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4
009. 급류
김서혁은 손을 뻗었다. 시계가 한바탕 할퀴고 지나가 피가 흥건한 손이었다. 서재희의 뒷덜미를 단번에 움켜쥐었다. 손바닥의 상처가 서재희의 피부와 맞닿아 쓸렸으나, 개의치 않고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비정상적으로 낮은 체온. 서재희의 맥동하는 목덜미 아래, 서늘한 흔적이 느껴졌다. 깊게 패어 다시는 완전히 아물지 못할 어떤 틈. 모질게 부서진 자리. 피가 멎기도 전에 다시 잔인하게 파헤쳐지기를 반복한…….
서재희가 거칠게 몸을 빼내며 김서혁에게서 서너 걸음 떨어졌다. 그가 무감한 눈으로 김서혁을 응시하며 제 뒷덜미를 문질렀다. 단정한 옷깃에 피가 묻어 붉었다. 김서혁의 피였지만, 서재희 자신의 피처럼 보였다.
그럼 그렇지.
김서혁은 서재희를 찬찬히 훑어 내렸다. 여전히 멀끔했다. 안정적인 호흡. 반듯한 시선. 고상한 분위기. 교과서보다 모범적인. 그러나 김서혁은 이미 서재희의 피부 아래서 들끓는 설계를 느낀 뒤였다.
차인호가 서재희를 곱게 내버려뒀을 리 없지.
서재희는 깜짝 놀랄 정도로 판단이 빨랐다. 언론이 기득권을 대변하며 사건을 요약하기도 전에, 서재희는 중앙수사부로 기꺼이 제 몸을 의탁하며 모든 시민의 판단을 유보시켰다. 그리하여 공개 진술까지 어떻게든 차인호의 손아귀를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곧 중앙수사부의 빈틈 사이로 차인호의 입김이 스몄을 테고 그 뒤는 알 만했다. 겉을 훼손하지 않고도 내부를 망가뜨릴 방법은 많았다. 특히 그 대상이 동조자라면 고문은 더욱 다양해졌다. 면밀하고 조용하게.
정신력 하나는 대단해.
서재희는 그만한 고통을 겪고도 두 다리로 단단히 버티고 서 있었다. 도시연합군 총사령관을 앞에 두고도 단 한 뼘도 굽히는 기색이 없는 건 여전했다. 그러나 예전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우선 예의 바른 미소가 싹 가시고 없었다. 가증스럽게 서글서글하던 눈빛도 없었다. 공개 진술 때 시민들의 혼을 쏙 빼놓은 드라마틱한 눈물 또한 당연히 없었다. 분명히 있을 적의는, 고통과 함께 갈무리되어 드러나지 않았다. 깨끗했다.
그러니까 후보로 거론되었겠지.
서재희가 제 뒷덜미를 문지르던 손을 천천히 늘어뜨렸다. 오만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은 태도로 김서혁을 직시하면서. 그 모든 것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김서혁은 하마터면 서재희가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착각할 뻔했다.
‘겉보기에 다들 속아 넘어가는 거지. 실은 예민하고, 까다롭고, 아주 지독해. 자네도 느꼈겠지만.’
임유현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서재희를 다루는 게 어렵다고 했다. 늘 정리된 낯으로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푸념했다. 생의 의지가 말라 버려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걸 그랬다고 했다. 혹은 서재희의 부모를 방치하지 않고 제때 치료해 줄 걸 그랬다며 후회했다. 그럼 더 효율적이었을 거라고 말하는 임유현의 얼굴은 진심으로 아쉬워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임유현은 몰랐을 것이다. 그저 어떻게든 회유해 보려고 이리 굴려 보고 저리 굴려 보던 그 서재희의 손에 제 숨통이 끊어지고 사지가 찢길 줄은.
김서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태 그리 싹싹하게 굴더니 이젠 인사도 안 하나?”
“제가 인사드리면 상황이 달라집니까?”
서재희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여긴 총사령관님과 저, 단 둘뿐입니다. 총사령관님은 제 겉모습에 속을 분이 아니십니다. 전 소용없는 일은 안 합니다. 그리고…….”
서재희의 검게 가라앉은 눈 안에서 새파란 빛이 한 차례 뒤채었다.
“……싫은 사람 앞에서 소득 없이 웃고 있기 힘듭니다. 아무리 저라도.”
김서혁은 서재희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대로 바닥으로 처박았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머리를 발로 내리밟았다. 홀스터에서 총을 잡아 뺐다. 빤빤한 낯짝을 군화 아래 두고 그 미간에 총을 겨누기까지 수 초도 걸리지 않았다.
서재희는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꿈틀거리지도 않았다. 그저 미끈한 목덜미에 핏줄만 서슬 퍼렇게 돋아났다. 김서혁은 서재희의 머리를 밟은 발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가, 거칠게 젖혔다. 서재희의 낯이 그대로 돌아가며, 시선이 부딪혔다. 짧고 차갑게.
김서혁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줄곧 겨누고 있던 새까만 총구를 서재희의 관자놀이에 가져다 대고 천천히 내리눌렀다. 서재희의 뺨이 바닥에 짓눌렸다. 저항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쉽지도 않게. 서재희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저 앞만 똑바로 보고 있었다. 허공 어딘가를 가르는 시선이었지만, 김서혁은 서재희가 자신을 똑바로 마주 보고 있다고 느꼈다.
김서혁은 총구를 움직였다. 오랜 시간 잘 길들여 까맣게 반질거리는 총구가 서재희의 관자놀이로부터 뺨으로 옮겨 가고 이윽고 뒷덜미에 머물렀다.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금속에 온이 팽팽하게 걸리며 차가운 소음이 나자, 서재희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김서혁이 예상한 체념이나 두려움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캉!
총구가 튀어 올랐다. 서재희가 숨을 들이켰다. 김서혁은 서재희의 창백한 목덜미와 까만 총구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패턴을 지켜보았다. 엷게 겹쳐진 색깔들이 흩어졌다. 여러 명의, 김서혁도 알아볼 만한 유명 인사들의 서명이 희미하게 빛났다. 복잡하게 얽힌 또는 거칠게 단순한 씨실과 날실이 풀어 헤쳐져 서재희의 목선을 따라 미끄러져 떨어지고, 바닥에 고이며 빙글빙글 돌았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뒤이어 쏟아진 설계들은 단단하고 날카로웠다. 방금 지옥에서 건진 듯 악독한 설계들이 벌레 사체처럼 줄줄이 기어 나왔다. 어떤 것들은, 서재희의 피를 빨아먹어 시뻘겋게 번들거렸다. 불법 패턴이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쓰는 것이 금지된.
서재희가 이를 악다물었다. 그는 숨을 거의 쉬지 않았다. 비명 없이 버티는 게 용했다. 서재희가 고통을 참으며 가슴 위로 주먹을 틀어쥐었다. 희게 질린 손마디 사이로 고리가 채워지지 않은 시곗줄이 차갑게 빛을 반사했다.
김서혁은 그 후로도 한참이나 서재희에게 심긴 고문 설계를 강제로 뽑아내는 데에 집중했다. 가끔은 끔찍하게도 총이 덜덜 떨리기도 했다. 그런 것들은 대개 차인호의 서명이 새겨져 있었다. 입이 썼다. 차인호가 재학 시절 고스란히 당했던 압박, 김서혁도 성장통처럼 겪어야 했던 악의가, 서재희에게서 고스란히 배어나고 있었다. 그토록 되풀이하지 말자고 다짐했던 악의 대물림. 미친 듯이 진동하는 총을, 김서혁은 꽉 쥐고 놓지 않았다.
이윽고 그 모든 독기가 빠져나갔을 때, 서재희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김서혁은 다소 피로를 느꼈다. 그는 서재희의 뒷덜미를 짓눌렀던 총을 거두었다. 목덜미에 보랏빛 피멍이 선연했다. 서재희가 천천히 눈을 떴다. 실핏줄이 터져 붉은 시선이 김서혁을 향했다.
창밖으로 빗소리가 요란했다. 칼처럼 쏟아지는 비.
김서혁은 문득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폭우로 들끓던 밤. 바람의 방향에 따라 묵직하게 쓸려 나가던 물안개. 그 속에서도 형형하던, 그러나 한편으론 텅 비어 있던 유은우의 눈.
김서혁은 몸을 일으켰다. 총을 홀스터에 집어넣었다. 발을 들어 올렸다가, 서재희 뒤쪽 바닥을 거칠게 밟았다. 물비늘처럼 남아 반짝이던 설계 부스러기들이 군화에 짓밟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김서혁은 바닥을 그리 문질러 설계 잔해를 전부 부수고 나서야 발을 거두었다. 뚜벅뚜벅 걸어 서재희에게서 멀어졌다. 창가에 서서 몸을 반쯤 옆으로 기대었다.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호흡기를 꺼내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10여 층 높이에서 내려다본 중앙대로는 장관이었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도 시민의 숫자는 줄기는커녕 더욱 불어나 있었다. 수십만 명이 우비를 나눠 입고 손에 하얀 풍선을 들고 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풍선이 간간이 터질 만도 한데 시위의 방식을 바꾸지도 않고 꿋꿋했다. 이렇게 위에서 풍선 떼를 내려다보니 과연 뉴스에서 보도하던 대로 거대한 구름 같았다.
진실의 구름.
김서혁은 호흡기에 회복제를 끼워 넣고 입에 물었다. 느리게 빨아들이고 내뿜었다. 눈을 들었다. 짙게 흩어지는 수증기 사이로 서재희가 몸을 일으키는 게 유리창에 비춰 보였다. 김서혁은 다시금 쌉싸래한 약물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시계에 사정없이 긁힌 데다 직후 총까지 잡아 도통 피가 멎질 않던 오른손 손아귀가 그제야 빠듯하게 차오르는 느낌이 났다.
김서혁은 뒤돌아섰다. 창에 등을 기대고 서서 서재희를 바라보았다.
서재희는 반듯하게 일어서 있었다. 지쳐 창백했으나 그마저도 정돈되어 보였다. 김서혁은 자신을 응시하는 서재희의 가라앉은 눈을 물끄러미 보면서 입에 물고 있던 호흡기를 빼 들었다. 턱짓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시위 본 적 있나?”
서재희는 대답이 없었다. 김서혁은 다시 호흡기를 물었다.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는 서재희에게 시선을 둔 채 회복제를 깊이 들이마시고 다시 뱉었다. 충분히 반복했지만 약물 케이스는 절반도 줄지 않았다. 김서혁은 호흡기를 창턱에 내려놓았다.
“수십만 명이 밀집되어 있어. 저 공간에 어떤 동조자 한 놈이 섞여 있다고 가정해 보지. 정윤환처럼 설계 천재도 아니고, 유은우처럼 타격이 절정에 오른 자도 아니야. 기초학교 1학년 부진아일 뿐이지. 동조율은 올해 평균치보다 아래로 한 12 정도로 잡아 볼까. 동조율이 형편없어서 별 의미도 없겠지만 타격보다는 그래도 설계에 소질이 있다고 해 두지. 그놈은 미쳐 있고 사리 분별이 안 돼. 그러나 겉으로는 멀쩡하지. 그래서 그 속을 아무도 몰라.”
김서혁은 피가 멎기 시작한 오른손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뻐근했다.
“그 동조자가 저 시위 현장 한복판에서 총을 뽑고, 어설픈 팽창 설계를 깔고, 그 위로 타격을 사정없이 갈긴다고 생각해 봐. 어떻게 될지. 적어도 수십 명은 죽고 다치겠지. 그러나 그것을 예상할 수 있다면? 그 어리고 불안정한 동조자의 행동 패턴을 수집하고 분석하는 거지. 평소 기초학교에서 실기시험을 칠 때는 방아쇠 당기기를 주저하다가, 하굣길에 홀로 길고양이를 만날 때면 스스럼없이 사격하여 잔인하게 괴롭힌다는 사실 따위를. 싹수가 노랗다 못해 말라비틀어진 놈들을 애초에 사회에서 격리할 수 있다면?”
서재희는 반응이 없었다.
“넌 공개 진술에서 낙원의 이론 시스템 자체를 부정적으로 언급했지. 그러나 도구와 책임은 분리해야 해.”
비가 거세어지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낙원의 이론은 점점 더 많은 샘플을 수집하며 갈수록 견고해졌다. 그러나 낙원의 이론을 다루는 지도자의 성향이 변질되었지. 평화가 길어지면서. 역대 후보들과 13위원들은 이제 낙원의 이론을 다른 방식으로 이용하기 시작했어. 비동조자들을 억압할 기질을 가진 동조자들을 판별하기보다는, 당장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만한 혁명의 싹을 걸러 내는 데에 사용하게 돼. 그들은 똑똑하고 용기 있는 인재들을 살해하고, 그중 소수만 후보자란 이름으로 선택하여 거듭 좌절시킨 후 기득권으로 편입시키면서, 입으로는 늘 낙원의 이론에 의해서라고 표현해 왔지. 시스템에 책임을 전가하는 비겁한 짓이다. 마치 논리적인 체계가 직접 불량한 동조자들을 걸러 내는 것처럼. 그건 옳지 않아. 낙원의 이론은 그저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일 뿐이다. 가치판단이 거세된 정보의 축적. 낙원의 이론 그 자체만으로는 그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아.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지. 총이 혼자서 걸어 다니며 사람들을 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순전히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인간의 자질 문제지.”
창밖에서 무언가 작은 소리가 들렸다. 시위대가 입을 모아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다. 그것은 희미하여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총이 아니라 총을 쥔 자를 바로잡고자 한다.”
김서혁은 뚫어져라 서재희를 바라보았다.
“넌 무엇을 원하지?”
서재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김서혁은 창가에 기대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서재희를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마주 섰다. 낮게 말했다.
“임유현을 갈기갈기 찢어 보란 듯이 널어 놓고, 차인호의 품에서 차예원을 영원히 떼어 놓고, 학교를 중립을 가장한 무법지대로 설정해 놓고, 내 휘하의 군을 내 이름으로 그 경계에 둘러놓고. 사해도 아니고 제1도시 한복판에 불을 지른 이유가 뭐지? 나와 차인호의 싸움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조용히 위원회 명단만 교체할 수도 있었던 일이었어. 네가 판을 크게 키우면서 죽어 나간 사람이 몇 명인지 똑똑히 기억해라. 나아가, 반란군을 부리며 시민을 기만하고 불필요한 희생자를 내는 도시연합과, 후보로 관리된 주제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 선한 낯으로 시민들 앞에서 눈물로 호소하는 네가, 어떻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지?”
도청이 의심되어 손수 고문 설계를 제거해 주긴 했으나, 마음 같아서는 서재희에게 더한 짓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충분히 실현 가능한 그 충동을 억누른 것은 일말의 양심이었다. 재학 시절 김서혁과 함께했던 나머지 후보 둘이 있었다. 하나는 용 사육실에 불을 지르다 사망했고, 하나는 파견 수업 때 홀로 실종되었다. 무사히 졸업한 것은 김서혁뿐이었다. 그 후 김서혁은 권력의 중심으로 차근차근 걸어 들어가며 단맛에 익숙해질 때마다, 언제나 그 둘을 상기하려고 애썼다. 은폐되어 평범한 그 죽음이, 어쩌면 김서혁의 최후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 셋 중 김서혁만 살아남은 것은, 그가 특별히 탁월해서가 아니라, 그저 운이었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차인호 도시연합장은, 네가 그저 복수심에 불타 아무런 목적도 없이 파괴만 추구한다고 하더군. 그냥 미친놈이라고. 그가 네게 그토록 강력한 고문까지 걸어 가며 얻어 낸 결론이 고작 그것뿐이라면, 답은 두 가지지. 네가 정말 그런 마음을 먹었거나, 혹은 내 상상을 초월하는 인내심으로 고문을 버티고 거짓을 말했거나. 아무래도 난…….”
김서혁은 서재희의 턱을 가볍게 쥐었다.
“……후자 같거든.”
키 차이는 한 뼘도 나지 않았으나, 김서혁은 서재희가 한참 어리게 생각되었다. 어리고, 지나치게 똑똑하며, 오래전 전부를 잃어버려 무서울 게 없으나, 최근 들어 약점이 하나 생겼을지도 모르는. 김서혁도 인정할 만한, 반짝반짝 빛나는 약점.
“요 며칠간 차인호는 내게 네놈 기억을 볼 수 있도록 군의 기계를 빌려 달라고 수차례 요구했다. 하지만 난 거절했지. 차인호가 네 기억을 보려 하는지 네 뇌를 망가뜨리려 하는지 정확히 가늠되질 않았거든. 네게 고맙다는 인사는 듣고 싶지 않다. 사실 난 네 뇌가 어찌 되든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내 관심은 다른 곳에 있어. 난 네게 직접 묻고 싶다. 설마하니 이 전부가 유은우의 안전을 위해서였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대지는 않겠지.”
“이제 유은우는 저 필요 없습니다.”
서재희가 즉각 대답하여, 김서혁은 눈을 굳혔다. 서재희는 부드럽게 고개를 비끼며 김서혁의 손으로부터 자신의 턱을 빼냈다. 그 동작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김서혁은 미처 손에 힘을 더하지도 못했다. 서재희의 입가에 설핏 웃음기가 스치는 것도 같았으나 순식간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등골이 서늘했다.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김서혁이 서재희에게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고, 또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단정하면서, 동시에 산산조각이 난 무언가 같았다.
줄곧 한자리에 서 있기만 하던 서재희가 예고 없이 김서혁을 스쳐 지나갔다. 임유현의 후원을 받으면서부터 상류층의 몸가짐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함은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양의 정석이 되었다는 항간의 소문을 과시하듯 우아하게. 방금 고문 설계를 추출당하며 이를 악물고 버텼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품이 여유로웠다.
서재희는 창가에 멈춰 섰다. 김서혁이 기대어 있었던 그 창가였다. 그는 줄곧 쥐고 있던 유은우의 시계를 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김서혁이 팽개쳐 놓은 호흡기를 집어 들고는 가볍게 훌쩍 뛰어 창가에 걸터앉았다. 다리 한쪽을 창틀에 얹고 다른 한쪽 다리는 아래로 늘어뜨린 채, 서재희가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습기와 소음이 밀어닥쳤다. 작아서 잘 들리지 않던 시민들의 목소리가 폭우를 뚫고 선명했다. 분명한 발음. 익숙한 가락. 도시연합의 오래된 가요에, 새로운 가사를 덧붙여 부르고 있었다. 도시연합장의 해명을 요구하고 서재희의 정상참작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유은우는 제가 아니라 시민들이 지켜 줄 겁니다.”
서재희가 김서혁과 눈을 맞추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마주하고서 처음으로 보는 웃음이었다. 그러나 가식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지금 서재희는 얼마간은 혹은 완벽하게 진심이었다. 그것이 김서혁을 불안케 했다.
내가 지금 괴물을 상대하고 있는 걸까.
창밖에서 밀려들어 오는 뿌연 비안개가 서재희의 까만 머리카락을 흠뻑 적셨다. 서재희가 김서혁을 바라보며 쥐고 있던 호흡기를 입술 틈으로 물었다. 나른히 빨아들이고 느리게 뱉었다. 수증기가 비안개와 뒤섞여 서재희의 빼어나게 단아한 낯을 잠시간 흐릿하게 했다.
순간적으로, 김서혁은 서재희가 거대한 재난처럼 느껴졌다.
저 서재희가 만약 권력의 정점에 선다면, 그리하여 악을 품고 움직인다면, 차인호보다 임유현보다 역대 그 누구보다 더 치밀하게 악랄하지 않을까. 그런 직감이 들었다. 임유현은 서재희를 잘못 취해도 한참 잘못 취했다. 그는 어린 서재희의 주위를 짓밟아 고립시켜서는 안 되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유은우는 서재희의 약점이 아니라, 유일한 제어장치였다.
김서혁은 홀스터의 총을 움켜쥐었다. 서재희가 매끄럽게 미소 지으며 호흡기를 물었다 놓았다. 그가 수증기를 후우 불어 뱉었다. 시야가 다시 한번 어지러웠다.
“총사령관님.”
서재희가 손을 들어 제 뒷덜미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총구에 눌리며 생긴 피멍이 눈에 띄게 옅어지고 있었다.
“고문도 아주 어릴 때부터 차근차근 받으면 익숙해집니다. 친애하는 우리 교장 선생님께서 손수 주신 유산이죠.”
서재희가 호흡기를 문 채 옅게 웃었다. 낯에 예의 그 서글서글한 분위기가 깔렸다. 더없이 선한 얼굴 위로 수증기가 뿌옇게 퍼져 나갔다.
“총은 왜 쥐십니까? 저를 죽이시겠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차인호 도시연합장이나 기타 저명하신 의원들처럼 고문하셔도 좋고. 다만 지금은 타이밍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여기서 총사령관님 손에 죽는다 칩시다. 까딱해서 시체가 창밖으로 넘어가면…….”
서재희가 호흡기를 가볍게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시민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김서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는 판을 깐 지 오래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당장 죽어도 결과는 안 바뀝니다. 애초에 제 죽음을 가정하고 짠 계획이니까요. 총사령관님은 제 변수가 아닙니다. 그러니 잘 보일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잘 보여야 할 사람은 밑에.”
서재희가 창밖 시위대를 가리키고는 이어 말했다.
“제가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은 학교에.”
서재희가 비스듬하게 웃었다.
“총사령관님께서 제게 물으셨지요. 무엇을 원하냐고. 차인호 연합장님 말씀이 아주 틀린 건 아닙니다. 저는 낙원의 이론을 부수고 세상을 한바탕 엎은 뒤에 죽고 싶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겐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이제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소중해지면, 그 사람이 사는 세상을 그 사람 시선으로 다시 살피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꾸 생각하게 되더군요. 어떤 세상이 그나마 숨 쉬고 살 만할까.”
서재희는 물 흐르듯 창가에서 내려왔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낙원의 이론, 그것도 참 믿을 만한 게 못 됩니다. 저도 제가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한낱 시스템이라고 알았을까요? 저도 낙원의 이론이 인간관계까지 기록한다는 건 압니다. 하나 말 그대로 기록일 뿐, 언제 어디서 누구와 사랑에 빠질지, 그것만은 예측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낙원의 이론은 아무 쓸모없는 것 아닙니까? 사람은 사랑으로 변하는데.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영역이라 기계에게는 무리인가 보지요. 그러니까 이를테면…….”
서재희가 부드럽게 말했다.
“……김서혁 총사령관님께서 드신 그 예시 말입니다. 불안정한 동조자가 시위 현장 한가운데서 폭주를 일으킬 수 있으니 미리 짐작하여 제거하는 데에 시스템을 활용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만약 그 어리고 나약한 동조자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시위에 참석했다면? 혹은 아끼는 친구가 제1도시에 거주하고 있다면? 또는 총을 뽑는 순간 누군가의 친절로 마음이 바뀌고 나아가 상대에게 첫눈에 반한다면? 그가 폭주할 수 있을까요? 아니겠죠. 그렇다면 세상을 바꾸는 것은 낙원의 이론이 아니라…….”
김서혁은 문득 서재희의 말마디 어딘가에서 익숙함을 느꼈다. 김서혁도 한때 위로받았던, 누군가의 온기가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마음 아닙니까?”
서재희가 성큼성큼 걸어 김서혁에게 다가왔다.
“낙원의 이론이 보존되든, 부서지든, 은폐되든, 공개되든, 이젠 그다지 개의치 않습니다. 또한, 낙원의 이론을 떠나서, 완벽한 인재가 쿠데타를 일으켜 오래도록 독재를 해 먹든, 그저 그런 범인이 우매한 민주주의로 선택되어 짧은 임기 동안 제 배만 잔뜩 불리든…….”
서재희는 김서혁과 한 발짝 거리만 두고 멈추어 섰다.
“중요한 건 시민이죠. 언제든지 바뀔 가능성. 혹여 오판으로 퇴보하더라도, 그 위험을 감수하고 움직일 수 있는. 깨어 있는 유연한 다수. 그리고 그들의 따뜻한 연대.”
김서혁은 가만히 서재희를 바라보았다. 잘 길들인 습관처럼 반듯한 미소 뒤로, 겹겹이 쌓인 상처가 보일까 가만히 들여다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전혀 그럴 생각은 아니었으나, 김서혁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널 선택해야 했을까.”
김서혁은 서재희를 처음 본 순간을 기억했다.
연합대회에서였다. 물론 소문은 들었다. 제8도시 촌구석에 팀만 이뤘다 하면 우연인지 재능인지 귀신같이 승리로 이끄는 새파란 놈이 하나 있다고 했다. 승률이 거의 100%에 가깝다는. 그러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김서혁은 당시 정윤환을 마음에 둔 상태였고 그를 어떻게든 군으로 데려오기 위해 골몰하고 있었다. 김서혁은 정윤환이 차세대 낙원의 이론 후보감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몇 가지가 걸리긴 했으나, 다른 몇 가지가 눈부시게 탁월했다. 출중한 설계 실력만이 아닌, 정윤환 특유의 무언가가 있었다.
서툴지만 정 많고, 잘난 가운데 나약했다.
남들은 싸가지도 그런 싸가지가 없다며 혀를 내둘렀으나 김서혁의 생각은 달랐다. 각종 대회에서 정윤환은 상대 팀은 물론이고 제 팀원까지 잔인하게 기죽이며 혼자 펄펄 날아다녔지만, 그건 단지 지루해서였다. 수준이 맞지 않으니 당연히 오만함이 싹트고, 그것은 오래 둘수록 고치기 힘들었다. 정윤환은 지금 바로 정예군에 합류해도 전혀 문제가 없는 실력이었다.
