인정된다면 사형 제도는 굳이 필요가 없지. 하지만 나는 차인호에게 그런 절차를, 그런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시민들의 손에 넘겨 버렸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서재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 진정한 복수나 온전한 속죄가 정말 존재하는지도. 죄는 저지르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데 속죄가 있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용서도 복수도 의미가 없는 게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갔어.”

차예원은 서재희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한때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다고 생각했던. 너무나 까만 나머지 거울로 차예원을 비춰 내던. 여전했으나 여전하지 않았다.

“네가 날 비난한다 해도 할 말은 없어. 다만 일방적인 관계는 아니지. 복잡한 세월이 있어. 내가 네 아버지를 그렇게 만들었지만 네 아버지 또한 나를 여러 번 죽였어. 그리고 너와 나도 서로 수없이 상처를 주고받았지.”

서재희가 천천히 말했다.

“끊어 내고 싶었어. 복수는 죄를 되갚는 게 아니다. 속죄는 죄를 씻는 게 아니다. 그럼 이 지난한 대물림을 이제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닐까. 어느 한쪽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겠다는 어떤 선언. 그걸 하고 왔어. 그러니 너는 내게 이제 새로운 사람이지.”

“결국…….”

차예원은 입술을 꾹 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네 마음 편하자고 다녀온 거잖아. 그럴싸하게 포장해 봤자.”

“그래, 맞아. 내 마음이 편해졌어. 이렇게 안정된 마음으로 살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러더니 서재희는 조용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눈이 가라앉았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나오는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변한 가운데 드문드문 보이는 옛 습관들을 알아볼 수밖에 없어 기분이 묘했다. 잊을 수 있기나 할까. 수없이 서재희를 파헤치고 또 파헤쳤다. 속내를 알아내면 통제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비로소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난 네 결혼을 축하할 수 없어.”

차예원은 미간을 좁혔다. 서재희가 말을 이었다.

“안기헌은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좋은 사람은 아니야.”

“뭐?”

“그와 몇 번 만났다고 들었어. 느끼지 못했어? 그는 통제력이 부족해. 폭행을 저지르고도 덮을 수 있는 위치라 들키지 않았겠지만. 설마 알고도 진행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건 전혀 못 느꼈는데.”

“결혼은 다시 생각해 보길 바라.”

“겨우 이틀 남았어.”

“파혼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지.”

“근거 있어?”

“그리고 왜 너의 측근들이 네게 안기헌을 결혼 상대로 제안했는지도. 그들은 네 콧대가 지나치게 높다고 생각하지. 네가 안기헌과 결혼하여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게 되면 그들은 그것을 약점으로 삼아 널 아래에 두려고 할 거야.”

“못 믿겠어. 나도 알아보고 결정한 일이야.”

“아무리 털어도 안 나올 만큼 철저히 감췄으니 그렇겠지. 결혼 전에 최소한 한 번은 더 보겠지?”

“아마도.”

“잘 살펴봐. 몰랐으면 모르겠지만 이제 내가 말해 주었으니 네 눈에도 보일 거야. 그런 사람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겉으로 분명 배어 나와.”

고맙다는 말은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차예원은 딱딱하게 말했다.

“설마 이거 얘기하러 온 거야?”

“예민한 문제잖아. 측근을 통해도 되는 협상 같은 게 아니니까.”

“내가 잘못돼도 넌 상관없잖아.”

“왜 그렇게 생각해?”

말문이 막혔다.

“……적한테 좋은 일을 하는 꼴이잖아.”

“우린 적이 아니야.”

차예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적이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등을 돌린 건 배신이었고 뱉는 말마다 대척점을 찍는데.

“정치란 의자와 같지.”

서재희가 부드러운 얼굴을 했다. 그가 이어 말했다.

“네가 없어져도 자리는 남아.”

이내 서재희는 일어섰다. 그는 소리 나지 않게 의자를 밀어 두고 옆에 편하게 걸쳐 두었던 코트를 집어 들었다. 차예원은 무의식적으로 따라 일어섰다. 그의 곁에 가까이 다가갔다. 익숙한 냄새가 났다. 서재희는 문 앞에서 차예원을 향해 돌아섰다. 한 뼘을 두고 서서 차예원은 낯설게 서재희를 올려다보았다. 수없이 이렇게 마주 봐 왔으나 동시에 얼마나 다른 곳을 보고 있었는지.

서재희가 고개를 숙였다. 낮게 속삭였다.

“우린 같은 죄가 있고 서로 너무나 잘 알지.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적이야. 하나가 입을 여는 순간 함께 추락할 텐데. 네가 어디 앉아 있는지는 상관없어. 어차피 존재하는 구도라면. 그게 오늘 내가 널 찾아온 이유야.”

서재희의 눈이 가만히 차예원을 응시했다. 어쩜 저럴까 싶은 단정한 까만색은 지치거나 피로한 기색 없이 또렷했다. 서재희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야 비로소 우리가 한팀이구나. 가장 어울리는 자리에서. 너도 그렇게 생각하길 바라.”

그가 돌아서서 문손잡이를 잡았다가 순간 멈춰 섰다. 그제야 차예원은 자신이 서재희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소스라쳐 놓았다. 얼결에 사과했다.

“미안.”

서재희는 웃음기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차예원은 천천히 숨을 토했다. 이마를 문지르며 멍하니 서 있다가 느리게 집무실로 돌아왔다. 양손으로 책상을 짚고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있었다. 곧 정신을 차리고 이프를 눌렀다. 통화음이 이어졌다.

내가 안기헌을 몇 번 만났더라? 네 번? 다섯 번? 기억도 나지 않았다. 형식적인 만남이었고 흥미도 없었다. 비서가 전화를 받자마자 빠르게 말했다.

“안기헌과 식사 약속 잡아 줘요. 오늘 저녁이요. 지금 바로.”

전화를 끊고 나자 비서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비서뿐이랴. 운전기사부터 홍보 담당까지 전부 다시 검토해야 했다. 딱딱, 초조한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리니 손톱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책상 뒤로 돌아가 블라인드를 젖히고 창을 열었다. 서늘한 기운이 훅 끼쳤다.

아래 현관에 서재희가 있었다. 그는 차에 올라타기 전에 몇몇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코트가 우아하여 잘 어울렸다. 유은우가 연말에 선물했다던 옷이 저걸까. 차예원이 애써 외면하려 해도 주위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혹은 일부러 서재희의 소식을 입에 올리곤 했다. 그래도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이프가 울렸다. 안기헌과의 저녁 식사 일정이 메모창으로 반짝 떠올랐다.

차예원은 왼손 약지를 어루만졌다. 숙제를 치르듯 맞춘 반지가 한낮의 햇살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돌려서 빼려다 그만두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다. 아직은 믿고 싶지 않았다. 사실 믿지 않는 길도 있었다.

내가 파혼을 진행할 수 있을까.

차예원은 안기헌과 결혼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권한은 늘어날 것이고 명예는 확고해질 것이다. 단, 잘 숨긴다는 전제하에. 안기헌도, 나도.

고개를 들었다. 까만 차가 정원을 돌아 멀어지고 있었다. 차가 사라지고 나서도 차예원은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외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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