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약한 선 (14/15)

외전 2 약한 선

“팔에 힘! 그대로 밀어붙여!”

“이야, 우리 은우 실력 많이 늘었다.”

“유은우! 뒤! 그렇지!”

“이선규, 좀 봐줘라! 애 상대로 이 악물고 이겨서 뭐 할 건데?”

“오늘은 민준이가 아니네?”

“박민준 어제 당직이었다고 이선규한테 은우 맡기고 갔……, 야, 이선규! 애 그만 패!”

내가 뭘 팼다고. 이선규는 다소 억울했다. 조그만 게 기어코 한번 이겨 보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게 우스워서 손날로 이마 한번 톡 친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반격이 이어졌다. 이선규는 힘이 제법 실린 주먹을 가까스로 피하고는, 발로 땅을 힘차게 디디며 유은우의 오른쪽을 쳤다. 유은우가 기민하게 팔을 들어 방어했다. 또, 또. 상대 손만 보느라 왼쪽은 무방비로 비워 놓지. 이선규는 무릎으로 유은우의 왼쪽 허리를 가격했다. 이선규가 나름대로 약하게 한다고 했는데도 유은우는 데굴데굴 세 바퀴나 굴러 멀어졌다. 주위에서 애 팬다고 야유가 일었다. 이선규는 눈을 굴려 사위를 쭉 훑었다. 다행히 김서혁은 없었다. 씩 웃으며 허리에 손을 얹고 유은우를 내려다보았다. 구르다가 멈춰 선 유은우는 턱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이내 발딱 일어서며 자세를 잡는 유은우에게 이선규는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이제 그만. 귀찮다고.”

유은우가 번개같이 달려와 손을 뻗었다. 이선규는 유은우에게 멱살을 잡히기 전에 손바닥으로 이마를 잡고 쭉 밀어냈다. 유은우는 버티고 서서 외쳤다.

“왜! 왜! 한 번 더 해! 원래 하루 세 번이야!”

“시간으로 치면 채웠어. 양보다 질. 알겠냐?”

“민준 오빠는 무조건 횟수로 했어!”

“그러냐. 그럼 내일 박민준 오면 오늘 안 한 것까지 네 번 해 달라고 해. 난 대타야. 대타는 대타의 기준이 있다고……. 이것 좀 놔! 나도 바빠.”

대련 한 번 덜 한 게 뭐가 그리 서운하다고 유은우는 눈이 울먹울먹했다. 맞고 바닥을 구를 때는 그리 씩씩하더니. 이선규는 주먹을 쥐고 손마디로 유은우의 머리를 꾹꾹꾹 찧었다.

“놔. 놔. 놔. 놓으라고!”

그제야 유은우는 움켜쥐고 있던 옷을 마지못해 놓았다. 이선규는 유은우가 잡은 대로 구겨진 제복을 툴툴 털며 혀를 찼다. 고집도 고집이지만 힘은 또 왜 이렇게 센 거야. 힐끔 내려다보니 유은우는 입이 댓 발은 나와서는 그 와중에도 이선규가 혹시 마음이 바뀌진 않을까 가지도 않고 딱 버티고 있었다. 이선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 유은우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눈을 찡그리며 피하는 유은우에게 가볍게 말했다.

“너 그거 습관이다. 얼른 안 고치면 버릇 들어. 오른쪽으로 치우쳐 방어하는 거.”

유은우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또 그랬어?”

“그래. 녹화했지? 가서 복습해라.”

“어제 민준 오빠랑 했을 때는 왼쪽도 잘 막았는데…….”

“어쩌다 우연이었겠지.”

“오늘은 대장이 보고 있어서 긴장했어.”

“어? 오셨어? 어디?”

유은우가 이선규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이선규는 휙 뒤돌아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대련을 구경하느라고 우르르 몰려왔다가 뿔뿔이 흩어지는 군인들 사이로, 저만치 김서혁이 팔짱을 끼고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엔 늘 그렇듯 소연주가 서 있었는데,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녀가 딱딱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들어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이런 망할……. 내가 유은우를 몇 번 때렸지? 두 번? 세 번? 이선규는 떫은 표정으로 다시 유은우를 보았다.

“언제부터 계셨어?”

“몰라.”

“모르긴 뭘 몰라. 무슨 더듬이라도 있는 것처럼 귀신같이 대장 오고가는 거 알아채는 주제에.”

이선규는 다시 한번 꿀밤을 먹이려다가 얼른 손을 거두었다. 유은우가 두 손으로 이마를 가린 채 대답했다.

“아까 두 번째 대련 시작할 때부터.”

유은우가 입을 꾹 다물더니 이어 말했다.

“한 번만 더 해. 나 진짜 잘할 수 있어.”