김서혁은 임유현과 차인호에게 단단히 선포도 해 놓았다. 정윤환은 자신이 데려가겠다고. 혹여나 빼앗길까 정윤환의 집에 수시로 드나들기도 했다. 초조했다. 김서혁은 정윤환이, 정확히는 정윤환을 포함한 차세대 후보들이 예언과 틀어지길 원했다. 세 후보가 도시연합 중앙학교에 동시에 재학하지 않는, 역대 단 한 번도 없었던 예외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싶었다. 낡은 글귀를 미신처럼 숭배하는 소수의 기득권을 보기 좋게 엿 먹이는 것은 물론이고, 같은 대 후보의 억울한 죽음으로 드리워진 어스름을 이제 그만 걷어 낼 수 있었으면. 예언은 의미가 없음을 증명하고, 사회를 이끌 만한 인재를 선택하는 것은 비단 낙원의 이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인간성으로 보완되어야 함을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김서혁은 서재희를 마주하고 흔들렸다. 소문대로 인재가 맞았다. 김서혁은 서재희의 어른스러우면서도 티끌 없이 선한 낯에서, 죽은 옛 후보의 모습을 보았다. 셋 중 둘이나 이렇게 일찍 발견하다니. 정윤환보다 서재희를 먼저 거두어야 하나 고민했다. 때마침 임유현도 서재희에 대한 욕심을 내비쳐 왔다. 그는 아주 선심 쓰듯, 김서혁에게 제안했다. 나눠 가지자고. 정윤환과 서재희 중 선택하라는 뜻이었다.
김서혁은 연합대회 내내 둘을 눈여겨보았다. 사실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서재희와 눈 한번 마주쳐 보겠다고 수줍게 얼쩡거리는 정윤환과, 그런 정윤환을 차분히 타일러 돌려보내는 서재희를 보며 저울질했다. 기준은 단순했다. 더 약한 아이를 데려오고 싶었다. 부서지기 쉬운 아이를 맡고 싶었다. 김서혁도 임유현의 방식을 겪어 알았다. 임유현의 손에 들어가면 혹독하리란 것을.
김서혁은 정윤환을 선택했다. 그리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다.
“임유현 교장 선생님께서도 항상 그 말씀을 하셨지요. 네가 아니라 정윤환을 데려왔어야 했다고. 하지만 총사령관님.”
서재희가 조용히 말했다.
“저와 정윤환의 자리가 바뀌는 데에 큰 의미는 없는 것 같습니다. 혹여 만에 하나 과거로 돌아가신다면, 지금과 다른 결말을 보고 싶으시다면, 그때는 유은우를 처음 본 순간 제거하셔야 할 겁니다. 정 붙이지 마시고. 그럼 저나 정윤환이나 지금과는 꽤 다를 것 같으니까. 어쩌면 총사령관님도.”
김서혁은 가만히 서재희를 응시했다. 어렸던 서재희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그 위로, 임유현의 밑으로 들어간 뒤 드문드문 서늘하던 서재희를 포개 보았다. 그리고 정윤환. 특히 정윤환의 어린 시절은 한번 떠올리면 뇌리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 김서혁이 정윤환을 데려오는 데에 무척 공을 들였기에 더욱 그랬다. 팔자에도 없는 음료수며 과일 따위를 사 들고 뻔질나게 정윤환의 집 문턱을 드나들었으니. 그리고 김서혁은 유은우를 기억했다. 인큐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귀찮을 정도로 자신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던 강아지 같던 아이를 떠올렸다.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부드럽게 부풀어 올랐다. 그것은 아주 연약해서 즉각 접어 눌러놓을 수 있었다.
김서혁은 때때로 셋 모두에게 부채 의식을 느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김서혁은 서재희가 아닌 정윤환을 선택할 것이고, 정윤환이 임유현의 손아귀에 넘어가기 전에 막지 못할 것이며, 유은우를 시민이 아닌 전리품으로 등록했을 것이다. 그는 매 순간마다 최선의 선택을 했다.
“제안을 하나 하지.”
“그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김서혁은 미간을 좁혔다. 서재희는 예의 바르게, 그러나 차갑게 웃었다.
“총사령관님 처지가 뻔히 보이는데, 그 제안 하나 예상 못 하겠습니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제가 짠 판이라고.”
공손하게 건방진 말투를 보아하니, 서재희는 이제 정말 김서혁에게 잘 보일 생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
“김서혁 총사령관님을 도시연합장 자리에 앉혀 드리겠습니다. 호칭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바꾸십시오. 만약 왕좌에 앉지 않으시더라도 그 왕좌를 좌지우지할 만한 힘을 드리겠습니다. 또한, 불필요한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은 저 또한 원치 않으므로, 싸움판은 사해에 깔아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낙원의 이론은 보존 못 해 드립니다. 장담컨대 시스템은 후에 당신의 발목을 잡을 겁니다.”
“조건.”
“두 가지를 요구합니다. 첫째, 메모리. 정성민이 유은우를 구하면서 촬영한 영상이 담긴 메모리. 이수연이 가지고 있다가 실종되었다는 말이 있지만, 총사령관님께서 그것을 빌미로 임유현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은 것 다 알고 있습니다. 제게 넘기십시오.”
어떤 이유로 메모리를 요구하는지, 김서혁은 서재희의 의중을 쉽게 읽었다. 그러나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서재희는 김서혁의 반응에는 개의치 않고, 아주 당연한 것을 요구하듯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둘째, 낙원의 이론과 관련하여 정윤환과 차예원의 모든 기록에 대한 삭제를 요청합니다. 다만, 단순 후보가 아닌 관리자로 등록된 뒤의 기록은 삭제가 어렵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제 이름으로 변경해 주십시오.”
김서혁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했다. 창밖 시민들의 노래로 헷갈려 자신이 지금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 그러나 서재희는 말을 바꾸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덧붙였다.
“누군가 한 명은 지고 가야 합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
“은우 먹어.”
무언가 불쑥 눈앞으로 들어왔다. 포장을 뜯지 않은 큼지막한 초콜릿이었다. 유은우는 이프 화면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손도연이었다. 눈가는 붉었고 뺨은 까칠했다. 손도연과 많은 말을 섞지는 않았지만, 유은우는 그녀가 예전과 달라졌음을 알았다. 눈물에 마음이 깎이면 어떤 부분은 한 뼘 성장하겠지만 어떤 부분은 영원히 죽어 버린다. 손도연은 지금 그 과정을 겪고 있었다.
유은우는 위로의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유은우가 머뭇대는 사이, 손도연이 말했다.
“간식 이제 얼마 없어. 있을 때 먹어.”
학교는 외부와 차단되고 고립되었다. 다행히 수도나 전기는 끊기지 않았지만, 공급 없이 줄어들기만 하는 식량은 큰 문제였다. 차예원은 식당 직원들로부터 받은 식자재 리스트를 공개했다. 앞으로 일주일은 충분한 양이었다. 차예원은 그 안에 상황이 종료되니 식량이 부족할 일은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녀는 서재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몇몇 학생들은 이 비상 상황이 예상보다 훨씬 길어질 수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니 개인적인 모든 먹을거리도 한곳에 모아 그 수량을 파악하고 계획적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차예원은 그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군에 살해당하면 당했지 굶어 죽는 일은 없을 거라고 딱 잘라 말했다. 학생들의 불안이 급격히 가중되었다. 차예원 말 참 똑 부러지게 잘한다며 정윤환이 혀를 찼다. 보다 못한 연다희가 앞으로 나섰다.
연다희는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했다. 학교엔 파견 수업용 모함이 한 척 있었고, 그에 부속선이 무려 열세 척이나 딸려 있었다. 모함의 저장고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에너지 팩과 영양 비스킷이 비축된 상태였다. 연다희는 그것만으로도 앞으로 5년은 충분하며, 이 대치 상황이 아무리 길어져도 5년 안에는 끝나지 않겠냐며 소란을 마무리 지었다. 학생들은 다소 안심했으나, 교내 매점 가판대에서 사탕과 초콜릿이 꾸준히 줄어드는 건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중립지대로 지정된 지 사흘 만에 소소한 군것질거리는 거의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손도연이 재촉했다.
“빨리 받아.”
누군가는 고작 초콜릿 하나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유은우는 그게 아님을 알았다. 그동안 손도연에게서 받은 소소하고도 평범한, 그래서 오히려 특별한 호의들이 있었다. 만약 유은우가 손도연과 단둘이 용 연구소에 가지 않더라도, 손도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와서 간식을 밀어두고 갈 것 같았다. 그게 중요했다.
군에 있었을 때, 유은우는 선택적 호의에 상처입곤 했다. 유은우와 단둘이 있을 때는 동정 섞인 조언을 하다가도 누군가 가까이 오면 입을 다물고 유은우를 못 본 체하는 이들이 있었다. 어떤 동료는 유은우만 따로 불러 놓고 설계 공식 노트를 빌려 주었다가, 누군가 필기체를 알아보자 자신의 노트가 아니라고 딱 잡아떼기도 했다. 애초에 유은우가 먼저 요청하여 받은 배려가 아니었기에, 그런 일이 수시로 반복되자 분이 올라왔다. 그 사람들은 유은우가 진심으로 걱정되어서 호의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약자에게 호의를 베푸는 자신의 모습이 좋았던 건지도 모른다.
작더라도 진심이었으면 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만나기 드물었다.
크고 작음을 떠나서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타인에게 자신의 것을 선뜻 나눌 수 있는 사람. 손도연은 그게 몸에 배어 있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듯 그녀는 성적 면에서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다. 동조율은 무난했고, 교내 랭킹은 바닥을 기었다. 그러나 그런 정량화된 수치를 떠나, 손도연은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똑똑한 사람은 있으면 좋지만, 따뜻한 사람은 있어야 한다.
“아, 혹시 단 거 싫어해?”
“아니, 고마워.”
유은우는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았다. 반을 뚝 갈라 손도연에게 주었다. 손도연 뒤에 친구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은우는 초콜릿 포장을 벗기며 물었다.
“어디 가?”
“모의 전투실.”
“왜?”
“애들이 회피 패턴 연습하재. 은우 너한테 짐 되면 안 된다고.”
“걱정하지 마. 내가 너 꼭 지켜 줄게. 무리하지 말고 체력을 비축해.”
“정보 다 수집하고 나서 다시 빠져나올 때 상황이 힘들어지면 나 버려도 돼. 그 전까진 어떻게든 버텨 볼게.”
손도연이 너무 쉽게 말을 해서, 유은우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그래.”
손도연의 낯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가 사라져 버렸다.
“너한테 짐이 안 되어야 할 텐데.”
“사람이 어떻게 짐이야.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유은우는 하마터면 발칵 화를 낼 뻔했다. 짐이니, 민폐니, 유은우가 얼마 전까지 군에서 수천 번은 더 들었던 말이었다. 설계 난독증인 유은우를 서포트하는 설계자들에게서. 강력하게 군을 재정비하는 김서혁을 견제하는 무리로부터. 대부분 뒤로 돌고 돌아 듣고, 때로 김서혁이 없을 땐 면전에서도 들었다. 그런 말은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유은우.”
낮은 목소리가 날아와, 유은우는 옆을 보았다. 김산이 지척에 서 있었다. 그가 덤덤한 얼굴로 유은우가 공중에 띄워 놓은 화면을 보며 물었다.
“다 외웠어?”
“완벽히는 아니고 대강요.”
유은우는 손끝으로 화면을 만졌다. 용 연구소 평면도가 확대되었다.
유은우와 손도연은 용 연구소 내부를 완전히 외워 가기로 했다. 김산의 조언이었다. 평면도를 훤하게 꿰뚫고 있으면 이프에 의존할 필요가 없으니 전투에서 훨씬 유리해진다. 거기다 최악의 경우 이프가 파괴되거나 평면도 데이터가 손상될 수 있으니 그에 대비해야 한다는 게 김산의 생각이었다.
손도연은 이걸 대체 어떻게 외운 거지?
둘은 503호로 쳐들어가기로 합의를 본 상태였다. 유은우는 한세연 연구관에게 받은 카드를 믿어 보기로 했다. 한세연을 신뢰한다기보다 당장 손에 잡히는 정보가 그뿐이었다. 그래서 유은우와 손도연은 503호를 목표로 하여 평면도를 암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용 연구소의 구조가 어찌나 복잡다단한지 흡사 거미줄을 연상케 했다. 지상 4층부터 5층까지는 아예 공개된 자료가 없어 하얗게 비어 있었기 때문에 그 외의 층만 외우면 되는데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어쩐지 용 연구소의 중앙은 텅 비어 있었다. 정말 비어 있는지 비공개인지도 가늠이 어려웠다. 유은우는 인내심 있게 평면도를 뜯어본 뒤,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그대로 복원해 보기를 반복했다. 특히 비상계단의 위치를 정성들여 외웠다. 김산이 간이의자를 끌어와서 유은우 옆에 앉았다. 그가 초콜릿을 낱개로 부순 뒤 한 개 두 개 부지런히 집어먹는 동안, 유은우는 용 연구소 출입구 열다섯 개 중 열두 개의 위치를 완벽하게 암기했다. 옆에서는 임원 학생들 셋이서 불이 붙고 있었다.
“우린 최악의 상황도 생각해야 해요.”
연다희가 말했다. 그녀의 오른손에서 펜이 팽팽 돌아갔다. 고세민이 팔짱을 꼈다.
“지금보다 더 최악이 있나?”
“군이 얼마나 강경하게 나오느냐가 관건이죠. 윤환 선배가 군을 뚫어서 의료진, 직원, 일부 학생들을 무사히 내보내는 건 가장 희망적인 거고요. 그 과정에 마찰이 일어나서 누구 하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면 본격적인 전투로 이어질 겁니다. 이 경우, 무고한 시민들이 다칠 수 있고요.”
잠깐 침묵이 있었다. 지해은이 중얼거렸다.
“지금 여론이 어때? 오늘 발표 나잖아.”
고세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개표만 안 했다뿐이지, 재희 선배 정상참작 거의 확실해. 항간에선 재희 선배 학교로 복귀하기 전에 차인호가 먼저 살해당하는 거 아니냐고…….”
“선배, 말조심해요.”
연다희가 주위를 살피며 고세민의 말을 잘랐다. 고세민이 코웃음을 쳤다. 붉게 튼 눈가에 한기가 돌았다. 그가 차갑게 말했다.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연다희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원 선배 들으면 어떡하려고요.”
“들으면 뭐? 차예원이 자기 아빠 등지고 여기 학교에 있다고 해서, 내가 차인호 죄까지 용서해야 해?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차예원 걔도 무슨 대단한 대의가 있어서 학교로 돌아온 건 아니잖아. 재희 선배 때문에 돌아온 거고, 재희 선배가 차예원 감싸는 거잖아. 내가 장담컨대…….”
“장담컨대?”
고세민이 퍼뜩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 차예원이 허리에 손을 얹고 서 있었다. 고세민은 헛기침을 하더니 난간에서 내려왔다. 차예원이 큰 보폭으로 고세민의 코앞까지 거침없이 다가선 다음, 재차 물었다.
“장담컨대 뭐?”
“아니, 선배. 그게 아니고…….”
“이제야 선배라고 부르네. 아까는 말이 짧더라?”
고세민은 이내 고개를 숙이며 차예원의 시선을 피했다. 차예원은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고세민을 한참 응시하다가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지시했다.
“선수에 설치해.”
차예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판 위로 바퀴가 요란하게 구르는 소리가 났다. 4학년 다섯 명이 묵직한 기계를 수레에 싣고 오고 있었다. 가로세로 1미터는 족히 될 듯한 그 기계는 짙은 회색으로 꼼꼼히 칠해져 있었는데, 어마어마한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다.
좌표기.
유은우는 화면을 만지던 손가락을 삐끗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기계를 뜯어보았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좌표기가 맞았다. 옆에서 김산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그는 마지막 남은 초콜릿 조각을 집으려다 말고, 간이의자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차예원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좌표기. 선수에 설치할 거야.”
다들 말이 없었다. 차예원의 설명에 수긍한 게 아니라, 너무 당황해서 입만 딱 벌리고 그 모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좌표기는 함선 대 함선의 전투 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장치였다. 긴박한 상황에서 순수한 계산만으로 좌표 값을 내기가 어려워, 좌표기가 그 일을 대신 해내곤 했다. 이프에 대상만 지정하면 좌표기를 통해 자동으로 좌표 값이 출력되므로, 공격과 방어가 가공할 정도로 빨라질 수 있었다. 전투 속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여서, 적군의 함선에 침투하여 좌표기를 먼저 파괴하는 팀이 따로 구성될 정도였다. 그런 좌표기를 기관실에 꽁꽁 감춰 두기는커녕 선수로 끌어올려 노출한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났다.
“좌표기를 어디 단다고?”
정윤환은 함선의 갑판에 우뚝 서서 차예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조끼부터 재킷까지 빼먹은 것 하나 없이 제대로 교복을 갖춰 입은 채였다. 아는지 모르는지 셔츠 단추 두 개가 끌러져 있었고 넥타이 매듭은 헐거웠지만 어쨌든. 서재희가 반듯하게 차려입었을 때는 그토록 단정해 보이던 교복이, 정윤환이 걸치고 있으니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한쪽 손으로 재킷을 젖히고 바지 주머니에 엄지만 가볍게 걸치고 있는 사소한 품도 화려하게 보였다.
제발 위치를 자각하라는 차예원의 등쌀에 져서 정윤환이 교복을 갖춰 입은 건 결코 아니었다. 주위의 절박한 시선 탓이 컸다. 학생들은 서재희의 부재로 구심점을 잃고 정윤환에게 크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저 서재희가 편지에서 정윤환의 성품에 대해 한두 문장 언급했을 뿐인데, 이리 분위기가 급변할 수 있다는 것에 유은우도 놀랐다. 정윤환은 그 기대가 불편하고 낯선 눈치였지만 그래도 책임감은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서재희가 정윤환을 지키기 위해 만든 자리였다. 정윤환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그는 제 성질을 누르고 분위기에 맞추려고 눈물 나게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변화는 쉽지 않았다. 특히 차예원과 마주할 때, 정윤환의 인내심은 쉬이 바닥을 보였다.
“거치대도 없이 선수부에 구멍을 뚫어서 바로 좌표기 설치하면 35노트만 넘어도 선체가 바로 기울어 버릴 텐데. 기관실에 잘 있는 좌표기를 뭐 하러 선수로 옮겨? 누가 이런 뭐 같은 생각을…….”
“내 생각인데.”
차예원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대답했다. 그녀는 정윤환과 똑바로 마주 선 채, 한쪽 손을 허리에 가뿐하게 짚고, 다른 한쪽 손은 기계에 얹고 있었다.
정윤환이 씹어뱉듯 말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더니 차예원 네가 딱 그 짝인가 봐. 좌표기를 선수에 놓으면 바로 적의 표적이 돼. 아군의 운용 범위를 넓히고 싶은 네 마음은 알겠는데, 중요한 기계를 선수에 배치하면 자살 행위나 다름없어. 넌 네 심장을 이마에 붙이고 싸울 셈이야?”
차예원은 정윤환에게 대꾸도 하지 않고 바로 학생들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딱딱하게 말했다.
“선수에 달아. 위장색도 칠했으니까 바로 달아도 문제없어.”
차예원의 말에, 정윤환의 눈치를 보며 멈춰 있던 학생들이 다시 수레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나 채 밀기도 전에, 정윤환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이를 바득 갈며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발을 들어 좌표기를 걷어차듯 막아 냈다. 학생들이 수레 손잡이를 놓고 황급히 물러났다.
“씨발, 진짜 사람 돌게 만드네. 차예원 너 미쳤어?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기관실에 멀쩡하게 잘 있는 좌표기를 왜 선수에 다는 건데!”
정윤환의 사나운 기세에도, 차예원은 굽히지 않았다.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지금 이대로 싸우면 우리 져.”
정윤환이 미간을 구겼다. 차예원이 재차 말했다.
“너도 유은우도, 군에 있어서 잘 알 거 아니야. 도시연합군이랑 붙으면 우리 승산 없어. 운이 나빠 김서혁이 이끄는 정예군과 정면 대결한다면? 우리 한 시간 내로 박살 나. 여태까지 했던 방식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어.”
“그래서 생각해 낸 방식이 좌표기를 선수에 달아서 운용 범위를 넓히는 대신, 수 초 안에 추락하는 위험을 감수하겠다? 무게중심은 그럼 누가 조정할 건데? 함선이 방향 틀 때 전복될지도 모르는데 그건 또 누가 케어할 건데?”
“5학년 설계부에서 중력 조정할 거야.”
“그러니까 뭐 하러 그런 짓을 하냐고. 차예원 너 지금 진짜 이상한 거 알고 있어? 좌표기를 선수에 설치하면, 그래, 인정해. 물론 장점도 있어. 좌표 값 출력할 수 있는 대상이 훨씬 확대될 거야. 군보다 우리가 더 멀리 볼 수 있고, 공격도 방어도 그 사정거리가 늘어나. 어쩌면 백번 양보해서 내가 좌표기를 매개로 삼은 뒤에 전교생을 동시에 서포트해 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좌표기가 파괴되면? 얻는 건 순간이고 까딱 잃고 나면 바로 패배야.”
“그래. 내가 말하는 게 바로 그거야. 서포트. 네가 전교생에게 전부 서포트하는 거지. 그게 내가 좌표기를 선수로 끌어온 이유야.”
“아니, 잠깐만요.”
연다희가 손을 들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을 뗐다가, 도로 다물었다가, 고개를 저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예원 선배 취지는 이해했어요. 좌표기를 선수에 달아서 운용 범위를 최대한 넓히고, 정윤환 선배가 좌표기 옆에 붙어서 우리 모두의 이프로 서포트를 전송한다는. 그러니까 좌표기를 좌표 값 출력에만 쓰는 게 아니라, 속도 증가, 회피율 증가, 일반적인 서포트 개념으로 보자는 거지요? 여태와는 다른 방식으로.”
“확실히 좋긴 하겠네. 그런데…….”
김산이 눈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게 가능해?”
“윤환이라면 가능해.”
차예원이 딱 잘라 대답했다. 모두의 시선이 정윤환에게 집중되었다. 유은우도 따라서 그를 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정윤환은 약간 삐딱하게 선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는 차예원도 아니고, 김산이나 연다희도 아니고, 유은우를 빤히 보고 있었다. 이윽고 정윤환이 손끝으로 제 이마를 문질렀다. 그가 말했다. 나른한 듯 지친 시선은 여전히 유은우를 향하고 있었다.
“전투 내내 좌표기에만 매여 있고 싶지 않아.”
정윤환의 목소리가 묘하게 잠겨 있었다. 김산이 낮게 말했다.
“왜? 몸이 안 좋아서 도저히 안 되겠어? 무리한 건 요구하지 않아. 못 하겠으면 못 하겠다고 해.”
정윤환이 유은우에게서 눈을 떼더니 한숨을 쉬었다.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그는 입술 안쪽을 잘근잘근 씹었다. 유은우는 저도 모르게 정윤환의 발목을 살폈다. 치료기는 떼어 내고 없었지만, 그가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완전히 회복했을 리 만무했다. 정윤환이 치료기를 뗀 이유는, 자신을 의지하는 학생들을 의식해서였을 수도 있고, 더 이상 치료기의 효과를 보지 못해서였을 수도 있다. 유은우는 초조하게 정윤환의 안색을 읽어 내려 애썼다. 하지만 그는 이제 유은우에게서 아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차예원이 단조롭게 말했다.
“설마 은우 때문에 그래?”
정윤환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짧게 숨을 뱉었다.
“뭔 개소리야. 말 함부로 하지 마.”
“반응 봐라. 은우 때문 맞네.”
“아니라고.”
유은우는 멀거니 차예원과 정윤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왜 자신의 이름이 여기서 튀어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차예원의 확신에 찬 표정과, 지나치게 날카롭게 반응하는 정윤환을 보고 있자니, 뒷덜미로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너 좌표기에 매여 있는 동안 은우 어떻게 될까 봐 걱정하는 거지? 네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은우 다치거나 죽어 버릴까 봐?”
주위가 서서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학생들이 많이 몰려 있지는 않았는데, 차예원의 지시로 좌표기가 운반되며 어수선한 소음이 나고, 뒤이어 차예원과 정윤환의 언성이 높아지면서, 많은 학생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이쪽으로 귀를 기울이거나 무슨 일이냐며 묻고 있었다.
차예원은 냉랭하고 여유롭게 정윤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정윤환과 달랐다. 유은우는 차예원에게서 심상찮은 느낌을 받았다. 현재 가장 뛰어난 설계자로 전투력의 대부분이나 다름없는 정윤환에게 특정 임무를 부여하는 건 민감한 주제였다. 부드럽지는 않아도 소리를 높이지 않고 의견을 조율할 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차예원은 그 어떤 언질도 없이 좌표기를 끌어오는 행동을 택했다. 그러고 나서 정윤환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상황을 먼저 꾸며 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많은 학생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는 정윤환은 단어를 고를 시간도 없이 차예원을 상대해야 했다.
“그런 게 아니야. 나는 단지…….”
정윤환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 같았다.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해. 내가 속도나 회피율을 조금 더 올려 준다고 해서 승세가 이쪽으로 기울까? 감히 군을 상대로 너무 안이한 거 아니야? 고작 내 서포트 하나 받으려고 좌표기를 선수에 배치한다고? 좌표기 훼손되면 끝이야. 이건 미친 짓이라고. 야, 뭐 하고 있어? 도로 기관실에 가져다 놔!”
