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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장악 (7/15)

007. 장악

유은우는 드레스를 걷어들고 접견실을 종종걸음으로 가로질렀다. 한쪽 벽면에 자리한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보았다. 깃털과 금속이 섬세하게 어우러진 새까만 장식이 머리칼과 섞여 들어 매끄럽게 윤이 났다. 드러난 쇄골과 어깨로, 잘 손질된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굴곡지며 흩어졌다. 상체가 꼭 달라붙는 회색 드레스는 허리를 기점으로 꽃송이처럼 부풀어 있었다.

유은우는 손을 들어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여린 목선이 드러났다. 총을 반납하면서 받은 행사용 인터컴을 느리게 왼쪽 귀에 꽂았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똑바로 서서 거울 속의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런 차림은 오랜만이네.

김서혁을 따라 온갖 행사에 참석하던 때가 있었다. 깨진 유리 조각이 다각도로 빛을 반사하듯, 유은우의 굴곡진 삶 전반이 살뜰히 활용되었다. 그녀는 반란군의 비도덕적이고 잔인한 실험의 희생자였으며, 동시에 자비롭고 강력한 도시연합군에게 삶을 빚진 유망한 동조자이기도 했다. 유은우는, 김서혁이 숙청까지 감내하며 바로 세우려고 한 도시연합군의 새로운 이념을 상징했다. 모든 전략에서 반란군을 비스듬히 우회하여 비판을 받는 임유현과 달리, 김서혁은 반란군과 정면으로 맞서며 그들의 전멸을 주장했다. 물론 위원회의 압박이 심해지면 김서혁도 잠시 임유현의 노선을 따르기도 했다. 그럴 때면 김서혁은 방관자의 입장을 취하며 불편한 기색을 비쳤다. 유은우를 처음 데리고 나갔던 전투 때처럼.

사실 유은우도 처음에는 그런 내막까지는 미처 잡아내지 못했지만, 행사에 참석하여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그 모든 것들을 빠르게 흡수해 냈다. 유은우에게 까다로운 요구가 없었기에 가능했다. 유은우는 그저 김서혁 측근의 가까이, 그러니까 소연주의 옆이나 이선규의 뒤쪽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되었다. 말은 최대한 아끼고 간혹 질문을 받으면 그냥 밝게 웃어 보였다. 초반에 어떤 연회에서 낯선 누군가 안부를 묻는 것에 유은우가 그만 군 기밀을 술술 말해 버려, 김서혁이 기함하며 함구령을 내렸기 때문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그 나이에 걸맞은 사회 경험 하나 없이 바로 군에서 걸음마를 떼고 있으니, 어디서 어디까지가 기밀인지 일상인지 그 선을 긋는 것이 어려워 당연한 결과였다.

유은우는 낯선 환경 속에서 대체로 주눅이 들어 있곤 했는데, 그나마 그 따분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음식 구경이었다. 평소 접하기 어려운 고급 요리와 예쁜 디저트를 보고 있으면 딱딱한 군대와는 정반대 세상을 보는 것 같아 신기하고 좋았다. 그래도 욕심 부리는 법 없이 가까이 놓여 있는 것만 조심조심 먹었다. 드레스가 배와 허리를 단단히 조이고 있었기 때문에 애초에 많이 먹지도 못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먹고 싶어도 참았다. 괜히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간 김서혁 라인 전체가 망신을 당할지도 모르니까.

그때 거북이멜론빵도 처음 만났다. 초록색 등딱지를 하고 초코 눈알이 콕콕 박혀 있는 그 심하게 귀여운 빵은, 3단 트레이의 가장 위에 빙 둘러져 놓여 있었다. 총 다섯 마리였다. 저만치 떨어져 있어 침만 삼키며 바라보는데, 이상하게 사람들은 손을 거의 대지 않았다. 거북이멜론빵은 연회가 끝날 때까지 다섯 마리 그대로 목숨을 유지했다.

나중에 김서혁의 뒤를 따라 퇴장을 할 때 유은우는 드레스 자락 아래로 발돋움을 하고 이선규의 귀에다 대고 소곤소곤 물었다.

‘저거 귀여운데 사람들이 왜 안 먹어?’

이선규는 흘깃 유은우가 가리키는 쪽을 보더니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저거 처음 나왔을 때는 사람들 줄 서서 사 먹고 그랬는데 지금은 시들시들해. 체인점에 가면 언제든지 사 먹을 수 있는데 굳이 여기까지 와서 저걸 먹겠냐. 다른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네가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인데, 빵은 못생긴 게 맛있어. 저렇게 겉모습만 그럴싸한 건 달기만 하고 맛도 없다고. 아직도 저런 게 들어오는 걸 보니까 빵 브랜드에서 협찬이라도 하는 모양인데…….’

‘그러니까 여기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건 아니다 이 말이지? 길거리에서 저런 걸 막 팔아? 아무나 그냥 사 먹으면 돼?’

‘어……, 보통은 그렇지.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야.’

‘좋겠다.’

유은우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선규가 묘하게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저런 싸구려 빵 같은 거 부러워할 거 없어.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건 너야. 저 시선들을 보고도 모르겠어?’

‘나도 그냥 길거리 막 다니면서 저런 거 아무렇지도 않게 막 사 먹고 그러고 싶다.’

‘……그러고 싶으면 열심히 해. 설계 난독증도 치료 사례가 있긴 있어.’

다른 사람들은 노력 없이 당연하게 누리는 것을, 나는 왜 아등바등 애써야만 가질 수 있어? 비동조자로 태어나도 평범하게 잘살잖아. 왜 내가 스스로 선택하지도 못한 태생 그 자체 때문에 그런 전제를 가져야 해? 뭔가 잘못된 것 같지 않아? 억울한 말마디들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으나 삼켰다. 말로 뱉으면 어리광이 될 터였다.

그때 너무 얌전하게 굴었어. 어차피 쫓겨날 줄 알았으면 먹는 거나 마음대로 먹을걸.

김서혁의 눈에 들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던 시절을 돌이키면 입이 썼다. 유은우는 손끝으로 머리 장식의 까만 깃털을 쓰다듬다가 거울을 통해 어깨 너머를 보았다. 정윤환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늘 부스스해 병아리 솜털 같던 머리칼에 컬을 넣어 정돈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답지 않게 세밀히 갖춰 입은 차림은, 정장인 듯 제복인 듯 의도적으로 경계가 흐려져 있었다. 마치 도시연합군 제복을 단순화한 후에 검은색과 회색을 반전시킨 것처럼 보였다. 옷깃에서 까맣게 반짝이는 부토니에는 깃털과 금속이 어우러져, 유은우의 머리 장식과 세트처럼 보였다.

접견실 곳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매달고, 정윤환은 친근한 태도로 유은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유은우는 거울을 통해 그와 마주 보았다. 그가 싱긋 웃으며 유은우의 귓가로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가 나른하게 스몄다.

“김서혁 지금 막 도착했대. 모함 착륙시키고 있다니까 조금 기다렸다가 맞춰 나가자.”

그러더니 정윤환이 유은우의 오른쪽 손목을 빤히 보았다.

“시계 빼자. 너무 튀어.”

유은우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며 적당히 웃었다.

“싫어. 누구 좋으라고. 총도 다 뺏긴 마당에.”

도시연합 입구에서 이미 무기를 반납했다. 유은우는 페이크 총에, 혹시 몰라서 가지고 온 진짜 총까지, 두 개 모두 명찰을 붙여 직원에게 내놓았다. 정윤환도 마찬가지였다. 참석자 등록부에 서명하는데 긴장으로 손에 땀이 났다. 총이 사라지면 동조자와 비동조자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진다. 표면적으로. 그 공백엔 다른 기준이 비집고 들어올 터였다. 정치적인 견해, 신뢰로 이어진 인맥, 명예나 경제력 따위의 동조자가 쌓아 올린 또 다른 권력의 형태였다.

정윤환이 뒤에서 유은우를 끌어안았다. 유은우의 오른쪽 머리에 왼뺨을 비스듬히 붙이며 그가 낮게 말했다.

“지금 네 드레스에 그게 어울린다고 생각해? 폭발물이라도 숨겨 둔 거라고 십중팔구 의심할 텐데?”

유은우의 손목시계가 달각거리더니 시계판을 비롯한 부품들이 나른하게 떠올랐다. 그것들은 날카롭게 번득이면서, 빗물처럼 빠르게 손목을 미끄러지고 드레스 주름 사이로 스며들었다.

“아.”

정윤환이 낮게 감탄했다. 틈을 놓치지 않고 유은우는 똑똑히 말해 두었다.

“봤냐? 내가 이 정도야. 앞으로 나 괴롭히지 마라. 끝장을 내줄 테니까.”

동그래졌던 정윤환의 눈이 스륵 가늘어졌다. 그가 피식 웃었다.

“무서워 죽겠네.”

그러더니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진짜 안 좋긴 하다, 몸이. 그럼 연회장에서 쿠데타라도 터지면 유은우 네가 나 보호해 주나? 나 총도 없고 환자잖아. 사회적 약자라고.”

“네 몸은 네가 챙겨. 짜증 나게 하지 말고.”

“너 말 예쁘게 안 해?”

“너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진 않은데.”

“너무하네. 서재희 말 못 들었어? 우린 팀이잖아. 서재희는 날 돕고. 나는 널 돕고. 협조해야지?”

정윤환이 스스럼없이 유은우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한 차례 감았다가 풀었다. 정윤환이 거울을 통해 유은우와 눈을 마주치며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난 너 도와주러 다녀와야겠다. 시곗줄 가릴 리본 끈이나 그런 거라도 찾아와야지. 그 상태로는 보기 싫어서 안 돼. 간 김에 우리 총도 좀 빼 오고. 어디 가지 말고 여기 가만히 있어. 곧 나가야 돼.”

정윤환은 돌아서서 몇 걸음 걸어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양손으로 유은우의 양 뺨을 덮어 감싸더니 장난스럽게 도리도리 흔들면서 ‘어디 가지 말라고 했다.’라고 단단히 덧붙이고 접견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 안 그래도 조용하던 접견실은 이제 숨소리도 조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유은우를 제하고 열 명이 될까 말까 한 인원은 앉거나 서서 입장 허가가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시선은 다른 곳에 두면서도 묘하게 이쪽으로 집중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그 어색한 공기에 숨이 막힐 무렵,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짙은 푸른색 자락이 쏟아지듯 들어왔다. 차예원이었다. 어찌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촘촘한 레이스로 덮인 가슴이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했고, 긴 머리칼을 우아하게 틀어 올려 매끈하게 드러난 목덜미엔 땀이 서려 있었다. 차예원은 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 빠르게 접견실을 훑어 내리다가 유은우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뛰어왔다. 그 기세에 유은우는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물러서다가 벽에 등이 닿아 멈춰 섰다. 차예원이 손을 내밀어 유은우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은우야!”

차예원의 손이 어찌나 찬지 유은우는 팔뚝으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가까이서 마주한 차예원은 여전히 청초하게 예뻤지만, 입술 끝이 발갛게 터져 있었고 눈가엔 물기가 어른거렸다. 그리고 전신을 떨고 있었다.

“너 왜 내 전화 안 받아?”

“전에 선배가 저 때린 날, 수신 차단했어요.”

“……내가 널 얼마나 찾아다닌 줄 아니? 윤환이랑 같이 오겠다 싶긴 했는데 걔도 내 전화 안 받아서. 그런데 네가 왜 여기 있어? 초대장 안 받았니? 여긴 초대장 없는 사람들이 파트너 기다리는 곳이야. 설마 했는데 여기 있을 줄이야…….”

“초대장 문자로 받긴 받았는데 바로 입장이 안 된대요. 김서혁 총사령관님께서 동행해 주셔야지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요. 제가 지금 시민등록번호도 없고 단순 전리품이라.”

“재희가 아무 말 안 해?”

서재희? 오한이 들었다. 유은우는 차예원의 마른 손아귀에서 천천히 자신의 손을 빼냈다. 여태까지의 차예원과는 확연히 달랐다. 거의 정신이 나가 있는 것 같았다. 유은우는 병원 앞에서 눈물범벅으로 통화하던 차예원을 떠올렸다. 볼이 하얗게 터서 까칠하던.

유은우의 손끝이 스륵 빠져나가자마자, 차예원은 즉시 유은우의 두 손을 다시 그러쥐었다. 그녀가 다급히 물었다.

“재희가 너한테 뭐 말한 거 없어?”

불길한 와중에도 유은우는 서재희와 나눴던 대화를 최근부터 빠르게 되짚었다. 유감스럽게도 차예원 앞에서 입 밖으로 내놓을 만한 것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되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차예원은 커다란 눈으로 말없이 유은우를 빤히 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집요하게 유은우의 눈가 언저리를 더듬었다. 유은우는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손을 뿌리쳤다. 차예원이 휘청거렸다. 유은우의 회색 드레스와 차예원의 짙푸른 드레스 자락이 크게 나부끼며 뒤섞였다. 유은우는 물러서려다가 차예원의 손아귀에 손목을 꽉 붙잡히고 곧바로 당겨졌다.

“잠깐 나와.”

잡아끌렸다. 유은우는 시계 침을 날카롭게 벼려 차예원의 드레스 자락 끝부분을 베어냄으로써 그녀가 허둥지둥 자리를 뜨게 하는 것을 상상하다가, 그녀가 뱉은 서재희 이름 석 자를 생각하고는 못 이기는 척 접견실을 나왔다. 복도는 밝았고 아무도 없었다. 차예원은 고개를 들어 복도 위쪽을 꼼꼼히 살폈다. CCTV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차예원은 모퉁이를 돌아 창가로 유은우를 밀어붙이고는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서로의 숨이 닿을 만한 거리에서 유은우는 차예원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은우야, 너 혹시 나한테 바라는 거 있니?”

“뺨 때릴 땐 언제고 갑자기 왜 이래요?”

“뭐든 말해 봐.”

“왜요? 거래라도 하려고요?”

“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내가 들어줄게. 너도 알지? 나 돈 많은 거. 대부분의 고민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어. 시민권 갖고 싶니? 그거 내가 줄 수 있어. 말해 봐. 뭐든지. 사양하지 말고.”

“시민권이요? 대체 저한테 뭘 요구하려고 시민권까지 얘기해요?”

“내가 너한테 하려는 부탁, 너한테는 별거 아니겠지만, 나한테는 정말 목숨만큼 중요해. 나 지금 입구에서 총 반납하고 와서 서약 설계 같은 거 걸지는 못하지만, 네가 원하는 것 내가 반드시 들어줄게.”

유은우는 차예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차예원은 미소를 지으려는 것 같았으나 터져 나오려는 울음으로 입가가 자꾸만 떨리며 허물어졌다. 유은우는 차예원에게서 비어져 나오는 감정으로부터 떨어지려고 애쓰며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차예원이 무엇을 부탁하든, 유은우는 웬만하면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차예원이 기꺼이 아량을 베푼다는데, 이 기회를 헛되이 흘려보낸다면 후에 아까워 죽을지도 모른다. 그럼 무엇을 말할까.

차예원은 시민권을 자신의 패로 들이밀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당장 얻기 힘들었다. 시민증이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만큼, 유은우는 차예원의 손에 휘둘릴 게 뻔했다. 게다가 차예원이 정말로 시민권을 발급해 줄 수 있는지 그 또한 불확실했다.

차예원이 무너져 흔들리는 틈을 이용해서 지금 당장 빼낼 수 있는 정보를 요구해야 했다. 일단 받고, 차예원이 후에 제시하는 부탁은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낙원의 이론이 뭐예요?”

차예원의 낯에서 핏기가 싹 빠졌다. 어찌나 창백한지 푸르스름하기까지 했다. 차예원은 잠시 입술을 짓씹었다. 이미 터진 입술 끝에 피가 맺혔다. 차예원이 꺼질 듯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범위가 너무 넓어.”

“애들 사이에 소문으로 떠도는 예언도 낙원의 이론이고, 학생회실 밑에서 본 자료도 낙원의 이론이었어요. 동일한 건지 별개인지부터 시작해서 선배가 아는 만큼 저도 알고 싶어요,”

차예원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숨을 골랐다.

“나는 낙원의 이론을 배웠어. 공부했지. 정확히는 우리 아버지께서 내게 가르쳐 주셨어. 그래서 난 진짜 후보들이 낙원의 이론에 어떻게 접근하는지 사실 잘 몰라. 아버지 말로는, 그들은 삶을 선택하면서 필연적으로 낙원의 이론에 가까워진다고 했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차예원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재희나 윤환이는 겪으면서 알게 되었지. 하지만 나는 알고 겪었어. 그건 아주 큰 차이가 있지.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겪고도 모르거나, 모르고 겪었겠지. 낙원의 이론을 학문으로 접근할 수 있었던 건 나의 아버지가 권력의 정점에 있었기에 누릴 수 있었던 명백한 특권이었어. 그때는 우쭐했지. 모든 게 다 이렇게 쉽게 손에 들어오겠구나. 세상이 가소로웠어. 그런데 지금 널 부러워하고 있다니 우습지.”

유은우의 어깨를 꼭 붙잡은 차예원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제국시대 말기, 중앙 산업단지가 폭발하던 날 인류는 모든 걸 잃었어. 용의 사체로 도시를 건설했지만 모든 인간을 다 수용할 수는 없었지. 정부는 도시 거주 승인 명단을 비밀리에 만들어. 이 과정에서 낙원의 이론이 활용돼.”

차예원이 마른침을 삼키고는 이어 말했다.

“낙원의 이론은 인간들의 행동 패턴을 축적, 분류, 분석하여 결과를 도출해 내는 시스템이야. 그 자체로는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에 불과하지만, 관리자의 의도에 따라 특정 기준에 맞는 케이스를 선별할 수 있어. 작게는 1년 이내에 직장을 그만둘 확률, 40대에 조기 축구를 시작할 확률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살인을 할 확률, 사회에 변혁을 가져올 확률까지. 정부는 신생아나 다름없는 도시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새로운 시대에 튀지 않고 잘 적응하며 동시에 각 분야에 뛰어나기까지 한 인간을 빠른 시간 내에 정확하게 골라내야 했어.”

유은우는 폭포수 아래에 있는 것처럼 차예원의 쏟아지는 말마디를 맞았다.

“정부는 낙원의 이론을 통해 도시 거주를 허락할 인간을 선별했어. 폐쇄되고 낯선 환경에도 잘 적응할 인간,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아도 돌발적인 범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을 인간, 사회 시스템을 신뢰하며 현상 유지에 헌신적으로 봉사할 인간, 상명하복에 충실할 인간, 그리고 현 체제에 반기를 들지 않을 보수적인 인간. 아무리 뛰어난 전문가라도, 틀에서 벗어나 판을 뒤집을 가능성이 있는 자는 제외시켰지. 물론 당시 정부 관계자는 낙원의 이론과 상관없이 전부 도시 거주 확정이었어.”

“제국시대에도 낙원의 이론 시스템을 활용했었나요?”

“공공연히 활용되었지. 지도자를 선출할 때, 교사를 임용할 때, 혼인 신고할 때, 정부뿐만 아니라 개인조차 가까운 센터에서 낙원의 이론을 돌려 볼 수 있었어.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 활용되었지. 하지만 곧 금지되었어.”

“왜요?”

“사랑하는 가족, 연인이 낙원의 이론에 의해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결혼이 어려워지는 등 인간의 모든 행동에 제약이 걸렸기 때문이야. 말 그대로 확률인데, 기정사실화되어 버리니까.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나자 제국은 낙원의 이론을 모든 법안에서 제외시킬 뿐 아니라, 완전히 폐기해 버리겠다고 했어. 하지만 거짓말이었지. 정부는 데이터를 몰래 간직하고 있었어. 그리고 용으로 도시 건설에 착수하자마자, 거주를 허락할 인간들의 명단을 낙원의 이론을 통해 추출했지. 하지만 거기서 끝낼 수 없었어. 인간은 계속 태어났고 도시는 유지해야 했으니까. 지금도 낙원의 이론을 활용하고 있어. 다만, 은폐되어 있지. 공식적으로 드러내면 제국시대 때처럼 시민들이 반발할 테니까. 그때는 낙원의 이론을 폐지하고도 사회가 굴러갔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야. 상황이 달라.”

차예원이 고개를 젓더니 말을 이었다.

“처음 인류가 도시에 들어왔을 땐 완전히 빈손이었어. 자유롭게 숨 쉬며 밟을 수 있는 대지의 면적은 말도 안 되게 줄어 버렸고, 빛나는 기술들은 사해에 묻혀 버렸고, 바다는 멀어지고 강은 말라붙고 식물은 시들었으며 동물은 뒤틀렸어. 그래도 도시연합에게 남은 자원이 딱 하나 있긴 했어. 동조자.”

차예원의 목소리가 낮아져 유은우는 더욱 귀를 기울여야 했다.

“처음엔 좋은 의도였어. 사실 많은 악이 선에서 출발하지. 그들은 동조자를 관리하려고 했어. 자원을 관리하는 것처럼. 제국시대에는 낙원의 이론이 보조 수단에 불과했지. 그때는 모든 것이 풍족했으니까. 하지만 도시연합은 빈털터리였어. 초라한 그들에게 낙원의 이론은 근간이 되었지. 그들은 마지막 남은 자원을 효과적으로 융통할, 검증된 기준이 필요했거든. 인류가 멸하지 않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어.”

“동조자를 관리한다는 게 정확히 무슨?”

“사회에 해악을 끼칠 수 있는 불량품을 걸러 낸다고 생각하면 쉬워. 여덟 개의 도시는 연합 초기에 연약하고 위태로웠어. 강력한 동조자들이 패를 갈라 싸우거나 비동조자를 지배하려고 하면, 애써 세운 도시가 무너지고 인류가 자멸할 수도 있었지. 그런 위험천만한 싹이 보이는 동조자를, 아주 어릴 때부터 지켜보다가 여물기 전에 제거하는 거야.”

“그게 가능해요? 겪어 보지도 않고 이 사람의 미래는 이럴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른 판단이?”

“가능해. 낙원의 이론은 아주 오랫동안 쌓아 온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한 체계적인 시스템이야. 오차는 거의 없어. 지금도 도시연합 지하에선 끊임없이 데이터가 수집되고 있으니까 앞으로 더 완벽해질 거야.”

“수집……?”

“이프, 인터컴, 인터넷, CCTV 등의 기록이 남아. 동조자라면 특히 총으로 수집하는 정보가 커. 타격이 가해진 위치, 장소, 설계가 깔리는 방식, 방아쇠를 당기기까지 망설이는 시간, 몇 번을 연사했는지, 타격을 가하는 순간 근육이 어느 정도 긴장했는지, 물러섰는지 나아갔는지, 효율과 안전 중 무엇을 더 중요시하는지, 전부. 그 사람이 총을 사용하는 방식에 그 사람의 성향이 드러나고 미래가 가늠돼. 그리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고정된 유전자. 시스템에 유전자를 넣고 돌리면 그간의 행동 패턴과 함께 분석되어 최종 등급이 매겨져.”

‘온디딤을 쓰면, 도시연합 눈을 피할 수 있으니까.’

전시실에서, 서재희가 그렇게 말했었다.

“처음 들으면 비인간적으로 느껴지겠지. 하지만 굉장히 효율적이고 부작용이 적어. 그 증거로 지금 도시연합을 봐. 그 강력한 동조자들이 사회에 녹아들어 착실히 제 의무를 다하고 있어. 소수의 동조자와 다수의 비동조자가 폐쇄적인 공간에 뒤섞여 있는데 사회가 이만큼이나 정상적으로 굴러간다는 건 쉽지 않아.”

“정상적으로.”

유은우는 그 낯선 단어를 입속으로 발음해 보았다. 뜻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생경하여 입에 붙질 않았다.

“그리고 예언.”

차예원이 빠르게 속삭였다.

“낙원의 이론은 하나만을 지칭하지는 않아. 제국시대 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예언이 최초였고, 어떤 학자가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면서 그 위험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예언의 제목을 따다 붙였어. 그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시스템이, 네가 지금 말하는 낙원의 이론이라 보면 돼. 그 시스템으로 현재 도시연합의 모든 체제가 유지되는 거고. 이미 굳어져서 바꿀 수도 없어. 역대 후보들이 그저 후보에만 머무른 데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야.”

차예원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어려 있었지만 목소리는 확고했다.

“윤환이를 봐. 오랜 시간 희생을 치르면서 견고하게 만든 체제를, 개인적인 판단으로 옳지 않다며 들쑤시니까 의미 없는 사상자가 생기잖아. 1학년 때 걔가 팀을 억지로 끌고 나가는 바람에 팀원이 전멸했어. 당시 사망자 중엔 시스템상에서 제거 대상이 아닌 학생들도 다수 있었고. 무사히 졸업했다면 사회에서 요직을 담당했을 거야.”

“도시연합에서 시스템으로 판단해 제거하는 동조자들도 피해자 아닌가요?”

“그건 필수 불가결한 요소야. 필요악 같은.”

유은우는 자꾸만 익사하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선배가 말하는 논리라면, 정윤환은 제거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체제에 반하고 불필요한 희생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면, 정윤환이야말로 시스템에서 걸러 내야 하는 게 아닌가…….”

“제거 대상과 후보는 한 끗 차이야.”

차예원이 속삭였다.

“애초에 혁명을 꿈꾼다는 자체가 혁명을 도모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거지. 그런 힘은 보통 머리가 비상하거나, 판에 예민하거나, 정보력이 출중하거나, 어찌 됐든 그만한 능력이 있어야 나오는 거야. 당연히 인재가 집중된 도시연합 중앙학교에서 제거 대상자가 빈번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감지하는 족족 다 죽일 순 없잖아. 인재란 인재를 다 죽이면 앞으로 도시는 누가 이끌겠어? 혁명의 싹은 보이지만 그래도 아직 여릴 때 밟아서 굴복시키면 기득권으로 편입시킬 수 있어. 처음에 의지를 꺾기 힘들어서 그렇지, 한번 굽힌 사람들은 더없이 충직해져. 그 대표적인 예가 낙원의 이론 후보야. 그런 말도 있잖아. 경찰이랑 조폭은 사주가 비슷하다는.”

유은우는 숨을 토했다.

“시스템에 의존해서 사람을 기만하는 일이에요.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지, 저는…….”

“쉿.”

차예원이 주의를 주는 바람에 유은우는 입을 다물었다. 스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유은우는 그제야, 차예원의 짙푸른 드레스 자락 아래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 검은 그림자는 유은우를 위협하는 대신, 바닥으로 매끄럽게 퍼지면서 복도 모퉁이를 돌았다.

“김서혁이야. 널 찾고 있어.”

차예원의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기도하듯 유은우의 두 손을 다시금 그러모으더니 꼭 쥐었다.

“은우야, 너 재희 지갑 본 적 있어? 남들이 가족사진 따위를 넣고 다니는 칸에 재희가 뭘 넣고 다니는지 알아?”

유은우는 고개를 저었다. 불안감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차예원의 설명이 진실인지 여부를 떠나서 어쨌든 그녀는 낙원의 이론을 정면으로 언급했다. 게다가 차예원은 아직 자신의 요구를 드러내지도 않았고, 유은우에게 확답을 듣지도 못한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패를 먼저 꺼내 보인 것은 차예원이 그만큼 절박함을 뜻했다.

“난 봤어. 아까 매장에서 옷 계산할 때. 재희가 잠깐 지갑을 카운터에 놓아두고 통화하러 가기에 내 사진 넣어 두려고 살짝 봤어.”

차예원이 지나치게 자신을 숙이는 이 상황에서, 자꾸만 서재희가 언급되고 있었다. 유은우는 부디 그녀의 부탁이 서재희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일차원적인 협박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차예원은 지나치게 떨고 있었다.

“재희는 약 같은 거 절대 안 해. 감기약도 안 먹어. 그 흔한 비타민도. 내가 알아.”

느닷없는 약 이야기에 유은우는 그만 가슴이 덜컹했다.

“재희는 어항 같지. 까만 어항. 속이 보이지 않아. 가끔 물이 튀고 거품이 보글거려서 안에 물고기가 산다는 것만 간신히 알 수 있어. 어떻게든 키워 보려고 먹이도 뿌리고 물도 갈고 수초도 넣어. 그렇게 관여하면서도 겁이 나. 보이지 않으니까. 내가 하는 행동 때문에 오히려 물고기가 다 죽어 버리는 건 아닌가.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어. 답답하고 괴로운데 놓을 수가 없어.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거, 제 살 깎아 먹듯 힘든 일이야. 제일 지쳐 있는 것도 나고, 제일 손해 보는 것도 나야. 가지지 못한다면 차라리 망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어. 그런데 이젠 그러지도 못해. 너무 오랫동안 좋아해 와서. 재희가 잘못된다는 거 상상만 해도 무서워져서.”

유은우의 손을 감싼 차예원의 손아귀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재희가 나한테 그러더라. 임유현이 김서혁에게 붙었으니 우리 아버지는 이제 혼자라고. 그리고 자신 또한 위험해진 건 매한가지라고. 그러니 임유현을 배신하고 이쪽으로 완전히 넘어오겠다고. 그러나 날 좋아할 일은 없을 거고, 겉으로 다정한 것에 계속 마음 쓰면 힘들 테니 미리 말해 둔다고. 이유야 뻔하지. 재희는 너를 좋아하는 거야.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다고. 자존심 상하지. 가끔은 죽여 버리고 싶어. 동시에 절대 죽지 않았으면 해.”

차예원의 뺨을 타고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녀는 숨을 몇 번 고르더니 필사적으로 말했다.

“은우 네가 재희한테 자살하지 말라고 좀 해 줘. 죽지 말라고. 살아만 달라고. 제발 좀 말려 줘.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네가 말하면 재희도 들을 거야…….”

유은우는 현기증을 느꼈다. 차예원의 말마디가 귓바퀴에서 왱왱 맴돌았다. 차예원이 재차 말했다.

“그 사람 죽게 내버려둘 수 없어.”

“이유가 있을 거예요.”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 나갔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예요. 만약에 서재희 선배가 자살을 계획하고 있다면, 그게 그 사람에게 가장 최선의 선택이기 때문일 거예요. 억지로 막는다면 더 끔찍해질 수도 있어요. 본인이 결정하도록 믿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은우 너도 재희 좋아하는구나.”

유은우는 흠칫했다. 피가 식는 것 같았다. 차예원이 발갛게 부은 눈으로 날카롭게 말했다.

“네가 재희한테 전혀 마음이 없다면, 이런 부탁쯤이야 알겠다고 대답하고 적당한 기회를 봐서 자살하지 말라고 말 한마디 전하면 끝날 일이지. 너도 그 사람 좋아하는 거지? 그래서 그런 대답이 나오는 거지. 전적으로 믿는다 이건가? 그 사람 선택이 잘못되었더라도?”

유은우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더 이상 서재희를 안 좋아한다고 우기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잘못된 선택인지 아닌지는 제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어요. 단지 서재희 선배가 나약하여 실수로 내린 결정은 아닐 것이다.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게 믿는 것뿐이에요.”

차예원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던 검은 연기가 차예원의 오른손으로 모여들더니 뱀처럼 빚어졌다. 유은우 또한 드레스 자락을 따라 시계 침을 미끄러뜨려 바닥을 기게 한 다음, 정확히 차예원의 뒷덜미에 놓았다. 차예원이 차갑게 말했다.

“내가 낙원의 이론에 대해 설명했으니까 너도 내 요구를 들어줘야지. 입만 싹 닦고 끝내시겠다?”

“선배가 먼저 본인 요구를 말했다면 저도 선배 설명 굳이 듣지 않았을 겁니다. 본의 아니게 저만 이득을 보긴 했지만, 그래도 선배 부탁 못 들어줘요. 더군다나 본인 욕심으로 남의 인생을 멋대로 휘두르려는 그런 부탁은.”

“사랑하는 사람 죽지 않았으면 하는 게 그렇게 나쁜 거야?”

“그건 선배 방식이고.”

유은우가 차갑게 대답했다. 검은 뱀이 뾰족한 주둥이를 올리며 솟아났다. 정수리를 노리며 한들거리는 그것을, 유은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시계 침을 한 뼘 크기로 쑥 늘렸다. 그 끝으로 아주 살짝 차예원의 뒷덜미를 그어 내렸다. 차예원의 동공이 커졌다. 유은우는 조용히 충고했다.

“뒤 조심해요.”

차예원은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그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바짝 얼어붙어 있었다. 마치 칼날과 맞닿은 기분일 거라 예상하며, 유은우는 쓰게 웃었다.

“피차 의견이 맞지 않는 것뿐이니 여기까지만 하죠. 지켜보는 사람도 있는데.”

유은우가 왼쪽으로 턱짓했다. 차예원은 고개는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 굴려 옆을 보았다.

“우리 애기 데려가도 돼?”

정윤환이 가볍게 말했다. 그는 총을 꺼내 겨누고 있었다. 총구는 차예원의 뒷덜미를, 정확히는 유은우의 시계 침과 맞닿은 지점을 향하고 있었다. 차예원은 눈을 내리깔았다가 손을 한 차례 휘저었다. 검은 뱀이 삽시간에 자취를 감추는 것을 확인하고 유은우는 시계 침을 드레스 자락 사이로 도로 불러들였다. 그와 동시에 정윤환도 총을 거두고 재킷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차예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눈가가 발갰으나 더 이상 눈물은 없었다. 그녀가 내뱉듯 말했다.

“뒤에서 공격하다니 치사하네. 윤환이 네 방식은 아니잖아?”

“남이사.”

“총은 반입 금지야.”

“어쩌라고. 너 같은 것들 때문에 내가 법을 어기잖아. 그건 그렇고…….”

정윤환이 해맑게 웃었다.

“……그렇게 혼자 여기 계속 있어도 돼? 김서혁이 유은우 찾는다고 난리 났는데, 너랑 여기 둘이 같이 있는 거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지금 여기 차인호 라인은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위험하지 않나?”

차예원은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려 유은우를 보았다. 서늘한 표정으로 도장이라도 찍듯 한 차례 깊이 응시하고는, 그녀는 드레스를 감아쥐고 자리를 떴다.

“어디 가지 말라고 당부에 당부를 거듭했건만. 잠깐만 눈을 떼면 이렇게 뽈뽈 돌아다니니 당최 마음을 놓을 수가 없네. 우리 애기 말을 안 들어도 너무 안 들어요. 오빠가 너무 힘듭니다. 예뻐서 어디 갖다 버릴 수도 없고.”

정윤환이 한숨을 푹푹 쉬며 어서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유은우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드레스 자락이 풍성하게 부풀어 올랐다.

“괜찮아?”

정윤환이 황급히 뛰어오더니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유은우는 일어나자마자 몸에 힘을 주고 정윤환의 손길을 밀어냈다.

“괜찮아. 그냥 좀 긴장해서. 빨리 가자. 대장 화났겠다. 잘 보여야 하는데.”

정윤환은 주머니에서 리본 끈을 꺼냈다. 유은우가 받으려고 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한쪽 손으로 어떻게 감으려고.”

그도 그래서 유은우는 정윤환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정윤환은 유은우의 손목에 채워진 시곗줄 위로 회색 리본을 감았다. 손재주가 없는지 여간 서툴렀다. 유은우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적응이 빠르네. 온디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사람을 같은 시대에 만날 줄이야. 차예원 놀란 표정 봤냐? 내가 한 줄 알았겠지.”

가벼운 말투와는 달리 정윤환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리본이 서툴게 묶이고 정윤환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그는 움직일 생각은 않고 다만 고개를 비스듬히 숙여 유은우를 빤히 보았다. 그러다 툭 뱉었다.

“서재희한테는 내가 물어볼게.”

듣고 있었나 보네. 유은우는 약간 놀라 그를 보았다. 정윤환이 덧붙였다.

“무슨 일인지 내가 물어볼게.”

유은우는 목을 가다듬었다.

“나는 별로 상관없어. 본인 선택이 그런 걸 나보고 뭘 어떡하라고.”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말해 봤자 본심 아닌 거 다 티 나거든. 내가 잘 이야기해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일단 가자. 서재희는 절대 안 늦어. 난 걔가 지각하는 거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러니까 우리도 늦으면 안 돼.”

김서혁은 중앙홀 입구에 있었다. 그는 정장 위로 기장과 배지, 훈장을 달고 있어, 언뜻 보면 도시연합군 제복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턱을 매만지며 반대쪽 복도로 시선을 두고 있다가, 기척에 고개를 돌려 유은우를 보고 말없이 손짓했다. 그 신호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도시연합 직원이 헐레벌떡 다가왔다. 그는 진땀을 흘리며 유은우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직원이 이프에 유은우의 지문을 입력하고 입장 허가를 내는 동안, 유은우는 김서혁의 뒤쪽을 보았다. 도시연합군 정예군 아홉이 있었다.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흩어져 있었으나, 그들 각자의 실력을 훤히 아는 유은우의 눈에는 그 불규칙 속에서도 분명한 서열이 딱 보였다. 그들은 유은우를 발견하고 눈에 띄게 반색했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예뻐졌다. 보고 싶었다. 왜 연락이 없었냐. 너 학교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냐. 안부인사가 빗발치는 가운데 이선규가 크게 외쳤다.

“너희 진짜 사귀냐?”

정윤환이 유은우의 허리를 당겨 안으며 대답했다.

“어. 내가 아깝지?”

“아니, 그 반대…….”

이선규는 숨을 들이켜며 말끝을 흐렸다. 소연주가 이선규의 발등을 꾹 밟아 눌렀던 구두 굽을 우아하게 들어 올리며 다정한 눈으로 유은우를 보았다.

“세상에, 오랜만이다. 우리 은우 정말 예쁘네. 잘 지냈어? 윤환이가 잘해 주니? 널 보고 있으니까 처음 드레스 입히던 때가 생각나네. 그때 우린 푸른색을 덧댔었지? 은우가 짙은 푸른색도 참 잘 어울렸지. 애가 하얘서 뭐든 잘 받았어. 입히는 재미가 있었는데.”

“맞아. 그땐 대장이 총사령관이 아니었으니까 임유현 따라 짙은…….”

소연주가 다시 이선규의 발을 밟는 시늉을 하자 그는 입을 불퉁하게 내밀고는 괜히 김서혁을 불렀다.

“대장, 이제 입장합시다. 은우도 왔는데요.”

“기다려.”

김서혁이 말했다. 그는 잠시 미간을 좁히는가 싶더니 다시 말이 없었다.

박민준이 팔짱을 끼고 소연주 쪽으로 상체를 기울여 속삭였다.

“대장 지금 누구 기다리는 거지? 은우 기다리는 거 아니었나? 왜 안 들어가는 거야? 지금도 입장이 많이 늦었어.”

소연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선규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아냐, 안 늦었어. 도시연합도 아직 안 왔잖아. 걔네 먼저 들여보내고 들어가도 충분해. 주인공은 우리니까,”

“이선규, 입조심해.”

소연주가 날카롭게 제지했다.

그때였다. 김서혁이 움직였다. 그가 서늘한 낯으로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자 정예군은 자연스레 도열했다. 정윤환이 능숙하게 팔을 내밀기에 유은우는 손을 얹었다. 둘은 김서혁의 바로 왼쪽 뒤, 소연주와 이선규의 옆에 서서 걸었다. 김서혁이 계속 주시하고 있던 복도 저쪽에서 정갈한 구둣발 소리와 함께 열댓 명의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우아하게 나이 든 차인호를 선두로, 바로 뒤에 서재희가 차예원을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뉴스에서 자주 본 적 있는 각 도시의 시장들이 함께 걸어왔고, 그 주위를 경호원이 삼엄하게 두르고 있었다.

차인호와 거리를 두고 김서혁은 멈추어 섰다. 유은우는 김서혁의 오른손이 마치 홀스터에서 총을 뽑아내듯 허공을 더듬다가 늘어뜨려지는 것을 보았다. 김서혁의 싸늘한 시선은, 차인호가 아닌 서재희를 향하고 있었다.

먼저 악수를 권한 건 차인호였다. 그는 심심한 안부를 건네며 인자한 미소로 손을 내밀었다. 김서혁은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그리고 김서혁은 길을 비키지 않았다. 무례한 태도였다. 차인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김서혁을 응시했다. 서재희도 자연스레 고개를 들었다. 반듯한 이마가 훤히 드러났고 그 아래 눈은 지극히 차분했다. 짙푸른색이 가미된 까만 정장을 칼같이 입고 있었다. 유은우는 서재희 또한 깃털과 금속이 가미된 부토니에를 깃에 달고 있음을 깨달았다. 깃털은 짙푸른색이었고 금속은 은색으로 반짝였다. 서재희의 담담한 시선은 유은우와 정윤환을 스치지 않고 바로 김서혁을 향했다. 차예원은 입술을 꾹 문 채 앞만 보고 있었다.

차인호가 매섭게 입을 열었다.

“김서혁 자네…….”

“따님 결혼식은 언제입니까?”

차인호의 말을 잘라먹으며 김서혁이 물었다. 차인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애롭던 낯 위로 서서히 분이 배어 나왔다. 유은우는 이만하면 차인호도 제 속을 많이 눌렀다고 생각했다. 물론 화를 팽팽하게 참는 것은 김서혁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 화의 근원은 서재희였다. 차인호가 입매를 굳히며 대답이 없자 김서혁이 무뚝뚝하게 웃었다.

“든든하시겠습니다. 요즘 시대에 참으로 드문 인재지요. 예비 사위가 직업을 잘 선택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곧 졸업을 앞두었다고 알고 있는데, 보통 우수한 인재들은 도시연합군을 거치는 게 정석 아닙니까. 그런데 이번에 적성검사 신청 명단에는 없더군요. 그 생각만 하면 정말 안타까워서. 사람이 기회를 주는데 잡지 못한다면 그것도 큰 불운이지요. 훌륭한 리더감이라고 알고 있는데 과장된 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더군요.”

말을 하는 내내 김서혁의 시선은 서재희를 향하고 있었다. 서재희는 빈틈없이 선한 낯을 유지하며 정중하게 미소 지었다.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만, 총사령관님, 저는 용 연구소에 지원했습니다.”

문득 허공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이어 펑펑 즐거운 폭발음이 터졌다.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 위로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하늘이 번쩍거리며 밝아졌다.

유은우는 모두의 시선이 밖을 향한 틈을 타서 서재희를 보았다. 서재희 또한 유은우를 보고 있었다. 눈빛이 포근했다. 그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예쁘다.

뺨이 확 달아올랐다. 유은우는 얼른 창가로 눈을 돌렸으나, 이제 야외에서 불꽃이 터지는지 폭탄이 터지는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에 이미 정신이 없었다. 유은우는 심호흡을 하며 달아오른 목덜미를 문질렀다.

정윤환의 손이 다가와 뒤통수를 감싸 안았다. 유은우는 얼결에 정윤환의 가슴팍에 얼굴을 꼭 파묻었다. 그가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하더니 희미하게 속삭였다.

“조심해. 들켜.”

유은우는 문득 정윤환의 가슴에 정확히 닿은 귀로 쿵쿵 들리는 터질 듯 빠른 심장박동이, 자신의 것인가 정윤환의 것인가 헷갈렸다. 그러나 채 가늠해 내기도 전에, 정윤환은 유은우의 머리를 농구공 다루듯 가볍게 쥐고 제 가슴으로부터 떨어뜨렸다.

서재희는 홀 가운데 반듯하게 서서 시종 서글서글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는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수많은 사람이 앞 다투어 서재희 근처로 모여들었으니까. 그들은 조심스레 다가와서 차례를 기다리고 제 순번에 열정적으로 머물다가 다른 이 눈치를 보며 아쉽게 떠나곤 했다. 서재희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지만, 상대의 눈을 마주 보며 신중하게 경청하는 태도를 보였다. 가끔 서재희가 낮게 웃음소리를 내면, 유은우는 애꿎은 포도 알을 떼어 내던 손을 멈추곤 했다. 유은우는 최대한 서재희 쪽을 보지 않으려 애썼지만, 한번은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깊이 자책했다. 서재희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다정한 얼굴로 차예원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있었다.

바람이 밤에 젖어 서늘했다.

유은우는 정윤환의 어깨에 기대 있었다. 테라스였다. 정윤환의 안색이 눈에 띄게 파리해지자, 소연주가 강력히 주장하여 중앙홀과 이어지는 야외 테라스에 마련된 벤치에 둘만 앉게 되었다. 작은 테이블에는, 이선규가 온갖 생색을 내며 가져다준 약간의 과일과 음료가 있었다.

유은우는 팔짱을 낀 채 정윤환의 귓가로 입술을 가까이했다. 정윤환은 음료를 마시려다 말고 유은우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유은우는 자신의 머리 장식과 정윤환의 부토니에를 차례로 가리키며 소곤소곤 물었다.

“깃털은 무슨 뜻이야?”

정윤환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대답했다.

“소속이 없다는 뜻이야. 나는 햇병아리입니다. 탐나면 데려가 주세요. 삐악삐악. 뭐, 그런 의미라고 보면 돼.”

“소속이 왜 없어? 우린 김서혁 라인이고 도시연합 중앙학교 학생이잖아?”

“김서혁 라인이지만 어쨌든 군인은 아니지. 난 군인 신분을 유예했고, 넌 애초에 전리품으로 등록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학생 신분은 여기서 안 쳐줘. 아직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지도 못한 불안한 동조자들은 애초에 이런 자리 오지도 못한다고. 우린 특별 케이스인 거고.”

유은우는 턱으로 차예원을 가리켰다.

