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6. 고착(3권) (6/15)

VOL. 3

006. 고착

서재희가 커튼을 걷고 창을 열었다. 어두운 정적 사이로 오전의 새파란 볕이 쏟아졌다. 정윤환은 서재희가 운을 떼기 전까지, 이불 위로 그림자 진 창틀의 무늬를 헤아렸다.

“내 도움을 받고 싶다면, 넌 전부 말해야 해.”

서재희는 한 손을 교복 바지 주머니에 반쯤 꽂아 넣고 서 있었다. 늘 첫 번째 단추를 꼭 가리던 넥타이는 피로에 느슨하게 끌러져 있었다. 볕이 미끄러지는 낯이 지쳐 창백했다. 그는 아마 한숨도 자지 못했을 것이다. 정윤환은 악몽과 통증이 뒤엉키던 새벽 내내 서재희의 가지런한 기척을 느꼈다. 식은땀을 닦아 내거나 이불을 고쳐 덮어 주는, 조심스러우나 건조한 손길.

“나는 내가 생각해 둔 마지막이 있어. 널 도와주려면 난 빙 둘러 돌아가야 하고, 그건 내게 큰 부담이야. 네가 전부 털어놓고 날 이해시키면, 그때 도움을 줄지 말지 결정하겠어.”

정윤환은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순간순간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어떤 선택부터 잘못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갈 곳 잃은 분노는 자꾸만 내부를 범람하고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을까, 그런 결론까지 비틀어 내곤 했으니.

정윤환은 서재희의 반듯한 시선을 옆얼굴로 받아 내면서, 필사적으로 지난날을 되짚었다. 다 내려놓고 시들시들 흘려보내던 최근부터, 폭풍에 휩쓸리듯 정신없이 나부끼던 군 생활, 어리석어 무난하게 행복했던 어린 날까지. 정윤환은 한참 만에 가닥을 잡았다. 불행의 시작이 아니라, 불행이 드러난 시점이었다.

“내가 군에 들어갔을 때 사촌 형이 죽었어.”

“8년 전.”

서재희의 차분하게 빠른 계산에, 도리어 당황한 것은 정윤환이었다.

“어? 어어……, 그쯤? 어떻게 알아? 뉴스에 보도됐었나? 아냐, 군에서 묻었을 텐데…….”

“그때 네가 나한테 전화했었어.”

서재희의 담담한 대꾸에 정윤환은 숨을 삼켰다. 없는 기억이었다. 당시 둘은 연락을 끊은 지 오래였다.

“내가 그랬나?”

“기억 못 할 거야. 완전히 취해서 혀가 다 꼬여 있던데. 조금 놀랐어. 너 술이니 약물이니 절대 손 안 댔잖아, 그때는.”

서재희가 마지막 말에 힘을 주었다. 정윤환은 가슴이 덜컹했다. 군의 통신은 도청되고 있었다. 혹시 내가 입이라도 잘못 놀렸다면.

“……내가 뭐랬는데?”

“형이 자살했다고 했어. 너무 무섭다고. 나보고 절대 군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 그게 끝이야.”

목부터 확 달아올랐다. 정윤환은 서재희의 시선을 피해 애꿎은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유은우의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우리 그때 좀 서툴렀지.”

서재희의 목소리가 한 톤 따스했다. 정윤환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서재희는 정윤환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눈을 반쯤 내리깔고 시선을 아래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드리워진 속눈썹에 서늘한 빛이 맺혀 있었고, 아주 먼 곳을 바라보는 듯 까만 동공이 아득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네게 기대고 싶었는데. 우리 다시 만났던 날. 학교 운동장에서. 눈이 왔잖아. 몸도 춥고 마음도 춥고 그랬어. 내 곁에 아무도 없어서 힘들었어. 나도 널 다시 만나 좋았는데. 하지만 반가움과는 별개로 내가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었어. 그게 어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때 내가 말을 삼켰던 것처럼, 너도 술의 힘을 빌려 정신없이 전화하고 잊어버렸던 거야. 특별히 네가 실수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서재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우리가 서로 솔직하게 털어놓고 위안을 구했다면 지금 상황이 좀 달라졌을까 가끔 생각해. 그러다가도 고작 그런 것으로 무엇이 그리 크게 달라졌을까 싶어 차갑게 식어 버려.”

서재희가 단정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오롯이 드러난 동공이 깨끗하게 정윤환을 향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어. 처음엔 내가 무지했다고 생각했어. 내게 죄가 있다면 몰랐던 것이 죄라고.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내 죄는 무지가 아니었어. 무관심이었던 거야. 그때 뉴스를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고민했더라면, 정치판 돌아가는 상황을 크게 크게만 읽었어도, 나는 절대로 연합대회에 나가지 않았을 거야. 몸 사리고 시골에 처박혀 있었겠지. 어쩌면 실력이 모자라는 척 가장하면서 기초학교를 그만두었을지도 몰라. 다시는 총을 잡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우우웅. 진동이 울렸다. 서재희가 이프를 누를 때 정윤환은 본의 아니게 발신자를 스쳐봤다. 차예원. 서재희가 표정 없이 이프를 종료시켰다.

“부질없네. 다 소용없는 일이야.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나 어제 새벽에 303호에 있었어. 백정명 의원한테 백일서 남은 조각을 돌려주려고. 다른 시체에서 혀 빼다가 바꿔치기했는데 서툴러서 피도 많이 튀고 시간도 지체하는 바람에, 하필이면 은우랑 마주쳤어.”

정윤환은 가만히 듣고 있다 잠시 후에야 흠칫했다. 다급히 되물었다.

“유은우? 걔가 거길 왜 가?”

“글쎄. 병원 돌아다니다가 303호가 수상하다고 생각했나 봐.”

“너 문도 안 잠그고 그 짓을 했어?”

“네 배지로 열고 들어왔던데.”

정윤환은 바로 몸을 틀어 서랍을 열었다. 총만 없어진 게 아니었다. 배지도 없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정신 놓고 뻗어 있는 틈에 쏙쏙 다 빼 갔네. 정윤환은 사납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내 총 어디 있어?”

서재희가 턱짓으로 건너편을 가리켰다. 정윤환은 고개를 홱 돌려 유은우의 침대 너머 서랍을 보았다.

“은우가 네 총 빼다가 자기 서랍에 넣어 놨더라.”

의기양양하게 서랍을 열고 총이며 배지며 챙겨 가는 유은우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이프는 또 뭘 어쨌기에 저렇게 배터리가 달랑 분리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윤환은 거칠게 서랍을 닫았다. 그러고 보면 유은우가 자신의 목을 조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유은우가 어디까지 봤어?”

“다행히 작업 자체를 본 건 아닌데. 마무리하고 씻고 나오는데 정통으로 마주쳤어.”

서재희가 손을 들더니 제 가지런한 손톱을 살폈다. 정윤환은, 서재희의 손끝이 핏기 하나 없이 말끔하나 유난히 까칠하게 터 있음을 알아보았다.

“유은우가 아무 말도 안 해? 그 꼴 다 보고도? 시체 보관해 놓은 것도 고스란히 다 봤을 거 아냐.”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대.”

“…….”

정윤환은 느리게 호흡했다. 정말이지 서재희가 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공간 속에 그런 몰골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온전히 넘어갈 수 있단 말인가. 만약에 서재희가 아닌 내가 있었더라도 유은우가 그렇게 말했을 것인가. 절대 그럴 리 없었다. 지금도 치를 떨며 싫어하는데, 공포심만 더 조장하겠지. 자초한 결과임에도, 심장 한구석이 밟히듯 꾹 짓눌렸다.

서재희가 조용히 말했다.

“나도 네가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내게 털어놔. 내 기준에 합당하다면 기꺼이 널 돕고 싶어. 물론 내가 준비한 마지막이 달라지지 않는 선에서.”

정윤환은 숨을 가다듬었다.

“형이 죽기 전에 나한테 메모리를 부탁했어. 나한테 가지고 있다가, 혹시 자기가 잘못되면 이수연에게 전달해 주라고 하기에 당시엔 별것 아니라 여기고 그냥 받아 두었어. 귀찮다고 입씨름하기 뭐해서.”

“이수연이라면 그때 해체되었던 팀원 말하는 거지. 야간 탐색 중 실종된.”

“……네가 모르는 게 있기나 해? 너 지금 몰라서 나보고 말하라는 게 아니고 그냥 확인 사살 차 묻고 있는 거 아니야?”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 말하는 거야. 그런 건 조금만 뒤지면 금방 손에 넣을 수 있어. 야간 탐색 일정이나 실종자 명단 같은 건.”

“……그래, 아무튼. 형이 그렇게 되니까 꺼림칙했어. 자살할 사람이 아닌데 자살했다고 하니까. 타살 같았어. 메모리를 봤는데, 형이 시체 더미로부터 여자애 하나를 끌어내더라고. 숨이 붙어 있었고. 손목에 라벨. 유은우. 10세. 동조율 100.”

서재희가 숨을 들이켰다. 그가 손을 들어 눈가를 덮었다. 이를 악다무는지, 턱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토록 감정에 팽팽한 서재희는 처음 보아, 정윤환은 그만 등골이 서늘했다.

예전에 서재희와 둘이 나란히 앉아서, 저만치 온실에서 수업을 듣는 유은우를 건너다본 적이 있었다. 서재희의 눈빛이 한없이 부드러워 덜컥 겁이 났다. 서재희야 셔츠 위로 넥타이를 매듯 늘 서글서글한 미소를 고정하고 있긴 했지만, 그땐 확연히 달랐다. 서재희 본인조차 깨닫지 못하는, 속에서 그대로 넘쳐흐르는 따뜻함으로 완전히 긴장이 풀어져 생경했다.

다른 사람이 사랑에 빠진 모습은 이토록 쉽게 알아채는데, 내 마음만큼은 어려웠다. 캐묻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지난날 자신에게 수없이 물어 왔듯, 서재희에게도 묻고 싶었다. 너도 유은우를 보고 있으면 어찌할 바를 모르겠냐고. 자꾸만 너 자신이 흐려져서 힘드냐고. 그러나 답을 듣는 것이 두려워, 질문은 겨우 기어 나왔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너 유은우 좋아하냐?’

서재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직후, 결코 아니라는 대답이 똑똑히 돌아왔다. 남 좋아할 만큼의 여유는 없다고 했다. 마음이 놓였다. 서재희니까 알아서 자제하겠지. 끊어 내지 못하고 지저분하게 질척거리는 나와는 다르겠지. 깨끗하게 걷어 내고 싹 비워 내어 햇살과 바람에 건조하게 말리는 것은 서재희 전문 분야 아니던가. 믿었다. 죄지은 내가 가지진 못하더라도, 깨끗한 남이 탐하는 시선조차 못 견디겠어서.

그랬는데. 네가 네 입으로 그렇게 말해 놓고. 사람 안심시켜 놓고.

안 좋아한다고 했잖아.

속이 뒤틀렸다. 제 눈을 가리고 솟구치는 감정을 꾹 잡아 누르는 서재희 앞에서, 정윤환은 삽시간에 분이 치밀었다. 화를 낼 자격도 없었고, 화를 낼 이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눈 뒤집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거칠게 불렀다.

“야, 서재희…….”

서재희가 눈을 덮었던 손으로 턱까지 쓸어내리더니 창백한 낯을 들었다. 정윤환은 집요하게 서재희의 눈을 바라보았다. 까만 눈동자는 이미 가라앉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서재희가 단정하게 말했다.

“계속 말해.”

“너 방금 뭐야?”

“하던 얘기 계속해.”

“너 설마…….”

“도와 달라며? 내가 뭐가 아쉬워서 네게 설명해야 하지? 다 털어놔야 하는 건 네 쪽이야.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간다.”

정윤환은 이를 악물었다. 서재희는 정윤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윽고 옅게 한숨을 쉬더니 돌아섰다. 뚜벅뚜벅 병실을 가로지르는 서재희의 등 뒤에 대고, 정윤환이 내뱉듯 말했다.

“도시연합군과 반란군 넘나들면서 유은우 내가 데리고 있었어.”