정윤환의 말끝이 사납게 긁혀 나왔다. 오도 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수레 손잡이를 잡았다 놓았다 하는 4학년들을 향해 정윤환의 말마디가 신랄하게 쏟아졌다.
“너흰 뇌가 없냐? 판단이 안 돼? 차예원이 멀쩡히 기관실에 잘 있는 좌표기 떼어다가 선수에 배치하자고 하면, ‘아, 예. 알겠습니다.’ 하고 개처럼 끌고 오면 그만이야? 아무리 학생회장 지시라도 맞는 말이 있고 아닌 말이 있어!”
“일반적인 서포트를 말하는 게 아니야. 속도? 회피율? 그런 어린애 장난 같은 거 말고. 윤환이 너라서 할 수 있는 설계가 있잖아. 내가 말했지. 여태까지 했던 방식으로는 절대 못 이긴다고.”
차예원이 정윤환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정윤환은 물러서지는 않았으나 경계하듯 차예원을 바라보았다.
“언제 군이랑 맞붙을지 모르는데 지금부터 훈련한다고 해서 실력이 올라갈 리 없어. 그럼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건 마음가짐이지. 정신력.”
차예원이 손가락으로 제 관자놀이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정윤환의 안색이 변했다. 차예원의 말에서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인지, 그는 단박에 창백하게 핏기가 빠져 버렸다. 정윤환은 손등으로 입매를 거칠게 문지르고는, 주위에 빽빽하게 몰려든 학생들을 빠르게 한번 훑더니 심호흡했다. 낮게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것도 같았으나 유은우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차예원이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14층 말이야. 윤환이 네가 모의 전투실 하나를 완전히 반전시켜 놨잖아. 가상 체력이 깎이는 게 아니라 실제 체력이 깎이도록. 그럼 그 반대도 가능하겠지?”
몇몇이 숨을 들이켰다. 정윤환이 눈을 감았다. 차예원이 좌표기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확실히 군은 기분이 묘할 거야. 적으로 맞붙기 전에, 우리 학생들은 본인의 자녀, 혹은 지인의 자녀니까. 아무 감정 없이 반란군을 쥐 잡듯 죽일 때와는 다르겠지. 그들은 살해에 머뭇거릴 테고, 혹여 잘 단련되어 그런 약한 마음을 누른다고 해도, 우리가 훨씬 우위에 서게 될 거야. 왜냐하면 우리는 실제로 죽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을 테니까. 말하자면, 우리는 마치 모의 전투를 치르듯이 부담 없이 군에 맞설 수 있어. 단시간에 실력을 올리는 건 그 방법뿐이야. 물론…….”
차예원이 부드럽게 말했다.
“……윤환이 네가 좌표기를 통해서, 전투 범위를 전부 가상 체력화시킨다는 조건하에.”
정윤환이 눈을 반쯤 떴다. 눈에 핏발이 돋아 있었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팽팽한 적막은 연다희가 깼다.
“선배 왜 대답 안 해요?”
연다희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재차 물었다.
“설마 할 수 있어요?”
정윤환은 갑판 어딘가를 가만히 응시할 뿐, 반응하지 않았다. 고세민이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쳤다. 할 수 있나 봐.”
서서히 소란해졌다. 이긴 거나 다름없다, 승산이 있다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정윤환의 설계 실력이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도 나왔다. 좌표기가 망가지면 큰일이니 따로 방어팀을 꾸려서 좌표기 방어에 집중하자는 의견이 곳곳에서 등장했다. 군에서 모르도록 철저히 연기해야 한다며 흥분에 들뜬 학생들도 보였다. 급기야 안도감에 눈물까지 보이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정윤환의 부상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홀로 지게 될 책임이나, 그로 인해 느낄 심각한 부담감, 군이 정윤환을 제일 먼저 노릴 거라는 아주 당연한 예측은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알면서도 눈감은 것인지, 정말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인지 유은우는 가늠이 되질 않았다.
유은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잠깐, 할 말이…….”
주위가 워낙 시끄러워 유은우의 시도는 금방 묻혀 버렸다. 그러나 정윤환은 눈을 굴려 이쪽을 보았다. 그의 빤한 시선을 받으면서 유은우는 이제 손을 높이 들었다. 그래도 주목을 받지 못하자, 옆에서 보다 못한 김산이 여러 번 손뼉을 쳤다. 이윽고 사위가 조용해졌다. 유은우는 목을 가다듬었다. 힘주어 말했다.
“정윤환 선배 많이 아픕니다.”
차예원이 손을 저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윤환이 아픈 거 모르는 사람 없어. 그래도 해야 하니까 맡기는 거 아니니.”
“침식 중이에요.”
차예원이 흠칫 굳었다. 학생들의 시선이 바로 유은우에게서 정윤환에게로 옮아 갔다. 정윤환은 무어라 입을 열려다가 이내 다물었다.
“여기서 빨리 나가서 중앙병원 의료진한테 의탁해도 시원찮을 판에 핵심 전력으로 너무 의지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정윤환 선배 본인이 동의한다면 전면에 나설 수는 있겠지만, 지나치게 특정 인물 중심으로만 판을 짜면 나중에 정윤환 선배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의지한 만큼 위험이 커집니다.”
유은우는 성큼성큼 차예원 쪽으로 걸어갔다. 수레 손잡이를 쥐고 있던 4학년들이 물러섰다. 유은우는 좌표기에 손을 얹었다. 금속 특유의 냉기에 소름이 끼쳤다. 다시 입을 열었다.
“거기다 좌표기를 선수에 단다는 건 모함의 속도를 포기한다는…….”
유은우는 말을 다 맺지 못했다. 정윤환이 다가와 유은우의 손을 거칠게 잡아 좌표기에서 떼어 냈다. 그가 허공 어딘가를 노려보며 말했다.
“됐어. 그냥 선수에 달아. 방식이 짜증나서 그렇지, 차예원 말 틀린 거 없어.”
그때였다. 누군가 비명처럼 외쳤다.
“개표 결과 나왔어요!”
한 1학년 남학생이 팔을 크게 휘저으며 갑판을 가로질러 달려오고 있었다. 머리 위로 온하나비 사이트 화면을 거대하게 띄운 채였다.
“압도적인 지지로 정상참작! 학교로 복귀한답니다!”
함성이 울렸다. 유은우는 잠깐 시야가 희어 중심을 잡지 못했다. 급한 대로 바로 옆의 좌표기를 잡아 지탱하려는데, 그 전에 단단하게 당겨졌다. 정윤환이 유은우의 팔을 잡아채 품으로 기대어 놓으며 다급히 물었다.
“언제? 복귀가 언제야?”
1학년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당장 내일이요!”
박수와 환호가 폭발하듯 터졌다. 소란으로 귀가 먹먹하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연다희가 달려와 정윤환의 품에서 유은우를 당겨 내더니 꼭 끌어안고 방방 뛰었다. 유은우는 연다희의 어깨 너머로, 고세민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손을 뻗어 정윤환을 얼싸안으려 하고, 정윤환이 질색하며 차예원을 당겨다가 고세민 쪽으로 대충 미는 것을 지켜보았다. 차예원은 불편한 표정으로 고세민이 힘껏 부둥켜안는 것을 인내했다. 잠시 뒤 고세민이 다른 사람을 포옹하러 떠나자, 차예원이 두리번거리더니 유은우를 보았다. 워낙 시끄러워 그녀는 거의 악을 쓰듯 외쳤다.
“그럼 날짜도 확실히 정해졌네!”
연다희의 품에서 막 벗어나며, 유은우 역시 소리를 질러 대답했다.
“내일 재희 선배 들어오는 날, 저희도 동시에 나가면 돼요!”
누군가 폭죽을 터뜨리는지 팡 소리가 터졌다. 색종이가 반짝이며 흩날렸다. 시야가 어지러웠다. 누군가에게 손을 붙잡혔다. 얼결에 정신없이 악수하고 그 손을 놓는 순간, 머리 위로 그늘이 덮쳐 오는 걸 느꼈다. 누군가 또 행복한 포옹을 시도하고 있었다. 상대가 누군지도 거의 식별이 안 되는 상태에서 유은우는 반사적으로 마주 안기 위해 손을 막 뻗쳤다. 그러다가 뒤로 확 끌어 안겼다. 가슴에 파묻혔다가 고개를 드니 옅은 머리칼이 보였다. 정윤환이 정색하며 유은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아무나 끌어안고 있어.”
“잠깐 비켜 봐.”
유은우는 정윤환을 밀치면서 바로 차예원을 찾았다. 차예원은 상기된 얼굴로 머리에 묻은 색종이를 털고 있었다. 유은우는 얼른 다가갔다. 뒤에서 정윤환이 잽싸게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선배, 저 용 연구소 갈 때 나노 드론 붙여 주세요.”
차예원이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정윤환이 미간을 좁히더니 내뱉듯 말했다.
“그건 또 뭔 소리야?”
“저랑 도연이, 용 연구소로 들어가면서부터, 전부 촬영할게요. 온하나비에 생방송으로 중계할 수 있도록. 여덟 도시 시민 전부 똑똑히 볼 수 있게. 저는 도연이를 용 연구소 내부 깊숙한 곳까지 안전하게 보호할 것이고, 도연이는 연구소의 자료 중 어떤 것이 용에 관한 것이고 어떤 것이 낙원의 이론에 관한 것인지 가려낼 거예요. 가치 판단은 시민들이 합니다. 우리가 여론만 가져오면, 군은 우리가 아닌 시민을 상대해야 할 겁니다.”
유은우는 차예원을 보며 말하고 있었으나, 정윤환의 경직된 시선이 뺨으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러니 드론 하나 붙여 주세요. 생중계가 시작되면 도시연합에서 온하나비의 존재에 대해 알고 외부망을 차단할 테고, 그럼 우리는 더 이상 바깥의 정보를 수집하지 못하겠지만, 그 대가를 치를 만한 정보를 제가 꼭 보여 드릴게요. 시민들은 서재희 선배의 폭로를 높이 살지는 몰라도, 아직 완전히 우리 편은 아니에요. 그래서 시민들은 서재희 선배가 학교로 돌아와서 어떤 변화를 일으키기를 기대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특정 리더를 따르는 게 아니라 자의로 이미 혁명을 주도하고 있음을 확실히 인식시켜야 해요. 그래야 만약에, 아주 만약에 서재희 선배가 잘못되더라도…….”
유은우는 차예원에게서 시선을 떼고 정윤환을 보았다.
“……흩어지지 않고 혁명을 이어 나갈 수 있으니까요.”
차예원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정윤환이 발칵 화를 냈다.
“뭐 하러 그런 짓을 해! 너 온디딤 쓰잖아. 아직 익숙하지도 않잖아. 패턴도 단순하고! 영상으로 한번 유출되면 네 전투 방식 전부 다 공개돼. 군에서 당연히 분석 들어갈 테고, 그러면 너만 불리해지고 너만 위험해진단 말이야! 총으로 설계하는 건 알아도 막을 수 없는 부분이 있지만, 온디딤은 물리적이잖아! 전투가 일회용이야? 유은우 너 하루만 살고 죽을 거야? 왜 이렇게 사람 힘들게 만들어?”
“아니, 드론 붙여. 은우 드론 붙이고 가! 내가 여덟 도시 전부 네 영상 뿌려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깟 외부망이야 들켜서 차단되면 뭐 어때. 은우 네 말대로 초반에 여론을 잡는 게 중요하니까.”
차예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정윤환이 뒷목을 잡았다.
“야, 차예원! 너 아까 나한테도 일부러 그랬지? 미리 상의해도 되는 걸 일부러 나 못 빠져나가게 하려고. 본인 일 아니라고 그렇게 멋대로…….”
“이건 내 일이야. 그 누구의 일도 아닌 내 일이라고! 나한텐 이제 아무것도 없잖아. 나도 다 버리고 여기 들어왔어!”
차예원이 소리를 질렀다. 정윤환이 턱을 굳혔다. 수많은 학생의 환성 속에서 차예원의 눈이 홀로 붉었다. 그녀가 갈퀴처럼 손을 뻗어 유은우의 손목을 잡았다. 차예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속삭이듯 작았지만, 선명하게 들렸다.
“우린 반드시 이겨야 해.”
◆
정윤환은 타인의 시선에 익숙했다.
특출한 동조자라서만은 아니었다. 총은커녕 숟가락도 제대로 못 잡는 나이에 유모차에 달랑 태워져 돌아다닐 무렵부터 주목을 받았다. 신망 높고 부유한 집안과 섬세하게 화려한 외모. 사람들 구설에 오르기 딱 좋았다. 그 뒤로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총을 잡고 상당한 동조율을 기록하면서 한 번 더 매스컴을 장식했다. 당연한 수순처럼, 기초학교에 입학하고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희대의 설계 천재라는 소문이 여덟 도시를 강타했다. 정윤환이 연습장을 북북 찢어다가 서툰 글씨로 거의 모든 통상적인 과정을 생략하고 해답으로 건너뛴 비약적인 메모들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인터넷을 돌아다녔다. 정윤환과 같은 수준의 설계자가 나오지 않는 한, 그 메모들은 정윤환 본인보다 오래 생존할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경탄의 시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질투와 열등감, 기득권을 향한 유서 깊은 반감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정윤환 앞에서는 웃어 보이다가 뒤로 돌아서면 따가운 말을 쏟아 냈다. 하지도 않은 일이 구체적으로 부풀려지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악질적인 루머가 돌고 돌아 정윤환의 귀로 들어왔다.
정윤환은 개의치 않았다. 결코 아량이 넓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정윤환이 가진 그 모든 것이 그따위 소문 나부랭이로는 쉽게 훼손되지 않을 만큼 견고했기에 가능했다. 익명의 다수 또는 무명의 언론사가 자신을 아무리 깎아내린다 하더라도, 정윤환의 부모는 변함없이 명성을 축적하고 있었고 정윤환의 기록 또한 끝을 모르고 갱신되었다. 그래서 정윤환은 자신에게 달라붙는 시선을 무시하는 데 금방 익숙해졌다. 한번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죄 하찮고 우스웠다. 그리고 사실 소문의 전부가 허무맹랑한 건 아니었다. 제 성질 더러운 건 정윤환 본인도 백번 인정했다.
“선배, 선배만 믿을게요. ……네? 아, 죄송해요. 제가 길을 막고 있었네요. ……은우요? 아까 저희랑 같이 점심으로 에너지 팩 먹었는데. 음? 그새 어디 갔지?”
“선배, 많이 아프다고 하던데, 괜찮으세요? 식사는 하셨어요? 애들이 선배 준다고 식당에 남은 재료 다 모아다가 샌드위치 만들어 놨던데 좀 가져다 드릴까요? 왜요? 샌드위치 안 드세요? 그럼 뭐 좋아하세요? 네? 다 싫다고요? ……혹시 제가 걸리적거리는 건 아니죠? ……은우요? 어디 있는지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너 총에 금 갔다며? 어떡하냐. 살다 살다 그 비싼 모델에 금 가는 건 또 처음 들어 보네. 내 총 한번 잡아 볼래? 혹시 너랑 잘 맞을 수도 있잖아. 아, 그래? 그거 창고에 남는 총 아니야? 그걸 그냥 쓰겠다니, 너도 진짜 대단하다. 조율은 했어? 백업 프로그램 깔아 줄까? 필요 없다고? 야, 너도 참. 나도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표정 좀. 귀찮다는 티 너무 내는 거 아니냐. 알았어, 간다, 가. 어? 유은우? 아까 차예원이랑 어디 가는 것 같던데.”
“윤환 선배만 있으면 무사히 나갈 수 있어. 너 그 영상 본 적 없지? 이거 봐라. 이거 선배 1학년 입학하고 첫 모의 전투 영상이다. 이게 그거야. 팀전에 혼자 나가서 다 이긴 거. 윤환 선배가 도서관에서 다 삭제시켜서 엄청 희귀한 자료야. ……야, 나도 처음에 봤을 때 그랬어. 얼굴 진짜 미친 거 아니냐. 집중이 좀 힘들긴 한데, 일단 얼굴 좀 가려 봐. 여기 설계 순서를 보면……. 야, 잠시만. 꺼. 일단 꺼. 윤환 선배 지나가고 보자. 기분 되게 안 좋아 보여. ……이쪽으로 온다. 그거 숨겨. 숨겨 빨리……. 서, 선배. 안녕하세요? ……네? 아닌데요? ……은우요? 은우 온디딤 연습한다고 모의 전투실 갔어요. 3시에 시작한다고 해서 저희는 이따가 갈 건데……. 네?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 죄, 죄송해요! 아니, 잠깐, 잠깐만. 선배, 선배! 저희만 볼게요. 삭제하지 마세요! 선배, 제발!”
“야, 정윤환. 한참 찾았잖아. 메시지도 안 되고 전화도 안 되고 불편해서 진짜. 김산이 너 3시까지 모의 전투실로 오라던데? 콘솔 좀 만져 달래. 교수들은 죄다 도망가고 재희도 없으니까 정석으로 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황 교수님은 그런 거 잘 못하시잖아. 야, 잠깐만. 저기, 내일 내가 뭐 도와줄 건 없어? 우리 5학년 설계부도 여러 명 뭉치면 쓸 만해. 물론 너만큼은 아니겠지만……. 뒤에서 서포트해 줄까? ……그래도 일단 뒤에서 대기할게. 네가 그렇게 광범위하게 설계하는 걸 또 언제 보겠냐. ……어? 구경났냐고? 아니, 그런 건 절대 아니고 만일의 사태를 위해서. 야,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사람을 왜 그렇게 봐. 유은우 보는 눈의 반의반만이라도 평소에 좀 장착해 봐라. 응? 유은우? 유은우도 모의 전투실 갔지. 나도 지금 가려고. 세상에, 내 살아생전 피 한 방울 안 내고 온디딤 잡는 동조자를 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역사적인……. 알았어. 그만할게.”
그러나 아무리 신경줄 튼튼한 정윤환이라도 이런 건 낯설었다. 막 대할 수가 없었다.
반짝반짝한 눈빛. 신뢰에 기반을 둔 기대. 진심 어린 배려. 거리낌 없는 호감.
정윤환이 누리기에 과분했다. 명백히 서재희의 몫이었다. 서재희가 정윤환을 보호하기 위해 빌려 준 임시 아우라에 불과했다. 흠이 나지 않게 소중히 쓰고 돌려줄 의무가 있었다. 정윤환은 서재희를 생각해서 최대한 착하게 말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려 애썼으나, 몸에 밴 오만함은 지우기 어려웠다.
게다가 너무 낯간지러웠다. 모든 학생이 정윤환에게 친근하게 다가왔다. 누가 보면 십년지기 친구라 해도 무방할 정도라 어이가 없었다. 특히 복도를 걷다 보면 5학년 이 미친놈들이 히죽거리며 어깨에 손을 턱턱 올리기도 했다. 예전이었다면 눈도 마주치기 어려워했을 텐데. 학을 떼며 정색을 해도 도무지 먹히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화를 버럭 내도, 상대의 눈빛이 모든 걸 다 이해한다는 듯 따뜻해서 되레 이쪽이 황당할 정도였다.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학생 임원들과 모여 의논을 하다가도, 목덜미로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가는 듯 소름이 돋아 퍼뜩 뒤돌아보면, 필시 누군가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방긋방긋 부담스럽게 해맑은 미소가 날아오거나, 허리를 굽힌 깍듯한 인사가 돌아오기도 했다. 흡사 서재희를 보는 시선과 같았다. 차라리 사해에서 한판 붙었으면 붙었지, 이런 대접은 딱 질색이었다.
세 살 애기처럼 불만에 가득 차 삐쳐 있지만 말고 이제 그만 운명을 받아들여 적응하라는 차예원의 닦달도 닦달이었지만, 정윤환은 유은우가 신경 쓰였다. 유은우는 용 연구소 배치도를 외우거나 에너지 팩을 입에 물고 쭉쭉 빨면서, 힐끗힐끗 정윤환을, 정확히는 정윤환의 떨리는 손끝을 주시하곤 했다. 그 눈빛이 어찌나 촉촉하게 측은한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유은우에게 동정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이제 더 떨어질 위신도 없는 것 같았다. 밑바닥 인생이 별거냐 싶을 정도였다. 서재희에게 그 어떤 일이 벌어져도 유은우가 그를 저런 시선으로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뒤집히려 했다.
정윤환도 고집만 부린 건 아니었다. 나름대로 많은 것을 양보했다. 그러니까 지금 학교 곳곳에서 기도문처럼 재생되고 있는, 불과 며칠 전 연다희의 등쌀에 떠밀려 연단에 올라가 몇 마디 했던 자신이 고스란히 촬영된 동영상 따위 말이다. 남을 사람은 남고 갈 사람은 가라고 선 하나 그은 것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수십 번씩 돌려 보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서재희는 이런 걸 어떻게 견딘 거지.
정윤환이 아는 서재희는, 이런 맹목적인 동경을 숨 쉬듯 자연스레 받아 낼 뿐만 아니라, 때마다 물을 주고 햇볕을 쬐며 가꾸어 왔다. 그 모든 것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학교 전체에 팽배한 추종의 분위기마저 서재희의 일부처럼 느껴지곤 했다.
물론 아닐 때도 있었다. 서재희가 학생회장이었고 정윤환과 돈독히 지내던 무렵이 그랬다. 정윤환은 가끔 학생회실 문을 벌컥 열었다가 홀로 앉아 있는 서재희를 목격하곤 했다. 대체로 서재희는 문이 열리는 즉시 반듯하게 미소를 차렸으나, 아주 드물게 정윤환을 알아차리지 못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미소는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감정과 표정이 창백하게 쓸려 나간 낯으로, 서재희는 그저 허공 어딘가 혹은 그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오래된 폐허처럼.
정윤환이 모르는 서재희였다. 연합대회에서 선하게 똑 부러지던 과거의 서재희도 아니었고, 학생들을 완벽하게 휘어잡고 있는 현재의 서재희도 아니었다. 굳이 끼워 맞춰 보자면, 서재희가 정윤환에게 자신의 부모님이 병원에 계신다고 처음 말한 뒤 아주 잠깐 배어 나왔던 분위기와 흡사했다. 그러니까 정윤환이 서재희와 소식이 끊어졌던 사이에, 서재희의 어떤 부분이 완전히 망가진 것이다. 잿더미가 된 그의 고향처럼. 까맣게.
그는 숨을 쉬며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그저 산산이 부서지고 남은 어떤 조각 같았다.
그런 서재희는 마치 다른 세계에 가 있는 것 같아, 어디론가 영영 떠나 버릴까 두려워 큰 소리로 이름을 불렀던 기억이 난다. 정신 홀라당 빼놓고 뭐 하고 있냐고 짐짓 장난스레 말을 걸었다. 그래도 깨어나지 않으면 다가가서 손으로 서재희의 등을 툭 쳤다. 실체가 만져지는 데에 안심하며. 그러면 서재희는 흠칫 놀라 어깨를 바싹 굳혔다가 곧 고개를 들며 알은체를 했다. 예의 그 서글서글한 미소와 함께. 그는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아주 부드럽게 미안하다고도 했다. 정윤환은 그냥 웃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서재희는 사과할 것이 없었다.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사람은 정윤환 자신이었다. 서재희의 부서진 틈으로 새어 나오는 어둠이 두려워 못 본 척 외면했으니.
그때 용기 있게 손을 내밀었다면 어땠을까. 알 수 없다. 입장이 바뀌어 자신이 서재희였다면 정윤환의 어둠을 끌어내어 빛 아래 흩어 날릴 수 있었을까. 그 또한 알 수 없다.
정윤환은 서재희가 돌아오는 내일을 상상했다. 고작 몇 시간 뒤. 얼마 남지 않았다. 또, 정윤환은 자신을 비롯하여 서재희와 차예원의 끔찍한 과거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을 그려 보았다. 그 또한 진즉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진실이 묻히거나 잊힐 가능성은 희박했다. 분명히 도래한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미래에. 굶주린 맹수처럼 바짝 쫓아와 뒷덜미에 서늘하게 닿을 듯 말 듯 했다.
모의 전투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정윤환은 차가운 거울에 이마를 붙이고 눈을 감은 채 맹렬히 생각했다. 세상살이도 설계처럼 답이 딱딱 나오면 얼마나 좋겠냐는 투정은 부질없었다. 치열하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모두가 다치거나. 또는 하나가 죽거나. 서재희가 하는 만큼 전체를 조망하진 못해도, 정윤환도 뇌라는 게 있었다.
서재희에게 붙은 혁명의 상징. 유은우는 그것을 제가 가져와 성공시킴으로써 면죄부를 만들겠다고 했다. 물론 유은우의 말도 맞았다. 혁명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그래야 서재희가 설 자리가 마련되었다. 서재희가 삶에 정당성을 얻으면 자연히 유은우의 안위 또한 보장된다. 그럼 정윤환은 유은우에 대해선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장담컨대, 서재희의 옆자리는 세상에서 제일 안전하니까. 정윤환 입장에선 모든 게 정리되는 셈이었다. 그러니까 상황이. 유은우의 마음을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 자신의 감정은 논외였다.
포기?
가슴이 꼭 죄었다. 숨 쉬기 어려웠다.
아직도 포기 못 했냐. 나도 참 지긋지긋하다.
정윤환은 눈을 감은 채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괜찮아, 숨 쉬어…….
오히려 이 얼마나 다행인가. 유은우가 제 삶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 옆에 서재희가 있든, 듣도 보도 못한 개새끼가 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니, 누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정윤환 자신은 애초에 자격이 없었다. 정윤환도 양심이 있었다. 제 자리가 아니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잘못된 결말을 이끌었고, 죗값을 치를 때가 되었다.