“그럼 차예원은 왜 깃털 안 달아?”

“쟤는 4학년 2학기 때 이미 도시연합 중앙제어센터에 지원해서 입사가 확정됐어. 졸업하고 바로 들어갈걸. 사실 작년에 조기 졸업해도 됐었는데 서재희 때문에 학교에 눌러앉은 거야.”

“차예원은 왜 서재희 선배를 좋아해?”

유은우는 지나가는 말처럼 물으려 했으나 목소리 끝이 우습게 갈라졌다.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큼큼 목을 가다듬는 유은우를 보며, 정윤환이 코웃음을 쳤다.

“눈이 삐었나 보지. 아니면 똑똑한 척 다 하면서 뼛속까지 멍청하거나. 나처럼.”

끝에 붙은 말마디가 귓가에 턱 걸렸다. 유은우는 정윤환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유은우를 마주 보며 씩 웃어 보였다. 파고들면 감당 못 할 대답이 튀어나올 분위기라, 유은우는 호기심은 접어 두고 아예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미간을 좁히며, 쟁반에서 포도 알을 하나 더 똑 떼어다가 손 안에서 데굴데굴 굴렸다. 천지에 맛있는 음식이 널려 있는데 이토록 입맛이 없을 수 있다니 신기할 정도였다. 불쑥 물었다.

“그럼 기초학교 학생들도 걸러 내?”

“기초학교?”

정윤환은 반문하더니 잠깐 웃었다. 그가 이어 말했다.

“도시연합이 경계하는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들이야. 예민한 성정에 호기심도 많아 사회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 무뎌지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옮겨 시스템을 파헤칠 만한 능력을 충분히 가진 사람들. 도시연합 중앙학교까지 올라오지도 못하는 어중이떠중이 기초학교 학생들은 도시연합이 염려하는 변수에 들어가지도 않아. 오히려 도시연합이 바라는 인간상이지. 환경엔 둔감하고 적당히 능력 있고. 할 수만 있다면 공장에서 대량생산하고 싶은 심정일걸, 아마.”

유은우는 쟁반 한쪽에 포도 알을 떨어뜨리고, 정윤환이 내려놓았던 음료를 대신 집어 들고 쭉 들이켰다. 탄산이 알싸했다.

‘나는 정윤환의 바람대로, 김서혁이 한세연 연구관을 해치지 않도록 막을 거야. 또, 은우가 낙원의 이론 관리자가 되지 않고도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할 거야.’

유은우는 잔을 내려놓았다. 소리 낮춰 물었다.

“한세연이 누구야?”

정윤환이 예쁘게 웃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 둘 중에 한 명.”

“나머지 하나는 누군데?”

“죽었어.”

“정성민? 그 편지 쓴 사람?”

정윤환이 헛웃음을 지었다.

“남의 방 막 뒤지고 그러면 안 되지 않냐? 어떻게 거기다 넣어 놓은 걸 찾았는지.”

“군에서 실종된 거야?”

“자살로 처리됐어. 어쨌든 죽고 없어. 이제 못 만나.”

정윤환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유은우는 약간 몸을 뒤로 뺀 후 고개를 기울여 정윤환을 빤히 응시했다. 정윤환이 눈을 찡그렸다.

“뭘 그렇게 봐.”

“죽어도 아예 없어지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손수 쓴 편지도 남아 있고, 이름을 기억해 주는 사람도 있잖아.”

정윤환은 한숨 섞어 중얼거렸다.

“괴롭히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정말.”

정윤환은 유은우가 내려놓은 빈 잔을 손끝으로 살짝 밀었다. 투명한 유리잔으로 중앙홀의 온갖 사람들과 화려한 조명이 일그러져 비쳐 보였다. 정윤환이 말했다.

“서재희는 중립지대에 대해 말했지. 유명무실한 법이야. 원래는 도시연합의 뜻에 반하면서 그렇다고 반란군을 지지하지도 않는 소수의 엘리트가 제8도시에 세우려고 그 발판 삼아 제정했던 법인데, 세금 문제 때문에 조항이 개정되면서 실제로 적용될 수 있는 범위가 없어져 버렸어. 서재희는 무슨 수로 그 법을 살린다고 했을까. 거의 불가능해. 왜냐하면, 그 법의 개정에 도시연합이 직접 나선 것이 아니라, 바로 시민들의 힘으로 개정되었기 때문이야. 시민들은 중립지대가 생기면 잘난 부자들이나 모여 살며 도시연합의 온갖 규제도 피하고 세금도 안 낼 거라고 소리를 높였어. 실제로는 자유의 시작이 될 수 있었는데.”

유은우는 허리에 정윤환의 손길을 느꼈다. 살짝 닿아 따뜻했다. 유은우는 꿈에서 뽑아냈던 희고 단단하고 날카로운, 칼의 형상을 한 기계 덩어리를 생각했다. 그리고 정윤환의 방에서 본 책의 구절을 떠올렸다.

‘용의 뼈는 녹슨 못과 같아, 한번 내리꽂으면 영원한 심연이 관통된다.’

“유은우, 너 말이야. 만약에 길이 하나밖에 없다면 어떡할 거야?”

유은우는 가만히 정윤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유독 아파 보였다.

“무슨 뜻이야? 구체적으로 말 안 하면 대답 안 할 거야.”

“이제 너한테 존댓말은 못 듣는 거야?”

“치사하게 고작 여섯 살 차이 가지고.”

“여섯 살 차이가 고작이야? 서재희 대할 때랑 너무 다른 거 아니야?”

“사람이 다르잖아.”

정윤환은 잠깐 웃었다. 유은우는 머리 위로 그의 무게를 느꼈다. 중앙홀의 많은 사람이 여전히 둘을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은우는 정윤환이 머리에 뺨을 묻고 도리도리를 하든 뽀뽀하면서 침을 바르든 개의치 않고 얌전히 있었다. 둘 중 하나라도 뻔뻔하게 연기를 잘 해내니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있잖아. 네가 살아 움직이는 모습이 예쁘지 않았으면 했어. 정말 짜증 나는 성격이면 좋겠다. 말끝마다 욕을 달면 더 좋고. 웃는 소리가 탁했으면. 둔하고 나약하여 자주 포기하거나. 그리고 아주 간절히, 네가 날 미워했으면 좋겠다고. 그럼 내가 널 대하는 게 더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했어.”

정윤환의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졌다.

“바란다고 이루어질 리가 없지. 기도를 안 해서 그런가. 누구 말대로 종교라도 가질까 봐. 네가 날 싫어하는 것 빼고는 전부 반대야. 쉬운 게 하나도 없네.”

유은우는 정윤환의 표정을 살피려 했다. 그러나 정윤환이 먼저, 유은우의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을 어깨로 옮기더니 그대로 꼭 감싸 당겨 안았다. 그가 유은우의 귀에 입술을 붙였다.

“비싼 개인 과외 들어간다. 잘 들어.”

정윤환은 테이블에서 가느다랗고 긴 포크를 집어 들었다. 포크를 펜대 굴리듯 툭툭 돌리다가 딱 멈추었다. 유은우는 그 끝을 따라 중앙홀을 응시했다. 복도에서 마주쳤던 차인호가 있었다. 그는 까만 겉옷을 벗고 하얀 셔츠에 짙푸른 니트 조끼를 덧입고 있어, 칼같이 정장을 차려입은 이들보다는 확연히 격식이 없어 보였다. 얼굴이 둥그스름하고 잘 웃는 인상이었다. 그의 주변에도 역시 수많은 인물이 있었지만, 서재희 주변처럼 사람이 휙휙 바뀌거나 진지한 표정이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사사로운 대화를 하는 듯 표정이 가벼웠고, 발을 디디고 선 위치가 안정적이었다. 다만 지팡이를 짚고 있는 차인호의 손등엔 때때로 핏줄이 불거지곤 했다.

“차인호. 도시연합장. 여기가 자기 안방이니까 저렇게 편하게 입고 있는 거야. 본인 빼고는 총도 다 압수했다고 생각할 테니까. 푸른색 익숙하지?”

유은우는 김서혁을 따라다니던 당시 늘 짙은 푸른색을 가미해서 입었던 차림을 떠올렸다.

“그때는 도시연합 행사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이 푸른색을 꼭 지녔어. 일종의 예의였고 당연한 충성이었지. 그런데 그걸 김서혁이 깼어. 어느 날 갑자기 도시연합군 제복을 입고 참석했다고 하더라고. 난 학교로 내려온 뒤에는 이런 자리 다 빼먹어서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 김서혁은 너무 바빠서 갈아입고 올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지만, 그게 변명이냐고. 그때부터 균열이 일어난 거야. 차인호랑 임유현은 더욱 협력할 수밖에 없었어. 김서혁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정윤환이 손을 튕기자 포크가 붕 돌아가다 멈추었다. 그는 줄곧 태연한 표정으로 테이블의 과일 따위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굳이 눈을 들어 살피지 않아도 어느 위치에 누가 있는지 다 파악하고 있는 기색이었다. 유은우는 포크가 가리키는 그 연장선에서 김서혁을 발견했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옆에서 소연주가 작게 말하는 것을 유심히 듣고 있었다.

“대장 옷에 푸른색 하나도 없지? 오직 무채색. 옷깃에 배지들 보여? 승전 기념 기장이나 계급장 말고, 평소에 대장이 도시연합군 행사에는 안 차는 것들이 지금 몇 개 있는데 알아보겠어? 가슴 쪽에 갈색 낙엽 모양 배지. 그건 난민을 상징해. 빨간색 문양 배지는 서른아홉 개의 유적지. 목에 넥타이도 보타이도 없이 까만 끈을 옷깃 사이로 늘어뜨린 거 보이지? 저건 반란군의 척살을 주장한다는 의미야. 예전에 반란군 세력이 미약해졌을 때 그들은 총을 살 자금이 없어서 싸구려 총을 사다가 썼어. 정보가 수집되지 않도록 역으로 프로그래밍할 기술도 없어서 당시엔 혼동 메모리를 박아 넣고 총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까맣게 테이핑 처리를 했거든. 군인들이 반란군을 죽이고 그 테이프를 떼어서 나중에 서로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그 수를 비교하곤 했었어. 모함으로 돌아오면 그날 전리품으로 획득한 테이프를 이어 붙여 긴 고리로 만들어서 제 숙소에 걸어 두는 게 유행하기도 했는데, 한 구역에서 반란군을 몰살하고 나면 그곳에서 획득한 테이프로 만든 고리는 끊어 내서 버리고 철수했거든.”

김서혁이 소연주에게 낮게 무어라고 할 때, 그의 옷깃 사이로 까만 끈이 나붓이 흔들렸다. 끊어진 테이프 고리가 어떤 느낌일지 가늠이 되었다. 김서혁과 소연주 사이로 이선규가 쏙 들어왔다. 그는 즐거운 표정으로 과자가 담긴 쟁반을 내밀었다. 소연주가 예의상 몇 개 집어 들고 이선규에게 저리 가라는 손짓을 했다. 이선규가 투덜거리며 소연주와 장난 같은 몸싸움을 했다. 그 가까이 있는 바람에 상의가 흐트러지자 김서혁은 손을 들어 소매의 주름을 반듯하게 쓸었다.

거추장스러운 차림은 싫어해서 제복도 간편하게만 입던 김서혁이 사복 위로 온갖 상징을 다 끌어온 것이 새삼 생경했다. 김서혁이 잔을 입에 대며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무표정하게 유은우를 바라보다가 바로 그 옆에 달라붙은 정윤환을 보고, 흘깃 눈을 돌려 저만치 홀의 중간에 서서 차예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서재희까지 응시했다. 그러다 낯선 이가 다가와 말을 걸자 그쪽을 돌아보았다.

이선규가 훌쩍 자리를 뜨자마자 소연주는 혀를 차며 손에 쥐고 있던 과자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 원피스 위로 옅은 회색 레이스가 한 겹 덧대어져 있었다.

정윤환은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나처럼 입어라. 대장이 그렇게 강요하지는 않았을 거야. 사실 그런 지시가 먹히지도 않을 거고. 정예군 한 명 한 명 얼마나 콧대 높고 자존심이 센지 너도 함께 지내 봐서 잘 알잖아. 그들이 김서혁의 노선을 따라간 건 순전히 본인 판단에서야.”

“대장 옆에 붙으면 이익이 그렇게 커? 도시연합과 틀어지는 걸 감수할 만큼?”

“임유현이 총사령관이었을 때랑 김서혁이 총사령관인 지금을 견주어 보면, 군의 자율성은 압도적으로 커졌고 위상은 더 높아졌어. 도시연합 중앙학교를 졸업한 인재들은 너도나도 군에 못 들어와서 안달이야. 옛날에도 그랬지만 갈수록 더 심해져. 언론에서 인재가 불균형하게 배치된다고 염려할 정도니까, 정상은 아니지. 역사를 되짚어 봤을 때 군이 통치자의 손아귀를 벗어나 독자적인 힘을 가지게 되면 반드시 피바람이 불어. 어쨌든, 다음.”

정윤환이 포크를 과일 타르트 정중앙에 꽂았다. 손가락 끝으로 포크 손잡이 끝을 기울여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임유현. 파삭파삭 말라 물기 없는 노인이 거기 있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학자 같았다. 오래된 책을 연상시키는 그를 보고 있으려니, 그가 왕년에 총사령관 자리에 앉았었다는, 합법적인 살인의 계획을 세우고 남의 목숨을 융통성 있게 골라내는 직업의 정점에 올랐었다는 과거는 떠올리기 어려웠다. 그는 부드러운 재질의 얇은 옷을 여러 겹 겹쳐 입고 있었는데, 과하기는커녕 무채색이 잘 어우러져 충분히 지적으로 보였다. 주위 사람들과 조용히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살면서 웃을 일이 많지 않았는지, 입을 다물 때면 깊게 팬 주름이 그를 더욱 엄격하게 보이게 했다. 임유현의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손가락에 희고 투박한 반지를 끼고 있었다.

“임유현. 친애하는 우리 교장 선생님. 차인호와의 동맹을 배신하고 김서혁에게 붙었어. 푸른색은 전혀 없지?”

임유현이 문득 눈을 들었다. 아까부터 유은우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듯 헤매지도 않고 정면으로 마주쳤다. 숨을 삼키며 먼저 눈을 피한 쪽은 유은우였다. 종잇장 모서리처럼 예리한 시선이라 묘하게 견디기 어려웠다. 유은우는 중앙홀을 가득 메운 사람 중 임유현이 가장 단단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월의 더께로 견고했다. 유은우는 직감적으로, 임유현의 사상이 선하든 악하든 범상한 사람은 아님을 알았다. 하늘하늘하지만 질긴 베일을 두른 것처럼 심상찮은 분위기가 풍겼다.

“흰 반지 낀 사람들은 죄다 용 연구소 직원이야. 일종의 상징 같은 건데, 입사하면 받는다더라고. 워낙 폐쇄적이라 그런가 무슨 행사 있을 때마다 꼭 저렇게 반지를 끼고 와서 티를 내더라. 저놈들하고는 말 섞으면 안 돼. 알겠지?”

“어? 왜?”

“잡아먹혀.”

유은우는 정윤환을 빤히 보았다. 터무니없는 대답을 툭 던져 놓고는, 정윤환은 웃음기 하나 없었다.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설명하자면 길어. 아무튼, 안 돼. 차라리 차인호한테 말을 걸면 걸었지, 용 연구소는 절대로 안 돼. 누가 너한테 말 걸면 손가락에 반지 있는지 없는지 잘 보고, 반지 있으면 두 번 쳐다볼 것도 없어.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라 생각하고 곧장 도망쳐. 약속해.”

“이유 정확히 말 안 해 주면 지금 가서 큰 소리로 인사할 거야.”

“서재희도 나랑 같은 의견일걸.”

정윤환이 서재희 이름 석 자에 힘을 주었다. 유은우는 빤히 정윤환을 바라보았다. 그는 유은우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으나 더는 말 않겠다는 듯 입매가 굳어 있었다.

그때였다. 유은우는 살갗을 베어 내는 듯한 강렬한 시선을 느꼈다. 유은우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그쪽을 보았다. 한 남자가 있었다. 20대 후반으로 보였다. 셔츠에 정장 바지, 구두,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유은우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고도 그는 표정이 변한다거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유은우는 다급히 정윤환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누구야, 저 사람?”

“어? 누구?”

“저기…….”

유은우는 살짝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려다 말고 말끝을 삼켰다. 여자 몇 명이 떠들면서 그 앞을 지나가고 나자 그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유은우는 입술 안쪽을 잘근잘근 물면서 그 주위를 빤히 살폈으나 어느새 기억은 희미해져 있었다. 깜짝 놀랄 정도로 특징 없는 인상이라, 정말로 그런 남자를 봤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한 번만 더 보면 얼굴을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유은우는 팔짱을 끼며 벤치에, 정확히는 정윤환의 팔에 등을 기대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정윤환은 그런 유은우를 물끄러미 보다가 갑자기 제 재킷을 벗어서 드레스로 풍성한 유은우의 무릎을 툭 덮었다.

“키스해도 돼?”

유은우는 잘못 들었나 했다. 하지만 정윤환이 한쪽 손으로 뒤통수를 감싸 당기자 얼른 고개를 저었다. 유은우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입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아니, 아니, 아니. 안 돼, 안 돼, 안 돼.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이 씨……!”

등을 받쳐 안고 꼭 당겨 안는 품이 능숙했다. 유은우가 막 욕을 내뱉기 전에, 정윤환이 몸을 틀며 유은우의 몸을 제 몸으로 완전히 덮어 내렸다. 홀의 화려한 조명이 그의 그림자로 가려졌다. 덕분에 유은우는 정윤환에게 가려 홀의 시선과 차단되었다. 그제야 유은우는 맘껏 인상을 썼다.

“상황극 이용해서 사리사욕 채우지 맙시다, 진짜.”

정윤환이 유은우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핏기 없는 뺨에 그나마 혈색이 돌며 해사해졌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하는 척만 할게. 사람들이 너무 우리 훔쳐봐서 그래. 애정 행각이라도 해야 우리 사귄다고 널리 소문이 퍼질 거 아냐.”

정윤환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유은우는 저도 모르게 등줄기부터 뻣뻣하게 굳었다.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정윤환의 코끝이 유은우의 뺨에 닿았다.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눈 안 감아?”

“너라면 감겠냐. 이대로 딱 10초만 있다가 떨어져. 강제로 혀 밀어 넣거나 하면 확 뽑아 버린다.”

“억지로 할 마음 있었음 옛날에 수백 번 하고도 남았지.”

정윤환의 손끝이 나른하게 유은우의 귓바퀴를 쓸었다. 유은우는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리다가, 정윤환이 턱을 잡고 치켜드는 바람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유은우는 긴장으로 머리가 하얘진 가운데에도 쉴 새 없이 경고했다.

“실수로라도 닿거나 하면…….”

“나도 알아. 자격 없는 거.”

정윤환은 가만히 멈춰 있었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 아래 반쯤 드러난 옅은 눈동자는 가만히 유은우의 입술을 응시하고 있었다. 더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다. 유은우는 그제야 약간의 여유를 되찾고, 어색하게나마 손을 들어 정윤환의 목을 감아 보았다. 그 손길을 느끼고 정윤환이 소리 내어 웃었다. 민망함에 유은우는 목덜미부터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급히 말했다.

“협조야.”

“알아.”

정윤환은 유은우의 허리에 감았던 손을 앞으로 미끄러뜨려 유은우의 무릎을 덮은 제 재킷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의 손이 움직이며 무언가 딱딱한 것을 빼내는 느낌이 났다. 정윤환은 여전히 유은우의 입술과 아슬아슬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총을 쥔 손으로 유은우의 드레스를 걷어 올렸다. 재킷으로 한번 가려 놓은 데다 유은우의 드레스가 워낙 촘촘하게 주름져 있어 가능했다.

“아까 리본 찾으러 가면서 보관실에 들렀는데, 총이 많이 없어졌더라. 그게 다 어디 갔을까. 전부 제 옷 속에 슬쩍 숨기고 있겠지. 페이크 어디야?”

유은우는 정윤환의 목을 감은 손에 힘을 주며 속삭였다.

“오른쪽.”

드레스 밑으로 들어온 정윤환의 손이 살짝 헤매다가 유은우의 오른쪽 허벅지에 채워져 있는 홀스터를 가늠하고 거기 총을 꽂아 넣었다. 따뜻한 손은 들어온 것처럼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그리고 다시 재킷을 들추는 느낌이 났다.

“이런 곳에서 유치하게 복장이며 장신구로 소속을 구분 짓고 위치를 드러내는 이유는 내가 굳이 말 안 해도 알지?”

정윤환의 손이 다시 드레스 밑으로 들어왔다. 이번엔 그다지 헤매지 않고 곧바로 왼쪽 홀스터가 채워지는 느낌이 났다. 진짜 총이었다. 드레스 밖으로 빠져나온 손은 다시 유은우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유은우는 작게 대답했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 아군인지 적군인지, 회유해야 할지 쳐 내야 할지 직관적으로 알아보려고.”

정윤환은 몸을 일으켜 떨어져 앉았다. 달아 있던 얼굴로 시원한 밤바람이 닿아, 유은우는 한결 숨을 돌렸다. 홀 안쪽에서 몇몇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특히 이선규는 완전히 경악하고 있었는데 그 낯이 볼 만했다. 그가 김서혁을 부르더니 과장된 손가락질로 이쪽을 가리켰다. 김서혁의 시선이 유은우를 향했다. 유은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빤히 김서혁을 마주 보았다. 김서혁은 다시 이선규를 보았다. 이선규가 뭔가 마구 말하는 것이 보였다. 김서혁은 조금 들어 주는 듯하더니 이내 자신을 찾아온 다른 이에게 관심을 돌려 버렸다. 이선규는 이제 소연주에게 말을 붙였으나 그녀마저 김서혁을 보좌하기 위해 몸을 돌려 버리자 황망히 눈을 깜박이다가 곧장 유은우가 있는 테라스로 다가왔다.

정윤환은 그런 이선규를 응시하며 테이블에서 음료를 집어 들었다.

“나 아프니까 혼자서는 무리야. 설계만 깔 테니까 네가 타격해 줘.”

유은우는 드레스 위로 손을 훑으며 총을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럴 필요 있어? 그냥 따로 움직이자. 난 시계도 있고.”

“아냐. 나 지금 많이 안 좋다니까? 내가 잘생겨서 덜 아파 보이는 거라고. 내가 서포트할 테니까 네가 뛰는 거로 해.”

“음.”

“유은우, 농담 아냐. 나 진짜 심각하다니까.”

“상황 봐서.”

“나 죽으면 서재희도 곤란할 거야.”

“서재희 선배 핑계 좀 그만 대.”

“그래야 네가 듣잖아.”

유은우는 지척까지 성큼성큼 다가오는 이선규를 보며 정윤환의 팔을 잡아당겨 안았다. 정윤환은 음료를 꿀꺽꿀꺽 마시면서도 유은우가 당기는 대로 기울어 주었다.

이선규가 유은우 앞에 서더니, 팔짱을 끼며 말했다.

“소꿉놀이도 작작해. 귀여워서 장단 맞춰 줬더니, 도시연합군 이미지 다 떨어뜨리네.”

유은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장은 별로 상관없어 하는 것 같은데?”

이선규가 자못 엄격한 눈을 했다.

“다들 은우 널 너무 아껴서 문제지. 이래서 잔소리는 항상 내 담당이잖아.”

“그냥 안 하면 되잖아. 그리고 아끼긴 뭘 아껴. 학교로 쫓아 놓고.”

유은우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정윤환이 가볍게 웃으며 저리 가라는 손짓을 했다.

“데이트 방해하지 말고 저리 가.”

이선규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정윤환을 향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총은 챙겼지? 아까 가지러 갔는데 너랑 은우 칸 비어 있더라.”

정윤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은우의 무릎에 덮었던 제 재킷을 가져가 도로 입었다. 이선규가 이어 말했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사귀는 시늉도 어지간히 해라. 나중에 은우 진짜 좋아하는 남자 생기면 어쩌려고. 여기 괜찮은 예비 신랑감이 얼마나 많은데. 은우야, 눈 크게 뜨고 잘 살펴봐. 정윤환 얘는 얼굴 반반한 거 빼고는 진짜 하나도 볼 게 없으니까 정신 잘 차려. 야, 정윤환, 나와. 나랑 얘기 좀 해.”

“아, 왜. 갑자기.”

“그래? 그럼 여기서 한다. 은우도 같이 들으면 되겠네. 소상한 옛이야기부터 해 볼까? 은우야, 너 인큐베이터에 있을 때 정윤환 저 변태 새끼가 매일같이 찾아가서…….”

“좀 닥쳐, 진짜.”

정윤환이 벌떡 일어났다.

“유은우, 소연주 누나 옆에 가 있어. 금방 다녀올 테니까.”

그러더니 정윤환은 이선규의 등을 밀며 성큼성큼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유은우는 혼자 덩그러니 남았으나 김서혁 근처로 갈 생각은 없었다. 홀 안쪽에서 낯선 몇이 반색하며 이쪽으로 다가오려는 게 보였다. 유은우는 귀찮다기보다는 위험한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벤치에 앉은 채 몸을 돌려 바깥을 보았다. 다른 곳에 관심을 두고 있으면 함부로 안 오겠거니 하는 생각에서였다.

테라스 바깥은 이음새 하나 없이 매끄러운 대리석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어둠에 가려진 끝에 도시연합 입구가 있을 터였다. 낮이라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득하게 먼 거리였으니까. 가장 바깥에서부터 본관까지 카트를 타고 왔는데도 수 분이 걸렸었다.

유은우는 난간에 두 팔을 걸치고 그 위에 턱을 가벼이 얹은 채, 어둠에 눈이 익기를 기다렸다. 본관으로 오면서 목격했던 인상 깊은 구조물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어둠이 흐려지며 구조물의 형체가 아스라이 드러났다. 그것은 낡다 못해 벌겋게 녹이 슨 고철 덩어리로 차곡차곡 쌓아 올려진 첨탑이었는데, 건물로 치면 그 높이가 10층은 족히 되어 보였다. 본래의 용도를 알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분해된 기계 부품들이 쉴 새 없이 돌아가며 첨탑의 아래위로 흘러가거나 안으로 쑥 들어가기도 하고 밖으로 불쑥 튀어나오기도 했다. 멀리서 이렇게 바라보니 첨탑 전체가 기괴하게 자글자글해, 구더기가 들끓는 것처럼 보였다. 온통 쇠붙이로 이루어졌음에도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아 섬뜩했다. 그렇게 요동치는 첨탑의 가장 꼭대기는 못으로 박아 놓은 듯 고요했는데, 한 쌍의 새까만 날개가 거기 있었다. 제1도시의 핵인 용의 날개였다.

멀리서 바라보면 용의 날개 한 쌍은 까만 박쥐처럼 보였다. 첨탑 꼭대기에 깊게 뿌리박힌 두 장의 용의 날개는 끔찍한 오염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했다. 그것은 때때로 기지개를 켜듯 활짝 펼쳐지기도 하고 먼지를 떨듯 부르르 진동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반듯하게 접힌 채 얌전했다.

유은우는 자신이 놓아준 용을 생각했다. 지금쯤이면 얼마나 컸을지도 궁금했다. 지금 홀에서 이뤄지는 대화의 대부분이 사해에 출현한 용에 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 보았다. 그 용에게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었다. 왜 하필 내가 놔준 용이 성체로 자랐을까 궁금했지만, 그렇게 크게 자랄 수 있는 용을 놔준 결정은 잘한 일이라고 홀로 고개를 끄덕여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정말 잘한 일인가 의문이 들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도시연합 기념탑입니다.”

누군가 말했다. 목소리는 소음과 섞여 자연스럽게 들렸다. 마치 아까부터 쭉 옆에 있었던 것 같았다. 유은우는 경계하며 상대를 보았다.

“안녕하세요. 강진욱입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음료를 들고 있지 않은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유은우는 느리게 벤치에서 일어나면서 빠르게 강진욱의 열 손가락을 확인했다. 반지는 없었다. 거기다 흰 셔츠와 까만 정장 바지가 전부인 단출한 차림이라 어느 쪽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다만 아까 묘하게 불편한 시선을 보냈던 그 사람이라는 것만 눈치챘다.

인상이 흐려서 살아남긴 좋겠네. 작전인가?

유은우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적당히 따뜻하고 적당히 습했으며 적당한 힘이 느껴졌다. 어렴풋한 인상처럼 손아귀의 촉감도 그랬다. 조금 과장하자면, 그와 악수를 끝내자마자 손이 닿긴 했었나 헷갈릴 정도였다.

유은우는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 홀 안쪽을 향해 섰다. 여차하면 김서혁 쪽으로 내달릴 셈이었다. 이놈의 정윤환은 막상 필요한 지금 왜 이리 늦는지 코빼기도 안 보였다.

“죄송한데 어디서 뵈었었는지. 제가 침식 치료 당시 기억이 워낙 드문드문해서요.”

“그 전에 뵈었지요.”

강진욱이 대답했다. 유은우는 그의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가만 보자, 분명 어디서 듣긴 들었는데…….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속 시원하게 걸리는 게 없었다. 잡힐 듯 말 듯 머릿속만 간질간질했다.

강진욱이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음료를 옮겨 잡더니 내밀었다.

“마실래요?”

투명한 유리잔 안에 붉은 액체가 찰랑거렸다. 유리잔을 가볍게 움켜쥔 그의 오른손 검지 마디에 햇빛에 덜 타 유독 흰 자국이 있었다.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라 생각하고 곧장 도망쳐. 약속해.’

유은우는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았다. 손에서 손으로 잔이 넘겨지며 음료가 흔들렸다. 파도가 지나간 것처럼 투명한 유리잔 입구까지 붉은 자국이 남았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마시지 않았다. 유은우는 실례인 줄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강진욱의 눈, 코, 입을 죄 뜯어보았다. 흔히 마주치고 쉽게 잊어버릴 평범한 인상 어디서도 이렇다 할 만한 단서가 없었다. 유은우는 그리 상대를 관찰하다가, 강진욱 또한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알고 소름이 돋아 자세를 바로 했다. 서로 인사만 하고 이렇다 할 대화 없이 이미 수 초가 흐른 뒤였다.

유은우는 긴장한 기색을 비치지 않으려 애썼다. 지척에 김서혁이 있었다. 나는 안전하다. 그럼에도 속이 울렁거렸다. 오래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복부로 통증이 일기 시작했다. 유은우가 물었다.

“그 전이라니 언제 말씀이신지.”

“유은우 씨가 아주 어릴 때요.”

그 한마디를 하고는 강진욱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특징이 없어서 오히려 기이하게 차가운 눈으로 찬찬히 유은우를 살피고 있었다. 강진욱은 비단 유은우의 외모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까지 잡아내려는 것 같았다. 마치 성장을 가늠하는 것처럼.

학교로 내쳐지며 사건 사고를 겪는 바람에 잊고 있었지만, 실로 익숙한 시선이었다. 연구원들이 안경을 치켜 올리거나 차트를 넘기며 유은우를 향해 보내던 눈빛.

강진욱이 말했다.

“우린 같은 유적지 출신입니다.”

그때였다. 촥, 하는 소리에 유은우는 홱 고개를 돌렸다. 정윤환이 숨을 헐떡이며 막 테라스로 들어와 있었다. 홀과 이어지는 테라스 입구 절반이 블라인드로 막혀 있었다. 정윤환이 불붙은 눈으로 강진욱을 노려보며 기둥의 스위치를 내렸다. 삽시간에 나머지 한쪽으로 블라인드가 단단하게 쳐지며 소음과 함께 집중되던 이목이 차단되었다.

정윤환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미친 새끼, 안 떨어져?”

의외로 강진욱은 정윤환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는 정윤환은 흘끔 보기만 하고 다시 유은우를 응시했다. 정윤환은 강진욱의 멱살을 잡아채 패대기라도 칠 기세로 걸어오다가 멈칫했다.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유은우는 정윤환의 시선을 따라 제 손을 보았다. 음료가 들려 있었다. 입도 안 댔지만, 손에서 손으로 옮겨지며 찰랑찰랑하는 바람에 잔이 지저분하긴 했다.

다음 순간, 정윤환이 폭풍처럼 달려왔다. ‘어어.’ 하는 사이 음료를 빼앗겼다. 정윤환은 팽개치듯 음료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잔이 빙그르르 돌면서 붉은 액체 일부가 쏟아지다가 중심을 잡고 바로 섰다. 정윤환이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유은우의 양 뺨을 감싸 당겼다. 그가 거칠게 물었다.

“마셨어?”

“……어?”

“마셨냐니까!”

“아, 아니요.”

심상찮은 분위기에 죽어도 안 하겠다고 다짐한 존댓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정윤환의 눈가로 새파란 열이 몰려 있었다. 유은우는 자신의 뺨에 닿은 정윤환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화가 났다기보다는 겁에 질려 보였다. 정윤환이 필사적으로 재차 물었다.

“너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유은우는 그의 동공이 자신을 구석구석 절박하게 더듬는 것을 느끼며 덩달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아니라고 대답했다.

“아니, 내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해…….”

“진짜 안 마셨어?”

“응.”

유은우는 세차게 고개도 끄덕이려 했으나 정윤환의 손아귀에 머리가 꽉 고정되어 그러지는 못하고 급한 대로 덧붙였다.

“진짜 안 마셨어.”

“한 모금도?”

“응.”

“냄새도 안 맡았어?”

“응.”

“너 진짜 입에도 안 댔어? 화 안 낼 테니까 솔직히 말해.”

“안 마셨다니까…….”

입술이 겹쳐졌다. 정윤환은 유은우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유은우는 정윤환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사납게 삼키고, 놀라 벌어진 틈으로 혀가 거칠게 비집고 들어오기까지 뭐가 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달콤한 탄산이 남아 있는 그의 혀가 유은우의 입천장과 혀와 볼 안쪽을 삽시간에 말캉하게 헤집고는 떨어져 나갔다. 유은우는 숨을 토하며 동그랗게 뜬 눈으로 정윤환을 빤히 보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 유은우는 입만 벙긋거리다가 겨우 말을 토해 냈다.

“왜…….”

“다행이다.”

정윤환이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 그는 날카롭게 뒤돌아섰다. 유은우는 정윤환의 등 뒤에서 무표정하게 이쪽을 보고 있는 강진욱과 마주했다. 정윤환의 등이 씨근덕거리는 숨과 함께 오르락내리락했다. 정윤환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개새끼야. 너 일부러 그랬지? 사람 이딴 식으로 엿 먹이니까 기분 좋냐?”

강진욱은 뚜벅뚜벅 걸어 가까이 왔다. 그는 여전히, 정윤환 뒤에 선 유은우를 빤히 보고 있었다. 정윤환은 오른손을 뒤로 돌리며 유은우를 완전히 가리려고 했다. 유은우는 왼쪽으로 고개를 빼서 강진욱을 보았다. 강진욱은 이제 정윤환을 똑바로 보면서 테이블에 놓여 있는 음료를 들어 쭉 들이켰다. 꿀꺽꿀꺽 소리와 함께 그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음료를 마시는 순간에도 강진욱은 정윤환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강진욱이 텅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달칵 올려놓았다. 그가 말했다.

“독 안 탔어.”

양쪽으로 내려졌던 블라인드가 젖혀 올라갔다. 웅장한 음악이 터져 나왔다. 드러난 홀 안쪽은 조명이 한층 밝아져 있었다. 모든 사람이 한곳을 보고 있었다. 연단과 이어지는 계단을 차인호가 오르고 있었다.

이선규가 테라스 안쪽으로 고개를 내밀더니 어서 나오라고 손짓했다.

“나와. 기념식 시작한다. 우리 자리로 가야지……. 분위기 왜 이래?”

정윤환은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냐.”

정윤환이 팔을 내밀기에 유은우는 팔짱을 꼈다. 정윤환은 발을 내딛으려다 말고 강진욱을 돌아보았다. 강진욱은 인상을 찌푸리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정윤환이 씹어뱉듯 말했다.

“자꾸 이렇게 사람 들쑤시면 다 같이 망하는 수가 있어.”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강진욱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정윤환의 숨이 거칠어졌다. 강진욱이 덧붙였다.

“독 들어오고 나가는 거 감시하려고 관리자로까지 등록했으면서 뭐가 그렇게 걱정이냐고. 하여간에.”

“입 안 닥쳐?”

강진욱이 다시 유은우를 응시했다. 그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희고 투박한 반지를 꺼내더니 오른손 검지에 끼웠다.

“유은우 씨는…….”

팡!

홀 천장에서 폭죽이 터졌다. 동시에 귀한 생화 잎이 푸르게 휘날렸다. 유은우는 드러난 어깨로 촉촉한 꽃잎들이 보송보송하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원치도 않는 사랑 받는 기분이 어때요?”

“……원치도 않는 사랑 받는 기분이 어때요?”

유은우는 강진욱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앞뒤 문맥이 숭덩숭덩 잘려 불친절한 그 말마디는, 그저 유은우의 귓바퀴 근처를 어색하게 맴돌 뿐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스러지지는 않았다. 미처 삼키지 못한 알약이 혀뿌리 위를 뒹굴며 쓴맛만 녹아나듯, 강진욱이 뱉은 단어들은 그 어떤 이해도 없이 유은우의 귓가에 들러붙어 역한 기운을 풍겼다.

‘진즉 끝냈어야 했어. 내 후회는 오직 그것뿐이야.’

정윤환이 총을 겨누며 그리 말했었다. 죄라고 했다.

‘나한테는 그냥 네 사진이었어. 그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은우의 사진을 가지고 있었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저 네 사진이라서 가지고 있었다는 대답은 조심스러운 목소리와는 달리 알맹이가 너무나 싱거워, 필히 속내에 무언가 있음을 짐작케 했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한 언제나 네게 최선을 다했어! 언제나!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사진은, 사진은, 따로 이유가 있어서 가지고 있었던 건 절대로 아니야. 그냥 단지 버릴 수가 없었어.’

유은우는 서재희와 되짚었던 과거를 떠올렸다. 유은우는 정윤환에게 꼭 끌어 안겨 있었다. 그는 자고 있었다. 가장 무방비한 상태였던 셈이다. 색색거리는 깊은 호흡. 드문드문 잠꼬대처럼 유은우를 고쳐 안던 손길은, 무딘 감각 너머로도 확실히 따뜻했다. 유은우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꼭 안고 자겠다는 어리고 거친 욕심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은우의 머리가 세게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조심 당겨 안는 죄스러운 배려가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원치도 않는 사랑 받는 기분이 어때요?’

유은우는 소스라쳤다. 징그러운 벌레를 떨어내듯, 정윤환의 팔에서 손을 빼며 그를 밀쳐냈다.

정윤환이 비틀거리다 중심을 잡고 섰다. 눈이 마주쳤다. 빼어나게 수려한 낯은 수척하여, 짓밟혀 문드러진 동백 같았다. 강진욱이 툭 뱉은 몇 마디만으로, 정윤환의 내부는 초토화되어 회생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천장에선 여전히 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물기를 머금은 꽃잎들이 드러난 어깨로 사뿐 내려앉을 때마다 유은우는 얼음이라도 닿은 듯 흠칫 몸을 굳히며 물러섰다.

정윤환은 말이 없었다. 그는 그저 폐허 같은 표정으로, 자신에게서 더듬더듬 뒷걸음치는 유은우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그의 입술 틈이 벌어졌으나, 이내 다물렸다. 그러더니 정윤환은 성큼성큼 걸어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총 한번 안 잡아 본 것처럼 굳은살 하나 없이 매끈했다. 타고난 재능으로 실질 연습량이 거의 전무하며 군에서도 최소한의 사격만 했음을 고스란히 방증하는 그 손을, 유은우는 경계하며 바라보았다.

“윤환아, 은우 데리고 빨리.”

음악과 대화로 소란한 홀 안쪽에서 소연주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그녀는 이선규의 넥타이를 다시 매어 주면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소연주는 턱짓으로 어서 오라고 재촉했다. 유은우는 다시 정윤환을 보았다.

“손잡아.”

정윤환이 낮게 말했다. 유은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윤환은 유은우를 향해 뻗은 손을 거두지 않은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지척에 서서 감시하듯 이쪽을 보고 있는 강진욱을 의식하는지 속삭임이 옅어, 유은우는 거의 듣지 못할 뻔했다.

“나는 못 믿어도…….”

정윤환의 목소리에서 마른 모래 소리가 났다.

“……서재희는 믿을 거 아냐.”

서재희가 유은우의 목숨을 소중히 여긴다는 믿음의 근거는 빈약했다. 법으로 보장된 것도 아니었고, 서재희가 손수 각서를 쓴 적도 없었다. 내가 너를 아낀다고 논리 정연하게 원인을 들어 설명한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은우는 서재희를 믿었다. 때로는, 차례차례 번호를 매겨 서류철로 정리할 수 있는 수많은 증거보다, 찰나의 눈빛이 진심을 더욱 온전히 전달하기도 했으니까. 유은우는 자신을 바라보는 서재희의 시선에 거짓이 없음을 굳게 믿었다. 그가 내게 어떤 길을 제시한다면, 설사 위험하더라도 최선일 것이다. 그런 견고한 믿음. 실체는 없었지만, 그 무엇보다 명료했다.

정윤환이 다시 속삭였다.

“손.”

그래서 유은우는 손을 뻗어 정윤환의 손을 잡았다. 정윤환이 서재희의 이름을 입에 담았기 때문에. 서재희라는 단단한 매개체 없이는, 유은우는 정윤환의 그 어떤 부분도 안심할 수 없었다.

설사 정윤환이 유은우를 사랑한다 하여도.

그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모두가 입을 모아 사랑이란 한 단어를 말하더라도, 풀어내는 방식은 저마다 달랐다. 때로는 폭력이나 침묵이 사랑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기어 다니기도 했으니까. 유은우는 정윤환의 사랑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과거를 설명한 적도 없었고, 유은우의 의견을 물은 적도 없었다. 언제나 혼자 결정했다. 그런 일방적인 판단은, 실험체로 이용당하던 시절이면 족했다.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당시 정윤환이 유은우를 아끼고 보호해, 그 덕에 여태껏 살아남았다면 물론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제 유은우는 하고 싶은 말을 또박또박 할 수 있었고, 남의 말도 똑똑히 들을 수 있었으며, 그 모든 것을 견주어 결정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정윤환은 유은우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

정윤환은 유은우의 손을 감싸듯 꾹 쥐더니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유은우는 그의 팔짱을 꼈다. 홀 안쪽으로 들어서자 조명이 한층 눈부셨다.

“유은우 씨.”

뒤에서 강진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쭉 무감하던 강진욱의 시선이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좀 더 따뜻한, 그러나 호의라기보다 동정에 가까웠다. 그가 말했다.

“당신 주위 사람들이 당신을 지나치게 아껴서, 혹은 이용하기 위해 숨기고 있는 것들, 내가 다 말해 줄 수 있어요.”

강진욱이 나긋하게 이어 말했다.

“그럼 곧 또 뵈어요. 그때는 질척거리는 방해꾼 없이…….”

강진욱의 동공이 잠시 정윤환을 향했다가 다시 유은우에게 옮겨 왔다.

“……둘만 봤으면 하네요. 당신도 그게 좋죠? 깊숙이 파고들다 보면 만나게 되겠죠. 어쩌면 오늘이 가기 전에.”

하, 정윤환이 짧게 숨을 뱉었다. 그는 유은우의 허리를 잡아 강하게 당겼다. 정윤환이 걸음을 빨리했다. 유은우는 딸려 가며 흘깃 정윤환을 올려다보았다. 턱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등 뒤의 테라스엔 강진욱이 있었고, 홀 어딘가엔 서재희가 있을 터였다. 유은우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대신, 정윤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김서혁을 향해 똑바로 걸었다. 김서혁은 정예군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소연주가 유은우의 머리에 붙은 꽃잎을 떼어 내다가 손을 거두며 제 왼쪽 귀를 꾹 눌렀다. 행사용 인터컴이 은색으로 반짝거렸다. 그녀가 김서혁을 향해 말했다.

“대장, 차인호 연합장님께서 지정석 위치를 대거 수정하셨답니다. 미리 언질받은 좌석 배치와 상이합니다.”

김서혁은 고개를 들어 연단을 보았다. 높이 마련된 그곳에 차인호가 홀로 우뚝 서 있었다. 그의 등 뒤에 설치된 거대한 스크린에서는 연합으로 묶인 여덟 도시의 영상이 화려하게 뿜어져 나왔다. 연단 양옆으로는 지정석이 계단식으로 뻗어 나와 반원을 그리고 있었다. 연단의 왼쪽 지정석엔 임유현이 앉아 있었다. 그는 자리에 비치된 태블릿을 가리키며 가까이 앉은 의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는 문득 손을 들어 대화를 멈추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손 안에서 부스럭거리다가 작은 무언가를 입에 머금었다. 이어 비치된 음료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약 같았다.

“임유현 중앙학교장 양 옆자리 비어 있는 것 보이십니까? 그의 오른쪽은 아시다시피 대장 지정석입니다. 그리고 교장의 왼쪽은 원래 서재희 지정석인데, 서재희가 그 자리를 비워 두기로 했답니다. 이례적인 일입니다만, 그는…….”

스크린에 맞춰 터져 나오는 웅장한 음악에도, 소연주의 목소리는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차인호의 가족 자격으로 차예원 옆에 앉았습니다.”

