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0. 단죄 (10/15)

010. 단죄

“우리 이제 어떡해?”

손도연이 작게 말했다. 유은우는 손도연의 무릎을 베고 몸을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 대리석 바닥은 차갑고 딱딱했다. 유은우는 제 얼굴을 완전히 덮고 있는 피 묻은 옷을 손으로 살짝 들추었다. 손도연이 유은우의 얼굴을 가린답시고 대합실 바닥에서 급하게 주워 온 옷이었다. 유은우는 옷 틈으로 손도연을 올려다보면서 속삭였다.

“애들이 준 리스트 다 시도해 봤다고 했지?”

“아무도 안 만나 줘.”

전교생이 합심하여 만든 리스트가 있었다. 유은우와 손도연이 기차에 몰래 탑승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줄 거라고 했다. 어떤 3학년은 제 아버지가 기관사라고 했고, 어떤 5학년은 제 이모가 역장이라고 했다. 이름만 대면 도와줄 거라고 호언장담하며 리스트를 주기에, 손도연이 잘 챙겨 두었다가 유은우보다 먼저 역에 도착한 김에 열심히 문을 두드리며 돌아다녔으나 죄 허탕 쳤다고 했다.

“나 말고도 역장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전서경 선배 이름을 대면서 ‘역장님 좀 만나게 해 주세요.’ 고함을 쳤는데 들은 척도 안 하더라. 진짜 못 들었는지도 몰라. 어떤 남자가 소화기로 역장실 문을 쾅쾅 내리치면서 당장 제8도시로 보내 달라고 난리를 치고 있었거든.”

손도연의 목소리는, 마스크를 끼고 있는 데다가 왁자한 대합실의 소음까지 겹쳐 잘 들리지도 않았다. 손도연이 지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우리 행운은 여기서 끝난 걸까?”

“이제 시작이지.”

유은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초조했다. 학교에서 중립지대 경계를 빠져나오자마자 폭발로 손도연과 떨어지며 이미 위기를 겪었다. 무사히 살아서 기차역에서 재회한 것만 해도 천운이었다. 심지어 유은우는 학교에서 기차역까지 마스크만 쓰고 뛰어왔음에도 아무에게도 검문 받지 않았다. 평생 쓸 운을 소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리스트 줘 봐.”

손도연이 청바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쪽지를 꺼내 내밀었다. 유은우는 쪽지를 펼쳐 보았다. 말 한마디로 당장에 기차를 움직일 만한 고위 관계자 대여섯 명이 적혀 있었다. 이름마다 가위표가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아래, 아무런 표시도 없는 이름이 하나 쓰여 있었다.

청소부 최정식(1학년 최성일 부).

유은우는 하마터면 벌떡 일어날 뻔했다. 반쯤 일으킨 몸을 얼른 다시 눕히며 낮게 말했다.

“야, 손도연! 여기 하나 남았는데?”

“아, 성일이 아버님? 지나가는 역무원들한테 물어봤는데, 여기 청소부들은 하청 업체에서 나온 사람들이라 자기들도 잘 모른대. 하청 업체 연락처는 행정실에 문의하라는데 거기도 사람이 바글바글 몰려 있어서.”

“같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누군지 정보가 없다고?”

“그게 방침이래. 하청 업체 직원 복지 때문에 얼마 전에 기사가 크게 났나 봐. 계속 나를 피하더라고. 그리고…….”

손도연은 괴로운 표정이었다.

“……성일이는 죽었어. 우리 역사 연구 모임 멤버였는데, 이번에 우편물 발송 명단에도 포함되어 있더라. 이미 아들이 죽어 버렸는데 그 가족에게 위험부담까지 지우고 싶지 않아. 상대는 철도 회사에서 관리도 안 해 주는 하청 업체 청소부야. 다른 사람들은 어느 정도 지위가 있어 안전이 보장된다지만, 청소부는 우리 때문에 직장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잃을 수 있어. 그쪽 도움은 받고 싶지 않아.”

유은우는 잠자코 이프를 눌러 보았다. 학교에서 저장해 온 기차역 상세 지도가 깨알같이 떠올랐다.

“일단 기차 승강장으로 가 볼까? 여객 운송은 안 해도 화물 같은 건 움직일지도 몰라. 특히 제5도시는 식량 자급이 안 돼서 정기적으로 제1도시에서 배급해 주잖…….”

유은우는 말을 더 이을 수가 없었다. 손도연이 유은우가 들추고 있던 옷을 황급히 눌러 덮었기 때문이다. 유은우는 붉게 물든 옷 밑에 갇혀 눈만 도르륵 굴렸다. 위로 그림자가 졌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부상이 심한가요? 가린 것 좀 치워 주세요. 한번 봐 드릴게요.”

손도연이 냉큼 유은우를 끌어안았다. 유은우는 긴장하여 숨을 참았다가, 최대한 편안하게 보여야 함을 깨닫고 찬찬히 호흡하기 시작했다. 옷에 묻은, 누구 것인지 모를 피 냄새가 역했다.

손도연이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까 응급조치 받았습니다.”

“그래요? 피가 많이 묻어 있어서…….”

“괜찮습니다. 아까는 피가 좀 났었는데 지혈제 받고 금방 멈췄습니다. 조금만 안정을 취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려고요. 저희는 원래 제1도시 시민인데 잠깐 할머니 댁에 가려고 나왔던 거라서.”

손도연의 어색한 거짓말에도 상대방은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합실 사방이 부상자였다. 울고 비명을 지르며 실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래도 또박또박 대답하는 손도연은 지극히 괜찮아 보였다.

“여러 차례 방송했다시피 오늘부터 기차 운행이 전면 중지됩니다. 언제 운행을 재개할지는 확실치 않아요. 한 시간 후가 될지, 내일이 될지, 아니면 한 달 뒤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여기서 안 주무실 거면 대기자 명단에도 이름 안 올릴 건가요?”

손도연이 거듭 괜찮다고 하자 인기척은 곧 멀어졌다. 유은우는 손도연에게 향하던 몸을 바깥쪽으로 돌렸다. 옷을 슬쩍 들춰 보았다.

제1도시 기차역 대합실은 전쟁 중의 대피소를 방불케 했다.

부상자와 아닌 자가 뒤섞여, 의자는 물론 바닥까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 사이를 자원봉사자들이 요령 있게 누비고 다니며 간편식과 물을 나눠 주고 있었다. 특히 녹색 어깨띠를 두른 의료봉사자들은 응급처치에 여념이 없었다. 누군가 병원 응급선은 아직도 도착 안 했냐며 고함을 쳤고, 지척에선 방금 사람이 죽었다며 비명을 질렀다. 역무원만 나타났다 하면 사람들이 달려가 그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대체 언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역무원은 고개를 저으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

“가시관령이 발효되면 모든 대중교통은 중단됩니다. 도시연합장의 승인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전광판의 모든 기차편은 결항이었다.

유은우는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내며 물었다.

“아까 그 사람 확실히 갔지? 나 보고 유은우 아니냐면서 소리 지르던 남자.”

“네가 때려서 기절시킨 사람? 들것에 실려서 나갔어. 다시 올 것 같진 않은데.”

“좋아. 이 정도 몸 사렸으면 이제 아무도 우리 신경 안 쓰겠지. 움직이자.”

유은우는 옷 아래에서 손을 움직여 마스크를 썼다. 옷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아예 일어서려는 유은우를, 손도연이 잡아당겨 주저앉혔다. 손도연이 눈짓을 했다.

“잠깐만. 저기 너 또 나온다.”

누군가 이프로 허공에 가로세로 1미터가량의 화면을 띄워 놓고 있었다. 촬영한 카메라가 손상되었는지 드문드문 지지직거렸으나 충분히 식별 가능한 영상이었다.

― ……입수한 영상에 따르면 서재희는 중앙수사부에서 괴한의 공격을 받았으나 당시 사망에 이르진 않았으며, 적어도 오늘 오후 3시경에는 도시연합 중앙학교에 머물렀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유은우는 도로 손도연 무릎으로 엎어져 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서재희가 발 못 빼게 만들 심산으로 대중 앞에 큰마음 먹고 벌인 일이었으나, 제 눈으로 다시 보니 새삼 속이 홧홧했다. 손도연이 유은우의 귀에 속삭였다.

“너 정윤환 선배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 난 너 오기 전에 저거 보고 누가 영상 가짜로 만든 줄 알았잖아.”

유은우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괜히 마스크만 고쳐 썼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 서재희와 유은우가 함께 있는 장면이 포착되었습니다. 지난번에 서재희는 서신을 통해 유은우가 정윤환과 연인 사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상을 미루어 짐작하면 오히려 서재희 본인이 유은우와 각별한 사이로 보입니다. 이에 관해 시민들은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서재희는 차예원과 정략 약혼한 사이이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선을 긋는 모습이 빈번하게 목격되었으므로 서재희는 차예원과 정치적 관계일 뿐으로, 본인이 도시연합의 표적이 될 것을 예상하고 유은우의 안위를 정윤환에게 맡긴 거라는 의견이 우세합니다. 그러나 서재희의 우려와 달리 사실상 둘의 관계가 드러난 지금, 여론이 서재희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일은 없어 보입니다. 오늘 오후 학교로부터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온 1학년 주성훈 학생의 증언에 의하면 유은우는 군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교내에서 정윤환을 도와 학생들의 참여를 주도하였으며…….

유은우가 손도연에게 속삭였다.

“우리한테 호의적인데?”

“반정부 언론 중 가장 큰 곳이야. 정선재 의원이라고 알아? 정윤환 선배 아버지인데, 저 언론사를 처음으로 만들었거든. 저게 반응이 좋아서 정치판에 뛰어들었고 지금은 반정부를 대표해. 차인호와 노선이 반대니까 당연히 우리한테 좋은 소리만 할 수밖에. 더구나 자기 아들 생사가 걸려 있는데. 다른 언론은 말도 못 해. 우릴 보고 반란군 앞잡이라나 뭐라나. 당장 사해로 추방하라고 난리야.”

유은우는 주의 깊게 주위를 돌아보았다. 여기저기에서 방송이 재생되고 있었다. 대부분이 같은 영상에 다른 멘트였으나 방향은 비슷했다. 적어도 시민들은 도시연합이 아닌 학생들 편으로 보였다.

― 다만 현재 도시연합 중앙학교 재학생들의 이프는 통신이 차단되어 개별적인 연락이 불가합니다. 차예원 학생회장은 학생들을 대표하여 현 정부의 비윤리적이고 폐쇄적인 행보에 반기를 들겠다고 선언하였으며, 도시연합이 철저히 은폐해 왔던 1급 보안지역에 진입하여 불일치하는 온 오염도 수치를 직접 측정하고 보안지역 내부를 촬영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실제로 서재희의 지휘 아래 1000여 명의 학생들이 학교 모함에 몸을 싣고 사해로 이동 중이며, 직위가 해제된 전 도시연합 정예군이 그 세력에 합류하였다는 추측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용 연구소에서는 반란군이 학생들을 선동하는 것을 막아 달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지강현 용 연구소장은 성체가 된 용이 1급 보안지역을 중심으로 머물고 있으므로, 학생들이 함부로 접근하고 도시연합이 이를 통제하기 위해 무력을 행사한다면 용의 포획에 어려움이 생길 뿐 아니라 귀중한 성체가 훼손될 수 있다고 염려하고 있습니다.

― ……제5도시 용 연구소 앞에서 시민 간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용 비늘 의혹에 대해 해명하라고 요구하는 서재희 진상 규명 시민 대책 위원회와 용 연구소의 비밀 보장과 빠른 성체 포획을 지지하는 신도시 건설 연대가 언쟁을 벌이다 흥분한 동조자 한 명이 총을 빼어 연사했습니다. 이 총격전으로 현장을 주도하던 시민단체장 김모 씨 등 마흔 명이 숨지고, 쉰아홉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주혜선 제5도시관리국장은…….

― ……한때 김서혁의 전리품이었으나 군에서 학교로 옮겨진 후 소속이 불분명한 유은우의 행보에 우리 모두가 주목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유은우는 현재 두 사람과 염문설이 돌고 있습니다. 유은우는 출신 자체도 특이한데 상대도 평범하진 않습니다. 한 명은 정선재 의원의 아들 정윤환, 다른 한 명은 도시연합장의 딸 차예원과 약혼한 서재희인데요. 무려 매년 검색어 순위에서 유수한 연예인을 제치며 상위권을 차지해 온 인물들 아닙니까? 유은우가 실제로 누구와 연인인가에 따라 그녀에 대한 대중들의 여론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정윤환과 연인으로 학생들을 이끌었다고 알려졌을 때는 유은우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라는 소리가 높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오후 3시경 서재희와 각별한 사이임을 확신케하는 영상이 유출되고 난 후에는 여론이 크게 부정적으로 변했습니다. 첫째, 유은우가 제 안위를 꾀하기 위해 두 사람을 이용하고 있다는 가설. 둘째, 유은우가 서재희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차예원이 설 자리가 없도록 하여 혁명이 성공할 경우 모든 공을 가로채기 위함이라는 가설입니다. 저는 특히 후자에 아주 신빙성이 있다는 의견인데요. 실제로 이 영상을 보시면 유은우가 먼저 서재희의 멱살을 잡고…….

― ……도시연합에서는 낙원의 이론 시스템 존재 자체를 강력히 부인하고 있습니다. 차인호 도시연합장은 오늘 기자회견을 열어 김서혁이 임유현의 죽음을 기회 삼아 반란군과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 학생들을 선동하고 있으니, 이럴 때일수록 시민들은 침착하게 일상을 영위하고 수상한 자가 있다면 즉시 경찰에 신고를…….

― ……도시연합 중앙학교 4학년 최준 학생은 자신이 소년 가장이기 때문에 차예원의 배려를 받아 이번 혁명에 가담치 못했다고 아쉬움을 표했으며, 시민들에게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고 방송국으로 연락을 취해 왔습니다. 최준은 지난 22일 사망한 임유현 전 도시연합 중앙학교장이 기존의 도시들을 식민지화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교장실에서 발견한 각종 자료를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데요. 낙원의 이론으로 추출한 명단도 있다고 합니다. 전화 연결을 해 보겠습니다. 최준 학생?

― ……전문가의 의견에 따르면 용의 심장은 너무나 오래전에 분실되었기 때문에 현재 온전한 형태를 하고 있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심장이란 생물의 내부에 안착하고 있을 때 비로소 기능한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현재 어떤 생명체에 기생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숙주는 인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나 옛 문헌에 따르면 반란군의 수장이 지니고 있었을 확률이 가장 높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현재 반란군이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데요. 이정인 의원은 김서혁 전 총사령관이 사해에서 용의 심장을 찾을 때 난민의 정보력을 이용하기 위하여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난민 인권에 힘쓴다는 의견을 꾸준히 피력해 왔습니다. 이정인 의원은 김서혁이야말로 주무대가 사해였던 만큼 용의 심장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쥐고 있는 자이므로, 도시연합장에게 김서혁의 처형 판결을 숙고해 달라고 청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서혁이 직위 해제 직전에 서재희를 도시연합 승인 없이 학교로 교묘히 복귀시키고 현재는 도시연합 중앙학교에 합류하는 등의 파격 행보를 보이고 있으므로, 차인호가 김서혁 전 총사령관의 쿠데타 혐의를 묵인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습니다.

― 상생 시민 연대에서는 낙원의 이론이 부재하다는 도시연합의 주장 자체에 의심을 표하고 있으며, 도시연합이 그간 용과 온에 관한 핵심 자료를 통제해 온 것에 해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도시연합장 차인호는 논란의 불씨를 일으킨 서재희를 비롯한 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겠다고 선언하였으나, 가시관령 발효로 민간인의 신분이 된 김서혁을 비롯한 도시연합 정예군이 학생을 지지하는 상황에서 과연 정부가 군을 효과적으로 통솔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 ……가시관령이 발효됨에 따라 모든 대중교통은 일시 중단되며 도시연합장의 승인이 있어야만 재개될 수 있습니다. 도시연합 중앙학교에서 벌어진 학생들의 폭동을 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그들 중 다수가 응급치료만 받고 기차역으로 모여들어 고향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현장 리포터를 연결하겠습니다…….

어쩌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조금씩 파고든 것뿐인데 정신을 차리니 세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터질 때가 되어 터진 것인지, 내가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지, 이 변화의 끝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일지,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었다. 판단은 후세의 몫이었다. 유은우는 손도연에게 눈짓을 했다.

“나가자.”

“어디로?”

“승강장.”

유은우는 손도연의 손을 꼭 잡고, 서거나 앉거나 누운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매표소며 복도며 계단이며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아예 멈춰 버린 에스컬레이터를 걸어서 아래로 내려갔다.

3층 층계참에 도착했을 때였다. 이상하게 소란했다. 여태 귀 아프게 들어 왔던 군중의 웅성임과는 달랐다. 한 사람이 버럭버럭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사과를 제대로 하라고요! 이거 다 어쩔 거야?”

