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 언더 프로모션
노석원이 유은우가 걸친 실험복을 젖히고 그 아래 도복을 칼로 크게 베어 냈다. 새까맣게 타들어 간 허벅지가 드러났다.
“직격으로 맞아 버렸네.”
노석원은 난감한 기색이었다.
입술을 꽉 물고 말이 없던 손도연이 급기야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내가 도움이 못 되어서. 설계 공부 좀 열심히 할걸.’ 흐느낌 사이 띄엄띄엄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손도연이 수건을 둘둘 야무지게 말아 유은우의 입에 가져다 대었다. 유은우는 그것을 악물었다. 손도연이 끅끅 울면서 유은우의 허벅지를 단단히 붙잡아 고정했다. 노석원이 약물 케이스를 집어 드는 것까지만 보고 유은우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도저히 상처를 더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부속선의 내부가 낯설었다.
연구실 벽을 사정없이 부수고 돌진한 부속선에 몸을 막 실은 참이었다. 부속선은 용 연구소의 것으로, 유은우가 경험한 군의 함선들과 사뭇 달랐다. 약물 케이스와 여분의 무기, 각종 폭발물로 가득한 군의 함선과 달리, 이 부속선은 연구를 목적으로 하여 훨씬 학구적이었다. 무언가를 담을 빈 병과 압축 팩이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벽마다 현미경과 측정기 따위가 알차게 수납되어 있었다. 콘솔도 간결했다. 부속선에 수납된 무기를 조종하기 위한 장치로 복잡다단한 군의 콘솔과 달리, 한세연이 조종석에 앉아 노련하게 타를 잡고 있는 콘솔은 정말 운항 외에는 다른 기능이 없어 보였다. 김서혁은 한세연 옆에 우뚝 서서 한 손은 허리에 짚고 다른 한 손은 콘솔의 여백을 짚은 채 무어라 낮게 말하고 있었다. 그 옆의 조수석엔 낯선 남자가 앉아 있었다. 뒷모습이라 얼굴이 보이진 않았으나 덩치가 꽤 컸고 기본적인 전투복 차림이었다.
“순둥아, 잠깐만 참아.”
딱, 케이스 깨지는 소리가 나고 허벅지 위로 끈적한 액체가 쏟아지는 느낌이 선명했다. 이어 유은우는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대로 수 초를 견뎠다. 번갯불로 살을 지지는 듯한 고통은 처음 내리꽂힐 때만큼이나 순식간에 사라졌다. 누군가가 유은우의 입에 물려 있던 수건을 빼 갔다. 가까스로 숨을 토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죽어라 이를 악문 탓에 턱이 빠질 것 같았다.
노석원이 감탄했다.
“와, 순둥이 여전히 잘 낫는구나. 예전에 인큐베이터에 있을 때도 회복이 빠르긴 했지만.”
그에 용기를 얻어 유은우는 조심스럽게 제 허벅지를 보았다. 역겨운 초록색 거품이 부글거리는 사이로 제법 아문 상처가 보였다. 노석원이 깨끗한 헝겊에 소독약을 흠뻑 적시더니 상처를 능숙하게 닦아 냈다. 피가 걷어지는 것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놓였다. 유은우가 거친 호흡을 고르는 동안 노석원이 붕대를 집어 들었다.
“그래도 조심해. 완전히 낫기 전에 2차로 맞으면 재생 불가한 거 알지? 붕대 좀 감아 놓자.”
노석원이 방수 처리된 붕대를 양쪽으로 펼쳐 쥐고 한쪽 손을 유은우의 허벅지 아래로 집어넣으려 했다. 유은우는 그의 손이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무릎을 약간 세워 주었다. 그러나 노석원의 손은 들어오기는커녕 흠칫하더니 그대로 멈추어 버렸다.
“치, 치료는 제 담당입니다, 총사령관님. 아니, 이제 총사령관님이 아니시죠. 아무튼…….”
“비켜.”
어느새 김서혁이 다가와 있었다. 노석원이 당황해하며, 그러나 물러설 기미 없이 말했다.
“이건 그냥 제가 하겠습니다. 총사령, 아니, 총사령관님이셨던 분이 뭐 하러 손을 더럽히면서까지 남 치료를 직접 하시려고 하세요. 이런 건 저희가 전문가입니다. 제가 3년이나 순둥, 유은우를 돌봤거든요. 총사령관님은 얼마나 훈련시키셨죠? 2년인가? 2년도 채 안 되지 않나요?”
유은우가 듣기에도 묘하게 신경을 긁는 데가 있었다. 김서혁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2년 5개월 8일. 그리고 군인이라면 당연히 응급처치는 기본으로 숙지한다. 내가 결코 너보다 못하진 않을 텐데. 유은우 데리고 전투 나갔을 때 부상을 입으면 항상 내가 해 주었어.”
“그건 사해에서 군인들밖에 없을 때고 지금은…….”
“노석원, 넘겨 드리고 이리 와.”
한세연 옆에 있던 남자가 딱딱하게 말했다. 그럼에도 노석원은 꿋꿋하게 버텼다. 그러나 김서혁이 급기야 유은우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자, 노석원은 마지못해 붕대를 내어 주며 뒤로 물러섰다. 손도연은 김서혁이 오든 말든 개의치 않고 유은우 옆에 꼭 붙어 있었으나, 노석원이 이리 나오라고 손짓을 하자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만 남자, 비로소 김서혁이 손을 움직였다. 그는 무감한 낯으로 유은우의 허벅지에 능숙히 붕대를 대었다. 한 바퀴를 탄탄하게 휘감는 손길이 낯익었다. 유은우는 살짝 눈을 들어 김서혁을 보았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바로 그와 눈이 마주쳐 약간 놀랐다. 김서혁이 손을 멈추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대체 서재희랑 무슨 사이지?”
유은우는 말없이 김서혁을 마주 보았다. 다시는 김서혁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을 거라 여겼다. 가족이되 가족이 아닌 그런 관계는 군에서 쫓겨나며 끝이라 각오했다. 그러나 김서혁의 손길은 가슴이 덜컹할 정도로 익숙하여 그간의 고통스럽던 부재를 전부 없던 일로 만들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한 와중에 그의 질문만 쨍하게 생경했다. 수많은 화제를 제치고 하필 서재희가 도마에 오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대답이 늦어.”
김서혁의 의도가 불투명하여, 유은우는 대답이 쉬이 나오질 않았다.
“그놈이 널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쯤은 안다. 넌 어떤지 묻고 있어.”
서재희.
서로 사랑하는 사이, 라고 해도 될까. 속이 홧홧했다. 연인 사이입니다, 라고 대답하면 나 혼자 너무 앞서가는 걸까. 목까지 달아올랐다. 그럼 제일 담백하게 내 감정만 담아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할까. 아니야, 좋아한다는 말로는 한참 모자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까. 열이 올라 더웠다. 이것도 부족해. 그럼 이제 그 사람 없인 안 된다고 할까. 그럼 내 감정의 반의반이라도 표현하는 게 될까.
“유은우.”
유은우는 퍼뜩 눈을 들었다가 흠칫 몸을 굳혔다. 벽에 등을 기대고 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놀라 몸을 물릴 뻔했다. 그만큼 김서혁은 날이 서 있었다. 전투 중의 예민함과는 그 결이 달랐다. 유은우가 한 번도 목격한 적 없는 분위기였다. 김서혁이 눈도 깜박이지 않고 유은우를 응시했다. 그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놈은 마치 네가 자기 소유라도 되는 양 말하던데.”
“……어? 재희 선배가 그런 말을 했어? 둘이 언제 만났어?”
“질문에 대답해.”
“난…….”
그러나 말을 잇지 못했다. 유은우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김서혁이 흠칫 유은우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저만치 떨어져 있던 노석원이 번개처럼 달려오더니 김서혁을 냅다 밀치고는 기겁을 했다.
“아이고, 아이고, 상처가 다 터졌네! 힘을 그렇게 주면 어떡합니까? 뭐 화난 일 있으세요? 이리 주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아, 좀 비키세요, 좀!”
유은우는 신음을 삼키며 눈을 들었다. 허벅지에 감긴 붕대 위로 피가 흠뻑 번지고 있었다. 김서혁은 노석원의 호들갑 때문인지 아니면 단지 깜짝 놀라서 정신이 없어 그런지, 옆으로 한참 밀려나 있었고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노석원이 다급히 붕대를 풀어냈다. 그는 다시 약물 케이스를 집어 들더니 도무지 호의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시선으로 김서혁을 힐끔 보았다. 김서혁은 낯을 정돈하더니 이내 훌쩍 일어서서 한세연 쪽으로 가 버렸다.
노석원이 다시 약을 뿌리고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김서혁의 방식보다 훨씬 빠르고 건조했다. 유은우는 다리를 살짝 움직여 보았다. 허벅지 위로 찢긴 도복을 도로 덮었다. 작게 속삭였다.
“아깐 미안했어요.”
노석원이 손사래를 쳤다.
“네가 왜 그랬는지 아니까 괜찮아. 거기서 내가 좋다고 술술 불었으면 아주 웃겼겠지. 시민들도 짜고 친다고 생각했을 거야.”
부속선이 덜컹 멈추었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이어 철컥, 묵직하게 연결되는 소리. 부속선이 모함에 도킹할 때 나는 소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부속선의 옆면이 완전히 개방되었다. 연결된 건너편은 모함으로 통하는 진입로였다. 조명이 어둡고 아무도 없었고 서늘했다.
“학교 모함이야. 그 소문의 서재희를 드디어 보겠네.”
노석원이 중얼거렸다. 그가 배낭을 정리해 한쪽 어깨에 메면서 한세연 옆으로 갔다. 한세연은 조종석에서 일어나 총을 점검하고 있었다. 목련처럼 여리던 한세연은 실험복 가운 대신 단단하고 매끄러운 전투복을 갖춰 입어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냉담해 보이기까지 했다.
유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몸에 힘을 주었다. 허벅지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신음을 삼키며 벽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누군가가 힘 있게 부축해 왔다. 유은우는 고개를 들었다. 낯선 얼굴. 각이 져 인상이 험한 남자였으나 묘하게 지적으로 보였다. 산속 깊이 틀어박혀 도끼로 나무를 패며 사는 지식인의 느낌이 풍겼다. 그가 유은우를 지탱한 손에 힘을 주었다. 덕분에 유은우는 중심을 잡고 똑바로 섰다. 남자가 말했다.
“김승훈.”
“안녕하세요.”
“윤환이 어떻게 생각해?”
김승훈이 대뜸 물었다. 유은우는 눈을 깜박였다. 바보처럼 되물었다.
“네?”
“정윤환. 너희 학교 3학년. 더럽게 잘생기고 성질 더러운 천재. 어떻게 생각하냐고.”
“……네?”
“……됐다. 네 표정 보니 알 만해. 정윤환 이 실속 없는 새끼.”
김승훈이 혀를 찼다. 그는 유은우 뒤의 벽에 붙어 있는 레버를 잡더니 힘껏 당겼다. 뚝 하고 부속선이 절전 모드로 들어갔다. 김승훈은 그대로 돌아서서 훌쩍 가 버렸다.
이번엔 김서혁이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손이 당연하게 뻗어 와, 유은우는 미처 움직이지 못했다. 거친 손이 허리를 감고 오금을 받쳐 오는 걸 인지하자마자 가볍게 들어 올려졌다. 유은우는 자연스레 김서혁의 코트 깃을 잡으며 안락한 자세를 잡다가, 이내 화들짝 놀랐다.
“내려 줘.”
“다리 다쳤어. 조금이라도 덜 걸어야 해.”
“괜찮아.”
“내려 달라는 소리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는데.”
김서혁의 손에 힘이 거칠게 들어갔다. 유은우는 다소 놀랐다. 낯설었다. 김서혁이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완력을 행사하는 일은 전무했다. 유은우가 여태 김서혁을 따랐던 것은, 오직 김서혁에게서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분위기에 자진해서 수긍했기 때문이지, 이런 노골적인 무언의 압력에 굴복해서가 아니었다. 고스란히 틀어 잡힌 허리와 무릎 뒤가 아팠다. 그러나 표현하지 않았다. 대신 김서혁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나 그의 낯은 단단하게 무감하여 어떤 것도 알아챌 수 없었다.
부속선 도킹 후 모함의 함교로 진입하는 통로는 길었다. 그리고 지나치게 어두웠다. 전투에 전력으로 임하기 위해 전기를 아끼는 건지, 모함의 어딘가가 이미 훼손되어 전기 설비가 망가진 건지 알 수 없었다. 또한 치밀하게 조용했다. 타고 있던 학생들이 전멸한 뒤 미리 설정해 둔 자동항법으로 겨우 부속선과 도킹한 것에 그친 건지, 수많은 학생들이 하나같이 침묵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설마 다 죽은 건 아니겠지.”
노석원이 중얼거렸다. 유은우는 그가 같은 걱정을 한다는 것에 전혀 위로받지 못했다.
손도연이 불안하게 말을 받았다.
“이미 도시연합에서 모함을 점거했고, 우리가 함교로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면 어떡하죠? 우리가 모함으로 건너올 때 안내 방송 하나 없었어요.”
번지는 불안에 비해 김서혁의 보폭은 흔들림이 없었다.
유은우는 김서혁의 코트를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몸이 바깥쪽으로 기울어지기 전에 김서혁의 목을 감았다. 그의 목은 쇠로 만들어진 나무처럼 단단했다. 유은우는 손에 힘을 주어 상체를 일으켰다. 동시에 김서혁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것만으로 김서혁은 걸음을 늦추었다. 이런저런 염려를 주고받는 노석원과 손도연, 그 옆을 말없이 걷는 한세연, 김승훈과 거리가 다소 벌어졌다. 유은우는 김서혁의 관자놀이에 이마를 붙인 채로 귓가에 속삭였다.
“재희 선배가 이선규를 협박했다고 들었어. 대장도 그래서 이쪽으로 붙은 거야?”
김서혁은 말이 없었다.
“재희 선배랑 언제 만났어? 선배가 대장한테 어떤 제안을 했어? 가시관령 선포로 대장 직위가 해제됐다는 건 알아. 지금이 차인호가 대장을 죽일 수 있는 적기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대장이 자신의 안위만 생각해서 학교를 서포트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 재희 선배와 어떤 점이 교집합이었던 거야? 왜 대장은 우릴 선택했어?”
김서혁이 낮게 대답했다.
“내가 서재희를 선택하긴 했지.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다는 게 유감이었다.”
목소리는 냉랭했다.
“아까 네 친구가 그랬지. 우리가 부속선에서 모함으로 넘어오는데 안내 방송 하나 없었다고.”
유은우는 김서혁의 목소리에서 어떤 통일된 결을 발견하려고 애썼다.
“안내 방송이 없는 건, 안내 방송을 할 수 있는 학생들이 전부 살해됐기 때문이 아냐. 단지 서재희의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이지.”
목소리 끝이 날카로워, 유은우는 그에게 붙였던 이마를 떼고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쯤 되자 이상한 확신이 섰다. 김서혁이 서재희를 견제하고 있다는. 상황은 명료하나 이유는 희미했다. 김서혁이 문득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그가 유은우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구구절절 환영 멘트를 날리며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건 서재희 방식이 아닐 뿐더러, 이런 극적인 연출을 놓칠 놈이 아니야. 당장 한 치 앞도 안 보이게 조명을 낮춘 것만 봐도 그렇지. 너까지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어. 제 등장을 돋보이게 만들 셈이지. 한 번 더 내 기를 꺾으려는 거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유은우는 김서혁의 목과 어깨를 바짝 껴안은 채, 퍼뜩 앞을 보았다.
저만치 어두운 통로의 끝에서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엔 한 명이었으나 인영은 어스름을 헤치고 셋, 다섯, 여섯, 여덟, 점차 늘어나 열 명이 되었다. 그들은 총을 빼지 않음으로써 아군임을 표하며 말없이 일정한 보폭으로 다가왔다. 부드럽고 낮은 조명에 그 전신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유은우는 상대의 복장으로 신원을 알아챘다. 학생 여섯과 정예군 넷.
선두에 서재희가 있었다. 아직 이목구비를 식별할 거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직선으로 곧은 태가 선연하여, 서재희 말고 다른 이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서재희가 지척에서 멈춰 섰다. 서재희 옆에 있던 정윤환을 비롯한 학생 임원들도 마찬가지로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정예군 넷은 그대로 쭉 걸어와 김서혁의 뒤에 도열했다. 노석원과 한세연, 김승훈은 통로 가장자리로 몸을 물렸다. 정윤환은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있어 눈동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가라앉은 낯으로 뚜벅뚜벅 움직여 한세연 옆에 섰다. 연다희가 손도연을 불러 제 옆에 두었다.
서재희, 정윤환, 김서혁을 중심으로 무리가 크게 셋으로 나뉘어 잠시 침묵했다.
먼저 한 발짝 앞으로 나선 것은 서재희였다. 그는 반듯이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공손했으나 비굴하진 않았다. 예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김서혁이 낮게 물었다.
“도시연합은?”
서재희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는 유은우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현재 사정거리에 없습니다. 지휘실로 이동하시지요.”
서재희는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세 무리가 자연스레 뒤를 따랐다. 그러나 자유로이 뒤섞이지는 못하고 묘하게 경계가 졌다.
서재희가 반듯하게 말했다.
“현재 저희는 모함 한 척, 부속선 열 척, 학생 1009명으로 사상자는 전무합니다. 현재 제1도시를 벗어난 지 다섯 시간째이며, 1급 보안지역까지 약 5000킬로미터를 남겨 두고 있습니다. 온 오염도 측정기를 가동한 지 40분째로, 현재 유효한 결과를 도출했습니다. 도시연합이 제작한 사해 지도와 그 수치가 크게 다릅니다. 한마디로 반대입니다. 도시연합은 1급 보안지역으로 가면 갈수록 온의 오염도가 높아지니 위험하다고 분류하였으나 그 반대입니다. 접근할수록 오염 수치가 급격히 낮아집니다. 심지어 어떤 지점을 통과할 때는 오염도가 마이너스 21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성인 여자가 보호칩 없이 호흡 가능한 수치입니다.”
한세연이 보폭을 빨리하여 서재희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를 보호하듯 김승훈이 따라붙었다. 서재희를 두르고 있던 학생 임원 한가운데로 노석원이 냉큼 파고들었다. 자연스레 무리가 섞이며 경계가 흐려졌다. 한세연이 물었다.
“그 지점을 따로 표시해 두었겠지? 온이 완전히 정화된 좌표.”
서재희가 한세연을 보며 단정하게 미소 지었다.
“물론입니다. 좌표를 수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공동 작업실에 학생들이 모여 그 모든 좌표를 잇고 있습니다.”
“아마도 용의 동선과 일치할 거야.”
“그렇겠죠.”
서재희가 간단히 수긍하고는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한세연이 걸음을 늦추지 않으며 서재희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그녀가 물었다.
“알면서 수고하는 이유가 뭐야?”
“정윤환이 1급 보안지역으로 접근할수록 온 오염도 수치가 급락한다는 것을 이미 인지하면서도, 그 사실을 알아내겠다고 학생들이 들고일어났을 때 그 기세를 꺾지 않고 기꺼이 동참한 이유와 같습니다. 혁명의 맥을 유지하기 위해섭니다.”
유은우는 정윤환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세연의 뒤, 김승훈의 옆에서 같은 보폭으로 걷고 있었다. 손을 주머니에 불량하게 꽂아 손 떨림은 알아볼 수 없었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옅은 낙엽 색깔의 동공이 어떤지 확인하고 싶었다. 동공까지 크게 열려 있다면 상황이 심각했다.
“현재 우리는 도시연합과 전투 중이 아닙니다. 이전의 승리로 학생들은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으며, 이때 집중할 거리가 없으면 그 흥분은 방탕으로 이어집니다. 성공 뒤에 반강제적인 휴식보다는, 좌표를 잇는 단순한 작업이더라도 연속성 있는 행위가 전투의 집중력으로 이어지리라 기대합니다. 자신의 손으로 도시연합의 비리를 끊임없이 추적한다는 사실은 그 무엇보다 사기 진작에 중요합니다.”
“이미 우리 자료로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학생들이 손수 작업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쉴 틈을 주지 않았을 뿐이며, 이는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기만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같은 결과라도 용 연구소에서 한 번, 저희가 한 번. 그 과정이 아주 의미 없지는 않지요. 다만 제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1급 보안지역 내부입니다. 저는…….”
서재희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1급 보안지역을 제국시대 때의 중앙 산업단지로 확신하고 있습니다만.”
김서혁이 말을 받았다.
“정확해. 처음 용이 훼손당한 지점이지. 그곳에 마지막으로 건재한 용이 머물렀기 때문에, 그 지점을 중심으로 가장 먼 곳부터 사해화가 시작되었다.”
서재희가 말했다.
“그래서 도시연합이 그 지역을 1급 보안지역으로 지정해 시민들의 접근을 막고 온 오염 수치를 조작했군요. 중앙 산단으로 진입할수록 온 오염 수치가 낮아지는 것이 알려지면 산단의 폭발로 유해 물질이 유출되어 온의 오염이 시작되었다는 자신들의 주장이 힘을 잃게 되니까요. 용을 해하려다가 온을 오염시킨 걸 들키면 도시연합이 용을 다룰 수 있는 중요한 명분이 설 자리를 잃습니다.”
한세연이 김서혁에게 물었다.
“1급 보안지역 내부로 진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희가 접근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물리적으로 막혀 들어갈 수 없었어요. 투명한 차단막이 생성되어 있어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손을 대면 만져졌습니다. 딱딱하고 냉기가 돌고 아주 견고합니다. 그러나 용은 자유로이 드나들더군요. 심지어 작은 날벌레까지.”
“용이나 벌레는 인간이 아니니까 들어갈 수 있어. 그 차단막은 오직 인간만 제한한다.”
“그래도 출입하는 인간이 있겠지요.”
“있지. 셋. 도시연합장. 도시연합 중앙학교장. 도시연합군 총사령관. 임유현은 죽고 난 직위가 해제되었으니, 현재로서 가능한 이는 차인호뿐이로군.”
“물리적으로 깰 수 있나요?”
“그 차단막은 낙원의 이론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어. 낙원의 이론 시스템이 존재하는 한 그 차단막은 물리적 파손이 불가하다. 다만 해제할 수는 있어. 낙원의 이론에 등록된 인구의 절반 이상이 낙원의 이론 파괴에 동의해야 해. 낙원의 이론이 파괴되면, 차단막도 해제된다. 도시연합이 낙원의 이론을 은폐해 온 핵심적인 이유지. 낙원의 이론은 공개되는 순간 존폐의 시험에 들게 돼. 은닉해야 유지된다. 대중의 도마에 오르면 끝이야.”
