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스테일메이트
불티가 전신을 할퀴었다.
연기와 피비린내가 바싹 마른 기도로 들이쳐, 서재희는 사해의 모래에 처박힌 채 거칠게 기침했다. 그마저도 곧 색색 쇳소리로 바뀌었다. 어떻게 상처 입고 얼마나 피를 흘렸는지 가늠이 어려웠다. 그저 익숙한 고통에 의식이 가물가물 흩어졌다.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잿빛 하늘이 서서히 땅으로 내려앉는 착각이 들었다. 입 안의 보호칩을 혀로 더듬었다. 절반쯤 닳은 까칠한 표면이 느껴졌다. 웃음이 나왔다.
무엇 하러 남아 있나. 다 녹아 사라져 버렸으면 좋았을걸.
부속선이 폭발하기 직전, 남은 보호칩을 김산의 홀스터에 전부 꽂아 넣은 자신의 기민함에 안도했다. 중간에 살해당하지 않는다면, 김산은 적어도 이틀은 더 살 것이다. 그 외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한세연이 몰고 온 반란군이 언제까지 군의 모함을 막아설지, 서재희가 넘긴 최전선을 이어받은 김서혁이 얼마나 버텨 줄지, 그토록 지키려고 애썼으나 결국 서재희의 판을 제 판으로 뒤집어 버린 정윤환의 시신이라도 수습할 수 있을지.
그리고 유은우.
정윤환을 잃고 겨우 버티던 내면은, 유은우가 부속선에서 홀로 강하했다는, 이선규의 다급한 무전을 받자마자 속절없이 무너졌다. 유은우가 모함의 함교를 깨끗하게 박살 낸 후 잔해와 함께 호선을 그리며 멀어지는 광경을 목격한 순간, 서재희는 실수했다. 단단히 타를 잡고 있던 손에서 설핏 힘이 빠졌다. 바짝 따라붙은 군이 그 틈을 놓칠 리 없었다. 적의 포탄에 날개가 부러지고 남은 동료들을 비상 사출시키기까지 순식간이었다.
고통이, 생이 질겼다. 그러나 이도 얼마 남지 않았다. 피는 묽고 심장은 낡았으니, 이제 정말 끝이다. 짓치는 통증에 서재희는 숨을 들이켜며 사해의 모래를 움켜쥐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지키고 싶었던 사람들은 이제 아무도 남질 않았는데.
처음 유은우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페어를 맺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내가 없었더라면. 그럼 정윤환이 유은우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둘은 도시연합에 목을 틀어 잡힐지언정 살긴 살았을 것이다. 적어도 이런 결말은 아니었겠지. 이렇게 소모적인, 그저 역사의 쳇바퀴에 갇혀서 원점으로 돌아갈 뿐인 외로운 끝은 아니었을 것이다.
앞이 흐렸다.
내 재능도 별거 아니구나. 완벽한 계획, 최선의 선택이라고 자신했는데. 어쩌면 유은우를 사랑하게 된 순간부터 이성적인 판이란 불가능해지고, 그리하여 뿌리 깊이 증오하던 재능이 의미를 잃었는지도 모른다. 유은우는 서재희에게, 감히 손댈 수 없을 만치 자유로이 빛나는 아름다운 변수였다.
어디선가 사이렌이 울렸다. 희미하던 소음은 곧 날카롭게 찢어져, 서재희의 귀를, 가슴을 먹먹하게 메웠다.
과거가 현재를 점령하기 전에, 서재희는 보호칩을 어금니로 옮겨 물었다. 지그시 힘을 주었다.
그대로 깨뜨리려는 찰나였다.
멀건 시야에 무언가 홀로 또렷했다. 저만치, 작은 인영이 힘겹게 버티고 서 있다가 고꾸라졌다.
눈이 번쩍 뜨였다. 서재희는 정신없이 몸을 일으켰다.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몇 발짝 가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휘청거리며 일어나 걸었다. 다시 쓰러졌을 때, 사이렌에 깜박 정신이 흔들렸다. 이를 악물고 몸을 움직였다. 막바지엔 기다시피 하여 다가갔다. 손을 뻗었다.
서재희는 유은우를 간신히 끌어안았다.
작고 여린 몸뚱이는 놀랍도록 차가웠다. 끊어진 홀스터. 희게 말라붙은 입술. 유은우가 눈을 반쯤 떴다. 가냘픈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재희는 유은우에게 입 맞췄다. 물고 있던 보호칩을 다급히 넘겼다. 입술을 떼어 내는 순간 유은우가 서재희의 뒤통수를 틀어쥐고 바싹 당겼다. 축 늘어져 있던 것이 무색하도록 절박한 손길이라,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유은우가 안간힘을 쓰며 보호칩을 돌려주려 했다.
돌려줄 필요 없어. 네 거야. 내 생이니까.
서재희는 단호하게 입술을 떼어 냈다. 유은우가 보호칩을 뱉지 못하도록 입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유은우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그녀가 서재희의 손을 밀어내려 했다. 손목을 잡고 끌어내리려 했다. 서재희는 전력으로 버텼다. 그러나 자꾸만 목이 탔다. 호흡이 가빠졌다. 서재희는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적어도 유은우가 보는 앞에서 죽고 싶지는 않았다. 마지막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제8도시가 폭격 당하던 날 부모님의 부상이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서재희를 괴롭게 했기에, 유은우에게 같은 아픔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은우야.”
우린 같은 터널에 갇혀 있었지. 내가 어두운 안쪽을 응시하고 있을 때, 네가 빛을 쫓아 달려 나오다가, 정면으로 마주치게 된 거야. 사고처럼. 운명처럼. 나는 그제야 비로소 과거에서 풀려나 널 쫓아 달리기 시작했지. 넌 터널 밖에 빛이 있다고 했지만, 내게 빛은 너였어. 네가 날 환하게 밝혀 줬잖아.
“나 너무 오래 기억하지 마.”
부디 날 영원히 간직해 주길. 네가 내게 빛이었으니, 난 네 그림자로라도 남고 싶어.
사이렌이 높아졌다. 숨이 막히며 일순 머리가 핑 돌았다. 서재희는 눈을 꾹 감았다가 겨우 떴다. 오염된 온이 속으로 들이치며 시야는 이미 뭉개진 후였다. 그럼에도 서재희는 필사적으로 유은우를 눈에 담았다. 피와 눈물에 젖어 엉망인, 그러나 언젠가 흰 꽃 너머 눈부시던 찬란함은 그대로였다.
우리가 조금만 더 서로를 이용했다면 어땠을까. 조금 더 건조하게, 조금 더 매몰차게, 자라나는 마음을 발로 짓밟아 부수고, 하다못해 둘 중 하나라도 떨림을 외면했다면 어땠을까. 네가 조금만 더 세상과 타협했더라면, 내가 조금만 덜 어둡게 부서졌더라면, 우리가 견딜 수 있을 만큼만 외로웠다면 어땠을까. 그럼 우리 이렇게 끝나지 않고, 숨죽이며 세계의 일부가 되어 오래 함께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랬다면, 난 널 좋아할 수는 있어도 사랑에 빠질 순 없었을 거야.
“행복해져. 그동안 힘들었으니까.”
울며 정신없이 고개를 젓는 유은우를, 서재희는 사력을 다해 밀어냈다. 유은우가 모래 위로 쓰러졌다. 서재희는 떨리는 손으로 총을 고쳐 쥐었다. 유은우를 향해 겨누었다.
“꼭 살아.”
방아쇠를 당겼다.
탕!
서재희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바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서재희는 눈을 감은 채, 눈동자를 굴려서 눈꺼풀 바깥에서 지글거리는 강렬한 볕을 어루만졌다. 잠으로 무뎌진 감각을 길어 올렸다. 꼼짝도 않은 채 천천히 호흡하면서, 사해에서 겪었던 그 모든 일들은 이제 지나간 지 오래며, 자신의 심장이 여전히 뛰고 있음을 자각했다. 행여나 급하게 눈을 떴다가 피투성이로 쓰러진 유은우를 다시 보게 될까 두려워, 꿈을 꾼 뒤의 기상은 언제나 쉽지 않았다.
서재희는 마른손으로 눈가를 꾹 눌렀다. 눈물이 어른거렸다.
잠을 완전히 떨어냈음에도 꿈속의 사이렌만은 여전히 현실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때 불행을 가지런히 엮었던 붉고 질긴 경고음은, 더 이상 서재희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서재희는 심호흡하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느리게 눈을 떴다.
임시정부의 일출은 아름다웠다.
해는 검푸른 새벽을 날카롭게 찢으며 떠올랐다. 그 뒤로 빛은 커튼처럼 넘실거리며 퍼지곤 했다. 정화된 온이 대기 중에 뭉쳐 띠를 이루고 그 경계의 밀도 차로 발생하는 궤적은 장관이라, 이 광경을 위해 도시를 무너뜨렸냐는 농담도 심심찮게 나왔다.
임시정부 핵심 인사들의 집무실이 대거 몰려 있는 9층은 남쪽이 전면 유리창이었다. 서재희가 일부러 블라인드를 달지 않았기 때문에, 아침은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일정이 바빠 숙소에 가지 못하고 집무실에서 선잠이 드는 날이면, 서재희는 언제나 빛에 익사하며 깨어났다.
깜박 잠들었네.
요 며칠 일정을 당겨 처리하느라 무리하긴 했다. 서재희는 의자에 앉은 채 조느라 뻣뻣해진 목을 한 손으로 가볍게 주무르며 이프로 시간을 확인했다. 6시 5분. 책상 위의 일정표가 반짝거렸다.
용 해방 3년 3월 5일.
06:00 사해환경과학원·온오염도 측정소 사해정화 공동조사팀 복귀.
서재희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쪽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대규모 조사팀을 싣고 돌아온 모함이 방금 본부에 착륙했을 터였다. 모함의 진입을 알리는 사이렌이 끊어지자 정적이 감돌았다. 그저 손을 저으면 묻어날 것처럼 환한 햇살뿐이었다.
서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습관처럼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돈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살짝 거울에 비춰 보니 셔츠에 주름이 잔뜩 가 있었다. 개의치 않았다.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넘기며 집무실을 뚜벅뚜벅 가로질렀다. 각종 서류로 어지러운 회의 탁자를 지나 긴 소파 앞에서 멈추어 섰다.
소파에 아무렇게나 엎어져 잠든 전신으로 햇살이 노랗게 번지고 있었다.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부스스한 옅은 머리칼에, 역시 옅은 눈동자는 나붓이 감겨 보이지 않았다. 색색 어린아이나 낼 법한 숨소리가 났다. 서재희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잠들어 버릴 거 본인 숙소에 가서 편하게 자라고 했는데도 기어코 밤을 새우겠다며 바득바득 우기더니, 내 이럴 줄 알았지.
“정윤환.”
정윤환은 미동도 없었다. 죽은 듯 달게 자는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서재희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떨어진 정윤환의 겉옷을 손에 쥐었다. 그대로 몸을 낮춘 채 말했다.
“일어나. 조사팀 돌아왔어.”
정윤환은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서재희는 채근하지 않았다. 잠든 정윤환을 깨우는 것은, 서재희가 드물게 힘들어하는 일 중 하나였다. 그간 정윤환이 뜬눈으로 지새웠을 수많은 밤과, 운명처럼 시달렸을 악몽을 떠올리면, 이리 편안해 보이는데 조금 더 재우면 어떠랴 마음이 약해지기만 했다.
사실 지난밤, 정윤환이 막무가내로 쳐들어와 일거리를 풀어놓았을 때도, 서재희는 남의 집무실에 일 벌여 놓지 말라고 타박하면서도 일부러 온도를 높여 두었다. 덕분에 정윤환은 따뜻하게 덥혀진 집무실이 제 둥지인 양 아주 푹 잠들어 있었다.
서재희는 정윤환의 겉옷을 쥔 채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순간, 겉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 미끄러지더니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졌다. 툭, 묵직한 소리가 났다. 만년필이었다.
서재희는 만년필을 줍기 위해 다시 몸을 숙이다가, 채 손을 대기도 전에 미간을 좁혔다. 서재희가 익히 아는, 정윤환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쓰는 전용 만년필이 아니었다. 낯설었다. 새로 마련했나 싶었으나 표면이 부드럽게 닳아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만년필을 주워 찬찬히 돌린 순간, 왜 처음 보는 것인지 깨달았다.
만년필 뚜껑 끝에 배지가 박혀 있었다. 세월의 흐름에 끝이 깨지고 금이 간, 1학년 배지가 다홍색으로 단단하게 빛났다.