어디서 싸우나 보네. 유은우는 흘려들으며 부지런히 내려갔다. 그러나 잡고 있던 손도연의 손이 덜컥 멈추어 몇 걸음 못 가고 뒤를 돌아보았다. 손도연이 한쪽 손으로 에스컬레이터 난간을 짚고 싸움이 일어난 곳을 빤히 보고 있었다. 유은우는 잡은 손을 흔들었다.

“도연아. 손도연!”

손도연은 유은우를 돌아보지 않았다. 유은우는 손도연의 시선을 따라갔다.

말라 쪼그라든 남자가 연신 허리를 숙이는 뒷모습이 보였다. 파란 작업복을 입고 파란 모자를 쓰고 거친 손으로 물걸레를 쥐고 있었다. 청소부 옆엔 전원이 꺼진 로봇 청소기가 있었고, 바닥엔 음료가 쏟아져 있었다. 그 앞에 노부인이 서서 손끝으로 핸드백을 들고 있었다. 핸드백에 음료가 흥건했고, 유은우가 지켜보는 동안에도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주위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었으나 힐끔거릴 뿐 나서서 중재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린 여학생 하나가 쭈뼛쭈뼛 손을 들었다.

“저기요, 할머니. 청소부 아저씨가 비켜 달라고 했는데 할머니가 안 비키셨잖아요…….”

그 옆의 다른 젊은 여자가 딱딱하게 말했다.

“안내 방송 못 들었어요? 로봇 청소기가 돌아다니면서 소지품을 칠 수도 있으니까 음료수 같은 거 벤치에 놓지 말라고 하잖아요. 본인이 가방 옆에 음료수 두고 전화한다고 신경 안 쓰고 있었으면서, 청소부한테 뭐라고 할 일이에요?”

노부인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래서 청소부는 잘못이 없다 이거야? 아무리 로봇 청소기가 혼자서 알아서 한다고 해도, 뒤에서 부지런히 살피고 불미스러운 일이 안 일어나게 바로바로 수동 조작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이래서 청소부들을 싹 다 없애야 해. 어차피 로봇 청소기 혼자 내버려두고 저희들은 두 손 놓고 놀면서 돈이나 따박따박 받아먹다니. 이거 다 당신네들 세금이야. 알아?”

어떤 상황인지 눈에 선했다. 손도연 성격상 어떻게 행동할지도. 그리고 얼마나 시간을 지체할지도.

유은우는 재빨리 올라가 손도연의 어깨를 감싸 돌리려 애썼다.

“도연아, 제발. 우리 시간 없어.”

“있어 봐.”

손도연이 유은우의 손을 뿌리쳤다. 유은우는 손도연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우리 가야 돼.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저게 사소해 보여? 저런 게 쌓여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는 거 아냐.”

손도연은 단호하게 도로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유은우는 한숨 돌릴 새도 없이 다급히 그 뒤를 쫓아갔다.

청소부가 카트를 뒤적이더니 하얗고 깨끗한 마른 수건을 꺼냈다. 그가 수건을 내밀며 핸드백을 닦으려고 하자 노부인이 질색을 하며 그를 밀쳤다. 바닥에 흥건한 음료 때문에 안 그래도 구부정한 청소부는 그대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청소 카트가 함께 엎어지면서 안에 담긴 청소 도구들이 널브러졌다. 순간 노부인의 눈에 미안한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입을 꾹 다물고 한 걸음 물러서기만 했다.

손도연이 폭풍처럼 달려가 청소 카트를 바로 세우고 쏟아진 청소 용품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 틈에 유은우는 넘어진 청소부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청소부는 갑자기 넘어지는 바람에 많이 놀랐는지 정신이 없어 보였다. 유은우는 일단 여기서 벗어나게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대신 카트를 잡았다. 카트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무거웠다. 로봇 청소기가 돌아다니는 시대에 카트 바퀴는 수십 년을 묵은 듯 뻑뻑했다. 유은우는 낑낑거리며 카트를 밀어 에스컬레이터 반대쪽에서 멈춰 섰다. 재빨리 주위를 둘러본 뒤 청소부를 바라보았다. 파란 작업복 어디에도 명찰 비슷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바짝 붙어 속삭였다.

“저기 혹시 지금 화물 기차 운행하나요?”

청소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은우는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에스컬레이터 건너편에서 노부인에게 조곤조곤 무어라 일장 연설을 해 대는 손도연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유은우는 속삭여 물었다.

“제5도시로 가는 기차도 있나요?”

청소부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유은우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제일 빠른 시간대가 언제죠? 승강장은요?”

청소부가 왼쪽 손목의 이프를 눌렀다. 정부에서 무상으로 보급한 구형인지, 작고 흐린 메모창이 지지직거리며 떠올랐다. 청소부가 거기에 대고 무어라 쓰더니 유은우 눈앞에 보였다.

[10분 뒤. 3번 승강장.]

유은우는 청소부의 손을 와락 부여잡았다. 손은 거칠었으나 따뜻하여, 유은우는 용기를 얻었다.

“저기 정말 죄송한데, 제가 거기 좀 탈 수 있을까요? 제가 제5도시에 꼭 가야 하거든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검사를 안 하는 화물칸이라든가 좀 알려 주시면…….”

청소부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유은우에게 손이 잡힌 채 유은우의 어깨 너머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잡고 있는 그의 두 손이 설핏 떨려 유은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손도연이 서 있었다. 그녀가 쓰고 있던 마스크를 당겨 내렸다. 동그란 얼굴을 온전히 드러내고, 손도연이 어렵게 한마디를 뱉었다.

“……아저씨.”

유은우는 멍하니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제야 카트에 걸쳐진 형광색 조끼에 달려 있는 명찰이 보였다. 최정식. 손도연의 시선이 최정식의 마른 낯과 까칠하게 튼 손을 지나 청테이프로 칭칭 동여맨 낡은 안전화에 멎었다. 손도연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최정식은 눈이 붉어진 채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는 이내 유은우를 바라보았다. 그가 손가락으로 유은우와 손도연을 번갈아 가리켰다. 유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예요. 저희는 제5도시로 가야 합니다. 용 연구소요.”

그때였다. 최정식의 이프가 울렸다. 호출이었다. 최정식은 충혈된 눈으로 이프에 떠오른 알림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내 그가 에스컬레이터 아래에 있는 창고 문을 열었다. 청소 카트 서너 개만 들어가도 꽉 찰 것 같은 협소한 공간엔 청소부가 쉴 수 있도록 플라스틱 의자 두 개와 커피포트가 있었다. 구석에 놓인 박스는 반쯤 뜯어져 안에 들어 있는 간편식이 보였다.

최정식이 카트를 창고 안에 밀어 넣고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유은우는 훌쩍이는 손도연을 다독이며 따라 들어갔다. 문을 닫자마자 최정식은 즉각 카트에 가득 차 있던 쓰레기봉투를 노련하게 끄집어냈다. 그는 까만 새 쓰레기봉투를 꺼내 아래쪽을 찢어 구멍을 만들더니 카트에 깔았다. 그러고는 의자를 끌어다가 카트 옆에 붙이고 손짓을 했다.

유은우는 의자를 밟고 올라서서 카트 안으로 들어갔다. 손도연이 입을 꾹 다물고 따라 들어왔다. 두 사람이 웅크리니 꽉 찼다. 최정식은 그 위로 쓰레기를 적당히 넣은 까만 쓰레기봉투를 얹었다. 묵직해지고 어두워졌다. 그러나 아래에 뚫린 구멍이 있어 숨을 쉴 수는 있었다.

카트가 움직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 덜덜거리며 바퀴가 굴렀다.

유은우는 머리에 쓰레기를 인 채 손도연을 안고 등을 쓸어 주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소리. 한참을 아래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들리던 소음이 점차 잦아들었다. 문이 열렸다. 차가운 적막. 인적이 드물어 자연스러운 정적이 아니라 긴장된 호흡 사이로 숙련된 침묵이 있었다. 누군가 날카롭게 일갈했다.

“누가 마음대로 사람을 들이랬나? 당장 내보내!”

카트가 덜컹 멈추어 섰다. 유은우는 손톱을 세워 카트 옆면 비닐을 살짝 뜯었다. 틈으로 빛이 들어왔다. 승강장이었다. 정장을 입은 여자 둘과 남자 둘, 그리고 제복에 기관사 명찰을 단 여자 하나, 부기관사 명찰을 단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누군가는 불안한 표정을, 누군가는 차가운 낯을 하고 있었다. 유은우는 숨을 죽였다. 그들 뒤로 검은 장벽처럼 펼쳐져 있는 것은 거대한 화물 기차였다.

정장을 입은 남자가 정장을 입은 여자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역장님, 주혜선 제5도시관리국장님께서 직접 물건을 받으실 겁니다. 시간이 촉박하여 미리 갈무리할 틈이 없었습니다. 이동하는 동안만이라도 정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대로 보내면 화물칸을 열자마자 악취가 날 테고 도시연합장의 지시에 불만이 있다고 비춰질 염려가 있습니다. 숨도 크게 쉬지 말아야 할 때입니다. 괜한 오해를 사서는 안 됩니다. 겨우 청소부 하나입니다…….”

역장이라고 불린 여자가 이쪽을 노려보았다. 눈빛이 얼마나 매서운지 쓰레기봉투를 뚫고 안을 들여다보듯 섬뜩했다. 역장이 말했다.

“최소 인원만이야. 기관사, 부기관사, 이렇게 둘만 탑승한다.”

“입이 무거운 자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요. 하나뿐인 아들도 죽어 연고도 없답니다. 무려 10년이나 이자가 이동 중 관리를 쭉 도맡아 왔습니다. 적임자입니다. 그 끔찍한 몰골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묵묵히 잘해 왔습니다.”

“우릴 우습게 보는군. 애초에 그쪽에서 해야 할 일이었다. 우리가 수고를 떠맡은 셈이 되었어.”

역장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최정식의 얼굴을 정확히 쏘아보는 것 같았다. 뒤에서 몇 사람이 거들어 말했다.

“이미 우리가 인도받았고 수송만 남았습니다. 화물칸이 딱 열렸을 때 그분들이 전부 다 나와서 바로 물건을 확인할 텐데, 피가 흥건하고 고약한 냄새가 나면 높은 분들 보기 안 좋지 않습니까…….”

“역장님, 연구소에 고일태 교수도 같이 있을 겁니다. 평소 온화한 분이시지만 현재 중앙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쿠데타에 가담하여 많이 예민한 거 역장님도 아시지요? 비위가 약하셔서 한마디 하실지도 모릅니다. 예전에 용 연구소 컨베이어 벨트 보시고는 오찬도 마다하셨어요.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젠 용 모양 카스텔라도 안 드신다고…….”

역장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장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이쪽을 향해 다급한 손짓을 했다. 카트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퀴가 거칠게 굴러 그들 앞에 멈추어 섰다. 거리가 가까워져 이제 유은우는 찢긴 비닐 틈으로 기관사의 갈색 구두 한 쌍을 보는 게 고작이었다. 목소리만 들렸다.

“관리를 한답시고 타는 청소부가 더 더럽지 않냐 이 말이야. 내 눈에 안 보인다고 직원 관리를 이따위로 하나? 일을 이렇게 하니 일용직 복지니 뭐니 임기 초기부터 우리 책임도 아닌 기사가 나는 거 아냐.”

“죄송합니다. 하청 업체를 통해 청소부를 관리하는지라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다른 목소리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저, 역장님. 3분 전입니다. 자네 둘은 어서 기관실로 가게. 이 사람은 우리가 알아서 태울 테니까. 정각에 바로 출발하도록. 가시관령이 발효되었으니 보고는 5분 간격이야. 잊지 말고…….”

역장이 씹어뱉듯 말했다.

“바로 태워. 대신, 연구소에 도착했을 때는 옆 칸으로 피해서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말라고 해.”

“그건 물론입니다. 자네도 들었지? 좋아, 그럼 어서 타게. 입은 무겁게 손은 빠르게. 여러 번 해 봤으니 이번에도 잘하리라 믿어. 잘 부탁하네.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시는 이런 일 안 맡길 테니까. 어서 밀고 들어가. 이보게, 여기 카트 미는 것 좀 도와줘! 시간이 없어…….”

카트가 황급히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크게 덜컹거리며 멈췄다. 바닥이 덜덜덜 크게 진동하고 있었다. 이내 문이 철컥 닫히는 소리가 났다. 카트는 멈췄으나 공간 전체가 서서히 움직이는 느낌이 났다. 점차 빨라졌다. 속도가 안정되자 머리 위를 누르고 있던 쓰레기봉투가 훅 들려 나갔다. 숨통이 트이는 것도 잠시, 유은우는 아주 고약한 냄새를 맡았다. 사해에서 전투를 하며 수없이 맡은 냄새였으나 훨씬 농밀했다.

거대한 그늘에 들어선 듯 가슴이 선득했다.

유은우는 손도연을 먼저 올려 보내고 카트에서 빠져나왔다. 바닥에 발을 디디고 고개를 드니 손도연의 옆모습이 보였다. 손도연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화물칸은 넓었고, 석탄으로 빚은 듯 사방이 온통 까맸다. 까만 천장, 까만 벽, 까만 바닥. 창은 없었다. 조명은 기이할 정도로 밝았다.

그리고 시체가 그득히 쌓여 있었다. 아직 뜨끈한 피가 흐르는 시체도 있었으나 거의 대부분은 피가 빠져나가 창백했다. 위쪽에 있는 시신들은 비교적 멀쩡했고, 아래에 깔린 것들은 이미 부패가 진행되고 있었다.

손도연이 소매로 입을 막고는 비틀거리며 시체 가까이 다가갔다. 열십자로 겹쳐진 시체들 사이에서 비죽이 튀어나온 팔을, 그 팔에 매달려 있는 라벨을 잡아당겼다. 유은우는 다가가 그것을 읽었다.

27.

그뿐이었다. 이름도 나이도 없었다.

유은우는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 천천히 물러섰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든 시체마다 라벨이 붙어 있었다. 얼핏 보아도 라벨의 숫자는 두 자리를 넘지 않았다.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백했다.

손도연이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은 지 얼마 안 됐어.”

유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학교에서 군이랑 붙었을 때 휘말려서 사망한 시민들 같아.”

“왜 하필 동조자들만 골라내서 제5도시로 수송하는 걸까? 수습해서 유가족에게 돌려주어도 모자랄 판에.”

손도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덧붙였다.

“동조자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정말 귀중한 자원이구나. 재희 선배는 학교에서 동조자의 시신으로 모의 전투실을 가동한다고 했지. 용 연구소라고 해서 그런 시스템이 없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어. 어쩌면 다른 곳도 비슷할지 몰라. 이를테면 대규모 온실이라든가.”

문득 달그락 소리가 났다. 최정식이 카트에서 막대 걸레를 빼고 있었다. 그는 막대 걸레로, 기차의 움직임에 따라 바닥을 미끄러지는 피를 능숙히 훔쳐 내었다. 그렇게 얼추 정리한 다음, 최정식은 옆 화물칸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고 그리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옆 칸은 지극히 평범했다. 반듯한 박스나 곡물이 가득 든 자루 따위가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자리를 많이 차지한 것은 로봇 청소기였다. 성인 두 명은 족히 들어갈 만한 대형으로 일고여덟 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최정식은 청소기 뒷부분을 잡아당겨 열고 오물통을 빼냈다. 청소기 안에 빈 공간이 생겼다. 최정식이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유은우와 손도연이 머뭇거리자 그는 재빨리 이프를 켜서 메시지를 써 보였다.

[용 연구소 납품 청소기. 기차가 도착하면 용 연구소 내로 반입 예정.]

손도연이 먼저 조심스레 청소기 안에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최정식이 청소기 뒷부분을 달칵 닫았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다른 청소기를 열고 손짓을 했다. 유은우는 그곳에 들어가 무릎을 안고 앉았다. 청소기 뒷부분이 막 닫히기 전에 다급히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최정식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청소기를 닫자 플라스틱 이음새가 맞물리며 딱 소리가 났다. 캄캄할 거라고 짐작한 내부는 곳곳의 틈에서 스미는 빛으로 제법 환했다. 유은우는 몸을 움직여 그나마 밖이 잘 보이는 공간을 찾아보았다. 안에 먼지가 얼마나 찼는지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청소기 벽면에 세로로 길고 반투명한 부분이 있었다. 눈을 붙이니 바로 옆에 있는 청소기가 보였다. 손도연이 들어간 청소기였다. 소리 내어 불렀다.

“도연아.”

“여기 의외로 잘 보인다.”

대답이 밝았다.

“여기 오는 거, 왜 자원했어?”

줄곧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그러나 손도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뒤에 그녀가 가볍게 웃더니 말했다.

“용이 좋아서.”

진짜 대답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은우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용이 왜 좋아?”

“글쎄.”

하루 종일 용을 끼고 사는 사람치고는 대답이 싱겁다고 생각했을 때, 손도연이 덧붙였다.

“변하지 않는다는 게 좋았어. 그렇게 강하고 아름다운 생명체가 영원할 수 있다는 게. 인간의 삶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데.”