서재희가 멈춰 섰다. 이윽고 돌아선 그는 더없이 차분했으나, 눈이 날카로웠다. 살갗을 벼리는 시선을 견디면서 정윤환은 입을 열었다.

“임유현이 정성민의 죽음을 미끼로 날 협박했어. 반란군이 흰 칼날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으니, 그 정보를 빼 옴으로써 결백과 충성을 증명하라고 했어. 난 계획적으로 반란군으로 스며들었고, 거기서 신뢰를 얻고 본부로 들어가자마자 유은우를 담당했어.”

공급기의 실린더에서 거품이 부글거렸다.

“임유현이 총사령관이고 차인호가 그의 직속 부하였을 때. 당시 차인호는 반란군 전 수장 유태헌을 죽였어. 그의 아내도 죽였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그의 딸도 죽였어. 그 공적으로 임유현의 신임을 받아 군복을 벗고 정계로 뛰어들었다고, 그렇게 알려져 있지. 하지만 차인호는 직접 손대지 않았어. 그러니까 내 말은, 차인호는 유태헌과 그의 아내 이가연은 살해했지만, 그의 딸 유은우를 죽이는 데엔 실패했다는 말이야.”

서재희가 표정 없이 물었다.

“이유는?”

“군에선 미신이 많이 돌아. 어린아이를 죽이면 제 자식이 요절한다는 말도 제법 퍼져 있지. 당시 차인호는 아내가 죽고 네 살배기 딸뿐이었어. 차예원. 딸까지 뺏길까 겁이 나서 임유현에게 굽히고 들어간 차인호였으니 그런 사소한 미신도 최대한 피하고 싶었겠지. 임유현은 제 부하를 시켜서 강보에 싸인 어린 유은우를 폐건물에 버려두고 건물을 통째로 폭파시키고 떠났어. 몇 시간 뒤 반란군이 폐허를 뒤져 빈사 상태인 유은우를 찾아냈지.”

“어떻게 안 죽고 살았어?”

“온디딤이 같이 있었대. 그게 유은우를 보호한 거야. 유태헌이 죽기 전에 유은우의 강보 사이에 자신의 시계를 끼워 두었던 것 같아. 서재희 너도 다루니 알겠지만 온디딤은 감정의 영향을 많이 받아. 당시 유태헌의 심정이 어땠을지 생각하면 답은 쉬워. 아내가 눈앞에서 죽고, 홀로 군에게 쫓기고,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며, 품에는 어린 딸이 있었어.”

서재희는 여전히 무감했다. 그러나 정윤환은 그를 마주 보기 어려워,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불 위로 늘어뜨린 제 손에 햇살이 말갰다.

“그날 반란군은 강인한 지도자와 명민한 연구사를 동시에 잃었지. 하지만 그들에게는 유은우가 남았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모를 잃고 혼자 남은 유은우에게서 이상한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해. 자꾸 주위의 물건들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거나 위치가 바뀌었지. 여덟 살 전후의 동조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눈도 제대로 못 뜨는 갓난아이에게서 발현된 거야. 반란군은 유은우의 동조율을 측정했고, 100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얻었지. 반란군이 유은우를 여덟 살까지 고이 길러다가 흰 칼날 프로젝트의 실험체로 쓰기 위해 기계를 삽입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어.”

정윤환은 제 손바닥을 뒤집어 보았다. 흉 하나 없는 미끈한 손. 타고난 재능.

“하지만 유은우는 설계 난독증이었고, 프로그램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오류를 일으켰어. 그들은 실망했고 유은우를 버렸어. 정확히는 도시연합에 돈을 받고 팔았지. 도시연합은 난민들에게서 강탈한 어린 동조자와 반란군에게서 헐값에 산 실험체를 수송선에 실어 도시 내로 진입하다가 전례 없던 일을 겪었어. 반란군의 일부가 상부 지시 없이 자체 판단 하에 수송선을 급습한 거야. 우리 형도 그 주동자 중 하나였는데, 반란군 아랫사람들은 윗사람들이 도시연합과 한통속인지 꿈에도 몰랐으니 상황이 꼬인 거지. 그건 수송선을 움직이던 인신매매상도 마찬가지라, 그들은 반란군에게 자원을 빼앗길 순 없다는 생각에, 동조자가 실려 있던 칸에 가스를 살포하고 도망쳤어. 유은우가 끈질기게도 살아남은 걸 우리 형이 발견하고 반란군으로 데려간 거고.”

“가져다가 고쳐 쓰려고?”

서재희가 고저 없는 톤으로 물었다.

“아냐, 형은…….”

정윤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더 이상 말을 잇기 힘들었다. 많은 말마디가 목에 걸려 혀로 굴러 나오지 못하고 스러졌다.

반란군에 속해 있다고 해서, 모두가 정성민을 닮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토록 헌신하던 반란군에서 요직을 차지하지도 못했으며 결국 내부고발로 반란군 동료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 과정에서 도시연합군의 손에 자살로 가장되었지만, 쉽게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메모의 문장은 똑똑했으며, 행간은 따뜻했다.

그가 남긴 메모는 정윤환의 신념이 되었다. 기성품이나 다름없던 세계를 전부 허물고, 지반부터 제 색깔로 다시 다져 가는 계기가 되었다. 무지에 대한 반성과 형에 대한 애도였다. 형은 죽었지만, 그의 죽음으로 인해 정윤환은 그와 대화할 수 있었다. 형이 죽고 나서 한참이 지나서야 정윤환은 그를 추모하기 시작했다.

때때로 정윤환은 제 소속이 헷갈렸다. 유은우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헷갈리는 것처럼.

도시연합군과 반란군을 교차하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집단이 놀라울 정도로 닮았음을 알게 되었다. 어디에나 선한 사람이 있었고, 어디에나 악한 사람이 있었다. 선과 악을 반듯하게 갈라놓을 수 있었다면 차라리 마음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윤환은, 선한 이의 발끝에서 짙은 그림자가 뻗어 나오는 것을 목격했고, 악한 자의 손에서 생명이 되살아나는 것도 경험했다.

의지와 욕망이 뒤엉켜 이미 구별할 수 없는 가운데, 영원한 진리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떻게든 유은우를 살리기 위해, 도시연합군에 오래도록 충성을 바치고 퇴직한 연구원을 사로잡아 총구를 들이밀며 연구 결과를 털어놔라 종용할 때도 그랬다. 이웃 할아버지처럼 인상이 선한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도시연합은 거대한 악을 아주 잘게 쪼개어 사회 구성원들이 나눠 수행하도록 했다. 전체를 볼 수 있는 안목은 드물었다. 그들은 자신이 해내는 소소한 업무가 모이고 쌓여 결국 거대한 악을 향해 나아갈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 연구원은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자신이 야근을 불사하며 성실히 수행한 실험들이 오직 부상당한 상이군인의 재활에 쓰이리라 믿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유은우의 존재조차 몰랐다. 유은우는 차트에 가상의 수치로 표시되어 있었다. 마치 사람이 아닌 것처럼.

“형은 유은우를 살려내서 언론의 전면에 내세우려고 했어. 정확히는 유은우를 시작으로 사해를 방랑하는 난민들의 인권을 제대로 세우고자 했어. 도시연합은 물론이고 반란군에게도 급진적인 사상이라 물론 환대를 받지 못했지. 솔직히 말하자면 어느 누구에게도 당장의 이득이 없는 주장이었어. 도시연합은 난민의 인권이 바닥이어야 어린 동조자를 가로채기 쉬웠을 테고, 반란군 또한 난민 출신 동조자를 잡아다가 흰 칼날 프로젝트에 투입했으며, 그마저도 실패하면 추려서 도시연합에 팔거나 분쇄기에 갈아 실험 원료로 썼어. 동조자는 인류에게 엄청난 자원이지. 죽었든 살았든 마찬가지야. 형은 자신의 의견을 묵살하는 반란군에 회의를 느꼈던 것 같아. 그는 본격적으로 도시연합 내부 언론과 접촉을 시도했어. 다들 쉬쉬하는 가운데 반란군 수뇌부까지 그 소리가 들어갔고, 바로 제거되었지. 서재희 너도 알겠지만 반란군의 배후엔…….”

“임유현.”

서재희가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덧붙였다.

“친애하는 우리 교장 선생님이시지. 바쁘시겠어. 도시 안팎 관리하시느라. 그럼 그 도시연합의 치부가 담겼다는 메모리는, 결국 돌고 돌아 김서혁의 손에 들어갔구나. 그래서 피바람 한번 불지 않고 매끄럽게 총사령관으로 올라간 것이고. 임유현은 덕분에 교장으로 부임해서 새싹 동조자들을 체에 거르고 걸러 사회 곳곳에 배치하게 되었고.”

정윤환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말했다.

“임유현이 말한 흰 칼날 프로젝트는 미완성이었어. 솔직히 말하면 애초에 완성이란 게 불가능해 보였지.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엉켜 있어서 아예 처음부터 뼈대를 다시 세워야 할 것 같았어. 나는 유은우를 모델로 처음부터 끝까지 설계를 짜서, 유은우와 함께 임유현에게 갖다 바치고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어. 그렇게 작업을 시작했고, 내가 성과를 제때 보고하지 않는 바람에, 반란군 측에서 다시 한번 유은우를 버렸어.”

지난한 나날이었다. 유은우는 자주 발작했으며, 정윤환은 매일 그녀의 여린 팔다리를 붙잡고 경련이 지나가기를 기도했다. 일부러 눈을 감고 유은우를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제력이 느슨해지는 새벽엔 저도 모르게 유은우를 찾았다. 품에 꼭 끌어안고 보드라운 머리에 뺨을 붙이면 잠이 깊게 달았다. 그러나 아침에 깨어나 피로가 걷히면 자신이 치가 떨리게 혐오스러웠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백번 생각해도 비정상이었다.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이를 악물고 설계에 박차를 가했다. 여기도 저기도 모두 임유현의 손아귀라면, 최대한 빨리 반란군과 연을 끊고 군에 마음을 붙이겠다. 그것만이 유일한 목표였다.

그러나 감추기도 전에 속이 비어져 나왔다. 정윤환이 유은우를 특별하게 여긴다는 소문은 금세 반란군을 휩쓸었다. 정윤환은 어디든 적이 많았다. 반란군이라고 정윤환의 안하무인한 태도에 아량이 넓진 않았으니. 하루는 정찰을 핑계 삼아 도시연합군 모함에서 외따로 떨어져 반란군 본부에 들르니, 실험실 문이 빠끔 열려 있었다. 늘 유은우를 눕혀 놓았던 긴 소파에는 얇은 이불만 젖혀져 있었다.

“내다 버리랬어. 김승훈 연구사님이.”

뒤에서 강진욱이 눈을 조금 찌푸리고 덧붙였다.

“다른 연구실 사람들이 네가 좀 이상하다고 수차례 의견을 낸 모양이더라고. 네가 정말 될 만한 실험체는 할당받으려 하지도 않고 너무 하나에만 감정을 쏟아붓는다고. 어차피 그거 설계 난독증이잖아. 너도 딱히 그걸로 성과를 내는 것 같지 않아서, 너 없는 동안 김승훈 연구사님이 처분하라고 했…….”

강진욱의 멱살을 틀어쥐고 거칠게 흔들었다.

“너 미쳤어? 내가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연구 수행하고 있다고 말했잖아!”

“나도 너한테 물어보고 처리하자고 계속 말씀드렸는데, 그렇게 밀어붙이기엔 네가 결과물을 하나도 안 내어 놨잖아! 거기다 다른 연구원들이 워낙 강력하게…….”

“유은우 지금 어디 있어?”

강진욱이 정윤환의 손을 쳐 냈다.

“폐기 처분실.”

정윤환은 다급히 제복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메모리 두 개가 만져졌다. 정윤환이 여태 유은우를 상대로 써 내려간 모든 설계가 쓰인 직사각형 하나와, 눈속임으로 기본 얼개만 짜 둔 타원형 하나. 정윤환은 타원형 메모리를 집어서 강진욱에게 던졌다.

“김승훈 연구사한테 갖다 바쳐. 내가 여태 보고만 안 했을 뿐이지, 유은우 상대로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다시는 내 것에 몰래 손대지 말라고 똑똑히 전해.”

