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깨진 순
“유태헌은?”
“시신은 모함에 실으라고 지시했습니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자네가 가서 가져와.”
“하지만 임유현 총사령관님께서 시신을 직접 확인하시겠다고…….”
“내가 직접 죽였다. 사망이 확실해. 시신은 여기 버리고 간다.”
“중장님.”
“시신은 운송 중 분실한 거다. 그 책임은 내가 지겠다. 자네와 나만 아는 사실이야. 함구하도록.”
차인호는 총을 홀스터에 꽂았다. 눈이 따가웠다. 오랫동안 모래 바람에 스쳐 건조한 목을 가다듬었다. 턱짓으로 가리켰다.
“시신은 저기 놔.”
백정명은 더 이상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대답 없이 차인호가 가리킨 폐허를 응시했다. 어린아이를 품은 채 무너진 건물 어디에서도 인기척은 느낄 수 없었다.
황망한 얼굴의 백정명을, 차인호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시를 즉각 수행하지 않는 수하에게 당연히 낼 수 있는 질책은 삼켰다. 백정명도 아이가 있었다. 아들이라고 했던가. 차인호의 기억이 맞다면 작년에 태어났으니 차예원보다 세 살 어렸다. 테스트를 치를 나이는 아니었지만 부모가 둘 다 동조자이니 아들 또한 동조자일 확률이 높았다. 하나 지금은 동조자 여부보다 하루걸러 옮아오는 열감기 따위에 마음이 쓰일 때였다. 넘어져 무릎만 까져도 마음이 덜컹하니, 아이에게 해를 끼칠까 만사가 조심스러웠다. 그것이 혹여 미신 따위라 해도……. 차인호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재차 말했다.
“저기 놓고 대충 잔해로 덮어. 보이지 않게 해.”
“반란군에게 무덤은 당치 않습니다.”
그제야 백정명이 작게 대답했다. 차인호가 딱딱하게 말했다.
“무덤이 아냐. 시신을 버리고 그 위에 쓰레기를 쌓으라고 하는 것뿐이다. 하고 싶지 않으면 내가 하겠어.”
“아닙니다. 계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백정명은 그 이후로 더는 주저하지 않았다. 지금 이곳엔 백정명과 차인호 둘뿐이었으며, 그들은 어린 자식을 키우고 있었다. 그 사실이 둘에게 묘한 연대감을 가져다주었다.
백정명은 핵심 설계 몇 가지를 정교히 다룬다는 명성답게 그 어떤 소란도 없이 조용히 유태헌의 시신을 가지고 돌아왔다. 저만치 아스라이 보이는 모함에서 군이 전리품과 포로를 싣는 동안, 백정명은 폐허에 유태헌을 눕히고 그 위에 콘크리트와 철골 따위를 쌓아 올렸다. 시신이 가려지기까지 수 초도 걸리지 않았다.
어린 자식을 품고 무너진 거대한 건물과 그 앞에 놓인 작고 초라한 아비의 무덤을 보면서, 차인호는 유태헌의 아내를 떠올렸다. 그러나 도리가 없었다. 그녀의 시신은 온전하지 못했다. 반란군을 만나 긴 추격전을 치렀던 길목을 따라 그녀의 일부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을 터였다. 군이 유태헌을 사로잡는 설계의 매개체로 아내의 시신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것까지 수습하는 건 무리야. 이 정도 했으니 설사 내 아이에게 불길한 기운이 옮겨 오지는 않겠지. 거듭 되뇌었다.
백정명이 총을 홀스터에 꽂고 차인호 곁으로 돌아왔다. 차인호는 자신이 죽인 사람을 기리는 우스꽝스러운 무덤을 응시하면서, 백정명에게 중얼거렸다.
“자네도 해. 부정한 기운을 씻어 줄 걸세.”
의미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럼에도 둘은 정성껏 고개를 숙였다.
죄는 쌓았어도 죄책감은 덜고 온 덕분인지, 어린 딸은 지독한 감기를 무사히 넘기고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해 보였다. 제 아빠가 혁혁한 공을 세우고 돌아와 세간의 화제가 됨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간 눈으로 서툰 젓가락질을 하는 차예원을 보고 있자니 사해에서 있었던 일은 전부 꿈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차인호는 막상 제 식사는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차예원만은 배불리 먹인 후 소중히 안아 들고 도시연합 본부를 걸었다. 사해에서 막 돌아와 도시연합장의 치사를 들을 때도 실감이 나지 않던 위치가, 딸을 안고 복도를 가로지르니 한결 선명해졌다. 이걸로 훨씬 안전해진 거지. 아내를 잃듯 딸을 잃을 수는 없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임유현을 죽이고 같이 죽을 각오였다.
