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5. 발화 (5/15)

005. 발화

동조자는 도시 밖에서도 태어나.

당연한 얘기야. 도시 밖에도 인간이 있으니까. 도시연합이 시민권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싸구려 정화 장치를 몸에 달고 있다고 해서 인간이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니지. 도시에서, 사해에서, 유적지에서, 군에서, 반란군에서, 인간이 있는 곳 어디든 동조자는 태어나.

김서혁은 유적지 출신이야.

빌어먹을 도시연합. 그들은 반란군인 척 가장하고 유적지를 들쑤시고 다니면서 난민들에게서 어린 동조자들만 골라 뜯어내. 이렇게 손에 넣은 아이들을 도시 내 부유층에게 돈을 받고 팔아. 오고 가는 자본의 규모를 들으면 아무리 너라도 깜짝 놀랄걸. 이건 도시연합의 핵심 자금 조달 방편 중 하나야. 인신매매도 도시연합이 하면 멋진 사업으로 탈바꿈하지.

도시연합은 동조자라면 눈에 불을 켜. 낙원의 이론 후보일 가능성이 있으니까. 후보가 될 만한 자질을 갖춘 위험 분자들을 도시로 끌어들여서 감시할 수 있으니 좋고, 반란군인 척하며 적의 이미지를 추락시켜서 좋고, 어린 동조자를 비싼 값에 팔아넘겨 자금을 충당하니 좋고. 이 인신매매는 역사가 길어.

김서혁도 그 희생자 중 하나였어. 아, 희생자라는 표현은 어폐가 있나? 그 지옥 같은 사해에서 도시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흉측한 정화 장치는 떼어 냈을 테니 구원받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저 지옥에서 지옥으로 넘어왔다고 해야 맞을까?

그는 입양과 파양을 반복하며 불안정하게 성장했지. 가족은 없어. 아, 제1도시의? 그들은 양부모야. 악마의 탈을 쓴 법적인 부모에 불과하지. 돈을 주고 동조자를 사들이는 고위층이 정말로 양육에 진심을 들일 거라고 생각해? 천만에.

지난주 뉴스 봤지? 제1도시의 부유층이 제8도시 빈민가의 어린 동조자를 사다가 방에 가둬 놓고 매일같이 피를 빼서 제 자녀에게 먹인. 그래서 가진 자가 무섭다는 거야. 동조자의 피를 먹이면 비동조자가 온에 동조할 수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미신을, 돈 있는 자는 실행에 옮길 수 있으니까.

김서혁의 첫 양부모는 그런 부류였어. 불행하게도, 그다음 부모도, 다다음 부모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았다더군. 어린 그는 도망쳤지만 매번 도시연합에 발각되어 팔리고 또 팔렸지. 도시연합은 동조자를 진귀한 자원으로 끔찍이 귀하게 여기니까 한번 등록된 건 절대 놓칠 리 없어. 김서혁의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원래 양부모 집에 돌려보내기 어려웠기 때문에 아마 몇 달에 한 번씩 부모가 바뀌었을 거야. 김서혁도 곧 도주를 포기하고 얌전한 척 몸 사렸다고 알아. 도망치려야 도망칠 수가 없으니. 그 타이밍의 부모가 김서혁의 마지막 부모, 즉 현재 부모로 남았지. 김영언 제2도시국장. 신해연 의원. 재미 좀 봤을 거야. 동조자의 부모는 온갖 혜택을 받아. 당장 절세만 해도 엄청나지.

김서혁은 스스로 컸어. 햇빛도 물도 없는 곳에서 성장한 것치고는 극적으로 훌륭해. 조기 졸업을 연달아 두 번 하여 남보다 5년이나 더 빨리 군에 들어갔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행한 유년 시절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지. 김서혁이 총사령관 자리에 최연소로 앉자마자 그의 부모는 몸을 사렸어. 당연히 양아들에게 복수당하리라 생각하지 않았겠어? 하지만 김서혁은 그들을 내버려뒀어. 용서했냐고? 그건 모르지. 짐작컨대 그는 일개 개인에게 복수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의 목적은 다른 데에 있었어. 나도 알고 자네도 알고 온 세상 시민들이 다 아는.

난민 인권 신장. 사해 개방.

김서혁은 몇 번이나 도시연합의 인신매매를 고발하려고 시도했어. 번번이 실패했고 그때마다 대가를 혹독히 치렀지. 한번은 총사령관 자리를 내놓을 뻔하기도 했어. 막판엔 유은우마저 잃었지. 힘든 일이었어. 일단 언론이 그의 편이 아니야. 물론 다른 설도 있어. 김서혁이 도시연합의 비리에 대한 아주 중요한 키를 쥐고 있는데, 아직 내놓지 않았다는. 그것만 드러내면 김서혁도 아주 승산이 없지는 않다는 소문이 있기는 해.

김서혁이 가지고 있다는 키? 그건 나도 몰라. 정말로 존재하는지도 모르겠고.

임유현과 차인호가 서로 못 미더워하면서도 동맹을 유지하는 이유가 김서혁이 쥐고 있다는 그 키 때문인지도 모르지. 김서혁을 대놓고 배척하는 임유현과 달리, 차인호는 끈질기게 김서혁을 회유하려 애써 왔어. 지금은 거의 포기한 것 같다만, 그는 한때 김서혁에게 중매까지 섰다고.

차인호가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거지. 자신에게 아내가 전부라고 남도 그럴 거라는 오만한 착각이라니. 김서혁이 결혼? 기도 안 차는 얘기지. 그가 여자를 쳐다도 안 보는 이유는 간단해. 이미 다른 것에 미쳐 있기 때문이지.

그는 용의 심장을 찾아 도시를 확장하여 난민을 수용하고 싶어 해. 기껏 도시를 건설하여 확보한 그 금쪽같은 공간을 벌레만도 못한 난민에게 내어준다? 도시에 거주하는 시민이 얼마나 김서혁을 지지할까? 그는 완벽하게 혼자야. 차인호와 임유현에 비해 입지가 극히 좁을 수밖에 없는 그가 그나마 시민의 신뢰를 받는 것은, 그가 반란군 본부를 소탕한 전적이 있기 때문이지.

도시연합은 난민이라는 개념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는 데에 아주 오랫동안 공을 들였어. 앵무새처럼 지저귀었지. 도시 바깥 인간들은 우리 알 바 아니다. 이제 난민의 삶은 우리의 그것과 너무나 달라지고 말았다. 우리는 그들과 어울릴 수 없다. 사실 그들은 인간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몸에 싸구려 정화 장치를 달고 부작용으로 수명까지 짧은 미개한 것들은. 우리가 도시 안에서 진화할 때 그들은 도시 밖에서 퇴화했다. 난민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류의 퇴보를 의미한다.

그래서 유은우가 안 되는 거야.

인신매매로 몰래 들여오는 동조자들은 신분을 세탁해서 원래 도시 출신인 것처럼 눈 가리고 아웅이 가능하다고 해도, 유은우는 그렇지 않지. 사해 출신, 그것도 반란군의 살인병기였음을 만천하가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인간 취급을 할 수 있겠어? 매일매일 거금을 들여 가며 사해 난민들은 쓰레기라고 대중을 선동하면서, 어떻게 사해에서 주워 온 유은우에게 인권을 준단 말이야. 말도 안 되는 거지.

유은우는 시민권을 받을 수 없어. 절대로. 유은우에게 시민권을 부여한다는 것은, 도시연합의 오래된 이념을 반하는 일이니까. 김서혁이 아무리 위원회에 안건을 상정하며 유은우의 인권을 외쳐도 깨진 독에 물 붓기라고.

유은우는 도시연합이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는 모든 부정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어. 그럼에도 김서혁이 설계 난독증인 유은우를 놓지 못하는 이유? 도시연합에서 그렇게 김서혁을 닦달하며 그깟 어린애 하나 생체 실험으로 치워 버리라고 종용하는데도, 얼굴에 철판 깔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보호한 이유? 글쎄. 동정심? 동질감? 나도 모르지.