막 돌아서는데, 강진욱에게 팔을 잡혔다. 그가 벌겋게 달아오른 제 목을 문지르면서 낮게 말했다.

“정윤환, 가서 데려오는 건 좋은데, 네 감정이나 추스르고 가. 동네방네 소문 다 내지 말고. 네가 그렇게 티 내니까 나도 감싸는 데 한계가 있단 말이야.”

강진욱의 손을 뿌리쳤다. 정신없이 지하 6층의 폐기 처분실로 달려갔다. 들어서기도 전에 피 냄새가 났다. 분쇄기에 전원이 들어가 있었으나 아직 돌아가지는 않고 있었다. 유은우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는데, 폐기 처분실의 약품 냄새로 숨이 가물가물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 주변으로 평소 시비 붙었던 연구원 몇이 빙 둘러서 있었다. 유은우가 막 해코지 당하려는 것을 목도하자마자 피가 거꾸로 솟았다.

미친놈들이 더러 실험체 가지고 논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러나 정윤환은 여유롭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정윤환은 도시연합군에서도 반란군에서도 즉각 처형되어도 할 말이 없는 입장이었다. 그가 살아남은 이유는, 오로지 가공할 만한 설계 실력, 그리고 약간의 운, 그뿐이었다. 맨발로 칼날 위를 걷는 상황에서, 유은우가 약점이 되어선 안 되었다. 그것은 정윤환과 유은우, 둘 모두에게 좋지 않았다.

“재활용도 안 되는 폐품 가지고 뭐 하냐? 물론 내 손에서 새롭게 태어날 참이다만. 너희 취향도 참…….”

혀를 쯧쯧 차고는 안쓰럽다는 시선으로 불청객들을 한번 쓱 훑어보았다.

“망가뜨리지 않는 선에서 즐기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대신에…….”

정윤환은 일부러 유은우는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재미 보고 나면 내 연구실에 원래대로 가져다 놔. 흰 칼날 프로젝트에 차질 생기면 너희 다 죽여 버릴 줄 알아. 혹시 실패라도 해서 김승훈 연구사님께 해명해야 할 때가 오면 은근슬쩍 너희들 이름 갖다 댈 테니까.”

정윤환의 예기치 못한 등장에 물러섰던 무리 중의 누군가가 앞으로 나섰다.

“네놈이야말로 실험체에 집착이나 하지 마! 그놈의 설계 실력만 믿고 도시연합군 소속을 반란군 핵심으로 들여놨더니 성과는 하나도 없고. 네놈이 우리 정보를 그쪽으로 나르지 않는다는 보장이라도 있어?”

“증거 있어?”

정윤환이 왼손으로 제복 코트를 젖혔다. 연구원들이 다급히 총을 뽑았다. 그러나 정윤환은 홀스터의 총에 손만 얹었다. 뽑지 않았다.

“내가 이쪽 정보를 연합군으로 흘린다는 증거 있냐고.”

“…….”

“내가 마음에 안 들면 안 든다고 말을 하시지요. 아니면 손이라도 빠르든가. 내가 오기 전에 아예 분쇄기에 넣어서 싹 돌려 놨으면, 나도 김승훈 연구사님께 증명할 매체가 없어서 한바탕 깨지고, 그걸 지켜보는 너희는 또 얼마나 짜릿했겠어? 추잡하게 시간을 질질 끄니까…….”

정윤환이 턱짓으로 유은우를 가리켰다.

“……내가 김승훈 연구사님께 보고서를 올리고 왔는데도 실험체가 멀쩡하잖아. 안 그래?”

팽팽한 적막이 이어졌다. 순간, 분쇄기의 전원이 뚝 꺼졌다. 정윤환은 어깨를 으쓱했다.

“연구사님이 내 보고서가 썩 마음에 드셨나 보다. 중앙에서 제어한 모양인데? 그럼 어떡할래? 유은우 데리고 노는 게 목적이면 내 연구실에 잘 가져다 놓고. 자리 비켜 줘?”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으나, 혹여나 이 이상 부딪히게 되어 자신의 감정이 드러날까 등골로는 긴장이 줄줄 흘렀다. 이윽고 연구원들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러나 유은우는 건들지 않고 나가 버렸다. 문이 쾅 닫히자마자 정윤환은 숨을 삼키며 유은우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처음에는 손대는 것도 서툴렀으나 이제는 너무나 익숙했다. 두 손으로 유은우의 등과 무릎 뒤를 받치며 가볍게 안아 들었다. 등으로 폐기 처분실 문을 밀어서 열고 나왔다. 복도를 걸었다. 그러다 멈춰 섰다.

평소 얕은 기침이나 옹알이, 뒤집기 정도만 드물게 하던 유은우가 그날따라 이상했다. 정윤환의 제복 셔츠를 꼭 잡아당긴 채, 그녀는 자꾸만 몸을 뒤척였다. 정윤환은 가만히 유은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가가 발개져 있었다. 복도 형광등 불빛이 그 눈 밑에 고여 어슴푸레 반짝였다.

눈물.

가슴이 쿵 떨어졌다. 정윤환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유은우를 놓칠 뻔했다. 가까스로 유은우를 고쳐 안았다. 품에서 흔들리면서 유은우의 눈가에서 눈물이 또륵 굴러 나왔다. 유은우의 뺨과 맞닿아 있던 정윤환의 까만 제복이 동그랗게 젖었다.

고개를 들었다. 복도의 창문에 자신의 모습이 비춰 보였다.

도시연합군의 새카만 제복을 입고, 반란군 본부 복도에 서서, 자신의 손으로 파헤칠 실험체를 소중하게 안고 있는, 오만함과 두려움으로 뒤범벅된 피로한 청년이 있었다. 기시감이 날카로이 내리꽂히며, 자신의 모습 위로 형이 겹쳐 보였다. 언젠가 메모리에서 봤던, 땀과 오물에 찌든 더럽고 지친 몰골로 기어코 유은우를 건져내 안던 정성민이 거기 있었다.

도저히 못 하겠다.

정윤환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져, 유은우의 뺨을 타고 흘렀다.

너만은 내가 반드시 구해 줄게.

사랑은 아니라 믿었다. 나 하나 숨통 트이기 위한, 일종의 타협이라 여겼다. 이 지옥에서도 내 인간성은 그래도 말살되지 않았다는. 내가 형처럼 개혁에 앞장서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침묵하지는 않았다는. 그래도 뭔가 하고 있다는.

정윤환이 유은우를 감정적으로 특별하게 여긴다는 모호한 소문은, 며칠 만에, 정윤환이 유은우를 그저 중요한 실험체로 여기고 있으며 흰 칼날 프로젝트의 초안을 완성해 김승훈 연구사의 승인까지 받았다는 꽤 구체적이고 살벌한 경고로 탈바꿈했다.

그 사건 이후, 정윤환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주 유은우를 비하했다. 실험체를 도구로 여기는 데에 익숙한 다른 연구원들조차 눈을 찌푸릴 정도의 천박한 단어를 일부러 골라 썼다. 내게 유은우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 내게 악감정을 품고 유은우를 해치더라도 나는 그 어떤 타격도 받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반란군에게 좋지 않은 결과만 가져다줄 뿐이다. 반복했다.

그러나 해가 지면 연구실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유은우와 꼭 붙어서 잤다. 무사하여 다행이다 그리 여겼다. 해가 뜨면 내 손으로 널 또 헤집어야 하건만, 그래도.

정윤환은 며칠 동안 유은우와 관련된 자료를 없애는 데 공을 들였다. 그는 우선, 임유현에게 제출할 목적이었던, 유은우에게 초점이 맞춰진 직사각형 메모리를 쓰레기통에 버린 뒤에, 부식되어 못 쓰게 되도록 그 위로 소금물을 부어 버렸다. 그동안 출력해 두었던 자료는 밤낮으로 파쇄기에 갈아 댔다. 어마어마한 양에 파쇄기가 과열되어 고장 나자, 빈 상자에 자료들을 잔뜩 쌓아 두고, 총으로 분해 설계를 걸어 전부 찢어발겼다.

컴퓨터의 파일도 정리했다. 굵직한 설계들은 남겨 두었다. 유은우에 대한 연구가 이리 잘 진행되고 있다고 김승훈 연구사에게 정기적으로 제출할 목적이었다. 그 외의 정교한 세부 설계는 싹 삭제시켰다.

막상 사기치겠다고 마음먹고 나니, 임유현에게 올릴 설계는 오히려 간단했다. 김승훈에게 받았던, 전임자들이 답도 없이 복잡하게 꼬아 놓은 흰 칼날 프로젝트에, 정윤환 또한 설계를 묶고 잡아 돌려 더욱 알아보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풀려면 한참 걸릴 것이며, 이대로 쓰면 필시 중간에 오작동을 일으킬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하지 않기로 했다. 임유현이 왜 실패작을 가져다주었냐 물으면, 어디서 오작동이 났는지 알아보겠다며 능구렁이처럼 넘기며 시간을 벌기로 했다. 정윤환은 운이 아닌, 자신의 설계 실력을 믿었다. 임유현은 날 벼랑 끝까지 몰아붙일 수는 있어도, 결코 밀어 떨어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도 내 설계 실력이 아까울 테니까.

그러나 유은우 몸에 삽입된 기계를 제거하는 건 혼자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교한 설계로 기계를 멈추는 것이야 정윤환도 자신 있었으나 그것만으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용의 뼈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차갑고 흰 기계들은 이미 내장에 뿌리를 내린 지 오래였다. 그것들을 완전히 떼어 내는 데는 최신 설비와 세심한 손재주를 갖춘 노련한 전문가가 필요했다. 정윤환은 유은우를 빼돌린 후에, 제1도시 중앙병원장인 자신의 친아버지에게 부탁하리라 마음먹었다.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제5유적지 근처의 소문난 불법 정화 장치 삽입자에게 데려갈 각오도 했다. 일단 빼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밤을 지새우던 어느 날, 정윤환은 소금물이라고 믿었던 작은 유리병의 맑은 액체가 실은 메모리 보존액임을 알게 되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황급히 쓰레기통을 뒤졌다. 청소부가 어제 비워 갔는지, 그제 비워 갔는지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았다.

“유은우가 반란군에 의해 재차 버려지고, 그래서?”

서재희가 물었다. 정윤환은 창백하게 말했다.

“내가 다시 주워 왔어.”

“네가? 왜?”

정윤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유은우만은 꼭 구해 주고 싶어서.’라는 대답은 위선 같았다. 위선이 아니라면, 유은우를 좋아한다는 파렴치한 고백이 될 것 같았다. 그 어떤 것도 자격이 없어, 건조하게 대답했다.

“……임유현에게 바칠 흰 칼날 프로젝트를 완성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완성했어?”

“대강. 하지만 임유현에게 가져다주지는 못했어. 연구원 하나가 내 보고서를 상부에 보고해 버렸어. 따라서 유은우도 내 소관을 떠났고. 내가 반란군에 항상 붙어 있을 수 없으니까, 그들은 내 설계만 보고 그대로 진행하면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모양이야.”

젖은 채 버려져 있는 메모리를 의심스럽게 생각한 강진욱이 그것을 몰래 주워 김승훈 연구사에게 제출했고, 메모리 안의 설계는 곧 깨끗하게 출력되어 한세연 연구관의 책상에 놓였으며, 삽시간에 반란군의 새로운 목표로 등극했다. 그들은 정윤환에게서 유은우를 앗아 가고, 핵심 연구진에서 정윤환을 제외시켰다. 감정에 휘둘린다는 것이 이유였다.

유은우가 끌려가고 텅 빈 연구실을 보면서 정윤환은 속으로 칼을 갈았다. 강진욱이 유은우를 앗아 가며 제시한 꿈은 솔깃했으나, 그래도 유은우만은 도구로 쓰고 싶지 않았다. 정윤환은 새벽을 틈타 한세연의 연구실로 숨어들었다. 묵혀 놨던 설계 솜씨를 한껏 발휘하여, 유은우를 둘러싼 몇 겹의 고급 보안을 소리 없이 해제했다. 어두컴컴한 연구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유은우와 연결된 노트북을 두드렸다. 잘 벼려진 유은우를 앞세워 도시연합군의 중앙을 치겠다는 역겨운 루트를 전부 삭제시켰다. 새카맣게 빈 모니터 앞에서 정윤환은 한 차례 손을 뚜두둑 꺾고 나서, 본격적으로 정교한 도주 시스템을 입력했다.