유은우는 김서혁 앞에서 진 것이 못내 분한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은우는 김서혁을 태양으로 삼아 하루에도 몇 번씩 시들해졌다 팔팔해지기를 반복했으니까. 사해에서 유은우를 건져 온 뒤, 군의 여론은 극히 좋지 않았다. 대부분이 적대적이었고, 관심을 보인다 해도 호기심에 그쳤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유은우를 폐기 처분해 달라는 익명의 탄원서가 물밀듯 쏟아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서혁은 홀로 유은우를 단단히 보호했다. 그뿐인가.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후로는 손수 훈련 계획을 짜는 것도 모자라 엄선된 정예군만 투입되는 까다로운 전투에 직접 데리고 나가기까지 했다. 그렇게 김서혁이 살뜰히 돌본 덕분에 유은우는 이제 휴게실에서 정예군과 섞여 늘어지게 쉬고 있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게 되었다.

이선규는 점차 또렷해지는 구둣발 소리보다, 유은우의 얼굴이 환해지고 주위가 긴장하는 것으로 김서혁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헛기침을 하며 정중히 뒤돌아섰다. 이선규는 김서혁이 무어라 운을 떼기도 전에 깍듯이 인사를 했다. 그걸로 유은우에게 꿀밤 먹인 게 무마되지는 않겠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박민준은?”

“어제 당직 서고 지금 들어갔습니다.”

“대련 몇 번 했지?”

“대장,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은우가 어찌나 실력이 늘었는지 깜짝 놀랐다니까요. 방어도 방어지만 뒤로 돌아서 공격할 땐 저도 위험했습니다. 체격이 이렇게 차이 나는데 전혀 밀리지도 않고. 대장도 긴장하셔야겠어요. 우리 은우 이렇게 실력이 일취월장해서 이제 곧 대장님 자리까지 위협하는 건 아닌지 정말…….”

“몇 번.”

“……세 번 같은 두 번이요.”

김서혁이 눈을 내려 이선규 옆에 서 있는 유은우를 바라보았다.

“유은우, 지금 대련을 한 번 더 하면 자유 시간이 줄어든다. 그래도 할 생각 있나?”

대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유은우는 맹렬히 반짝이는 눈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멈칫하고는 이프로 시간을 확인했다. 풀이 죽어서 유은우가 중얼거렸다.

“지금 4시 50분인데 대장 나랑 대련하면 5시까지 집무실 못 가. 5시에 영상 회의 있잖아.”

이것 봐라. 이선규는 눈만 살짝살짝 굴려서 김서혁과 유은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김서혁이 유은우의 일정을 꿰고 있는 건 일정표에 직접 관여했기 때문이라지만, 유은우의 반응은 새로웠다. 이른 아침마다 비서가 집무실에 일정표를 가져다 놓을 때 유은우가 꼭 들러서 확인한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진짜인가 보네.

“소연주.”

김서혁이 유은우를 응시하며 뒤에 보좌하고 선 소연주를 향해 말을 이었다.

“영상 회의가 도시연합장 주재였던가?”

“네. 회의 자료를 검토하실 수 있도록 5시 30분 회의를 5시로 표기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요약본을 준비해 놓았으니 10분 정도는 여유가 있습니다.”

소연주가 김서혁이 원하는 대답만 쏙쏙 골라 했다. 김서혁이 총사령관이 되고부터 쭉 의전을 도맡은지라 아주 입 안의 혀 같았다. 나한텐 잔소리뿐이면서. 왠지 얄미워 이선규는 부러 질색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눈이 마주친 소연주가 소리 없이 얼굴을 찡그렸다. 김서혁이 없었다면 등짝을 한 대 맞았을 것이다.

“이번 회의에 중요한 안건은 없는 걸로 아는데.”

“네. 특별한 사항은 없습니다.”

“그럼 유은우 대련은 내가 상대하지.”

아무리 그래도 유은우가 회의보다 중요할 리 없었으나 김서혁은 벌써 장갑 단추를 끄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전투가 없을 땐 단출하게 입는 김서혁이 오늘따라 제복을 갖춘 채였다. 그가 유독 성가셔 하는 망토만 없다뿐이지, 총엔 핏기가 서려 있었고 군화는 하얀 모래 먼지로 지저분했다. 막 복귀하여 집무실에도 들르지 않고 곧바로 온 모양이었다. 표정은 역시나 좋지 않았다.

“이선규.”

김서혁이 장갑과 코트를 차례로 관람석 의자에 던지며 이어 말했다.

“군에서 허용하는 체벌 외에 개인적으로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시정하겠습니다.”

냉큼 대답했으나 김서혁의 얼굴을 보니 이미 신뢰를 잃은 지 오래 같았다. 김서혁이 힘을 주어 덧붙였다.

“특히 머리는. 유은우는 설계 난독증이다. 머리에 충격은 좋지 않아.”