이게 여기 있었구나. 어쩐지 유류품 목록에 없더라니. 서재희는 3년 전 정윤환을 기억했다. 몸이 회복되기도 전에 자원봉사단에 등록하더니 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에서 유류품 수습을 돕는다고 했다. 그때 우연히 주웠을까. 손에 들어온 이상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감히 탓할 수 없었다.
서재희는 손 안에서 만년필을 느리게 굴렸다. 다홍색의 낡은 모서리를 따라 빛이 아름답게 반사되었다. 갖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만년필을 정윤환의 겉옷 안주머니에 조심스레 꽂아 넣었다. 그대로 일어서려는데 정윤환이 몸을 뒤척였다. 근래 팔자에도 없는 종이를 만지느라 거칠어진 왼손이 소파 아래로 툭 늘어졌다.
서재희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기울여 정윤환의 왼손을 응시했다. 손바닥 가득 흉이 처참했다.
정윤환은 절대 자신의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전투에서 생애 처음으로 완벽하게 이타적인 선택을 했다고 서재희에게 여러 번 말해 왔다. 정윤환은 망가진 왼손을 그 명예로운 증거로 여겼다. 그러나 서재희는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한세연의 지시로 반란군이 그들을 도우러 오지 않았다면 정윤환은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모든 전투가 끝난 뒤 간신히 수습되어 숨만 붙어 있던 정윤환의 모습은, 아직도 서재희의 꿈에 빈번하게 등장하곤 했다.
남들은 봐도 못 본 척하는 정윤환의 왼손을, 심심하면 가십거리로 나도는 그 손을, 서재희는 스스럼없이 쥐었다. 조심조심 눌러 가며 세심히 살폈다. 순간, 정윤환의 손에 힘이 딱 들어갔다.
“뭐 하냐. 징그럽게.”
눈이 마주쳤다. 정윤환이 눈을 반쯤 뜨고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서재희를 보고 있었다. 그가 재차 말했다.
“손 안 놔?”
서재희는 즉각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정윤환이 크게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그 왼손을, 서재희는 다시금 응시했다.
“재활이 효과가 있나 봐. 훨씬 부드러워진 것 같은데.”
정윤환이 피식 웃었다.
“무슨 재활 덕이야. 다 서재희 너 때문이지. 나는 네가 진짜로 안정제 유통 금지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렇게 강제로 끊게 될 줄이야.”
차예원만 아니었으면 더 빨리 금지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는데. 몇 번이나 무산된 걸 떠올리면 입이 썼다. 그런 서재희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윤환은 일어나 앉아 강아지처럼 머리를 털었다. 그가 밀어닥치는 햇살에 눈을 찡그렸다.
“해 떴네.”
“남의 집무실에서 온갖 서류 다 펼쳐 놓고 5분 만에 잠들 거면 아예 시도를 하지 마.”
정윤환이 이마를 문지르더니, 탁자 위의 전자 서류를 응시했다. 홀로그램 그래프가 선이 드문드문 끊어진 미완성으로 공중을 천천히 돌고 있었다. 정윤환이 중얼거렸다.
“다 하고 잤어야 했는데. 오늘 조사팀 오는 날 아니야?”
“방금 도착했어. 씻고 바로 나가자.”
“큰일 났다. 오후에 언론에 내보내려고 했는데.”
서재희는 말없이 전자 서류에 손목을 가져다 댔다. 서재희의 이프를 인식하자마자, 얼기설기 허술하게 돌고 있던 그래프가 요동쳤다. 곧 가느다란 선들이 정교하게 뻗어 나가더니 아름답게 맞물리며 환하게 빛을 뿜었다.
“새벽에 내가 완성했어.”
정윤환의 눈이 일순 반짝했다. 그가 늘어져라 기지개를 켜더니 산뜻하게 말했다.
“그래? 고맙다.”
반응이 매끄러워, 서재희는 눈을 찡그렸다. 설마.
“너 혹시 어젯밤에 이거 일부러 들고 왔어?”
“서재희 너도 감이 예전 같지 않네. 유해지긴 했어.”
“……너 나한테 너무 미루는 거 아니야?”
정윤환은 들은 척도 않고 전자 서류를 집어 들었다. 손끝으로 그래프를 다각도로 돌려 가며 유심히 살피는 얼굴이 흡족하기 그지없었다. 몇 마디 타박하려는 찰나, 이프가 진동했다. 서재희는 발신자를 확인하고 인터컴을 스피커폰으로 전환한 뒤 탁자에 보란 듯이 탁 올려 두었다. 정윤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세연 원장님, 서재희입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 네 덕분에 안전하게 다녀왔어. 윤환이 있니? 도통 전화를 받지 않는구나.
정윤환이 전자 서류를 든 채 두 팔을 교차하더니,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재희가 차분히 대답했다.
“또 이프를 꺼 놓은 모양이네요. 옆에서 같이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정윤환이 맥 빠진 얼굴을 했다.
― 재희 네 예상이 맞더구나. 정화 속도가 아주 빨라. 이대로면 향후 3년도 채 안 걸리겠어.
“이제 용이 두 마리니까요.”
― 연구원에 샘플 넘기기 전에 네가 한번 봐 줬으면 좋겠구나. 차예원 쪽에 반박할 수치를 얻었는데, 어디서 어디까지 공개해야 할지 판단 부탁한다. 시간 되겠니?
서재희는 힐끔 일정을 살폈다. 한세연에게 한번 잡히면 짧으면 한 시간, 길면 서너 시간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음 주까지는 모든 업무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손꼽아 기다린 날인데 일에 치여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리광 부릴 때가 아니었다.
“한 시간 내로 가겠습니다.”
― 윤환이도 데리고 나올래? 오늘은 꼭 확답을 들어야겠어.
서재희는 물끄러미 정윤환을 바라보았다. 정윤환이 입모양으로 열렬히 외쳤다. 안 된다고 해. 바쁘다고 해. 서재희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싫답니다.”
― 아, 그러니?
인터컴 너머로 한세연이 낮게 웃었다.
― 우리 돌아오는 길에 난민 복지재단이랑 합류했는데.
서로 마주 보던 서재희와 정윤환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인터컴을 응시했다.
― 지금 은우랑 같이 있단다.
◆
유은우는 선실 한가운데 마련된 의복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옷이라기보다 건축물처럼 보였다. 섬세하게 계산된 미. 어깨 양쪽에서 시작되어 바닥까지 낙낙하게 드리워진 망토는 모함의 약한 진동에 살아 있는 것처럼 잘게 물결쳤다.
계약자를 상징하고 김서혁을 지지하며 난민을 대변하는 그 의복을, 유은우는 한 겹 한 겹 인내하며 걸쳤다. 정해진 방식으로 매듭을 엮고, 약속한 만큼 끈을 늘어뜨렸으며, 필요한 각도로만 깃을 젖혔다. 여러 층, 다양한 재질, 어둡게 통일되었으나 조명에 따라 미세하게 다른 색. 허투로 입을 옷이 아님을 알기에 늘 신중했다.
그러나 어깨에 두른 망토 위로 아름다운 체인을 고정하고, 용의 뼈를 깎아 이은 가느다란 장신구를 머리칼에 엮는 것은 도움을 청해야 했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신속히 들어와 유은우의 손에서 장신구를 받아 들었다. 한세연의 지시를 받아 유은우에게 붙은 직원들은 의전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그러나 유은우는 감흥이 없었는데,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겪어서 알기 때문이었다. 한때, 폐품 취급을 받기도 했으니. 나는 달라진 게 없으나 시대의 흐름을 타고 아주 우연히 정점에 올라선 거라고. 화려하게 추락하기 좋은 위치였다.
직원들이 유은우의 몸에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빠르게 의복을 마무리한 후 고개를 숙이며 물러섰다. 유은우는 눈을 들어 거울을 보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상징이었다. 덧씌운 선은 우아했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다각도로 빛을 반사하는 온갖 금속이 지독하게 극적이었다.
혁명을 주도한 학생들의 이름이 날카롭게 조각되어, 보석보다 찬란한 체인의 끝을, 유은우는 가만히 어루만졌다. 언젠가 김서혁에게 의견을 구한 일이 있었다.
‘나는 혁명의 주동자들이 신격화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대단한 의지를 가진 것처럼 과장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작은 선택 하나로, 사소한 의심 하나로 그렇게 세상이 바뀐다고 말하고 싶어.’
‘자신을 폄하하기엔 공적이 무겁고, 오만을 부리기엔 기반이 약한데.’
‘특히 이 체인은 죽은 사람들을 전시하는 것 같아서 싫어. 이건 마치, 우스꽝스러운 꼬마전구 같아. 용 해방 기념일에 중앙광장 나무에 걸어 놓는 그런 거 말야.’
‘우린 칼만 안 들었다 뿐 아직 전쟁 중이다. 차예원은 전 동조자를 대변하여 나오겠지. 스크린엔 너와 차예원이 번갈아 비춰질 테고, 그 몇 초간 대중은 네 진심이 아니라 네 의상을 본다. 지고 들어갈 필요가 있나?’
대답 없는 유은우에게 김서혁이 딱딱하게 덧붙였다.
‘치렁치렁한 거 입기 싫다고 뻗대는 건 정윤환 하나로 족해.’
유은우는 매만지던 체인을 놓았다. 매끄러운 금속은 망토로 떨어져 주름 사이로 자취를 감추었다.
마음을 단단히 했다. 턱을 당기고 허리를 세웠다. 발을 내디뎠다. 힘 있는 걸음마다 의복이 바람을 먹어 부드럽게 부풀었다.
밤이었다. 갑판은 캄캄했다. 조명이 강하면 멀리 있는 항로 표지를 놓칠 수 있어, 최소한으로 밝혀 놓은 등 몇 개가 전부였다. 지평선은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어딜 봐도 경계 없는 먹색이라, 하늘이 아니라 우주를 떠 가는 착각이 들었다. 문득 희게 빛나는 결정들이 몰아쳤다. 그 위로 모함이 잔잔히 미끄러져, 은하수를 통과하는 듯 시야가 아득했다.
유은우는 손을 들어 따라오는 직원들을 물렸다. 홀로 갑판을 걸었다. 연구원증을 패용하거나, 측정소 작업복을 입은 직원들이 갑판 이곳저곳에 머물고 있었다. 하나같이 설레는 얼굴이었다. 보름 만의 복귀라고 했다.
유은우는 갑판 선단에 서서 난간을 쥐었다. 입김이 희끄무레 흩어졌다.
3월. 겨울과 봄이 겹쳐, 날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변덕을 부렸다. 특히 사해와 녹지가 뒤섞인 정화 구간에 들어서면 바람과 기온은 예측할 수 없이 널을 뛰었다. 특히 이렇게 흰 결정이 눈처럼 휘날릴 때면, 공기에 날이 서 감기에 들기 쉬웠다. 그러나 함 내로 들어오라는 안내 방송에도,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핑계 대며 고집스레 갑판에 머물곤 했다. 유은우는 스노우볼 안에 들어온 듯 경이로운 광경보다, 그 순간을 실로 감사히 여기는 사람들이 더 장관으로 느껴졌다.
바람이 불자 머리칼에 엮인 용의 뼛조각이 맑은 소리를 내며 나부꼈다. 유은우는 난간에 몸을 기댔다. 손을 뻗어 바람을 가늠했다. 용이 어디쯤 있는지 본능적으로 감이 왔다. 유구한 세월을 살게 될 그 심장박동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자, 아름다운 결정이 눈 폭풍처럼 몰아쳐 순간 시야가 희었다. 얇고 매끄러운 조각들이, 손가락 사이로 감겼다가 일시에 날아올랐다.
온이 정화되고 남은 찌꺼기가 대기를 떠돌며 서서히 마모되는 이 현상을, 한세연은 ‘온각’이라고 공식 명명했다. 용이 허물을 벗듯이 온이 오염된 비늘을 떨어내는 것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었다.
한세연이 고심하여 지은 학명이 무색하게도, 김서혁은 지난 달 연설에서 온각을 ‘죄의 잔재’라고 별칭했다. 이는 많은 언론사가 유의미하게 되풀이하며 정윤환이 추진하는 녹지 개발 사업에 쇄신의 이미지를 부여했다.
그러나 정작 정윤환은 순수하게 온각을 좋아했다. 단지 보기 좋다는 이유였는데, 그는 바람에 날아오르는 온각이 흰 나비 떼 같다며 눈을 떼지 못했다. 황폐하던 사해의 마지막이 이토록 아름답다니 이상하게 눈물이 난다면서.