욕심 부리지 않기로 했으니까.
유은우를 다시 만났을 때, 총을 뽑으며 다짐했다. 유은우를 죽음으로 몰게 되더라도, 최소한 기만하지는 않겠다고.
유은우는 자신에 대한 기억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다. 새로운 관계를 맺을 절호의 기회였다. 서재희가 유은우와 맺었던 페어, 손 하나 까딱하면 해제할 수 있었다. 서재희가 유은우에게 둘렀던 보호 설계, 아무도 부술 수 없는 견고한 내 설계로 대신할 수 있었다. 외따로 떨어져 달달 떨고 있는 유은우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해사하게 웃으며 접근할 수도 있었다. 그때 유은우의 마음은 텅 비어 있었으니, 활짝 열고 들어가 내부를 장악할 거짓말은 한숨이 나올 정도로 쉬웠을지도 모른다. 서재희에게 빼앗길 틈 없이. 원래 내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내가 한 짓이 있는데. 마음을 얻고 용서를 구하는 것도, 용서를 구하고 마음을 얻는 것도 그저 두려웠다.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죄를 고백하는 순서나 방식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유은우를 노리는 사람은 사위에 그득했다. 그렇게 잘난 서재희도, 그토록 발버둥 친 정윤환 자신도, 결국 체제에 녹고 있었다. 유은우를 살리기 위해, 김서혁을 배신하고 임유현에게 붙으라고 다그쳤던 협박엔 선택지가 없었다.
그런데 서재희가 흐름을 비틀고 있었다. 판을 뒤집고 있었다. 어쩌면 유은우의 미래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최악은 아닐지도 모른다.
정윤환은 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거울 위로 김이 희게 서려 있었다. 손으로 거울을 크게 문질렀다. 거울을 노려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창백한 낯의 자신이 있었다. 그 위로 닮았으나 닮지 않은 형의 낯이 겹쳐졌다. 그리고 몇 년 전의 정윤환이 거기 있었다. 흔적도 없이 갈릴 뻔한 유은우를 구해서 품에 안아 들고, 유리창에 비친 겁에 질린 자신을 보며, 내가 너 하나만은 꼭 구해 내겠다고 다짐한.
죄를 덮을 수 없다면 결국 누군가는 반드시 심판받아야 한다. 숫자는 중요치 않았다. 유무가 중요했다. 시민들의 증오를 받아 낼 대상은 한 명으로 충분했다.
땡.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중앙 제어실은 어두웠다. 수십 개의 스크린으로부터 강렬한 빛이 날카롭게 뻗어 나왔다. 학생 임원들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매끄러운 바닥을 성큼성큼 밟으며, 정윤환은 곧장 차예원 옆으로 다가섰다. 콘솔에 두 손을 가볍게 짚으며 고개를 들었다.
스크린의 유은우는 모의 전투실 입구에 서 있었다. 중앙 제어실에서 아직 그 어떤 조작도 하지 않아, 배경도 장애물도 가상의 적도 없었다. 정확한 측정을 위해 자연으로 구성된 테스트실과는 달리, 그저 널찍한 회색 공간뿐이었다. 유은우 옆으로 온디딤이 가득 담긴 수레가 보였고, 그 수레에 사람 크기만 한 솜 인형이 기대어 놓여 있었다.
허리를 곧게 세운 유은우는 어깨가 수평으로 반듯했으며, 정면을 똑바로 보고 있었고, 호흡이 골랐다. 전투 시작 전, 낭비되는 동작 없이 단단히 긴장하고 있었다. 군에서 제대로 훈련받은 태가 났다. 김서혁이 그녀를 직접 가르쳤다. 정윤환이 차마 제 눈으로 유은우 보기가 힘들어 학교로 도망친 사이에.
“유은우 첫 테스트할 때 생각나네.”
김산이 중얼거렸다.
정윤환은 콘솔의 스틱을 잡고 카메라를 조정했다. 화면의 시선이 바뀌었다. 천장. 투명한 돔 위로 학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다들 숨을 죽이고 조용했다. 호기심으로 시끌벅적하던 예전과 사뭇 달랐다.
정윤환은 스틱을 능숙하게 돌려 다시 초점을 유은우에게 맞추었다.
“여기 용 연구소 데이터 없지?”
도시연합 기밀이 있을 리 만무했으나 확인차 한번 물어나 보았다. 연다희가 즉각 대답했다.
“없어요.”
“그나마 제일 비슷한 건?”
“제8유적지 정도 되려나요? 거긴 멀쩡한 빌딩도 많고 규모도 크니까요.”
“안 돼. 거긴 도시랑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온 흐름이 달라. 차예원, 리스트 띄워 봐.”
차예원이 가까이 있는 버튼을 눌렀다. 스크린의 유은우가 반투명해지고, 그 위로 배경 리스트가 빼곡하게 차올랐다. 정윤환은 눈을 가늘게 뜨고 스크린을 유심히 살폈다. 초조하게 손끝으로 콘솔을 톡톡 두드린 끝에, 하나를 선정했다.
“제21유적지. 여긴 제5도시랑 가까우면서도 기상이 안정적이라 건물 내부랑 가장 비슷해.”
“음.”
차예원이 팔짱을 끼면서 정윤환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거긴 건물이 하나도 없어. 얽히고설킨 철망에, 폐건물이 엉망으로 내려앉아서 구조가 미로 같아.”
정윤환은 개의치 않고 손가락을 뚜둑 한 차례 꺾더니 콘솔에 얹었다.
“건물 안에서 싸울 거니까 건물 안에서 연습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버려. 모양만 건물이 아니어서 그렇지, 협소하고, 직각 모퉁이 많고, 바닥 평평하고, 다른 유적지에 비해 거친 장애물도 적어. 가상의 적만 최대로 깔면 여기가 딱이야.”
정윤환의 손이 콘솔 위를 날았다. 유은우 주변의 회색 공간이 모자이크처럼 무너져 내렸다. 수 미터의 거대한 콘크리트 조각들이 허공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이어 쿵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흙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그 위로 철망이 지붕처럼 내려앉았다. 이어 그 공간은 한없이 확대되어 이젠 끝도 보이지 않았다. 천장의 돔은 사라지고 잿빛 하늘이 내리깔렸다. 돔 너머의 학생들은 여전히 유은우를 볼 수 있었지만, 유은우는 이제 천장 너머를 볼 수 없었다.
정윤환은 마이크를 잡았다. 그 잡음에 유은우가 기민하게 반응했다. 유은우는 손을 들어 왼쪽 귀의 인터컴을 살짝 고쳐 끼웠다. 동시에 신체 강화제를 끼운 호흡기를 물고 깊이 빨아 당겼다. 수증기가 흩어졌다.
“유은우.”
― 응.
“기상은 이대로 간다. 어차피 사해는 기차로 이동할 거고, 건물 내부에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지는 않으니까. 그 외는 전부 최고난도로 설정하겠어. 의견 있어?”
유은우는 물고 있던 호흡기를 홀스터에 꽂아 넣었다.
― 없어.
“무기 잡아. 뭐 쓸 거야?”
유은우는 수레를 응시했다.
정윤환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고세민이 헛웃음을 지었다.
“저렇게 좁은 수레 안에 빽빽하게 차 있어서 꺼내기도 힘들겠…….”
유은우는 수레를 발로 걷어찼다. 수레는 와장창 소리를 내며 무기를 뱉어 냈다. 가장 무거운 망치가 쿵 하고 흙바닥에 파묻혔고, 단단히 벼려진 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굴렀으며, 가벼운 화살들이 주위를 낭창거리며 튀어 오르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그중 길고 단단한 봉 아래로, 유은우는 발을 밀어 넣었다. 발등으로 걷어차 올렸다. 봉이 공중으로 희게 튀어 올랐다. 봉이 한 바퀴를 다 돌기도 전에, 유은우는 깨끗하게 잡아챘다. 동작이 정확했다. 봉을 잡고 몇 바퀴 가벼이 돌려 본 다음 바닥에 내려놓더니, 이번엔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누워 있는 솜 인형을 번쩍 들어 등에 훌쩍 업었다. 하얗고 밋밋한 천에 엉성한 박음질은 그렇다 쳐도, 아까는 보이지 않던 반대쪽이 훤히 드러나면서, 정윤환은 그만 제 눈을 의심했다. 콘솔을 능숙하게 조작하던 그의 손이 딱 멈췄다.
“저 징그러운 건 뭐야?”
인형 머리 부분에 손도연의 얼굴 사진이 떡하니 붙어 있었다. 활짝 웃는 표정이었다. 어디 단체 사진에서 오려 왔는지 머리 부근에 다른 사람의 손가락 끝이 붙어 있었다.
“우리 도연이 대역이야.”
차예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정윤환은 현기증이 났다.
“뭐? 손도연은 어디 가고? 이게 어린애 장난이야? 당장 내일이라 연습할 시간 오늘 하루밖에 없는데!”
“긴장했는지 토하고 난리 나서. 도연이는 약 먹고 뛰겠다고 했는데, 은우가 자라고 보냈어. 애들이 기숙사 이불 뜯어다가 급하게 만든 인형이야. 도연이랑 키도 같고, 중력 설계 걸어 놔서 몸무게도 똑같아. 그냥 해. 어쩔 수 없잖아. 컨디션 안 좋은 애 억지로 훈련시키면 역효과야. 하루 훈련한다고 뭐가 달라지니. 어차피 걔 못 해. 은우한테 기대는 수밖에.”
정윤환이 혀를 찼다.
“잘하는 짓이다.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속이 뒤집히면 어쩌라는 거야. 어차피 우리 드론 보낼 거 아냐? 유은우만 연구소로 보내고 손도연은 여기 학교에 있고, 원격으로 자료 뒤지면 안 되는 거야?”
“중간에 드론 파괴되면 은우 거기까지 간 보람도 없어져.”
정윤환이 눈을 찌푸리고 스크린을 응시하는 동안, 유은우는 인형을 업고 나서 인형의 두 팔을 끌어다가 어깨 위에 단단히 묶고, 인형의 두 다리는 허리 위에 야무지게 묶은 다음, 잠시 바닥에 내려놓았던 봉을 도로 집어 들었다. 그리고 도약을 준비하는 듯, 디디고 선 바닥을 발로 꾹꾹 다지기 시작했다.
정윤환은 이제 어이가 없다 못해 화가 나려 했다.
“업고 뛴다고?”
차예원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은우가 그렇게 한다고 했어.”
“손도연은 동료야, 짐이야?”
“도연이가 부상을 입었다고 가정하고, 은우가 저렇게 연습한다고 했어.”
정윤환은 손등으로 열 오른 눈가를 꾹 눌렀다. 차예원이 가까이 붙어 오는 기척이 느껴져 그는 고개를 들었다.
“정윤환, 나 좀 봐.”
다른 학생들에게 들리지 않게 차예원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거 훈련이야.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훈련. 실제가 아니라고. 쥐면 깨질까 불면 꺼질까 애지중지 감싸고도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은우가 이제 막 걸어 다니기 시작한 애기도 아니고. 쟤 동조율은 100이고 온디딤을 다뤄. 너보다 부상도 덜해. 재희였으면…….”
“알았으니까 닥쳐.”
그놈의 서재희. 이름에 꿀 발랐냐. 아주 지긋지긋했다. 학교는 중립지대로 지정되었으니 임원 전원만 동의하면 법의 제정이 가능했다. 몇 시간 뒤면 서재희도 학교로 복귀하겠다, 이번 기회에 확 그냥, 내 반경 1킬로미터 내에서 서재희 이름 석 자 뱉는 놈들은 싹 잡아다가 감옥에 처넣는 법이라도 제정할까 싶다가, 이건 또 무슨 유치한 생각이냐며 자신에게 화가 났다.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알았다니까.”
정윤환은 입술 안쪽을 짓씹으면서 콘솔을 두드렸다. 유은우가 버티고 선 배경 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지지직거리며 솟구쳤다. 곧 단단하게 인간의 형상으로 빚어졌다. 수십 개를 넘어서서 수백 개가 벌레 떼처럼 바글거렸다.
연다희가 난색을 표했다.
“난이도가 너무 높은 거 아니에요? 시작하자마자 죽겠어요. 최고난도는 실행해 본 적 없잖아요. 너무 어려우면 의미 없어요. 실제론 저렇게까지 어렵지 않을 텐데…….”
“저거 할 수 있으면 다 할 수 있잖아.”
차예원이 대답했다.
정윤환은 콘솔에서 물러섰다.
기계음이 떨어졌다.
― 모의 전투. 개인 대 시스템. 1학년 유은우. 동조율 100. 타격 100%. 설계 0%.
유은우는 손목의 이프를 향해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봉을 움켜쥔 손마디가 희게 질렸다. 호흡은 거의 없었다. 유은우는 고개를 정면으로 향한 채, 눈만 빠르게 굴려 주위를 훑었다. 사방에 단단한 인간의 형상을 한 적이 도사렸다. 유은우는 발로 바닥을 문질렀다. 흙먼지가 물씬 피어올랐다. 그녀는 도약 시점을 가늠하고 있었다.
― 채널 제21유적지. 기상 해제. 온 안정 최상. 온 오염도 최하. 장애물 미지정. 대적 최고난도. 통증 체감 0%. 목표물 등급 A.
정윤환은 입이 말라, 넥타이를 당겨 느슨하게 했다.
― 총 감지 불가. 총 등록 없이 모의 전투를 진행하시겠습니까?
정윤환이 손을 채 내밀기도 전에, 콘솔과 가장 가까운 차예원이 실행 버튼을 눌렀다.
― 카운트다운 스타트. 3. 2. 1. 0.
유은우가 도약했다.
그녀가 디디고 있던 자리로 적이 새까맣게 모여들었다. 다시 땅으로 착지하며, 유은우는 봉을 비스듬히 그어 내렸다. 빛이 먼저였다. 희게 스쳤다. 소리는 늦게 따라왔다.
카가가가각!
날카로운 타격음을 내며, 적들이 뒤엉켜 쭉 밀려났다. 잠깐 숨이 트인 땅 위로 발을 디디는가 싶더니, 유은우는 바로 콘크리트 미로 속으로 들어갔다. 나노 드론이 그 뒤를 바짝 쫓았다. 밀려난 적들이 다시 일어섰다. 그들은 약간의 상흔만 입은 채, 바퀴벌레처럼 끈질기게 유은우의 뒤를 쫓았다.
“왜 안 죽이는 거지? 적이 계속 살아서 따라붙잖아.”
고세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연다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힘 조절이 안 되는 거 아닐까요?”
김산이 콘솔에 손을 짚었다. 그가 빨려 들듯 스크린을 응시하더니 중얼거렸다.
“아니. 힘 조절이 안 되는 게 아냐. 저 많은 적에게 단 한 번 공격을 날렸는데 적이 전부 살아 있다는 건 엄청난 우연이거나, 혹은 치밀하게 의도했거나. 이건 우리가 해 왔던 일반적인 모의 전투와 달라. 용 연구소 내부로 깊이 들어가기 위한 준비지. 유은우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은 거야. 죽이는 연습이 아니라, 살리는 연습을 하는 거야. 그래야 시민들 마음이 우리한테 오지. 멀쩡한 연구소 들어가서 사람을 막 죽이면 살인자밖에 더 되겠어.”
정윤환은 가만히 유은우를 바라보았다. 불과 며칠 전, 유은우가 물었었다.
‘너 사람 안 죽여?’
‘웬만하면.’
‘왜 안 죽여?’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 설계 천재 소리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고작 그런 것뿐이더라.’
유은우는 총이 없었다. 허벅지의 홀스터엔 약물 케이스와 호흡기뿐인데, 손은 문득문득 그쪽으로 미끄러졌다. 달리면서도 안정적인 호흡. 깔끔하게 떨어지는 방향 전환. 이프 확인은 신속했고, 적과의 거리는 일정했으나, 좁히고자 마음먹을 땐 망설임이 없었다. 유은우가 봉을 고쳐 쥘 때, 김서혁이 총을 쥐는 방식이 묘하게 겹쳐 떠올랐다. 비단 정윤환만 그리 느낀 것은 아니었다.
“기본기가 굉장하네. 빠르진 않은데 묵직하고 힘이 있어. 저렇게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건 김서혁 스타일 아닌가?”
김산이 눈을 찡그리며 이어 말했다.
“그런데 너무 느리네. 사정거리도 심하게 짧고. 온디딤이라 어쩔 수 없나. 유은우가 사용할 수 있다는 점만 제하면, 어째 총보다 좋은 점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차예원이 초조하게 입술을 매만졌다. 그녀가 말했다.
“도연이가 은우한테 계속 서포트를 해 줘야 할 것 같아. 속도든, 운용 범위든.”
앞만 보고 내달리던 유은우가 모퉁이를 돈 뒤, 숨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봉을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봉의 전신을 빠르게 쓸어내렸다. 푸른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유은우가 입술을 모아 훅 불어 내자 푸른 기는 무겁게 흩어졌다. 유은우는 공중으로 손을 저어 그것을 몇 번 그러쥐고 손 안에서 부수었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했다.
“맙소사. 패턴화되기 전의 온이야. 저거 봐요. 물결이 굉장히 불규칙하죠.”
지해은이 감탄했다. 그녀가 멍하니 이어 말했다.
“저렇게 날것으로 밀집되어 있는데 맨손으로 만져도 아무렇지도 않나 보네. 동조율이 100이라 그런가, 아니면 온디딤을 쥐고 있어서 그런가.”
유은우는 이제 중앙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좌우가 콘크리트로 막히고 전후가 깊게 뚫려 있는 데다가, 위는 철망으로 막혀 있었다. 건물 복도와 흡사했다. 유은우는 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후, 뒤돌아섰다. 적과 정면으로 마주한 뒤 기다렸다. 봉을 들고 대기하는 수고는 없었다. 봉 끝을 바닥에 대어 힘을 최소한으로 소비했다. 좁은 공간 덕에 적은 서넛씩 짝을 지어 달려왔다. 지척에 가까워졌을 때 유은우는 봉을 두 손으로 움켜쥔 뒤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으로 꽂았다.
정적. 땅이 우득우득 갈라지는 소리가 나는 듯했으나 표면은 멀쩡했다. 그리고 적들이 디딘 바닥 이쪽저쪽이 부서지는가 싶더니 거대하게 푸른 빛줄기가 뱀처럼 튀어 올랐다. 빛줄기는 적의 발목을 날카롭게 베어 내며 휘돌다가 스러졌다. 적은 죽지 않았으나, 더 이상 쫓아올 수는 없었다. 쓰러진 그들을 밟고 뒤의 적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와, 저거 뭐야. 사정거리가 짧지는 않네요.”
고세민이 감탄했다. 김산이 고개를 저었다.
“길지도 않아. 그리고 속도. 느려.”
연다희가 스크린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렇게까지 느린 건 아닌 것 같은데. 김서혁 총사령관님도 속도 저 정도 나와요. 서포트 없이 뛸 때는. 그래도 학교 다닐 때 늘 랭킹 1위라고 들었어요.”
정윤환이 조용히 정정했다.
“그건 김서혁이 매개를 집중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덜 지쳐서 그래. 유은우하고 비교하면 안 돼. 김서혁은 그야말로 장기전에 능하고, 유은우는 짧게 치고 빠져야 하고. 거기다 아주 치명적인 문제가 있어. 지금의 유은우를 봐. 그 흔한 탐지 설계 하나 못 띄우고 있어. 아무 정보 없이 싸우는 거야. 무식한 방법이라고.”
그 와중에 유은우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뒷걸음치며 이프를 확인하고 있었다. 목표물의 위치가 빨갛게 반짝거렸다. 유은우는 불편한 기색으로 등에 업힌 인형을 고쳐 업었다.
정윤환이 한숨처럼 말했다.
“5학년 설계부에서 상위권 적어도 일곱은 붙여. 저대로는 안 되니까. 유은우 온디딤은 보조로 쓰게 하고 총 쥐게 해. 저대로 손도연이랑 둘이 가면 절대 살아서 못 돌아오니까. 시계 다루는 걸 봐서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 무기마다 편차가 너무 크잖아.”
침묵이 이어졌다. 동의나 다름없었다.
연다희는 사색이 되었다. 당장 내일인데. 재희 선배가 들어올 때 나가야 언론 덕도 보고 성공할 가능성도 커지는데. 그녀가 중얼거리는 걸 무시하고, 정윤환은 자연스럽게 차예원에게 다가갔다. 차예원은 난처한 기색으로 스크린의 유은우만 뚫어져라 보고 있다가, 정윤환이 가까이 붙으며 어깨를 툭 건드리자 기겁을 했다.
“아, 깜짝이야. 좀 떨어져 주겠니? 껍데기는 쓸데없이 잘나 가지고.”
“잘생겨서 미안한데, 잠깐 얘기 좀 해.”
정윤환이 속삭였다. 차예원은 의아하다는 얼굴로, 그러나 빠르게 주위를 살피더니 다시 정윤환을 보았다. 왜? 하고 차예원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너 학교로 돌아온 이유 꼭 서재희 때문만은 아니지?”
차예원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네 마음대로 생각해.”
“차인호는 앞으로 쭉 내리막길만 걷게 될 거야. 이번에 서재희가 정부의 비리를 까발렸고, 이건 앞으로 시작에 불과해. 해명하든 해명 못 하든, 어쨌든 차인호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어. 재선은커녕 시민들에게 죽임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 너도 그거 알고 있어서 일찌감치 아빠랑 연 끊고 이쪽으로 넘어온 거 아니야?”
차예원이 정윤환을 노려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네 사랑이 언제부터 그렇게 대단했냐? 너 명분이 없어서, 사랑하는 약혼자를 위해서 학교로 돌아왔다고 핑계 대고 있는 거잖아. 서재희도 그걸 예상해서 너 하나 발붙일 공간은 마련해 주려고 일부러 공개 진술에서 너 언급한 거 아니야? 서재희가 약혼녀인 널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보이면 시민들이 네게 너그러워질 테니까. 그래서 서재희가 편지에서 나랑 유은우를 확 묶어 버린 것 같거든. 서재희가 유은우를 좋아하는 제 마음을 들켜서 네가 시민들에게 외면받을까 봐.”
차예원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내가 너 아빠한테 보내 줄까?”
차예원 뺨이 경직되었다. 정윤환은 그녀의 귓가로 낮게 말했다.
“내일 내가 직원들이랑 일부 학생들 내보낼 때, 너도 끼어서 빠져나가. 설계 끝부분에 서면 내가 너 하나쯤은 숨겨 줄 수 있어. 나가서 아빠한테 돌아가. 우리 엄마, 아빠한테 안부도 좀 전해 주고.”
“……나 지금 대의를 위해서 아빠도 버리고 학교로 복귀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나보고 다시 돌아가라고?”
“어차피 너 학교에 오면서 아빠랑 한패가 아니라고 시민들에게 똑똑히 보였잖아. 돌아가는 이유야 적당히 둘러대면 되지.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총대 메고 도시연합으로 들어간다고 하면 되잖아.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는 건, 아빠한테 감금당해서 못 나오는 거고. 그럼 여기서 위험하게 싸울 필요 없어. 거기서 소강될 때까지 입 꾹 다물고 기다리기만 하면 돼. 그냥 듣기만 해도 편하지 않냐? 네가 추구하는 삶 아니냐고.”
“……됐어. 안 가.”
“뭐?”
정윤환은 미간을 좁혔다. 차예원이 한 차례 이를 악물더니 재차 말했다.
“안 간다고.”
“야, 너 진짜.”
정윤환은 할 말을 잃고 입을 달싹이다가 재차 말했다.
“나도 나지만 너도 참 대단하다. 아직도 모르겠냐. 넌 죽었다 깨어나도 서재희랑 안 돼. 정신 차려. 보내 준다고 할 때 가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사돈 남 말 하네. 은우도 너 안 좋아해. 남 연애에 훈수 둘 시간 있으면, 네가 그렇게 잘생겼는데 왜 은우가 안 넘어오는지, 가슴에 손 딱 얹고 네 인생이나 돌아보렴.”
그때였다. 연다희가 비명을 질렀다. 강렬한 폭발음. 정윤환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스크린이 흙먼지로 뿌옜다. 폭발음과 함께 일제히 날아오른 잔해들이 서서히 가라앉자, 콘크리트 위에 우뚝 서 있는 유은우가 보였다. 그녀는 어느새 봉 대신 채찍을 쥐고 있었다. 어딘가 부족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완벽했다. 거의 모든 적이 바닥에 누워 뒹굴고 있었다. 정윤환은 빠르게 스크린의 오른쪽을 살폈다. 사망자는 여전히 0명이었다.
유은우가 인터컴을 만졌다.
― 적 무한 생성 돼요?
“당연히 되지.”
고세민이 신이 나서 콘솔을 두드렸다. 그는 정윤환이 만진 초기 설정에서 개수 제한을 풀어 버렸다.
부상을 입고 꼼짝 못하는 적 위로 삽시간에 새로운 적들이 빚어졌다. 유은우는 콘크리트 위에서 뛰어내렸다. 정윤환은 육안으로 채찍의 움직임을 좇을 수 없었다. 느리게 움직인다 싶어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예상치 못한 곳을 거칠게 긁고 있었다. 급소를 약하게 치거나, 급소가 아닌 곳을 강하게 때리거나.
“안 보고 어떻게 적의 위치를 알지? 설계도 안 쓰면서. 유은우의 감이 유독 좋다는 건 알지만.”
차예원이 중얼거렸다. 정윤환이 다급히 물었다.