아아, 그래. 나도 기억나. 그때 김서혁이 아주 강력하게 주장했어. 맞아. 제6회 조정위원회 때였지. 차인호가 유은우를 폐기 처분하라고 하자 김서혁이 회의 탁자를 거의 뒤집어엎을 뻔했어. 임유현이 유은우를 임시로나마 학교로 받아 주겠다고 해서 그 정도로 끝나고 말았지. 난 그때 김서혁이 차인호의 멱살을 잡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변수?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유은우가 김서혁의 변수가 될 순 없지. 유은우를 쥐고 흔들면, 김서혁을 화나게 할 수는 있어도 움직이게끔은 불가능해. 그 이유는 너도 잘 알겠지. 김서혁은 사사로운 감정을 무시하는 데 도가 튼 사람이야. 그때는, 글쎄, 김서혁이 공식 석상에서 그리 격한 감정을 드러낸 건 처음이었지. 드문 일이었어. 나라면, 어쩌다 한 번 있었던 사건으로 김서혁의 전면을 판단하진 않겠어.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야.

자, 이제 서재희 너도 내게 약속한 걸 줘. 내 아들을 돌려줘.

시체라도 좋아.

“……선배, 재희 선배!”

서재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연다희가 앞에 서서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서재희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연다희가 장난치듯 말했다.

“설마 긴장한 건 아니죠?”

즉각 미소 지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전날 밤, 위험을 감수하고 백정명과 개인적으로 만났으나, 익히 알고 있던 부분을 재확인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게다가 자신이 간절히 알고 싶었던, 김서혁과 유은우의 실질적인 관계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여기서 서재희는 더욱 자신에게 화가 났는데, 실은 김서혁과 유은우가 어떤 사이인지 굳이 알아낼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순전히 제 욕심이었다.

“선배, 저 두 손으로 사격해 봤는데 속도가 너무 느려져요.”

연다희의 말을 들으며 서재희는 구석에 있는 유은우를 좇았다. 대답은 기계적으로, 그러나 충분히 다정하게 나왔다.

“너 집중력 떨어지면 초점 많이 흔들리니까 애초에 두 손으로 사격하는 버릇 들이면 좋아. 왼손으로 아래 꼭 받쳐. 속도가 걱정되면 최소한 안정될 때까지만이라도. 하지만 안정되고 나면 굳이 한 손으로 바꿀 필요성 못 느낄 거야. 안정되면 속도도 같이 따라와.”

유은우는 처음 대기실에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으나, 지금은 허리에 단단하게 심이 잡혀 있었다. 의자에 등을 대고 반듯하게 정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마치 군으로 돌아간 듯 날카롭게 벼려진 상태였다. 서재희는 유은우의 시선을 좇았다. 유은우가 무엇을 보고 있을지 이미 알고 있었으나 확인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스크린에 김서혁이 비춰지고 있었다.

역시. 서재희는 다시 유은우를 응시했다. 그래. 당연하지. 김서혁이 유은우를 구해왔어. 그리고 둘은 무려 5년을 함께 지냈지. 이해할 필요가 없었으나 이해하려 애쓰느라, 머리는 뻑뻑하게 돌아갔다. 유은우가 김서혁을 의지하는 건 당연하잖아. 아무리 버림받았어도 다시 돌아가고 싶겠지…….

저 작고 예쁜 공간에, 내가 들어갈 자리가 있긴 할까?

유은우가 문득 이쪽을 보았다. 서재희는 소스라쳐 눈을 내리깔고도 모자라 아예 몸을 돌려 버렸다. 가슴이 세차게 뛰어 당황스러웠다. 처음에 유은우랑 페어를 맺을 때만 해도, 정면으로 마주 본들 아무 느낌 없었는데. 그런데 지금 와서 왜. 고작 시선 한번 스쳤다고.

큰일 났다. 나 정말 왜 이러나.

서재희는 숨을 뱉으며 넥타이를 끌러 냈다. 그러나 참가팀으로 추첨되자마자 다시 단정히 죄었다.

점검실에서 유은우와 페어를 해제한 것이 드러나 학생들이 소란했던 것만 제하면, 모의 전투는 평소와 같았다. 모든 것이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이어 정윤환이 총을 잡았다. 정윤환 또한 컨디션이 최상으로 보였는데, 그는 전투를 끝내고 유은우에게 다가붙었다. 유은우는 인터컴을 두 개 가지고 있었다. 왼쪽 귀에 하나, 홀스터에 하나.

임유현은 늘 그렇듯 귀빈과의 오찬에 서재희가 참석하기를 바랐다. 서재희는 기꺼이 응했다. 서재희는 차예원과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하는 내내 임유현을 주시했다. 식사 초반에, 임유현의 완고한 낯이 잠깐 동안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으나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예상한 타이밍이었다.

서재희는 포크로 채소를 뒤적이며 짐짓 태연한 척했다. 서재희가 백정명의 입을 빌려 일찌감치 귀빈석으로 흘린 안부를, 소연주가 놓치지 않고 김서혁에게 전달한 것 같았다. 몸조심하시라는 한마디면 되었다. 김서혁은 백정명에게서 서재희의 그림자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오찬 내내 김서혁의 지정석은 비어 있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간 대기실에서 마주친 유은우는 코끝이 빨갰다. 한바탕 운 모양이었다. 코를 훌쩍거리면서 홀스터에 나란히 꽂힌 약물 케이스를 확인하는 유은우를, 서재희는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았다.

아마도 김서혁은 유은우를 받아 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죽이지도 않았다. 김서혁이 유은우의 가능성을 점친 것인지, 유은우의 존재 자체를 아끼는 것인지 가늠이 힘들었다.

― 다섯 번째 전투입니다. 참가팀은 B2팀과 D5팀입니다.

학생 몇이 아쉬운 소리를 했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내심 유은우와 붙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설계 난독증에 팀원도 없는 유은우는 거저 밟고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나 다름없었다. 누군가, 차예원이 운이란 운은 다 가져간다며 작게 빈정거렸다. 유은우가 교내에 낙원의 이론 자료를 뿌린 뒤로, 성적 조작이 의심되는 대표적인 몇몇 학생, 특히 차예원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은 급격히 높아져 있었다. 이어 유은우가 우선권을 선택하자 사위가 웅성거렸다.

연다희가 안타까워했다.

“룰을 잘 모르나 봐요. 제일 좋은 게 딱 정해져 있는데. 도서관에서 모의 전투 영상 하나만 빌려 봤어도 알았을 텐데.”

고세민이 눈을 가늘게 뜨고 스크린의 유은우를 보며 말했다.

“모르진 않을걸. 필기 끝나자마자 지침을 하루 종일 끼고 살았다더라.”

그러나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기이한 정적뿐이었다.

유은우는 총을 뽑았고, 사격했다. 총구가 튈 때마다 괴물이 찢겨 나갔다. 그러나 설계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어떤 미세한 것이 공기를 빠르게 가르고 지나가는 흔적뿐이었다. 실탄을 쏘는 것과 같았다. 유은우가 시계를 다룬다는 것을 익히 아는 서재희조차, 유은우가 총을 발포함과 동시에 시계를 날려 보내는 타이밍이 정교하게 맞아떨어져 놀랐다. 어떻게 며칠 만에 저렇게 쉬이 다룰 수 있는가. 온디딤을 특출나게 다루는 차예원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차예원은 매번 피를 보았고, 유은우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난독증 고쳤나?”

누군가의 중얼거림을 시작으로 대기실이 소란해졌다. 주로 차예원 팀을 청취하던 학생들이 다급히 유은우 전용 채널로 바꾸었다. 동시 접속으로 인해 대기실 곳곳에 떠 있는 개인 스크린들이 버벅거렸다.

“같이 좀 보자. 내 거 다운됐어.”

“난독증 고친 거 맞아? 왜 설계가 안 보여? 은닉 쓰나?”

“은닉은 고급 기술인데. 정윤환도 겨우 할걸.”

“여기서 멈춰. 아까 괴물한테 뭘 날린 것 같은데. 확대해 봐.”

“……작은 바늘 같은데.”

“실탄인가? 비동조자 군인한테 지급되는.”

“단순 총알이면 괴물이 이렇게 폭발하지는 않겠지. 이건 꼭 괴물 안에 뭐가 들어가서 자라나면서 찢고 나오는 것 같은데.”