반면에 서재희는 온각을 보며 과거를 회상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흐린 날, 중앙수사부 앞에 모여 노래를 부르던 수많은 시민들. 그들이 들었던 하얀 풍선들. 진실의 구름이라고 불렸던 그 하얀 점의 집합이 떠오른다고 했다. 온각 하나에 풍선 하나. 새 떼처럼 날아오르는 그 결정들에, 낙원의 이론에 반대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지만 소중한 결정이 대입된다고 했다. 온각이 나부낄 때 산란하는 빛이 너무나 찬란하여, 어쩌면 희망이라는 게 실재할지도 모르겠다고.
유은우에게 온각은, 끝이며 시작이었다. 흰 칼날이 산산이 부서지고 남은 파편이었으며, 오래도록 고통에 시달린 용을 태우고 남은 뼛가루였다.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 될 죄의 굴레를 끊어 낸 흔적이었다. 옛 시대를 떠나보내며 치르는 장례였으며, 새 시대를 맞이하며 뿌리는 축복이었다.
유은우는 인기척을 느끼고 뒤돌아섰다.
연구원이 정중히 묵례했다.
“이사장님, 말씀하셨던 유리병입니다.”
연구원이 한 뼘 길이의 유리병을 내밀었다. 유은우가 그것을 건네받자, 연구원은 주머니에서 보호칩 봉투를 꺼냈다.
“곧 정화 구간이 끝나고 사해로 진입합니다. 임시정부로 복귀하기 전 마지막 사해입니다. 길어도 한 시간 안에는 통과한답니다.”
연구원이 봉투를 내밀어, 유은우는 손을 집어넣었다. 박하맛을 골랐더니 0:50이라고 적혀 있었다. 레몬맛을 하나 더 골라 0:30이라고 쓰인 것을 확인했다. 박하맛의 포장을 뜯어 입에 물었다. 겉옷을 젖히고 안주머니에 레몬맛 보호칩을 넣어 두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연구원이 이쪽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물었다.
“두 가지 맛이 다 가능하다는 게 사실입니까?”
유은우는 빙긋 미소 지었다. 자주 접하는 반응이었다.
“그럴 계기가 있었어요.”
“저도 들었습니다. 낙원의 이론이 파괴되던 날, 용과 계약하시면서 체질이 바뀌셨다고요.”
“……네?”
매번 새로운 추측이라 유은우는 소리 내어 웃었다. 연구원이 당황해했다.
“아,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주워들은 헛소문을…….”
임시정부가 들어서며 유은우는 혁명의 주동자로서 모든 정황을 진술해야 했다. 그러나 서재희가 제 생을 내어 준 순간만은 아무에게도 고백한 적 없었다. 너무나 소중하여 말로 표현하는 순간 유한한 단어에 갇혀 훼손될까 두려웠다. 홀로 가슴에 품고 매일 살피는 것만으로도 그 찰나는 갈수록 아름답게 연마되었다.
― 전 직원에게 알립니다. 우리 모함은 5분 후 사해로 진입, 57분간 통과합니다. 전 직원은 보호칩을 머금어 주십시오. 임시정부 도착 예정 시간은 6시입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우리 모함은 5분 후 사해로 진입…….
유은우는 유리병을 열어 공중을 휘저었다. 온각이 청량한 소리를 내며 담겼다. 포르르 날아오르는 것을, 마개를 닫아 막았다. 유리병 안쪽에서 온각이 나부끼며 작고 예쁜 소리를 냈다.
그 후로도 유은우는 한참이나 갑판에 머물렀다. 밤이 검푸른 새벽으로 뒤채었다. 사해와 안전지대의 경계 통과를 알리는 안내 방송에 이어 모함이 고도를 낮추었다. 갑판의 조명이 일시에 밝아졌다. 유은우는 보호칩 없이 새벽의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난간 아래를 굽어보니 가까이 다가온 땅에 듬성듬성 짙은 갈색이 선명했다. 더 이상 매캐한 유황 냄새를 풍기지 않는 희고 고운 사해의 모래와 정윤환이 이끄는 사업단에서 지속적으로 투여하는 기름진 토양이 뒤섞여 대지는 마치 바닐라와 초코가 뒤섞인 아이스크림처럼 보였다.
“우리 녹지 개발 사업단장님께서 그답지 않게 성실한 모양이더구나.”
한세연이 유은우의 옆 난간을 짚으며 이어 말했다.
“처음엔 그런 자리 싫다고 마다하더니.”
유은우는 아래로 시선을 둔 채 밝게 웃었다. 둘은 잠시 그렇게 가만히 대지를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한세연이 난간에 팔을 걸치며 물었다.
“윤환이가 별말 없니?”
“아직이요.”
한세연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 애가 결단을 내려야 할 텐데.”
“강요해서는 안 돼요. 그 사람은 너무 오랫동안 선택권이 없었어요.”
“네 말이라면 들을 텐데, 혹시 은우 네가…….”
“죄송합니다.”
“말이라도 한번…….”
“못 합니다. 제 말 한마디에 그 사람은 인생이 흔들려요.”
잠잠하던 바람이 흐느끼듯 불어닥쳤다. 온각이 맑게 찰랑이며 스치는 사이로, 유은우는 한세연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한세연은 난간에 등을 기대고는 두 손을 가운 주머니에 넣었다. 그녀가 불쑥 말했다.
“네가 풀어 준 용 말이다. 너는 용을 손대지 않고 방치했다고 했지.”
유은우는 한세연을 빤히 보았다.
“그 용은 성체가 되었어. 결과론적으로는 잘됐지만, 네 판단이 최선이었는지 다시 생각해 보길 바란다. 보통 새끼 짐승이라면 굶어 죽었을 거야. 네가 사육 칸 문을 열었을 때 용이 죽어 있었다면 어땠겠니. 자유와 방임은 달라.”
유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시민의 투표로 낙원의 이론을 파괴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의지를 표명함으로써 서로가 서로의 미래에 깊숙이 개입한 거지.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야. 나는 윤환이에게 강요를 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한세연이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말했다.
“거긴 그 애 자리야. 윤환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앉는 건, 나는 상상할 수도 없구나.”
유은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정윤환에 관한 모든 것에 신중하고 싶었다.
“우리는 혁명에 몸 바친 자들에게 마땅한 보상을 주어야 한다. 도시연합을 단죄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지. 단순히 윤환이가 그 자리에 앉고 안 앉고의 문제가 아니야. 이미 그 애는 역사에 이름을 올렸고, 우리는 역사를 쓰고 있어. 후대에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말끝에 한세연은 고개를 돌려 유은우를 바라보았다. 단단한 말과는 달리, 그녀는 힘없이 웃었다.
“내가 만약 널 버리지 않았다면 이런 말을 더 자신 있게 할 수 있었을까.”
이미 지난 일이라는 대답은 의미가 없었기에, 유은우는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한세연이 가운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금속이 차갑게 빛나, 유은우는 눈을 크게 떴다. 한세연이 손을 내밀었다.
“받으렴.”
유은우는 잠시 굳어 있다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여기저기 깨지고 망가진, 그럼에도 여전히 초침이 똑딱똑딱 돌아가는 기계식 손목시계가 유은우의 손바닥 위로 묵직하게 떨어졌다.
3년 만이었다.
“이걸 어떻게…….”
“이번 탐사 중에 우연히 찾았단다. 쓰레기 더미에 파묻혀 있어서 하마터면 놓칠 뻔했어. 직원 하나가 샘플을 수집하다가 시계에 손이 스쳐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발견했지.”
유은우는 천천히 시계를 어루만졌다. 금이 간 시계판. 이 빠진 톱니바퀴와 벌겋게 녹슨 시곗줄. 이상한 각도로 꺾인 시계 침이 유은우의 손길을 따라 핑그르르 돌았다. 오른쪽 손목의 선명한 흉터 위로 시계를 찼다.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한세연에게서 서너 걸음 물러서, 오른손을 가벼이 휘둘렀다. 시계 부품이 약하게 삐걱거렸다.
그리고 폭발했다.
괴물처럼 부풀어, 여전히 압도적으로 유은우의 오른쪽을 드리웠다. 미세하던 부품들이 팽창하니, 훼손되고 마모된 흔적이 더욱 부각되었다. 망가졌음에도 단단히 제자리를 지키는 톱니바퀴 사이로, 이제는 빛바랜 피와 불의 냄새가 났다.
유은우는 시계를 찬찬히 줄여 손목에 동그마니 얹었다.
다시는 쓸 일이 없기를 바랐다. 온디딤으로써가 아니라 아버지의 유품으로 간직할 수 있기를.
“제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한세연이 미소 지었다.
“유태헌은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반란군 수장이 된 남자였어. 가연이는 반란군 수장 정도 되는 남자가 아니면 거들떠도 보지 않는 여자였지. 그 외에는 모든 것이 평범했어.”
“만약 두 분이 살아 계셨다면 절 자랑스러워하셨을까요?”
“글쎄.”
한세연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시간을 두었다가 말했다.
“하지만 네가 내 딸이었다면, 나는 이 이상 자랑스러울 수 없었을 거야.”
한세연의 눈이 설핏 젖었다가 말랐다.
“어렸던 네게 좋은 어른이 되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
유은우는 가만히 한세연을 응시했다. 혁명 이후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긴밀히 얽혔으나 한세연이 직접 용서를 구한 것은 처음이었다. 유은우는 한때 자신을 실험체로 삼았던 이들을 향해 품었던 원망과 분노를 끌어내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 거친 감정들은 이미 부드럽게 닳아 힘을 잃은 지 오래였다.
“마지막 순간에 제가 아끼던 사람들을 구해 주셨잖아요. 이제 우리 사이에 빚은 없어요.”
한세연이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그녀는 약간 주저하면서, 평소에 잘 하지 않는 행동을 했다. 어색하게 주위를 살핀 것이다. 갑판에는 여전히 꽤 많은 직원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유은우의 시계가 팽창했을 때 잠깐 이목을 끈 것 외에는 평온했다. 다시 유은우를 바라보는 한세연의 눈빛이 묘하게 서툴렀다.
“그날 제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원장님께서 제 손을 잡고 말씀해 주셨잖아요. 울면서 반복하셨죠. 그때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없어요. 정신없이 되풀이하시던 이름들. 생존자 명단을 읊어 주셨죠.”
한세연이 희미하게 웃었다.
“저는 원장님을 그때 처음 만난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관계는 그날 다시 시작되었다고요. 한번 깨진 관계는 붙더라도 완벽할 수 없다고들 하지만, 우리가 드문 사례가 되면 되는 거죠.”
한세연은 잠시 침묵했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네가 그럴 때마다 윤환이가 가여워서.”
유은우가 의미를 되짚기 전에, 한세연이 화제를 돌렸다.
“서재희는 요새 어떠니?”
유은우는 물끄러미 한세연을 바라보았다. 한세연은 다시 두 손을 가운 주머니에 넣고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이쪽을 응시했다. 유은우는 가벼이 대답했다.
“저도 궁금해요. 통 보질 못해서. 조사팀은 보름 만의 복귀라지만 전 한 달이 넘었어요. 중간에 원장님 모함을 얻어 타서 사흘 더 빨리 돌아가는 거지, 저희 부속선으로는 이런 속도 나오지도 않아요.”
한세연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유은우가 모른 척 비껴낸 대화를, 한세연이 다시 틀어쥐었다.
“서재희 좀 변한 것 같던데. 내가 맞게 보고 있니?”
유은우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느낌을, 타인의 입을 통해 확인받고 싶었다. 한세연이 말을 이었다.
“지난 예비심사에서 너희 언쟁이 있었다며? 서로 봐주지 않고 치열하게 싸웠다고 들었다. 윤환이가 가운데 끼어서 어울리지도 않게 중재하느라 아주 볼 만했다던데.”
그때 진땀을 흘리던 정윤환의 표정이 생각나, 유은우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한세연의 낯에서는 서서히 웃음기가 가셨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은우야, 나는 서재희가…….”
한세연은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런 표현이 옳을지 모르겠구나. 나는 그 사람이 두려웠어. 정확히는, 네가 없어지고 난 후 홀로 남을 서재희가 두려웠지. 혁명 직후, 서재희는 정말로, 뭐라고 해야 하나.”
유은우는 당시 서재희의 분위기를 떠올렸다. 한껏 순화하여 표현했다.
“예민했죠.”
“위험했지. 판을 좌지우지할 권력을 얻고도, 사실 그는 새 시대에 별 관심이 없었어. 오직 네가 잘못될까 전전긍긍했고. 나는 차예원보다 서재희가 임시정부의 독이라고 생각했다. 힘을 가진 자가 오로지 연인을 위해 정책을 세우고 조직을 짜고. 어찌나 능란한지 측근마저 아주 깔끔하게 속이면서. 내가 윤환이에게 그 예산이 다 어디로 빠졌는지 전해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넌 모를 거야. 그런데 최근의 행보를 보니, 내 걱정은 기우였던 모양이다.”