“하지만 설계 난독증과 머리 충격은 이렇다 할 상관관계가……. 죄송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겨우 꿀밤 몇 대 가지고 김서혁은 징계라도 내릴 법한 눈을 했다. 더 이상의 말대꾸는 용납이 안 될 것 같았다. 슬쩍 돌아보니 유은우는 이미 대련장 한가운데에 딱 자리를 잡고 서서 기본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아주 신났네, 신났어.

김서혁이 대련장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유은우와 마주서자 오가던 군인들이 금세 몰려들었다. 둥그렇게 모여 선 어깨 사이로 유은우가 자세를 가다듬는 것을 바라보는데 정강이에 무언가 툭 닿았다. 돌아보니 소연주가 관람석에 앉아서 군화를 까딱이고 있었다. 그녀가 이선규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김서혁만 보며 물었다.

“이선규, 바빠?”

이선규는 소연주 앞에 얼굴을 디밀었다.

“내 얼굴 좀 보고 얘기해 주라.”

소연주가 힐끔 이쪽을 보았다. 이선규는 재빨리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립스틱 바꿨지? 잘 어울린다.”

“바쁘냐고.”

“왜? 우리 연주 데이트 신청이라면 내가 없는 시간도 만들…….”

“시간 많나 보네. 중앙 휴게실 좀 다녀와.”

“왜?”

“윤환이 왔대.”

“뭐? 진짜?”

등 뒤로 함성이 와아 울렸다. 유은우가 김서혁을 제대로 한 방 먹인 모양, 아니, 또 김서혁이 일부러 힘을 빼고 받아 준 게 틀림없었다. 돌아보지 않고 재차 물었다.

“다시 군에 온대?”

“아니. 잠깐 서류 떼러 왔대. 학교에서 뭐 제출하라고 했나 봐.”

“아…….”

김이 팍 샜다.

“난 여기서 대기하고 있다가 대장 모셔야 되니까, 이선규 네가 가서 학교는 왜 갔는지, 군에는 언제 돌아올 건지 한 번 더 물어봐.”

“대답 안 하던데. 그냥 쉬고 온다고.”

“학교에서 겉돈대. 그럴 거면 다시 군에 오라고 해. 좋을 줄 알고 내려갔다가 후회하는데, 자존심 때문에 못 돌아오는 걸 수도 있잖아.”

“흠.”

“처음엔 졸업하고 온다고 했지만 그게 말이 되냐고. 5년이나 학교에서 썩는다고? 뭐 하러 재능을 낭비해. 언제 다시 군으로 올 건지 그것만이라도 대답 듣고 와. 윤환이 네가 없으니 너무 힘들다고 징징대서라도. 너 그런 거 잘하잖아.”

“나랑 만나 주면.”

“나 연애 안 한다고 몇 번을 말해.”

“나는 하고 싶은데. 너랑.”

소연주는 언제나처럼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이선규는 늘 그랬듯 가만히 기다렸다.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싱긋 웃으려고. 그러나 소연주는 앞만 똑바로 보고 앉아 있었다. 이선규는 그 끝을 더듬어 보았다.

김서혁이 유은우를 뒤로 눕혀 눌러 완전히 제압하고 있었다. 유은우가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김서혁이 무릎으로 등을 간단히 눌러 버렸다. 주위를 둘러싼 군인들이 환호하며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이선규가 넌지시 말했다.

“대장 멋있지? 쟁쟁한 집안에서 혼담이 하루걸러 하나꼴로 들어오는데 다 거절한대.”

“길게도 떠본다. 나 대장 안 좋아해. 내 스타일 아니야.”

“그럼 어떤 남자 좋아하는데?”

“알아서 뭐 하려고?”

“내가 그렇게 되려고.”

“과거를 지울 수 있겠냐.”

소연주가 말을 뱉고는 미미하게 턱을 굳혔다. 말실수라고 느낀 것 같았으나 이선규는 전혀 걱정할 게 없었다. 당당하게 외쳤다.

“과거? 무슨 과거? 나 깨끗해. 박민준한테 물어봐. 나 학교 다닐 때 연애 한번 안 했어. 무론 나 좋아하는 여자들은 많았지. 근데도 내가…….”

“여자 말고. 됐다. 잊어버려.”

소연주가 목을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능숙하게 김서혁이 던져 놓은 코트와 장갑을 챙겼다. 유은우를 배려하여, 혹은 김서혁의 눈치를 보며 유독 느리게 이어지던 카운트다운이 끝났다. 등 뒤에서 함성이 울렸다. 결국 유은우가 진 모양이었다. 소연주가 다시 한번 목을 가다듬었다. 시선을 피하는 표정이 어색했다. 이선규는 얼굴을 굳혔다. 설마. 막 김서혁에게로 가려는 소연주의 팔을 잡아챘다. 소연주는 멈춰 섰다. 평소라면 학을 떼며 팔을 뿌리쳤겠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시선은 여전히 아래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이선규는 잇새로 물었다.