한세연이 말했다.
“그렇다면 현재로서 1급 보안지역 안으로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과반수의 동의는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거죠?”
노석원이 중얼거렸다.
“역시 투표인가요? 하지만 총 유효 시민 투표는 관련 법에 의거해야 하는데, 제안할 명분이 마땅치 않습니다.”
김서혁이 인내심 있게 말했다.
“낙원의 이론 시스템은 이미 시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수집하고 있어. 꼭 공식적인 투표가 아니더라도 시스템이 유의미하다고 판단하는 반응들이 과반수 수집된다면 자체 폭파된다.”
노석원이 머리를 긁었다.
“그럼 일반 시민이 진행하는 투표도 문제가 없겠네요. 하지만 우리는 투표를 올릴 수가 없어요. 지금 도시연합이 우리 통신망을 전부 끊어 버렸고, 유은우가 용 연구소에서 방송하고 나서부터는 외부망도 차단되어서 온하나비에도 접속 못 하니까. 전 총사령관님 이프는 통신이 원활한가요?”
“아니, 나도 차단되었어. 내 직위가 해제됨과 동시에. 내 부하들도 마찬가지일 테지. 전투 시 인터컴을 쓸 수 없어 우리는 굉장히 불리해졌다. 그리고 생각이 너무 협소해. 꼭 투표만 수단이 되지는 않는다. 낙원의 이론이 정보를 수집하는 방식을 생각해. 그 시스템이 오직 투표 결과만 수용하나? 결코 아니지.”
“차예원이 온디딤으로 연락망을 유지하는 데 능합니다. 최소 반경 1킬로미터 내는 가능하니 최악은 아닙니다. 함선 자체 무전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김서혁 전 총사령관님 말씀은…….”
서재희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가 낙원의 이론 해제를 원한다는 걸 시스템에 어떤 방식으로든 인식시키면 된다는 뜻이지요? 현재 시민의 과반수. 그렇다면 시민등록번호가 없는 유은우나 난민들의 의사는 여기서 제외되겠네요. 현재 여덟 도시의 총 시민 수는 4000만 명이 못 됩니다. 그 과반수니 최소 2000만 명의 동의는 받아야 한다는 뜻이군요. 낙원의 이론은 어떤 형태로든 데이터를 닥치는 대로 수집하니 시민의 의사 표현 또한 어떤 형태로든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입니다.”
한세연이 미간을 좁혔다.
“시간?”
“네. 시민들이 결정할 시간. 예컨대 시위에 참석해서 낙원의 이론을 반대하는 전자 플래카드를 게시할 물리적인 여유 말입니다. 공약은 이 정도면 충분하잖습니까.”
한 치 앞이 불확실한 가운데서 서재희만 홀로 모든 해답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다만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서재희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열었다.
“사해에 출현한 그 용은 계속해서 1급 보안지역을 맴돌고 있습니다. 마치 1급 보안지역에 말뚝을 꽂고 그 줄에 목이 맨 채 뱅뱅 도는 형국입니다. 정윤환을 통해 넘겨주신 자료를 분석한 결과, 성체는 포획팀이 가까이 접근할 때마다 땅으로 꺼지며 도망치지만 다시 보안지역 부근에서 재출현합니다. 이에 대해서 의견 있으신가요, 김서혁 전 총사령관님.”
“용의 심장이 거기 있어.”
서재희가 우뚝 멈춰 섰다. 그가 돌아서서 김서혁을 마주 보았다. 서글서글한 웃음은 사라지고 없었다. 서늘했다. 김서혁이 건조하게 말했다.
“교장도 모른 채 죽었다. 그토록 알고 싶어 했으나 결국 찾아내지 못하고 죽었지. 나도 얼마 전까진 전혀 몰랐다. 짐작도 못 했지. 나 또한 임유현처럼, 1급 보안지역이 다만 중앙 산단이라는 이유로 접근이 금지된 줄 알았으니까. 그 이유만으로도 은폐가 납득이 되었다. 또 다른 이유가 존재하는지는 최근에 알게 되었지. 정확히는, 내가 너와 중앙수사부에서 만났던 직후, 차인호에게서 알아냈다.”
“너 알고 있었어?”
줄곧 침잠해 있던 정윤환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는 차예원을 직시하고 있었다. 정윤환이 재차 물었다.
“알면서도 여태 단 한마디 없었던 거야?”
차예원이 정윤환을 노려보았다.
“네가 그 팀을 이끌고 가서 다 죽이고 돌아온 뒤로, 나도 그 내부가 궁금해서 아빠에게 물어봤었어. 아빠는 속 시원히 대답해 주지 않았어. 내가 엄마만큼 성장하면 그때 알려 주겠다고만 했지. 20년도 더 전에 죽은 엄마와 경쟁해야 한다니, 나는 바로 포기했어. 추억보다 완벽해지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 뒤로 아빠 앞에서 보안지역을 언급한 적 없어.”
차예원이 쌀쌀한 시선을 김서혁에게 돌렸다.
“저한테도 함구한 걸 왜 당신에게 말한 거죠? 고문했나요, 협박했나요? 그러실 분이 아니라 여겼는데.”
“아버지를 등진 네가 내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차예원이 눈도 깜박이지 않고 김서혁을 응시했다. 격양되어 깊게 호흡하는지 가슴이 천천히 부풀었다가 꺼졌다.
김서혁이 감정 없이 말했다.
“질문에 답을 하자면 그가 먼저 내게 말했다. 그가 판단하기로 내게 실토하는 것이 너를 위한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지.”
차예원이 내뱉었다.
“못 믿겠어.”
“남의 가정사에 참견할 생각 없다만, 지금 네 표정을 보니 마지막으로 보고 온 차인호가 가엾을 지경이라 덧붙이겠다. 차인호는 매 순간 너만을 위해 움직여. 처음에야 네게서 죽은 아내를 보았겠지만, 그 짓도 20년을 넘어가면 차예원 네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재평가되어야 하지 않나? 믿고 말고는 네 자유다. 어차피 갈라선 이상…….”
김서혁의 회색 눈이 무미건조하게 서재희를 향했다가 다시 차예원에게 붙었다.
“……재회한다 해도 둘 중 하나는 시체겠지만.”
모두가 서로의 사이로 시선을 두고 멈춰 서 있었다. 침묵이 차올랐다.
유은우는 눈을 들어 어두운 진입로의 끝을 바라보았다. 함교가 보였다. 노을이 어른거리는 가운데 학생 여럿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저기…….”
손도연이 손을 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러우나 단호하게 말했다.
“용은 군집 생활을 합니다. 용의 심장이 1급 보안지역에 있다면 사해의 그 성체가 주위를 맴돌 만해요. 동족과 함께 있고 싶을 테니까요. 최대한 인간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도시 한가운데 있는 날개나 자궁보다는 사해에 홀로 있는 심장을 찾아 헤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손도연이 또박또박 말하며 유은우를 살짝 바라보았다.
“……사해의 그 용은 새끼였던 시절 사육실의 다른 용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사실이에요. 그렇다면 그 용은 사육실의 용들을 자기 동족으로 여기지 않았나 봅니다. 그렇다면 그 사육실이라는 공간 자체, 인간이 용을 키우는 방식 자체가 용의 생태를 거스른다고 봐요.”
한세연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녀가 되물었다.
“사육실?”
“그 용, 은우가 놔준 용이에요.”
한세연이 경악했다, 그녀가 고개를 홱 돌려 유은우를 바라보았다. 속사포처럼 물었다.
“학교로 배급되는 용은 하급인데. 설마 네가 사해로 풀었니? 1학년은 외출 안 되지 않아?”
유은우가 대답했다.
“학교에서 풀어 줬는데 사해까지 나갔나 봐요.”
“어떻게? 처음 깨어났을 때 상태는 어땠니? 온도는? 혹시 물 닿았어? 사육 조명은 몇 개나 설치했니? 아니, 그보다 깨기 전에 심장박동은…….”
“교수님께서 기본으로 세팅해 놓으신 설정 하나도 안 건드리고 조명은 없었어요. 그냥 두기만 했어요. 정확히는 방치했어요. 같이 사육 시작한 다른 용들이 먹이 붙임 기간 거의 끝나갈 때쯤 깨어난 것 같아요.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기에 문 열어 준 것뿐이에요. 그렇게 잊고 있다가 나중에야 사해로 나간 것을 알았는데, 막 태어나 작았을 때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어서 같은 용이라고 추측하고 있어요.”
“먹이는…….”
“안 줬어요.”
한세연이 물끄러미 유은우를 보았다. 유은우의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지, 유은우가 내민 정보와 자신이 아는 정보를 저울질하는지,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물었다.
“왜 그랬어?”
이번엔 유은우가 말문이 막혔다. 뜸 들여도 딱히 이유가 생각나지 않아 그냥 대답했다.
“그냥요.”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서?”
“네.”
“성적은 아무렇지도 않니? 그 수업은 점수를 거저 받잖아.”
“그렇게 얻는 점수는 받고 싶지 않았어요.”
한세연은 시선을 떨어뜨리고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서재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용의 심장이 거기 있다면 차인호는 왜 이용하지 않았던 거죠? 모종의 이유로 사용이 불가한가요, 아니면 있다고 확신하나 손에 넣을 수 없었던 건가요?”
“후자.”
김서혁이 말을 이었다.
“나 또한 이전에 보안지역을 여러 번 드나들었다. 중앙 산단의 터라는 사실만으로도 탐사할 가치가 충분했어. 하지만 용의 심장은커녕 비늘 반쪽도 보지 못했다. 차인호가 처음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나 또한 반신반의했어. 차인호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가 착각한다고 여겼다. 그는 감히 내게 거짓말하지 못해. 차예원이 제 품을 자진해서 떠났고, 그리하여 내가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제 딸을 죽일 수 있어졌다는 걸 아니까. 그는 내게 털어놓았다. 꿈을 꾸었다고 했어. 물론 차예원 너는…….”
김서혁이 차예원을 응시했다.
“……후보가 아니라서 꿈을 꾸지도 못하겠지만.”
차예원이 낯을 굳혔다. 김서혁이 이어 말했다.
“네 아버지는 낙원의 이론 후보였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시스템을 폭로하려 애썼지. 아내가 죽고 나서 전부 포기하고 임유현 밑에 들어갔지만 그래도 후보의 특성이 어디 가진 않아. 그는 숙명처럼 꿈을 꿔. 내가 용이 조각조각 잘리는 악몽에 시달리는 것처럼, 차인호 또한 특정 악몽에 익숙하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용의 심장이 나오는 꿈을 지속적으로 꿨다고 했어. 1급 보안지역, 산업단지의 옛터에 용의 심장이 덩그러니 놓인 채 쿵쿵 뛰는 모습을 매일 새벽마다 목격했다고 하더군. 그래서 도시연합장 자리에 올라 출입 권한을 가지게 되자마자 수도 없이 탐색했다고. 처음엔 도시연합장의 권한으로 특별 승인을 내려 조사팀을 여러 차례 보냈고, 그들이 늘 빈손으로 돌아오자 성에 차지 않아 직접 간 것도 여러 번이라고 했다. 최근엔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용의 죽음이 목전에 다가오자 심장이 더욱 간절해져 홀로 보안지역에서 나흘을 머물렀다고도 하던데. 그런데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하지만 분명히 있을 거라고 단언하더군. 후보들의 꿈은 예사가 아니야. 우리에게 그것은 확신이다.”
유은우는 오한이 들었다.
차인호는 제 꿈을 맹신한다고 했다. 김서혁 또한 후보로서 꿈을 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악몽 또한 단순한 개꿈으로 치부하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기에, 자신의 꿈은 너무도 끔찍했다. 수없이 삼켜 댄 심장이,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용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감히 고민하기도 꺼려졌다.
심란한 마음에 김서혁의 목과 어깨를 잡았던 손이 미끄러졌다. 다급히 그의 코트 자락이라도 잡으려는 순간 김서혁이 유은우를 능란하게 고쳐 안았다. 덕분에 유은우는 단숨에 자세를 안락하게 바로잡았다.
서재희는 여전히 유은우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는 깨끗한 낯으로 돌아서더니 앞장서서 걸었다.
조타실은 소란했다.
조수석에서 레이더를 만지고 있던 학생이 가장 먼저 유은우를 알아보았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환호하자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들은 유은우를 껴안을 기세로 달려오다가, 김서혁의 눈치를 보면서 속도를 줄이고 주위를 맴돌며 너도나도 한마디씩 하느라 바빴다. 손도연은 이미 학생 여럿에 둘러싸여 악수와 포옹으로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고생했어. 나 감동했잖아. 애들도 많이 울었어.”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네가 방송을 빨리 시작해서. 그만큼 더 위험해질까 봐.”
“역시 5학년을 더 붙일 걸 그랬어. 손도연 네가 설계 그렇게 못하는 줄 몰랐다. 그래도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지.”
“도연이 등이 왜 이래? 내려가자. 넌 좀 쉬어야 돼. 너무 고생했어.”
“은우 혹시 다리 다쳐서 못 걷는 거니? 갑자기 동영상이 끊어져서 다들 걱정했어.”
“온하나비 서버 터질 뻔했어. 난리도 아니었어. 언론에서 연예인 기사를 막 터뜨려 댔는데, 어림도 없지. 모든 시민이 다 시청했을걸.”
“은우야, 이거 받아. 네 교복이야. 내가 챙겨 왔어.”
룸메이트 이은혜가 학생들을 헤치고 다가와 있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쇼핑백을 내밀었다. 유은우는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으려 했으나, 김서혁이 빨랐다. 그가 유은우를 한 손으로 고쳐 안으며 쇼핑백을 받아 들고는 다시 두 손으로 유은우를 안아 들었다.
연다희가 피곤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선배님들, 후배님들, 동기들아, 다들 내려가 주세요. 저희 바빠요. 김서혁 전 총사령관님께 보고드릴 게 산더미입니다. 내일 오전에 접전이 있을 테니 일찍 자라고 방송까지 했잖아요. 내려가세요.”
“한 줄로 서서 내려가.”
김산도 나서서 학생들을 물리려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흥분으로 들끓어서 해산하기는커녕 점점 더 그 수가 불어났다. 소연주를 비롯한 정예군 셋은 멀찌감치 서서 이 모양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선규만 학생들 틈에 끼어 신이 난 것 같았다. 그는 벌써 학생들과 친해진 듯 어깨동무를 한 채 무어라 떠들어 대고 있었다.
결국 서재희가 나섰다. 그는 손을 들어 항해에 방해가 된다고 딱 잘라 엄격하게, 그러나 선한 낯으로 말했다. 그 한마디만으로 학생들은 즉각 질서를 지키며 아래층 선실로 우르르 내려갔다. 서재희가 목소리를 크게 낸 것도 아니었으나 학생들은 아주 일사불란하게 반응했다.
연다희가 곧장 조타실 한쪽에 쳐진 두툼한 암막 커튼을 걷었다.
안쪽에 지휘실이 있었다. 큼직한 스크린은 여러 칸으로 나뉘어 모함 바깥의 동태를 시시각각 송출했다. 바닥에 단단히 고정된 탁자엔 사해 전자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김서혁은 지휘실 벽에 붙어 있는 소파에 유은우를 앉히고는, 연다희가 안내하는 대로 상석에 앉았다. 정예군과 연구소 관계자, 학생 임원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서재희가 스크린 앞에 섰다. 그가 손끝으로 탁자의 전자지도를 두드렸다.
― 대기 모드 해제.
흑백으로 단조롭던 지도가 단숨에 다채롭게 폭발했다. 전자지도 위로 홀로그램이 크고 작게 쑥쑥 자라나면서 납작하던 사해가 입체적으로 부풀었다. 서재희가 능숙하게 다섯 손가락 끝을 모았다가 탄력 있게 튕겼다. 일정 범위가 확대되었다. 서재희가 그것을 가볍게 쳐서 공중으로 띄웠다. 탁자에 놓인 전자지도 위로 또 다른 지도 한 조각이 구름처럼 부드럽게 떠올랐다.
“현재 저희 위치입니다.”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작은 모함이 반짝반짝 빛을 내면서 제1도시를 등지고 직선으로 이동 중이었다.
“목적지는 제1급 보안지역입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열두 시간 10분 후, 그러니까 오전 7시경에 차단막에 도달합니다.”
유은우는 그 홀로그램 모함 너머로 정윤환을 응시했다. 정윤환은 탁자를 가운데 두고 유은우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는 차예원의 잔소리로 꾸역꾸역 껴입던 교복을 죄 벗고 평소처럼 셔츠에 바지 달랑 그뿐이었다. 등받이에 제 재킷을 걸쳐 놓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서재희가 띄워 놓은 전자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료함이 줄줄 흘렀다.
“원래 저희가 학교에서 출발할 때의 목표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보안지역으로 접근하며 온 오염 수치를 측정하는 것. 이것은 현재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정윤환과 눈이 마주쳤다. 찰나 서로를 깊이 더듬었다. 유은우는 무너지듯 안도했다. 섬세한 눈동자는 그대로였다. 동공 확장까진 아니었다. 약물치료로 충분히 회복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 약물치료를 언제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 전에 정윤환이 얼마나 더 총을 쥐고 온을 감당해야 하느냐 또한 문제였다.
“둘째, 보안지역 내에 진입하여 도시연합이 정말 옛 산업단지를 은폐했는지 확인하는 것. 이는 현재 가능성이 불투명합니다. 보안지역을 두른 차단막은 중립지대와 달리 돔의 형태가 아닙니다. 끝도 없이 위로 펼쳐진 병풍과 같습니다. 아시겠지만 모함으로 아무리 고도를 높인다 해도 차단막을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유은우는 이제 서재희가 자유자재로 다루는 전자지도에 집중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번 달라붙은 정윤환의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그가 여전히 빤히 이쪽을 쳐다봐, 유은우도 자연스레 다시 그를 응시했다. 여전히 오만한 태도에 피로한 얼굴마저 화려했다.
유은우는 입 모양으로 왜, 하고 물었다. 정윤환이 소리 없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한 차례 예쁘게 웃고는 그가 서재희가 움직이는 전자지도로 시선을 옮기자 유은우도 따라서 서재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는 즉시 정윤환의 시선이 다시 밀려오는 게 느껴졌다. 반응하기에 뜨거워 애써 외면했다.
“따라서 저희는 차단막으로 간 뒤 기다려야 합니다. 과반수의 시민들이 낙원의 이론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하고, 시스템이 이를 인지하여 자동적으로 가동을 멈춘다면 동시에 차단막도 해제됩니다. 이때 우리는 안으로 진입합니다.”
“잠깐.”
김승훈이 눈을 찡그렸다. 그가 말했다.
“차단막이 언제 해제될 줄 알고? 시민들이 들고일어난다고는 하지만, 제 안위를 중요시 여겨 의견 내는 것을 조심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유은우가 연구소 내부를 촬영하여 공개했다고 여론이 크게 뒤집히리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할 수 없어. 무려 1000년 전 이야기다. 그리고 그리 굳건하다 믿었던 용이 사실은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시민들이 체감하기에 부족해. 오히려 새 용을 사로잡아 당장을 연장하자는 도시연합을 지지할 수 있다.”
“제가 뭘 하나 뿌려 두고 왔습니다. 오늘 새벽을 기점으로 퍼질 겁니다.”
“무엇을?”
“아주 오래된 증거입니다. 시민들이 제 안위를 걸고서라도 새로운 변혁에 배팅할 만한 동영상이죠. 무엇인지는 승리한 다음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십시오. 현재…….”
서재희가 매끄럽게 다음으로 넘어갔다.
“……도시에서 따라붙는 적은 전무합니다. 도시 내에서 일어난 시민들을 진압하는 것만으로도 인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반란군과 대치하기 위해 사해에 나와 있는 군인들은 용의 이송에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위치는…….”
용의 이송? 유은우는 그만 숨을 삼켰다. 서재희가 부드럽게 이쪽을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차분히 설명했다.
“연구소 분들은 익히 전달받으셨겠지만 지금까지 연구소 단독으로 진행했던 용의 포획 활동에 차인호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불과 세 시간 만에 용이 사로잡혔습니다. 용은 현재 도시연합군의 운송선에 실려 제5도시로 수송 중입니다. 그 위치는…….”
서재희가 전자지도의 한 조각을 분리시켜 공중으로 띄웠다. 제1도시를 등지고 뻗어 나가는 학교의 모함과는 한참 떨어진, 1급 보안지역 근처에 한 수송선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은 학교 모함보다는 다소 느린 속도로 제5도시를 향해 직진하고 있었다.
“……여기입니다. 시뮬레이션에 의하면…….”
서재희가 손을 가볍게 움직였다. 거의 멈춰 미미하게 이동하던 학교 모함과 용 수송선이 빠르게 움직이더니 사해 중간에서 맞닥뜨렸다.
“……약 세 시간 후 각자의 사정거리에 진입하며, 두 시간 후 근접전이 가능합니다. 물론 우리는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수송함을 피해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도시연합이 우리가 1급 보안지역으로 진입하는 것조차 제쳐 두고 용을 먼저 수송하고 있으므로, 우리 또한 우선순위를 재편해야 합니다. 사해에 있는 용이 제5도시의 용 연구소에서 해체되기 전에 구출하고, 그 후에 1급 보안지역을 탐색합니다. 팀은 쪼개지 않겠습니다. 전력만 보자면 저희가 밀립니다. 아무리 정예군이 빠졌다하더라도 도시연합군은 그 수가 압도적입니다.”
한세연이 조용히 말했다.
“이쪽 세력도 있어. 동조자의 비율은 극히 낮지만 우리 또한 오랜 전투에 익숙해. 화약 무기나 레이저 총의 성능을 무시해선 안 된다. 어설픈 동조자 셋보다 잘 만든 폭탄 하나가 위력이 더 크다는 정도는 다들 알고 있겠지.”
서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바로 투입은 어렵습니다. 학생들 반감이 클 겁니다. 도시연합에 반기를 드는 것과 반란군을 인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네?”
줄곧 긴장한 채 입을 다물고 있던 고세민이 경악했다. 목소리를 내지 않았을 뿐 다른 학생회 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김산이며 지해은이며 사색이 되어 있었다. 쭉 사무적인 태도를 고수하던 연다희조차 핏기가 싹 빠진 채였다.
서재희가 조용히 말했다.
“제가 따로 신호하겠습니다. 치고 들어올 적합한 타이밍이 있을 겁니다.”
“학생들 대규모 방어 패턴 도안이 있나? 갑판상 타격 배치도는?”