손도연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교장실에서 용 심장박동 수치가 나왔잖아. 확연히 느려지고 있었어. 그걸 보고 나니까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더라. 용도 불사가 아닐 수 있겠구나. 세상 어디에도 영원한 건 없구나. 영원하길 바라는 것만 있을 뿐이지. 가족이 변하는 것도, 가세가 기우는 것도 당연하구나, 안도했어.”

유은우는 청소기 안벽에 등을 기댔다. 틈새로 들어와 어둠을 가로지르는 빛을 보았다. 그 빛 사이로 유영하는 먼지를 보았다. 그 작은 반짝임만으로 유은우는 서재희를 떠올렸다. 전시관에서 먼지를 담뿍 뒤집어쓰고도 따뜻하게 웃던 그가 눈에 선했다. 만물이 시간 앞에 낙엽으로 바래진대도, 어떤 순간만은 기억 속에 영원하리라고 유은우는 생각했다.

“도연아, 혹시 위험해지면 너 자신을 우선으로 챙겨. 무엇보다 목숨이 가장 중요해. 무슨 말인지 알지?”

침묵은 길었다. 규칙적인 기차의 소음뿐이었다. 한참이 지났을 무렵, 손도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은우야, 네가 전에 나한테 물었지. 낙원의 이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유은우는 자세를 고치며 청소기 벽면에 눈을 바짝 붙였다. 손도연이 보일 리도 없건만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다.

“나는 역사 연구 모임 멤버야. 누군가 권유해서 들어간 건 아니고, 도시의 역사 강의를 듣다가 용과 관련해서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 황종길 교수님을 찾아뵌 게 계기가 되었어. 교수님은 나처럼 역사에 의문을 가지고 성적과 상관없이 방문하는 학생들을 지켜보다가 시간이 나면 불러서 이런저런 것들을 함께 토론하곤 해. 재희 선배가 편지에서 언급해서 이제 너도 알겠지만 그 모임은 단순한 역사 연구 모임이 아냐. 정확히 말하자면 역사 발굴 모임이지. 도시연합이 은폐한 역사를 추적하는.”

유은우는 천천히 자세를 고쳤다. 피부에 닿는 청소기 벽면이 차가웠다.

“혹시 마네킹 기억나? 백일서 명찰을 달고 있었고 예언이 녹음된. 은우 너도 현장에 있었다고 들었어.”

“천장에서 떨어졌던 그거 말하는 거야?”

“우리 모임에서 꾸민 일이야. 백일서가 온하나비로 우리 모임 멤버랑 접촉을 시도했거든. 백일서의 평소 행실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그가 정말 우리와 뜻을 함께할 수 있는지 신중을 기해야 했어. 처음 약속은 일부러 안 나가고 그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려고 했는데, 다음 날 아침 바로 강화제 중독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더라. 이미 죽었다고 봐도 무방했어. 그런 식으로 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바닥에서 기차의 일정한 진동이 느껴졌다.

“백일서를 죽인 게 누군지 알아내야 했어. 범인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노린다는, 최소한 지켜보고는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우리도 가만있을 순 없었어. 백일서가 단순히 약물 중독으로 입원한 것이 아니라,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계획적으로 살해당했음을 우리도 분명히 알고 있다고 경고해야 했지. 그래서 꾸민 짓이야.”

유은우는 마네킹 소동이 있던 날 밤, 손도연의 이프에 묻어 있던 붉은 자국을 기억했다.

“낙원의 이론은 내게 희망이야.”

손도연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도시연합은 공동체의 선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과도하게 진실을 은폐하고 있어. 묵인 가능한 정도를 넘어섰지. 언제까지 그렇게 거짓으로 버틸 수 있을까? 세상엔 영원한 비밀도 없고 완벽한 거짓말도 없어. 낙원의 이론이 안락한 현재의 종말을 예고하는 끔찍한 저주라고 믿는 사람들이 다수겠지만, 나는 아니야. 언젠가는 반드시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아주 당연한 이치를 뜻한다고 생각해.”

“그럼 예언에서 말하는 세 사람은 누구인 것 같아?”

손도연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은우야, 내게 그건 의미가 없어. 어떻게 단 세 사람으로 세상이 뒤집어질 수 있겠니? 혁명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을 각오로 힘을 모아야 성공할 수 있어. 만일 예언이 말하는 그 세 사람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해도, 수많은 사람들의 대표가 될 뿐이지, 결코 그들이 특별한 건 아니야.”

그때였다. 바닥에서 느껴지던 진동이 사뭇 달라졌다. 기차의 속력이 급격히 줄고 있었다.

유은우는 바짝 긴장하며 반투명한 틈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끼익. 화물칸이 열렸다. 그 너머로 꽤 많은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으나 놀랍도록 조용했다. 그들은 신속하게 화물칸에 올라타더니 쌓인 곡물 자루며 박스를 들어다가 차근차근 밖으로 내렸다. 몇 사람이 이쪽으로도 다가왔다. 유은우는 혹시나 들킬까 숨을 참고 틈에서 최대한 떨어졌다. 사람들이 다가와 청소기를 밀자 바퀴가 돌돌 구르는 소리가 났다. 공중으로 들렸다가 한참 아래에 반듯이 내려졌다.

유은우는 조심스레 틈에 눈을 대었다. 넓고 쾌적한 승강장. 흰 가운을 입은 몇이 보였고, 그 뒤로 일반 직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바쁘게 화물칸에서 물품을 내리고 있었다. 유은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가장 중요해 보이는 사람, 어떤 잡무도 하지 않고 팔짱을 끼거나 허리에 손을 얹고 작업을 지켜보고만 있는 무리를 응시했다.

“상태가 좋지 않군. 제1도시에서 기본적인 전처리도 없이 수송한 건가?”

정장을 입은 중년 여성이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한 차례 마주친 적 있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유은우는 그녀를 쉽게 기억해 냈다. 제5도시관리국장 주혜선.

그녀와의 만남이 좋은 경험은 아니었기에 불안이 가중되려는 찰나, 유은우는 주혜선 이상으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굵은 단발 아래 드러난 낯은 피로했고, 단정한 투피스 위로 흰 실험복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한세연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 연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국장님, 시기가 시기인지라 황급히 보낸 모양입니다. 그러나 문제없습니다. 저희도 가공은 할 수 있으니까요.”

직원들은 하나같이 입을 굳게 다물고, 흰 천으로 감싼 길쭉한 것을 들것에 실어 부지런히 옮기고 있었다. 어떤 것은 깨끗했고, 어떤 것은 진득한 오물이 배어 나왔다. 강력한 탈취제 냄새로도 시취는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주혜선이 혀를 찼다.

“성체 포획하느라고 연구소 인력 절반이 사해로 나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이런 잡무까지 우리 도시로 떠넘기다니……. 잠깐, 저 직원은 우리 유니폼이 아닌데?”

한세연이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작게 대답했다.

“기차 관리 직원이군요. 수송되는 동안 시신을 수습한 모양입니다. 홀로 고생했겠네요.”

“아무리 상황이 위급하다지만 일처리를 이따위로…….”

“국장님, 드문 일이 아닙니다. 작년 말에도 제가 저 직원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 전도 마찬가집니다.”

쭉 조곤조곤하던 한세연이 주혜선의 말을 자르며 사뭇 목소리를 높였다. 주혜선이 앞으로 나아가며 유은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뒤로 한세연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급히 덧붙였다.

“저희 소관이 아닙니다. 제1도시 기차역 소속입니다. 저희는 그에게 권한이 없습니다! 국장님!”

탕!

무언가 맥없이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한세연이 입술을 깨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시기가 어느 시기인데 일일이 살려 두나? 다른 누구도 아닌 김서혁이 일으킨 쿠데타다. 내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김서혁 그 새끼 정치질 못하고 고개 빳빳할 때부터 피바람이 일겠구나 싶었다고……. 이럴 때일수록 쥐새끼 하나라도 조심해야 해. 어차피 고급 인력도 아니지 않나. 그리고 후환을 없애는 것이 역장 입장에서도 좋을걸. 엊그제 기사를 보니 하청 업체 관리도 소홀하던데.”

주혜선이 다시 유은우의 시야로 들어왔다. 그녀는 한세연 옆을 지나치기 전에 딱딱하게 말했다.

“차인호가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이만큼이나 우리 도시를 챙겨 줬으니 상응하는 결과물을 내야겠지? 지금 학생들이 1급 보안지역으로 접근하고 있어. 거기서 도시연합과 전투가 벌어지면 포획이 더 어려워진다는 건 다른 누구보다 자네가 잘 알 거야. 이대로 지지부진하다면 나도 자네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어.”

“명심하겠습니다.”

한세연이 조용히 대답했다. 주혜선이 탐탁잖은 기색으로 뚜벅뚜벅 스쳐 지나갔다. 한세연은 그대로 가만히 서 있다가 주혜선의 기척이 멀어지자 이내 다정한 목소리로 근처 직원을 불렀다.

“시신 수습해 주렴. 가족이 있나 모르겠구나. 직업상 동조자로 보이지는 않지만 혹시 모르니 조회해 보고, 동조자라 하더라도 빼돌리지 말고 시신을 보낼 주소가 있는지 알아봐 줘. 역장님께는 내가 직접 전화드리겠다.”

그리고 한세연은 맥없이 타박타박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유은우가 숨어 있는 청소기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청소기를 만지는 기척이 났다. 삑삑 하고 버튼 눌리는 소리에 이어 청소기 내부에 반짝반짝 불이 들어왔다. 이어 청소기가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청소기에 달린 물걸레가 바닥을 휩쓰는지 아래에서 찰박찰박 소리가 났다.

유은우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도 멈춘 채 반투명한 틈으로 시시각각 바뀌는 바깥을 응시했다. 바쁘게 오가는 발 사이로 붉은 기가 보였다. 떨어진 밑창을 청테이프로 둘둘 감은 안전화. 파란 작업복 위로 덧걸친 때 묻은 형광색 조끼. 최정식이라고 쓰인 명찰 아래 까만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구멍으로부터 피가 울컥울컥 비어져 나왔다. 아직도 심장이 뛰는 것처럼.

유은우는 청소기 바닥을 바라보았다. 균일하게 가느다란 틈 사이로 핏기가 비쳤다. 이내 청소기의 소음이 웅웅 높아졌다. 바깥으로부터 빨아들인 피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원래라면 오물통으로 들어가야 할 피가, 유은우의 정강이로 무릎으로 가슴으로 사정없이 튀었다. 아직 따뜻했다.

유은우는 최정식의 피를 맞으며 뻣뻣한 손으로 품이 넉넉한 검도복을 들추었다. 허벅지의 홀스터에서 나노 드론을 뽑아냈다. 손이 떨려 드론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침착하려 애쓰며 손톱으로 드론의 전원을 꾹 눌렀다. 약한 기계음과 함께 드론에 빨간 불이 반짝 들어왔다.

유은우는 입가에 드론을 바싹 가져다 댔다. 혹여나 들킬까 등골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청소기의 소음에 의지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덜덜 떨려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도시연합 중앙학교 1학년 유은우입니다. 저는 지금 제5도시 용 연구소에 들어와 있습니다. 은폐된 내부를 다음과 같이 공개합니다.”

바닥의 틈 중 그나마 피가 덜 들이치는 쪽으로 드론을 가져다 대었다. 드론은 잠깐 손끝에 머문다 싶더니 곧 잘게 떨면서 밖으로 쏙 빠져나갔다.

다음 순간 유은우는 바싹 얼어붙었다. 언제 다가온 건지 한세연의 구두 한 쌍이 바로 앞에 있었다. 그녀가 청소기를 톡톡 두드렸다.

“이거 소리가 왜 이러지? 저기, 누가 여기 와서 청소기 좀 봐 주었으면…….”

“연구관님.”

남자 목소리가 불쑥 날아왔다. 그가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속삭였다.

“호출입니다. 급하게 연구관님을 찾으시는데요…….”

유은우는 숨을 죽였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였다. 앳되고 다소 산만한.

한세연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발신자를 먼저 보고하라고 여러 번 일렀을 텐데.”

“아, 아, 죄송합니다. 차인호 도시연합장이십니다. 연구관님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실험실로 직접 전화를 거셨습니다. 여기, 제가 제 인터컴으로 연결해 왔습니다. 어서 받으세요.”

“차인호가 내게 전화를 했다고? 직접?”

“네네, 빨리 받으세요. 저도 정말 놀랐다니까요. 사흘 연속 밤을 새워서 제가 헛것을 듣나 하고. 목소리를 들어 보니 지금 굉장히 화가 난 것 같습니다. 제가 정말 심장이 떨려서…….”

약간의 침묵 뒤에 한세연이 날카롭게 물었다.

“뭐라고 하든?”

“여태까지의 포획 일지를 전부 가져오라는 지시입니다. 아무래도…….”

남자는 이제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다급히 이어졌다.

“……저희가 일부러 용을 놔주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 같습니다.”

“난 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

“이제 연구관님도 아시겠지만, 전 임유현에게 묶여 있습니다. 반란군과 연을 끊으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때 넌 임유현은 안중에도 없었어. 온전히 용서를 구하러 온 눈이었지. 우리도 안목이 있다. 네가 임유현 때문에 억지로 온 건지, 책임을 지기 위해 돌아온 건지 정도는 구분해.”

정윤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어. 그래서 내가 널 아낀단다. 난 네가 욕심나. 하지만 그렇다고 널 강제로 취한다면 임유현이나 다를 바 없겠지. 그 사람이 어떤 식으로 서재희를 가졌는지는 나도 들었다.”

정윤환의 몫으로 놓인 찻잔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임시 본부를 꾸리느라 바쁘다가 이제 좀 안정이 되니 슬슬 네 이야기가 나오는구나. 물론 대부분이 널 원망해. 하지만 널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어. 김승훈 연구관은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내게 찾아왔고 급기야 어제는 무릎을 꿇고 빌었단다. 본인이 널 처음 데려왔으니 책임을 물으려거든 자신에게 절반을 달라더구나. 그뿐인 줄 아니. 강진욱 연구원도 왔었어. 그 애는 네가 마음 붙일 데가 없어서 헤매다가 애먼 실험체에 빠진 것뿐이지, 실험체가 군으로 넘어간 이상 이젠 마음잡지 않겠냐고 울면서 호소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윤환이 네가 여기 남아 주길 바라. 하지만 네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건 결코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네가 바란다면 우리 쪽에서 네 흔적을 모두 삭제하겠어.”

정윤환은 그제야 눈을 들어 마주 앉은 한세연을 바라보았다.

“군으로 돌아가. 이중 스파이는 그만두렴. 군도 널 탐하고 우리도 널 탐하니, 우리가 널 포기하겠다. 앞으로는 적으로 보자꾸나.”

정윤환은 고개를 숙였다. 두 손으로 제 무릎을 움켜쥐었다.

“연구관님, 정말 염치가 없지만…….”

마른 눈물이 미끈한 정예군 제복 바지 위로 후드득 쏟아졌다. 정윤환은 흐느낌을 가까스로 삼켰다. 고개를 들었다. 시야는 눈물로 굴곡져 한세연이 이상하게 찌그러져 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김승훈이 무릎을 꿇었다고. 강진욱이 호소했다고. 무릎은 정윤환이 꿇어야 했다. 호소도 정윤환이 해야 했다. 이중 스파이로 살얼음판을 걷는 와중에, 유은우를 빼돌려 보겠다고 욕심을 부려 반란군의 절반이 사망하고 본부를 잃었다. 그리고 그가 애달프게 살리려 애썼던 유은우는, 바로 어제 김서혁의 전리품으로 등록되었다.

“제가 반란군과 더 이상 접촉하지 못한다는 걸 임유현이 알게 되면 절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아무리 총사령관 자리에서 밀려났다 하더라도 그 사람 보통이 아닙니다. 항간에는 이미 중앙학교 교장으로 확정되었다는 소문도 돌고 있어요. 임유현 말 한마디면 저희 부모님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제발, 연구관님.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제명하지 말아 주세요.”

“본부가 파괴되고 가까이 지내던 간부들이 전부 죽어 버려서 꼬리가 잘렸다고 하렴. 그 사람은 절대 너 못 죽여. 네 설계 실력을 아는 자라면 그 누구도 널 죽일 수가 없지.”

“하지만 가족이…….”

“가족이 걱정된다면, 좋아. 우리가 페이크 정보를 주겠어. 그걸 임유현에게 가져다주면 네 가족은 무사하겠지.”

“……그럼…….”

“여태 쭉 했던 대로, 너도 우리에게 임유현과 김서혁의 정보를 전해 주렴. 더 이상 직접 접촉하는 일은 없겠지만, 우린 계속 한팀이야.”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안도감이었다.

“넌 가진 게 정말 많지. 전부 지켜 내려고 아등바등 애쓰느라 정작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한세연이 한숨을 쉬었다.

“윤환아, 원하는 걸 다 가질 순 없어. 선택해야 해. 매 순간 모든 것을. 그래서 사람에겐 신념이 필요해. 확실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가슴에 손을 얹고 하나를 정하렴. 가족인지. 군인지. 반란군인지. 임유현인지. 김서혁인지. 우리인지. 너무 어렵다면, 네 자신을 가장 우선으로 두는 것도 좋아. 넌 절대로 그럴 애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산단다.”