한세연이 가만히 덧붙였다.
“사람이 달라지기도 하는구나.”
동이 트고 있었다.
안개에 지평선이 희끗했다. 아스라한 선 위로 건축물들이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김서혁이 지정한 ‘거주 가능 지대’라는 명칭이 있음에도 세간에서는 인간들이 새로이 모여 살게 된 곳을 ‘안전지대 안쪽’, ‘인구 밀집지’, ‘집단 거주 구역’ 등으로 제각기 달리 부르곤 했다. 특히 ‘신도시’라고도 자주 불렸는데, 이는 차예원이 선호하고 김서혁이 꺼리는 호칭이었다. 신도시는 세월이 흐르면 구도시가 된다. 용어가 인간의 사고를 한정 짓는다는 김서혁의 우려에, 서재희가 직접 움직이기도 했다. 서재희는 조용히 차예원을 찾아갔다가, 역시 조용히 돌아왔다. 둘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으나, 그 뒤에 차예원은 공식석상에서 ‘신도시’를 언급하는 비중을 줄였다. 임시정부 초기부터 단 한 번도 ‘거주 가능 지대’라는 용어를 입에 담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확연한 변화였다.
“원장님.”
유은우가 천천히 말했다.
“저는 그 사람의 그런 점이 좋아요. 상처를 딛고 변할 수 있는, 유연한 면이요.”
유은우는 서재희를 떠올렸다. 내가 널 조금만 좋아해도 되겠냐고 묻던, 서툴고 뜨겁던 고백.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힘들어서 감정을 통제한다던 그가, 눈물로 유은우에게 호소했었다. 그리고 모함에서 다친 유은우를 품에 보듬어 안고, 네가 살아갈 세상을 만들겠다던 약속. 세계를 부수겠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쏟아 붓던 그가, 유은우를 위해 복수를 내려놓았다.
“다만, 그 사람에게 제가 전부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텅 비어서 저밖에 없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수많은 것 중 저는 그저 하나였으면. 그래서 우리가 어느 한쪽에게 맹목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서로 침범하고 내주면서 서서히 같은 길을 바라봤으면 했어요. 사실, 처음에는 저도 자신이 없었어요. 그런데 요즘 그 사람, 하고 싶은 게 제법 생긴 모양이에요. 저와 별개로, 타인에게 기대하고 희망을 품고.”
한세연은 가만히 웃었다. 그녀가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서재희가 내게 말하더구나. 후회한대. 임유현을 죽인 걸.”
바람이 불어 의복이 부드럽게 떠올랐다. 유은우는 망토를 고쳐 여미면서 한세연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개인이 개인을 단죄해서는 안 된다고 하더구나. 그를 죽임으로써 자신은 복수를 한 게 아니라, 한 번 더 피해자가 되었다고.”
유은우는 잠깐 고개를 돌렸다. 일부러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눈을 깜박였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서재희는 정말로 많이 변했다. 한때 그가 상처를 숨기기 위해 뒤집어썼던 부드럽고 선한 껍질은 천천히 내부로 스미며 진짜가 되고 있었다.
“원장님도 이제 걱정 안 되시죠? 제가 예언 가지러 갔다가 용에게 잡아먹혀도 그 사람은 곧 아픔을 딛고 잘살아 갈 거예요. 감사하게도.”
유은우의 농담에도 한세연은 진지한 얼굴을 했다.
“글쎄. 아직 그 정도까지는. 난 여전히 네가 서재희보다 오래 살길 바란다.”
한세연이 손을 내밀어 유은우는 습관처럼 손목을 내어 주었다. 그녀가 다정한 손길로 유은우의 맥을 짚었다.
“마지막으로 병원에 간 게 언제니?”
유은우가 장난스레 대답했다.
“의사 선생님이 제발 그만 오래요.”
“갑자기 이상 증세가 올 수도 있어. 용의 심장을 품었다가 스스로 파괴한 사람은 선례가 없다. 경계를 늦추면 안 돼.”
“저 정말 정말 정말 건강해요.”
“모르는 일이야. 힘든 일을 겪었잖니. 넌 심장이 한 번 멈췄었어.”
“그건 제 심장이 아니었어요.”
“그래도.”
한세연은 한참이나 유은우의 손목을 쥐고 놔주지 않았다. 가끔 유은우는, 한세연이 자신의 뺨을 감싸거나, 등을 토닥이거나, 머리칼을 걷어 주고 싶은 충동을, 맥을 핑계 삼아 손목을 쥐는 것으로 인내하는 게 아닐까 했다.
“네가 살아남은 건 기적이야.”
유은우는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게 진짜 기적이에요.”
한세연이 부드럽게 유은우의 손을 놓았다. 그녀가 의아하다는 눈을 했다. 유은우는 조심스레 숨을 골랐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었다.
“사실, 저 그날 용의 심장을 깨기 전에, 이미 한 번 죽을 뻔했어요.”
끊어진 홀스터. 보호칩 없이 칼칼한 입 안. 목을 죄는 고통이었다.
“그런데 누가 절 살려 줬어요.”
유은우는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역시 간직하고 싶었다. 한세연도 더는 묻지 않았다. 이미 누군지 짐작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서재희를 떠올리면 심장이 생생하게 뛰었다. 그가 계산 없이 건넨 보호칩을 무는 순간, 전신으로 피가 뜨끈하게 돌며 비로소 숨을 토했듯, 다시 한번 살아 있음을 자각했다. 타인으로부터 생을 온전히 선사받은 그 기억만 있다면, 칼날 같은 새벽도 희게 시린 겨울도 유은우는 그 무엇이든 견딜 수 있었다.
― 5분 후 착륙합니다. 전 직원은 갑판에 도열 바랍니다.
모함이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임시정부의 정문을 막 통과한 참이었다.
서재희가 직접 조경한, 끝없이 펼쳐진 정원 사이로 도로가 거미줄처럼 섬세하게 뻗어 있었다. 그 위로 붉은 리본이 흩어져 있었다. 입에 마스크를 끼고 팻말을 든 수십 명이 겨울 잔디에 나란히 앉아 있었고, 경찰이 멀찌감치 대기하고 있었다.
도심지 난민 유입 반대, 출신 도시 확인서 발급 의무화, 난민 리스트 공개 요구, 용 추적 태그 부착, 예언 공시제 합법화…….
유은우는 시선을 멀리 두었다. 아스라이 보이는 착륙장에도 어림잡아 수십 명이 모여 시위를 펼치고 있었다. 의복을 한 차례 매만져 정돈했다. 몸도 마음도 단단히 했다.
그러나 한세연은 다른 것을 보았다. 그녀는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봄이 오긴 오는구나. 아직 이렇게 바람이 찬데.”
김서혁 의장 취임을 기념하는 식수의 단단한 가지마다 흰 꽃봉오리가 부풀어 아름다웠다. 취임식이 있던 날, 유은우도 흰 장갑을 끼고 내로라하는 저명한 인사들 틈에 서 있다가, 차례가 다가왔을 때 삽으로 흙을 크게 퍼서 나무의 뿌리를 덮어 준 기억이 있었다. 대지에 뿌리를 박고 제법 자라난 나무를, 유은우는 오래도록 응시했다.
“네. 곧 봄이에요.”
◆
“계약자는 용의 위치를 공개하라!”
“난민과 인간이 뒤섞이면 인류가 돌연변이로 쇠퇴합니다. 난민 주거지역을 설정하여 아이들의 미래를 지킵시다!”
“김서혁 의장은 도시 붕괴에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하라!”
임시정부에 복귀할 때마다 열에 아홉은 시위를 마주했으나, 오늘은 유난했다. 일부러 한세연과 시간차를 두고 모함에서 내려왔음에도 유은우는 곧바로 언론의 타깃이 되었다. 의복을 갖춰 입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주위에서 뻗쳐 오는 손과 바짝 따라붙는 드론에도 내색 않고 턱을 당기고 앞만 똑바로 보았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무사히 빠져나가나 싶었을 때, 옷자락이 탁 당겨지며 넘어질 뻔했다. 중심을 잡자마자 손목을 잡혔다.
빈번히 겪는 일이었다. 유은우는 끌려가지도 않고 내치지도 않으며, 심지어 손목을 잡은 이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침착하게 기다렸다. 오른쪽에 선 경호원이 제지하려고 나섰을 때였다.
“잠깐 실례.”
왼쪽에서 손이 불쑥 날아와 유은우를 잡은 손을 경고하듯 쳐 냈다. 이어 상대가 가볍게 유은우의 어깨를 감싸 왔다. 바짝 끌어 안겼다. 머리 위로 숨이 따뜻했다. 익숙한 온기에, 유은우는 상대를 확인하지 않고도 이미 안심했다. 정윤환이 한 팔로 유은우를 안은 채 다른 손을 뻗어 시야를 확보하며 선선히 소리쳤다.
“지나갑니다. 길 좀 터 주세요. ……비키라고.”
사람들이 크게 물러났다. 앞뒤로 서 있던 경호원보다 정윤환 하나가 더 위압적이었다. 유은우는 정윤환의 비호를 받으며, 빠르게 착륙장을 빠져나왔다. 함성도 희미해지고 드론도 사라져 오직 둘만 정원을 가로지를 때, 유은우는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
정윤환이 해사하게 웃었다. 그가 손을 놓으며 유은우에게서 한 발짝 떨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가까웠다. 반가운 마음을 제치고, 유은우는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나서지 말라니까.”
정윤환이 장난스럽게 눈을 찡그렸다.
“그럼 너 시달리는 거 보고만 있으라고?”
“차라리 그냥 둬. 네 이미지가…….”
“아아, 유은우. 제발.”
정윤환이 질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가 즐거운 얼굴로 이어 말했다.
“제발 그런 거 좀 그만 신경 써.”
“너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네가 내 걱정을 다 해 주고.”
“난 항상 널 걱정해.”
유은우는 말끝에 저도 모르게 정윤환의 왼손을 보았다. 들리는 말로는 움직임이 부드러워졌다고 하던데. 다시 살짝 그를 올려다보았다. 언론에서 수없이 극찬하는 정윤환의 옆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둘은 나란히 보폭을 맞추며 깨끗하게 정돈된 정원을 천천히 걸어 가로질렀다. 보통 때였으면 차량을 부를 거리였지만, 유은우는 이프를 누르지 않았다. 수행원 하나 없이 홀로 마중을 나온 정윤환 역시 주머니에 손을 넣고 휘적휘적 걷기만 했다. 그것만으로도 유은우는 천천히 피로를 물렸다.
정원을 지나는 동안 볕이 점차 짙어졌다. 저 멀리 본청이 드러났다. 정윤환의 걸음이 사뭇 느려졌다. 유은우는 기꺼이 그 보폭에 맞추었다. 돌바닥에 부딪히는 구두 소리가 햇살과 나란히 단조로웠다. 가만히 물었다.
“요새 많이 바쁘다며? 권력 이양 때문에.”
정윤환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차예원이 의장은 아예 선거 출마를 못 하게 막아 버려서. 아니면 이렇게까지 고생할 필요 없는데.”
“본인이 원하는 건 꼭 가져야 하는 성미라. 그걸 실현할 만큼 사람 고르는 안목이 뛰어난 것도 사실이고. 그것 말고도 일이 많다며.”
“옛날에 동조자였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일반인이 되어 버리니까 그 괴리를 메울 만한 획기적인 정책을 내놓기가 어려워서. 팀 전체가 고전하고 있어. 거기다 보호칩 가격을 내렸더니 관련 기업들이 별 이상한 루머를 가져다가 우리를 공격하질 않나. 어차피 곧 사해가 사라지면 보호칩 생산도 중단될 텐데 마지막 발악하는 거지, 뭐. 사실 잠잘 시간도 거의 없어. 지금도 일어나자마자 바로 나온 거야. 얼마나 일이 많은지 내가 이렇게 종이를 많이 만지고 살 줄은…….”
말끝이 사그라져, 유은우는 고개를 돌려 정윤환을 바라보았다. 낙엽처럼 빛바랜 눈동자가 찬찬히 이쪽을 훑고 있었다. 이렇게 끈질긴 시선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그러지 말라고 몇 번 지적도 해 보았으나, 그때마다 정윤환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그런 적 없다고 횡설수설하는 걸로 봐서는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뒤로 유은우는 그저 감내했다. 감정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게 아니겠냐고. 마음대로 정리할 수 없는 영역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서로 빤히 마주 보다, 이내 정윤환이 화들짝 놀랐다. 그가 어색하게 헛기침했다.