연단의 바로 오른쪽에 서재희가 있었다. 그는 비치된 태블릿을 손끝으로 두드리며 들여다보고 있었다. 반듯하고 선한 낯이었다. 서재희가 앉은 자리는 김서혁의 지정석과, 차예원이 앉은 자리는 임유현의 자리와 대척점을 이루고 있었다. 연단을 중심으로 권력이 뻗어 나간다고 생각하면, 서재희는 하루아침에 자신의 후원자를 배신한 셈이었다. 임유현이 차인호를 버리고 김서혁과 손잡은 것처럼.

김서혁이 서재희를 응시하며 짧게 웃었다. 눈은 차가웠다. 그가 말했다.

“보란 듯이 행사 당일 자리를 변경하고, 본인이 버린 위치엔 아무나 꽂아 넣든 상관없다고? 선심 쓰듯? 누가 봐도 이 빠진 것처럼 보이는 곳에? 차 한 잔 마시는데도 원리 원칙 따져 대는 차인호 머리에선 나올 리 없는 생각이고, 서재희 입김이 들어갔겠지. 본인은 교장의 그늘에서 벗어나 결혼으로써 소속을 옮기니 자진해서 버린 옛 자리엔 누가 앉든 상관없다라……. 새파랗게 어린놈이…….”

휘황한 조명으로 눈부신 와중에, 김서혁의 주위만 차게 가라앉았다. 정예군들의 낯도 싸늘하게 굳어졌다. 유은우는 바짝 긴장했다. 함께 전투를 치른다면 더없이 든든하겠지만, 그들의 총구가 일시에 서재희를 향한다 생각하니 등골이 다 서늘했다. 뻣뻣하게 얼어붙어 있는데 문득 이마로 숨이 닿았다. 정윤환의 입술이 다가와 붙더니 잠시 말랑하게 머무르다 떨어졌다. 그가 속삭였다. 표정. 유은우는 급히 낯을 가다듬었다. 문득 김서혁 뒤에 서 있던 이선규와 눈이 마주쳤다. 이선규가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과장된 반응에 유은우는 그만 웃음이 터졌다. 근육이 한결 이완되었다.

소연주가 말했다.

“착석하실 때 은우나 윤환이를 대동하신다면 제가 연합 쪽에 요청하겠습니다. 비워 두면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제 생각엔 은우를 앉히는 게 어떠신지. 윤환이는 학교로 내려가면서 언론의 관심에서 좀 잊힌 경향도 있고 더불어 평판까지 떨어져서. 은우를 학교로 내려 보냈으나 여전히 군에서 보호하고 있음을 어필하면 인권 단체 쪽도 누그러질 겁니다. 온디딤 사용자라고 대장이 직접 소개하면 인상에 깊이 남을 것도 같고요. 아직 발표가 없었으니까…….”

“됐어. 혼자 가겠다. 누구처럼 우리가 가족은 아니니.”

김서혁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고 반짝이는 인터컴이었다. 매 모양 직인이 찍힌 전투용이었다. 김서혁이 인터컴을 쥔 손을 뻗어 오기에, 유은우는 정윤환에게서 풀려나 잘 길들여진 습관처럼 한 걸음 김서혁에게 다가갔다. 김서혁이 유은우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더니, 능란하게 왼쪽 귀의 행사용 인터컴을 뽑고 전투용 인터컴을 꽂아 넣었다. 머리카락이 다시 흘러내리며 김서혁의 손을 가렸다. 그는 유은우의 귀에 인터컴을 장착하고서도 바로 손을 거두지 않고 잠깐 유은우의 귓가에 머물렀다. 유은우는 드리워진 머리카락 사이로 김서혁이 제 귓바퀴를 부드럽게 마사지하는 것과, 이어 귓불을 아프지 않을 만큼만 꾹 누른 뒤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유은우가 모함에서 사출하기 전에 긴장하여 젖 떨어진 강아지처럼 구석에 콕 처박히면, 김서혁이 혀를 차며 다가와 다른 사람 모르게 긴장을 풀어주려 종종 하던 행동이었다.

김서혁이 소연주를 향해 딱딱하게 말했다.

“게다가 그 자리에 유은우를 앉히면, 유은우가 서재희의 후발 주자라고 자처하는 거나 다름없어. 공식적인 자리에서 도시연합군이 도시연합의 다음이 된다. 그게 바로 서재희가 노리는 점이겠지. 나도 그런 자리는 필요 없다. 비워 둬.”

그리고 김서혁은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었다. 인파로 복잡한데도 김서혁은 누군가를 피하는 법 없이 홀을 직선으로 가로질렀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혹은 분위기에 압도당해 길을 열었다. 연단에 선 차인호를 존중하여 뒤로 돌아가 착석할 만도 하건만, 김서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앞을 지나가 임유현의 옆에 앉았다. 순수하게 가장 편하고 빠른 방식이었다.

소연주의 지시에 따라 유은우는 정예군과 도열하여 일반석으로 이동했다. 정윤환은 능숙하게 유은우를 에스코트했다.

스크린의 영상이 도시연합의 최근 1년간 성과를 나열하며 막바지에 이를 때쯤, 사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각양각색의 언론사 로고를 단 드론들이 사방을 웅웅거리며 일시에 날아올랐다. 유은우는 몇몇 카메라가 정예군을, 특히 자신과 정윤환을 집중적으로 포착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유은우는 강진욱이 지금 어디쯤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 궁금했으나, 짐짓 태연하게 드레스를 갈무리하며 자리에 착석했다. 지정석만큼은 아니었지만 다른 일반석보다 위치가 월등히 높아 사위가 잘 보였다.

조명이 꺼졌다. 다시 밝아지는 가운데 차인호가 막 마이크를 쥐고 있었다.

때마침 시야에 서재희가 걸렸다. 그는 빈틈없이 반듯하게 미소를 유지하며, 때때로 차예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늘 보송보송 자연스럽게 흐트러져 있던 앞머리를 세련되게 넘겨 단단한 이마가 훤히 드러난 것을 보니 마치 다른 사람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일반석과 지정석은 한참 떨어져 멀었다.

정윤환이 유은우의 머리칼에 입을 묻으며 속삭였다.

“나도 전투용 인터컴 받았어. 혹시 서재희가 너한테 채널 몇 번 쓸 건지 말했어?”

유은우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 중요한 것을 미리 맞춰 두지 않았다니. 고개를 저었다. 정윤환이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큰일 났다. 제일 중요한 걸 안 맞추고 왔네. 대장 지시 듣는 척하면서 서재희 지시도 함께 반영해야 하는데, 연락할 대책이 없으면 어쩌잔 거야. 대장이 우리 둘을 같은 팀으로 엮어 줄지 모르겠네.”

유은우는 입을 가리고 물었다.

“서재희 선배 보통 땐 채널 몇 써?”

“서재희 사해 파견 나갈 땐 2로 맞춰. 근데 그건 채널 네 개짜리 학생용이고. 우린 여덟 개짜리니까 아마도…….”

“일단 4로 맞춰 놓을게. 대장은 1을 쓰니까 그것만 안 겹치면…….”

유은우는 말을 다 맺지 못했다.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인터컴 어설프게 쓰다가 바로 박민준한테 들키는 거 아냐?”

정윤환이 이마를 문질렀다. 등 뒤에서 박민준이 다른 정예군과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도시연합군에서 가장 도청이 뛰어난 자가 바로 뒤에 앉아 있었다. 정윤환이 끙끙거렸다. 그가 드물게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재희는 아마 정규 채널은 안 쓸 거야. 아무도 안 쓰는 서브 쓸 것 같은데. 서브는 현장에서 맞춰야 하니까, 그럼 미리 말 안 했을 수도 있어…….”

“박민준은 서브도 잘 감지해. 예전에 제1유적지에서 반란군하고 붙을 때 모함에서 사출하기 전부터 주파수 잡아서 아예 전체 청취했었어.”

“뭐? 나랑 뛸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서브는 못 잡았었는데……. 아, 돌겠다, 진짜.”

“……이프로 메시지 보내려는 거 아닐까? 그나마 안전하니까.”

“총 겨누기도 바쁜 상황에서 언제 손목 보고 앉아 있어. 모르겠다. 일단 상황 터지면 넌 1부터 차례대로 올라가며 찾아. 난 8부터 내려가며 찾을게. 서재희는 왜 채널에 대해 아무 말 없었지. 이런 걸 빠뜨릴 사람이 아닌데.”

정윤환의 목소리에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군인 정예군의 눈을 피해 따로 움직여야 했다. 그들이 얼마나 노련하고 또 냉정한지는 같이 호흡을 맞췄던 둘이 가장 잘 알았다. 할 수 있을까? 유은우는 자꾸만 식은땀이 흘렀다. 정윤환이 악문 잇새로 말했다.

“서재희가 어떻게 지시 내릴지 모르겠네. 초반에 놓치면 틀어지잖아.”

“같이 뛰어 본 적 없어?”

“팀으로는 한 번도 안 뛰어 봤고, 그냥 옆에서 많이 봤어. 그래도 예측 불가야. 서재희는 정형화된 스타일이 전혀 없어. 팀원을 어떻게 꾸리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야. 그게 장점이긴 한데, 짐작할 수 없으니 힘드네. 이런 건 미리 맞춰야 하는데.”

차예원의 말을 듣기 위해 몸을 기울이고 있던 서재희가 문득 내리깔고 있던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단박에 유은우와 시선이 마주쳤다. 차예원이 지정석에 설치된 태블릿을 가리키며 무어라 말하자 서재희가 즐겁게 웃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유은우를 향하고 있었다. 유은우는 일부러 지정석을 한번 쭉 훑는 듯 다른 곳으로 눈동자를 굴렸다가, 조심스레 다시 서재희를 보았다. 서재희는 이제 차예원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눈은 유은우를 보고 있었다. 유은우는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조금 시선 두어도 괜찮겠지.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사람이 사람을 그저 바라만 보는 것뿐인데, 이상하게 배 속부터 따뜻해졌다.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 의식도 못 하던 심장박동이 놀랍도록 생생하게 느껴졌다. 속으로부터 온기가 올라와 속눈썹 끝까지 물결처럼 밀려 퍼져 나갔다.

“정윤환.”

유은우는 자기 자신에게 되뇌듯 천천히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다 잘될 거야. 믿자.”

정윤환이 말없이 몸을 떼어 내는 것이 느껴졌다. 유은우는 흔들림 없이 서재희를 보았다.

감각은 비늘처럼 예민하게 일어서 서재희의 온갖 사소한 순간을 잡아냈다. 그의 입술이 얼마나 벌어지고 어떻게 다물리는지. 그의 옷깃 그림자가 어떤 방향으로 드리우는지. 그가 차예원의 말을 들으면서도 얼마나 선명하게 나를 보고 있는지.

‘은우 네가 재희한테 자살하지 말라고 좀 해 줘.’

어깨로 따뜻한 바람이 훅 끼쳤다. 유은우는 움찔하며 몸을 굳혔다. 정윤환이 입술을 모아 한 번 더 바람을 훅 불었다. 유은우의 머리며 어깨에 붙어 있던 꽃잎들이 훌훌 날아 흩어졌다. 정윤환이 거침없이 허리를 끌어안으며 유은우의 머리로 고개를 묻었다. 공영방송 로고가 붙은 드론 하나가 집요하게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기 봐. 우리 찍는다.”

정윤환이 드론을 향해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잠깐 자리를 비웠던 이선규가 성큼성큼 다가와 고의인지 실수인지 애매한 태도로 들고 있던 태블릿을 휘둘러 드론을 쫓아냈다. 그가 정윤환 옆에 털썩 앉으며 고개를 쑥 빼서 이쪽을 보았다. 이선규가 팔을 들더니 땀 한 방울 없이 매끈한 이마를 과장되게 닦아 내는 시늉을 했다.

“와, 힘들어. 그냥 지정석 한번 다녀온 것뿐인데 사람들이 계속 붙잡아서 죽는 줄 알았네. 인터넷이고 뭐고 온통 너희 기사로만 도배될 판이야. 사람들이 전부 다 너희 둘만 물어봐. 서재희와 차예원 약혼설 났을 때도 이 정돈 아니었던 것 같은데.”

유은우 옆에 앉아 있던 소연주가 대답했다.

“경우가 다르지. 그때는 소문이 서서히 깔리다가 확인 사살처럼 확정된 거고. 얘네 둘은 그냥 폭탄선언인 거고.”

조명이 살짝 어두워졌다가 연단 쪽으로 서서히 밝아졌다. 차인호가 기념 연설을 시작하자마자, 유은우는 제 머리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정윤환이 물먹은 솜처럼 완전히 기대 오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르게 숨을 쉬면서도 유은우의 허리에 감은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유은우가 작게 물었다.

“자?”

정윤환이 대답 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의 뺨이 머리에 닿아 뜨거웠다. 머리 장식이 망가질 것 같아 밀어내려다가 그만두었다. 정윤환의 침대에 놓여 있던 사람만 한 토끼 인형 정수리가 왜 나달나달 닳아 있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젖먹이 동물처럼 꼭 붙은 유은우와 정윤환을 사이에 두고, 이선규는 계속해서 소연주와의 대화를 시도했다.

“야, 야, 소연주, 이거 봐. 패 갈리는 게 확연하다, 진짜.”

소연주는 힐끗 곁눈질로 이선규가 내미는 태블릿을 바라보았다. 유은우도 물끄러미 태블릿을 보았다. 기기 끝에 도시연합 문양이 찍혀 있었다. 액정 가득 중앙홀 설계도가 띄워져 있었다. 천장에서 전체를 조망하듯 구석구석까지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이선규가 액정 위로 손을 움직이자, 지정석 한쪽에 앉은 사람들 머리카락 한 올까지 선명하게 확대되었다.

유은우는 눈을 들어 사방을 가로지르는 드론들을 주시했다. 화려한 로고의 언론사 마크가 먼저 눈에 들어와 아까는 미처 살피지 못했던, 도시연합의 문양이 찍힌 드론들이 그제야 하나둘 보였다.

“임유현이 오늘 서재희 없이 입장하고 차인호가 서재희 데리고 들어온 거 보고, 이놈들 바로 차인호한테 붙었어. 오염 철책 건설 회사 엉덩이 가벼운 것 좀 봐라.”

소연주가 조용히 물었다.

“이선규, 태블릿 어디서 났어?”

“지정석에서 빼 왔는데.”

소연주가 미소 지었다.

“미쳤구나. 대장이 알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소연주 너만 말 안 하면 대장 모를 텐데? 백정명 의원 자리에서 뽑아 왔어. 어차피 그 사람 오늘 안 오잖아.”

“촬영하는 드론들 안 보여?”

“이제 우리 안 찍는 거 알면서.”

익숙한 이름이 지나가, 유은우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선규의 팔을 움켜쥐고 물었다.

“백정명? 그 사람은 왜 안 와? 무슨 일 있어?”

“아. 블랙리스트 올라가서 사상 검증 받는다던데. 그 단계까지 가면 인생 끝난 거지, 뭐. 사해로 쫓겨나서 죽거나, 난민으로 살아남으면 정화 장치 달고 마주치거나.”

유은우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문득 손이 잡혔다. 아래를 보니 정윤환의 손이 다가와 자신의 손을 꼭 감싸 쥐고 있었다. 정윤환이 무엇을 경고하는지 알면서도, 유은우는 기어코 물었다.

“왜? 무슨 잘못 저질렀어?”

이선규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궁금해? 네가 그 사람 어떻게 알아?”

“우리 학교 선배 아버님이라고 알고 있어서…….”

“아아, 그래?”

이선규가 대수롭잖은 듯 이어 물었다.

“혹시 그 학생 실종됐어?”

유은우의 예상대로 이야기가 확 튀고 있었다. 바로 실종에 대해 묻는다는 것은, 이선규 역시 학교에서 자행되는 살인을 짐작한다는 증거가 되었다. 어디까지 아는지는 몰랐으나, 연관시킬 정도는 아는 듯했다. 하긴, 이선규도 도시연합 중앙학교 출신이었다. 이선규뿐만 아니라, 정예군 전부, 그리고 도시연합군 대다수가. 사람이 바보가 아닌 이상 5년이나 학교에서 폐쇄된 생활을 하는데 학생 죽어 나가는 낌새도 눈치 못 챌 리 없으니. 낙원의 이론은 절대다수의 견고한 침묵을 기반으로 했다. 나만 아니면 된다며 의식적으로 눈 감고 귀 닫고 살다가 그 불행이 하필이면 자신의 가족에게 닥쳐, 그제야 홀로 발악하는 자가 있다면 백정명처럼 제거될 터였다.

유은우는 숨을 고르려 노력했다.

“병실에 입원 중이야. 강화제 중독으로…….”

“흠. 입원한 거 본 적 있어?”

“아니. 그렇게까지 친한 건 아니어서…….”

“아, 그래? 도시연합에 진정서 제출했다더니, 아들 일인가 보네.”

“아들 일로 진정서 제출하면 사상 검증받아?”

이선규는 잠깐 눈가를 불편하게 찡그렸다. 그는 태블릿을 무릎에 내려놓고 손을 들어 유은우의 앞머리를 장난스럽게 흩뜨렸다. 그가 가볍게 말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안됐네. 잊어버려. 은우 너 어디 가서 그 사람 알은체하지 말고…….”

“이선규, 은우한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연합장 연설 끝나자마자 태블릿 도로 갖다 놔.”

소연주가 이선규의 말을 뚝 잘라 내며 딱딱하게 말했다.

“싫은데.”

이선규가 즉각 대꾸했다. 그러더니 이번엔 뒤를 돌아 박민준을 보며 태블릿을 건넸다. 뒤로 한껏 몸을 젖혀 의자가 넘어갈 판이었다.

“야, 박민준. 이거 봐. 진짜 웃겨.”

뒷자리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박민준의 헛웃음이 들렸다. 신이 난 이선규의 속닥속닥하는 소리도 들렸다.

“윤환이 얼굴이 워낙 반반해야지. 난리 났어.”

박민준이 말했다.

“은우 예쁘게 잘 나왔다. 윤환이가 안목이 있어서 은우 예쁘게 잘 입혀 와 가지고. 언제지? 재작년인가? 예능 나왔을 때 그때도 우리 은우 예뻤지. 윤환이 잘생긴 거야 말할 것도 없고. 좀 덜 잘생기고 성격이 좀만 유했어도 좋았을걸. 아아, 또 주신희랑 같이 사진 떴네. 윤환이 너도 피곤하겠다. ……댓글 쓰레기네. 본인들도 한집안에 동조자 두 명씩 낳으면 알뜰하게 나누어 가질 거면서 아주 지랄들이네. 우리 집도 나랑 여동생이랑 갈라졌는데. 다만 나는 얼굴이 평범해서 아무도 기사 안 내 주더라.”

몇몇이 작게 웃었다. 유은우는 제게 기댄 정윤환이 피식 웃는 것을 들었다. 정윤환이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 위로해 줄 필요 없어. 기사야 얼마든지 내라고 해. 잘생기면 그만이지.”

이내 정윤환은 파리하게 이울었다. 유은우는 정윤환의 무게를 고스란히 지기 어려워 몸을 의자에 푹 파묻으며 등받이에 정윤환을 기대 놓았다. 귓가로 그의 고른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모의 전투 때 너무 심하게 팼나 싶어 마음이 심란했다. 많이 회복된 자신과 달리 정윤환은 상태가 좋지 못했다. 급하게 나오느라 안정제를 최대치로 맞았으니 기운이 빠질 법도 했다.

그렇다 쳐도 너무 잘 잤다. 차인호가 인자한 인상과는 다르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연설하여 졸다가도 깜짝깜짝 놀라 깨는 유은우에 비해, 정윤환은 전혀 개의치 않고 죽은 듯이 잘 잤다.

불면증 아니었나.

유은우는 손을 들어 정윤환의 허벅지를 꾹 눌러 보았다. 정윤환이 한 차례 뒤척이더니 유은우를 답삭 끌어안았다. 기껏 밀어낸 보람이 없었다. 정윤환이 내뱉는 숨에 머리 위가 뜨뜻했다. 김이 서릴 지경이었다. 침 흘리는 거 아냐? 유은우는 조심조심 정윤환을 밀어서 떼어 놓았다.

“세상에. 윤환이 잔다.”

소연주가 중얼거렸다. 유은우는 힐끗 소연주를 보았다. 그녀는 토끼 눈을 뜨고 정윤환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얘 불면증 있는데. 밖에서 불편하게는 절대 못 자는 앤데. 하도 안쓰러워 내가 당직도 많이 바꿔 줬었어. 불면증 고쳤나? 그게 그렇게 쉽게 고쳐지나? 잠꼬대도 안 하네.”

정윤환은 숙면에 빠져 거의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박민준이 뒤에서 손을 뻗어 정윤환의 이마를 짚었다. 그가 혀를 찼다.

“열 좀 봐. 얘 안 되겠다. 소연주, 대장한테 말해서 오늘 윤환이 빼자고 해. 이 상태로 총 쥐면 까딱하다 골로 가.”

유은우는 가슴이 덜컹하여 얼른 정윤환의 뺨을 감쌌다. 불덩이 같았다. 아깐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유은우가 주춤 손을 떼자 정윤환이 잠결에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유은우를 끌어안았다.

“은우 네가 윤환이 팼다며?”

이선규의 물음에 유은우는 목이 턱 막혔다. 정윤환의 무게에 파묻힌 채 간신히 대답했다.

“……나도 맞았어. 시비는 정윤환이 먼저 걸었고.”

“사랑싸움 한번 살벌하게 한다. 윤환이가 너 많이 봐주다가 실수해서 더 많이 다친 거지?”

“아니야. 봐주긴 뭘 봐줘. 나 죽을 뻔했어.”

“윤환이가 은우한테 너무 쥐여산다. 여친한테 흠씬 두들겨 맞고 살이 쏙 빠져도, 저렇게 좋다고 자면서도 끌어안는 거 봐라.”

“아니, 내가 죽을 뻔했다니까?”

뒤에서 박민준이 불쑥 물었다.

“실력이 궤도에 오르긴 했나 보네. 설계 난독증 고쳤다는 말은 못 들었고. 아까 소연주가 그러던데 너 온디딤 다룰 줄 안다며?”

정예군의 시선이 이쪽으로 몰렸다. 유은우는 목덜미부터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옆에 붙어 있는 정윤환도 열이 올라 더 더웠다. 유은우는 대강 대답했다.

“조금.”

“조금? 윤환이랑 싸우는 시늉만 하려고 해도 조금으론 안 될 텐데. 지금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정윤환을 때려눕혀 놓고 조금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사실대로 말해.”

이선규가 말했다. 장난기가 싹 가셔 진지했다. 유은우는 대답 없이 이선규의 무릎에 놓인 태블릿을 끌어당겼다. 태블릿 위쪽에 참석자 명단 탭이 있었다. 손으로 누르자 소속과 이름이 차르륵 나열되었다. 유은우는 심심풀이로 훑어보는 것처럼 설렁설렁 손가락을 넘겼다. 눈으로는 용 연구소를 찾았다. 정윤환은 하얀 반지를 낀 사람들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고 했지만, 유은우는 용의 뼈와 꿈에 대해서 알아내야 했다. 용 연구소까지 직접 찾아갈까 고민하던 차에 이런 곳에서 마주친다면 오히려 행운이었다.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설마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싶기도 했다.

유은우의 어깨를 툭 치며 이선규가 물었다.

“은우 너 온디딤 뭐야? 나 어디서 듣기로는 옛날에 제국 사람들은 오토바이도 무기로 썼다고 하던데. 무난하게 활? 칼?”

줄곧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있던 강지원이 경악했다.

“칼? 사과 깎는 칼 말하는 거야? 와. 너무, 뭐라고 해야 하나, 무식하네, 왠지.”

“무식하다고? 너 실제로 보면 그런 말 안 나올걸.”

“이선규 너는 꼭 본 것처럼 말한다?”

“나는 봤지. 귀한 영상이라 공유는 못 해 준다.”

“사기 치네. 너도 도시연합에서 사상 검증받고 싶냐?”

“너 말 참 이상하게 한다. 도시연합군 전리품이 공식적으로 온디딤을 다루는 마당에, 말 한번 꺼냈다고 내가 왜 사상 검증을 받아?”

“조용히 해. 특히 이선규. 자꾸 떠들면 입에 재갈 물린다.”

소연주가 기계적으로 주의를 주었다. 이선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금 속닥이기 시작했다.

“나 오늘 은우랑 뛰고 싶다. 강지원 말고. 소연주 네가 대장한테 말 좀 해 줘.”

이선규의 투정에 유은우는 얼른 소연주의 소매를 잡고 나는 싫다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소연주가 유은우 너머로 고개를 빼고 이선규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이선규 넌 좀 닥치고 이따 태블릿이나 원래 자리에 갖다 놔.”

“그럼 은우 이제 실전에서 탑이야?”

박민준이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이선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그래 봤자 타격이 섬세해진 정도지. 고급 설계는 여전히 못 하니까. 근접전에서만 극도로 유리하겠네. 사해 나갈 땐, 우리가 은우 보호하면서 적진 중앙까지 파고든 다음에 은우 풀어놓고 오면 편하겠다…….”

강지원이 코웃음 쳤다.

“은우가 무슨 폭탄이냐?”

그 뒤로 뭔가 무시무시하게 이어지는 대화를 흘려들으며, 유은우는 태블릿을 만지던 손을 멈추었다. 용 연구소 소속 열댓 명의 명단이 막 손끝에 걸린 참이었다. 찬찬히 직위를 살폈다. 대부분이 연구사였고 연구관은 다섯이었다. 직급이라고는 깜깜한 유은우가 보기에도 연구사보다는 연구관이 높아 보였다. 유은우는 자꾸만 기울어 오는 정윤환을 이선규에게로 밀어 두고, 소연주의 눈앞으로 태블릿을 들이밀었다.

“여기 한세연 연구관, 어떤 사람이야?”

“응? 한세연? 왜?”

“학교에 친구가 있는데 용에 관심이 많아서. 용 연구소에 취업하고 싶다고 하더라고. 내가 사인이라도 좀 받아다 주려고. 그 친구한테 신세를 많이 져서…….”

소연주가 반색했다.

“은우 학교에서 친구도 사귀었니?”

“응.”

유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가, 얼른 덧붙였다.

“근데 나만 일방적으로 친구라고 생각하는 걸 수도 있어.”

소연주는 물끄러미 유은우를 보다가 태블릿을 가리켰다.

“한세연 유명하지. 강의도 많이 하고, 예전에 도시연합 중앙학교 멘토링도 하고 그랬어. 용 연구소 취업이 꿈이면 아마 한세연이 동경의 대상일 거야. 특출한 전문가라. 40대에 연구관 달기가 쉽지는 않지.”

유은우는 한세연 이름을 꾹 눌러 보았다. 명단이 위로 쑥 올라가 사라지며 중앙홀 배치도가 떴다. 한세연 이름을 단 작고 까만 점이 일반석 끝에 있었다. 유은우는 그 지점을 확대했다. 40대 후반쯤 되었을까. 웨이브 진 단발을 하고 약간은 피로해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턱을 괴고 연단을 보고 있었는데, 손가락에 희고 투박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유은우는 깊게 한세연의 인상을 새겨 두었다. 문득 소연주가 태블릿을 두드려 시야를 넓게 잡았다. 그녀가 연단 주위를 확대했다. 어딘가 상당히 불편해 보이는 임유현을 스쳐지나, 단정한 서재희와 그 옆에 앉은 차예원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소연주가 물었다.

“파견부장이나 학생회장하고는 안 친해?”

유은우는 소연주의 시선을 피했다.

“음, 잘 몰라.”

소연주는 더는 묻지 않고 태블릿을 건넸다. 유은우는 그것을 받아 쥐고 소연주에게 속삭였다.

“나 잠깐 사인 좀 받고 올게.”

그리고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소연주가 유은우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앉혔다.

“은우야, 나 봐.”

유은우는 약간 움츠러든 채 소연주를 마주 보았다. 소연주는 사람을 꿰뚫을 듯 바라볼 때가 있었는데 바로 지금이 그랬다. 아주 드문 일이었다. 이선규처럼 미쳐 날뛰는 놈들 기를 수시로 죽이면서도, 소연주는 관성에 젖은 무료한 표정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손으로 만져질 듯 송곳 같은 시선은 실로 오랜만이라, 유은우는 애꿎은 태블릿만 만지작거렸다.

“이리 가까이.”

소연주가 유은우의 머리를 보듬었다. 그녀가 작게 귓속말했다.

“은우야, 조금 헤매고 의문이 들더라도 종착지는 정해 놔야 해. 네가 학교로 보내졌다고 해서 군에서 기록이 삭제된 것은 아니야. 네 뿌리는 여기 우리와 함께 있어.”

유은우는 소연주에게 잘 보여야 할 상황임에도 도무지 수긍할 수가 없었다.

“군은 나를 반란군에게서 데려와 몇 년 함께 지냈을 뿐이야. 내가 왜 여기 뿌리를 내려? 사람은 식물이 아니야. 원하면 언제든지 터를 바꿀 수 있고, 그게 자유로워 죄가 되지 않는 사회여야 해. 내 근간은 내가 정하는 거야. 게다가…….”

유은우는 어쩔 수 없이 분이 치밀었다.

“……군은 나를 버렸잖아? 학교로 내쳐 놓고 무슨 뿌리 운운이야.”

“지금은 다시 데려왔잖아. 그것만 생각해. 얼마나 다행이니? 너 지금 이러면 안 돼. 대장은 널 아끼고 있어. 그걸 알아야 해. 군은 도시연합의 세 축 중 하나야. 우리는 그 군 중 최상위 팀이고. 역사가 오래되어 기반이 단단한 곳에 마음을 붙이고 살아야 네가 힘들지 않아. 소속만 확실시되면 함께 싸워 줄 많은 사람이 있으니까. 때때로 이상이 봄바람처럼 불 때가 있어. 마음이 동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평생 땅에 발도 붙이지 않고 바람에 실려 홀로 나부낄 수는 없잖아. 그게 자유라고 할 수 있니? 자신을 학대하는 게 옳은 일이니? 네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우리 모두 잘 알아. 다시 군으로 복귀할 기회가 주어졌으니 꼭 붙잡고 제발 편하게 살아.”

유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군에서 학교로 버림만 안 받았어도 소연주 말에 솔깃하여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유은우는, 삶이 어떤 집단에 딸려 들어감으로써 유지된다는 말에는 더는 동의할 수 없었다. 소연주가 말하는 뿌리 내리는 삶은, 뿌리가 뽑히는 순간 고사당하며 그 판단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음을 뜻했다.

“연구관에게 질문은 해도 좋아. 내가 그것까지 막을 권리는 없지. 하지만 그들은 예전에는 임유현, 현재는 차인호의 사람들이야. 어쩌면 훌쩍 성장해서 돋보이는 서재희의 사람일지도 모르지. 어쨌든 우리 쪽은 아니야. 너는 대부분을 걸러 들어야 하고, 어떤 것들은 들었다는 사실마저 잊어야 할 거야. 진실이건 아니건 간에. 명심하고 가.”

유은우는 태블릿을 내려놓은 다음, 비치된 볼펜을 들고 일어섰다. 드레스를 감아쥐고 일반석을 지나 통로로 빠져나왔다. 몇몇 사람들이 선 채로 연단을 보며 차인호의 연설을 경청하고 있었다. 사뭇 경건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들 사이를 막 빠져나왔다. 저만치 한세연이 보였다. 유은우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때였다. 왼쪽 귀에 부착된 인터컴이 삐 소리를 냈다. 개인 통신 알람음이었다. 유은우는 막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멈춰 섰다.

― 유은우.

“……대장?”

― 식 중에 어딜 돌아다녀.

“아니, 잠깐…….”

― 정윤환이랑 어린애 소꿉장난처럼 붙어 있다고 해서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드레스를 감아쥔 손아귀 사이로 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왔다. 유은우는 침착하려 애썼다. 김서혁의 눈은 못 속인다는 것은 이미 예상한 일이 아닌가. 차분히 생각하면 달리 놀랄 것도 없었다. 서재희도 말하지 않았는가. 대중만 속이면 된다고. 여론만 만들면 된다고. 김서혁 개인은 중요치 않다고.

― 서재희랑 무슨 사이야.

“선후배 사이.”

― 그 이상 아냐?

“아니야.”

― 아, 그래. 그럼…….

김서혁이 차갑게 말했다.

― ……내가 너한테 서재희 처리하라고 해도 상관없나?

유은우는 그만 숨을 토했다. 김서혁이 태블릿으로 자신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음이 분명함에도, 어쩔 수 없이 다리가 후들거렸다.

“……왜?”

― 낙원의 이론 후보 자리엔 네가 앉아야 하니까.

“대장, 나는, 나는 그런 거 정말로 원하지 않아.”

유은우는 정신없이 통로를 빠져나왔다. 한세연도 지나쳐 걸었다. 벽에 붙은 다음,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유은우는 이를 악문 사이로 말했다.

“왜 항상 아무도 내게 의견을 묻지 않아? 물론 내가 항상 옳은 판단만 한다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어떤 행동을 하면 안 되는지 정도는 알아. 지금 대장이 지시하는 것은…….”

― 지금 네 위치에서 오른쪽으로 쭉 나가면 귀빈 전용 공간이 나와. 거기서 기다려. 1부 끝나자마자 내가 서재희를 그쪽으로 보내겠다. 그를 살리고 싶다면, 당장 후보 자리 내려놓고, 차예원과 약혼 해지 후 임유현 교장 밑으로 들어가며, 도시연합군에 원서 넣겠다는 것까지 확답 받아 와. 네가 서재희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 서재희가 어찌 되든 미련 없다면 그냥 두고. 똑똑한 놈이라 어차피 설득도 쉬울 것 같지 않으니까. 그래도 서재희에게 유일한 변수는 유은우 너인 것 같아 시도해 보는 거다.

“대장, 사람 목숨 따지면서 그 사람의 능력에 대해 논하고 싶지 않지만, 서재희는 인재야. 아깝지 않아?”

― 아깝지. 그래서 적으로 마주한다면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해. 나는 몇 번이나 기회를 줬고 그걸 걷어찬 건 서재희 본인이다.

유은우는 손을 들어 턱 끝을 훔쳤다. 뺨과 눈가의 눈물을 닦아 냈다. 심호흡했다. 김서혁은 극도로 사무적이었다. 감정이 배제된 상대 앞에서 눈물은 독이었다. 유은우는 자꾸만 할딱거리려는 숨을 빠르게 진정시켰다.

커튼을 걷고 나왔다. 차인호가 연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고막을 팽팽히 밀고 들어오는 음악과 박수와 환호, 시야를 산만하게 조각내는 조명 사이에서, 유은우는 서재희를 보았다. 한참 멀리 떨어져 이목구비조차 희미했지만 금방 알아보았다. 유은우는 말라붙은 눈가를 한 차례 더 비빈 후, 오른쪽으로 돌아섰다.

― 기념식 2부 시작까지 한 시간 남았다. 그 안에 서재희를 임유현 옆에 못 앉힌다면, 내가 직접 제거한다. 그리고 그렇게 정예군이 움직여야 할 때가 온다면…….

유은우는 드레스를 꽉 움켜쥐고 발을 내디뎠다.

― ……넌 나와 같이 행동하게 될 거야.

빛이 산란했다. 1부 막이 내렸다. 사람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질서 있게 배열되어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 흩어지고 무리 지었다.

유은우는 김서혁이 지시한 대로 오른쪽으로 쭉 나아가려 했으나, 쏟아지는 인파에 휩쓸리면서 곧 방향을 잃고 말았다. 어디가 왼쪽이고 어디가 오른쪽인지 알 수 없었다. 유은우는 드레스를 감아쥐고 발돋움해서 연단을 찾았다. 도시연합 상징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스크린의 위치를 확인한 후 기준으로 잡았다. 다시 오른쪽으로 막 걸으려 할 때였다.

“안녕하세요.”

뒤에서 날아든 목소리라면 지나칠 수 있었으나, 인사가 앞을 가로막으니 유은우도 도리가 없었다. 1초라도 빨리 서재희와 접선해야 한다는 조급함을 삼키지 못하며, 유은우는 상대를 보았다.

“제5도시관리국장 주혜선입니다.”

생전 처음 보는 중년 여성이, 마치 장애물처럼 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짙은 푸른색이 가미된 정장. 살이 적당히 올라 포동포동했고, 피부는 조명 아래 반들반들 윤이 흘렀다. 그녀는 전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다소 강압적으로 명함을 내밀었다. 빳빳하여 모서리가 날카로운 그것을, 유은우는 얼결에 받아 들었다.

주혜선의 감정 없는 눈동자가 유은우의 전신을 샅샅이 훑었다. 목소리는 교양 있고 다정했다.

“얘기 많이 들었어요. 아주 인재라고 하던데. 온디딤을 사용할 줄 안다고 소문이 돌던데 기회가 되면 직접 보고 싶군요. 졸업하면 바로 군으로 지원할 생각인가요? 아니면 졸업도 필요 없나? 이번에 우리 국에서 단기 파견팀을 뽑아요. 우리 제5도시는 용 연구소가 있어서 다른 도시와 다르게 사해 파견이 많거든요. 기간도 짧아서 부담 없을 테고 군과는 달리 좋은 경험이 될 텐데. 졸업반이 아니면 지원할 수 없지만, 은우 학생이 원한다면 제가 추천서를 써서…….”

유은우는 대답 대신 눈을 빠르게 굴렸다. 어느새 낯선 이들에게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일단은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할 말이 없거나 단순한 구경꾼이라서 조용한 분위기는 결코 아니었다. 다만 주혜선에게 선수를 빼앗겨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것뿐으로, 당장에라도 명함을 떠안기거나 자기소개를 하는 동시에 유은우의 정보를 털고 싶어서 안달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 여태 뭐 하다가 지금 다 튀어나온 거지.

유은우는 천천히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답은 금방 나왔다.

내가 지금 혼자라서.

정윤환이 유은우를 애지중지 보듬어 안으며 얘는 내 연인이다 외칠 때, 유은우는 김서혁 라인으로 철저하게 보호받은 셈이었다. 그때 눈치만 보며 가까이 오지 못하던 이들이 이제야 슬금슬금 다가들고 있었다. 인큐베이터에서 생사를 오갔던 서늘한 감각이 삽시간에 되살아났다. 저도 모르게 바짝 날이 섰다. 유은우는 즉시 뒤돌아섰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정신없이 헤치고 나와서 한참을 뛰다시피 걸어 멀어진 후에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꼬리 말고 도망친 걸까 뒤늦게 후회했다.

그리고 음악과 소음 사이로, 여태 들리지 않았던 대화들이 잡혔다.

“의회에서 당장 폐기하라고 지시한 것을 총사령관께서 겨우 목숨만 살려 학교로 피신시키고 이제야 가능성을 확인했는데, 조기 졸업을 막는다니요? 그것도 학생회장이 서명을 미뤄서? 타당한 이유도 없이? 김서혁 총사령관께서 뒷목 잡고 넘어가시겠습니다.”

“학교로 피신? 인권 단체가 비난할까 두려워 차마 직접 처리하지는 못하고 학교로 떠넘겼다가 쓸모가 생기니 원래는 우리 것이라고 뒤늦게 나서는 주제에 뒷목 잡고 넘어가? 군은 양심이 있나?”

“맞는 말이지. 거기다 전리품 재활용의 가능성을 발견한 건 군이 아니라 학교야.”

“그게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의원님, 온디딤 한시 허가 절차가 적법합니까?”

“서재희가 그쪽 법의 허점을 뚫었어. 법적으로는 완벽해.”

“법에 허점이 있다기보다는 유은우가 특이케이스지요.”

“유은우 자체는 문제가 없어. 유은우를 특이케이스로 만든 군에 문제가 있지. 멀쩡한 인간을 전리품으로 등록시키고 시민권도 주지 않으니 서재희같이 졸업도 안 한 학생이 그런 편법을 쓰는 게 아닌가?”

“대표님, 언사에 주의하십시오. 졸업도 안 한 학생이라고만 치부하기엔 너무 성장했습니다.”

“성장? 무슨 성장? 어린애도 별수 없지. 결국 김서혁만 좋은 꼴이 되었으니. 서재희나 차인호나 하등의 이득이 없잖은가.”

“서재희는 이득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전부터 사심 없이 학생들 키워 내는 것으로 신망이 두터웠습니다. 파견부니 학생회니 본디 그런 자리 아닙니까. 깎아내리시면 후에 큰코다치십니다.”

유은우는 연단의 서재희를 찾았다. 그러나 서재희를 미처 잡아내기도 전에 임유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반쯤 몸을 일으키다가 허리를 다 펴지도 못하고 테이블에 손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디 아픈가?

유은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임유현을 더 살피려 했으나, 곧 몇몇 사람들이 다가와 그를 부축하는 바람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반대쪽에 서재희가 있었다. 그는 차예원과 외따로 떨어져서 김서혁과 함께 있었다. 서재희는 김서혁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무어라 입을 움직여 대답하고는 등을 돌려 멀어졌다. 바로 귀빈실 쪽으로 가는가 싶었으나 서재희는 곧 다른 사람들과 어울렸다.

“이래서 지원 횟수를 제한해야 한다고 자꾸 말이 나오는 거야. 졸업생들이 죄 군으로만 몰리니 다른 기관들이 상대적으로 죽어 가잖아.”

“용 연구소 소장님은 좋으시겠습니다. 서재희가 그쪽으로 지원했다고.”

“거봐요. 애가 똑똑하다니까. 본인이 어떻게 돋보일지 알아.”

“글쎄. 일단 독이 든 술을 버릴 줄은 아는 것 같고.”

의미심장한 웃음이 들렸다.

“소장은 오늘 안 왔나?”

“요새 사해에 출현한 그 용 때문에 도무지 쉴 수가 없다고 하셔서. 아마 한세연 연구관이 대리 참석했을 겁니다.”

“연구소에서 놓친 용이 사해로 도망가서 무럭무럭 크고 있는데 연구소 소장이 여길 어떻게 오겠습니까. 아마 밤에 잠도 못 자고 있을 텐데. 며칠 전 보고회 때 보니 얼굴이 누렇게 떴던데요.”

저만치 한세연 연구관이 앉아 있었다. 유은우가 처음 그녀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주변이 사람들로 빼곡했으나, 지금 그녀는 혼자였다. 굵게 굽실거리는 단발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닳고 지쳐 보였다. 흰 반지가 끼워진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졸고 있는 모양이, 화려한 연회장이 아니라 잔업이 많은 사무실에 더 어울렸다. 소박한 드레스 위로 푸른 가운이 물처럼 흘러 그 끝이 의자 아래에 닿아 있었다.

다시 서재희 쪽을 보았다. 김서혁은 유은우에게 귀빈실로 가라고 지시했다. 서재희도 그쪽으로 보낼 테니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 오라고. 그러나 서재희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시간이 있었다.

유은우는 주위를 휙휙 둘러본 후, 테이블에 놓인 음식 접시를 살짝 들추고 그 밑에 주혜선에게서 받은 명함을 쑤셔 넣었다. 쓰레기를 처리하니 속이 다 시원했다. 자리에서 챙겨 온 펜만은 그대로 꼭 쥐고 한세연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바로 코앞에서 인사하는데도 한세연은 잠에서 깨지 못했다. 그저 머리를 괴고 앉은 채 곤히 자고 있었다. 유은우는 그녀 옆자리에 앉았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그녀에게서 싸늘한 냄새가 났다. 더없이 익숙한 소독약 냄새. 유은우는 자고 있는 한세연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문득 정윤환을 떠올렸다. 고개를 돌려 정예군 자리를 좇았다. 드문드문 빈자리 사이로 정윤환이 설핏 보였다. 그는 이 시끄러운 와중에도 이선규의 어깨에 기댄 채 맹렬하게 자고 있었다. 누군가 덮어 준 듯 어깨에 걸쳐진 까만 코트가 느른한 호흡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했다. 옅은 머리칼이 정전기로 부스스해 열감기 걸린 병아리 같았다.

유은우는 정윤환을 확인한 후 다시 한세연에게로 고개를 돌리다가, 너무 놀라서 몸을 움찔했다.

한세연이 똑바로 앉아 눈을 크게 뜨고 유은우를 보고 있었다. 언제 자고 있었냐는 듯 다갈색 눈동자가 생기로 맑고 또렷했다. 그녀가 눈을 재빠르게 굴려 힐끗 옆을 보았다. 유은우도 그쪽을 보았다. 주혜선 국장이 아닌 척하면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유은우는 얼른 한세연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도시연합 중앙학교에 재학 중인 유은우입니다. 저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사인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 친구가 연구관님 팬이라서요.”

한세연은 가만히 유은우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유은우가 공손히 내민 펜을 받아 갔다. 유은우는 오른쪽 손목을 내민 뒤에, 정윤환이 서툴게 묶어 준 리본 끈 중 길게 늘어진 부분을 팔 위로 평평하게 폈다. 한세연은 익숙하게 펜 끝을 리본에 가져다 대다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목소리가 가냘팠다.

“친구 이름이?”

“손도연입니다.”

술술 말하면서도 유은우는 내심 손도연에게 미안했다.

“손도연……. 손도연?”

한세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작게 탄성을 냈다.

“아아, 맞아. 기억났어. 올해 용 포토 에세이 공모전에 출품한 학생이구나. 사진도 글도 다정해서 여러 번 읽었어. 내가 심사 위원이었거든. 특히 사진이 마음에 쏙 들어서 내 연구실 액자에 끼워 두었지. 상은 못 줬지만.”