“또 누가 알아?”

소연주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이선규는 웃지 않았다. 소연주가 낮게 말했다.

“어디서 들은 게 아냐. 내가 추측했어. 너 진급 안 된다고 술 퍼먹고 징징거린 날. 내가 생각해도 이상해서. 그래서 나 혼자 알아본 거야.”

이선규는 소연주를 빤히 보았다. 소연주가 잡힌 팔을 빼내더니 말했다.

“행정실 가서 네 자료 좀 뒤졌어. 혹시 내가 모르는 징계 기록이 있는지, 아니면 입대 성적이 안 좋은지 당최 궁금해서 살펴봤는데 깨끗하더라. 대장이 널 계속 진급 1순위로 평가한 것도 줄줄이 나오고. 그런데 평가 위원회에서 심사 점수가 낮게 나오더라고. 그러니 이유가 달리 뭐가 있겠어. 몰래 가서 본 거니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아, 말도 못 하겠네.”

“자료 몰래 뒤졌다가 걸리면 어쩌려고 그걸 찾아봤어? 뭐 때문에 진급 늦는지 나한테 알려 주려고?”

“바보야, 그게 중요해? 네가 다른 데 발 들인 전력이 있다는 걸 누군가 이미 안다니까. 어쩌면 대장도 알고 있을지 몰라.”

소연주가 말을 멈추고는 혀를 찼다. 이선규는 묘한 기분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래서 나한테 마음 안 주는 거야?”

“아직도 그 소리야?”

소연주가 어이없어했다. 이선규는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잠시 한눈팔았다고 해서, 나하고 엮이고 싶지 않다 이거지?”

“야, 무슨 말을 그런 식으로 해. 난 그냥……. 됐다. 네 마음대로 생각해.”

“네가 나하고 엮이는 거 불편하다니까 앞으론 그냥 혼자 조용히 좋아할게. 그럼 너도 상관없을 거 아냐.”

“내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이선규는 잠시 숨을 골랐다. 소연주의 차가운 낯을 응시했다. 그는 처음 입대하던 날을 기억했다. 소연주가 그의 첫 상사였고, 이후 동경하며 순식간에 동료가 되었으며, 어느 순간 전부가 좋아졌다는 걸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긴 전투로 고단하여 눈만 겨우 붙일 때 소연주가 다가와 말없이 홀스터에 약물을 채워 주었던 순간. 첫 휴가를 받아 고향에 다녀온 기념으로 열쇠고리를 사 와서 뿌렸더니 죄 시원찮은 반응을 보이는 동료들 사이로 소연주만 유일하게 그 자리에서 바로 열쇠에 달았던 일. 술자리에서 이선규가 장난으로 한 약속에 아무도 안 나왔는데 소연주만 나와서 기다렸던 것. 온통 입 밖으로 내기에 사소한 것들이었다. 눈처럼 소복소복 쌓이고 쌓여 그 수많은 무늬 중 사실 어떤 걸 골라야 할지 나야말로 어렵기만 한데. 애써 입 밖으로 내면 겨우 그것 때문이냐고 타박을 들을 것 같아서.

이선규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다. 다 좋아.”

소연주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가볍게 어깨를 밀쳤다.

“바보같이. 네 앞가림이나 해.”

그러더니 성큼성큼 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이선규는 가만히 좇았다. 절도 있게 코트를 건네는 소연주와 무심히 받아 드는 김서혁, 그 옆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는 유은우까지 보고, 이선규는 천천히 대련장을 등지고 나왔다.

소연주 앞에서 의연하던 속은 복도를 돌자마자 뒤집혔다. 숨을 가다듬고 뒤늦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을 때 누군가 시선에 턱 걸렸다. 복도 끝, 빛이 들지 않아 어두운 그늘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눈을 가늘게 떴다.

한 사람은 체격이 꽤 컸는데 뒤돌아 있어 등만 보였다. 맞은편에 있는 사람은 몸을 기울이자 얼굴이 드러났다. 빛이 옅은 머리칼에 보는 사람의 눈이 번쩍 뜨이도록 화려한 익숙한 낯이었다. 정윤환이 잔뜩 경직된 표정으로 무언가 작은 것을 상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상대방이 돌아서서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언뜻 스치는 얼굴이 낯익어 이선규는 미간을 좁혔다. 김승훈.

기억에 산재하던 파편이 와르륵 들고 일어섰다. 정성민의 죽음. 그러나 크게 다치지 않은 그의 친동생.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냐고 거듭 물어도 웃으며 고개를 젓던 정윤환. 기밀을 내주는 조건으로 발을 빼고 나서도, 지속적으로 협박하듯 정보를 요구하던, 그러나 어느덧 사그라진 메시지들이 잔상으로 떠올랐다.