기준. 정윤환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기준. 손이 차가웠다.

폭우. 물안개. 비로 들끓는 바닥. 희게 얼어붙은 이마. 젖어 달라붙은 머리칼 아래 이어지는 부드러운 뺨과 턱의 선. 비에 젖어 번들거리는 시커먼 동공은, 그 안에 서린 오랜 원한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정윤환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있었다.

그때 대장은 유은우가 분노에 점령당했다고 했다. 동공이 활짝 열려 자신을 보고 있었다고. 하지만 정윤환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증오로 들끓는 눈. 새파란 열로 번들번들한 눈. 유은우의 눈은 김서혁이 아닌, 김서혁 바로 뒤에 선 자신을 향하고 있었음을.

우린 그때 처음으로 마주 봤던 거야. 넌 내 죄로, 난 네 벌로.

“윤환아, 그건 사랑이 아니다.”

정윤환은 소스라쳐 고개를 들었다. 한세연은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측은해하고 있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야. 너의 가장 약한 부분이지.”

가슴이 쿵쿵 뛰었다.

사람들은 정윤환에게 단 한 번도 사랑을 언급한 적 없었다. 말 한마디 못 나누고 눈 한번 제대로 마주칠 수도 없는 실험체에게 유난히 집착한다고 했다. 징그럽고 끔찍한 동정이라고 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네게 그 실험체는 어떤 관념일 뿐이라고 했다. 죽은 형에 대한 부채 의식. 망가진 선악의 잣대를 구원할 매체. 극한의 스트레스에 기인한 정신 이상. 형의 유품으로 남겨진 철저한 약자인 유은우를 구해 주면 마치 네 인생이 썩 괜찮아 보여서 그러는 것뿐이라는 비웃음을 들으면, 마치 그런 것도 같았다. 정윤환 자신조차 사랑은 금기어였다.

“어떤 기준을 삼아도 좋아. 우리를 버리고 군을 선택해도 널 안전하게 돌려보내 주겠다. 하지만 그 실험체는 안 돼. 절대로 그것만은 선택하지 말거라. 네 인생이 달린 문제다. 어쩌면 넌 임유현보다 그 실험체를 조심해야 하는지도 몰라.”

정윤환은 천천히 호흡했다. 사랑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단어에 홀린 자신을 다잡았다.

“저는 형처럼 되고 싶어요.”

정윤환은 한세연에게 말하며, 동시에 자신에게 말했다.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의심하고 싶어요.”

정윤환은 정성민을 떠올렸다. 군에 턱걸이로 겨우 들어와 온화한 성품 하나로 간신히 말단팀 리더 자리를 유지하던 형은 자의로 반란군에 들어갔지만 그 큰 위험을 감수하고도 요직을 맡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진짜 용기란 그런 거였다. 고작 실험체 하나 살려 보겠다고 반란군의 절반을 망가뜨려 놓고, 덜덜 떨며 용서를 구하기 위해 참상 한가운데로 돌아온 자신은 얄팍한 자기 위안에 불과했다.

정윤환은 한세연이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정윤환이 아닌 정성민을 아꼈어야 했다. 나의 재능이 아니라 형의 성품을 알아봤어야 했다.

“만약 누군가 진실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면, 그건 제가 하고 싶어요.”

정윤환은 한세연 너머 벽에 빼곡하게 붙은 신문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대한 사해 지도와 그 위로 수없이 표기된 메모를 응시했다. 가장 위에 붙은 표어는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도시에 단죄를, 사해에 진실을.

“달라진 세상을 제 눈으로 보지 못하더라도, 역사 속에서 제가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용의 심장을 찾고 도시와 사해의 경계가 무너지는 그 연장선상에 있고 싶어요. 전 재능을 타고났습니다. 땀 한번 안 흘리고 공짜로 받았죠. 그에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군이 아니라…….”

눈물은 마른 지 오래였다.

“……반란군에 힘을 보태겠습니다.”

한세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장에 달린 조명에 한세연의 완고한 주름과 단단한 눈이 드러났다.

“내부에 아직 널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어. 아군을 절반이나 죽인 스파이를 내치지 않고 끌어안고 가는 건 내게도 모험이란다. 그들을 설득시키려면 너도 어느 정도 각오를 해야 해.”

정윤환은 똑바로 앉은 채 한세연을 올려다보았다.

“우린 동조율 100짜리 실험체를 잃었다. 절대로 적으로 마주하고 싶지 않아. 나중에 김서혁이 그 실험체를 놓친다고 해도 우리에게 돌아올 확률은 지극히 낮고, 까딱하다 임유현 손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상황은 더 악화된다. 그 전에, 인큐베이터에 꼼짝 않고 누워 있는 지금, 네 손으로 제거하렴.”

정윤환은 자신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한세연은 덧붙였다.

“못 하겠다면 우리는 널 받아들일 수 없다. 네가 그 실험체 때문에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었으니, 용서를 구하고 내부의 마음을 돌리려면 이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야. 네 손으로 마무리하는 것.”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막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정윤환은 그런 자신에게 놀랐다. 목이 말라붙은 듯 조였다.

“윤환아, 만약 그 실험체가 군에서 회복한다면 어떻게 할 거니?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면. 똑바로 널 바라본다면.”

한세연 연구관이 탁자를 돌아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시선이 이마로 내리꽂혔다. 여태 정윤환의 실수에 대해 단 한 번도 책망한 적 없던 한세연이, 지금 담담하게 묻고 있었다.

“그래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자신 있니?”

정윤환은 잠에서 깨어났다. 함선 특유의 묵직한 진동이 전신으로 느껴졌다.

“……선배, 윤환 선배.”

시야가 희미했다. 어깨를 흔드는 손길이 지극히 사무적이라, 정윤환은 상대를 보지 않고도 연다희임을 알았다. 정윤환은 연다희의 손길을 뿌리치고 돌아누웠다.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잘게…….”

다음 순간 소스라쳐 일어났다. 갑자기 몸을 일으키자 눈앞이 핑 돌았다. 왼손으로는 얼굴을 문지르고 오른손으로는 옆의 아무나 붙잡아 당기며 물었다. 목소리는 잠겨 나왔다.

“유은우는? 손도영이랑 잘 도착했대? 드론 켰어? 방송 시작했어?”

“손도영 아니고 손도연.”

심드렁한 대답이 돌아왔다. 정윤환은 눈을 찌푸리며 제가 잡고 있는 옷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차예원이 팔짱을 끼고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고 있었다. 그녀가 정윤환에게 붙잡힌 제 옷자락을 냉담하게 흔들어 빼 갔다. 정윤환은 빈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소파 아래 제 군화가 한쪽만 벗겨져 있었다. 정윤환은 그것을 집어 들고 발을 꿰었다.

“이름 좀 틀려도 알아듣잖아. 도착했냐고.”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정윤환은 군화 끈을 묶다 흠칫했다. 왼손의 느낌이 이상했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정윤환은 내색 않고 허리를 펴 차예원을 바라보았다. 차예원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바닥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야, 대답 안 해? 입 없어?”

침묵이 불길했다.

“뭐야?”

정윤환은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휘실이었다. 꺼진 스크린과 사해 지도가 펼쳐진 탁자. 그 주위로 바닥에 단단히 고정된 의자. 정윤환이 일어나 앉은 긴 소파가 있었다. 임원을 비롯한 학생 몇이 의자에 앉거나 선 채였다. 다들 묘하게 정윤환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정윤환 바로 옆에 선 연다희만 빼고.

“분위기 왜 이래?”

“보고 드릴게요.”

연다희가 앞으로 한 발짝 다가왔다.

“저희는 현재 제1도시를 막 벗어나 순항 중입니다.”

연다희의 어깨 너머, 암막 커튼 사이로 어두운 조타실이 보였다. 학생 여섯이 항해 장비 사이를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하나는 타를 잡고 있었고, 하나는 망원경으로 견시를 했으며, 둘은 레이더와 관측기를 하나씩 차지하고 수선스러웠다. 나머지 둘은 온 오염도 측정기 뚜껑을 열고 안에 리필용 측정지를 채우고 있었다. 모두 항해술을 수강한 이력이 있는 5학년들이었다.

연다희가 빠르게 말했다.

“저흰 현재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없습니다. 다만 전투 시 내보냈던 부속선 열세 척 중 세 척이 손상되었습니다. 남은 열 척은 무사히 실어 왔습니다.”

정윤환은 크게 안도했다.

“윤환 선배 덕분에 학교 주위 반경 2킬로미터까지 모든 동조자의 체력이 가상화되었어요. 저희 쪽은 원래 사망자만 쉰 명이 넘고 부상자는 그 두 배에 달했습니다만, 모함으로 해당 구역을 빠져나오자마자 전투 전 상태로 감쪽같이 복원되었습니다. 군 또한 그 혜택을 함께 받았습니다. 그들 또한 사상자가 없습니다. 대신 군의 물적 피해는 상당합니다. 모함 세 척과 부속선 마흔다섯 척이 추락하여 파괴되었습니다. 언론은 우리에게 극히 호의적입니다. 특히 친정부 언론사마저 정부의 강경한 대응에 학생들이 평화적으로 대처했다며 극찬하고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연다희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좌표기를 중심으로 2킬로미터 밖에 있던 시민들입니다. 재희 선배의 학교 복귀를 환영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시민 중 다수가 전투로 발생된 폭발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습니다. 도시연합에서 집계 중이라고 밝혀 정확한 피해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저희가 학교를 빠져나오며 육안으로 파악한 시체만 쉰 구를 넘어갑니다.”

정윤환은 이마를 문질렀다. 왼손이 저릿했다.

“전투가 그렇게 광범위했나? 2킬로미터 밖까지 그 여파가 있을 만큼?”

“저희가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던 학생들을 군이 추적했습니다. 학생들은 당연히 반격했고, 저희가 주시하고 있던 중심에서 많이 벗어난 곳에서도 격전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학생들이 얼마나 군에 사로잡혔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언론에 의하면 그중 다수가 간단한 신원 조사를 위해 중앙수사부로 넘겨졌다고는 합니다만.”

“간단한, 신원 조사.”

발음이 껄끄러웠다. 정윤환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었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곧 항복을 의미하니 군에서 너그러이 봐줄 거라 생각한 게 오판이었다. 하긴, 정부로서는 혁명에 대한 아주 작은 단서라도 잡고 싶을 테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약한 학생들을 사해까지 끌고 올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이미 뚫린 학교에 남겨 둘 수도 없었다. 서재희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쉽고, 화가 났다.

차예원이 낮게 말했다.

“몇 명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어. 언론사 인터뷰를 통해서 우리 혁명을 지지한다고 말하고 있어. 어떤 애는 교장실 문서를 정리해서 가지고 나갔더라. 안전이 최우선이니까 가볍게 나가라고 당부했는데도 위험을 감수하고 챙겨 나간 모양이야. 덕분에 우리 위치가 한결 나아지긴 했지만.”

연다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학교에서 출발한 지 지금 두 시간 지났어요. 설계팀이 15분에 한 번씩 갑판으로 나가 교대로 방어막을 구축하며 1급 보안지역으로 이동 중입니다.”

“적의 동향은?”

“도시연합 측 함선은 현재 우리 사정거리 내에 파악되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희가 그쪽 함선을, 모함과 부속선을 마흔여덟 척이나 부수어 놓았으니까요. 하지만 곧 따라붙겠죠. 만약 지금 저희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다면 30분 내에 근접전으로 이어집니다.”

한 번 더 붙을 거라 생각하니 앞이 깜깜했다.

“내가 좌표기로 가상 체력화한 거 들켰으니 두 번은 못 쓰겠지.”

“아무래도 그렇죠. 예원 선배가 좌표기를 도로 기관실로 내리라고 했으니 안심하세요.”

“우리 쪽 부상자 명단 줘 봐.”

차예원이 탁자에 놓여 있던 서류철을 집어다가 내밀었다. 정윤환은 그것을 받아 쭉 훑어보았다. 후문 쪽에 배치되었던 학생들이 다수였다. 어차피 가상 체력화되어 전부 살아남았다지만, 실제 전투였다면 큰 손실이었다는 생각에 속이 쓰렸다. 웬 부속선 한척이 기이한 행태를 보이는 바람에 대처하느라 후문까지 정성을 들이지 못했다. 김산이 있어 가장 안전할 거라고 믿었던 제 잘못이었다.

“그 부속선 어떻게 됐어? 확인했어? 그거 한 척이 거의 서른 척 넘게 물고 있었어.”

“제가 직접 가서 확인했습니다. 도시연합 정예군이 타고 있었어요. 이쪽으로 투항하기에 데리고 왔습니다. 그 명단입니다.”

연다희의 손이 다가와 정윤환이 들고 있던 부상자 명단을 한 장 뒤로 젖혔다. 다음 장에 익숙한 이름들이 있었다.

소연주, 이선규, 강지원, 박민준.

“……투항했다고?”

“현재 갑판마다 한 명씩 배치되어 방어선 구축에 핵심 설계 박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잘 따릅니다.”

정윤환은 멍하니 리스트를 보고 또 보았다. 반갑다기보다 황당했다. 이 또한 서재희가 수를 쓴 걸까. 묻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정말 원하는 보고는 따로 있었다. 여태 털끝만치도 듣지 못해 정윤환은 먼저 물었다.

“유은우는?”

“학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유은우는 손도연과 중립지대를 나가자마자 폭발에 휘말리면서 저희가 걸어 준 추적선이 손상되었다고 합니다. 혹여 떨어지게 되더라도 무조건 기차역에서 재회하기로 둘이 말을 맞추었기 때문에, 둘은 각자 기차역으로 향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현재까지 유은우가 사망했다는 언론 보도가 없는 걸 볼 때, 군이 유은우의 죽음을 은폐하였거나 유은우가 무사히 살아 있거나 둘 중 하나이며, 살아 있더라도 무사히 기차역까지 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기차역에 도착했다하더라도 현재 모든 대중교통이 전면 중지되었다는 보도를 볼 때 아직 제5도시로 출발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들고 있던 서류철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옆에 서 있던 차예원이 그것을 줍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정윤환은 연다희의 말을 들었다.

“온하나비를 통해 영상이 하나 퍼지고 있습니다. 서재희 선배와 유은우가 키스하는 영상인데, 공신력 있는 언론이 보도했답니다. 장소는 당시 격전지 중 하나입니다. 둘의 생사가 1차로 확인된 셈이죠. 그 후로 게시판에 글이 하나 올라왔는데, 기차역에서 어떤 남자가 저기 유은우 아니냐고 크게 외쳤다고 합니다. 상대가 급히 몸을 피했다는 소리도 있고, 총을 맞아 머리에 부상을 입은 사람을 잘못 봤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헛소문인지 아닌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영상이 기록된 시각, 오늘 오후 3시경에는 서재희 선배도 유은우도 살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약 한 시간 전에…….”

“뭐?”

정윤환이 물었다. 연다희가 눈을 깜박이다가 대답했다.

“현재 유은우의 생사나 위치는 불확실합니다. 다만, 기차역에서 목격담이…….”

“아니, 그거 말고. 둘이 뭘 했다고?”

연다희가 대답하기 전에, 차예원이 들고 있던 서류철을 탁자로 내팽개쳤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서류철이 몇 번 튀어 오르고 페이지가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차예원은 팔짱을 끼고 성큼성큼 걸어서 조타실로 나가 버렸다. 조타실과 지휘실을 가르는 커튼이 사납게 흔들렸다. 근처에 서 있던 고세민이 헛기침을 하며 정윤환의 시선을 피했다.

정윤환은 연다희를 노려보았다.

“내가 방금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무슨 영상? 유은우가 뭐?”

“그리고 약 한 시간 전에 서재희 선배가 여기 도착했습니다. 이상 보고 끝.”

연다희가 빠르게 말을 맺었다. 그녀는 도움을 청하는 눈으로 정윤환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 정윤환은 소파 등받이를 잡으며 상체를 비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서재희가 있었다.

핏자국이 말라붙은 셔츠. 흐트러진 머리칼. 뺨엔 검푸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엉망이었다. 서재희가 저리 망가질 수 있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정윤환은 잠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서재희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으나 끝이 잠겨 있었다.

“다들 잠깐 나가 줘.”

연다희가 대여섯 드문드문 있던 학생들을 재촉하여 지휘실을 나갔다. 커튼이 닫히자 조용해졌다. 가끔 조타실에서 온 오염도를 출력하는 소리가 났다.

서재희는 천천히 걸어와 정윤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가 정윤환의 오른쪽 군화에 엉성하게 묶인 끈을 풀어냈다. 이어 끈을 꾹 잡아당겨 조이고 단단한 매듭을 짓는 서재희의 마르고 긴 손가락을 지나, 예민한 턱과 단정한 입술을, 정윤환은 그저 감내했다.

서재희는 몸을 일으켜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입을 열지 않았다. 차분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정윤환이 내뱉듯 말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나한테 할 말 많을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네가 모르는 것도 있냐.”