“팽창 설계 쓰는 건가?”

“그래야 말이 되긴 하는데, 패턴이 아예 안 보이니까 이상하다는 거지.”

서재희는 눈을 들어 대기실 전면 스크린을 보았다. 귀빈들 또한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차인호는 손등으로 입가를 가린 채 임유현에게 몸을 기울이고 무어라 속삭이고 있었다. 임유현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유은우는 임유현이 내린 임무를 고의적으로 실패함으로써 본인이 김서혁 라인임을 증명해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임유현을 거부한 유은우가 모호한 수단으로, 그러나 확실히 선전하고 있으니 속이 편할 리 없었다.

김서혁은 표정이 없었다. 그는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뒤에서 보좌하던 소연주가 다가와 입을 가리고 정중한 태도로 무어라 말을 건네었으나 김서혁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어깨를 툭 쳐서, 서재희는 옆을 보았다. 김산이 제 개인 스크린을 손끝으로 움직여 서재희 눈앞으로 이동시켰다. 스크린 속의 유은우가 빌딩과 빌딩 사이를 건너뛰더니 괴물이 득실거리는 육교로 강하했다. 동작이 깨끗하고 시원했다.

김산이 물었다.

“애초에 난독증 극복이 가능해? 재희 넌 알 거 아냐. 유은우가 혼자서 싸울 수 있게 되어서 페어 해제한 거 맞지?”

“그렇지.”

서재희가 애매하게 대답했다. 고세민이 냉큼 옆으로 달라붙었다. 스크린의 유은우가 총을 들어 전방을 겨누었다. 총구는 튀었으나 설계는 없었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괴물들이 삽시간에 둥그런 원을 그리며 터져 나갔다.

“타격부인 내가 봐도 알겠다. 이거 설계 아니죠?”

고세민은 흥분한 어투로 김산의 스크린을 가리켰다.

“아무리 은닉이라도 처음 총구가 튈 때 패턴이 어느 정도는 서리게 되어 있다고요. 그런데 아예 없잖아요. 대신, 이렇게 확대하면, 여기 뭐 있는 거 보이죠. 반짝반짝하는 금속 같은 거. 이게 설계로 보여요? 이렇게 단단하게 빛을 반사하는 게? 이건 뭔가 물리적인! 손으로 만져지는!”

김산이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설계가 아니면 뭔데?”

“당연히 온디딤이죠.”

김산은 고세민의 의견을 묵살하는 대신, 심각하게 화면을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곳곳에서 학생들이 온디딤을 언급하고 있었다. 총을 제외하고 온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수단.

“재희 선배는 알고 있었죠? 선배가 온디딤 관리하잖아요. 선배가 유은우한테 내어 준 거 아니에요?”

열렬히 말하는 고세민에게 부드럽게 웃어만 주고, 서재희는 다시 귀빈석을 보았다.

학생들이 짐작하는 것을 저 사람들이 놓칠 리 없다. 온디딤 사용은 불법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전투 중지를 명하지 않았다. 김서혁은 물론이고, 유은우를 손에 넣지 못한 임유현마저. 차인호는 초조한 기색이었다. 그는 앞에 놓인 음료를 연거푸 들이켜고 있었다.

― 어떻게, 네가 어떻게 총을 써?

스크린에서 김주완이 유은우를 향해 총을 겨누는 것까지 보고, 서재희는 대기실을 나왔다. 김산을 비롯한 팀원들이, 모의 전투 중에 어딜 가냐며 당황해했으나 서재희를 붙잡지는 않았다. 서재희는 대기실을 나오자마자 재킷 안주머니에서 인터컴을 꺼내 귀에 끼웠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아니나 다를까 몇 걸음 걷지도 않아 이프가 진동했다. 서재희는 전화를 받았다. 걸음을 늦추진 않았다.

“네.”

― 서재희, 유은우가 온디딤을 쓰는데.

“온디딤 보관은 학교에서, 사용 승인은 군에서 주관합니다.”

― 김서혁이 승인했다고?

“네. 서명하셨습니다. 의식은 못 하셨을 겁니다. 정기 보고서에 첨부하여 올려 드렸고 따로 구두 보고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인터컴 너머에서 잠깐 침묵이 있었다.

“교장 선생님께서도 지금 보고 계시겠지만, 유은우는 폐기 처분하기에 가치가 큽니다.”

― 유은우는 김서혁 편이다. 회유하는 데 실패했어. 네게 말하진 않았다만 너도 익히 알고 있지 않나? 강력한 적은 제거해야 맞다.

“설마 김서혁의 전리품 하나 못 가져온다는 약한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서재희는 관제실 앞에 섰다. 교내에서 서재희가 출입하지 못하는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였다. 낙원의 이론 관리자로 등록된 차예원과 정윤환이 자유로이 드나드는 데 반해, 서재희는 권한이 없었다. 그러나 권한은 위임받으면 그만이었다. 굳게 닫힌 금속 문을 바라보며 서재희가 매끄럽게 말했다.

“어차피 유은우는 회유가 어렵습니다. 강제로 가져야 합니다.”

― 유은우가 내게 제 발로 들어오면 모르겠으나, 지금 강제로 취하면 반드시 김서혁과 피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나?

“동조율 100에, 타인의 온디딤을 대가 없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인터컴 너머, 침묵이 길어졌다. 서재희는 통제실 문을 노려보며 인내했다.

― 조금 더 봐야겠다.

옳지. 서재희는 안도의 숨을 겨우 삼켰다. 건조하게 말했다.

“현재 전투를 비공식으로 연장하자고 제안하십시오. 차인호야 교장 선생님께 반기를 들지 못할 테고, 김서혁 또한 바라는 바일 겁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직접 보시고, 유은우가 필요한지 아닌지 결정하십시오. 혹여 유은우가 필요치 않다고 최종 판단하신다면 제가 직접 사고사 처리하겠습니다.”

― 그 반대의 경우라면 네가 데리고 오는 건가?

서재희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미 정윤환을 통해 유은우에게 손길을 뻗어 놓고 여의치 않으니 내게 기대는 건가.

“유은우의 성격상 회유는 어렵다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힘으로 제압하셔야지요.”

― 그러니까 너는 못 하겠다? 서재희답지 않은 대답인데.

“하려면 할 수 있으나 품이 많이 듭니다. 저는 지름길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서재희는 왼쪽 손목의 이프를 켰다. 모의 전투로 활성화된 유은우 전용 채널에 접속했다. 음성은 죽이고 바라만 보았다. 이제 유은우는 차예원을 제압한 채 김주완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종료까지 남은 시간 5분.

“교장 선생님.”

서재희는 이프를 껐다.

“저 관제실 앞입니다. 유은우를 좀 더 보시고 싶다 하셨으니, 제게 관제실 권한을 임시 위임해 주십시오. 유사시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 내 허락 없이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온디딤을 유출하고 김서혁 총사령관의 승인을 받은 책임은, 후에 묻겠다.

통화가 끊어졌다. 서재희는 학생 배지를 보안장치에 가져다 댔다.

문이 열리자마자 곧장 성큼성큼 들어갔다. 간밤에 차예원이 들어와 추첨을 조작한 것 외에는 드나든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알았다. 안은 어두웠고, 전면의 크고 작은 스크린이 날카로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모의 전투실의 유은우, 귀빈석의 임유현, 모의 전투 대기실의 참가팀. 각 장소의 드론이 보내오는 영상이 모자이크로 엮여 한눈에 보였다.

서재희는 콘솔에 두 손을 짚었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곧 안내음이 나왔다.

― 도시연합장 차인호, 도시연합 중앙학교장 임유현, 도시연합군 총사령관 김서혁이 합의하여 조건이 충족되므로 해당 전투를 비공식 연장합니다. 시스템 관리자 권한에 따라 채널이 변경됩니다. 이 시각부터 전투 종료까지의 영상은 동조자 기록물 관리에 따른 법률을 적용받지 않습니다. 따라서 해당 전투는 도시연합의 여덟 도시로 동시 송출되지 않고 시스템 오류로 표기되며, 실제 데이터는 낙원의 이론으로 특별 관리됩니다.