이선규가 숨을 멈춘 사이, 정윤환은 반대쪽 코너를 돌아서 사라졌다. 이선규는 팽팽하게 서서 양쪽을 번갈아 보았다. 어디를 먼저 잡아야 할지는 자명했다. 무언가를 건네받은 증거가 있는 쪽. 즉각 복도를 가로질러 계단을 내려갔다. 층계참에서 김승훈을 잡아채 벽으로 몰아붙였다. 그의 손을 낚아채 펼쳤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멱살을 잡았다.

“뭐 받았어?”

김승훈이 목이 졸린 소리를 냈다. 그러나 눈은 지겨워 보였다. 김승훈이 이선규의 손을 뿌리치더니 낮게 말했다.

“네가 뭔데.”

“윤환이한테 뭐 받았냐고?”

“이제 와서 왜 이래?”

귀찮다는 듯 눈을 찡그리는 김승훈의 멱살을 다시 틀어쥐었다.

“미친놈이 이제 윤환이까지 건드려? 쟤 김서혁 소관이야. 너희가 손댈 건덕지가 아니라고!”

“저쪽에서 자진해서 들어왔는데.”

“뭐?”

“정윤환이 반란군에 직접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고.”

손에서 힘이 스르륵 풀렸다. 김승훈이 이선규의 손을 쳐 냈다. 그가 냉담하게 말했다.

“뭐가 그리 놀라워? 너도 그런 식으로 들어왔다가 네 멋대로 나가 놓고 벌써 잊었어? 네가 빠져나가서 어쩌나 했더니 빈자리는 또 어떻게든 메워 지네. 너보다 훨씬 나아. 여러모로.”

김승훈이 짜증이 역력한 기색으로 벌겋게 된 목을 쓸었다. 이선규는 이를 악물었다. 어쩐지. 정윤환 이 자식, 낌새가 심상찮더라니 결국. 가까스로 물었다.

“아까 받은 거 뭐야?”

“네가 참견할 바 아니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정윤환을. 양심은 개한테 줬냐? 정성민이 왜 죽었는데! 집안 하나 파탄 내고 싶어? 건드려도 좀 돌아가며 건드려!”

“야, 이선규.”

김승훈이 눈을 내리깔았다. 하찮기 그지없다는, 이선규가 반란군에서 나오겠다고 했을 때 받았던 그 눈빛이었다. 그가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 신경 꺼. 네 과거 다 까발리기 전에.”

“너는 뭐 얼마나 깨끗해?”

“더 이상 선 넘으면 같이 죽겠다는 걸로 알겠다고.”

“정윤환 건드리다가 너 꼬리 잡히는 거 순식간이야. 김서혁이 정윤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서 그래?”

“그러니까 네가 왜 참견이냐고. 그 새끼도 집안 제대로 꼬였던데, 너도 뭐 먼 친척이라도 되냐? 같은 핏줄치곤 네 실력이 너무 형편없는 거 아냐?”

“네 말대로 정윤환 같은 인재를 꼭 손에 쥐고 흔들어야겠어?”

“그렇게 아까우면 어디 박물관에 모셔다 놓으시든가. 인재도 우리 손에 있을 때야 인재지. 안 그래?”

김승훈이 씹어뱉듯 말하고는 어깨로 이선규를 밀쳤다. 이선규는 거칠게 밀려나 김승훈이 성큼성큼 멀어지는 것을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와 얼른 삼켰다. 그 뒤 묘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그래도 난 할 만큼 했다는 서늘한 안도였다.

상관없어. 그냥 이렇게 살기로 했는데 뭘 새삼스레. 있는 듯 없는 듯 그게 내 삶의 모토 아니던가. 반란군에서 조용히 발 빼려고 내가 얼마나 애썼는데…….

이선규는 정윤환을 볼 자신이 없었다. 반가움은 말라붙은 지 오래였다.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소연주의 당부가 있었기에 느릿느릿 중앙 휴게실로 갔다. 바람과 달리 정윤환은 너무나 쉽게 눈에 띄었다. 제복은 당연히 아니었고, 교복도 아닌 가벼운 사복인데도 휴게실 입구부터 정윤환만 보였다. 그는 주머니에 양손을 꽂고 비스듬히 서서 군인 하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상대는 박민준이었다. 그는 턱도 까칠하고 세수도 안 한 몰골이었으나 오랜만에 환하게 웃고 있었다. 당직이라서 일찍 들어가 쉰다더니 정윤환 왔다는 소리에 부리나케 달려온 듯했다.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여 무어라 말을 퍼붓는 박민준에 비해 정윤환은 대화에 흥미가 없어 보였다. 지루해한다기보다 초조해 보였다.

빨리 자리를 뜨고 싶겠지. 능히 짐작이 갔다. 정윤환은 학교에 낼 서류 따위로 군에 들른 게 아닐 터였다. 김승훈에게 지시를 전달한 이상 볼 일은 끝났을 것이다. 오래 머물면 혹여 의심을 살 수 있었다. 정윤환은 숨만 쉬고 서 있어도 주목을 끌었으니.