“왜요?”

“너무 따뜻해서. 입선도 줄 수 없었어. 우리도 기준이 있거든.”

“기준이요?”

“어떻게든 용의 존재 가치가 드러나야 했어. 그런데 그 학생의 작품엔 그게 없었어. 용 그 자체로 완전해서, 오히려 감점 요소가 되었지.”

용 동영상을 재생시키며 너무 귀엽다고 흐뭇한 표정을 짓던 손도연이 떠올랐다. 그녀는 빈말로라도, 용을 빨리 사로잡아서 도시를 건설해야 한다는 등의 말은 하지 않았다.

리본 위로 펜이 지나가자 팔이 간질거렸다. 유은우는 힐끔 옆을 보았다. 주혜선은 등을 보이고 있었다. 고개를 숙였다.

“제 부모님 아시죠?”

펜이 삐끗하며 사인 끝이 뭉개졌다. 한세연은 테이블에 펜을 내려놓았다.

“당신이 절 8년간 키웠다면서요.”

한세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테이블에 놓아둔 펜을 노려보았다.

유은우는 눈을 들어 힐끗 연단 쪽을 보았다. 아직 서재희가 거기 있었다. 유은우는 몸을 기울여 한세연의 손을 잡았다. 한세연이 흠칫하며 손을 빼려고 했으나 유은우는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끌어와 배에 가져다 댔다. 한세연이 그제야 눈을 들어 올렸다.

“당신이 여기다가 꽂았잖아. 희고 단단한 기계를 여기다가. 그때 내게 무슨 짓을 했어? 왜 난 스스로 기억할 수 없어? 혹시…….”

‘용의 뼈는 녹슨 못과 같아, 한번 내리꽂으면 영원한 심연이 관통된다. 기억은 그 어둠속에 영원히 고일 것이며, 아무리 긴 두레박이라도 길어 올리지 못한다.’

“……용의 뼈와 관련 있어?”

한세연이 입술을 달싹였다. 목소리가 희미했다.

“윤환이한테 들었니?”

“지금 그게 중요해? 당신 손으로 한 짓이야. 당신한테 들어야겠어.”

한세연이 바싹 굳었다. 까맣게 벼려진 손톱만 한 시계 침이 한세연의 목덜미에 아슬아슬하게 닿아 있었다.

“말해. 죽고 싶지 않으면…….”

강하게 몰아붙이고 싶었으나 유은우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한세연의 눈에서 마른 눈물이 툭 떨어졌다. 유은우는 눈을 크게 뜨고 한세연을 바라보았다. 한세연은 유은우보다 더 당황한 듯했다. 그녀는 목을 가다듬으며 손바닥으로 제 눈을 허둥지둥 닦아 냈다.

“아, 정말 미안하구나. 많이 놀랐니? 이제 와서 눈물이라니. 나도 참.”

한세연은 붉어진 눈으로 유은우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몸을 가까이 붙여 왔다. 제 목덜미를 날카로운 침이 위협하고 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아, 유은우는 더욱 당황했다. 칼자루는 유은우가 쥐고 있는데, 상황은 한세연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녀가 유은우의 귓가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기계를 인간에게 삽입하고 성공적으로 장기와 융합시키려면 강력한 매체가 필요했어. 용의 뼈를 기계와 엮어 집어넣었지. 아주 고통스러운 과정이란다. 인간이 한계를 뛰어넘는 고통을 겪게 되면 그 경험은 통째로 삭제되곤 해. 그래서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거란다. 어쩌면 다행이지 않니?”

한세연이 몸을 떼어 냈다. 그녀는 손을 들더니 제 얼굴을 한 차례 쓸어내렸다. 손 그늘 아래 짧은 일그러짐이 있었다. 고통스러운 표정. 순식간에 스치고 사라졌으나 잠깐 마주한 것만으로도 섬뜩했다. 꿈속에서 목격한 용만큼이나 괴로워 보여서.

“김서혁 총사령관이 다시 널 데려가려는 모양이더구나. 우리가 염려했던 최악의 상황이지. 우린 널 처리하고 싶었어. 적의 손에 훌륭한 무기를 쥐여 주기 싫었으니까. 몇 번이나 윤환이를 괴롭게 했지.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널 그렇게 쓰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더 강력하게 나갔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니.”

한세연은 시선을 떨어뜨리고 눈을 몇 번 깜박였다.

“네게 우리 쪽으로 넘어오라고 제안한다면 널 기만하는 게 되겠지. 하지만 말해 두고 싶구나.”

한세연이 속삭였다.

“네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사실이 아니야. 역사서는 도시연합의 감시 아래 편찬되지. 왜곡되다 못해 새로이 쓰였어. 그중 진실이 얼마나 남아 있으며 거짓이 얼마나 더해졌는지. 무지한 자들이 교수라 불리며 엘리트를 세뇌할 동안 진실을 아는 자들은 사해에서 강제 노동을 하다 파묻혔어. 너는 네가 배웠던 것을 처음부터 뒤집어야 해. 그래야 진짜를 볼 수 있어.”

“자세히…….”

“내 입을 거쳐 나가면 내 가치관이 배어 있을 텐데 괜찮겠니? 나는 네게 객관적인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방향을 제시하게 될 거야. 나는 단체에 소속되어 있고 그 단체는 신념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집합이란다. 말로 뱉을 때 나는 그들을 대변해야 해. 그것을 원하니? 난 그때 주위에 기대어 스스로 선택하지 못했어. 하지만 넌 다를지도 몰라. 내가 지금 네게 말하지 않고 보여 준다는 것은, 너에 대한 배려야. 선택할 수 있도록. 물론 신뢰가 가지 않겠지만 이게 내 최선이고…….”

한세연에게서는 여전히 소독약 냄새가 났다.

“……위험을 감수하고 말고는 네 자유야.”

― 유은우, 움직여.

김서혁의 목소리가 칼처럼 떨어져, 유은우는 몸을 움찔했다. 본능적으로 연단을 보았다. 유은우가 한세연에게 정신을 빼앗긴 틈에 서재희가 홀로 이동하고 있었다. 늦었다. 유은우는 시계 침을 거두며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다가 한세연에게 팔을 붙잡혔다.

“여태 네게 해 준 게 하나도 없으니…….”

한세연이 유은우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이 정도는 내 마음대로 주어도 되겠지.”

유은우는 제 손을 펼쳐 보았다. 작은 보안카드였다. 앞면엔 용 연구소 마크가 찍혀 있었고, 뒷면엔 ‘503호 : 한세연 개인 연구실’이라는 문구가 찍혀 있었다.

한세연이 말했다.

“다음에 또 환영이 보이면, 그땐 총을 잡아 보렴. 그럼 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거야.”

고개를 들었다. 저만치 인상이 희미한 남자가 서 있었다. 강진욱. 눈이 마주쳤다. 그는 다른 사람들 틈에 서서 물끄러미 이쪽을 보고 있었다.

유은우는 드레스를 움켜쥐고 일어섰다. 사람들 사이로 빠르게 걸었다. 수시로 서재희의 위치를 확인했으나, 중간에 낮은 공간으로 내려서며 그것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유은우는 방향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오른쪽으로 쭉 걸었다. 점차 인파가 옅어지고 복도 끝의 입구에 다다랐을 땐 혼자가 되었다. 새까맣고 고풍스러운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유은우는 정신없이 발을 들였다가 곧 숨을 삼키며 멈춰 섰다.

사방이 꽃이었다. 화병에 풍성히 꽂히거나 천장에서 낭창하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테이블 중앙에도 한가득 있었다. 아까까지 머물던 홀에도 이 정도 꽃은 없었는데. 이렇게 싱싱한 생화라니. 돈 안 내고 봐도 되나 겁이 날 정도로 사치스러웠다. 유은우는 거의 얼이 빠져서, 중앙의 테이블과 의자를 가운데 끼고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그러다 우뚝 멈춰 섰다. 아니, 지금 내가 꽃구경이나 할 때가 아니라, 선배…….

“왜 이렇게 늦었어?”

머리 위로 불쑥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허리로 부드럽게 손이 들어오고 감싸지며 끌어당겨졌다. ‘어어.’ 하는 사이에 유은우는 서재희와 한 뼘만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잠시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서재희가 손을 뻗어 유은우의 왼쪽 귀에 꽂힌 인터컴을 만졌다. 종료를 알리는 기계음이 들렸다. 그러더니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깔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유은우는 저도 모르게 살풋 눈을 감으려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 서재희는 밀려나지는 않았지만 더 끌어안지도 않았다.

“대장이 절 여기로 보냈어요. 선배를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 오라고. 또, 그 약혼을 파기하고, 후보 자리를, 후보를 그만두고…….”

김서혁에게 받은 지시는 여태 단 한 번도 잊거나 더듬은 적이 없었는데 자꾸만 말이 끊겨 나왔다. 꽃이 너무 많았고, 큰 손이 허리를 단단하게 받치고 있었고, 숨이 가까웠다.

“그, 그리고, 또, 뭐지? 아, 교장 선생님에게 다시 돌아가라고 했어요.”

서재희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는 따뜻하게 유은우를 보면서 가만히 멈춰 있었다. 유은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분명 김서혁에게 직접 지시를 들었을 때는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두려웠는데, 막상 서재희를 마주 보며 전달하니 김서혁의 협박은 이상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또, 음, 도시연합군에 원서를 넣고, 2부 시작할 때는 임유현 교장 선생님 옆에 앉으라고. 그러지 않는다면 제거하겠다고 했어요. 선배는 똑똑해서 적의 위치에 있으면 안 된대요. 꼭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 오라고.”

서재희가 빙긋이 웃었다. 그는 손으로 유은우의 뺨을 어루만지더니 속삭였다.

“다 끝났어?”

“네?”

“김서혁이 전하라는 말, 그게 끝이야?”

“어어……, 네…….”

입술이 부드럽게 물렸다. 뒤통수로 서재희의 손가락이 감겨 들어왔다. 그의 입술이 보채듯이 유은우의 입술 사이로 파고들고 떨어졌다가 다시 머금었다. 그가 약하게 신음을 뱉을 때, 유은우는 혼이 싹 달아났다. 지금 내가 내 다리로 서 있는지, 서재희에게 안겨 발만 땅에 닿아 있는지. 아랫배로부터 정수리까지 찡하게 미끄러져 올라오는 이 감미롭고 말랑말랑한 것이, 꽃으로부터 풍기는지, 그로부터 배어나는지, 아니면 내게서 흐르는지. 서재희의 손끝이 귓바퀴를 스쳤다. 왼쪽 귀의 인터컴이 약간 흔들렸다. 차가웠다.

“잠깐…….”

유은우는 숨을 토하며 물러섰다. 서재희는 잠깐 고개를 드는 듯하다가 다시 유은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선배, 잠깐만. 지금 이럴 때가 아니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채널, 채널은 몇 번으로…….”

“너 왜 정윤환이랑 키스해?”

잠시 유은우는 머리가 멍해졌다. 눈을 깜박이며 서재희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입가가 굳어 있었다.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조금이 아닌가…….

“선배가 그렇게 하라면서요. 선배는 차인호 쪽으로 가서 김서혁과 대항하여 균형을 맞추고, 저는 선배랑 그 어떤 감정적인 사이도 아닌 걸로 하자면서요. 그래서 제가 정윤환이랑…….”

“사귀는 척하랬지, 내가 언제 키스하랬어?”

“안 했어요. 하는 척만.”

유은우의 대답에 서재희는 금세 표정이 풀어져서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그렇게 가까이 꼭 붙을 필요는 없잖아. 어땠어? 정윤환 잘생겼잖아.”

“아, 뭐 잘생겼긴 한데…….”

유은우는 이마가 훤히 드러나 선이 세련되고 깔끔한 서재희의 낯을 보며 어색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때였다. 서재희의 눈이 차갑게 죽었다. 멱살을 잡혀 얼어붙은 호수로 던져지듯 즉각. 그가 왼손을 들더니, 제 인터컴을 꾹 눌렀다. 서재희는 유은우에게서 손을 놓고 몇 발짝 물러선 뒤 서늘한 표정으로 수신에 집중했다. 그는 계속해서 듣기만 하다가 마지막에 몇 마디 덧붙였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한 가지만 더. 여덟 개로 찢어 주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통신을 끝내고도 그는 유은우 곁으로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무언가 날카롭게 일어선 것을 애써 내리 눕히듯 서재희는 몇 번이나 깊이 호흡했다. 이내 가까이 왔다. 그가 담담히 말했다.

“김서혁은 내가 그쪽으로 붙지 않으면 오늘 날 죽일 셈이야. 다들 김서혁은 어려워하지. 미련도 없고 판단도 빨라 상대를 정신없이 강하게 몰아붙이는 그런 사람. 맞서 싸우려면 나도 그렇게 되면 돼. 더 빨리 더 강하게 밀어붙이면 되지. 많은 것을 움직일 필요는 없어. 핵심만 치면 돼…….”

유은우는 물끄러미 서재희를 보았다. 그가 왜 그리 빤히 보냐는 듯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유은우는 입술 안쪽을 짓씹다가 말했다.

“선배는 나한테 인권을 보장해 준다고 했어요. 정윤환에게는 한세연을 보호해 주겠다고 했었고. 그럼 선배는, 선배는 어떻게 돼요?”

서재희는 매끄럽게 웃었다.

“나는 우리 셋 중에 제일 잘 먹고 잘살 거야.”

유은우는 성큼 서재희에게 다가갔다. 그의 재킷을 젖히고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서재희는 몸을 굳혔을 뿐 자신의 지갑을 빼 가는 유은우를 제지하지 않았다. 유은우는 지갑을 들고 서재희와 눈을 맞추며 잠시 기다렸다. 서재희는 차분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락으로 알고, 유은우는 지갑을 열었다.

‘너 재희 지갑 본 적 있어? 남들이 가족사진 따위를 넣고 다니는 칸에 재희가 뭘 넣고 다니는지 알아?’

깔끔하게 정리된 카드와 지폐 사이로, 바스락거리는 작고 투명한 약봉지가 있었다. 동그란 수면제 다섯 개.

유은우는 가만히 약봉지를 매만졌다. 다섯 개를 거듭 헤아리고 또 헤아렸다. 유은우의 떨리는 손끝에서 약봉지는 금세 꾸깃꾸깃해졌다. 유은우는 한참 만에 그것을 지갑에 갈무리해 넣고 서재희에게 내밀었다. 그는 지갑을 받아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선배가 정해 놓은 길이라면 제가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만약에.”

목소리가 이상하게 높아졌기 때문에 유은우는 잠깐 목을 다듬어야 했다.

“만약에 그 길을 가다가 너무 외로워져서 쓰러질 수도 있잖아요. 혹은 이 길은 아니다 싶어 후회하면서 다시 돌아오고 싶어질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너무 멀리 와 버려서, 깜깜한데 불도 없어서 혼자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유은우는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걷잡을 수 없게 될까 봐.

“……내가 가까이서 기다릴게요.”

서재희는 여전히 유은우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미소 짓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계속 기다릴게요, 선배. 저 그냥 여기 주저앉아 있어도 괜찮아요. 도망 못 가도 괜찮아요. 시민권 필요 없어요. 조금 이용당하면 뭐 어때요. 제가 옆에 있어 줄게요.”

서재희가 다가왔다. 꼭 끌어 안겼다. 그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언제 어떻게 만났어도, 나는 결국 널 좋아하게 되었을 것 같아.”

유은우는 서재희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눈가를 꼭 눌렀다.

“여기 남지 마. 나는 괜찮아. 정말이야. 이 길에 후회는 없어. 내가 지칠까 봐 네가 기다릴 필요도 없어.”

유은우는 서재희의 등을 끌어안았다. 그의 메마른 등줄기는 빳빳하게 긴장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끔찍한 일들이 많이 일어날 거야. 하지만 내가 널 위해 그런 일들을 벌였다고는 생각하지 마. 내가 뼛속부터 원했던 일이야.”

머리에 닿는 서재희의 숨이 차가웠다.

“임유현 옆자리? 나보고 거기 다시 가서 앉으라고?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면 다시 돌아와라? 아주 인심이 후하시네.”

그가 차갑게 웃었다.

“김서혁한테 전해. 임유현 옆자리가 아니라 임유현 자리에 앉겠다고.”

홀은 여전히 눈부셨다.

유은우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코트를 주워서 탈탈 털고 다시 정윤환 몸 위에 덮어 주었다.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열이 상당했다. 버팀목이 되어 주던 이선규도 어디론가 가고 없어, 정윤환은 꺾인 꽃처럼 고꾸라져 있었다. 유은우는 옆자리에 앉아 낑낑거리며 그의 몸뚱이를 기울여 제 쪽으로 기대게 했다. 얼마나 지쳐 있는지 깨지도 않고 잘 잤다. 어깨에서 색색 숨소리가 났다. 무거웠지만 참을 만했다.

2부 시작 전이라 다들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정석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김서혁이 박민준과 함께 있었다. 김서혁과 눈이 마주쳤다. 유은우는 황급히 왼쪽 귀를 더듬어 인터컴을 켰다.

― 인터컴은 왜 꺼. 어떻게 됐어?

“음…….”

서재희가 한 말을 그대로 전달할 수는 없었다. 고르고 골라 포장했다.

“그쪽에 앉긴 앉겠대.”

― 확실해?

“음…….”

그때였다. 불이 꺼졌다. 모든 조명과 스크린이 일시에 나가자 거짓말처럼 앞이 캄캄해졌다. 다들 놀라 웅성거리고, 곳곳에서 잔을 놓치는지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수많은 무언가가 떨어지면서 날카로운 금속음을 냈다. 유은우 바로 코앞에서도 무언가가 직각으로 쑥 떨어지는 느낌이 나더니 큰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그 파편이 다리를 가볍게 스쳤다.

예고도 없이 연단의 스크린이 켜졌다. 화려하게 편집된 영상은 온데간데없고 불쾌하게 지지직거렸다. 그 희미한 빛에 의지해 유은우는 발밑을 보았다. 드론이 엉망으로 부서져 있었다.

“뭐야.”

정윤환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가 느리게 몸을 일으키자 유은우의 어깨가 가벼워졌다. 정윤환은 잠이 덜 깬 눈으로,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유은우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당황하는 사람들. 동력을 잃고 추락한 드론들. 팽팽한 공기. 이미 총을 꺼내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태연하게 간식을 집어 먹는 이선규. 그 옆에서 무덤덤한 소연주. 냉랭한 얼굴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김서혁. 김서혁의 시선 끝에 서재희가 있었다.

서재희는 지정석의 테이블에 자연스레 기대 있었다. 임유현의 자리였다. 그는 소풍이라도 온 듯 태연하게, 당황한 의원들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유은우는 바로 정윤환을 잡아당기고는 등을 보였다.

“드레스 벗겨 줘.”

“야, 그냥 해.”

“불편해. 빨리.”

정윤환은 투덜대면서 드레스의 지퍼를 끝까지 내렸다. 유은우는 자리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고 기민하게 드레스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거추장스러운 천 더미를 발밑으로 쑤셔 박고는 매끄러운 소재의 속치마를 정리했다. 정윤환이 재킷을 벗더니 내밀었다. 유은우를 그것을 받아 걸치고 소매를 둘둘 걷어붙였다.

잡음이 일던 스크린이 점차 잡혔다.

유은우는 처음에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흔들거리는 스크린. 빛이 아스라하여 식별이 어려웠다. 단 한 번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어 더 느리게 인식되었다.

그것은 탑이었다. 도시연합 기념탑. 그리고 무언가가 그 위에 널려 있었다.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여러 조각으로 찢어다가 널어 놓았다. 기계로 이루어진 탑은 톱니바퀴를 비롯한 온갖 녹슨 고물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그 위에 널린 시체가 흔들거렸다. 하나, 둘, 셋……, 여덟.

공허한 두 눈. 이상하게 꺾인 팔다리. 얇고 고급스러운 옷자락이 찢겨 바람에 항복기처럼 펄럭였다.

시체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내가 뼛속부터 원했던 일이야.’

임유현이 거기 죽어 있었다.

정윤환이 옆에서 숨을 들이켰다. 유은우는 서재희를 보았다. 서재희의 얼굴에 미소는 가시고 없었다. 그는 임유현의 자리에 기대어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켜 반듯하게 섰다. 서재희의 깨끗하게 차분한 시선은 김서혁을 향하고 있었다.

― 유은우, 나랑 붙고. 정윤환은 이선규. 나머지는 수색조 그대로 간다.

유은우는 손목에서 리본을 풀어냈다.

유은우는 손목에서 풀어낸 리본을 입에 물었다. 손을 들어 머리칼을 한 번에 걷어잡은 뒤에 물고 있던 리본으로 머리를 높이 올려 묶었다. 훤히 드러난 뒷덜미로 찢어질 듯 높은 비명이 스쳐, 유은우는 그만 움찔했다. 그릇과 잔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담겨 있던 것들이 엎어져 쏟아지는지, 발치로 동그란 과일 알맹이와 자잘한 견과류들이 굴러 왔다. 사람들이 서로를 밀치며 출입구로 몰리고 있었다. 몇몇은 테라스를 통해서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쓸려 나가는 사람들 중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홀의 중앙에 선 김서혁. 어느새 곳곳에 흩어진 정예군. 그들은 회색과 검은색이 교차한 정장을 반듯하게 입고 꼿꼿하게 서 있었는데, 움직임이 거의 없어 인간이 아니라 작은 빌딩처럼 보였다. 그리고 짙은 푸른색이 가미된 차림의 차인호, 차예원. 경호원들이 둘에게 바짝 붙어 있었다. 서재희는 의원들과 경호원에 둘러싸여 있었다. 모두 총을 뺀 채였다.

숨이 꽉 옥죄었다. 온이 사방에서 불안정하게 덜덜 떨렸다. 한정된 공간에서 동조율이 상당한 동조자 수십 명이 각자의 방아쇠마다 온을 딱딱 걸어 놓으니 무리하게 팽팽해진 탓이었다.

귀가 먹먹한 소란에도, 아직까지 총성은 없었다.

“임유현이 죽었어.”

정윤환이 중얼거렸다. 그는 총을 잡기는커녕,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였다. 그저 스크린의 임유현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창백하던 낯이 새파랬다. 그가 되뇌었다.

“죽었어.”

유은우는 그동안 정윤환이 임유현을 입에 담으면서 어떤 눈을 했는지 기억했다. 낡아 옅은 눈.

유은우는 한 손을 뻗어 정윤환의 뒤통수를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열이 감겼다. 유은우는 손을 조금 더 당겼다. 몸도 아픈 데다가 정신까지 홀라당 빼놓았는지 정윤환은 그대로 딸려 왔다. 유은우는 가슴에 정윤환의 머리를 기대어 놓고 다른 한 손을 그의 등에 얹었다. 정윤환의 숨이 거칠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다시 스크린을 보려고 했다. 유은우는 이제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눌러 안았다. 이어 자신의 인터컴을 끄고, 정윤환의 인터컴도 꺼 버렸다.

“그만 봐. 계속 봐서 좋을 것도 없어.”

정윤환이 깊게 숨을 토했다. 유은우는 그의 뺨에 손등을 대어 보았다. 불덩이였다.

“너 몸이 뜨거워.”

얇은 속치마 아래로 닿는 정윤환의 숨이 열에 달떴다. 유일한 조명인 스크린이 깜박거리자 사위가 번쩍번쩍했다. 정윤환이 손을 들어 유은우의 소매를 잡았다. 방금 전 자신이 벗어 준 제 재킷이었다. 정윤환이 유은우에게서 이마를 떼어 냈다. 그의 시선은 붉게 충혈되어 아래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그가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미쳤어, 서재희. 어쩌려고. 저러면 안 돼. 돌아올 수 없단 말이야. 영영 어디로 가 버리려고. 선이 있어. 넘으면 안 되는 선이. 여태 잘 견뎠잖아. 조금만 있으면 졸업인데. 1년도 채 안 남았는데. 잘 참았으면서. 왜. 어쩌려고. 이런 식으로 복수하면 서재희 본인이 다치잖아. 깨끗하게 죽지도 못해. 사해로 추방될 거라고.”

정윤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눈을 꾹 감았다. 눈가로 물기가 비어져 나왔다. 흐르지는 않았다. 그가 이를 악물었다. 유은우는 두 손으로 정윤환의 뺨을 감싸 쥐고 고개를 들게 했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대로 정윤환의 뺨을 가볍게 두어 번 쳤다. 부러 냉담하게 말했다.

“정신 차려. 나 대장 눈 피해서 재희 선배 지시받아 움직일 생각만으로도 지금 긴장돼 죽겠거든. 네 위험부담까지 못 져 준다. 빨리 총 쥐든가, 계속 그렇게 정신 오락가락할 거면 대장한테 말하고 여기서 빠져.”

정윤환이 눈을 깜박였다. 눈물로 어른거리던 동공은 금세 초점이 또렷해졌다. 정윤환이 거칠게 유은우를 밀쳤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총성이 울렸다. 입구 쪽이었다. 서로 밀치고 당기며 빠져나가려다 보니 마찰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무리 지어 유은우와 정윤환을 스쳐 지나갔다.

“채널 맞춰야 돼.”

정윤환이 인터컴을 켜려고 했다. 유은우는 그의 손목을 잡아 제지했다. 원하는 대로 그의 손을 확 젖히지는 못했다. 열에 들떴음에도 불구하고 정윤환의 손은 힘이 꽉 들어가 빳빳했다.

“채널 맞출 필요 없어. 너 잘 때 재희 선배 잠깐 보고 왔는데, 인터컴 안 쓸 거래. 박민준한테 도청당할 수 있어서. 대신 차예원이 온디딤으로 통신할 거래. 쌍방은 안 되고, 우리가 일방적으로 지시받는 것만 된대.”

정윤환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가 중얼거렸다.

“차예원이 그런 것까지 할 줄 안다고? 아직 거기까지 진도 나가지도 않았어.”

“이럴 때 써먹으려고 숨겼나 보지.”

“나나 서재희나 재능 다 드러나서 이리저리 이용당하는 거 보고 경각심이라도 들었나 본데. 차예원이 바보도 아니고. 난 못 믿어. 서재희가 진짜 차인호가 좋아서 그쪽으로 붙은 게 아니란 거 차예원도 알 거야. 그런데 통신까지 도맡아 준다고? 중간에 위조라도 안 하면 다행이지. 어쩌다 해 준다고 해도, 차예원 판단에 자기 아버지한테 피해가 가겠다 싶으면 바로 지원이 끊길 거야.”

“차예원이 재희 선배 좋아하니까 괜찮아.”

잠시 침묵이 돌았다. 정윤환은 여전히 손목을 잡힌 채, 유은우를 빤히 보았다. 이윽고 정윤환이 손목을 거칠게 비틀었다. 유은우는 그의 손목을 놔주었다. 정윤환이 낮게 말했다.

“너는 나만 빼고 다 믿는구나, 그렇지?”

유은우는 작게, 그러나 또렷하게 대꾸했다.

“네가 바라던 바 아냐?”

정윤환이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속눈썹이 겹쳐졌다 떨어질 때마다, 붉게 열이 올랐던 시선의 온도가 뚝뚝 떨어졌다. 스크린이 심하게 깜박였다. 정윤환은 한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더니 스크린을 보았다.

“미친 거지, 서재희. 미쳤어. 일을 이렇게 벌여 놓고 어떻게 수습을, 아니…….”

정윤환이 체념하듯 웃었다.

“……수습할 생각이 없는 건가?”

유은우도 정윤환을 따라 그쪽을 보았다. 스크린은 심하게 깜빡이고 흔들렸으나 여전히 임유현을 비추고 있었다. 그 아래 연단에 서재희가 있었다. 그는 아직 총을 뽑지 않았다. 서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막 마주치려는 찰나였다.

스크린이 뚝 꺼졌다. 유일하게 조악하던 조명이 사라진 셈이었다. 보란 듯이 기념탑에 널려 있던 임유현의 시체는 막을 내리듯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손끝까지 돋아난 소름은 사라질 줄 몰랐다. 임유현의 공허한 눈이, 처벌하듯 찢긴 시체의 단면이 뇌리에 사진이라도 찍힌 것처럼 선명했다. 사위가 깜깜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더욱 그랬다.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총성이 울렸다. 유은우는 강풍으로 밀어닥치는 온에 휩쓸려 그만 중심을 잃었다. 평소라면 없을 일이었지만 구두 굽이 너무 높았다. 순간 암흑 속에서 단단하게 끌어 안겼다. 앞이 보이지 않았으나 감각으로 알았다. 정윤환. 유은우는 그를 의지하며 겨우 바로 섰다. 속으로는 구두를 욕했다. 귓가에 숨이 닿았다.

“너 아까 나한테 뭐랬냐? 뭐? 정신 오락가락할 거면 판에서 빠지라고?”

정윤환이 코웃음 치더니 이어 속삭였다.

“너나 정신 차려.”

오른쪽 관자놀이에 차갑고 딱딱한 것이 닿았다. 총구.

탕!

유은우는 숨을 들이켰다. 잠깐 어지러웠다. 숨을 깊이 내쉬었다. 새까맣던 시야가 희멀겋게 떠올랐다. 언제 임유현의 시체를 보고 충격을 받았냐는 듯, 코앞에서 여유 만만하게 웃고 있는 정윤환의 얼굴이, 눈을 깜박일 때마다 점차 선명해졌다.

“이제 좀 보이냐? 신체 강화까지 같이 걸어 놨으니까, 절대 죽지 마. 나 혼자 널 두고 그렇게 지랄을 떨었는데, 네가 어디서 허접한 타격이나 맞고 즉사하면, 씨발, 내가 억울해서 살겠냐? 꼭 살아서 보자.”

정윤환은 그리 말하고 유은우의 관자놀이에서 총을 거두어 갔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 멀어지더니 출입구 쪽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캉, 하고 총구가 튀자마자, 출입구가 반파되었다. 각도가 절묘하여 통과하고 있던 사람들은 다치지 않았으나, 다들 이프의 불빛이나 기초 설계로 빚어낸 희미한 빛 덩이에 의지하던 터라 갑작스러운 폭발에 크게 놀라 소리를 지르고 엎드렸다. 그러나 정윤환 덕분에 입구가 크게 늘어나, 곧 사람들은 깨끗하게 빠져나갔다. 정윤환은 뛰어가 이선규와 합류했다. 이선규는 총을 쥔 채 손을 아래로 하고 있었는데, 그쪽 어깨가 덜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총을 쥐지 않은 손으로는 떨리는 어깨를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방아쇠는 한껏 당기기 직전이었고, 총구 끝에 새파란 빛이 번득였다. 수십 개의 갈고리 모양 빛줄기가 위협적으로 휙휙 돌아가고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것을 손끝에 매달고, 이선규는 뒤늦게 도착한 정윤환을 향해 타박하듯 몇 마디 내뱉었다.

유은우는 깊게 심호흡했다. 머릿속에서 임유현의 시체는 지워 버리려 노력했다. 대신, 홀의 상황과 온의 흐름을 함께 읽으려 노력했다. 등 뒤에서 쐐액, 하고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기민하게 피했다. 발로 바닥을 북 긁으며 멈춰 서자 대리석이 우두둑 부서지며 일어섰다. 인터컴을 켰다. 기다렸다는 듯 소연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카랑카랑 울렸다.

― ……유은우, 정윤환! 한 번만 더 인터컴 끄면 명령 불복종으로 알겠어.

“미안해.”

― 바로 메시지 확인하고 상황 파악해. 이선규, 윤환이랑 합류했으면 움직이고, 은우는 당장 위층으로 올라가. 대장 거기서 대기 중이야.

― 왜 뜸 들여? 바로 안 하고.

정윤환의 시큰둥한 물음에 김서혁의 대답이 즉각 떨어졌다.

― 지금 시작하면 불필요한 희생이 많아져. 어차피 붙을 사람들은 남아 있을 거다. 조금 더 기다린다.

이프를 켰다. 밀려 있던 메시지가 급류처럼 쏟아졌다. 도시연합 본관의 배치도와 서포터 순서가 차례로 떠올랐다. 전부 아래로 내려놓고 타깃 리스트만 남겼다. 리스트의 아래부터 위로 쭉 올라갔다.

조승일, 박경훈, 문화영, 류정아, 안재호……, 서재희, 차예원, 차인호.

헷갈리지 말고 잘 보고 죽이라고 친절하게 사진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미리 만들어 온 게 분명한, 정성 들인 리스트였다. 이를 악물고 다시 배치도를 당겨 왔다. 김서혁을 찾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홀 중앙에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배치도엔 김서혁 꼬리표를 단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위층으로 올라갔다더니. 다시 한번 꼼꼼히 훑었다. 서재희도 없었다. 배치도를 2층으로 조작하려다가 문득 손이 멎었다.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차예원. 지척이었다.

위험하게 여기서 혼자 뭐 하는 거야? 차인호도 없이.

유은우는 고개를 들어 차예원의 실제 위치를 확인했다. 그녀는 잔뜩 긴장한 채, 경호원들에게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무언가 필사적으로 집중하고 있었다. 차예원의 매끄러운 드레스 끝에서 어두운 안개가 슬금슬금 맴돌고 있었다. 유은우는 자신의 발을 보았다. 구두 끝으로 검은 연기가 아스라하게 떠돌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옅어 마치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때였다. 엄청나게 큰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 정윤환.

유은우는 저도 모르게 귀를 감싸며 숨을 헉 들이켰다. 서재희의 목소리. 어찌나 큰지, 두통이 찡하게 왔다. 흘끗 정윤환을 보니, 그도 두 손으로 귀를 감싸 쥐고 죽을상을 짓고 있었다. 옆에서 이선규가 묘하게 정윤환을 보고 있었다. 정윤환이 이선규를 향해 고개를 젓는 모습이 보였다.

― 너희 정예군, 배치도 돌리고 있지? 그거 다 끊어 줘. 너 이선규하고 붙었지? 꾸준히 실수해. 이선규 입에서 그만 들어가 쉬라는 말 나올 때까지. 최대한 빨리 이선규하고 떨어져서 지하 4층으로 내려가. 내려가는 길에, 13위원 누구누군지 알지? 백정명은 지금 징계 중이니 권한도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나머지 열둘, 지문 다 떠. 법률 시스템실 가서 중립지대 개정하려면 지문 필요하니까. 시스템에 접속해서 중립지대로 검색해. 지금이 11시니까, 12시 정각까지.

서재희의 목소리는 점차 정돈되었다. 음량이 줄어들고 잡음도 잡혔다.

― 그리고 은우. 은우는 김서혁하고 움직이겠지. 일단 의심 사지 말고 하라는 대로 해. 아마 김서혁은 네 손으로 직접 나를 처리하도록 유도할 거고, 그 과정에서 마주치는 적의 일부를 살해할 거야. 그 사람 입장에선 최선이니, 절대 흔들리는 모습 보이지 말고 그의 말에 따라. 그 대신 시간을 끌어. 정윤환이 12시 정각까지 법을 바꿔 놔야 하니까 그때까지 김서혁이 지하로 내려가게 두면 안 돼. 그 사람은 아마 은우 네가 온디딤을 얼마나 잘 다룰 수 있는지 보기 위해서 네게 많은 것을 위임할 거야. 다양하게 시도하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 줘. 그리고 상대를 죽일 때, 지문은 남겨 줘. 혹시 그 사람이 13위원이고 손가락이 훼손되면 정윤환이 그 사람들 안구를 뽑아야 하니까 번거로워져.

누군가 빛의 구를 쏘아 올렸다. 설계가 서툴러 표면이 울퉁불퉁했으나 충분히 환했다. 소연주가 총을 들더니 그것을 쏘아 맞혔다. 검은 그림자가 날다람쥐처럼 빛의 구를 감싸 삼켜 버렸다. 다시 암흑. 잠깐의 빛이 지나가고 나자 사위는 더욱 짙게 느껴졌다.

― 내가 차인호에게 섣불리 움직이지 말자고 했어. 희생을 줄이고 싶은 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리할 만큼 손 놓고 싶지도 않아. 김서혁 스타일로 봤을 때, 사람들이 본관을 빠져나가 최소한 기념탑은 지날 즈음에야 움직일 거야. 그런 쪽엔 보수적이니까. 나는 그보다 빨리 움직이겠어. 김서혁 쪽 사람들 지금 위층으로 올라가는 중이야. 혼란을 틈타서 위원회를 새로 짜려는 모양인데, 지금부터 내가 제거 들어갈게. 명단 수정되면 다시 파악해야 하고 일이 복잡해지니까. 나는 차인호의 세력과 차예원의 온디딤을 빌리는 대가로 위원 열두 명을 모두 제거하고 새로 판을 짜 주기로 했어.

유은우는 직감으로 서 있던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쐐액, 공기를 찢으며 날카로운 무언가가 간발의 차이로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 착지하자, 구두 굽이 부러지며 대리석을 파고들었다. 구두는 벗어 버렸다.

더 이상 조명을 쏘아 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다들 어둠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위협적인 총성이 드문드문 울렸으나 본격적으로 붙지는 않았다. 아직 사람들이 건물 안에 있었다. 그 전에는 싸우지 않는다. 암묵적인 룰이었다. 대신, 그만큼 이를 갈며 준비하고 있었다. 이선규가 빚어낸 빛의 갈고리는 이제 수십 개를 넘어서 100여 개 남짓 돌고 있었다.

― 까만 인터컴을 쓰는 사람들은 건들지 마. 내 사람이야. 그리고 차예원, 넌 전투에서 빠져.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있어. 나서는 순간 넌 타깃이야. 경호원 믿지 마. 그 사람들, 도시연합군을 거쳐 간 엘리트라고 해도, 전투에 감 떨어진 지 오래야. 도시연합은 너무 오랫동안 평화로웠어.

유은우는 벽에 등을 붙였다. 이프에서 타깃 리스트를 다시 끌어올려 보았다. 차예원의 이름 옆에 소연주의 이름이 깜박거렸다. 차인호와 서재희 옆에는 김서혁이 표시되어 있었다. 유은우는 자신의 이름이 붙은 사람을 체크했다.

이금하, 노민영, 김석주, 이성훈……. 그중 노민영이 1층에 있었다.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차예원을 확인했다. 그녀는 서재희의 지시를 듣고 일단 출입구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도시연합군의 도청을 피할 수 있는 탁월한 통신기기였으나, 그녀 자체로 너무 눈에 띄었다. 짙은 푸른색 드레스를 입은 차예원 주위로 진한 녹색 유리 같은 것이 각도에 따라 반사되었다. 난독증으로 어지러워 대체 몇 겹이나 되는지 자세히 살피지는 못했으나 확실히 고급에다 견고해 보이긴 했다. 그러나 소연주가 깨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 그럼 잘해 보자.

콰앙!

사방이 흔들렸다. 위층에서 일어난 폭발로 천장에서 부스러기가 기분 나쁘게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수십 개의 조명이 폭죽처럼 터지며 높이 솟아올랐다.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유은우, 1층 처리하고 올라와.

김서혁의 목소리였다. 유은우는 대답 대신 소연주를 보았다. 그녀는 똑바로 홀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폭이 좁은 드레스를 입고 있음에도 불편한 기색 없이 여유로웠다. 매끄러운 장갑은 벗고 맨손으로 총을 고쳐 쥐고 있었다. 소연주의 시선은 막 홀을 빠져나가는 차예원에게 못 박혀 있었다.

유은우는 오른손을 휘둘렀다. 시계가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시계 부품들이 차가운 색을 뿜으며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톱니바퀴들이 시계판을 중심으로 짐승처럼 날뛰다가 점점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섰다. 세 개의 시계 침이 유은우의 오른쪽을 점령한 시계 방패 위를 대담하게 가로지르자, 쌔액, 하고 서늘한 금속음이 났다.

차예원의 드레스 자락이 막 사라지려는 찰나, 소연주가 총을 들어 겨냥했다. 탕! 총구가 튐과 동시에 새빨간 타격이 공중을 날았다. 상대를 얕보듯 기교도 없고 굳이 숨기려는 수고도 없는 뚜렷한 공격이었다. 소연주의 타격은, 차예원을 둘러싼 경호원에게 닿기도 전에, 유은우의 시계판에 맞고 세차게 튕겨 나갔다. 소연주가 눈썹을 찌푸리면서 이쪽을 보았다. 유은우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 야, 유은우! 뭐 해!

질책은 박민준에게서 날아왔다. 소연주는 말없이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만 보내고 있었다. 유은우는 그 모든 것을 무시하며 오른손을 휘둘렀다. 시계판은 번득이며 날았다. 정교한 각도로 비스듬히 기울더니, 푸르게 펼쳐 놓은 보호 설계를 단번에 부수고, 그 뒤에 서 있던 남자의 가슴을 깨끗하게 갈랐다. 이프에서 노민영의 사망 알림음이 났다. 유은우는 피로 번들거리는 시계판을 거두어들이면서, 소연주의 뒤를 노리고 날아들던 다른 타격 또한 사납게 부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미안. 내 타깃만 노리다가 실수했어.”

이선규가 숨넘어갈 듯 웃는 소리가 들렸다.

― 와, 은우 좀 봐. 미쳤다, 진짜. 너 그냥 조기 졸업하고 다시 군으로 와라.

박민준도 한결 누그러진 기색으로 충고했다.

― 서툰 건 알겠다만 집중해서 제대로 해. 너한테 적응하려면 우리도 시간 좀 걸리겠다. 여태 없던 스타일이라.

그러나 소연주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샅샅이 살피듯 유은우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김서혁이 먼저였다.

― 유은우, 노민영 제거했으면 올라와. 와서 나머지 네가 해 봐.

유은우는 바로 입구 쪽으로 뛰었다. 소연주 또한 같은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출입구를 진즉 벗어나 도주한 차예원을 다시 노리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정윤환이 소연주 쪽으로 자신의 타깃을 패대기치는 바람에 소연주는 주춤 뒤로 물러서느라 한 발짝 늦고 말았다. 그사이 유은우는 잽싸게 홀을 벗어났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유은우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절반쯤 올라간 뒤, 안쪽으로 꺾이는 층계참에 멈춰 섰다. 몸은 기울여 숨겼다. 차예원이 복도를 가로질러 뛰고 있었다. 복도는 홀 출입구로부터 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사각지대가 없어, 건물을 완전히 빠져나가기도 전에 소연주에게 잡혀 수백 번은 죽고도 남을 것 같았다.

이프에서 팟, 하고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들여다보니, 배치도 창이 시꺼멓게 죽어 있었다. 인터컴으로 이선규가 바락 화를 내는 소리가 들렸다.

― 아, 배치도! 이거 누가 깔아 왔어! 터졌잖아!

― 내가 군에 있을 때도 업데이트 안 된 거 깔아 오더니, 여전하네.

정윤환의 가벼운 목소리 뒤로, 박민준이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 아냐, 최신인데……. 외부에서 뚫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 뚫렸는데?

정윤환의 장난스러운 대꾸 뒤로, 2층에서 굉음이 터졌다. 타깃이 살해되었다는 알림음이 몇 번 울리며 이프가 진동했다. 유은우는 시계를 콩알만큼 작게 빚어서 복도를 빠르게 달리게 했다.

홀 쪽에서 새빨간 빛무리가 그물처럼 퍼지며 쭉 뻗어 나왔다. 이어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소연주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지극히 사무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은우는 가까스로 시계를 바닥과 벽의 모서리에 납작하게 붙여 소연주의 설계를 피했다. 그대로 쭉 미끄러뜨려 차예원 옆까지 다가가게 했다.

더 이상 도주만 할 수 없는 상황이라 판단했는지 차예원을 보호하던 경호원의 절반이 멈춰 섰다. 그들은 곧바로 소연주를 향해 사격했다. 소연주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연사했다. 붉은 그물이 상대의 공격에 찢기지도 않고 견고하게 펼쳐지고, 대항하기 위해 멈춰 선 경호원들을 전부 사로잡아 갈기갈기 찢어 내는 동안, 유은우는 시계를 차예원의 바로 옆 벽으로 붙인 후 순간적으로 팽창시켰다.

폭발음을 내며 벽이 산산이 부서졌다. 차예원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녀는 즉각 몸을 일으키더니 이를 악물고 소연주와 똑바로 마주 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검은 그림자가 뱀 수백 마리로 일어섰다. 바닥에서 솟아나 벽을 기어오르고 천장에서 다시 뚝뚝 떨어졌다. 차예원의 손목에 핏기가 비쳤다.

“온디딤을 꽤 다루는구나.”

소연주가 기계적으로 웃으며 이어 말했다.

“그 시간에 총을 훈련하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소연주가 총을 겨누고 연사했다. 총구가 튈 때마다 붉은 그물은 더욱 짙어지며 차예원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검은 뱀들이 필사적으로 앞을 막아섰으나, 소연주의 설계는 작은 알갱이로 부서지며 차예원의 뱀을 피했다가 삽시간에 단단하게 뭉쳐지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경호원들이 펼쳐 놓은 녹색 반사 설계에까지 다가붙어 서너 번 거칠게 부닥치자, 금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소연주가 설계를 강하게 밀어붙일 때, 유은우는 복도 한쪽 벽을 부순 뒤 작게 만들어 대기하고 있던 시계판을 차예원의 허리로 붙여 힘껏 바깥으로 몰아냈다.

차예원이 비명을 지르며 무너진 벽 바깥으로 훅 밀려 나가는 것과, 소연주가 반사 설계를 부수고 남은 경호원들을 한꺼번에 살해하는 것은 동시에 일어났다.