“속도는 왜 저렇게 빨라? 뭘 한 거야?”
연다희가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갑자기 빨라졌어요. 특별히 잘 맞는 무기가 있는 건가?”
지척에서 적의 공격이 날아왔다. 평범한 동조자라면 설계로 간편히 막아 냈을 공격을, 유은우는 바닥으로 몸을 던지며 피했다. 그 와중에 등에 업은 인형을 보호한답시고, 팔로 바닥을 긁었다. 아무리 설정을 무감하게 했더라도 뇌는 고통을 기억한다. 전혀 아프지 않겠지만, 유은우는 반사적으로 눈을 약하게 찡그렸다. 인형은 군데군데 터져 솜이 뭉글뭉글 삐져나오긴 했으나, 용케도 유은우의 등에 매달려 있었다.
뛰어올라 반 바퀴를 돌며 유은우는 그대로 채찍을 던져 버렸다. 채찍은 콘크리트 틈 사이로 날아갔다. 곧 요란한 소리를 내며 콘크리트가 무너져 내렸다.
유은우는 빈손이었다. 속도가 확연히 느려졌다. 그러나 계산은 정확해서, 유은우는 적이 지척에 오기 전에, 흩어져 있는 무기에 도착했다. 엉망으로 굴러다니는 화살들을 밟아 부수면서 유은우는 손끝으로 모든 무기를 빠르게 쓸어 보았다. 그녀는 창을 한번 잡았다가 놓고, 활을 만지며 망설이더니, 이내 긴 검을 집어 들었다. 무게를 가늠하듯 손잡이를 손 안에서 몇 번 굴려 보더니 이내 도약했다. 모든 무기를 차례차례 잡아 볼 심산 같았다.
김산이 낮게 탄성을 질렀다.
“빨라. 지금까지 중 제일 빠른데.”
정윤환은 홀린 듯이 유은우를 보았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지. 그는 유은우를 따라잡으려 애썼다. 그러나 움직임이 빨라 어려웠다. 동작이 크고 묵직하여 타격의 여파가 어마어마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은우가 떠난 자리의 적은 전투 불능일 뿐 여전히 숨이 붙어 있었다. 강한 힘을 빠르고 섬세하게 다루고 있었다.
유은우는 잠깐 멈추어 서더니 주위를 쓱 훑어보았다. 긴장도 여유도 적당했다. 온통 쓰러진 적뿐이라 바닥이 새까맸으나, 수많은 그림자가 불쑥불쑥 새로이 솟아나고 있었다. 유은우는 이제 탁 트인 땅엔 흥미를 잃은 듯했다. 처음 훈련의 목적과 맞지 않았으니. 유은우는 채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콘크리트 틈 사이로 파고들었다. 이제 적은 뒤뿐만 아니라 앞에도 있었다. 유은우가 잠깐 멈추며 적을 가늠하는 사이, 정윤환은 유은우의 전신에서 드문드문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뭐지, 저거?
정윤환은 눈을 가늘게 떴다.
유은우는 칼끝으로 바닥을 가벼이 짚고 있었다. 그녀는 손아귀 안에서 검 손잡이를 천천히 돌렸다. 칼날 위로 빛이 눈부시게 반사되었다. 그 사이로 익숙하나 익숙지 않은 어떤 패턴이 빛을 받아 물비늘처럼 반짝였다.
설마.
정윤환은 제 눈을 의심했다. 여태 못 알아보다니. 숨이 탁 막혔다.
“설계 같은데.”
지해은이 말했다.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말도 안 돼. 총 없이 어떻게 설계를 써. 거기다, 설계 난독증 아니었어?”
고세민이 반박했다. 그러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김산이 눈도 깜박이지 않고 유은우를 응시하며 말했다.
“설계 맞는 것 같은데. 우리가 아는 거랑 패턴이 다르긴 한데, 정형화되어 있지 않을 뿐이지 똑같은 효과야. 우리는 계산을 해서 정확한 모양이 나오는 거고, 유은우는 완전히 감으로만 하고 있어서 불안정한 거고. 어쨌든 저것도 설계의 한 형태로 봐야 할 것 같은데. 정윤환 네 생각은…….”
김산은 정윤환 쪽을 보았다가, 이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차예원이 당황한 기색으로 물었다.
“너 우니?”
정윤환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황급히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김산을 제외한 모든 임원이, 이제는 유은우가 아닌 정윤환을 보고 있다가, 차예원이 입 모양으로 무어라 하자 못 본 체 고개를 돌렸다.
― 모의 전투를 종료합니다.
정윤환은 심호흡을 하며 눈물을 삼키려 애썼다. 차예원 말이 맞았다. 유은우는 약하지 않았다. 정윤환이 필사적으로 보호해야 했던 때와 달랐다. 홀로 서고 홀로 싸우고, 어쩌면 정윤환보다 더 강해질지도, 이미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 1학년 유은우. 제한 시간 30분 내 목표 미달성. 적 852명 중 322명 접촉. 대적 클리어 0%. 유은우 체력 82% 감소. 적과 유은우 모두 유의미한 손상 없음. 온 활성화 지수 기준치 초과로 측정 불가.
정윤환은 차예원의 손목을 잡고 구석으로 데려갔다. 그늘에 가려 둘은 다른 이에게 잘 보이지 않았다.
“차예원, 하나 물어볼게.”
차예원의 빤한 시선을 받으며, 정윤환이 천천히 말했다.
“내가 교장실에서 우리 결재 라인 다 없애 버렸잖아. 그건 낙원의 이론과 별개로 교내 범위라 삭제가 가능했던 거고. 도시연합 본부에는 우리 기록 그대로 다 남아 있지?”
“그렇지. 그건 삭제도 안 돼. 설사 낙원의 이론을 파괴한다고 해도 일부는 남을걸. 연동 안 된 별개 자료도 많아서.”
“그럼 서재희는? 걔 관리자 등록 안 했잖아. 그럼 서재희는 기록 하나도 안 남아 있어? 아니면 후보였던 것만으로도 흔적이 남아?”
차예원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글쎄. 관리자로 등록만 안 했다뿐이지, 너나 나보다도 훨씬 먼저 후보로 추천되었으니까 그건 어딘가 남아 있을 것 같아. 13위원 정보랑 같이 보관되어 있지 않을까 짐작되는데, 확실한 건 아니고.”
“그거 죽은 관리자로는 변경 못 하지. 이를테면 다 임유현 이름으로 돌린다든가…….”
“불가능해. 살아 있는 후보나 관리자로만 가능해,”
“그럼 그거 내 이름으로 바꿔 줘.”
차예원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만 약간 벌어졌다.
정윤환이 다급히 말했다.
“내가 너 아빠한테 보내 줄게. 여기서 나가게 해 준다고. 너희 아빠한테 가서 말해. 서재희 기록 남은 거 최대한 삭제해 달라고. 안 되면 그냥 내 이름으로 데이터를 다 옮겨 버리라고. 만약에 아빠가 못 하겠다고 하면, 덧붙여. 내가 차예원 네 기록까지 다 가져가겠다고. 실리콘으로 내 지문 떠 줄게.”
정윤환은 손아귀에서 차예원의 손목이 축 늘어지는 걸 느꼈다. 정윤환은 작게, 그러나 분명히 말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의 과거, 남이 다 짊어진다는데 싫다고 하겠어?”
차예원은 질린 표정으로 주위를 힐끗 살피더니 물었다. 목소리가 다 쉬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네가 학교에 남으려는 이유와 같아. 하지만 넌 이제 떠날 거야. 그렇지? 네가 여기서 나가는 게 서재희에게 더 이득일 테니까.”
“너 미쳤구나.”
차예원은 이제 핏기가 가셔 있었다. 그녀가 속삭였다.
“성난 시민들한테 산 채로 갈기갈기 찢기고 싶어? 그냥 묻자. 없던 일로 해. 누가 알겠니? 도시연합이 건설되고 여태 아무도 몰랐어…….”
“아니, 시민들은 바보가 아니야. 곧 모두가 알게 될 거야. 그리고…….”
정윤환은 차예원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죄인은 딱 한 명이면 돼.”
◆
서재희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뒤에서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이어 삐빅, 하고 바깥에서 잠기는 소리가 났다. 서재희는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고개를 들었다.
소박한 침구가 놓인 철제 침대. 멋없이 투박한 탁자. 그 위에 놓인 마른 식사. 감옥이라기엔 넓었고, 객실이라기엔 삭막했다. 커튼 한 장 없는 창틀 사이로 어렴풋하게 시위의 노래가 스며들고 있었다.
서재희는 탁자로 걸어가 물병을 집어 들었다. 뚜껑을 따고 입에 물었다. 미지근한 물을 느리게 머금으면서, 서재희는 김서혁의 행보를 가늠했다.
중앙수사부 면회실에서 도시연합 본부까지 차로 20분. 본부 입구에서 13층 도시연합장실까지 13분.
부드럽게 물을 삼켰다. 바짝 말라붙은 목구멍이 따가웠다. 서재희는 물병을 든 손등으로 입가를 가볍게 눌렀다.
대기 시간은 없을 것이다. 김서혁이 중앙수사부에 방문했다는 사실을 차인호가 모를 리 없을 테니까. 차인호는 다른 일정을 전부 미루고서라도 김서혁과 접촉하려 할 테고, 김서혁은 차인호에게 새로운 제안을 하며 우위를 점할 것이다. 그리고 김서혁의 성격상,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으나 서재희가 당해 온 고문에 대해 일말의 안타까움을 느꼈을 것이다. 유은우에 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서재희에게 온정을 베풀 만한 여유가 그에게 있다면 아마도…….
서재희는 탁자에 물병을 내려놓았다. 사소한 동작마저 차분한 습관이 들어, 부딪히는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지금쯤.
벽면 구석에서 약하게 기계음이 났다. 서재희는 물병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사각지대 없이 설치된 CCTV는 세 대. 기계음이 세 번 울리고 나서야, 서재희는 고개를 들어 방의 모서리를 확인했다. 깜박이던 빨간 불빛은 모두 꺼져 있었다.
긴장이 탁 풀렸다. 몸이 기울어졌다. 서재희는 부딪히듯 벽을 짚었다. 옥죄고 있던 호흡이 깊이 터졌다. 그는 건조한 손으로 뒷덜미를 꾹 감싸 쥔 채, 담담히 무너졌다. 무릎을 세우고 앉아 웅크리며 고개를 묻었다. 여전히 통증이 감도는 뒷덜미를 붙든 손이 간간이 떨렸다.
‘총사령관님, 고문도 아주 어릴 때부터 차근차근 받으면 익숙해집니다.’
이를 악무는 와중에도, 서재희는 그런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은 자신이 지독해 피식 웃음이 났다. 아무리 겪어도 선명하게 끔찍한 것들이 있었다. 고문이 그랬다. 익숙해지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증오. 언젠가는 기필코 당신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는.
임유현의 숨을 끊을 기회를 백정명에게 양보하는 건 쉽지 않았다. 수없는 밤을 그 순간만 그리며 버텨 왔으니. 어떤 새벽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정윤환에게 부탁해 패턴의 일부라도 걷어 내 볼까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겹겹이 쌓여 굳은 그 악독한 설계들을 정윤환에게 그대로 보이기가 꺼려져, 그저 견디게 되었다.
그렇게 수년을 홀로 간직한 깊은 상처를 처음으로 덜어 간 이가 유은우였다. 처음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제정신이 아니었다. 항상 들러붙어 있던 묵직한 불쾌감이 어느 날 갑자기 깨끗하게 증발하였을 때란. 후련하다기보다 두려웠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나. 온통 어두운 내게 왜 갑자기 볕이 드나. 더 큰 불행의 암시일까. 잠깐의 빛으로 내 그늘을 더 짙게 하려는 걸까. 그러나 유은우의 대답과 마주하자 용기가 생겼다. 조심스럽게 유은우의 빛을 디뎌 보았다. 아주 잠깐 정도는 괜찮겠지. 여기 좀 안전한 것 같아. 어쩜 이렇게 따뜻할까. 나답지 않지만 한 번만 더 기대도 될까. 그리고 유은우를 중력으로 잡아 삶이 전복되기까지 한 찰나였다.
보고 싶어.
더운 숨이 울음 대신 왈칵 쏟아졌다. 마지막 가는 순간에 유은우의 손길만 남아 있었으면 했다. 그런데 하필 김서혁…….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뒷덜미를 문지르던 손을 거두어 눈앞에서 펼쳤다. 손아귀에 말라붙은 핏자국 부스러기가 묻어 있었다. 몸이 너무 아팠기 때문에, 서재희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피라고 생각했지만 곧 깨달았다. 김서혁이 유은우의 시계에 다치고, 그 손으로 자신의 뒷덜미를 틀어잡았었다. 그의 흔적이었다.
김서혁. 회색이 도는 눈과 단단하게 맞물린 턱. 단순하지만 힘 있게 서재희를 잡아 눌렀다. 그러나 서재희에게서 불법 패턴을 뽑아낼 때, 그는 눈가를 불편하게 일그러뜨렸다. 적어도 그때 김서혁의 분노는 서재희가 아니라 임유현을 향하고 있었다.
김서혁은 그런 사람이다. 난민을 시민이라 부르는 사람. 죽은 동기들의 기일이 돌아올 때마다 귀한 생화를 가지고 납골당을 방문하는 사람. 제 인생에 연애와 결혼은 없다 생각하여, 깊이 아끼는 마음이 연정으로 자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
서재희는 부모님의 죽음을 준비할 당시 여러 납골당을 둘러보다가, 한곳에서 김서혁을 목격했었다. 사실 처음에 서재희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언론이나 소문으로 들었던, 권력에 미쳐서 임유현을 내몰고 사방에 적을 만들며 군을 집어삼켰다는 그 김서혁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는 수행원 하나 없이 홀로 있었다. 잎이 연하게 흩어진 단출한 꽃다발을 두 개 안고 한쪽에 묵묵히 서 있었다. 그때의 그는 아주 희미하여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김서혁이 유은우를 테스트하기 위해 병실로 찾아온 날, 김서혁은 자못 철저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러나 그 딱딱함은, 조직의 상관보다는 엄격한 아버지를 연상케 했다. 서재희는 자신이 유은우 주변에 한정해 유독 민감할 수 있다고 백번 인정했다. 유은우가 김서혁과 통화하며 매번 보이는 눈물이, 혹여 애정이 비틀린 애증이 아닐까 두려운 마음에, 내가 이리도 유난 떠는 게 아닐까. 그래서 되도록 넘겨짚지 않으려 애썼으나, 묘한 느낌은 수 초 만에 확신으로 바뀌었다. 유은우가 김서혁에게 카드를 받기 위해 두 손을 내밀며 시선을 숙일 때, 김서혁의 고개도 함께 비스듬히 기울어졌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내밀고 있는 카드는 안중에도 없이, 그저 고요하게 유은우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김서혁의 눈은, 상관의 눈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탕!
서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창문 너머, 회색으로 흐린 하늘. 어느덧 안개처럼 옅어진 빗줄기 사이를 헤치고 흰 풍선들이 새 떼처럼 날아오르고 있었다. 땅에서 하늘로 거꾸로 솟구치는 눈처럼.
서재희는 지체 없이 몸을 일으켰다. 빠른 걸음으로 창가로 다가가 창틀에 손을 얹었다. 도주를 막기 위해 잠금 처리된 창을 열어젖힐 수는 없었다. 서재희는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위대는 무수히 많은 점의 집합처럼 보였다.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정해진 방향은 없었다. 이리 쏠렸다 저리 밀쳐졌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그럴 만했다. 총성이 어디서 울렸는지 가늠하기 힘들 테니까. 서재희가 김서혁에게 조언한 대로, 총을 쏜 주체는 숨어 있을 것이다. 혹은 벌써 빠져나와 김서혁에게 보고하고 있거나.
누군가 거칠게 고함을 질렀다. 시위대가 반발하고, 경찰과 약한 충돌이 일어났다.
김서혁의 수하가 실없는 농담처럼 공포탄을 쏘았을 뿐이지만, 그 여파는 흐린 대기를 빡빡하게 얼리고 있었다. 시민은 도시연합을 의심하며 불안해하고, 도시연합은 시민을 견제하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서재희는 유리창에 이마를 댄 채 눈도 깜박이지 않고 아래를 뚫어져라 보았다. 창틀에 가벼이 얹은 손가락을 일정하게 톡톡 두드렸다. 천천히 헤아렸다. 셋. 둘. 하나.
시위대가 크게 물결쳤다. 소란이 커지면서 자연스레 노선을 달리하는 무리가 두드러졌다. 그들은 피켓과 플래카드를 집어 던지고 풍선을 놓았다. 급기야 몇은 총을 뽑았다. 시위대의 다수가 그들에게서 물러서며 틈이 생기고 분리되었다. 누군가 확성기로 평화 시위를 주장하였으나, 이미 강경한 태도를 취한 시민들에게 경찰이 접근한 후였다. 총성이 울린다 싶더니 순식간에 맞붙었다. 위험하지는 않지만 소리가 크고 빛이 강한 타격이 연달아 터졌다. 시민들 사이엔 꽤 실력이 좋은 동조자도 다수 섞여 있는 듯했다. 그들은 경찰에 밀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앙수사부 건물로 거칠게 진입했다. 겁만 주려던 경찰들이 이내 전열을 가다듬고 따라붙었다. 군인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주위로 퍼지는 설계를 드문드문 소멸시켜 일반 시민들을 보호하는 듯하더니 곧 경찰을 쫒아 건물 입구로 달려왔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나, 일반 군인과 확연히 다른 착의로 미루어 보아 정예군 중 하나였다.
그거면 충분했다. 곧 무대로 나가야 한다. 레드카펫은 필요 없었다. 깨질 듯 위태위태한 살얼음판을 원했다. 내가 기폭제가 될 수 있도록.
캉!
총성이 울렸다. 이번에는 아래가 아니었다. 뒤. 정확히는 문밖. 복도.
서재희는 여전히 무감한 눈으로 창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귀로는, 연달아 이어지는 날카로운 타격 음과 뚝뚝 끊기는 마지막 숨들을 헤아렸다. 뚜벅뚜벅. 가벼운 군화 소리. 권태로운 한숨이 바로 문밖 지척이었다. 요란한 경고음. 다시 한번 총성. 어떤 금속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 경고음이 멎었다. 묵직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
서재희는 뒤돌아섰다. 철저하게 보안되어 견고하던 문이 우습도록 활짝 열려 있었다.
정예군 제복을 입은 여자. 소연주였다. 그녀는 총을 쥐지 않은 손으로 허리를 당당하게 짚고 서서, 서재희를 향해 턱짓을 했다. 이리 나오라는 뜻이었다.
서재희는 움직이지 않았다. 차분하게 말했다.
“그냥 나가기에는 제가 너무 멀쩡합니다. 겉으로는.”
소연주는 즉각 이해했다. 그녀는 바닥에 엎어져 있는 직원의 팔을 걷어차 문틈에 끼우며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이어 천장 모서리를 날카롭게 훑으며 꺼진 CCTV를 재차 확인하더니, 바로 총을 서재희를 향해 겨누었다. 이미 불그스레한 총구가 사정없이 튀어 올랐다. 경고는 없었다. 상호 합의했으므로.
서재희는 전신에 충격을 느꼈다. 감정 없이 건조한 공격이었다. 셔츠가 찢기며 피가 배어나오는 게 느껴졌다. 총성이 멎었다. 아쉬운 느낌이 들 찰나, 뺨 위로 둔탁한 타격이 지나갔다. 입 안이 터지는 걸 감수한 만큼 보기 좋게 부풀어 올랐으면 했다.
서재희는 호흡을 가누며 눈을 떴다.
소연주가 사무적으로 물었다.
“더?”
“좀 더.”
소연주의 낯 위로 질린다는 기색이 살짝 스쳤다. 그러나 그녀는 더 묻지 않고 왼손에 끼고 있던 가죽 장갑을 벗어 이쪽으로 집어 던졌다. 서재희가 그것을 주워 입에 단단히 물자마자 소연주가 총을 연사했다.
아까와는 달랐다. 총구가 네 번째로 튀어 올랐을 때, 서재희는 그만 바닥에서 쭉 밀려나 벽에 등을 부딪치고 멈추어 섰다.
소연주가 총을 홀스터에 꽂아 넣고 다가왔다. 군화를 신은 발로 서재희의 허벅지를 지그시 밟았다. 설계 잔재가 깨지는 맑은 소리가 났다. 제 서명을 그리 밟아 지우고, 소연주는 물러났다. 그녀가 문에 끼운 시체를 발로 걷어차 치우고 문을 활짝 여는 동안, 서재희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입가에 흐른 피를 셔츠 소매로 아무렇게나 닦았다. 소연주가 다가와 제복 코트를 벗어 서재희의 어깨에 걸쳤다. 그 무게에 상처가 쓸려 따가웠다. 서재희는 소연주에게 몸을 의탁하면서 물었다.
“정예군 기장 없습니까?”
서재희를 부축한 채 막 걸음을 옮기려던 소연주가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전투할 땐 걸리적거려서 뺀다.”
“달아 주십시오. 잘 보이는 곳에.”
서재희는 자신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소연주의 전신에 힘이 빳빳하게 들어가는 걸 느꼈다. 이내 소연주는 말없이 서재희를 벽에 밀쳐 놓고, 제복 재킷 주머니에서 기장을 꺼냈다. 은으로 만들어진 흰 매. 은회색의 매끄러운 리본과 섬세하게 세공된 보석들이 그 둘레를 위압하듯 두르고 있었다. 소연주가 건조한 손길로 서재희가 걸치고 있는 코트 깃을 당기더니 기장을 달았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살뜰히도 팔아먹는구나.”
“거래가 시원치 않으면 저 두고 가십시오.”
소연주는 물끄러미 서재희를 바라보았다.
“……대장을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김서혁 총사령관께서 절 선택하셨습니다.”
서재희의 담담한 대답에, 소연주는 낯만 굳힐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복도는 어두웠다. 거의 모든 조명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부서진 천장 틈으로 망가진 전기 설비가 죽은 넝쿨처럼 드리워져 이따금 빠직빠직 소리를 내며 번쩍거렸다. 복도로 거대한 갈퀴가 쓸고 간 듯 시체들은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다. 낭비된 힘. 불필요한 파괴. 타깃을 지정하고 설계를 세밀히 깔며 타격을 조율하는 일련의 과정을 성가셔 하는 소연주답다고, 서재희는 생각했다. 소연주는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보다 어디까지만 해도 되는가에 집중하는 사람이었다. 서재희가 팀원을 고른다면 가장 마지막으로 선택하며, 차라리 적으로 마주하고 싶은 그런 사람. 배려 없이 사망한 시체들 사이로, 날 선 온들이 몸부림을 치며 날아올라 서재희의 귓가를 날카롭게 스쳤다.
엘리베이터로, 때로는 계단으로, 1층으로 내려갈수록 소음은 짙어졌다. 수많은 군중들의 노래, 고함, 방송국 중계. 드론이 나는 듯 윙윙거리는 소리. 선과 악을 나눌 수 없는 열기가 밀려나고 밀려오고, 심장박동처럼 부풀었다가 또 어느 순간 사그라졌다가 다시 팽팽해졌다.
중앙수사부 정문을 앞두고 복도 모퉁이를 돌기 전에, 소연주는 멈추어 섰다. 서재희는 피로를 느꼈다. 내가 김서혁과 어떤 거래를 했는지 또 들쑤실 참이구나. 이렇게 여러 번 물어볼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소연주 본인도 그렇게 궁금하지 않을 텐데. 그저 상명하복에 충실한 그런 사람 아니었나. 그러나 소연주의 입에서는 다른 이름이 튀어나왔다. 뿐만 아니라 목소리 끝이 떨리기까지 했다.
“너 이선규한테 무슨 짓 했어?”
서재희는 잠시 말을 잊었다. 천천히 소연주의 말을 곱씹었다. 아아, 그러니까 소연주가 이선규를. 긴장이 탁 풀렸다. 군이 아니라 연애 집합소네. 하긴, 한 번씩 사해에 나갈 때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을 한함선 내에서 먹고 자고, 몸으로 부딪히는 대련에다가, 팀워크를 빙자한 일대일 대면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거기다 목숨이 경각에 이르는 긴장감 속에 동료끼리 뭉치다보면 자연스레…….
생각하다 보니 속이 홧홧했다.
그러니까 그 군에 유은우도 있었단 말이지. 김서혁이 그런 눈으로 몇 년이나 유은우를 보아 왔을지 생각하니 그저 아찔했다.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했을지도 모르지. 유은우가 얼마나 맹목적으로 김서혁을 따르는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왔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과거라서, 자신이 없었던 시간이라서, 김서혁의 어떤 면에 유은우가 의지했고, 유은우의 어떤 점을 김서혁이 아꼈을지 선명하게 가늠이 되어, 더 분이 치밀었다. 화를 낼 만한 일이 아닌데도.
돌이켜 보면, 페어를 맺을 때도 그랬다. 유은우는 울고 있었다. 김서혁 때문에.
“은우랑 윤환이가 다쳐서 절뚝거리는 걸, 이선규가 미쳤다고 놓쳤을 리 없어. 이선규는 무조건 본인 안위가 제일이야. 동정심 같은 건 없단 말이다. 네가 수 쓴 거야. 그렇지?”
서재희는 소연주에게서 정중히 떨어졌다. 팔다리가 부러진 것도 인대가 파열된 것도 아니었다. 단순한 타박상일 뿐이라, 서재희는 문제없이 버티고 섰다.
