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캐슬링
유은우는 왼손으로 검집을 집어 들었다. 검집 위로 두껍게 엉켜 있던 거미줄이 딸려 올라오다가 뚝 끊어지며 나른히 내려앉았다. 검집에서 검을 힘껏 뽑아냈다. 검날이 서늘한 소리를 내며 흰 뱀처럼 기어 나왔다. 크게 휘둘렀다. 부러져 치료 중인 오른손은 쓰지 않았다. 왼손으로만 서툴게 그어 내린 검 끝에서 빛이 새파랗게 일었다가 금세 스러졌다. 그 동작에 먼지가 부옇게 일어났다. 유은우는 소매로 입을 막고 기침을 했다.
혼자 있으니까 목이 더 따가워.
전에는 서재희와 같이 왔었다. 이름만 전시관일 뿐 창고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둘은 먼지며 거미줄이며 오래 방치된 시간을 흠뻑 뒤집어썼다. 늘 단정하던 서재희는 금세 머리며 옷이 엉망으로 흐트러졌고, 많이 웃었다. 그때는, 창으로 비춰 드는 햇살에 반짝이며 유영하는 먼지가 별이 부서진 가루 같았다. 그러나 홀로 다시 돌아온 지금, 먼지는 그저 목구멍을 콱 틀어막아 괴로울 뿐이었다. 공간은 달라진 게 없는데. 그저 둘이었다가 혼자가 되었을 뿐인데.
눈을 문질렀다. 먼지 때문인지 자꾸 눈물이 났다.
유은우는 검을 도로 검집에 집어넣고 돌아섰다. 문가에 세워 놓은 수레는 이미 활이며 창이며 봉 등의 온갖 무기들이 한가득 담겨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으나, 유은우는 골라잡은 검을 그 사이로 쑤셔 넣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사방의 무기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천장에 매달리고 벽에 걸리고 바닥에 쌓인 무기 하나하나 전부 눈으로 뒤지고 손으로 들어 보았다.
기준은 단순했다. 휴대 가능할 것.
유은우는 바닥에서 괴상하게 생긴 목걸이도 하나 주웠다. 손에 쥐자마자 그것은 붉게 꿈틀거리며 채찍처럼 사방을 이리저리 할퀴어 댔다. 무기가 멍청해서 적과 아군을 구분 못 하는 건지, 잡은 사람이 다루는 요령이 없어 그런 건지 가늠하기 어려워 망설이는 사이, 허벅지를 호되게 얻어맞았다. 미련 없이 저만치 던져 버렸다. 목걸이는 쨍강 소리를 내며, 유리함에 거칠게 부딪혔다가 바닥으로 스르륵 떨어져 내렸다. 유은우는 다른 무기를 살피기 위해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그쪽을 보았다. 유리함이 익숙했다. 다가가서 들여다보았다. 짧고 투박한 단검이 천에 곱게 둘러싸여 있었다. 조심조심 유리함을 쓸어 보았다. 여기 어딘가 서재희의 손길이 닿았을 터였다.
유리함을 열고 단검을 꺼내 쥐었다. 온디딤 특유의 청량감. 쥐는 순간, 자신이 옅어지고 감각이 활짝 열렸다. 전신으로 온이 스몄다가 맴돌고 빠져나갔다. 왼손으로 손잡이를 움켜쥐고 오른손으로 칼날 위를 더듬었다. 꽃잎이 희게 돋아나다가 만개하지 못하고 스러졌다.
보고 싶어.
그리움은, 깜짝 놀랄 정도로 갑작스럽게 밀려들었다. 유은우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묻었다. 숨을 골랐다. 눈물은 안으로 흘렀다.
그리움은 파도와 같아서 주기적으로 밀려왔다가 또 금세 쓸려 나갔다. 안타까워 젖은 마음이 햇볕에 바짝 마르기도 전에 먹먹히 다시 밀려오고, 또 쓸려 나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니 마음 한쪽 구석, 눈물샘이 가까운 곳은 마를 새가 없었다.
처음 겪어 보는 감정이라 유은우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서재희 또한 같은 마음이기를 바라는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가끔 가슴이 꽉 막혀 숨이 쉬어지지도 않는데, 이 고통을 서재희도 느꼈으면 하는 제 마음이 정상인지 혼란스러웠다. 그가 괜찮길 바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나 때문에 힘들길 바라는 마음이.
힘내자.
유은우는 발딱 일어났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는,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야.
유리함에 단검을 도로 넣었다. 다시 한번 주위를 훑어보았다. 무시무시하게 버티고 선 가시 돋친 곤봉들 사이에 얇지만 단단한 방패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유은우는 그것을 집어다가 수레 위에 지붕처럼 얹었다. 아슬아슬하게 쌓은 무기들이 쏟아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수레를 밀며 나왔다. 문을 발로 차서 열고, 발로 차서 닫았다. 아까 들어올 때 때려 부순 잠금장치가 덜렁거렸다.
수레를 돌돌돌 밀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왼손으로 어설프게 밀다 보니, 중간에 몇 번 수레를 쏟을 뻔했다. 오전에 정윤환과 나란히 재활을 받았음에도, 아직 오른손을 자유자재로 쓰기 어려웠다. 오히려 잘되었다고 긍정적으로 여기기로 했다. 왼손만으로 바짝 훈련할 기회라고. 유은우는 김서혁에게 시계의 주도권을 빼앗겼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했다. 다시 한번 김서혁과 마주한다면 그때는…….
“유은우.”
누군가 불쑥 앞을 막아섰다. 유은우는 반사적으로 다친 오른손을 움직여 수레 위로 비죽 튀어나온 검 손잡이를 움켜쥐려 했다. 그러나 휴대용 치료기를 부착해 둔해진 오른손은 수레 모서리에 부딪히는 데 그쳤다. 선연한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 말이야. 재희 선배랑 정윤환이랑 같이 기념 연회 갔다고 알고 있는데.”
낯선 남학생. 레몬색 배지. 2학년. 그의 뒤로 남학생과 여학생 다섯이 뒤섞여 서 있었다. 차고 있는 배지 색깔은 다양했으나, 낯은 똑같이 불안했다. 그들은 유은우와, 유은우가 잡고 있는 수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 1학년 남학생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수레 철망 사이로 번득이는 창끝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딱딱하게 묻고, 유은우는 곤두선 신경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냥 같은 학교 학생이야. 긴장하지 마. 쉽지 않았다. 새벽의 치열했던 피비린내가 아직도 코끝에 달라붙어 있었다. 사방이 온통 적 같았다. 그러나 다음 질문을 듣는 순간, 온몸의 긴장이 탁 풀려 버렸다.
“재희 선배 왜 안 와?”
어린 한마디가 신호탄이 되어, 옹기종기 모여 선 학생들이 일시에 울먹거렸다. 새벽에 내리던 비는 말끔히 개어 날이 이토록 화창한데, 갑자기 학생들 머리 위로 작은 먹구름이 뭉글뭉글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유은우는 왠지 코가 시큰했다. 다른 여학생이 물었다.
“유은우 너도 봤을 거 아냐.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 부모님은 빨리 학교에서 나오라고 난리야. 중립지대인지 뭔지 무법지대나 다름없다면서. 일반 도시연합법 적용이 안 된다며? 그게 사실이야? 나는 부모님께 무조건 학교 입장을 들어 보고 결정하겠다고 했어. 괜히 몸 사려서 나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가 성적에 불이익 받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데 부모님이 너무 걱정하셔서. 그냥 다 버리고 나오래. 나 어떻게 해야 해?”
유은우가 머뭇거리는 사이, 다른 남학생이 한 발짝 다가왔다.
“다른 사람 말은 못 믿겠어. 언론도 못 믿어. 재희 선배가 있었다면 분명히 우리한테 말을 해 줬을 텐데. 재희 선배 왜 안 와? 무슨 일 있는 거야? 자수했다는 건 또 무슨 소리고? 너 거기서 재희 선배 봤을 거 아냐.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야? 교장 선생님이 첨탑에 걸려 있었다던데, 그것도 사실이야? 또 뭐 이상한 거 없었어? 본 대로 다 말해 줘.”
보고 들은 것은 차고 넘쳤으나 입 밖으로 낼 만한 건 하나도 없었다. 유은우가 뭐라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자, 다른 학생들이 앞다투어 떠들었다.
“재희 선배가 교장 선생님을 죽였을 리가 없어. 분명히 어디서 모함받았을 거야. 누군가 뒤집어씌운 거라고.”
“맞아. 누명이야. 우리 아빤 서재희 소리 소문 없이 살해당할 거라고 했어. 명예욕이 하나도 없는데 재능만 있는 사람이 이용 안 당하고 여태 살아 있었던 것도 운이 좋은 거라고. 서재희 아끼던 교장도 죽었겠다, 누군가 교장을 죽이고 서재희한테 그 죄를 다 뒤집어씌우고 강제로 자수하게 시켰을 거야. 병원에 있는 부모님을 미끼로 그랬을지도 몰라.”
“재수 없는 소리 좀 그만해! 이정수, 너 진짜 나한테 죽고 싶어? 재희 선배가 네 친구야? 똑바로 안 불러?”
“아니, 난 그냥 아빠가…….”
“부모님 미끼는 아니었을걸. 재희 선배 부모님 기념식 당일에 이미 돌아가셨대. 병실 뺐다더라고.”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유은우는 학생들에게 지난 새벽 자신이 겪었던 혼란을 전부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무언가 안심할 수 있는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재희라면 이런 상황에서 뭐라고 했을까. 뇌를 바닥까지 긁어 보았지만 아까 전시관에서 들이마신 먼지만 뭉텅이로 나왔다. 유은우가 말을 뱉지 못하자, 여학생 하나가 급기야 두 손을 뻗어 유은우의 환자복 소매를 잡았다.
“지금 다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재희 선배만 기다리고 있어. 다른 임원들도 마찬가지고. 재희 선배 소식 모르면, 예원 선배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예원 선배도 전혀…….”
“나 여기 있어.”
학생들이 파드닥 놀라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뭐가 궁금하니? 물어봐.”
차예원이었다. 유은우는 무의식적으로 그녀가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빠르게 훑어 내렸다. 차예원은 평소와 같았다. 딱 달라붙은 교복 위로 얇은 코트를 걸치고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다만 평소 올려 묶던 긴 머리가 부드럽게 풀어져 가슴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낯이 차가웠다.
다들 놀라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가운데, 누군가 황급히 물었다.
“선배, 재희 선배는…….”
“뉴스 안 보고 사니? 자수했어. 도시연합 중앙수사부에 있겠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한 시간 뒤에 진술 생방송하는 거 보렴. 도시연합 중앙학교장 살해 용의자니, 모든 진술을 시민 앞에서 할 의무가 있어.”
“……중립지대는 뭔가요? 지금 우리 학교를 둘러싼 이 파란 장막…….”
“법 안 찾아봤니? 동조자 진흥법 거기에 다 나와 있잖아?”
“……제가 해석하기로는 중립지대란 동조자 자치구역처럼 느껴지는데, 그럼 현재 우리는 도시연합법에 반하는 그 어떤 법도 제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현재는 무법지대라고 봐도 무방한가요?”
“학교가 중립지대로 설정되면서 이 안에서 새로이 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은 교장으로 지정되었고, 교장이 사망했으니 그 권한은 우리 학생회 및 파견부 임원들이 나눠 가지고 있어. 중립지대라고 무에서 시작하는 건 아니야. 교장이 여태 도시연합법을 따르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우리도 현재의 도시연합법을 그대로 준수한다. 물론 바꿀 수도 있겠지. 권한을 가진 자가 전원 동의하면 법을 발의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불가능해. 왜냐면 권한을 가진 한 사람이 부족하니까. 재희가 여기 없잖아. 답이 됐니?”
“그럼 왜 우리는 밖으로 못 나가죠? 출입이 불가능하다는 법이 새로 만들어진 것도 아닌데.”
“왜 출입이 불가능해? 나 방금 내 발로 걸어서 들어왔어. 푸른 유리처럼 보여도 통과할 수 있어.”
“군인들이 지키고 있던데요. 나오지 말라는 뜻 아닌가요?”
“재학생이나 교직원처럼 현재 학교에 소속된 사람들은 출입에 아무 문제가 없어. 법적으로는. 하지만 군인이 눈치를 주고 있다면, 이유는 몰라도 알아서 몸 사려야겠지? 그리고 재희가 없어도 우리 임원은 최선을 다해 모든 일에 책임을 질 거야. 교직원보다 많은 혜택을 누린다는 소리도 듣는데 받은 만큼 일해야지.”
차예원이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학생들은 의문을 하나도 해소하지 못한 채 차예원의 쌀쌀한 분위기에 그만 자리를 떠 버렸다.
유은우는 차예원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불안해하는 학생들에게 그렇게 쏘아붙일 필요가 있냐고 묻고 싶었다. 어차피 남들 다 아는 얘기만 반복할 거라면. 그러나 입술을 꽉 문 차예원이 제 발끝만 내려다보다가 코끝이 빨개지고 이어서 눈물까지 그렁해지는 걸 보고 있자니, 차마 뭐라고 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학생들에게 이렇다 할 답을 하지 못한 건 유은우도 마찬가지였으니. 차예원이 그대로 가만히 서서 눈을 빠르게 깜박이는 동안, 유은우는 모른 척 바닥에 깔린 돌의 무늬를 세었다. 이내 차예원이 말했다.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궁지에 몰린 것 같아. 재희 때문에.”
뜸을 들인 후, 차예원이 말했다.
“아버지가 학교로 돌아가지 말라고 했어. 위험하다고. 서재희가 김서혁의 눈을 피하려고 딱 서너 시간만 날 이용하고 바로 배신한 것 같다고 하셨어. 어쩌면 단순히 김서혁에게 도시연합장의 권력 일부를 빼앗기는 게 아니라, 더 큰일이 닥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고.”
유은우는 물끄러미 차예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교복 차림이었다. 까만 넥타이에 작은 배지까지 갖춘. 유은우는 그녀에게 왜 학교로 돌아왔냐고 묻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답은 뻔했으니. 다른 질문을 했다.
“통신이 중간에 끊어졌어요.”
“재희가 끊으라고 했어. 끊고 도망치라고. 재희가 사람을 조금만 늦게 보냈어도, 나 죽었을 거야.”
차예원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럼 재희 선배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라요?”
“응. 몰라.”
차예원이 유은우를 빤히 응시했다. 묘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덧붙였다.
“난 네가 알 줄 알았는데.”
유은우는 고개를 저었다. 차예원이 유은우가 쥔 수레를 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그게 다 뭐야?”
“시계를 잃어버렸어요. 새 무기를 찾아야 해서. 예전이야 몸 사리느라 눈에 안 띄는 시계나 차고 다녔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요. 이렇게 된 마당에 다 시험해 보려고.”
“전시관은 우리 학생회 소관인데 어떻게 들어간 거야?”
“부수고 들어갔는데. 낡아 빠져서 쉽던데요.”
“태연하게도 말한다. 너 재희 없다고 그렇게 행동해도 돼?”
“서재희 선배 있어도 이렇게 행동할 건데요. 어차피 이런 고철 덩어리 신경도 안 쓰면서. 있는 줄도 몰랐던 거 아니에요?”
유은우는 수레를 밀었다. 가득 실린 무기들이 덜컹거렸다. 차예원은 한 발짝 물러났다가 옆으로 빙 돌아서 다시 유은우의 옆으로 왔다. 유은우는 그녀를 무시하고 수레의 균형을 유지하며 타박타박 걸었다. 차예원은 팔짱을 끼고 아무렇지 않은 척 유은우의 뒤를 따라왔다. 이상할 정도로 텅 빈 교정을 둘러보며 그녀가 작게 물었다.
“윤환이는?”
“오전에 저랑 같이 재활 받았어요. 지금은 자고 있을 것 같은데. 총이 부서졌어요. 그래서 새 총을 구해야 하는데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라, 이따가 모의 전투실 가서 남는 총 잡아 본다고 했어요.”
“총이 부서졌어? 침식된 거 아니야?”
“침식 초기래요. 부작용 감수해야 한다고.”
“은우 네가 너무 멀쩡해서 이상하다 했더니, 윤환이가 네 몫까지 다쳤구나.”
맞는 말이라 유은우는 반박할 수 없었다. 유은우가 시계만 잃지 않았어도 정윤환이 그렇게까지 무리하지는 않았을 텐데.
“지금 학교 상황은 어때?”
“살얼음판이에요. 아까 병원밥 안 먹고 일부러 학생 식당에서 먹으면서 분위기 좀 봤는데, 다들 불안한 눈치예요. 근데 진짜 웃긴 게 뭔지 알아요? 교수들. 다 도망갔어요. 새벽에 중립지대로 지정되자마자 전부 다 빠져나갔는지 교수동이 텅텅 비었대요. 이런 상황에 의사들까지 싹 다 도망가 버렸으면 진짜 큰일이었을 텐데, 그 사람들 정보가 늦었던 걸 다행으로 알아야 하는 건지.”
차예원은 사색이 되었다.
“교수님이 한 명도 없어?”
“한 명은 안 가고 남았다던데요. 황종길 교수님.”
차예원이 이마를 짚었다.
“알 만하다.”
유은우도 그의 수업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도시의 역사. 의도치는 않았지만, 정윤환과 함께 들었었다. 그때 교수는 온디딤을 언급했었고, 서재희는 총과 온디딤의 차이점을 가르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고 말했었다. 남들 다 체면이고 뭐고 버려두고 떠나간 마당에 홀로 남아 정해진 시간에 맞춰 강의까지 계속한다는 걸 보면 황종길도 보통 사람은 아닌 게 분명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학생들이 그래도 재희 선배 얘기는 들어 보고 움직이자면서, 단 한 사람도 이탈 없이 머무는 게 믿기지 않아요.”
“애들이 재희 믿는 것도 있고, 괜히 혼자 튀는 행동 했다가 불이익 받을까 두려운 것도 있고. 학교 밖으로 무단 외출해 버리면 출석 일수가 모자라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
둘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푸르스름한 장막을 통해 바라보는 구름은 연하게 푸릇했다.
“은우 너는…….”
차예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은우 너는 재희가 무슨 생각인 것 같아?”
차예원은 조심스레 질문을 뱉고 입술을 짓씹었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유은우는 차예원을 빤히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기어코 유은우의 시선을 피했다. 유은우가 차예원에게 한눈을 판 사이 수레가 비틀거렸다. 위험한 무기들이 막 쏟아지기 직전에, 차예원이 얼른 손을 뻗어 수레 모서리를 잡아 지탱했다. 유은우가 균형을 잡고 나서도, 차예원은 수레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둘은 어색하게, 그러나 안정적으로 수레를 같이 밀면서 아무도 없는 교정을 가로질렀다. 바퀴에서 부드럽게 돌돌돌 소리가 났다.
“재희는 부모님이 돌아가시자마자 우리 아빠하고 약속했어. 자신을 낙원의 이론 후보로 강력히 밀어준다면, 그 대가로 임유현을 제거해 주겠다고. 거기다 13위원 명단을 우리 아빠 입맛대로 전부 물갈이하겠다고 장담했어. 우리 아빠는 그동안 재희의 모호한 태도에 몹시 화가 나 있었지만, 별 기대 없이 수락했어. 재희가 그 모든 것을 해낼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낙원의 이론 후보로 미는 것에 손해는 없었으니 알겠다고 한 거지. 밑져야 본전이었던 거야. 그런데 재희는 임유현을 죽이는 데 성공했어. 하지만 그런 퍼포먼스는 미리 상의된 부분이 아니야. 누구 좋으라고 그렇게 대놓고 전시했는지. 분명 몰래 죽이겠다고 했는데. 거기다 위원회 물갈이는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어. 학교로 복귀하는 문제로 아빠랑 싸우느라 물어보지도 못했어.”
“자수한다는 계획도 들어 있었어요?”
“없었지. 왜 갑자기 노선을 틀었는지 모르겠어. 재희가 자수하면 우리 아빠가 필연적으로 다쳐. 누가 봐도 임유현을 살해할 만한 동기가 가장 강한 사람은 우리 아빠야. 임유현이 우리 아빠를 배신하고 김서혁에게 붙기가 무섭게 살해당했으니. 거기다 재희가 여태 쌓아 놓은 이미지가 너무 견고해. 아까 애들 봤지? 재희가 누굴 죽일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는 거. 자수했다는데도. 모든 시민이 재희는 결백하다고 생각할 거야. 분명 배경이 있을 거라고.”
“……애들이 강당에 대책본부 비슷한 걸 차렸어요. 사방에서 말이 다 다르니까. 언론 보도. 부모님에게서 걸려오는 전화. 그리고 지금 실제로 학생들이 겪는 상황. 일치하지 않으니까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인과를 밝혀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자는 취지예요. 학생회랑 파견부가 주축이 되어서 적극 협조해 달라고 다른 학생들을 설득하더라고요. 식당에서.”
차예원은 수레를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
“그래야지. 그게 우리 임원들 역할이야. 나도 가야겠어. 너도 모의 전투실은 그만두고 나랑 같이 가자.”
유은우는 차예원의 도움을 받아 본관 입구 옆 자전거 보관소에 수레를 세워 두었다.
본관 2층에 위치한 학생 강당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전교생이 거의 다 모여 있었다. 1층 학생 휴게실에서 끌어왔는지 책상과 의자도 가득 널려 있었고, 몇몇은 창턱에 걸터앉아 다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거대한 스크린에선 뉴스가 한창이었다. 다른 한쪽 벽면엔 전자 칠판이 붙어 있었다. 학생회와 파견부 임원 몇이 소매를 둘둘 걷어붙이고 의자에 올라서서 열정적으로 전자 칠판을 채우고 있었다. 학생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으나 소란하지는 않았다. 아나운서의 멘트와 전자 칠판에 펜을 갈기는 소리를 제하면, 온통 불길한 적막뿐이었다.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2학년 설계부 박수정입니다! 방금 저희 아버지하고 연락이 닿았어요. 의식이 돌아오셨다고. 아버지께서 본 바로는 임유현 교장 선생님 사체를 직접 목격하지는 못하고 영상으로 접했다고 합니다. 영상이라면, 조작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당 드문드문 웅성거림이 일었다. 김산이 손뼉을 치자 다시 조용해졌다. 김산 옆에 서 있던 학생회 소속 고세민이 물었다.
“몇 시에 목격하셨대?”
박수정이 대답했다.
“11시쯤? 2부 시작하기 전이요.”
고세민이 펜을 들더니 전자칠판에 ‘영상’이라고 덧붙여 썼다. 그러더니 그가 학생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도시연합 발표랑 일치하긴 하네. 그런데 왜 도시연합에서는 영상을 공개할 수 없다고 하는 거지? 원본이 소실되었다고…….”
순식간에 강당이 소란해졌다.
“거짓말인가?”
“교장 선생님 사실 납치 감금되신 거 아냐?”
“도시연합에서 사망이라고 발표했잖아. 영상이 없는 것뿐이지, 시신은 중앙병원에 안치되셨다니까.”
김산이 무뚝뚝하게 다시 손뼉을 치더니 말했다.
“모두 조용히 해! 교장 선생님의 생존 가능성은 없어. 아까 내가 말했잖아. 우리 이모가 중앙병원에서 일하신다고. 교장 선생님 시신 들어온 거 확인하셨다고 했어. 새벽에…….”
차예원은 성큼성큼 입구로 들어섰다. 학생들은 금방 그녀를 알아보았다. 모두 반색하며 손을 번쩍 들었다.
“예원 선배 왔다!”
“선배!”
“야, 좀 비켜 줘. 선배, 이쪽으로 지나가세요!”
“다행이다. 선배 안 다쳤어…….”
“예원 선배, 재희 선배는 어디……. 야, 저기 유은우 아냐?”
“유은우도 거기 갔었지 않아?”
“어. 쟤 새벽에 정윤환이랑 같이 들어왔대.”
차예원은 학생들이 길을 터 주는 대로 몇 걸음 걷다가, 뒤돌아 유은우를 보고 손짓했다. 유은우가 귀를 가까이 대자, 차예원이 속삭였다. ‘일단 넌 앞에 나서지 마. 어차피 말할 만한 것도 없잖아.’ 빠르게 속삭이고는 툭 밀었다. 유은우는 얼결에 넘어질 뻔하다가 책상을 짚고 멈춰 섰다. 손 밑에서 종이 구겨지는 느낌이 났다.
“아, 미안…….”
손을 떼며 급히 사과했다. 종이에 무언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연필로 아름답게 스케치한 용이었다.
“어? 은우, 오랜만이네. 너 살아 돌아왔구나. 그 난리 통에……. 넌 교복보다 환자복을 더 자주 입는 것 같다? 많이 다쳤니?”
손도연이었다. 그녀는 동그란 안경 너머로 유은우를 바라보더니 유은우의 손을 밀고 구겨진 종이를 가져가서 조심조심 펴기 시작했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유은우에게 이것저것 묻고 싶으나, 방금 차예원이 유은우를 감싸는 듯한 분위기에, 섣불리 말을 걸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사위가 조용했다. 유은우가 어찌할 바 모르는 사이, 손도연이 옆 의자에 놓여 있던 큼지막한 가방을 번쩍 들어 올렸다.
“여기 앉아.”
“고마워.”
손도연은 이프로 용 동영상을 띄워 놓고 그것을 그림으로 옮기고 있었다. 갑자기 학교가 중립지대로 설정되는 바람에 혼란한 다른 학생들과 달리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유은우는 의자에 앉은 채 몸을 돌려 차예원을 찾았다. 그녀는 어느새 저만치 앞으로 걸어가, 학생 임원들에게 무언가를 전해 듣고 있었다. 유은우는 전자 칠판을 찬찬히 살폈다.
<사망자 명단 : 3/23 14:30 현재>
조승일, 박경훈, 문화영, 류정아, 안재호, 노민영, 신해경, 강진욱, 이금하…….