시스템이 자동으로 조정되었다. 콘솔의 빽빽한 버튼과 스틱들이 저마다 활성화되거나 종료되며 빛의 물결이 일었다.

― 상기 전투의 우선권은 초기화됩니다. 상기 전투의 생존자 B2팀 리더 유은우, D5팀 리더 차예원. 팀원 김주완이 랜덤으로 전투 지역에 배치됩니다. 모든 조건은 기본으로 진행합니다. 시간제한은 없으며, 각 팀에서 한 명 이상 사망할 시 혹은 관리자 희망 시 전투 종료됩니다.

고개를 들었다. 새롭게 빚어진 공간에서, 유은우가 관제탑에 막 발을 디딘 참이었다.

제3유적지.

셋 중 누가 채널을 골랐을까. 서재희의 직감이 맞다면 아마 김서혁일 것이다. 셋 중 제3유적지와 인연이 깊은 사람은 김서혁뿐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반란군 본부를 뽑아냈고, 유은우를 처음 만났다. 서재희의 판단에, 그 이유 말고는 굳이 제3유적지를 선택할 점은 없어 보였다. 콘솔을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감상적인 데가 있네.

서재희는 허리를 굽혀 콘솔 아래쪽 비상 레버를 찾았다. 자동 시스템을 수동으로 전환하는 레버였다. 서재희는 그 위에 발을 단단히 올렸다.

유은우는 고전하고 있었다. 관제탑에서 뛰어내리며 호흡기를 잃어버린 탓에 신체 강화제를 보충 흡입할 수 없어 속도가 확연히 느려진 상태였다. 그러나 미처 흡입할 시간을 확보하지도 못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계에 문제까지 생긴 듯했다. 유은우의 시계는 손목에 붙어 있긴 했으나 소름끼치게 희번덕거렸다. 그때마다 유은우가 이를 악무는 것을 보니, 시계의 위험한 움직임은 그녀의 의지가 아닌 게 확실했다.

서재희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동안 온디딤을 사용한 대가를 설마 지금 몰아서 치르는 건 아니겠지. 하나 온디딤이 상처를 유예했다가 한꺼번에 할퀴어 간다는 건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상처를 적립했다가 지불한다는 건, 상처 없이 온디딤을 쓰는 것만큼이나 상식을 비껴갔다.

― 서재희.

임유현이었다.

― 유은우가 온디딤을 전혀 제어하지 못하는데. 저런 식이라면 온디딤의 일부만 훼손당해도 전투 불능이 되는 것 아닌가. 더 이상 지켜볼 가치도 없다. 차인호도 동의하는군. 살려 봤자 문제만 일으킬 테지. 김서혁이 동의하지 않아 전원 합의가 어려우니 편법으로 시스템을 일부 조정하겠다.

딱딱한 기계음이 떨어졌다.

― 내부 시스템 오류에 따라 B2팀 리더 유은우의 충격 흡수 시스템이 안내 없이 종료됩니다.

서재희는, 쓰러진 유은우를 향해 총을 겨누는 차예원의 눈에서 번쩍이는 희열을 보았다.

― 서재희 너는 거기서 대기하고 있다가 혹시 김서혁이 개인적으로 시스템에 침투하여 유은우를 살리려고 하면 막아. 공격은 원격으로 가능해도 방어는 관제실에서만 가능하니까. 유은우를 확실히 제거할 수 있는 팀으로 교체하겠다. 이건 김서혁 역시 동의했으니.

서재희는 스크린을 응시했다. 유은우는 차예원을 몸싸움으로 따돌리고 간신히 몸을 숨긴 상태였다. 전투에서 머리보다 직감에 의존하는 유은우가, 통증이 유독 선명한 것을 눈치 못 챌 리 없다. 유은우는 이프를 켜서 무언가를 확인하더니 곧 낯빛이 희어졌다.

― D5팀이 C4팀으로 교체됩니다.

유은우를 추적하던 차예원과 김주완이 전원 꺼지듯 사라졌다. 그 자리에 정윤환이 내리꽂혔다. 그는 표정 없이 머리를 쓸어 넘기고 전방을 주시했다. 몇 번의 도약 만에 그는 유은우의 시야로 접근했다.

어떡하지?

서재희는 숨을 멈추고 이를 악물었다. 드문 일이었다. 예상을 정통으로 비껴가는 것은.

서재희는 유은우가 시계를 환상적으로 다루리라 기대했다. 온디딤은 총과 달랐다. 어딘가 부서진다고 해서 그것이 꼭 기능 불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총이 이성에 기댄다면 온디딤은 감성에 가까웠다. 서재희도 실수로 목마를 떨어뜨려 부순 적이 있었다. 조각을 주워 한군데 잘 모아 두었더니 그다음 날 감쪽같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왜 시계를 못 다루는 거지?

유은우는 필사적으로 정윤환을 피해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로 보였다. 반면에 정윤환은 매 순간 유은우의 타격에 적응했으며, 그마저도 조급한 기색이 없었다. 하기 싫은 숙제를 하듯, 그러나 실력만은 숨길 수가 없어, 둘의 거리는 확실히 좁혀지고 있었다.

임유현은 여태 서재희에게 유은우를 언급한 적이 없었다. 임유현은 오직 정윤환을 통해서만 유은우의 전반을 관리해 왔다. 그러나 지금 임유현이 서재희가 보는 앞에서 버젓이 정윤환을 부려 유은우를 제거하려 함은, 서재희에 대한 확연한 경고나 다름없었다. 내가 부릴 수족이 너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지는, 네가 그동안 유은우를 보호하려 했는지 몰라도 그건 내 손아귀 안에서 무의미할 뿐이라고.

정윤환의 총구가 튀어 올랐다.

탕!

유은우의 지척에서 드론이 파괴되었다.

― 드론이 훼손되어 촬영이 중단됩니다.

동시에 크고 작은 스크린 중 모의 전투실을 띄우던 유일한 하나가 뚝 꺼지며 먹통이 되었다. 보통의 모의 전투라면 일고여덟 대의 드론이 가동되어 하나쯤 손상되어도 모니터링이 가능했겠지만, 전투가 비공식으로 전환되는 순간 단 하나만 빼고 전부 종료되었기 때문에 이제 모의 전투실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서재희는 다급히 콘솔의 스틱을 쥐었다.

― 고의적 훼손의 우려가 있어, 안내 없이 비상용 드론으로 전환합니다.

비상용 드론을 지정하고 그 송출 경로를 차례로 차단시켰다. 이제 모의 전투실 화면은 오직 서재희만 볼 수 있었다. 이어 기록이 남지 않도록 실시간 저장 기능을 꺼 버렸다.

― 서재희, 이쪽에서는 전투실 상황이 전혀…….

인터컴을 뺐다. 이프를 껐다. 비상용 드론은 정말 비상용일 뿐이라, 화면이 불안정하고 잡음이 지지직거렸다. 정윤환이 유은우를 향해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화면이 안정된 찰나, 서재희는 정윤환이 거의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윤환이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다음 순간, 뚝, 화면이 크게 일그러졌다. 식별이 불가했다.

서재희는 발로 레버를 힘껏 밟아 완전히 반대쪽으로 꺾어 놓았다.

― 배경 재설정 모드로 전환합니다. 60, 59, 58…….

이어서 콘솔에서 물러섰다. 대기실과 점검실을 거치지 않고도 모의 전투실로 넘어갈 수 있는 통로의 위치를 확인했다. 왼쪽.

그때였다. 스크린이 폭발하듯 반짝 돌아왔다. 그러나 온통 먼지구름으로 시야가 뿌옜다. 쐐액 하고 날카로운 것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거친 폭발음이 연달아 쏟아졌다. 그 흩어져 어지러운 스크린에서, 서재희는 유은우보다 정윤환을 먼저 발견했다. 정윤환은 고가도로 한가운데 버티고 서 있었다. 클로즈업하니 만신창이였다. 땀에 젖어 있는 것은 기본이고 허벅지가 크게 찢겨 있었다.

다쳤어?