“아빠, 아빠.”
문득 차예원이 차인호의 어깨를 꼭 잡아 왔다. 그 들뜬 목소리에 차인호는 퍼뜩 앞을 보았다.
“응?”
“저기. 저어기.”
차예원이 손을 쭉 뻗어 복도 한쪽을 가리켰다. 그 끝에 일고여덟 살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정수기에 물총을 가져다 대어 물을 받고 있었다. 발밑엔 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모자가 동그마니 떨어져 뒹굴었다. 아이는 차인호도 큰마음 먹고 사야 하는 값비싼 브랜드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소매를 아무렇게나 쭉쭉 걷어붙이고 앞섶은 빨간 케첩으로 범벅이었다. 어찌나 엉망인지 자기 아들도 아니건만 차인호는 그만 달려가서 옷에 묻은 걸 닦아 줄 뻔했다.
“예뻐.”
차예원이 웅얼거렸다. 장난감 가게에서 마음에 쏙 드는 인형을 발견한 듯 눈이 초롱초롱했다. 드물게 확연한 호감에 차인호가 당황한 찰나 차예원이 어깨를 밀치며 보채기 시작했다.
“내려 줘어.”
“안 돼. 쟤 장난 심하단 말이야.”
차인호는 차예원을 달래며 흘끔 남자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이제 물을 다 받고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물총 뚜껑을 똑 소리 나게 잠그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부스스 귀엽게 헝클어진 옅은 머리칼 아래 아직 다 여물지도 않은 이목구비가 어찌나 섬세한지 보는 이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방송도 여러 번 타고 익히 만나기도 했으나 볼 때마다 넋을 놓게 되는 외모라, 저대로 자라 성인이 되면 어떨까 심히 궁금해졌다.
거기다 만약 동조자라면.
가능성이 상당했다. 부모도 그걸 아니 젖먹이 때부터 미리 아이를 나눠 가졌겠지만. 연예계를 독식하던 여배우가 돌연 건강 문제를 내세우며 활동을 중단했다가 복귀한 시점과, 난임으로 고생하던 중앙병원장의 아내가 바깥출입을 금한 요양 끝에 출산을 한 시기를 세간에서는 자주 겹쳐 화제에 올리곤 했다.
“내려 줘.”
“알았어. 내려 줄게. 대신 저기 가지 말고 아빠 뒤에 있어. 알았지?”
그리 보채던 차예원은 막상 품에서 내려놓으니 수줍은 모양이었다. 차예원은 쭈뼛쭈뼛 차인호의 다리 뒤로 몸을 감추더니 고개를 빼꼼 내밀어 정윤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말간 아이의 얼굴 위로 물줄기가 쭉 쏟아졌다. 깜짝 놀란 차예원이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차인호는 얼른 무릎을 꿇고 앉아 소매로 차예원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환아! 정윤환!”
복도 저편에서 키가 훤칠한 의원 하나가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정선재였다.
“너, 너! 당장 이리 오지 못해!”
정선재는 도시연합장과 면담이라도 있었는지 평소보다 더 말쑥한 차림이었다. 그러나 갖춰 입은 정장이 무색하게도 이마에 땀까지 송골송골 맺힌 채 죽어라 뛰어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물총을 야무지게 움켜잡은 정윤환이 쌩하니 차인호 옆을 스쳐 도망갔다. 차예원에게 물벼락을 날려 놓고 사과 한마디 없이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실수가 아니라 고의임이 한층 명백해졌다.
“이놈의 자식! 이리 안 와? 그놈의 물총 잡히기만 하면 내가, 억!”
정선재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정윤환이 정선재의 얼굴에 쏜 물총을 거두더니 잽싸게 뛰어 멀어져 버렸다. 정선재는 잠시 멈춰 서서 얼굴을 훔치고 정장 재킷을 벗어 들었다. 그러더니 정수기 아래 동그마니 떨어져 있는 모자를 낚아채듯 줍고는 이쪽으로 뛰어왔다. 그대로 그는 맹렬한 기세로 차인호의 옆을 스쳐 정윤환의 뒤꽁무니를 쫓아 사라졌다.
“……괜찮아?”