“나 너 보는 거 아냐. 옷 보는 거야. 너 그 옷 입은 거 실제로 처음 봐.”
“어? 진짜?”
유은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윤환이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대답했다.
“그래, 진짜.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안 맞아서.”
유은우는 걸음을 멈췄다. 정윤환도 따라서 멈춰 섰다.
유은우는 양팔을 나붓이 벌리고 그 자리에서 한 바퀴 휙 돌았다. 의복이 여러 겹으로 풍성하게 펼쳐졌다가 느리게 가라앉았다. 머리 장식이 맑게 찰랑거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양쪽으로 갈라진 망토가 전신으로 차분히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유은우는 정윤환을 올려다보았다. 정윤환이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검은색 나비 같다.”
“칭찬?”
“그래. 예쁘다, 예뻐.”
정윤환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것을, 유은우가 손을 들어 막았다. 겉옷을 젖히고 안쪽에 매달아 두었던 것을 풀어서 불쑥 내밀었다.
“내 거야?”
정윤환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유은우는 어서 가져가라는 듯 유리병을 흔들었다. 온각들이 포르르 날아 유리병에 이리저리 부딪히며 청량한 소리를 냈다.
“이번에 조사 나가고 싶었는데 바빠서 못 갔다며. 보고 싶었을 것 같아서.”
정윤환은 유리병을 받아 가만히 어루만졌다.
“잘 때 머리맡에 두고 자고 출근할 때 냉장고에 넣어 둬야지. 그럼 좀 오래가더라.”
“다음에 또 가져다줄게.”
정윤환이 유리병을 천천히 기울였다. 온각이 나풀나풀 반짝였다. 유은우가 가볍게 허공을 휘저어 담아 온 그것을, 정윤환은 귀한 보석처럼 다루었다.
“아름답지.”
정윤환이 유리병을 반대쪽으로 기울이며 이어 말했다.
“살아서 이런 걸 볼 수 있다는 데 감사해.”
정윤환이 여전히 온각에 시선을 둔 채 밝게 웃었다.
“그리고 너랑 한배를 타고 있다는 것도. 같은 꿈을 좇고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
정윤환은 오른손으로 유리병을 쥔 채 습관처럼 허벅지로 왼손을 미끄러뜨리다가 실소했다. 그가 유은우의 시선을 느꼈는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이마로 옅은 머리칼이 나부꼈다. 그 아래 나른하면서도 맑은 눈이 유은우를 직시했다. 정윤환이 쾌활하게 말했다.
“마음은 천천히 접을게. 나 노력하고 있으니까 너무 뭐라고 하지 마라.”
유은우는 정윤환의 섬세한 낯을 응시했다. 정윤환이 차예원과 결탁한다면 끝장이었다. 아무리 김서혁과 서재희가 있더라도 정윤환은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론의 중심인물이었다. 정윤환이 마지막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수송선에 총을 겨누는 영상은 끊임없이 소비되고 있었다.
그런 영향력을 가진 남자가 자신을 여태 마음에 두고 잊지 못한다는 것은, 언제나 심장 한쪽을 아리게 했다. 너무나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보답은 할 수 없으니까.
“그거 우리가 해낸 거야.”
유은우가 불쑥 말했다. 정윤환이 유리병을 품에 넣으며 작게 웃었다.
“뭐, 그렇지.”
“이번 선거, 김서혁 후계자를 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확실한 발판이 될 거야.”
“글쎄.”
정윤환은 탐탁지 않아 보였다. 그가 덧붙였다.
“너 지금 서재희하고 합의는 하고 날 밀어붙이는 거야? 나만 대중의 사랑을 받는 거 아니잖아.”
“난 깨끗하잖아.”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정윤환은 말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유은우는 조용히 덧붙였다.
“차예원이 왜 이번 선거에 목을 매는지 너도 알잖아. 그 자리는 면죄부가 될 수 있어. 나중에 전부 밝혀졌을 때.”
정윤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룬 것들을 봐. 이건 시작일 뿐이야. 너 하고 싶은 거 많잖아. 내가 널 정상으로 올려 줄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
정윤환이 눈을 굴려 이쪽을 보았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누가 연인 아니랄까 봐 서재희랑 똑같은 말을 하네. 내가 그런 무시무시한 감투를 쓰고 내 이득만 취하면 너 어떡하려고 그런 말을 해.”
“널 믿으니까.”
바람이 다시 불어왔다. 정윤환은 공중에 기대듯 눈을 감았다.
“장족의 발전이야. 언제는 소름 끼친다더니, 믿는다는 소리를 다 듣고. 정말 내가 널 포기할 수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다.”
복잡한 말을 하면서도, 정윤환은 평온해 보였다. 이내 그가 싱긋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너 왜 요새 일정이 뒤죽박죽이야. 다음 주에 온다며.”
유은우는 장난스레 웃었다.
“다시 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놀랐단 말이야. 왜 미리 말 안 했어? 서재희, 너 다음 주에 온다고 해서 일정을 다 당겨서 처리하고 있었는데…….”
“자꾸 나 오는 날짜에 맞춰서 일하니까 일부러 말 안 했어. 일찍 온다고 하면 더 무리해서 일할까 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배려 좀 해. 서재희 너 사해 나가면 악몽 꾸는 것 같더라.”
유은우는 멈칫했다.
“악몽? 무슨 악몽?”
“무슨 악몽이겠냐. 뻔하지.”
둘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춥지 않았다.
“그런 꿈은 나도 가끔 꿔. 우리 사촌형 죽은 날이라든가, 네가 전리품으로 등록된 날이라든가.”
정윤환이 밝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 다 지나간 일이고, 우린 앞으로 더 좋아질 텐데.”
유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윤환이 다시 쐐기를 박았다.
“그래도 연락 좀 해. 서재희, 너 없는 동안 얼굴 상했다가 너 오면 다시 반짝 살아나고. 여기 사람들, 서재희 표정만 봐도 네 일정이 나온다고 농담할 정돈데.”
“용 근처에 가면 이프가 자꾸 끊겨.”
“서재희한테 잘해.”
“안 그래도 조만간 이거 그만두려고.”
정윤환이 우뚝 멈춰 섰다. 그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무슨 뜻이야?”
“이제 용 보러 안 간다고.”
정윤환의 빤한 시선을 받으며, 유은우가 또박또박 말했다.
“예언 같은 거, 이제 안 받아 올래.”
◆
“예언을 안 받아 오겠다고?”
김서혁이 중얼거렸다. 반문이 아닌 혼잣말이라, 유은우는 말없이 차에 설탕을 탔다.
“예언을 안 받아 오겠다라…….”
김서혁이 되뇌며 의자에 천천히 등을 기대었다. 그는 생각에 잠겨 허공에 시선을 던진 채였다.
접견실은 넓고 환했다. 임시정부의 중앙에 위치한 이곳은 일출보다 일몰이 더 장관이었는데, 노을이 질 때면 대리석 바닥이 붉은 바다처럼 넘실거렸다.
유은우와 정윤환은 나란히 앉아 김서혁과 마주 보고 있었다. 둘은 김서혁이 입을 열 때까지 비서가 아름다운 다기에 내어 온 차와 약간의 과일을 먹었다. 유은우가 김서혁의 생일에 고심하여 골라 선물한 다기 세트였다. 유은우가 자랑스레 찻잔을 감싸 쥐고 온기를 만끽하는 동안, 정윤환은 딸기를 집어 들고 유심히 살폈다. 초록 꼭지마다 과시하듯 자연 재배 인증 태그가 달려 있었다. 완전히 정화된 대지 곳곳에서 기계의 흔적 없이 수확하기 시작한 귀한 작물이었다.
정윤환이 딸기를 다섯 개째 먹고 유은우가 차를 세 모금 마셨을 무렵, 노크 후에 접견실 문이 열렸다. 서재희가 뚜벅뚜벅 걸어와 정중히 묵례하고는 말했다.
“의장님, 4차 공동 조사팀이 채취한 샘플입니다.”
서재희가 들고 온 비닐 팩을 딸기 접시 옆에 내려놓았다. 비닐 팩의 입구는 단단히 봉해져 있었고, 그 위로 사해환경과학원의 직인이 붉게 찍혀 있었다.
“우리끼리 있을 땐 예의 차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을 텐데. 편하게 하도록.”
서재희는 고개를 숙였다가 들고는, 반듯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유은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김서혁은 더 말하지 않고 봉인지를 뜯었다. 정윤환이 접시를 탁자 끝으로 밀어 공간을 확보하자, 김서혁이 비닐 팩에서 내용물을 꺼내 빈 공간에 내려놓았다. 벌겋게 녹이 슨 금속 부품 몇 조각이었다. 기이한 배열과 핏자국을 보아하니 괴물의 일부였다. 김서혁은 그중 하나를 쥐고 힘을 주었다. 기계는 손아귀 사이에서 먼지처럼 부스러졌다. 매캐한 유황 냄새가 아스라이 맴돌았다.
“한세연 원장님의 의견으로는 괴물이 멸종하기까지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답니다.”
“보고회가 내일 2시던가?”
“네. 제가 미리 샘플을 좀 걸렀습니다. 일부 샘플에서 인위적인 흔적이 보여 객관성을 잃었기에 불가피한 조치였습니다. 차예원 쪽에서 먼저 손을 썼다고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리 떠오르는 이유가 없습니다.”
유은우는 문득 손에 무언가 닿는 것을 느꼈다. 탁자 밑으로 서재희의 손이 다가와 유은우의 손을 부드럽게 쥐더니 깊이 깍지 꼈다. 그의 손은 뜨거워, 불에 덴 듯 심장이 뛰었다.
“차예원이 전 동조자 연대와 함께 개발 부지 선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예전에 동조자였던 이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반란군 출신으로 대변되는 신권력을 부흥하기 위해 일부러 절차를 간소화해서 한때 반란군 본부가 있었던 해당 부지를 주요 개발지로 선정한 게 아니냐는 게 요지야.”
상황이 좋지 않았다. 차예원은 혁명이 성공하여 임시정부가 세워진 직후부터 노선을 달리하더니 최근 들어 완전한 대척점에 서 있었다. 그런 차예원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피를 흘리던 용이 죽은 후 더 이상 온을 다룰 수 없게 된 옛 동조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기 때문이었다. 차예원은 기득권을 대표했다. 그들은 더 이상 동조자가 아니었으나 오랜 세월 축적한 부는 그 무엇보다 견고했다.
“시위는 통제할 필요 없습니다. 무리하여 진압하면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올 겁니다. 시민들은 영리합니다. 알아서 판단토록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서재희가 정윤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 미아랑 사귄다고 떠들썩한 거 알아?”
잠깐 침묵이 있었다. 정윤환이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미아? 그게 누군데?”
서재희가 낮게 말했다.
“네 비서가 관련 기사 안 챙겨?”
“스캔들 관련해선 일절 보고하지 말라고 했어. 어디 한두 건이어야지.”
“이번 건은 좀 큰데. 미아 소속사 측에서 너랑 엮이는 걸 대환영하는 분위기라 제재는커녕 부추기고 있어서 이대로 두면 너 미아 남편 될걸. 내가 정정 기사 써서 네 메일로 보내 놨어. 확인하고 바로 내보내. 늦어도 오늘 자정까지.”
서재희가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정윤환은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어찌나 짜증이 역력한지, 단순한 질문도 욕처럼 들렸다.
“그래서 미아가 누군데?”
“요새 잘나가는 배우. 차예원 측 홍보 대사로 활동하고 있어서 너도 보면 익숙할 거야. 2일 정책간담회 뒤풀이 때 네 옆자리에 앉았었어. 보아하니 넌 기억도 안 나는 모양이지만.”
정윤환이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내 기억에 남을 만큼 특별하진 않았나 보지.”
“미아가 일어서려다가 드레스가 밟혀서 넘어지려고 하는 걸 네가 부축했어. 그 사진이 인터넷에 보도블록처럼 깔려 버렸고. 너도 보면 알겠지만 사진이 지나치게 잘 나왔어. 영화 속 한 장면이야.”
“그랬나. 나도 너처럼 매너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라. 상류층 가정교육을 톡톡히 받았거든. 아니면 걔가 넘어지면서 내 음식 접시를 엎어 버리려고 했거나 뭐 그랬겠지. 그냥 내버려 둬. 알아서 사그라들 거야. 시위처럼.”
정윤환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서재희가 소리를 낮추었다.