서재희는 웃었다. 눈이 매끈하게 접히고 입꼬리가 부드럽게 선을 그렸다. 또 그의 입술에 시선이 머물러, 정윤환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따끔거렸다.

지난 며칠간 얼마나 간절하게 서재희를 바라 왔던가. 그러나 이런 식은 아니었다. 그를 만난 반가움은 마음속 가장 어두운 곳에 처박혀 부서진 지 오래였다. 나는 왜…….

“너 죽은 줄 알았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일까.

“나 죽길 바랐다는 건 아니지?”

서재희의 목소리에 옅게 웃음기가 감돌았다. 정윤환은 다시 고개를 돌려 서재희를 바라보았다. 서재희는 몰골이 엉망이었으나 의자에 옆으로 앉아 등받이에 팔꿈치를 가벼이 얹은 품이 극적으로 고상했다. 정윤환은 단 한순간만이라도 유은우를 배제하고 서재희만 보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어려웠다. 정윤환은 솔직해지기로 했다.

“계속 기다렸어.”

서재희의 낯으로 미소가 번졌다. 그가 웃는 걸 보고 있노라니 낮의 전투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서재희가 부드럽게 말했다.

“애들한테 들었어. 네가 애를 많이 썼다고.”

그놈의 반말 좀 그만하면 안 되냐는 타박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으나 삼켰다.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임유현은…….”

“내가 죽였어.”

서재희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병원에서 약 타 드시잖아. 평소에 드시던 게 너무 강해서 자꾸 헛구역질이 나온다고 이번엔 좀 약하게 지어 오셨더라. 그런데 내가 그냥 원래 약으로 바꿔 놨어. 판단력이 조금이라도 흐려지라고. 독은 못 썼어. 부검 때 나오면 안 되니까.”

서재희는 9년간 제 후원자였던 사람을 무표정하게 떠올리고 있었다.

“약 기운으로 허덕이며 토악질하는 모습 남한테 보이기 싫어하는 분이시지. 또 그래서도 안 되고. 임유현 건강 문제, 정확히는 언제 죽느냐가 요사이 도시연합 최대 관심사였으니까. 내가 미리 언질해 드렸어. 코너를 돌면 귀빈 전용 화장실이 있다고. 그 뒤는 백정명이 알아서 했어. 내가 하고 싶었지만…….”

서재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양보했어.”

정윤환은 홀린 듯이, 여덟 도시를 통틀어 가장 압도적이었던 권력자를 계획적으로 살해했다고 시인하는 서재희를 바라보았다. 정윤환이 천천히 중얼거렸다.

“나는 도무지 실감이 안 나. 10년 가까이 날 쥐고 흔든 사람이었어. 앞으로 조금이라도 편해질까.”

“많은 사람들이 편해졌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졌어. 차예원만 아니었으면 차인호가 학교를 부수고도 남았을 텐데.”

정윤환은 차예원이 보란 듯이 팽개치고 나간 서류철을 바라보았다.

“내가 차예원한테 제안했어. 아빠한테 보내 주겠다고. 그런데 끝까지 안 가더라. 차예원, 내 생각보다 널 더 좋아하는 것 같아.”

“그래서?”

정윤환은 서재희가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여 하마터면 시선을 피할 뻔했다. 서재희가 재차 물었다.

“그 말을 하는 저의가 뭐야? 나보고 차예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의미야?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어차피 차예원은 나한테 오게 되어 있어. 나에 대한 감정은 별개의 문제야. 차예원은 갈 곳이 없어. 차인호와 함께 죽든지, 차인호를 등지고 살든지, 차예원이 판단할 문제야. 물론 내가 차예원을 진심으로 포용한다면 깔끔하겠지만…….”

서재희가 새카만 눈을 차분히 내리깔았다.

“……내 마음이 그게 아니라서. 다른 건 다 하겠는데, 그건 잘 안 되네.”

서로의 말마디는 유은우의 언저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정윤환은 서재희가 말을 조심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철저히 경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언제나 그렇듯, 정윤환은 또 서재희에게 굽히고 들어가야 했다. 먼저 꺼내고 싶지 않았다. 네게 듣고 싶었는데.

“네가 편지에서 나랑 유은우를 붙여 놔서 네가 포기한 줄 알았어.”

서재희가 눈을 들었다. 그가 고요하게 물었다.

“무엇을?”

“네 삶을.”

한 호흡 뒤에 덧붙였다.

“그리고 유은우를. 전부 포기한 건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어. 유은우를 내게 맡기고 네가 다 껴안고 죽을 셈인 걸까, 두려웠어. 동시에 안도했어. 잘되었다고 생각했어. 그럼 내게도 기회가 오지 않을까.”

나란 인간은 뼛속까지 끔찍하지. 심지어 이번만도 아니었다. 유은우가 학교로 내려와서부터, 서재희가 유은우를 보고, 유은우가 서재희를 볼 때마다, 서재희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나의 악이 자연스러운 감정이기를. 오랜 친구를 부수고서라도 유은우를 앗고 싶은 충동이,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면 어쩔 수 없이 자라나는 어두운 마음이기를. 정말 중요한 문제는, 그 감정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 감정에 굴복하는 대신 극복해 낼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양심 내지는 온 여력을 쏟은 한 가닥 의지의 유무라고.

정윤환은 이런 속내를 그대로 보이는 것이 결코 잘하는 짓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당장 내일도 보장되지 않았으니까. 실제로 서재희를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여겼을 때, 가장 먼저 안타까웠던 것은 단 한 번도 표현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서재희가 정윤환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유은우를 언급한 것은, 그 속내를 밝히기 위한 전철이었다.

“그런데 정말 고통스러운 건, 그래서 네가 밉냐고 묻는다면 그 또한 결단코 아니라는 거야.”

사실 유은우가 서재희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었더라면, 정윤환은 지금만큼 인내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치 못했다. 유은우 때문에, 정윤환은 서재희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정윤환은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서재희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타인의 그 어떤 면도 추측하지 못하며 응시했다.

“……무슨 말이든 해 줘.”

서재희가 침묵 끝에 깨어지듯 웃었다. 만인 앞에서 매끄럽게 걸쳐 대던 예의와 달랐다.

“네가 그랬지. 형이라고 부르라고. 반말하지 말라고. 하지만 먼저 말 놓으라고 한 건 너잖아.”

정윤환은 눈을 깜박거렸다. 왜 하필 지금 서재희가 옛날이야기를 끌어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토록 존댓말을 쓰라고 해도, 기어코 너라고 지칭하던 서재희였다. 심지어 적당한 이유를 둘러대는 수고조차 없어서 얼마나 괘씸했는지. 언젠가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겠다고 다짐은 했으나, 지금 이렇게 화제로 떠오를 줄은 결코 몰랐다.

서재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가 이내 꾹 다물었다. 그의 까만 눈동자가 얼핏 말개져, 정윤환은 제 눈을 의심했다. 서재희가 조용히 말했다.

“그때 우리 연합대회에서 처음 만났을 때. 너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했을 때. 네가 나한테 친구하자고 그랬잖아. 그리고 모든 게 사라졌어. 이제 어렸던 나를 아는 사람은 다 죽고 오직 너뿐이야.”

정윤환은 눈을 크게 뜨고 서재희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단정하던 서재희가 얼굴을 고통스럽게 일그러뜨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난 절대 너 형이라고 안 불러. 넌 내 마지막 남은 어린 시절이니까. 내가 행복했던 시절 네게 반말했으니 그거 하나라도 움켜잡고 싶어서. 네게 형이라고 부르는 순간 관계가 재정립되어 버릴까 봐.”

서재희가 낮게 말을 이었다.

“넌 나한테 그런 존재야.”

정윤환은 입술을 사려 물었다. 눈가가 뜨거웠다.

“그리고…….”

서재희의 톤이 사뭇 달라졌다. 분명하고 딱딱했다.

“……나도 알고 있어. 내가 유은우와 만나기 훨씬 전부터 네가 먼저 유은우와 얽혔다는 걸. 나는 그저 운이 좋아 유은우와 잠깐 스칠 뿐이고, 결국엔 운명처럼 유은우는 너와 엮이게 될까 봐 지금도 두려워. 하지만 동시에, 너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어. 그래서 편지에 그렇게 썼던 거야.”

서재희가 손바닥으로 눈매를 눌렀다가 쓸어내렸다. 드러난 눈빛이 또렷했다.

“그런데 나 이제 욕심 좀 부려 보려고.”

정윤환은 서재희의 다음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복수만 생각하며 나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으려고. 예쁘고 따뜻하고 내 마음에 쏙 드는 것들 죄책감 없이 사랑해 보려고. 세상을 부수는 대신, 내 친구가 염원하는 미래를 비슷하게나마 그려 보려고.”

서재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그의 그늘이 정윤환을 삼켰다. 서재희가 정윤환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했다.

“내가 체스판 마지막 열까지 네 폰을 밀어 줄 테니, 넌 퀸이든 나이트든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될 수 있어. 무력하게 추락하지 말고 도약해. 누구도 넘보지 못할 정상에 올라서서, 우리가 저질렀던 그 모든 용서받을 수 없는 것들에 조금이라도 정당성을 부여해 줘.”

정윤환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서재희의 새카만 눈을 통해 자신을 보았다. 서재희가 속삭였다.

“할 수 있지?”

홀린 듯 물었다.

“내가 뭘 하면 되는데?”

“뭐든지, 마음껏. 넌 네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돼. 판은 내가 깔겠지만, 선택은 네 자유야.”

“여태까지 포획 일지 쓴 걸 전부 가져오라는 지시입니다. 아무래도…….”

남자는 이제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다급히 이어졌다.

“……저희가 일부러 용을 놔주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 같습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규칙적인 소음뿐이었다. 직원들이 바삐 움직이는 발소리. 박스나 자루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 유은우가 웅크리고 숨어 있는 청소기가 윙윙거리며 바닥을 찰박찰박 걸레질해 대는 소리. 이윽고 한세연이 딱딱하게 말했다.

“네, 연합장님. 한세연입니다.”

그 뒤는 잘 들리지 않았다. 유은우는 반투명하고 좁은 틈으로, 한세연의 구두 한 쌍과 남자의 곰돌이 슬리퍼 한 쌍이 불안한 보폭으로 저만치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제야 이프를 누를 정신이 들었다. 무음 모드로 전환한 뒤 화면을 띄웠다. 방금 내보낸 나노 드론이 촬영하고 있는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드론은 승강장 높이 떠올라 아래를 전체적으로 담고 있었다. 이제 승강장엔 입을 꾹 다물고 기계적으로 일하는 몇몇 직원들뿐이었다. 짐도 시체도 거의 다 나르고 없었다. 유은우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다. 청소기 한 대가 홀로 승강장 끝을 느리게 맴돌고 있었다. 최정식의 시체는 어느새 거두어 가고 없었다. 바닥의 피도 어느 정도 사라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청소기 안은 빨아들인 피로 자박자박했다.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지?

초조했다. 지금 촬영되는 영상은 온하나비에 실시간으로 업로드되고 있을 터였다. 연구소 내부 사람들이 알아채기까지는 시간문제였다. 원래라면 낙원의 이론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확인한 직후 시작하려고 했던 촬영이었다.

그냥 지금 나가서 직원들 다 기절시키고 이동할까?

자신이 없지는 않았다. 드론 화면으로 확인했을 때 현재 승강장에 있는 직원들은 총을 소지한 자가 없었다. 다들 비동조자라는 뜻이었다.

저만치서 청소기 하나가 비정상적인 동선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정상적인 청소기라면 센서를 통해 주위의 오물을 감지하고 그 방향으로 움직일 텐데, 유독 하나가 주위에 널린 쓰레기를 무시하며 일직선으로 부지런히 달려오고 있었다. 방향은 정확히 유은우를 향하고 있었다. 그 청소기는 직원이 눈길을 줄 때마다 멈칫하면서 괜히 한 바퀴 빙그르 돌고, 직원들이 한눈을 팔면 다시 맹렬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더듬더듬 어설프던 움직임은 점차 매끄러워졌다.

도연이다.

유은우는 황급히 제 청소기 내부를 살펴보았다. 손도연이 자유롭게 움직인다면 자신도 움직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내부가 온통 피범벅인 데다가 그 와중에도 바닥으로부터 피가 사정없이 튀어 들어오고 있어 뭐가 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툭 거칠게 부딪혔다. 유은우는 황급히 화면을 확인했다. 승강장에 청소기 두 대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하나가 뒤로 조금 움직이더니 다시 다른 하나를 툭 밀어냈다. 동시에 유은우는 자신의 청소기가 무언가에 부딪히는 걸 느꼈다.

“은우야.”

속삭임이 들렸다.

“레버 당겨서 바닥 빼.”

유은우는 발아래에서 차갑게 식어 가고 있는 피 웅덩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필사적으로 바닥을 더듬었다.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힘껏 당겼다.

“거기 발 집어넣어서 밀어.”

딱 소리가 나면서 청소기 바닥의 일부가 분리되었다. 딱 발 하나 넣을 수 있을 만한 구멍이 생김과 동시에, 안에 고여 있던 피가 도로 우수수 흘러 나갔다. 누군가 보면 필시 이상하게 생각할 터였다. 최악의 경우 청소기를 열어 볼 수도 있었다. 유은우는 더 이상 많은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들키면 정면 승부뿐이었다. 구멍으로 발을 내려 바닥을 디뎠다. 피로 미끄러워 몇 번 헛발질했으나 금세 요령이 들었다. 조금씩 앞으로 움직였다. 화면을 확인하니 손도연은 벌써 저만치 나아가 승강장 입구 구석 쓰레기장 옆에 얌전히 대기하고 있었다.

간신히 손도연 옆에 도착했을 때, 유은우는 다리는 물론 온몸에 쥐가 나기 직전이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땀에 젖어 숨을 헐떡이는데 청소기가 발칵 열렸다. 팔을 잡히고 일으켜 세워졌다.

“너 엉망이다. 이거 입어서 가려.”

숨 돌릴 틈도 없이, 지저분한 실험복이 품에 와락 던져졌다. 유은우는 일단 실험복에 팔을 꿰었다. 손도연은 유은우에게 실험복을 건넨 뒤 곧바로 쓰레기 더미 속에서 버려진 실험복을 하나 더 꺼내 훌훌 털었다. 긴장한 기색으로 실험복을 재빨리 걸치는 손도연의 팔을, 유은우는 잡아당겼다.

“도연아, 내가 드론 띄웠어.”

손도연이 실험복 소매를 걷어붙이다가 눈을 크게 떴다.

“벌써? 낙원의 이론 증거 찾아내면 그때부터 촬영하기로 했잖아.”

“너무너무 화가 나서.”

자꾸만 눈에 눈물이 고여 앞이 어른거렸다. 누군가를 위해 울어 줄 시간이 없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손도연은 고개를 빼서 승강장을 힐끔 훔쳐보았다. 사회적 약자에게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다던 손도연은, 유은우를 책망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물을 뿐이었다.

“아까 돌아가신 것 촬영됐을까?”

유은우는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나였어도 드론 띄웠을 거야.”

손도연이 힘주어 대답하여 유은우는 간신히 눈물을 삼켰다. 손도연이 이어 속삭였다.

“도시연합이 지금 동영상 추적 들어갔다고 치면 얼마나 남았지? 외부망 찾아서 온하나비 동영상 업로드 차단하기까지.”

“한 시간. 그런데 그 전에 연구소 사람들한테 먼저 들킬 가능성이 커. 여덟 도시 시민 전체가 동시 접속할 테고, 당연히 여기 직원들도 온하나비 볼 테니까.”

“좋아. 그럼 우리 여차하면 정면 돌파하자. 들켜도 상관없어. 이미 아까 그 시체들을 촬영해서 내보낸 것만으로도 우린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꼭 낙원의 이론만이 도시연합의 비리는 아니잖아.”

유은우는 손도연과 함께 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악물고 실험복 끝자락을 끌어당겨서 얼굴을 마구 비벼 눈물을 떨어냈다. 심호흡했다. 찬찬히 주위를 살폈다. 몸을 숨긴 쓰레기장 너머를 기웃거려 보니 직원들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승강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끔했다. 이따금 서늘한 소독약 냄새가 스칠 뿐이었다.

손도연이 말했다.

“승강장이 있는 걸 보니까 여긴 지하 4층이야. 지상 5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가자. 드론까지 띄웠으니 천천히 숨어서 이동하는 건 의미가 없잖아. 저거 일회용이라 한 번 켜면 중간에 끄는 것도 안 된다며.”

유은우는 화면을 조작해 나노 드론을 불러들였다. 손으로 낚아챘다. 유은우의 손바닥에 카메라가 가려 화면이 캄캄해졌다.

“일단 이렇게 가릴게.”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복도 안쪽으로 이동하며 동시에 신체 강화제를 흡입했다. 계단을 통해 다급히 뛰어 올라가는 동안 직원 서넛을 마주쳤다. 유은우가 뭘 어찌하기도 전에, 직원들이 먼저 들고 있던 양동이나 유리병을 황급히 보호하듯 끌어안으며 계단 안쪽으로 피했다. 그들은 무법자처럼 계단을 뛰어오르는 낯선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기보다, 당장 제 손에 들린 것이 잘못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묘한 인상을 풍겼다. 그러나 인터컴으로 통화를 하면서 내려오던 한 연구원은 달랐다. 그는 유은우를 바로 알아보았다. 바로 소리를 지르려는 것을 급소를 쳐서 기절시켰다. 그 뒤로는 방해꾼 없이 쭉쭉 올랐다.