<시간대별 상황>
19:00~23:00
- 도시연합 133주년 기념 연회(생방송)
23:05
- 정전. 생방송 중단. 임유현 사망 추정(영상). 통신 불안정으로 연회에 참석한 가족들과 연락 두절(다수 학생 증언 및 당시 통화 녹음)
01:30
- 반란군 도시연합 본부 침입 및 테러로 인한 도시연합 전 시민 비상경계명령(속보)
-임유현 사망 및 제1도시 중앙병원 안치(속보)
03:20
- 중립지대 설정(새벽에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 다수 목격 후 임원에게 신고)
04:00
- 교수 34인 중 33인 부재 확인(파견부 김산)
- 최현 교수가 캐리어를 끌고 4호관을 지남(3학년 김수영 외 다수)
- 구인영 교수가 실험실 학생을 급히 호출하여 짐을 꾸리는 것을 도와 달라고 함(4학년 하정인)
- 교장의 사망만으로는 임용이 해제되지 않기 때문에, 교장의 권한을 승계받은 임원들의 특별한 의견이 있기 전까지 정상 강의할 예정(황종길 교수)
05:00
- 유은우, 정윤환 학교 도착(파견부 연다희, 파견부 김산)
06:30
- 관리 직원 5인 행방 묘연 및 연락 두절. 급히 짐을 꾸린 흔적 남아 있음(관리부장)
08:20
- 서재희가 파견부에 부탁한 우편물 특급 발송. 내용물 모름. 각 0.5kg 내외. 82개. 재학생 및 졸업생 본가로 발송(파견부 연다희)
09:40
- 서재희, 임유현 살해 자수(속보)
10:10
- 군대 주둔. 관련 언론 보도 없음. 5학년 졸업반이 시험 삼아 단체로 외출을 시도하였으나 군인에게 가로막혀 실패. 무력 진압 없음. 중립지대이므로 혼란을 막기 위해 군을 투입했다는 답변만 들음. 증거 확보를 위해 학생부에서 촬영용 드론을 띄웠으나 군에 의해 파손(임원 및 학생 다수)
11:00
- 도시연합 중앙수사부, 서재희 진술 대국민 공개 결정(속보)
11:10
- 도시연합 정예군, 백정명 전 의원을 임유현 살해 유력 용의자로 체포하였으나, 백정명 의식 불명(속보)
- 도시연합장, 정황상 임유현 살해 용의자에 백정명도 포함되므로, 서재희 단독 진술 공개 불허(속보)
13:00
- 도시연합 중앙수사부, 도시연합 특별 범죄에 대한 처분의 기준과 절차에 관한 규칙에 근거하여, 도시연합장 불허와 관계없이 서재희 진술 공개 확정 및 시간 예고(속보)
15:00
- 서재희 진술 생방송 예정
유은우는 문득 불편한 시선을 느꼈다. 옆에서 누군가 유은우를 곁눈질하더니 손도연의 어깨를 툭 쳤다. 굳이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았다.
“야, 손도연. 쟤 뭐야? 친해? 왜 앉으라고 해? 저리 가라 그래. 지금 얼마나 흉흉한 소문이 도는데. 쟤가 막 사람 죽이고 다녔다는…….”
손도연이 용의 날개를 색칠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유은우 내 친구야.”
동영상을 정지시키고 용의 콧구멍을 확대한 후에 비늘의 개수를 세는 손도연을 보고 있자니, 한세연에게 받았던 사인이 떠올랐다. 손도연에게 전해 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걸. 사인을 받은 리본으로 머리를 묶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진득하게 피가 묻는 바람에 그냥 버린 것이 못내 아쉬웠다. 소중하게 가지고 있다가 주었으면 좋아했을 텐데.
유은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도연에게 속삭였다.
“나 어제 연회에서 한세연 연구관님 뵈었는데, 그분이 네 이름을 기억하더라. 이번 공모전에서 글이랑 그림이 인상 깊었대.”
“뭐? 진짜?”
손도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이 환하게 빛났다. 그녀는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으나 가슴이 벅차서 말도 잇지 못하는 것 같았다.
“따뜻해서 좋았대. 심사 기준에 안 맞아서 상은 줄 수 없었지만, 따로 액자에 넣어서 가까이 두고 보고 있대.”
“그렇구나. 기준에 안 맞았구나. 그럴 것 같았어. 그림 크기가 규격보다 좀 크긴 했거든. 줄여서 보낸다는 걸 깜박했어. 그럼 내 실력이 모자란 건 아니었구나. 아, 물론 규격을 맞췄다고 해서 내가 상을 받을 거라는 말은 아니고.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되게 열심히 그렸거든. 작문도 며칠에 걸쳐서 수정하고…….”
손도연은 뺨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횡설수설했다. 어디선가 진동이 울렸다. 손도연이 교복 재킷 주머니를 더듬더니 인터컴을 꺼냈다.
“여보세요? 엄마? 왜 울어? 뭐라고? ……잘 안 들려.”
손도연이 당황한 기색으로 인터컴을 고쳐 끼웠다.
곧 강당 이곳저곳에서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너도나도 전화를 받고, 놀라고, 되묻고, 또 되물었다. 웅성거림은 서서히 불어났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차예원을 비롯한 임원들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전화를 받는 학생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유은우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자꾸만 가슴이 뛰었다. 귀로는 손도연의 통화를 들었다.
“집에 뭐가 왔다고? 언니? 무섭게 왜 그래. 언닌 죽었잖아……. 뭐? 유리병?”
손도연이 눈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머리카락?”
◆
“머리카락?”
손도연은 그 후로 한참 말이 없었다. 그녀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내리깐 눈은 초점이 흩어져, 그리다 만 용을 보고 있는지, 그 너머 먼 곳을 보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내 손도연이 눈을 감았다. 그녀는 힘없이 팔꿈치를 세운 후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어깨가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충격을 받은 건 손도연만이 아니었다. 전화를 받은 많은 학생이 덜덜 떨며 웅크리거나 정신없이 숨을 몰아쉬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는 주위의 걱정에도, 그들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무슨 일이야? 지금 전화 받은 학생들 설명 좀 해 봐. 보아하니 재희가 보낸 우편물 때문인 것 같은데.”
보다 못한 김산이 나섰다. 그러다 흠칫 몸을 굳혔다. 김산이 천천히 홀스터에서 인터컴을 뽑았다. 진동이 웅웅 울리고 있었다. 그가 사색이 되어, 바로 옆에 선 차예원을 돌아보았다. 차예원은 희게 질린 낯으로 김산의 인터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도망치려는 듯 주춤 몸을 물리다가, 이내 눈빛을 단단히 하고 바로 섰다. 김산은 다시 제 인터컴을 내려다보고, 이번엔 전자 칠판 앞에 펜을 들고 서 있는 연다희를 돌아보았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집 주소도 있었어?”
연다희는 완전히 겁에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모, 모르겠어. 워낙 많아서. 일일이 대조하진 않았어. 개수만 맞는지 확인했어. 재희 선배가 이미 우편물에 주소를 다 적어 두어서.”
“……그래.”
김산은 더 지체 않고 전화를 받았다.
유은우는 가만히 손도연의 등을 어루만졌다.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돼?”
손도연은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대답이 희미해, 유은우는 더욱 숨을 죽여야 했다.
“집에 우편물이, 유리병에 머리카락이 담겨서 왔대. 병에 우리 언니 이름이 쓰여 있고. 그리고 편지도 같이 왔다는데. 재희 선배 이름으로.”
가슴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유은우는 가빠지는 숨을 누르려 애썼다.
병원. 차가운 소독약 냄새. 303호. 물 떨어지는 소리. 선반에 줄지어 있던 유리병. 뿌리까지 뽑혀 있던 혀. 손가락. 머리카락. 눈알. 토막난 장기. 묵직한 수증기와 섞여들던 서늘한 밤바람. 서재희의 까맣게 젖은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하얀 수건. 바투 깎은 손톱 밑엔 핏기가 서려 있었다. 그 불그스레한 기억 속에서, 백일서의 혀가 든 유리병이 다시 한번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내가 전에 은우 너한테 말한 적 있지? 실력자로만 구성된 전도유망한 팀이 사해로 파견 나갔다가 정윤환만 빼고 다 죽어 버렸다고. 우리 언니도 그중 한 사람이었어. 시체도 못 찾았어. 그랬는데.”
손도연이 손바닥으로 눈을 문질렀다. 미처 닦이지 못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손도연이 중얼거렸다.
“나도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편지에 뭐라고 쓰여 있었대?”
“엄마가 우시느라 말을 잘 못 하셔.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 주시겠대.”
손도연이 간신히 대답하자마자, 그녀의 손목에서 이프가 웅웅 울렸다. 손도연이 유은우의 소매를 꾹 잡아당겼다. 눈이 떨리고 있었다.
“무서워서 못 보겠어. 네가 좀 봐 줘.”
유은우는 손도연이 밀어주는 창을 받아 끌어왔다. 이상하게도, 사진은 바로 뜨지 않았다. 먼저 절반이 떠오르고, 남은 절반은 조각조각 느릿하게 떠올랐다.
왜 이렇게 느리지?
유은우는 초조하게 화면을 만지작거렸다. 손아귀로 땀이 찼다.
고화질 동영상도 아니고 고작 사진인데. 학생들이 강당에 한꺼번에 모여 있어서 그런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유은우는 일단 전송된 편지 반쪽만이라도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동안 편지는 천천히 완성되었다.
고 손주연의 부모님께.
안녕하십니까.
도시연합 중앙학교 파견부장 5학년 서재희입니다.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려야 마땅하나, 사태가 긴급하여 부득이 편지글로 인사드리게 되어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파견부장으로 학생들의 어려움을 살피는 데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너무나 부족한 탓에, 학교에서 자행되는 일련의 잦은 사건 사고에 대한 내막을 지금에서야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부주의로, 이 끔찍한 시스템이 교내 깊숙한 곳에서 조용히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학생이 희생되어 깊은 책임을 통감합니다. 고개 숙여 사죄드립니다.
오랜 고민 끝에, 제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하고, 손주연의 사망에 대하여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아래와 같이 알려 드립니다.
도시연합은 낙원의 이론을 이용하여 시민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항간에 떠도는 예언과 동일한 명칭이라 혼동되시겠지만, 그것과 다릅니다. 낙원의 이론이란 오랜 시간 동안 인류의 행동양식과 유전자 등을 축적한 방대한 데이터입니다. 사용자가 원하는 기준을 제시하면 그에 따른 결과물을 도출해 내는 시스템으로, 그 존재가 시민들에게 철저히 은폐되어 왔습니다.
낙원의 이론은 제국시대 때 고안되었으며 실제 공공의 목적으로 활용되기도 하였으나 비도덕적인 부작용을 우려해 취급이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도시가 건설되고 그 안으로 들여보낼 인간을 선별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정부는 낙원의 이론을 비밀리에 도입하였습니다. 그 후 여덟 도시의 최초 연합부터 근 40년에 이르는 도시연합 제1기 동안, 낙원의 이론은 제한된 도시 내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난 동조자를 관리하는 데에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잠재적 범죄자를 가려내어 집중적으로 추적 감시하고,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며 적법한 격리를 가했습니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 낙원의 이론은 기득권을 유지하는 도구로 변질되었습니다. 낙원의 이론 잣대는 도시연합 중앙학교 학생들에게 특히 엄격합니다. 그 실력이 객관적으로 입증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등교육의 혜택까지 받은 동조자이므로 차후 기득권을 위협할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입니다. 낙원의 이론은 유능한 동조자를 소수만 남겨 두고 싶어 합니다. 기득권이 대중의 우둔함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손주연은 그 피해자 중 한 명입니다.
그녀는 시대에 깨어 있었던 유망한 인재였기에, 기득권의 경계를 받아 살해되었습니다.
손주연은 입학 당시 평균에 미달하는 동조율을 가지고도 상당한 집중력으로 정확한 조준에 능하여, 저의 제안으로 한팀으로 뛴 적도 있습니다. 당시 저는 눈치채지 못하였으나, 팀 내에서 도시연합의 비리를 추적하자는 일종의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오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학생들은 제가 임유현 교장 선생님을 후원자로 두고 있던 탓에, 차마 저에게까지 의논하지는 못하고, 당시 1학년이었던 정윤환을 주축으로 움직였습니다.
도시연합은 제국시대 때 중앙 산업단지가 대규모로 폭발하면서 유해 물질이 흘러나와 온이 오염되고 사해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학생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도시연합의 주장에 의하면 최초 오염 발생지인 산단 근처로 접근할수록 온의 오염도가 증가해야 합니다. 그러나 도시연합은 산단의 정확한 위치를 공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학생들은 도시연합에서 산단을 은폐하는 까닭이, 과거 사해화가 시작된 진짜 이유를 숨기는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또한 도시연합에서 제작 배포한 사해 지도에 표기된 온 오염도 평균 수치와 실제 오염 수치가 유독 제7유적지에서 상당 부분 불일치한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제7유적지 근처 1급 보안지역이 바로 과거 제국시대의 산단일 거라고 추측하였습니다. 그들은 제게 지침을 변경해서라도 전례 없는 대규모 파견팀을 꾸려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저는 당시 이 내막을 알지 못한 채 교육을 목적으로 그 요청을 수락하였습니다. 그들은 파견을 나가 일부러 낙오한 뒤 제7유적지부터 보안지역 경계까지 일직선으로 달리면서 오염도 수치를 직접 측정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게 도시연합이 온 오염도를 거짓 표기했다는 증거를 확보하여, 비리를 파헤칠 최초의 단서로 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밀고와 최악의 기상으로 학생들의 계획은 무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리더였던 정윤환을 제외한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학교 측은 사망 지점을 레이더에 표시해 두었다가, 후에 기상이 안정된 후에 비밀리에 나가 그 시체를 수습해 왔으나 유가족에게는 그 사실을 숨겼습니다. 그래서 시신 없이 장례를 치르셨을 겁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나, 현재 3학년에 재학 중인 정윤환은 당시 사고를 막으려고 고군분투했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그의 총을 미리 망가뜨려 놓는 바람에 혼자 겨우 살아남아 돌아왔습니다. 그는 후에 부모님을 미끼로 도시연합의 협박을 받았습니다. 타고난 설계 실력을 도시연합의 발전에 기여하겠다고 약조하고 낙원의 이론을 들쑤시지 않고 조용히 살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따라서 행동반경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만, 그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낙원의 이론을 폭로하기 위한 증거를 모으고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이 편지를 받아 보시는 지금 저는 아마 학교에 없을 겁니다. 어쩌면 시스템 오류라는 명목으로, 학교 전체가 중립지대로 지정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저는 학생들을 전부 본가로 돌려보낼 계획입니다만, 제 역량이 부족하여 여의치 않다면 현재 학생들은 중립지대에 갇히는 형국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런 상황이더라도, 정윤환이 학교에 있을 겁니다. 항간에 떠도는, 정윤환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들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는 몇 번이나 낙원의 이론에 정면으로 맞선 정의로운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설계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탁월한 동조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김서혁 총사령관의 전리품으로 등록된 1학년 유은우와 서로 각별한 사이입니다. 유은우 또한 낙원의 이론 때문에 시민권조차 받지 못하고 기득권의 도구로 부려지는 피해자로, 정윤환과 함께 낙원의 이론을 폭로하기 위해 제 몸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아버지를 등질 만큼 학생에 대한 책임감이 투철한 차예원을 비롯, 우수한 임원들이 있습니다. 더불어 똑똑하고 정의로운 학생들이 모여 역사 연구 모임이라는 미명 아래 도시연합이 자행한 역사 왜곡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손주연 학생 같은 피해자가 더는 발생하지 않도록, 부디 그들에게 힘을 실어 주십시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또한, 유가족분들이 받을 충격이 염려되어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만, 손주연의 시신 일부를 함께 보내드립니다.
결코 동의하신 적 없으시겠지만, 도시연합은 동조자의 사체를 귀중한 자원으로 활용합니다. 도시연합 중앙학교 및 군의 큰 자랑거리인 모의 전투 시스템을 아실 겁니다. 물리적으로 한정된 공간을 팽창시켜 실제와 같은 현장감을 부여하는 그 경이로운 시스템을 원활하게 운용하기 위해서는 아주 강력한 매개가 필요합니다. 도덕적으로 충분히 납득 가능한 여러 연료 또한 사용 가능합니다만, 역시 비용 면에서 가장 효율적인 재료는 동조자의 신체입니다. 작년 하반기의 경우 동조자 사체 서른아홉 구만으로 도시연합 중앙학교 및 군의 시설비가 78% 가까이 절감되었습니다.
학교 측은 낙원의 이론을 빙자한 기득권의 견제와 알력으로 학생들의 생사를 결정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죄 없는 학생들을 살해하고 사고사로 가장했습니다. 그 시신을 집으로 돌려보내면 부검을 통해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질 수 있으므로 침식되었다고 거짓말하고는, 활용이 쉽도록 전처리하여 교내 깊숙이 비밀리에 보관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연료로 사용해 온 일련의 과정은 비단 최근 한두 해에만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물론 사해에서 사망한 학생들의 시신을 수습해 오는 것도 학교 측의 중요한 수입원입니다. 개교 이래, 학교 밖으로 온전히 빠져나간 시신은 단 한 구도 없었으며, 죽은 자녀를 돌려받았다는 학부모의 사례 또한 전무합니다.
이 모든 사실에 대한 근거 자료를 메모리에 담아 동봉합니다.
파견부장으로 학생들의 안위를 살피지 못한 데에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깊이 사죄드립니다. 저는 이 모든 참사를 막지 못한 책임에 대하여 그 어떤 벌이든 마땅히 치르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서재희 드림.
“……뭐라고 쓰여 있어?”
손도연의 질문은 먼 곳에서 들리는 듯 아득했다. 속이 뒤집어졌다. 유은우는 배를 꽉 움켜쥐며 몸을 말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어디 아파? 괜찮아?”
유은우는 손도연이 자신의 어깨를 다급히 흔드는 것을 느꼈으나,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어지러웠다. 윙윙거리는 이명 사이로, 소란이 들렸다.
“어?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빠? ……뭐지? 전화가 끊어졌어.”
“다시 걸어 봐.”
“안 걸어져. 왜 이러지? 인터컴 좀 빌려 줘.”
“나도 안 된다.”
“메신저는?”
“안 돼. 아무것도. 아예 안 터져.”
“인터넷도 안 된다. 아까부터 느려지더니. 왜 이러지? 아, 잠깐만, 또 된다.”
유은우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손도연의 손목에서 이프가 한 차례 부웅 진동했다. 동영상 수신 창이 떴다. 손도연이 수락 버튼을 눌렀으나 갑자기 화면이 까맣게 변하며 안내창이 떴다. 수신 불가.
쿠웅! 현란한 배경음악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살갗 위로 공기가 진동했다. 스크린이 휘황찬란했다. 도시연합의 상징이 스크린을 짙푸르게 가득 채우고 있었다. 웅장한 영상과 효과음이 강당을 압도했다.
누군가 볼륨을 더욱 높였고, 학생들은 숨을 더욱 죽였다. 전교생 대부분이 빽빽하게 모인 강당에서 이제 누구 하나 말하는 이 없었다.
― 안녕하십니까, 여덟 도시 시민 여러분. 도시연합 중앙수사부장 박선호입니다. 지난밤 일어난 테러로 임유현 도시연합 중앙학교장을 포함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도시연합의 중앙 제어 시스템 기능 일부가 마비되었습니다. 현재 가장 큰 문제는 시스템 오작동으로 인한 도시연합 중앙학교의 중립지대 설정입니다. 많은 시민이 학생들의 안위를 우려하고 있으므로, 김서혁 총사령관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중립지대 경계선에 군을 배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학생회 및 파견부 등 학생 임원과 충분히 협의된 결과입니다. 학생들의 신상이 도시연합에서 중립지대로 이동한 상태에서 학교를 벗어나 본가로 돌아가게 되면 시민등록번호 등 고유 정보가 엉킬 수 있음이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혼란한 상황을 틈타 불미스러운 상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침착하게 학교에 남아 시스템이 복구되고 중립지대가 해제되기를 기다리…….
스크린이 지지직거렸다. 영상이 일그러지고 소리가 뭉개졌다.
유은우는 이프를 확인했다. 통신망이 불안정하게 깜박거리고 있었다.
쾅! 누군가 탁자를 내리쳤다. 한 여학생이 분개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옷깃에서 자주색 배지가 반짝거렸다. 5학년이었다.
“협의한 적 없었잖아! 우리가 모든 언론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강당의 온도가 삽시간에 치솟았다. 학생들이 곳곳에서 벌떡벌떡 일어섰다. 의자 다리가 거칠게 바닥을 긁고, 몇 개는 뒤로 넘어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군인들이 학교를 빙 둘러싼 이유가 정말로 저런 거였다면, 왜 진즉 말해 주지 않은 거야? 뒤늦게 핑계 대는 거 아냐?”
“이상하네. 설사 저 발표대로, 우리가 학교 밖으로 나가는 순간 신상 정보가 엉켜 버린다면, 그럼 교수님들 새벽에 다 도망간 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교수들이 앞을 내다본 거지. 신상 정보 꼬이든 말든, 최대한 빨리 여기서 벗어나는 게 이득이란 걸. 어쩌면 정보 어쩌고 저것도 다 거짓말인지도 몰라.”
“그냥 나가지 말라고 하면 되지. 왜 경찰이 아니고 군인인데? 쓸데없이 살벌하잖아.”
“불미스러운 상황? 무슨 불미스러운 상황? 대체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보호하겠단 뜻이야? 학교엔 그저 우리밖에 없는데…….”
“교수들 다 도망가고 우리끼리 모여 있으면 서로 살육이라도 저지르는 미개한 종족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야! 아까 나랑 같이 외출하려다가 군인한테 막혔던 5학년 다 일어나 봐! 너희도 봤지? 그 태도? 군이 지금 중립지대 경계를 못 넘어서 그 정도로 끝난 거지, 그놈들이 푸른 장막 뚫고 학교로 들어올 수만 있었으면 진즉 쳐들어와서 학교를 점령할 기세였던 거 다들 봤잖아!”
“대체 뭐지? 군에서 왜 우릴 감시하는 거지? 뭘 염려하는 건지 모르겠네. 왜 우리 학생들을…….”
“잠깐. 조용!”
김산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안색이 좋지 않았으나 침착하게 한 학생을 지목했다.
“너도 아까 전화받았었지? 의견 있으면 말해 봐.”
김산의 시선을 받은 남학생은 높이 들고 있던 손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선 남학생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엉망이었다. 사납게 들끓던 학생들이 차츰차츰 수그러들며 곧 조용해졌다. 남학생은 소매로 창백한 낯을 한번 문질렀다. 그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었으나 발음은 또렷했다.
“전화받은 애들은 대충 감이 잡힐 거야. 우리 학교 5학년 졸업반쯤 되면, 처음 입학생의 절반, 혹은 3분의 2까지도 줄어드는 거 다들 알지? 그만큼 파견 수업이 위험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굳이 파견이 아니더라도 교내에서 인명 사고가 빈번한 편이고. 우리 누나도 나 입학하기 전에 여기 학생이었어. 파견 나갔다가 죽었어. 흔한 일이지. 난 여태 사고라고 알고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었던 것 같아. 서재희는 편지에서 그것이 조작된 살해라고 주장해. 서재희가 근거 자료까지 첨부해서 발송했대. 우리 누나 이름이 붙은 유리병에 귀가 들어 있었고, 메모리엔 증거 동영상도 담겨 있대. 그 동영상 전달받으려고 했는데 통신이 불안정해서 수신이 안 돼. 어쨌든, 짐작해 보자면…….”
남학생이 눈을 들어 올렸다.
“……도시연합에서는 우리가 서재희에게 어떤 언질을 받고 폭동이라도 일으킬까 봐 겁이 나서 군을 파견한 것 같아. 만약의 사태가 일어나면 진압하려고. 그게 경찰이 아닌 군인인 이유야. 폭동이라는 단어가 적합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침묵이 감돌았다. 오직 스크린의 지지직거리는 소음뿐이었다. 그마저도 누군가 다급히 볼륨을 줄여 곧 조용해졌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운 가운데, 한 여학생이 손을 들었다.
“우린 그냥 학생이야. 나는 폭동 같은 거 휘말리고 싶지 않아. 난 그냥 다른 애들 아무도 집에 안 가기에 나만 가기도 좀 그래서 여기 남은 것뿐이야. 뭘 일으킬 생각 같은 건 없단 말이야. 아무리 재희 선배가 그런 걸 보냈다고 하더라도,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그냥 누군가 재희 선배 이름으로 보낸 가짜 귀일 수도 있고…….”
“재희 선배가 나한테 직접 부탁했어. 진짜야. 여기서 맹세할 수도 있어.”
연다희가 강하게 말했다. 옆에서 김산이 덧붙였다.
“귀가 진짠지 아닌지는 유전자 감식해 보면 금방 나오는 결과야. 재희가 며칠 만에 들킬 가짜 모형을, 그것도 82건이나 손수 포장해서 발송하는 수고를 하진 않았을 것 같네. 거기다 나도 전화받았어. 작년에 사망한 내 동생. 솔직히 말하자면…….”
김산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이내 그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 폭동, 지금 내가 일으키고 싶어.”
“폭동이든 시위든, 무언가 일으키기에 아주 최적의 조건인데요?”
학생회 소속 고세민이 말했다. 그는 연다희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등받이를 앞으로 해서 걸터앉아 있었다. 형형한 안광에, 초점이 어긋난 시선. 그는 반쯤 미친 것 같았다. 유은우는 고세민 바로 옆 바닥에 인터컴이 팽개쳐져 있는 걸 발견했다. 박살 나 있었다. 고세민이 씹어뱉듯 말했다.
“아주아주 조건이 좋아요. 왜냐하면 지금 우리 신상은 도시연합이 아닌 중립지대에 속해 있으니까. 우리 정보를 도시연합에서 수집도 못 하고 통제도 못 한다는 뜻이죠. 거기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학교 안에서 법도 새로 제정할 수 있어요. 물론 재희 선배가 중립지대 안으로 들어온다는 조건 하에. 그런데 난…….”
의자 등받이를 움켜쥔 고세민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면서 마디마디가 허옇게 질렸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이 상황이 마치 재희 선배가 판을 깔아 준 것처럼 보이는데? 타이밍이 기가 막히잖아. 물론, 하고 안 하고는 우리 선택이죠. 내 쌍둥이 동생도 죽었지만, 그게 뭐 대순가? 일단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입 닥치고 얌전히 있다가 도시연합에게 구출되든가, 아니면 우리끼리 뭐라도 해 보겠다고 지랄 발광하다가 빙 둘러싼 군인들한테 맞아 뒈지든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전자를 택해야 할 것 같단 말이야. 그런데…….”
고세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분이 너무 더러워서 도저히 가만히 못 있겠어. 동영상까지 보고 나니까 더욱.”
고세민의 충혈된 시선이 바닥을 더듬었다. 망가진 인터컴. 그 시선을 눈치채고 연다희가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우려고 했다. 그러나 고세민이 더 빨랐다.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거칠게 인터컴을 걷어찼다. 인터컴은 쌕 소리를 내며 바닥을 긁으며 날아가, 벽에 부딪히고 파편으로 흩어졌다.
유은우는 문득 오한을 느꼈다. 바로 옆에서 손도연이 숨을 들이켰다. 유은우는 손도연의 이프를 건너다보았다. 동영상 수신 여부를 묻는 창이 떠 있었다. 유은우는 제 이프를 보았다. 깜박거리던 통신망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스크린이 반짝 돌아왔다. 언제 그렇게 지지직거렸냐는 듯, 화면이 깨끗했다.