“정윤환, 이거 큰 문제야. 너 지금 아주 중요한 시기라고.”
“무슨 시기. 또 뭘 시키려고.”
서재희는 입을 열어 무어라 하려다가 다물었다. 비서가 들어와 탁자에 서류를 내려놓고 나갔다. 서재희가 조언한 대로 한세연이 빠르게 정리한 조사 보고서였다. 김서혁이 서류를 쥐고 첨부된 지도부터 반듯하게 펼쳤다. 그가 중얼거렸다.
“정화가 상당히 빨라.”
정윤환이 눈을 반짝였다. 여태 권태롭던 분위기는 싹 증발하고 옅은 다갈색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그가 말했다.
“용이 두 마리가 되면 속도가 두 배 빨라질 줄 알았더니 거의 열 배 가까이 빨라졌습니다. 또 성체가 나올 가능성이 있을까?”
정윤환이 말끝에 유은우를 보았다. 유은우는 고개를 저었다.
“도연이 만났는데 꼭 사람 손을 안 타는 것만이 성체가 되는 조건은 아닌가 봐. 어쩌면 우리 세대엔 이 두 마리로 만족해야 할 수도. 내가 풀어 준 한 마리랑, 이번에 새로 발견된 한 마리.”
김서혁이 손끝으로 지도를 툭툭 두드렸다. 그가 물었다.
“사해에 풀었던 알은 몇 개 남았지?”
유은우가 대답했다.
“87%는 고사하고 현재 50여 개뿐입니다. 그러나 남은 것들도 상태가 썩 좋지는 않다고 합니다. 더 이상의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성체 두 마리가 교접하길 바라는 수밖에요.”
“다른 계약자의 의견은?”
“저와 일치합니다.”
유은우는 두려움과 환희로 뒤범벅되어 엉엉 울던 손도연을 생각했다. 새 성체가 출현했다고 보도된 당일이었다. 손도연은 자신이 계약자로 선택되었다는 것에 거의 넋이 나가 있었다. 유은우는 온몸을 덜덜 떨며 눈물을 쏟아 내는 손도연을 안고, 절대 남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밝혀진 건 유은우 하나로 족했다.
“성체가 또 나오면 좋겠지만, 지금 이 속도도 고무적입니다. 이대로라면 3년 뒤에 사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한세연 원장님 말씀으로는, 현재는 온각이 안전지대 밖에서만 발생하는 현상이지만, 빠른 시일 내에 거주 가능 지대에서도 빈번히 목격될 거라고 합니다. 그만큼 온의 흐름이 과거 비정상적인 패턴을 깨고 온 대지를 경계 없이……. 잠깐, 이건 내가 검수한 부분이 아닌데. 여기 표시한 건 뭐야?”
서재희가 손으로 지도 한쪽을 짚으며 물었다. 정윤환 특유의 유려한 글씨체로 몇 군데에 기호가 그려져 있었다. 정윤환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거긴 개발 부지로 정해졌다가 지반이 물러서 보류된 곳. 여기서 부정적인 여론이 많이 나온다니까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아. 전에 일부러 황량하게 사진을 찍어서 공사 중단이니 어쩌니 얼토당토않은 허위 기사 토대가 된 게 이쪽 부근인데, 내가 봐도 좀 그렇긴 해. 꼭 사해화가 진행되는 것 같은, 그러니까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육안으로 말이야. 유동 인구가 많아서 오고 가며 다들 볼 수밖에 없는 구간인데, 만약에 내년 겨울까지 착공이 지연되면 더 삭막해질 테니까 임시방편으로 보리라도 심어야겠어. 겨울 보리는 푸르니까 사람들에게 안정을 주겠지. 예산 확보 가능할까?”
“걱정 마. 보리로 바다를 만들 만큼 확보해 줄게.”
서재희가 담담하게 장담했다. 정윤환이 싱긋 웃었다.
“예산을 좌지우지한다더니. 이제 그만 간판 바꿀 때도 되지 않았냐. 이번 선거…….”
“이 자리도 내게 과분해.”
서재희가 딱 잘라 대답했다. 정윤환이 미간을 좁혔다.
“안 나간다고?”
“나는 그럴 만한 그릇이 아냐.”
“……네가 안 나가면 누가 나가? 여론 조사마다 부동의 1위를 휩쓸어 놓고…….”
“나는 그 무엇보다 은우가 우선이야. 나 같은 사람은 그런 자리에 앉으면 안 돼. 은우 빌미로 나 끌어내리려고 공작하는 게 몇 번짼지 셀 수도 없어. 우린 언제나 최악을 가정해야 해.”
“아니, 그럼 차예원이 무투표 당선되게 두겠다는 거야? 아무리 차인호가 우리 죄까지 다 짊어지고 갔다 하더라도 차예원한테 그리 후한 건 내가 용납 못 해.”
“내가 기껏 차예원 주려고 그 자리를 만들어 놓은 줄 알아? 천만에. 거긴 네가 앉아야 해. 물론 네가 동의해야겠지만.”
서재희가 유은우의 손을 놓고 정윤환의 어깨를 잡았다. 힘이 실렸다.
“이제 정부 앞에 임시라는 수식어를 뺄 때도 됐지.”
“너까지 왜 이래?”
정윤환이 깊게 숨을 토했다. 그가 복잡한 얼굴로 이마를 거칠게 문질렀다. 그대로 침묵이 감돌았다. 이미 답을 들은 듯 평온한 서재희에 비해 정윤환은 완전히 궁지에 몰린 표정이었다. 정윤환은 서재희를 향해 무어라 말하려다 말고 휙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야, 유은우. 네가 뭐라고 말 좀 해 봐. 그런 자리는 따뜻하고 똑똑한 사람이 앉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네가 적임자야.”
유은우가 단칼에 대답했다. 정윤환이 아연한 낯으로 반박했다.
“진심이야? 너 이 시대의 유일한 계약자, 아니, 이제 두 명 중 한 명, 어쨌든 계약자로서 양심에 손을 얹고 똑바로 대답해. 서재희가 밀어붙이니까 너도 그냥 동조하는 거 아니야?”
“나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해. 예비 심사에서 싸움난 거 네가 중재해 놓고 내가 남 의견 따라간다는 말이 나와?”
정윤환이 생각보다 제 위치를 받아들이지 못해, 유은우는 그만 초조해졌다. 내색 않고 덧붙였다.
“네가 말하는 따뜻하고 똑똑한 사람이 별거야? 네가 그런 사람이야. 네가 가진 재능이 비단 설계뿐이었다면, 내가 용을 죽여서 동조자가 전부 힘을 잃은 그 순간부터 너도 별 볼 일 없어졌어야 해. 그런데 지금을 봐. 이렇게 활발히 정치하며 돌아다니고 있잖아. 이게 재능이 아니면 뭐야?”
“무슨 소리야. 나 정치 안 해. 사회 활동이야. 봉사라고.”
정윤환이 항변했다. 김서혁이 딱딱하게 말했다.
“그 봉사 계속하고 싶으면 이번 스캔들만큼은 확실히 무마하도록. 길어지면 영상회의 소집될 거다.”
“잘생겨서 여자 꼬이는 게 제 탓인가요.”
정윤환이 작게 투덜거리자 김서혁이 펜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얼굴 때문만은 아닐 텐데. 침묵이 오래되면 악으로 굳어지니.”
유은우는 그만 웃음이 터졌다. 정윤환의 낯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어 정윤환의 연설을 그대로 읊으려는 김서혁을, 정윤환이 황급히 두 손을 들어 막았다.
“아, 하지 마세요, 진짜. 의장님 요새 장난이 너무 느셨어요.”
서재희가 부드럽게 말했다.
“홍보실장님도 걱정하시더라. 네가 밥 먹다가 옆에서 넘어지는 여자 잠깐 부축한 것만으로 판이 휘청거리고 구도가 재편되는데, 정치가 아니라고 할 순 없지. 물론 네가 의도치 않는다는 건 나도 충분히 알고 있어. 하지만 우리가 그때 낙원의 이론을 폭로한 순간부터 이렇게 될 거라는 건 너도 예상했잖아. 우리가 우리 위치를 이용하지 않으면 남이 우리를 이용해. 낙원의 이론을 부쉈다고 해서 끝난 건 아니야. 또 다른 이름의 낙원의 이론이 언제든지 생길 수 있어. 그렇게 필사적으로 체제를 한번 꺾어 냈는데, 설마 똑같은 역사가 반복되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서재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친절하게 덧붙였다.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니야.”
“어련하시겠어.”
정윤환이 중얼거렸다. 그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 그래서 걔가 나한테 결혼하자고 했나.”
유은우는 서류를 뒤적이며 물었다.
“누구?”
“차예원.”
유은우는 손을 멈추고 정윤환을 빤히 보았다. 되물었다.
“차예원? 안기헌이랑 결혼하잖아. 다음 주 토요일에.”
정윤환이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 저번 주에 나한테 물어보더라고. 안기헌이 마음에 다 차진 않는다고. 위치는 괜찮은데 외모가 별로라나 뭐라나. 나보고 결혼 생각 있으면 어차피 마음에 찰 여자도 없을 테니까 이왕이면 자기랑 하자던데. 너랑 결혼하느니 차라리 혀 깨물고 죽겠다고 지랄을 했더니 더 이상 아무 말 안 하더라. 쥐약을 처먹었나 뭔 개소리를 하나 했더니, 경쟁자 하나를 제 편으로 만들려는 원대한 꿈이었나 보네.”
서재희가 정윤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데 차예원이랑 결혼은 안 돼. 그럼 의장님은 물론이고 나도 타격이 커.”
“내가 미쳤냐.”
“만에 하나.”
진동이 울렸다. 서재희가 이프를 확인하고 김서혁에게 말했다.
“원장님 호출입니다. 다녀오겠습니다.”
김서혁이 고개를 끄덕여 서재희는 일어섰다. 도통 일어날 생각을 않는 정윤환을 향해, 서재희가 타이르듯 말했다.
“자꾸 이프 끄고 다닐 거야?”
정윤환이 콧방귀를 뀌었다.
“원장님은 아까 잠깐 뵀어. 원장님 뵙고 유은우 마중 나간 거라고.”
“멀찌감치 서서 눈인사만 하고 사라진 거 말하는 거야?”
정윤환이 못 들은 척하자 김서혁이 말했다.
“정윤환, 한세연이 너 찾는다고 나한테까지 전화 오게 만들지 마라.”
“이렇게 체질이 아닌데 나보고 선거에 나가라니.”
정윤환이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유은우와 눈이 마주치자 과장스럽게 죽을상을 지어 보이고는 씩 웃었다. 그가 유은우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내일 보고회 때 봅시다, 유은우 이사장님.”
“네네. 오늘 마중 나와 주셔서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옆에서 듣던 김서혁이 피식 웃었다.
정윤환이 휘적휘적 먼저 나가고, 서재희가 옷매무새를 고치고는 김서혁에게 묵례를, 유은우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이어 나갔다.
둘만 남자, 김서혁은 말이 없었다. 그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유은우는 흩어진 서류를 정리했다. 이내 김서혁이 말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유은우는 서류를 모아 각을 맞추던 손을 멈추었다.
“응? 뭐를?”
“예언 말이야. 받아 오고 싶지 않으면 받아 오지 마.”
유은우는 들고 있던 서류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웃으며 물었다.
“이유 안 묻네?”
“물을 필요 있나. 계약자가 원치 않는다는데 그것으로 끝나는 거지.”
김서혁이 선선히 말하여, 유은우는 안도했다. 언쟁을 감수하고 왔는데, 김서혁은 온전히 받아들여 주었다.
“운명 같은 건 없어. 예언은 필요치 않아. 듣는 이마다 다르게 해석하기 때문이지. 오히려 용의 예언이라는 무게가,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들어. 대장도 느꼈겠지만.”
김서혁이 엄한 얼굴을 했다.
“의장님.”
“아, 의장님. 미안해. 입에 붙질 않아서.”
“3년이나 지났어.”
“죄송해요.”
유은우는 작게 웃었다. 김서혁은 고개를 기울이며 유은우를 깊숙이 응시했다.
“이미 인간과 용의 계약은 깨어진 지 오래야. 용을 해체하여 도시를 건설한 순간 파기된 거나 마찬가지다. 네 용이 관대했던 거지.”