수없이 상상한 루트를 직접 그려 넣었다. 이곳 제3유적지의 1구역부터 12구역까지 일직선으로 쭉 내달린 다음, 12구역 끝의 부속 정찰기 안에 숨어들기까지. 며칠 전에 도시연합군의 관리 시스템에 들어가 아무도 신경 안 쓸 것 같은 낡은 부속 정찰기를 하나 빼돌려 그곳에 착륙시켜 두었다. 외관은 금방이라도 삭아 없어지기 직전이었으나, 엔진이며 콘솔이며 운항에는 문제가 없도록 정비했다. 일단 유은우를 그곳에 숨겨 놓고, 나중에 실어 나를 계획이었다.

속도도 속도였지만, 정윤환은 회피 패턴에 특히 공을 들였다. 혹시 유은우가 도주 중에 사람을 마주치더라도 맞붙지 않고 매끄럽게 피했으면 했다. 싸움으로 도주가 지체되거나 상대가 아군을 불러 판이 커지지 않길 바라면서.

“나는 유은우를 빼돌리고 싶었어.”

정윤환이 다 쉬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서재희가 관자놀이를 꾹 짚었다.

“왜? 임유현에게 가져다주려고?”

정윤환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몰래 도주 시스템을 입력해 두고 빠져나왔어. 나오는 길에 일부러 지상의 폐건물 서넛을 연달아 폭격했어. 주의를 그쪽으로 돌리고 싶었거든. 마주치는 사람 하나 없이 일이 잘 풀리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어. 일단 도시연합군의 모함으로 돌아가 김서혁에게 얼굴도장 한번 박아 두고 어두워지면 다시 가서 유은우와 만나야겠다고. 왔다 갔다 박쥐 짓 하기에 동선이 편했지. 당시 김서혁은 제3유적지에 반란군의 본부가 있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어서 그쪽에 모함을 두고 있었으니까. 쉬워 보였어. 그때까지만 해도.”

인터컴이 켜진 것은 그때였다. 잡음이 지글거렸다. 불길함이 엄습했다. 정윤환은 눈앞에는 도시연합군 모함을, 등 뒤에는 지하의 반란군 본부를 두고 채널을 조정했다. 손이 떨렸다. 소리가 또렷해졌다. 귀가 폭발음으로 먹먹했다.

― ……야, 정윤환! 네가 그랬지! 너 미쳤어? 돌았냐고!

강진욱의 비명이 날카롭게 찢어졌다.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또 연이은 폭발음.

― 실험체 네가 풀어 줬어? 탈출시키려면 곱게 내보낼 것이지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뭐?”

― 끝까지 모르는 척할 거야? 미친 새끼, 도시연합군을 흰 칼날 프로젝트에 받아 주는 게 아니었는데!

정윤환은 멍하니 뒤돌았다.

쾅!

이번에는 인터컴이 아닌, 눈앞에서 폭발이 터졌다. 온통 회색으로 고요하던 폐허가 땅 내부로부터 폭발했다. 땅이 흔들려 정윤환은 급히 옆의 폐건물을 짚어 몸을 지탱했다.

맙소사. 조용히 몸만 빼내도록 설계했는데, 대체 이게 무슨…….

“강진욱! 상황을 말해!”

― 실험체가 풀려나서 닥치는 대로 부수고 있어! 몇 초 만에 본부의 절반이 죽었다고! 사람만 쏙쏙 골라 죽이는 게 아주 악질이야! 너 빨리 와! 네가 어떻게 좀 해 봐! 한세연 연구관님이 온디딤을 써서 겨우 붙잡아 뒀어! 네가 와서 설계 무효화를 시키든가, 이 괴물 끌어안고 같이 나가 죽든가 빨리 결정해! 오래 못 버텨, 연구관님 부상 입었어!

손이 덜덜 떨렸다. 인터컴에서 삐삐 소리가 났다. 채널을 변경했다.

― 정윤환, 어디지?

김서혁. 정윤환은 애써 호흡을 가누었다.

“대장, 저 지금 3구역 정찰 중입니다.”

― 폭발 현장인가? 네가 맡아. 서포터는…….

“필요 없습니다. 1구역부터 12구역까지 저 혼자 뛰겠습니다.”

― 5분 간격으로 보고해.

“네.”

지하로 들어가는 본통로는 완전히 내려앉아 있었다. 몇 명이나 죽었을지 감히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정윤환은 평소 온의 흐름이 날카롭고 통로가 좁아 잘 쓰지 않는 보조 입구로 진입했다. 연구실은 초토화되어 있었다. 전기가 끊겨 어두웠다.

“윤환이 왔니?”

한세연 연구관은 그토록 사용하길 꺼리던 만년필을 쥐고 있었다. 그 팔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낯이 익숙한 반란군 간부 몇이 죽은 나무처럼 둘러싼 중앙에, 유은우가 포박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정윤환이 애달프게 보듬어 온 유은우의 가냘픈 팔다리가, 잉크로 빚어 만든 듯 까만 줄에 칭칭 감겨 있었다. 그러나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수백을 삽시간에 죽인 실험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멀쩡해 보였다. 그간 인형처럼 까맣기만 하던 눈망울이 정윤환을 직시했다. 적의였다.

내가 직접 설계했는데.

정윤환은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유은우의 주위로 희고 정교한 설계가 물에 풀린 물감처럼 번져 나왔다. 정윤환은, 여태 살면서 가장 공을 들여 주입한 설계가 유은우의 압도적인 동조율에 망가져 새어 나오는 것을 텅 비어 바라보았다.

내 설계는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데.

유은우가 사납게 몸을 뒤틀었다. 한세연 연구관이 만년필로 허공을 그었다. 유은우의 손목에 포박이 더해지고 한세연의 어깨가 다시 한번 찢어졌다.

“윤환아, 너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구나. 지하가 무너져 본부가 김서혁에게 발각되었으니, 우리도 어쩌면…….”

한세연이 만년필로 공중을 짚었다가 빠르게 끌어당겼다.

그 손짓에 따라 유은우가 거칠게 끌려와, 정윤환의 군화에 부딪히고 멈추었다.

“너도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했지. 우리가 임유현의 꼭두각시가 아닌, 반란군의 새로운 세력이라는 것은, 너도 강진욱 연구원에게 들어서 알고 있을 거야. 너와 함께 계속 가고 싶어. 우린 네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너는 너무나 불안하여 서로 상처만 줄 뿐이지. 네 손으로 끝내렴. 네가 우리 편이라는 걸 보여 다오.”

정윤환은 고개를 들었다. 강진욱, 김승훈을 비롯한 반란군 간부들이 모두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 뒤로는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짙은 피비린내와 어디선가 울려 대는 폭발음으로 어지러웠다.

정윤환은 인터컴을 눌렀다.

“정윤환. 1구역부터 12구역, 전원 사살. 제5유적지 개발보고서 포함 기밀문서 다량 확보.”

다시 인터컴을 눌러 꺼 버렸다. 정윤환은 총을 뽑아 유은우를 겨누며 말했다.

“12구역 끝에 부속 정찰기가 있습니다. 탑승하시고 5구역을 정확히 등지면서 도주하세요. 그쪽으로는 추적선 안 걸리게 하겠습니다. 덤프트럭처럼 큰 폐기물이 많은 곳은 절대 접근하지 마십시오. 김서혁은 매개체를 이용해 타격하는 것에 강합니다. 실험체는…….”

정윤환은 총을 고쳐 쥐었다.

“……제가 마무리 짓겠습니다.”

공급기가 깜박거렸다. 서재희가 다가와 공급기의 실린더를 갈아 끼웠다.

“나는 실패했어. 대단하게 실패했지. 유은우가 반란군의 절반을 살해했고, 남은 절반은 도시연합에서 끝장냈어. 서재희 너도 들어서 알 거야.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니까.”

서재희가 조용히 읊었다.

“제3유적지 반란군 본부 적출. 살인병기 획득. 김서혁의 가장 눈부신 업적이지.”

“그때 내가 빼돌린 반란군 간부들이 있어. 임유현의 세력에 반하는 자들이야. 진실로 반란군이라고 말할 수 있는. 특히 한세연 연구관. 그 사람은 절대로 죽어선 안 돼. 김서혁이 손 못 대게 네가 좀 도와줘.”

“한세연? 용 연구소 수석 연구관?”

“동시에 반란군 수장이야.”

서재희가 허탈하게 미소 지었다.

“반란군 수장이 대체 누군가, 수년을 뒤져도 안 나오더니. 네 비호를 받고 있었네. 제1도시 출신 최고 기득권의 자녀가 정예군 제복을 입고 임유현과 김서혁의 정보망을 한 번에 취해 손수 반란군에 흘려 넣었으니…….”

허공에 늘어뜨려져 있던 서재희의 손끝에 힘이 설핏 들어갔다.

“……손에 안 잡힐 수밖에.”

“한세연 연구관이 반란군 꼭대기를 지키고 있어서 이나마 도시연합을 견제할 수 있었어.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면 반란군은 정말로 도시연합의 일부가 되고 말아. 한세연 연구관은 용 연구소에서 요직을 맡고 있어서 누구보다 용에 대해 잘 알고, 끊임없이 도시연합으로부터 반란군을 독립시켜 보려고 애쓰는 유일한 사람이야.”

서재희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정윤환, 김서혁이 널 마음대로 써먹기 위해서 한세연을 미끼 삼아 살려 둔 것은, 그 사람이 정말로 별 볼 일 없기 때문이 아닐까? 유태헌 수장이 사망하고 나서 반란군은 급격히 도시연합에 빌붙기 시작했어.”

“서재희 네가 예전에 내게 말했지. 반란군이 아무리 도시연합과 타협했다 하더라도 고유의 색을 잃지 않은 이들이 있을 거라고.”

서재희가 손끝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낯이 메말랐다.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겠어. 어떤 집단의 리더든 허용된 권한만큼이나 제약을 감수해야 한다는 거지? 한세연 연구관이 반란군 고유의 명맥을 잇기 위해서 어느 정도 타협을 하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는 건 나도 인정해. 그런데 문제는, 내 눈엔 그 타협만 보인다는 거야. 그들의 진짜 목적이 뭐지? 그 어떤 문헌에서도 반란군이 처음 만들어진 계기는 나오질 않아. 그저 도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이 반발하여 조직되었다고만 하지.”

“다들 원하는 것은 같아. 새로운 용의 성체. 잃어버린 용의 심장.”

정윤환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나 수단이 같을 뿐 목표가 다르지. 도시연합은 도시 확장을 꿈꿔. 반란군은 난민을 수용할 신도시 건설을 꿈꾸지. 임유현 또한 제 입맛에 맞는 도시를 염원하고 있어. 그러나 한세연을 비롯한 소수 반란군의 목적은, 최초 반란군의 목적은, 어떤 특정 도시의 건설이 아니야. 그들이 원하는 건…….”

유은우와 맞바꾼 단 하나의 꿈을, 정윤환은 이어 말했다.

“……도시의 붕괴.”

서재희가 다가왔다. 그는 정윤환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가까이 마주한 서재희의 까만 눈동자가 옅게 일렁였다. 깊어 잔잔한 바다에서 고래의 매끈한 등이 설핏 드러났다가 사라지듯이. 서재희가 나직이 말했다.

“나하고 뜻이 일치하네. 난 낙원의 이론을 망가뜨리고 싶으니까. 도시가 붕괴되면 낙원의 이론도 파괴되겠지.”

정윤환은 서재희의 열띤 목소리에서, 어쩔 수 없는 추위를 느꼈다. 서재희가 이어 속삭였다.

“왜 내게 여태 말하지 않은 거야? 기꺼이 도왔을 텐데.”