이상하게 오가는 사람이 적네. 자주 쓰는 통로가 아닌가?

4층 층계참에 막 올라섰을 때였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없었다. 막다른 곳에 서서 손도연이 당황해했다.

“여기가 끝이야. 5층이 있긴 한 건가?”

유은우는 반사적으로 암기한 평면도를 떠올렸다. 텅 비어 깜깜했다. 현재 발을 디디고 있는 4층과 목표로 하는 5층. 두 층의 구조는 외부에 공개된 적이 없었다. 사전 정보가 전무했다.

유은우는 다급히 속삭였다.

“4층 중앙에 5층으로 가는 전용 계단이 따로 있을 수도 있어. 우리 이쪽으로 쭉 올라오는 동안 사람 많이 못 마주쳤잖아. 분명히 계단이 이것만 있는 건 아닐 거야. 복도로 들어가 보자.”

손도연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몸을 기울여 계단 안쪽 복도를 바라보았다. 한산한 이쪽과 달리 많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손도연이 곧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은우는 쥐고 있던 드론을 손도연에게 넘겼다. 손도연이 드론을 야무지게 받아 쥐고는 다른 손으로 총을 뽑았다. 유은우는 손을 등 뒤로 돌려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대로 위로 당겼다. 차가운 소리를 끌며 검이 희게 튀어나왔다. 검 끝이 바닥에 닿으며 맑은 소리를 냈다.

그 뒤로는 복도를 통과하는 것만 생각했다. 갑작스레 무기를 들고 튀어나온 유은우와 손도연을 본 직원들은, 처음에는 당황하며 피하는 데 급급했다. 그러나 곧 총을 들어 반격했다. 유은우는 그 모든 것을 쉬이 튕겨 내고 이따금 위협을 주기 위해 부수었다. 복도가 끝을 보이고 있었다. 앞으로 시야가 트이기 직전이었다.

비상 사이렌이 내리꽂혔다.

― 비상입니다. 연구소 내에 무단 침입자가 발생했습니다. 침입자는 총 두 명으로, 김서혁 전 총사령관의 전리품 유은우와 도시연합 중앙학교 1학년 학생으로 추측됩니다. 그들은 드론으로 연구소 내부를 촬영하여 그 영상을 온하나비 사이트에 실시간 업로드하고 있으며, 현재는 카메라가 가려지고 마이크의 잡음이 심해 침입자의 정확한 위치와 동향은 파악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직원들은 즉각 모든 공정을 중지하여 내부 정보가 유출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 주시고, 침입자나 외부 드론 목격 시 경호팀으로 연락 바랍니다. 또한, 온하나비는 현재 최다 동시 접속자 수를 갱신하고 있습니다. 현재 도시연합은 온하나비가 사해의 외부망을 통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신속한 사이트 폐쇄를 위해 기술팀을 해당 지역으로 급파하였으나, 사해의 기상이 악화되어 외부망 차단까지 최소 40분은 소요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부서별로 중지한 모든 공정은 이후 안내 방송에 따라 재개하길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안내 방송은 종료되는 듯하다가 재개되었다.

―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침입자는 외곽 계단을 이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5초 후 방화벽이 작동합니다. 전 직원은 노란 선에서 물러나 주십시오. 5, 4…….

유은우는 앞서가는 손도연의 발 지척에서 노란 선을 발견했다. 밟기 직전이었다. 이를 악물고 속도를 붙였다. 손도연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 ……3, 2…….

그대로 앞으로 몸을 던졌다.

― ……1

서 있던 자리로 방화벽이 무자비하게 쾅 떨어졌다. 하마터면 손도연은 압사하고, 유은우 혼자 뒤에 남겨질 뻔했다. 등골이 서늘했다. 도저히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작동 방식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사람을 해쳐서라도 내부를 은닉하고야 말겠다는 악의만 선명했다.

유은우가 견고한 방화벽을 노려보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엎드려!”

손도연에게 바로 소매를 잡혔다. 유은우는 즉각 몸을 낮추었다. 손도연이 바닥에 납작 붙은 채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저기, 저것 좀 봐…….”

둘은 복도 끝 난간에 매달려 있었다. 아래는 까마득한 낭떠러지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하4층부터 현재 4층을 지나 위로 보이는 5층까지 통째로 가운데가 비어 있었다. 마치 거인이 거대한 봉을 집어다가 건물 한가운데로 힘차게 박고, 그대로 쑥 빼낸 것처럼 가운데가 둥그런 원기둥 형태로 비어 있었다. 몸을 살짝 움직여 아래를 보니 지하 4층까지 그 단면이 그대로 보였다. 고개를 드니 계단으로는 갈 수 없었던 5층이 보였다. 둥그렇게 둘러선 5층의 문마다 호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위는 투명한 유리 천장으로 쾌청한 하늘이 보였다.

연구소는 거대한 아트리움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왜 여태 계단에 인적이 드물었는지 알 것 같았다. 많은 사람이 중앙의 에스컬레이터나 좁고 긴 나선형 계단을 통해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거대한 금속 덩어리가 있었다. 각 벽면으로부터 솟아난 와이어로 허공에 단단히 고정된 그것은 가로세로 수 미터의 위용을 자랑했다.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그 금속 덩어리는 어떤 장기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금속 표면에 드문드문 모자이크처럼 붉은 조직이 조각조각 덧붙여져 있었는데 살아 꿈틀거렸다. 그 밑에 가느다란 관 여러 개가 뻗어 내려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손도연이 탄식했다.

“은우야, 여기 산란실인가 봐.”

그것은 용의 자궁이었다. 1000년이 넘도록 제5도시를 지탱해 온 핵이었다. 사해의 오염된 온으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동시에, 인간의 손에 의해 금속이 덧대져 팽창한 만큼 너덜너덜해진 어떤 조각이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압도적으로 거대했으나 그래서 초라하게.

손도연은 홀린 듯이 자궁의 형태를 잃은 자궁을 응시했다. 난간을 붙잡은 손마디에 힘이 들어가 희게 질려 있었다. 손도연이 중얼거렸다.

“저번 달 연구지에 자궁이 원 형태로 건재하다고 사진까지 실려 있었는데…….”

유은우는 난간에 이마를 붙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궁으로부터 뻗어 나온 가느다란 관들은 3층의 컨베이어 벨트로 연결되어 있었다. 관 끝에서 무언가가 콩콩 떨어지고 있었다. 희고 둥근 알이었다.

유은우는 내뱉듯 말했다.

“학교에서 배운 시스템이랑 많이 다른데. 친환경 산란을 지향한다고 하지 않았어? 자궁이 스트레스 받지 않게 하루에 한 개만 낳는다며. 그래서 용의 알이 귀하다고. 그런데 지금 보니까 거의 5초에 하나꼴로 나오는 것 같은데. 과자 공장도 이거보단 느리겠다…….”

유은우는 점점 화가 치밀었다.

“용 연구소는, 또 도시연합은 대체 왜 거짓말을 하는 거야? 저렇게 해야만 하는 사정이 있다면 그렇다고 밝히면 되잖아. 숨기고 감출 게 아니라…….”

“그 사유가 정당하지 않아서 은폐했다고밖에 볼 수가 없어.”

손도연이 잘라 말했다.

직원들이 컨베이어 끝에서 알을 수거하여 수레에 실었다. 대다수가 유은우가 품었던 알처럼 얼룩지고 찌그러진 못난 형태였고, 간혹 깨끗한 타원형이 있기도 했다. 직원들이 빠르게 알을 가려내어 3층 전벽에 칸칸이 설치된 부화실에 넣었다. 어떤 부화실은 삐삐 알람이 울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직원들이 신속히 달려가 문을 열고 깨진 알이나 부화된 새끼 용을 꺼내었다. 장갑을 낀 직원들의 손에 들린 새끼 용들은 축 늘어져 있었다. 이 비실비실한 용들은 간혹 힘겹게 기침을 하거나 몸을 떨었는데, 그때마다 용의 주둥이에서 날카로운 금속 찌꺼기가 튀어나왔다. 그런 불량한 상태의 새끼 용들은 즉각 바로 옆의 기계에 넣어졌다. 직원이 기계의 레버를 당기면 안에서 뼈와 살점이 갈리는 끔찍한 소리가 났다. 막 산란된 알이 컨베이어마다 일렬로 나란히 움직이고, 바로 옆에서 부화한 새끼가 처분되는 과정이 동시에 일사불란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손도연이 창백한 낯으로 물었다.

“은우야, 나 드론 띄워도 돼?”

“띄워.”

유은우는 검을 고쳐 쥐며 이어 말했다.

“이것보다 더 큰 은폐가 있을까 모르겠네. 띄우고 나한테 업혀. 5층으로 올라가자.”

손도연이 쥐고 있던 손을 펼쳤다. 나노 드론이 날벌레처럼 우웅 날아올랐다. 동시에 유은우의 이프 화면도 밝아졌다. 인공적으로 비대해진 자궁과 그 아래 컨베이어가 똑똑히 촬영됨을 확인하고 나서 유은우는 일어섰다. 손도연이 총을 빼 든 채 업혀 왔다. 둘 다 약물로 신체 강화된 상태라 업고 업히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행동에 제약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전 직원에게 알립니다. 외부 드론이 5층 높이에서 아래를 촬영하고 있으며 침입자는 중앙 4층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직원들은 개인 안전에 유의하시고 즉각 모든 공정을 중지하시기 바랍니다.

여태 마주쳤던 흰 실험복이나 회색 작업복 차림이 아니었다. 짙은 색의 제복을 입고 홀스터에 총과 약물까지 제대로 갖춘 경호원들이 이쪽을 향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중 몇이 총을 뽑았다.

탕!

유은우는 바닥을 박차고 도약했다. 방금까지 디디고 섰던 난간이 콰직 우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대로 허공의 와이어를 잡아챘다. 5층 벽면에서 자궁과 이어지는 와이어였다. 유은우와 손도연의 무게를 감당하며, 와이어가 크게 휘청거렸다. 따라서 자궁도 흔들렸다.

“자궁이…….”

“조심해!”

“전원 사격 중지! 사격 중지!”

“침입자를 생포하라는 상부의 지시입니다!”

유은우는 개의치 않고 와이어를 따라 자궁에 안착했다. 진짜 용의 자궁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금속판만 골라 디디며 기어올랐다. 자궁의 꼭대기에 올라서기까지 순식간이었다. 지하까지 9층 높이에 달하는 아래가 아찔했다. 등 뒤에선 손도연이 매달린 몸에 힘을 주는 게 느껴졌다.

연구원들이 경호원을 향해 악을 썼다.

“안 돼! 총 내려! 침입자 하나 잡겠다고 자궁이 손상되면 어쩔 거야?”

“드론부터 파괴하십시오! 지금도 영상이 실시간으로 유출되고 있잖아!”

경호원 여럿이 와이어를 디디며 이쪽으로 접근했다. 자궁이 그 무게를 못 견디고 크게 기우뚱거렸다. 끼이이잉 와이어가 팽팽해지는 소리에 연구원 몇이 질겁했다. 설계로 몸무게를 절반은 줄이고 움직이는 거라는 경호원의 반박에도 그들은 여태 나방 한 마리 못 앉게 지켜 왔다며 제정신이 아니었다.

“은우야, 2시 방향!”

유은우는 손도연이 지목한 방향을 대놓고 바라보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5층을 대강 훑었다. 이미 경호원과 직원들로 우글우글했다. 그들은 허공을 잽싸게 날아다니는 유은우의 드론을 잡으려고 혈안이었다. 정윤환의 설계를 입은 나노 드론은 모든 추적선을 매끄럽게 피하며 공중에서 곡예를 부리고 있었다. 힐끔 이프의 화면을 보니 역시 마구 어지러워 피사체의 식별이 어려웠다.

문득 뒤로 온이 꽉 죄었다. 누군가 방아쇠를 당김을 직감한 유은우가 즉각 검을 휘둘렀다. 흰 궤적이 초승달처럼 날아 상대의 총을 쳐 냈다. 유은우에게 손목을 강타당한 경호원이 몸을 비틀거리자 와이어가 당겨지며 불안한 소음을 냈다.

유은우는 곁눈질로 2시 방향을 확인했다. 확실히 중요한 장소이긴 한 모양인지, 503호라고 적힌 문 앞은 경호원이 진을 치고 있었다. 문득 왼쪽이 심상찮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521호 앞에서 경호원 여럿이 동시에 드론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저마다 방아쇠를 반쯤 당기고 있었고 총구에 설계가 아스라이 맴돌며 빚어지고 있었다. 드론이 쉬이 잡히지 않자 연합 사격을 펼칠 태세였다. 군에서 김서혁이 펼치는 연합 사격을 보다가 지금 경호원들이 하는 모양을 보니 그 단계가 아주 느리고 분명하게 느껴졌다. 유은우는 자만하지 않으려 애썼다. 이프의 시간을 확인했다. 도시연합에서 외부망을 파괴하기까지 30분도 채 남지 않았다.

“도연아, 꽉 잡아!”

유은우는 그대로 이를 악물고 자궁을 박찼다. 그 반동으로 와이어가 핑 하고 끊어지는 기척이 났다. 비명 사이로 검을 반 바퀴 휘두르면서 5층 난간에 발을 디뎠다. 파공음이 일며, 연계 설계를 시도하던 경호원들이 양쪽으로 휩쓸려 나갔다. 521호 앞에 만들어 놓은 여백에 착지한 후, 유은우는 즉각 503호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힐끔 자궁을 보니 상황이 심각했다.

“저러다가 추락하겠어! 보완해, 어서!”

“전원 아래로 내려와! 무게를 못 견디잖아!”

지지하던 와이어가 절반 이상 끊어져 용의 자궁은 허공에 위태롭게 매달려 이리저리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 주위를 매끄럽게 날고 있는 드론을, 유은우는 이프를 조작해 가까이 불러들였다.

곧 사방에서 크고 작은 타격이 온갖 설계를 입고 날아들었다. 검을 고쳐 쥐었다. 등 뒤에 매달린 손도연의 범위를 고려하느라 방어가 까다로웠다. 모의 전투실에서 업었던 솜 인형과 무게는 비슷했으나, 상처를 입으면 솜이 아니라 피가 나올 거라는 사실이 유은우를 긴장하게 했다.

503호를 목전에 앞두고 유은우는 그만 발이 묶였다. 바닥을 타고 온 속박 설계를 미처 인지하지 못해 딱 걸린 탓이었다. 발이 바닥에 붙은 채 서서히 얼어붙었다. 손도연이 총을 뽑아 유은우의 발에 여러 번 사격했다. 속박 설계 해제에 연사는 필요 없었으나, 계속해서 실패했기 때문에 손도연은 반복해서 방아쇠를 당겨야 했다. 손도연의 몸이 덜덜 떨리며 숨이 거칠어지는 것이 등으로 확연히 느껴졌다.

여기서 손도연이 풀지 못하면 끝장이었다. 그러나 유은우는 짐짓 태연을 가장하며 사방에서 밀려오는 공격들을 차례로 쳐 냈다. 손도연에게 부담을 주면 좋을 것 없었다. 그렇다고 유은우가 직접 검으로 속박 설계를 깨기도 어려웠다. 구속 계통 설계가 흔히 그렇듯, 적의 설계는 유은우의 발과 다리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검으로 잘라 내려면 못 할 것도 없었으나, 그 짧은 시간이라도 적에게 빈틈을 줄 수 없었다.

시계가 간절했다. 여러 부품으로 나뉘어 다양한 활용이 가능했던 시계에 반해, 검은 그저 짧은 반경의 일회성 공격과 둔하게 넓은 방어가 전부였다.

손도연이 여덟 번째쯤 방아쇠를 당겼을 때, 유은우는 그만 발이 잘려 나가는 줄 알았다.

“미, 미안!”

손도연이 울먹였다. 유은우는 대꾸할 정신도 없이 머리 위로 검을 깨끗이 그었다. 묵직하게 떨어지던 그물 모양의 이름 모를 설계가 반으로 갈라지며 빛의 파편으로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손도연이 아홉 번째로 사격했다. 잠시 따끔하더니 발의 감각이 확 돌아왔다.

“됐다!”

손도연이 안도했다. 유은우는 즉각 자리를 벗어났다. 뒤로 무언가가 날아와 벽면에 부딪치고 산산조각 났다. 그 파편이 전신을 날카롭게 스쳤다. 유은우는 검을 고쳐 쥐었다. 모의 전투에서 성공했던 공격을 재차 시도할 생각이었다. 검 손잡이를 두 손으로 단단히 쥐고 검 끝을 아래로 했다. 검날이 희게 번득였다. 그대로 바닥을 강하게 찍었다. 가까이 접근하고 있던 경호원들 사이 바닥을 찢고 새파란 빛줄기가 튀어 올랐다. 급소를 노리진 않았으나 충분히 위협적인 공격에 경호원 무리가 주춤 몸을 물렸다. 여태 유은우가 보인 공격의 양상과 확연히 달라 더욱 효과가 좋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유은우는 503호 문 앞을 차지했다. 검을 앞으로 겨누며 문을 등지고 똑바로 섰다.