김서혁의 물음에 한세연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부터 짜야겠지요. 학생들은 재학하는 동안 모의 전투나 파견을 하긴 합니다만 팀으로 나뉘어 진행됩니다. 전교생이 일시에 참여하는 대규모 전투는 교육과정에 없으니 도안이 있을 턱이 없지요.”
“아뇨. 있던데요.”
이선규가 말했다. 그는 한세연에게 대꾸하면서도 서재희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미 만들어져 있더군요. 저희가 학생들과 합류한 후 모함을 이륙하며 가장 먼저 한 일이 갑판마다 핵심 설계를 박아서 방어선을 구축하는 일이었습니다. 전교생이 각자 이프에 대규모 설계 도안과 타격 배치도를 저장해 놓고 수시로 띄워서 숙지하고 있었습니다. 산아, 보여 드려.”
언제 친해졌는지 이선규가 스스럼없이 턱짓을 했다. 김산이 제 소매에서 메모리를 떼어 내 탁자의 단자에 끼웠다. 서재희가 여러 층으로 띄워 낸 전자지도가 일시에 흑백으로 납작하게 가라앉고 새로운 홀로그램 스크린이 떠올랐다.
거대한 전투 배치도가 상황마다 달리 나뉘어 지휘실 내부를 가득 메웠다. 사정거리 인식부터 적함과 조우하여 접근전으로 이어지기까지 시간 순으로 상황별로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서재희가 익숙하게 손을 뻗어 배치도를 한편으로 싹 걷어 냈다. 여백이 생기자 상단에 가로로 접혀 있던 전교생 리스트가 아래로 미끄러져 펼쳐졌다. 학생 개개인의 동조율, 타격과 설계 비율에 따라 상성이 잘 맞는 파트너나 서포터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특히 각 파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을 만한 리더급은 따로 붉게 반짝거렸는데, 그 아래로는 사망할 시 교체될 인물들이 나란히 번호를 달고 있었다.
유은우는 자신의 이름을 리스트 상단에서 발견했다. 정윤환과 나란히 연결되어, 주요 전력으로 체크되어 있어 눈에 띄었다. 필기시험을 치른 후 교내 랭킹 밑바닥에 깔려 이끼 취급을 받았던 것과 대조적이었다.
“저도 이렇게 쓸 줄은 몰랐습니다. 순전히 공부 목적으로 한 일이었으니까요.”
김산이 말했다. 김서혁이 딱딱하게 대꾸했다.
“서재희가 제안한 공부였겠지.”
문득 김서혁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유은우는 즉각 자세를 고쳤다. 피로한 데다 부상당한 다리가 불편하여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김서혁이 이번엔 서재희를 응시했다.
“차예원이 통신 가능하다고 했던가?”
“네.”
“유은우는 브리핑 받지 못한 실전에 대체 인력으로 투입되어도 인터컴을 통한 지시에 즉각 반응한다. 익숙한 배경일수록 안정되기 때문에 선상 전투에도 능해. 다만 체력은 컨디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쳐. 응급처치를 적기에 했기 때문에 수면만 서너 시간 충분히 취하면 내일 뛰는 데 무리가 없을 거라 예상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합니다. 제 의견도 같습니다.”
“데려다주고 오지.”
김서혁은 서재희의 대답을 듣지 않고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유은우는 그대로 품에 안기고 훌쩍 들렸다. 정예군은 그런 김서혁의 태도에 익숙한지라 별다른 반응이 없었으나, 학생 임원이나 연구소 관계자들은 다시금 놀라는 눈치였다. 정윤환은 심히 불편한 기색이었다. 서재희는 고개를 약간 뒤로 돌린 채, 연다희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무어라 속삭이는 것을 차분히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유은우는 서툴더라도 혼자서 걷고 싶었으나, 단지 김서혁과 말싸움하여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김서혁 전 총사령관님.”
김서혁이 우뚝 멈춰 섰다. 서재희가 말을 이었다. 정중했다.
“지체 없이 바로 돌아와 주시겠습니까. 정예군의 합류를 고려하여 저희가 배치도를 수정하였습니다만, 전 총사령관님께서 최종 검토해 주셔야 안심할 것 같습니다.”
‘안심이라.’ 김서혁이 잇새로 중얼거렸다. 아주 작아 유은우만 겨우 들었다. 김서혁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안겨 암막 커튼을 헤치고 조타실로 나오자 온통 깜깜했다. 야간 항해 시 공중에서 빛나는 부표를 파악하기 위해 일부러 모든 조명을 차단한 상태였다. 학생 몇은 타를 잡거나 측심기를 체크하는 등 각종 항해 장비를 다루고 있었고, 몇은 방송 장비를 테스트하고 있었다.
김서혁은 함교를 가로질러 통로로 빠져나왔다. 복도는 밝았다. 그는 한 선실 앞에 멈춘 뒤, 팔꿈치로 문손잡이를 내린 후 어깨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층 침대 두 개와 소파 하나, 그 앞에 탁자, 침대마다 작은 개인 사물함이 겨우 갖춰진 소형 선실이었다. 학생 몇이 드나들었는지 헝클어져 있었으나 아무도 없었다.
“씻고 자. 힘든 전투가 될 거다.”
김서혁이 유은우를 조심스레 소파에 앉히고는 숙였던 상체를 일으켰다. 유은우는 다급히 김서혁의 코트 깃을 쥐고 잡아당겼다. 김서혁이 무표정하게, 그러나 부드럽게 도로 몸을 숙여 왔다.
“대장.”
회색빛이 도는 김서혁의 눈은 차고 단단했다. 한 번도 열린 적 없고 앞으로도 굳게 닫혀 있을 것 같은 그 바위 같은 눈동자에 자신이 말갛게 비쳐, 유은우는 용기를 냈다.
“왜 자꾸 재희 선배를 신경 써?”
김서혁이 딱딱하게 말했다.
“너한테나 선배지 나한테는 아닌데.”
그가 몸을 일으켜 가려는 것을, 유은우가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세웠다.
“저기, 대장. 내가 착각하는 걸 수도 있는데, 그래도 웃으면 안 돼. 알았지? 나도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너무 이상해서 확실히 해 두고 싶어서…….”
“아닌 걸로 알아 둬.”
유은우는 눈을 크게 떴다. 김서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거, 아닌 걸로 알아 두도록.”
예상치 못했고, 바라던 바도 아니었기에, 유은우는 김서혁의 옷깃을 놓쳤다.
“늦게 깨달은 날 탓해야겠지. 일어나지 않을 거라 여겼기에 미처 인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널 몰랐던 시절에도 난 잘살고 있었어. 그러니 참고 버티면 가라앉겠지.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 믿는다.”
유은우는 김서혁의 뺨에 남은 가느다란 상처를 응시했다.
“대장, 왜…….”
“이유는 일일이 댈 수도 없어. 그저 함께했던 시간 전부.”
김서혁이 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난 여태 네게 단 한 번도 내 감정에 대해 솔직한 적이 없었지. 너와의 추억이 퇴색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면서도 지금 굳이 네게 확실히 말해 두는 이유는 단 하나다. 네게 약속함으로써 지키려고. 그리고…….”
김서혁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네가 학교로 내려가기 전에 내 집무실에 찾아왔었지. 닫힌 문을 사이에 두고 대화했었어. 내가 당시 네게 한 말이 있다. 네가 설계 난독증인 거 알았다면, 그때 즉살했을 거라고.”
김서혁의 손이 다가왔다.
“진심이 아니었어.”
거친 손끝이 이마를 스치고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귀 뒤로 꽂혔다. 군에 있을 때 수없이 받았던 손길이었다. 김서혁은 너무 당연히 쏟았고 유은우는 너무 당연히 젖어서 오히려 무심히 넘겼던, 둘 중 하나라도 일찍 자각했다면 어떤 시작이 될 수도 있었던 수많은 전조 중 하나였다.
“널 구해 온 건 내 인생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
유은우는 눈물을 참아야 했다. 김서혁이 감정을 자제하는 만큼, 자신도 그래야 했다.
“고마워. 그렇게 말해 줘서. 말하기 어려웠을 텐데, 솔직하게 대답해 줘서 고마워.”
귓가에 머물렀던 손이 뺨을 부드럽게 보듬었다. 금방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김서혁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유은우에게서 깨끗하게 시선을 떼어 냈다. 돌아서 나가 버렸다.
유은우는 몸을 웅크렸다. 심호흡했다. 김서혁이 엉망으로 휩쓸고 간 제 숨을 정돈했다. 그러나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어렴풋이 짐작하는 것과, 직언으로 확인 사살하는 것엔 큰 차이가 있었다.
유은우는 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다른 사람들이 지휘실에서 머리를 싸맬 동안 저 혼자 얻은 금쪽같은 휴식이었다. 김서혁이 소파 아래 놓고 간 쇼핑백을 뒤적였다. 유은우 명찰과 배지가 고스란히 달린 교복과 익숙한 속옷이 잘 개켜져 있었다. 작은 비닐 팩엔 학생용 군화가 들어 있었다.
선실 안쪽에 개인 샤워실이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검을 잃어 휑한 검집을 어깨에서 끌러내어 바닥에 던졌다. 총이 꽂힌 홀스터의 버클을 끌러 냈다. 피와 먼지로 더러워진 실험복 가운을 벗었다. 단단히 매듭진 허리끈을 풀자 도복이 간단히 어깨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피로 질척한 운동화도 벗어 버렸다.
샤워기 물을 틀자 몸에 들러붙어 있던 피가 일시에 씻겨 내려갔다. 유은우는 한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지르고는 맨발을 내려다보았다. 나란한 두 발 사이로 붉은 피 웅덩이가 자박거렸다. 고작 허벅지 하나 다친 유은우의 피보다, 죽은 최정식의 피가 더 많다는 건 자명했다. 더운 수증기에 숨이 막혔다.
두툼한 수건을 두르고 나왔다. 쇼핑백을 탁자 위로 엎었다. 속옷을 입고도 몸이 선득하여 우선 재킷을 펼쳐다가 무릎부터 덮었다. 셔츠에 팔을 꿰고 단추를 잠그려 할 때였다.
노크 소리가 났다. 유은우가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문이 달칵 열렸다. 서재희였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불안하고 초조한 낯이었다.
“어, 선배? 배치…….”
“거의 끝났어. 빠져도 돼.”
빠져도 된다니, 다른 누구도 아닌 서재희가 빠져도 될 리 없다. 설사 여유가 되어 어디선가 빠진다 해도 즉시 다른 곳에 투입되어야 마땅할 그가, 문가에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얼굴로 서 있었다. 유은우가 당황하는 가운데, 서재희가 문을 닫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유은우 옆에 무너지듯 앉았다. 그가 손을 뻗는다 싶더니 거칠게 끌어안았다. 유은우는 서재희가 날 선 숨을 제 목덜미로 깊이 묻는 것을 느꼈다. 다급함을 넘어 광폭해, 유은우는 서재희의 팔뚝을 움켜쥔 채 그가 진정하길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맞닿은 심장박동은 가라앉기는커녕 지나치게 속도가 붙어, 유은우는 손을 옮겨 서재희의 팽팽한 등에 얹었다. 가만히 쓸었다.
“저 별로 안 다쳤어요.”
서재희는 말이 없었다. 유은우를 끌어안은 손에 힘만 꽉 들어갔다. 그가 단정히 차려입은 교복과 그 위로 걸친 코트의 딱딱한 장식들에 살갗이 눌렸다. 속옷 위로 흰 교복 셔츠 하나만 달랑 걸치고 그마저도 단추를 채 잠그지 못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낯이 달아올랐다.
“선배, 저 괜찮아요.”
“……괜찮은데 김서혁한테 안겨서 와?”
목소리가 꽉 잠겨 있었다.
서재희가 손에서 힘을 풀더니 고개를 들었다. 비로소 그와 제대로 마주 보았다. 그는 거의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김서혁에게 우아하게 상황을 설명하던 남자는 뿌리 뽑히고 없었다. 눈에 핏발이 서 붉었고 뺨이 상기되어 있었다. 서재희가 잇새로 말했다. 늘 자로 잰 듯 정확하던 발음은 날아가고 쇳소리가 섞여 나왔다.
“김서혁한테 안겨서 올 정도면 많이 다친 거 아냐? 아니면 가벼운 생채기였는데도 그 사람이 굳이 널 손수 안아서 데리고 온 거라고 생각해야 해?”
날카로웠다. 유은우는 서재희의 반듯함을 찢고 나온 차가운 예민함에 마음이 아팠다. 수많은 사람들이 서재희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홀로 얼마나 힘들까.
서재희가 정신없이 되뇌듯 말했다.
“네가 촬영을 빨리 시작해서 가슴이 덜컹했어. 내가 김서혁에게 그리로 가라고 한 타이밍과 안 맞을까 봐. 네가 잘못될까 봐…….”
“선배, 괜찮아요. 다 괜찮아.”
유은우는 두 손으로 서재희의 양 뺨을 감쌌다. 그는 인형처럼 건조하고 서늘했다. 느리게 어루만졌다. 서재희가 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다소 누그러져 유은우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어딜 얼마나 다쳤어? 혼자서 걷기 힘들어 남자에게 안겨 왔으니 당연히 다리를 다쳤겠지?”
다친 부위가 다리가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선실에서 튀어나가 김서혁의 멱살을 잡을 기세였다. 유은우는 열린 셔츠를 간단하게 여미며 허벅지를 가리고 있던 재킷을 걷어 냈다.
“이쪽이요. 바로 응급처치 받아서 금방 아물 거예요.”
유은우의 눈에 꽂혀 있던 새까만 시선이 그제야 아래로 떨어졌다. 서재희가 손끝으로 가만히 유은우의 붕대 감긴 허벅지를 쓸었다. 유은우는 그 틈을 타 재빨리 셔츠 단추부터 잠그기 시작했다. 중간에 두어 개나 잠갔을까. 서재희의 큰 손이 다가와 세 번째 단추를 막 잡은 유은우의 손을 걷어 갔다. 손가락 사이로 손가락이 스몄다. 유은우는 서재희가 제 왼손을 단단히 깍지 끼고 다른 한 손으로 턱을 치켜들어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아랫배가 밟히듯 조였다.
“난 하루 종일 널 생각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널 생각해.”
서재희가 낮게 속삭였다.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김서혁이나 정윤환이나, 그들이 널 바라보는 시선을 목격할 때마다 난 그냥 숨이 막혀. 사람이 사람의 소유권을 주장해선 안 되는 거지.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를 위해 널 사랑하고 싶어.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너도 나밖에 없었으면. 네가 다른 사람에게 닿지 않았으면. 끔찍한 욕심이 나서 견디기 힘들어. 이 감정이 격해져서 내가 널 다치게 하면 어쩌지. 내가 조심할게. 정말 조심할게.”
피할 수도 있었다. 그가 허락을 구하듯 다가왔기 때문이다. 유은우는 기꺼이 눈을 감았다.
입술이 부딪혔다. 스산하던 낯에 비해 숨은 깜짝 놀랄 정도로 뜨거웠다. 부드러운 시작은 열기에 증발하고, 곧 서재희는 목숨을 들이붓듯 키스해 왔다. 다급하고 거칠어, 유은우는 뒤로 중심을 잃었다. 서재희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탁자를 더듬으며 몸을 지탱하려다가,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소파로 길게 쓰러지기까지 순식간이었다.
질식해 죽을까 봐, 뜨거워 터질까 봐, 유은우는 서재희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 서재희의 까만 눈동자와 정확하게 마주쳐, 그의 가슴을 밀치려던 손은 힘을 잃고 미끄러졌다. 그 손을 서재희가 잡아챘다.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사람들은 날 좋아해. 그렇지만 그건 내가 꾸민 모습을 보고 그러는 거잖아. 너한텐 내 있는 그대로만 보여 줬어. 혹시 그래서 네가 날 동정하는 건 아닌지. 난 널 이토록 사랑하는데, 넌 단지 날 불쌍히 여기는 건 아닌지.”
‘내가 보기에 유은우 하나도 안 불쌍해. 오히려 그 애가 날 불쌍히 여기는 것 같아.’
언젠가 층계참에서 서재희가 정윤환에게 그리 말했었다. 유은우는 그만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직 기억하고 있었구나. 뿐만 아니라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구나. 유은우는 간신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배, 아니에요. 절대로 그런 거 아니에요.”
“처음부터 남들한테 하던 대로 접근해야 했을까. 그럼 내가 이렇게 불안하지 않아도 될까. 그런데 또 그러기는 죽어도 싫어. 너한테만은 그런 내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 불행으로 똘똘 뭉쳐서 타인을 전부 체스판의 말처럼 보고 적당히 조종하려 드는, 그런 모습을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한테 보일 수 있어.”
“선배, 저도 선배랑 같은 마음이에요. 동정이 아니에요.”
“믿는데도 불안해. 난 분명 널 믿는데, 어째서 이렇게 순간순간 낭떠러지 끝에 있는 것처럼…….”
말끝은 맺어지지 못하고 희미하게 스러졌다. 서재희가 유은우의 목덜미로 제 숨을 파묻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었지만, 유은우는 갈수록 가슴이 크게 요동쳤다. 새삼 서재희의 손길이 제 어디에 닿아 있는지, 그의 몸이 어떻게 제 몸 위로 포개어졌는지, 그의 머리가 제 어깨 위로 기운 모양, 그의 발끝이 뻗은 방향, 차갑게 자신의 가슴과 복부를 누르고 있는 그의 코트 장식과 늘 그렇듯 새파란 냄새가 어지럽게 뒤섞여 그 결이 하나하나 선명하게 느껴졌다.
서재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결코 유은우에게서 완전히 떨어지기 위함이 아니었다. 상체를 들어 유은우와 마주 보기 위해서로 보였다. 혹은 다시 키스하려고 하거나.
그의 그늘이 새파랗게 드리워졌을 때, 유은우는 그만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저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돌려 시선을 피했다. 서재희가 위에서 딱딱하게 굳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유은우는 제가 더 당황하여 다급히 서재희를 올려다보았다.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돌린 게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단지 너무 긴장하여 나온 반응일 뿐이라고. 그러나 서재희는 이미 유은우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유은우의 허벅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재희에게 밀려 쓰러지며 스쳤는지 붕대 주위가 벌겋게 되어 있었다.
“미쳤나 보다.”
서재희가 중얼거렸다. 그가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이어 유은우도 그에게 안겨 바로 앉혀졌다. 서재희의 손이 아쉽게 떨어져 나갔다. 그가 가라앉은 낯으로 말했다.
“미안해. 많이 놀랐지. 내가 경솔했어. 푹 재워도 모자랄 판에. 나가 볼게.”
서재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은우는 다급히 그의 옷자락을 쥐어 당겼다. 눈을 크게 뜨며 돌아보는 서재희에게, 작게 속삭였다.
“선배…….”
서재희가 유은우의 입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유은우는 침을 삼키고 겨우 뱉었다.
“……보고 싶었어요.”
유은우는 서재희의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조금만 더 같이 있다가, 저 잠들고 나서 가면 안 돼요?”
직후 얼굴이 화끈해졌다.
서재희가 손등으로 제 입가를 눌러 가렸다. 반듯한 옷깃 위로 미끈한 목덜미가 삽시간에 상기되었다. 서재희가 한숨을 쉬며 입가에서 손을 떼었다. 그가 입고 있던 코트와 그 안의 재킷까지 벗어 소파 등받이에 걸쳐 두었다. 이어 유은우 옆에 앉았다. 그의 무게에 소파가 크게 흔들렸다. 유은우는 제가 뱉어 놓은 열기에 취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서재희의 긴 손가락이 다가와 유은우의 셔츠 단추를 쥐었다. 하나하나 단정히 꿰어졌다. 그리 입히고 그가 유은우를 번쩍 들어 제 무릎에 앉혔다. 이어 서재희가 벗어 둔 코트를 들어 유은우의 몸을 완전히 덮었다. 유은우는 눈을 감고 전신의 힘을 뺐다. 혹여 그가 나를 무거워 할까 하는 걱정은 내려놓았다. 노곤하게 그에게 몸을 기댔다. 사랑에 완전히 파묻혔다.
코로 새파란 햇볕이 들이쳤다. 정돈된 세탁물, 가지런한 피로, 아름다운 불행의 냄새가 났다. 유은우는 자세를 고치며 더욱 깊게 서재희에게 파고들었다. 서재희가 억눌린 신음을 냈다. 그의 심장이 살아 뛰는 것이 전신으로 전해져 눈물 나게 감사했다. 이어 유은우는 이마 위로 건조한 촉감이 부드럽게 머물렀다가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저 사람이 사람에게 안겨 있을 뿐인데,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머무는 듯 완벽한 안도감이 느껴졌다. 잠으로 추락하기 직전이었다.
문밖에서 목소리가 불쑥 날아왔다.
“야, 서재희. 여기 있냐?”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는 기척이 났다. 유은우는 눈을 뜨지 않았다. 서재희의 코트 아래서 고요히 호흡했다. 곧 정윤환의 목소리가 갈라져 이어졌다.
“……빨리 나와. 방어 패턴에 정예군까지 넣어서 재구성한 거 괜찮은지 확인 안 할 거야?”
서재희가 차분히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산이랑 이미 한 번 검토했어.”
“그 문제가 아니잖아. 네가 얼굴을 비치고 안 비치고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면서 하는 소리야? 일단 나오라고. 임원 애들 불안해해. 아무래도 반란군은 그렇잖아.”
“깊이 잠들면 나갈게.”
“걔가 애야? 그냥 두고 나와. 혼자서 잠도 못 잘까 봐.”
“나한테 있어 달라고 했어.”
정적이 흘렀다. 이내 정윤환이 날카롭게 말했다.
“수작 부리지 말고 지금 나와. 유은우 벌써 잠든 것 같은데.”
“내가 더 있고 싶어서 그래. 조금만 더 있다가 나갈게.”
“……내가 너 불러온다고 했어. 애들 기다리니까 너무 늦지 마.”
이어 문이 닫혔다. 예의 없이 냅다 열리던 아까와는 달랐다. 문이 맞물리는 소음이 제법 조용했다.
유은우는 가물가물한 의식 사이로 서재희의 손길을 느꼈다. 유리 다루듯 조심스레 머리칼을 쓸어내고 눈썹을 매만지며 뺨을 감싸 왔다. 이어 서늘한 손이 코트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얇은 셔츠 한 장 위로 허리를 감아쥐었다가 척추뼈를 가만가만 헤아리듯 타고 올라왔다. 차고 건조한 손. 낮게 깔린 음성으로 서재희가 속삭였다.
“다 잘될 거야. 어떤 식으로든.”
유은우는 제 오른쪽 손목으로 차갑고 매끄러운 금속이 닿는 것을 느꼈다. 이어 찰칵하고 맞물리는 소리. 묵직한 무게감. 익숙한 서늘함.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니까. 널 위해서. 네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
◆
정윤환은 문을 닫았다.