“왜 말하지 않았냐고?”

정윤환이 힘없이 반문했다.

“목적은 같을지 몰라도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지. 우리는 인류에게 희망을 봐. 서재희 너와는 다르지. 내가 지금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리지만 않았어도 네게 부탁하지 않았을 거야. 궁극적인 목표가 다르면, 작은 목적을 함께 달성해 나가더라도 조금씩 방향이 틀어질 테니까.”

서재희가 정윤환의 바로 옆으로 손을 디디며 체중을 실었다. 정윤환은 침대가 약간 아래로 꺼지는 것을 느꼈다. 서재희가 조용히 말했다.

“어쨌든 넌 지금 내 도움이 필요하지. 그래서 그 목표가 뭔데?”

“도시연합에서 은폐한 진실이 있어. 그들은 제국시대 말기에 중앙산단이 폭발하면서 온이 오염되었고, 오염도가 너무나 심각해 돌이킬 도리가 없다고 말하지.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용 성체 딱 한 마리만 있어도 사해의 온 전부가 정화되고도 남아.”

정윤환은 서재희의 까만 눈에 비치는 자신을 보았다. 말을 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성체가 된 용을 사해에 자유로이 풀어놓는 거야. 그럼 자연스럽게 사해와 도시의 경계가 없어지겠지.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대지를 누비며 살게 될 거야. 빠르면 우리 대에서, 늦으면 후손들이. 우리가 먼 옛날 제국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이미 사해에 용이 출현했어. 정윤환 네 말대로 단순히 용을 사해에 풀어놓기만 해도 온이 정화된다면, 그럼 도시연합은 왜 굳이 용을 사로잡아 도시를 건설하려는 거지? 그냥 내버려두면 될 텐데…….”

서재희의 숨이 느려졌다. 그가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불사라 믿었던 용이 죽어 가고, 온이 정화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려서?”

정윤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용의 심장박동이 확연히 느려지고 있다는 건 우리 손으로 몇 년간이나 직접 측정했으니, 너도 용이 불사가 아니라는 건 믿을 수 있지? 그리고 아무리 성체가 된 용이라도 1000년간 오염되어 있던 온을 눈 깜짝할 사이에 깨끗이 만들 수는 없어. 얼마나 걸릴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야. 만약에 사해의 용이 온을 정화시켜 줄 거라고 마냥 기다리다가 도시의 용이 먼저 죽어 버리면? 그러면 도시의 시민들은 하루아침에 오염된 온에 노출될 거야. 인류의 대부분이 한날한시에 죽을 수도 있어. 난민들처럼 정화 장치를 삽입하면 목숨이야 잇겠지만, 지금 도시연합은 그런 재난에 대한 비상책을 하나도 마련해 놓지 않았잖아. 그들은 무조건 용을 사로잡아 도시를 보강할 수 있다고 자신하니까.”

서재희는 말이 없었다.

“우리는 시민들에게 알려야 해. 더 이상의 도시 건설은 없을 거라는 여론을 이끌어내야 해. 우리는 도시의 붕괴에 대비함으로써 용에게 온을 정화할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해. 사해에 용의 성체가 나타난 건 인류가 해낸 업적이 아니야. 아무도 모르게 어느 날 나타났어. 용 연구소에서 그렇게 애를 쓰는데도 인류는 여전히 용을 통제하지 못해. 복권 기다리듯이 용의 성체가 나올 때마다 도시를 확장하고 보강하면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도시가 건설되고 1000년이 지났고, 그때 쓰인 용은 점차 죽어 가고 있어. 새로 도시를 건설한다고 해도 인류에게 보장되는 시간은 또 1000년 남짓뿐이야. 최근에 내가 심장박동을 측정했을 때는 일시적으로 멎기까지 했었어. 도시의 수명도 얼마 안 남았어. 그리고 도시연합도 그 사실을 알아. 그래서 필사적으로 사해의 용을 사로잡으려고 하는 거고.”

서재희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희끗하던 열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무감한 그가 두려워, 정윤환은 손을 내밀어 서재희의 소매를 잡았다.

조금 더 일찍 말했어야 했다. 여름밤, 너를 재단하지 않고 털어놨어야 했어. 디디는 걸음마다 후회뿐이라, 정윤환은 서재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지금이라도. 말이 빨라졌다.

“지금 현장에서 한세연 연구관이 포획팀을 지휘하고 있어. 연구관님 말로는, 용 근처 온 오염도를 측정하면 그 수치가 때때로 급격히 하락하는 걸로 봐서 어쩌면 인류가 인내할 만한 시간 내에 온의 정화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하셨어…….”

“그럼 한세연은 포획팀을 지휘하는 척하면서 동시에 포획이 어렵도록 막고 있겠네. 그녀로서는 어떻게든 용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사해에 머물게 하고 싶을 테니까. 이번에 도시연합에게 빼앗기면 언제 또 용의 성체가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니.”

“한세연 연구관마저 죽으면 이 세력은 와해되고 말아. 도시연합이고 반란군이고 그냥 의미 없는 큰 덩어리가 될 뿐이야. 그렇게 그냥 흘러가는 거야. 아무런 변화도 반성도 없이.”

“그럼 낙원의 이론은?”

서재희가 차분히 물었다. 갑작스러워, 정윤환은 대답하지 못했다. 서재희가 재차 물었다.

“네가 따르는 한세연의 목표에 낙원의 이론은 필요 없어 보여. 안 그래? 그녀는 낙원의 이론에 대해 어떤 입장이지?”

그때였다. 복도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가까워졌다. 서재희가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재희야!”

차예원이었다. 그녀가 희게 질린 얼굴로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큼지막한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왜 전화 안 받아? 왜? 어젠 왜 기숙사 안 들어갔어?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전화라도 받아 주지, 전화라도…….”

차예원이 서재희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무너졌다. 보는 눈이 많았다면 차예원의 눈물을 닦아 줬을 것을, 서재희는 미간을 좁히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차예원은 거의 넘어지려다가 벽을 짚으며 겨우 몸을 지탱했다.

“무슨 일이야?”

서재희가 침착하게 물었다. 차예원이 핏기 없이 새파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제 아빠한테서 전화 왔어. 약혼은 없던 거로 하자고. 당장 헤어지는 거로 소문내라고.”

서재희는 아무 말 없이 차예원을 바라보기만 했다. 차예원은 숨을 고르려고 애썼으나 제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무표정한 서재희 앞에서 차예원은 결국 다시 눈물을 터뜨렸다.

“김서혁 총사령관이 어제 새벽에 위원회에 가서 재희 네 자료 열람을 요청했나 봐. 왜 아직까지 관리자로 등록하지도 않은 학생을 여태 후보로만 두고 있냐고 이의를 제기했대. 그러고 나서 바로 우리 학교로 와서 교장 선생님도 만났었대. 그 새벽에. 아빠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까 재희 널 통해서 상황 좀 빨리 파악해 달랬는데, 네가 어제 새벽부터 전화도 안 받고 기숙사에도 없고…….”

정윤환은 이불을 꾹 그러쥔 손아귀에 땀이 서리는 것을 느꼈다. 뒤가 서늘했다.

임유현이 차인호와의 동맹을 끊고 김서혁에게 붙었나? 설마. 아니야. 그럴 리가. 임유현이 서재희까지 버리면서 김서혁에게 갈 만한……. 아니, 잠깐만. 김서혁에게 그만한 새로운 패가 생겼다면? 확실히 서재희는 임유현의 입맛에 딱 맞게 굴지는 않았다. 오히려 까다로운 존재였다.

서재희가 표정 변화도 없이 물었다.

“교장 선생님은?”

“아빠가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데 교장 선생님께서 전화를 아예 안 받으신대. 나도 오늘 집무시간 되자마자 교장실에 갔는데 잠겨 있어서 만나 뵙지도 못했어. 전화도 안 받으시고.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 그러게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재희야, 제발 몸 사리라고. 관리자로 등록하라고. 거기다가 방금 다른 의원분께도 전화 왔는데…….”

차예원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김서혁 총사령관이 방금 전에 위원회에 안건을 상정했대. 널 낙원의 이론 후보 자리에서 탈락시키겠다는.”

서재희가 눈을 꾹 내리감았다. 정윤환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럼 김서혁은 그 자리에 누구를 앉히겠대?”

차예원이 울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유은우.”

유은우는 기계적으로 걸었다. 속이 끓고 있었으나 이상하게 머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온몸의 열기가 배 속으로 몰려 그런지도 모른다. 유은우는 납작한 돌이 깔린 교정을 가로지르면서 몇 번이나 오른손을 풀었다. 시계가 날카롭게 달각거렸다.

병원 입구에 낯익은 여학생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차예원이었다. 그녀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입을 막은 손등은 창백하게 질려 와들와들 떨고 있었고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는 뺨은 까칠까칠하게 터 있었다. 유은우는 그녀를 힐끗 본 뒤에, 병원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5층을 눌렀다. 간호사 몇이 알은체를 했다. 유은우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인사했다.

병실로 들어섰다. 정윤환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있었고, 서재희는 창가 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유은우는 자신이 감정을 잘 추슬렀다고 자신했지만, 서재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미간을 좁히더니 곧장 다가왔다.

“은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유은우의 걸음이 더 빨랐다. 성큼성큼 병실을 가로질러 정윤환에게 갔다. 정윤환은 쿠션에 기댄 편한 자세로 앉아 있다가, 유은우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떨떠름하게 허리를 세워 자세를 고쳤다.

“너 나한테 할 말 없냐?”

유은우가 꽉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정윤환은 입을 잠깐 벌렸다가 꾹 다물었다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없는데.”

유은우는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던졌다. 사진은 유은우의 가족이 찍힌 면을 앞으로 향하며, 정윤환의 손 근처로 툭 떨어졌다. 사진을 확인한 정윤환의 눈가가 바싹 얼어붙었다. 유은우는 정윤환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야, 이 개새끼야. 모른 척 숨기니까 좋았냐? 사람 바보 만드는 게 재밌어?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

유은우는 10여 분 전부터 이를 박박 갈며 걸어왔으며, 정윤환은 이런 사태를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은우는 쉽게 정윤환을 끌어낸 다음, 다시 침대로 패대기칠 수 있었다. 기숙사에서 병원까지 걸어오며 수없이 반복한 그림 그대로였다. 공급기의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하고, 치료기의 그래프가 급격히 오르내렸으나 정윤환은 정신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거칠게 기침했고, 그마저도 유은우가 목을 조르기 시작하며 숨넘어가는 소리로 바뀌었다.

“은우야, 그만해. 그만!”

서재희가 유은우를 부드럽게 끌어안고 강하게 당겼다. 유은우는 정윤환을 향한 분노가 누그러져서가 아니라, 단순히 눈물이 앞을 가려 호흡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서재희의 손길대로 당겨졌다. 유은우는 자신의 허리를 단단히 감은 서재희의 손을 밀어내려 애쓰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왜 그랬어, 왜! 나한테 왜 그랬어? 말해! 전부 다 말해! 한 번만 더 거짓말하고 숨기면, 내가 너 죽여 버릴 거야!”

정윤환이 가슴을 틀어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와 연결된 공급기가 사납게 울어 댔다. 유은우는 서재희에게 붙잡힌 상태에서 발로 공급기를 걷어찼다. 공급기가 벽에 거칠게 부딪히면서 전원이 뚝 꺼지고 요란하던 경고음도 멎었다.

“은우야, 제발!”

서재희가 강하게 유은우를 돌려 안았다. 유은우는 서재희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정신없이 울었다. 서재희가 가만가만 등을 쓸어내리는 느낌이 났다. 가끔 큰 손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눈물을 걷어 가기도 했다.

등 뒤에선 때때로 정윤환이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정윤환은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버거웠다.

뭐 하는 거야. 왜 그러는 거야. 제 입으로 날 죽인다고 그렇게 당당하더니, 왜 네가 죽을 것처럼 그러는 거야. 네가 피해자인 것처럼 대체 왜 그래.

유은우는 서재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깊이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섬유유연제의 푸릇한 냄새 사이로, 이제는 핏기가 서려 있음을 알았지만 그래도 꼭 매달렸다.