“감히 짐작컨대 김서혁 총사령관께서는 이런 이야기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으실 겁니다. 역사적인 날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실례합니다.”
서재희가 뻗는 손을, 소연주는 피하지 않았다. 서재희는 소연주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걷어 귀 뒤로 꽂아 주고는 손을 거두었다. 소연주의 날카로운 눈을 마주 보며 서재희는 매끈하게 웃었다.
“길이 남을 사진이 될 테니까요.”
비는 거의 멎어 안개처럼 부슬거렸다. 흐린 날인데도 눈이 부셨다. 사방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으므로.
“안에서 총성이 있었다! 경찰이 시민을 죽였어!”
“도시연합은 투표 결과에 승복하라! 서재희를 시민에게 인도하라!”
“시위를 탄압하지 마라!”
“우리는 평화 시위를 지향합니다! 시민들은 총을 뽑지 마시고 질서를 지켜 주세요!”
“사람이 죽었어! 입구를 막지 마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할 수 있게 해 줘!”
고함과 비명이 덩어리째 밀려와 귀가 먹먹했다.
소연주 혼자만으로는, 밀어닥치는 군중, 마이크를 들이미는 언론사, 너무 가까이 다가와 시야까지 방해하는 드론으로부터 서재희를 보호하기 쉽지 않았다. 사람인지 카메라인지에 서재희가 어깨를 수없이 부딪치고 나서, 정예군 둘이 더 붙어 호위하기 시작했다. 박민준. 강지원.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제 함부로 서재희의 팔목을 잡아채 끄는 손들은 없어졌다. 거기에 박민준이 서재희의 등을 감싸며 홀스터에서 가볍게 총을 빼어 들자, 잡아먹을 듯 돌진하던 방송국 드론도 안전거리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폭죽을 쏘아 올렸다. 하늘 위로 서재희의 정상참작을 지지하는 플래카드가 나부꼈다. 그 단순한 소음에도, 시민들은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여러 갈래로 우르르 몰리고 흩어졌다. 방금 전 총성에 예민해진 탓이었다. 어수선한 틈을 타, 소연주가 입술을 거의 떼지 않으며 날카롭게 물었다.
“부속선 어디 있어? 바로 앞에서 대기하라고 했잖아!”
박민준이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도시연합에서 막았어. 학교로 바로 복귀는 안 된대.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데. 우리가 직접 서재희 데리고 본부로 데리고 가겠다고 했어. 이것도 겨우 얻은 거야.”
소연주가 인내심 있게 물었다.
“그래서 부속선 어디 있어?”
“11시 15분 방향.”
강지원이 홀스터의 총에 손을 올리며 이어 물었다.
“바로 가?”
“아니. 그쪽에서 오라고 해. 시작하면.”
혼잡하던 분위기가 어느 정도 질서를 찾자, 소연주는 우뚝 멈추어 섰다. 그녀가 서재희를 부축한 손에 힘을 꽉 주었다가 놓았다. 소연주가 서재희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자, 강지원과 박민준도 즉시 거리를 두었다.
서재희는 약간 비틀거렸으나 똑바로 섰다. 줄곧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구름처럼 모인 군중보다, 군중 너머의 스크린이 먼저 보였다. 공익 광고나 스포츠 중계를 하던 거대한 스크린에, 서재희 자신이 있었다.
엉망이었다. 의도했지만.
흐트러진 머리칼. 창백한 이마. 그늘진 눈가. 뺨은 보라색으로 멍들어 있었고, 입술은 하얗게 부풀어 터졌으며, 입가엔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서늘했다.
소란하던 사위가 잠깐 동안 희게 비었다. 날 선 적막.
그리고 터졌다.
“강압 수사다!”
“중앙수사부는 해명하라!”
“차인호가 개입했는지 밝혀내라!”
함성이 고막으로 밀어닥치자 머리가 심하게 울렸다. 서재희는 호흡을 고르게 유지하려고 애썼다. 기자들이 마이크를 뻗으며 각다귀처럼 다가붙자, 박민준이 총을 하늘 위로 치켜들고 한 차례 사격했다. 탕! 그 어떤 설계도 없었으나 온이 잠깐이나마 크게 흔들렸다. 김서혁의 권위를 빌려 온 경고는 힘이 컸다. 다시 한번 서재희의 주변이 비었다. 여백은 분에 찬 적막으로 팽팽했다.
소연주가 능숙하게 도시연합 중앙방송의 마이크를 건네받아 서재희에게 내밀었다. 서재희는 그것을 받아 쥐었다. 입가에 대기 전에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가까이 있는 이들은 서재희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고, 조금 멀리 떨어진 이들부터는 스크린의 서재희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마이크가 무거웠다.
도시연합 중앙방송 기자가 모든 언론사를 대표해서 정중하게 질문했다.
“도시연합에서는 서재희 학생의 복귀에 대해서 여러 조건을 걸었습니다. 첫째, 법의 제개정 불가. 둘째, 도시연합과의 긴밀한 협조. 셋째, 도시연합 중앙학교 내 상황 상시 보고. 넷째, 중립지대 해제 노력. 다섯째, 사흘 내 중립지대가 해제되지 않을 경우, 중립지대의 전원이 군과 협조하여 질서 있게 교내를 빠져나올 것. 이때 개인 정보의 혼탁은 차후 처리로 미뤄집니다. 차인호 도시연합장은 합의된 내용이라고 밝혔습니다. 서재희 본인의 서명도 공개되었습니다. 동의한 내용입니까? 수사 과정에서 부당한 압박이 있었습니까?”
서재희는 스크린의 자신을 보았다. 아무리 다쳐 망가진 모습이라도, 산산이 부서져 흩어진 내면을 비춰 낼 수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꺾이고 또 꺾이면서 급기야 어두운 내면으로 흉하게 굽어 들어간 자신을 만인에게 보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재희는 마이크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기회가 주어져도, 폭로하되 폭로할 수 없었다. 고향이 무너지고 부모님이 의식불명에 빠진 후, 외롭고 춥던 날들. 삶을 비튼 원흉을 후원자라 부르며 견디다, 기어코 그를 죽여 버렸다고. 이 모든 게 내 빛나는 재능 때문이다. 당신들이 그토록 갖고 싶어 하는. 내가 이토록 증오하는.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모른 척 사회의 꼭대기에 올라앉아 같은 악행을 되풀이하거나. 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 죄와 당신들의 죄를 끌어안고 죽거나. 차마 치가 떨려 전자는 생각도 할 수 없었기에, 그래서 내가 지금 여기 서 있다고.
서재희는 마이크를 들었다.
“우리 동조자는…….”
목소리는 긁혀 나왔다. 오래된 우물에서 길어 내듯 힘겨워, 서재희는 침을 삼켜 목을 축였다.
“……도시연합의 평화와 시민의 행복에 기여한다.”
사위가 조용했다. 비가 그친 뒤 습기를 머금은 바람뿐이었다.
“우리 동조자는…….”
서재희는 스크린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단 한 번도 신뢰한 적 없는 동조자 헌장을 제 전부인 것처럼 읊으면서.
“……비동조자와 화합하고 약자를 위해 헌신한다.”
‘그렇다면 세상을 바꾸는 것은 낙원의 이론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마음 아닙니까?’
하마터면 피식 웃음이 날 뻔했다. 웃기는 소리. 세상은 안 바뀐다. 돌고 돌아서 똑같을 뿐. 체제가 무너져도 시스템을 개편해도. 더 취하는 자와 덜 취하는 자를 넘어서서, 남을 밟고 올라서는 자와 밟히는 데 익숙한 자들이 있을 뿐이다. 주체가 인간인데 배경을 바꾼다고 당최 무슨 변화가 있단 말인가? 낙원의 이론이 세상에 밝혀지는 순간, 또 다른 낙원의 이론이 만들어질 텐데. 새로운 시스템이 전보다 공정하다고는 그 누구도 보장할 수 없다.
잠 못 드는 새벽엔 임유현의 목을 조르는 상상을 했고, 선한 얼굴로 도시연합 본부에 앉아 있을 땐 도시를 무너뜨릴 계획을 세웠다. 그 외는 서재희가 알 바 아니었다.
그러나 유은우.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 힘은 없고 재능은 넘치는 자의 말로는 뻔했다. 그렇게 예쁘고 씩씩한데. 까딱하다 물어 뜯겨 망가질 모습이 훤하여.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해서 10여 년간 그려 온 마지막을 달리할 생각은 없었다. 계획은 그대로 간다. 그러나 하나쯤은 남기고 가도 좋을 것 같았다. 내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어떤 세상이든 가장 빛나는 자리에 좋아하는 여자 하나쯤은 앉힐 수 있다고.
“우리 동조자는…….”
그 뒤부터 서재희는 혼자가 아니었다. 시민들이 함께 선언했다. 얕은 웅성임은 금세 불어났다.
“……타고난 재능을 악의 수단으로 쓰지 않는다.”
누군가 풍선을 날려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남은 풍선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풍성하게 흩어지는 동그라미 사이로 햇살이 곧게 떨어졌다.
“우리 동조자는…….”
이제 서재희의 목소리는 시민들에게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모두가 동시에 말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불의에 굴하지 않는다.”
캉!
총성이 햇살을 찢었다. 어디서 방아쇠를 당겼는지 그 위치를 채 가늠하기도 전에, 서재희는 가슴에 둔탁한 충격을 느꼈다.
◆
서재희는 중심을 잃고 밀려 쓰러졌다. 호흡만 가빠지는 걸 보니 강한 설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극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 뒤로는 정신이 없었다. 서재희는 카메라를 의식하며 몸에 힘을 빼고 죽은 것처럼 모든 것을 정예군에게 맡겼다. 너희가 선공했으니 이제부턴 정당방위라고 선언하듯, 소연주가 총성이 울린 방향을 향해 총을 연사했다. 날렵한 설계들은 아무도 해치지 않았으나 충분히 위협적으로 허공을 가로질렀다. 박민준이 서재희를 안아 들었다.
시민들의 성난 고함이 불처럼 들끓었다. 그 사이를 헤치고 굉음이 땅을 울렸다. 부속선이 지척에 위협적으로 착륙했다.
도시연합 경찰이 압도적인 수로 통제를 가했으나, 강지원이 탁월한 설계로 완충 공간을 확보했다. 박민준이 서재희를 안고 부속선에 먼저 탑승했고, 그 뒤를 소연주와 강지원이 차례로 탔다. 부속선이 날아오르는데도 끈질기게 따라붙는 방송국 드론을, 소연주가 선체 옆면에 탑재된 총을 쏘아 부수었다.
“괜찮나? 살살 하라고는 했지만, 너무 약하면 티 나니까.”
중앙수사부로부터 맹렬하게 멀어지면서, 박민준이 서재희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강한 공격을 받은 건 아니었지만 며칠간 감금에 지쳐 있던 터라 겨우 몸을 가누는데, 부속선이 크게 기울었다. 서재희는 안전 바를 붙잡으며 간신히 바닥을 뒹구는 것만 면했다. 반사적으로 조종석을 보았다. 타를 잡은 자는 뒷모습이었지만, 정예군 프로필을 줄줄 꿰는 서재희는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게 대체 뭔 일이야? 서재희한테 쏘라고 해서 쏘긴 쐈는데 무슨 상황인지 알고나 가자고!”
이선규가 타를 힘껏 돌리며 소리 질렀다. 부속선이 사정없이 반대편으로 기울었다. 서재희는 주르륵 미끄러지다가 발로 바닥을 지탱하며 멈춰 섰다.
이선규가 재차 불평했다.
“아무도 대답 안 해 줄 거야? 나 좌천됐다가 돌아왔다고 이렇게 찬밥처럼 대할 거야?”
“이선규 네가 왜 여기 있어?”
서재희의 맞은편에서 안전 바를 노련하게 잡고 선 소연주가 이선규를 뚫어져라 보며 다시 물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대장이 널 보내 버린 줄 알았는데…….”
이선규가 뒤돌아보며 씩 웃었다. 옆에 서 있던 강지원이 ‘미친놈아. 앞에 집중해.’라며 이선규의 뒤통수를 냅다 갈겼다. 이선규가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전방을 보았다. 대답은 가벼웠다.
“내 실력이 아쉬우셨던 모양이지. 꺼지라고 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날 다시 찾으실 줄이야. 그건 그렇고 지금 우리 학교로 가는 거 맞지?”
소연주가 멍하니 이선규를 보는 동안, 부속선은 고도를 높이다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안정을 되찾았다. 선체의 주기적인 옅은 떨림으로, 서재희는 부속선이 위치 발신 장치를 끄고 모든 방어막을 포기하는 대신 선체를 반투명화하여 도시연합의 육안과 레이더망을 동시에 피하고 있음을 알았다.
서재희는 양 벽면에 설치된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피로했으나 머리는 놀랍도록 차가웠다. 소연주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서재희의 발치로 던졌다. 중앙수사부에 압수당했던 홀스터였다. 총이며 호흡기, 인터컴, 약물 케이스가 마지막으로 봤던 그대로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서재희는 그것을 주워 허벅지에 채웠다. 굽혔던 등을 펴자 온몸이 아팠다. 신음은 속으로 삼키고 호흡기에 회복제를 끼워 입에 물었다.
강지원이 조수석에 앉아 계기판에 지문을 대었다. 콘솔이 온전히 활성화되었다. 강지원이 말했다.
“소연주, 대장이 너한테 따로 지시한 거 있어? 솔직히 나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대장이 나한테 개별 지시한 건, 중앙수사부에서 소연주가 서재희 데리고 나오면 무조건 부속선에 태우라는 것뿐이었어.”
“강지원 넌 그나마 낫네.”
박민준이 어깨를 으쓱하며 이어 말했다.
“난 대장이 강지원 너 하는 대로 따라하라고 하던데.”
이선규가 픽 웃었다. 박민준은 개의치 않고 소연주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소연주 넌 뭐라도 들었을 거 같은데. 우리도 알고 움직여야지. 우린 지금 도시연합인 척 가장하고 서재희를 죽인 척 쇼를 벌였다가 우리 손으로 서재희를 건져서 학교에 데려다주는 꼴이라고. 우리끼리 북 치고 장구 치는 건 둘째 치고, 이거 보통 상황이 아니잖아. 다들 마찬가지겠지만, 나 사상범으로 사형당하려고 군에 들어온 거 아니거든.”
소연주는 대답 없이 벽면의 설치대에 꽂혀 있는 약물을 빼서 홀스터의 빈 슬롯에 끼웠다. 강지원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래서 대장이 지시를 쪼갰나 본데. 우리가 무조건 따르게 하려고. 그리고 이렇게 발을 들인 이상, 못 빠져나가. 꼼짝없이 대장이 이기도록 밀어붙여야 해. 박민준 네 안위가 걱정된다면 지금 여기서 나가. 가서 몰랐다고 해. 김서혁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누가 믿을까?”
박민준은 한 손으로 눈가를 덮은 채 말했다.
“대장이 총사령관 자리에 오르고 나서 윤환이가 그랬어. 대장은 도시연합과 다른 노선을 바라보니까, 언젠가는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올 거라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건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강지원이 조수석 의자를 빙글 돌리더니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대장이 구구절절 설명해 줬어도 박민준 넌 결국 이 자리에 있었을걸. 차인호는 난파선이야. 대장은 구명보트를 내린 거고. 시민들은 지금 도시연합이 그 고상한 서재희를 데리고 강압 수사를 한 것도 모자라서 살해까지 사주한 걸로 알고 있을 텐데, 그쪽에 가서 붙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안 말려.”
“강지원 말이 맞아.”
여태 부속선 한쪽에 도사리고 앉아 침묵하던 장현철이 불쑥 말했다. 그가 덧붙였다.
“중앙수사부 앞에 모여서 평화 시위를 하는 시민들도 있었지만, 상당한 숫자가 수사부 내부로 진격했다가 즉결 처분을 받았다는데. 인터넷에 목격담이 여과 없이 올라오고 있어. 지금쯤 방송국 카메라도 들어가고 난리 났을 거야. 시위를 폭력적으로 탄압하는 차인호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시민들은 이미 차인호에게서 마음이 떴어. 난 풍선 들고 노래나 부르는 그 시위대가 서재희 내놓으라고 그렇게까지 수사부를 뒤집어 놓으리라고는…….”
“나도 좀 거들었어.”
소연주가 장현철의 말을 뚝 자르며 대답했다. 잠깐 침묵이 돌았다. 이선규가 고개를 돌려 소연주를 보려고 하자, 강지원이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운전 똑바로 하라고 했다.
장현철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소연주 너 미쳤어?”
“유사시 시민을 보호하라는 대장의 지시였어.”
“대장의 지시라면 목이라도 매달 셈이야? 거기에 개입하면 어떡해?”
“아무리 동조자라고 해도 시민은 시민이야. 전투 경험이 전무한데 어떻게 경찰을 이기겠어. 일방적으로 탄압하는 모양이 지나치게 깨끗하고 질서 정연했다고. 어울리게끔 천장이랑 복도랑 조금 부숴 주었을 뿐이야. 그 와중에 차인호의 끄나풀이 몇이나 죽었는지는 자세히 안 봐서 모르겠지만. 그래서…….”
소연주가 사무적으로 이어 말했다.
“……결국 대장이 왜 이선규를 도로 불러들였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고?”
“말했잖아. 대장도 내가 아쉬웠을 거라고.”
이선규의 의기양양한 대답을, 소연주가 딱딱하게 받아쳤다.
“그건 네 생각이고.”
정예군끼리 지나치게 막역하여 매사에 의견이 불일치한다는 소문에 미루어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로 콩가루일 줄은 몰랐다고 생각하며, 서재희는 호흡기에서 빈 케이스를 딸깍 분리했다. 예민하여 평소 약물은 거의 입에 대지 않는데, 김서혁 앞에서 한 번, 지금 또 한 번, 짧은 시간에 도합 두 번이나 흡입한 터라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러나 효과는 확실하여, 소연주에게 대차게 얻어맞은 자잘한 생채기는 이미 말끔히 사라진 지 오래였고, 터진 입 안도 빠르게 아무는 게 느껴졌다. 서재희는 빈 약물 케이스를 벽에 붙어 있는 수거함에 넣고는, 우연처럼 고개를 들어 소연주와 눈을 맞추었다. 부속선에 타면서부터 그녀의 시선을 줄곧 느꼈으나 조금 더 애태우기 위해 부러 외면하고 있던 참이었다.
소연주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서재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목소리가 깨끗하게 울렸으면 하고 바랐으나 말라붙은 목은 숨만 쉬어도 따가웠다.
“김서혁 총사령관께선 지금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닐 겁니다. 총사령관님 성격상, 자신을 배반한 이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절대 돌아보지 않습니다. 단칼에 끊고 맺지요. 이선규 중장님의 실력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도시연합에 맞설 전력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피눈물을 머금고, 마지못해 불러들였다는 쪽이 확실합니다.”
타를 쥔 이선규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저 새끼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내가 네 가슴에 총 겨눌 때 진짜로 얼마나 죽여 버리고 싶었는지 알아? 대장 지시만 아니었으면…….”
“그럴 사람 아니라는 거 압니다.”
서재희는 여태 걸치고 있던 소연주의 제복 코트를 어깨에서 끌어내렸다. 소연주가 성큼 다가와 그것을 가져갔다. 그녀가 서재희를 뚫어져라 보며 중얼거렸다.
“전력이 부족하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어. 도시연합 소속 경호원, 경찰, 직속 부대 다 합쳐도 숫자고 실력이고 우리 군에 비할 바가 못 돼.”
“제가 총 맞는 걸 본 시민들은 지금 제정신이 아닐 겁니다. 풍선은 날아간 지 오랩니다. 이젠 총과 칼을 들고 일어날 겁니다. 빠르면 오늘 자정 전에 가장 높은 비상명령이 선포되겠네요. 가시관령이 발발하면 김서혁 총사령관과 그 휘하 직속 정예군은 가시관령이 해제될 때까지 민간인 신분이 됩니다. 도시연합은 수뇌부가 잘려 나간 군을 입맛대로 부려 시민을 제압하겠지요. 김서혁과 그 밑의 당신들은, 소속을 잃고 처량한 신세가 될 겁니다. 여태 도시연합을 이루던 한 축이었던 김서혁을 시민들이 받아줄 리 없겠지요. 차인호가 김서혁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소연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가시관령 발효 시, 군 수뇌부 직위 해제를 말하는 건가? 쿠데타 예방이니 어쩌니 웃기지도 않는 그 법? 대장이 없애 버렸을 텐데?”
“김서혁이 총사령관 자리에 오르자마자 의원을 매수하여 법을 개정하면서 해당 문구는 삭제되었죠. 하지만 얼마 전에 다시 부활했습니다. 없던 걸 만드는 건 어렵지만, 있던 걸 살리는 건 쉽지요. 임유현이 발의하고 차인호가 통과시켰습니다. 아는 사람 거의 없을 겁니다. 차인호가 필사적으로 언론을 통제했거든요. 그러니까 당신들은…….”
서재희가 담백하게 말했다.
“……가시관령이 선포되면 더 이상 군인이 아니며, 가시관령이 해제되면 더 이상 살아 있지도 않을 겁니다.”
소연주가 안전 바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대장이 그 꼴을 보고도 가만히 있었다고?”
서재희는 상황을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시간이 가고 있었다.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받았겠지요. 예컨대 상당한 액수의 지원금이라든가. 혹은 사해 개척 사업을 군으로 끌어온다든가. 요사이 군으로 온갖 명목의 혜택이 집중되었지요. 모두 김서혁 총사령관이 목을 내어 주고 가져온 돈입니다. 물론 그때는 이렇게 크게 얻어맞을 줄 몰랐겠지요. 실제로 도시가 연합한 지 1000년이 지나도록 가시관령은 단 한 번도 발효된 적 없습니다. 김서혁으로서는 내어 줘도 될 낡은 패라고 생각했겠죠. 오판할 만합니다.”
소연주가 서재희를 노려보며 낮게 물었다.
“이런 엿 같은 딜을 누가 제안한 거야?”
“표면적으로는 임유현이 발의했지만…….”
서재희는 그 어떤 표정도 만들어 내지 않으려 조심했다.
“……그분께 처음 제안 드린 건 접니다.”
충분히 예상했으나, 침묵은 얼음보다 희었다. 살얼음을 밟듯 서재희는 느리게 말했다.
“그래서 김서혁 총사령관이 이선규 중장을 급히 불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징계를 받았더라도 어디까지나 직속 부하니 홀로 떨어져 있으면 위험해지니까요. 인력 부족이라는 이유보다 걱정하여 그랬다는 가정이 더 듣기 편하신가요?”
이선규가 거칠게 타를 틀었다. 부속선이 흔들렸다. 노련하게 중심을 잡고 있던 소연주가 안전 바를 놓치며 크게 휘청거렸다. 다급히 몸을 바로 하였으나 안색이 납빛이었다.
강지원이 스틱을 완전히 놓더니 의자를 빙글 돌려 앉았다. 그녀는 턱을 만지며 서재희를 똑바로 보았다. 그 표정이 낙담보다 호기심에 가까워, 서재희 또한 강지원을 유심히 마주 보았다.
강지원이 말했다.
“궁금하네. 그럼 처음부터 염두에 두었던 건가?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정보가 많으면 예측이 쉽습니다. 바라고 한 일입니다. 다만, 그때는 목적이 달랐지요.”
장현철이 튕기듯 일어섰다. 그가 총을 뽑았다. 새까만 총구가 서재희의 미간을 겨누었다. 서재희는 눈도 깜박하지 않고 장현철을 마주 보았다. 서재희는, 장현철이 만약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면, 어떤 타격이 어떤 설계를 입고 튀어나올지 궁금했다. 김서혁의 사람은 절대로 자신을 해칠 수 없을 거라는 이 확신이 거짓말처럼 비틀리면 어떨까. 그래서 내 생이 여기서 꺾여 이 지긋지긋한 판에서 차갑게 식은 몸뚱이로 미끄러진다면. 사해에서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겠다는 오만한 계획이 허망해져 재능보다 운명이 우위라고 증명되면 어떨까. 그저 궁금했다. 두렵지 않았기 때문에, 장현철이 방아쇠를 당기는 동작은 아주 느리고 분명하게 보였다.
손을 든 것은 소연주였다. 그녀는 장현철도 서재희도 보지 않고 공중에 손바닥만 내보였다. 그것만으로도, 장현철은 방아쇠를 당기던 손을 멈추었다. 인내는 아니었다. 함께 오래 일하며 굳어진 반사 신경이었다.
소연주가 말했다.
“서재희를 안전히 학교로 복귀시킨다. 그의 생존에 대해 침묵한다. 그게 우리 모두가 대장에게 받은 지시야.”
장현철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뭘 얻는데? 대장이 도시연합과 척을 지고 우리가 민간인 신분이 되면?”
“반대쪽에 붙어야지.”
이선규가 대답했다. 장현철은 숨을 씨근덕거릴 뿐 대꾸하지 않았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도,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서재희를 부속선에 태웠을 때부터, 그들은 이리되리라 짐작했으리라. 불안한 관성에 밀려 여기까지 온 것은 그들의 선택이었다.
서재희는 부속선 앞유리에 아스라이 비치는 이선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선규 역시 유리에 비치는 서재희를 보고 있었다. 마주 보지는 않으나 같은 방향으로 서로를 응시하면서, 이선규가 입을 열었다. 소연주 앞에서 부리던 장난기는 이제 없었다.
“대장이 도시연합과 척을 지면? 우린 시민의 편에 서면 돼. 민간인 신분이 되면? 민간인 신분으로 싸우면 돼. 소속 없어지고 직함 날아간다고 우리 실력 어디 가는 거 아니잖아?”