소연주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잔해를 들여다보았다. 당연하게도 차예원의 흔적은 없었다. 곧 소연주가 총을 고쳐 잡고는 부서진 벽 바깥으로 나갔다. 1층이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보나 마나 추적선을 쓰겠지. 유은우는 다급히 나머지 계단을 올랐다. 2층에 오르자마자 피 냄새에 구역질이 났다. 1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온이 사납게 날뛰고 있었다. 사람은 많았으나 모두 죽어 있었다. 유은우는 빠르게 사위를 살폈다.

저만치 김서혁이 서 있었다. 그는 무감한 얼굴로 복도 한가운데 서서 널린 시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유은우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최대한 계단 난간에 붙으며 조심조심 계단을 올랐다. 구두 굽이 부러져서 버리고 온 것이 천운이었다. 맨발은 소리를 죽이기 쉬웠다. 막 3층으로 올라섰을 때였다.

― 유은우, 2층으로 오라고 했어.

김서혁의 지시에, 하마터면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유은우는 소리 죽여 아직 1층이라고 대답하려다가, 보나 마나 김서혁이 바로 아래층에서 들을 거라는 생각에 아예 입을 다물기로 했다.

― 대장, 윤환이 빼겠습니다. 총에 금 갔어요.

유은우는 멈칫 몸을 굳혔다. 이선규의 보고였다. 장난기는 싹 가시고 없었다. 그럴 만했다. 총에 금이 간다는 것은, 동조자가 온을 무리하게 컨트롤하면서 총에 물리적인 부담을 준다는 뜻이었다. 휴식을 취하거나 치료를 받지 않고 같은 총으로 계속해서 온을 다루면 총이 완전히 망가지는 순간 그 충격을 동조자가 전부 흡수할 수밖에 없었다. 온에 잡아먹히는 것, 침식을 의미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정윤환이 금 간 제 총을 버리고 타인의 총을 대신 사용할 수는 없었다. 총은 길들이는 기간이 필요했다. 아무리 정윤환이 설계에 뛰어나다 해도, 죽어 엎어진 적의 총을 대신 주워 쓰다가는 부작용에 시달릴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지금 환자였다.

― 정윤환, 할 수 있겠어?

김서혁의 물음에 정윤환이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 ……할 수 있습니다.

― 빼. 이선규, 다른 것 다 제쳐 두고 정윤환 데리고 나가서 모함에 탑승시켜. 정윤환, 가서 치료받아. 네 총은 지금 그 자리에서 버리고 손대지 마.

― 아닙니다, 저 정말 괜찮습니다. 할 수 있습…….

― 이선규, 당장 애 데리고 가.

― 넵.

유은우는 인터컴을 꺼 버렸다. 기민하게 3층을 살폈다. 복도 끝에서 맹렬한 타격음이 들렸다. 심호흡하고는, 유은우는 앞만 보고 3층 복도를 가로질렀다. 이미 열린 창문턱에 발을 걸치고 바깥으로 훅 뛰어내렸다.

“아악.”

차예원이 비명을 질렀다. 유은우는 바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거대해진 시계판 위에, 유은우는 차예원과 단둘이 바짝 붙은 채 몸을 옹송그렸다. 그대로 빠르게 위로 쭉 올라갔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찔한 높이였으나, 소연주의 추적선이 희게 번득이며 맴도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추적 범위가 넓으나 얕다는 것은, 소연주의 몇 안 되는 약점 중 하나였다.

유은우는 옥상에 시계판을 가까스로 착륙시켰다. 조용히 하라고 거듭 당부하고, 차예원이 여러 번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풀어 주었다. 차예원은 피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으며 황급히 시계판 위에서 내려왔다. 그녀가 숨을 할딱이며 물었다.

“이, 이게 뭐야?”

“제 무기요.”

차예원이 흠칫하더니 시계판을 빤히 보았다.

“이런 것도 가능해? 너 온디딤 다룬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저도 처음 해 봐요. 통신 유지할 수 있겠어요? 재희 선배 지시 들어야 해요. 선배가 필요해요.”

서재희 이름을 듣자마자, 차예원은 엉망으로 찢긴 드레스를 정리하며 똑바로 일어섰다. 여전히 어깨를 떨고 있었으나 목소리는 한결 똑똑해졌다.

“할 수 있어.”

“그럼 저 가 볼게요. 더 멀리 더 안전한 곳에 데려다주고 싶긴 한데, 저도 지금 잠깐 이탈한 거라.”

유은우는 시계판 중앙에 다시금 자리 잡았다. 아까는 워낙 긴박하게 차예원을 데리고 올라오느라 미처 깊게 생각지 못했으나, 30여 층 아래로 도로 내려갈 생각을 하니 등골이 서늘했다. 유은우는 급한 대로 시계판을 꼭 붙잡았다. 손에서 땀이나 자꾸 미끄러졌다. 시계판이 둥실 떠올랐다.

“조심해.”

차예원이 조그맣게 말했다. 유은우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옥상 난간을 넘어가려다가, 다시 차예원을 보았다.

“선배가 부탁했던 거 있죠. 재희 선배 죽지 않게 잡아 달라고 했던 거.”

차예원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유은우가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 같았다. 그건 사실 유은우도 마찬가지였다.

“그거 저 말했어요. 재희 선배한테. 물론 선배 방식은 아니고, 제 방식대로요. 재희 선배가 들을지 안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차예원의 함빡 커진 눈동자가 부담스러워, 유은우는 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소름 돋는 높이에 눈을 질끈 감고 이어 말했다.

“……말해 둬야 할 것 같아서. 오늘 밤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둘 다 죽을지도 모르니까요. 갈게요, 그럼.”

“잠깐만.”

차예원이 다가왔다. 그녀가 왼손 엄지손가락을 손톱 끝으로 조금 문질렀다. 얄팍한 껍질 같은 것이 벗겨졌다. 예고 없는 행동에 유은우는 그만 깜짝 놀랐다. 아래로는 30층 높이가 낭떠러지처럼 깎아지르고, 바로 옆에서는 차예원이 제 엄지손가락 껍질을 벗겨 내고 있었다.

“뭐, 뭐 하는…….”

“손 이리 내.”

차예원이 유은우의 왼손을 잡고 그것을 끼웠다. 얇고 말랑말랑하고 투명했다. 자세히 보니 골무였다. 손끝으로 만져 보니 표면이 오돌토돌했다.

“우리 아빠 지문이야. 우리 아빠는 낙원의 이론 관리자 중 하나야. 나 또한 현 관리자지만, 내가 못 들어가는 곳도 분명 존재해. 왜냐하면 우린 아직 세 명이 다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야. 불완전하지. 하지만 도시연합장 지문이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차예원은 유은우의 손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가 말했다.

“살아서 보자.”

유은우는 인터컴을 켰다. 난간을 넘어 아래로 훅 떨어지는 동안, 눈을 꼭 감았다. 배 속의 내장이 전부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불쾌함 끝에, 간신히 3층에 도착했다. 유은우는 열린 창문으로 동태를 살핀 뒤에, 얼른 창턱을 넘었다.

시계를 줄여 다시 손목에 얹었다. 그저 시계판에 따개비처럼 달라붙어 내려온 것뿐인데, 숨이 턱까지 차올라 호흡이 어려웠다. 유은우는 손을 들어 이마에 솟은 땀을 닦았다.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창에 김서혁이 비춰 보였다.

“흐읍…….”

숨을 들이켜며 황급히 뒤돌았다. 등으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대, 대장.”

김서혁이 물끄러미 유은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2층 복도를 학살해 놓고, 핏방울 하나 튀지 않고 말끔했다.

“2층으로 오라고 했을 텐데.”

“3층, 3층인 줄, 3층인 줄 알았어요.”

“네가 내 지시를 잘못 들은 적이 있었던가?”

“죄, 죄송합니다.”

유은우는 떨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이미 대답이란 대답은 전부 더듬은 직후였다. 차라리 바깥에 한 놈 처리하러 가다가 놓쳤다고 뻔뻔하게 말했으면 좋았을 것을. 이미 다리에 힘이 풀려 창가에 간신히 기댄 상황에서 그런 변명은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았다. 거기다 김서혁이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기에 자꾸만 심장이 뛰었다. 만약에 차예원을 태우고 날아올랐던 것부터 보고 있었다면? 고개를 아래로 하며 시선을 피했다.

“유은우, 네가 아는지 모르겠다만…….”

김서혁이 낮게 속삭였다. 그가 손가락 하나로 유은우의 턱을 들어 올렸다. 어쩔 수 없이 시선이 얽혔다.

“……난 지금 널 굉장히 많이 봐주고 있어.”

“……난 지금 널 굉장히 많이 봐주고 있어.”

정적이 흘렀다.

김서혁은 여전히 손가락 하나로 유은우의 턱 끝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는 힘을 거의 주지 않았다. 스치듯 닿아 있었다. 그러나 유은우는 압박감으로 숨도 쉬지 못했다. 정윤환에게 대놓고 멱살을 잡힐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김서혁의 손끝만으로 시간이 멈추고 공기가 사라졌다.

김서혁의 짙은 눈썹 아래, 회색이 도는 까만 눈동자가 깜빡이지도 않고 뚫어져라 유은우를 응시했다. 유은우는 차츰 눈을 내리깔았다. 옷깃 사이로 흐르는 까만 끈. 수없이 보아 온 휘황한 기장과 배지들을 지나, 재킷 밖으로 살짝 나온 셔츠 소매엔 매 모양의 커프스 버튼이 반짝거렸다. 그 아래 크고 거친 오른손은 총을 잡고 있었다. 총구가 불그스레했다. 그 모든 것이 노련하여, 유은우는 삽시간에 군에 있었던 그때로 되돌아갔다.

학교로 내쫓기며 그토록 배신감을 느꼈던 김서혁인데, 귀소 본능처럼 다시 그에게 기울고 있었다. 자신을 구해 내고, 키워 내고, 버렸다가, 다시 취하려는 사람. 새까만 급류 속에서, 유은우는 한 줄기 빛처럼 서재희의 지시를 떠올렸다.

‘일단 의심 사지 말고 하라는 대로 해. 절대 흔들리는 모습 보이지 말고 그의 말에 따라.’

서재희를 상기하자마자, 비로소 유은우는 김서혁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왔다. 한때 전부였던 사람 앞에서 나부끼던 내면은, 무게를 잡고 제자리로 내려앉았다. 그제야 자신을 통제할 수 있었다. 김서혁에게 억눌려 저도 모르게 군인의 자세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로 충성스러운 군인인 척할 수 있었다.

등줄기를 꼿꼿이 폈다. 숨은 고르게. 식은땀이 날아가며 뒷덜미가 서늘했다. 관성으로 흘려듣고 있던 인터컴의 잡음마저 선명해졌다. 모함의 사출구에 설 때처럼, 서포터들의 설계를 밟을 때처럼, 유은우는 김서혁에게 배운 대로 신경을 재정비했다. 오래도록 김서혁에게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친 터라, 그 감각은 놀랍도록 익숙했다. 마치 학교로 내쫓긴 적 없이, 쭉 군에 머물고 있었던 것처럼.

익히 아는 분위기가 흘러나오자, 유은우의 턱에서 김서혁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갔다. 그가 한 걸음 물러서자, 여백이 피비린내로 서늘했다.

“우린 13층으로 올라간다. 올라가면서 네 타깃 보이면 바로 제거해. 타인의 타깃은 범위에 들어와도 건들지 않는다.”

“네, 대장.”

“네가 온디딤을 사용한다고 해서 다른 동조자들과 동등하거나 혹은 유리한 위치에 선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가장 부족한 점이 뭐지?”

“설계를 쓸 수 없으므로 시야가 한정됩니다. 시야 확보를 위해 계속해서 빠르게 이동해야 하므로 체력 소모가 커 전투를 길게 끌 수 없습니다. 온디딤의 전부를 공격에 쓰지 못하고 일부를 항시 방어로 써야 하니 운용의 폭이 좁고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다수와 동시에 맞붙었을 때 특히 불리합니다. 적은 타격과 설계를 본인 능력에 한해서 얼마든지 겹칠 수 있으나, 전 무기가 물리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으므로 애초에 개수 자체가 제한됩니다.”

“어떤 식으로 장점을 살려야 하지?”

“무조건 일대일 근접전으로 가야 하고 적보다 높은 위치를 선점해야 합니다. 적이 설계를 짤 틈을 주지 않고 밀어붙이면서 신속하게 전투를 끝내야 합니다.”

이프에서 끊임없이 타깃 제거 알람이 울렸다. 아래층과 위층에서 울려 퍼지는 총성. 인터컴으로는 정예군들의 보고가 규칙적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막상 유은우와 김서혁이 있는 3층은 조용했다. 유은우는 김서혁의 너머로, 층계참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작고 반짝이는 무언가를 보았다. 금색 매 모양 배지였다. 유은우는 손바닥을 살짝 펼쳐 보았다. 온의 흐름이 느껴졌다. 거칠게 배지 쪽으로 감기고 있었다.

처음으로 김서혁을 따라 사해로 나갔다가 며칠을 지새우고 돌아온 날 저녁, 유은우는 억지로 식사를 했다. 신선한 채소와 고기의 형태가 온전히 살아 있는, 귀한 일반식이었다. 그러나 유은우는 그것을 절반도 채 먹지 못했다. 사해에서 에너지 팩만 겨우 빨아먹으며 연명했는데도 이상하게 배가 고프지 않았다. 깨작거리는 시늉만 하다가 전부 버리고 도로 구석에 처박힌 유은우를, 김서혁이 손짓으로 불러내 빈 지휘실로 데려갔다. 불이 꺼지고 노을만 기어들어 오는 지휘실에서, 김서혁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유은우는 그가 건네는 영양제를 삼키고, 고약한 맛을 풍기는 시럽도 넘기고, 입가심으로 사탕도 받아먹었다. 그때도 김서혁은 배지를 기준 삼아 누구든 접근치 못하도록 막았었다.

“나는 너와 상성이 좋은 편인가?”

“최선은 아닙니다. 대장은 물리적인 매개체를 이용하는 것이 특기고, 저 또한 물리적인 무기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역량이 최대치까지 발휘되기 어렵습니다.”

“너는 정윤환과 뛰는 것이 가장 맞아. 그럼에도 내가 오늘 널 선택한 이유는?”

“제가 얼마나 온디딤을 잘 다루는지 테스트하기 위함입니다.”

“아니. 네 실력 검증은 진즉 끝났어. 며칠 전 병실에서. 너는 아주 잘 해냈다. 오늘 내가 테스트하려는 것은 그런 게 아니야. 13층으로 간다. 따라와.”

― 은우야.

귓가로 서재희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파고들었다. 예고 없는 부름에, 유은우는 순간적으로 경직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움츠리며 김서혁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김서혁은 막 돌아서려던 자세로 딱 멈춰, 유은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유은우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를 마주 보았다. 김서혁이 미간을 천천히 좁혔다.

― 4층에 까만 인터컴을 착용한 중년 남자가 있어. 그 사람 죽지 않게 지켜 줘. 이따가 내가 신호하면 그쪽으로 정윤환 설계가 하나 밀려들어 갈 거야. 바로 타격 얹어 줘. 총성은 걱정하지 마. 그리고 그 자리는 떠도 좋아.

김서혁이 손을 뻗었다. 유은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하게 버텼으나 과연 잘 해내고 있는지는 자신이 없었다. 김서혁의 손이 유은우의 왼쪽 귀에서 인터컴을 빼 갔다. 김서혁은 그것을 자신의 귀에 꽂고 집중하다가 다시 빼냈다. 그리고 그가 인터컴을 내밀기에 유은우는 그것을 받아 다시 왼쪽 귀에 꽂았다. 서재희와의 통신은 인터컴을 거치지 않는데도, 김서혁은 유은우가 다른 누군가와 통신을 하고 있음을 이미 직감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지금 당장 고문과 동시에 추궁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자꾸만 입 안이 말라붙었다.

― 정윤환, 소연주가 탐색 방지 설계를 깔아서 너희 위치가 안 잡혀. 역으로 경로를 터서 나도 소연주랑 정보 공유하게끔 해 줘. 나 지금 13층 도시연합장실이야. 정문은 안 돼. 거긴 이선규가 돌고 있어. 의회로 들어가서 지하로 내려가. 그럼 본관 지하와 연결될 거야. 의회 들어가기 전 마당에, 도움닫기 설계가 하나 꽂혀 있을 거야. 거기 대기 설계 걸어 주고 가. 방향은 본관 4층 오른쪽 끝. 본관을 마주 보고 오른쪽이야. 대기 설계 계속 유지하면서 지하로 내려가.

그러나 김서혁은 말이 없었다. 그는 따라오라는 듯 턱짓을 하고는 뒤돌아서서 걸었다. 유은우는 재빨리 김서혁을 따라갔다. 힐끗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정윤환이 걸어 준 신체 강화로 맨발은 멀쩡했다. 검은 안개가 발밑 그림자와 섞여 맴돌고 있었다.

― 그리고 내가 신호하면, 대기 설계 바로 시행해. 타격은 설계가 전달될 정도로만 최소로 가해. 그래야 네 서명이 흐려지고 도움닫기 설계 동조자 서명이 1차로 드러나. 시행 타격은 유은우가 할 거야. 대기 설계의 본설계는, 위치 이동으로 잡아 줘. 인원은 한 명. 목적지는 네 좌표로. 보조 설계는 방음으로 잡아. 은우가 진짜 총을 쓰면 김서혁이 의아해할 거야. 총성이 들리지 않게 정교하게 잘 잡아 줘.

김서혁은 성큼성큼 걸으면서 공중을 맴돌고 있는 배지를 낚아챘다. 커튼처럼 너울거리던 온이 확 찢겨 나갔다. 한 겹 가려져 어렴풋하던 총성, 피 냄새, 팽팽한 온이 밀려들었다. 김서혁은 배지를 옷깃에 매달면서 뚜벅뚜벅 계단을 올랐다. 그가 인터컴에 대고 물었다.

“박민준, 도청 걸린 것 있나?”

― 없습니다. 손에 잡히는데 못 푸는 게 아니고, 아예 흔적이 없습니다.

유은우는 걸음을 빨리하여 김서혁 옆으로 붙으며 살짝 그를 훔쳐보았다. 김서혁은 앞만 보고 있었고 표정이 없었다.

막 4층에 다다랐을 때였다. 자색 빛줄기가 소나기처럼 쏟아져 들었다. 유은우는 이를 악물고 김서혁 앞으로 뛰어나갔다. 강하게 발을 디디자 복도 바닥이 우드득 금이 가며 갈라졌다. 그대로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팽창한 시계판이 세차게 돌면서 빛줄기를 모두 튕겨 냈다. 유은우는 중심을 잃고 뒤로 약간 밀렸다. 계단 밑으로 기울었으나, 바로 단단하게 받쳐졌다. 김서혁의 손바닥이 유은우의 등을 지탱하고 있었다. 뒤에서 김서혁이 낮게 말했다.

“걸었다가 다시 튕겨. 방향 없이 반사하지 말고. 적도 활용할 줄 알아야지.”

김서혁이 한 손으로 유은우를 가볍게 밀어냈다. 유은우는 복도의 중앙으로 뛰어들었다. 왼쪽에 둘. 오른쪽에 하나. 그중 이프가 왼쪽의 남자에게 반응했다. 내 타깃. 페이크 총을 뽑아 지체 없이 오른쪽을 연사했다. 날카로운 총성과 함께 총구에서 인공 빛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가짜 공격에 오른쪽의 적이 반사적으로 방어하는 틈을 타서, 시계 침은 왼쪽을 직선으로 날아 타깃의 가슴을 정통으로 꿰뚫었다. 이프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이금하. 유은우에게 지정된 타깃 중 하나의 불이 뚝 꺼졌다.

타당, 하고 오른쪽에서 총성이 울렸다. 유은우는 직감만으로 크게 도약했다. 반대쪽 벽을 밟으며 공격을 피했다. 간발의 차로 유은우가 서 있던 복도 바닥이 카가가각 소리를 내며 거칠고 사납게 긁혀 나갔다. 유은우는 안정적으로 착지하여 벽에 등을 딱 붙인 채 김서혁을 마주 보았다. 그는 총을 쥐고는 있었으나, 팔짱을 낀 채 계단 안쪽에 서서 이 모양을 단지 지켜만 보고 있었다. 군의 훈련장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유은우를 관찰할 때처럼 지극히 제삼자의 태도였다.

유은우는 바로 김서혁에게 신경을 껐다. 양쪽에서 좁혀 오는 적을 주시했다. 아까와 반대 방향을 보고 있으므로, 왼쪽과 오른쪽이 뒤바뀐 셈이었다.

오른쪽. 여자. 은색 인터컴. 딱 달라붙는 제복. 차인호를 호위하던 경호원이었다. 유은우는 힐끗 이프를 보았다. 현재 가장 근접한 적의 이름이 푸르게 깜박거렸다. 적은 양쪽으로 둘인데, 이상하게 오른쪽 하나만 출력되었다. 신해경. 이선규의 타깃이었다. 그녀는 보호 설계를 겹겹이 두른 채 유은우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 까만 시계 침이 날카롭게 빛을 뿜으며 떠 있었다. 신해경은 차마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자신의 눈을 정확히 노리고 있는 유은우의 시계 침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 옆에는 방금 유은우가 살해한 동료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경호원 제복 위로 피가 천천히 번져 붉었다.

유은우는 빠르게 시계판을 펼쳐 신해경과 자신을 가로막았다. 정면으로 붙을 생각은 없었다. 타인의 타깃은 건들지 말라는 김서혁의 지시를 따라야 했다. 벽에서 등을 떼고 대신 시계판을 등진 채 왼쪽을 향해 섰다.

왼쪽. 남자. 중년. 짙은 푸른색이 배제되었으나 그렇다고 도시연합군이라고 보기에도 어려운, 옅은 자색의 고상한 차림새였다. 의원 배지를 달고 있을 법도 한데 공식적인 소속을 추측할 단서가 전혀 없었다. 까만 인터컴. 어딘가 묘하게 낯이 익었다. 한쪽 다리가 이상한 각도로 부러져 있었다. 서 있는 게 용했다. 그 역시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자신의 동공을 정확하게 겨냥하는 시계 침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발아래로 설계가 무너져 패턴이 아무렇게나 흘러내리고 있었다. 유은우는 설계 끝의 서명을 확인했다. 신해경. 그러니까 신해경과 그의 동료가 팀을 먹고 이 남자를 몰아붙이던 차에, 유은우가 뛰어들어 훼방을 놓은 것으로 보였다.

탕! 뒤가 서늘했다. 유은우는 본능적으로 옆으로 피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시계 침만 겨누고 있으면 감히 움직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신해경이 그새 설계를 쏜 모양이었다. 발밑으로 황금색 물결이 번득이며 밀려왔다. 발이 쩍 달라붙고, 곧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타는 듯한 통증이 따라붙었다. 유은우가 숨을 들이켜며 무너지자 남자의 눈을 노리고 있던 시계 침도 흔들렸다. 남자가 이를 악물며 총을 들어 올렸다. 손이 심하게 떨렸다.

탕! 그의 총구가 튀었다. 타격은 빗나갔다. 그러나 꼬리처럼 길게 달라붙은 현란한 설계가 유은우의 시야를 덮쳤다. 현기증. 유은우는 그만 중심을 잃었다. 시계판을 더욱 거대하게 펼치며 그 뒤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 와중에 시계 침을 하나 뽑아내서 남자의 상처 부위를 노렸다. 이번엔 적당히 겁만 주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시계 침을 세 뼘 정도로 부풀려, 남자의 상처에 반쯤 꽂아 넣었다.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서재희는 남자를 죽이지 말라고 했지, 공격하지 말라고는 안 했으니까. 유은우는 남자의 다리에서 시계 침을 뽑아내고, 이번엔 그의 손등을 강하게 내리쳤다. 그가 총을 놓쳤다. 시계 침으로 총을 밀어서 저 멀리 치워 버렸다. 남자가 쓰러져서 웅크린 채 신음했다.

유은우는 치미는 욕지기를 참으면서 시계 톱니바퀴로 다리에 달라붙은 신해경의 설계를 잘라냈다. 발목부터 정강이까지 감겼던 패턴 그대로 새빨갛게 부어올라 핏기가 어른거렸다. 유은우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상처를 꼭 붙잡았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고통이 극렬했다. 꼭 악문 입술이 터져 쌉쌀했다. 분이 치밀었다.

김서혁이 다른 타깃은 건들지 말라는 지시만 안 했어도, 단번에 신해경을 끝내 놓고 남자와 일대일로 맞설 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 이렇게 꼴사납게 뒤에서 당하지도 않았겠지…….

캉! 총성에 유은우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김서혁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신해경이 비틀거렸다.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신해경을 견고하게 감싸고 있던 푸른 보호 설계 위로 우드득 금이 가더니 와장창 깨졌다. 신해경은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등을 뚫고 작은 핏덩이가 톡 뽑혀 나와서 잠깐 공중에 머물렀다. 그리고 팽그르르 세차게 돌면서 피를 떨어냈다. 회전을 멈추자 매끈한 표면이 드러났다. 갈색 낙엽 모양 배지는 호선을 그리며 김서혁에게 돌아갔다. 김서혁은 그것을 낚아채어 다시 옷깃에 달았다. 마치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다가 배지가 떨어져 다시 다는 듯 그저 무감했다.

김서혁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너 지금 정신 빼놓고 있지.”

유은우는 고개를 숙였다. 발목을 꽉 움켜쥔 손마디 사이로 피가 비쳤다.

“이렇게까지 적에게 등을 보일 필요가 있나? 한쪽으로 몰아넣고 한꺼번에 발을 묶어도 모자랄 판에 적을 양쪽에 벌려 두고 대체 뭘 살피는 거지? 나는 네게 지정된 타깃만 처리하고 13층으로 올라가라고 했지, 마주치는 사람마다 적인지 아군인지 판단하라고 하진 않았다. 네가 내 지시를 제대로 들었다면, 타깃을 죽이고 방어에만 주력하면서 바로 다음 층으로 갔어야 했어. 그런데 여기 머문 이유가 뭐지?”

툭, 바닥으로 무언가 떨어졌다. 호흡기였다. 회복제는 이미 끼워져 있었다. 유은우는 그것을 주워 깊이 빨아들였다. 통증에 손이 덜덜 떨렸으나 몇 모금 넘기자마자 머리가 몽롱해지면서 감각이 무뎌졌다. 갈라졌던 상처에서는 더 이상 피가 배어 나오지 않았다. 짙게 말라붙었다.

― 정윤환, 지금. 설계 쏴.

유은우는 빈 약물 케이스를 빼서 던져 버렸다. 호흡기만 재킷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고개를 들어 김서혁을 보았다. 그는 호흡기만 던져 주고 유은우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서늘한 눈으로, 다리를 부여잡고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는 몸을 둥글게 말고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부러진 데다 유은우의 공격까지 받아 엉망이 된 다리를 꽉 붙잡은 채였다. 찢긴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기시감. 유은우는 그의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분명 어디서…….

“오랜만입니다, 백정명 전 의원님.”

김서혁의 말에, 유은우는 그만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제야 남자의 얼굴에 백일서가 겹쳐 보였다. 유은우는 벽을 짚고 일어났다. 옆을 드리운 시계가 덜덜 진동했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사해에서 뵙게 될 거라 여기고 굉장히 유감이었습니다만, 여기서 이렇게 마주치고 보니 차라리 사해가 나았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 은우, 확인하고 바로 타격 얹어.

유은우는 흘깃 창을 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의회에 주저앉으시고 입만 바쁘시기에 실력은 녹슬었을 거라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대단하십니다. 실은 퍽 놀랐습니다. 아무리 숨이 껄떡껄떡 넘어가는 나이라 해도 그 임유현을 죽이긴 쉽지 않았을 텐데. 시체의 단면을 보니 피가 극적으로 천천히 흐르도록 마감까지 해 놓으셨더군요. 역시 여전하시네요. 하나…….”

김서혁이 단조롭게 말을 이었다.

“……새파랗게 어려서 제 머리만 믿고 피아 구분도 못 하는 그런 놈의 수족이 되시다니요.”

백정명이 일그러진 얼굴로 눈을 떴다. 핏발이 서 붉었다. 그가 끓는 소리로 웃었다.

“김서혁 자네 서재희를 너무 얕보는 것 아닌가? 임유현을 내가 죽였을 것 같나? 아니야. 난 마무리만 했어. 전처리는 전부 서재희가 했지. 내가 도착했을 때 임유현은 이미 반쯤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어. 그 상황에서는 기초학교 부진아라도 임유현의 목숨을 끊을 수 있었을 거야. 사실 서재희는 내게 아주 큰 은혜를 베푼 셈이지. 서재희야말로 수많은 밤을 임유현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상상을 하며 잠들었을 테니까. 나는 서재희의 수족으로 일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빚을 졌다. 임유현을 찢어발길 그 귀한 기회를 내게 기꺼이 양보했으니.”

백정명의 시선이 점차 또렷해졌다. 그는 전신을 심하게 떨고 있었지만, 분노로 활활 타올라 누구보다도 강인해 보였다. 똑바로 마주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김서혁 네놈도 한때 후보자였지. 네 추천서에 서명했던 내 손을 잘라 버리고 싶어. 너도 내 아들의 제거에 동의했겠지?”

“아닙니다.”

김서혁이 건조하게 이어 말했다.

“임유현이 교장으로 부임하고 제가 총사령관이 되면서, 임유현은 교장의 모든 권한을 저와 나누기 꺼렸습니다. 도시연합 중앙학교장 자리는 도시 내 동조자의 전체 인사권을 쥐고 있는 거나 다름없지요. 아직 채 완성되지 않은 어린것들의 정보를 분석하고, 잘라 낼 것인지 키워 낼 것인지 결정하니까요. 아무리 시스템의 기준이 딱딱 떨어진다 하여도 온갖 변수가 나오고, 그에 따른 판단은 교장의 융통성에 좌우됩니다. 온갖 인사들이 자녀의 생존을 위해 임유현에게 빌붙었겠지만, 저와는 관계없습니다. 그러나 권한이 없어 책임 또한 없다고 변명하는 건 아닙니다. 이제 막 임유현과 손을 잡아 그 권한도 일부 받기로 약조했거든요. 물론 당신이 그를 죽여 버려 여의치 않게 되었지만.”

백정명의 시선이 김서혁에게서 떨어져 유은우에게 닿았다. 아까까지는 별생각이 없었으나, 백일서의 아버지임을 알고 나니 그 시선은 흡사 송곳 같았다.

“후보가 될 생각에 꿈에 부풀어 있겠지? 그 자리는 독이 든 술과도 같아. 한번 마시면 취해서 헤어 나올 수도 없고 끝은 죽음뿐이야. 후보자로 살다가 죽으면, 네 무덤은 죄 없는 자들의 뼈로 덮이게 될 거다. 후보로 언급될 정도니 너도 당연히 낙원의 이론에 접근했겠지?”

유은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김서혁은 백정명을 차갑게 바라보고 있을 뿐, 그가 쏟아 내는 말을 제지하지 않았다.

“내 아들이 조금만 더 동조자로서 재능이 있었다면, 조금만 더 낙원의 이론에 가까이 갔더라면 그 자리엔 내 아들이 앉았겠지. 그 경계선을 넘지 못하는 어정쩡한 재능과 호기심. 차라리 비동조자로 태어났더라면…….”

백정명이 말끝에 이를 악물었다. 그의 다리에선 피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그때 백일서가 죽은 날에도, 그의 피가 붉게 녹은 유리처럼 매끄럽게 문틈으로 밀려들어 왔었다. 유은우는 가슴이 꽉 눌려지듯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백정명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홀린 듯이 그의 말을 들었다.

“후보자가 되는 것과 F등급을 받아 제거되는 것은 한 끗 차이야. 지금 네 옆에 있는 김서혁. 내가 죽인 임유현. 그리고 서재희가 장악한 차인호. 나. 그밖에 낙원의 이론 실체를 정확하게 알고도 지지하는 자들. 전부 역대 낙원의 이론 후보들이다.”

김서혁은 무감하게 백정명을 보고 있었다. 유은우는 김서혁의 기색을 살피는 척하며 창을 보았다. 푸르스름한 설계가 얇은 레이스처럼 창틀 위에 나붓이 얹혀 하늘거렸다. 끝에 서명이 휘갈겨져 있었다. 이성훈.

“재학 당시 우리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학교에서 일어나는 실종이나 퇴학 따위를 캐내면서 예언에 접근했어. 끔찍한 시스템이라 여겼고, 그 누구보다 개혁에 대한 의지가 있었다. 낙원의 이론이 말하는 세 사람 중 하나가 될 자질이 있었던 거지. 하지만 결국 어떻게 됐지? 전부 후보로 주저앉는 데에 그쳤어. 그리고 그리 치를 떨던 낙원의 이론 일부가 되었지.”

백정명이 쇳소리로 웃었다.

“이렇게 효과적인 시스템이 있을 수가 없어. 낙원의 이론이라고 멍청한 시민만을 원하는 것은 아니야. 오랜 시간 축적된 방대한 데이터에 의하면, 사회를 바꾸는 사람들은 특유의 행동 패턴이 있다. 낙원의 이론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회를 전복시키겠다는 의지를 가질 만큼 특출하고 예민한 인재를 가려내서 수많은 실패에 길들여 기득권의 정점에 올려놓는 거지. 그 외에 애매한 사람은 쳐 내고 무지한 것들만 남겨서, 중간을 끊어 버리고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간격을 유지하는 것.”

‘그러니 도시를 유지하고 싶다면, 셋의 혀에 꿀을 발라 길들이고, 혹은 날개 꺾고 고립시켜, 영원히 후보로 머물게 하라.’

유은우는 긴장으로 땀이 서린 손을 쥐었다 폈다 여러 번 풀었다. 백정명은 눈을 감았다. 형형하던 눈빛이 감기자, 그가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리고 있다는 것이 재차 실감 났다. 숨이 가르랑가르랑 끓었다. 김서혁은 여전히 말없이 백정명을 보고만 있었다. 유은우는 김서혁의 뒤쪽으로 돌아가 창가로 붙었다. 거대하게 부풀려진 시계를 비스듬히 기울어 시선을 차단한 뒤에, 양 허벅지에 꽂힌 진짜 총과 페이크 총의 위치를 바꾸었다.

김서혁이 조용히 말했다.

“서재희가 저희와 다를 게 뭡니까. 낙원의 이론에 의심을 품고 고민하던 자가 비단 서재희만은 아닙니다. 저나 당신 또한 재학 시절에 이미 성장통처럼 같은 과정을 겪었습니다. 저희 때도, 그리고 당신 때도 크고 작은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우리가 어떤 대안을 가지고 행동한 건 아닙니다. 저는 다시 돌아간다면 절대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겁니다. 수많은 동기와 아끼던 선후배를 잃었습니다. 단순한 발악으로 무엇이 바뀝니까? 그의 소망대로 낙원의 이론이 삽시간에 무너진다고 칩시다. 그 이후의 혼란은 누가 책임집니까.”

유은우는 진짜 총을 뽑았다. 백정명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가 턱을 꽉 악물었다.

“아들이 제거되고 나니, 여태 그리 효율적이라 믿으시던 낙원의 이론에 반감이 생기신 것은 이해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어린아이 치기로 반항하는 장난질에 참여하시다니요. 당신과 차인호가 당장의 안위만 생각하고 서재희의 손을 빌리니 이렇게 일이 커지는 것 아닙니까. 학생 시절에 설익은 정의감으로 낙원의 이론에 대해 반발하고 좌절하는 과정은 늘 있었으나 언제부터 이렇게 스케일이 컸습니까? 우리는 적어도 사해에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서재희는 제1도시 한복판에서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 아들이 죽은 것만 억울하겠지만, 오늘 이 전투에 휘말려 죽은 자들도 희생자입니다. 훈수 두실 자격 없으십니다.”

유은우는 살며시 총구를 창턱의 설계에 가져다 댔다. 김서혁이 단호하게 이어 말했다.

“낙원의 이론은 결백합니다.”

“사람을 줄 세우고 골라내는 작업이 정당하다고? 자네가 그렇게 아끼는 유은우는 지금 F등급이야! 진즉 제거하고도 남았을 애를 일부러 살리려고 전리품으로 등록시켜 놓고, 시스템의 눈을 피해 자기 사람만 편법으로 빼놓고, 지금 내 아들은 잘 죽었다 이건가?”

백정명이 소리를 지르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안색이 희게 질려 납빛이었다. 유은우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가, 백정명이, 그리고 김서혁까지 갑자기 이쪽을 보는 바람에 얼른 창가에 기대는 척했다. 김서혁이 유은우에게 이리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유은우는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유지한 거리가 무색하게도, 김서혁이 훌쩍 손을 뻗어 유은우의 팔을 잡았다. 그는 능숙하게 유은우를 잡아당겨 제 뒤로 감추었다.

“낙원의 이론은 죄가 없습니다. 다루는 인간들이 문제지요. 늘 비슷비슷한 사람들. 고만고만한 타협. 서재희라고 다르겠습니까? 그 애는 사회가 어떻게 바뀌든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임유현에게 복수하고 사회에 분풀이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아들을 잃은 슬픔에 앞뒤 판단이 흐려져 그에 동조했지요. 당신이 힘을 보태었다고 서재희가 대단해지는 거 아닙니다.”

“서재희는 달라. 자네는 서재희를 단지 똑똑한 인재일 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지. 자네도 잘 알지 않은가? 사실 재능 자체가 뭐가 중요한가? 재능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지. 서재희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치열해. 분신자살하는 데 재능을 쓸 각오를 하고 있으니. 상대하려면 골머리 좀 썩게 될 거야.”

“글쎄요. 저야 워낙 대등하게 붙어 본 적수가 없어서 맨몸으로 부딪혀 오는 게 신선하긴 합니다.”

“오만하긴. 서재희는 예언에서 말하는 그 하나야. 난 확신해.”

유은우는 김서혁의 뒤에서 살짝 떨어져 나왔다. 창가로 막 걸음을 떼려 할 때였다. 김서혁이 손을 뻗어 유은우의 팔목을 강하게 잡았다. 유은우는 움찔해서 창가를 보았다. 타인의 대기 설계를 타고 날아온 정윤환의 설계는 여전히 선명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설계가 저리 오래도록 버티는 건 유은우도 살면서 처음 보았다. 게다가 정윤환은 지금 아예 다른 건물, 그것도 지하로 내려가고 있을 터였다. 그토록 먼 거리에서 이리 오래 유지한다니 경악스러웠다. 그러니 지금 바로 응집된 온이 풀어져 설계가 무효화된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유은우는 손목을 꽉 틀어쥐고 있는 김서혁의 손을 보았다. 도저히 그의 얼굴을 대놓고 올려다볼 자신이 없어 다시 창문을 보았다. 유리창에 김서혁이 비춰 보였다. 그는 유은우를 보고 있었다.

손끝까지 피가 식었다. 유은우는 애써 고개를 돌려 백정명을 보는 척했다.

“김서혁 자네도 뭔가 원하는 게 있으니 지금 서재희와 정면으로 붙는 것 아닌가. 정말 자네가 서재희를 하룻강아지로 보고 있다면 직접 나서지도 않았을 테지. 자네야말로 무슨 꿍꿍이지? 죽을 때 죽더라도 자네 그 시커먼 속은 보고 가야겠어.”

유은우는 백정명을 보고 있었으나, 왼쪽 뺨으로 달라붙는 김서혁의 시선을 온전히 느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답니다. 의원들은 말이 너무 많습니다. 도시연합장 임기도 너무 짧습니다. 민중이 우매하니 차인호 같은 사람을 뽑아 도시연합장 자리에 앉혀 놓고, 차인호는 재선을 노리며 당장 시민들의 목구멍에 들어갈 단기적인 정책이나 밀고 있지요. 죽어 가는 용을 대체할, 시민들에겐 숨겨야 하나 실로 절실한 장기 프로젝트는 예산조차 확보가 어렵습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시민이 각자 한 표씩 행사한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훌륭한 지도자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객관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낙원의 이론.”

유은우는 눈을 들어 김서혁을 보았다. 그는 유은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은우는 그제야, 김서혁이 여태 입 밖으로 내놓은 말들이, 지금 당장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백정명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가 후보로 밀고 있는 유은우 자신에게 하는 말임을 깨달았다.

“탁월한 지도자가 사심 없이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임기의 제한 없이 낙원의 이론을 기반으로 사회를 유지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 연합장이 표심에 휘둘리지 않으면 의원들 눈치 볼 일도 없을 것이고, 낙원의 이론이 기득권 멋대로 쓰이지도 않을 겁니다. 당장 표심을 얻으려고 뿌려 대던 예산으로 기반 사업을 다져서 더 많은 것을 되돌려 받을 수도 있겠죠.”

“그건 독재야.”

“정말로 사회를 위하는 자가 독재한다면, 우매한 민주주의보다 효과적입니다.”

“지금 그 지도자를 자네 본인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저를 비롯해 몇으로 구성되겠지요. 그게 뭐가 어렵습니까.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객관적인 자료가 있지 않습니까. 상황을 설정하고 낙원의 이론 시스템만 돌리면 몇 초 만에 명단이 뽑히는데.”

김서혁이 갑자기 발을 내디뎠다. 유은우는 손목을 잡힌 채 끌려갔다. 김서혁은 창가에 서더니, 총을 들어 설계의 서명 부분을 걷어 올렸다. 낯선 이성훈의 서명이 벗겨지고 그 아래 희미한 서명의 흔적이 있었으나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김서혁은 서명을 유심히 보지 않았다. 그는 총을 들어 바로 갈겼다. 푸른 설계는 삽시간에 깨져 바람에 날아갔다. 강하게 뭉쳐 있던 온이 급작스레 흩어지며 살갗을 따갑게 스쳤다.

“서명 볼 것도 없다. 여긴 4층이고, 이 정도 설계를 유지할 만한 사람은 하나뿐이지.”

그러더니 김서혁이 인터컴에 대고 물었다.

“이선규, 정윤환 어디 있어.”

― 모함까지 데려다주고 왔습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정윤환 인터컴은.”

― 제가 회수했습니다.

“박민준, 배치도 복구 불가한가?”

― 네. 그냥 뚫린 정도가 아니고 기본 틀을 완전히 부숴 놨습니다.

“도청은?”

― 도청은 여전히 잡히는 것 없습니다.

“서재희는 내 타깃에서 제외하겠다. 누구든 먼저 발견하는 즉시 죽일 것. 꼼꼼하게 확인 사살까지 하고 즉시 보고한다. 그리고 이선규, 정윤환한테 추적선 걸어서 찾아내.”

― ……네? 윤환이 말입니까?

김서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백정명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인터컴에서 이선규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 대장, 윤환이 상대로 추적선 안 걸립니다. 여덟 도시 다 통틀어도 윤환이한테 추적선 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시잖습니까.

“일단 해. 총에 금까지 간 상태면 먹힐 수도 있어. 찾아서 총 압수하고 모함 치료실 인큐베이터에 집어넣어. 못 나오게 잠금하고 보고해.”

― ……네.

이프가 반짝이며 창이 떴다가 사라지더니 다시 떴다. 서재희 이름이 굵은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타깃 리스트 가장 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차인호나 차예원보다 위였다. 서재희 옆에 박혀 있던 김서혁 이름은 사라져 빈칸이었다.

백정명이 웃었다. 목소리가 긁혀 나왔다. 그가 김서혁을 향해 말했다.

“자네, 오늘은 날 이겼지만, 훗날엔 서재희에게 지게 될 거야. 분명히. 예언처럼. 그동안 도시는 건재하나, 영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김서혁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가 튀어 올랐다. 새하얀 빛이 백정명의 가슴을 정확히 노리며 날았다. 그와 동시에 유은우는 김서혁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앞으로 뛰어나가며 오른손을 움직였다. 김서혁의 타격이 유은우의 시계판과 부딪히며 끼기긱 거칠게 긁히고 날아가 천장에 부딪히고 다시 아래로 내리 떨어졌다. 유은우는 시계 침으로 그것을 단번에 부수어 놓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백정명은 멍하니 유은우를 보고 있었다. 김서혁이 겨누었던 총을 천천히 내리며 옅게 숨을 뱉었다. 놀라긴 유은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생각하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김서혁의 타격을 대놓고 막은 것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깜깜하기만 했다. 서재희는 백정명을 살리라고 했다. 그러나 정윤환의 설계가 파괴된 지금 김서혁의 눈을 피해 백정명을 빼돌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김서혁이 백정명을 죽이도록 놔둘 수도 없었다. 백일서의 아버지라는 것을 몰랐으면 몰라도, 이미 알게 된 상황에서 도저히 그것만은 두고 볼 수 없었다. 이유는 정확히 말할 수 없었으나, 그 어떤 시답잖은 변명을 갖다 붙여서라도 백정명의 죽음을 방관할 수는 없었다. 그래야만 했다.

유은우는 빠르게 백정명을 훑었다. 어딜 어떻게 부축해야 가장 쉽게 들어 올릴 수 있을 것인가. 다친 다리에 최대한 손을 대지 않으려면 어디를 얼마나 잡아당겨야 하는가. 아까 복도 끝으로 날려 버린 백정명의 총은 어떻게 챙길 방법이 없겠는가. 크게 동선을 그려 보았다.

김서혁이 입을 열었다.

“내가 아까 분명히 말했지.”