유은우는 까맣고 반들반들한 용을 떠올렸다. 맑은 진주색을 띠며 온순한 손도연의 용에 비해, 유은우와 계약한 용은 제멋대로에 주파수 안 맞는 라디오처럼 의사소통도 잘 되지 않았다. 심지어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나타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용은 과거 도시연합의 덫에 걸렸던 순간을 아주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잊지도 않고 유은우를 만날 때마다 그때의 심정을 복기하며 인류 전체를 폄하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유은우는 중간에 한번 말을 끊었다가 꼬리로 얻어맞은 후로는, 인내하며 그 모든 것을 들어 주곤 했다. 용은 유은우와 친밀해지려고 할 때마다 그 경험을 말미암아 거리를 두겠다는 다짐을 새로이 하는 것 같았다. 그건 유은우도 피차 마찬가지였다.
반면에 손도연은 용과 의사소통이 아주 원활했는데, 정말 그뿐이었다. 손도연은 아주 가끔 유은우가 몰래 지원하는 부속선을 타고 용을 보러 다녀오곤 했는데, 용을 만나면 밤새도록 떠들다가 온다고 했다. 유은우가 안부 전화를 할 때마다 손도연은 이미 예언의 일부를, 혹은 전부를 잊은 채였고 간혹 기억한다고 해도 유은우가 받아 온 예언과 상충하기도 했다. 손도연은, 강렬한 교감 속에 스치는 애매하고 장황한 찰나보다, 용의 비늘에 윤기가 잘 도는지, 지난달 빠졌던 발톱이 새로 돋아났는지 따위를 더 중히 여겼다. 그녀는 부속선에 탈 때마다 놀러 간다고 표현했다.
“내 용이 관대하지는 않아. 그저 본능적으로 계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내가 제일 익숙해서 선택한 거래. 아무튼, 이제 저는 예언을 가져오지 않겠습니다.”
“그게 네 결정이라면, 좋아. 다른 계약자는, 누군지 모르겠다만 가지고 돌아오는 예언을 보아하니 애초에 그쪽에 관심도 없는 것 같으니, 그럼 이제 우리는 정말 운명이 없는 거로군.”
“네. 선택과 결과만 있어요.”
김서혁은 이프를 눌렀다. 메모리 하나가 톡 튀어나왔다. 김서혁은 무어라 말도 없이 그것을 가만히 매만지기만 했다. 유은우는 조용히 기다렸다. 이내 김서혁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먼저 사과부터 하지. 내가 먼저 보았다. 네게 주어도 될지 판단하기 위해서였어. 나는 앎이 행복과 직결된다고는 믿지 않아. 그래서 보고 판단해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정할 수 없었어. 그래서 난 네 입장에서 생각했다. 너라면 어땠을까. 네가 나라면, 메모리를 당사자에게 전달했을까. 그 기준으로 판단했다.”
김서혁이 메모리를 내밀었다.
“유은우 너라면 주었겠지.”
유은우는 메모리를 받아 들었다. 제대로 인식이 될까 싶을 만큼 낡은 메모리였다. 김서혁의 온기로 따뜻했다.
“유류품에 섞여 있던 것인데, 담당자가 중요한 자료라고 판단하여 나한테까지 올라온 거다. 처음엔 폐기하라고 지시했고, 나중엔 후에 쓸 일이 있을까 싶어 보관을 할까 했지만, 우린 이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거니까.”
김서혁은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유은우를 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단단했고 짙은 회색이 돌았으며 따뜻했다.
“사람은 누구든 양면을 지니고 있어. 네 부모님이 어떤 오판을 했다고 해서, 그들이 악한 자였던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차인호는…….”
김서혁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
“……그는 젊었을 때 너와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었지.”
“고마워.”
유은우는 다정하게 이어 말했다.
“내가 괜찮을 거라고 믿고 줘서.”
◆
유은우는 이프에서 메모리를 빼내었다. 그럼에도 홀로그램의 잔상이 아지랑이처럼 남아, 아직도 부모님의 얼굴이 선했다.
유은우가 수없이 그려 왔던 것보다, 부모님은 평범한 인상에 열정적이었으며, 무엇보다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이가연은 지적인 외모와 다르게 덜렁대며 잘 웃었고, 유태헌은 반란군 수장이라기에 격이 없었다. 화면 드문드문 한세연도 비쳤다. 그녀는 지금보다 훨씬 생기 있었다.
이가연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용의 뼈와 기계를 엮는 과정을 보일 때, 유은우는 동영상을 한 번 멈추어야 했다. 숨을 고르고 다시 재생했다. 그 손바닥만 한 화면으로, 유은우는 젊고 유능한 사람들이 어린 난민 동조자들을 상대로 흰 칼날 프로젝트를 구상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영상은 끝에 이르러 드문드문 끊어지고 이어 툭 꺼져 버렸다.
유은우는 메모리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낡아서 깨진 금으로 오후의 빛이 차올랐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한때 강렬했던 분노가 되살아나는 듯하다가 이내 힘을 잃고 스러졌다. 메모리에 담긴 시대는 끝난 지 오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은우 자신의 손으로 끝을 냈다.
유은우는 부모님을 미워하지 않기로,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다. 유은우는 김서혁이 고민 끝에 메모리를 내어준 것에 감사했다. 그 또한 유은우가 이리 강해졌음을 알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선택이라고.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시간차를 두고 보안 해제음이 났다. 유은우는 문을 등진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메모리를 집어 투명하여 안이 들여다보이는 폐기함에 떨어뜨렸다. 메모리는 폐기함 가득 담긴 소금물에 퐁당 빠지고 보글보글 기포를 내며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낡은 회색이었던 메모리는 순식간에 타고 남은 재처럼 새까맣게 변해 버렸다.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이내 뒤에서 끌어 안겼다.
“갈 때도 말을 안 하더니, 올 때도 말 한마디 없고.”
유은우를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숨으로 귓가가 뜨거웠다. 전신으로 제 체온을 밀어붙이며, 서재희가 낮게 속삭였다.
“나 지금 화났어. 네가 나 풀어 줄 때까지 키스 같은 거 안 할 거야.”
유은우는 늘 그렇듯 장난삼아 몸을 틀어 그 품에서 살짝 벗어났다. 항상 하는 장난인데도 서재희는 언제나 화들짝 놀라 유은우를 필사적으로 당겨 안았다.
“어디 가.”
꽉 잠긴 목소리로 서재희가 팔에 힘을 주었다. 유은우는 서재희의 단단한 품 안에서 용케 몸을 뒤집어 그와 마주 보았다. 눈을 맞추기 위해 서재희가 팔을 느슨히 하여 공간을 두었다. 그러나 완전히 놓지는 않았다.
“오빠가 자꾸 내 일정에 맞춰 업무를 처리한다는 소문이 도니까.”
“널리 퍼뜨리라고 해. 사실인데 무슨 상관이야.”
유은우는 서재희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넥타이 없이 윗 단추가 끌러진 연푸른 셔츠가 매끄러웠다. 서재희의 손이 다가와 머리칼 사이로 익숙하게 파고들었다. 유은우는 자신의 머리를 가만히 어루만지는 서재희의 손끝에서 며칠을 희게 지새우며 뒤적였을 종이의 마른 결을 느꼈다. 서재희의 다감한 눈에서는, 카페인에 약해 꺼리는 커피 대신 티백을 바꿔 가며 몇 잔이고 마셨을 허브차 냄새가 났다.
“이제 나한테 전화도 안 하고.”
“방해될까 봐 그러지.”
“난 너랑 붙어 지내고 싶어서 빨리 끝내려고 하는 건데, 네가 나 마음껏 일하라고 연락도 안 해 주면 무슨 의미가 있어? 계속 이런 식으로 하면 다 관두고 파업할 거야. 진짜야.”
서재희가 말끝에 눈으로 웃었다. 유은우는 따라 웃고 싶었으나 쉽지 않았다. 얼른 서재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부드럽게 뛰는 심장 소리에 코를 묻었다.
서재희가 파업이니 어쩌니 농담처럼 말해도, 결코 자의로 멈출 리 없음을 유은우는 알고 있었다. 서재희는 필사적으로 일했다. 잠을 줄이고 식사를 거르며 온갖 정책을 발굴했고, 막 제정된 법도 예외 없이 해체하여 개정안을 발표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금은 무엇을 해도 좋을 시기였다. 틀이 무른 찰나였다. 지금 비뚤게 고착되면 후에 고치기 어려워진다고 했다. 그러니 하나라도 바르게 세워야 한다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 소진되더라도. 이 노력이 훗날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에게 최소한의 안전망이 되기를.
서재희는, 유은우가 아끼는 많은 사람이 그렇듯, 응당 받아야 할 죗값을 치르지 못한 데에 부채를 느끼고 있었다. 서재희가 자기 자신을 체벌하듯 혹독하게 몰아붙이는 만큼, 대중은 서재희를 유력한 차세대 지도자로 거론했다. 유은우는 그런 여론이 달갑다기보다 두려웠다. 우리가 이렇게 노력하는데도 어떤 거대한 불가항력적 쳇바퀴처럼 같은 운명을 걷고 같은 시대가 반복될까 봐. 서재희는 이전에 낙원의 이론 후보였다.
서재희의 숨이 차츰차츰 나른해졌다. 유은우는 그의 품속에 파묻힌 채 부드럽게 뛰는 심장박동과 함께 호흡하다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피곤에 지친 까만 눈동자가 유은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없이 따뜻하여 유은우는 손을 뻗었다. 서재희의 눈가를 가만히 쓸었다. 그뿐인데 서재희는 흐르듯 웃었다.
“간지러워.”
“옛날에 만져 보고 싶었거든요.”
서재희가 웃음을 지우지 않으며 진지한 얼굴을 했다.
“언제?”
“말 안 해 줄 거야.”
유은우가 장난처럼 입을 다물자 서재희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래?”
서재희가 유은우를 훅 안아 들었다. 숙소 안쪽의 침실까지 몇 걸음이었다. 서재희가 유은우를 침대에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까만 의복이 물처럼 흩어졌다. 능숙하게 위로 올라와 무게를 더하고 그늘을 드리우며 다가오는 서재희의 등을 유은우는 익숙하게 처음처럼 끌어안았다. 입맞춤은 이마, 눈, 코, 뺨, 턱, 목에, 부드럽거나 까칠하거나 오목하거나 솟거나를 가리지 않고 따뜻한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끝에 입술을 물렸다. 숨이 천천히 파고들었다. 유은우는 서재희의 손이 상의를 걷으며 들어와 허리를 문지르면서 등 뒤로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유은우를 바짝 당겨 안으며 서재희가 입술을 떼어 냈다. 그가 심각하게 물었다.
“옛날에 언제?”
유은우는 그만 웃음이 터졌다.
“간담회 가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돼요.”
“그러니까 옛날에 언제. 누가 먼저 좋아하기 시작했나 궁금해서 그래.”
“나한테 시험 공부 가르쳐 준 날.”
“아.”
서재희가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탄식했다.
“이미 너한테 푹 빠졌을 때야.”
“설마. 내가 먼저 좋아했어요.”
“아니야. 내가 먼저 좋아했어. 언제부터 좋아했냐면, 네가 계단에서 피를 막 쏟아 버리고 총을 뽑았을 때부터.”
“거짓말…….”
“진짜야. 느낌이 그랬어. 저 특례입학생 때문에 내 인생 앞으로 정말 힘들어지겠구나.”
유은우는 서재희를 밀어내며 웃었다. 서재희는 유은우가 미는 대로 밀려나 주다가 별안간 숨 막히게 끌어안았다. 그가 머릿결 사이로 속삭였다.
“넌 언제부터 내가 좋았어?”
“진짜 잘 모르겠어요. 그냥 정신 차리니까 좋아하고 있었어요.”
“잘 생각해 봐. 지어내서라도 말해 줘.”
대답할 수 없었다. 서재희가 유은우를 안고 있던 팔을 풀더니 두 뺨을 힘 있게 감쌌다. 고개가 기울어지고 입술이 겹쳐졌다. 햇살인지 사랑인지 눈이 부셨다. 의복이 바닥으로 흘러 떨어졌다. 서재희의 손끝이 스치는 곳마다 감각이 새파랗게 피어났다.
우웅, 진동이 울렸다.
“받지 마.”
서재희가 키스하며 속삭였다. 유은우는 급한 대로 이불을 젖히고 손을 협탁 위로 더듬어 인터컴을 찾았다. 손끝에 인터컴이 걸린다 싶었는데 그대로 몸이 확 움츠러들었다. 서재희가 유은우의 귓가에 부드럽게 숨을 불어넣고 있었다. 이어 귓불을 물렸다. 정신이 아득해 유은우는 인터컴을 포기했다. 몇 번의 진동 뒤에, 자동 연결 안내음이 이어졌다. 인터컴을 통해 앳된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이사장님, 저 주원이에요. 석찬 간담회 있는 거 잊지 않으셨지요?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서재희의 입술을 받아 내느라 유은우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인터컴 너머로 유은우를 부르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이내 뚝 호출이 끊어졌다. 유은우는 장난스럽게 손바닥으로 서재희의 얼굴을 덮어 밀었다. 손바닥 가득 서재희의 웃음소리가 꽃송이처럼 부풀었다.