서재희가 제 눈을 의심하는 사이, 정윤환이 이를 악물며 낮게 욕을 하더니 그 자리에서 도약했다. 막 정윤환이 디디고 있던 자리로, 시커멓게 번쩍이는 거대한 창이 빛처럼 날아와 꽂혔다. 순식간에 반경 수 미터 내 모든 것이 가루로 부서졌다.

시계 침.

서재희는 콘솔을 조작하여, 시계 침이 날아왔던 방향을 잡았다.

― ……47, 46, 45…….

반쯤 무너진 건물 꼭대기 구석에 유은우가 있었다. 왼쪽 어깨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리 한쪽이 부러진 듯 몸이 위태롭게 기울어 있었지만, 그래도 서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을 거대한 시계가 드리우고 있었다. 매끄러운 시계판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톱니바퀴가 펄펄 살아 날뛰었다. 유은우가 통제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유은우가 통제당하고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도 아직 맞서 싸우고 있었다.

서재희는 다리에서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콘솔을 지지하며 간신히 몸을 바로 세웠다. 유은우를 수신자로 잡고 통신 기능을 활성화시켰다.

“유은우.”

서재희는 유은우가 자신의 부름을 듣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은우는 즉각 반응했다. 그녀는 정윤환이 있는 방향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입가에 말라붙은 피를 닦아 내는 시늉을 하며 입을 가렸다. 잔뜩 쉰 목소리.

― 선배?

치열한 전투 속에서도 오감을 열어 두고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만큼 잘 훈련되었다는 뜻이다. 설계도 못 하고 유순한 외모라 자주 잊었지만, 어쨌든 유은우는 군인이었다. 그것도 김서혁이 직접 키운.

― ……34, 33, 32…….

“30초만 더 버틸 수 있겠어? 정윤환이랑 최대한 멀리 떨어지면서. 바로 시스템을 종료하면 오히려 위험해질 수 있어. 엄폐물이 사라지니까. 내가 차라리 공간을 둘로 나누려고 그래.”

유은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즉각 오른손을 휘두르며 몸을 낮추었다. 다친 어깨가 왼쪽이라 그나마 버틴 것 같았다. 시계판이 방패처럼 그녀에게 드리워졌다. 그 위로 정윤환의 공격이 무자비하게 퍼부어졌다. 새파란 칼날들이 시계판 방패 위를, 카가가각 긁으며 지나갔다.

유은우는 눈을 꼭 감고 웅크리더니, 달달 떨면서 한 차례 피를 토해 내고는 입가를 문질렀다. 서재희는 유은우의 오른쪽 다리가 이상한 각도로 어긋나 있음을 발견했다. 못 움직이는구나. 정신 붙잡고 있는 게 용했다. 군에 들어가면 고통을 삭이는 법부터 훈련받는다더니. 가슴이 탔다. 다시 화면을 잡았다. 시계 침을 피해 멀어졌던 정윤환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 ……27, 26, 25…….

“은우야, 내가 셋을 셀 테니까 거기서 뛰어내려.”

― 선배랑 페어 해제해서 진짜 다행이에요.

쌕쌕거리는 숨소리 사이로 목소리가 가만가만 이어졌다.

― 여기 와서 제일 잘한 일이에요.

서재희는 그만 목이 메었다. 눈이 자꾸만 흐려져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내가 신호하면 뛰어내려.”

― ……15, 14, 13…….

서재희는 포인터를 잡았다. 손에 땀이 서려 자꾸만 미끄러졌다. 유은우가 움직이지 못하니, 앞으로 정윤환과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그리고 정윤환은 현재 유은우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서 차츰차츰 뛰어내려 오고 있었다. 서재희는 유은우의 바로 위로 신중하게 좌표를 설정했다. 유은우의 바로 밑으로는 온의 밀도를 조정했다.

유은우의 몸이 어슷하게 기울었다. 안 그래도 작은 몸뚱이를 옹송그려, 괴물처럼 난폭하게 엉켰다 풀어지는 시계가 버거워 보였다.

유은우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정윤환이 코앞이었다. 그가 방아쇠를 당겼다. 흰 궤적이 초승달처럼 날카롭게 날았다.

― ……3, 2, 1…….

“은우야, 뛰어!”

유은우가 눈을 꼭 감았다. 날개 꺾인 새처럼, 몸이 크게 한 번 휘청거리더니, 건물 모서리에서 톡 미끄러졌다.

― 배경 재설정 모드 전환 완료.

서재희의 손이 콘솔 위를 날았다. 미리 설정해 둔 값이 차례로 빠르게 입력되었다.

― 총의 최대 동조율을 000으로 조정합니다.

정윤환이 쥔 총에서 동조율이 빠르게 하락하더니 000을 기록하고 불이 꺼졌다.

― 기준점 아래 온의 밀도를 150%로 조정합니다.

일직선으로 세차게 추락하던 유은우의 몸은, 허공에서 서서히 그 속도가 줄었다. 사뿐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먼지가 풀썩 피어올랐다. 유은우가 바르르 떨며 몸을 웅크렸다.

― 공간을 분리합니다.

방금까지 유은우가 버티고 있었던 자리를 기준으로, 대기가 얼어붙듯 얇고 투명한 판이 생성되었다. 유은우를 향해 빠르게 내리꽂히던 정윤환은,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 총 때문에 완충 설계도 하나 펼치지 못하고, 가로막힌 판에 정통으로 처박히고 나서 몇 번을 거칠게 굴렀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피가 사정없이 튀었다.

서재희는 정윤환을 클로즈업했다. 거의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서재희가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부상을 입은 데다, 마지막에 상당한 속도로 판에 부닥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 공간 분리를 해제합니다.

판이 사라지며 정윤환이 시체처럼 뚝 떨어지다가 서재희가 뻑뻑하게 조정해 놓은 온의 밀도 덕에 나붓이 땅에 가라앉았다.

― 온의 밀도를 초기화합니다.

서재희는 왼쪽 통로로 들어가 달리면서, 이프를 켜 응급 환자 이송을 요청했다. 그 잠깐을 틈타 임유현과 차인호는 물론이고 차예원의 호출까지 물밀듯 쏟아졌다. 바로 꺼 버렸다.

유은우는 바닥에 내려앉은 그대로,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서재희는 정신없이 유은우에게 다가갔다. 그런 서재희를 발견하고 유은우는 손을 꿈지럭거려 손목에서 시계를 풀어 냈다. 삼킬 듯 유은우를 점령하던 시계가 줄어들었다. 유은우는 그대로 몸이 축 늘어졌다.

정신을 잃어 호흡기를 물릴 순 없었다. 서재희는 회복제 케이스를 깨물어 부수었다. 약을 머금고 즉각 유은우의 위로 몸을 숙였다. 두 손으로 유은우의 양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입을 맞추었다. 아랫입술을 유은우의 입술 사이로 밀어 넣어 유은우가 입술을 벌리도록 했다. 그 틈으로 머금었던 약을 천천히 흘려 넣었다. 유은우가 간신히 삼키는 기척이 나자 눈물 나게 고마웠다. 중간에 케이스의 깨진 조각이 같이 흘러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다급히 혀로 그것을 걷어 냈다.

회복제 네 통을 싹 비운 다음에야 유은우는 호흡을 겨우 가누었다. 눈을 뜨고 이쪽을 바라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몸이 빠르게 식고 있었다. 서재희는 제 코트를 벗어 유은우에게 덮어 주었다. 조끼도 벗어서 둘둘 말아 유은우의 머리를 괴어 주었다.

“의료진이 금방 올 거야.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마터면 널…….”

목이 잠겨 뒷말은 이을 수 없었다. 서재희는 유은우의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생각보다 많이 안 다쳤네. 금방 낫겠다.”

농담조로 말했다. 유은우가 옅게 웃었다. 유은우의 눈에서 초점이 가물가물 흩어졌다. 회복제에 기본적으로 포함된 진통제와 수면제의 약효 때문인 듯했다. 흙먼지로 전신이 따가웠다. 유은우를 깨끗한 관제실로 옮기고 싶었으나, 꺾인 다리가 염려되어 함부로 안아 들 수 없었다.