마음 같아서는 부서져라 쾅 닫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유은우는 이제야 겨우 쉬고 있었다. 용 연구소에서 고군분투하고서 부상까지 입고 돌아온 유은우에게 체력을 끌어올릴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금뿐이었다.
닫힌 문을 응시하며 소리 없이 물러섰다. 당장에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서재희에게서 유은우를 앗고 싶은 충동을, 순식간에 비틀린 마음을 홀로 삭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전신에 열이 올라 머리가 핑 돌기 직전이었다. 반대쪽 벽에 등이 툭 닿았다. 가까스로 멈춰 섰다.
내가 먼저 만났어.
유은우는 정윤환의 품에서 보호받으며 지냈던 회색의 나날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 서재희의 가슴에 기대어 잠든 시간은 유은우에게 고스란히 남을 터였다. 남기만 하랴. 극히 높은 확률로, 유은우의 빛나는 순간 중 하나로 간직되겠지.
안 자고 있었어.
입술을 깨물었다. 정윤환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유은우가 자는지 안 자는지. 3년간 별처럼 많은 밤을 함께 잠들었으니, 세상 그 누구보다 명료하게 가려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하등 쓸모없는 감각이었다. 어디 가서 떳떳하게 말할 수 없는 건 물론이고, 유은우에게 실수로라도 언급해서는 안 되었다. 가슴 한쪽에 침전되어 썩는 찌꺼기에 불과했다.
정윤환은 천천히 돌아섰다. 복도를 걸었다. 멈춰 섰다.
유은우와 서재희가 서로 좋아한다는 건 진즉 알았다. 그러나 실제로 목격한 충격은 컸다. 너무 놀라서 심장을 떨어뜨리고 오는 바람에 텅 비어 버린 가슴이 선득했다.
그래도 화들짝 놀랄 수는 있는 거잖아. 부끄러워하는 척은 할 수 있잖아.
유은우는 분명 정윤환의 목소리를 들었을 터였다. 그러나 눈을 떠 확인하는 수고조차 않았다. 그저 서재희에게 파묻히듯 안겨 있었다. 더없이 평온한 낯으로 호흡하고 있었다. 그 자리가 제 자리인 양.
이거 완벽한 거절인 거지.
언젠가 유은우에게 말해 달라고 종용했었다. 날 사랑할 일 없을 거라고, 네 입으로 말해 달라고. 포기할 수 있게. 벗어날 수 있게. 그러나 한편으론 간절히 원했다. 아주 작은 희망만 있다면 결코 포기하지도 벗어나지도 않을 각오였다. 차라리 영원히 괴로워도 좋았다. 그때 유예된 대답을, 오늘 유은우가 고스란히 보인 셈이었다.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한 방울에 그칠 줄 알았으나 한 방울로 둑이 터져 쏟아졌다. 정윤환은 그 자리에 서서 아이처럼 울었다. 겨우 이를 악물어 소리를 죽였다. 유은우가 듣는 건 또 죽기보다 싫어서.
“괜찮니?”
정윤환은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차예원이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당황을 넘어서 경악이었다. 정윤환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차예원이 재차 물었다.
“왜 그래?”
“……남이사.”
내뱉듯 대답하고 양 손바닥으로 눈가를 꾹 눌러 닦았다. 걸어서 차예원을 지나치려고 했으나,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가로막는 바람에 멈춰 섰다. 짜증이 솟구쳤다.
“뭐.”
“지금 그 꼴로 들어가려고? 하늘이 무너진 표정에 코는 새빨개져 가지고? 너랑 유은우 하나 믿고 전략 다 짜 놨는데, 네가 눈물범벅으로 함교에 들어가서 휘젓고 돌아다니면 애들 기 팍팍 살고 참 좋겠다. 그치?”
“말투 봐.”
“너한테 배웠어.”
반박이 어려웠다. 하긴 차예원이라고 틀린 말만 하라는 법은 없지. 화제를 돌리기 위해 물었다.
“상황은?”
“똑같아.”
정윤환은 이프를 보았다. 동이 틀 시각이었다. 골이 뎅뎅 울렸다. 잠을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 전투의 핵심 전력임에도 쉴 기회가 부족한 사람은 비단 유은우만은 아니었다.
“가라. 나 잔다.”
아무렇게나 잡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누군가 있는지 휘휘 둘러본 후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신발만 벗고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불은 끄지 않았다. 언제 일어나야 할지 몰랐으니. 몸이 노곤했다.
그러나 차예원이 따라 들어오자 즉각 신경이 곤두섰다. 말 섞기 싫어 두었더니, 차예원은 다른 침대에서 이불까지 끌어와 소파 위에 펼치며 누울 채비를 했다. 기가 막혔다. 비상사태 시 바로 뛰어나가려고 안쪽 침대가 아닌 문과 가까운 소파에 눕는 건 이해하겠다만, 굳이 자신의 시야에 알짱거리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모함에 선실은 차고 넘쳤다. 정윤환은 이불을 걷어찼다.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왜 이래? 너 아니어도 돌겠으니까 나가.”
차예원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돌아눕더니 대답했다.
“갈 데가 없어.”
정윤환은 눈을 찌푸린 채 차예원을 빤히 보았다. 이불을 꽁꽁 두르고 고치처럼 소파에 누워, 차예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까만 뒤통수만 보였다. 갈 곳이 없다는 대답이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학생들은 도시연합을 무너뜨리기 위해 모함에 타고 있었고, 차예원은 도시연합장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다. 뒤돌아서면 뒷담화였다.
“……갈 데가 왜 없어. 모함에 빈방 천지인데.”
“여기가 제일 안전해. 넌 사람 안 가리잖아. 다 구하잖아.”
“그걸 아는 애가 여태 그렇게 막말했냐? 사해에 버리고 왔네, 애들을 죽이고 왔네…….”
“사과는 안 해.”
정윤환은 차예원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차예원이 여전히 돌아누운 채 이어 말했다.
“사과는 안 한다고. 나도 그땐 그게 최선이었어. 넌 자신 있었는지 몰라도 내 눈엔 아니었어. 네가 그 얼토당토않은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않게 하려면 네 총을 망가뜨리는 수밖에 없었어. 그 상황에서 내 판단이 옳았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어.”
“그러시겠지.”
“그래도 널 다시 본 건 사실이야. 교장실에서 찾은 파견 기록으로 애들이 당시 전투를 복기했어. 그거 보니까 네가 팀을 어떻게 지키려 했고 어떻게 잃고 돌아왔는지 한눈에 알겠더라.”
차예원이 입을 다물었다가 덧붙였다.
“그러니까 여기가 제일 안전해. 그 판단으로 있는 거야.”
“너 진짜 뻔뻔한 거 알고 있지?”
“상관없어. 살아남는 사람이 옳아. 어떤 경우든.”
동의할 수 없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옳아서 죽었다.
간극 아래 침묵이 길었다.
정윤환은 팔베개를 하며 도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뒤통수를 받친 손끝이 파르르 경련했다. 신경안정제가 간절했다. 당장 홀스터에 네 개, 재킷 안주머니에 두 개, 호흡기에 꽂힌 한 개까지 도합 일곱 개가 있었다. 자제심을 잃고 입에 물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이 대치 상황이 얼마나 오래 갈지 몰랐고, 모함 내에 신경안정제는 한정되어 있었다. 대규모 전투가 처음인 대다수가 불안해했다. 모든 약물 중 신경안정제가 가장 빠르게 소모되고 있었다.
잠이 안 와.
지긋지긋한 불면증이었다. 모함 특유의 진동이 등 아래서 자글거렸다. 힐끔 소파를 건너다보았다. 동그랗게 부푼 이불이 천천히 오르내렸다. 불쑥 물었다.
“너 왜 아빠한테 안 갔냐?”
말이 없어 자나 했다. 고된 하루였다. 곯아떨어질 법했다. 다시 천장을 보는데 늦은 답이 날아왔다.
“말했잖아. 이쪽에 있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차예원은 시민들에게, 심지어 제 아버지에게까지 자신이 혁명의 주동자임을 확실히 인지시켰다. 총대 메고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돌아갔다가 붙잡혀 감금된다는 시나리오는, 정윤환 본인이 생각해도 제 머리에서 나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느껴졌다. 안전도 확보하고 비난도 피할 최적의 기회였다. 게다가 덤까지 얹지 않았는가. 차예원 이름을 전부 정윤환으로 바꿔치기해 주겠다는. 손해라고는 한 톨도 용납하지 않는 차예원이 정윤환이 손수 깔아 주겠다고 제안한 지름길을 마다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왜? 서재희 때문에? 서재희가 그렇게 좋냐?”
물으면서도 차예원이 그렇다고 대답할까 섬뜩했다. 사랑에 목숨 거는 부나방은 저 하나로 족했다. 여럿 늘어날수록 세상에 이로울 게 없었다.
“재희가 좋냐고?”
차갑게 웃는 소리가 났다. 차예원이 말했다.
“만약 그 애가 제 뜻을 굽히고 날 사랑하게 되는 순간 목을 졸라 죽여 버릴 거야.”
목소리가 착 깔려 나왔다. 정윤환은 그만 제 목을 잡힌 것처럼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차예원이 같은 어조로 덧붙였다.
“농담이야.”
정윤환은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삶의 마지막 밤이 될 수도 있다. 유은우와 함께 보낼 수 없는 건 이 악물고 넘어간다 쳐도, 차예원에게 시달릴 아량은 추호도 없었다. 도로 일어나 벗어 둔 군화에 발을 꿰었다. 차예원이 안 나가면 자신이 나가면 된다. 벌써 낭비한 몇 분이 아까웠다.
“너 나한테 잘해야 할걸.”
한쪽 발만 신은 채 멈추었다.
“사람들은 내가 아빠를 버리고 재희 따라 학교로 돌아왔다고 생각하지. 안락한 기득권을 내려놓고 사랑과 정의를 좇아 가족까지 등졌다고 치켜세워 대. 사실이 아니야. 난 학교로 돌아올 생각이 없었어. 아빠가 날 여기로 보냈지.”
정윤환은 나머지 한쪽 발을 군화에 쑤셔 넣었다. 대꾸하지는 않았다.
“네가 내 아빠 입장이 되어 생각해 봐. 날 여기로 보낸 이유. 간단하잖아. 본인은 이미 회생 가능성이 없어. 재희가 등을 돌린 순간 다 끝난 거나 마찬가지야. 재희는 오랫동안 예비 사위로 도시연합장실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렸고, 거의 모든 약점을 알고 있거나 완전히 알지는 못하더라도 실마리는 쥐고 있어. 필요악이었던 임유현은 사망했고 시민은 등을 돌렸지. 앞으로 비리만 파헤쳐질 상황에서 아빠는 나와 연을 끊을 수밖에.”
정윤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선실을 가로질렀다. 문손잡이를 잡았다가 놓았다.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은 채 문에 오른쪽 어깨를 기대고 삐딱하게 서서, 차예원의 웅크린 등을 노려보았다. 마음을 담아 빈정거렸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우린 이기겠네. 적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으니. 딸을 여기 보낸 이상 이겨 먹고 싶진 않을 거 아냐. 오히려 져 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는데. 내일 우리 손잡고 깃발이나 흔들면서 전진해 볼까?”
차예원이 꽁꽁 두르고 있던 이불을 젖히며 일어났다. 헝클어져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눈이 붉었다.
“우린 도시연합장이 아니라, 도시연합과 싸우고 있어.”
정윤환은 머리도 문에 툭 기댔다. 눈을 반쯤 뜨고 차예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원점이네. 그럼 내가 대체 왜 너한테 잘해 줘야 하는데? 난 내일 네 통신 서비스도 못 누린다고. 너 스트레스로 온디딤 다루기 힘들어서 유은우만 해 줄 거라며.”
“네가 나한테 부탁했던 거 있잖아.”
“그게 뭐. 내가 가라고 했는데, 네가 안 갔잖아. 통신 다 두절되었는데 아빠한테 말도 못 꺼냈을 거 아냐.”
“아까 김서혁이 그랬어.”
차예원이 씹어뱉듯 이어 말했다.
“우리 아빠가 날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고. 김서혁은 내가 그 사실을 모른다고 여겨 딱하다는 듯 얘기했지만, 나도 알아. 아빠가 날 사랑하는 것쯤은. 잘못된 방식이라도, 사랑이라는 거 알아.”
정윤환은 천천히 차예원의 말을 곱씹었다. 그녀의 의도는 어슴푸레하게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윤곽을 갖추었다. 정윤환은 문에 기대었던 몸을 천천히 바로 세웠다. 목소리는 탁하게 갈라져 나왔다.
“……설마.”
“아빠가 날 여기 보냈어. 아빠가 내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조치야. 내게 정당성을 부여해 주려면 나뿐만 아니라, 현재 나와 함께 있는 너희도 깨끗해야 해.”
정윤환은 마른 손끝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현기증이 치밀었다. 단 한 번도 동정한 적 없던 차인호가 끔찍하게 안타까웠다. 아아, 이 빌어먹을 사랑 같으니라고. 기꺼이 파멸의 길을 자처하는 이 완벽하게 깎아지른 절벽이라니. 사람을 한계까지 몰아넣는 이 강렬한 감정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는 데 반박할 여지는 없었다.
“이제 좀 감이 와?”
정윤환은 눈을 들었다. 괴로운 와중에도 타고난 뼈처럼 의기양양한 차예원을 훑었다. 차예원이 바라는 것은 명백했다. 본인 가치의 재평가. 그러나 정윤환은 그녀가 원하는 것은 추호도 줄 생각이 없었으며, 실제로 고맙지도 않았다. 그저 차인호가 측은했다.
“솔직한 감상을 말할까? 넌 끝까지 아빠 덕을 보는구나.”
“아무렴. 몰랐니? 이게 내 재능이야.”
“도시연합장 외동딸로 태어난 게 네 재능이다?”
“그러는 정윤환 너도 그 설계 실력 노력해서 얻은 거 아니잖아. 타고났잖아.”
“그러네.”
정윤환은 허탈하게 웃었다. 이어 차갑게 대꾸했다.
“그런데 난 내 재능에 대가를 지불해 왔거든. 사람 피 빨아 가는 게 온디딤보다 더해.”
문을 열고 나왔다. 뒤에서 차예원이 무어라 소리치는 것이 들렸으나 쓸데없었다.
잠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인내심은 이미 바닥을 보여, 복도를 휘적휘적 걸으며 왼손으로 재킷 안주머니를 뒤졌다. 호흡기가 손에 잡히자 입에 물기도 전에 기분이 좋아졌다. 수증기를 어지러이 뿜으면서 조타실로 들어갔다.
항해를 하던 학생들이 알은체를 했다. 긴장과 그 긴장을 압도하는 어떤 사명감이 느껴졌다. 정윤환은 손을 들어 인사를 물리고, 지휘실의 암막 커튼을 슬쩍 젖혀 보았다. 정예군과 학생 임원, 정윤환도 얼굴이 익은 5학년 설계부 실력자 서넛이 탁자에 거대한 방어 패턴을 펼쳐 두고 갑론을박을 하느라 치열했다. 김서혁은 팔짱을 낀 채 서서 짙은 회색 눈으로 방어 패턴을 응시하고 있었다. 서재희는 없었다.
“선배, 아직 안 잤어요? 많이 피곤하지 않으시면 들어와서 검토 좀 해 주세요.”
연다희가 정윤환을 알아보고 요청했다. 시선이 강아지 떼처럼 우르르 몰려왔다. 익숙한 기대였다. 정윤환은 호흡기를 깊이 빨며 김서혁을 살폈다. 김서혁은 정윤환은 신경도 쓰지 않고 방어 패턴에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갔다.
아름답게 얽히고설킨 도형과 그것들을 가로지르는 직선과 곡선 사이로 학생들의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김서혁은 방어 패턴의 가장자리, 정윤환의 꼬리표가 붙은, 특히 정교한 패턴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윤환은 즉각 탁자의 가운데를 보았다. 보통 핵심 설계자가 자리하는 중앙엔, 소연주 이름이 솟아 있었다.
정윤환은 제게 붙은 시선을 느끼면서 호흡기를 한번 깊이 빨았다가 뱉었다. 수증기가 확 퍼지면서 시야를 가렸다. 성큼성큼 걸어서 김서혁 앞에 선 뒤 묵례했다.
“모든 전투에서 유은우와 절 중심에 놔 주십시오. 유은우는 제가 전담으로 서포트하겠습니다. 그것 말고는 이번 전투에 딱히 바라는 것 없습니다. 저 컨디션 나쁘지 않습니다. 더구나 유은우가 있으면 전 타격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설계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외곽은 말도 안 됩니다.”
김서혁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눈동자만 이쪽으로 떨어졌다. 정윤환은 그가 제 얼굴이 아닌 호흡기를 든 왼손을 주시한다는 걸 알았다. 김서혁이 다시 방어 패턴을 보았다. 그가 낮게 말했다.
“약 줄이라고 했을 텐데.”
“중앙이 제 자립니다. 만약 제 부상을 고려하여 가장자리로 빼내신다 하더라도, 무게중심은 저를 기준으로 다시 재편될 겁니다. 힘은 정직합니다. 가장 크고 강력한 지점을 핵으로 삼기 마련입니다. 그때 가서 방어 패턴이 가장자리로 기울어지는 걸 재구성하느라 수고치 마시고 처음부터 그리 짜 주십시오. 제 부상은 유은우가 보완하며, 유은우의 부상 또한 제가 보완합니다. 저희는 이미 한번 뛴 전적이 있습니다. 상당히 잘 맞습니다. 사실 서로가 서로에게 최적일 수밖에 없지요. 고려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정윤환은 기다렸다. 그러나 김서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윤환은 김서혁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전투가 시작되고 총을 빼자마자 자신을 중심으로 전교생의 설계를, 나아가 적의 것까지 재편할 자신이 있었고,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았기에,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돌아섰다. 연다희와 눈이 마주쳐 덧붙였다.
“패턴 자체에 대해선 내 의견 구할 필요 없어. 그대로 써. 어차피 내가 짜면 너희 못 따라해. 내가 너희에게 맞춰. 그리고 서재희 어디 갔어?”
“모르겠어요. 잠깐 선실에서 쉬다 오겠다고 하고 아직 안 왔어요.”
정윤환은 커튼을 헤치고 나왔다. 아직 거기 있단 말이지. 속이 들끓었다. 이런 비상사태에 아직도. 내가 늦지 말라고 했는데.
함교를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멈췄다가 도로 들어갔다. 콘솔의 빈 여백을 짚으며 타를 잡고 있는 5학년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5학년 여학생이 몸을 뒤로 물리며 당황한 얼굴로 왜 그러냐 물었다. 그녀의 뺨이 확 달아올라, 정윤환은 다급히 거리를 두었다. 남 얼굴 붉히게 만드는 건 서재희의 전매특허 아니던가. 낯선 반응에 오히려 이쪽이 황당했으나 곧 납득했다. 내가 잘생기긴 했지. 문득 유은우도 그렇게 생각할까 궁금해졌다.
“이따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안내 방송으로 알려. 비상 사이렌 쓰지 말라는 소리야.”
“……네? 왜요?”
“귀 아프잖아. 나 예민해서 그런 거 못 참아. 사이렌 어디 있어? 아예 꺼 버려. 그렇지. 켜지 마라, 그거.”
항해를 맡은 모든 학생들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함교를 나왔다.
복도를 큰 보폭으로 가로질렀다. 유은우가 자고 있을 선실 앞에 서서 스스럼없이 문손잡이를 잡았다. 서재희가 나갔으면 그의 성격상 문을 안쪽에서 잠갔을 테고, 서재희가 있으면 문은 잠겨 있지 않을 터였다. 서재희가 어디 있는지 찾아내어 지휘실에 처넣을 생각이었다. 김서혁은 훌륭한 지휘관이었으나, 연다희를 비롯한 학생들에게는 확실히 어려운 상대였다. 원활한 소통을 위해 서재희가 있어야 했다. 문손잡이가 걸리는 것 없이 매끄럽게 돌아가 욕이 나왔다. 설마하니 아직도…….
그러나 문을 열었을 때 정윤환은 당황했다. 긴 소파엔 유은우만 색색 잠들어 있을 뿐, 서재희는 흔적도 없었다. 반사적으로 안쪽 욕실을 응시했다. 물소리나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다시 유은우를 보았다. 아까 봤을 때는 서재희 코트만 달랑 걸치고 그 아래 맨다리만 쭉 뻗어 사람을 미치게 만들더니, 그새 교복을 죄 갖춰 입어 틈이라곤 없었다. 심지어 비상시 빨리 출동하기 위해 군화까지 신은 채였다. 매듭이 단단했다. 정윤환의 군화와 같은 방식으로 묶여 있어, 서재희의 손이 탔음을 짐작했다.
문을 왜 안 잠그고 갔지.
문고리를 잡은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단순히 잊은 걸까. 그리 끔찍이 여기는 여자가 홀로 자고 있는데 서재희 성격에 잊어버렸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아니면 믿는 걸까. 전교생을 비롯한 모함의 모두가 유은우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 여겨 문을 잠글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을까. 김서혁에게 익숙하게 안겨 들어오던 유은우를 봤음에도, 서재희는 김서혁을 믿었을까. 내가 문을 열고 폭발하기 직전이었고 제대로 숨기지 못했는데도, 서재희는 나를 믿었을까.
서재희가 없으니 문을 닫고 나오면 될 것을, 정윤환은 홀린 것처럼 유은우를 응시했다. 소파에 길게 누운 유은우의 흩어진 머리칼이, 벌어진 입술이, 부드럽게 힘이 빠진 곡선이, 반쯤 흘러내린 얇은 담요가 정윤환의 혼을 잡아 빼서 실험실에서 함께 있었던 때로 쾅, 못 박았다.
담요만 덮어 주고 갈 거니까 괜찮아.
무엇으로부터 괜찮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정윤환은 이끌리듯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등 뒤로 닫았다. 저도 모르게 안에서 잠글 뻔했다. 의식적으로, 일부러 열어 두었다. 자제력을 잃을까 겁이 났다. 그러면서도 굳이 유은우에게 다가가 몸을 숙이고 흘러내린 담요를 집어 드는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담요를 부드럽게 훑어 먼지를 떨어내고 유은우의 몸에 덮어 준 뒤, 능숙하게 갈무리했다. 유은우는 잠꼬대가 심하여 이불을 걷어차고 굴러 떨어지기가 예사였다. 그녀의 몸 아래에 담요 자락을 반듯하게 밀어 넣어 고정했다.