― ……중립지대 해제를 위해서는 법의 개정이 필요하나 현재 발의 권한을 가진 의원의 대다수가 사망한 상태입니다. 고로 도시연합 중앙학교장의 지위를 승계한 학생 임원 전원의 동의하에 중립지대의 해제가 가능한 상황에서, 파견부장 서재희가 우리 중앙수사부로 자진 출두하여 본인이 임유현 도시연합 중앙학교장을 살해하였다고 자수했습니다.
중앙수사부장 명패를 앞에 둔 박선호가 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 김서혁 도시연합군 총사령관은 서재희가 반란군일 가능성을 높이 보고, 중앙수사부에서 군으로의 인도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중앙수사법에 위배되는 사항입니다. 또한, 차인호 도시연합장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습니다. 첫째, 임유현의 시신을 훼손한 설계를 복구한 바 백정명의 서명이 나왔고, 그 이전의 살해 흔적에서는 서명이 휘발되어 복구가 불가하므로 서재희는 임유현의 사망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둘째, 임유현의 사망 시점에 서재희가 중앙홀에 다수의 의원과 같이 머물렀던 정황이 명료하다. 셋째, 후원자임과 동시에 유일한 보호자였던 임유현의 갑작스러운 사망이 서재희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도시연합에서는 이와 같은 근거로, 서재희가 공개 진술에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을 피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의원 과반수의 동의가 뒷받침되지 않은 도시연합장 개인의 의견은 효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중앙수사부에서는 도시연합 특별 범죄에 대한 처분의 기준과 절차에 관한 규칙에 근거하여, 서재희의 최초 진술을 다음과 같이 공개합니다. 다만,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정제되지 않은 진술이 시민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도록, 30분간 자유 진술 후, 청문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또한, 추후 서재희의 처분에 대한 모든 절차는 총 유효 시민의 투표에 근거함을 알려 드립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유은우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스크린에 비친 서재희는, 다소 지쳐 있었으나 언제나처럼 단정했다. 그는 깨끗하게 다려진 셔츠 차림이었다. 창백하게 반듯한 이마로 까만 머리칼이 흩어져 있었다. 그 아래 가지런한 눈썹. 차분한 눈매. 곧게 떨어지는 콧날. 다물려 있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아득하게 멀어졌던 모든 감각이 한 번에 밀어닥쳤다.
― 안녕하십니까. 서재희입니다.
낮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몇 마디뿐이었지만, 발음이 정확했고, 끝맺음이 확실했다. 늘 그랬듯이.
― 본인은 임유현을 살해했다고 자수하였습니다. 사실입니까?
박선호의 질문에 서재희가 담담히 대답했다.
― 사실입니다.
― 살해 정황에 대하여 30분간 자유 진술하십시오.
― 저는 학교에서 은폐하는 시스템, 낙원의 이론을 폭로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임유현 교장 선생님의 의견은 달랐습니다. 그분은 제가 그 모든 것들을 함구하길 바라셨습니다. 만약 제가 입을 연다면, 후원을 중지함은 물론이거니와 학교에서 퇴학시키겠다고 화를 내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을 믿었습니다. 차마 그렇게는 못 하실 거라고. 교장 선생님은 저의 오랜 후원자이며 동시에 하나뿐인 가족입니다. 고향이 폭격을 맞았을 때, 혼자가 된 저를 교장 선생님께서 손수 거둬 주셨습니다.
서재희는 잠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거나 이를 악물거나 숨을 거칠게 쉬지도 않았다. 감정은 갈무리되어 깨끗했다. 그는 그저 시선만 부드럽게 내리깔았다. 그늘처럼. 이어 말했다.
― 저는 제 신념대로 밀어붙이기로 했습니다. 오랜 기간 자행되어 온 악순환을 끊고 더 이상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제 판단으로 교장 선생님의 신변이 위험해진다 하여도 그게 옳은 결정이라고 믿었습니다. 저는 교장 선생님을 깊이 존경하나, 죄가 있다면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교장 선생님께서 반대하시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저를 이해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으니까요. 그래서 교장 선생님께 더 이상 상의하지 않고 혼자 준비했습니다. 우선 동영상. 당시 기념 연회를 앞두고 있었고, 그 행사는 전 도시에 생방송으로 중계됩니다. 저는 낙원의 이론뿐만 아니라 사해에서 자행되는 불법 인신매매상과 도시연합의 유착관계 등 정부의 오랜 비리가 담긴 증거 자료를 편집하여 짧은 동영상을 만들었습니다. 1부와 2부 사이에 중앙 스크린에 그 동영상을 띄워 모든 시민에게 진실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우편물. 저는 희생된 학생들의 시신을 부모님들께 돌려보내기 위해 82건의 우편물을 꾸려 믿을 만한 학생에게 맡겼습니다. 연회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발송해 달라고 부탁하면서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서재희가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어 올렸다. 촘촘한 속눈썹 아래 새까만 눈동자는 거울 같아서, 그 어떤 것도 배어 나오지 않았다.
― 바로 어제 저희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부모님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병원에 방문했습니다. 그때, 차인호 도시연합장님께서 병실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학생들의 시선이 차예원을 향했다. 차예원은 새파랗게 질린 채 스크린의 서재희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 차인호 도시연합장님께서는 이미 눈치채고 계셨습니다. 제가 어떤 폭로를 준비하고 있음을. 제가 미숙하여, 정보를 수집하면서 흔적을 남긴 모양입니다. 그분은 제게 협상을 제안했습니다.
유은우는 문득 어깨로 닿는 손길을 느꼈다. 고개를 들었다. 정윤환이었다. 그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손목 근처에서 손바닥만 한 창이 떠다니고 있었고, 화면 속에서 서재희가 진술을 잇고 있었다. 정윤환은 말없이 유은우를 한번 응시한 다음, 이프의 화면을 끄고, 고개를 들어 강당의 스크린을 보았다.
― 이번에 열릴 기념 연회에서 반란을 가장한 내란을 일으키겠다고 하셨습니다. 도시연합의 주요 정책을 비밀리에 심의하는 13위원을 제거하여 후에 새로운 위원회를 구성할 때 본인에게 유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선거가 얼마 안 남았고, 지지율은 폭락하여 초조해 보였습니다. 그분께서는 만약 낙원의 이론을 발설할 시 저를 소리 소문도 없이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임유현 교장 선생님 또한 무사치 못할 거라며, 그것도 아주 악랄한 방식으로 서서히 괴롭게 죽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 저는 시간을 벌기 위해 낙원의 이론은 묻어 두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차인호 도시연합장님께서는, 차예원과 약혼을 유지하고 싶다면 이번 내란에서 위원회 물갈이를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또한 수락하였습니다. 일단은 그 자리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정윤환이 숨을 토하며 이마를 짚었다.
― 돌아가신 부모님의 장례를 치를 시간은 없었습니다. 병원에서 나와 기념 연회장으로 가는 동안, 수없이 고민했습니다. 낙원의 이론을 폭로하고 교장 선생님과 더불어 살해당하겠는가, 혹은 아무것도 몰랐던 때처럼 전부 없던 일로 하고 현재를 유지할 것인가. 저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낙원의 이론을 발설하지 못할 거라고. 나 자신은 나약하여 금방 순응하게 될 거라고. 그렇게 현실과 타협하며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미처 알아채지 못한 제 책임도 있었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수없이 파견을 나가면서도, 교내에서 일어난 약물 과다 남용과 같은 인명 사고를 처리하면서도, 희생이 아닌 사고로 알고 있었으니까요.
서재희는 그로부터 한참 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 저는 1부 시작 전에, 영상 송출실로 가서 제가 만든 동영상을 1부와 2부 사이에 끼워 넣었습니다. 그리고 중앙홀로 내려와, 교장 선생님께서 벗어 둔 겉옷 안주머니를 뒤졌습니다. 평소 드시는 혈압약을 몰래 빼내고, 그 자리에 제가 가지고 있던 수면제를 넣어 두었습니다. 육안으로 봤을 때 구분이 되지 않도록 병원에서 특별히 받은 약이었습니다. 도시연합에 의해 참담한 죽음을 맞이하느니 차라리 수면제가 낫다 생각했습니다.
“나가자.”
정윤환이 유은우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챘다. 그대로 성큼성큼 강당 입구로 향했다. 모든 학생이 꼼짝도 하지 않고 서재희에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파를 헤치고 나가는 데 시간이 걸렸다. 유은우는 그에게 끌려가면서도 드문드문 뒤를 돌아 스크린의 서재희를 주시했다.
― 그 뒤는 익히 아시는 대로입니다. 저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제가 끼워 둔 영상은 날아갔습니다. 대신 교장 선생님의 처참하게 찢긴 모습이 스크린 가득 띄워졌습니다. 그렇게 되시기 전에 약 기운이 돌았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오늘 오전 속보를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사인은 수면제가 아니더군요. 누군가 직접 설계를 써서 살해했다고.
서재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유은우는 무의식적으로 정윤환의 손을 뿌리치고 멈춰 서서 스크린을 똑바로 보았다. 단단한 유리알 같던 서재희의 눈동자가 천천히 젖었다. 서재희는 가만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이를 악다무는지 희고 곧은 목덜미로 핏대가 도드라졌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 제가 침묵했다면 교장 선생님은 그렇게 돌아가시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서재희의 메마른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스크린이 일그러졌다. 지지직, 잡음이 터졌다. 유은우는 다시 정윤환에게 손목을 잡혔다. 누군가 다급히 볼륨을 줄였다. 학생들이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면서 순식간에 혼란해졌다. 유은우는 몇 번이나 밀려 넘어질 뻔했으나 그때마다 정윤환이 요령 있게 감싸 준 덕에 간신히 입구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둘은 텅 빈 복도를 달려 1층으로 내려왔다. 정윤환이 주위를 살피더니 유은우를 층계참 밑으로 끌어당겼다. 이어 그는 유은우를 벽에 밀어붙여 놓고 허리를 굽힌 채 한참 동안 숨을 몰아쉬었다. 얇은 환자복 위로 식은땀이 흥건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선연했다.
“저거 다 거짓말인 거 알지?”
유은우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서재희에게 한바탕 홀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와 교장 선생님의 사이가 원래 어땠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유은우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정윤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유은우! 나 속 터지게 자꾸 바보 같은 표정 지을래? 알아, 몰라? 설마 너 서재희 눈물 연기에 속은 거 아니지?”
정윤환의 불같은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 내면서, 유은우는 가까스로 기억의 한 조각을 그러잡았다. 교장 선생님과 통화할 때 치를 떨던 서재희의 표정.
‘내가 뼛속부터 원했던 일이야.’
“유은우, 제발 정신 차려. 우리 그냥 서재희만 믿고 있으면 안 돼. 이대로 있다간 큰일 나.”
정윤환이 거칠게 유은우의 어깨를 잡았다. 그가 유은우의 바로 옆 벽에 툭 하고 이마를 댔다. 열에 들뜬 숨.
“서재희는…….”
정윤환이 속삭였다.
“……임유현을 죽이고, 김서혁과 척지고, 방금 차인호까지 배신했어. 그리고 대신 시민을 등에 업으려고 해. 하지만 저 진술의 대부분은 거짓말이야. 깨끗한 척하고 있지만, 손에 피가 묻어 있다고.”
유은우는 서재희의 손톱 밑에 서려 있던 불그스름한 핏기를 떠올렸다.
“모든 게 기록으로 남아 있어. 금방 탄로 날 거야. 동조자 시체 전처리? 그거 나랑 차예원, 서재희가 돌아가면서 했어. 그래도 나랑 차예원은 좀 나은 편이네. 서류에 서명은 안 했으니.”
유은우는 정윤환의 옷자락을 그러쥐었다. 뭐라도 잡고 있어야 안심될 것 같았다. 가까스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생들 죽이고 나서 서명하는 절차가 있었어. 차인호는 자기 딸이 나중에 불리해질까 봐 절대로 서명 못 하게 했고, 그래서 서재희가 쭉 하고 있었어. 그 뒤에 내가 합류했는데, 서재희가 절대 나한테 서명하지 말라고 했어. 이미 자기가 해 버렸으니 굳이 한 사람 더 더할 것 없다고. 이왕 자기 이름 남아 버린 거, 자기가 쭉 한다고 했어.”
백일서가 죽던 밤, 유은우도 똑똑히 봤다. 직원 몇이 살해 현장을 수습했었다. 차예원과 정윤환은 먼저 일찍 가 버리고, 서재희만 끝까지 남아 있었다. 그는 직원이 내미는 서류에 서명했었다. 익숙하게.
“시민이 들고일어나면 일어날수록 진실은 드러날 거고, 그럼 서재희도 끝장이야. 지금 서재희가 말한 게 다 거짓말이고, 실은 낙원의 이론에 깊이 협조했던 주요 인물이란 게 밝혀지면 어떻게 되겠어? 시민들이 서재희를 가만히 놔두겠어? 임유현이 갈기갈기 찢긴 것보다 더 심하게 당할지도 몰라. 그걸로 끝나는 것도 아냐. 서재희를 구심점으로 변화의 물결이 모이더라도, 실체가 알려지면 시민들은 배신감을 느끼고 금방 흩어져 버릴 거야. 혁명이 일어나더라도 서재희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단 말이야. 그런데 왜 거짓말을 하는 거야? 전 시민이 보고 있는데. 설마 안 들킬 자신이 있는 건가? ……아냐, 그건 말도 안 돼. 그럼 들키기 전까지 어떻게든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어 보려고?”
유은우의 어깨를 잡은 정윤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건 도박이야. 서재희는, 혁명의 상징이 되기엔 너무 과거가 많아.”
정윤환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가 한 차례 비틀거려, 유은우는 다급히 그를 껴안아 부축했다. 정윤환이 유은우의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유은우는 손을 들어 그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열에 들뜬 그와 달리, 층계참은 서늘했다.
유은우는 정윤환의 숨을 달래면서, 오히려 점점 더 차분해졌다. 편지의 가지런한 글씨가 떠올랐다.
‘그러니 손주연 학생 같은 피해자가 더는 발생하지 않도록, 부디 그들에게 힘을 실어 주십시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유은우는 조심스레 정윤환을 밀어냈다. 손을 뻗었다.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옅은 머리칼을 걷어 내어 주었다. 눈을 맞추었다. 낮게 말했다.
“혁명이 일어나서 낙원의 이론이 파괴되면, 그럼 재희 선배한테 조금이라도 정당성이 생기는 거잖아. 결국 거짓말을 들키게 되더라도, 그 거짓말로 인해 변화가 일어났다고, 역사가 그렇게 기록할 수 있는 거잖아. 선의의 거짓말까지는 아니더라도, 계기임은 부정할 수 없을 거야.”
유은우는 정윤환을 향해 또박또박 말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다졌다. 서재희는 팀을 맺자고 했다. 서재희가 혁명의 불길을 지피기 위해 스스로를 낭떠러지까지 몰아넣었으니, 이제 자신과 정윤환이 움직일 차례였다.
“지금 우리는 굉장히 안전해. 전 시민이 너와 나, 그리고 차예원까지 보호할 거야. 재희 선배가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네 말대로 곧 재희 선배의 실체가 드러났을 때, 성난 시민으로부터 그를 감싸려면 우리가 혁명의 중심이 되어야 해. 재희 선배의 거짓말이 시민들을 들끓게 만든 이 짧은 순간 동안, 우리가 주도권을 잡아야 해. 그래야 사람들이 재희 선배한테 실망하더라도 혁명을 유지할 수 있어.”
정윤환은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유은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윤환 너도 돌아가면서 시체 처리했다며? 그러면 너도 과거가 완전히 깨끗한 건 아니지. 그럼 내가 해야겠네. 딱 맞잖아. 나는 낙원의 이론에 협조한 기록이 없음은 물론이고. 인권도 없고, 시민권도 없고, 사해 출신에, 군에 전리품으로 등록되어 있어. 누가 봐도 명백한 기득권의 희생양 아닌가?”
정윤환이 유은우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가 딱딱하게 굳은 낯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유은우는 한 걸음 다가가 그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너 그거 아는지 모르겠는데, 나 예능도 한번 나갔었다? 시민들 내 얼굴 다 알아.”
정윤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정윤환이 입을 꾹 다문 채 바닥 어딘가를 노려보고, 유은우가 그런 정윤환을 응시하면서, 수 초가 팽팽하게 지나갔다. 이윽고 정윤환이 제 눈을 문질렀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유은우는 거칠게 끌어당겨져 그대로 정윤환의 품에 안겼다.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유은우는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재희 선배는 이미 낙원의 이론을 폭로했어. 그가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거 사람들 금방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네가 나 좀 도와줘. 혁명의 상징, 재희 선배가 아닌 내가 될 수 있도록. 운이 좋으면 우리 셋 다 살아남을 테고,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머리 위로 정윤환이 얼굴을 묻는 게 느껴졌다.
“……최소한 세상은 흔들어 보고 가자.”
◆
서재희의 공개 진술이 있고 그다음 날이었다. 학생들이 사건을 정리하고 논의하기 위해 다시 강당으로 모여 들었을 때, 손도연이 그 인파를 헤집고 앞으로 나아가 강당의 스크린에 자신이 받은 동영상을 띄웠다.
동영상의 시체는 손도연의 이목구비를 그대로 닮아 있었다. 조각난 얼굴을 이어 붙인다는 전제하에 그랬다. 시체는 잘게 토막 나 있었기 때문에 콧대, 귀, 혀, 손목과 발목, 그리고 넓적한 피부들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배열로 뒤엉켜 있었다. 장갑을 낀 손이 화면 안으로 들어와서 마른 나무 같은 발목을 골라잡아 정교하게 돌아가는 기계 안에 집어넣을 때 강당은 다시 한번 침묵했다. 이어 익명의 손은, 가까이 있는 통에서 까만 씨앗 같은 것을 신중하게 몇 톨 집어다가 저울로 무게를 잰 뒤 기계에 함께 넣었다. 기계는 안쪽이 투명하여 시체와 까만 조각들이 뒤엉켜 피부가 녹고 뼈가 허물어지는 과정이 그대로 보였다. 한때 인간이었던 그것은 곧 진득한 액체가 되어 길고 투명한 관을 통해 어디론가 빠져나갔다. 서늘한 소리와 함께.
많은 학생이 그 동영상을 끝까지 보지 못했다. 정윤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스크린에 핏기가 비치자마자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했다. 유은우는 정윤환의 마른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속삭여 물었다.
“알고 있던 거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정윤환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가 정말로 속을 게워 내려는 듯 몸을 크게 들썩거렸기 때문에 유은우는 다급히 그를 보호하듯 등을 도닥여 주었다.
유은우는 사위를 살폈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사방에 눈과 귀가 너무 많았다. 서재희가 학생회와 파견부, 그리고 유은우를 믿을 만한 인물로 직접 언급함으로써 그 시선은 더욱 집요하고 치밀해졌다. 유은우는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는 정윤환을 강하게 잡아끌고 강당을 나왔다. 아무도 없는 복도 벽에 정윤환을 기대어 놓고 그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복도의 창문 너머로는 강당 내부가 보였다. 동영상은 어느새 종료되어 있었다. 학생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빽빽한 학생들 사이로 손도연이 보였다. 그녀는 새파랗게 굳은 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꺼진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윤환은 여전히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곧 헛구역질을 멈추었다. 힘이 쪽 빠져 마른세수를 하는 정윤환에게 물었다.
“저거 303호에서 있었던 일 아니야?”
“맞아.”
“새삼 왜 그래? 너도 했던 일 아니야?”
정윤환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했다고 해서 익숙해지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란 말이야.”
“알겠어. 화내지 마.”
유은우는 두 손을 들고 아이 어르듯 쉬 소리를 냈다. 정윤환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말했다.
“나랑 서재희랑 차예원이 번갈아 돌아가며 했어. 특히 서재희 차례가 잦았어. 서재희가 말을 잘 안 듣는다 싶으면 교장이 길을 들이는 식으로 배정하곤 해서. 원래 영상 같은 거 절대 찍으면 안 되는데, 서재희가 몰래 찍었나 봐. 아니면 교장이 미끼삼아 협박하려고 몰래 카메라 설치해 놓은 걸 서재희가 빼돌렸거나. 그것도 아니면 교장을 협박해서 한몫 단단하게 뜯어내려고 직원 중 하나가 촬영했을 수도 있고. 원래는 직원들이 하는 일이야.”
“직원?”
“응. 그들은 늘 갈아 버린다고 표현했어.”
유은우는 기억을 되짚었다. 백일서가 죽던 밤, 경비원들이 살인의 흔적을 신속히 지웠었다. 피를 닦아 내고 소독을 하고 시체를 실어 갔다. 유은우가 물었다.
“그럼 그 직원들은 지금 어디 있어?”
정윤환은 유은우를 바라보면서 손을 말아 쥐었다. 불거진 손마디로 제가 뒤통수를 기대고 있는 창문을 톡톡 쳤다. 유은우는 창문 너머로 강당 한쪽 벽에 붙어 있는 전자 칠판을 보았다. 연다희가 빼곡히 기록해 놓은 사건 정황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시선에 턱 걸리는 메모가 있었다.
관리 직원 5인 행방 묘연 및 연락 두절.
“도망간 거야, 죽은 거야?”
유은우가 중얼거렸다. 정윤환은 거칠게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모르지, 나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윤환은 이제 유은우를 보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아래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섬세한 눈가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너 재희 선배 편지 봤어?”
정윤환은 유은우를 보지 않고 대답했다.
“어. 아빠가 보내 줬어.”
“……너도 가족이 여기서 죽었어?”
“아냐. 사촌 형이 하나 있긴 한데 군에서 죽었어. 학교는 무사 졸업했지.”
아. 유은우는 그제야 드레스를 고르며 엿들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배우인 엄마의 이목구비를 그대로 물려받아 화려한 정윤환에 비해 그의 형은 아빠를 닮아 선하게 잘생겼다고 했고, 군에서 자살했다는 소문이 돈다고 했다.
“그럼 왜 편지가?”
“우리 집으로 우편물이 온 건 아니고. 그냥 우리 아빠가 워낙 정보가 빠르니까. 의원이거든. 서재희가 말하는 13위원에 포함되진 않는데, 어쨌든 간판 의원이야. 잘생긴 데다가 몸 안 사리고 말을 시원하게 해서 인기가 많거든. 그러니까 아빠가 두 명인데 그중 하나 말이야. 어제 병실에서 서재희 공개 진술 기다리고 있는데, 아빠가 어디서 제보를 받았는지 바로 나한테 보내 주더라고.”
“집에서 뭐라고 안 하셔? 당장 학교에서 빠져나오라든가.”
유은우는 자신의 목소리에 왠지 힘이 없다고 느꼈다. 정윤환은 그제야 눈을 들어 유은우를 보았다. 그가 피식 웃었다.
“왜 물어? 나 그냥 집에 갈까?”
“궁금해서.”
“당연히 나오라고 펄펄 뛰시지. 거기 있다가 큰일 난다고.”
“안 가?”
“나 혼자 어떻게 나가냐. 사람이 양심이 있지. 서재희 개고생하는 거 뻔히 다 알고 있는데. 거기다 낙원의 이론을 폭로하는 건 나도 늘 소망해 왔던 것이고. 학생들이 희생된 데에 당연히 나도 책임이 있으니 죗값도 치러야 하고. 그리고…….”
정윤환이 담백하게 말했다.
“……유은우 너도 있고.”
정윤환의 대답엔 망설임이 없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매끄러웠다. 그러나 누구나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정윤환과 같은 상황이 닥친다면 자신의 몸을 피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우선순위일 수 있었다.
유은우는 새삼 정윤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본인만을 위해 욕심을 부린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설계 천재라는 압도적인 타이틀 때문에, 살인을 극도로 꺼리는 올바르고 연약한 부분이 얼마나 훼손되었을지. 날것처럼 거친 행동들은 도리어 겁을 먹어 그런 것은 아니었는지.
“있잖아.”
정윤환이 불쑥 물었다.
“이선규가 강진욱 제압했다고 했잖아. 그 제압이 어느 정도였어? 아예 죽였어?”
지나가는 말처럼 툭 물어 놓고 정윤환은 유은우의 시선을 피해 엉뚱한 쪽을 바라보았다.
유은우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정윤환의 질문에 놀라서가 아니라, 정윤환의 낯에 놀랐다. 정윤환은 강진욱에게 호되게 당하고도, 마치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는 듯 초조해 보였다.
“……아마도. 이선규가 봉으로 강진욱 머리를 가격했어. 피가 많이 나왔고 그 뒤로도 움직임이 없었으니 죽었을 거라고 생각해. 산다고 해도 큰 부상이라 완전히 회복되긴 힘들 거야.”
“그래.”
정윤환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으나 이내 눈가가 말갛게 젖었다. 그는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한숨처럼 말했다.
“참 이상하지. 내가 지키려고 하는 건 항상 그렇게 돼.”
유은우는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정윤환이 심리안정술 강의실로 자신을 데려가서 페어 조건이 뭐냐고 윽박지른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저 정윤환이 두려워서 덜덜 떨었으나,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그 낯은 낡아 바삭거리는 모래 같았고…….
“내가 살아 있잖아.”
불쑥 그렇게 말했다. 정윤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빤한 시선을 받으며 유은우는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있잖아. 한세연도 사망자 명단에 없어. 그리고 부모님도 무사히 살아 계시잖아. 일이 그렇게 된 게 꼭 네 탓만은 아니야.”
정윤환의 입술 틈이 나붓이 벌어졌다. 유은우가 덧붙였다.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너 없었으면 나도 없었을 거라고.”
정윤환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는 그저 빨려 들듯 유은우만 응시하고 있었다. 유은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간이 치료기가 채워져 무거운 오른손 대신 멀쩡한 왼손을 들어 올렸다.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폈다.
“나 유은우는 정윤환 앞에서 열심히 살아남을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
정윤환은 반응이 없었다. 이젠 눈도 깜박이지 않고 있었다. 유은우는 괜히 무안해져서 들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이내 정윤환이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가 손을 들어 제 명치 부근을 꾹 눌렀다. 그러더니 깊이 숨을 토했다.
“와…….”
“왜?”
“아니. 그냥.”
열에 들떠 상기된 뺨과 어쩔 줄 모르는 눈빛과 달리 싱거운 대답이었다. 정윤환은 손끝으로 명치를 누르다가 그것으로도 진정이 되질 않는지 몇 번 문지르기도 했다. 이윽고 그가 얼굴을 확 일그러뜨리고는, 한 손으로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아, 정말 짜증 나.”
“뭐야, 갑자기? 약속한대도 반응이 왜 그래?”