서재희는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지척에 정윤환이 엎어져 있었다. 정신을 잃었을 거라 생각했으나, 놀랍게도 정윤환은 의식을 놓지 않고 있었다. 서재희는 정윤환의 찢긴 허벅지나 부러진 팔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정윤환의 눈을 보았다. 섬세한 눈매에, 눈물로 색이 빠진 듯 옅은 눈동자. 서늘했다. 단순히 서재희의 방해로 임유현의 지시를 수행하지 못했다는 낭패는 결코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깊은, 그리고 아주 오래된.

서재희는 홀린 듯 성큼성큼 걸어가 정윤환의 손목을 쥐었다. 힘없이 늘어진 그의 왼손을 오른손의 이프에 가져다 대었다. 상태 창을 띄웠다.

충격 흡수 시스템이 꺼져 있었다. 서재희는 정윤환의 지문을 다시 대어 상세 열람을 했다. 타인이 시스템으로 조작하여 종료한 것이 아니었다. 정윤환 본인이 직접 설정했다.

서재희는 시야가 아득해졌다.

“너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사람 목숨을 보호하는 시스템을 왜 자진해서 해제했단 말인가. 미친 짓을 넘어 명백한 자살 행위였다.

“같이 죽으려고. 드디어 끝나나 했는데.”

정윤환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서재희가 여태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상으로 엉망이 된 것과 별개로 정윤환은 더없이 닳은 눈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정윤환이 줄곧 유은우를 협박해 온 것은 안다. 임유현의 지시였겠지. 그 회유하라는 지시는, 오늘에서야 살해하라는 명령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수행할 수밖에 없을 터. 정윤환에겐 가족이 있었는데, 임유현의 손짓 한 번에 전부 죽어 나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자기 자신까지 던져 가며 함께 죽으려고 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작년 이맘때쯤, 낙원의 이론 관리자에 등록하고 돌아온 날도 정윤환이 말하지 않았던가. 다 잊고 가족들만 생각하며 편하게 살고 싶어 등록하고 왔다고.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그건 내가 묻고 싶다.”

정윤환이 거친 숨을 섞어 드문드문 말을 이었다.

“이렇게 해서 네가 얻는 게 뭐야. 교장이 나한테는 유은우를 죽이라 하고, 너한테는 살리라고 이중 지시하진 않았을 테고. 너 지금 이거 단독 행동이지? 아무리 너라도 뒷감당 어려울걸.”

정윤환이 벌겋게 충혈된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네가 원하는 게 뭐야? 정말 유은우가 가진 정보뿐이야? 그렇다면 내게 물어. 유은우에게서 원하는 것, 내가 전부 말해 줄 수 있어. 유은우의 처음과 끝에 내가 있었으니까. 내가 네 갈증을 해소해 줄게. 그리고 넌 제발 여기서 손 좀 떼. 이러다 너까지 잃겠어. 부탁이니까 제발 좀.”

서재희는 차마 정윤환의 멱살을 잡지 못했다. 빛바랜 그의 시선에서, 서재희는, 정윤환이 유은우의 죽음뿐만 아니라 정윤환 본인의 죽음까지 오랫동안 살피어 왔음을 알았다. 그것은 단순한 살해가 아니라, 아주 낡은 소원처럼 느껴졌다.

망설임 끝에, 서재희는 입을 열었다.

“예전에 말한 그대로야. 반란군 핵심 간부 명단. 분명 그들 중에 용의 심장을 감췄다는 옛 계약자의 후손이 있을 테고, 그 사람은 심장의 위치도 알고 있을 거야. 나는 딱 그것만 원해. 유은우에게 줄곧 그것을 물어 왔어.”

기분이 이상했다. 처음 유은우와 페어를 맺을 땐, 이 질문에 대한 답만이 서재희의 인생에서 최우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정윤환 네가 말해 줄 수 있어?”

“물론.”

정윤환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가 꺼질 듯 속삭였다.

“내 앞에서 맹세해. 여기서 나가는 순간, 유은우에게 절대 관여치 않겠다고. 전부 다 말해 줄 테니.”

서재희는 유은우를 돌아보았다. 날개 꺾인 새처럼 작고 초라했다. 강력한 회복제를 연달아 원액 그대로 마시는 바람에 완전히 취했는지, 피에 흥건하게 젖은 야트막한 가슴이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정윤환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널 살릴 수 있다면 살리고 싶어. 난 항상 누군가를 해치고 죽여 왔으니까. 서재희, 내게서 답을 듣고 유은우는 잊어.”

잠시 숨을 고르더니, 정윤환이 이어 말했다.

“넌 꼭 유은우가 아니어도 되잖아. 나는 달라. 나는 유은우가 아니면 안 돼. 내 손으로 꼭 마무리 지어야만 해.”

자꾸만 오한이 들었다.

차라리 차예원을 좋아하면 어땠을까. 교내의 많은 학생이 차예원을 좋아했다. 그들처럼, 서재희 또한 차예원의 예쁘장한 외모나 탄탄한 배경에 마음을 쉽게 줄 수도 있었다.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 믿었던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아니면 좋아하지 않아도 좋아하는 척할 수 있었다. 뻔뻔한 연기력이야 수년을 갈고닦아 왔다. 편하게 살 수 있다는데 그게 대수겠는가.

실로, 혹은 필요로 사랑하여 기쁘게 약혼하고, 그리하여 서재희의 후원자와 차예원의 부모가 동맹으로 엮여 견고해지기까지 한다면. 의식도 없이 병원에 누워 있는 부모님은 이제 그만 놓아주고, 내 운명이 이리 흘러가니 흐르는 대로 몸을 맡겨 복수도 접어 두고 그리 홀가분하게 살 수 있다면.

“유은우가 아니면 안 되는 건…….”

그런데 하필이면 왜.

“……나도 마찬가지야.”

유은우는 첫 전투를 생생히 기억했다.

3년에 걸친 침식 치료가 끝나고, 김서혁 밑으로 들어가 엄한 훈련을 받은 지 3개월가량 지났을 무렵이었다. 제2유적지에서 반란군의 움직임을 포착한 김서혁이, 직접 정예군을 이끌고 사해로 나갔던 전투였다. 모두가 이르다고 말렸지만, 김서혁은 유은우와 동행하겠다는 결단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김서혁은 유은우의 설계 난독증을 어떻게든 고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놓지 않았던 상태였고, 유은우는 설계 난독증이 어쩌면 평생 가져가야 할 숙명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던 때였다.

모함에서 강하하기 전, 김서혁은 낱개 포장된 비닐을 까서, 직접 유은우의 입에 보호칩을 넣어 주었다. 작고 납작하고 동그란 분홍색 칩에는 05:00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유은우는 매일 배급되는 비타민 혹은 드물게 얻어먹은 사탕을 떠올리며 덥석 물었다가, 그 역한 딸기맛에 충격을 받고 그만 칩을 뱉어 버렸다. 김서혁은 유은우를 탓하지 않았다. 대신, 이번엔 하얀 보호칩을 까서 유은우의 입에 밀어 넣고 뱉지 못하도록 크고 단단한 손으로 막았다. 알싸한 박하 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보호칩 특유의 괴상한 맛은 도무지 감내하기 힘들었다. 유은우는 헛구역질을 하고 눈물을 글썽거리면서도 한쪽 볼에 칩을 머금는 데 성공했다.

“다섯 시간 동안 널 보호해 줄 거다. 사해에 있는 동안은 절대로 뱉으면 안 돼. 삼키지도 말고, 입 안에서 깨뜨리지도 마. 깨지는 순간 녹는 시간이 갑절로 빨라져. 항상 혀로 더듬어 살피고, 다 녹아 간다 싶으면 새 걸 뜯어서 얼른 물어야 해.”

유은우는 잔뜩 긴장하여 뻣뻣한 동작으로, 전투 준비대에 마련된 알록달록한 보호칩 보관함에서 하얀 박하맛 하나를 집었다.

“그걸로 모자라. 세 개 더 집어.”