그러나 박민준은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윤환이 너 이제 그만 돌아와. 너 없으니까 누구 하나 입바른 소리 하는 사람도 없고 재미 하나도 없다. 서재희도 곧 입대할 텐데. 너랑 친하다며.”

“어……. 어?”

줄곧 건성으로 대답하던 정윤환이 눈을 굳혔다.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재차 물었다.

“서재희? 걔는 갑자기 왜? 설마 이번에 지원했어? 난 못 들었는데.”

박민준이 다소 당황하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에 지원한 건 아닌데 입대야 시간문제지. 그 정도면 조기 졸업할 수 있지 않아? 당연히 여기 들어오고 싶겠지.”

정윤환이 마른 손바닥으로 눈을 거칠게 문질렀다. 그가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만약에 지원한다고 해도 본인 의지가 아닐걸.”

“무슨 뜻이야?”

“교장이 할 거란 뜻이야. 원서도 서재희 모르게 넣겠지.”

“……교장이 왜 그런 짓을 해?”

“합격이야?”

“어?”

“형이 보기에 어때. 만약에 서재희가 지원하면 붙을 것 같아?”

“그걸 말이라고……. 우린 환영이지, 무조건. 여기 서재희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걔 사이렌 들으면 병신 되는데.”

이선규는 미간을 좁혔다. 서재희를 둘러싼 그 무성한 소문 중 사이렌은 들은 적 없는데. 정윤환이 입매를 비틀었다. 목소리에 기이하게 혈색이 돌았다.

“트라우마 있어. 걔 어릴 때 제8도시 박살났었잖아. 그때야 언론에서 쉬쉬했다지만 이제 역사 추적이니 뭐니 다 알게 된 마당에, 그런 일을 겪은 애가 정상이라고……”

박민준이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그가 정윤환을 향해 재차 물었다.

“확실해?”

“어. 사이렌 들으면 공황 와.”

정윤환이 명료하게 대답하며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그가 빈 호흡기를 꺼내 들고 쐐기를 박았다.

“아무튼 서재희 군에 들어오면 영원히 나 못 볼 줄 알아.”

박민준이 눈을 찡그렸다.

“싸웠어?”

“차라리 싸운 거면 좋겠다. 안정제 있어?”

“야, 너 손!”

이선규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꽥 질렀다. 정윤환과 박민준이 동시에 이쪽을 바라보았다. 이선규는 빠르게 다가가 정윤환의 손을 잡아채 꾹 쥐었다. 차가운 호흡기 사이로 손이 뻣뻣하게 떨렸다. 적당히 보고만 있다가 슬며시 자리를 뜨려던 다짐은 온데간데없이 이선규는 정윤환의 손을 쥔 채 마구 흔들어 댔다.

“너 내가 안정제 물처럼 퍼마시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냐?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놀래라. 좀 조용히…….”

“너 이러다 큰일 나! 어? 늙어서 숟가락도 못 쥐고 싶어? 어?”

“왜 이래, 진짜.”

정윤환이 난처한 기색으로 손을 뿌리쳤다. 이어 호흡기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헛기침을 하는 정윤환 앞에서 이선규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괜히 나섰다 싶어 후회하는 찰나 옆구리를 꾹 찔렸다. 박민준이 손을 거두며 물었다.

“은우는?”

“너도 말이야. 남한테 맡겨 놓고 이렇게 너 할 거 다 하고 돌아다닐 거면, 처음부터 네가 하라고.”

“아, 미안. 윤환이 왔다는 소리에 잠이 확 깨서. 은우는? 잘했어?”

“맨날 똑같지, 뭐.”

“이번에도 1승 2패야?”

“너랑 붙었을 때나 한 번 이겨 먹지, 나랑은 어림도 없어. 왼쪽 비는 버릇 빨리 고치라고 해.”

“아, 그거 거의 고쳤는데. 오늘 긴장했나 보다. 대장이 보고 있었나 봐?”

여기고 저기고 유은우에 관해서라면 줄줄 꿰고 있어, 이선규는 피식 웃음이 났다. 김서혁이 유은우를 처음으로 전투에 데리고 나간다고 선언했을 때 박민준이 보였던 반응을 생각하면 지금의 태도는 놀라웠다. 당시 박민준은 김서혁에게 전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매사 조용하고 주장이 약하던 그가 경직된 얼굴로, 미숙한 인원이 투입되면 안전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며 사출하지 않고 버텼다. 김서혁은 강행했고, 유은우는 신고식을 훌륭히 치렀다. 지금은 사해로 나갔을 때 유은우의 컨디션을 체크하는 건 박민준 몫이었다. 누군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가 도맡아 했다.