“아까워 죽겠다, 정말. 서재희한테 주기 싫다고.”
“……그거 내 얘기야?”
“몰라.”
“내가 무슨 물건이야? 왜 네 마음대로 주네 마네 하는데? 내가 널 좋게 보려고 해도, 너 뱉는 말마다 그따위…….”
유은우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허리가 확 당겨졌다. 휘청거릴 새도 없이 정윤환의 품에 쏙 안겼다. 급한 대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지만 뒤통수가 꽉 틀어 잡힌 후였다. 얼굴이 가까웠다. 숨이 뒤섞였다. 바로 코앞에 정윤환의 눈동자가 있었다. 긴 속눈썹의 그늘이 예쁘게 드리운 옅은 갈색 눈동자가 유은우의 입술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입술과 입술의 틈은 분명히 떨어져 있긴 했지만 서로의 온기로 이미 닿은 거나 다름없었다.
유은우는 여차하면 정윤환을 걷어찰 셈으로 무릎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그러나 정윤환은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았다. 잠깐을 그렇게 팽팽히 인내하다가, 이내 유은우를 확 밀어젖혔다. 유은우는 고꾸라질 뻔했으나 기민하게 중심을 잡고 바로 섰다. 고개를 드니 정윤환이 복도 벽에 이마를 붙이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무어라 욕을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유은우는 자신이 실수를, 그것도 대단한 잘못을 했고, 앞으로는 정윤환에게 확실히 거리를 둬야 함을 직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뭘 그리 실수했나, 내가 뭘 그리 잘못했나, 이 이상 거리를 어떻게 두나, 다소 억울한 마음도 없진 않았다. 온갖 말을 삼키며 구겨진 환자복을 주섬주섬 정리하고 나니, 정윤환도 한결 열이 가셔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그가 자못 당당하게 툭 뱉었다.
“미안.”
그러더니 냉큼 덧붙였다.
“사실 별로 미안하지도 않지만.”
“그래 보인다.”
유은우가 대꾸하자마자 뒤가 소란해졌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로 강당 안을 보았다. 학생 몇이 서로 멱살을 잡더니 급기야 총성까지 울렸다. 곧바로 연다희가 총을 들어 싸움 한가운데로 사격했다. 흥분한 학생들이 사납게 뱉어 놓은 타격은 연다희의 설계에 잡혀 깨끗하게 소멸했다. 김산이 화가 난 모습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시비가 붙은 학생들을 강경히 떼어 놓았다.
“서재희의 편지는 진실이 짜깁기된 거야.”
유은우는 정윤환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붉던 그의 뺨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정윤환이 이어 말했다.
“거짓으로 예쁘게 포장된 진실이야.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극적인 스토리텔링 때문이지. 구구절절 항목별로 건조하게 설명만 하면 듣는 사람도 냉정해져 분석에 들어가기 쉬워. 그럼 단시간에 여론을 일으킬 수가 없어. 단 한 장의 편지로 시민들의 감정을 최대한 흔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야. 모든 진실을, 소중한 자녀의 죽음과, 그 비슷한 나이 대인 서재희 본인의 희생에 집중시켰어. 탁월한 선택이지. 들키지 않고 얼마나 갈지 모르겠지만.”
유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희 선배가 교장을 정말로 사랑하고 존경해서 살해를 망설였다는 멘트는 확실히 거짓이란 거 알겠어. 시민들에게 동정표를 사고 자신에게 정당성과 인간성을 부여하기 위해 넣었겠지. 그럼 나머지는? 정확히 어디가 거짓이야?”
“서재희가 3학년이고 내가 1학년 때 우리가 대규모 파견팀을 꾸리긴 했지. 편지에선 내가 주도한 것처럼 써 놨지만 그거 서재희가 제안한 거야.”
정윤환이 벽에 비스듬히 기대었다.
“그때 나랑 서재희는 낙원의 이론에 대해 몰랐어. 교내에서 자꾸 인명 사고가 나니 뭔가 이상해서 추적만 하고 있었지. 교내 통신망이 감시당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적지의 외부망을 우회하는 비공개 사이트를 하나 개설했어. 온하나비. 마음 맞는 학생 몇을 모아 온하나비를 통해 정보를 정리하고 의견을 모았어. 우리는 처음에 교내 인명 사고가 정말 사고인지 어떤 계획적 살해인지만 캐내려고 했는데, 참여하는 학생들이 스무 명으로 늘어나고, 각자 관심 있는 분야로 파고들다 보니 미심쩍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 일이 점점 커졌어. 온 오염도 측정하자는 얘기도 그때 나왔고.”
정윤환이 환자복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그대로 손을 꽂은 채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파견 때 일부러 낙오해서 그쪽으로 가 보자고 뜻을 모았어. 위험부담이 컸기 때문에 서재희가 지침까지 개정해서 대규모 팀을 꾸린 거야. 당연히 서재희가 리더였어. 그런데…….”
정윤환이 미간을 좁혔다.
“……사출 전날, 서재희가 전부 없던 일로 하자고 했어. 첫째, 기상이 너무 안 좋아서 실력자가 스무 명이나 경로를 이탈하면 사실상 선발대가 없어져 버리는 거니까 가뜩이나 파견이 처음인 1학년 초보들이 극도로 위험해질 수 있으며, 둘째, 교수들의 움직임을 봤을 때 이미 우리 계획을 들켰고 감시받고 있다는 게 그 이유였어. 하지만 내가 밀어붙였고, 오랫동안 준비한 다른 애들도 자신감에 차 있었기 때문에 서재희보다는 내게 찬성했어. 만약에 내가 없었으면 서재희는 늘 자기 하던 대로 애들을 제 편으로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있어서. 서재희가 내게 거짓말하지 않고 상황을 그대로 말해서 애들이 날 지지할 수 있었던 것 같아. 항간에는 서재희와 내가 싸워서 서재희가 팀을 나가 버렸다고 소문나 있지만 사실이 아니야. 나는 서재희가 우리 팀에 있어 줬으면 바랐고, 서재희는 이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하자고 했기 때문에 남들 보기에 큰 소리가 난 건 맞아. 그렇지만 끝에는 합의했어. 나 같은 놈 두 명이었으면 싸우다가 한 놈이 죽었겠지만, 나랑 서재희니까 당연히 합의했지. 나는 우리 팀에 남고, 서재희는 우리 팀에서 나가 다른 학생들을 보호하기로. 확실히 상위 실력자가 스물이나 빠지면 다른 학생들이 위험하긴 해. 그래서 서재희가 약한 쪽에 붙기로 한 거야. 우린 자신이 있었어. 서재희가 빠져도 열아홉 명이나 되니까. 그땐 몰랐지. 내 총이 고장 나 있을 줄은.”
정윤환이 조용히 이어 말했다.
“누군가 우리 계획을 밀고하고, 내 총을 망가뜨리고, 나중엔 온하나비까지 공개 사이트로 돌려 버렸어.”
“누가?”
정윤환이 유은우의 어깨 너머로 턱짓을 했다. 유은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차예원이 서 있었다. 그녀는 눈을 약간 찌푸린 채 정윤환을 보고 있었다.
정윤환이 차갑게 말했다.
“안녕. 한배를 탄 기분이 어때?”
차예원이 코웃음을 치더니 가까이 왔다. 그녀는 지쳐 보였지만, 품에 타고난 여유가 여전했다. 차예원이 창문을 통해 강당 안을 쓱 확인하더니 유은우를 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우리 아빠가 병원에 찾아가서 재희를 협박한 게 아니야. 재희가 우리 아빠를 병원으로 불렀지. 임유현을 살해하고 13위원을 물갈이하는 것, 그것도 우리 아빠가 제안한 거 아니야. 재희가 내민 카드였지.”
“어쨌든 도시연합장이 재희 선배에게 동의했잖아요? 재희 선배가 순서를 바꾸면서 자기만 쏙 빠져나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배 아버지가 정당화되는 건 아니에요.”
유은우의 말에 차예원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정윤환이 말했다.
“네 아빠는 망했지만 넌 안전해. 최소한 지금은.”
차예원이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그렇지. 나는 아빠와 등지고 대의를 위해서 학교로 온 거니까. 재희의 표현에 의하면.”
“서재희는 널 보호한 거야. 서재희가 편지에서 널 언급하지 않았으면, 넌 지금 강당에서 애들한테 맞아 죽었을걸. 이 혼란한 상황에서 누구 하나 안 다치고 긴장 유지하는 것만도 벅찬데, 한번 터지면 그 뒤는 끝이야. 마지노선 무너지고 서로 핏발 서서 죽고 죽이고. 여긴 도시연합의 온갖 라인이 한꺼번에 다 모여 있으니까.”
“재희는 알고 그 말을 넣었겠지? 내가 재희 포기 못 하고 학교로 돌아올 걸 미리 알고?”
정윤환이 코웃음 쳤다.
“너 서재희만 보고 이쪽에 붙은 거 아니잖아? 난파선에서 탈출해 놓고 세기의 사랑인 척하지 마. 너 정도 되는 기회주의자는 지옥에서도 안 받아 준다.”
차예원이 정윤환을 노려보았다. 죽어 있던 눈에 생기가 확 돌았다. 그녀가 빈정거렸다.
“너만 정의라고 생각하지 마. 그때 기상이 어땠는지 기억해. 온 오염 수치가 얼마나 기록적이었는지도. 넌 네가 천재라고 남들도 다 너만큼 하는 줄 아는 모양인데, 너한테 쉽다고 남들도 쉬운 거 아니야. 나는 학생들을 고려했어. 너희의 그 알량한 호기심을 충족하느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1학년들을 사지로 내모는 걸 두 눈 뻔히 뜨고 보고 있으라고?”
“알량한?”
“그때 내가 우리 아빠한테 너희의 그 끔찍한 계획을 말하지 않았다면 전부 다 개죽음당했어. 괴물한테 먹히기도 전에 오염된 온에 휘말려서.”
정윤환은 화를 억누르듯 잠깐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차예원을 보았다.
“차예원, 기상은 문제가 안 됐어.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정도였어.”
“너한테나 문제가 아니었겠지. 그래서 네가 리더가 못 되는 거야. 재희는 평범한 학생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알아. 하지만 넌 범인을 이해하지 못하지. 타고나길 잘 타고나서.”
“너도 하층민 이해 못 하는 건 피차일반 아닌가? 네가 내 총을 건드리지만 않았으면 다 살아 돌아왔어.”
“남 탓 좀 그만해! 나한테는 그게 최선이었어. 모함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서 기상을 걱정하는 어리고 서툰 1학년들은 정윤환 네 잘난 눈엔 보이지도 않았겠지만!”
“제가 이제 선배들 싸움까지 말려야겠어요? 네? 그만 좀 합시다, 그만 좀!”
불쑥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팽팽하게 맞붙던 정윤환과 차예원, 그 사이에 속절없이 껴 있던 유은우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강당 입구에서 연다희가 고개를 내밀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동그랗게 앳된 얼굴로 노인처럼 끌끌 혀를 차더니 손짓을 했다.
“빨리 정리하고 들어와요. 사람 열 받게 하지 말고!”
그러더니 쑥 들어가 버렸다. 그 뒤로 김산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는 마른 눈으로 복도의 셋을 쓱 훑어보더니, 건조하게 말했다.
“들어와서 발언해. 재희가 공개 진술한 지 꼬박 하루가 지났어. 이제 네 입장을 밝힐 때도 됐잖아. 재희가 널 공개적으로 지목했는데.”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김산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정윤환 너한테 말하는 거야.”
“……나?”
“그래. 얼른 들어와. 네가 생각하고 있는 걸 말해. 함께 조율하고, 의지하면서 버티자. 재희 올 때까지.”
정윤환이 소름 돋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제 팔뚝을 쓱쓱 문질렀다.
“돌겠네. 체질 아닌데.”
“이 상황이 체질인 사람이 어디 있어. 들어와. 애들 기다려.”
김산이 인내심 있게 반복했다. 정윤환은 잠깐 가만히 서 있다가, 이어 유은우의 손을 낚아챘다. 유은우는 정윤환의 큰 보폭에 딸려서 강당으로 들어갔다. 학생들의 시선을 받으며 연단에 서자, 편지가 떠올랐다.
‘그는 김서혁 총사령관의 전리품으로 등록된 1학년 유은우와 서로 각별한 사이입니다.’
서재희는 한 장의 편지 안에 수많은 진실을 통일성 있게 밀집시키기 위해 거짓도 불사했다. 그런 그가 몇 문장이나 기꺼이 할애하면서 정윤환과 유은우를 ‘서로 각별한 사이’라는 표현으로 묶었다. 왜 굳이 그런 말을 집어넣었을까?
처음에 서재희는 필요에 의해서 정윤환과 유은우가 연인인 척하길 바랐다. 자신이 움직이는 데에 유은우가 약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래서 연회에서 팔자에도 없는 애정을 과시하며 딱 붙어 있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젠 그 헛소문을 유지할 이유가 없었다. 임유현은 죽어 버렸고, 차인호는 배신했으며, 김서혁은 애초에 통하지도 않았으니.
연다희가 제 옷깃에 부착하고 있던 무선 마이크를 떼어 정윤환의 환자복 옷깃에 매달았다. 정윤환이 유은우의 손을 놓고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유은우는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잘 들어. 반복도 번복도 없다.”
정윤환이 운을 떼었다.
“어제부터 통신 깜박깜박하지? 장담컨대, 곧 전화도 인터넷도 방송도 완전히 다 끊겨. 그러나 온하나비만은 유일하게 접속 가능할 거야. 그 사이트는 내가 1학년 때 서재희랑 만들면서 기반을 외부망으로 잡았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사실은 극소수만 알고 있어. 도시연합에서 알게 되면 온하나비마저 바로 차단하겠지. 그러니까 온하나비에 글을 올리거나, 댓글을 달거나, 로그인을 하는 멍청한 짓은 삼가길 바란다. 그냥 입 닥치고 들어가서 보기만 해. 그래야 우리가 몰래 바깥의 정보를 수집할 수 있어. 도시연합이 우리의 눈과 귀를 제한했다고 착각할 때, 온하나비는 우리의 가장 큰 무기가 될 거야.”
누군가 드론을 띄웠다. 드론은 공중을 매끄럽게 날아올라 정윤환을 잡아냈다. 카메라의 빨간 불이 반짝반짝 들어왔다. 정윤환은 그것에 질색하는 눈치였지만 언급하지는 않았다.
“학교 주위는 군이 통제하고 있어. 교수나 직원들은 도망갔고. 지금 학교에 남아 있는 건, 도망갈 타이밍을 놓친 의료진과 일부 직원, 그리고 서재희의 복귀를 기다리거나 혹은 혼자 불이익 받을까 봐 다수의 눈치를 보면서 머뭇대는 학생뿐이지. 교장은 죽고 그의 권한은 나와 여기 있는 임원, 그리고 중앙수사부에 있는 서재희에게 자동으로 승계되었어.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엄선된 엘리트. 예비 기득권. 희생자의 가족 또는 친구. 그리고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유은우는 옆걸음질로 정윤환과 거리를 두었다. 그제야 정윤환의 옆모습이 보였다. 지쳐 흐트러진 낯에,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총도 없었다. 발목엔 간이 치료기가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단단하여 흔들림이 없었다. 강당의 모든 조명과 숨, 긴장을 홀로 붙들고 있었다.
“우리는 동조자로 태어났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이미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를 보장받았어. 하지만 우리의 무의식적인 선택이 낙원의 이론이라는 시스템에 의해 재차 검증되고, 그 결과 기득권을 위협하는 인물로 지목되는 순간 조용히 제거될 위험 또한 지니고 있지. 어떤 사람은, 낙원의 이론이 순수한 도구일 뿐이라고 말해. 그것을 다루는 기득권의 교체만이 답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 시스템을, 낙원의 이론 자체를, 불완전하나 따뜻한 인간의 판단으로 대체할 가능성을 바라보고 있어.”
정윤환은 말을 멈추었다. 견고한 적막 뒤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유능한 범죄자를 사회의 요직에 세우며 발전만을 꾀하는 것이 답이 아니라, 정당한 죗값을 치르게 하여 사회가 건강해지기를 원해. 그로 인해 우리 사회가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한두 발짝 혹은 훨씬 퇴보하더라도. 우리는 차세대의 기득권자로 어쨌든 지금까지 살아남았어. 따라서 누구보다 현재의 사회를 유지하길 원할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다시 한번 묻고 싶어. 교장이 작성했던 수많은 제거 리스트에 네 이름이 추가되었다가 삭제되었을 수도 있고, 그 빈자리는 네 동기나 형제자매로 채워졌어. 너는 살아남아 사회의 요직을 차지할지 몰라도, 네가 사랑하는 자녀 혹은 연인은 후에 끊임없이 시스템에 시험당할 것이며, 그들이 다만 덜 영민하거나 더 우직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혹여나 삐끗하여 그 틀에서 벗어나게 될지도 몰라. 그런 최악의 경우가 닥친다면 네가 아무리 그들의 손을 잡아 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을 거야. 침묵이 오래되면 악으로 굳어지니.”
정윤환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도시연합 초기엔 낙원의 이론이 최선이었는지도 몰라. 제국시대와 달리 갑작스레 폐쇄된 공간에, 미처 세우지 못한 사회 체계까지 모든 것이 낯설고 혼란스러웠을 테니까. 그런 혼란기엔 악의를 가진 동조자 하나가 상당한 위협이었을 테고, 정부는 어떻게든 색출하고 싶었을 거야. 하지만 아직도 그런가? 우리 사회가, 우리 인간이, 고작 그런 시스템에 의지해야만 하는 존재인가 다시 생각해야 해.”
정윤환은 학생들을 향해 말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되뇌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우리의 부모가 앉은 자리, 빠르면 졸업 후에, 늦어도 10년 안에 우리가 앉게 돼. 답습할지 변화할지는 바로 우리 손에 달려 있어. 남에게 맡길 수도 기댈 수도 없어. 밑에서 약자들이 뭉쳐서 움직이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희생도 깊어. 하지만 우리가 움직인다면 달라지지. 영향력이 큰 만큼 변화할 가능성도 훨씬 높아져. 이건 마음 내키면 하고 아니면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우리는 남보다 확연히 좋은 조건을 타고났어. 동시에 정의에 앞장설 도덕적 의무 또한 함께 부여받았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지만, 유은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서서히 바뀌고 있음을 알았다. 항해사가 키를 한 뼘만 돌려도 거대한 선박이 급격히 방향을 틀듯이. 그들은 어디든 갈 수 있었는데, 서재희가 정윤환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정윤환이 그 키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우리는 도시연합과 정면 대결한다. 우리의 요구 사항은, 여태 은폐되어 온 악행에 대한 명백한 해명과 낙원의 이론 시스템 파괴, 그리고 관계자들에 대한 적법한 처벌.”
유은우는 정윤환이 진심을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후에 모든 것들이 밝혀져, 그 관계자에 혹여 자신이 포함되더라도 모든 걸 감수하겠다는.
정윤환도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 그도 서재희나 차예원처럼 과거가 있었다. 손에 피가 묻어 있었고 발끝의 그림자가 짙었다.
서재희는 왜 나를 정윤환과 연인으로 묶었을까. 앞으로 서재희 옆에 있으면 위험해지니까 보호하기 위해 그랬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서재희보다는 증거가 덜하긴 했지만 정윤환도 결코 깨끗하진 않았으니. 오히려 파고들면 서재희보다 정윤환에게서 더 많은 죄가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럼 도대체 왜? 도무지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질 않았다. 손끝만 자꾸 식었다.
“물론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
정윤환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의 옅은 눈이 강당을 주르륵 훑었다.
“서재희라면 여기 있는 인원 다 끌고 갔을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난 성질 더러워서 그렇게 못 해. 원래 팀전 같은 거 질색이기도 하고. 서로 안 맞는 사람들 조율하는 거 하지도 못하고 할 생각도 없어. 난 생각이 같은 사람들만 데려간다. 그 외는 빠져. 연다희, 총 좀 줘 봐.”
정윤환이 연다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연다희는 제 홀스터에서 총을 뽑아 내밀었다. 연다희가 잘 길들여 놓은 총을 정윤환은 망설임 없이 움켜쥐었다. 동조율이 불안정하게 널을 뛰었지만, 정윤환은 무리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가 튀고, 강당 중앙 허공으로 새파란 선이 반듯하게 그어졌다. 정윤환이 총을 들어 선의 오른쪽을 가리켰다.
“죽을 각오 하고 어떻게든 바꿔 볼 의지가 있는 사람은 여기 서고…….”
정윤환이 총구를 움직여 선의 왼쪽을 가리켰다.
“……그딴 거 다 필요 없고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여기 서. 내가 설계하면 아주 잠깐 동안은 군의 통제를 무너뜨릴 수 있어. 그 틈에 탈출하면 되니까. 도시연합에서 중립지대를 벗어나면 정보가 꼬이네 어쩌네 겁을 줬지만 그건 말도 안 되고,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정보보다 팔딱팔딱 뛰는 심장이 우선순위라는 건 다들 실감하겠지. 일단 나가고, 개인 정보 혼재에 대해서는 도시연합에 복구를 요청해. 일단 내가 학교에서 나가게는 해 주겠어. 나머진 너희들 몫이야.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더라도 우리 이프로 여전히 온하나비 접속이 가능하다는 건 함구해 줘. 그렇게 오랫동안 입 다물어 줄지도 의문이지만 일단 부탁은 해 둔다.”
정윤환이 옆을 돌아보지도 않고 총을 휙 던졌다. 연다희가 그것을 가볍게 잡아챘다. 정윤환이 엄지로 이마를 문질렀다. 그가 말했다.
“지금 당장 결정하긴 힘들겠지. 이틀 뒤 이 시간에 여기 다시 와서 나뉜 인원 보고 탈출 계획을 구체적으로 잡겠다. 지금 여기 없는 의료진이나 직원들에게는 학생회 임원들이 의견을 수렴하면 될 것이고. 시간 충분하지?”
정윤환은 그대로 병원으로 돌아와 재활을 받는 도중에 정신을 잃듯 잠이 들었다. 간호사가 정윤환의 몸에서 재활기를 떼어 내며, 유은우를 향해, 둘의 회복 속도에 확연한 차이가 나니 불편하다면 병실을 옮겨 주겠다고 했다. 유은우는 즉각 사양했다.
유은우는 정윤환의 침대에 걸터앉아 밤이 되길 기다렸다. 정윤환이 이따금 무어라 웅얼거리며 아이처럼 뒤척이면 이불을 고쳐 덮어 주었다. 한번은 악몽을 꾸는 듯 감긴 눈으로 물기가 어른거렸다. 유은우는 달래듯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옅은 머리칼 사이로 식은땀이 흥건했다. 개의치 않고 그대로 어루만졌더니 잠잠해졌다. 늘 이리 고통스럽게 잠드는지, 매일 밤마다 어떤 벼랑에 매달리는지, 어떻게 이렇게 열병 도진 어린아이처럼 색색 애처로운 소리를 내며 자는지 가슴이 선득했다. 새벽이 깊었을 때, 유은우는 병원을 빠져나왔다. 본관에 들러 자전거 보관소에 세워 둔 수레에서 검을 빼 들고 단단히 틀어쥐었다.
교장실이 위치한 복도는 서늘했다. 찬 새벽이라 그런지, 원래 온도가 낮은 곳인지 알 수 없었다. 교장실 앞은 엉망진창이었다. 복도 벽, 바닥, 문에 시뻘건 락카 스프레이가 마구 갈겨져 있었다. 진상 규명, 탄압 중단부터 시작해서 지옥으로 떨어지라는 험한 욕설까지 뒤엉켜 어지러웠다. 굳게 닫힌 문짝은 날카로운 것으로 여러 번 긁혔는지 드문드문 금속이 벗겨져 있었다. 심지어 문손잡이는 뽑혀 나가 있지도 않았다. 보안장치도 한쪽이 찌그러져 있었다.
유은우는 환자복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작고 차가운 것을 꺼냈다. 임유현의 손가락은, 약간 마른 것 외에는 아직 멀쩡했다. 지문도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보안장치에 가져다 댔다. 희미한 기계음과 함께 문이 안쪽으로 달칵 열렸다. 다시 한번 복도를 살펴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은우의 움직임을 감지한 센서등이 탁 켜지면서 교장실 안이 단번에 환하게 밝혀졌다. 등 뒤로 문을 닫았다.
교장실은 끔찍할 정도로 정갈했다. 묘하게 서재희의 방을 연상시켰으나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서재희의 기숙사 방이 세련되면서도 텅 빈 느낌을 주었다면, 교장실은 금고처럼 견고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창을 등진 묵직한 책상 위로 손끝을 미끄러뜨리면서 방을 한 바퀴 돌았다. 책상 서랍은 잠겨 있었다. 한 걸음 물러서서 검을 두 손으로 쥐고 서너 번 가늠한 후 강하게 내리쳤다. 책상이 형편없이 부서졌다. 무너진 상판을 걷어 내고 서랍이란 서랍은 죄 꺼내서 바닥으로 던져 놓았다.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발로 차 흩어 놓고 우뚝 서서 눈으로 쭉 훑었다.
익숙한 낯이 눈에 띄었다. 파일 홀더 밖으로 서류 하나가 비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앳된 정윤환의 증명사진이 붙어 있었다. 파일 홀더째로 집어 들어 티 테이블에 던져두었다.
한쪽 벽면은 장식장이었다. 유수한 상패와 기념사진이 고상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유은우는 팔을 한껏 벌려 장식장의 틈과 틈을 더듬었다. 어딘가 헐겁다고 느껴졌을 때 온몸을 밀어붙여 힘을 주었다. 처음엔 잘 되지 않다가 요령을 부리니 매끄럽게 밀려났다. 쪽문이 드러났다. 열쇠 구멍 하나 없는 평범한 문이었다. 열어 보았다.
골방이었다. 차가운 냄새가 났다.
손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렸다. 등이 켜졌으나 희미했다. 그러나 바닥의 불그스레한 흔적을 확인할 정도는 되었다. 한쪽 벽에 설치된 세면대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유은우는 몸을 천천히 낮추었다. 드문드문 깨진 대리석 바닥 틈으로 핏기가 어른거렸다.
유은우는 손으로 바닥의 핏기를 덮었다. 느리게 쓸어 보았다. 서재희의 뒷덜미를 매만졌던 것처럼.
이내 손을 거두고 일어섰다. 교장실로 돌아와 티 테이블에 딸린 의자에 무너지듯 앉았다. 탁자에 엎드려 숨을 골랐다.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파일 홀더에서 내용물을 잡아 뺐다. 정윤환의 프로필 사이에 은색으로 반짝이는 메모리가 있었다. 바로 이프에 끼웠다. 허공으로 음성 파일들이 날짜별로 주르륵 나열되었다. 유은우는 리스트에 손을 미끄러뜨리다가 낯익은 날짜를 눌렀다. 시민의 날이었다. 테러가 일어났던.