유은우의 울음이 잦아들고 정윤환의 호흡이 진정될 무렵, 어디선가 진동이 울렸다. 서재희가 몸을 움직여 인터컴을 꺼내는 기척이 났다. 이내 그의 몸이 경직되었다.

“예, 교수님. 서재희입니다.”

― 재희야, 마음 단단히 먹고 들어.

인터컴 저편에서의 음성은 발음이 분명하고 톤이 깊게 울려 유은우에게까지 똑똑히 들렸다. 어쩌면 정윤환한테까지 들릴 것 같기도 했다.

― 부모님께서 돌아가셨다.

유은우를 끌어안은 서재희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유은우는 잠시 그가 숨을 멈췄다고 생각했다. 호흡이 거의 없었다. 유은우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얼굴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두려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순간 서재희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유은우는 그대로 꼭 끌어 안겨졌다. 서재희가 낮게 물었다.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다 입원해 계십니다. 어느 분…….”

― 두 분이 동시에 임종하셨어.

서재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인터컴 너머에서 ‘재희야.’ 하고 걱정스럽게 부르는 소리가 여러 번 난 뒤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깨끗하게 담담했다.

“교수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저희 부모님 신경 써서 체크해 주시고, 제 안락사 신청서에 소견서도 써 주셔서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교수님, 하필이면 왜 동시에 돌아가셨나요? 이게 그렇게 흔한 일입니까? 저는…….”

서재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제가 합법적으로 제출한 안락사 신청서는 이유도 없이 수차례 반려당하며 몇 년이 흘렀고, 그동안 부모님의 상태는 신기할 정도로 한 치의 변화도 없으셨는데, 오늘은 무슨 특별한 날인가 봅니다. 사람 죽이기 좋은 날인가요?”

― 재희야, 가망이 없으셨어. 동시에 돌아가신 건 식물인간 상태에서 같은 공급기를 쓰며 생체리듬이 연동되었기 때문이야. 물론 드문 경우지. 하지만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어.

“저도 교수님 입장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쭉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신 것에는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부탁 하나만 더 드릴게요. 시신 보존해 주세요. 어차피 동조자도 아니니 쓸모없지 않습니까. 완전하게 태워 하얀 재로 나오는 것까지 제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싶습니다.”

― 교장 선생님 오후 4시에 진료 예약하셨어. 혈압 때문이라고 말은 하는데…….

“그 전에 가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졌다.

서재희에게 안겨 있어서인지, 유은우는 마치 그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빨라지는 심장박동, 빳빳하게 긴장한 피부, 불거진 핏줄, 불규칙한 호흡. 오랜 시간 겹겹이 쌓이며 딱딱하게 굳어진 슬픔은, 이미 형태가 뭉개져 있었다.

“임유현이 널 버린 거야.”

정윤환의 낮은 한마디에 숨이 탁 막혀, 유은우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정윤환은 핏발 선 눈으로 뚫어져라 서재희를 보고 있었다. 그가 버석하게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김서혁이 유은우라는 새로운 패를 내세워 임유현과 손잡은 거야.”

서재희는 말이 없었다.

유은우는 그만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앞뒤 맥락을 짚기 힘들었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유은우는 뒷걸음질로 물러서서, 서재희와 정윤환을 동시에 시야에 담았다. 분위기를 조망할 필요가 있었다. 정윤환은 침대에 일어나 앉아 있었고, 핏기가 다 빠져서 창백했다. 서재희는 침대 옆 간이 의자에 앉아 이마로 손을 짚은 채 아래를 보고 있었는데, 낯이 희게 질려 있었다.

서재희가 조용히 말했다.

“……아니야.”

정윤환의 목덜미에 핏줄이 굵게 도드라졌다.

“김서혁이 간밤에 여기 쳐들어와서 한 짓을 봐. 느슨해진 내 목줄을 바짝 고쳐 쥐고, 버리기엔 아깝고 취하기엔 위험했던 유은우의 가능성을 확인했어. 거기다가, 예의 바르게 까다로운 네가 임유현의 사람임에도 위원회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는 걸 확인 사살했고. 김서혁이 거추장스러운 망토에 손톱만 한 배지까지 전부 갖추고 온 거 너도 봤지? 아주 작정하고 온 거야. 너는 김서혁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 그 사람은 한 번에 두세 가지 일을 해. 한번 방향만 잡으면 상대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빠르게 몰아붙여. 분명히 새벽에 여기서 나가자마자 교장실에 들렀을 테고, 임유현의 확답을 받자마자 위원회로 넘어갔겠지.”

서재희가 이마를 느리게 문지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되짚듯, 새까만 동공이 초점을 잃고 허공을 더듬었다.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윽고 서재희가 숨을 토하듯 말했다.

“아니야. 버린 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동조자라면 시체도 아까워 벌벌 떠는 도시연합이 날 버린다고? 내 재능엔 변함이 없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내가 지금 뭘 놓치고 있는 거지? 뭐가 빠졌지?”

“임유현은 말 안 듣는 널 버리고, 시민권도 없어 다루기 쉬운 유은우를 가진 김서혁에게 붙은 거야. 김서혁이 치고 올라오는 동안 차인호는 성과가 거의 없었어. 게다가 임유현은 너 때문에 늘 차인호 앞에서 면목없어 했어. 네가 입장을 확실히 하지 않고 미뤄 대니 초조했겠지…….”

정윤환이 갈라진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이제 다 끝났어. 그렇게 발버둥 쳤는데 이따위 결말이라니…….”

“아니야, 정윤환. 아니라고. 나 생각 좀 하게 조용히 좀…….”

“곧 나한테 지시 떨어질 거야. 널 제거하라고. 그러게 내가 비싸게 굴지 말고 후보자로 등록하라고 누누이 말했잖아.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서재희 넌 내 손으로 처리해야 할 테고, 유은우는 꼼짝없이 관리자로 등록될 거야.”

“조용히 해!”

서재희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정윤환은 이를 악다물었다. 서재희가 두 손에 머리를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제발. 조용히. 나 지금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서재희가 머리를 감싸 쥐었던 손을 느리게 움직여 제 얼굴을 완전히 덮어 내렸다. 그가 그대로 고개를 숙이자 반듯한 교복 재킷 아래로 등줄기가 팽팽해졌다. 읽기 힘든 표정마저 가려졌다.

정윤환은 서재희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침대 위에 떨어져 있는 사진을 보았다. 그의 눈가로 발갛게 열이 올라 있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정윤환이 고개를 들어 유은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간 수없이 마주 보았음에도 유은우는, 왠지 지금에야 그가 자신을 진짜로 보고 있다고 느꼈다.

“넌 전 반란군 수장의 딸이야. 네 부모가 죽고 나서 반란군은 네 동조율이 100이라는 걸 알게 돼. 반란군은 널 데리고 흰 칼날 프로젝트를 시도하기로 했어.”

유은우는 머리를 차갑게 유지하려 애썼다. 끓어오르는 혼란을 삼키며, 찬찬히 정윤환을 살폈다. 그러나 그에게 뚜렷한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복잡한 감정들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처럼, 그저 낡고 지쳐 보였다.

“넌 설계 난독증이었고 실험은 실패했어. 반란군은 널 돈을 받고 팔기도 하고 다시 건져 오기도 했는데, 결국 마지막엔 내게 맡겨졌어. 그들이 진지하게 어떤 성과를 바라고 널 내게 준 건 결코 아니었고, 그냥 실패작이니 가볍게 손이나 풀라는 식이었어. 나도 그러려고 했어, 처음엔.”

유은우는 속눈썹 한 가닥이라도 떨지 않으려 애썼지만 잘 되고 있는지 자신이 없었다. 먼저 시선을 피한 쪽은 정윤환이었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숨을 뱉었다.

“흰 칼날 프로젝트는 엉망으로 꼬여 있었어. 난 널 모델로 삼아서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다시 짰어. 그 보고서는 상부로 올라갔고, 너도 더 이상 내 소관이 아니게 됐어. 그리고 김서혁이 반란군 본부를 급습했고. 그 뒤는 네가 아는 그대로야.”

“……그럼 그걸 왜 네가 가지고 있어? 인형에다 고이 넣어서.”

“네가 찍혀 있어서.”

짧은 대답이었다. 나직하고, 이상하게 무거운.

유은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수표도 하찮게 굴러다니는 어수선한 방구석에 희한하게서 사진만 꼭꼭 감쳐 둔 이유를 물었더니, 그저 내가 찍혀 있어 그랬단다. 고작. 그리 사소한 것이 이유로 충분하기 위해서는, 보통 다른 것들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나? 충분히 깊은 감정이 밑바탕이 되어야 성립하는 대답을, 지금 정윤환이 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야 했다. 그러나 질문은 입 안에서 허물어져, 유은우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정윤환이 거칠게 튼 손으로 침대 시트를 움켜잡는 것이 보였다. 그 낯이 납빛이었다. 그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놓더니 작게 말했다.

“나한테는 그냥 네 사진이었어. 그뿐이야.”

정윤환의 시선은 여전히 유은우를 비껴가고 있었다.

시계가 달칵거렸다. 유은우는 흠칫 놀라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약간 들떴다가 사르르 가라앉는 시계판 너머로 손등에 선명한 흉터가 보였다. 정윤환이 걷어찬 흔적이었다. 아물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유은우는 한 차례 입술을 축이고 성큼성큼 걸어가 정윤환의 멱살을 잡아챘다.

“무슨 뜻인지 똑바로 말해.”

정윤환은 즉각 유은우의 손을 쳐 냈다. 눈빛이 사나웠다.

“나도 몰라. 모르겠어. 사진 한 장 가지고 있는 게 뭐가 어때서? 그냥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 꼭 이유가 필요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진짜 열 받게 하네. 야, 내가 언제 잘잘못 따졌냐? 왜 가지고 있냐고 묻고 있잖아! 이유를 말하라고!”

“이유 없어. 그냥 가지고 있었어. 그것도 후회해. 돌려주면 되잖아!”

“장난해? 나한테 주면 없던 일 되냐? 켕기는 게 있으니까 가지고 있었겠지. 넌 이유도 없이 남의 사진을 이중삼중으로 꼭꼭 숨겨 두냐? 생각할수록 소름 끼치니까 빨리 대답 안 해? 없으면 지어내서라도 말하라고!”

“뭐? 소름 끼쳐?”

정윤환이 되물었다. 그는 이를 악물더니 오른팔과 왼쪽 허벅지에서 차례로 치료기를 떼어 내어 바닥으로 팽개쳤다. 캉, 치료기가 바닥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정윤환은 조금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침대에서 내려와 유은우와 똑바로 마주 섰다. 그가 이를 바득 갈았다.

“나 없었으면 유은우 넌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해. 알아?”

“몰라! 모르니까 말하라고! 언제는 죽인다며? 근데 사진은 왜 가지고 있어? 너야말로 왜 사람 헷갈리게 해? 하나만 하라고, 하나만!”

“나도 그러고 싶어! 쭉 살리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어. 상황이 끔찍했다고! 난 내가 할 수 있는 한 언제나 네게 최선을 다했어! 언제나!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사진은, 사진은, 따로 이유가 있어서 가지고 있었던 건 절대로 아니야. 그냥 단지…….”

정윤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꽉 주먹 쥔 두 손도. 그는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버릴 수가 없었어.”

정윤환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흰 이마에 땀이 솟아 옅은 색 머리칼이 달라붙어 있었다. 눈은 핏발이 서 벌겠다. 그는 팔을 들더니 환자복 소매로 제 이마와 눈가를 아이처럼 문질렀다. 호흡이 한결 누그러진다 싶더니, 정윤환은 침을 삼키고 유은우를 노려보았다. 그가 토하듯 말했다.

“이제야 속이 시원해?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이유가 없다고 했잖아. 이렇게 사람 밑바닥까지 긁어내야겠어? 난 네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 과거를 설명하고 싶지도 않고, 내 죄에 변명할 생각도 없어. 용서를 구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받고 싶지도 않아. 다시 돌아간대도 똑같은 선택을 할 테니까. 네 앞에 서 있으면 나 자신이 정말로 싫어져. 그러니까 너도 그냥 나 싫어하면 되잖아. 정윤환 쟨 그냥 미친놈이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넘기라고. 왜 자꾸 이유를 캐묻고 지랄이야, 나도 모르는데! 나를 변호할 만한 것들은, 불행에 얽히고설켜서 이제 제대로 기억도 안 난단 말이야!”