장현철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서재희는 그에게 멱살을 잡혔다. 단추가 뚜둑 뜯겨 나가는 소리가 났다. 서재희는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장현철이 잇새로 말했다.
“우린 수적으로 열세야. 아무리 개개인이 강하더라도. 도시연합은 강력한 물자를 가진 데다가 도시 전역의 시스템을 통제해. 거기다 이젠 우리 동료들까지 거느릴 테지. 만약 우리가 여기서 서재희를 살해한다면? 구조 당시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고 말하고, 대장의 지시에 불복종하고 도시연합에 몸을 의탁한다면?”
장현철은 마음만 먹으면 서재희 따위 눈감고도 죽여 버릴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사실이었기에, 서재희는 불쾌하다기보다 피로했다. 타인이 제 목숨을 저울질하는 것을 늘 그렇듯 강 건너 불구경처럼 바라보면서, 서재희는 김서혁을 떠올렸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제 부하들에게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다니. 김서혁은 의도적으로 설득을 서재희에게 미뤄 놓았다.
“장현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이선규가 선선히 이어 말했다.
“대신 서재희 죽이기 전에 날 먼저 밟고 지나가야 할걸. 왜냐하면 난 기우는 탑에 붙고 싶진 않으니까. 그리고…….”
이선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가 눈을 깜박거리더니 이어 말했다.
“……내가 사실 옛날부터 도시연합이랑 좀 안 맞았거든. 그때 못 했던 걸 이번 기회에 좀 해 볼까 하고. 그 계기가 서재희인 건 유감이지만.”
“그만 말해. 운전에 집중.”
강지원이 경고했다. 그녀가 장현철을 바라보며 서재희에게 질문했다.
“갈 사람 붙잡을 만큼 우리가 열세는 아니지 않나?”
서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교가 지척이었다.
“도시연합 중앙학교 학생만 하더라도 천 명이 넘습니다.”
장현철이 중얼거렸다.
“마치 전교생이 제 수족이라도 되는 듯 말하네.”
“저는 5년간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가 아니라 다른 걸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쪽엔 인재가 셋이나 있지요. 정윤환, 유은우, 그리고 방금 당신이 총을 겨눈 저 말입니다. 정윤환과 유은우는 당신들도 이미 합을 맞춘 전적이 있으니 그 둘이 함께 뛰면 얼마나 압도적일지 능히 짐작하실 테고, 저는 처음이시죠. 그러나 우린 아주 탁월한 팀이 될 겁니다. 다행히 함께하는 처음이 순조롭네요.”
장현철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함께?”
“어쨌든 당신은 지금 여기 계시지 않습니까. 저와 함께. 물론 당신이 절 죽이신다면, 제 예측은 틀리게 되고 당신은 지게 될 겁니다.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당신이 총을 뽑기 전에 착오 하나를 바로잡자면, 당신은 지금 저와 도시연합 둘 중 하나를 고를 입장이 아닙니다. 지금 당신은 이미 선택의 여지없이 제 편입니다. 당신은 나와 도시연합을 견줄 것이 아니라, 지금 탄 배에서 뛰어내림으로써 저를 등질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제가 당신 모르게 당신 상사를 잡았으니까요.”
오랜 시간 쌓아 온 각자의 삶이 묵직한 몸을 이끌고 방향을 틀고 있었다. 날숨이 엉켜 눅진했다. 서재희는 거울 앞에서 수만 번 연습한 얼굴로 장현철을 직시했다.
“제2도시에 거주하는 당신 가족의 안전은 보장합니다. 저는 이 모든 싸움을 사해 밖으로 끌어낼 겁니다. 하지만 차인호에게 그런 상식을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그는 딸을 기준으로 행동합니다. 그리고 그 차예원은 학교에 남았으며, 그녀는 아버지를 등지고 제 편에 섰습니다. 어디가 솟고 어디가 꺼질지 기가 막히게 예측하는 친구니까요.”
부속선에 섬뜩한 무언가가 스쳤다. 서재희는 즉각 안전 바를 고쳐 쥐었다. 이선규가 욕을 했다. 강지원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운전 똑바로 하라고 했잖아!”
“운전 탓이 아냐! 설계에 걸렸어! 밑에서 올라왔다고! 밑에서! 땅에서!”
이선규가 악을 썼다. 강지원이 더 크게 소리 질렀다.
“장난해? 이 정도 고도에서 누가 설계를 유지…….”
강지원이 말을 멈추었다. 그녀가 낯을 굳혔다.
끼이이이익…….
불길한 소리를 내며 부속선의 속도가 빠듯하게 줄어들었다. 오른쪽으로 완만하게 기울었다. 무언가에 걸린 게 틀림없었다. 무게중심이 기우는 게 느껴졌다. 수 초 만에 부속선은 완전히 오른쪽으로 누워, 서재희는 벽에 기대 있으나 바닥에 누운 형세가 되었다. 반대편에 있던 소연주와 장현철이 차례로 안전 바를 놓고 미끄러졌다. 둘은 서재희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차례로 안착했다.
“이런…….”
박민준이 숨을 들이켰다. 서재희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 너머, 도시연합 중앙학교가 있었다. 사실 학교 건물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정황상 학교 말고는 떠올릴 수 없었다. 거대한 반투명 돔이 씌워져 있었고, 그 위로 붉은 스파크가 지글거리고 있었다. 피로 쏘아 올린 불꽃놀이 같았다. 돔 가장자리는 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대기하고 있었다지만, 양상이 달랐다. 전 군인이 총을 잡고 경계를 물리적으로 깨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위로 군의 부속선이 수없이 떠 있었다. 돔 위를 번쩍이며 휘도는 붉은 설계들은 이따금씩 거칠게 하늘 위로 솟구쳐 부속선을 잡아채 땅으로 추락시켰다. 서재희가 잠깐 상황을 살피는 와중에도 부속선 두 척이 땅으로 메다 꽂혔다.
“큰일 났다.”
이선규가 정색을 했다.
“윤환이가 우리 부속선을 타깃으로 잡았어. 우리가 도시연합 쪽인 줄 알고…….”
“뭔 개소리야! 도시연합 쪽인 줄 알다니? 우린 도시연합에 충성을 맹세했어!”
고함을 치는 장현철을, 강지원이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야, 장현철! 상황 파악이 그렇게 안 돼? 충성심이 아주 눈물겹다, 눈물겨워. 그럼 네가 밖에다 대고 소리 질러! 우린 도시연합 쪽이지만 죽이지는 말아 달라고! 대장 지시로 서재희는 구했지만 서재희 편은 아니고, 어디 붙어야 할지 몰라서 간만 보고 있다고! 윤환이가 잘도 들어 주겠다!”
서재희는 주의 깊게 창밖을 살폈다. 그는 학교의 상황보다, 곁에 떠 있는 다른 부속선들에 주목했다. 육안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서재희는 벽면에 길게 설치된 안전 바를 차근차근 잡아당기며 조금씩 몸을 앞으로 움직였다. 소연주가 요령 있게 몸을 피해 주었다. 서재희는 강지원의 의자를 움켜쥐며 콘솔 가까이 다가갔다. 뭘 보려고 하냐는 강지원의 물음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서재희의 눈이 레이더를 찾았다. 검은 스크린에 붉은 동심원이 균등했고, 드문드문 흰 점들이 주위의 부속선들을 나타내고 있었다. 서재희는 그 화면을 그대로 뇌리에 사진 찍었다. 다음은 방향. 포인터를 잡아 능숙하게 레이더 스크린을 확대했다.
“뭘 찾는 거야?”
강지원이 물었다. 서재희는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다 같이 추락할 방법이 있을 겁니다.”
박민준이 총을 잡았다. 그러나 뽑지는 않은 채, 그가 쉰 목소리로 소연주를 어르듯 불렀다.
“소연주, 너 대장 지시 받았지? 대장이 뭐라고 했어?”
부속선이 덜덜 진동했다. 이선규는 팔을 부들부들 떨면서 거의 타에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었다. 강지원이 온몸으로 콘솔의 레버를 힘껏 당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속선은 천천히 아래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귀가 윙윙거렸다.
강지원이 이를 갈아붙였다.
“소연주! 아무도 네 말에 전적으로 안 따라. 판단은 각자 할 테니 쓸데없는 고민하지 말고 빨리 말해!”
부속선이 급속도로 추락하다가 덜컹 멈추었다. 내장이 목 끝까지 치미는 느낌이 났다. 서재희는 포인터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몸의 중심을 잡는 척하면서 소연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고민하고 있었다. 김서혁의 지시를 그대로 전달할지, 일부만 말할지, 거짓을 말할지, 혹은 잊어버릴지. 그리고 충성을 맹세한 도시연합의 편에 설지, 수년을 받든 김서혁의 편에 설지. 서재희는 인내를 갖고 기다렸다. 그는 아까 이선규가 뭐라고 말했는지 정확히 기억했다. 그리고 소연주 또한 분명히 그 말을 염두에 두리라는.
‘그때 못 했던 걸 이번 기회에 좀 해 볼까 하고.’
소연주가 눈을 떴다. 그녀가 지극히 사무적으로 말했다.
“서재희를 안전하게 학교로 복귀시킨다. 우리는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신분에 관계없이 명망 높은 동조자로서 학생들을 보호하고, 도시연합이 아닌 시민의 편에 선다. 명에 불복하는 자는 내가 아닌 역사가 판단할 것이므로, 어떤 결정도 강제하지 않겠다.”
박민준이 신을 부르짖더니 중얼거렸다.
“대장, 진짜 이러기야?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고 선택권을 주는 척하면 우린 어떡하라고…….”
소연주가 총을 뽑았다. 그녀가 말했다.
“전부 총 뽑아.”
장현철이 씹어뱉듯 말했다.
“불복은 지금부터 유효한가?”
소연주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아니. 대장은 허락했는지 몰라도, 나는 달라. 한 놈도 남김없이 총 뽑아. 일단 살고 본다.”
장현철이 굳은 얼굴로 총을 뽑았다. 동시에 소연주가 빠르게 말했다.
“서재희는 부상을 입었어. 그러니 팀원이 아닌 특수 운반물로 본다. 나, 박민준, 장현철은 완충 설계로 부속선 아래 중심 잡고 대기한다. 박민준 중심 잡고, 장현철 좌표 찍어. 전개는 내가 해. 강지원, 장현철이 좌표 따면 방향은 네가 틀어. 이선규, 내가 신호하면 부속선 자동운항 장치로 돌려 버리고 타에서 손 떼. 잘하면 그때 윤환이 설계가 우리 부속선에서 떨어질 거고, 그래도 여전히 붙어 있다면 내가…….”
“안 됩니다.”
서재희가 단호하게 말했다. 소연주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부속선에서 끼잉, 하고 소음이 찢어졌다. 급강하가 코앞이었다. 서재희는 홀스터에서 신체 강화제와 호흡기를 뽑았다. 손 안에서 굴려 둘을 끼웠다.
“우린 지금 당장 추락만 면하면 되는 게 아닙니다. 정윤환은 수십 개에 달하는 부속선을 전부 허공에 멈춰 놓은 상태입니다. 땅으로 내려가더라도 정윤환의 사정거리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더 위험해질 겁니다. 그러니 정윤환에게 알려야 해요. 우리가 네 편이라는 것을. 그래야 부속선에서 나가도 살 수 있습니다.”
박민준이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정부에서 학생들 통신망을 전부 차단해 버렸잖아. 윤환이랑 연락하고 싶어도 못 해.”
“말로 전할 수 없다면 행동으로 보여야지요. 정윤환의 눈에 우리 부속선을 아군으로 인식시키면 됩니다. 도시연합군 부속선인데, 이상하게 날 돕는 행동을 한다, 그렇게 느껴지면 그는 우리에게서 공격을 거둘 겁니다. 부속선 안에 탄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질 테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추락하더라도 폭발하지는 않겠죠.”
서재희는 자신이 확신에 차 있기를 바랐다. 여태 이렇게까지 상대의 감에 이쪽의 안위를 위임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또한 정윤환의 설계를 역이용하는 것이야말로, 최후의 최후로 미루고 싶었으니까. 확실히 정윤환은 서재희에게 버거웠다. 그러나 동시에 믿음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는 눈치챌 것이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우리는 이 주변의 부속선 서른다섯 척을 물고 정윤환의 설계 방향 그대로 가속하여 전속력으로 함께 추락합니다. 남이 보기에 동반 자살하는 것처럼 보이겠죠.”
소연주가 미간을 좁혔다.
“서른다섯?”
“현재 가능한 척수입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좌표가 바뀌고 있으니까요. 제가 두 번 세 번 거듭 계산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건 당신들도 원치 않겠지요. 지금 바로 자동항법으로 전환하고 전원 갑판으로 나간 뒤, 제가 먼저 방향을 잡겠습니다. 인터컴도 이프도 필요 없습니다. 육안으로 따라오세요. 전 기준선만 살짝살짝 그을 겁니다. 그 방향 그대로 있는 힘껏 연계 걸어 주십시오. 순서는 돌아가면서. 지금 정하죠. 오른쪽에서부터 이렇게…….”
서재희는 손가락을 들어 바로 오른쪽에 있는 이선규부터 장현철을 이어 가장 왼쪽의 강지원까지 한 바퀴 깨끗하게 그어 보였다.
“……돌아가겠습니다. 기초학교 때 해 보셨지요?”
“꼬리물기 게임.”
소연주가 중얼거렸다. 서재희는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부드러운 낯을 유지하며 고개를 돌려 장현철을 응시했다.
“정윤환을 도움으로써 도시연합을 등지고 싶지 않은 사람은 빠지십시오. 사실 세 명 정도만 있으면 충분하기 때문에, 그 이상이 간절한 건 아닙니다.”
부속선이 크게 덜컹거렸다. 장현철이 악문 잇새로 대답했다.
“나도 돕겠어.”
서재희는 호흡기를 물고 신체 강화제를 깊이 들이마셨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차가운 기운은, 이미 두 번의 회복제에 지친 근육 사이로 뻐근하게 스몄다. 서재희는 선교 입구의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발로 문을 걷어차 활짝 열었다. 갑판엔 강풍이 몰아닥치고 있었다.
“신속한 소통을 위해 존칭은 생략합니다.”
서재희는 총을 뽑았다.
“이선규, 강지원. 자동항법 전환. 전원 갑판에 도열, 대기.”
갑판은 섬뜩하게 추웠다. 바람은 칼날 같았고, 투명한 흐름엔 붉은 기가 언뜻언뜻 비쳤다. 정윤환의 설계였다. 서재희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정윤환이 입은 부상에 대해서. 침식에도 불구하고 정윤환이 학교를 대표하여 전면에 나선 것에 대해서. 이렇게 정윤환이 숙원을 되풀이하는 데에 유은우가 얼마나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가에 대해서. 그러니 내가 정윤환에게 유은우를 부탁한다면 그의 마음이 어떨지에 대해서. 전부 미루었다.
바람이 전신을 내리쳤다. 숨을 쉬기 어려웠다. 약물에 취한 사고는 느렸다. 서재희는 부속선들의 위치를 간신히 떠올렸다. 총을 겨누어 전방을 쏘았다. 부러 힘을 아꼈기에 공중에는 희미한 자국만 남았다. 바로 이선규가 그 흔적 위로 겹쳐 사격했다. 서재희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연계 설계가 시원하게 뻗어 나갔다. 그 끝은 너무나 멀어 보이지도 않았지만 소리는 확실했다. 콱, 무언가 비틀리는 소리가 났다. 이쪽의 부속선 역시 함께 덜컹거렸다. 이로써 하나가 연결되었다. 함께 추락할 서른다섯 개 중 하나가.
“다음, 박민준. 강지원 대기.”
다음은 빨랐다. 서재희는 기억에 의존했고 정예군은 서재희에 의존했다.
“소연주, 장현철 순서 상호 변경. 이선규, 첫 설계 기준으로 2시 방향 재설정.”
서재희는 총을 겨누는 제 손이 이따금 파르르 떤다는 것을 알았다. 그로 인해 벌어지는 간격은 정예군의 가공할 만한 실력이 메웠다. 서른다섯 척을 연결하는 데 수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서재희가 디딘 갑판은 팽팽한 연계 선으로 가득했다.
높은 곳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본다면, 서재희의 부속선은 사방팔방으로 서른다섯 개의 부속선을 갈고리처럼 매달아 마치 민들레 홀씨의 핵처럼 보일 터였다.
서재희는 난간을 움켜쥐고 갑판 끝머리에 올라섰다. 아래를 굽어보았다. 부속선 밑쪽에 희미한 붉은 선이 보였다. 정윤환의 설계. 그것은 대지의 어딘가에 있는 정윤환의 총구에서 뻗어 나온 경이롭도록 무수한 설계 중 하나로, 공중의 부속선을 결박한 후 언제 아래로 처박을지 가늠하고 있었다. 서재희는 총구를 들어 올렸다. 정윤환의 설계를 정확히 겨누었다. 방아쇠를 당겼다.
탕!
대기가 흔들렸다.
정윤환의 설계가 서재희의 타격을 받아 펄떡이며 빛났다. 부속선은 그대로 낙하했다. 팽팽하게 연결된 옆의 부속선들도 함께 따라왔다. 육안으로는 확인하지도 못할 만큼 위압적인 규모였다. 흡사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비명보다 바람소리가 컸고, 시야는 인지하지도 못할 만큼 빠르게 스쳤다.
문득 난간을 잡은 손이 미끄러졌다. 힘을 더할 수도 있었으나 서재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해야 할 일이 남았음을 알면서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면서도 그랬다. 차가운 금속이 손아귀를 쭉 스치며 사라지고 몸이 공중으로 튕겨져 나가려는 순간, 거칠게 끌어 안겼다.
“꽉 잡아!”
이선규였다. 그는 필사적으로 바람으로부터 서재희를 앗아 왔다. 서재희는 간절히 원해서가 아니라 이선규에게 기계적으로 반응하여 난간을 다시 붙잡았다. 모든 게 꿈같았다. 중앙수사부에 갇히고, 임유현에게 받던 강도를 웃도는 고문을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당한 여파로 정신이 깜박깜박했다. 어쩌면 임유현이 죽은 후부터 죽음을 실감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복수의 일부가 완성되었으니. 혹은, 유은우를 정윤환에게 맡기겠다고 결심한 후부터 생의 의지가 말랐는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너, 절대로 죽지 마! 책임지라고!”
이선규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바람에 뚝뚝 잘려 날것으로 들어왔다.
“네가 벌인 일이니까!”
서재희는 난간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미안하다고 말하려다, 삼켰다. 이선규는 본인의 실력에 비해 쉽게 불안해하고 타인을 의식하는 전투를 했다. 서재희는 단단해 보여야 했다. 문득, 울어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서재희는 습관처럼 제 옷깃을 더듬었다. 비어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메모리…….
피가 식었다. 흐릿하던 정신이 섬광처럼 번쩍였다.
급강하하던 부속선은 어느 순간 차츰차츰 속도가 줄어들었다. 거친 바람 사이에서도 기척은 섬세했다. 정교한 설계가 눈송이처럼 흩날렸다. 완충 설계. 정윤환 특유의,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한 패턴이 사방을 에웠다. 서재희는 자신을 껴안은 이선규의 어깨 너머로, 희생양 삼아 함께 끌려 들어가고 있는 다른 부속선들을 보았다. 그것들은 이쪽과 달리 급강하하며 아래로 쑥쑥 꺼지고 있었다. 폭발음으로 귀가 먹먹했다.
“됐다. 윤환이가 우릴 알아본 거야!”
박민준이 안도했다. 이선규는 서재희가 난간을 잡고 있는데도, 여전히 서재희를 품에 꽉 가둔 채 외쳤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밑을 봐!”
피와 불의 냄새가 났다.
부속선이 땅에 부딪혔다. 중간부터 속도도 줄어들고 완충 설계도 입었으나 그동안 붙은 가속도를 상쇄하기에 충분치는 않았다. 굉음을 내며 갑판이 두 동강 났다. 서재희는 이선규와 함께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신체 강화제를 흡입하지 않았더라면 척추가 꺾였을 충격이었다.
이선규는 서재희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었다. 서재희는 기울어진 갑판에서 뛰어내렸다. 발밑에서 아스팔트가 부서졌다. 쩍쩍 갈라진 도로면을 딛고 일어섰다. 즉시 피했다. 방금 서 있던 자리에 날카로운 상흔이 남았다. 어디서 온 공격인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들었다.
연기가 자욱했다. 총성, 설계 패턴, 강도 높은 타격, 먼지 구름, 비명, 신음, 고함이 뒤섞여 오감이 어지러웠다. 추락한 지점은 서재희가 짐작한 대로 학교와 군이 맞붙은 최전선, 중립지대의 경계였다. 차단막은 이미 물리적으로 파괴되어 있었다. 그 틈으로 군이 집중적으로 투입되고 있었고, 안쪽에서 학생들이 도열하여 방어하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밖에서도 학생과 군이 뒤엉키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느 쪽으로 승세가 기울었는지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저만치 한 여학생이 빠르게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선배!”
절규에 가까운 부름이었다. 연다희는 제 앞을 가로막는 군인 서넛을 속박 설계를 써서 한 번에 땅으로 메다꽂은 뒤 쏜살같이 달려와, 서재희와 부딪히기 직전에 멈추어 섰다. 그녀는 즉각 서재희를 보호하듯 등지더니 오른손으로 총을 겨누고 왼손으로 그 밑을 야무지게 받쳤다. 이미 피를 먹어 벌건 총구는 서재희 바로 옆에 서 있는 이선규를 향했다.
이선규가 싱긋 웃더니 항복하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자세가 좋네. 웬만한 군인보다 나은데?”
연다희가 주위의 소연주를 비롯한 정예군을 경계하듯 주시했다. 상대가 도시연합군 제복을, 정예군 기장을 달고 있음에도 조금도 주눅 드는 기색이 없었다. 그녀가 앞에 시선을 둔 채 뒤에 선 서재희에게 빠르게 속삭였다.
“정윤환 선배가 여기 우리 편이 있을 거라고 그랬어요. 저한테 데리고 오라고 했어요. 여긴 제가 막을 테니 학교로 들어가세요. 정문 근처에 군이 집중되어 있으니 그쪽은 피하시고요. 본관 앞에 모함이 대기 중입니다. 군에 인질로 붙잡힌 학생들만 구하면 우리도 모함 타고 학교를 뜰 거예요. 제 홀스터에서 필요한 약물 빼 가시고요.”
서재희는 손을 뻗어 제 앞을 단단히 막아 선 연다희의 총신을 가볍게 잡아 천천히 내리눌렀다. 연다희는 머뭇거렸으나 서재희가 누르는 대로 총을 내렸다.
“이분들 안내해 드려.”
연다희가 고개를 홱 돌려 서재희를 보았다.
“네?”
“우리 편이야. 아, 물론…….”
서재희는 장현철을 응시했다.
“……전부는 아니고. 원하는 분들만 안내 부탁해. 정윤환한테로.”
이선규가 항복 자세를 풀고 총을 뽑은 뒤 지척으로 날아오는 공격을 맞추어 부수었다. 연다희는 이선규와 서재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소연주, 박민준, 강지원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장현철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소연주가 물었다.
“넌?”
“전 할 일이 남았습니다. 먼저 가세요.”
“널 복귀시켜야 우리 임무가 끝나.”
서재희는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소연주의 손에 쥐여 주었다. 얼결에 받아 든 소연주가 시계를 알아보고 낯을 굳혔다. 서재희는 미소 지었다.
“완수한 걸로 하죠. 융통성 있게.”
공기가 날카로웠다. 전원이 동시에 총을 들어 겨누었다. 그 틈에 서재희는 뒤돌았으나 소연주에게 팔을 잡혔다. 다음 순간 엄청난 힘에 밀려 둘은 함께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고개를 드니 박민준과 연다희가 앞에 서서 반사 설계를 구현하고 있었다. 허공에 전개된 다각형이, 적의 공격을 거칠게 튕겨내고 있었다.
서재희는 일어서려다 소연주에게 어깨를 잡혔다.
“어디 가!”
서재희는 공기를 가르고 달려드는 소리로 공격의 방향을 가늠했다. 반대쪽으로 소연주를 밀었다. 뒤돌아 힘껏 뛰었다. 뒤에서 땅이 갈라지는 충격음이 났다.
일부러 부속선에 바로 올라타지는 않았다. 서재희는 무너진 건물 사이에 몸을 숨겼다. 숨을 고르고 정예군이 연다희를 앞세우고 사라지는 걸 확인한 후에야 건물을 빠져나왔다. 중간에 공영방송 로고가 새겨진 드론이 카메라 렌즈를 번쩍이며 바짝 따라붙었으나 간신히 따돌렸다. 가까스로 부속선에 다다랐다. 선교의 문은 찌그러져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반파된 전방 유리창에 총을 쏴서 마저 깨뜨린 다음 기어 들어갔다.
총으로 약한 타격을 쏘아 빛의 구를 만들었다. 평소의 반의 반에도 못 미치는 엉성한 조명이 허공에 떠올랐다. 몸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음을 방증했다. 시간이 없었다. 이젠 회복제도 듣지 않을 것이다. 서재희는 기울어진 선교 가운데 균형을 잡고 서서 기억을 되짚었다.
장현철이 어디서부터 성큼성큼 걸어왔는지. 어디쯤에서 그에게 멱살을 잡혔는지. 단추가 두둑 뜯겨 나가는 소리가 언제쯤 들렸는지.