그러고 나서도 정윤환은 쉬이 일어서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유은우를 찬찬히 훑었다. 방금 직접 덮어 둔 담요를, 떨리는 손으로 젖혀 유은우의 목덜미를 드러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걷었다. 희고 매끈한 목의 어디에 설마 흔적이 있을까, 귓바퀴를 살피고 입술을 눈으로 더듬었다. 서재희가 어디까지 유은우를 침범했는지, 유은우가 어느 선까지 서재희를 허락했는지, 어떻게든 엿보려는 자신에게 화가 나 뇌가 부풀어 터지려 했다. 감히 유은우의 가슴을 헤치지 않고 그 정도만 살피고 끝난 것은, 그가 드물게 현명하게도 열어 놓은 문 때문이었지, 그의 자제력이 특별해서가 아니었다.
그만해, 미친놈아. 언제 인간 될래.
정윤환은 제게 쌍욕을 퍼부으며 일어섰다. 돌아서서 나올 참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당겨져 도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유은우의 손이 제 소매를 잡고 있었다. 정윤환은 유은우가 무어라 웅얼거리며 몸을 뒤척이는 것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제 소매를 잡은 손은 떨어질 줄 몰랐다.
이 버릇 아직도 있구나.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아기 새처럼 필사적으로 매달려 정윤환은 감히 유은우를 뿌리치지 못했다. 힘을 주면 충분히 떼어 낼 수 있었으나, 뻗어 오는 손에 그런 냉혹함은 도리가 아니라 여겼다.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유은우에게 한번 잡히면 스스로 놓을 때까지 옆에 머물러 있기 부지기수였다.
정윤환은 제 소매를 꼭 잡은 유은우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누군가 언제부터 유은우를 좋아했냐고 묻는다면.
사실 그 누구도 묻지 않을 테고, 정윤환도 대답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이제 알 수 있었다. 강진욱이 보는 앞에서 자존심 다 구기면서 유은우에게 잡힌 재킷을 꼴사납게 벗어 주던 그 순간이, 연민의 시작이었다고.
정윤환은 조심스레 유은우의 손을 잡고 당겼다. 옛날처럼 악을 쓰듯 매달린 손이라, 잡힌 소매를 빼내는 데엔 힘이 필요했다. 정윤환은 제 심장에서 유은우를 뜯어내듯 어렵게, 처음으로 그녀의 손을 떼어 냈다. 조용히 소파에 내려놓았다.
일어서서 선실을 나왔다. 문을 닫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뱉었다. 유예된 피로가 몰려왔다. 그러나 정신은 놀랍도록 맑아져 있었다.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 나가는구나 생각했다. 다른 사람에게 혼을 홀라당 빼앗기더라도 텅 빈 내부를 누덕누덕 기워 살긴 사는구나. 유일한 위로였다.
정윤환은 함교를 등지고 걸었다. 아래층 학생들이 모여 있는 강의실에 가서 서재희를 찾아볼 셈이었다. 이프의 통신이 끊어지니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계단을 다 내려가기도 전에 귀가 따가웠다. 학생들이 입을 모아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학교 축제도 이렇게까지 흥이 있진 않았는데. 정윤환은 고개를 빼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층은 통으로 넓었다. 드문드문 기둥으로 지탱될 뿐 벽 없이 트여 있어 전교생이 모이고도 남았다. 색색의 플래카드가 벽마다 걸려 있었고, 천장은 화려한 띠와 풍선으로 가득했다. 학교 강당에 있던 너절한 것들을 몽땅 쓸어다가 모함에 실어 온 듯했다. 역사 속 이 자리에 있기로 선택한 것을 자랑스레 여기는 마음들이 해일처럼 밀려들어 아찔했다.
정윤환은 한 칸 더 내려가 보기로 했다. 장담컨대 이 반짝반짝한 흥분 사이에 서재희가 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때였다. 살갗으로 소름이 돋았다. 정윤환은 즉각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철제 계단 난간을 움켜잡았다.
쾅!
모함이 크게 흔들렸다. 대비하고 난간을 쥐었음에도 정윤환은 상당한 충격을 느꼈다. 아래가 즉각 시끌벅적해졌다. 학생들은 비명을 지르고 소란을 피웠으나 곧 질서를 지키며 일렬로 뛰어 올라왔다. 그래도 중앙학교 학생이라고 반응이 기민했다. 정윤환은 그 기세에 밀려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뒷걸음질로 위로 떠밀렸다가 이내 학생들과 함께 올라갔다. 상황이 이러니 서재희를 찾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아마도 서재희는 함교로 돌아갔을 것이다.
“윤환 선배다!”
학생들이 즉각 정윤환을 알아보았다. 눈에 띄게 안심하는 기운이 느껴져 정윤환은 새삼 기분이 묘해졌다.
― 비상입니다.
연다희의 목소리가 함 내에 쩌렁쩌렁 울렸다. 발밑으로 눈부신 설계가 밀려들었다. 새벽 내내 조율된 대규모 설계 도안이 바닥에 정교하게 깔렸다. 정윤환은 이프를 켰다. 온통 희끗한 푸른색이던 설계 중 일부가 황금색으로 번쩍이기 시작했다. 정윤환 개인 안내선이었다. 짐작대로 갑판을 가리켰다.
― 전교생은 즉시 갑판에 도열 혹은 부속선에 탑승해 주십시오. 현재 부속선 세 척이 손상되었습니다. 4호기, 32호기, 58호기입니다. 해당 부속선 탑승자는 후미 갑판으로 나가 방어선 복구를 도우십시오. 다시 한 번 알립니다. 손상된 부속선 세 척은 4호기, 32호기, 58호기입니다…….
정윤환은 열 시간짜리 딸기맛 보호칩을 까서 한쪽 볼에 머금으며 갑판으로 나왔다. 이미 많은 학생들이 올라와 각자의 자리에 도열하고 있었다. 바람이 넓은 채찍처럼 그들의 전신을 후려갈겼다. 강당에서의 들뜬 흥분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긴장으로 사위가 빽빽했다.
― 현재 도시연합의 모함 세 대와 용을 실은 수송선 한 척이 사정거리 내에 진입했습니다. 그들은 함선의 포를 난사하고 있으며, 포탄 하나가 저희가 구축한 방어선을 뚫고 들어와 모함의 후미를 훼손하여 격납된 부속선 세 척이 파손되었습니다. 적은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도록 버전이 높은 은닉을 가동하여 접근하였으며, 도시연합이 위성 자료를 조작해 송출함으로써 저희가 이와 같은 접근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낭패였다. 도시연합은 모든 기반과 데이터를 쥐고 있었다. 남의 집 안마당에서 싸우는 꼴이었다. 아까 지휘실에서 머리를 맞대며 계산한 것은 모두 거짓된 정보 위에 쌓은 무의미한 수고에 불과했다. 도시연합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홀스터에서 총을 뽑는 소리, 갑판으로 빈 약물 케이스가 타다닥 떨어지는 소리, 흩어지는 수증기, 거친 호흡, 군홧발로 갑판을 디디고 문지르는 소리. 합법적 집단 살해를 예고하는 익숙한 전조들 사이에서, 정윤환은 유은우를 발견했다.
유은우는 무방비하게 잠에 빠져 있던 아까와 달랐다. 눈은 생기로 반짝이고 전신에 팽팽한 활기가 돌았다. 유은우가 정윤환을 응시하며 시계를 차고 총을 쥔 오른손으로 제 바로 옆을 힘차게 가리켰다. 정윤환 꼬리표가 붙은 지정 좌표가 유은우 바로 옆에서 황금색 원으로 맴돌고 있었다. 뚜벅뚜벅 걸어가 원 안에 섰다. 등 뒤엔 함교가 솟아 있었고 전방은 갑판의 정중앙을 가리키고 있었다. 딱 봐도 전체 배치도의 중앙이었다.
문득 위가 그늘졌다. 힐끔 올려다보았다. 검은 포탄들이 어림잡아 열 개 이상 포물선을 그리며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공격을 감지한 방어선이 즉각 가동되었다. 정윤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둥글게 발효된 방어선을 살폈다. 후미에서 깨진 부분이 보완되었는지 손쓸 수고는 없어 보였다.
콰과과과광!
다시 한번 모함이 크게 뒤흔들렸다. 정윤환은 반사적으로 유은우를 잡아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유은우는 능숙히 중심을 잡고 있었다. 정윤환은 말없이 무안해진 손을 거두었다. 포탄들은 내부로 진입하지 못하고 방어선에서 차단되어 묵직하게 아래로 미끄러졌다.
유은우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물어 왔다.
“우린 포 없어?”
“교육용이라. 학교 모함에 포가 있겠냐. 애초에 반란군 박멸한 곳으로만 다니는데.”
유은우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가 제 이프를 보더니 말했다.
“지정석 대기까지 87%. 제자리 찾아가는 게 느려. 군이었으면 벌써 시작하고도 남았을 텐데. 아까운 방어선 다 부서지겠어.”
“대규모 전투는 처음이라 그래.”
정윤환이 대꾸했다. 유은우가 전방을 주시했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기분이 이상해.”
“뭐가.”
“군함을 적대하고 있어서. 군과 싸우게 될 줄 몰랐어. 저 모함은 내가 마지막으로 탔던 모함이야.”
“그래서 꺼려져?”
“전혀.”
유은우는 긴장한 기색이었으나 지나치지 않았다. 딱 전투에 필요한 만큼이었다. 컨디션이 최상으로 보였다. 호흡기에 신체 강화제를 끼워 깊이 흡입하는 유은우에게, 정윤환이 총을 빼며 물었다.
“부상 어때?”
“좋아.”
“특정 강화 한 번 더 씌워 줘?”
유은우가 흘깃 정윤환의 왼손을 보았다. 그녀가 대답했다.
“아니.”
정윤환은 개의치 않고 곧바로 총을 들어 유은우의 허벅지를 사격했다. 탕, 하고 유은우의 까만 교복 바지 위로 매끈한 물결이 한 겹 덧씌워지고 이내 투명해졌다. 유은우가 한숨처럼 말했다.
“고마워.”
“군에서 뛸 땐 어떻게 했어? 설계 읽는 거 느리잖아.”
“청각 지시에 의존했어. 여기까지 온 것도 안내선 따라온 거 아니야. 차예원 선배가 나한테 직접 말로 해 줘서 그거 듣고 왔어. 지금 차예원 선배, 서재희 선배랑 같이 함교에 있으면서 바로바로 내게 지시해 주고 있어.”
“차예원 잘못되면 내 파트너 큰일 나겠는데.”
농담 반 진담 반 중얼거렸다. 유은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군에서 인터컴이 손상되면 가장 실력 있는 서포터 옆에 딱 붙어서 같이 움직였어. 나 솔직히 별로 걱정 안 돼. 내 서포터가 너라서.”
정윤환은 물끄러미 유은우를 보았다. 유은우는 정윤환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전방을 보고 있었다. 단단하면서 여린 옆모습이, 정말 보는 사람 억울하게 예뻤다.
정윤환은 총을 들어 유은우를 겨누었다. 탕! 총구가 튀고, 흰 추적선이 뻗어 나와 유은우의 오른쪽 손목 시계 부근에 감겼다. 기시감을 느꼈다. 하늘을 보았다.
그래도 오늘은 비가 안 오네.
총을 거두려는데 유은우에게 느닷없이 손목을 잡혔다. 속절없이 끌려갔다. 정윤환은 어지럼증을 느끼면서, 유은우가 두 손으로 제 왼손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고스란히 당했다. 뒤늦게 손을 빼려 했으나 도로 잡혔다.
“잠깐 보자, 좀.”
“야, 하지 마. 진짜.”
그러나 유은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아, 정윤환은 날카롭게 뱉었다.
“이런 식으로 나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거칠게 뿌리쳤다. 유은우는 퍽 심각한 표정이었다. 정윤환은 숨을 가다듬었다. 유은우가 불쑥 말했다.
“내가 잘할게.”
“……뭘 또 잘해.”
“너 무리 안 하게, 설계 한 번으로 전부 끝나게, 내가 정말 최선을 다할게.”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는 대꾸가 목구멍까지 짓쳤다. 네 실력이 바닥이라 자꾸만 실패해서 내 몸이 부서져라 그 손해를 감당한다 해도, 네가 내게 마음 한편 내주면 그것으로 족할 텐데.
나만 좀먹는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 서재희입니다.
갑판 전체가 일시에 긴장했다. 인터컴은 무용지물이 되어 각자의 홀스터에 꽂혀 있었기 때문에, 서재희는 함내 방송으로 반듯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 거리가 가까워져 바로 눈앞에 적의 부속선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서재희는 교내 방송을 하듯 그저 평온했다.
― 배치도 조율은 제가, 현장 보완은 김서혁 전 총사령관님께서 주관합니다. 우리는 팀을 쪼개지 않고 방어선을 강화하며 전속력으로 적함을 파고들겠습니다. 적의 중앙에 위치한 수송선에 실린 용을 구출할 계획입니다. 용을 풀어내고도 모함이 손상되지 않았다면 그대로 1급 보안지역으로 이동하겠으나, 여의치 않을시 부속선을 띄워 이동토록 하겠습니다.
서재희답지 않은, 그러나 현 상황에서 달리 방법이 없는 무식한 정공법이었다.
― 우리는 압도적으로 이기거나, 지더라도 근소한 차이일 것이며, 어떤 식으로든 역사에 정의의 고유명사로 기록될 테니 살아도 죽어도 명예로울 것을 약속드립니다.
발밑의 배치도가 일시에 환하게 빛을 뿜었다.
― 전원 배치 완료되었으므로 3초 후 전력 질주하겠습니다. 3.
옆에서 유은우가 총을 뽑았다.
― 2.
정윤환은 총을 고쳐 쥐었다.
― 1.
모함이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을 내며 움직였다. 점차 가속이 붙어 이쪽으로 다가오는 적함과 그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 들었다. 동시에 수많은 공격이 산발적으로 이쪽으로 퍼부어졌다. 마치 자석이 돼서 철심이 가득한 구간을 통과하는 것처럼, 설계로 빚어진 빛나는 타격과 역한 냄새를 풍기는 화약 무기들이 학교 모함 하나만 노리고 새카맣게 달려들었다.
설계부 학생들이 혼신을 다해 구축하고, 타격부 학생들이 죽어라고 힘을 부어 놓은 방어선이 깨질 듯 위태롭게 버텼다. 별자리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반투명한 막 너머로 무수한 공격이 쏟아져 떨어졌다. 갑판에서는 그 여파를 줄이고 방어선을 보완하기 위해 서재희가 배치도로 지시하는 대로 설계와 타격이 정신없이 이어졌다. 막느라 바빠 공격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정윤환이 밟고 선 황금색 원이 빙글빙글 돌며 사방으로 화살표를 뻗었다. 보완이며 중첩이며 서재희의 지시가 기호로 떠오를 때마다, 정윤환은 이를 악물고 연사로 화답했다. 처음엔 그 속도를 버거워하던 유은우도 금세 따라붙어 정윤환의 설계에 제 타격을 얹어 쭉 밀고 나갔다. 온이 사방으로 시원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제 의도대로 뻗어 나가자 정윤환은 속이 다 탁 트였다. 자신의 설계를 이토록 힘 있고 깨끗하게 타고 가는 타격은, 결단코 유은우만 가능하리라 확신했다.
그러기를 수 분이었다. 문득 정윤환은 묘한 여백을 느꼈다. 실제로 적의 공격을 막는 것에 급급하던 학생들도 다소 편안한 기색이었다. 소나기처럼 무자비하게 떨어지는 적의 공격은 여전하나, 이상하게 방어의 간격은 길어졌다. 미리 짜 둔 대규모 방어 설계 덕이었다. 초반엔 몰아쳤으나, 한번 구축하고 나니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가면서 최소한의 보완만으로도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하여간, 서재희.
순수하게 감탄하는 찰나, 적의 공격이 일시에 멈추었다. 모두가 의아해할 때, 함교의 서재희에 의해 발밑의 배치도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학생들이 일사불란하게 새로운 위치로 달려갔다.
정윤환은 제 이름 꼬리표를 단 황금색 원과 유은우 꼬리표를 단 흰색 원 두 개가 쌍둥이처럼 쭉 미끄러져 갑판 앞으로 올라붙기에 이를 악물고 뛰어 따라잡았다. 유은우는 제 발 밑의 설계를 보지도 않았지만 차예원의 지시를 받았는지 지체 없이 따라붙었다. 거대한 모함의 첨단에 서서 정윤환은 그만 숨이 탁 막혔다. 중얼거렸다.
“……이건 좀 힘들겠는데.”
정윤환은 서재희가 왜 자신과 유은우를 전면에 내세웠는지 알 것 같았다. 적이 공격을 멈춘 건 그들의 간격이 너무 가까워져서, 학교 모함이 폭발할 경우 도시연합 또한 만만찮은 피해를 입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직접 접근하여 선상 전투로 넘어가겠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활짝 열린 총 세 척의 적함 격납고로부터 번쩍번쩍 빛나는 부속선들이 미사일처럼 이쪽으로 직진하고 있었다. 보나마나 도킹 시도였다. 문제는, 그 부속선들이 많다는 거였다. 해도 해도 너무 많았다. 정윤환은 사격 횟수를 한 번이라도 아끼기 위해, 총을 드는 대신 가까운 5학년에게 외쳤다.
“야, 거기! 저거 다 몇 척인지 알아봐!”
마침 5학년도 생각이 있는지 탐색 설계를 내보낸 직후였다. 그가 돌아온 설계를 크게 읽었다.
“여든일곱 척입니다!”
서재희의 지시가 간절했다. 정윤환은 습관적으로 왼쪽 귀의 인터컴을 고쳐 끼려 했다. 그러나 고장 난 인터컴이 있을 리 만무했다. 발밑의 황금색 원이 빙그르르 돌다가 사방팔방으로 화살표를 뻗어 댔다. 그 위로 수십 가지 기호가 떠올랐다. 고난이도 설계를 요구하거나, 기초 설계 일곱 가지를 중첩해 달라거나……. 가리지 않고 고슴도치처럼 빽빽하게 솟아났다.
“야, 서재희. 이거 나 죽이려는 거지.”
그만큼 믿는다는 거겠지. 심호흡했다.
“유은우.”
“응.”
“나 지금부터 스물한 번 안 쉬고 연사한다. 너 따라오는 거 안 살피고 바로바로 넘어갈 거야. 절대 놓치지 마. 아까랑은 비교도 안 되게 세게 나갈 거니까 너도 내 설계 부서질까 걱정하지 말고 곧장 밀어붙여. 내 부담 덜어 준답시고 사선 쓰지 마. 이번 설계 무거워서 안 날아갈 수도 있어. 무조건 정곡으로. 무슨 말인지 알지?”
유은우가 숨을 깊게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에 낯이 굳어 있었다. 문득 시선이 마주쳤다. 유은우가 이쪽을 안심시키듯 활짝 웃어 보이더니 사뭇 밝게 말했다.
“응. 나 할 수 있어.”
다시 전방을 바라보는 유은우를, 정윤환은 깊이 응시했다. 지켜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좋아.”
정윤환은 총을 고쳐 쥐었다. 자신을 격려하듯 중얼거렸다.
“간다.”
정윤환은 발로 서재희의 지시가 새겨진 원을 더듬었다. 첫 번째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총을 들어 정확히 겨누었다. 그대로 연사했다. 눈부신 설계가 폭죽처럼 터졌다. 거의 동시에 유은우의 타격이 정윤환의 설계를 맞춤처럼 입고 허공을 갈랐다. 정윤환은 본인이 어떤 설계를 쏘는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으나, 사실 주변의 다른 동조자들의 설계와 어떤 시너지 효과를 내는지까지는 전혀 살필 겨를이 없었다. 총이 덜덜 진동했다. 이젠 감각도 사라진 왼손과 금이 쩍쩍 갈라진 총 중, 어느 쪽이 먼저 나가떨어질지 알 수 없었다.
스무 번째 총구가 튀어 올랐을 때, 정윤환은 시야가 탁 터지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침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는 섬뜩한 직감이 왔다.
쾅!
모함이 크게 흔들렸다.
카가가가각!
금속이 금속 위로 세차게 갈리는 굉음이 났다. 대체 어떤 상황이기에 이런 식의 소음이 발생하는지 의아했다. 그러나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고도의 집중으로 실제 시야는 희게 비어 보였다. 입으로는 중얼중얼 비약적으로 공식을 뛰어넘으면서 마지막으로 방아쇠를 당겼을 때였다. 고비를 넘기는구나 싶어 안도하는데, 유은우가 정윤환의 마지막 설계에 타격을 입히자마자 곧장 이리 덮쳐 왔다. 정윤환은 유은우에게 당겨져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이어 부딪히듯 안겼다. 아찔한 가운데, 카앙, 날카로운 파공음이 지척이었다. 정윤환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은색과 검은색의 매끈한 금속들이 얽히고설켜 정윤환의 전신을 깨끗하게 막아 내고 있었다. 유은우의 시계판에 튕겨나간 적의 설계가 날카롭게 부서졌다.
“조심해.”
유은우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정윤환을 보호하듯 뻗었던 오른손을 거두었다. 거대하게 전개된 시계가 옆으로 비껴났다. 그제야 서재희의 지시대로 죽어라 갈긴 결과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적진 한가운데였다.
그들은 더 이상 비행하고 있지 않았다. 거대한 수송선의 갑판에 착륙해 있었다. 간신히 버티던 방어선은 여기저기 금이 가 형편없었다. 패색이 짙었다. 그러나 적의 공격은 이상하게 드문드문했다. 아흔 척에 달하는 부속선들은 감히 도킹 시도조차 못 하고 주변을 날카롭게 맴돌고 있었다. 그 뒤로 모함 세 척이 버티고 있었는데, 함마다 측면이 전부 개방되어 포란 포는 죄 튀어나와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김서혁이 모함 끝에 우뚝 서서 총을 연사하고 있었다.
도시연합이 공격을 아끼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자신들이 어렵게 손에 넣은 운반물이 훼손될까 봐.
김서혁이 겨눈 총 끝에 용이 있었다.
1000년 만에 등장한 성체는 결코 성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쭉 당겨 보아도 겨우 1미터 남짓일 까맣고 투박한 짐승이 갑판에, 아니, 정확히는 학교 모함이 처박히는 바람에 형편없이 찌그러진 수송선의 갑판에 너덜거리고 있었다.