유은우가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그런 목소리였다.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김서혁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많이 봐주고 있다고.”

김서혁은 유은우도 백정명도 아닌 허공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낯이 굳어 딱딱했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부디 내 손으로 널 처리하는 일은 없길 바란다.”

유은우는 걸어 나갔다. 백정명을 보호하듯 등지고 서서, 김서혁을 똑바로 마주했다.

“나는 여태 단 한 번도, 대장한테 나 봐 달라고 한 적 없어.”

김서혁이 손을 들어 이마를 문질렀다. 단단한 시선이 유은우를 향했다.

“저녁 먹은 것 다 게워 내면서도 설계 공부에 매달렸어. 서포터들에게 짐이 되기 싫어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달릴 수 있도록 밤새도록 훈련실에 머물렀어. 혹여나 대장이 나 때문에 진급을 놓치지는 않을까. 동료들에게 폐가 되지는 않을까. 조금이라도 군에 도움이 되고 싶어서. 대장이 날 인간으로 봐 주니 사실은 시민권이 그리 절실한 것도 아니었어. 그런 내 마음을 알아주고 인정해 주길 바란 것이지, 내 선택에 대해 눈감아 주길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나는…….”

유은우는 또박또박 말하려 애썼다. 그러나 목소리는 자꾸만 떨려 나왔다.

“……우매한 민주주의라는 말에 동의 못 해. 낙원의 이론이라는 시스템을 꼭꼭 숨겨 두고 온갖 정보는 감추면서 시민들을 어리석다고 말하는 건 모순이야. 한정된 정보에, 조작된 언론에, 숨겨진 시스템까지. 이런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올바른 판단을 해. 시민들이 우매한 것이 아니라, 정부가 우매한 시민을 원하고 있잖아.”

김서혁은 총을 든 손을 움직였다. 유은우는 저도 모르게 몸을 바짝 굳혔다. 그러나 김서혁은 총을 홀스터에 꽂고 팔짱을 꼈다.

“낙원의 이론은 공개되는 순간 그 힘을 잃어버려. 은폐되어야 힘을 발휘하는 시스템이 까발려져 만인에게 부정되면, 미처 걸러 내지 못한 자질 나쁜 동조자들이 그 어떤 안전망도 없이 나머지를 찍어 누르게 될 거다. 왜 동조자들이 심리안정술을 쓰는지 잘 생각해. 온을 처음 다루기 시작하는 기초학교 1학년 때 왜 그렇게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지.”

“대장이야말로 낙원의 이론에 대해 신뢰하는 것 맞아? 그 자질 나쁜 동조자에 나도 들어가는 거 아니었어?”

“시스템은 완벽하지 않아. 그러니 후보들과 13위원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고. 다른 이들은 그 틈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지만 나는 널 살리는 데에 썼다. 내가 보는 너는 F등급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학교로 보내서 증명하고 싶었어. 낙원의 이론 후보감이 부모의 죄 때문에 F등급으로 매겨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니 지도자는 낙원의 이론에 의지하기보다 보완해야 한다고. 시스템이 아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것 또한 필요하다고.”

“나는 낙원의 이론에 대해 모두 공개하고, 그 시스템의 존폐 여부를 시민들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해. 무조건 수치만 보고 위험인물로 규정하고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유은우, 내가 몇 번이고 말했잖아. 보완이 필요하다고. 네가 바로 그 특이케이스야. 그만하고 이리 와.”

김서혁이 손을 내밀었다. 총이 들리지 않은 빈손이었다. 유은우는 그의 손을 잡는 대신, 시계 침을 한 뼘 길이로 뽑아냈다.

김서혁이 뻗었던 손을 거둬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관자놀이를 몇 번 누르더니, 한 발짝 가까이 왔다. 유은우는 한 걸음 물러섰다.

“일단 이리 와. 백정명을 계기로 조금이나마 네게 언질을 주려 했던 내가 잘못했다. 조금 더 준비되고 난 후에 이야기했어야…….”

그때였다. 인터컴에서 이선규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 대장, 윤환이 추적선 걸렸습니다. 의회 지하입니다. 윤환이가 소연주가 깐 탐색 방지를 역으로 뚫은 모양인데, 그 틈으로 정보가 새서 13층 도시연합장실로 흘러가고 있어요. 서재희가 그쪽에 있는 걸로 보입니다. 일단 의회랑 제일 가까운 소연주가 윤환이 잡아서 모함에 집어넣기로 했습니다. 13층은 제가 올라가겠습니다. 지금 10층이라 제가 제일 빠릅니다. 다만 서재희가 11층부터 별 설계를 다 깔아 놔서 엘리베이터도 멈추고, 계단도 막히고, 창문도 열리지 않습니다. 벽이나 천장을 부수려고 해도 건물 전체에 타격이 전달되도록 해 놔서 도무지 위험해서 함부로 시도할 수도 없고. 도청되는 통신도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여러 사람 서명 써서 몇 겹으로 깔아 놨는지 통…….

“순서.”

― 일단 베이스로 강화 설계가 깔리고 무효화 설계가 반사 설계랑 같이 꼬여 있는데 이게 어려운 고급 설계는 아닌데 희한하게 엮어 놨어요. 연쇄로 풀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하나씩밖에 안 풀려서 이거 며칠은 걸릴 판입니다.

“서재희가 일부러 시작점을 여러 군데로 잡았을 거다. 그중 서너 개는 금방 찾을 수 있을 테니 다른 것 신경 쓰지 말고 그걸 기준점으로 잡아서 네가 그 위에 절개 설계로 다시…….”

순간 김서혁의 인터컴이 박살이 났다. 바닥으로 인터컴 조각들이 금속음을 내며 떨어져 뒹굴었다. 그가 낯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천천히 눈을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이윽고 김서혁의 왼쪽 뺨으로 가느다랗게 핏기가 서렸다. 유은우의 시계 침이 지나간 자리였다.

“……유은우.”

김서혁이 총을 뽑았다.

캉!

김서혁의 총구가 튀어 올랐다. 황금색 빛무리가 쌔액 소리를 내며 날아와, 유은우가 전개한 시계판 위를 드드득 긁고 자취를 감추었다. 유은우는 그 힘을 받아 내느라 뒤로 조금 밀렸다. 발뒤꿈치를 중심으로 바닥이 뚜둑 갈라지는 느낌이 났다.

유은우는 전신을 팽팽히 긴장시켰다. 김서혁이 사물을 매개체 삼지 않고 직접 설계하는 타격은, 쉽게 소멸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동조자가 빚어내는 온은, 어딘가 부딪힐 때 그대로 사그라지거나 추진력이 한풀 꺾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김서혁은 달랐다. 그가 밀집시키는 온은 오랫동안 유지되고 시간이 갈수록 유연하게 움직여,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때문에 김서혁은 방아쇠를 많이 당길 필요가 없어, 쉬이 지치지 않았다. 짧은 시간 내에 담판을 지어야 하는 유은우에게 최대의 적이나 다름없었다.

― 정윤환, 멈춰. 지금 소연주가 그쪽으로 가까이 가고 있어. 아냐, 그 사람은 죽이지 마. 괜히 체력 낭비하지 말라고. 너 지금 상태가……. 소연주 추적선은 소멸시키지 마. 그럼 네 위치가 발각되는 거나 다름없잖아. 끝을 잡아. 그렇지. 그 앞에 남자 있지? 추적선 남자한테 묶고 놔줘.

유은우는 뒷걸음질로 백정명 가까이 붙었다. 발바닥이 뜨끈하게 질척거렸다. 백정명의 피. 발목으로 그의 꺼질 듯 희미한 호흡이 느껴졌다. 천장을 살폈다. CCTV가 매끄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총을 고쳐 쥐었다. 페이크가 아닌 진짜 총은,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겨 달라는 듯 손아귀에 쩍 달라붙었다.

김서혁은 총을 쥔 손을 늘어뜨린 채 유은우를 보고 있었다. 표정은 읽기 어려웠다. 그의 설계가 어디쯤에서 어떤 형태로 자신을 노리고 있을지 섬뜩했으나, 유은우는 주위를 둘러보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육안으로 잡아내기 어려웠다. 유은우는 김서혁을 똑바로 응시하며 오직 짐승 같은 육감에 의지했다. 설계 난독증을 극복하기 위해 길러 낸, 위태로운 차선책이었다.

― 우리 의회에서 본청으로 넘어갔던 루트 알지? 그쪽으로 해서 본청으로 넘어와. 의원들 지하로 몰아 놨으니까 지문 거두는 거 잊지 말고. 본청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이성훈 의원이 기다리고 있어. 그 사람 만나면 은우 타깃으로 잡아서 공간 이동시켜. 김서혁 모르게 눈속임 따로 걸 필요 없어. 이미 은우, 김서혁 눈 밖에 난 것 같아. 이성훈 의원, 다른 건 몰라도 사정거리 하나는 특출하니까 정윤환 너 혼자 무리하지 말고, 꼭 도움받아.

뒤에서 쌔액 하고 날카로운 기운이 내리꽂혔다. 유은우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시계 침을 날려 그것을 부수어 놓았다. 김서혁의 타격이 산산조각 나는 느낌이 났다. 바닥으로 유리 조각이 쏟아지는 듯 잘각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유은우는 예민하게 그 소리의 위치를 가늠했다. 백정명의 바로 뒤. 김서혁은 유은우를 직접 노렸다기보다는, 유은우가 감싸고도는 백정명의 숨통을 먼저 끊으려 한 것 같았다.

김서혁이 다시 총을 들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을 단번에 죽일 수 있음을 누구보다 유은우가 가장 잘 알았다. 그럼에도 맞선 것은, 김서혁이 자신을 완전히 놓지 못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남아 있어서였다. 실제로 김서혁은 치열한 기색이 없었다. 마치 유은우를 시험하는 듯한 한 걸음 물러선 태도에, 공격의 간격이 길었다.

― 은우야, 백정명은 포기해. 설계 하나 다시 갈 테니까 타격해서 편승해.

유은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차예원의 온디딤이 상호 통신을 지원했다면 어땠을까. 서재희의 지시를 일방적으로 받는 게 아니라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면……. 하지만 과연 내가 백정명까지 데리고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는지 자신에게 묻는다면, 그 또한 확신할 수 없었다. 유은우는 발을 조금 더 뒤로 더듬어 보았다. 발목으로 미약하나마 여전히 숨이 느껴졌다. 백정명은 아직 살아 있었다.

김서혁이 다시 총을 들었다.

탕!

순간 앞으로 훅 고꾸라졌다. 시계판이 거칠게 당겨진 탓이었다. 유은우는 넘어질 듯 몇 걸음 내딛다가 겨우 중심을 잡고 멈춰 섰다. 시계판이 김서혁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딸려 가지 않도록 버텼다. 시계판이 허공에 뜬 채 정신없이 덜덜 진동했다.

유은우는 그야말로 당황했다. 김서혁의 특기가 매개를 이용한 공격임을 몰랐던 것도 아닌데, 자신의 온디딤 자체가 그의 매개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제 더 이상 시계는 유은우의 무기가 아니었다. 김서혁의 무기를 유은우 손으로 들고 있는 꼴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당장 김서혁의 힘에 저항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이걸, 대체, 어떻게…….

김서혁이 유은우에게 겨누었던 총을 가볍게 옆으로 휙 당겼다. 깜짝 놀랄 정도로 순식간에, 시계가 훅 움직였다. 유은우는 그에 딸려 공중을 날아 복도 벽에 처박혔다. 신음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으나, 시곗줄을 찬 오른쪽 손목이 다시 거칠게 바닥으로 붙으면서 정신없이 엎어졌다. 오른쪽 손목이 뚝 꺾이는 소리가 났다. 시야가 희게 번득였다. 고통으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인 줄 알았으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공중으로 흰 패턴이 레이스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패턴의 가장자리에, 이성훈의 서명과 정윤환의 서명이 유려한 필체로 겹쳐 있었다.

유은우는 즉각 오른손에 쥐고 있던 총을 왼손으로 바꿔 쥐었다.

뚜벅뚜벅 구두 소리가 났다. 김서혁이 백정명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총구는 정확히 백정명의 미간을 향하고 있었다.

유은우는 손목에서 시곗줄을 풀어냈다. 허공을 버르적거리던 시계 부품들이 구심점을 잃고 와장창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 요란한 소리에 김서혁이 힐끗 눈을 굴려 이쪽을 보긴 했으나, 그의 총구는 여전히 백정명에게 꽂혀 움직이지 않았다.

탕!

김서혁의 총구가 튀어 오른 것과 유은우가 김서혁의 공격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전신으로 백정명을 끌어안아 보호한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김서혁의 타격은 유은우에게 닿기 직전, 거칠게 비틀리더니 소멸해 버렸다. 유은우의 예상대로.

그 짧은 순간, 군에서의 수많은 나날이 뇌리를 스쳤다.

일정이 없어 한가할 때면, 정예군은 절반으로 팀을 갈라 가볍게 모의 전투를 뛰곤 했다. 당시 유은우는 발을 헛디디거나 거리를 잘못 계산하여 김서혁의 사정거리 안으로 데굴데굴 굴러 들어가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김서혁의 거친 공격은 항상 코앞에서 깨끗하게 거둬지곤 했다. 유은우가 아군일 때는 당연했고, 적군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은우는 그런 김서혁의 반응을 역이용하면 어떨까 생각했었다. 일부러 김서혁의 앞에 뛰어들어, 그가 반사적으로 공격을 거두게 하면 그 찰나 반격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실제로 실행에 옮긴 적은 없었다. 발상이 비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유은우는 백정명을 깊이 끌어안았다. 피비린내가 짙었다. 손목이 부러져 통증이 심했으나, 그럼에도 오른 손바닥으로 백정명의 가느다란 움직임이 느껴졌다. 망설임 없이 총을 들었다. 총구는 김서혁을 비껴가, 그의 뒤에서 희게 나부끼는 설계를 향했다.

이젠 정말 끝이다. 다시 김서혁을 만난다면, 이젠 그 어떤 것도 서로 기대할 수 없으리란 걸 알았다.

유은우는 방아쇠를 당겼다.

탕!

공간이 휘몰아쳤다. 사방이 빛으로 휘감겼다. 온이 나부끼자, 옷자락도 따라서 사납게 펄럭였다. 유은우는 백정명을 끌어안은 몸에 힘을 더했다. 공기 중에 섞인 온들이 섬세한 선의 형태로 도드라지며 세밀하게 교차했다. 씨실과 날실이 정교하게 엮이며 거대한 패턴을 형성했다. 유은우는 어지럼증을 삼키며 눈을 꼭 감았다. 그럼에도 빛이 강렬하게 눈꺼풀을 뚫고 들어와, 유은우는 웅크리며 백정명의 어깨에 눈가를 묻었다. 귓가가 윙윙거렸다.

정적은 갑자기 찾아왔다.

“서재희는 하나만 올 거라고 했는데.”

낯선 목소리. 유은우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두 사람의 구두가, 이어 다리가 보였다. 유은우는 백정명에게서 떨어지며 고개를 들었다.

흰 셔츠에 검푸른 정장 바지를 입은, 30대로 보이는 남자가 눈을 찌푸린 채 유은우를 보고 있었다. 그는 한쪽 손으로는 정장 재킷을 걷어들고 있었고, 다른 쪽 손으로는 총을 쥐고 있었다. 총구가 붉었다. 그리고 그 옆에 정윤환이 있었다. 그가 툭 뱉었다.

“어쩐지 무겁더라.”

정윤환은 벽에 반쯤 기댄 채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풀어헤친 셔츠. 목덜미가 피로 젖어 있었다. 정윤환의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인지 다른 이의 피가 튄 것인지 가늠할 수 없어 유은우는 그의 목을 깊이 주시했다. 그런 유은우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정윤환이 총을 쥔 손을 들더니 목덜미를 거칠게 닦아 냈다. 핏기가 가시자 창백한 피부가 드러났다. 상처는 없었다. 그러나 유은우는 이제 정윤환의 총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검게 빛나는 총신 위로 가느다란 금이 선명했다. 그 갈라짐으로, 072라는 숫자가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다.

“너 총이…….”

“너 시계 어쨌어?”

유은우의 다급한 물음은, 정윤환은 서늘한 질문에 막혔다. 유은우는 제 오른손을 흘깃 내려다보았다. 시곗줄 없이 텅 빈 손목은 이상한 각도로 비틀어져 있었다. 통증보다 걱정이 앞섰다. 온디딤이 없으면, 이제 혼자 싸울 수 없었다.

“버렸어. 대장이 내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뤄 버려서.”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정윤환이 턱으로 백정명을 가리켰다.

“백 의원님 모셔 오느라 무리한 건 아니고?”

“백정명은 이제 의원이 아닌데.”

낯선 남자가 조용히 대꾸했다. 정윤환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이성훈 의원님?”

그러더니 정윤환은 다시 유은우를 보았다. 그가 신랄하게 퍼부었다.

“유은우 너한테 설계 깔아 주고 나서, 너 바로 올 줄 알았는데 뜸 좀 들이더라. 서재희 지시 못 들었어? 무기는 버리고 사람을 데리고 와? 너 이 사람 알아? 모르잖아. 대체 뭐 하러…….”

유은우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정윤환의 시선을 피하며 백정명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으나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유은우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백정명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은우가 굳이 기를 쓰며 자신을 데리고 탈주한 것에 대해.

유은우는 고개를 돌려 백정명의 눈길도 피했다. 정윤환도 백정명도 못 보니, 시선 둘 곳이 없었다. 자연스레, 이성훈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무언가에 집중하는 기색이었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나는 가야겠어. 서재희가 위로 와 달래. 이선규가 서재희 위치를 파악하고 본격적으로 뚫는 모양이야. 설계가 차츰차츰 무너지고 있다는데 보강 좀 해야겠어. 김서혁도 그쪽으로 가는 것 같고.”

그리고 이성훈이 가까이 다가왔다. 유은우는 몸을 굳혔다. 이성훈은 유은우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백정명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그것을 바닥에 톡 내려놓았다. 약물 케이스였다.

백정명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유은우는, 그가 아직도 화를 낼 기운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누굴 놀리나? 당장 집어치워.”

이성훈이 고개를 숙이며 작게 대답했다.

“저는 서재희를 돕지, 백 전 의원님을 도울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도 오늘 당신 작품은 무척 마음에 들어서. 이제 뉴스만 틀면 임유현이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방송되겠죠. 이왕이면 당신 서명이 휘발되기 전에 카메라를 들이대면 좋았을 텐데 그게 여의치 않아서…….”

이성훈이 짧게 웃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노선을 바꿨다고 해서, 당신이 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들만 죽지 않았으면 당신은 여전히 임유현에게 많은 것을 빌려 주었을 테니까. 전 아직도 사석에서 당신이 했던 발언을 잊을 수 없습니다. 시스템이 검증한 소수의 희생이니, 필요악이니……. 당신 부인이 살아 있었다면 이 짓도 할 수 없었을 텐데. 가족은 죄다 죽어 버리고 본인도 위험해지니 서재희 편에 붙은 것이지, 당신이 뭐 특별한 신념이 있어서 여기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 생각하니 영 달갑지 않아서…….”

“저기요.”

정윤환이 이성훈의 말을 뚝 잘라 냈다. 퉁명스러운 말투로 정윤환이 이어 말했다.

“의회에서 두 분 자주 부딪혔다는 건 저도 익히 아는데요. 다쳐서 힘도 없는 사람 앞에 두고 말이 너무 긴 거 아닙니까. 바쁘잖아요, 우리.”

이성훈이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동시에 총을 들어 제 관자놀이에 대고 쏘더니 그대로 총을 쭉 미끄러뜨렸다. 총구가 닿은 지점을 시작으로 이성훈은 안개처럼 옅어지더니, 그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졌을 때는 이윽고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어 복도를 타닥타닥 달리는 소리마저 멀어졌다.

유은우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머니에서 호흡기를 꺼냈다. 이성훈이 놓고 간 약물 케이스를 주워 끼웠다. 백정명의 입에 물리기 위해 몸을 낮추었다. 그러나 백정명의 핏발 선 눈을 마주한 순간, 손이 딱 얼어붙었다.

“네 도움 받고 싶지 않아.”

그가 차갑게 말했다. 유은우는 그의 입가에 막 호흡기를 가져다 대려다 멈추었다.

“저는…….”

유은우는 힘겹게 운을 떼었다. 그러나 백일서가 죽던 날 현장에 있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백정명을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자신에게 치가 떨렸다. 결국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일이었으니.

백정명이 낮게 말했다.

“내가 네 도움을 받을 것 같냐? 네가 그토록 냉정하게 내 다리에 무기까지 쑤셔 박다가, 내 이름을 듣자마자 안색이 허옇게 질려 시체 낯짝이 되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는데. 너와 나의 접점은 아무것도 없고, 그나마 내 아들과 함께 재학했다는 사실 뿐이지. 그렇다면 너의 그 알량한 호의는 내 아들과 관련되어서겠지? 네 도움 받고 싶지 않다.”

백정명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목소리였다.

“꺼져 버려.”

유은우는 잠시 숨을 쉬지 못했다. 손에서 호흡기가 미끄러졌다. 간신히 그러쥐었으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호흡기는 금속음을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문득 어린 용이 생각났다. 나는 네 삶에 참견치 않을 테니 네 마음대로 자유로이 살아가라는 뜻에서 풀어 줬었다. 그때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먹이를 주고 이름을 지어 부르며 돌보는 자체가 어떤 강요처럼 느껴졌기에. 용이 내게 그런 것을 바란 적 없으니 나도 줄 의무가 없다고 여겼다.

차예원에게 한 말도 같은 맥락이었다. 서재희가 자살하더라도 본인의 의지라면, 타인이 그의 마음을 돌릴 권리 또한 없다는. 본인의 선택에 그만큼의 이유가 있을 테니.

그러나 그게 과연 옳은 일이었는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여태 유은우 자신이 취했던 태도로는, 백정명의 의사를 존중해야 했다. 그를 그냥 내버려두고 가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십중팔구 그는 살해당하거나, 출혈로 사망할 터였다.

어린 용이 굶주려 죽을 수도 있음을, 서재희가 정말 자살할 수도 있음을 유은우도 모르지 않았다. 정말로 상대를 존중한다면 최악의 결과 또한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상하게 유은우는 백정명을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유은우 자신이 만들어서 지켜 온 어떤 신념의 틀이 유독 백정명에게만 끼워 맞추기 어려웠다. 백정명 말대로 알량한 죄책감에서인지, 혹은 애초에 용이든 서재희든 줄곧 잘못 판단해 왔는지, 도통 아귀가 맞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자꾸만 뒤가 서늘했다.

‘나도 그러고 싶어! 쭉 살리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어. 상황이 끔찍했다고! 난 내가 할 수 있는 한 언제나 네게 최선을 다했어! 언제나!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사진은, 사진은, 따로 이유가 있어서 가지고 있었던 건 절대로 아니야. 그냥 단지…….’

파르르 떨리던 정윤환의 입술이 생각났다. 꽉 주먹 쥔 두 손도. 그는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눈을 꽉 감았다가 떴었다.

‘……버릴 수가 없었어.’

그때는 정윤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왜 속 시원하게 과거를 털어놓지도 않으면서, 그저 그 모든 일이 나를 살리고 싶어 최선을 다한 결과일 뿐이라고 했었는지. 어떻게 그런 상황이 존재할 수 있는지 미심쩍었다. 사진은 또 왜 가지고 있었는지. 단지 버릴 수 없었다는 건 이유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유은우 또한 백일서의 혀가 들어 있던 유리병을 들고 주저했었다. 누군가 그 이유를 묻는다면, 유은우는 대답할 수 없었다. 정윤환이 그랬던 것처럼.

백정명의 까슬한 낯은, 백일서의 인상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유은우는 백정명의 다리를 보았다. 유은우가 처참하게 찢어 놓아 피가 흥건했다. 백정명이 재차 말했다.

“두고 가.”

유은우는 호흡기에서 약물 케이스를 분리했다. 손은 이제 떨리지 않았다. 케이스를 입에 물고, 백정명의 다리를 꽉 붙잡은 뒤, 상처 위로 고개를 숙였다. 턱에 힘을 주었다. 딱, 소리가 나며 케이스가 박살 났다. 쌉쌀한 맛이 났다. 약한 점성을 가진 액체가 상처로 쏟아졌다.

상처가 부글부글 끓었다. 백정명이 신음을 내며 몸부림쳤다. 유은우는 그의 다리를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차마 부러진 오른손은 쓰지 못하고 멀쩡한 왼손만 썼으나, 신체 강화 상태라 손쉽게 제어했다. 그 모양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정윤환이 다가왔다.

“이거 놔!”

백정명이 사납게 소리를 질렀으나, 곧 정윤환의 손날에 뒷덜미를 얻어맞고 축 늘어졌다. 유은우는 그제야 백정명의 다리를 놓아주었다. 왼팔이 뻐근했다.

정윤환은 백정명을 훌쩍 둘러업고는, 근처 아무 문이나 열고 쑥 들어가 버렸다. 부스럭부스럭 수습하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정윤환이 홀로 나왔다. 그는 피로한 낯으로 복도의 CCTV를 힐끗 보았다. 그가 중얼거렸다.

“서재희도 봤겠지? 이 정도 수습해 놨으면 나중에 빼내 주겠지?”

유은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불안감이 스멀스멀 등골을 미끄러졌다.

“재희 선배 지시가 없어.”

“바쁘겠지.”

정윤환이 딱 잘라 대답했다. 그는 유은우를 보더니 덧붙였다.

“우리하고만 통신하는 거 아니잖아. 서재희가 굳이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 안 하는 건 우리가 지금 잘하고 있다는 거겠지. 일단 지하로 가자. 이리 와. 아니, 잠깐.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너 손 왜 그래?”

“괜찮아.”

유은우는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정윤환이 성큼 가까이 왔다. 그가 총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거칠게 유은우의 팔뚝을 잡아당기고 꺾인 손목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가 중얼거렸다.

“큰일 났네. 회복제도 다 떨어지고 없단 말이야. 아까 백정명한테 주는 게 아니었어.”

그 틈에 유은우는 정윤환의 총을 살폈다. 가까이서 보니 금이 깊었다. 게다가 동조율은 072를 찍고 있었다. 정윤환의 동조율 최대치가 082임을 감안할 때 떨어질 만큼 떨어졌다고 봐도 좋았다. 정윤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유은우의 손목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심각했다. 유은우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의 손아귀에서 팔을 빼냈다.

“진짜 괜찮아. 왼손으로 쏴 봤는데 할 만하더라.”

“할 만하더라? 오른손잡이가 하루아침에 어떻게 왼손으로 조준을 해.”

“그러는 넌? 네 총은 또 왜 그래?”

더 이상 쓰면 침식됨을, 정윤환 너도 알지 않냐고 묻고 싶었으나 삼켰다. 정윤환도 모를 리 없을 테니까. 유은우가 손목이 부러진 것처럼 그도 이유가 있을 터였고, 이유를 안다고 해도 도리가 없었다. 시계를 잃은 지금, 유은우는 정윤환의 설계에 완전히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왠지 자꾸만 코가 시큰거렸다.

“재희 선배 잘못된 거 아니겠지?”

불쑥 그런 말이 나왔다. 유은우는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을 뱉어 놓고, 그만 속이 하얗게 말라붙었다. 정윤환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뭐라고 크게 소리라도 지를 표정이었으나, 그는 뜻밖에 낮게 말했다.

“서재희 믿는다고 한 건 너잖아. 너까지 왜 그래. 내가 아까 말했잖아. 서재희, 우리 말고도 여럿 움직이고 있다고. 우리가 잘하고 있으니까 아무 말 없는 거라고. 우리가 더 이상 지시받을 게 뭐가 있어? 지하로 내려가서 법 개정만 하면 돼. 서재희 하고 싶은 일에, 우린 그냥 숟가락 얹는 것뿐이야. 원래 서재희, 쭉 복수를 원했어. 다 계획한 일이야. 분명히 성공할 거야.”

그러나 정윤환은 총에 금이 갔고, 유은우는 시계를 잃고 오른쪽 손목이 부러진 상황에서, 서재희만 멀쩡할 거라는 희망은 품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그의 지시가 끊어졌다.

“그럼 위원들 지문은…….”

“다 땄어. 일부는 이성훈한테 받고. 얼마나 쉬워? 조금만 버티면 이제 다 끝나…….”

무엇이 끝난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당장 오늘의 전투가 마무리되고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앞으로 닥칠 깊은 지옥의 시작이 될 텐데. 이렇게까지 판이 커지리라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닌데 자꾸만 마음이 헐거워졌다. 유은우는 급히 눈을 깜빡거렸다. 애써 참으려 했으나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야, 유은우! 제발 좀!”

정윤환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손을 뻗어 유은우의 뒤통수를 끌어당겼다. 뒤이어 정윤환의 다른 손이 눈가로 다가오기에 유은우는 눈을 꼭 감았다. 정윤환의 소매가 거칠게 눈가를 비비고 지나갔다. 그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른 건 몰라도 울지는 마라, 진짜.”

유은우는 자신의 눈가를 꾹꾹 눌러 대는 정윤환의 손을 잡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눈물이 어른거려 정윤환의 얼굴이 일그러져 보였다. 유은우는 제 손으로 눈을 닦아 냈다. 시야가 또렷해졌다.

“가자.”

정윤환이 유은우의 왼손을 잡아당겼다. 둘은 복도를 한참 달리고, 계단을 만날 때마다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 정윤환은 이쪽 지리에 훤했다. 앞서 내보낸 탐지 설계가 정보를 실어 돌아오면, 정윤환은 즉시 멈춰서 유은우의 입을 막은 채 모퉁이에 숨거나, 생각지도 못한 통로로 유은우를 발로 차 밀어 넣어 숨기곤 했다. 다리가 아닌 손목이 부러져 천운이라고, 유은우는 거듭 자신을 안심시켰다.

중간에 몇을 만나기도 했다. 까만 인터컴을 착용한 자를 만나면 서재희와 연락이 되냐고 물어볼 셈이었으나 하필 적뿐이었다. 정윤환은 적을 마주할 때마다 즉시 설계를 깔았다. 그의 총구가 튀어 오르면 유은우가 그 위로 조준해 사격했다. 유은우는 자신의 타격이 그리도 깔끔하게 타인의 설계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한번은 정윤환 총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희미했으나 유리 깨지듯 날카로웠다. 유은우는 놀라 그의 총을 보았다. 정윤환이 매끄럽게 총신을 가려 상태가 잘 보이지 않았다. 옆에 있는 유은우가 그 소리를 들었으니 총을 쥔 정윤환이 그 균열을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러나 정윤환은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유은우는 정윤환이 방아쇠를 최대한 덜 당기도록, 한 치의 실수도 하지 않기 위해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덕분에 왼손임에도, 유은우는 바로바로 정윤환의 설계 위로 자신의 타격을 얹을 수 있었다.

“우리 진짜 잘 맞는다.”

세 번째 적과 맞닥뜨렸을 때, 정윤환이 신호도 없이 총을 겨누고, 직후 유은우가 같은 방향으로 쏘며 적이 소리 없이 쓰러졌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뜻밖이었다.

“이게?”

정윤환은 그리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힘 조절이 안 돼. 내 총이 멀쩡하고 네가 오른손만 썼어도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텐데. 너 감당하기 힘들다. 동조율 100이 생각보다 많이 무겁네. 너 원래 서포터 몇이나 붙어서 뛰었어?”

“최소 다섯…….”

“내가 보기엔, 일곱 명은 붙어서 너만 지원해야 할 것 같은데. 그래야 안정될 것 같아.”

유은우는 정윤환을 따라 복도를 달리면서, 바닥에 쓰러진 적을 스쳐보았다. 뒷덜미에 보라색의 상흔만 남았을 뿐, 깨끗하게 절명했다. 군의 지침상 최상의 살해였다. 유은우는 정윤환의 뒤에 바짝 붙으며 물었다.

“이 이상 어떻게 죽일 수 있어?”

“나 원래 사람 안 죽여. 급소 쳐서 기절시켜. 그런데 네 타격이 버거워서 조절이 잘 안 돼. 자꾸 강하게 나가는 것 같아. 그렇다고 네 타격을 줄이는 식으로 설계를 잡기도 좀 그래. 너무 약해서 적한테 스치기만 하면 난 한 번 더 사격해야 하고, 그건 지금 위험부담이 크니까. 타협 중이야.”

정윤환은 모퉁이 벽에 노련하게 등을 붙였다. 앞서 보낸 탐지 설계가 돌아오는 걸 보고 나갈 셈이었다. 그가 숨을 고르는 동안 유은우는 작게 물었다.

“너 사람 안 죽여?”

“웬만하면.”

“어떻게 사람을 안 죽여. 너 군인이었잖아.”

“살짝만 치면 기절시킬 수 있어. 웬만하면 그렇게 해. 누가 알아채는 것도 아니니까. 다 살리는 건 아냐. 꼭 필요할 때는 죽일 때도 있어. 김서혁이 생존 탐지 돌리고 그럴 때면 나도 내 마음대로 살리고 못 그러지. 그럴 땐 다 죽여.”

유은우는 정윤환을 빤히 쳐다보았다. 정윤환은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유은우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몸을 약간 뒤로 빼며 물었다.

“왜? 뭘 그렇게 봐?”

“아니, 그냥. 대단하네. 전쟁터에서 적을 기절시킨다는 게.”

“뭐가. 비꼬냐?”

“전혀 아닌데.”

“이선규는 엄청 뭐라고 하던데. 전에 한번 들켰거든. 군인이 그게 뭐냐고. 네가 네 형이랑 다를 게 뭐냐고. 약해 빠졌다는 둥, 짬밥만 축내는 비효율적인 새끼라는 둥…….”

“왜 안 죽여?”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 설계 천재 소리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고작 그런 것뿐이더라.”

“맨날 나 죽여 버린다는 사람 입에서 그런 소리 들으니까 되게 묘하네.”

정윤환은 대답 없이 피식 웃었다. 탐지 설계가 작은 비행선처럼 쌩하니 날아 돌아왔다. 날개엔 어떤 정보도 실려 있지 않았다. ‘이상하네. 지하 4층에 아무도 없을 리가 없는데.’ 정윤환이 중얼거리며 탐지 설계를 낚아채 부수었다. 푸른빛 가루가 날렸다.

가자, 정윤환이 작게 신호했다. 막 모퉁이를 돌려는 그의 팔을, 유은우는 다급히 잡아챘다. 정윤환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저기, 있잖아.”

유은우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 애썼다.

“만약에 우리 살아서 나가면…….”

“자꾸 그런 소리 하지 마. 재수 없다고.”

정윤환의 손이 훌쩍 다가와 유은우는 눈을 꼭 감았다. 그의 손바닥이 유은우의 얼굴을 가볍게 한번 쓱 훑고 지나갔다. 열이 올라 뜨거웠다. 눈을 뜨자 정윤환은 이제 다시 모퉁이 쪽을 보고 있었다. 유은우는 그의 소매를 잡아당겨 자신을 보게 했다.

“나가면 나한테 얘기해 줄 수 있어? 옛날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네가 예전에 그랬잖아. 나한테 최선을 다했다고. 그런데 정작 내가 모르고 있으니까, 도움을 받았더라도 고마워할 수가 없잖아. 몰라서 자꾸 널 미워하게 되니까, 말해 주면 안 돼?”

정윤환이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옅은 눈동자. 눈가가 차츰 붉어졌다.

“화 안 내고 들을게. 변명뿐이라도 좋아. 최대한 이해하면서. 네가 거짓말을 보태도 진실이 그렇다 여기며 들을게. 내 입장이 아니라 네 입장이 될게.”

정윤환이 손을 뻗었다. 손끝이 유은우의 이마에 닿았다. 정윤환은 유은우의 앞머리를 스치듯 걷어 올렸다. 아주 잠깐 동안, 유은우는 그가 시선으로 자신을 만진다고 생각했다. 정윤환이 낮게 속삭였다.

“여기서 키스하면 서재희가 CCTV로 보고 한마디 하려나? 아무리 바빠도 그냥은 안 넘어갈 것 같은데. 서재희 생존신고도 들을 겸 해 볼래, 우리?”

“질문에 대답 좀…….”

정윤환이 예쁘게 웃었다. 그가 유은우에게서 손을 떨어뜨리고는 장난처럼 말했다.

“언제는, 서재희는 믿고, 나는 소름 끼친다더니.”

“모르니까 그렇게 말한 거잖아.”

“그럼 넌 서재희에 대해 얼마나 아는데? 오랫동안 알고 지낸 나도 가끔 서재희가 다른 사람 같을 때가 있는데.”

유은우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서재희를 향한 믿음은, 순간순간 느낀 감정들의 축적이었다. 막상 서재희에 대해 말하려 하면, 유은우는 딱히 뱉을 만한 것이 없었다. 이름, 고향, 나이, 외모, 동조율, 자잘한 습관, 나를 보는 눈빛…….

정윤환은 물끄러미 유은우를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유은우는 그에게 손을 잡혀 모퉁이를 돌면서 재차 물었다.

“그래서 말 안 해 줄 거야?”

“싫은데? 네가 뭐가 예쁘다고.”

정윤환은 예고도 없이 멈춰 섰다. 문은 없고 그저 벽뿐으로, 보안장치만 덩그러니 붙어 있었다. 정윤환이 익숙하게 보안장치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거짓말처럼 벽 위로 가느다랗게 선이 그려지고 문이 도드라졌다. 매끄럽게 좌우로 열렸다. 정윤환을 따라 유은우도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약간의 공간을 두고 또 다른 문이 있었다. 정윤환이 그 문의 보안을 해제하자 또 다른 문이 나타났다. 아무것도 없이 온통 회색이라 그런가 이상하게 서늘했다. 유은우는 두리번거리다 물었다.

“문이 몇 개나 있어?”

정윤환은 보안에 지문을 가져다 대려다가 멈추고 대답했다.

“세 개. 이게 마지막인데.”

“탐색 설계 안 내보낼 거야?”

“아, 여기서는 총 못 써. 온이 차단되어서.”

온이 차단된다고? 유은우는 그런 말은 듣도 보도 못했다. 농도가 짙고 옅고 흐름이 다를 뿐이지 온은 어디나 존재함이 상식이었다.

“그럼 적 만나면 어떻게 싸워?”

“아마 육탄전? 그런데 걱정할 것 없어. 여기 숫자 보이지?”

정윤환이 손가락으로 보안장치 스크린을 톡톡 두드렸다. 알 수 없는 기호와 숫자들이 떠 있었다. 정윤환은 그중, 가장 위에 있는 숫자 0을 가리켰다.

“내부에 있는 사람 수인데, 이게 0이잖아. 아무도 없다는 소리야. 얼른 끝내고 나가자.”

정윤환이 보안장치에 손가락을 꾹 눌렀다. 문이 열렸다.

사방에 스크린이 놓여 있었다. 벽을 따라 콘솔이 빙 둘려 있었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그 흔한 펜이나, 구겨진 종이컵 따위도 없었다. 온통 막 공장에서 찍어 낸 듯한 전자기기뿐이었다. 약하게 우웅 하는 소음이 들렸다.

정윤환은 어디가 어딘지 살피는 기색도 없이 곧바로 한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두 손을 깍지 껴 여러 번 풀어내고는, 콘솔에 가볍게 얹었다. 익숙하게 콘솔을 조작하는 정윤환 옆에 서서, 유은우는 자꾸만 불안해졌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입구에, 통과하면서 지문을 인식했던 보안장치와 같은 스크린이 있었다. 스크린 오른쪽 위로 2라는 숫자가 깜박거렸다.

“여기 원래 사람들 잘 안 와?”

“음. 복도는 사람이 많이 오가는데, 아무래도 여긴 들어올 수 있는 사람 자체가 적어서. 너도 아까 봤겠지만, 문도 잘 안 보이잖아.”

유은우는 왼손 엄지를 만지작거렸다. 지문이 새겨진 실리콘 골무는, 찰싹 달라붙어 마치 피부처럼 느껴졌다.

“여기 말고 다른 곳이 더 있어? 네가 못 들어가는 그런…….”

유은우는 말을 다 맺지도 못하고 헉, 숨을 들이켰다. 정윤환이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한 움큼 꺼내 콘솔 위로 쏟았기 때문이다. 짤막하게 잘린 손가락들이 버튼들 사이를 뒹굴었다. 어떻게 처리를 했는지 피가 흐르지는 않았다. 까맣게 말라붙어 있었다. 유은우가 놀라든 말든 정윤환은 반대쪽 주머니를 뒤적였다. 한 번 더 콘솔 위로 신체의 일부가 쏟아졌다. 둥그런 안구 하나가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려는 것을, 유은우는 다급히 손으로 받아 냈다. 도로 콘솔 위로 올려놓자 정윤환이 말했다.

“이성훈이 그러는데 소연주가 위원 한 명 손가락을 아주 못 쓰게 지져 놨다더라고. 그래서 어쩔 수 없었대.”

정윤환은 콘솔을 조작하고 뒤로 돌아섰다. 텅 비어 있던 중앙의 바닥이 찰칵 열렸다. 그리고 거대한 원기둥이 매끄럽게 솟아났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은 단순한 원기둥으로 보였으나, 빛의 각도에 따라 고개를 기울여 보니, 일정한 간격을 두고 미세하게 금이 그어져 있었다. 정윤환은 신중하게 손가락들을 그러쥐었다. 원기둥을 빙 돌며 그 가장자리에 손가락들을 드문드문 내려놓았다. 각각의 지문을 인식할 때마다 원기둥의 칸들에 하나씩 하나씩 은근하게 불이 들어왔다.

“총 열두 개. 백정명 자리는 비워 놓고…….”

정윤환이 마지막으로 안구를 내려놓았다. 총 열세 칸 중 하나가 비어 있음에도 원기둥 전체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원기둥으로부터 빛줄기들이 복잡한 문양을 그리며 바닥으로 쏟아지고 콘솔을 지난 다음 천장을 휩쓸고 지나갔다. 여태까지 죽은 듯 희미하던 스크린이 차례로 가동되었다. 온통 흰빛으로 아찔했다. 조명이 강해 눈이 따가웠다.

정윤환의 두 손이 콘솔 위를 빠르게 날았다. 버튼 눌리는 소리가 빠르게 울렸다. 그가 중얼거렸다.

“서재희가 뭐라고 했더라. 중립지대로 검색하고, 그 뒤에 뭐라고 했지?”

“너 후보인데도 못 들어가는 곳 있어?”

정윤환은 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있지.”

“어딘데?”

“우리 뒤.”

유은우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았다. 그제야 문 같은 무언가가 보였다. 콘솔의 시작점과 입구 사이에 직사각형 모양의 틈이 있었다. 벽과 같은 소재와 색에, 잘 맞물려 있었고, 그 흔한 손잡이도 없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뭘 그렇게 놀라. 저긴 최대 여섯 사람만 들어갈 수 있어. 도시연합장. 도시연합 중앙학교장. 도시연합군 총사령관. 그리고 가장 최근의 완성된 후보 셋. 나는 옛날에 임유현이랑 세 번인가 들어가 봤어. 견학인지 지랄인지.”

“저기 뭐가 있는데?”

“낙원의 이론 핵심 시스템.”

유은우는 홀린 듯이 문을 응시했다. 옆에서 정윤환이 빠르게 콘솔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어림도 없다는 듯 말했다.

“못 들어가. 들어갈 필요도 없고. 신경 꺼.”

유은우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손잡이가 없어 어찌 여는지 알 수 없었다. 찬찬히 살핀 끝에, 문 옆에 부착된 아주 작고 반질반질한 유리판을 발견했다. 지문을 얹으면 딱 맞을 크기였다. 유은우는 왼손 엄지를 들어 올렸다. 차인호의 지문이 덧씌워진 손가락이었다. 완전히 몰입하면서, 무심코 오른 어깨로 문을 밀었다. 당연히 꽉 닫혀 있을 거라 짐작한 문은, 너무나도 쉽게 안쪽으로 밀렸다. 지문이 채 닿기도 전이었다. 유은우는 소스라쳐 물러섰다. 문은 아주 약간 밀려 있었다. 틈이 아슬아슬하여 안쪽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열린 것만은 확실했다. 유은우는 반사적으로 입구의 스크린을 보았다. 분명 아까까지는 2였는데, 어느새 3으로 올라가 있었다.

유은우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정윤환을 돌아보았다. 그는 콘솔 위에 손을 멈춘 채 유은우를 빤히 보고 있었다. 발소리도 조심스러워하는 유은우를 보며, 그가 입 모양으로 물었다.

‘왜 그래?’

유은우는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역시 소리 없이 입만 움직여 대답했다.

‘열려 있어.’

정윤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유은우는 입구의 스크린을 가리켰다. 입 모양으로 말했다.

‘누가 또 있어.’

정윤환이 무어라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욕인 것 같았다. 유은우는 꾸준히 뒷걸음쳐서 겨우 정윤환 곁으로 돌아왔다. 그의 어깨를 잡고 발돋움하여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언제 끝나?”

“존나 느려. 돌겠네, 진짜…….”

정윤환이 이를 악물고 콘솔에 붙은 스크린을 가리켰다. 로딩 중 32% 문구가 반짝거렸다.

유은우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문은 여전히 살짝 열린 채였다. 어깨에 정윤환의 손길이 닿는 게 느껴졌다. 그가 유은우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너 나가 있을래? 내가 마무리하고 바로 나갈 테니까.”

“여기선 온도 못 쓰고 몸으로 직접 싸워야 한다며? 몸 상태만 보자면 너보단 내가 낫잖아.”