차인호가 다정히 물었다. 차예원은 이제 눈물을 그치고 간혹 훌쩍거리기만 했다. 살면서 처음 맞아 본 물총에 어찌나 놀랐는지 뻣뻣하게 굳은 채 차인호의 바지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
“나한테 물 쐈어.”
“예원이랑 같이 놀고 싶어서 그랬나 보다.”
“갖고 싶어.”
“뭐? 물총?”
“아니.”
차예원이 눈을 반짝 빛냈다. 물세례를 맞고 놀란 게 언제냐는 듯 평소의 고집 있는 입매로 돌아와, 차예원이 손을 쭉 뻗어 차인호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쟤. 갖고 싶어.”
차인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정선재가 숨을 몰아쉬며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한 손에는 물이 찰랑찰랑한 물총을, 다른 한 손에는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제 아들의 뒷덜미를 단단히 틀어쥐고 있었다. 화가 날 대로 난 아빠에게 붙잡혔는데도 정윤환은 풀이 죽기는커녕 더 활발하게 뛰듯이 통통 걷고 있었다. 차예원이 재차 강조했다.
“예뻐. 나 가질래.”
“……잘생기긴 했지.”
차인호가 중얼거렸다. 그사이 정선재가 다가와 멈추어 섰다. 아들이 도망갈까 싶어 뒷덜미 옷을 꽉 붙잡은 손등에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그럼에도 강아지처럼 흐트러진 아들의 머리칼을 쓸어 정리해 주는 손길이 익숙하고 부드러웠다. 신나게 노느라 땀이 촉촉한 아들을 앞세우고 정선재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제 아들이 실수를 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차인호가 괜찮다며 고개를 젓자 정선재가 미안하다는 얼굴로 차예원을 바라보았다.
“많이 놀랐지? 미안하다. 환아, 동생한테 미안하다고 인사해야지.”
정윤환은 뒷덜미가 잡혀 있는 상태에서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다가 정선재가 억지로 머리를 누르자 그제야 꾸벅 인사를 했다. 미안한 기색은커녕 해맑기만 했다. 그때였다. 차예원이 정윤환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대로 쭉 당기며 ‘내 거!’라고 외치는 차예원을 차인호가 당황하여 떼어 놓았다.
“예원아, 손 놔. 아드님이 참 잘생겼습니다.”
“아, 예. 따님도 귀엽……, 환아, 안 돼! 이건 나중에 줄게.”
정선재가 물총을 높이 들어 정윤환의 손이 닿지 않도록 했다. 그럼에도 정윤환은 포기하지 않아, 정선재는 결국 정윤환을 번쩍 안아 들었다. 자주 있는 일인지 제법 큰 아이인데도 안는 품이 익숙해 보였다.
“아이 하나 키우는데도 정신이 없네요. 사회성 부족하고 산만한 것이 ADHD가 아닐까 싶어 상담도 받았는데 아니라고 해서…….”
정선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윤환이 안긴 자세로 정선재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볼에 쪽 뽀뽀를 했다. 정선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아빠가 웃으니 신이 나서 볼에 냅다 뽀뽀 세례를 퍼붓는 정윤환과 이미 화가 다 풀린 듯한 정선재를 보며, 차인호가 넌지시 말했다.
“어릴 때 산만한 아이들이 설계를 잘한다는 이야기도 있잖습니까.”
“하하. 아직 동조자 테스트를 받지도 않아서요.”
“올해입니까, 테스트가?”
“아닙니다. 내년입니다. 아직 일곱 살이라.”
정선재가 웃음기를 거두고 조심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럴 만도 했다. 항간의 수군거림을 본인도 모르진 않을 테니. 그래도 형제끼리 나눠 갖는 건 약과였다. 일명 족보만 보고 비싼 돈 주고 아이를 사들였다가 후에 동조자가 아니라고 버리는 일은 없을 테니.
만약 동조자가 아니라면. 동조자가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아이를 낳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특히 신분 상승을 꿈꾸는 저소득층이 그랬다. 정부에서 비동조자가 일정 비율 이하인 집안의 부부에게는 출산 제한을 고려하고 있을 정도로.
그러나 정선재에게 그런 일은 없어 보였다. 그의 제수인 주신희는 희대의 여배우였다. 동조자만 기대하며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기에 그녀의 시간은 가치가 컸다. 게다가 주신희의 첫째는 이미 동조자로 판명 났다. 어쩌면 도시연합 중앙학교까지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동조자가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이리 예쁜걸요. 사실 요새는,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가끔 합니다.”