음성 파일의 첫 부분은 소음만 희미했다. 이따금 사락사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전부였다. 손을 움직여 파일의 중간으로 성큼 건너뛰었다.
― ……내가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 말해 봐, 정윤환. 내가 네게 그렇게 지시했나? 공격하는 척 방어 설계를 구축하라고?
― ……죄송합니다. 광장처럼 넓은 공간에 며칠에 걸쳐 설계를 까는 것은 아무리 저라도 처음 해 보는 일이어서 미숙했습니다. 제 손으로 짰지만 저도 제한 설계가 그렇게 강하게 발휘될 줄은 몰랐습니다. 복기해 보니 중첩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실수? 네 실력에?
― 교장 선생님, 시민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예상하신 숫자의 배를 넘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희생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그저 공격만 강화시키기보다는 적당한 방어도 같이 엮어 두어야 했습니다. 교장 선생님께서도 광장 전체가 날아가는 걸 바라지는 않…….
― 그래서 지금 네가 잘했다고?
뚜벅뚜벅 구두 소리가 났다. 서늘한 적막.
― 너무 오랫동안 충돌이 없었어. 반란군 이것들이 아주 틈만 나면 기어오르려고 해. 이번엔 우리 승인도 거치지 않고 다온에서 총까지 보급받으려고 했단 말이다. 한 번씩 주기적으로 밟아 줘야지 정신을 차리지. 그래서 네게 지시했는데, 그걸 아무 소득도 없게 만들어 놔? 네가? 거기다가 김서혁도 이 사태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았어. 테러 내내 코빼기도 안 보이고 설계 핵을 추출하는 것을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내가 서명을 훼손해 놓지만 않았어도 꼬리를 밟힐 뻔했다.
― 맹세코 흘린 적 없습니다. 김서혁이 이번 테러를 수상하게 여겼다면, 그것은 제가 밀고해서가 아니라 그의 감이 좋았던 겁니다.
― 이번 테러의 목적이 뭐지? 알고나 있나? 네 입으로 똑똑히 말해 봐.
― 다수의 인명 피해로 반란군의 이미지를 크게 깎아내려, 그들이 도시 내 기업과 직접적인 교류를 시도하는 것을 통제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도시 내에서 테러가 자행됨으로 김서혁의 무능함을 부각시키고, 최근 반란군과 개인적인 접촉을 시도한 차인호에게 경고를 주기 위함입니다.
― 지금 그중 하나라도 성공한 게 있나?
― ……죄송합니다.
― 애초에 사망자가 적어. 역사상 이렇게 너그러운 테러가 없었다. 누구 탓이지?
― …….
― 네가 그 귀한 몸뚱이의 절반을 김서혁한테 걸치고 있지만 않았어도, 나는 널 서재희 다루듯 했을 거다. 앞으로 처신 똑바로 해.
― ……네?
― 그만 나가. 유은우 건까지 제대로 처리 못 하면 네 두 부모 중 하나가 진창에 빠지는 꼴을 보게 될 거다. 내가 이렇게 기회를 주는 것도 올해가 벌써 9년째니 너도 정신이 해이해질 만하지.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는 건 반란군 하나로 족하다.
― 교장 선생님, 방금 서재희라고……. 그게 무슨…….
무언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음성 파일이 뚝 끊겼다. 유은우가 미처 손을 대기도 전에, 랜덤으로 다른 음성 파일이 재생되었다. 비교적 최근 날짜였다.
― 교장 선생님, 말미를 주십시오. 어차피 유은우를 조금 더 살려 두어도 우리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상태론 제대로 된 소속도 없지 않습니까. 유은우가 교내에 있는 이상 취하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조급하게 생각지 마시고 이번 모의 전투까지는 지켜보시는 게 어떠신지요. 김서혁이 참관하러 온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때 유은우에게 기회를 주고…….
― 왜 그렇게 아끼는 거지?
― ……무슨 말씀이신지요. 저는 단지 효용 가치를 따져 봤을 때…….
― 반란군에서 네가 실험체로 담당하게 되었을 때 애착이라도 형성된 건가? 그래서 내게 그 말도 안 되는 짜깁기 설계를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제출한 거고?
― …….
― 흰 칼날 프로젝트 재개해. 테스트 영상을 보니 재료가 아주 좋던데.
― 교장 선생님, 그건 오래전에 실패했습니다. 불가능한 프로젝트입니다.
― 정윤환, 네가 군인 신분으로 반란군에 드나들 듯이, 반란군에서도 이쪽을 드나든다. 내가 너를 통해서만 네 동향을 파악한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 …….
― 머리 굴려 봤자 네놈은 짐작도 못 할 거다. 조금만 마음을 주면 다 믿어 버리는 그 성격에 의심이나 할 수 있겠나? 캐내서 피할 생각 말고 중심 잘 잡아.
유은우는 흠칫 고개를 들었다. 열린 문가에 정윤환이 서 있었다. 열꽃으로 흐드러져서 문에 비스듬하게 기댄 채, 그는 넋을 잃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 교장 선생님, 유은우는 제가 이쪽으로 끌어오겠습니다. 교장 선생님께서도 가까이 두고 살펴보시려고 입학을 허락하셨잖습니까.
― 내가 보기에 그 애는 뼛속까지 김서혁 사람이다. 괜히 수고스럽게 들여왔어. 그 애가 여기서 스파이 짓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정윤환이 타박타박 힘없이 걸어와 유은우 앞에 섰다. 붉게 열 오른 손가락이 다가왔다.
― 교장 선생님, 시간을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든…….
정윤환은 유은우의 오른손을 잡아, 녹음이 재생되고 있는 이프를 눌렀다. 딸깍 소리가 나면서 메모리가 튀어나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메모리를 주우려는 듯 정윤환이 몸을 숙였다. 그의 이마가 유은우의 무릎에 툭 닿았다.
정윤환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대로 고요하게 멈춰 있었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낙화했다. 그리 오만하던 두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마른 손이 유은우의 다리를 쓸 듯하다가 바닥으로 물 흐르듯 떨어졌다. 뜨거운 이마만 여전히 유은우의 무릎에 머물러 있었다.
정윤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은우는, 그가 몸을 낮춘 의미를 알았다.
유은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입을 열지 않았다. 이 잔인한 침묵이, 그의 순간을 영원으로 연장하고, 그의 죄를 선명하게 부각함을 아는데도 그랬다. 정윤환은 유은우가 허락하는 딱 그만큼만 무릎에 이마를 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오랜 정적 끝에, 유은우는 손을 들어 정윤환의 머리에 얹었다. 유은우의 다섯 손가락이 정윤환의 머리칼로 파고들고 천천히 미끄러져 목덜미를 지나 등으로 이어졌다.
“내가 널 미워하고, 네가 날 원망하고, 네가 네 죄를 덮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짓고, 내가 널 용서하지 않으려고 되레 네게 죄를 짓는다면…….”
어린 짐승처럼 가엾게 웅크린 등.
“……이 불행은 끝이 없어.”
유은우는 말끝에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정윤환은 숨을 삼키며 밀려났다. 다음 순간, 유은우는 완전히 무릎을 꿇으며 정윤환과 마주 앉았다. 정윤환이 초라하게 고개를 비껴 시선을 떨어뜨렸으나, 유은우는 그의 등을 강하게 당겨 완전하게 끌어안았다. 맥박이 뜨겁게 살아 뛰었다. 바짝 얼어 있던 정윤환이 어느 순간 와락 울음으로 밀려왔다. 그가 흐느끼며 유은우의 목덜미에 눈을 묻었다. 유은우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 수많은 밤을 그랬듯, 정윤환의 두 팔이 유은우의 등으로 더듬더듬 뻗어 오더니 옷자락을 겨우 움켜쥐었다.
“어디서부터 시작이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 용서를 구하고 누군가 용서를 함으로써 이 불행을 끊어 낼 수 있다면…….”
유은우는 정윤환을 보듬었다.
“……우리가 하자.”
이튿날, 아침 식사를 받아 막 봉투를 뜯으려 하는데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차예원이 사색이 되어 빠른 걸음으로 정윤환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다급히 말했다.
“교장실 열렸어.”
정윤환은 차예원을 힐끔 보고는 비타민 젤리를 입에 털어 넣었다.
“듣고 있어? 교장실 열렸다고. 애들이 지금 거기 들어가서 문서 다 빼 오고 강당에서 정리하고 난리도 아니…….”
“쟤가 열었어.”
정윤환이 손을 뻗어 이쪽을 가리켰다. 유은우는 음료를 따다가 차예원에게 멱살을 잡힐 뻔했다. 간신히 피하자 차예원은 유은우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정윤환이 없었으면 또 뺨을 맞았으려나 싶을 만큼 격했다.
“너, 너, 거길, 어떻게, 어떻게 들어갔어?”
“저번에 연회 때 교장 선생님 손가락 주워 왔어요.”
“뭐어?”
차예원이 입을 딱 벌렸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정윤환이 픽 웃는 게 보였다.
“야, 차예원. 걱정하지 마. 우리 흔적 내가 어제 얼추 없애고 왔다. 교장 손가락 있으니까 쉽던데.”
차예원은 숨을 길게 뱉으며 유은우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녀가 여전히 창백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우리가 연관된 거 애들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끝장이야.”
“임원들 입단속시켰어? 걔네들도 6.5층 드나들면서 성적 조작은 했었잖아.”
“함구하라고 당부하긴 했어. 본인들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 지금 그런 말 했다가 어떻게 될지 정도는.”
“확실히 해 둬. 지금 전교생이 전부 우리한테 의지하고 있는데 교장 비리에 임원까지 연관된 거 발각되면 구심점 무너지고 다 같이 죽는 거야. 그렇게 되면 서재희가 와도 다시 뭉칠 명분이 없어져.”
순식간에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그동안 여럿이 매달려도 꿈쩍도 않던 교장실이 느닷없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학생들은 교장실이 다시는 닫히지 않도록 문을 열어 단단히 고정했다. 그들은 유은우와 정윤환이 이미 한바탕 뒤진 현장을 훼손하지 않도록 유의하며 드론으로 동영상을 꼼꼼히 촬영한 다음, 안에 들어 있는 모든 자료를 샅샅이 꺼내 넓은 강당으로 옮겨 놓고 머리를 맞대 찬찬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교장실을 연 게 누구냐는 의문은 교장실에서 나온 이 자료들은 대체 무어냐는 경악으로 바뀌었다.
“임유현 개새끼야.”
“미친 거 아니야? 이게 말이 돼?”
“교장은 그렇게 곱게 가서는 안 됐어. 살아서 죗값을 치렀어야 하는 건데.”
학생들은 사다리를 끌고 와서 강당 한쪽 벽에 교장실에서 가져온 전자지도를 부착했다. 임유현이 오래도록 은닉해 온 청사진이 거기 있었다. 새로운 용의 성체를 아홉으로 나누고, 가장 강력한 심장으로 신도시를 건설하겠다는 포부가 강당 조명 아래 훤하게 드러났다. 남은 여덟 조각은 기존의 도시를 확장시키는 데에 쓰고 죄 식민지로 돌려 버리겠다는 얼토당토않은, 그러나 퍽 구체적인 계획이 강당 바닥에 쌓인 자료로부터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야, 여기 네 이름 있다. 축하한다.”
임유현이 미리 뽑아 둔, 신도시 거주를 친히 허락하는 엄선된 시민 명단도 굴러 나왔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그 리스트를 벌레 보듯 들추며 욕을 퍼부었으나, 종국엔 그런 자료가 너무나 많이 나왔기 때문에 급기야 표기된 학생들을 호명하여 저들끼리 낄낄거리며 장난을 쳤다.
“한순간에 식민지 노예 돼서 김명훈 수발이나 들 뻔했네. 식은땀이 다 난다.”
“이거 실현되었으면 너 여친이랑 결혼 못 했겠다. 여친은 이름 있는데 넌 없어. 네가 모자란가 봄.”
“시끄러워. 이거 기준이 뭐지?”
“아까 보니까 저기 연단 밑에서 4학년 애들이 기준 뽑아 가지고 보기 좋게 정리하고 있던데. 몇 개 봤는데 기도 안 차더라. 일단 동조율이 50은 넘어야 돼. 거기서 넌 이미 탈락임.”
“거기 2학년, 조용히 좀 해. 선배, 이건 뭐예요?”
“그거 용 심장박동 측정한 거. 사해에 새로 나타난 용 말고, 지금 우리 도시 받치고 있는 그 용 심장박동 같아. 기록이 엄청 옛날부터 있거든.”
“심장은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잃어버렸어도 어딘가 있나 봐. 그러니까 측정이 가능했겠지. 여기 보면 측정자는 안 나오는데, 측정 장소는 표시되어 있거든? 전부 다 좌표가 사해야…….”
“왜 측정했지?”
“나도 모르지. 그런데 여기 보면 심장박동이 점점 느려진다? 이상하지? 용은 불사인데…….”
“그보다 이것 좀 봐. 여기 왜 중간 검토자가 빠져 있어?”
“저기 보고서도 다 그렇던데요. 결재자 임유현만 있고 기안자랑 검토자, 협조자 다 빈칸이에요.”
중요한 문서마다 기안자나 검토자가 드문드문 빠져 있었다. 정윤환이 유은우의 도움을 받아 매크로를 돌려 전자 보고서의 결재 라인을 밤새도록 삭제한 덕이었다. 원래는 서재희 이름이 다수 기록되어 있었고 정윤환도 가끔, 차예원은 드물게 있었다.
“원래라면 교수님들 서명이 들어가 있어야 하나?”
“행정실장이나 아예 외부 사람일 수도 있고.”
“재희 선배는 이거 몰랐을까?”
“물품 관리나 용 사육실 관련 보고서에만 서재희 서명 있어.”
어쩌다 서재희나 정윤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유은우는 가슴이 덜컹했다. 불안한 마음을 꾹 누르고 손도연 옆에 앉아 문서를 정리하고 메모리를 분류하는 것을 도왔다. 가끔씩 눈으로 정윤환을 좇았다. 그는 연단에 다리를 늘어뜨리고 걸터앉아 신경안정제를 연달아 몇 개나 빨아 대고 있었다. 이따금 학생들이 말을 걸면 귀찮다는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내어 당연하게도 주위에 사람이 없었다. 연다희가 탐탁잖은 표정으로 그런 정윤환을 몇 번 주시하더니 이내 서류 뭉치를 가져다가 정윤환 옆에 털썩 내려놓고는, 아프면 병원으로 돌아가고 안 아프면 일이나 도우라며 안 그래도 북적거리는데 자리 차지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정윤환은 짜증을 내더니 못 이기는 척 몇 번 훑어보는 시늉만 하고는 서류를 도로 밀어 두었다.
반면에 차예원은 다소 긴장한 얼굴로 부지런히 학생들의 자료 분석을 돕고 있었다. 혹여나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입 밖으로 내어 실수할까 봐 겁을 먹어서인지 말수가 극히 적었다.
어디에서도 언급된 적 없는 교장의 비리를 우리 손으로 밝혀내고 있다는 도취된 분위기는 해가 지면서 급격히 가라앉았다. 누군가 교장실 책장에서 보고서를 하나 찾아온 탓이었다. 그 보고서는 다른 자료와 달리 내용을 요약하여 이쪽에서 정리해라 혹은 저쪽에 추가해라 확성기로 크게 외치는 법 없이 그저 조용히 강당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학생들은 제 손에 보고서가 들어오면 침묵으로 읽고 말없이 옆 사람에게 건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의 자료였다. 당장 강당에 있는 다수의 학생이 그 사건의 희생자와 가족 또는 동기로 얽혀 있었다. 보고서는 돌고 돌아서 어느덧 유은우가 끼어 앉은 1학년 무리까지 넘어왔다. 유은우 맞은편에 양반다리로 앉아 있던 남학생이 찬찬히 그것을 살펴보았다. 그가 이리 모이라는 손짓을 했다. 주위의 학생들이 한껏 그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거 정윤환 1학년 때 파견 결과 보고서야.”
“뭐어?”
유은우의 오른편에 있던 여학생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가 재차 물었다.
“그, 나가서 다 죽은?”
남학생이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팔랑팔랑 넘겼다. 사해 지도가 나오자, 그는 보고서를 바닥에 놓고 손으로 눌러 반듯하게 폈다. 빨간색 점선으로 경로가 그려져 있었다.
“이거 봐.”
“잘 가다가 바로 꺾었네.”
“그렇지? 사출하고 5분도 채 안 지나서 이미 원래 파견 경로를 한참 벗어났어. 아예 처음부터 작정하고 방향을 튼 거야.”
“재희 선배 말 그대로네. 온 오염도 수치 측정하려다가 실패했다고 했지?”
“그리고 여기 봐. 여기 자료. 이건 개인별 동선이거든? 정윤환 거 보라고. 이 구간, 지그재그로 도는 거 보이지? 정윤환이 미쳤다고 제자리를 돌 리는 없고. 여기 나머지 애들 동선을 여기다가 갖다 대 보면, 아, 보기 힘들다, 잠시만…….”
남학생은 아예 집게를 빼서 보고서를 낱장으로 만든 후 투명한 종이들만 차곡차곡 한데 모아 바닥에 놓고 양손으로 팽팽하게 당겼다. 열아홉 명의 동선이 한 번에 겹쳐 드러났다.
“정윤환이 나머지 팀원 열여덟 명하고 전부 한 번씩 접촉하는 거 보이지?”
“왜 이래?”
“아직도 모르겠어? 본인 총이 고장 난 거야. 그래서 다른 팀원들 총을 급한 대로 쥐어 보느라고 이렇게 한곳에서 지그재그로 움직인 거라고. 남이 쓰던 총, 자기 것만큼 익숙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그나마 상성이 맞는 걸로 골라야 했을 테니까.”
“사출할 때 테스트 받았을 텐데 5분 만에 고장 났단 말이야?”
“아니면 일부러 테스트 피했을 수도 있고. 아무래도 학교 눈 피해서 증거 수집하러 가는 거니까 총에 수집 프로그램 깐다고 일부러 테스트 안 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총 고장 난 것 모를 수 있잖아.”
“총 웬만하면 고장 잘 안 나는데. 게다가 정윤환 총 아무거나 안 써. 고급 모델만 쓰던데.”
“여길 봐. 다른 애들이랑은 한 번씩만 접촉하는데, 손주연하고는 두 번 접촉해. 두 번째 접촉하고 나서는 둘이 계속 붙어 다녀.”
유은우는 왼쪽에 앉은 손도연이 몸을 바짝 굳히는 것을 느꼈다. 유은우는 손도연의 손을 살며시 잡아 주었다. 다른 학생이 살짝 손도연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손주연 총이 그나마 제일 맞았나 보다. 그래서 손주연 보호하려고 데리고 다닌 거고.”
“그런 것 같아. 그 뒤에 이렇게 따라가다 보면, 이 구간 보이지? 팀원들이 한군데 뭉쳐 있고, 정윤환이랑 손주연만 이쪽에 있잖아. 기상 지도를 겹쳐 보면 온이 이쪽에서 이쪽으로 흐르고 있으니까, 정윤환이 여기서 팀원들이 안 다치게 혼자서 막았던 것 같…….”
“야, 가자.”
학생들이 일시에 반짝 고개를 들었다. 정윤환이 삐딱하게 서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선을 해석하던 남학생이 머뭇머뭇 말했다.
“어, 은우 우리랑 저녁밥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정윤환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뭔 헛소리야. 우리 애기 환자야. 병원밥 먹어야 돼. 야, 뭐 해? 빨리 가자. 배고파 죽겠다. 내일 아침에 재활 받으려면 오늘 빨리 자야 된단 말이야.”
곧바로 손목을 잡혔다. 이어 정윤환이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었다. 거의 반강제적으로 끌려가는 와중에 뒤를 돌아보니 학생들이 아쉬운 눈으로 너도나도 입을 모아 인사하고 있었다. 잘 가. 은우 잘 가. 내일 봐. 오늘 고생했어. 그 사이에서 손도연은 고개를 숙이고 보고서를 정신없이 보고 있었다.
교정은 어스름이 드리워져 있었고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정윤환은 큰 보폭으로 병원을 향해 걸으며 다른 한 손으로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넘겼다. 유은우는 정윤환에게 잡힌 손목을 빼려고 비틀어 보았다. 그러나 정윤환은 꿈쩍도 안했다. 그는 정신이 홀라당 빠진 것처럼 쭉쭉 걷기만 했다. 급기야 유은우는 제 손목을 잡고 있는 정윤환 손을 탁탁 쳤다.
“이거 좀 놔. 애기 손목 부러지겠다. 왜 나 끌고 다녀. 혼자 좀 다닐 순 없어?”
정윤환이 눈을 찡그렸다. 그는 손목을 놓기는커녕 더 힘을 주었다.
“서재희가 너랑 나를 연인으로 묶었잖아. 서재희가 하라는 대로 하고 있을 뿐이야. 사심 같은 거 없다고.”
“아아, 사심이 없으시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해. 너 지금 손에 불붙은 것처럼 뜨거워. 그리고 막 손에서 심장 뛰는 게 느껴진다고. 네 손에 심장 붙어 있는 것처럼 손이 쿵쿵거리는데 사심이 없어? 이거 안 놔?”
“그…….”
정윤환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목부터 귓불까지 빨개져서는 정윤환이 잡고 있던 유은우의 손목을 탁 내쳤다.
“그렇게 꼭 따박따박 말로 해야겠어? 모른 척 좀 해 주면 안 돼? 몸이 멋대로 그러는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내가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고 심장이 너만 보면 알아서 미쳐 날뛰는데, 그러지 말라고 하면 내가 어떡할까? 혀 깨물고 콱 죽어 버릴까? 어? 나 괴롭히는 것도 정도껏 해. 난 지금 너보다 더 많이 다쳤잖아.”
정윤환은 완전히 토라졌다. 간밤에 교장실에서 무릎을 꿇고 울던 그 사람은 어디로 갔나 싶어 유은우도 유은우대로 어이가 없었다. 휘적휘적 앞서가는 정윤환을, 유은우는 잽싸게 달려가 따라잡았다.
“그때 어떻게 된 거야?”
“뭐?”
“파견.”
정윤환이 우뚝 멈춰 섰다. 그만 좀 하라고 소리를 지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나, 정윤환은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는 손을 말아 눈을 비비더니 한숨처럼 대답했다.
“손주연 총이 나한테 잘 안 맞더라고. 처음에 잡았을 때는 내 총 느낌이랑 꽤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구성이 약하더라. 쓰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터져 버렸어. 나는 몰랐지. 그런 싸구려 총은 중첩을 못 견디니까 나눠서 해야 한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난 항상 제일 좋은 것만 쓰는데.”
그러더니 힘없이 중얼거렸다.
“차예원이 틀린 말 한 건 아니지. 내가 남 입장에서 생각 잘 못한다는 거.”
“아직도 떠올리면 힘들어?”
“조금?”
정윤환이 유은우와 눈을 맞추었다. 그가 이어 말했다.
“그런데 괜찮아. 내가 그때 애들한테 나만 믿으라고 했거든. 그런데 아무도 못 지켜 주었으니까, 잊어버리고 속 편하게 사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해. 아까 네 친구 표정 봤지? 손주연 동생. 걔도 아직 안 잊었잖아. 아마 평생 못 잊을걸. 그러니까 나도 잊으면 안 돼. 매일매일 기억해야 해.”
익명 게시판 ― 전체 기초학교 도시연합 중앙학교 질문답변 자유게시판 서재희로부터 받은 편지와 첨부 파일(동영상 및 학생부 데이터)을 전부 공개합니다. ―71,298
ㅇㅇ | xxxx.xx.xx
안녕하세요. 제8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시민입니다.
서재희는 공개 진술에서 총 82건의 우편물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그 우편물의 대부분이 공개 진술 당일날 발송 완료되었습니다. 제게는 아무 소식도 없어 해당 사항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 없었으나, 제 딸이 단순한 사고사여서 얼마나 다행인가 눈물마저 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편물이 도착했네요. 서재희의 공개 진술로부터 무려 나흘이 지났습니다. 아마도 82건의 우편물 중 가장 마지막으로 도달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제8도시에 거주하고 있으니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닙니다. 가장 낙후된 곳으로, 가끔 우편물이 누락될 정도니까요. 사실 무사히 도착한 게 기적입니다. 도시연합에서는 강력히 부인하고 있지만, 미처 도착하지 못한 우편물을 회수하기 위해 도시연합 직원들이 우체국 전산을 통제하려 했다는 보도까지 나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제 딸은 3년 전에 사망했습니다.
사망 당시 도시연합 중앙학교 5학년 졸업반이었습니다. 딸은 늘 도시연합군에 들어가고 싶어 했으나 성적이 아슬아슬하게 모자라,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습니다. 딸은 제게, 교내 랭킹을 뒤집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다가오는 모의 전투뿐이라고 여러 번 말했습니다. 꼭 이기겠다고요. 잠도 줄이며 팀원들과 치열하게 연습했던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그토록 열심히 준비했던 모의 전투가 치러진 날, 저는 학교로부터 제 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학교 측의 설명에 의하면, 제 딸이 모의 전투 도중 복통을 호소했다고 합니다. 이어 정신을 잃고 쓰러졌으며, 병원으로 옮겨지는 도중 숨을 거두었다고요.
그날 바로 학교로 찾아갔으나 죽은 딸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제 딸의 시신이 빠르게 침식되고 있으므로 절대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저 또한 동조자입니다. 이미 숨이 끊어진 시체가 침식되면 얼마나 위험한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학교가 적절한 조치를 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학교에서 ‘침식과 전이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시신을 처분하겠다고 통보했을 때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딸 없이 딸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러나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제 딸이 모의 전투에서 이기기 위하여 총에 불법 프로그램을 설치했다고 했습니다. 웹상에 전염병처럼 떠돌아다니는, 단시간 동안 패턴의 빠른 중첩을 가능케 하나 대신 안정성이 크게 떨어지는, 말도 안 되게 조잡한 그런 프로그램 말입니다. 모의 전투에서 바짝 긴장한 제 딸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심하게 손을 떨었고, 불법 프로그램 설치로 불안정해진 총이 제어력까지 잃으며 온이 딸의 내부로 터졌다고 했습니다.