전투가 얼마나 길어지기에. 유은우는 보관함을 부스럭부스럭 뒤졌다. 박하맛으로 세 개를 더 골라서 제복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넌 아무것도 하지 마. 내 옆에 붙어서 보기만 해. 다만, 그냥 봐서는 안 돼. 전부 다 봐야 한다. 유황 냄새가 나는 건조한 대기부터 피가 튀는 방향까지 전부 다 몸으로 기억해.”

유은우는 호흡기에 신체 강화제를 끼웠다. 입에 물고 일정한 속도로 깊이 들이마셨다. 약 기운이 쌉싸름하게 목구멍을 타고 미끄러졌다. 한쪽 볼에 어색하게 붙은 보호칩에서는 여전히 역한 맛이 스며 나왔다.

김서혁이 홀스터에서 총을 뽑아 유은우를 겨누었다. 깔끔한 사격 뒤에, 총구로부터 흰 선이 뻗어 나와 유은우의 총에 한 차례 감겼다. 보통은 적에게나 거는 추적선을 매달고, 유은우는 팀원들을 따라 사출구에서 강하했다.

김서혁을 따라다니는 것은 수월했다. 그간의 긴장이 무색할 정도로. 김서혁은 제2유적지에 발을 디디고부터 한동안은, 유은우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때때로 뒤를 돌아보았으나 곧 지휘에 집중했다. 그는 유은우가 자신을 놓치기는커녕 그림자처럼 바짝 잘 따라붙으니 염려를 놓은 듯했다. 유은우 생각에도, 난다 긴다 하는 김서혁 팀에 처음으로 합류했음에도 무리 없이 대열에 잘 섞이고, 거기에 더해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까지 가진 자신이 스스로 대견했다.

다른 군인들도 유은우가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에 놀라워했다.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고난도 설계가 휘황하게 뻗어 나가고 그 위를 강력한 타격들이 팽팽하게 내달리는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도, 그 방향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자리를 비키거나 한 뼘 틈을 두고 물러서 전투에 방해가 되지 않는 유은우에게 모두가 감탄했다. 그들은 유은우가 타고난 직감이 있다고 했다. 후천적으로 습득하기 어려운, 본능 같은 것이 보인다고 했다. 천생 군인이 체질이라고. 군대에 평생 눌러앉으라는 뼈 있는 농담도 나왔다.

초짜답지 않은 기민함은 유은우 본인도 인정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으나 일종의 흐름이나 분위기의 반전이, 감각으로 자연스레 읽혔다. 그러나 군인이 체질이라는 말은 흘려듣고 싶었다. 내색하지 않았으나, 고통스러운 것은 따로 있었다.

알면서도 보류하는 것들이 있다.

도시연합군이 반란군을 죽이고 반란군이 도시연합군을 죽인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군인이란 부순 심장의 개수가 곧 실적으로 올라가는 직업임을 몰랐던 것도 아닌데, 유은우는 이 모든 것들에 새삼 적응하지 못했다.

그동안은 멋모르고 김서혁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앞만 보고 훈련해 왔으나, 그 모든 훈련이 이런 목적이라면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그 전투에서 도시연합 정예군은 단 하나의 피해도 없이 반란군 200여 명을 몰살시켰다.

모함으로 돌아오자마자 유은우는, 부산히 전투태세를 해제하는 군인들을 피해 구석에 오도카니 웅크려 앉았다. 소연주가 제복 코트를 벗고 뭉친 어깨를 풀다가, 그런 유은우를 보고 다가와 말했다.

“이건 일이야. 감정 섞지 마.”

유은우는 물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도 일인가요?”

소연주가 대답했다.

“넌 군인으로 길러지고 있어. 군인에게 그런 질문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도시연합군 중 상위 실력을 갖춰 김서혁을 중심으로 정예군 타이틀을 달고 있는, 길이 잘 든 칼처럼 냉철한 그들도 전투는 힘들어했다. 식량이 제때 보급되지 않거나, 모함의 기관이 고장 나 대기 시간이 길어지거나, 사격의 방향을 잘못 잡아 군복에 피가 튀는 것에 불평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살인을 힘겨워하는 군인은 없었다.

차갑게 견고한 풍경 한가운데서, 유은우는 자꾸만 속이 뒤집혔다. 이 불편한 기분이, 낯선 전투를 겪어서인가, 낯선 사람을 보아서인가 혼란스러웠다.

전투를 마치고 본부로 복귀했음에도, 유은우는 그 서늘한 온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낯선 감각은 매우 약하고 부드러워 충분히 눌러놓을 수 있었으나,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아 두려웠다. 적당한 군인은 되어도 노련한 군인이 되기는 그른 걸까 싶어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남들처럼 묻어가면 그만인데 그게 왜 거부감이 드는 것일까.

산란한 마음은 실수로 이어졌다.

김서혁이 참관한 훈련 중에, 유은우는 서포터가 깐 설계에서 발을 헛디뎌 엉뚱한 곳으로 사격하고 말았다. 단 한 발이었지만 동조율이 100에 달하는 타격이었다. 겹쳐져 얽혀 있던 모든 설계가 삽시간에 허물어졌다. 김서혁이 직접 수습했으나, 서포터 두 명이 다쳤다.

그날 저녁, 유은우는 박민준의 감시를 받으며 석 장의 반성문을 쓰고, 이선규의 비웃음을 듣다가 한바탕 멱살을 잡고 뒹군 다음, 소연주의 전언을 듣고 김서혁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내가 네 컨디션까지 관리해야겠나.”

김서혁은 한 손으로는 서류를 반쯤 들추고, 다른 한 손으로는 관자놀이를 꾹 누른 채 유은우를 응시했다. 다소 지친, 그러나 엄격한 시선이었다.

유은우는 침묵을 유지했다. 무슨 말을 해도 불리할 것 같았다.

“지난번 전투 다녀오고부터 줄곧 정신 빼놓고 다니는 이유가 뭐지?”

유은우가 제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자, 김서혁이 한숨을 쉬며 제 옆으로 의자를 끌어다 놓았다. 여기 와서 앉으라는 턱짓에 유은우는 쭈뼛쭈뼛 가서 앉았다. 김서혁이 서랍을 열며 말했다.

“손.”

유은우는 무릎 위로 두 손을 오목하게 모았다. 김서혁이 서랍에서 무언가를 한 주먹 움켜쥐고 유은우의 두 손 위로 쏟아 부었다. 낱개 포장된 과자며 사탕이 소복하게 쌓였다. 어쩌다 하나씩 감질나게 받아먹던 간식을 이렇게 많이 받은 것은 처음이라 유은우는 불길한 예감부터 들었다. 설마 한 달 치 먼저 당겨 주고 어디 시답잖은 부대로 재배치되는 건 아니겠지.

“내가 직접 지휘하는 전투에 널 데리고 간 건 큰 부담이었다. 귀한 경험을 했으면 발전을 해야지 왜 뒤로 물러서.”

유은우는 손 안에서 색색의 간식을 부스럭부스럭 굴리다가 고개를 들어 김서혁을 보았다.

“대장, 나 마음이 너무 힘들어.”

“존댓말.”

“힘들어요.”

“뭐가?”

“훈련하는 진짜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이래도 괜찮은 건가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돼. 뭐가 잘못된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도 잘 모르겠고. 다른 사람들은 고민조차 하지 않는데 자꾸만 곱씹는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어. 그냥 나는 군인이 안 맞는 걸까? 그렇다면 난 어디에 소속되어야 해? 전리품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싸우는 게 내키지 않는다면 나는 가치가 없는 거야?”

김서혁은 가만히 유은우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창가로 가서 블라인드를 젖혀 오후 늦은 빛이 들어오게 했다. 눈은 찌푸리고 입매는 굳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가 다시 유은우 앞에 앉더니 입을 열었다. 약해 빠졌다는 등의 꾸지람을 예상했으나 그가 던진 것은 뜻밖의 질문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지 말해 봐.”

“바꾸고 싶어.”

유은우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부족한 것 같아 덧붙였다.

“좋은 방향으로.”

김서혁이 손으로 제 이마를 문질렀다. 약간 웃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좋은 방향이란 건 뭐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이건 아닌 것 같아. 뭔가 불필요하게 희생되는 느낌이야. 예를 들어 이번 전투만 해도…….”