“도연아, 내 왼쪽 주머니에 카드!”

손도연이 유은우의 가운을 젖히고 도복 주머니에서 카드를 빼 가는 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손도연이 유은우의 등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몸이 가벼워졌다. 보안 해제음이 났다.

“열렸어!”

손도연이 환호했다. 유은우는 마지막으로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날아드는 설계를 그리 부순 뒤, 손도연이 당기는 대로 뒷걸음질 쳐서 503호 안으로 들어섰다. 드론이 왱 하고 귓가를 스치며 따라 들어왔다. 손도연이 황급히 문을 쾅 닫았다. 자동으로 문이 잠겼다.

유은우는 숨 돌릴 새도 없이 문에 등을 붙이고 전방에 검을 겨누었다.

한세연 개인 연구실로 알고 왔으나 홀로 쓴다기에는 책상이 정말 많았다. 어림잡아 일곱 개는 족히 되었다. 책상마다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고, 천장에 매달린 모니터도 제법 되었다. 책상마다 가득한 문서들은 넘치다 못해 바닥까지 흘러내려 어지러웠다. 그 종이 더미 사이로 머그컵이 산에 깃발 꽂히듯 드문드문 놓여 있었는데, 하나같이 갈색 커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나마 있는 여백은 열댓 개가량의 의자로 빼곡했다. 의자 등받이마다 흰 실험복 가운이 혼이 빠진 시체처럼 툭툭 걸쳐져 있었다.

“아무도 없나?”

손도연이 중얼거렸다. 유은우는 천천히 검을 내렸다가 화들짝 고쳐 쥐었다.

높이 쌓인 서류 더미 사이로 웬 남자 하나가 엉거주춤 서 있었다. 부스스한 까치집 머리에 많아 봤자 20대 후반으로, 너절한 실험복 가운을 걸친 채 멀건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꺼운 안경 너머 얼굴이 선량했다. 그는 양손 가득 파일철을 여럿 쥐고 있었는데, 파일 안에서 서류들이 계속 흘러나와 바닥에 흩어지고 있었다. 그 종잇장 사이로 곰돌이 슬리퍼 한 쌍이 보였다.

유은우는 그제야 깨달았다. 청소기 너머로 들었던 그 익숙한 목소리가 누구였는지.

노석원. 유은우가 인큐베이터에 누워 숨만 쉬던 시절 군 소속 연구원으로 일했던 남자였다. 다소 따뜻하고 매우 산만하게 유은우를 보살폈었다. 이후 유은우가 김서혁 밑에서 한창 훈련할 무렵, 노석원은 군에서 용 연구소로 소속을 옮겼었다.

그 와중에도 문 너머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쾅쾅 때리는 소리로 요란했다. 급기야 총성까지 울렸다. 노석원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나마 손에 쥐고 있던 파일들이 통째로 바닥에 떨어졌다.

손도연이 총을 뽑아 노석원을 겨누었다. 노석원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두 손을 항복하듯 위로 들어 올렸다. 손도연이 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그러나 또박또박 말했다.

“용 연구소도 낙원의 이론에 협조하고 있지? 용 비늘을 학교에 공급한 게 사실인지, 다른 은폐된 사실이 있는지 말해.”

“……어?”

노석원의 벌어진 동공이 저를 향한 시커먼 총구를 향했다가, 검을 바닥에 늘어뜨린 유은우를 보았다가, 부서져라 쾅쾅 울리고 있는 문으로 옮겨 갔다가, 허공에 매끄럽게 멈춰 서서 카메라를 돌리고 있는 나노 드론을 스쳐, 다시 유은우를 향했다. 그가 중얼거렸다.

“다시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이런 식은 아니잖아…….”

손도연이 총을 단단히 겨눈 채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조금.”

유은우는 주저하며 대답했다. 검을 바닥에 끌며 몇 걸음 다가섰다. 노석원의 뒤로 커다란 배낭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배낭은 입구가 한껏 벌어져 있었고 그 안에 여러 물건이 아무렇게나 쑤셔져 터질 것 같았다. 원통형 메모리 보관 용기 여러 개가 미처 다 들어가지 못하고 절반쯤 나와 있었다.

노석원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용 비늘은 나도 몰라. 진짜야. 그건 저 밑에 자재부 직원들이 알겠지.”

손도연이 지지 않고 말했다.

“그럼 아는 걸 말해. 도시연합은 낙원의 이론을 통해 시민을 걸러 내고 있고, 용 연구소는 그 작업에 용 비늘을 공급했다는 의혹을 받자마자 잠정 폐쇄되었어. 아무 연관 없을 리가 없어. 관련 자료를 내놔.”

노석원이 초조한 낯으로 자신을 촬영하고 있는 드론을 힐끗 쳐다보았다. 자신의 미간을 겨누고 있는 손도연의 총구는 이미 잊은 것 같았다. 그는 당장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총이 아니라, 문이 부서져라 밀고 들어오려는 같은 연구소 직원들이 아니라,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하는 카메라를 의식하고 있었다. 분명 무언가 알고 있을 거라는 직감이 왔다. 사실 한세연 개인 연구실에 홀로 들어와 있다는 것부터 범상치는 않았다.

유은우는 승강장에서 들었던 노석원의 말마디를 기억했다.

‘저희가 일부러 용을 놔주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 같습니다.’

노석원은 차인호를 경계하는 인상을 풍겼다. 그렇다면 최소한 온전히 도시연합 편은 아닐 거라고 짐작되었다. 그러나 여덟 도시의 전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시연합을 대놓고 등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유은우는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성큼성큼 걸어가 검 등으로 배낭을 쳤다. 노석원은 자신이 검에 맞은 것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배낭에 아슬아슬하게 꽂혀 있던 메모리 보관 용기 하나가 가장 먼저 튀어나와 데구루루 굴러 유은우의 발치에 멈추었다.

유은우는 용기를 검으로 때려 부수었다. 투명하고 끈적한 보관 용액과 함께 은색으로 빛나는 메모리가 외딴 조각배처럼 바닥으로 흘러나왔다. 집어서 옷에 대강 문질러 닦았다. 가장 가까운 책상에 쌓여 있는 문서들을 손으로 밀어 전부 아래로 떨어뜨려서 모니터가 온전히 잘 보이도록 했다. 모니터 아래에 메모리를 꽂아 넣었다. 화면이 지지직거렸다. 유은우는 드론이 잘 촬영할 수 있도록 몸을 뒤로 물렸다.

화면이 떠올랐다.

글자들. 새카만 글자들이 무수히 많이 떠올랐다. 화면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서 자동으로 아래로 쭉쭉 내려가며 그 밑으로 수많은 이름을 뱉어 냈다. 이름마다 뒤에 숫자가 붙어 있었다. 1부터 8까지, 여덟 개 숫자 중 하나가 붙어 있었다. 유은우는 그중 이름 몇 개를 읽었다. 어감이 이상하게 낯설어 입에 바로 붙지 않았다.

“……이게 뭐야?”

손도연이 다소 김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냥 제1도시부터 제8도시 시민들 명단인가?”

추리하고 있을 시간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유은우는 노석원의 뒷덜미를 잡아 그 머리를 옆 책상에 처박았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서류들이 일시에 풀썩이고, 간간이 놓여 있던 필기구와 종이컵이 우수수 떨어졌다. 틀어쥔 노석원의 뒷덜미가 빠르게 맥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마음이 약해졌다.

노석원은 군에서 몇 번이나 유은우를 찾아왔었다. 매번 접수처에서 거절을 당해도 포기하지 않고 면담을 요청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주 보았을 때, 그는 유은우의 체질에 맞는 음식과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약물이 빽빽이 적힌 메모를 건네며, 씩씩하게 살라고 말했었다. 어떤 조언도 없는 완벽한 응원이었다.

느슨해진 손을 다잡았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강제적으로 협박하는 것이, 혁명이 실패할 최악의 경우 노석원에게 유리했다. 자진해서 술술 불기보다 유은우의 폭력에 의해 마지못해 뱉는 모양이, 후에 노석원에게 빠져나갈 틈을 줄 터였다.

“설명해.”

낮게 내뱉었다. 문밖에서 크게 쾅 하는 소리가 났다. 잠긴 문 중앙으로 금이 쩍 갔다. 노석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며, 명단이야. 낙원의 이론으로 걸러 낸 명단…….”

손도연이 여전히 노석원에게 총을 겨눈 채 물었다.

“지금 도시연합이 낙원의 이론으로 시민들을 통제한다는 게 사실이야? 네가 이 메모리를 가지고 있다는 건 용 연구소도 낙원의 이론에 동조한다는 증거인가?”

“그건…….”

노석원이 힘겹게 말했다.

“……1000년 전 명단이야.”

잠깐 침묵이 있었다. 바깥에서 쾅 하는 소리가 났다. 문손잡이가 덜컥거렸다. 노석원은 가쁜 호흡으로 말했다.

“그, 그건 지금의 도시연합이 뽑아낸 명단이 아니야. 오래전 거야. 처음 도시가 만들어졌을 때 정부가 낙원의 이론을 사용해서 인간을 걸러 냈어. 그때 그 명단이야.”

손도연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낙원의 이론이 존재한다는 게 사실이야?”

나노 드론이 허공을 맴돌았다. 유은우는 이프의 화면을 확인했다. 노석원이 책상에 얼굴을 처박고 띄엄띄엄 대답하는 모양이 고스란히 촬영되고 있었다.

“이, 있어. 반란군이 시민들을 선동하려고 거짓으로 뿌린 말이 아니야. 실제로 존재해. 제국 때 처음 만들어졌고, 지금은 도시연합이 쓰고 있다고 알아.”

유은우는 차예원의 말을 떠올렸다. 제국시대 말기, 중앙 산업단지가 폭발하고 용의 사체로 도시를 건설했지만 모든 인간을 다 수용할 수는 없었기에, 정부는 낙원의 이론을 활용하여 도시 거주 승인 명단을 비밀리에 만들었다고 했다.

유은우는 노석원을 압박하면서 발로 이미 엎어져 있는 배낭을 걷어찼다. 배낭 속에서 보관 용기가 두 개 더 굴러 나와 손도연의 발아래 멈추었다. 손도연은 얼른 용기를 주워 열려고 했으나 지문을 요구하자 총으로 쏴 깨뜨려 버렸다. 그녀는 메모리 두 개를 건져 우선 하나를 가까운 본체에 끼웠다. 이번엔 천장에 매달린 모니터가 반짝 켜졌다. 영상이 재생되었다.

온통 흰색. 하얀 실험복을 입은 직원들이 바쁘게 오가는 너머로 거대한 철창이 보였다. 그 철창 안에 용이 가두어져 있었다. 길이는 1미터, 높이는 30센티미터가량 되는 성체로 무려 세 마리나 있었다. 한 마리는 맑은 옥빛을 띠었고, 다른 한 마리는 진주처럼 희었으며, 또 다른 한 마리는 밤처럼 새카맸다. 그중 까만 용의 아름다운 날개에, 유은우는 시선을 오래 주었다. 도시연합 본부 첨탑 끝에 있던 검은 날개 한 쌍과 닮아 있었다.

그때였다. 쇠창살 사이로 주둥이를 내밀고 송곳니를 드러내거나, 유연한 꼬리로 바닥을 쾅쾅 내리쳐 대리석을 부수고, 힘차게 뛰어올라 우리의 천장으로 부딪치는 등 사나운 성체 세 마리 사이로 어린 용 두 마리가 빠끔 고개를 내밀었다. 이윽고 톡 튀어 올라 까만 용의 꼬리 위로 장난치듯 올라탔다. 주둥이부터 꼬리 끝까지 어림잡아 사람 팔뚝 길이는 될까 말까 한 새끼 용 두 마리는 각각 새파란 눈과 새빨간 눈을 번득이면서 날카로운 발톱을 이용해 순식간에 검은 용의 등으로 기어올랐다. 덜 자란 새끼임에도 다 자란 용만큼 교만한 태도가, 유은우의 알에서 막 깨어 나왔던 그 새끼 용을 연상케 했다.

손도연이 한 발짝 모니터로 다가가며 중얼거렸다.

“저 까만 용, 지금 우리 도시마다 있는 용 조각이랑 동일해. 색깔, 크기, 비늘의 배열.”

총을 든 손을 늘어뜨린 채 손도연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저것도 1000년 전 자료야?”

노석원은 침을 삼킬 뿐 대답이 없었다. 손도연이 재차 물었다.

“1000년 전의, 아홉 조각으로 찢기기 전의 용이야? 그런데 그 옆에 다른 성체가 두 마리나 더 있잖아. 새끼도 두 마리 있고. 새끼는 성체가 되기 전에 죽어 버렸다 치더라도 다른 성체 두 마리는 어디 간 거야? 용은 불사라며. 1000년 전에 있었으면 지금도 있어야 하잖아. 저기서 도시로 건설된 용은 한 마리뿐이야. 나머지 두 마리는 어디 갔어?”

“죽었어.”

손도연은 침묵했다. 그녀는 용은 불사라는, 죽지 않는다는, 그러니 용으로 도시를 건설한 거 아니냐는 상식적인 반박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명료하게 말했다.

“교장은 알고 있었구나. 용이 불사가 아니라는 걸.”

유은우는 노석원을 누른 손에 재차 힘을 주었다. 노석원이 억눌린 채 말했다.

“용도 죽어. 수명이 징그럽게 길어서 마치 죽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용은 수명이 1000년이야. 그 전에 용이 죽는 방법은 단 하나, 자살뿐이야.”

유은우는 웅웅거리는 드론을 곁눈질로 확인했다. 분명히 물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용의 수명에 한계가 있다면, 저 세 마리 중 둘은 수명이 다해 죽고 수명이 남은 하나만 도시로 건설되었다는 말이겠지. 그럼 우리 도시도 언젠가는 무너져?”

“올해로 도시연합은 1030년이야.”

노석원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가 이를 악문 사이로 똑똑히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 없어. 잘 버텨야 이번 세대야. 도시연합이 지금 사해에 출현한 성체를 잡아서 도시를 보완하지 않는 이상, 우리 다음 세대는 사해에서 살아가야 해. 난민들처럼 정화 장치를 달고. 무법 지대에서 짐승처럼. 지금 도시연합은 마치 새로운 성체의 등장을 도시 확장의 기회인 것처럼 떠들고 있지만, 사실은 인류의 존폐가 달린 문제야. 사람 사는 방이 한 칸 늘어나는 정도가 아니고, 내려앉기 직전의 폐가에 인류가 태평히 들어앉아 있는데 새 집을 지을 자재가 등장한 셈이니까.”

손도연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럼 지금 사해에 있는 그 용으로 도시를 보강한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또 새로운 성체가 필요할 거 아니야 . 계속 그렇게 이어 나가는 게 가능해? 이번에 용의 성체가 나타난 것도 우리가 예상치는 못했잖아. 언제까지 기연에 의지할 생각인 거야?”

“글쎄. 또 거짓말로 하루하루 버티며 새로운 성체가 나타나는 행운을 바라겠지. 도시는 안전하다. 용은 불멸이다. 위에서 그렇게 말하면 아래에서는 믿을 수밖에 없잖아. 도시연합은 시민들에게 안정감을 줘야 할 테니까. 그리고…….”

유은우는 틀어쥔 노석원의 목덜미가 빳빳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노석원이 말했다.

“……도시가 무너지면 기득권도 무너져. 결정 권한을 가진 윗사람들은 도시가 유지되길 바라지.”

유은우는 노석원의 대답에서 미세한 균열을 느꼈다.

“마치 도시가 유지되지 않고도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 것처럼 말하네.”

쾅! 문이 사납게 흔들렸다.

“이, 이번에 사해에 나타난 용. 그 용이 머물다 가면 그 주위의 온 오염도가 급격히 하락해. 그 용이 오염된 온을 여과하고 있어. 그 속도하고 범위만 보자면, 최소 반년 내에 제1도시 면적만큼의 온이 인간이 생존 가능할 정도로 정화될 거라고 추측해. 다만 문제가 있다면…….”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온이 정화된 지역에서는, 총이 안 들어. 사람은 숨을 쉴 수 있는데, 동조자와 비동조자의 차이가 사라져.”

뒤가 서늘했다. 불과 며칠 전 이선규와 비슷한 대화를 했다. 제국시대에는 동조자가 희귀했다고. 그러나 도시가 건설되고 나서 동조자의 수는 갑작스레 폭발적으로 증가해 유효 시민의 1%에 육박한 뒤 꾸준히 유지되고 있었다.