삭막한 군에서 유은우는 예외 중 예외였다. 칼 같은 김서혁이 아껴서만이 아니라, 그녀의 상황이 그랬다. 정식 군인도 아니며, 금속으로 만들어진 무기도 아니며, 인간이되 인권은 없는, 이렇게 웃고 떠들어도 당장 내일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태로운 위치가 유은우를 특별하게 했다. 이선규는 그녀를 동정하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쉽지 않았다.

“아, 윤환이 너 은우 깨어나고 한 번도 못 봤지? 보고 가.”

박민준이 정윤환의 등을 툭 치며 말했다. 정윤환은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아니. 나는 됐어.”

이선규는 눈을 찡그렸다.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얼굴이 창백해.”

이선규가 이마를 짚으려는 것을 정윤환이 고개를 비껴 피했다. 그가 빠르게 말했다.

“아니, 바빠서. 가 봐야겠어. 차 대기시켜야겠다.”

“바쁘긴 뭐가 바빠. 너 학교에서 수업도 안 듣는다고 소문 다 났는데.”

말끝에 이선규가 장난삼아 어깨를 밀었다. 정윤환은 밀려나면서도 급하게 이프를 눌러 차량을 호출했다. 박민준이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여 말했다.

“왜? 은우 보고 가. 그 소문의 동조율 100짜리가 궁금하지도 않아?”

정윤환이 옅게 한숨을 쉬었다.

“인큐베이터에 있을 때 많이 봤어.”

“그건 거의 죽어 있던 거고. 살아서 움직이는 거 본 적 없잖아. 네가 가서 직접 보고 학교 내려가서 친구들한테 말 좀 해. 위험인물 아니라고. 거기 유명한 애들 많잖아. 차예원이나 서재희나. 여론이 뭐 별거냐. 이렇게 만들어지는 거지. 안 그래?”

“곧 죽을 거.”

정윤환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박민준의 낯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잠시 침묵이 돌았다. 정윤환이 마른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박민준이 딱딱하게 말했다.

“저번에 방송국에서 은우를 무슨 얼굴마담처럼 내보내서 그러나 본데, 제법 해. 오래 살아남을걸. 그리고 은우가 만약 사망한다고 해도, 반드시 사해에서 싸우다 전사해야만 해. 인간이 휘두르는 공권력 때문이 아니라.”

“정붙이는 쪽만 힘들지.”

“적어도 대장 앞에선 그런 말 입에 담지 마. 은우 이번에 정예군이 포함된 대규모 전투에 같이 나갈 거야. 서포터들이랑 호흡도 잘 맞고 기대가 커.”

정윤환이 눈을 감으며 손을 들어 말을 막는 시늉을 했다. 박민준은 멈추지 않았다.

“은우가 버텨서 살아남아야 우리 사회가 성장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너한테 은우를 직접 보라고 하는 거고. 그냥 사람이야. 그 애가 원해서 제 몸에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게 아니잖아. 난 정말 너한테 실망했다. 그래도 네가 보수적이진 않다고 생각했는데.”

“변할 수도 있지.”

“인정하는 거야, 지금?”

“그만하자.”

박민준은 할 말이 많아 보였으나 입만 달싹이다 결국 다물었다. 정윤환은 여전히 시선을 피하고 있었으나 목 줄기에 시퍼렇게 핏줄이 돋아 있었다.

이게 이렇게 예민할 일인가. 이선규는 박민준의 등을 떠밀어 그만 가서 자라고 보내 버렸다. 이어 머리를 쓸어 넘기는 정윤환의 낯을 빤히 응시했다. 불쑥 물었다.

“너 오늘 뭐 하러 왔어?”

정윤환이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서류 떼러.”

“무슨 서류?”

“입대할 때 측정했던 기록 같은 거.”

“그게 학교에서 왜 필요한데?”

“그건 나도 모르지.”

“줘 봐.”

“어?”

정윤환이 이프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왜?”

“줘 보라고, 서류.”

“그러니까 왜?”

“그러는 너는 왜 유은우 얘기만 나오면 예민하냐?”

정윤환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서려다가 버티고 섰다. 그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내가 언제?”

“너 아까 김승훈한테 뭐 줬냐?”

정윤환이 눈을 크게 뜨며 바싹 굳었다. 이선규는 혀를 찼다. 하여간 거짓말은 서툴러서. 낮게 말했다.

“그러게 내가 조심하라고 했지. 한번 발 들이면 인생 망한다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어휴. 내가 도와줄 거 없어? 혹시 나오고 싶은데 못 나오고 있는 거면…….”

“징그럽게 왜 이래. 없어.”

“정윤환, 내 눈 보고 말해.”

정윤환이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마주친 시선이 냉담했다. 정윤환에게서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냉기라, 이선규는 흠칫 놀랐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그게 도와주는 거야.”

“야…….”

“형도 나가지? 이번 전투 조심해. 총 점검 잘하고.”