그 말에 차인호는 정선재를 빤히 보았다. 정선재는 차인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뺨에 이마를 붙이고 어느새 얌전해진 정윤환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한 차례 헝클어뜨렸다. 정선재가 차인호의 시선을 느꼈는지 문득 눈을 들었다. 그가 웃었다. 왠지 쑥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선재가 말했다.
“이런 말 조금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차인호는 차예원이 비동조자로 판명되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그래도 차예원은 여전히 예쁠 것이다. 그러나 아쉽지 않다고는 할 수 없었다.
“동조자가 아니면 배우를 시켜도 되겠는데요.”
태가 남다른 정윤환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차인호가 말했다. 정선재가 사람 좋게 웃었다.
“제안은 많이 옵니다만, 아이 엄마가 방송에 내보내는 걸 꺼리는지라.”
“이해합니다.”
“중장님께서도 인터뷰 많이 하시지요? 반란군 수장을 잡은 건 처음이니까요. 대단하십니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다시 한번’이라는 언급이 의미심장했다. 차인호는 사무실에 돌아가면 축하 메시지를 보내온 명단을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선재는 도시연합과, 특히 임유현과 노선이 달랐으나 그의 평소 성격을 생각해 보며 축하를 하고도 남았다. 하긴 그 모난 데 없는 성격과 훤한 외모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 위치까지 오지 못했을 테지.
“중장님.”
정선재가 쾌활하게 말을 붙여 왔다. 그리 친하게 지낼 위치도 사이도 아니건만 워낙 서글서글한 태도에 차인호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 다큐를 찍자는 제안도 많이 들어올 겁니다. 제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지만 되도록 안 하시는 걸 권합니다.”
“아, 어차피 생각이 없어서.”
“그렇군요. 항간에 듣기로 오명을 벗기 위해 출연한다는 소리가 다소 들려서요. 걱정했습니다.”
“그런 소문이 돕니까?”
“금방 조용해질 겁니다. 중장님이 결백하다는 판결은 이미 나왔으니까요. 제가 괜한 이야길 했나 보네요.”
“괜찮습니다.”
그리 대답했으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내가 죽은 지 불과 몇 달이었다. 살해 누명을 벗기까지 임유현 앞에 수없이 무릎을 꿇어야 했다. 어린 딸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가족은 노출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특히 정계로 진출하실 생각이라면요.”
“네?”
차인호는 미간을 좁히며 정선재를 보았다. 정선재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낮았다.
“홀로 딸을 키우려면 사해보다는 도시가 나으니까요. 언제까지 군에 계실 겁니까. 임유현 총사령관님께서도 중장님을 더 이상 사해에 두지 않겠다고 말했다던데요. 이번 공적도 그렇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일 저희 집에서 작은 모임이 있습니다. 시간 괜찮으시면 한번 오시지요.”
차인호는 낮게 숨을 토했다. 그는 말을 부드럽게 하려 애썼으나 쉽지 않았다.
“의원님, 상식적으로 제가 거길 왜 갑니까?”
“앞으로 많이 엮일 텐데 식사도 같이 하고 좋잖습니까. 따님도 저희 아들하고 친해지고 싶어 하는 것 같고요.”
힐끔 아래를 보니 차예원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뚫어져라 정윤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 시선을 받는 정윤환은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졸린지 제 아빠에게 꼭 달라붙어 눈이 가물가물했다. 차인호는 다시 정선재를 응시했다.
“앞으로 많이 부딪히겠죠. 그마저도 제가 군복을 벗고 도시연합으로 들어온다는 가정하에 말입니다.”
“사모님 일은 정말 유감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사건 이후 변하신 중장님이 더 안타깝습니다. 임유현이 도시연합장이라도 시켜 준답니까?”
“의원님, 제가 그런 자리가 탐나서 이러는 걸로 보입니까?”
“그게 아니라면 하루 빨리 이쪽으로 넘어오십시오. 당신 아내를 누가 죽였을 것 같습니까? 누가 당신을 범인으로 몰았으며, 누가 당신을 의혹에서 건졌습니까?”
“그만하십시오.”
“알면서도 가서 빌었겠지요. 저도 압니다. 복수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억울하지 않으세요?”
대화가 낮게, 그러나 날카롭게 이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까무룩 잠이 든 정윤환과 달리 차예원은 예민하게 분위기를 읽고 겁먹은 눈을 했다. 차인호는 고개를 저으며 차예원을 안아 올렸다. 어리고 부드럽고 따뜻한 것을 품에 꼭 안고 다독이며 정선재를 향해 말했다.