정윤환은 그제야 왜 도시연합이 조그만 용 하나를 운반하기 위해 거대한 수송선까지 사용했는지 깨달았다. 수송선 갑판을 무수히 뒤덮고 있는 것은 흰 모래 색깔 그물로, 그물코마다 수많은 덫이 촘촘히 박혀 있어 마치 덫을 경작한 끔찍한 밭을 연상케 했다. 그 그물에 용이 엉켜 있었다. 도시연합은 덫을 엮은 그물을 용에게 집어던져 포획에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그 그물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거대하여 갑판이 흔들릴 때마다 자글자글 움직이는 것이 마치 쇠로 이루어진 바다의 물결 같았다. 혹여나 용을 덫에서 분리하다가 놓쳐 버릴까 염려하여, 무식하게 큰 덫의 밭을 그대로 질질 끌어다가 수송선 갑판에 통째로 던져 놓았을 거라고 짐작했다. 학교 모함이 바로 그 위로 처박힌 셈이었다.
김서혁의 총구가 튈 때마다, 용에게 달라붙은 덫이 하나둘씩 입을 벌리며 용을 놓아주고는 한 바퀴 뒤틀리며 본연의 기능을 잃었다. 그러나 더뎠다. 용의 움직임은 예측이 어려워 정교한 집중력을 요했다. 김서혁이 덫 하나를 풀면, 용이 풀려나 움직이며 덫 두 개에 물렸다. 김서혁은 무감한 낯으로 계속해서 용을 조준했다. 그의 타격이 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그물을 크게 찢어냈다. 덕분에 숨은 트였으나, 여전히 사지에 덫을 주렁주렁 매단 용이 날개를 활짝 펼쳤다. 이어 전신의 비늘을 꼿꼿이 세우며 저를 향한 시선에 적의를 드러냈다. 붉은 안광이 번쩍거려 제법 사나워 보였으나 철저하게 사로잡힌 채였다. 용이 몸을 뒤틀 때마다 덫에 긁혀 까지면서 까만 비늘이 후두둑 튀어 올랐다. 끈적한 피는 흘러나오는 즉시 바람에 흩어져 투명하게 사라졌다.
용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바르르 경련했다. 붉은 안광이 흡사 피가 고인 듯 형형했다. 포기 않고 몸부림치는 것만도 기적이었다.
“여기 언제 착륙했어? 아니, 그보다…….”
등허리로 소름이 돋았다. 방어선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긴 했으나 크게 꿰뚫린 흔적은 전무했다.
“……우리 도킹, 한 척도 안 당했어?”
유은우가 여전히 왼손으로는 정윤환의 한쪽 팔을 단단히 움켜쥐고, 오른손으로는 시계를 펼쳐 사위를 경계하며 대꾸했다.
“네가 한 거잖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너 빼고 전교생이 전부 속도만 강화했어. 넌 방향을 틀었고. 적이 도킹할 수 없는 동선이었어. 어떻게 네가 하고 몰라.”
“서재희가 짠 대로 계산하느라 급급해서…….”
옆이 서늘했다.
정윤환은 일부러 총을 쓰지 않고 몸을 굴려 피했다. 동시에 유은우가 시계로 적의 공격을 쳐 냈다. 부서진 적의 설계가 빛의 파편으로 갑판 위를 훅 쓸려 나갔다. 정윤환은 가감 없이 욕을 퍼부었다. 정말 이쪽 목숨을 노리고 들어온 공격은 아니었다. 그보다, 본격적으로 펼칠 공격을 보다 더 정교하게 다듬기 위해 기준 삼아 슬쩍 떠본 것에 불과했다. 용을 건드리지 않고 이쪽을 사살해 보겠다는 명백한 악의였다.
정윤환은 즉각 일어섰다. 숨을 가다듬고 제 위치에 섰다. 당장이라도 머리 위의 방어선이 산산이 깨어질 것 같았으나 정윤환은 직접 총을 들어 보완하기가 망설여졌다. 방어선을 보충하라는 서재희의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그 지시는 정윤환이 아닌 다른 학생들의 몫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적의 공격이 날것으로 휘몰아치기 직전임을 피부로 느끼면서도, 학생들은 여전히 질서를 지키고 있었다. 의문은 없었다. 하다못해 의견 교환도 없었다. 제 발밑에서 생명체처럼 어지러이 교차하는 서재희의 지시에, 토 하나 달지 않고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적진 한가운데였다. 용기만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군데군데 방어선을 깨고 적의 공격이 내리꽂혔다. 정윤환이 살피는 동안에도 서넛이 부상을 입었다. 학교 모함을 폭파하거나 지척의 용을 훼손하지는 않으면서도 방어선을 깨고 갑판의 학생들만 골라 죽일 만한 강도의 공격이 드문드문 테스트하듯 이어졌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어쩌려는 걸까. 여기서 도대체 뭘 어떻게. 용을 구출해 내는 순간 도시연합은 공격을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맹공이 이어질 테고 이쪽이 전멸하기까지는 시간문제였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김서혁에게 용을 최대한 늦게 풀어 주라고 외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윤환은 마지막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용하고 교감, 아니, 말이라도 걸어 봐. 네 용이라며? 알아볼 수도 있잖아. 풀려나는 순간 우릴 도와줄지 누가 알아.”
“내 용이었던 적 없어. 날 알아볼 리도 없고. 꼬리로 후려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말끝에 유은우가 정윤환을 힘 있게 뒤로 끌었다. 정윤환은 애써 정신을 차리며 제 발밑을 보았다. 원이 아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함 내로 들어오라는 지시였다. 정확히는 가장 아래 기관실로.
그토록 기다리던 서재희의 지시였다. 정윤환은 즉각 유은우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대로 전속력으로 뛰어 갑판을 가로질렀다. 반사적으로 이행하고 있으나 순간 이상했다. 머리 위로 스치는 파편을 시계로 재빨리 걷어 내는 유은우를 향해 다급히 물었다.
“밑으로? 왜? 차예원이 뭐래?”
“모함이 갑판에 충돌하면서, 잠깐 이리……. 조심해! 프로펠러가 부러졌대. 예비로 교체해야 하는데 그거 배우기만 하고 실제로 해 본 애들이 없어서…….”
“뭐어?”
정윤환은 갑판 아래로 내려가는 입구에서 즉각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보았다. 찰나마다 학생들은 조금씩, 그러나 뚜렷하게 밀리고 있었다. 정윤환이 바라보는 동안에도 방어선 중앙으로 날카로운 설계가 부딪히며 까드득 균열이 생겼다. 도시연합은 슬슬 감을 잡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용을 피하면서 학생들만 박멸할 수 있을지. 시간이 걸릴 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학생들 틈에서 서포트하느라 정신이 없는 정예군 넷의 위치를 가늠하며 씹어뱉듯 물었다.
“네가 잘못 들은 거 아냐?”
유은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기색이었다. 그녀가 재차 말했다.
“내려가서 프로펠러 교체하라고 했어.”
“……나 같은 고급 인력이 지금 그거 하게 생겼어?”
“너랑 난 경험이 있으니까 쉽게 금방 하잖아. 얼른 내려가서 보고 오자. 이러다가 방어선 다 깨지겠어…….”
정윤환은 제 아래를 빙글 돌고 있는 원의 가장자리를 군화 굽으로 짓밟았다. 깨지는 소리가 났다. 발로 문질러 파편을 걷어 냈다. 17.
“뭐야.”
유은우가 흠칫 굳어 중얼거렸다. 초조하기만 하던 낯이 창백해졌다. 정윤환은 즉각 발을 들어 유은우의 배치도를 밟아 부수었다. 9.
“이거 설마…….”
유은우가 숨을 토하며 말을 이었다.
“……부속선 번호야? 우리보고 내려가서 부속선 타라는 뜻이야?”
제발 이 짐작이 비껴가기를. 정윤환은 대답 대신 총을 들었다. 사격을 아끼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 정도 정교한 설계를 해낼 수 있는 이는 아군은 물론 현 세대 전 동조자를 통틀어도 정윤환 자신밖에 없었다.
방아쇠를 신중하게 당겼다. 총성 뒤에 즉각 이프로 선내의 투시도가 떠올랐다. 정윤환은 뚫어져라 투시도를 응시하며, 허공을 진찰하듯 총구를 천천히 미끄러뜨렸다. 투시도가 총구의 각도를 따라 미는 힘을 따라 모함 아래로 파고들고 확대되었다. 기관실의 프로펠러는 부러지지 않았다. 멀쩡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유은우가 숨을 삼키며 시계를 전개해 정윤환을 감쌌다. 카가가각, 강력한 힘이 시계판의 금속을 한바탕 긁고 지나갔다. 정윤환은 투시도를 보고 있었으나 감각만으로 사위의 완연한 패색을 느꼈다.
총을 고쳐 쥐었다. 투시도는 한바탕 뒤집어지며 이번엔 수송선 전체를 조망했다. 모함은 수송선의 용골을 부수고 깊이 파고들어 있었다. 파견용 모함에 비해 일반 수송선이 넓고 재질이 약하여 가능한 일이었다. 욕이 절로 나왔다.
“우리 지금 수송선 용골에 완전히 꼈네. 이대론 옴짝달싹도 못해. 착륙이 아니라 박혔잖아.”
“그래서 부속선을 타고 탈출하라는 거구나. 프로펠러는 핑계고.”
유은우가 중얼거렸다. 정윤환은 입술 안쪽을 짓씹었다. 셈이 맞지 않았다.
“부속선 세 척 망가지고 일곱 척밖에 안 남았어. 1000명이 어떻게 부속선 일곱 척에 타? 제일 톤수 큰 것도 정원이 고작 서른 명인데, 못 타는 나머지는 어떡하라는 거야. 대장이 용을 풀어 주는 순간, 남은 사람들 개죽음 당할 게 뻔하잖아.”
유은우가 투시도를 보고 있던 눈을 들었다. 충혈되어 벌겠다. 그녀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럼 어떡할까. 다 같이 손잡고 여기 붙어 있을까? 부속선을 타고 나가면 일부가 살고 전부 남으면 전멸이야. 그렇다고…….”
유은우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대장이 계속 용을 인질로 잡고 있을 순 없잖아! 우린 용을 풀어 주기 위해 여기 착륙했어. 목숨이 아까웠으면 애초에 오지도 않았어…….”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야. 부속선 일곱 척 다 나가 봤자 얼마나 살 수 있을 것 같아? 빠져나간다 해도 바로 추격당해!”
“정윤환, 더 이상 뭘 어떻게 해? 모함은 못 움직이고 부속선은 남았어. 이게 최선이야.”
“최선? 대장이 용을 풀어 주는 순간 지금 갑판에 나와 있는 사람들 다 죽어.”
“적어도 부속선 탄 사람들은 살아.”
“이러면 내가 1학년 때 팀원을 전부 죽음에 몰아넣었던 거랑 뭐가 달라?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잖아!”
유은우가 오른손을 휘둘렀다. 새카만 시계 침이 쐐액 하고 달려드는 타격을 부수어 놓았다. 정윤환은 번득이는 시계판 너머로 유성처럼 떨어지는 적의 공격을 보았다. 그리고 훨씬 자유로워진 용의 몸놀림도. 용은 이제 덫에서 거의 풀려나 날개를 퍼덕이며 공중을 날고 있었다. 아직 꼬리가 그물에 얽혀 있긴 했으나 풀어지기까지 금방이었다.
“들어가자. 너 죽으면 나까지 능력이 제한돼. 우리 쪽 손실이 커. 부속선이라도 살아남으려면 네가 필요해.”
그렇게 말하는 유은우도, 막상 김서혁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정윤환이 중얼거렸다.
“방법이 있을 거야.”
우리가 더 적게 죽는 방법.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정말 이게 최선일까? 무수한 선택지에서 지름길을 골라내는 건 서재희의 전문이었다. 서재희가 정윤환보다 한 수 위였다. 그런데 그 서재희가 배치도를 이리 짜놓았다. 프로펠러를 핑계로 부속선에 탑승하라고 한다. 서재희의 말이니 의심 없이 수긍해야만 할까. 하지만 자꾸만 숨이 막혔다. 이건 서재희 스타일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미끼로 삼아 시간을 버는 것은. 게다가 그 미끼는 전멸할 확률이 상당히 높았다……. 만약, 서재희가 내린 이 결정이, 객관적 판단이 아닌 어떤 사심을 반영했다면.
어떤 사심.
정윤환은 서재희의 껍데기를 쓰고 이 모든 판을 바라보려 애썼다. 서재희가 가장 아끼는 체스 말은 단연코 유은우였다. 그다음은? 자신하건대 바로 정윤환 자신이었다. 서재희가 이 순간 가장 탁월한 패를 단지 사랑하여 쓰지 않고 쥐고만 있는 거라면?
지금 서재희가 굴리는 판에서, 내가 그저 노는 패라면?
정윤환은 서재희가 그랬듯 유은우를 모든 위험에서 배제시켰다. 그러나 정윤환 자신만큼은 아니었다. 쥐고 굴리던 모든 선택지를 놓아 버렸다. 생각의 방향 자체를 달리했다. 우리가 어떤 최선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어떤 최선을 할 수 있는가.
서재희가 그랬다.
‘뭐든지, 마음껏. 넌 네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돼. 판은 내가 깔겠지만, 선택은 네 자유야.’
이걸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을까. 나는 지금 서재희의 판에 서 있는 걸까, 나의 판에 서 있는 걸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결정은 쉬웠다. 너무 쉬워서 웃음이 났다. 한세연이 그토록 강조하던 기준에 따르면, 현재의 상황에선 마땅한 선택지랄 것도 없었다. 정윤환의 기준은, 유은우도 아니었고, 가족도 아니었고, 심지어 제 자신도 아니었다. 은폐되어 견고한 현재를 깨고 태어날, 어리고 성숙한 미래. 어두운 터널 속에서 손에 잡히지도 않는 그 영원한 빛이 정윤환의 삶을 쪼개 온 기준이었다.
정윤환은 투시도를 껐다. 자신에게 되뇌었다.
“내려가야겠어.”
“뭐?”
유은우가 반문했다. 정윤환이 말했다.
“여기선 각이 안 나와.”
유은우가 눈을 크게 떴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왔다. 정윤환은 유은우가 필사적으로 제 옷자락을 움켜쥐는 것을 애써 무시했다. 이 빌어먹을 재능이 왜 하필 제게 떨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땅으로 내려가서…….”
정윤환은 혀로 왼쪽 볼에 붙은 보호칩을 더듬었다. 언제 깨졌는지 아주 작아져 있었다.
“……내가 부러진 용골을 위로 밀어내면 돼. 그럼 모함은 빠져나갈 수 있어. 부속선 쓰지 않고도 모함 자체로 이동할 수 있다는 말이야. 적어도 한 명은 더 살겠지.”
유은우는 새파랗게 굳었다. 숨이 거칠어졌다. 유은우는 정윤환에게서 눈을 떼고, 내려앉기 직전인 방어선과, 거의 풀려난 용과, 한계에 다다른 김서혁을 훑고, 다시 정윤환을 보았다.
“안 돼. 못 할 거야. 안 될 거야. 그러지 마. 혼자 감당하지 마.”
찰나 정윤환은 크게 동요했다. 유은우가 하는 말에 못 이기는 척 쉽게 갈 수 있었다. 어차피 서재희는 정윤환과 유은우를 부속선에 싣겠다고 선언했다. 입 다물고 가만히만 있으면 여기서 살아서 나갈 수 있었다. 변명도 필요 없었다. 주요 전력이었다. 누가 봐도 그들이 선택받는 게 당연했다.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나 하나 살겠다고 눈 감으면 끝장이다. 또 반복된다.
유은우가 사색이 되어 정윤환의 손목을 잡았다.
“절대 안 돼. 너 지금 동공 커져 있어.”
“그래도…….”
입꼬리를 씩 당겨 웃어 보였다.
“……여전히 잘생기지 않았냐? 내 실력도 똑같아. 침식 좀 됐다고 해서 내 실력 어디 안 가.”
유은우는 이제 두 손으로 정윤환의 옷자락을 죽어라고 부여잡은 채였다. 얼마나 필사적인지 여차하면 정윤환을 끌어안을 태세였다.
정윤환은 총을 들어 갑판 쪽에 연사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혼신의 힘을 다했기 때문에, 방어선은 정윤환 본인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었다. 끔찍한 소음과 날카로운 빛이 한결 줄었다.
이걸로 서재희는 예상할까? 내 선택을.
“정 그럴 거면 같이 가.”
유은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다급히 말을 이었다.
“내가 네 부담 덜어 줄게. 그럼 되잖아. 그리고 같이 돌아오는 거야. 좋은 생각이지? 같이 가자. 지금 갈까? 그래, 지금 가자.”
그러더니 결국 울음이 터졌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유은우는 입술을 꼭꼭 깨물며 울음을 참아 냈다. 그녀는 여전히 두 손으로 정윤환을 붙잡고, 설사 자기가 우는 동안 정윤환이 휙 가 버릴까 전전긍긍하며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너는 평생 모르겠지. 내 눈에 네가 얼마나 예쁜지.
너를 향한 나의 마음엔, 부서진 꿈의 잔재들이 달라붙어 있어. 용서할 수 없이 날카로운 단면. 나 홀로 간직하기도 아파, 도저히 네게 줄 수가 없어.
정윤환은 유은우의 두 뺨을 감싸 쥐었다. 그대로 끌어당겼다. 수없이 그려 온 것보다 훨씬 쉽게 유은우는 가까이 당겨졌다. 유은우가 물기 어린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뚫어져라 올려다보는 그 예쁜 시선을 아래에 두고, 정윤환은 유은우의 이마 위로 고개를 기울였다. 할 수 있었다. 마지막이었으니까.
비로소 정윤환은 유은우의 이마에 입 맞췄다.
그리고 밀치며 뒤돌아섰다. 일부러 힘을 주어 거칠게 밀어냈으나, 유은우는 기민하게 정윤환의 손목을 잡아챘다. 꿈결 아닌 첫 손길이었으나, 희게 뿌리쳐야만 했다.
정윤환은 난간을 뛰어넘었다. 그대로 강하했다. 바람이 먹먹하게 귀를 찢고, 내장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이 한계에 다다를 무렵 사해 한복판에 착지했다. 신체 강화제를 취했음도 어마어마한 충격이 전신을 뒤흔들었다. 이를 악물고 똑바로 일어섰다. 총을 고쳐 쥐었다. 금이 간 표면이 생경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를 지옥으로 몰아넣었던 나의 재능이, 이까짓 실금 따위에 굴할 리 없다고 확신했다.
하늘을 점령한 거대한 수송선의 밑바닥을 겨누었다.
귓가로 작고 반짝이는 것이 윙윙 날아들었다. 나노 드론이었다. 전시 상황 기록을 알리는 중립 로고가 홀로그램으로 반짝였다. 도시연합이 학생들을 사살하는 것을 언론을 통해 공개할 리 만무했다. 그러니 이것은 양심 있는 언론사의 용기 있는 촬영이거나, 도시연합보다 시민들의 입김이 거세어져 언론사가 새로운 주체의 수발을 들고 있거나. 후자이길 바랐다. 간절히.
엄마, 아빠가 보고 있겠지. 아니면 이미 구금됐을지도.
어찌 됐든 마지막 인사가 될 터였다. 말썽을 무마할 때마다 부모님께 보였던 미소를 재현하고 싶었다. 수년간 그리 악착같이 지키려 애썼건만 결국 이리되었다고. 카메라를 향해 웃고 싶었다. 그러나 얼굴은 자꾸만 일그러져 무너졌다. 포기하고 총구를 보았다. 총구가 뻗은 연장선을, 그 끝의 수송선을, 그 수송선에 탄 수많은 미래를 보았다.
방아쇠를 당겼다.
탕!
저 멀리 수송선이 크게 흔들렸다. 유은우와 희미하게 유지되던 추적선이 뚝 끊어졌다.
충분하다는 확신은 어려웠다. 한 번 더 쏘고 싶었다. 그러나 다음은 없었다.
재차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총이 산산조각 났다. 왼손에서 소우주가 폭발했다. 시야가 뚝뚝 끊겨 희었다. 정신을 차리니 하늘이 기울어 있었다. 쓰러진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사해의 마른 모래가, 보호칩이 녹아 사라진 입 안을 메우고 폐부로 따갑게 들이쳤다. 주머니에서 새 보호칩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입에 물어야 한다고. 그러나 왼손이 없었다. 피로했다.
그토록 시달려 온 불면증이 무색했다. 잠은 죽음에 젖어 달게 몰려왔다.
내 삶의 마디마다 네가 있어.
난 너를 잊기 위해 너를 기억해야 했어. 그리하여 넌 내 삶의 페이지마다 주어가 되고 목적어로 남고, 때로는 행간에 모습을 감추며 나의 일부가 되었어. 네 이름은 내 이름과 같은 농도로 같은 필체로 나란히 쓰였어. 나는 네게서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으나, 바로 그래서 결국 너로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신이 내리는 벌이 있다면 이런 거겠지.
죄는 유연하여 어디로든 숨어들어 갈 수 있지만, 결코 사라지지는 않아. 그래서 평생 들키지 않는다고 해도 이렇게 벌은 피할 수 없는 게 아닌가 하고.
수없이 널 피해 궤도를 돌고 싶었어. 그래서 널 외면하고. 때로는 짓밟고. 너로 이루어진 문장이 무너져 내 삶의 모든 페이지가 의미를 잃고. 널 삼키고 만들어진 가지가 마디마디 꺾여 내 잎이 마르고. 그리하여 단지 널 잃은 것뿐이지만, 곧 내 전부가 훼손되고 말아.
난 널 사랑해서는 안 돼. 난 내 과거를 정당화해서는 안 돼. 네가 사라져 내 삶이 여백뿐이라 해도.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사죄야.
◆
유은우는 정윤환을 놓쳤다. 정윤환이 난간을 넘어 사라졌다. 깨끗하게.
“어…….”
실감은 느렸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이해했다. 정신없이 난간 아래를 굽어보았다. 수직으로 낙하해 멀어지는 정윤환을 보았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몸은 난간을 넘고 있었다. 뛰어내리기 직전, 순식간에 뒤에서 끌어안기고 당겨졌다. 유은우는 난간을 움켜쥐며 버텼다. 그러나 완강한 힘이, 결국 유은우를 낭떠러지로부터 거칠게 뜯어냈다. 난간을 놓친 손이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허공을 휘저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은우는 제 허리를 움켜쥔 바위 같은 손을 떼어 내려 안간힘을 썼다.
“안 돼! 혼자서, 어떻게. 혼자서 어떻게 하려고! 내가 같이!”
악을 쓰며 몸부림쳤다.
“저대로 두면 죽어!”
쾅!
어마어마한 충격이 느껴졌다. 등 뒤로 누군가에게 단단히 붙들려 있음에도, 유은우는 모함을 뒤흔드는 강력한 진동을 고스란히 느꼈다. 한참 아래에서 올라온 압도적인 그 힘에 추진력을 얻어, 모함이 위로 힘껏 날아오르고 있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멀어져, 정말로 멀어져서,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유은우는 기를 쓰고 상대를 밀어내며 발버둥 쳤다. 정신없이 외쳤다.