“왜 네가 화를 내?”

유은우가 차갑게 뱉었다. 정윤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열 오른 숨을 씨근덕댔다. 유은우는 정윤환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내가 여기 입학하기도 전부터 줄곧 날 죽이려고 해 놓고, 사진은 꼭꼭 감춰 뒀단 말이지. 왜 사진을 가지고 있었는지 대답하기가 그렇게 질색할 정도로 힘들면, 질문을 바꿔 볼까? 너한테 난 뭐야?”

정윤환의 입술이 약간 벌어졌다. 옅은 갈색 눈동자가 흔들린다 싶더니, 그는 고개를 돌리며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이쯤 되자 유은우는 정말로 화가 치밀었다.

“언제부터 이 질문이 너한테 그렇게 어려웠어? 폐품이니 쓰레기니, 멋대로 불러 댄 건 너잖아. 안 그래?”

우우웅. 진동이 울렸다. 유은우는 이프를 확인했다. 익숙한 번호. 김서혁이었다. 유은우는 홀스터에서 인터컴을 빼 귀에 꽂았다.

“왜?”

― 전화 받는 태도가 그게 뭐야. 다시 걸 테니 똑바로 받아.

전화가 뚝 끊어졌다가, 즉각 웅웅 진동이 울렸다.

“네, 대장.”

― 메신저로 초대장 보냈다. 확인하고 정윤환이랑 같이 와. 잘 갖춰 입어야 해. 중요한 자리니까.

“어딘데?”

― 정윤환이 잘 알아.

유은우는 눈을 굴려 옆을 보았다. 정윤환은 이프로 메신저를 확인하고 있었다.

“알겠어.”

― 정윤환 말 잘 들어. 싸우지 말고.

“노력해 볼게.”

― 유은우.

김서혁의 호명이 유독 무거워, 유은우는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 중요한 자리다.

유은우는 대답 없이 천천히 눈을 들었다. 정윤환과 서재희가 뚫어져라 자신을, 정확히는 자신과 통화하고 있는 김서혁을 응시하고 있었다.

― 판이 바뀔 거다. 각오하고 오도록.

전화가 끊어졌다. 유은우는 메신저를 열었다.

도시연합 1030주년 기념 연회.

3월 22일 오후 7시.

제1도시 도시연합본부 중앙홀.

유은우는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날짜를 확인했다. 3월 22일.

연합기념일은 4월 1일이었다. 기념 연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앞당겨도 되는 행사였나. 이건 마치 생일 전 주에 생일 파티를 하는 꼴이었다.

그때였다. 무언가가 훅 날아왔다. 유은우는 반사적으로 물러섰다. 정윤환은 고개도 제대로 들지 않았지만, 공중에서 가볍게 그것을 낚아챘다. 총이었다.

“상황 정리할까.”

서재희가 말했다. 그는 유은우의 침대 옆 서랍을 닫고는 이어 말했다.

“임유현은 날 버린 게 아니야.”

서재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작년 이맘때쯤 도시연합 기록물실에서 내가 위원회 명단을 빼 왔어. 열세 명으로 구성된 진짜 위원회 명단. 그때 난 걸렸는데도 제거되지 않았어. 왜냐? 내 재능이 아까워서. 다른 사람이었으면 목이 날아가고도 남았을 짓을 저질렀는데도 그들은 날 못 건드렸어. 임유현이 막아 줬으니까. 그는 내게 많은 것을 투자했어. 돈, 시간, 인맥, 인내심. 그는 절대로 쉽게 나 못 버려. 그리고 날 가지고 싶어 하는 건 김서혁도 마찬가지야. 세상 사람 모두가 날 가지고 싶어 하니 대수로울 것도 없어.”

서재희는 병실을 가로질렀다. 그는 말을 하면서 동시에 생각을 정리하는지,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여러 번이나 안락사 신청서를 제출했어. 물론 임유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지. 나는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길 바랐지만, 그러질 못한다면 최소한 인간 이하의 취급은 받지 않았으면 했어. 아무리 의식이 없더라도. 그래서 교장의 비위에 최대한 맞추었던 거고. 하지만 임유현은 불안했을 거야. 나는 지쳐 있었고, 부모님을 뵈러 병원에 가는 횟수를 꾸준히 줄여 왔으니까. 혹여나 내가 완전히 부모님을 포기하고 자신을 배신할까 봐 속이 탔겠지. 그가 보기에 부모님은 효과적인 인질이 아니었어. 그는 대체품을 찾고 싶었을 거야. 그래서 김서혁의 제안이 구미에 맞았던 거고.”

서재희는 창가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몸을 돌려 창가에 몸을 기대었다. 불과 몇 시간 전 김서혁이 머물렀던 지점이었다. 서재희는 당시 김서혁의 자세를 그대로 재현하며, 병실 한쪽 구석을 바라보았다. 김서혁이 방문했을 때, 서재희와 유은우가 함께 서 있었던 위치였다.

“내가 어제 김서혁 앞에서 실수했어. 은우를 너무 대놓고 감쌌어. 내가 은우를 좋아한다는 걸 김서혁이 눈치챈 것 같아. 김서혁은 우리 관계를 떠보고, 바로 임유현에게 갔을 거야.”

서재희의 시선이 흐릿했다. 김서혁의 입장이 되어 상황을 짚어 내느라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았다.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임유현 당신이 서재희를 손에 넣었으나 통제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나 김서혁은 알고 있다. 서재희는 내가 가지고 있는 전리품, 즉 유은우를 좋아하고 있다. 그러니 유은우가 후보 자리에 오르고 관리자로 등록한다면, 서재희는 유은우를 위해서라도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할 것이다. 나는 유은우를 통제할 것이고, 유은우의 동선을 따라 서재희가 움직일 것이다. 그러니 나와 손을 잡으면, 우리는 둘을 모두 가질 수 있다. 그편이, 차인호와의 소득 없는 동맹보다 당신에게 이득이며, 비로소 당신은 서재희를 입맛대로 휘두를 수 있을 것이다.”

서재희의 눈이 광채로 반들거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목소리는 지극히 차분했다.

“임유현은 나를 버리지 않았어. 나의 새로운 약점을 찾아냈을 뿐이지. 부모님을 살해한 것은 내게 경고의 의미일 뿐이야.”

유은우는 배를 꾹 움켜쥐었다.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토록 염려했는데. 자꾸만 넘치는 마음을 눌러 꼭꼭 묻어 두었다. 거리를 두려 했었다. 소중한 사람이라 나 때문에 길을 잃지 않았으면 하고. 그렇게 바랐는데.

서재희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기척이 났다. 그가 서늘한 손으로 유은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그가 가만가만 말했다.

“죄책감 같은 거 갖지 마. 이건 순전히 내 실수야. 내가 생각이 짧았어. 그리고 이런 식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겪었을 일이야. 네 탓이 아니야.”

“이제 와서 후보를 바꾼다고?”

정윤환이 내뱉듯 이어 말했다.

“차인호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위원회는 또 어떻고? 도시 출신도 아닌 유은우를 후보로 세운다는 게 말이 돼? 여태 시민권도 주지 않았어. 그런데 낙원의 이론에 손댈 권한을 준다고?”

“정윤환, 난민 혐오는 차인호의 견해야. 임유현의 노선이 아니라. 임유현은 난민이든 시민이든 가리지 않고 묶어서 더 뛰어난 인간을 가려내려고 해. 그가 김서혁에게 동의한 것은, 유은우가 자신의 리스트에 넣을 만했다는 뜻이야. 여태 김서혁이 올린 안건은 백이면 백 부결되었지만 이번은 달라. 과반수 원안 가결되어 일사천리로 진행될걸.”

서재희는 유은우에게서 손을 거두고 제 이마를 문질렀다. 그는 턱을 매만지며 다시 병실을 왔다 갔다 돌아다녔다. 그러다 우뚝 멈춰 섰다. 그가 입을 열었다.

“임유현의 손아귀에 걸려들었을 때, 나는 정말 어렸었지. 상황판단이 서툴렀고, 결단을 두려워했고, 고통에 몸을 사렸어. 하지만 지금은 달라.”

서재희가 정윤환을 바라보았다.

“정윤환 넌 항상 나랑 팀 하고 싶어 했지? 나는 매번 거절했었고. 이제 내가 팀 제안을 할까 하는데. 셋이서 팀 한번 만들까. 역대 최고라고 평가되는 설계 천재에, 동조율 100의 타격자에, 그리고 나에 대해 어필하자면…….”

서재희가 장난스럽게 제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팀전 승률 98%. 덧붙이자면 2%는 기초학교 다니던 시절, 시골 촌구석에서 다 알고 지내는데 너무 나만 이기니까 이웃에게 미안해서 설렁설렁 봐준 몇 판이야. 일부러 지는 것도 힘들더라. 참고로 나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팀원이 죽게 내버려둔 적이 없어. 보통은 내 팀에 서로 들어오려고 하는데. 어때? 난 굉장히 든든하게 느껴지는데.”

서재희는 확신에 차 있었다. 목소리는 크고 듣기 좋았다. 그러나 유은우는 자꾸만 뒤가 서늘했다. 그 저주 같은 예언. 유은우가 막 입을 열려는데, 정윤환이 먼저 내뱉었다. 목소리가 날이 서 예리했다.

“잠깐만. 서재희, 우리 지금 예언의 한가운데 있는 거 아니야?”

서재희가 매끄럽게 웃었다.

“나도 알아. 하나가 둘의 지지를 받아 셋을 최악으로 끌어야만 비로소 용의 죽음으로 도래할 것이다. 지금 너희 둘이 나를 리더로 삼게 되면 예언과 딱 맞아떨어지지. 우리가 최악으로 치달을까 봐 두려운 거지?”

서재희가 목소리에 부드럽게 힘을 더했다. 발음은 명확했고, 끝맺음이 확실했다.

“나는 선택할 수 있어. 지금 내가 원한다면 당장 여기서 창문을 열고 뛰어내릴 수도 있고, 임유현에게 달려가 무릎 꿇고 빌 수도 있어. 하지만 난 너희 둘을 선택했고, 이건 예언과는 별개로 나의 의지야. 지금부터 예언은 신경 쓰지 마. 시가 평론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듯, 낙원의 이론도 마찬가지야. 그저 도구로 쓰일 뿐이야. 우리에게 예언은 아무 효력도 없어. 곰팡내 풀풀 풍기는 악담 따위, 온 세상 사람이 믿어도, 우리가 뒤집을 수 있다는 것 내가 똑똑히 증명해 보일 테니까.”

서재희는 손을 들어 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나는 정윤환의 바람대로, 김서혁이 한세연 연구관을 해치지 않도록 막을 거야. 또, 은우가 낙원의 이론 관리자가 되지 않고도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할 거야.”

서재희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은우가 관리자로 등록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주 간단해. 낙원의 이론을 부수면 되지.”

서재희의 낯이 상기되었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끄르며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김서혁이 잡았다고 생각하는 나의 약점은 없던 일로 해야겠지. 내가 은우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저 김서혁의 생각일 뿐이야. 아직까지 그 어떤 증거도 없어. 공식적으로 나는 차예원과 약혼한 사이야. 임유현은 곧 손으로 만져지는 실질적인 증거도 없이 김서혁의 말만 믿고 내 부모님을 살해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되겠지.”

유은우는 고개를 저었다.

“선배, 대장은 정말 눈치가 빨라서 그렇게 쉽게 속지는 않을 거예요.”

서재희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수고롭게 김서혁을 노릴 필요 없어. 우린 그저 여론만 신경 쓰면 돼. 가령 너랑 정윤환이 붙어만 있어도 커플로 엮어 대는 온하나비가 아주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김서혁 빼고 나머지를 속이면 돼. 아무리 김서혁이라도 여론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 아주 쉬운 일이야. 그리고 나는…….”