“저는 아이가 있습니다. 당신처럼요.”
“압니다. 가족이 있으면 몸이 둔해지지요. 안전이 우선이 되고 모험은 죄가 됩니다. 당신이 나쁜 게 아닙니다. 그렇지만 여럿이 연대하면 아주 외롭지는 않습니다. 지금 발 빼지 않으면 영원히 임유현 밑에서 개처럼 일해야 할 겁니다. 반란군 수장을 잡아서 대중의 주목을 받아 힘이 생긴 지금이 적기입니다. 또 약점 잡히지 말고 넘어오십시오.”
“전 이제 그런 거 관심 없습니다. 제 딸만 안전하면 됩니다.”
정선재는 무어라 더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푹 잠든 제 아들을 추슬러 안으며 작게 말했다.
“딸이 안전해지는 순간 또 다른 욕심이 생길 겁니다. 동조자이길 바라게 될 것이고, 동조자 판명을 받으면 도시연합 중앙학교에 보내고 싶어질 테죠. 무사히 졸업하면 도시연합의 수뇌부에 앉히고 싶을 겁니다. 그러면 임유현의 그늘에 삼켜지는 거 순식간입니다.”
차인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지금 그게 당신이 할 말입니까? 혜택 보려고 아이를 나눠 가진 사람이?”
잠시 침묵이 깔렸다. 차인호는 뱉은 말을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선재는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내 나온 대답은 차인호의 예상을 빗나갔다.
“아이가 갖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동조자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습니다. 아무도 안 믿겠지만요. 처제는 커리어에 지장을 주는 육아를 더는 원치 않았고, 전 아이가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갖고 싶다는 것도 욕심은 욕심이니까 중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함부로 말해 죄송합니다.”
차인호는 천천히 숨을 토했다. 마른손으로 이마를 문지르고 작게 말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막 돌아서려는데 정선재에게 가로막혔다.
“중장님, 그 사건이 있기 전에 저희 쪽에 문의하신 걸로 압니다. 합류할 수 있겠냐고, 도움을 받고 싶다고 제 지인을 통해 여쭈셨지요. 사실…….”
정선재가 잠긴 목을 가다듬고 이어 말했다.
“……제가 반대했었습니다. 당신이 이미 임유현에게 너무 기울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후회합니다.”
차인호는 화도 나지 않았다. 왜 이제 와서 마음이 달라졌는가. 무엇으로 나를 달리 판단하는가. 나는 달라진 게 없으며 상황만 악화되었는데. 그렇다면 이건 동정인가.
“전적으로 제 불찰입니다. 마음이 바뀌면 오십시오.”
말끝에 정선재가 이프를 눌렀다. 메시지가 작은 창으로 솟아올라 차인호의 이프 근처로 포르르 날아와 머물렀다. 정선재는 이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멀어졌다. 그런 정선재의 어깨 위에서 어느새 잠이 깬 정윤환이 동그란 갈색 눈으로 이쪽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복도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차인호는 가만히 서 있었다.
“아빠.”
차예원이 품에서 웅얼거렸다. 차인호는 차예원을 고쳐 안고 등을 어루만졌다. 정선재가 주고 간 메시지가 손목 근처에서 반짝거렸다. 날짜와 시간과 장소. 정선재를 주축으로 한, 현재 도시연합에서 가장 강력하게 반정부 입장의 목소리를 내는 언론인의 모임이었다. 아내의 뜻에 따라 그토록 들어가고 싶었고 비로소 받아 준다는, 그러나 이제는 갈 수 없는 길이 거기 있었다.
차인호는 메시지를 손끝으로 밀어냈다. 푸른 창은 쭉 밀려나다가 이내 파삭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아내가 죽던 날, 차인호는 어린 딸만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사랑하는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한 자기 자신은 그날부로 죽여 버렸다. 앞으로 그 어떤 갈림길을 만나도 길은 하나뿐이겠지만 속죄라고 여기니 차라리 감사했다. 다만 이 선택이 자신을 갉아먹더라도 딸만은 위로 더 위로 올려 보낼 수 있길 바랐다. 감히 아무도 손댈 수 없는, 그래서 언젠가는 나 같은 건 필요도 없이 온전히 안전해질 수 있도록. 그리고 이런 나의 마음이 부디 네게 짐이 되지 않기를.
차인호는 차예원을 깊이 끌어안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아직 가시지 않은 겨울이 희게 얼어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