정윤환이 손을 쭉 뻗어 이선규의 홀스터에서 약물 케이스 하나를 쏙 빼 갔다. 동작이 간결하고 빨라 이선규는 채 막지도 못했다. 정윤환은 제 호흡기에 신경안정제를 딱 소리 나게 끼우고 입에 물었다. 그러더니 몸을 휙 돌려 성큼성큼 가 버렸다.

“……야! 그거 당장 안 빼? 약이 무슨 간식이냐? 전투용이라고!”

정윤환이 저만치서 돌아서더니 뒤로 걸으며 씩 웃었다. 언제 그리 심각했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망가져도 내 몸인데.”

그러더니 손 인사를 하고 완전히 돌아서 가 버렸다.

이선규는 참았던 숨을 천천히 몰아쉬었다. 습관적으로 오른쪽 홀스터의 총을 쥐었다가 놓았다. 이내 이프를 눌러 전투 일정을 열었다. 쭉 훑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종사 명단에 김승훈이 있었다.

입술 안쪽을 짓씹었다.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이든 관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힘들게 빠져나온 덫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긴 죽기보다 싫었다. 이선규는 천천히 중앙 휴게실을 나오면서 단 하나만 생각하려 애썼다. 나의 안위.

김승훈을 찾아가 메모리의 내용을 실토하게끔 할 수도, 김서혁에게 이번 전투에서 김승훈을 제외시켜 달라고 청할 수도, 정윤환을 붙잡아 부드럽게 달래 볼 수도, 혹은 사무실에 찾아가 확인해 볼 수도 있었다. 정말 학교 측에서 정윤환에게 서류를 요구했는지. 정윤환이 정말 서류를 발급받았는지. 군에 출입할 때 정윤환이 어떤 명목으로 허가를 받았는지. 그러나 그 수많은 선택지 중 어느 것도 해서는 안 되었다. 나를 위해서라면.

그때 누군가 등을 툭 쳤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서늘한 복도에 소연주가 있었다. 그녀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뭐 해? 정신 빼고. 윤환이 봤어?”

“어. 방금 갔어.”

“학교 때려치우고 돌아오라고 말했어?”

“그럴 생각 없어 보이던데.”

“아, 그래……. 진짜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네. 어때 보였어? 여전히 잘 지내지?”

“별로 달라진 거 없었어. 그냥 평소랑 똑같더라.”

이선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힘주어 덧붙였다.

“근데 그게 좋은 거잖아. 평소랑 똑같은 거. 평탄한 삶이 원래 제일 어려운 거야.”

“뭐래. 술 마셨냐?”

소연주가 핀잔을 주더니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정예군들 전부 다 호출해. 은우까지. 이번 전투 배열 마지막으로 점검하게.”

이번에 총 점검 프로그램 누가 가동해? 늘 하던 대로 모함 조종사 담당인가? 김승훈이 이번 모함 조종간 잡던데 다른 사람으로 바꾸면 안 될까?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눌렀다. 불덩이를 삼키니 목이 타는 듯 말랐다. 이내 재빨리 소연주 옆으로 따라붙었다.

아무 일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럼 소연주는?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이선규는 소연주와 보폭을 맞추며 그녀의 쌀쌀한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음을 꾹 짓이겼다. 만약 이번 대규모 전투에서 반란군이 어떤 음모를 계획하고 있고 그것이 성공한다면? 정윤환이 관여하고 있다면 그 무슨 일이든 견고해진다. 이선규는 넌지시 말했다.

“이번 전투에서 내 옆에 있으면 안 돼?”

“뭔 소리야.”

“안 돼?”

“진심으로 묻는 거야? 지금 이 배열이 최선이야.”

“네가 위험해지면 내가 지켜 주려고 그러지.”

소연주가 멈춰 섰다. 그녀가 제정신이냐는 표정으로 이선규를 올려다보았다.

“바보냐? 네 그 발상이 제일 위험하다. 친한 친구 팀에 넣어 달라고 징징거리는 생각 없는 신입들이랑 너랑 다른 게 뭐야? 적재적소에 사람이 들어가야 모두가 안전해지지. 그럼 네 말대로 하면 대장은 전투 내내 유은우 옆에 꼭 끼고 돌아다니겠네. 아주 볼 만하겠어. 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멸하겠다.”

그러더니 소연주가 쏘듯 물었다.

“왜, 뭐 할 말 있어?”

“……아니. 아무것도.”

다시 소연주를 따라 걸으면서 이선규는 홀스터의 총을 꾹 쥐었다가 놓았다. 내가 외면했으니 그 어떤 결과도 받아들여야 함은 알았으나 쉽지 않았다.

힘든 전투가 될 것이다. 어쩌면 이선규의 짐작보다 꽤 길게 이어질지도 모른다. 사해에서, 혹은 사해가 아닌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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