“안 돼! 내가…….”
눈앞에 불이 튀었다. 얼굴이 홱 돌아갔다. 그대로 차가운 갑판에 메다 꽂혔다. 머리를 부딪쳤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따귀가 얼얼한 건 직후였다. 볼 안쪽이 찢겨 피가 흘러나왔다. 그 들큼한 비린내가, 부서져 빠르게 녹기 시작한 박하맛 보호칩과 얽혀 끔찍한 맛을 냈다.
유은우는 금방이라도 속을 게워 낼 것처럼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자신이 눈물범벅이라는 것을 알았다. 흔들리던 초점이 겨우 겹쳐졌다.
김서혁이 유은우의 따귀를 갈겼던 맨손에 다시 장갑을 끼고 있었다. 표정은 없었다. 찢어질 듯 사납게 펄럭이는 그의 망토로, 귓가를 무자비하게 후려치는 바람으로, 유은우는 정윤환의 희생이 성공했음을 깨달았다. 모함이 전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해에 홀로 남은 정윤환으로부터 이미 한참 멀어진 후였다.
유은우는 덜덜 떨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울음이 쏟아졌다.
“대장, 보내 줘. 제발. 내가 가서 데려올게. 부속선 필요 없어. 그냥 가서 데려올게. 나 할 수 있어. 둘 다 살아서 복귀할 수 있어. 믿어 줘. 할 수 있어. 제발…….”
“총 넣고 시계 펼쳐. 이제 네 타격 감당할 사람 없다.”
“대장!”
“정신 똑바로 차려. 동료의 죽음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으면.”
유은우는 소리 내어 엉엉 울면서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비틀거려 쓰러졌다. 다시 일어섰을 땐 여전히 울고 있었으나 소리는 삼킨 채였다. 소매로 눈을 문지르고 총을 홀스터에 꽂았다. 거친 호흡을 정돈했다. 귓속에 벌 떼가 들어찬 듯 윙윙거렸다.
김서혁이 주위에 일갈했다.
“각자 위치로 돌아가! 전속력으로 보안지역으로 이동한다.”
“은우는 제가 데리고 내려가겠습니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바로 손을 잡혔다. 유은우는 끌려가면서 상대를 확인했다. 이선규였다. 그는 한쪽 어깨가 크게 찢겨 있었고 목덜미에 시퍼런 멍이 들어 엉망이었다. 함께 뛴 전투가 몇인데, 이선규의 부상을 목격하는 건 처음이었다. 유은우는 이를 악물었다. 끌려가던 보폭에 힘을 주어 이선규와 빠르게 발맞추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잃을 수 없었다.
갑판을 가로질러 함 내로 들어갔다.
놀랍도록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학생들을 헤치고 아래로 뛰었다. 거친 소음 사이로 누군가가 정윤환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을 들었다. 발목을 접지를 뻔했다. 이를 악물고 똑바로 뛰었다.
서재희도 봤겠지. 그도 알겠지. 정윤환이 낙오되었다는 거 모를 리 없어. 무슨 방법을 마련해 놓았겠지. 이 모든 전투가 끝나면, 승패를 떠나서 정윤환을 다시 볼 수 있겠지. 서재희가 기적처럼 정윤환을 데려올 거야.
문득 뒤가 서늘했다. 이 또한 서재희의 계획 일부인가. 어쩔 수 없는 희생인가.
설마.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계단을 구르듯 내려가는데 이선규가 예고 없이 멈춰 섰다. 유은우는 앞으로 고꾸라지려다 난간을 움켜쥐며 겨우 중심을 잡았다. 황급히 돌아보니 이선규는 딱딱한 표정으로 계단 아래쪽을 보고 있었다. 부상 없이 말끔한 소연주가 학생들을 줄 맞춰 위로 보내고 있었다. 쏟아져 올라오는 학생들 틈에 우뚝 서서 이선규는 점점 다가오는 소연주를 뚫어져라 보았다. 이내 이선규가 유은우의 손목을 잡은 채 아래로 내려갔다. 그대로 스쳐 지나가나 했을 때, 이선규가 뒤를 돌아보았다.
“야, 조심해.”
늘 치던 장난처럼 가벼운, 그러나 낯선 당부였다. 소연주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손만 살짝 들어 반응하고는 양 떼를 몰듯 학생들을 격려하며 쏜살같이 위로 올라가 버렸다.
“용은?”
다시 달리기 시작하며 유은우가 물었다. 이선규가 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빠르더라. 풀려나자마자 솟구치나 싶더니 그대로 땅으로 내리꽂히더라고. 순식간에 모래를 파고들고 땅 밑으로 들어가 버렸어. 도시연합이 왜 그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잡을 수밖에 없었는지 알겠더라.”
계단이 끝났다. 격납고에 들어서자마자 맞바람이 들이쳐 눈을 뜨기 힘들었다. 사출구가 활짝 열려 있었다. 세 척은 파괴되어 연기를 뿜고 있었고, 멀쩡하지만 작은 톤수의 한 척이 시동을 건 채 대기하고 있었다. 나머지 여섯 척은 이미 사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간 듯했다.
“우리가 이거 타고 나가면 다른 애들은?”
그리 묻다가 함선이 묵직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거칠게 긁히는 진동이 길게 이어졌다. 이선규가 유은우의 손을 잡아당기며 부속선으로 이끌었다.
“대장이 용을 풀어 주었으니 이제 전력으로 부딪히는 일만 남았어. 우린 열세야. 모함 기관실 다 망가졌어. 윤환이 힘으로 추진력 받아 이만큼 움직인 거지 오래 못 버텨. 일부는 부속선을 타고 탈출하고, 일부는 반란군의 모함으로 옮겨 갈 거야.”
유은우는 소음을 예민하게 더듬었다.
“도킹하는 소리가 아닌데.”
“도킹 없이 갑판 위에 직접 착륙하기로 했어. 어차피 모함 버리고 떠날 거야. 더 이상 살살 아껴 쓸 필요 없으니까. 소연주가 애들 데리고 탈 거야.”
“재희 선배는? 아까부터 차예원 선배 지시가 없어.”
“함교도 공격당했어. 차예원 많이 다쳤다더라. 서재희는 차예원 부상당하자마자 다른 애들한테 맡기고 부속선 타고 제일 먼저 나갔어. 5학년 설계팀이랑.”
“지금 어디 있는데?”
“일부러 속도 늦추면서 우리 뒤를 호위하고 있어. 적의 공격을 완충하는 셈이야.”
최전선에 있다는 소리였다. 마음이 자꾸 무너지려 했다. 하나는 잃었고, 하나는 잃기 직전이었다.
“그럼 알고 있겠지? 정윤환…….”
“은우야, 잊어. 이미 늦었어.”
당장에라도 출동할 것처럼 웅웅거리는 부속선의 문이 아래로 덜컹 열렸다. 유은우는 이선규의 손에 이끌려 야트막한 철제 계단에 올랐다.
“정신 안 차리면 까딱하다 져.”
이선규가 낮게 말을 이었다.
“이제 윤환이도 없으니까.”
부속선에 오르자마자 등 뒤로 문이 덜컥 닫혔다. 내부는 좁았다. 조종석에 앉은 박민준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 외에 아무도 없었다. 조수석은 아예 있지도 않았다. 전투용 부속선이 아니었다. 정찰용으로나 쓰일 법했다.
“빨리도 온다.”
쉰 목소리로 그리 말하며 박민준이 능숙하게 타를 돌렸다. 유은우가 안전 바를 붙잡자마자, 부속선이 매끄럽게 사출구를 빠져나왔다. 박민준이 무전기를 잡았다.
“유은우, 이선규. 22호기 탑승 완료. 최전선에 합류하겠습니다.”
부속선이 급격히 유턴했다. 유은우는 다급히 박민준의 어깨를 잡았다.
“지금 정윤환 있는 데로 갈 수 있어?”
박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은우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박민준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정윤환만 데리고 오면 우리 이길 가능성이 훨씬…….”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유은우는 움켜쥐었던 조종석 등받이를 놓고 멈칫 물러섰다.
박민준은 엉망이었다. 방어에 능해 언제나 멀끔하여 ‘넌 전투 내내 어디 숨어 있었냐.’는 동료들의 농담을 독차지하던 그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얼굴 한쪽이 붉었다.
가슴이 덜컹했다. 김서혁과 함께 사해를 누빌 때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분위기가 사방에 팽배했다. 늘 적의 몫이라 생각했던 패배가 지척이었다.
박민준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은우야, 우린 둘로 나뉘기로 했어. 첫째, 보안지역으로 들어가 용의 심장을 탐색할 것, 둘째, 그 탐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도시연합을 막을 것. 우린 후자야.”
유은우는 습관적으로 홀스터의 인터컴을 잡았다가 말았다. 소용없어진 지 오래였다. 모함에선 대규모 설계와 함내 방송으로 서재희의 지시가 직접 전달되었으나, 이젠 달랐다. 일부는 부속선 일곱 척으로, 일부는 반란군의 모함으로 나뉜 지금은 오직 무전기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동성이 크게 떨어졌을 뿐 아니라, 연락이 가능한 부속선에서 나가는 순간, 서재희의 지시를 전달받는 것을 포기함을 의미했다. 닻이 끊어진 부표처럼 사해를 떠도는 것은 물론이고, 다시 아군에 합류할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조심.”
박민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유은우는 이선규에게 낚아채어져 겨우 안전 바를 쥐었다. 부속선이 날카롭게 기울어졌다. 내부에 수납된 설비들이 죽은 덩굴처럼 비스듬히 쏠렸다. 거의 직각으로 세워져 적의 공격을 피하고 나서야 부속선은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박민준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서재희 뚫릴 것 같은데. 오른쪽.”
유은우는 황급히 몸을 꺾어 오른쪽 창을 바라보았다.
도시연합군의 모함이 지척이었다. 그 바로 앞에서 단단한 방어선을 전개하고 있는 부속선은, 날개 한쪽이 부러져 비틀거릴 뿐만 아니라 기관실 쪽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서재희가 타고 있어. 유은우는 그리 직감했다. 이선규가 말한 최전선이었다. 투명하고도 견고하게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으나 그게 마지막이었다. 군과 학생을 가르는 그 한 겹만 부서지면 그 뒤로는 끝장이었다.
― 14호기 전투 불능. 14호기 전투 불능.
박민준이 다급히 무전기를 들었다.
“22호기 도착했다. 방어선은 우리가 이어받겠다. 이선규, 빨리!”
이선규가 총을 뽑았다. 그가 부속선 창에 설치된 투입구를 열고 총구를 끼웠다. 이선규가 총을 연사하고, 박민준이 타를 돌리며, 그들은 방어선 정중앙으로 이동했다. 열악했다. 갑판도 없는 정찰용 부속선에서, 오직 납작한 창 너머로 적을 보며 거대한 방어선을 홀로 건네받는다는 것은.
이선규가 이를 악물었다. 그가 경고했다.
“위험하니까 뒤로 빠져.”
유은우는 창에 더 달라붙었다. 불꽃처럼 터지는 이선규의 설계 너머로 14호기가 보였다. 추락하기 직전이었다. 다른 부속선 하나가 맹렬히 접근했다.
― 7호기 김산. 14호기는 우리가 수습하겠다.
부속선끼리 도킹은 불가했다. 7호기가 14호기로 닻을 내렸다. 연결되었으나 안심할 수 없었다. 둘 다 살거나, 둘 다 죽거나. 14호기엔 서재희가, 7호기엔 김산이 있었다.
유은우는 유리창에 서리는 입김을 연신 닦아 내며 밖을 보았다. 시야는 한정되어 있었다. 안전 바를 놓고 콘솔로 다가갔다. 방어선을 뚫고 빗발치는 공격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는 박민준 옆에서 스크린을 주시했다.
위. 비어 있었다. 앞. 학생들이 탄 부속선은 까마득히 멀어져 보이지 않았고, 반란군의 모함만 버티고 있었다. 왼쪽과 오른쪽. 곡선을 그리며 굽은 방어선에 적의 부속선이 지척으로 붙어 있었다. 뒤. 도시연합군 모함이 연달아 두 척. 아래. 도시연합군의 모함 한 척. 아래가 이상했다. 모함의 갑판 가득 군인들이 도열해 있었고, 총구에서 빛이 사정없이 튀어 올랐다.
아래에서 치고 올라올 셈이구나. 가장 약한 곳을 뚫어 방어선 전체를 깨려고.
“나 저기 내려 줘.”
“뭐? 어디?”
가까이 있는 박민준보다 이선규가 더 빨리 반문했다. 유은우는 다시금 콘솔의 레이더와 좌표기를 번갈아 확인했다. 크게 외쳤다.
“나 내려 줘! 17-B!”
박민준이 무어라 대답할 새도 없이 이선규가 총을 갈기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어디? 도시연합 모함? 저기 한가운데? 너 미쳤어? 갑판에 착지하기도 전에 죽고 싶어?”
“정윤환 없어서 나 총 쓰지도 못해. 어차피 육탄전으로밖에 못 싸워. 직접 부딪혀야 내 가치가 드러나. 여기서 구경이나 할 순 없잖아!”
이선규가 무어라고 하려다 말고 정신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가 바깥에 집중하는 사이, 유은우는 박민준의 팔을 꾹 잡았다.
“저기 내려 줘. 위치 잡을 수 있지?”
박민준이 타를 크게 돌렸다. 유은우는 콘솔을 짚으며 버텼다. 박민준이 중얼거렸다.
“너 내보내면, 나 나중에 서재희한테 죽는 거 아니냐.”
“그것도 살아남아야 겪을 수 있는 일이야.”
“……은우 너 연구소 때처럼 싸우면 안 돼. 무슨 말인지 알지? 적을 살려 주겠다는 오만은 정윤환이나 떠는 거야. 넌 그럴 여유 없어.”
“걱정 마.”
“야, 이, 미친! 야, 박민준! 너 사출구 열면 진짜 죽여 버린다.”
이선규가 발악했다.
“어? 듣고 있어? 박민준! 야, 유은우!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유은우는 괜찮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전신이 긴장으로 뻣뻣하여 미소조차 지어지지 않았다. 두려웠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최선을 외면하는 선택은 더 두려웠다. 모른 척 살아남는다면 얼마나 수치스러울 것인가.
홀스터에서 호흡기와 신체 강화제를 차례로 뽑았다. 딸깍, 끼워서 입에 물었다.
부속선이 급속도로 회전했다. 유은우를 떨어뜨릴 위치를 정확하게 잡기 위해서였다.
호흡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세 모금 만에 약물 케이스는 텅 비어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약물 케이스를 빼고 빈 호흡기를 다시 홀스터에 끼우면서, 다시는 사용할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불현듯 예언이 뇌리를 스쳤다.
셋은 서로를 탐하고 해치고 구원하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온전치 못할 것이나
아니야. 그딴 해묵은 헛소리 떠올리지도 마.
그들이 타고 남은 재는 땅을 기름지게 하고
흘린 피눈물은 비가 되어 강을 이루니
괜찮을 거야.
그동안 도시는 건재하나
영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괜찮지 않더라도, 그것도 그것대로 괜찮아.
부속선이 속도를 줄였다. 방어선과 맞부딪히며 부속선이 덜덜거렸다. 위험 구역 내에 진입했다는 느낌이 왔다. 온이 날카로이 뒤엉켜 빽빽했다. 얽히고설킨 설계와 설계. 맞부딪혀 힘을 겨루는 타격과 타격. 숨이 막혔다. 직선으로 까마득히 떨어지는 아래에 적의 모함이 위치하자마자, 부속선 바닥의 사출구가 덜컹 열렸다.
괜찮아. 처음이 아니야. 해 본 적 있어. 스스로를 세뇌하듯 격려했다.
‘태풍 오는 날, 맨몸으로 적진에서 탈출해서 15킬로미터를 달려 아군에 도착했으니까…….’
유은우는 김서혁을 떠올렸다. 자랑스러운, 대견하기 그지없다는 눈빛. 그때 배 속 밑바닥부터 솟구쳤던 희열을 기억했다.
‘……앞으로 이것보다 쉬운 건 다 할 수 있어.’
무분별한 사출의 위험을 알리는 경고음 속에서, 유은우는 깨끗하게 뛰어내렸다. 뒤에서 이선규가 무어라 피를 토하듯 외친 것도 같았으나 이미 바람이 전신을 갈기고 있었다. 시야는 빠르게 지나갔다. 어지러운 색채의 향연 속에서, 유은우는 그날 김서혁의 조언을 떠올렸다. 비에 푹 젖은 담요 대신 김서혁의 코트 안에 파묻혀 깊이 새겨 두었던 단어, 억양, 목소리.
‘낙오되어 적의 한가운데 떨어지게 된다면 넌 어차피 죽는다.’
유은우는 갑판 한가운데 안착했다. 착지하는 순간 시계를 팽창시켰기에 어림잡아 일고여덟 명을 죽이며 시작할 수 있었다. 어쨌든 군인으로 빼곡해 발 디딜 틈 없던 갑판에 한자리 차지할 정도는 되었다. 다만 시체를 밟고 서야 했다. 피를 뒤집어써야 했다.
‘숨을 수 없다면, 오히려 너를 드러내듯 싸워라.’
사위가 얼어붙었다가, 유은우를 알아보고 삽시간에 총구가 이쪽으로 몰렸다. 그러나 쉽사리 당기지 못했다. 피를 먹어 검붉은 수백 개의 총을 응시하며, 유은우는 왼손으로 느리게 얼굴의 피를 훔쳐 내었다. 눈은 감지 않았다. 박차고 도약했다.
‘마치 네가 선두인 것처럼, 앞으로 몰려올 아군의 예고처럼 움직여.’
유은우는 의도했던 것보다 더 위로 솟구쳤다. 자신을 노리고 달려든 설계가 겹겹이 부딪혀 충돌하고 타격이 뒤이어 몰아쳤기 때문에, 몸은 세차게 떠올랐다. 시계판은 사방팔방으로 빠르게 유은우를 휘감으며 모든 공격을 말끔하게 쳐 냈다.
‘적을 껴안고 죽어.’
다음 순간 아래를 디뎠다. 새까맣게 벼려진 세 개의 시계 침과, 수십 개의 크고 작은 톱니바퀴들이 하나하나 전부 유은우의 의도대로 날카롭게 뻗어 나가며 삽시간에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았다. 길이 트였다. 유은우는 함교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항해사만 잡으면 모함은 움직이지 못한다.
정윤환은 수송선에 박힌 모함을 단번에 빼내 주었어. 서재희는 이 모든 상황을 홀로 관장하고 있고. 그런데 나만 한 게 없네. 동조율이 100이나 되는 주제에. 적이 모함을 세 척이나 끌고 왔는데 내가 적어도 하나는 막아 줘야…….
유은우는 이를 악물고 오른손을 휘둘렀다.
……체면이 서겠지.
친절하게 조타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 통성명을 하며 1등항해사를 고를 시간은 없었다. 시계를 층층이 이루는 얇고 두껍고 크고 작은 판들이 은색과 검은색으로 희번덕거리며 날았다.
콰과과과광!
하늘이 기울어졌다. 발밑에서 갑판이 미끄러지다가 훅 멀어졌다. 추락하는 모함 밖으로 튕겨 나가며 마지막으로 확인한 함교는, 흔적도 없이 통째로 날아가 있었다.
그 뒤로는 형광등이 나간 것처럼 의식이 뚝뚝 끊겼다. 몸 어딘가가 부러졌다는 것만 알았다. 그러나 고통은 전신을 휩쓸어, 어느 부위가 문젠지 인지하지도 못했다. 목이 졸리듯 치밀하게 괴로웠다.
보호칩…….
유은우는 텅 빈 입으로 크게 기침했다. 색색 새된 숨을 몰아쉬며 허벅지의 홀스터를 더듬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총, 그리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은우는 사해의 모래로 뒤범벅된 손으로 역시 지저분한 얼굴을 문질렀다. 추위에 곱은 듯 움직여지지도 않는 몸을 옹송그리며 허벅지를 내려다보았다. 홀스터의 절반이 끊어져 너덜거렸다. 약물 케이스와 보호칩, 호흡기는 어디론가 날아가고 없었다. 가장 쓸모없는 총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유은우는 숨을 헐떡이면서 가까스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까마득한 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비상 착륙을 시도하는 거대한 모함만 보일 뿐이었다. 함교가 파괴되어 텅 빈 상단에서 검은 연기가 재앙처럼 피어올랐다.
내 몫은 했어. 안도했다. 그러나 오염된 온이 들이쳐 시시각각 말라붙는 기도는 정직하게 두려웠다. 유은우는 간신히 몸을 움직였다. 일어나려 했으나 기는 수준에 그쳤다. 주위에 널브러진 시체들의 입을 벌려서라도 보호칩을 찾아 물어야 했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수십 가지 맛 중에서 박하맛을 건져야 했다. 적응하지 못한 맛은,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더라도 몸에서 받아 내질 못했다.
그러나 사지가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분명 눈앞의 시신에 접근하고 있다고 믿었으나 정작 앞으로 가질 못했다. 눈이 가물가물 감기려는 찰나, 날카로운 소음이 고막을 찢었다.
비상 사이렌.
유은우가 함교를 날려 버린 모함이 사해에 거칠게 착륙하며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안 돼.
사이렌.
서재희가 들으면 안 돼.
멀어져 가던 의식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서재희가 어디 있는지 감도 잡지 못하면서, 살아 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면서, 유은우는 본능적으로 일어섰다. 두 발로 땅을 딛고 휘청거리다가 도로 쓰러졌다. 이젠 눈을 뜰 수도 없었다.
익사하기 직전이었다.
그때였다. 유은우의 상체가 거칠게 일으켜졌다. 단단한 팔이 등을 받쳐 왔다. 왼뺨이 감싸졌다. 상대의 손은 식은땀에 젖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웠다. 그 냉기에, 유은우는 진저리치며 눈을 떴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찢기고 부러진, 그럼에도 기이할 정도로 반듯한 서재희가 눈앞에 있었다. 그가 갈급히 입을 맞춰 왔다. 제 과거를 건드리는 찢어질 듯 날카로운 사이렌과 치열하게 싸우면서, 그의 숨이 유은우의 입술을 열었다. 유은우가 채 인지하기도 전에, 납작하고 둥근 것이 입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시고 달콤했다.
그에게 남은 마지막이구나. 직감했다. 여분이 있었다면 이런 식으로 넘겨줄 리 없을 테니까. 서재희라면, 녹다 만 것이 아닌 새것을 까 주었을 테니까. 1초라도 더 긴 생명을 넘겨주었을 테니까.