서재희는 안전 바를 잡으며 부속선 안쪽으로 깊이 들어갔다. 천장이 반쯤 무너져 있어 마치 방 하나가 새로 생긴 것처럼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다. 서재희는 그 뒤로 들어갔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잔해가 뒤덮여 엉망이었다. 찾을 수 있을까. 손톱보다 작은 메모리를.
평소라면 없을 실수였다. 그리 중요한 것을 부주의하게 옷깃에 매달고 괜찮으리라 여긴 것도. 장현철에게 단추를 뜯길 때 메모리가 함께 떨어지는 걸 깨닫지 못한 것도. 메모리 없이 텅 빈 옷깃을 한참 후에 알아챈 것도.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법 망가진 모양이었다. 괜찮다고 되뇌었다. 머리도 몸뚱이도, 쓸 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메모리를 정윤환 편으로 넘기면 내 역할은 끝난다. 모든 죄는 나의 죽음 후에 나의 몫으로 드러날 것이다.
지금의 컨디션으로는 정교한 설계를 해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서재희는 직접 손으로 잔해를 뒤지기 시작했다. 떨어진 금속 선반을 들어 옮기고 뿌옇게 쌓인 부스러기를 손바닥으로 쓸어 냈다. 쏟아져 어지러운 빈 약물 케이스들은 발로 밀어냈다. 깨진 유리를 들어 올려 아래를 보려는 순간, 서재희는 유리에 비친 인영을 보았다. 상대는 소리 없이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누군지 감이 왔다.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그래도 믿고 싶었던 자신의 판단을 후회했다. 이럴 때면, 어쩔 수 없이 임유현이 생각났다. 그는 언제나 서재희를 두고 무르다고 말했다. 처음 만난 날부터,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서재희는 뒤돌아 장현철을 막는 대신, 태연하게 잔해를 뒤지는 척하면서 다음 순간 빠르게 옆으로 몸을 날렸다. 장현철의 설계가 지척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서재희는 기민하게, 옆에 널브러져 있던 선반을 들어 힘껏 던졌다. 장현철이 다급히 총을 쏘아 그것을 막음과 동시에, 서재희는 철제 막대를 발로 걷어차 공중에 띄운 후 단단히 틀어쥐고 휘둘렀다. 막대는 장현철의 손에 쥐인 총이나 급소를 노리는 대신, 정확히 왼쪽 발목을 후려쳤다. 장현철이 신음을 하며 비틀거렸다. 서재희는 이어 장현철의 오른손을 내리쳤다. 장현철이 놓쳐 떨어뜨린 총을 서재희는 걷어차 멀리 보내 버렸다. 막대를 버림과 동시에 총을 뽑았다. 장현철은 그대로 서재희의 공격을 받고 벽으로 밀려 쓰러졌다. 부속선이 크게 흔들렸다. 장현철의 몸을 타고 올라앉아 총구를 턱 밑에 밀어붙였을 땐, 서재희도 진이 빠져 눈앞이 아득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내색하지 않았다. 장현철이 숨을 헐떡였다.
“어떻게…….”
“나는 당신을 압니다. 당신이 나를 아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내가 당신 발목의 부상만 알고 있다고 여긴다면 오산입니다. 나는 당신 아들이 주말마다 제8도시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그걸 당신이 반대한다는 것도 알고 있죠.”
총구에 힘을 주었다.
“아까 당신은 도시연합에 충성을 맹세한다고 했지요. 도시연합과 도시연합장을 구분한다면 이렇게 제 뒤통수 못 치십니다. 군 강령 첫 번째, 군은 시민을 위해 존재한다. 제 머리를 도시연합장에게 가져다 바쳐도 당신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당신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혁명에 가담하세요. 미래를 선택하십시오.”
제 입에서 미래라는 단어가 술술 흘러나오는 게 우습지도 않았다. 마지막으로 진짜 속마음을 표현한 게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상대의 삶을 송두리째 쥐고 흔들 수 있는 화려한 패들을 모두 놓아 버리고 아무런 가식 없이 유은우에게 고백했던 날, 터져 버릴까 두렵도록 요동치던 심장. 이제 그런 순간은 다시는 맞이하지 못할 것이다. 수십만 명의 대중 앞에서 동조자 헌장을 읊을 때도 감흥 없던 심장은, 이젠 내 것이 아닌 유은우를 떠올리자마자 생경하게 뛰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차예원 옆에서 가만히 숨만 쉬어도 도시연합 꼭대기에 오를 텐데…….”
“차인호와 같습니다. 그가 딸만 보는 것처럼 저도 한 사람을 위해 삽니다. 그 사람이 시민의 편에 설 사람이라, 저도 그렇게 하는 것뿐입니다.”
“거기에 네 의지는?”
언젠가 정윤환에게 비슷한 질문을 받았었다. 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있어야 합니까?”
“본인의 확고한 신념도 없이 남을 위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놈 하나 믿고 도시가 전부 뒤집어져야 하나? 지금이라도 끝낼 수 있어. 너만 죽으면…….”
말을 채 맺지 못하고 장현철의 낯빛이 서서히 질렸다.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서재희는 알 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쫓듯이, 나도 그렇게 살고 있을 뿐인데.
“이제 알겠다. 살인 미수가 아니야. 교장도 네가 죽였어.”
“임유현이 먼저 절 죽였습니다. 되갚아 준 것뿐이죠. 그런 끔찍한 관계는 이제 그만하고 싶습니다. 다시는 제 손으로 엮어 내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을 죽이고, 후에 당신의 자녀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복수하고, 끊임없이 싸우고 또 싸우며 목적도 희미해진 채 악이 대를 물리는 건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 목을 치려 한 것은 눈감아 드리겠습니다. 저에 대한 건 모두 잊으시고 처음 군에서 명예 훈장을 받았던 때를 떠올리세요. 당신이 연단에서 뭐라고 소감을 말했었는지.”
장현철의 뺨이 굳었다. 서재희는 방아쇠에 건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몸을 가까이 숙이고 꿀을 흘리듯 속삭였다.
“혼란스러운 시대가 열리겠지만, 그래서 선택의 폭이 넓어질 겁니다. 어디든 덜 후회스러운 길을 가시길 바랍니다.”
선택은커녕 살아남을 보장도 없었으나,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서재희가 알 바 아니었다. 방아쇠를 당겼다.
탕!
서재희는 아래에서 장현철의 전신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서재희는 무너지듯 그에게서 내려왔다. 바닥의 날카로운 잔해들 위로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숨을 골랐다.
바로 여기서, 장현철이 서재희의 멱살을 잡았고, 단추가 뜯어졌다.
서재희는 장현철의 감긴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총을 홀스터에 끼워 넣으며 일어섰다. 다시 장현철 위로 올라탔다. 그의 제복을 젖히고 주머니란 주머니는 싹 뒤졌다. 홀스터에 장착된 약물 케이스도 전부 빼어 확인하고 다시 꽂았다. 없었다. 장갑을 벗길까 군화를 벗길까 고민하던 차에 폭발음과 함께 부속선이 별안간 흔들렸다. 각도가 바뀌며 무언가 반짝거렸다. 서재희는 장현철의 왼손을 들어 올렸다. 이프가 채워진 손목 아래 꽉 잠긴 소매 단추가 있었고, 소매 단추와 나란하게 은색의 작은 메모리가 붙어 있었다.
서재희는 장현철의 소매에서 메모리를 뜯어냈다. 메모리를 제 이프에 끼우자 패스워드 입력 창이 떴다. 서재희는 김서혁이 알려 준 네 자리 숫자, 0305를 입력했다. 메모리가 열리며 동영상이 떠올랐다.
잃어버린 게 아니었구나. 뺏겼던 거야.
서재희는 거기까지 확인하고 이프를 껐다. 메모리는 이프 안에 그대로 두었다.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진 장현철의 팔 밑에 양손을 집어넣고 질질 끌었다. 처음 띄웠을 때보다 가물가물해진 조명이 비틀거리며 따라왔다. 전방 유리창 가까이 와서 장현철을 내려놓았다. 창틀에 날카로운 잔해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장현철을 그대로 밀어 밖으로 던지면 그가 상처를 입을 터였다. 체력이 바닥이었으나 할 수 없이 총을 뽑았다. 장현철은 서재희의 총이 겨누는 대로 공중으로 떠올라 창틀을 안전하게 통과하여 밖으로 날아갔다. 일부러 도시연합군의 모함이 있는 곳을 향하도록 했다. 어디선가 툭 하고 끊기는 느낌이 났을 때, 서재희는 총을 내렸다. 누군가 장현철을 받아 냈다는 뜻이었다. 상대가 장현철을 살릴지 죽일지는 서재희도 알 수 없었다. 그의 목숨을 한 번 연장해 준 것에 족했다.
이제 학생을 찾아야 했다. 정윤환에게 전달해 달라며 메모리를 맡길 사람이 필요했다. 믿을 만한……. 당장 생각나는 이는 연다희였다. 메모리를 잠깐 잃어버리지만 않았어도 아까 마주쳤을 때 진즉 건넸을 텐데. 그러면 서재희는 지금 당장 죽어도 문제가 없을 터였다. 후회가 막심했다.
서재희는 의자를 밟고 콘솔을 디뎠다. 창틀을 막 넘으려 할 때였다. 흰 궤적이 눈앞을 휙 스치고 사라졌다. 서재희는 총을 들어 무리하는 대신 콘솔에서 도로 내려와 몸을 숨겼다. 누군가 가까이 오고 있었다. 서재희는 안쪽에 붙어서 고개를 돌려 밖을 주시했다. 다시 한번 그 설계가 날아오길 기다렸다. 서재희는 설계만 읽어도 상대가 아군인지 아닌지 판단할 자신이 있었다. 전교생 개개인의 설계 패턴을 훤히 꿰고 있었으니.
상대가 학생이길, 제법 믿을 만한 학생이길 바랐다. 그러나 군인이라면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싸워야 했다. 버틸 자신은, 솔직히 없었다. 서재희의 개인전 승률은 평균 이하였으며, 그마저도 같은 학생끼리 붙었을 때 이야기였다. 노련한 군인과 일대일로 겨뤄 이긴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장현철을 때려눕힌 것만으로 평생의 행운을 다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재희는 숨도 멈추고 기다렸다. 다시 한번 희끗한 기운이 공기를 갈랐다. 서재희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은 온전한 설계가 아니었다. 어떤 설계의 일부였다. 어딘가에 맞아 부서진 파편이 우연히 이쪽으로 날아온 것으로 보였다…….
아니, 잠깐…….
서재희는 자신이 몸을 숨기고 있다는 것조차 잊었다. 그는 몸을 천천히 숙이고, 빛의 패턴이 부속선의 창틀에 부딪힌 후 콘솔 위를 물처럼 미끄러지는 모양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설계 맞나?
직선, 곡선, 다각형과 작은 점들이 모여 아름다운 레이스처럼 하늘거렸다. 분명 설계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서재희는 살면서 이런 식의 패턴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정윤환의 설계처럼, 중간 과정이 비약적으로 생략되어 읽기 힘든 경우가 아니었다. 애초에 처음 보는 무늬였다. 서명도 없었다. 서명을 은닉하거나 타인의 서명을 덮어씌운 경우가 아니었다. 아예 처음부터 없다는 듯 깨끗했다.
설계 비슷한 그 무언가는 콘솔 벽을 직각으로 타고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서재희의 발치에서 설탕과자처럼 부스러졌다.
설마.
서재희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촉각을 곤두세웠다. 상대가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이 났다. 가볍고 망설임이 없는 걸음. 낭비 없는 몸가짐.
설마. 정윤환이 유은우 혼자 위험하게 나다니는 걸 그냥 두진 않았을 텐데…….
가슴이 뛰었다. 서재희는 당장에 창틀 너머로 몸을 내밀어 밖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쾅 하고 부속선이 크게 흔들렸다. 근처에서 폭발음이 일어나자 바깥의 걸음은 빨라졌다. 타닥타닥 발소리를 들으면서 서재희는 눈을 꾹 감았다. 결심은 빨랐다. 서재희는 벽에서 튕기듯 떨어졌다. 전속력으로 뛰어 부속선 구석으로 들어갔다. 장현철을 때려눕혔던, 천장이 반쯤 내려앉아 분리되어 잘 보이지 않는 그 공간이었다. 몸을 숨기고, 비스듬한 천장과 벽 사이 틈으로 부속선 앞쪽 창틀을 보았다.
창틀 위로 손이 하나 탁 올라왔다. 이어서 다른 손도 탁 올라왔다. 까만 정수리가 언뜻 보이나 싶더니 상대가 가뿐하게 창틀에 올라섰다. 짙은 색의 품이 넓은 검도복을 입고, 등에 긴 검집을 매달고, 머리를 하나로 달랑 묶은 유은우가 창틀에서 안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그녀는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으나 불안하고 다급해 보였다. 유은우는 부속선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옆으로 몸을 숨겼다. 아까까지 서재희가 기대어 있던 그 벽이었다.
유은우가 심각한 낯으로 손을 등 뒤로 돌려 검 손잡이를 쥐더니 그대로 위로 뽑아냈다. 검이 유리로 만들어진 뱀처럼 기어 나왔다. 서재희가 빚어낸 조명은 이제 수명을 다하고 없어 주위가 어둑한데도, 칼날은 빠르게 빛을 반사했다. 그 파편이 화살처럼 날아들어, 서재희는 잠깐 눈을 감아야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유은우는 뽑은 검 끝으로 부속선 바닥을 콱 짚고 있었다. 유은우가 왼쪽 손목의 이프를 켰다. 홀로그램 스크린은 정상적으로 작동했으나, 유은우가 추적선 열람을 선택하자 경고음이 울렸다.
유은우는 초조한 표정으로 이프를 눌러 화면을 끄고는, 몸을 기울여 바깥을 주시했다. 탐지등이 한바탕 이쪽을 훑고 지나갔다. 유은우는 잽싸게 몸을 도로 숨겼다가 검을 들고 조종석 의자를 밟았다. 부속선에서 나가려는 것 같았다.
쾅! 바깥의 폭발로 부속선이 한 번 더 흔들렸다.
서재희는 중심을 잘 잡았으나, 마지막에 몸이 기우는 바람에 발로 바닥을 고쳐 디뎠다. 발밑에서 딱, 하고 무언가 맑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보나마나 빈 약물 케이스였다.
서재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틈으로 유은우를 보았다. 아주 작은 소리라 듣지 못했길 빌었다. 바깥의 소음이 이토록 큰데 설마…….
그러나 유은우는 의자에 한쪽 발을 디딘 채 얼어붙어 있었다. 검 손잡이를 쥔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서재희는 총을 뽑았다. 동시에 유은우도 발로 의자를 밀어내며 검을 휘둘렀다.
서재희의 방어 설계가 푸른 장막처럼 단단하게 펼쳐지고, 유은우의 검에서 반달을 그리며 날아든 궤적이 둘 사이를 가로막은 잔해를 부수면서 부속선이 크게 흔들렸다. 서재희는 안전 바를 당기며 벽에 몸을 붙였다. 유은우의 흰 공격은 벽처럼 가로막은 잔해를 무너뜨리고도 멀쩡하게 형태를 유지하며 서재희가 전개한 보호 설계까지 쉬이 부수고는 서재희가 서 있던 자리를 사납게 긁으며 사라졌다. 그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선배?”
유은우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검을 내렸다. 검 끝이 바닥에 거칠게 부딪히면서 불규칙하게 정교한 패턴이 꽃가루처럼 사방으로 퍼졌다. 서재희가 설계인지 아닌지 가늠하지 못한 바로 그 무늬였다. 그것은 천장에 달라붙거나 바닥을 미끄러지면서 어둡던 부속선 안을 환하게 밝혔다. 그 빛으로, 서재희는 유은우와 마주했다.
익사하는 기분이 들었다.
서재희는 안전 바에서 손을 떼고 몸을 바로 했다. 숨 쉬듯 표정을 정돈하며 살아 온 그였으나 지금은 너무 힘들었다. 감정을 비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그렇게 애쓰는 것 또한 갈무리하며 서재희는 고요하게 유은우를 마주 보았다.
들키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자신이 없었다. 욕심 부리지 않을 자신이. 그러나 정윤환의 죄까지 짊어지고 가려는 마당에, 유은우에게 미련 둘 수 없었다. 정윤환이라면,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이다. 제 내부가 썩어 들어가더라도. 그의 곁이라면 안전했다.
가장 어려운 길을 자진해서 갈 수 있는, 지도자의 자질을 갖춘 사람.
서재희는 정윤환을 높이 샀다. 비단 설계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서가 아니라, 그의 타고난 성정 때문에. 정윤환은 남을 위해 자신을 부술 줄 알았다. 정윤환이 한 시대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재임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정윤환의 부모는 기득권을 대변하고, 정윤환은 혁명을 주도한다. 정윤환은 명망 높은 집안을 기반으로 두었으므로 기존의 기득권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기 쉬울 것이며, 그간 정치판에서 굴러먹던 경험을 토대로 혼란한 새 시대에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정윤환의 부모는 선한 이미지에 반해 교섭 능력은 떨어지므로 김서혁에게 감히 반발할 수 없었다. 차인호를 비롯한 핵심 세력을 제거하고 정윤환의 집안을 주축으로 한 기득권을 김서혁에게 편입시켜 정치 구도를 최대한 빠르게 안정화시킨다는 게 서재희의 의도였다.
정윤환은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그 임유현조차 정윤환을 차마 해치진 못했다. 그는 신이 선사한 희대의 설계 천재였다. 서재희가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런 정윤환 인생의 축엔 유은우가 있었고 정윤환 스스로 그 축을 여러 번 부수어 왔다. 서재희는 이제 정윤환에게 유은우가 더 이상 아픈 부분이 아니라 대의를 대표하는 이미지였으면 했다. 모두가 지도자로 추앙하는 서재희 자신은, 정윤환만큼의 순수한 대의를 가져 본 적 없어, 누군가의 위에 서서는 안 되었다. 특정인을 신념으로 삼는 사람은 리더가 되어서는 안 된다. 차예원에게서 죽은 아내를 본 차인호가 최악의 지도자였듯.
“……은우야.”
그냥 서로 빨리 스쳐 지나갔으면 했다.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유은우가 말없이 눈가를 딱딱하게 굳혔다. 놀라 약간 틈이 벌어졌던 입을 꾹 다물고, 그녀는 잡아먹을 듯 이쪽을 노려보았다.
“은우야, 가. 난 할 일이 있어.”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유은우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화려한 수식어를 섞어 여러 층의 거짓말을 대면서 지금 당장에라도 부속선에서 뛰쳐나가게 만들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하늘이 두 쪽 나도 유은우에게만큼은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 서재희는 바보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어서 가.”
유은우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서재희는 고작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유은우가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유은우가 제 품으로 온전히 뛰어 들어오기를 바랐다. 자꾸만 불쑥불쑥 치솟는 욕심에 화가 났다.
“선배, 나 뭐 하나 물어볼게요.”
유은우는 서재희와 서너 발짝 남겨 놓고 멈춰 섰다. 눈빛은 단단하여 손으로 만져질 것 같았다. 온몸이 생기로 똘똘 뭉친, 예쁜 모습 그대로였다.
“학부모들한테 보낸 편지에 이상한 말을 써 놨던데요. 저랑 정윤환을 엮어 놨더라고요. 제 동의도 없이.”
서재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은우의 가슴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는 듯 부풀었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물론 절 위해 한 일이겠지요. 선배는 정윤환을 살리고 그 옆에 날 붙여 안전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을 거예요. 언론에 우리 둘을 연인으로 묶어 혁명의 상징으로 만들고, 그 파급력 때문에라도 제가 다른 마음 못 먹게. 물론 선배 뜻대로 되겠죠. 언제나 그랬듯이. 하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사람을 멋대로 다뤄도 되는 건가요? 선배가 길을 정해 놓고 타인을 몰아넣는다면…….”
서재희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유은우를 빤히 응시했다. 유은우에게서 묻어나는 색깔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선배가 그 엿 같은 교장이랑 뭐가 달라요?”
유은우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속눈썹 아래 드러난 맑은 시선은, 뜨겁고 견고했다.
“제가 예전에 그랬지요. 선배가 자살하는 것 말리지 않겠다고. 그 뜻을 존중한다고요. 혹시 선배가 마음을 돌리고 싶을 때를 대비하여 항상 옆에 있겠다고 했었죠. 아직도 그 생각 변치 않아요. 본인이 더 살고 싶지 않으면 죽는 거죠. 근데요. 저는 선배가 오래 살았으면 좋겠거든요. 제 옆에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요. 선배는 죽고 싶어 하고, 전 선배와 살고 싶으니…….”
유은우의 손 안에서 검이 비스듬히 돌았다.
“……누가 이기나 어디 한번 해 봐요. 난 절대 안 져.”
다음 순간, 유은우가 검으로 바닥을 빠르게 그었다. 흰 궤적은 종이 새처럼 사뿐 날아오르는가 싶더니, 쏜살같이 창틀 너머로 빠져나갔다. 바깥에서 부속선 안쪽의 기척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적을 모으는 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즉각 무언가 날아들었다. 서재희가 부속선에 다시 숨어들기 전 간신히 따돌렸던, 공영방송 로고가 붙은 드론이었다. 날개가 망가져 비틀거리긴 했으나 촬영 렌즈는 멀쩡했다.
맙소사, 카메라…….
서재희는 드론을 부수기 위해 총을 뽑았다. 그러나 유은우가 박치기하듯 그의 품으로 와락 달려들었기 때문에,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소중히 받아 내느라 미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지 못했다. 유은우가 검을 잽싸게 거꾸로 쥐고 검 손잡이로 서재희의 오른손을 내리친 건 그다음이었다. 멍청하게 총을 놓쳤다는 낭패감에 이어, 유은우가 그 총을 걷어차 멀리 보내는 것을 하릴없이 바라보아야 했다. 이어 유은우가 검을 놓더니 두 손으로 힘껏 서재희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서재희는 맞은편에서 빨간 램프를 반짝이는 드론의 시선을 느끼면서, 유은우의 악력에 기꺼이 끌려 머리를 숙였다. 그녀가 발돋움을 하는지 머리가 서재희를 향해 한 뼘 쑥 올라오고, 숨이 가까워졌다.
유은우가 매달리듯 서재희에게 입 맞췄다.
카메라가 돌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전 도시에 생방송으로 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윤환과 유은우를 혁명의 정점에 올려놓고, 둘을 연인으로 이미지화하여 온 시민의 사랑을 받도록 해 주고, 모든 죄를 홀로 짊어지고 가려 했던 최선의 계획이 묵직한 소리를 내면서 기울고 있었다.
내가 짠 판인데.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바로잡을 수 있었다. 유은우를 밀어내거나, 혹은 오히려 그녀에게 거칠게 달려들어 서재희 본인의 이미지를 시궁창으로 처넣으며 유은우를 가련한 피해자로 만든 뒤 정윤환에게 돌려보낼 수도 있었다. 수만 갈래 선택지가 떠올랐다. 그러나 어느 것도 시도할 수 없었다. 제 멱살을 틀어쥔 유은우의 손이 어린 새처럼 떨고 있었기 때문에.
유은우의 키스는 조심스러웠다. 누가 이길지 어디 한번 붙어 보자고 외치던 호언장담에 비해. 입술을 물고 미끄러지는 숨이 따뜻하여 눈물이 났다. 서재희는 불가항력적으로 입술을 열었다. 유은우의 숨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내 것이 아니라 생각했던 것들. 나 때문에 고향이 무너졌으니까. 나 때문에 부모님이 그리되셨으니까. 홀로 누려선 안 된다고, 행복해선 안 된다고 미루고 외면했던,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들. 차갑고 선명한 것들.
서재희는 줄곧 열여섯 살이었다. 제8도시의 폭격 한가운데 멈춰 단 한 뼘도 자라지 못했으니. 과거의 불행에 부서져 주저앉은 채 미래를 복수로 탐하던 그간, 단 한 번도 현재를 살지 못했다.
서재희에게 깊이 들어오지 못하고 숨만 부으며 언저리를 맴돌던 유은우의 입술이 떨어졌다.
한껏 치켜들고 있던 발뒤꿈치가 탁, 바닥을 딛는 예쁜 소리를 따라 유은우는 한 뼘 아래로 내려갔다. 필사적으로 서재희와 시선을 맞춘 유은우의 눈에서 마른 눈물이 뚝 떨어졌다. 흐느낌은 없었다.
“저 선배 좋아해요.”
폐허가 된 고향, 부모님의 죽음, 임유현의 그림자가 해묵은 사슬로 엮여 서재희의 발목에 채워져 있었다. 과거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그러나 지금, 그 쇠사슬이 힘차게 바닥을 끄는 소리가 났다. 삶에 대한 의지로 반짝반짝 빛나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서재희의 쇠사슬을 쥐고 혼이 부르트도록 제 쪽으로 당기고 있었다. 서재희는 속절없이 과거에서 건져졌다. 현실에 발붙였다. 처음으로 복수가 아닌, 자신을 위한 욕심을 부렸다. 사실은 옆에 있고 싶다고.
유은우가 서재희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스륵 놓았다. 틈이 느슨해진 그녀를, 서재희는 당겨 안았다. 한 손으로 유은우의 허리를 껴안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받쳤다. 단단하게.
“선배, 제발…….”
유은우가 가냘프게 속삭였다.
“……나 두고 가지 마요.”
서재희는 유은우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빛이 온전히 품에 들어찼다. 눈이 부셔 눈을 감았다. 고개를 기울였다.
아아, 은우야.
서재희는 유은우의 입술을 부드럽게 삼켰다.
내가 널 어떻게 이기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