“너 손목 부러졌잖아.”

“그러는 넌 아프잖아.”

둘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를 빤히 마주 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유은우였다.

“얼마나 걸려?”

정윤환은 스크린을 보았다. 그는 유은우의 어깨를 감싼 채, 초조하게 입가를 문질렀다.

“……10분?”

“기다릴게. 같이 가. 일단 로딩 다 될 때까지 저 뒤에 숨어 있자.”

유은우가 원기둥을 가리켰다. 계속해서 문 쪽을 주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윤환이 주위를 훑더니 다시 욕을 했다.

“망했다. 무기로 쓸 만한 게 하나도 없어.”

“일단 숨…….”

그때였다. 문이 확 열렸다. 유은우는 본능적으로 정윤환의 앞을 막아서고자 했다. 그러나 정윤환 또한 유은우를 뒤로 숨길 셈이었는지, 그 짧은 순간 둘은 그 자리에서 빙그르르 두세 바퀴를 돌았다. 아까 총 들고 뛸 때는 그렇게 합이 잘 맞았는데, 벌써 이러니 이제 어떻게 싸워야 하나 앞이 깜깜했다.

“이제 왔냐?”

열린 문 사이로 남자가 정윤환을 향해 덤덤하게 말했다. 익히 본 얼굴이었다. 그는 이내 문을 완전히 젖히고 나오더니 유은우를 향해 눈인사했다. 그가 말했다.

“또 뵙네요.”

유은우는 사실 조금 안심했다. 완전히 낯선 이가 아니라는 점이, 근거도 없이 묘한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상대가 보자마자 달려들지 않아서 더 그랬다. 거기다 깍듯한 존댓말로 인사도 받았다. 최소한 지금 당장 싸우자는 뜻은 아닌 것 같았다. 힐끗 스크린을 건너다보았다. 48%. 시간만 끌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정윤환은 안색이 흙빛이었다. 그가 이를 악문 사이로 중얼거렸다.

“……강진욱.”

정윤환이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그의 몸이 기울기에, 유은우는 황급히 손을 뻗었다. 그러나 정윤환은 유은우의 부축 없이 콘솔에 몸을 기대어 지탱했다. 정윤환이 강진욱에게 물었다. 목소리가 버석하게 갈라져 나왔다.

“거긴 어떻게 들어갔어?”

강진욱은 대답 없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어 보였다. 잘린 손가락. 정윤환이 낯을 굳혔다.

“설마…….”

“김서혁.”

강진욱의 대답에, 유은우는 숨을 들이켰다. 피로 녹슨 나무 조각 같은 그 손가락 어디에 김서혁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필사적으로 살폈다. 강진욱이 짧게 웃었다.

“유은우 씨는 방금 도시연합군과 척을 지지 않았나요? 그런데 왜 김서혁 이름을 듣자마자 창백해지나요. 누가 보면 같은 팀인 줄 알겠네……. 하긴, 돌아선다고 해도 등은 붙어 있을 수 있죠. 삶이란 게 원래 그런 거 아니겠어요. 저도 겪어 봐서 압니다. 내 편으로 손 꼭 잡고 있어도 도무지 마음이 동하지 않을 때가 있고, 적으로 맞서더라도 자꾸만 신경이 쓰일 때가…….”

“닥쳐. 임유현 손가락인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정윤환이 씹어뱉듯 말했다. 강진욱은 손가락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왠지 시들해진 표정이었다. 강진욱이 말했다.

“맞아. 내가 잘라 왔어. 너무 쉽던데. 다른 사람보고 가져가라고 거기다 빨래처럼 널어 놓은 거 아니었어? 서재희가 그런 실수를 다 하고. 머리 좋다더니 다 순 거짓말 아냐?”

바깥에서 희미한 소음이 났다. 유은우는 예민하게 청각을 곤두세웠다.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건 정윤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유은우보다 더 또렷하게 상황을 인지하는 듯했다. 정윤환의 숨이 서서히 거칠어졌다. 낯은 희게 질렸으나 눈빛은 단단했다. 예기치 못하게 강진욱을 마주하며 받은 충격은 이미 말끔히 가시고 없었다. 그 여백엔 이제 불이 붙어 있었다. 정윤환이 강진욱을 노려보며 천천히 말했다.

“어쩐지. 복도에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이상하다 했다.”

“차예원만 온디딤을 능숙하게 다루는 건 아니잖아? 우리 쪽에도 있어. 한세연 연구관. 너도 알고 있잖아? 차예원 실력이 예상보다 탁월해서 어렵긴 했지만, 그래도 그쪽 상황을 읽을 정도는 돼. 그러니까 내가 여기 와서 너흴 기다렸지.”

“이따위 짓을 하라고 한세연 연구관님께서 차예원 온디딤을 들여다본 건 아닐 텐데?”

유은우는 강진욱이 정윤환을 보는 틈을 타서 힐끔 스크린을 보았다. 64%. 치미는 욕을 삼키며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역시나 무기로 삼을 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숨 쉴 때마다 부러진 오른쪽 손목으로부터 통증이 짜릿하게 타고 올라왔다. 강진욱의 한쪽 손에 들려 있는 반질반질 윤이 나는 쇠로 만들어진 봉을 보고 있으려니, 총이 소용없는 여기서 어떻게 싸워야 할지 그저 아찔했다.

정윤환이 콘솔의 가장자리를 꽉 쥐고 선 채 물었다.

“계속 날 감시한 거야? 우리,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한팀 아니었나?”

강진욱이 미간을 찌푸렸다.

“친구라도 의심스러우면 감시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강진욱 네가 이딴 식으로 세력을 쪼개서 마음대로 쓰고 있다는 거 한세연 연구관님은 아시냐? 연구관님은 오늘 그 어떤 전투에도 깊이 관여하지 말라고 하셨어.”

“그래. 그렇게 말씀하셨지. 절대 서재희나 차인호 쪽으로 붙지 마라. 입장이 필요하다면, 애매하게 김서혁에게 동조하는 듯한 분위기만 풍기라고 하셨지. 그런데 정윤환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하고 있는데?”

강진욱의 눈이 차갑게 사위를 훑었다. 그의 시선이 원기둥에 일정한 간격으로 나란히 놓인 신체 일부와 환하게 켜진 모니터를 지나 유은우를 향했다. 강진욱이 중얼거렸다.

“웃기지 않아? 그 조그만 여자애 하나 때문에 네 인생이 엉망으로 꼬인 게.”

강진욱이 쥐고 있는 봉으로 바닥을 긁었다. 그는 빈정거린다기보다 측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윤환은 콘솔에서 손을 떼고 바로 서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은지 다시 기대었다. 정윤환이 조용히 말했다.

“그 반대야. 내가 유은우 인생을 꼬았지. 너야말로 참견하지 말고 여기서 나가. 내가 여기 있든 말든, 무슨 짓을 하든 대체 뭐가 문제야? 난 내 전부를 너희에게 주겠다고 약조했어. 그 대가로 유은우 하나 받았어. 마무리 짓고 돌아간다잖아. 한세연 연구관님께 허락도 받았어. 그리고…….”

정윤환은 불편한 표정으로 이어 말했다.

“……내가 너 몇 번이나 살려 줬잖아.”

“그게 네 문제야. 물러 터져서는. 넌 사람 못 죽여. 유은우도 못 죽였고, 나도 못 죽였지. 넌 언제나 기회를 날리고, 자꾸만 벌어지는 불행의 틈을 네 몸뚱이 하나로 막고 있어. 네가 적이라면 상관없지만, 아군으로 약점이 되니 유감이야.”

강진욱이 몇 걸음 다가왔다. 봉이 바닥을 긁으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유은우 씨, 내가 재미있는 거 하나 알려 줄까?”

정윤환이 기우뚱 중심을 잃었다. 유은우는 황급히 그를 잡았다. 정윤환이 무너지듯 주저앉으면서 그의 이마가 유은우의 팔에 닿았다. 불덩이 같았다. 유은우는 정윤환이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를 악물고 일어서려는 그의 어깨를 강하게 눌러 바닥에 앉혔다. 살짝 고개를 들며 스크린을 확인했다. 73%.

“내가 말했지? 우리 같은 유적지 출신이라고. 정확히는 반란군 내에서 태어났지. 당신 부모는, 뭐라고 해야 하나, 무난하게 제 명대로 살기는 글러 먹은 케이스였어. 아비는 지나치게 정의로웠고 어미는 지나치게 똑똑했지. 네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죽어 버렸지만. 넌 나와 함께 반란군 본부에서 함께 자랐어. 한세연 연구관이 널 예뻐했지. 네 부모와 막역한 사이였거든.”

강진욱은 유은우 쪽으로 다가오던 걸음을 멈추었다. 과거를 더듬는지 그가 눈을 찡그렸다. 유은우는 무릎을 꿇고 정윤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의 머리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 숨이 색색거렸다. 옅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더니 식은땀이 흥건하게 묻어 나왔다. 정윤환이 유은우의 목덜미로 깊이 파고들었다. 그가 작게 속삭였다. 열에 들떠 호흡이 가빴다.

“얼마 남았어?”

유은우는 정윤환을 고쳐 안는 척하며 스크린을 보았다.

“76%. 내가 시간 끌어 볼게.”

“가지 마. 그냥 있어…….”

정윤환이 유은우의 옷자락을 그러잡았다. 유은우는 그 손을 떼어 내고 일어섰다. 정윤환을 보호하듯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강진욱은 바닥에 봉을 짚고 서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유은우나 정윤환을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만큼 이쪽이 별 볼 일 없다는 뜻이었다. 김서혁이 승리를 확신하는 전투에서 대놓고 난민들에게 대피 방송을 내보내는 것처럼.

승산이 없었다.

유은우는 강진욱의 걸음걸이나, 서 있는 자세에서 어떠한 습관이나 버릇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그가 빈틈을 보였을 때 무기를 빼앗고, 여기서 빠져나가야 했다. 다만, 바깥의 소음. 바깥에서 싸우려면 정윤환이 정신을 잡고 있어야 했다. 유은우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시계만 가지고 왔어도. 아니, 오른손만 멀쩡했어도.

문득 백정명에게 쓴 회복제가 떠올랐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쓸 수 없었다. 유은우의 몫이 아니었다.

“넌 좀 특별했지.”

강진욱의 시선이 허공을 더듬었다. 그가 말했다.

“동조율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너는 또래 아이들보다 좀 더 단단하고, 뭐라고 해야 하나, 타인의 아픔에 예민하게 반응했어. 가끔 공습경보가 울리면 본부의 아이들은 지하 대피소에 모이곤 했는데, 그럴 때면 넌 아이들의 불안과 걱정을 끊임없이 흡수했지. 애들이 널 많이 의지했어. 나도 마찬가지였고…….”

“야!”

순간 유은우는 엄청난 힘에 떠밀려 휘청거렸다. 거의 고꾸라질 뻔했다. 겨우 중심을 잡고 보니, 정윤환이 완전히 분에 찬 기세로 일어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유은우를 밀쳤다는 사실도 거의 깨닫지 못한 채 강진욱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똑바로 서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까무룩 정신을 놓칠 것 같더니, 지금은 당장에라도 강진욱의 멱살을 잡아챌 기세였다.

“씨발, 너 진짜. 야, 이 개새끼야! 너 나한텐 그런 얘기 한 적 없었잖아! 너 나한테 유은우 이름까지 물어봐 놓고. 아예 모르는 척 시치미 뚝 떼고!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몇 번이나 너한테 물었어. 너도 본부에서 자라났고, 유은우도 여덟 살 때까지는 한세연 연구관 밑에서 컸다고 해서, 내가, 내가 몇 번이나 물어봤잖아. 혹시 유은우랑 안면이 있냐고. 실험체와 연구원으로 만나기 전에 본 적이 있냐, 혹시 아냐고 거듭해서 물어봤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때는 한마디도 없다가, 어떻게, 내가 너 한세연 연구관한테 들키기 직전마다 몇 번이나 모른 척 감싸 줬는데…….”

강진욱이 봉을 들었다가 바닥을 내리찍었다. 쾅.

“정윤환, 말은 바로 하자. 넌 날 감싸 준 게 아니고, 내버려둔 거야. 엄연히 다르지. 넌 그때 나한테서 너 자신을 본 거야. 너나 나나 스파이로 똑같았으니까. 넌 임유현의 지시를 받아 반란군에 들어왔고, 난 반란군의 지시를 받아 도시연합군으로 들어갔고. 네가 반란군에게 매력을 느꼈듯, 나도 군에 매력을 느꼈어.”

침묵이 희었다. 정윤환이 이를 악문 사이로 뱉었다.

“차인호한테 뭘 받기로 했어?”

“깨끗하게 손 털고 나도 시민의 반열에 들어갈 거야. 유은우 목만 따 가지고 가면 충분해. 굳이 정윤환 너까지 손대고 싶진 않아.”

“차인호가 유은우의 살해를 사주했을 리 없어. 그는 서재희 편이야.”

“겉으로는 그렇지. 차인호도 자존심이 있는데, 제 딸뻘인 서재희 말을 고분고분 듣고 싶겠어? 유은우만 제거해도 김서혁한테 타격이 꽤 클걸. 차인호도 지금 제 전부를 걸고 움직이고 있다고. 재선이 코앞이야. 너만큼이나 절박해. 뭔들 못 하겠어?”

유은우는 뒤로 천천히 물러섰다. 콘솔에 몸을 붙이고 눈을 내리깔았다. 스크린에 새로운 화면이 떠 있었다. 작고 딱딱한 글자들이 수없이 나열되어 있었다. 스크린을 살짝 건드렸다. 화면이 빠르게 위로 넘어갔다.

‘시스템에 접속해서 중립지대로 검색해.’

검색할 필요 없었다. 빽빽한 글씨 중 한 구절이 턱 걸렸다. 유은우는 휙휙 내리던 스크롤을 멈추고, 다시 위로 당겼다.

4. “중립지대”란 동조자의 자율성 향상과 권익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조직의 자치를 인정하는 구역으로 다음 각 목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지역을 말한다.

가.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제21조 제1항 제1호에 따라 도시연합장이 고시하는 지역

나. 동조자 등의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3조부터 제7조까지의 규정에 따른 지역

다. 자유시민 정기 여론조사 결과 유효시민 총수의 100분의 80 이상이 희망하는 지역

……서재희가 그다음에 뭐라고 했지?

“피해!”

순간, 유은우는 정윤환에게 거칠게 밀려 나동그라졌다. 이어 퍽 하는 소리가 났다. 약한 신음. 쓰러지는 소리. 서늘한 직감에 유은우는 바로 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캉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내리꽂히자 소스라쳐 고개를 들었다. 바닥으로 무언가가 날카롭게 날아와 다리를 스치고 떨어졌다. 스크린의 유리 조각이었다.

정윤환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미동도 없었다. 의식을 잃은 게 분명했다.

“이제야 둘만 남았네.”

강진욱이 중얼거렸다. 그는, 정윤환을 후려갈기고 곧바로 콘솔까지 내리치고도 매끈하게 멀쩡한 봉을 다시 주워 들었다. 조금 전까지 유은우가 만졌던 스크린은 금이 쩍쩍 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스크린의 한쪽 부분은 시커멓게 얼룩이 져 죽어 있었다.

“어디까지 얘기했지?”

강진욱이 물었다. 유은우는 허옇게 질려서 그의 뒤에 아무렇게나 쓰러진 정윤환을 바라보았다. 어딜 어떻게 맞은 걸까. 머리는 아니겠지. 그 정도 타격음이었는데 머리를 맞았다면 벌써 피가 흥건해야 했다. 하지만 깨끗했다. 그렇다면 등이려나? 아니면 다리?

죽은 건 아니겠지.

유은우는 주저앉은 채로 주춤 몸을 물렸다. 막상 정윤환이 쓰러지고 나니, 강진욱을 상대로 무기를 빼앗겠다는 야심은 물 건너간 지 오래였다. 앞이 깜깜했다. 나 생각보다 정윤환에게 의지를 많이 하고 있었구나. 시계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정윤환에게 들을 얘기가 있는데. 듣게 된다면 해야만 하는 말도.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올라왔다.

그때였다. 바닥에 널브러진 정윤환의 손끝이 약간 떨렸다. 마지막 경련인지 의식의 증거인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심장에 불이 반짝 켜진 것 같았다.

유은우는 천천히 강진욱을 살폈다. 그는 봉을 바닥에 딱 짚고 거기 의지해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가끔 자세를 고칠 때도 한쪽 다리에 유난히 체중을 실었다. 기대거나 기울거나. 똑바로 서 있질 못했다. 유은우는 멀쩡한 왼손을 한 차례 쥐었다 풀었다. 옆에 떨어져 있는 유리 조각을 집어 재킷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천천히 일어섰다.

“나도 정윤환처럼 한세연 연구관을 좋아해.”

쓰러진 정윤환을 가만히 보고 있던 강진욱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한세연은 괜찮은 사람이지. 아니, 그런 말로는 부족해. 대단한 사람이야. 네 아버지가 죽고 나서 반란군은 와해 직전이었어. 도시연합에 의탁하자는 여론이 대세였지. 한세연이 그걸 간신히 일으켜 세웠어. 물론 희생도 감수하고 타협도 했지만, 한세연이 없었다면 반란군은 지금쯤 그 명칭조차 바뀌었을지도 몰라.”

유은우는 경청하는 태도를 유지하며 강진욱에게 다가갔다. 직선으로 다가가지 않고 호선을 그렸다. 강진욱은 유은우와 마주 보기 위해 따라서 몸을 틀다가 급기야 원기둥에 등을 기대고 섰다. 습관처럼. 유은우는 강진욱과 서너 걸음만 남겨 두고 멈추어 섰다. 그가 더욱 여유 있도록.

“하지만 완벽한 사람은 아니야. 특히 사람 보는 눈이 지지리도 없지.”

유은우는 자연스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에 유리의 날카로운 감촉이 느껴졌다.

“정윤환 저 새끼가 너한테 미쳐서 앞뒤 분간 못 하고 풀어 줬을 때도 한세연 연구관은 끝까지 정윤환 편이었거든.”

“정윤환이 날 풀어 줬다고?”

강진욱이 혀를 찼다.

“정윤환이 얘기 안 했어?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너 혼자 반란군 본부를 탈출하는 게 가능할 것 같아? 정윤환이 널 풀어 줬다고. 그래서 네가 반란군 절반을 박살 내고 도망가다가 김서혁한테 발각된 거 아냐. 정윤환도 진짜 웃기는 놈이네. 너 하나 때문에 본인 인생을 밑바닥에 처박아 놓고 너한테 생색 한번 안 냈다고? 진짜 답답해서.”

강진욱은 잡고 있던 봉을 원기둥에 기대 놓고는 팔짱을 꼈다.

“정윤환도 정윤환인 게, 널 그런 식으로 풀어 줘서 다시는 우리한테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거든. 그런데 도망도 안 치고 또 돌아오더라. 그러자 이번엔 한세연이 정윤환에게 유은우 처리를 일임하겠다고 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죄, 네가 마무리 지어라. 그렇게 해서 돌아선 반란군의 마음을 돌리라고. 한세연은 정윤환이 우리 눈 밖에 날까 걱정하고 있었어.”

정윤환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한세연은 늘 말했어. 정윤환 같은 타입은 강제로라도 높은 자리에 앉히기만 하면 오히려 좋은 리더가 될 수 있다고. 그 유약하고 동정심 많은 성격에 큰 책임을 지우면 큰 줄기를 오히려 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정윤환 자신은 문드러지더라도 분명히 다수에게 나쁜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한세연은 오히려 서재희 같은 자가 리더 자리에 위험하다고 말했는데, 서재희가 임유현에게 밟히는 동안 사회를 보는 시선이 냉소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했어. 일말의 따뜻함도 없다고. 물론 서재희가 자신의 사람, 자신의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되면 그 재능이 좋게 쓰이겠지만, 어디 보라고. 서재희가 사랑은커녕 지나가는 강아지에게라도 동정심을 가질 수 있겠느냐. 그러니 서재희를 데려오라는 부탁은 더 이상 정윤환에게 하지 마라. 아무도 그 말에 동의 안 했어. 정윤환조차.”

“나한테 이런 얘길 하는 이유가 뭐야?”

강진욱이 코웃음 쳤다.

“나는 8년을 정윤환하고 같이 지냈어. 저 새낀 제 입으로 말도 못 꺼낼 것 같으니까 내가 말한다. 너도 알고나 죽어야지. 너 하나 감싸려다가 사람이 얼마나 철저하게 망가졌는지. 네 목숨 그거 네 거 아니야. 정윤환 거지. 죽기 전에 고맙다는 말은 하고 가라.”

유은우는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혀로 살짝 축였다. 내뱉듯 말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뭐?”

“몸담았던 반란군을 배신하고 차인호에게 빌붙어서 도시 안으로 들어오면 행복할 자신 있냐고.”

강진욱이 한바탕 부숴 놓은 콘솔에서 이따금 스파크가 튀었다.

“행복? 네가 뭔데…….”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게 될걸. 네 눈을 보면 알아. 넌 이런 짓 저지르고도 두 발 뻗고 잘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지금 네가 내게 변명하듯 늘어놓는 것만 봐도 그래.”

강진욱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유은우는 고개를 홱 돌려 정윤환을 바라보았다. 강진욱 또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틈에 유은우는 강진욱을 향해 뛰었다. 강진욱이 재빨리 봉을 잡아 휘둘렀다. 유은우는 일단 맞았다. 강진욱이 봉을 놓고 있다가 잡는 데 시간이 걸려서 그나마 한 번만 맞고 끝났다. 유은우는 바닥에 쓰러짐과 동시에 강진욱의 발목에 유리 조각을 힘껏 꽂아 넣었다. 비명이 울렸다. 유은우는 잽싸게 몸을 굴려 거리를 두었다. 바로 일어서려고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아 한 번 비척거렸다. 등줄기로 통증이 쫙 올라왔다. 그래도 바닥을 깡깡 구르는 봉을 잡아채는 데는 성공했다.

강진욱이 쓰러진 채, 핏발 선 눈으로 입구를 보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기색이었다. 그가 사납게 말했다.

“어차피 너 여기서 못 나가. 밖에서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 운이 좋아 빠져나간다고 해도 네가 갈 곳이 있을 것 같아?”

그러거나 말거나 유은우는 봉으로 바닥을 지탱하며 일어섰다. 다시 강진욱 쪽으로 갔다. 한쪽 다리를 거칠게 갈겼다.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강진욱이 신음을 삼키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유은우는 잠시 그런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강진욱을 협박하여 정보를 더 캐낼 것인가. 작은 문으로 들어가서 핵심 시스템이니 뭐니 눈으로 직접 마주할 것인가. 그냥 시스템이고 강진욱이고 죄 내버려두고 최대한 빨리 이 자리를 뜰 것인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유은우는 바로 정윤환에게 달려갔다.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눈이 감겨 있었다. 코 밑에 손을 대었다. 미약한 숨이 느껴졌다. 멀쩡한 왼손만으로는 그를 들쳐 안을 수 없었다. 부러진 오른손을 직접 사용하지는 못하더라도 오른 팔뚝을 동원하여 겨우 그를 안았다. 키가 한참 차이가 나서 번쩍번쩍 안아 들 수 없었다. 그래도 질질 끌 수는 있었다. 그러나 입구가 한계였다. 아무리 신체 강화 상태라도 부상을 입었기에, 거의 시체나 다름없이 축 처진 정윤환을 유은우 혼자 끌고 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거기다 바깥엔 적이 있었다. 사방에서 레드카펫을 깔아 대며 격려를 해 줘도 모자랄 판에, 흉흉한 적이 밟히도록 깔린 복도를 통과할 자신은 없었다.

이렇게는 못 빠져나가.

상황이 암담하여 눈물이 터지려 했다. 유은우는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그래도 살아 있는 게 어디야. 서재희는 아무 소식도 없는데. 그래도 정윤환은 숨이라도 붙어 있잖아.

그럼 뭐 해. 곧 죽을 텐데.

불길함이 그림자로 들러붙었다. 유은우는 왼손으로 눈을 문질렀다. 손이 차가웠다. 심호흡하며 고개를 들었다. 저만치 쓰러져 있는 강진욱이 보였다. 유은우는 봉을 주워 들었다. 당장에 달려가 그의 위에 올라탔다. 오른손이 멀쩡했으면 그의 멱살을 잡았을 텐데 여의치 못했다. 대신 왼손으로 봉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오른손을 정확히 조준했다.

“입구로 들어오면 사람 숫자가 카운트된다고 했어. 하지만 너는 문이 열려서 공간이 연결되자 인식되었지. 그렇다면 애초에 다른 루트로 들어왔다는 말이 되겠지? 어떻게 드나들었는지 말해.”

정윤환은 사람을 못 죽인다고 했다. 유은우는 달랐다. 죽일 수 있었다. 필요하다면 천천히.

“대답 안 하면 한 군데씩 부러뜨릴 거야.”

그때였다. 우웅, 금속끼리 매끄럽게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 번. 두 번. 그 소리에 강진욱이 숨을 색색거리며 웃었다. 유은우는 바짝 긴장한 채 입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세 번째 소리와 함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도시연합군 제복을 연상케 하는 정장을 입은 키 큰 남자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가 손 안에서 능숙히 총을 굴리며, 입구에 곱게 눕혀져 있는 정윤환을 보고, 막 봉을 높이 치켜든 유은우를 보고, 유은우 밑에 깔려 딱딱하게 굳은 강진욱을 보았다.

“이쪽도 못지않게 살벌하네.”

이선규가 중얼거렸다. 그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자세를 낮추더니 정윤환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짚었다. 그러더니 왼쪽 귀의 인터컴을 만지고 말했다.

“네, 대장. 서재희는 처리했습니다. 나머지 둘은…….”

이선규가 유은우를 빤히 보았다.

“……곧 데려가겠습니다.”

손에서 힘이 풀렸다. 봉이 손아귀를 타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 끝이 막 강진욱의 손가락을 부수기 전에, 유은우는 봉을 고쳐 잡았다. 간신히.

‘서재희는 처리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채 이해하기도 전에, 시야가 먼저 아득해졌다. 눈앞이 희어지기에 다급히 눈을 깜박였다. 이선규가 자세를 낮추고 정윤환에게 호흡기를 물리는 모습이 아주 잠깐 또렷해졌다가, 금세 흐려졌다.

어떡하지. 앞이 안 보여.

유은우는 고개를 숙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제는 밑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는 강진욱이 보였다. 그는 황망한 눈으로 이선규를 응시하고 있었다. 강진욱의 입이 벌어졌다. 그가 필사적으로 이선규를 향해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유은우는 도통 들을 수가 없었다. 귀에 물이 찬 듯 먹먹하여 머리가 어지러웠다. 강진욱이 거칠게 움직여, 유은우는 중심을 잃었다. 본능적으로 손에 쥐고 있던 봉을 내리찍었다. 봉은 강진욱의 손과 약간의 틈만 두고 바닥과 쾅 부딪혔다. 강진욱이 바싹 굳었다. 유은우는 봉에 의지해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때였다. 바닥에 눕혀져 있던 정윤환이 얕게 몸을 떨었다. 아주 작은 기척이었지만 유은우는 놓치지 않았다.

‘서재희는 처리…….’

그만 생각해.

이를 악물었다. 만약 혼자였다면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정윤환의 숨이 붙어 있었다. 지금 유은우가 포기하면 정윤환도 끝장이었다. 그동안 소문으로만 들었던 정윤환의 소소한 하극상은 늘 김서혁의 재량으로 무마됐으나, 이번은 달랐다. 귀엽게 넘어갈 만한 장난이 아니라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배신이었다. 김서혁은 정윤환의 설계를 알아보았고, 거기 드리운 서재희의 그늘 또한 직감했을 터였다. 김서혁이 손수 정예군으로 들인 그 정윤환이 인터컴으로는 군의 지시를 듣는 척하면서, 정작 뒤로는 서재희를 돕고 있다는.

“뭐? 그럼 복도에 지천으로 깔려 있던 놈들이 다 네 친구들이었냐?”

이선규가 강진욱을 보며 짜증스럽게 이어 말했다.

“많긴 많더라. 전부 상대하느라 어깨 빠지는 줄 알았네. 야, 유은우. 너 깔고 앉아 있는 걔 대체 뭐냐. 우리 편은 아니고, 그렇다고 네 편도 아닌 것 같고. 대장이 파악 못 한 세력이 또 따로 있었나? 아니면 대장이 굳이 신경 안 써도 되는 잡것들인가? 임유현 하나 없어졌다고 고새를 못 참고 별 희한한 것들이 다 튀어나오네.”

이선규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밤이 너무 길다.”

강진욱은 더는 아무 말 않고 눈을 감아 버렸다. 그의 몸에서 힘이 슥 빠지는 게 느껴졌다.

유은우는 갈피를 잡으려 애썼다.

적은 둘이었다. 강진욱, 이선규. 강진욱은 다리를 부러뜨려 놓았고, 이선규는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였다. 그럼 누구를 먼저 상대해야 하는가는 명확했다. 게다가 이선규는 자기 입으로 복도의 강진욱 세력을 전부 해치웠다고 말했다. 그럼 굳이 강진욱을 두들겨 패서 숨겨진 루트를 찾지 않아도 지금 텅 빈 복도를 통해 도망갈 수 있었다.

이선규만 제압하면.

유은우는 최대한 동작을 낭비하지 않으며 빠르게 튀어 올랐다. 두 발로 바닥을 똑바로 딛고 서서 봉을 단단히 겨누었다. 김서혁이 했던 조언이 스쳐 갔다. 오래된 습관처럼.

‘군인은 총이 없어도 싸울 수 있어야 해. 물리적인 무기를 무시하면 큰코다친다. 가끔은, 시간을 들여 온을 빚어내는 것보다 몽둥이로 한 대 후려치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어. 상대가 네 총만 견제할 때는 더욱. 많은 동조자가 원시적인 무기를 무시하고 격투를 깔보지. 어리석은 생각이야. 총 없이도 싸울 수 있다면 그건 네 결정적인 한 수가 될 거다.’

여기서 문제는, 이선규 또한 김서혁 밑에서 배웠다는 사실이었다.

이선규와 겨루었던 수많은 훈련이 떠올랐다. 그가 얼마나 격투에 소질을 보였는지 돌이키면 새삼 뒤가 서늘했다. 심지어 오래전에 이선규에게 장난 반 진심 반으로 호되게 후려 맞았던 허벅지가 다시 뻐근하게 아플 지경이었다. 김서혁이 참관한 훈련에서였고, 유은우가 설계 공부를 하다가 이선규의 군화 위에 토한 다음 날이기도 했다.

유은우는 봉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선규가 미간을 좁혔다. 그는 유은우가 두렵다기보다 그저 번거롭다는 기색이었다.

괜찮아. 왼손이어도. 할 수 있어. 이선규는 지금 무기가 없잖아. 내가 유리해. 여기선 총도 쓸 수 없고. 이선규만 쓰러뜨리고 정윤환 데리고 여기서 나갈 거야. 나가서……. 숨이 탁 막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짚이는 곳은 차인호의 거처였다. 다만 서재희가 잘못된 상황에서, 차인호가 서재희와 한팀이었던 정윤환과 유은우의 안위를 보장해 줄 것인가 불투명했다.

옆에서 강진욱이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그는 부러진 다리 때문에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했다. 겨우 상체만 일으켜 앉은 그와 거리를 둔 채, 유은우는 다시 이선규를 보았다. 또박또박 물었다.

“대장이 우릴 잡아 오라고 했어? 안 죽이고? 군 지시를 거부하고 움직이면 즉결처분이잖아. 그런데 왜? 우릴 데려가서 뭘 어쩌려고? 싹싹 빌면 용서해 줄 거야? 아니면 군 재판으로 넘기려고? 그것도 아니면 누구처럼…….”

유은우는 흘깃 강진욱을 보았다.

“……내 몸뚱이가 필요해?”

이선규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유은우를 보고 있지 않았다. 이선규의 시선은, 처참하게 망가져 이따금 스파크가 튀는 콘솔을 지나, 원기둥에 둥그렇게 놓여 있는 짤막한 손가락들과 큼직한 안구에 머물렀다가, 이어 빠끔 열린 문틈에 멎었다. 이선규의 눈이 커졌다. 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열려 있어.”

이선규는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더니, 혼잣말했다.

“저기가 열리긴 열리는구나. 서재희가 말한 그대로네.”

유은우는 혹여나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았다. 어떤 대답을 들어도 버틸 수 있도록. 여전히 봉을 단단히 겨눈 채, 물었다.

“서재희 처리했다는 게 무슨 뜻이야?”

열린 문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이선규가 고개를 돌려 유은우를 보았다. 이선규는 약간 화가 난 것 같았다. 그가 대답했다.

“죽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어?”

“그게 무슨 뜻이야. 똑바로 말해!”

“나야말로 묻고 싶어! 서재희 그 새낀 대체 뭐 하는 새끼야?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되레 거래를 제안하질 않나. 상황을 군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질 않나. 감정이고 뭐고 인형처럼 깨끗한 눈으로 날 보는데, 사근사근한 말투로 남의 약점을 후벼 파듯이. 사람 맞아? 내가 정말, 소름이 끼쳐서…….”

“처리했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묻고 있잖아!”

“거짓 보고야!”

침묵이 흘렀다. 유은우는 이선규의 일그러진 낯과 마주하면서, 거칠게 날뛰는 호흡을 한 풀 한 풀 가라앉히면서 눈물을 간신히 참아 냈다. 눈으로는 이선규의 왼쪽 귀를 더듬었다. 인터컴은 하얀 색깔이었다. 서재희는 검은 인터컴이 자기 편이라고 했는데.

“대장한테 왜 거짓말을 해? 서재희 따라서 차인호한테 붙은 거야?”

유은우의 물음에 이선규가 질린다는 표정을 했다.

“내가? 돌았냐?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도시연합 정예군이야. 아무리 내가 비겁하게 느껴져도 눈 감고 귀 막고 끝까지 참고 버텨서 은퇴하고 연금도 받아먹으며 편하게 살 거라고. 그러니까…….”

이선규가 성큼 다가왔다.

“……그거 내려놓고 여기서 나가자. 서재희가 말한 대로 해야 하니까.”

“대장 편이라면서 왜 서재희가 말한 대로 한다고 그래?”

“서재희 그 새끼한테 협박당했으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믿어?”

유은우는 반사적으로 물러섰다. 이선규를 어디까지 신뢰해야 하는지 확실치 않았다. 유은우가 망설이는 사이, 이선규가 폭풍처럼 다가와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유은우는 일단 무기는 빼앗기지 않았으면 했다. 이선규가 손을 뻗으며 그의 발이 유은우의 두 발 사이로 들어오고, 유은우가 봉을 휘두르는 것을 그가 매끄럽게 피하고, 이어 틈을 파고드는 그의 공격을 유은우가 능숙히 비끼고 착지하며, 둘은 한 호흡 만에 서너 번 물 흐르듯 부딪혔다.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싸움마저 친숙했다.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애초에 학교에 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쭉 군에 있었더라면. 이선규와 장난처럼 다투고, 대장이 눈으로 하는 칭찬을 받고 기뻐서 잠을 설치고, 설계 공부를 하다가 강지원에게 핀잔을 듣고, 속이 뒤집히던 반란군 진압도 점점 익숙해지고. 그리하여 지금 이것도 단순한 훈련 중 하나였다면.

마음이 헐거워진 틈을 이선규가 놓칠 리 없었다. 오른손잡이인 유은우가 왼손으로 다루는 서툰 봉도.

이선규가 유은우 깊숙이 파고들었다. 언제나 그랬듯, 유은우는 오른쪽으로 치우쳐 방어했다. 그러면서 아차 했다. 버릇처럼 오른쪽으로 기우니까 이선규가 그걸 알고 비어 있는 왼쪽을 치는 거라고 김서혁이 늘 말했었는데…….

“또.”

이선규가 질책하듯 한마디 했다. 그의 무릎이 유은우의 왼쪽 옆구리를 강타했다. 유은우는 숨을 삼켰으나 봉을 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이선규의 손이 다가왔다.

“미안.”

오른쪽 손목을 잡혔다. 이선규가 일부러 스치듯 약하게 쥐었다는 걸 유은우도 알았다. 그러나 이미 부러져 있는 손목의 고통은 어마어마하여 유은우는 비명을 삼키며 몸을 움츠렸다. 바닥에 탕, 하고 봉이 떨어졌다. 몇 번 튕기기도 전에 이선규가 그것을 잡아챘다. 유은우가 자책하며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을 때, 이선규는 이미 뒤돌아 등만 보였다. 그는 유은우에게서 빼앗은 봉을 꽉 잡고 강진욱을 향해 휘두르고 있었다. 딱 한 번. 간결하고 묵직하게.

퍽.

강진욱이 쓰러졌다.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고 새빨간 피가 쭉 번졌다.

이선규가 돌아섰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유은우 또한 단번에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은, 이상하게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선규가 유은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무덤덤하게 말했다.

“우리 얘길 다 들었는데 살려 둘 순 없잖아.”

그러더니 피와 살점이 묻은 봉을 저만치 던져 버렸다. 일부러 유은우를 안심시키려는지 신중하고 과장된 동작이었다. 봉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 자취를 따라 핏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이선규가 더러워진 손을 가볍게 재킷에 문질러 닦았다. 그러고는 턱짓으로 열린 문을 가리켰다.

“들어가 봤어?”

유은우는 바짝 경계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선규가 갑자기 눈을 굳히더니, 검지를 제 입술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인터컴을 눌렀다.

“어, 찾았어. 둘 다. ……윤환이 상태가 많이 안 좋긴 한데, 약 물려서 보내려고. 은우? 기절시켰는데. 아냐, 지원 필요 없어. 내가 모함에다 요청해 놨어. 금방 올 것 같아. 박민준? 몰라. 연락 안 돼. 대장 인터컴이 부서져서 박민준이 여분 전달하러 간다고 했어. 그게 마지막. ……어, 나도 오늘은 좀 힘들다. 배치도가 먹통이니까 상황이 안 보여서…….”

유은우는, 이선규와 달리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제 인터컴을 왼쪽 귀에서 빼냈다. 체온에 더워져 따뜻해진 인터컴을 만지작거리다가 주머니에 넣었다.

“혼자 알아서 해. 나 거기 못 가니까. 차예원 때문에. 차인호하고 합류하기 전에 잡아야지. 아, 싫다고. 그건 소연주한테 시켜. 난 후발대로 갈게. 나 신경 쓰지 말고 대장이랑 먼저 가. 어.”

이선규가 인터컴을 꾹 누르며 초조한 기색으로 이프를 살폈다. 그가 빠르게 말했다.

“시간 없으니까 본론만 말할게. 나 서재희 잡으러 갔고, 완전히 엿 먹었어. 그놈이 내 신상을 가지고 날 협박했어. 그래서 약속했어. 너희 둘, 빼내 주겠다고.”

유은우는 찬찬히 이선규를 살폈다. 그는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며칠에 걸친 지난한 전투에서도 실없는 소리를 해 대서 동료들을 진저리치게 하던 그 장난기도 여유도 새파랗게 가시고,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이선규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마구 쓸어 넘겼다.

“서재희가 너한테 물어보라고 했어.”

유은우는 잠깐 숨을 멈추었다. 이선규의 억양 하나 놓칠까 그를 빤히 주시했다.

“낙원의 이론 핵심 시스템실이 열려 있을 테고, 유은우가 그것을 봤을 것이다. 그러니 선택하게 하라고. 도시연합에서 도망쳐서 다 잊고 중립지대의 일원이 되어 새 삶을 살고 싶다면 마지막 문구를 살리고, 그런 마음이 들지 않으면 새로이 학교를 추가하라고. 무엇을 선택하든 네가 원하는 대로 이뤄 주겠다고 했어, 반드시.”

유은우는 눈을 문질렀다. 눈가는 뜨거웠고 손은 차가웠다. 혹시 이선규가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서재희 핑계를 대는 걸까 의심하던 경계가 즉각 무너졌다. 이선규의 입으로 들었지만, 서재희가 거기 있었다. 아주 또렷하게.

유은우는 왼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형편없이 구겨진 콘솔과 금이 간 스크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망가져서 조작이 가능할지 모르겠어.”

이선규가 콘솔로 다가가 스크린을 손으로 거칠게 쓸었다.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눈부시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가 만져 볼 테니까 저기 들어가서 보고 와. “

“넌 안 봐? 저기 열려 있는 거 처음 본다면서.”

이선규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안 봐. 보면 나 자신이 너무 싫어질 것 같아서.”

유은우는 더는 지체하지 않았다. 널브러진 강진욱과, 이제는 호흡이 제법 안정된 정윤환을 지나쳐, 빠끔 열린 문을 밀었다. 문은 깜짝 놀랄 정도로 매끄럽게 열렸다.

안은 어두웠다. 아주 작고 연약한 불빛들이 사방을 에우고 있었다. 검은 도화지에 미세한 금가루를 흩어 놓은 것처럼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하여 식별이 어려웠다. 곧 어둠이 눈에 익었다. 사위가 아스라이 도드라졌다. 자잘한 격자무늬. 처음에는 벽이 타일로 이루어져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아주 작고 반듯한 칸의 연속이었다. 손톱만 한 그 칸마다 이름과 함께 일련번호가 쓰여 있었다. 시민등록번호. 유은우는 가지지 못한.

유은우는 차인호의 지문을 덧댄 손가락으로 아무 칸이나 살짝 가져다 대 보았다. 특별히 고른 칸은 아니었다. 그저 손을 뻗기 좋은 높이여서 그랬다. 칸에 손이 닿기도 전에 허공이 불룩 솟아나는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곧 그 칸이 환하게 빛나며 황금색 빛줄기가 분수처럼 뻗어 나오더니 온갖 다른 칸들과 연결되었다. 그리고 눈앞으로 무수한 정보가 쏟아졌다.

낯선 이의 이름. 주소. 생년월일. 나이. 동조율. 설계와 타격의 비율. 기초학교 성적. 중앙학교 입학일. 도시연합 중앙학교 랭킹. 소속된 직장과 소모임. 재산. 건강 검진 기록. 가입된 보험과 단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순위와 가입된 사이트 목록. 소비 패턴.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당기기까지의 소요 시간. 타깃이 사람일 때와 사물일 때 홀스터에서 총을 뽑아내는 속도의 차이. 지금까지 살해한 사람은 두 명으로 그 명단이 따로 떨어져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조각 영상들이 색종이로 접은 새처럼 공중을 나부꼈다. 유은우는 손끝으로 영상을 훑었다. 차인호의 지문이 닿을 때마다, 영상들은 순식간에 부풀어 재생되다가 다시 작아지곤 했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거나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지나는 소소한 영상도 있었고, 졸업이나 결혼, 어린아이의 목을 조르는 중요한 영상도 있었다. 도시연합 중앙학교 시절 영상은 없었다. 유은우도 그 이유를 잘 알았다. 학교엔 CCTV가 한 대도 없었다.

유은우는 고개를 숙였다. 무릎께에 수많은 그래프가 화려하게 빛나며 높이 솟아 있거나, 흐리게 깜박이며 바닥에 자잘하게 깔려 있었다. 폭력도와 대인 관계, 사회 적응도는 상이었다. 공감 능력은 바닥을 기었다. 집중할 때 심박 수가 낮아지면서 냉정을 기하는 그의 성향은 높이 살 만하므로, 동조율 측정소로의 배치가 제격이라는 진로 상담이 있었다.

그리고 등급이 매겨져 있었다. C등급.

유은우는 손을 들어 그것을 눌러 보았다. 상세 창이 녹인 유리처럼 매끄럽게 떨어졌다.

폭력적이나, 동조율 측정소의 성실한 직원으로 도시연합에 기여도가 상당하므로 전체 사회에 이익임. 단, 2년 이내 중범죄 1회 이상 발생하거나, 석 달 뒤 태어날 자녀가 비동조자일 경우 등급 하향 요함.

유은우는 다시 한번 자신이 눌렀던 칸을 바라보았다. 시민등록번호가 새겨진 투명한 칸의 안쪽이 비로소 보였다. 정사각형의 작은 메모리가 들어 있었다. 유은우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손을 휘저었다. 눈앞을 떠다니던 정보들이 유은우의 손길에 후루룩 밀려났다. 한 칸으로부터 여러 갈래로 뻗어나 수많은 다른 칸들과 연결된 빛줄기를, 살짝 쓸어 보았다. 낯선 이의 온갖 감정과 기억이 파도처럼 쏟아졌다.

그것은 대인 관계였다. 메모리의 주인이 누군가를 만나거나, 감정이 쌓이거나, 혹은 이별했음에도 잊지 못할 때, 선이 하나씩 하나씩 더해졌다. 어쩌다 직장에서 한두 번 마주친 사람과는 희미한 한두 줄에 그쳤으며, 가족일 경우 오랜 시간 수많은 빛줄기가 쌓이고 겹쳐져 빛 덩어리처럼 보였다. 유은우가 그 빛줄기들을 손끝으로 더듬을 때마다, 각각의 기억이 튀어나오며 현악기를 조율하듯 묘한 소리가 울렸다.