믿기 어려웠습니다. 제 딸은 불법 프로그램이라면 치를 떨었으니까요. 저도 마찬가지고, 비동조자인 제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전 남편이 업무를 수행하다가 총의 오작동으로 크게 고생한 적이 있었거든요. 침식까지는 아니었으나 다시는 총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다쳤습니다. 당시 저희는 불완전한 총을 제작하여 유통한 업체, 다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또한 총의 오작동으로 일어난 사고의 책임을 개인의 부주의로 돌리고 행정처분까지 내린 도시연합에 행정심판을 청구했습니다. 소득 없이 길고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잘 다니고 있던 제2도시의 회사를 그만두고 제8도시로 이사 올 만큼 가세가 기울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제 딸이 불법 프로그램에 손을 대다니요. 그럴 리 없다며 학교에 근거 자료를 요청하였으나 번번이 거절당했습니다. 알고 보니 입학하면서 서명한 동의서에, 학교 측에서 학부모에게 정보를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는 조항이 있더군요. 깨알 같은 글씨로 나열되어 잘 보이지도 않는 그 여러 장의 동의서 말입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기에 그리 묻어 두고 산 지 3년입니다. 눈물이 마른 지 오래라 여겼으나 아니었나 봅니다. 서재희의 편지에 제 딸이 살해당한 정황이 있었습니다.
현재 총을 제작 유통하는 업체는, 다온, 단 한 군데뿐입니다. 도시연합과의 유착 관계는 굳이 제가 설명치 않아도 잘 아시지요. 딸이 사망하기 몇 달 전부터, 저희 부부는 다른 피해자와 연대하여 총의 오작동이나 불량에 관한 사례집을 무료로 제작 배포하고자 했습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찰나, 딸이 죽었습니다. 저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침식 근거 자료를 요청하며 학교와 근 1년간을 맞붙고 나니, 이미 피해자 연대는 뿔뿔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모아 놓은 돈이 바닥나자 생계가 캄캄했습니다. 사례집도 소송도 딸의 죽음을 밝히는 것도 좋지만, 우선 목구멍에 풀칠부터 해야 했습니다. 급히 직장을 구했습니다. 출근과 퇴근의 반복. 부끄럽지만, 놀랍도록 순식간에 무뎌졌습니다.
그러나 상자 속에 가지런히 정돈된 딸의 일부를 보고 결심했습니다. 더 이상 나 힘들다고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침묵으로 딸의 죽음을 헛되이 흘려보낼 수 없다.
주위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면 자연스레 잊힌다며 저를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닳기는커녕 더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딸은 제 추억 속에서 갈수록 더 예뻐집니다. 아무리 죽었다고 해도, 여전히 소중한 제 자식이 은폐된 악의로 훼손되며 급기야 역겨운 무언가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공개하기까지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용기 내어 글을 씁니다. 제 작은 한 발짝이, 보장된 미래 대신 어둠을 지고 앞으로 나선 서재희의 발언에 신뢰를 더해 주기를 바랍니다.
많은 분이 서재희를 지지하고 있지만, 어떤 분들은 여전히 그의 모든 자료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우편물을 받은 학부모 중 대다수가 감히 동영상까지는 공개하지 못하고, 편지만 노출했기 때문으로 짐작됩니다. 저는 서재희에게서 받은 동영상을 가감 없이 그대로 공개하겠습니다. 진위 여부를 직접 비교 판단하실 수 있도록, 아껴 간직하고 있던 살아생전 제 딸의 모의 전투 동영상을 함께 첨부합니다. 그 끔찍함을 견디고 끝까지 보신다면, 두 동영상의 주체가 조작 없이 동일 인물임을 명백하게 인지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비록 끝에 가서는 더 이상 인간의 형태라 볼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현재 도시연합 본부 앞에서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분이 추측하시는 것처럼 저 또한 낙원의 이론에 희생된 학생들이 비단 82명만은 아닐 거라고 짐작합니다. 서재희가 보낸 82명의 희생자는 각자 살해된 경위나 학년, 출신이 겹치지 않고 다양합니다. 서재희가 골라서 보냈다고 추측합니다. 각 케이스의 대표적인 표본을 추출했겠지요. 그렇다면 실제 희생자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겁니다. 어쩌면 학교 밖에도 그런 희생자가 존재할지 모른다는 신빙성 있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서재희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임유현을 포기하면서까지 낙원의 이론 폭로의 물꼬를 텄습니다. 그 불씨가 번져 어둠을 걷어 내며 나머지 진실까지 밝혀내도록 지켜 내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몫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립지대를 보존해야 합니다. 도시연합 중앙학교는 범죄 현장인 동시에 도시연합의 법망을 공식적으로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입니다. 탁월한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유연하게 대응 가능하니, 도시연합에게 진실을 요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집단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 기득권의 자녀가 한공간에 모여 있으므로 첨예하게 대립할 위험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각기 다른 권력들을 한 번에 휘어잡을 만한 리더가 필요한데, 그 자리에 서재희가 가장 적합하다는 데에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겁니다. 그는 여덟 도시의 미래를 위하여 반드시 학교로 복귀해야 합니다.
앞으로 사흘 후면 서재희의 처분에 대해 유효 시민 총투표가 진행됩니다. 그에게 빚을 진 시민 중 한 명으로서, 서재희의 정상참작을 진심으로 지지합니다.
유은우는 차마 그 아래 첨부된 동영상을 재생시킬 수 없었다. 손가락은 화면과 약간의 틈만 두고 머뭇거렸다. 등으로 식은땀이 솟았다.
“보지 마. 어차피 도영인가 뭔가 네 친구가 틀어 줘서 내용 다 알잖아.”
옆에서 정윤환이 한마디 했다. 유은우는 토분을 고쳐 안았다. 잎이 살랑대며 턱을 스쳤다. 유은우가 말했다.
“진짜 다 막혀도 온하나비는 접속이 되네.”
“재활에 집중하세요. 유은우 학생, 이프 끄시고요.”
간호사가 정윤환의 팔뚝에 주사를 놓으며 주의를 주었다. 유은우는 이프를 끄고, 재활기에서 울리는 신호음에 맞춰 손목을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간호사가 재활실을 나가자마자 유은우는 안고 있던 토분을 내려놓고 다시 이프를 켰다. 결국 동영상은 건너뛰었다. 이미 손도연의 동영상을 보았으니 전말은 알았다. 다른 사람 것이라고 다르겠는가. 더 볼 필요는 없었다. 사실 한 번 더 볼 자신이 없었다. 손가락을 휙휙 움직여 댓글을 살폈다.
댓글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신고된 댓글입니다.
┗ 성숙한 시민분들, 오늘 오후 시위에 꼭 참석해 주세요. 시간 : 오후 7시, 장소 : 도시연합 본부 중앙대로.
┗ 도시연합장의 해명을 요구합니다.
┗ 용기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다른 사람들이 왜 여태까지 동영상 공개 안 했는지 알겠다.......
┗ 아 씨발 저게 뭐야ㅠㅠㅠㅠ 어후ㅜㅜㅜㅜㅜㅜㅜ
┗ 동조자들 비동조자 차별하는 거 꼴도 보기 싫었는데ㅋㅋㅋㅋㅋㅋㅋ 자기들끼리 아주 편 가르고 뒤에서 죽이고 난리 났네. 세상 참 잘 돌아간다^^
┗ 저기 동영상에서 2분 3초에 시체 위로 뿌리는 거 뭔가요? 수박 씨 같은 거요.
┗ 깨 아냐?ㅋㅋㅋ 양념.
┗ 위에 미친놈아.
┗ 꿈에 나올까 무섭네ㅋㅋㅋㅋㅋㅋㅋㅋ
┗ 어, 진짜 저게 뭐지?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뭐지, 저거?
┗ 이거 미성년자가 보면 안 되게 해야 하는 거 아니냐.
┗ 난 오히려 애들이 더 봐야 한다고 생각함. 더러운 세상 안 보이게 손으로 가려 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
┗ 토 나와.
┗ 그럼 넌 어린애들한테도 저런 걸 여과 없이 다 보여 줘도 된다는 뜻이야? 말로 설명해 주면 되지 저걸 굳이 보여 줄 필요가 있냐는 말이야, 내말은.
┗ 그럼 네 자식 눈만 가려. 난 남녀노소 안 가리고 모두가 봤으면 좋겠다.
┗ 진정한 시민이십니다. 가슴이 찢겨 말이 아닐 텐데 이렇게 공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저거 용 비늘입니다.
┗ 도시연합장의 해명을 요구합니다.
┗ 이러고도 당신이 부모냐. 딸의 시체가 저렇게 취급되는데 이걸 인터넷에 전부 공개하고 제정신이냐??? 죽은 딸은 뭔 죄임??? 진짜 부모인지 의심스럽다. 다른 사람 것을 자기 것처럼 올린 것은 아닌지?
┗?? 용 비늘? 확실함?
┗ 저 작년에 용 연구소에서 인턴 1년 했었습니다. 분명히 용 비늘입니다. 제가 저 용 비늘을 매일매일 한 통씩 날라서 잘 압니다. 되게 비싸고요. 보기보다 엄청 무거워요. 저기 저울에 무게 재는 거 보이시죠?
┗ 글쓴 분 응원해요.
┗ 힘내세요.
┗ 글쓴이는 동영상 두 개를 비교해 보라는데 실상은 역겨워서 제대로 보지도 못하겠다..... 어후.
┗ 일단 동영상 봤을 때 조작은 아님. 손등에 점이나 눈매 이런 게 다 똑같음.
┗ 비위 강한 누가 동영상 하나하나 캡쳐해서 비교문 올려 주겠지. 그거나 기다려야겠다~
┗ 너무 마음이 아프다... 빨리 진실이 밝혀지길....
┗ 용 비늘 용도가 뭔데? 저걸 왜 같이 넣는 거야? 비동조자라 그런가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 저도 모릅니다. 용의 부산물 중 싸구려는 용도가 만인에게 알려져 있고, 비싼 건 기밀이죠.
┗ 뭐야, 그럼 결국 모른다는 거자나ㅡㅡ 장난하나.
┗ 용 비늘이라고요. 플라스틱 쪼가리가 아니라. 용도는 모르지만 뭔지는 알려 드렸잖습니까.
┗ 오늘 오후 7시부터 시위 재개합니다. 깨어 있는 시민이라면 도시연합 본부 앞 중앙대로로 모두 모이세요!
┗ 흠... 이상하네? 하필이면 용 비늘? 학교 중립지대로 지정되고 나서 도시연합에서 용 연구소 잠정 폐쇄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 왜 용 연구소를 폐쇄함? 냄새가 난다....
┗ ㅇㅇ 맞음. 지금 용 연구소 직원들 완전 최상위 연구관 몇 명만 남고 전부 다 사해로 파견된 상태야.
┗ 왜?
┗ 신고된 댓글입니다.
┗ 바보냐. 잠정 폐쇄가 아니고 그냥 연구원들이 전부 사해로 나가서 비어 있는 것뿐이야. 사해에 새 용 한 마리 나타났잖아. 그거 포획한다고 다 나가 있지.
┗ 제5도시 시민입니당. 현재 용 연구소는 단순히 비어 있는 상태는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 엄마가 거기 다니시는데 오늘도 출근하셨거든요! 그리고 연구소 근방은 전부 교통 통제되고 있어서 일반인은 접근 불가합니다. 경찰이 막고 있어용!! 맨날맨날 학교 가는데 돌아가야 해서 시간 너무 오래 걸림ㅠ
┗ 이상하네. 누구는 잠정 폐쇄라고 하고, 누구는 단순히 비어 있는 거라고 하고.... 근데 왜 교통 통제까지 하지? 그리고 왜 용 비늘이 저기 쓰이는 거야.
┗ ㅋㅋㅋㅋㅋ 저렇게 사람을 연료로 때는 거에 용 연구소가 한몫하고 있는 거겠지. 아니면 비싸다는 용 비늘이 저기 쓰일 리가 있겠어? 용 연구소 보안 엄격한 거 알지? 저 짓 할 때마다 일일이 용 비늘을 훔쳐 왔다고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고, 지원받았겠지? 용 연구소 해명해야겠네ㅋㅋㅋ
┗ 글 삭제되기 전에 복사해서 옮겨 둡시다. 동영상 다들 다운받아 두시고요!!!!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런 용기가 모여 비리가 밝혀지고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길 기원합니다. 응원합니다.
┗ 저거 동영상 다운받았다가 내 컴터 썩는 거 아니야???ㅋㅋㅋㅋㅋㅋ
┗ 말 함부로 하는 사람 많네.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의 부모가 올린 글이고요. 생각하고 댓글 다세요.
┗ 이번 선거 어찌 되려나.
┗ 선거고 뭐고 일단 차인호 자리에서 내려와라!!!!!
┗ 동조자들 다 죽어 버려. 하는 짓 더럽네 진짜.
┗ 그래서 글의 요지가 뭔데? 결국 다온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까 피해 보상 요구하는 거 아닌가? 결국 돈 내놔라 이거 아니야?
┗ 글 좀 제대로 읽어.
┗ ㅎㅎ도시연합 중앙학교 지원 안 하길 정말 잘했당.
┗ 못 간 거 아니고?
┗ 비단 동조자에게만 일어난 일은 아닐 겁니다. 사회의 예비 기득권이나 다름없는 어린 동조자들이 저렇게 소리 소문 없이 희생당했는데 비동조자라고 무사했을까요? 우리가 모를 뿐이겠지요. 여기서 동조자와 비동조자의 판가름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으로서 연대해야 할 때입니다.
┗ 무서워서 세상 살겠냐ㅎ
┗ 우리 오빠 중앙 학생이라서 중립지대 안에 있는데 너무 걱정된다. 정말. 후.
┗ 내 동생도 지금 중앙학교에 있어. 지금 연락이 안 돼.
┗ 글쓴이는 도시연합 중앙학교를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하네. 이게 좀 위험한 것 같아. 왜냐하면 도시연합 중앙학교는 동조자, 그것도 엄청나게 특출한 동조자들만 밀집되어 있음. 그야말로 준비된 사회의 새싹 기득권이지. 당연히 기존 기득권의 견제나 견인이 있을 것이고. 현재 기득권들의 아귀다툼에 따라 학생들도 희생됐을 거임. 학교 전체가 온갖 비리의 온상이요, 범죄의 구덩이ㅋㅋㅋㅋㅋㅋ 그런데 쟤들이 세상을 뒤집는다고?? 말도 안 돼ㅋㅋㅋㅋㅋ 그냥 고개만 처박고 모르는 척 있다가 좀 진정되면 학교 계속 다닐걸?? 그러다가 졸업하고 차례차례 윗대가리에 앉는 거고, 세상은 또 그렇게 돌아가겠지^^ 글쓴이한테는 미안하지만 당신 하나 글 올린 게 대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더 이상 딸 얼굴 공개치 마시고 글 내리세요~ 생각해서 하는 말임.
┗ 어휴... 그러니까 서재희를 학교로 복귀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잖아. 리더가 방향을 어떻게 잡아 주느냐에 달려 있다고.
┗ 학교 하나만 파도 도시연합 모든 비리가 다 밝혀질 듯. 주요 인사들 자녀가 전부 그 학교에 모여 있어서.
┗ 그래서 군이 학교를 통제하고 있잖아.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어.
┗ 군이 학교를 통제하는 게 아니고 미숙한 학생들 사고 일어날까 봐 군이 대기하고 있는 거야. 학생들하고 전부 합의된 내용이고. 뉴스 안 보냐.
┗ 아직도 언론에 휘둘리는 바보가 있네. 총 들고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합의는 무슨 합의.
┗ 나는 오히려 그런 병아리 기득권이라서 더 희망이 보인다고 생각해. 일반 힘없는 시민들이 저런 꼴을 당했다면 이렇게 공론화될 수 있었을까? 중앙학교 애들이 낙원의 이론을 밝혀낸다면 그야말로 세상이 뒤집어지는 거겠지.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오는 일련의 과정이 짧아지잖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너야말로 검증된 동조자라고 해서 색안경 끼고 보는 건 아닌지?
┗ 맞아. 그리고 서재희는 그저 그런 기득권이랑은 차원이 다름. 이번에 졸업 후 진로도 도시연합군으로 안 썼어. 원체 욕심이 없는 사람임. 모의 전투 동영상에서 지휘 스타일 보면 딱 답이 나오지.
┗ 진짜? 원서 어디로 씀??
┗ 용 연구소.
┗ 그런데 동영상 보면 시체를 토막 내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네요. 이미 잘려 있어요. 앞이 편집된 것 같은데 미심쩍네요. 동영상 원본 그대로 올린 거 맞습니까?
┗ 의심할 걸 의심해라. 네 논리대로라면 저 애가 태어난 것부터 올려야 되니?
┗ 와. 군으로 가면 인생 탄탄대로일 텐데. 서재희가 정윤환보다 김서혁 후임자로 더 적합하다는 사람도 많은데, 왜 굳이 용 연구소로 썼지.
┗ 명예, 욕심 이런 거 다 버리고 하고 싶은 걸 선택한 거 아닐까.
┗ 멋있다 진짜.
┗ 반반한 낯짝 하나 보고 멋있긴ㅋㅋㅋ 속셈이 있겠지.
┗ 무슨 속셈??ㅋㅋㅋ 무려 임유현을 버리고 모든 걸 폭로한 서재희가 대체 무슨 속셈이 있다는 거지? 도시연합 통틀어 최고로 든든한 후원자를 제 손으로 먼저 떠나보내는 각오까지 하면서 총대메고 나섰어. 말 함부로 하지 말고 시위나 나와.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이번에 서재희 정상참작 안 될까 봐 존나 불안하네.
┗ 그래?ㅋㅋㅋㅋ 그게 그렇게 대단한가? 난 그냥 양아버지를 살해한 패륜아로밖에 안 보이는데ㅋㅋㅋㅋ
┗ 걱정 안 해도 될 듯. 각 도시마다 인구의 3분의 1 가까이가 파업까지 불사하고 시청에 몰려가서 시위 중이라 서재희 정상참작 당연히 될 것 같아. 오히려 영웅이지. 솔직히 서재희가 직접 임유현을 살해한 것도 아니잖아.
┗ 살인에 실패하면 죄가 줄어드니? 시도만으로도 이미 범죄자지.
┗ 살인 미수?
┗ 악의로 그런 게 아니잖아. 공개 진술 때 서재희 우는데 우리 가족도 티비 앞에서 다 같이 울었다. 아버지나 다름없는 사람 목숨 끊을 각오하면서 그 마음이 어땠겠어. 그리고 서재희가 자기 이득을 위해서 그런 거야? 아니잖아. 도시연합을 위해서 자기가 가진 것 다 내려놓고 한 일이야.
┗ 서재희 우는 거 처음 봤어. 임유현 특집 다큐 찍으면서 서재희 옛날 고향에 폭격 떨어지고 부모님 반 죽어 있는 거에 대해서 인터뷰할 때도 담담하기만 하고 전혀 슬픈 기색 없길래, 눈물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 여태 참은 거겠지. 그런 성격이잖아. 마음이 아프더라.
┗ 솔직히 웬만한 정치인보다 나음.
┗ 어떤 의도든 살인이 정당화돼서는 안 돼. 아주 위험한 발상.
┗ 글쎄, 난 좀 의심스러운데.... 도시연합 중앙학교 5년 내내 학생회장이며 파견부장이며 도맡아 한 서재희가 정말 그 모든 정황을 몰랐을까? 터질 줄 알고 미리 실토하며 동정표를 사는 것 같기도 하고... 흠...
┗ 서재희 권력욕 없기로 유명합니다. 그런 욕심 있었으면 진작에 조기 졸업했겠죠.
┗ 이상한 놈들 많네ㅋㅋㅋㅋㅋㅋ 깔 게 없어서 서재희를 까냐. 너넨 씨발 얼마나 깨끗한데? 서재희 위치에 지금까지 행보 보면 어떤 사람인지 감을 못 잡겠냐? 허구한 날 남 못 잡아먹어 안달이니 도시연합이 이따위로 굴러가지ㅋㅋㅋㅋㅋㅋ
삐 삐 삐 삐…….
손목에 채운 재활기에서 종료음이 울렸다. 유은우는 화면에서 눈을 떼고 재활기를 풀었다. 손목을 몇 번 돌려 보았다. 통증은 가셨지만 여전히 둔했다. 힐끗 옆을 보았다.
정윤환은 어느새 의자를 젖히고 누워 있었다. 그의 발목에 채워진 재활기에서는 간간이 기계음이 났다. 정윤환은 한쪽 팔뚝으로 눈을 가리고 미동도 없어, 자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달칵, 문이 열리고 의사가 간호사 둘을 데리고 재활실로 들어왔다. 의사는 유은우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들고 있던 차트를 흔들며 바로 정윤환을 향해 말했다.
“정윤환 학생, 상태가 지금 너무…….”
“나가서 얘기하죠.”
정윤환이 의사의 말을 끊어 냈다. 그는 간호사가 제지하기도 전에 발목에서 재활기를 풀고 일어서더니, 의사의 등을 냅다 밀면서 성큼성큼 재활실을 나갔다. 유은우도 지지 않고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슬리퍼를 신지도 않고 맨발로 달렸다. 재활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문에 뭔가가 거세게 부딪혔다.
“아!”
바로 코앞에 정윤환이 있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제 머리를 붙잡고 있었다. 유은우는 문을 약간 당겨 닫으며 바로 사과했다.
“미안.”
정윤환이 눈을 잔뜩 찌푸린 채 유은우를 한번 보고는, 의사를 향해 말했다.
“진료실에 가 계세요. 제가 따라 들어가겠습니다.”
의사가 저만치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정윤환은 머리를 문지르던 손을 떼어 냈다. 그는 묘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유은우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은우가 물었다.
“나도 결과 같이 들으면 안 돼? 상태 심각한 거 아니야?”
“……됐어. 들어가. 네가 들어서 뭐가 바뀌어?”
“그래. 그럼 너 진료실 가서 의사 선생님이랑 얘기해. 난 문에 귀 붙이고 있을 거야.”
유은우는 막 재활실에서 나오려고 발을 쭉 내밀었다. 정윤환은 짜증 섞인 얼굴로 한 손으로 유은우의 어깨를 밀었다. 유은우는 버티다가 결국 도로 재활실로 밀려 들어갔다. 정윤환이 고개를 돌려 한숨을 쉬고는 다시 유은우를 보았다.
“너 나랑 사귈 거야?”
“……뭐?”
“너 나 불쌍하다고 이마 만져 주고, 등 쓸어 주고, 안아서 재워 주고, 내 침식 걱정하다가 점차 묘하게 신경 쓰게 되고, 서재희보다 날 더 좋아하게 돼서 사귀고, 키스하고, 자고. 나랑 그럴 거냐고.”
유은우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정윤환은 아무런 기대도 없는 눈으로 유은우를 물끄러미 보다가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갈색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게 떠올랐다가 사락사락 내려앉았다. 흐트러진 머리칼 아래 시선이 차가웠다.
“아니면 꺼져. 사람 욕심나게 하지 말고.”
쾅, 문이 닫혔다. 유은우는 그 사나운 공기에 밀려 저도 모르게 한 발짝 주춤 물러섰다. 닫힌 문 너머로 꽤 긴 적막이 이어졌다. 이내 짧은 한숨과 함께 발소리가 났다. 멀어졌다.
결국 유은우는 정윤환의 침식이 얼마나 호전되었는지, 혹은 어떻게 악화되었는지 단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오전 내내 정윤환은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유은우는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이 위축되었다. 이게 내 잘못이냐 따지고 싶다가도 정윤환의 쌀쌀한 낯을 보면 도로 죄인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잘잘못의 경계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재희라면 교복 입었겠지.”
강당이 있는 2층 복도로 막 들어선 정윤환과 유은우를 향해, 차예원이 냉담하게 말했다. 유은우는 바로 수긍했으나 정윤환은 발칵 화를 냈다. 오전 내내 차곡차곡 쌓여 있던 분이 만만한 대상을 찾고 한 번에 터진 듯했다. 유은우가 괜히 차예원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서재희 얘기 좀 그만해라. 좋아하는 거 존나 티 내네.”
“비교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으니 그래.”
“옷이 뭐가 중요해? 난 환자야. 아프니까 입었다고. 그리고 난 서재희가 아니…….”
“갈아입어. 네가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건들건들 올 줄 알고 내가 챙겨 왔지. 너 지금 동네 편의점 가는 거 아니잖아. 은우 너도.”
차예원이 들고 있던 쇼핑백 두 개를 정윤환과 유은우의 품에 하나씩 턱턱 밀어 안겼다. 정윤환은 쇼핑백을 복도 바닥에 패대기쳤다.
“안 입어!”
“더럽게 말 안 들어, 진짜! 지금 네 위치를 자각해!”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소리가 커지자 차예원 옆에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김산이 갑자기 불쑥 다가왔다. 그는 두 손으로 정윤환의 상의를 냅다 잡아당기더니 북 찢었다. 탄탄한 복부가 설핏 드러났다가 옷자락이 천천히 내려앉으며 도로 가려졌다.
잠깐 정적이 있었다. 저만치 강당에서 이쪽으로 부지런히 걸어오던 연다희가 분위기를 읽었는지 그대로 휙 뒤돌아 가 버렸다.
정윤환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것처럼 보였다. 그는 몇 번이나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삼켰다가를 반복하다가 거친 동작으로 바닥에서 쇼핑백을 잡아챘다. 그러더니 근처 빈 강의실로 쑥 들어가 버렸다. 강의실 문이 부서져라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세 살 애기 옷 입히는 것도 이거보단 쉽겠다. 잘했어.”
차예원이 팔꿈치로 김산을 툭 쳤다. 그러더니 닫힌 문을 향해 가볍게 소리쳤다.
“넥타이랑 다 매고 나와! 빼먹지 말고! 잘생긴 얼굴 옷발 받고 확 사는 것 좀 보자!”
김산이 유은우를 보더니 말없이 맞은편 강의실을 가리켰다. 유은우는 강의실 문을 열어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들어가서 문을 닫고 등을 기대고 섰다. 오래 비어 있었는지 냉기가 바닥에 엷게 깔려 있었다. 쇼핑백을 근처 책상에 올려 두었다. 환자복 상의 단추를 하나씩 끄르다가 문득 손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었다.
오후의 긴 햇살이 강의실을 비스듬히 가로질렀다.
여기서 서재희하고 페어 했었어.
유은우는 그대로 잠시 멈춰 있었다. 서로의 속을 경계하고 이익을 가려내던 순간이 아주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유은우는 마른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가, 이내 빠르게 상의 단추를 풀었다. 교복으로 갈아입고 보니 쇼핑백에 총이 들어 있었다. 페이크가 아닌, 유은우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진짜 총이었다. 유은우는 총신을 한번 쓸어 보고는 홀스터에 채웠다.
차예원의 조언은 탁월했다. 환자복 입고 설렁설렁 갈 자리가 아니었다. 교복을 갖춰 입고 정윤환과 강당에 들어서자마자 유은우는 그만 숨이 탁 막혔다.