서재희의 입술이 막 떨어지려고 했다. 유은우는 젖 먹던 힘을 짜내 서재희의 뒤통수를 틀어쥐고 바싹 당겼다.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유은우는 뱉어 내려고 애썼다. 돌려주어야 했다. 제 몫이 아니었다. 그러나 보호칩이 서재희에게 건너가기 전에, 그의 힘에 밀려났다. 그의 찬 손이 유은우의 왼뺨을 간절히 보듬고, 이어 단단하게 입을 막아 왔다. 몸부림칠 기력조차 없었다. 눈물도 말라 흘렀다.
유은우는 덜덜 떨면서, 제 입을 틀어막은 서재희의 손을 밀어내려 했다. 여의치 않자 그의 손목을 잡았다. 끌어 내리려 했다. 메마른 모래가, 유은우의 손아귀와 서재희의 손목 틈에서 날카로운 생채기를 냈다.
“은우야.”
보호칩을 입에 머금은 지 몇 초 지나기도 전에, 거짓말처럼 숨이 트였다. 말라붙어 찌그러지던 전신이 탁 놓여났다. 남의 혼을 받아먹어 제 심장이 다시 뛰는 것이 못내 끔찍했다. 드문드문 번지던 시야가 또렷해졌다. 그제야 서재희가 온전히 드러났다. 충혈된 눈. 말라붙은 입술. 가파른 숨. 상처에서 쇠 냄새가 났다. 그는 재앙에 깨져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유은우는 울지 않으려 애썼다. 눈물에 가려 그를 보지 못하게 될까 봐.
서재희의 까만 시선이 정신없이 유은우에게 쏟아졌다. 호흡이 어려워, 그의 목소리는 긁혀 나왔다.
“나 너무 오래 기억하지 마.”
비상 사이렌. 귀를 찢을 듯 높은 사이렌 소리가 왱왱 울려 댔다. 서재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숨이 드문드문 끊어졌다. 무너지듯 전신을 떨면서도, 서재희는 유은우의 입을 막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새카만 눈동자는 이미 초점이 흩어져 있었다.
“행복해져. 그동안 힘들었으니까.”
유은우는 그제야 깨달았다. 서재희조차 승리를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을. 혹은 확신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본인의 희생을 충분히 염두에 두었음을.
유은우는 다급히 고개를 저으려 했다. 그러나 서재희에게 단단히 잡혀 여의치 않았다. 목소리는커녕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서재희는 보호칩을 양보했음에도 지독한 악력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늘 과거로 빨려 들어가던 사이렌으로부터 버티고 있었다. 악에 받친 그를, 힘으로 이길 수 없었다.
간절히 달라붙는 유은우를, 서재희가 절박하게 밀어 떨어뜨렸다. 유은우는 사해에 내동댕이쳐졌다. 뿌옇게 일어난 모래 먼지 사이로 서재희가 보였다. 그는 경련이 이는 손으로 총을 고쳐 쥐고 있었다. 새카만 총구가 이쪽을 겨누었다.
“꼭 살아.”
총구가 튀어 올랐다.
탕!
유은우는 그 자리에서 튕겨 나갔다. 전신으로 무시무시한 힘이 몰아쳤다. 가공할 만한 속도로 내던져지기를 한참이었다. 정신을 잃기 직전에 어떤 것에 콱 부딪히는가 싶더니 이내 빠듯이 뚫고, 사해의 모래에 사정없이 처박혔다. 숨을 헐떡이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손을 뻗어 막 부딪혔던 허공을 어루만졌다. 투명하여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막이 느껴졌다.
차단막.
1급 보안지역의 차단막.
견고했으나, 이따금 우르릉 소리를 내며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지직거렸다.
‘낙원의 이론에 등록된 인구의 절반 이상이 낙원의 이론 파괴에 동의해야 해. 낙원의 이론이 파괴되면, 차단막도 해제된다.’
유은우는 흠칫 손을 떼었다. 사위를 둘러보았다. 서재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숨이 탁 막혔다.
눈으로 확인한 후에야 온갖 소음이 피부로 밀려들었다. 머리 위 하늘에서는 학교 부속선과 도시연합군 부속선들이 뒤엉켜 싸우고 있었고, 저만치서 군의 모함 두 척과 반란군 모함 한 척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유은우는 차단막의 안쪽에 있었다.
서재희가 유은우를 어찌나 힘껏 밀어냈는지, 정말로 멀리 와 버렸다. 설계에 그리 능하지 못한 서재희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멀리 보내 주었다는 사실에 다시금 마음이 무너졌다.
유은우는 양손으로 차단막을 어루만졌다. 힘껏 밀어 보았다.
차단막은 대체로 아주 단단했으나 가끔씩 굉음을 내며 모자이크처럼 흩어지곤 했다. 하필 그 허술한 틈을 타고 유은우의 작은 몸이 차단막을 통과한 듯했다.
유은우는 저만치 공중에서 맹렬히 맞붙은 부속선들을 보았다. 학교 부속선은 군을 간신히 따돌릴 때마다 그 틈을 타서 차단막으로 돌진했으나 매번 막히고 말았다.
아직 과반수를 충족하지 못한 거야.
유은우는 위로 끝도 없이 펼쳐진 거대한 차단막을, 그 너머의 접전을 응시하며,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서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어떡하지.
고민은 짧았다. 여럿의 목숨을 이어받았기에 가능한 지금이었다. 유은우는 이를 악물고 일어서서 안쪽으로 달렸다. 들어온 이상 용의 심장을 찾아야 했다. 군보다 더 빨리.
‘저는 1급 보안지역을 제국시대 때의 중앙 산업단지로 확신하고 있습니다만.’
서재희의 짐작이 맞았다. 몇 발짝 달리기도 전에, 거대한 건물들이 위용을 드러냈다. 1000년 전의 유적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훼손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목숨을 걸었던 뜀박질은 금세 느려졌다.
전부 포기하고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거대한 그림자의 끝에 살짝 스치는 것뿐이라 자위하며 모른 척하고 적당히 온디딤을 부려 군으로 돌아가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최소한 서재희하고 엮이지나 말 것을. 차라리 입학하고 나서 재수 없게 살해당했더라면. 그럼 서재희와 마주치지도 않았을 텐데. 죽지 않았을 텐데.
후회는 걷잡을 수 없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흐느끼며 주저앉았다.
차가운 모래를 짚은 손등 위로 눈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볼 안쪽에 달라붙은 보호칩을 혀로 더듬었다. 서재희가 내어 준 생의 일부였다. 다시 일어서는 순간, 유은우는 어마어마한 힘에 밀려 거칠게 튕겨 나갔다.
쾅!
한참을 날아가 덤프트럭에 처박히고 쓰러졌다.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대지를 울리는 무시무시한 진동 뒤로 저만치서 차단막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저 높은 하늘로부터 빛나는 유리 조각처럼 찬란하게 쏟아져 내렸다.
마치 빛의 폭포 같았다.
빛의 폭포.
가슴이 쿵 떨어졌다.
‘나랑 서재희는, 아직까지 그런 용은 본 적 없어. 우리도 피바다를 보긴 보는데, 나는 하늘에서 빛의 폭포가 떨어지는 걸 보고, 서재희는 어떤 스산한 공장 지대를 봐. 그게 다야.’
스산한 공장 지대.
유은우는 소스라쳐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랜 세월을 비껴가 온전한 흰 벽과 회색의 기둥들. 가동을 멈추었으나 녹이 슬었을 뿐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수많은 기계 장비들. 건물과 건물 사이 드문드문 놓인 대형 트럭.
등 뒤에서 파공음이 울렸다. 이제 사라진 차단막 너머로 부속선과 모함이 쫓고 쫓기며 뒤엉켜 이쪽으로 맹렬히 날아들고 있었다. 포탄 하나가 지척에 떨어졌다. 유은우는 이를 악물고 달려 무너진 벽 뒤로 숨었다.
콰광!
그러나 여파는 커서 벽은 단숨에 날아갔다. 종이 인형처럼 붕 뜨고 바닥에 떨어져 구르다가 겨우 멈춰 섰다. 머리 위에서 적과 아군이 맞붙는 가운데, 시야가 붉었다.
처음에 유은우는 제 머리가 깨져서 흘러나온 피인 줄 알았다. 그러나 저만치서 꾸물꾸물 다가오는 검은 짐승을 보고서야, 환각임을 깨달았다. 지긋지긋한 악몽. 진저리가 쳐졌다. 여기서까지 보게 될 줄이야…….
‘다음에 또 환영이 보이면, 그땐 총을 잡아 보렴. 그럼 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거야.’
유은우는 이미 걸레짝이 된 홀스터의 총을 그러쥐었다. 잡아 뺐다. 총신이 익숙하게 손아귀로 들러붙었다. 허공에 겨누었다. 총신의 숫자가 빠르게 상승했다. 주위에 흩어져 있던 핏기가 뭉텅뭉텅 엉기며 총으로 달라붙어 왔다.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에서 핏기가 회오리치듯 부풀었다.
이게 뭐야.
소스라쳐 총을 놓쳤다. 총을 중심으로 뭉치던 핏기가 한순간에 풀어져 그 농도가 균일해졌다.
“드디어 왔구나.”
숨을 들이켰다.
손 내밀면 닿을 듯 코앞에, 까만 용이 도사리고 있었다. 듬성듬성 이 빠진 비늘. 나달나달한 날개. 비척거리는 움직임. 꿈속의 그 용이었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었다. 늘 피를 줄줄 흘리던 텅 빈 눈구멍에 붉게 반짝이는 선명한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작고 초라한, 그러나 눈빛만은 형형한 용이 날개를 느리게 펼치며 이쪽으로 한 발짝 다가왔다. 유은우는 앉은 채 미친 듯이 몸을 물렸다. 폭음으로 대지가 흔들렸다. 분명 꿈이 아니었다. 현실의 환각이었다. 전쟁 한가운데 피바다가 펼쳐지고, 용이 있었다.
“이런 장난감은 네게 필요 없지 않나.”
유은우가 떨어뜨린 총을, 용이 꼬리로 탁 쳤다. 총이 툭 하고 유은우의 군화에 부딪혔다.
“나는 1000년 전, 막 성체가 되었을 때 여러 갈래로 찢기고 말았어. 그때부터 쭉 흘러나온 피가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달라붙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특히 교류가 있었던 종인 인간에게 내 피가 많이 고여 버렸지. 그래서 마치 계약한 듯한 효과를 내는 거야. 저런 조잡한 쇳덩이로 온을 조작하기에 이르러, 뭐랄까, 세상일은 참 알 수가 없지.”
유은우는 발치에 떨어진 총을 응시했다. 환각이 아니다. 그 두려움이 먼저였다. 환각이, 총을 움직일 수는 없는 거겠지. 그럼 이건 뭘까. 나 이미 죽은 걸까. 아니면 어디선가 정신을 잃고 꾸는 꿈인가. 그럼 정윤환이 홀로 뛰어내린 것도, 서재희가 마지막 보호칩을 넘긴 것도 전부 없던 게 되는 걸까. 만약 간절함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몇백 년 전으로 건너뛸 수 있을 정도로, 유은우는 맹렬하게 소원했다.
그러나 살갗에 닿는 모래 바람은 선명하게 따가웠다.
“온디딤은 어디 갔지?”
용은 어느새 소름 끼치도록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용이 앙상한 앞발을 내밀어 유은우의 오른쪽 손목을 탁탁 내리쳤다. 손목은 시계 없이 검붉게 부어 있었다. 모함의 함교를 부수고 나서 시계가 어찌 되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깝구나. 네 아비가 쓰던 건데.”
유은우는 새파랗게 굳어 용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용이 다시 한번 비쩍 마른 주둥이로 총을 가리켰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넌 온디딤을 쓸 수 있으면서 왜 저런 쓰레기를 쥐고 다니는 거냐. 내 심장을 지녀 온과 완벽히 동조할 수 있을 텐데.”
“어?”
가슴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왜 기억을 못 하는 거지? 네 아비가 죽으면서 내 심장이 네게 전해졌다. 심장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면서 그 기억도 고스란히 전달돼. 너는 무슨 일을 겪었던 거냐? 과거가 아예 백지로구나.”
용이 유은우를 향해 훌쩍 뛰어올랐다. 유은우는 하마터면 손으로 용을 쳐 낼 뻔했다. 용이 유은우의 무릎을 타고 찬찬히 기어 복부로 올라왔다. 깜짝 놀랄 정도로 가벼웠다.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얄팍한 날개를 이따금 팔락이면서 용이 발톱이 부러진 앞발로 유은우의 복부를 차근차근 짚었다. 용이 힘없이 혀를 찼다.
“내 뼈를 집어넣었었구나. 아팠을 거다. 기억이 통째로 날아갈 만도 하지.”
그러더니 용은 가냘픈 몸뚱이를 움직여 몇 발짝 더 기어올랐다. 유은우의 가슴에 안착하여 주둥이를 치켜들었다. 턱에 용의 주둥이 끝이 닿았다.
“그래도 아직 간직하고 있는 게 있구나. 그렇지?”
용의 붉은 눈동자가 번쩍거렸다.
“내 심장 말이야.”
유은우는 잠시간 용과 마주하며 그리 멈춰 있었다.
“내가 네 심장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불안감에 숨이 가빠졌다.
“……용의 심장은 여기 있다고 했어. 1급 보안지역에…….”
“그래. 네가 지금 여기 있구나.”
현기증이 몰려왔다.
“나의 혼은 여기 쭉 머물러 있었지. 널 발견했을 땐 이미 너무나 멀어서 대화가 힘들었다. 네가 잠든 밤에야 겨우 꿈의 형태로 찾아갔지. 운이 좋으면 낮에 환각으로 만나기도 했어. 그리 부드러운 대화는 아니었지? 나도 힘에 부쳐서 말이야. 이 짓도 한 지 너무 오래되어서.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여럿에게 꿈으로 내 고통을 피력해 왔거든. 이 상황을 바꿀 수 있을 만한 자질을 갖춘 세 명에게 말이야.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는 앞날을 내다볼 줄 알거든. 네게도 두 명이 있지? 그들의 꿈에 찾아가 널 이리 데려오라고 끊임없이 말했는데. 막상 네가 기억을 전부 잃어 답답하더구나.”
용이 뒷발을 들더니 마른 나뭇가지 같은 제 뿔 뒤를 털어 냈다.
“내가 잃어버린 기억에 너도 있어?”
용이 기침을 했다.
“역대 심장을 지녔던 사람들의 기억이지. 아주 처음에, 내가 아홉 조각으로 해체되었을 때 나의 마지막 계약자가 정부로부터 내 심장을 빼돌렸어. 노리는 세력으로부터 철저히 숨기기 위해, 삼켜서 제 몸에 숨겼지. 그게 기억의 시작이다.”
용의 숨이 가르랑가르랑 들끓었다.
“계약자는 수하들마저 믿지 못했기 때문에 모두에게 거짓말했어. 사해 어딘가 깊숙한 곳에 숨겨 놓았으며 용의 나머지 조각들을 되찾아 오는 날 자신이 직접 심장을 보관 장소에서 가져오겠노라고. 그리하여 찢긴 조각이 모두 모이면 나는 천천히 회복될 것이라고 했어. 그가 사망했을 때 내 심장은 그의 가장 사랑하는 딸에게 옮겨 갔다. 그의 기억과 함께. 그녀마저 죽었을 땐 친우에게 옮겨 갔지. 사망할 때마다 가장 아끼는 이에게 건너가면서 지금 네게 이른 거야.”
“1000년 동안 그 비밀이 지켜졌다고?”
“가장 사랑하던 이가 목숨 걸고 지키던 것을 받았기 때문이지. 내 심장을 지님으로써 동조율이 100에 달하고 온디딤도 마음껏 부릴 수 있었으나 다들 비밀에 부쳤다. 너처럼 공공연히 드러내지 않았단 말이지.”
“모, 몰랐어. 그럼 나는 너의 계약자인 거야?”
용이 불같이 화를 냈다.
“넌 내 계약자가 아니야! 넌 그저 내 심장을 보관하고 있을 뿐이지. 운반자나 그릇이란 말이다!”
용은 금세 기운이 빠져 버렸다. 데친 시금치처럼 비척거리더니 길게 숨을 토하며 유은우의 가슴에서 미끄러져 허벅지에 툭 똬리를 틀었다.
“이제 나는 그만하고 싶어.”
불길했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용에게서 도무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드디어 새로운 성체가 나타났다. 나는 이 질긴 생을 이만 끝내고 싶어. 내 잃어버린 조각들을 모두 끼워 맞춰서 회복할 여유 따윈 남아 있지 않아. 나는 이미 1000년 넘게 고통받았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매 순간이 끔찍했어. 이제 나 말고 다른 용이 생겼으니 이만 죽고 싶어.”
‘용은 수명이 1000년이야. 그 전에 용이 죽는 방법은 단 하나, 자살뿐이야.’
유은우는 이 불안의 정체를 깨달았다.
“지금 나보고 죽으라는 거야?”
“너는 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걸. 나는 널 알아.”
용이 온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왜 새로운 성체가 이 구역을 빙빙 맴도는 줄 알아? 바로 내가, 용의 혼이 이곳에 서려 있기 때문이야. 새로운 성체가 특정 지점에만 머무를 때 손해 보는 건 너희 인간이지. 온의 정화가 그만큼 늦어질 테니까. 용이 대지 이곳저곳을 누비며 오염된 온을 빠르게 정상화하면 할수록 너희 인간들에게 이득 아닌가?”
용이 구겨진 우산 같은 날개를 활짝 펼쳤다.
“이대로 있으면 나는 최소 2년은 더 버티게 돼. 그동안 새 성체는 멍청하게 동족의 기운을 좇으며 이 근방만 맴돌 테고, 사해는 반의반도 채 회복이 되지 않을 테지. 너희 인간들이 발붙일 대지가 턱없이 부족할 거다. 뻔한 결말이지. 사실 나는 상관없어. 너희가 어떻게 되든 말든. 그러나 이 정도 이용당해 주었다면 나 또한 죽음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날 수단으로 사용해서?”
“물론 네 선택이지. 나는 네 손에 칼을 쥐여 줄 수도, 네 심장을 뽑아낼 수도 없어. 하지만 넌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잖아. 그렇지?”
용이 유은우를 직시했다.
“자, 이제 선택해.”
숨을 들이켰다. 전신이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정신을 차리니 형편없이 쓰러져 있었다. 폭발음과 비명 소리로 귀가 먹먹했고, 농밀한 피비린내로 후각은 이미 마비되었다. 몸을 일으키기 위해 땅을 짚었다. 물컹하여 흠칫했다.
시체가 널려 있었다.
학생도 있고 군인도 있었다. 수많은 낯선 얼굴들 사이로 드문드문 낯익은 이들이 보였다. 한때 유은우와 함께 군에 소속되었던 이들, 최근 학교에서 오다가다 마주쳤던 이들이나 혹은 그 일부가 포개어지거나 흩어져 대지를 메웠다.
단순한 악몽이었을까. 그리 치부할 수 없다는 건 유은우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용이 건드렸던 그 각도 그대로, 총이 발치에 놓여 있었다.
‘후보들의 꿈은 예사가 아니야. 우리에게 그것은 확신이다.’
용은 선택하라고 했다. 그러나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아끼던 사람들의 희생을 떠올리면, 그들이 희생을 치러야 했던 이유를 생각하면,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은우는 발치에서 총을 주웠다.
그러나 두려웠다. 손은 떨려 자꾸만 총을 놓쳤다.
여태 삶만 바라보고 달려왔다. 남들만큼의 자유를 원했고, 더는 목숨을 위협받고 싶지 않았기에.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그 모든 노력이 지금 와서 무색했다. 그러나 다만 두려워 삶을 택한다고 해서 정말 그것이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숨은 붙어 있어도 하루하루가 죽은 것처럼 텅 비어 여백뿐일 텐데. 정윤환이 난간을 넘던 순간이, 서재희가 보호칩을 넘겨주던 찰나가, 유은우의 삶을 지금 이 순간에 못 박아 더는 나아갈 수 없도록 할 터였다.
쾅!
폭음이 거칠었다. 지척이었다. 무언가가 이쪽으로 사납게 날아왔다. 유은우는 총을 움켜쥐고 몸을 굴려 간신히 피했다. 숨을 몰아쉬며 정신없이 돌아보니, 불에 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가, 유은우가 있었던 자리에 이상한 각도로 거꾸러져 있었다. 그 너머로 반란군의 부속선 하나가 느리게 추락하는 것이 보였다.
만약 서재희가 살아 있다면.
재와 불티가 전신을 휩쓸었다.
서재희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내가 죽임을 당한다면.
가슴이 꼭 죄었다.
서재희가 살아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정윤환이나 김서혁의 생사가 불투명한 것만큼이나.
내 눈으로 죽은 걸 본 건 아니잖아. 아직 아무도 안 죽었을 수도 있잖아.
만약 서재희가 살아 있다면, 유은우가 자살이 아닌 형태로 죽는 순간, 용의 심장은 서재희에게 전해질 터였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무거운 짐을 지게 할 수는 없었다.
유은우는 부르튼 손으로 젖은 눈가를 거칠게 닦아 냈다. 이를 악물었다. 적의 표적이 되지 않도록 몸을 낮추었다. 납작 엎드려 기다시피 하여 폭격으로 만들어진 낮은 지대에 몸을 숨겼다. 귀가 먹먹했다. 피를 먹어 붉은 모래 구덩이 안쪽에 등을 붙였다.
손에 땀이 서려 총은 자꾸만 미끄러졌다. 두 손으로 총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설계자 없이는 단 한 번도 당겨 본 적 없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설계를 하지 못해 늘 밖으로만 향하던 총구로 제 가슴을 짓눌렀다. 심장을 겨냥했다. 두려워 몸을 웅크렸다. 바짝 세운 무릎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눈물이 차가운 총신을 적셨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 심장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걸까. 아니면 두 개의 심장이 뛰고 있는 걸까. 알 수 없었다.
‘꼭 살아.’
서재희의 마지막 말이 유언이 아니기를. 누군가 살아야 한다면 내가 아닌 그 사람이 살기를. 누군가 용의 심장을 안고 죽어야 한다면 그게 나이기를.
유은우는 눈을 꼭 감았다. 혀로 볼 안쪽에 붙은 보호칩을 더듬었다. 할 수 있어. 이를 악물었다. 숨을 참았다. 총을 고쳐 쥐었다.
방아쇠를 당겼다.
탕!
가슴을 관통하는 충격은 날카로웠다. 오감이 닫히며 오로지 고통에 집중될 찰나였다.
검은 용이 땅을 찢으며 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