“현재 도시연합의 기득권은 동조자가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어. 용이 사해를 정화한다면 인간은 자유로이 대지를 누비게 되겠지만, 그로 인해 동조자가 힘을 잃는다면 권력은 재분배될 수밖에 없어. 도시연합의 높은 분들 입맛에 껄끄러운 시나리오잖아. 그리고 용을 사해에 풀어 자연스럽게 온을 정화시키는 동안 도시를 지탱하던 용이 수명을 다해서 죽어 버리면, 그러면 시민들은 갑작스럽게 오염된 온에 노출되어 버려. 정부는 그에 대한 대안이 아무것도 없어. 정화 장치를 달고 사는 난민에 대해 부정적인 언론 플레이를 해 왔는데, 이제 와서 시민들에게 정화 장치를 권고한다면 입장이 우스워져.”

노석원의 목소리에 점차 힘이 실렸다.

“우리 포획팀은 사해의 용이 온을 지속적으로 정화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이미 여러 차례 올렸어. 용 연구소장님이 계속해서 반려했을 뿐이야. 그는 요행에 인류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다고 했어. 지금 용을 사로잡아 도시를 보완하면 1000년은 유지할 수 있겠지만, 사해의 용이 언제까지 또 얼마나 완벽하게 온을 정화할 수 있는지는 불투명하지 않냐고. 그건 너희 포획팀의 추측일 뿐이지 않냐고…….”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로 들리는데.”

유은우가 낮게 말했다.

손도연이 쥐고 있던 마지막 메모리를 또 다른 본체에 꽂았다. 가까이서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니터가 몇 번 깜박이다가 반짝 켜졌다.

한 사람이 완고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성별을 가늠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는 중년이었다. 화면엔 그 사람 혼자뿐이었다.

유은우는 영상 아래에 표시된 촬영 날짜를 확인했다. 1975년 4월 2일. 이 또한 도시 건설 전의 기록물이었다.

쾅! 문이 크게 흔들렸다. 금이 쩍 갈라졌다. 문손잡이가 떨어져 나갔다. 영상의 사람은 굳은 얼굴로 카메라를 직시할 뿐 입을 굳게 다물고만 있었기 때문에, 유은우는 스크린에 손을 대어 중간으로 건너뛰었다. 시간이 없었다.

― ……정부는 중앙 산업단지가 폭발하면서 유해 물질이 누출되어 사해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정부가 끝까지 진실을 은폐한다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 이 기록을 남깁니다.

목소리는 가늘었으나 깔린 뼈대가 단단했다. 여자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 저는 마지막 계약자입니다.

여자가 날카롭게 말했다.

― 현존하던 계약자 셋 중 하나는 용을 지키려다가 정부에 살해당했고, 하나는 배신자로 제가 살해했으니, 남은 계약자는 저 하나뿐입니다. 본래 계약자는 신분을 밝히지 않습니다. 제가 살해한 계약자가 먼저 룰을 어겼습니다. 탐욕에 눈이 멀어 정부에 용의 위치를 팔아넘긴 그자 때문에 이 모든 재앙이 닥쳤습니다. 상황이 심각함을 고려하여 저 또한 부득이 신분을 밝힙니다. 이는 제 발언에 힘을 싣고 뜻을 함께할 이들을 모으기 위함입니다.

유은우는 정신없이 여자를 응시했다. 고목처럼 메마른 인상이었으나 눈에 광채가 돌았다.

― 저희는 용과 계약함으로써 온디딤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힘을 얻고, 용의 예언을 전파할 책임을 집니다. 용은 멀고 가깝고를 가리지 않고, 명료하게 혹은 희미하게, 산발적으로 앞날을 내다봅니다. 저희는 그 예언 중 공익을 증진할 일부를 선별하여 최초 발원지를 가늠할 수 없도록 가공한 후 세상에 전달합니다. 이 계약 관계는, 옛 선조와 용 사이의 맹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예언을 취하려고 용을 구속하고, 용이 이에 반발하여 거짓 예언을 뱉으면서 발생한 분쟁 끝에, 용의 자유를 보장하며 인간도 예언을 선사받을 수 있도록 서로 간에 합의된 내용입니다.

여자가 딱딱하게 말했다.

― 하나 계약자도 사람인지라 잘못된 결정을 내리기도 합니다. 선대의 한 계약자는 용의 예언 없이, 인간 스스로 미래에 일어날 사건의 확률을 계산할 수 있도록 어떤 객관적인 메커니즘을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계약한 용을 산 채로 해부하여 얻은 지식으로 어떤 시스템을 만들어 냅니다. 한때 일상 깊숙이 파고들었으나 악용을 경계하여 현재는 활용이 금지된 낙원의 이론이 그 산물입니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오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배신은 없었습니다.

여자가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가 이어 말했다.

― 1974년 9월경, 정부는 계약자의 밀고로 용의 서식지를 알아낸 뒤 급습했습니다. 정부는 현존하는 용의 전부, 즉 성체 세 마리와 새끼 두 마리를 탈취하여 산업단지로 이송하였습니다. 정부의 목적은 현존하는 계약자 세 명에 버금가는 힘을 자체적으로 구현해 내는 것입니다. 계약자의 힘의 원천은 용과 계약하며 발현되므로 정부는 용을 대상으로 비인도적인 실험을 진행코자 했습니다. 그러나 실험은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연구진의 부주의로 산업단지가 대규모로 폭발하며 많은 사상자를 냅니다. 이는 도저히 은닉할 수 없는 규모였으므로, 현재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언론을 통해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 정부가 계속해서 관련 자료를 폐기하고 있어 후대에 올바르게 전해질지는 장담이 어렵습니다.

문 너머로 밀어붙이는 소음이 더욱 커졌다. 유은우는 재빨리 연구실을 살폈다. 창문은 있지도 않았다. 도망치려면 벽을 부수고 뛰어내리는 방법뿐이었다. 고작 지상 5층이었고 흡입한 신체 강화제는 유효했다. 다만 뛰어내린 후가 문제였다. 어디로 도망칠 것인가? 연구소에 몰래 잠입했다가 몰래 빠져나오겠다던 야심차고도 안일한 계획은 이미 물 건너간 지 오래였다. 당장 생각나는 것은 제5도시 광장 한복판이었다. 각 도시마다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시위를 벌이고 있다고 했으니, 보는 눈이 많은 곳으로 가면 그래도 도시연합에 의해 즉결 처분 당하는 최악의 상황은 늦출 수 있을 거라는 한 가닥 희망이 있었다.

― 폭발의 여파로 새끼 용 두 마리는 즉사했습니다. 성체 세 마리는 크게 다쳤으나, 용의 경우 성체가 되고 1000년의 수명을 채우지 않을 경우 어떤 형태로든 생존하므로 숨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얼마 가지 못합니다. 세 마리 중 두 마리가 수명을 다해 죽고, 성체가 된 지 얼마 안 된 용 한 마리만 숨이 붙어 있습니다. 저와 계약한 용입니다.

여자가 감정 없이 말을 이었다.

― 현재 가장 큰 문제는 온의 오염으로 인한 사해화입니다. 대지가 눈처럼 흰 모래로 뒤덮이고 대기에 지독한 유황 냄새가 떠돌고 있습니다. 온의 조절을 관장하는 성체의 급격한 개체 수 감소와 그나마 남은 한 마리의 부상으로 온이 충분히 여과되지 못해 발생한 현상입니다. 중앙 산업단지 대규모 폭발로부터 반년이 흐른 지금, 용과 가장 멀리 떨어진 제국의 가장자리부터 사해화가 진행되어 현재 대륙의 10%가량이 황폐화되었으며,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인간을 비롯한 수많은 생명체가 침식되어 기계화한 괴물로 떠돌고 있으며, 간신히 살아남은 인구는 용이 위치해 가장 안전한 정부청사를 목표로 대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에 정부는 타 지역민의 수도권 진입을 철저히 막으며 조악한 정화 장치를 보급하고 있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현재 인류는 유례없는 난관에 봉착해 있습니다.

손도연이 노석원의 배낭을 거꾸로 들고 털었다. 낡아서 모서리마다 녹이 슬고 액정이 깨진 전자 문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도연이 주워 들자 체온을 인식한 문서가 환하게 켜졌다.

― 이것은 명백한 인재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빚은 죄입니다. 우리는 묵묵히 기다려야 합니다. 다친 용의 부러진 뼈가 맞붙고 찢긴 상처 위로 새살이 돋아, 무사히 산란하여 용이 멸종하지 않도록 인내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용에 손을 대서는 안 됩니다. 용의 회복이 더뎌 인류가 전부 침식되어 멸하더라도 이 또한 죗값을 치르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손도연이 뚫어져라 전자 문서를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희게 질려 있던 낯이 딱딱해져, 손도연은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전자 문서를 유은우에게 내밀었다.

― 그러나 바로 어제, 1975년 4월 1일, 정부는 이 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제시합니다. 바로 용을 이용한 도시 건설입니다. 그들은 용이 완전히 치유되기 전에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르니, 하루라도 빨리 용을 이용하여 오염된 온으로부터 안전한 도시를 건설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옳은 일입니까? 마지막 남은 용마저 인간의 욕심으로 해한다면 이 재난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언론에 의하면 정부는 이미 용을 아홉 조각으로 해체하였습니다. 표면적을 늘려 도시를 최대한 확대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유은우는 노석원을 잡은 손에서 힘을 풀지 않으며 전자 문서를 바라보았다. 사진의 나열이었다. 사각 프레임마다 용이 있었다. 정확히는 용이 해체되는 과정이 있었다.

― 더 이상 인간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을 방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반정부 연대는 오늘부로 모든 평화 시위를 중단합니다.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정부로부터 용을 되찾아 오겠습니다.

유은우는 다시 화면을 응시했다. 여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강경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 우리는 비도덕적인 정부에 단죄를 가하고, 진실의 왜곡을 저지합니다. 먼 훗날 우리가 정부에 의해 반동분자로 기록되는 한이 있더라도 뜻을 굽히지 않겠습니다.

도시에 단죄를, 사해에 진실을. 현재 반란군의 슬로건이었다.

화면이 뚝 꺼졌다. 새까만 스크린에 유은우 자신의 낯이 모노톤으로 비쳐 보였다. 유은우가 낮게 물었다.

“그래서 저 사람들은 성공했어?”

노석원이 대답했다.

“심장만 겨우 가지고 나온 걸로 알아. 그리고 그 후 심장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몰라. 아직까지도.”

“최근에…….”

손도연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최근에 용의 산란이 빨라지지 않았어?”

노석원이 숨을 들이켰다. 그가 되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용도 알고 있는 거야. 자신의 수명이 다했음을. 생명체는 존속의 위기를 겪으면 후세 양산에 집착하게 되어 있어.”

그때였다. 나노 드론에서 깜박이던 빨간 불이 톡 꺼졌다. 동시에 이프의 화면이 그대로 나가 버렸다. 까맣게 빈 화면에 알림창만 덩그러니 떠올랐다.

온하나비 접속 불가.

콰앙!

문이 폭발했다. 묵직한 먼지구름이 들이닥쳐 시야가 뿌옜다. 유은우는 노석원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킨 뒤 그의 상체를 뒤로 껴안았다. 그대로 노석원의 목덜미에 검을 바짝 가져다 대었다. 노석원이 숨을 들이켜며 바싹 굳는 것이 느껴졌다.

손도연이 총을 들고 유은우의 등 뒤로 가까이 달라붙었다.

먼지구름을 헤치고 경호원들이 들이닥쳤다. 총신에 찍힌 동조율과 노련한 자세에서 상당한 실력자임이 느껴졌다. 하긴, 그렇게 문을 두드려 대는 동안에 전력을 재배치했어도 서너 번은 했겠지…….

탕!

첫 총성이 울렸다.

노석원 하나 따위 죽든 말든 날 먼저 제압하는 게 우선이라 이건가. 유은우는 속으로 욕을 뱉으며 인질 삼아 데리고 있던 노석원을 옆으로 내팽개쳤다. 검을 휘둘러 공격을 막아 내고 동시에 노석원을 발로 걷어차 책상 밑으로 구겨 넣었다.

경호원이 총을 겨눈 채 순식간에 이쪽으로 접근해 왔다.

손도연이 총을 연사했다. 그러나 이쪽의 전력이 형편없다는 것만 확인 사살하고 말았다. 유은우는 그런 손도연을 보호하듯 뒤에 두고, 전방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수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확실히 불리했다. 넓어 자유롭던 아까와는 차원이 달랐다. 유은우는 패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공격은 곧 빗발치듯 몰아쳤다. 사위를 두른 적이 점점 거리를 좁혀 왔다. 유은우는 모든 설계를 부수고 모든 타격을 받아쳤으나 도무지 벽을 부수고 뛰어내릴 타이밍은 잡지 못했다. 손도연의 머리가 날아갈 뻔한 것을 겨우 구하고 나자, 이대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진해졌다. 유은우가 빠르게 속삭였다.

“도연아, 내가 막을 테니까 넌 총으로 벽 부숴.”

손도연이 적을 향하던 총구를 즉각 벽으로 향했다. 사실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미 적이 둥그렇게 둘러싼 상황에서 벽을 부수려면 벽 앞에 선 경호원을 먼저 제거해야 했다.

손도연의 총이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튀어 오르는 동안, 유은우는 옆구리로 밀려오는 속박 설계를 반으로 잘라 낸 후 검날을 바닥에 댄 채 그으며 몸을 돌리면서 아래를 노리고 밀려오는 타격을 막아 냈다.

숫자가 너무 많아.

저쪽에서 아예 죽이려고 달려들었으면 진즉 시체로 나자빠졌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상대는 유은우를 조심히 다루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의 목숨을 중히 여기는 것은 유은우도 마찬가지였다. 김서혁을 따라다니며 반란군의 숨통을 끊던 옛날과 달리, 유은우는 처음으로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싸우고 있었다. 새삼 정윤환의 실력에 감탄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적을 죽이지 않고 급소만 쳐서 기절시키는 것뿐이라고 했다. 고작이라니. 정윤환은 가볍게 말했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일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유은우는 즉각 노선을 선회했다.

내가 안 죽이면 내가 죽어. 죽여서라도, 시체를 밟고서라도 빠져나가자.

그러나 공격을 펼칠 틈이 없었다. 연타로 방어만 했을 때였다. 허벅지가 서늘하더니 즉각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확인하지 않아도 치명상이었다. 유은우는 버티고 섰으나 손도연을 노리고 날아드는 설계를 부수었을 때, 아차 싶었다. 몸이 기울었다. 직후에 등을 맞았다. 둔중한 타격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검을 놓치지는 않았으나 그 검 끝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지탱해야 했다. 그 빈틈에 속박 설계가 내리꽂혔다. 직격으로 맞았다. 그 뒤로 엄청난 힘에 의해 검날에 우두둑 금이 가더니 산산조각 났다.

검이 부서져 의지할 데가 없어진 유은우는 그대로 무릎을 꺾고 쓰러졌다. 희미한 시야로 손도연이 이를 악물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보였다. 직후 굉음이 터졌다.

손도연이 줄곧 겨누던 벽면이 크게 무너졌다.

처음에 유은우는, 손도연이 성공한 줄 알았다. 그러나 벽은 밖으로 터지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터졌다. 무언가가 건물 밖에서 이쪽을 정확하게 내리치고, 그것도 모자라서 아예 일부를 들이밀고 있었다. 유선형의 반질반질하고 거대한 금속이 벽을 뚫고 들어왔다. 부속선이었다. 그것은 잠깐 뒤로 선체를 물리고는 다시 거칠게 파고들어 왔다. 건물 전체가 흔들렸다. 콘크리트 조각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손도연이 다급히 몸을 숙였다. 유은우는 손도연이 자신을 끌어안아 파편을 온몸으로 막아 내는 걸 알면서도,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정통으로 맞은 설계가 단순한 속박은 아니었는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손도연이 유은우를 필사적으로 안은 채 뒤를 돌아보더니 몸을 떨며 흐느꼈다.

“됐어, 이제 됐어…….”

뭐가 됐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감긴 눈꺼풀 위로, 둔한 감각 너머로 빛과 소리가 뒤엉켰다. 손도연이 무어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의식을 까무룩 놓치려는 찰나였다. 몸이 공중으로 가볍게 훅 들렸다.

유은우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한세연이었다. 그녀는 실험실 한가운데 우뚝 서서 경호원을 향해 총을 갈기고 있었다. 가냘픈 잎사귀 같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빈틈없이 차가운 낯. 꾹 다문 입매. 깜박이지 않고 직시하는 눈. 쭉 뻗은 두 손은 총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총신에 068 숫자가 또렷했다. 한세연의 총구가 튀어 오를 때마다 설계가 날렵하게 팽창하며 경호원을 밀어붙였다. 이미 바닥은 시체로 가득했다. 한세연 뒤엔 노석원이 서 있었다. 그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배낭을 끌어안고 있었다.

“너는 생각이란 게 있나?”

딱딱한 목소리.

“난생처음 잡아 보는 무기 하나 들고 적진 깊숙이 혈혈단신으로 진입하는 건 자살 행위다. 너 하나 무모하게 뛰어들어 아군의 전력이 낭비됐어.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나?”

유은우는 자신을 안아 든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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