여태 사람만 많았지 스산하기만 하던 강당은, 몰라보게 바뀌어 있었다.
도시연합을 질타하고 서재희의 정상참작을 요구하는 색색의 플래카드들이 수없이 걸려 강당의 벽이 아예 보이질 않았다. 드론 수십 개가 붕붕거리며 날아다녔다. 수많은 학생이 바삐 움직였다. 강당 드문드문 모여 앉아 영사기에 드론을 꽂아 놓고 홀로그램을 띄워 열렬히 분석하는 무리도 있었고, 직접 총을 들고 조준하며 다른 이들에게 시범을 보이는 학생도 있었다.
유은우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데, 몇몇 학생들이 거대한 전자 종이를 둘둘 말아 운반하며 바로 옆을 지나갔다. 유은우는 황급히 물러서 비켜 주었다. 학생들이 유은우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정윤환을 보자마자 놀랍도록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정윤환은 얼결에 그 인사를 받았다. 그 학생들은 부지런히 강당을 가로지르더니 이미 플래카드로 가득한 한쪽 벽에 사다리를 세우고 운반해 온 전자 종이를 펼쳐 부착했다. 그것은 거대한 도시연합 중앙학교 조감도였다. 조감도를 붙이고 나자 한 학생이 총을 꺼내 전자 종이 위로 사격했다. 그가 총구를 움직일 때마다 조감도가 확대 축소되고, 각 건물의 층수가 쪼개지며 세밀해졌다. 몇몇이 박수를 쳤다.
강당 한쪽에 서른 명 정도 되는 학생들이 오글오글 질서 정연하게 모여 있었다. 대부분이 1학년 다홍색 배지를 달고 있었다. 간혹 다른 학년 배지도 보였다. 그들은 자신의 옆에 캐리어를 하나씩 두고 쭈그려 앉아, 학생회 고세민이 무어라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정윤환이 그어 놓은 선은 이미 의미가 없었다. 그가 공중에 그어 놓은 푸른 선에는 하얗게 풍성한 종이꽃이 빽빽하게 매달려 있었다. 새하얀 종이꽃마다 까만 리본이 묶여 간간이 흔들렸다. 리본마다 희생자의 명찰과 배지가 달려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정윤환이 넥타이에 검지를 걸어 끄르며 숨을 토했다. 그는 완전히 질린 얼굴로 차예원을 돌아보았다. 차예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응? 뭐가? 희생자 명찰이랑 배지? 명찰은 행정실에서 틀 가져와서 찍어 낸 거야. 온하나비에 돌아다니는 명단 보고 82명 것 전부 만들었어. 배지는 사망할 당시 학년에 맞춰서 애들이 자기 것을 달아 놓은 거야. 음, 그리고 저기 벽에 붙어 있는 리스트는, 우편물 발송된 82명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사해에 파견 나가서 실종되거나 미심쩍은 이유로 사고사한 학생들 리스트야. 은폐된 희생자라고 생각하고 애들이 만들었어. 지금 여기 없는 애들은 전부 모의 전투실에 있어. 연습 중이라. 시간 되면 곧 올 거야. 그리고…….”
“아니,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정윤환이 손사래를 쳤다. 그는 황망한 얼굴로 강당을 둘러보고는 다시 차예원을 보았다.
“집에 간다는 사람은 없어? 내가 선까지 그어 놨잖아.”
“없는데.”
차예원이 가볍게 말했다. 그녀가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은 예외. 지병이 있거나, 다쳤거나, 부모님이 아프시거나, 랭킹이 낮거나, 가정 형편이 안 좋아서 온 가족이 동조자 하나에 의지하고 있는 학생들. 쟤네는 집으로 돌려보낼 거야. 안 가고 남아서 무엇이든 돕겠다고 고집 피우는 애들도 있어서 겨우 설득했어. 지금 고세민이 신신당부하고 있어. 절대 온하나비 발설하지 말고, 나가서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이쪽에 도움이 될지…….”
“일단 캐리어는 빼라고 해. 어디 소풍 가나.”
발끝에 무언가 걸렸다. 인쇄된 종이였다. 유은우는 허리를 숙여 종이를 주워 들었다.
우리 동조자는 도시연합의 평화와 시민의 행복에 기여한다.
우리 동조자는 비동조자와 화합하고 약자를 위해 헌신한다.
우리 동조자는 타고난 재능을 악의 수단으로 쓰지 않는다.
우리 동조자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불의에 굴하지 않는다.
“동조자 헌장이야. 애들이 인쇄해서 뿌린 모양이야.”
김산이 조용히 이어 말했다.
“아이러니하지. 동조자로 나고 자라면 온갖 행사에서 이 헌장을 수십 번 외곤 해. 너무 당연한 말이라 다들 잊고 살지만, 이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유은우는 종이를 꼭 쥔 채 고개를 들었다. 스크린에 학생들 명단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팀 구성이었다. 유은우가 물었다.
“스크린에 저 팀 명단은 뭐예요?”
김산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군과 충돌하고 전투로 번졌을 때 싸울 팀 짜 놓은 거야. 우리도 알아. 평화 시위는 언론이 지켜보고 있는 공개적인 장소에서만 가능하다는 걸. 가령 도시연합 본부 앞에서 벌어지는 시위 같은 거 말이야. 우린 지금 군에 의해 폐쇄되고 통신도 끊겼지. 부딪힌다면 무력뿐이야. 거기 대비하려고 짰어.”
정윤환이 불쑥 말했다.
“팀은 서재희 오면 짜는 게 어때?”
“재희 선배가 짠 팀이에요.”
연다희가 걸어오며 말했다. 정윤환이 미간을 좁혔다. 연다희가 덧붙였다.
“이번에 팀전 앞두고 재희 선배가 각 팀의 리더만 골라 간 거 아시죠?”
“몰라.”
정윤환의 대답에 차예원이 눈을 흘겼다.
“팀전에 관심이 없어도 그렇게 없니. 원래 팀전 날짜 공고 나면 재희가 바로 본인 팀 먼저 짜고, 남는 애들끼리 거기에 대응해서 짜곤 했어. 그런데 이번엔 재희가 유독 팀 짜는 게 늦었어. 그래서 애들이 기다리다 못해 먼저 팀을 짜서 제출했는데, 재희가 그 팀들의 리더만 싹 뽑아 갔단 말이야.”
연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들 난리 났었어요. 리더가 사라지니 팀을 재구성해야 하고 연습까지 전부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으니까. 재희 선배 아니고 다른 사람이 그랬으면 맞아 죽었을걸요.”
“이걸 대비한 것 같아.”
그리 툭 던지고는, 김산이 덧붙였다.
“팀 구성되고 처음 모인 날, 재희가 그러더라. 나는 이 팀에 따로 연습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개개인이 이미 특출하니까.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리더만 모은 이유는, 졸업 전에 색다른 경험을 해 보기 위함이다. 팀을 어떻게 구성하고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우리가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면 어떻게든 겪게 될 테니까, 기회가 있을 때 우리끼리 한번 해 보고 싶다. 우리는 따로 훈련하지 않아도 되니까 빈 시간에 다 같이 모여서 한번 가상으로 팀을 짜 보자. 여태 자기 팀만 최적으로 꾸려 왔다면, 이번에는 전교생을 대상으로.”
유은우는 다시 고개를 들어 스크린을 보았다.
“그래서 짠 명단이 저거예요?”
“맞아. 할 때는 재미있었지.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어.”
김산이 연단 위로 올라가자는 손짓을 했다. 유은우가 연단에 막 오르자마자 강당 입구가 소란해지더니 학생들이 와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땀에 젖어 있었는데, 재킷과 조끼를 벗고 넥타이를 끄른 채였다. 홀스터에 꽂힌 총구가 불그스름했다. 학생들은 아직도 모의 전투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손짓으로 열렬하게 전투를 재현하며 강당 가운데로 진입했다. 몇몇은 의자를 끌어오고 대부분은 그냥 강당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럼에도 약속이나 한 듯 질서 정연했다. 모두가 한마디씩 하고 있었으나 서로를 배려하듯 조용조용해서 어수선하지는 않았다.
“이거 우리 학교 학생들 맞아? 맨날 치고받고 싸우던 애들 맞냐고.”
정윤환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차예원이 대답했다.
“처음이라 그래. 유지가 힘들겠지.”
이윽고 강당이 빈틈없이 꽉 메워졌다.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이쪽 연단만 뚫어져라 응시하는 학생들을 마주하자니 긴장이 되어, 유은우는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연다희는 이렇게 주목받는 데 굉장히 익숙해 보였다. 심지어 그녀는 사무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는데, 흡사 밀린 잡무를 싹 몰아서 해치우고 얼른 퇴근하고 싶어 모니터에 코를 박고 있는 회사원 같았다.
연다희가 이프를 조작하자 작은 스크린이 떠올라 허공 위에 거대하게 펼쳐졌다.
“우리가 협의한 32명의 학생, 탈출 의사를 표시한 324명의 직원, 도합 356명을 최대한 빨리, 늦어도 이번 주까지는 학교 밖으로 내보낼 생각입니다. 3학년 정윤환도 이의가 없다니, 그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다만 우리가 상의해야 할 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다들 기억하시겠지만, 오전 회의에서 나왔던 의견입니다. 정윤환이 군의 통제를 부순다는 탈출 계획은 단 한 번의 기회뿐으로, 최대한 이용하자는 발언이 있었습니다. 군이 두 번은 당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그 기회를 어떻게 쓸 것인가 많은 학우의 생각을 들었고, 오후 2시까지 투표로 결정하자고 했었습니다. 가장 많이 득표한 의견은…….”
연다희가 이프를 눌렀다. 스크린에 최다 득표한 의견이 반짝 표시되었다.
“……용 연구소 진입입니다. 현재 온하나비로 정보를 수집한 결과, 5학년 서재희의 공개 진술 후 발생한 도시연합의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용 연구소의 폐쇄입니다. 이런 이례적인 상황에는 분명히 어떤 배경이 있을 거라고 추측됩니다. 또한 우리가 수집한 모든 동영상에서 시체와 함께 까만 물체를 넣는 행위가 나타났고, 온하나비상에서 그것이 용의 비늘이라는 주장을 접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소수의 학생을 선출하고, 그 학생을 탈출 인원에 섞어서 학교 밖으로 내보낸 다음, 용 연구소로 잠입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용 연구소가 학교에 용 비늘을 공급해 줌으로써 도시연합의 악행에 관여하였는지 그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현재 도시연합은 낙원의 이론과 관련한 모든 논란을 전부 허위 사실 유포로 치부하고 있으므로, 먼저 용의 부산물이 학생들의 시체 처리에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용에 대해 잘 아는 인재가 가야 합니다. 최소한 용의 비늘인지 아닌지 정도는 구분해야 하니까요. 이 점을 고려하여 자원 혹은 추천 바랍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연다희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그란 안경을 낀 1학년 여학생이었다. 손도연. 잠깐 정적이었던 강당이 서서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쟤 누구야?”
“이름이 뭐더라. 맨날 휴게실에서 용 그리는 애.”
“그 있잖아. 재희 선배가 편지에서 말한 역사 연구 모임.”
“1학년 하위권이잖아.”
“간이 부었네. 교문 나가면서 죽는 거 아냐?”
“누가 손도연 쟤 좀 자리에 앉혀!”
손도연은 그 모든 수군거림은 전혀 개의치 않고 높이 든 손을 한 치도 내리지 않았다. 약간 긴장한 듯 턱에 힘이 들어가 있었으나 흔들림은 없었다. 오히려 그의 옆에 있던 동기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쩔쩔매고 있었다. 그들은 손도연의 손을 잡아당기고 어깨를 밀면서 도로 자리에 앉히려고 안간힘을 썼다.
“야, 손도연, 너 돌았어? 미쳤어?”
“너 언니 때문에 제정신 아닌 건 알겠는데 차분히 생각 좀 해. 너 개인전 승률 4%야. 넌 그냥 우리 학교 들어온 것만도 기적이라고. 학교 밖으로 나가는 동시에 죽고 싶어?”
손도연은 굽히지 않았다. 그녀는 굳건히 버티고 서서 김산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손도연을 미친년 보듯 혀를 차는 학생들 사이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들도 있었다.
“난 찬성해. 도연이 혼자만 안 보내면 돼. 다른 실력자가 같이 가면 되잖아.”
“야, 손도연 실력이면 서재희 팀에 들어가도 짐이 돼. 아무리 용에 미쳐 있어도 그렇지, 너무 약하다고.”
“손도연이 적임자야. 쟤만큼 용에 대해 잘 아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교수님 강의하실 때 티끌만 한 오류도 그 자리에서 딱딱 잡아내던데 용 연구소는 당연히 손도연이 가야지. 안 그래? 거기다 역사 연구 모임 멤버라잖아. 여태 아무것도 모르고 살던 우리랑은 다르겠지.”
“아니, 가는 건 안 말리는데 쟤 때문에 우리 일이 틀어지면 안 된다, 이 말이라고.”
김산이 손을 들어 학생들을 조용히 시켰다. 그가 말했다.
“당연히 도연이 혼자는 못 보내. 실력자가 옆에 붙을 거야. 도연이 말고 또 자원할 사람 없어?”
온갖 책임을 다 지고 불법적인 일에 앞장서야 하는데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학생들은 용에 대한 지식이 지극히 부족했다. 용에 대한 많은 정보가 열람 금지되어 있었다. 유일한 용 사육 수업은 단순한 노동일 뿐이었다. 매뉴얼대로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고, 시간 맞춰 용의 입에 말린 무당벌레를 부어 주기만 하면 되었으므로.
김산이 강당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무도 없어? 그럼 도연이가 간다. 도연이는 서투니까 실력자들이 보호해야겠지. 나하고 연다희, 고세민이 기본으로 붙고 5학년 중 상위권 열 명 정도 더 붙이겠어. 오늘 오후에 모의 전투실에서 모두 합 한번 맞춰 보고 모자란다 싶으면 그때 더 추가 혹은 변경하면 될 것 같아.”
“잘 부탁드립니다.”
모두를 위해 본인을 바치는 일인데도 도리어 손도연이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했다. 그녀는 가볍게 묵례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즉각 불만이 쏟아졌다.
“지금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간부가 세 명이나 용 연구소로 빠지면 우리는 어떡하라는 거야. 거기다 5학년 상위권을 열 명이나 빼 간다니 만약에 학교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할 거야. 재희 선배도 없는데.”
“야, 손도연! 너 그거 용기 있는 행동 아니야. 민폐라고!”
“너무 손해가 커. 그냥 손도연 보내지 말고 다른 적당한 사람이 가면 그렇게 꽁꽁 싸매듯 보호할 필요 없는 거잖아.”
“다들 웃기고 있네. 손도연 보내기 싫다고? 그럼 너희가 가세요. 안 갈 거면 좀 닥치고.”
“여기서 손도연 다음으로 용 성적 잘 나온 사람 있어? 그 사람을 보내자.”
“그건 기준이 안 되지. 그깟 단순한 강의 점수 못 나오는 게 되레 이상한 거니까. 그 수업은 손도연이 1등이고, 유은우가 꼴등, 나머진 전부 공동 2등이라고 보면 돼.”
귓가가 왱왱거렸다. 유은우는 손도연을 응시했다. 그녀는 자리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언뜻 스치면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으나 찬찬히 살피면 상처가 확연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가 빨갛게 말라붙어 있었고, 얼마나 짓씹었는지 입술도 까맣게 터져 있었다.
유은우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손을 번쩍 들었다. 손도연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많이 필요 없습니다. 한 명만 붙죠.”
강당이 일제히 침묵했다. 손도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유은우가 이어 말했다.
“제가 손도연하고 둘이 가겠습니다.”
“유은우.”
뒤통수가 따가웠다. 돌아보니 정윤환이 사납게 이쪽을 보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그런 그의 눈빛이 두려워서 움츠러들었을 텐데, 이제는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안심시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은 정윤환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섣불리 의견을 꺼내지 못하고 조용하기만 했다.
뜻밖에도 침묵을 깬 건 연다희였다.
“그럼 그렇게 할까요? 일이 잘 풀리네요.”
연다희가 홀가분한 기세로 이어 말했다.
“손도연하고 유은우가 용 연구소로 가면, 핵심 인력이 하나만 빠지는 셈이네요. 그럼 우린 남은 인력으로 또 다른 걸 시도할 수 있죠. 어디 보자. 두 번째로 득표한 의견이…….”
연다희가 이프를 빠르게 눌러 댔다. 스크린이 반짝 바뀌었다.
“……온 오염도 측정 및 1급 보안지역 진입이네요. 용 연구소 진입과 불과 다섯 표 차이입니다. 어떤가요?”
“뭐야, 저게?”
정윤환이 아연실색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고세민이 불쑥 한마디 했다.
“선배가 이루지 못한 거잖아요. 이번 기회에 재도전하자는 말이 많아서. 1급 보안지역이 도시연합 비리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추측도 상당히 신빙성 있고요.”
“나 그런 거 해 달라고 한 적 없는데. 대체 이 투표는 언제 한 거야?”
“어제 윤환 선배랑 은우가 병원 간 다음에요.”
“미리 공지도 안 해 주고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소중한 내 한 표는?”
“두 사람 빼고 다 참여한 거라 지금 한 표 행사하셔도 결과가 뒤집힐 것 같진 않은데요.”
정윤환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러나 단호하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유은우는 그가 자신의 허리를 잡고 뒤로 돌려세워 강당의 학생들을 등지게 하기에 잠자코 따랐다. 이어 정윤환이 연다희를 향해 손짓을 했다. 연다희가 마이크를 김산에게 넘기고 이쪽을 보았다. 정윤환이 잇새로 말했다.
“아직 유은우 용 연구소 간다고 확정된 거 아니잖아!”
연다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 그럼요. 아직 의견 수렴 중이에요.”
아닌 게 아니라 학생들이 술렁이고 있었다. 동의한다는 소리가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급기야 박수까지 터지자 김산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 생각엔 재희가 정상참작되어 학교로 복귀하게 되면 그 타이밍에 정윤환이 길을 트면 될 것 같아. 시민이며 언론사며 많이 몰릴 테니 군도 그리 강압적으로 우릴 막지 못할 테니까. 집으로 돌아갈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고, 은우랑 도연이는 연구소로 빠지고, 그리고 사해는 남은 사람들이 다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일부만 움직이면 조용히 살해당하고 은폐될 수 있어. 하지만 대규모로 움직이면 보는 눈도 있고 하니 우리가 유리해질 거야.”
정윤환이 날카롭게 물었다.
“다 같이라니?”
“말 그대로야. 전교생 다.”
김산의 대답에, 정윤환은 더 이상 아무 말 않고 뒤돌아섰다. 유은우는 그대로 정윤환에게 손을 잡혀 연단을 가로지르고, 묵직한 커튼이 쳐진 구석으로 끌려갔다. 정윤환은 여분의 전자 교탁 사이에 유은우를 몰아넣은 뒤 고개를 숙이고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었다. 유은우는 그의 어깨 너머로 학생들이 손을 번쩍번쩍 들고 의견을 개진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야, 유은우.”
그의 눈이 거칠었다.
“가긴 어딜 가? 열심히 살아남겠다고 맹세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나 가지고 노는 거야, 뭐야? 나랑 하는 약속은 안 지켜도 되는 거야?”
연단 구석이었지만 혹여나 다른 학생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유은우는 그에게 가까이 붙었다. 역시 입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대답했다.
“말은 바로 해. 용 연구소에 가겠다는 거지, 다른 말은 안 했어.”
“그게 그거 아니야?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
유은우는 손등으로 제 입을 가렸다. 더욱 소리를 낮춰 빠르게 말했다.
“혁명의 상징을 내가 가져와야 해. 더 이상 재희 선배 혼자 주목받게 둘 수 없어. 후에 다 밝혀져서 모든 사람이 비난해도, 그래도 재희 선배 숨은 쉴 수 있게. 그 사람 거짓말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정당성을 다 부여해 줄 거야.”
“꼭 이런 식으로 안 해도 되잖아. 꼭 네가 가지 않아도 되잖아.”
“정윤환, 이건 위기가 아니라 기회야.”
정윤환의 손이 다가왔다. 유은우는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손은 유은우의 어깨를 잡을 듯하다가 깊은 숨을 토하며 거둬졌다. 정윤환이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차라리 내가 연구소에 갈게. 넌 애들이랑 사해로 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나 설계 못 하잖아. 난 아무리 뛰어봤자 혼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하지만 넌 달라. 넌 총 한번 쏴서 수백 명을 서포트할 수도 있고, 반대로 적에게 광범위한 공격도 가능하잖아. 나는 고작해야 물리적인 근접전이 고작이야. 이건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야.”
“그럼 내 마음은?”
정윤환이 한 발짝 다가왔다. 그가 유은우 바로 옆을 짚으며 바짝 다가왔다. 날 선 시선이 뚫어져라 유은우를 향했다.
“너 위험한 데 보내기 싫은 내 마음은? 무시해도 돼?”
“무시하는 게 아니라…….”
“너 대체 나한테 왜 이래? 내가 너한테 뭐 큰 거 바라는 거 아니잖아. 키스를 해 달래, 세상을 구해 달래? 그냥 살아만 달라고. 남들처럼 적당히 몸 사리고 네 이익 챙겨 가면서 나 죽기 전에 너 먼저 죽지만 말라고. 그게 뭐가 어려워? 온디딤 하나 다룰 줄 안다고 기고만장해서 용 연구소에 보내 달라, 그것도 학교 랭킹 바닥인 1학년 하위권하고 단둘이서. 이러니 내가 안 미치고 배겨? 너 거기가 어떤 덴지 알기나 해?”
“그러는 너는.”
정윤환의 눈가가 딱딱하게 굳었다. 유은우가 재차 말했다.
“그러는 너는 뭐 얼마나 길고 가늘게 살려고 나 포기 못 하는 건데?”
“……너랑 내가 같아?”
“다를 건 또 뭐야. 사람 손목 잡아끌고 여기 처박았다가 저리 처박았다가 하지 말고 저리 비켜. 나 나갈 거야.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나 가고 싶은 곳에 갈 거라고. 재희 선배였으면…….”
아. 유은우는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내가 미쳤구나. 해도 이런 실수를…….
차마 정윤환을 올려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마로 느껴지는 숨은 이미 가팔랐다. 정윤환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지 그늘이 짙어졌다. 유은우는 눈을 굴려 볼 생각도 못 하고 코앞으로 다가오는 그의 가슴팍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귓가에 입술이 닿은 것처럼 뜨거웠다.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내 앞에서 서재희 이름 올려 봐. 그때는 십년지기 친구고 좋아할 자격이고 뭐고 없어. 인간이길 포기하고 너 뺏어 올 거니까.”
계단 밑 창고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 느꼈던 서늘함이었다. 그 공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정윤환에게 걷어차였던 손등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유은우는 결코 그때처럼 마냥 당할 생각이 없었다. 찌그러져 있던 용기가 팽창했다. 즉각 손을 뻗어, 막 멀어지려는 정윤환의 넥타이를 잡아챘다. 그대로 당겼다. 그가 휘청거리며 다시 유은우 옆을 짚었다. 불과 한 뼘을 두고 직시한 정윤환의 눈동자는 거친 경고와 달리 창백하게 젖어 있었다.
“너 나 좋아한다며? 그럼 나 믿어 줘야지.”
넥타이를 당긴 손에 힘을 주며, 유은우가 이어 속삭였다.
“그게 사랑의 기본 아니야?”
◆
― 도시연합 중앙학교 통신 차단은 중앙 제어 시스템 마비로 인한 일시적인 오류에 불과하므로, 도시연합은 그에 대한 빠른 복구를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의견은 이와 다릅니다. 중립지대로 설정된 후에 통신망의 단절이 일어났으므로, 이는 단순히 중앙 제어 시스템의 복구로는 정상화될 수 없다는 의견이 우세합니다. 시민들의 불안이 커짐에 따라, 서재희의 정상참작을 요구하는 시위가 점점 열기를 띠고 있으며…….
김서혁은 집무실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꽉 잡아맸다. 의자에 걸쳐 두었던 재킷을 입고 그 위로 코트를 덧걸쳤다. 코트 깃을 정리하다 문득 손을 멈추었다. 고개를 기울여 왼쪽 뺨을 거울에 비추었다. 가느다란 붉은 선. 반듯한 상처. 손끝으로 살짝 쓸어 보았다.
“대장, 차량 대기시켰습니다.”
소연주가 말했다. 그녀는 집무실 입구에 서 있었다. 단추 하나까지 꽉 채워 고지식한 차림이었다.
“그리고 도시연합 중앙학교 포위는 서재희의 지시로 보입니다.”
김서혁이 장갑을 끼다가 눈을 찡그렸다.
“그게 가능한가?”
“서재희가 가능케 했습니다. 전투가 벌어지던 당시 서재희는 도시연합장실을 점거했습니다. 차인호 도시연합장이 대장의 동의 없이 군을 움직일 수 있도록 우회 경로를 마련해 둔 것을 서재희가 익히 알고 이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언론에 밝히시겠다면 제가 바로 브리핑 준비하겠습니다.”
김서혁은 혀를 찼다.
“총사령관이나 되어서 지휘권을 남에게 빼앗겼다고 실토하면 우스워지겠지. 그냥 둬. 그래도 명목은 학생들 보호니까.”
“시민들은 군의 대처에 상당히 부정적입니다. 이대로 두면 상황이 심각해질 수 있으니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소연주가 살짝 눈을 들어 김서혁을 바라보고는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대장이 자존심 때문에 밝히지 않고 안고 갈 거라는 걸 서재희도 알고 있을 겁니다.”
김서혁은 뚜벅뚜벅 집무실을 가로질렀다. 서랍을 열었다. 주인을 잃고 몇 달을 그대로 방치한 사탕과 초콜릿, 과자가 바스락바스락 뒹굴었다. 그 사이로 은색 시계가 있었다. 고리만 채우지 않으면 지극히 평범한 시계를, 김서혁은 집어서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차인호는?”
“차인호 도시연합장은 서재희와 협의 당시, 경찰로 학교를 포위하려고만 했지 절대 군을 투입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적당히 경찰을 둘러 그럴듯한 상황만 만들어 놓고, 딸을 들여보내 그곳 학생들을 안정시켜서 데리고 나오면, 차예원의 지지도가 올라가고 권력을 물려주기에 좋은 기반이 될 거라고 여긴 모양입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딸에게 학교로 가지 말라고 하면서도 못 이기는 척 들여보낸 겁니다. 막판엔 서재희가 차인호와 차예원의 뒤통수를 차례로 후려치면서, 결국 딸과 의절한 아버지가 되고 말았지만요.”
“이선규 정예군에서 박탈시키고 외곽팀으로 보내. 어디든, 확실히 좌천시켜.”