서재희가 차분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차인호에게 붙을 거야. 그래야 균형이 맞지 않겠어?”

정윤환은 말이 없었다. 그는 질린 낯으로 서재희를 빤히 보고 있었다. 서재희는 그런 정윤환을 말끄러미 보다가 배려하듯 눈으로 웃었다. 유은우는, 이런 상황에서도 서재희가 웃을 수 있다는 것이, 혹은 웃는 척할 수 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서재희가 따뜻하게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다 잘될 거야.”

“내가…….”

정윤환의 목소리가 탁하게 갈라졌다. 그는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내가 뭘 해야 해?”

서재희가 약하게 웃었다.

“정윤환, 내가 여태 단 한 번이라도 팀원들한테 무언가를 강요하는 거 본 적 있어?”

서재희가 부드럽게 이어 말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여태 그렇게 못 했잖아. 너 같은 설계 천재를 같은 팀원으로 모신 것만도 영광인데 지시까지 내릴 순 없지. 내가 너 훨훨 날 수 있게 공간도 마련해 줄게. 학교를 중립지대로 설정해 두면 움직이기 좋을 것 같아.”

“……어?”

정윤환이 뒤늦게 당황해했다. 서재희는 이프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가 지극히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볼게. 임유현보다 빨리 병원에 도착해야 해서.”

“잠깐, 잠깐!”

정윤환이 다급히 불러 세웠다. 서재희가 문손잡이를 잡다가 빙글 돌아섰다.

“장례식은…….”

정윤환이 어색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서재희가 매끈하게 웃었다.

“따로 치를 게 뭐 있겠어. 고향에 폭격 떨어지던 그날이 장례식이었지.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도 물어봐 줘서 고마워.”

문이 단정히 닫혔다.

김서혁은 중요한 자리라고 했다. 판이 바뀔 거라고. 각오하라고. 유은우가 알기로 김서혁이 무언가를 재차 강조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그러니 신중해야 했다. 무엇이든. 그래서 정윤환이 옷을 고르러 가야 한다고 말했을 때, 유은우는 두말 않고 즉각 따랐다. 복식에 관해서라면 정윤환이 저보다 백배 나았으니까.

“닮았지?”

점원이 다른 점원의 팔을 툭 쳤다. 둘은 매장 벽에 설치된 스크린과 정윤환을 번갈아 바라보며 속닥이고 있었다. 유은우도 옷을 고르다 말고 스크린을 보았다. 화장품 광고가 한창이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이목구비가 화려한 중년 여성이 스크린 밖으로 우아하게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유은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힐끔 정윤환을 건너다보았다. 그는 행거를 뒤적여 옷을 꺼내 쓱 살펴보고는 진열대에 툭툭 걸쳐 놓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브닝드레스. 실크 셔츠. 길게 떨어지는 재킷. 짤막한 원피스. 전부 회색이나 검은색으로 칙칙했다. 정윤환은 가끔 부상당한 팔을 짚으며 미간을 좁히기도 했다. 후드를 뒤집어써 그늘이 졌음에도 이마에서 콧날까지 이어지는 선이 또렷했다.

“진짜네. 눈이 아주 판박이야. 입은 주신희보다 더 예쁜 것 같기도 하고. 역시 소문이 맞나 보네. 어릴 때야 몰랐다 하더라도 크니까 얼굴이 그 증거야. 본인은 알까?”

“당연히 알겠지. 자기도 거울 보고 살 텐데 얼굴만 봐도 답이 나오잖아. 인터넷에 말이 얼마나 많은데. 주신희랑 정윤환 둘을 비교해 놓은 사진도 있어. 실제로 보니까 더 닮은 것 같아.”

“근데 주신희는 좀 그렇겠다. 동조자를 둘이나 낳았는데 하나를 형님한테 뺏긴 데다가 하필이면 그 애가 설계 천재일 줄 누가 알았겠어…….”

“맞아. 아들이 하나 더 있었지? 걔도 한 인물 했어.”

“정성민이었나. 그쪽은 아빠를 닮아서 순하게 잘생긴 느낌이었는데. 실종됐었지, 아마?”

“그래? 난 군에서 자살했다고 들었는데…….”

탕, 하고 큰 소리가 났다. 점원들이 대화를 삼키며 자세를 바로 했다. 유은우는 행거에서 옷걸이를 잡아 빼던 자세 그대로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정윤환이 진열대에 막 구두를 내려놓고 있었다. 구두 굽이 진열대 유리를 찍으며 큰 소리를 낸 것 같았다. 정윤환이 유은우를 보더니 이리 오라고 턱짓했다. 유은우는 옷걸이를 내려놓고 정윤환 옆으로 다가갔다.

“뭐가 마음에 들어? 골라 봐. 너도 짐작하겠지만 너무 편한 건 안 돼. 격식 있는 자리라……. 와, 진짜 몸 너무 안 좋은데.”

정윤환은 눈을 찡그리더니 옆의 의자에 앉았다. ‘딱 30분이라도 재활받고 나올 걸 그랬나. 아니면 모양 좀 빠지더라도 공급기 끌고 올 걸 그랬나. 아니야, 어떻게 그 큰 치료기를 두 개나 몸뚱이에 매달고 쇼핑을 하겠어. 창피하게. 차라리 죽는 게 나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정윤환 옆에서, 유은우는 그가 골라 툭툭 나열해 놓은 옷들을 건성으로 훑어보았다. 전부 회색 아니면 까만색이었다.

“다른 색깔 없어?”

“우리 놀러 가는 거 아니다. 불평불만 하지 마. 김서혁 라인을 탄다는 아주 중대한 뜻이 담긴 내 안목이라고. 도시연합군 제복하고 비슷한 느낌을 내야 해.”

정윤환은 핼쑥한 낯으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 회색 이브닝드레스를 옷걸이째 집어 들어 유은우 턱밑에 가져다 댔다. 그는 조금 물러서서 유은우를 아래위로 살폈다.

“옷 색깔이나 브로치 위치 따위로 편 가르는 게 유치해 보여도 어쩔 수 없어. 도시연합 주최 행사는 원래 다 이래. 네 편 내 편 가르고 견제하는. 이거 예쁜데? 사이즈도 얼추 맞아서 수선할 필요도 없겠고.”

유은우는 물끄러미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허리가 잘록했다.

“작을 것 같아.”

“내가 네 사이즈도 모를까 봐. 가서 입어 봐.”

정윤환이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그가 건네는 드레스를 유은우는 잠자코 받아 들었다.

정윤환이 이렇게 옷을 골라 주는 게 정말 처음일까 의문이 들었다. 서재희와 들여다본 과거에서, 정윤환은 유은우를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당시 대화로 추측해 보건대 그것은 아마도 빈번한 일이었을 것이다. 유은우는 입술을 짓씹으면서 정윤환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정윤환은 이제 남성복 쪽을 보고 있었는데, 유은우의 옷을 고르는 만큼의 정성은 없어 보였다. 그는 대충 몇 가지를 골라 들었다. 유은우는 옷걸이로 정윤환의 어깨를 툭 쳤다.

“야, 근데 너 옛날에…….”

“너 왜 반말하냐.”

정윤환이 골라 들었던 넥타이를 집어 던지면서 유은우를 돌아보았다.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그가 재차 말했다.

“너 몇 살이야?”

“스물둘.”

“나는?”

“몰라.”

유은우의 성의 없는 대답에 정윤환이 정색을 했다. 한 대 맞을 것 같은 분위기라, 유은우는 그의 반반한 낯을 뜯어보며 생각이란 걸 해 보았다. 외모는 유은우 또래라 해도 믿을 것처럼 화사하여, 가늠이 어려웠다. 기억을 더듬었다. 서재희가 스물다섯이고 정윤환이 그보다 형이라고 했으니까…….

“스물여섯?”

“여덟. 너랑 내가 지금 한두 살도 아니고 여섯 살 차이인데 반말 찍찍하는 건 아니지 않냐? 정 반말이 하고 싶으면 앞에 오빠라고 붙이고, 오빠 소리 하기 싫으면 존댓말 써. 아니면 나 대답 안 할 거야.”

“……뭐?”

기가 막혀 대답도 한 박자 늦게 나왔다. 유은우가 입만 벙긋거리자, 정윤환은 씩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화장품 광고의 여배우처럼 눈이 예쁘게 가늘어졌다. 몸이 정상이 아닌지라 안색이 창백한데도 웃는 낯이 화려했다. 그러더니 정윤환은 유은우의 어깨 너머를 보며 점원을 부르고, 유은우가 들고 있는 드레스를 가리켰다.

“이 드레스하고 색깔이랑 재질 비슷한 느낌으로 셔츠 보여 주시고…….”

그 뒤로는 정윤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유은우는 오도카니 서서, 막 매장 문을 열고 들어서는 차예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활력이 없었으며, 유은우를 보고도 별다른 내색 없이 바로 점원의 안내를 받았다. 그 뒤로 서재희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서재희는 매끄럽게 미소 짓고는 유은우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교복 위로 까만 코트를 걸치고 있었는데, 반듯한 깃에 희게 반짝이는 작은 꽃 모양의 금속 배지가 달려 있었다.

혼자서 부모님 보내 드리고 왔구나.

유은우는 잠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목구멍부터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코까지 아려 왔다.

차예원이 점원의 안내를 받아 찬찬히 옷을 고르는 사이, 서재희는 눈으로만 매장을 훑어보고 바로 몇 가지를 딱딱 골라잡았다. 점원이 함께 들어가 봐 주겠다는 것을 한사코 사양하고 서재희는 매장 안쪽에 따로 마련된 피팅룸으로 안내되었다. 유은우는 서재희가 사라진 쪽을 뚫어져라 보며 팔꿈치로 정윤환의 등을 툭 쳤다.

“야, 나 이거 입어 보고 올게.”

“반말하지 말라고…….”

“어, 미안.”

유은우는 얼른 피팅룸 쪽으로 달려갔다. 점원이 거들어 주겠다는 것을 완강한 도리질로 물리치고, 매장 안쪽으로 종종 뛰어갔다. 양쪽으로 나열된 피팅룸 중 하나가 막 문이 닫히려는 것을 다급히 밀고 들어갔다.

“어? 은우…….”

막 셔츠 윗 단추를 끄르던 서재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은우는 등 뒤로 문을 닫아걸었다. 서재희는 유은우가 들고 있는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당황한 기색으로, 그러나 따뜻하게 말했다.

“예쁘다. 그런데 그런 옷은 혼자서 입기 힘들 텐데. 점원 도움을 받는 게 어때?”

유은우는 드레스를 벽에 걸었다. 그리고 서재희를 세차게 끌어안았다.

서재희의 몸이 빳빳하게 경직되었다.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서재희는 잠시 얼어붙은 것처럼 그리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러더니 곧 무너져 내렸다. 체구가 한참 차이가 났기에 실제로는 서재희가 유은우를 끌어안는 모양새였지만, 유은우는 왠지 서재희가 자신의 품으로 완전히 안겨 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은우는 서재희의 체중에 밀려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벽에 등을 단단히 붙이고 다리를 똑바로 세웠다. 부상당한 정강이로부터 찌르르 통증이 올라왔으나 이를 악물고 참았다. 서재희가 겪는 아픔에 비하면 이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괜찮다고 생각했어. 생각보다 아프지 않다고. 무뎌져서 다행이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봐.”

서재희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단지 조금 미뤄졌던 거야.”

유은우는 있는 힘껏 그의 몸무게를 받아 내며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천천히 서재희의 단단한 등을 어루만졌다. 황량한 사해에 풀 한 포기 심는 듯 막연했다. 그러나 달리 할 수 있는 위로가 없었다. 유은우는 한겨울 벌판에 서서 혼자 입김을 불어 봄을 불러오려 애쓰는 것처럼 말없이 서재희의 등을 쓸어내리고 또 쓸어내렸다.

유은우는 서재희가 아주 조금이라도 울었으면 하고 바랐다. 눈물이 부질없다 하여도 한 방울이라도 흘러나오기를. 그는 이미 너무나 많이 고여 있었으니까. 그러나 서재희는 끝까지 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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