유은우는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나이별로 나뉜 인생 그래프가 파도처럼 허공을 굽이쳤다. 20대의 어딘가에 범죄기록 두 개가 참고 사항으로 나란히 붙어 있었다. 불법 인신매매상 밑에서 일하며 어린 동조자 둘을 구타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게 요지였다. 하나는 목 졸라 죽이고, 하나는 배를 걷어차 죽였다. 유은우는 그 살해 현장의 한쪽에 폐품처럼 쌓여 있는 또 다른 어린아이들 틈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지금보다 한참 어렸으나 분명히 이목구비가 남아 있었다. 유은우 자신이었다.

유은우는 영상으로 손을 뻗어 어린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환하게 빛을 뿜던 낯선 이의 정보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칸과 칸을 잇던 빛줄기도 사그라졌다.

그리고 새로이 작은 칸 하나가 반짝 빛을 뿜었다. 유은우의 키보다 약간 높은 곳에 있었다. 시민등록번호는 없었다. 매끈한 표면에는, 열 자리 시민등록번호가 아닌 전리품등록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A-23. 유은우.

― 최근 변경 사항입니다. 도시연합장의 권한으로 해당 전리품의 모든 자료가 일시 개방됩니다. 예약된 열람을 먼저 실행하시겠습니까?

창이 반짝 켜졌다. 예약 리스트였다. 김서혁의 이름으로 무수한 예약이 있었다. 거의 한 달 간격으로 꾸준했다. 전부 ‘도시연합장 승인 불가’가 줄줄이 붙어 있었다. 가장 최근 예약은 불과 이틀 전으로, ‘승인 완료 및 1회 열람 가능’으로 표시되어 있었고, 바로 밑에 ‘미열람’ 문구가 반짝거렸다. 열람 요청 자료는, ‘전리품 등록 전 단계 감정 표시선’이었다.

가만히 눌러 보았다.

꽃송이가 만개하듯 빛이 터져 나왔다. 유은우 칸이 아니었다. 손이 닿을까 말까 한참 위쪽의 어떤 칸이었다. 그 칸에서 선명한 황금색 빛줄기가 수없이 뻗어 나와 유은우 칸으로 이어지고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유은우는 뒷걸음쳐서 칸의 이름을 확인했다.

정윤환.

손을 뻗었다. 조심스레 쓸어 보았다. 빛의 선이 손가락에 감겼다가 떨어지며 청아한 소리를 냈다. 방금 낯선 사람의 빛줄기를 만졌을 때는 기억과 감정이 재생되었는데, 이번엔 차가운 경고음뿐이었다.

― 시스템 오류로 인한 무의미한 결과입니다.

유은우는 물끄러미 그 빛줄기를 바라보았다. 점점 더 불어나고 점점 더 선명해졌다. 빛이 겹겹이 쌓이며 어찌나 눈이 부신지 똑바로 보기 어려워질 때쯤, 열람이 종료되었다.

유은우는 잠깐 그렇게 서 있었다. 빛은 사라졌으나 그 잔상으로 눈이, 가슴이, 얼얼했다.

밖에서 이선규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유은우는 밖을 내다보았다. 이선규가 초조하게 이리 나오라 손짓을 했다.

“왜 안 나와. 계속 불렀는데.”

“못 들었어.”

“어떡하냐.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어서.”

이선규가 턱짓으로 콘솔을 가리켰다.

“스크린 한쪽이 완전히 죽어 버려서 인식이 안 돼. 삭제된 문구는 못 살려. 다행히 콘솔 망가지기 전에 누가 추가 항목을 활성화해 놔서 학교 추가는 가능한데. 어떡할래? 미치겠네. 서재희, 나중에 나보고 제대로 안 했다고 약속도 안 지키는 거 아니야? 내가 부순 것도 아닌데…….”

유은우는 시스템실에서 나왔다. 쓰러져 있는 강진욱의 품을 뒤져 임유현의 손가락을 찾아 쥐었다.

“서재희는 중립지대로 안 가겠지?”

“차인호하고 손잡고 이렇게까지 난장판을 벌여 놨는데 차인호가 서재희 꽉 붙들고 본전 뽑으려고 하지, 어디 가게 가만 놔두겠냐.”

유은우는 바닥에서 피 묻은 봉을 집어 들었다. 다시 시스템실로 들어갔다.

“정윤환은?”

“안 갈걸. 부모님이 안 갈 테니까. 그렇게 잘나가는데 뭐 하러 다 버리고 중립지대로 들어가. 윤환이 걔가 말은 더럽게 안 들어서 그렇지, 부모 버리고 혼자 어디 갈 놈은 아니야.”

“그럼 나도 중립지대는 안 가.”

유은우는 시스템실 중앙에 섰다. 아무 벽이나 보고 마주 섰다. 어딜 갈겨도 상관없었다. 사방에 빼곡했으니. 봉을 단단히 쥐고 높이 치켜들었다. 이선규가 달려오는 기척이 났다. 그토록 의도적으로 시스템실 내부를 보지 않으려 애쓰던 이선규가 문가에 발을 걸치고 다급히 소리 질렀다.

“야, 너 거기서 뭐 해!”

“학교 추가해 줘.”

유은우는 봉을 힘껏 휘둘렀다.

“왜 그랬어?”

이선규가 물었다. 그는 신호를 기다리며 룸미러로 유은우를 보았다. 유은우는 그의 시선을 비껴내며 정윤환의 이마를 짚었다. 뜨거웠다. 정윤환은 유은우의 무릎을 베고 뒷좌석에 길게 누워 있었다. 유은우는 손끝으로 조심스레 정윤환의 젖은 머리칼을 걷어 올렸다. 이어 그의 가슴을 가만히 눌렀다. 부드러운 셔츠 아래로 간간이 뛰는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차가 출발했다. 차창 밖으로 휘황한 조명이 스쳤다. 이선규가 말한 대로, 군의 정찰기가 차인호와 그의 세력을 쫓고 있었다. 따가운 조명이 지나갈 때까지, 유은우는 손으로 정윤환의 눈가를 가려 주었다. 손아래에서 따뜻한 숨결이 닿았다 스러졌다 했다.

이윽고 이선규가 핸들을 급하게 꺾었다. 차가 급커브를 하며 몸이 기울었다. 유은우는 정윤환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그를 반쯤 껴안아 보호했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유은우의 발밑에선 차가운 금속이 끊어진 전선을 매달고 굴러다녔다. 유은우가 차에 탄 직후 잡아 뜯은 CCTV였다.

자정이 한참 지나 새벽이 희끗했다.

차에 타자마자 이선규가 강제로 종료시켜, 계기판의 자동운행 시스템은 꺼져 있었다. 건조하게 달리는 자율 주행 자동차 틈을, 이선규는 요령 있게 쏙쏙 빠져나갔다. 그는 다소 서툴렀지만 어쨌든 직접 운전하고 있었다. 자동항법이 제한된 함선을 제하고, 많은 교통수단이 자동화된 지 오래였다. 직접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서재희가 내 신상을 가지고 날 협박했어.’

유은우는 물끄러미 이선규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이선규가 운전을 배운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서재희가 도시연합의 눈을 피하고자 온디딤을 공부했던 것처럼. 불쑥 물었다.

“옛날에 반란군 소속이었어?”

이선규는 대답이 없었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굵은 빗줄기가 차체를 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유은우는 정윤환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움직여 그의 귀를 덮었다.

대로를 벗어나자 한산해졌다. 이선규의 운전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가 낮게 말했다.

“내가 말했던가? 제7도시 출신이라고.”

유은우는 눈을 들어 이선규를 보았다. 그는 앞만 주시하고 있었다. 군에서 그리 오랜 시간 함께 부대끼면서도, 유은우는 유독 이선규의 신상에만 어두웠다. 그는 소문에 빨라 항상 가십을 끌어오면서도 언제나 본인의 이야기는 함구해 왔다. 이선규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말했던가.’라고 말문을 텄지만, 그도 유은우도 이런 대화가 처음임을 알고 있었다.

“기초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교통사고. 당시에 보도가 크게 났어. 어떤 미친놈이 술을 마시고 상사의 차를 훔쳐서 자동운행 시스템을 파손하고 직접 운전대를 잡은 사건이었지. 그 차가 도로를 역주행했는데, 한 고급 승용차와 정면으로 부딪치기 직전에 어떤 경차가 달려와 먼저 부딪치며 겨우 멈춰 섰어. 경차엔 우리 아버지가 타고 있었는데, 즉사했지. 언론에서 말이 많았어. 잘 달리고 있던 경차가 왜 별안간 노선을 꺾어 그 미친놈 차 앞으로 제 몸을 던졌는가. 마치 그 고급 승용차를 보호하듯이. 자동운행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면 경차가 그렇게 자살하듯 달려와 막을 리가 없다. 시스템의 오류인가. 경차 운전자 또한 음주 상태로 직접 운전을 하였는가. 논란이 뜨거웠어. 그 경차는 판매가 중지되고, 평소 술은 입에도 못 대던 우리 아버지 부검 결과가 알코올중독자로 나오고, 자동운행 패턴 공개를 요구하는 시위가 들끓고. 그러다가 묻혔어. 지금은 아무도 기억 못 할 거야. 항상 그렇듯이.”

비가 거세어졌다. 유은우는 갈증을 느꼈다.

“제국시대엔 자동운행 시스템 유통을 법으로 금지했다더라. 자동차가 행인과 충돌 위험에 있을 때, 운전자를 보호할 것인지 행인을 보호할 것인지 판단할 기준이 모호했기 때문이지. 사람은 두 명인데, 기계가 선택해야 하니까. 하지만 도시연합은 망설일 필요가 없었어. 명확한 기준이 있었으니까. 낙원의 이론.”

신호를 받아, 이선규는 속도를 줄였다. 교통 상황을 미리 계산해 매끄럽게 멈춰 서는 다른 차들에 비해 한 박자 늦었다. 그래도 똑같이 정지선에 나란했다.

“그 고급 승용차엔 제7도시에 출장 차 들른 백정명 의원이 타고 있었고, 경차엔 평범한 회사원인 우리 아버지가 타고 있었어. 백정명은 객관적으로 검증된 인재였고, 우리 아버지는 그저 그런 비동조자였지. 낙원의 이론은 사회를 위해 둘 중 하나를 선택한 거야. 우리 아버지를 방패 삼아 백정명을 구한 거지.”

신호가 바뀌었다. 차가 다시 출발했다.

“3144라는 말이 있어. 수험생 사이에 나도는 말인데, 제3도시 출신까지는 그래도 제1도시에 거주할 가능성이 있지만, 제4도시부터는 그냥 거기서 평생 살다 죽는다는 말이야. 제4도시 밑으로는 계층 이동 따위 꿈도 못 꾼다는 뜻이지. 그래서 사람들이 서재희에게 열광해. 정보가 흘러 들어가지도 못하는 제8도시 촌구석 출신. 그 변변찮은 부모마저 폭격으로 잃고도 실력 하나로 임유현의 후원을 받았으니. 여태 없었고, 다시는 없을 케이스. 도시연합이 서재희를 놓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 있어. 사회의 책임을 개인의 역량으로 미룰 수 있으니. 서재희를 보라고. 노력하면 된다. 사회엔 문제가 없다.”

이선규의 말은 유은우의 귀로 흘러들어와 명치를 꾹 메웠다.

“나는 서재희나 윤환이처럼 타고난 천재도 아니고, 집안이 좋지도 않아. 순수하게 노력해서 여기까지 올라왔어. 사회를 바꿀 수 없어서 날 바꿨어. 돈이나 명예는 바라지도 않아. 아버지처럼 개죽음당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 나는,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어떤 최악의 사고에 직면했을 때, 시스템이 객관적인 이유로 타인이 아닌 바로 날 선택하길 바라. 버려지고 싶지 않아서 이 악물고 올라왔어. 난 여기서 단 한 계단도 못 내려가. 아무리 서재희가 날 협박한다 해도.”

유은우는 정윤환의 이마를 매만졌다. 까칠한 뺨과 지쳐 늘어진 속눈썹. 수척하게 잠들어 있었으나, 화려한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유은우는, 만약 이선규가 정윤환처럼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설계 천재에, 유복한 집안. 그랬다면 이선규는 행복했을까.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이선규가 동경하는 조건을 모두 갖춘 정윤환의 인생이 그리 평탄치 않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유은우는 눈을 들어 이선규를 보았다.

“모든 사람이 너처럼 생각하면, 나중에 네가 희생자가 되었을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거야.”

이선규가 칼칼하게 웃었다. 그가 되물었다.

“도움? 무슨 도움? 우리 아버지가 죽었을 때 시민들이 나와서 시위를 하긴 했지. 떼로 모여서 길을 막고,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고, 우리 아버지 사고 현장을 재현한 뒤에 삼삼오오 모여 기념사진을 찍고. 나도 거기 있었어. 인파에 밀려서 누군가의 발을 실수로 밟았다고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알아? 네가 말하는 도움이 그런 거야? 그런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여태 무관심하게 살다가 사건 하나 터지니까 제 감정에 취해서 삽시간에 몰렸다가 제풀에 시들해지는 그 시민들? 본인들이 뭐라도 된 것처럼? 웃기고 있네. 타인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이야? 나는 남 안 믿어. 스스로 노력했어.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비싼 개인 과외를 받고 좋은 총을 샀어.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온 것 같아? 자동운행 시스템 유통사에서 입 닫으라고 찔러 준 돈이지. 진짜 도움은 그런 거야.”

이선규가 액셀을 밟았다. 속도가 빨라졌다.

“은우 넌 내 판단이 그르다고 하지만, 내 판단은 내 삶에서 나왔어. 날 제외한 그 누구도 날 비난할 수 없어. 내 삶을 비난할 수 없어.”

유은우가 걸치고 있던 정윤환의 재킷에서 부토니에가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유은우는 그것을 줍기 위해 정윤환의 이마에서 손을 떼었다.

그때였다. 곤히 늘어져 있던 정윤환이 갑자기 손을 뻗었다. 그러더니 제 이마에서 막 떨어진 유은우의 손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유은우는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두 손이 그렇게 허공에 수 초간 머물렀다. 열이 올라 뜨거운 정윤환의 손가락이 유은우의 마른 손을 꼭 감아쥐었다.

자는 줄 알았는데.

정윤환이 눈을 떴다. 그는 눈을 굴리거나 고개를 돌려 유은우를 보지는 않았다. 그는 유은우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운 채 그저 앞만 보고 있었다. 눈빛이 선연했다.

안 잤구나.

유은우는 의식적으로 손에서 힘을 뺐다. 정윤환의 손가락이 유은우의 손바닥을 더듬고, 이어 서툴게 깍지를 껴 왔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렇게 단단히 엮어, 정윤환은 그대로 제 가슴으로 끌어갔다. 그가 다시 눈을 감았다.

손바닥으로는 정윤환의 달뜬 손바닥이 맞붙고, 손등으로는 그의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둘이 진짜 사귀는 거 아니야?”

유은우는 룸미러를 통해 이선규와 눈을 맞추었다. 이선규의 질문에 장난기는 없었다. 냉담하기까지 했다. 그가 덧붙였다.

“서재희가 널 끔찍하게 여기는 것 같더라.”

“선배가 내 얘길 했어?”

다급히 물었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유은우의 손이 절반쯤 빠져나가자, 정윤환의 손에 힘이 더해졌다. 제동이 걸리듯, 다시 손을 온전히 잡혔다.

“눈빛만 보면 알지. 그렇게 철저한 새끼가 못 숨기는 정도면 말 다한 거 아니냐. 윤환이야 말할 것도 없고. 네 이름 누가 지었는지 알아? 윤환이가 지었다.”

“내 이름 대장이 지어 줬잖아.”

“대장이 윤환이 의견을 고른 거지.”

“……뭐?”

처음 듣는 소리였다. 유은우는 정윤환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눈을 반쯤 뜨고 있었다. 인상을 구기고 있어, 유은우는 정윤환이 곧 이선규에게 닥치라고 일갈할 줄 알았다. 그러나 정윤환은 별말이 없었다.

“너 의식 돌아올 때쯤, 대장이 휴게실로 내려왔었어. 이름 지어야겠다고. 대장은 널 훈련시켜서 정예군으로 들일 생각이었으니까, 이왕이면 기존 멤버들하고 이름이 덜 겹치게 하고 싶었던 것 같아. 너도 알다시피 인터컴으로 호명할 때 이름이 확연히 다르면 인지가 빠르니까. 조건이 여러 개 있었는데. 인상이 순하니 이름도 그에 맞춰 둥글었으면 좋겠다고 했어. 다들 의견 하나씩 냈지. 그런데 복도에 윤환이가 지나가다가 멈춰서 몰래 엿듣고 있더라. 학교로 내려가겠다고 허가받은 다음 날이었어. 배웅도 안 받고 그냥 몰래 나가려고 했는지 한 손에 캐리어를 끌고 있더라고. 가지도 못하고 들어오지도 못하고 문가에서 귀만 쫑긋 세우고 있기에, 내가 큰 소리로 한마디 했지. ‘부르기 쉽게 춘자로 합시다. 촌스럽게 지으면 명이 길다는 설도 있고. 우리 멤버랑은 전혀 안 겹치잖아요. 성은 대장 성을 따서 김으로. 김춘자.’ 아니나 다를까, 정윤환이 박차고 뛰어 들어오더라. 캐리어를 요란하게 끌고.”

정윤환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러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아 버렸다.

“들어오더니, 정예군으로 한번 들어오면 수십 년을 부를 텐데 이름이 얼마나 중요하냐며 사주팔자 어쩌고 일장 연설을 하더라고. 거기다 괜히 대장 성을 땄다가 숨겨진 딸이니 어쩌니 헛소문이라도 나면 대장 이제 결혼 적령기인데 여자는 어떻게 만나냐면서. 그리고 온갖 예쁜 이름이란 이름은 줄줄 쏟아 내는 거야. 마지막에 살짝 눈치를 보면서 유은우 이름을 또렷하게 발음하는데, 대장이 그걸 듣더니 우유에 폭 빠진 강아지랑 똑같이 생겨서는 딱 맞다고 그걸로 하자고 했어. 그리고 정윤환, 소연주한테 엄청 깨졌지.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짐 챙겨서 몰래 나가다가 딱 걸렸다고. 그때 알았지. 아, 저 새끼 뭔가 있구나. 유은우 의식 돌아온 타이밍에 느닷없이 도망치듯 학교로 내려가겠다고 고집부린 것도 그렇고. 평소에 학교는 수준에 안 맞다고 깔보던 애가.”

유은우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정윤환의 손아귀 사이로 땀이 서렸다. 매끄러운 셔츠 아래에서 팔딱팔딱 뛰는 정윤환의 심장박동이 한층 빨라져, 유은우는 손을 펼쳐 착각인지 가늠해 보려 했다. 그러나 정윤환이 살짝 손을 틀어, 유은우의 손도 덩달아 그의 가슴과 틈이 벌어졌다. 그 사이로 열기만 아지랑이처럼 떠돌았다.

“윤환이 같은 애들, 얼마나 쉽냐. 애처럼 얼굴에 다 드러나서 어쩔 줄을 모르고. 그에 반해 서재희는 감정을 잘 감춰서 무서울 정도야. 그런데도 널 볼 때면 눈빛이 아예 달라서 소름이 돋던데.”

유은우는 창을 보았다. 굵은 빗줄기가 거세게 타닥타닥 부딪혔다.

서재희가 어디 어떻게 있든, 비는 맞지 않았으면.

유은우는 이선규를 협박하는 서재희를 떠올려 보았다. 어땠을까. 처음 유은우에게 페어를 제안했을 때처럼 냉담했을까. 유은우가 손등에 상처를 입었을 때 테스트를 미루겠냐고 예의상 물었던 것처럼 건조했을까. 둘 다 아닐 것 같았다. 아마 이선규를 앞에 두고 서재희는 서글서글하게 미소 지었을 터였다. 차예원이나 다른 학생들을 대하듯 친절하게. 그러고 보면 서재희는 처음부터 유은우에게 솔직했다. 조건을 명확히 했고,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했다. 표정도 포장도 없었다. 감정은 그 뒤에 자랐다. 그가 드문드문 웃기 시작했을 때, 오래 연습한 기교가 아니라 속에서 흘러넘쳐서 반짝였다.

“난 오히려 유은우 널 모르겠다. 네가 대장 뒤꽁무니 쫓아다닐 때는 동경하는 티가 팍팍 나서, 네가 누굴 좋아하게 되면 만인이 다 알 정도로 표가 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만 유독 모르겠어. 다른 것도 그렇고. 왜 그랬냐?”

“뭘?”

“왜 부쉈어? 손도 다쳤으면서, 봉을 꽉 움켜잡고. 네가 그렇게 막 때려 갈긴다고 해서 시스템이 망가지는 것도 아닌데. 어차피 소용없잖아.”

유은우는 봉을 잡고 시스템과 정면으로 부딪친 감각을 돌이켰다. 단단한 봉의 끝이 벽을 사납게 내리칠 때마다, 작은 칸들은 유연하게 흩어졌다가 다시 본래 자리로 빼곡하게 모여들었다. 유은우는 낙원의 이론에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그렇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휘둘렀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지쳐 주저앉고, 이선규에게 뒷덜미를 달랑 들려 나올 때까지. 이선규가 콘솔을 두드려 중립지대에 학교를 추가하는 동안, 유은우는 눈을 부릅뜨고 핵심 시스템실을 노려보았다. 울지는 않았다. 지기 싫어서.

“화가 나서.”

“왜 화가 나?”

“사람을 두 명이나 죽였는데 능력이 출중하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에 기여한다고 평가하잖아. 범죄를 눈감아 주고. 일상을 감시하고. 사람을 부품으로 보고 있잖아. 나도 진짜 옳은 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그른 게 뭔지는 알아. 이건 아니야.”

“그럼 낙원의 이론 없이 동조자들을 어떻게 제어할래?”

“특별한 방법이 필요해? 정석으로 가면 돼. 죄를 저질렀으면 대가를 치르게 해. 능력 있는 범죄자 하나 없앤다고 사회가 무너져? 인재 놓칠까 봐 벌벌 떨지 말고 바로바로 처벌해. 그 자리에 평범하지만 정직한 사람 두 명, 모자라면 세 명을 앉혀서 일하게 하면 돼. 이게 어려워? 당연한 거 아냐?”

이선규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간단한 산수가 아니야. 동조자끼리 뭉쳐서 비동조자를 억압하면 어떻게 할래. 법을 위반하지 않고도 범죄는 저지를 수 있어. 서서히 확실하게. 그런 조짐이 보이는 동조자를 미리 알아볼 방법은 낙원의 이론뿐이야. 제때 제거해야 해.”

“도시연합 전에도 동조자는 있었고 낙원의 이론 없이 사회를 유지했어.”

“그때는 동조자가 희귀했어. 전체 인구의 0.001%도 채 안 되었어. 그들은 콧대가 높아서 교류하지 않고 개개인이 흩어져 있었어. 사회를 위협하는 집단이 될 수 없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달라. 유효 시민의 1%가 동조자야. 게다가 돈독히 연대하고, 충분히 위험해.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고.”

유은우는 입을 열려다가 흠칫 몸을 굳혔다. 뒤가 서늘했다.

동조자가 왜 갑자기 늘어났지? 도시연합 전후로.

이선규가 핸들을 부드럽게 꺾었다.

“난 대장 의견에 찬성해. 대장이 무슨 명예욕이 있어서 차인호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으려는 건 아니잖아. 그런 사람 아니라는 거 너도 잘 알잖아? 오히려 대장은 후에 역사 속에서 최악의 독재자였다고 평가받는 걸 감수하고 있다고. 낙원의 이론 순기능은 그대로 두고, 기득권이 입맛대로 악용하지 않도록 막는 게, 사회를 크게 흔들지 않고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아니야? 잘 생각해 보고 다시 돌아오는 것도 고려해 봐. 대장이 너희 둘 아끼잖아.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에서도 너랑 윤환이 생포해 오라고 강조했어. 다치게 하지 말라고.”

유은우는 김서혁의 왼쪽 뺨을 가로질렀던 상처를 떠올렸다. 날카롭고 가느다란.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상처를 내려던 건 아니었다. 인터컴만 부수려고 했는데. 이제 와서 그런 게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그래도.

도로 끝에 웅장한 건축물이 보였다. 도시연합 중앙학교. 학교 내부에 있을 때는 미처 몰랐으나, 멀리서 한눈에 담으니 아름다웠다. 검은 새벽 아래 상앗빛으로 은은하게 떠오르는 깨끗한 벽면과 가지런한 창틀, 직선 사이로 드물게 흘러 세련된 곡선. 달을 녹여 이성으로 빚은 예술품 같았다.

그리고 학교 위로 반투명한 돔이 생성되어 있었다. 연하게 푸르스름한 돔. 마치 거대한 비눗방울 절반을 잘라 학교에 씌워 놓은 것처럼 보였다.

유은우는 조용히 말했다.

“나나 정윤환이나 대장한테 안 돌아갈 거란 거 너도 짐작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옛날이야기 꺼낸 거 아니야? 우리 앞으로 볼 일 없다고 생각하고.”

이선규는 대답이 없었다.

차가 멈춰 섰다. 학교 정문에 덩치 큰 남학생 하나, 포동포동한 여학생 하나가 우산을 하나씩 펼쳐 들고 여유분 우산도 하나씩 손에 쥐고 서 있었다. 둘은 초조한 기색으로 서성이다가 차를 보고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유은우는 정윤환이 몸을 일으키도록 도왔다. 바닥에 떨어진 부토니에는 주워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차 문을 열었다. 빗소리가 사나웠다. 막 몸을 빼내려는데, 이선규가 핸들에 한쪽 팔을 걸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평소처럼 싱긋 웃고 있었지만, 습관이 아니라 애쓰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시계, 대장이 가지고 있던데.”

유은우는 차 문을 연 채 대답했다.

“내가 버리고 왔어.”

“다른 무기 구할 거지?”

“그래야지.”

“오른손 아물 때까지 그냥 놀지 말고, 왼손으로 연습해. 지금도 대단하긴 한데, 너무 근접이야. 양손 다 쓰면 사정거리가 그나마 좀 늘어나니까.”

반쯤 일어나 앉아 유은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정윤환이 쌕쌕거리며 웃었다. 그가 툭 뱉었다.

“적한테 너무 친절한 거 아냐?”

“내 맘이야.”

이선규가 가볍게 대꾸했다. 유은우는 여전히 차에서 내리지 못한 채 밖을 힐끗 보았다. 학생 두 명은 이제 달려오고 있었다. 둘의 발밑에서 빗물이 마구 튀었다. 유은우는 그들이 이선규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하도록 차 문을 도로 살짝 닫았다. 빗소리가 수그러졌다. 이선규를 향해 물었다.

“괜찮겠어? 이렇게 늦게 돌아가도.”

“이제 와서 걱정은. 나도 몰라. 징계나 안 먹으면 다행이지. 그래도 서재희한테 털리는 것보다는 나아. 내 걱정은 하지도 마. 난 철저히 내 위주로 움직이고 있으니까. 그리고 윤환이.”

이선규가 정윤환을 바라보았다.

“네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너한테 조언한 적 있었지. 이상한 사상 기웃거리지 말라고. 그거 아직도 유효해. 늦지 않았으니까 잘 생각해. 은우 데리고 오면 더 좋고. 서재희가 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대장은 못 이겨. 임유현 죽었다고 서재희가 자유로워진 건 아니야. 그는 차인호 밑으로 들어갔고, 그 굴레 벗기 힘들 거야. 상황이 빤해. 대장, 이기는 싸움만 하는 거 알지?”

“옳다고 생각하면 지는 싸움이라도 해야지.”

유은우가 대신 대답했다. 차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나왔다. 새벽 빗줄기는 차갑게 아팠다. 삽시간에 흠뻑 젖었다. 정윤환을 끌어내서 부축하자 손이 모자랐다. 발로 문을 걷어차 닫았다. 차는 빗물이 튀지 않도록 부드럽게 출발했다. 곧 멀어졌다.

유은우는 정윤환을 부축하고 서서 텅 빈 도로를 바라보았다. 뿌연 물안개가 아스팔트 위에서 들끓었다.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우산이 불쑥 다가들었다. 그늘이 지면서 온몸을 때리던 비가 멎었다. 뒤늦게 오한이 들었다. 유은우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바짝 다가온 두 학생의 명찰을 확인했다. 김산. 연다희.

김산이 황급히 유은우의 어깨에서 정윤환을 걷어 갔다. 뜨끈하던 열기가 멀어지니 더 으슬으슬했다.

“정윤환 왜 이렇게 많이 다쳤어? 재희는? 재희는 같이 안 왔어? 누가 데려다줬어? ……유은우 넌 또 옷이 왜 그래? 너 손목은?”

유은우에게 우산을 씌워 주던 연다희가 말했다.

“우산만 챙기는 게 아니라, 들것도 가지고 올 걸 그랬어요. 재희 선배가 조용히 마중 가라고만 했지, 다쳤을 거란 소리는 안 해서.”

그녀가 우산 손잡이를 내밀기에, 유은우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연다희는 새 우산을 펼치며 유은우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뛰다시피 종종 걸으며 앞장섰다. 정윤환을 둘러업은 김산이 그 뒤를 성큼성큼 따라갔다. 유은우는 그 둘을 따라 푸르스름한 장막을 통과했다. 물속으로 들어가듯 저항이 느껴졌으나 잠시였다. 정문을 지나 교정을 가로질렀다. 폭우를 헤치며 병원으로 향했다.

김산이 빠르게 걸으며 정윤환을 고쳐 안았다. 정윤환의 품에서 총이 툭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유은우는 우산을 어깨에 걸치며 몸을 숙였다. 왼손으로 총을 집었다. 일어서려다 도로 주저앉았다. 우산이 미끄러지며 비가 와락 쏟아졌다. 머리가 핑 돌았다. 바닥을 짚으며 고개를 숙이는데 속이 메스꺼웠다. 연다희가 뛰어서 다가왔다. 그녀가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윙윙거리는 이명과 뒤섞여 시야를 메웠다.

“안 되겠다. 산 선배, 병원에 연락해서 데리러 나오라고 해요.”

“재희가 최대한 조용히…….”

“불러요. 이러다 죽겠어!”

똑, 똑, 약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유은우는 소스라쳐 깨어났다. 아무 생각 없이 오른손으로 옆을 짚으며 몸을 일으키려다가 통증에 다시 쓰러졌다. 침대에 파묻히며 오른손을 들어 보았다. 손목에 두꺼운 치료기가 수갑처럼 채워져 있었다.

쌉쌀한 소독약 냄새. 정갈한 침대. 정윤환과 나란히 입원했던 그 병실이었다. 크고 작은 통증이 뼈와 근육 사이에서 지글거렸다. 유은우는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숨을 골랐다. 창문을 두드리는 폭우 사이로, 그제야 소음이 또렷해졌다. 벽면의 스크린이 켜져 있었다.

― ……30명이 숨지고 5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군 당국은 반란군이 내부로 침투해 테러를 벌였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정윤환이 옆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리모컨을 잡은 손이 희게 마른 넝쿨처럼 침대 아래로 늘어뜨려져 있었다. 그가 건성으로 리모컨을 꾹꾹 누를 때마다, 화면이 툭툭 바뀌며 각 채널의 아침 뉴스가 번갈아 떴다.

― ……안심하십시오. 학생 및 교직원 등 도시연합 중앙학교의 인명 피해는 없었습니다. 간밤의 테러로 인하여 시스템이 오작동하여 일부 법이 개정되면서 생긴 혼란으로 도시연합에서 신속한 복구를 장담하고 있으며…….

― ……그렇지 않습니다. 중립지대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논의되어 왔습니다. 도시연합 24년에 황종주 의원이 대표 발의한 동조자 진흥법 개정안에 중립지대가 포함되었으나, 폐쇄된 지역 안에서 비동조자가 소수의 동조자 밑으로 들어가 경제활동을 자처하며 자발적으로 탄압받을 수 있다는 시민들의 우려로 공개 투표 때 불발된 전적이 있습니다. 중립지대는, 시민이 외치고 시민이 외면하며 법안에서 살고 죽기를 반복했습니다. 중립지대는 양날의 검입니다. 새로운 도시의 베타테스트가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기득권을 형성하는 데 그칠 수도 있으며…….

정윤환은 탁자에서 호흡기와 신경안정제를 차례로 집었다. 호흡기에 약을 끼우고 깊이 빨아들이더니, 후우 불어 뱉었다. 수증기가 빛 무리와 엉기며 퍼져 나갔다. 스크린의 창백한 빛이 그의 섬세한 얼굴을 휙휙 스쳐 지나갔다.

― ……시스템의 오작동으로 법에 항목이 추가되었다는 도시연합 측의 해명에 많은 시민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왜 하필 중립지대이며, 왜 하필 학교인가에 대해서. 일각에서는 테러가 아닌 내란을 은폐하기 위해서가 아니냐는 의견과, 시민의 동의 없이 멋대로 법을 개정하려는 눈속임이 아니냐는 의견이…….

― ……임유현 도시연합 중앙학교장의 사망으로 인하여 그의 지위가 일부 학생 임원에게 자동 승계되지 않았습니까? 학생회나 파견부 소속 학생들 말입니다. 특히 서재희의 인망이 대단하여 내부의 혼란은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합니다만, 현재 그의 행적이 묘연합니다. 간밤의 테러가 진압된 지금도 그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으며, 함께 행사에 참석했던 두 학생은 현재 부상으로 교내 병원에 입원 중입니다. 테러 현장에 남아 있는 설계 패턴에서 서재희의 서명은 추출되지 않았으나, 일각에서는 김서혁 총사령관이 테러의 혼란을 틈타 서재희의 살해를 지시하였다는…….

정윤환이 무표정하게 뉴스를 보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지쳐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가 입에 물고 있던 호흡기에서 빈 약물 케이스를 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 움직임에 이불 밖으로 맨발이 살짝 나왔다. 발목에 치료기가 채워져 있었다. 치료기에 부착된 가느다란 관들이 부딪히며 차가운 금속음을 냈다. 치료기의 스크린에서 그래프가 맹렬히 파도쳤다.

“서재희가 없네.”

정윤환이 중얼거렸다. 리모컨을 누르는 속도가 차츰 빨라졌다. 뉴스, 광고, 쇼 프로가 다채롭게 휙휙 지나갔다. 그가 다시 말했다.

“서재희가 없어.”

그러더니 리모컨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리모컨은 바닥을 쭉 미끄러지다가, 아파트 광고가 현란한 스크린 밑에 멈추어 섰다. 정윤환이 눈을 찡그리며 탁자를 더듬었다. 손에 잡히는 게 없자 그가 유은우를 보지 않고 말했다.

“네 옆의 서랍에서 안정제 좀 꺼내 줘.”

유은우는 서랍을 열어 보았다. 색깔별로 용도별로 약물 케이스가 정갈하게 나란했다. 유은우는 서랍을 탁 소리 나게 닫았다. 냉담하게 말했다.

“없는데.”

그제야 정윤환이 유은우를 바라보았다. 기가 찬다는 표정이었다.

“웃기지 마. 있잖아. 서재희가 네 자리에 무엇이든 못 갖다 놓아서 안달인 걸 내가 다 아는데 약이 없다고?”

“없는 걸 어쩌라고.”

“내가 가서 보고 있으면 알아서 해.”

“와서 본다고? 일어날 수는 있냐?”

“유은우, 사람 놀리지 말고 약 달라니까.”

“약 빨지 말고 잠을 자. 눈은 벌게서.”

“잠이 안 온단 말이야.”

“몸이 그렇게 엉망인데 잠이 안 온다고?”

“몰라.”

“지금 너 수면제 공급받고 있는 거 아니야?”

정윤환이 뒤를 돌아보았다. 유은우도 그 시선을 따라갔다. 정윤환의 침대 옆에 설치된 치료기에서 색색의 실린더가 약물로 부글거렸다.

“의사가 신참이더라. 학생 데이터를 못 본 건지 일반 수면제로 처방하고 갔네. 나 저거 안 들어. 내성 있어.”

“의사 부를까?”

“됐어. 안정제나 줘, 빨리.”

“안아 줄까?”

“……어?”

정윤환이 반 박자 늦게 반응했다. 입술 틈이 살짝 벌어지다 멈추었다. 유은우는 찬찬히 정윤환을 살폈다. 정전기가 일어나 부스스하게 옅은 머리칼. 한숨도 못 자 안색이 푸석했다. 유은우는 조심조심 몸을 일으켰다.

“너 가만 보니까 나한테 기대서는 잘 자더라.”

죽이니 살리니 눈 마주칠 때마다 할 말 못 할 말 해 대더니, 정윤환은 대답이 없었다. 정말로 이상했지만, 그는 약간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

유은우는 슬리퍼를 꿰어 신고 치료기를 밀며 그에게 갔다. 치료기 바퀴에서 돌돌 소리가 났다. 정윤환은 두 손으로 호흡기를 꼭 쥔 채 멍하니 유은우가 하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유은우는 정윤환의 손에서 호흡기를 빼다가 탁자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슬리퍼를 벗고 침대로 올라가려는 순간, 정윤환에게 거칠게 밀렸다. 공격이 아니라, 필사적인 방어 같았다. 유은우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침대에서 요란하게 굴러 떨어졌다.

악, 유은우는 신음을 속으로 삼켰다. 눈물이 금세 그렁해졌다. 안 그래도 부러진 손목이 바닥에 부딪히며 찡하게 아팠다. 소리를 지른 건 정윤환이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소리 지르고 싶은 게 누군데. 유은우는 발딱 몸을 일으켰다.

“너야말로 사람을 왜 밀치고 난리야. 재워 준다니까. 너 그렇게 신경 곤두세우고 안정제 안정제 노래만 부르다가 저세상 가고 싶어?”

“네가 무슨 상관이야!”

“한팀이잖아!”

유은우는 똑바로 선 채로, 정윤환은 침대에 앉은 채로, 둘은 한참을 씨근덕거렸다. 숨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우리 한팀이잖아. 재희 선배는 행방도 모르고, 어쩌면 둘만 남았을지도 모르는데. 앞으로 밤이 얼마나 길어질지, 아침이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조용조용한 유은우의 말에도, 정윤환은 날카로운 눈을 했다.

“유은우, 너 올라오면, 올라오면 진짜 후회해. 경고했다. 오지 마. 너 올라오면 그다음부턴 나도 몰라. 알아들어?”

이쯤 되자 오기였다.

“어, 그래.”

유은우는 잽싸게 이불을 젖히며 침대로 올라갔다. 정윤환을 제압하는 건 쉬웠다. 그는 거의 반 죽어 있었다. 힘이 빠져 나달나달한 정윤환의 두 손목을 잡아채고 이어 꽉 끌어안았다. 정윤환은 처음엔 사납게 저항했으나, 상대적으로 덜 다친 데다가 잠까지 푹 자서 팔팔해진 유은우를 이기지는 못했다. 곧 숨이 잦아들었다.

유은우는 살짝 힘을 풀었다. 느리고 고른 숨이 느껴졌다. 정윤환은 눈을 반쯤 떴다가 느리게 감았다가 또 천천히 들어 올렸다. 유은우는 살짝 고개를 틀어 그의 발목에 붙은 치료기를 살폈다. 아까까지만 해도 미친 듯 요동치던 그래프는, 이제 제법 잠잠하게 흐르고 있었다.

여전히 광고가 한창이었다. 스크린을 끄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정적 속에서 정윤환의 숨소리만 들린다면, 이렇게까지 오래 끌어안지는 못할 것 같았다. 유은우에게는 단순한 포옹이지만, 정윤환에게는 어떤 의미일지 알 수 없었다. 알면 안 될 것 같기도 했다. 유은우는 그가 조금이라도 빨리 잠들기를 바랐다.

정윤환의 눈에서 초점이 가물가물 흩어졌다. 그렇게 뾰족하게 가시를 세웠다고는 믿지 못할 만큼, 날 선 경계는 공기 중으로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가 거의 잠들었을 때, 유은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혹여나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정윤환에게서 떨어졌다. 막 침대에서 내려오려 할 때였다. 푹 잘 수 있게 스크린부터 꺼야겠다고 생각하며 정윤환이 내던진 리모컨의 위치를 확인하는데, 느닷없이 확 끌어당겨졌다.

거친 힘은 아니었지만 방심하던 차라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유은우의 어깨 위로 정윤환의 두 팔이 단단하게 섰다. 그가 유은우 위로 고개를 숙이자 밤처럼 그늘이 졌다. 유은우는 정윤환의 달아오른 시선과 간절한 숨을 느꼈다.

문득 가슴이 차게 식었다. 아무리 과거를 소상히 알게 되더라도 정윤환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를 가까이 안는다 해도, 둘 사이에 메울 수 없는 낭떠러지가 있어 마음은 자꾸만 아래로 미끄러지리라는. 순간을 공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다른 사람이라.

“구해 주고 싶었어.”

정윤환이 속삭였다. 그가 눈으로 천천히 유은우를 만졌다.

“믿기 어렵겠지만, 진심이야.”

정윤환이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눈물을 삼키듯.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그의 뺨을 베어 내듯 스쳤다.

“만약에 내가 아니라 서재희라면 어땠을까. 걘 잘 해냈을 거야. 너무 잘 해냈겠지. 널 철저히 도구로 삼든, 지옥에서 빼내서 인간다운 삶을 주든, 그 어떤 쪽이든, 망설임도 실수도 없이. 그는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널 바로 폐기했을지도 몰라. 그럼 인연은 거기서 끝났겠지. 또는, 널 살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빼내는 데 성공했을지도 몰라. 다 내 탓이야. 서재희가 아닌 나라서.”

그의 목소리 끝이 떨려 나왔다. 눈물로 색이 빠진 옅은 눈빛이, 유은우가 모르는 감정을 담고 아래로 함빡 쏟아졌다.

“정말 노력했는데. 중요한 순간마다 잘못된 선택을 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어. 정신 차리고 보니 이렇게 되어 버렸어.”

유은우는 뺨으로 정윤환의 손끝이 가까워지는 걸 느꼈다. 오랫동안 몇 번이나 유은우의 뺨을 매만졌다는 듯, 그는 익숙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유은우에게는 처음이었다. 정윤환이 문득 손을 멈추었다. 유은우의 뺨에는 닿지 않으나 온기는 전해질 틈만 두고.

“살아 움직이는 널 보니 이젠 겁이 나더라. 큰일 났다고 생각했어. 네가 인형처럼 무표정할 때 생긴 감정이라, 네가 살아 움직이면 내 감정도 수그러질지 모르겠다고 기도했던 것이 아무 소용이 없어져서. 도리어 짙어져서. 희망을 갖게 해서. 이제 어엿하게 사랑이라고 정의해도 되지 않을까 혼자 기대하는 내가 끔찍해서.”

정윤환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져 유은우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서재희는 길이 필요하면 만들어. 정말 눈물 나게 부럽지. 나는 널 회유하고 협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서재희는 널 살릴 길을 만들겠다고 해. 나는 절박하게 협조하지만, 자꾸 화가 나. 난 왜 이렇게밖에. 내가 널 먼저 만났는데. 내가 먼저. 네가 기억 못 한다고 해서 내 기억이 없던 게 되는 건 아니잖아.”

간곡한 시선이었다.

“네가 내게 물었지. 나한테 넌 뭐냐고.”

유은우는 자신의 질문을 기억했다. 그러나 대답이 두려워, 저도 모르게 정윤환의 눈을 피했다. 곧바로 턱을 잡혔다. 다시 시선이 얽혔다.

“나 봐. 고개 돌리지 마. 너도 궁금해서 물어본 거 아니었어? 아니면 그냥 해 본 말이야? 네 질문 하나에 네 눈빛 한 번에 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데. 그러니 들어. 내가 먼저 말하는 거 아니잖아. 네가 물어서 내가 대답하는 거야.”

거친 어조와 달리 턱을 붙든 손길은 이미 부서진 것처럼 연약했다.

“넌 내 전부야.”

유은우는 제 턱을 잡은 정윤환의 손이 부드럽게 미끄러져 뺨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나도 이런 내가 싫어. 네가 전부인 내가 싫어. 내가 원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니잖아. 너도 원하지 않고, 나도 원하지 않는데. 아무도 나보고 너만 보라고 하지 않았는데. 왜 내가 이런 기분을 겪어야 해? 내가 왜? 죽으면 끝이 나? 언제쯤 난 네게서 놓여날 수 있어? 그런 날이 오기나 해? 혹시 네가 날 바라봐 준다면, 그럼 나도 숨이 좀 트일 수 있을까? 그렇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잖아. 그렇잖아.”

정윤환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가 낮게 속삭였다.

“절대 그런 일 없을 거라고 말해 줘.”

햇빛이 바람을 타고 불어왔다. 창밖으로 구름이 움직이는지, 정윤환의 낯으로 빛 무리가 조각조각 머물렀다. 유은우는 손을 내밀어 정윤환의 이마에 서린 빛을 어루만졌다. 손을 미끄러뜨려 간절한 눈물을 닦아 냈다. 정윤환이 고개를 기울여 유은우의 손바닥에 제 뺨을 묻었다. 온기가, 눈물이, 오래된 마음의 무게가 빛으로 흘러내렸다.

“말해 줘. 날 사랑할 일 없을 거라고.”

유은우는 몸을 굳혔다. 정윤환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스크린에 속보 한 줄이 떠 있었다.

서재희, 임유현 살해 자수.

― 속보입니다.

정윤환이 딱 멈췄다. 그가 유은우 위에서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돌려 스크린을 보았다.

― 도시연합 중앙학교 5학년 파견부장 서재희가 방금 도시연합 중앙수사부에 출두하여 본인이 임유현을 살해했다고 자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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