소연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좁히고 눈을 깜박이며 김서혁의 지시를 곱씹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더니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네?”
김서혁은 다시 한번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대장, 이선규가 이번 임무에서 큰 실수를 하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가 빠지면…….”
“빼.”
소연주는 조용히 호흡을 골랐다. 그녀가 불안한 눈으로 집무실 바닥을 더듬는 것을 알면서도, 김서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시간을 주었다. 넥타이를 조금 끌렀다가 다시 죄고, 휘황한 기장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김서혁이 다시 눈을 들었을 때는 소연주가 평정을 되찾은 후였다. 김서혁은 의자에 걸쳐 두었던 망토를 집어 들었다. 소연주가 한 발짝 다가왔다.
“대장, 비가 많이 옵니다. 망토는 제게 주십시오. 제가 가지고 있다가 본부 도착 후 드리겠습니다. 입고 나가시면 젖습니다.”
김서혁은 그제야 창을 보았다. 회색 블라인드 사이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선연했다. 평소 잠에서 깨기도 전에 그날 날씨를 짐작할 정도로 기상에 예민한데, 어떻게 여태 모를 수 있었는지.
“비 오는 거 싫다.”
유난히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유은우가 그리 중얼거렸다.
정예군 전용 휴게실. 유은우는 창가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달랑 앉아 있었다. 두 팔을 창턱에 올리고, 그 위에 또 제 턱을 얹어 놓고. 누가 입혀 놓았는지 제복 셔츠 위로 하얀 니트를 덧입고 있어 뒷모습이 웅크린 작은 토끼 같았다.
김서혁은 보고서를 들추던 손을 멈추고 등을 뒤로 젖히며 유은우의 얼굴을 살폈다. 창을 조금 열어 놓아 창틀에 비가 사정없이 튀고 있었다. 속눈썹이며 뺨이며 빗방울이 마구 튀어 젖는데도, 유은우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밖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지 입이 댓 발은 나왔다.
그 옆 긴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이선규가 눈을 찡그리더니, 유연하게 발을 들어서 유은우의 등을 걷어찼다. 눈처럼 보송하게 하얀 니트에 지저분하게 발자국이 났다.
“창문 안 닫아? 비 들어오잖아!”
유은우가 잽싸게 등을 문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유은우는 분에 차 씩씩거리긴 했으나, 이선규가 발을 다시 움직여 걷어차려는 시늉을 하자 마지못해 창문을 닫아걸었다. 그러고는 이선규를 한껏 노려본 뒤, 다시 팔뚝에 턱을 얹고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이선규의 머리맡에 앉아 있던 소연주가 보고 있던 소책자를 단단하게 말아 쥐었다. 곧바로 이선규의 머리를 호되게 갈기기 시작했다.
“이선규, 네가, 지금, 제정신이야? 어?”
말 마디마디마다 퍽퍽퍽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이선규가 머리를 감싸 쥐며 얼른 소연주에게서 멀어지더니 소파 끝자리에 처박혔다. 그가 몸을 움츠린 채 억울하게 외쳤다.
“자꾸 때리면 인권 위원회에 신고한다!”
“평소에 대장 그림자 밟는 것도 조심하는 주제에, 지금 감히 은우를 발로 차? 정신 안 차려?”
이선규가 질린다는 얼굴로 소연주를 보았다. 그러나 소연주가 흉기를 치켜들자, 이선규는 즉각 뒤로 돌아 소파 등받이를 짚으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가 고개를 쑥 빼고 창가의 유은우를 살피며 물었다.
“야, 전리품. 많이 아팠냐?”
유은우가 팔에 턱을 얹은 채 눈만 도르륵 굴려 이선규를 보았다. 싫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이선규를 한 차례 흘겨보고는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소연주는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다시 퍽퍽 소리와 함께 이선규의 뒤통수로 매타작이 이어졌다.
“지금, 그걸, 사과라고, 하고, 있어?”
휴게실의 다른 정예군들은, 소연주가 이선규를 패거나 말거나, 유은우가 다시 창문을 조금 열어젖히며 빗소리가 스미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에너지 바를 먹거나, 눈을 감고 드러누워서 취약한 설계 공식을 재차 암기하거나, 부드러운 천으로 총을 닦는 데에 열중하고 있었다. 박민준을 주축으로 한 몇은 영사기에 드론을 꽂아 놓고 이틀 전 전투를 복기하고 있었다. 사뭇 진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전투에서 박민준은 유독 힘겨워했다. 물론 모든 전투가 항상 쉽지만은 않았다. 육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그러나 이번은 좀 달랐다. 낯선 힘겨움이었다.
정윤환이 빠져서.
김서혁은 그리 생각했다. 손끝에서 보고서 끝자락이 팽팽해졌다.
임유현의 추천서만 없었어도.
정윤환을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고 그리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왔는데, 임유현의 추천서 한 장으로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임유현이 개입하고 차인호가 지지하니 정윤환은 더는 무서울 게 없었다. 중요한 지휘를 맡기겠다는 김서혁의 회유에도 정윤환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그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학교로 내려가 쉬고 싶다는 말만 반복했다. 남녀 가리지 않고 누구나 한 번씩 돌아볼 만한 해사한 웃음은 싹 가시고 없었다.
당연히 미심쩍었다. 정윤환이 학교로 내려가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없었다.
김서혁은 강경하게 나갈 수도 있었다. 정윤환을 압박해 그 속내를 캐내고, 다리를 부러뜨려 군에 주저앉힐 수도 있었다. 의원을 매수해 특례입학 규정을 바꿀 수도 있었고, 임유현에게 추천서를 철회하라고 거래를 제안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김서혁은 정윤환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윤환의 서늘한 눈에서 운명을 읽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내가 널 응용학교 졸업도 전에 군으로 데려왔건만. 그 끔찍한 학교 문턱엔 발도 들이지 않게 해 주고 싶었는데.
후보는 후보라 이건가.
김서혁은 정윤환이 내민 동의서에 서명했다.
정윤환은 그 길로 짐을 꾸려 바로 학교로 내려가 버렸다. 무언가로부터 황급히 도망치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윤환은, 드문 인재 정도가 아니라 기적에 가까웠다. 전투에서 코너에 몰리면 누구나 정윤환을 호명했다. 그리고 정윤환은 정예군의 기대를 늘 상회했다. 제1도시 교양 시민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준의 욕을 수시로 지껄이는 동시에 상류층 자제 특유의 오만한 낯을 하면서, 그 모든 것을 너무나 쉽게 해냈다. 모두가 알게 모르게 그에게 의지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설계가 무너져도, 타격이 빗나가도, 정윤환이 있으니 어떻게 되겠지 하는 안이한 태도. 김서혁은 그 몹쓸 버릇이 정예군 사이에 팽배하지 않길 바랐다. 그러나 습관은 무서웠다. 특히 박민준은 정윤환의 갑작스러운 부재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개개인의 스타일이 탁월하게 구축된 정예군 동료들과 달리, 박민준은 본인이 다져 놓은 토대가 약하여 주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정윤환과 같은 독보적인 천재는 그 존재만으로 주위를 휩쓸어 초토화하곤 했다. 박민준은 정윤환의 설계 방식을 저도 모르게 닮아 가다 예기치 못하게 기준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일반 동조자라면 정윤환의 설계를 감히 따라할 시도조차 못 내겠지만, 박민준은 노력하면 몇 가지 흉내는 낼 수 있었다. 어중간한 실력은 늘 독이 된다.
김서혁은 들고 있던 펜을 툭툭 돌려 잡았다.
박민준이 정윤환의 그늘에서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정예군에서 빼야 했다. 당장 박민준을 대신할 만한 수많은 후보 리스트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뽀득뽀득.
김서혁은 눈을 들었다. 유은우가 유리창에 들러붙어 손가락으로 무언가 그리고 있었다. 유은우는 또 한 번, 하아, 입김을 불어 넣더니 그 위로 무언가를 덧그렸다. 뽀드득 소리가 났다. 대체 뭘 그리는 건가 싶어서, 김서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이선규의 뒤통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이선규는 어느새 유은우 옆에 의자를 하나 더 가져다 놓고 딱 달라붙어 있었다. 그가 비웃었다.
“진짜 못 그린다. 이게 뭐냐?”
“해님.”
유은우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김서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기울였다. 유은우의 부드러운 머리칼과 이선규의 각 잡힌 어깨 사이로, 유리창에 어설프게 그려진 동그라미와 그 가장자리로 비죽비죽한 무언가가 보였다. 해님이라기보다는, 망한 달걀프라이처럼 보였다.
“비켜 봐. 내 그림 실력을 보여 주지.”
이선규가 기세등등하게 몸을 기울였다.
“아, 싫어. 지우지 마!”
유은우가 발칵 화를 냈다. 그녀는 발로 이선규가 앉아 있는 의자를 밀어 넘어뜨리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잘 그리지도 못한 해님 하나가 뭐라고 항의가 아주 필사적이었다. 그런 유은우의 얼굴을 왼손으로 덮어 장난스럽게 밀어내면서, 이선규는 오른 소매로 유리창을 쓱 닦아 냈다. 그러더니 후 입김을 불어 넣고, 그 김 위로 손가락을 쓱쓱 움직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우산이 탄생했다.
“비 오니까 우산 그려야지.”
유은우는 이제 완전히 토라졌다. 그녀는 의자 위에서 내려온 뒤, 이선규가 같이 놀자고 붙잡는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박민준 옆에 가서 앉았다. 박민준은 턱을 괴고 이프에 무언가를 집중해서 쓰고 있다가, 유은우가 오는 것을 보고 옆으로 비켜 앉아 자리를 비워 주었다.
“비 오는 날 주워 온 미친 새끼라고 누가 그랬나 봅니다. 원래 비 오는 날 미친년, 미친놈들이 돌아다닌다고.”
김서혁은 그제야 자신이 보고서를 단 한 줄도 읽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강지원이 탁자에 메모리를 내려놓으며 이어 말했다.
“제법 상처받은 모양이에요. 익숙해지겠지만.”
김서혁은 대답 없이 메모리를 집어 이프에 끼워 넣었다. 모의 훈련 계획이 질서 정연하게 떠올랐다. 눈으로는 그것을 훑어 내리면서도 생각은 또 유은우로 흘렀다.
이제 막 총을 잡기 시작한 유은우는, 살인병기라고 불리던 과거와는 달리 눈망울이 유순했다. 그럼에도 총을 쥐여 주고 훈련실로 밀어 넣으면 누구보다 기민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군의 대부분이 그런 유은우를 두고 정제되지 않은 원석이나 다름없다고 했으며, 적군이 만들다 만 살인병기를 즉결처분하지 않고 아군의 중앙으로 데려오는 위험을 감수한 김서혁의 결단에 감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유은우는 겉돌 수밖에 없었다. 몇몇은 유은우에게 조언하기도 했다. 힘없는 재능은 본인을 힘들게 할 뿐이라며, 적당히 숨기고 인권 단체의 입김을 받아 군에서 나가 버리라고. 유은우의 이마에 김서혁 이름 석 자가 버젓이 쓰여 있는데 그런 개소리를 하는 놈들이 존재하다니.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몸은 사릴 줄 알아야 했다. 유은우에게 무슨 말을 하든, 적어도 내게 들키지는 말아야지. 그리고 군내에서 감히 총사령관의 눈과 귀를 피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도.
당시 김서혁은 유은우에게서 압도적인 가능성과 치명적인 약점을 동시에 보고 있었다. 유은우 자체만 보면 좀 서툴러도 충성도 높은 강아지나 다름없어 걱정이 없었으나, 그 외의 모든 조건이 까다로웠다. 전례 없는 특수한 상황과 신분이 유은우를 모든 법에서 비껴가게 했다. 그 말인즉슨, 누구도 이용하기 쉽다는 뜻이었다. 김서혁은 유은우의 가능성과 약점 중 어느 것에 더 무게가 나가는지 판별할 때까지, 유은우를 꽉 잡고 절대 놓칠 생각이 없었다.
“지난주 모의 훈련에서 기상을 태풍으로 지정했다. 그랬더니 유은우의 점수가 형편없이 나왔어. 그것도 그 헛소리의 여파인가?”
김서혁이 낮게 물었다. 대답은, 강지원 대신 소연주가 했다. 그녀는 유은우가 듣지 않도록 조용한 목소리로 빠르게 대답했다.
“은우가 감정에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이해하시고 인내하며 기다리셔야 합니다. 채근하면 더 불안해할 수 있습니다.”
김서혁은 펜대로 탁자를 초조하게 두드렸다. 소연주가 덧붙였다.
“설계와 타격으로 분야가 나뉘다 보니 다들 은우를 윤환이와 많이 비교하지만, 윤환이랑은 다르지요. 윤환이는 감정의 변화에 상관없이 안정적인 프로 중의 프로고, 은우는 총 잡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윤환이는 어릴 때부터 개인 과외가 붙어 최상의 교육을 받았고, 은우는 대체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상상조차…….”
“그만. 나는 습득 속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니까.”
김서혁이 펜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소연주는 즉각 한 걸음 물러섰다. 저만치 창가에 앉아 있던 이선규가, 김서혁을 한 번 보고, 박민준에게서 에너지 바를 얻어먹고 있는 유은우를 한 번 보고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선규가 이쪽으로 가까이 오는 것에 개의치 않고 김서혁이 강지원을 향해 지시했다.
“오후 훈련은 기상을 태풍으로 잡고, 유은우한테 신체 강화 걸어 주고 훈련실에 혼자 집어넣어. 총도 쥐여 주지 말고, 아무도 도와주지 말고, 혼자 힘으로 목적지까지 도달하도록 지켜봐.”
“네, 대장. 거리는…….”
강지원이 물음을 다 맺기도 전에 김서혁이 대답했다.
“15킬로미터로 잡아. 난이도는 B-3.”
“무리인데요.”
어느새 다가온 이선규가 불쑥 말했다. 김서혁은 그를 무시하고 강지원을 향해 말했다.
“못 빠져나오면 못 빠져나오는 대로 그냥 둬. 적어도 24시간 이내에는 나오겠지. 나오지 못하더라도 느끼는 점이 있을 테고. 본인이 지금 빗줄기 따위를 신경 쓸 처지인지 아닌지 정도는 똑똑히 알겠지.”
“대장, 은우 감기 걸리는데요.”
이선규가 지겹도록 조잘거렸다. 소연주가 팔꿈치로 이선규의 복부를 후려치려 했다. 이선규는 가볍게 손바닥으로 소연주의 팔꿈치를 막아 냈다. 이선규의 눈빛이 제법 진지했다. 김서혁이 말했다.
“충격 흡수 시스템은 꺼. 실제처럼 해.”
이번엔 소연주가 사색이 되었다. 그녀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대장,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은우 죽을 수도 있어요.”
유은우는 죽지 않았다.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네 시간 만에 그 훈련을 성공적으로 통과했다. 큰 부상은 없었다. 그 정도 난이도라면 온갖 대형 폐기물들이 사방을 날아다녔을 텐데, 자잘한 생채기만 나고 무사히 목적지를 찍었다는 사실은 정예군들을 안도와 감격에 놓이게 했다.
김서혁이 모의 훈련실에 도착했을 때, 유은우는 두꺼운 털 담요를 둘둘 말고 웅크리고 앉아서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유자차를 마시고 있었다. 머리칼은 흠뻑 젖었고, 뺨은 상기되었고, 입술은 터져 있었다. 유은우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정예군들이 벌떡벌떡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초보자에게 무리한 훈련을 시켰다는 질타의 시선도 적지 않았으나, 김서혁이 알 바 아니었다.
김서혁은 우뚝 서서 유은우가 두 손으로 머그잔을 쥐고 유자차를 마시는 모양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소연주가 눈치 빠르게 동료들을 훈련실 밖으로 내몰았다. 눈치는 빠르나 눈치 없는 척 뻔뻔한 이선규가 유은우 옆에 끝까지 들러붙어 있었으나, 소연주의 눈총을 받고 꾸역꾸역 밖으로 나갔다. 문이 쾅 닫히자, 정적이었다. 유은우가 티스푼으로 머그잔 밑에 수북이 깔린 유자청을 건지는 소리만 달그락달그락 들렸다.
김서혁은 제복 코트 자락을 젖히며 그 옆에 앉았다. 유은우가 티스푼으로 유자청을 가득 퍼 올리더니 김서혁에게 내밀었다. 김서혁은 순간 헛웃음이 났으나 잘 참고 고개를 저었다. 유은우는 더 권유하지 않고 그 달고 노란 것들을 제 입으로 가져갔다. 머그잔은 순식간에 비어 버렸다. 유은우는 잔을 옆에 내려놓고 담요를 여몄다. 약간 기침을 했고, 간간이 몸을 부르르 떨기도 했다. 김서혁은 유은우에게서 차가운 비 냄새와 심장 팔딱이는 온기를 느꼈다.
“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아니었으나, 김서혁은 저도 모르게 변명거리를 찾았다. 상처는 상처일 뿐 약점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그리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말을 해 주면 유은우가 김서혁 자신을 의지하며 나약해질까 두렵기도 했다.
김서혁은 정말로 유은우가 잘 성장하길 바랐다. 그는 안목이 있었고, 재능 있는 누군가를 보호하고 밀어줄 만한 역량 또한 충분했다.
결국 김서혁은 입을 다물었다. 유은우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김서혁이 이런 식으로 유은우 앞에서 운을 뗐다가 도로 삼키는 일은 흔했으니. 이번엔 유은우가 말했다.
“할 만했어.”
김서혁은 물끄러미 유은우를 바라보았다. 코가 분홍색이었다.
“생각보다 안 무서웠어. 동료들이랑 같이 비를 맞을 때는 무서웠는데, 혼자 있으니까 오히려 무섭지 않았어. 살아서 나가야 한다는 목표가 생기니까 비는 중요하지 않았어. 내가 비 오는 날 군에 발견되었다는 사실도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니었어. 과거는 고칠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으니까.”
유은우가 고개를 숙여 담요에 얼굴을 마구 비벼 댔다. 담요가 금세 젖어 들었다. 이윽고 고개를 든 유은우의 이마와 뺨에 젖은 머리칼이 엉망으로 엉겨 붙어 있었다.
“태풍 오는 날, 맨몸으로 적진에서 탈출해서 15킬로미터를 달려 아군에 도착했으니까…….”
유은우가 김서혁을 바라보았다. 눈이 자랑스럽게 반짝였다.
”……앞으로 이것보다 쉬운 건 다 할 수 있어.”
그러더니 콜록 기침했다.
김서혁은 유은우가 둘둘 감고 있는 담요를 보았다. 물기를 흡수하여 축축했다. 김서혁은 손을 내밀어 유은우의 어깨에서 담요를 끌러 내렸다. 홀딱 젖어 더 새까매진 제복이 드러났다. 유은우가 몸을 바르르 한 차례 떨었다. 김서혁은 제 제복 코트를 젖히고 유은우를 끌어안은 뒤, 그 위로 다시 코트 자락을 덮었다. 유은우는 새끼 새처럼 얌전히 품에 안겨 있었다. 스산한 비 냄새가 옮아 왔다. 팔딱팔딱 심장박동도 느껴졌다. 처음 유은우를 건져 왔던 그날처럼.
유은우를 후보로 밀어붙인다면.
김서혁은 서재희와 정윤환을 생각했다. 그리고 차인호의 외동딸 차예원도. 차예원이 자격 미달이라는 건 지나가는 개도 안다.
잘 자라야 할 텐데.
김서혁이 코트 위로 유은우의 등을 쓸어내렸다.
잘 자라야 해. 견디고 버텨서 설계 난독증도 이겨 내고, 애초에 증명할 필요도 없는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김서혁은 유은우의 이마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칼을 걷어 냈다. 빗물이 또르르 굴러 흰 이마를 둥글게 지나고, 감긴 속눈썹으로 맺히며 반짝거렸다.
……나아가 예언의 한 구절이라도 스스로 비틀 수 있다면.
빗소리가 요란했다. 김서혁은 굳게 닫힌 차창 너머로, 도시연합 본부 중앙대로를 가득 메운 수많은 시민을 보았다. 너도나도 비닐 우비를 입고 하얀 풍선을 들고 있었다.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데도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대신 수십만 개의 하얀 풍선들이 세찬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부대꼈다. 김서혁은 오전에 본 뉴스에서 시위를 ‘진실의 구름’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들었다.
이프가 울렸다. 김서혁은 뒷좌석에 등을 기대며 전화를 받았다.
― 자네, 오고 있나?
“어디를 말입니까?”
― 모르는 척하긴. 자네 차가 중앙대로로 들어오는 게 뻔히 보이는데.
“연합장님 얼굴 보러 가는 건 아닙니다.”
― 서재희가 자네 말을 들을 것 같나?
김서혁은 피식 웃었다. 그는 창밖을 보았다. 차가 천천히 본부로 진입했다. 시민들은 분명히 도시연합군 차량임을 알아봄에도 폭력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도로를 점거하고 있었으나 뒤로 물러서 길을 터 주었다.
“시위가 참 성숙합니다. 쓰레기 하나 안 보이고, 난동 피우는 사람도 없고…….”
― 그 사람들이 정말 정의 구현을 위해 거기 나갔다고 생각하나? 아닐걸. 그저 SNS에 올릴 사진이나 찍으러 간 거지. 버티면 금방 수그러들 거야. 저열하게 떼로 몰려다니기는.
“그래서 당신 딸이 학교로 돌아갔나 봅니다. 대단한 신념을 가진 딸을 둬서 참 행복하시겠습니다.”
― 헛소리! 자네까지 대체 왜 이러나? 우린 이미 한배를 탔어. 임유현도 죽고 이젠 나와 자네 둘뿐이야…….
“그날 밤 이후 밖에 나오신 적 없지요? 테러가 두려우시면 경차라도 빌려 타고 차창을 이만큼만…….”
직접 얼굴을 보고 하는 대화도 아니건만, 김서혁은 엄지와 검지를 들어 한 마디 정도를 가늠해 보았다.
“……열고 어디 한번 드라이브라도 다녀오시지요. 바깥 공기 5분만 마셔도 알게 되실 겁니다. 도시연합장님이 말씀하시는 그 헛소리가 얼마나 범람하는지. 숨에 묻어나고 발에 챕니다.”
― 멍청한 놈들…….
“멍청한데 아주 많습니다.”
― 서재희 그 미친 새끼랑 대화하느니 내가 나을 거다. 그놈이 하는 행동엔 목적이 없어.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태 관심도 없던 정의 구현에 갑자기 뜻이 생겼을 리도 없고. 이건 그냥 자살하기 전에 우리 엿 먹이고 가는 절차일 뿐이라고. 그런데도 자네가 이런 식으로 사사롭게 움직인다면 나도 전부 폭로할 수밖에 없다는 걸 명심해. 내일이면 중앙 제어 시스템이 복구될 거야. 하지만 중립지대까지 해제하려면 뛰어난 설계자가 필요해. 자네가 학교로 가서 정윤환을 빼 와. 군인 신분을 유예했어도 총사령관의 지시는 들을 것 아닌가. 그리고 이 모든 소란은 반란군에게 떠넘기면 그만이야. 늘 그랬던 것처럼. 용의 사체에 겨우 빌붙어 사는 이 좁은 공간에서 내란이라도 터지면 그건 어찌 수습할 건가? 많은 시민이 다칠 수 있어. 그게 두려워서 여태 낙원의 이론에 의지한 것 아닌가. 서재희가 불붙인 이 광기는 무조건 사해로 내보내야 해. 그러려면 반란군을 움직여야 하고…….
“임유현의 승인 없이는 반란군 못 씁니다. 그리고 그 권한은 지금 학생 간부들이 뿔뿔이 나눠 가지고 있고요. 연합장님은 밑천이 다 털려서 아무것도 없을지 모르겠지만, 전 남아 있습니다. 서재희는 제 말을 들을 겁니다. 그리고 연합장님도 앞으로 제게 말조심하십시오. 딸 목숨 붙어 있는 꼴 보시려면.”
전화를 뚝 끊었다.
김서혁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소연주에게서 망토를 건네받아 코트 위로 걸쳤다. 따라오려는 소연주를 로비에 대기시키고, 김서혁은 즉각 중앙수사부 직원의 안내를 받았다. 중앙수사부에서도 꽤 높은 직급의 명찰을 달고 있는 그는, 미리 언질을 주셨다면 서재희를 먼저 대기시켰을 거라며 김서혁이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을 비칠까 쩔쩔매었다.
면회실엔 한기가 돌았다. 날이 흐렸고, 온통 잿빛이었다. 김서혁은 차갑고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서재희를 기다렸다. 코트 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끝에 차가운 금속이 만져졌다. 꺼내 보았다. 평범한 기계식 손목시계. 손 안에서 잘그락잘그락 굴려 보았다.
찬찬히 기억을 되짚었다. 유은우가 어떤 식으로 시계판을 전개했는지. 얼마나 빠르게 시계 침의 크기를 자유자재로 늘렸다 줄였는지. 톱니바퀴 각각의 섬세한 배열과 경이로운 회전 속도에서 김서혁이 가르친 하나하나가 다 묻어 나왔다.
찰칵하며 시곗줄 고리가 맞물렸다. 즉각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김서혁은 반사적으로 시곗줄을 끌렀다. 시계는 바닥으로 툭 떨어지며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손아귀로는 피가 흥건했다. 그 잠깐 동안, 맹수의 발톱에 할퀴어진 듯, 상처가 깊었다. 하필이면 총 쥐는 오른손이. 김서혁은 눈을 찌푸렸다. 손아귀에 흠뻑 고인 피를 닦아 내거나 상처를 압박해 지혈하는 대신, 김서혁은 시계를 먼저 줍기 위해 몸을 굽혔다. 멀쩡한 다른 손을 시계를 향해 뻗었을 때였다.
찰각.
곧고 길어 단정한 손이 순식간에 바닥의 시계를 먼저 낚아채 갔다. 말끔히 잘 닦인 구두 한 쌍, 맞춘 것처럼 길이가 딱 맞는 바짓단이 눈앞에 있었다.
빌어먹을.
김서혁은 속이 뒤틀리는 걸 느꼈다. 무슨 이유에서든. 그는 숙였던 허리를 펴고 등을 바로 해서 앉았다.
서재희가 한 손에 가볍게 시계를 쥐고 서 있었다. 김서혁이 뭐라고 운을 떼기도 전에, 서재희가 시계를 쥐지 않은 손으로 김서혁이 앉은 의자 등받이를 쥐었다. 그가 아주 부드럽게 상체를 숙였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낯이 그늘을 드리우며 다가왔다.
서늘하게 새까만 눈.
“김서혁 총사령관님.”
서재희가 김서혁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 여자한테서 관심 끄십시오.”
<낙원의 이론>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