“그런 사소한 일정까지 다 챙기면 언제 숨 쉬고 살아? 오늘 내가 너 보내 주나 봐. 저번 달부터 한 번도 못 안았어. 같이 밥은 못 먹어도 이건 절대 양보 못 해.”
일정이 급해 걱정이 되면서도, 유은우는 서재희의 장난에 맞춰 주어야 하나 심히 갈등했다. 그만큼 제 몸을 파고드는 서재희의 손길이 지나치게 달았다.
하긴, 그동안 너무 바빴지. 단둘이서 밥 먹은 게 언젠지도 모르겠네…….
가만 보자. 지지난달에 김서혁이 선물로 간식을 보내 와서 서재희 집무실에 찾아가서 단둘이 나눠 먹지 않았었나? 아냐, 그때 갑자기 차예원이 청첩장 돌린다며 찾아오는 바람에 셋이서 먹었지. 그럼 그 전에는? 유은우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으나 건질 게 없었다. 거의 한 달간 유은우는 사해에 있었고, 그 전에도 서재희와 단둘이 오붓하게 식사한 것은 손에 꼽았다. 유은우에게 식사는 업무가 된 지 오래였다.
다시 진동이 울렸다. 이번엔 서재희의 바지 주머니에서였다. 유은우가 재빠르게 손을 뻗어 그의 주머니에서 인터컴을 꺼냈다. 막으려고 다가오는 서재희의 손을 기민하게 피하며 인터컴을 눌러 스피커폰으로 전환하고 그대로 서재희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서재희가 과장되게 서운한 표정으로, 그러나 깨끗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서재희입니다.”
― 서재희 기획경제위원장님, 안녕하십니까. 난민 복지재단 이주원입니다. 실례인 줄 압니다만 혹시 옆에 유은우 이사장님 계십니까? 두 시간 뒤에 석찬 간담회가 있습니다.
유은우가 막 입을 열어 대답하려는 것을, 서재희가 장난치듯 손바닥으로 막았다. 그가 짓궂은 눈으로 유은우를 응시하며, 그러나 더없이 매끄럽게 응답했다.
“오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그쪽에서 바로 뵙지요.”
몇 마디가 오간 후 통화가 끊어졌다. 서재희가 인터컴을 끄더니 바닥에 힘차게 던지는 시늉을 했다. 유은우는 그만 웃음이 터졌다. 손을 들어 서재희의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곧 일정이 있음에도 서재희는 그 손길을 제지하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땐 그렇게 철두철미하던 서재희는, 유은우와 지내면서부터 천천히 허물어졌다. 처음엔 유은우가 어지르는 족족 말없이 정리하던 그가, 이젠 넥타이도 의자에 비스듬히 걸쳐 둘 만큼 유해지고 있었다. 죽음을 예비하며 홀로 제 흔적을 벅벅 지워 대던 결벽증은 서서히 옅어지고, 미래에 대한 여유로 흐트러지는 만큼 더 자주 웃었다.
“어떡하지. 나 지금 정말 행복하다.”
“두 시간 남았어요.”
“지금 키스 안 해 줄 거면 내일 저녁에 일정 빼. 제발 둘이서만 밥 좀 먹어 보자. 아니면 같은 시간에 동시에 침대에 들어가든지. 응? 어떻게 해야 나한테 네 시간 좀 줄래.”
“못 빼요. 다 잡아 놓은 공청회를 어떻게 지금 빼.”
“진짜 이럴 거야?”
서재희가 짐짓 화난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남에게 하듯 꾸며 내어 완벽하게 굴지 않았다. 허술하게 화를 내고 틈을 두며 칭얼댔다.
“소연주한테 이번 공청회에 기자 몇이 작정하고 붙었다고 해야겠다. 온 오염도 수치 오류 건으로 물고 늘어질 것 같아 내가 막긴 했는데 혹시 모르니 미리 답변 준비해야 할 거라고. 그럼 소연주 성격상 공청회는 연기되고 넌 일정이 비겠지? 그럼 저녁만 같이 먹겠어? 그동안 우리 못 했던 거…….”
“하지 마요, 진짜.”
웃으며 대답했다. 서재희가 결코 실행에 옮기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단 한순간도 유은우를 제멋대로 휘두르려 한 적이 없었다. 유은우는 서재희의 모든 조율에서 언제나 최우선으로 예외였다.
“이선규는 좋겠다. 일 다 줄이고 매일 칼퇴하고 소연주랑 알콩달콩 신혼이라 행복하겠지. 나는 이게 뭐야. 예쁜 애인이 있는데 아무것도 못 하고. 매일 데이트 신청하느라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받아 주지도 않고.”
유은우가 서재희를 힘 있게 밀어냈다. 서재희는 아쉽게 물러났다. 유은우가 풀린 끈을 묶고 겉옷을 매만지자 서재희가 한숨을 쉬었다. 유은우는 침실에서 나와 옷걸이에서 망토를 집어 들었다. 뒤따라온 서재희가 손을 내밀어 유은우의 앞을 막았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 이제 서로 하고 싶은 대로 다 밀어붙이면서 누가 이기나 한번 해 볼까.”
“그럴까요.”
유은우가 웃으며 서재희의 팔을 잡아 내리려는 찰나, 그에게 허리를 확 감겼다. 그대로 깜짝 놀랄 정도로 자상하게 벽에 몰아붙여져 유은우는 약간 당황하여 서재희를 올려다보았다. 낯을 살필 수 없었다. 서재희는 이미 유은우의 귓가에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스몄다.
“안 되겠어. 내일 저녁에 시간 내. 무조건이야. 나 네 일정 안 건드려. 네가 정말 날 생각한다면 네가 시간 빼. 안 그러면 다음 주 내내 모든 일정이 연기되는 기현상을 겪게 될 거야. 아무리 나라도 인내심에 한계가 있어…….”
“이거 혹시 협박인가요?”
유은우는 도닥이듯 서재희의 어깨를 밀어냈다. 서재희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럴 리가. 간곡한 구애야.”
유은우는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서재희를 마주하고는 그만 가슴이 뛰었다. 남들 앞에선 치밀하게 정돈된 남자가 제 앞에서만 여과 없이 내보이는 모습이었다. 이런 안달 난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유은우는 요즘 들어 풍부해진 서재희의 감정 표현이 내심 달가웠다.
“농담 아냐. 진짜로.”
서재희가 유은우의 손에서 망토를 가져갔다. 그가 더없이 따뜻한 손길로 유은우의 어깨에 망토를 두르고 체인을 고정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유은우를 품으로 껴안아 망토 뒷자락을 쓸어 정돈할 때, 유은우는 그의 어깨 너머로 눈부신 광경을 보았다. 창 너머 온각이 나부끼고 있었다. 부모님의 영상을 볼 때도 말랐던 눈물이, 저도 모르게 뚝 떨어졌다. 유은우는 그대로 서재희를 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온각이 여기까지 왔어요.”
서재희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둘은 오랫동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늦겨울의 찬 하늘 위로 흰 결정들이 날아오르다 창에 부딪히며 크게 휘돌았다.
문득 뺨으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유은우는 결국 간지럼을 참지 못하는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를 마주 보았다. 서재희의 눈빛에 무한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가슴이 녹을 정도로 따뜻하여, 전신의 힘이 쭉 빠졌다.
유은우는 서재희에게 어깨를 잡혔다. 서재희가 고개를 기울이며 가까이 오기에 유은우는 눈을 감았다. 짧은 입맞춤이 몇 번 이어지고 이내 갈급히 깊어졌다. 유은우는 자꾸만 다리에 힘이 풀려 급한 대로 서재희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등과 뒤통수를 단단히 받치던 서재희의 손이 부드럽게 떨어지더니 이내 유은우의 왼손을 감싸 쥐었다. 오래 쥐고 있어 온기로 달궈진 금속이 왼손 약지에 걸리더니 매끄럽게 안착했다. 서재희가 느리게 입술을 떼었다. 까만 눈이 젖어 있었다.
“은우야.”
단정한 손이 다가와 유은우의 머리칼을 걷어 귀 뒤에 꽂았다. 서재희가 낮게 속삭였다.
“널 생각하면 내 인생이 괜찮아 보여.”
유은우는 눈을 떨어뜨렸다. 왼손 약지에서 반지가 빛을 발했다.
“처음 페어 맺은 것도, 함께 외출한 것도, 온디딤을 찾았던 것도, 내가 더 살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널 생각하면 모두 다 잘한 결정이 돼.”
유은우는 다시 눈을 들어 올렸다. 사랑을 마주했다. 유은우는 서재희가 용기를 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고백에 감격하기보다, 그의 결심에 가슴이 벅찼다.
“널 만나기 전에 난 얼마나 초라했는지 몰라. 새카맣게 타서 재만 남아, 그나마 남은 뼈는 비틀려서, 죽은 것처럼 살았어. 그런데 이젠 달라. 네가 날 눈부시게 해.”
서재희의 까만 눈이 고요하게 유은우를 담아냈다.
“청혼이 많이 늦었지. 혁명이 성공하자마자 반지를 사서 간직하고 다닌 지 3년이 넘어가는데 쉽게 줄 수가 없었어. 혹시 죄가 탄로 나서 내가 더 이상 네 곁에 있을 수 없게 될까 봐. 네게 내 죄가 묻을까 봐. 아무리 차인호가 덮어쓰고 갔더라도,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니까. 그런데도 욕심이 나서 네 주변에 머물렀어. 그런데 이제 이 짓도 더 이상 못 하겠어. 나중은 어떻게 되든 이 악물고 헤쳐 나가려고. 더 이상 몸 사리지 않으려고.”
옅게 떨리는 목소리로, 서재희가 속삭였다.
“나랑 결혼해 줄래?”
서로가 서로의 어디쯤인지 애가 닳던 때가 있었다. 아직도 바삭하게 마른 가장자리만 헤맬 뿐인지. 언젠가 역동하는 녹색 잎맥을 따라 내가 널 흐를 수 있기는 한지. 그러나 서로가 서로에게 햇살처럼 흠뻑 쏟아져, 오래된 우물을 길어 올리고 말랐던 잎을 펼치며 지금 이렇게 활짝 피어났음을. 그리고 너는 내 안 깊이 스미고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한 어둠마저 끌어안아 뿌리가 되었음을.
유은우는 손을 내밀어 서재희의 뺨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서늘하고 단정한, 서재희가 간절히 대답을 구하는 눈으로 유은우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젠가 야외 오찬에 참석한 날, 유은우는 서재희가 옆자리에 앉은 김서혁의 귓가에 속삭이는 걸 들었다.
‘의장님도 아시겠지만, 저는 이렇게 밝은 대낮에 나오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청첩장을 건네러 온 차예원도 그랬다. 우리는 비밀을 간직함으로 인해 완전히 망가졌다고. 다시는 온전한 삶을 누리지 못하리라고. 영원히 죄가 밝혀질까 전전긍긍하며 살아 갈 거라고. 우리가 새 시대를 열었으나, 그 새 시대가 우릴 버릴 거라고.
상관없었다.
유은우는 서재희를 힘껏 끌어안았다. 안타깝도록 잔뜩 긴장해 있던 서재희가 비로소 무너지듯 안도했다. 그의 온기가 유은우의 어깨를 적셨다. 유은우는 서재희의 마른 등을 쓸어내리고 또 쓸어내렸다. 새파란 햇빛 냄새를 담뿍 들이마셨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고난이 닥칠 것인가. 그들은 오래되어 견고하던 어떤 체제를 무너뜨렸고, 그 모든 변화를 감당할 책임이 있었다. 많은 언론이 현재를 암흑의 시대라 명명했다. 혁명이 성공했다고 길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온 건 결코 아니었다. 어쩌면 인간이란 평생 희미한 빛만 갈구하며 터널을 걷다가 죽을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은우는 확신했다. 사랑에 기반한 선택이 반복되면 결국은 더 나은 세상이 될 거라고. 이보다 더 이타적인 결정은 있을 수 없으므로. 그리하여 서로를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으로 인하여, 아주 천천히 그러나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나아지리라고.
유은우는 서재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눈을 감았다. 처음 페어를 맺던 날 빈 강의실을 가로지르던 오후의 볕이 눈꺼풀을 파고들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선택한다.
<낙원의 이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