유은우는 김서혁의 표정을 확인했다. 그는 팔꿈치를 책상에 괴고 이마를 짚은 채 유은우를 보고 있었다. 화는 안 난 것 같았다. 오히려 집중하고 있었다.

“……제2유적지는 대장이 직접 칠 만한 장소는 아니었어. 이번에 수집한 정보 중에 알짜는 하나도 없다고 했어. 반란군이 미리 빼돌렸다고 했지만, 아니야. 애초에 없었던 거야. 그리고 그건 대장도 알고 있었지? 다 털어 오라고 지시하면서도, 전혀 기대도 안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잖아. 이번 전투는 마치 보이기 위한 것 같아. 그러니까 내 말은, 반란군의 중심부를 피해서 변두리만 치는 느낌이야.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숨만 붙여 놓고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 같아. 마치 도시연합이 반란군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물론 대장의 지휘 실력에 대해 뭐라고 하는 건 아니고……. 그냥 내 생각이야.”

말끝에 빠져나갈 구멍을 옹색하게 매달아 놓고 유은우는 잠자코 김서혁의 반응을 기다렸다.

발밑으로 노을이 붉게 깔리고 있었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로 온통 벌겋던 제2유적지처럼.

김서혁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유은우를 보고 있었다. 그의 의자 등받이에 김서혁의 이름이 새겨진 제복 코트가 걸쳐져 있었다. 반짝이는 배지들과 화려한 완장, 공훈을 기리는 갖가지 문양이 수놓아져 다채로웠다. 그 위로도 노을이 붉게 내려앉았다.

김서혁이 나직하게 말했다.

“만약에 기회가 온다면 바꿀 수 있나? 그 모든 변화를 감당할 수 있냐는 말이다. 현 시스템을 유지하는데도 희생이 필요하지만, 변화엔 더 큰 희생이 필요하지. 인류 전체에게 비난받을 수도 있고, 최악의 인물로 역사에 기록될 수도 있다. 그 변화의 결과가 예상보다 좋지 않을 수도 있어. 사상자만 내고 실패할 수도 있지. 그런데도 시도할 수 있나? 그게 아니라면 현실에 정착해야겠지. 너는 선택해야 해.”

“나는…….”

말끝이 흐려졌다. 유은우는 시선 둘 데를 찾지 못하고 애꿎은 제 손아귀를 보았다.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과자와 예쁜 사탕이 있었다. 모양은 달랐지만, 김서혁의 제복 코트에 달린 장식들처럼 반짝거렸다. 갑자기 입맛이 떨어졌다. 유은우는 두 손을 그대로 들어 올려서 김서혁의 책상에 좌르륵 쏟아 놓았다. 그렇게 환장하던 간식인데, 내려놓으니 홀가분했다.

“기회가 오면 할 거야. 왜냐하면…….”

유은우가 김서혁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두려워서 변하지 못하면 정체되기 때문이야. 누군가 해야 하니까, 어쩌다 혹은 원해서 내가 그 길에 들어선다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 내가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 모른 척하면, 분명히 나 같은 피해자가 또 생길 거야.”

김서혁은 이마를 짚고 있던 자세를 풀었다. 그는 책상 위로 손을 뻗어 보고서 하나를 끌어당겼다. 유은우의 눈앞에서 몇 장 넘기더니, 한 페이지를 펼쳐 손으로 꾹 눌렀다. 시체 사진이 여러 장이었다.

“이건 우리가 이번에 다녀온 제2유적지 현장 사진이다. 내가 죽인, 혹은 죽이라고 지시한 사람들이지.”

김서혁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 짓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 많은 사람이 너무도 쉽게 익숙해지지. 삶의 많은 문제가 그 익숙함에서 출발해. 그러니 너는 지금의 생경함을 기억해라. 어떤 체제 안에 처음 들어갔을 때 이상하게 어그러진 느낌을 받는다면, 그 감각을 놓치지 말고 유지해야 해. 아니면 너는 체제 안에 녹아서 없어지고 말아. 이 지긋지긋한 전쟁도, 그래서 계속되는 거야. 사람들이 체제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들은 죽고 뼈대만 남아 버려서.”

“그럼 세상을 바꿀 수 있어?”

김서혁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다. 다만,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야.”

삐, 삐, 삐, 삐…….

규칙적인 기계음에 맞춰, 유은우는 끝부터 깨어났다. 빨래가 햇살에 마르듯, 꿈에 젖어 흐물대던 의식이 점차 빳빳해졌다. 통증이 뒤따랐다. 찢긴 어깨. 부러진 다리. 전투 도중에 피를 울컥 토했던 것을 상기하면, 속도 엉망일 터였다. 그 외 자잘한 상처는 미처 인지하지도 못했다.

눈을 뜨고 몇 번 깜박였다. 불이 꺼진 회색 천장. 미지근한 수증기가 흩어지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침대 옆 탁자에 가습기가 보였다. 그 뒤로 스탠드가 은은하게 켜져 있었다.

그리고 유은우의 오른손 근처에, 까만 정수리가 있었다. 스탠드의 희미한 빛을 받아, 머리칼 올올이 윤기가 흘렀다.

서재희가 유은우의 침대 옆에 간이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머리를 침대에 놓고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늘 꼿꼿하던 허리가 비스듬히 굽어 있었다. 훤칠한 키와 어울리지 않게 의자가 낮아, 긴 다리는 어색하게 구긴 채였다. 창백한 뺨 위로 속눈썹 그림자가 지치도록 길게 늘어졌다. 늘 촉촉하게 매끈하던 입술이 갈라져 희었다. 숨이 느리게 색색거렸다.

“선배.”

목소리가 쉬어 나왔다. 유은우는 천천히 오른손을 뻗었다. 서재희의 까만 머리칼에 손가락 끝이 닿았다. 유은우의 조용한 손짓에, 그의 머리칼이 파도처럼 흩어졌다가 사르르 가라앉았다.

서재희가 옅게 뒤척였다. 그는 쉬 깨어나지 못했으나, 침대 위로 아무렇게나 늘어뜨려 놓았던 손을 움직였다. 유은우는 멍하니 그 손을 바라보았다. 서재희의 곧은 손가락들이 잠에 취한 채 주위를 더듬다가, 이내 유은우의 오른손을 찾아 쥐었다. 부드러웠다.

늘 건조하고 서늘하던 손이, 처음으로 따스하여 놀랐다. 유은우의 체온이 평소보다 낮거나, 아니면 서재희가 긴장을 풀고 있거나.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속까지 덥히는 온기라 그대로 잡혀 있었으면 했다.

혹시 다쳤을까?

유은우는 서재희의 손에 꼭 가둬진 자신의 오른손을 움직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척추를 관통하는 통증에도 이를 악물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아픈 왼쪽 어깨에 체중을 실은 어정쩡한 자세로 서재희의 전신을 꼼꼼히 살폈다.

멀쩡했다. 너무 불편한 자세로 잠들어 있어, 깨어나면 분명 삭신이 쑤실 것 같아 안쓰러웠으나 괜찮아 보였다. 거기다 막 새로 사서 처음으로 입은 듯한, 소매와 바짓단이 딱딱 떨어지는 반듯한 교복 차림이었다. 안색이 다소 창백한 것만 빼면 잘 다듬어져 세련된 분위기는 여전했다. 평소와 같았다.

다행이다.

유은우는 안도했다. 그제야 제 몸을 살필 여력이 생겼다.

우선 오른쪽 손목에 널찍하고 두툼한 반창고가 붙여져 있었다. 정윤환과 싸우며 얻은 상처는 아니었다. 그간 시계와 실랑이하며 혹사시킨 탓이었다.

이불을 걷어 보니 오른쪽 정강이에 치료기가 채워져 있었다. 치료기의 초록색 스크린에서 빨간 그래프가 일정한 간격으로 너울거렸다. 시험 삼아 오른 무릎을 구부렸다 펴 보았다. 아찔한 통증과 함께 그래프가 악을 쓰며 요동쳤다. 유은우는 제 비명에 서재희가 곤한 잠에서 깰까 봐,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았다. 스크린 끝까지 튀어 오르던 그래프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뻐근한 목을 돌려 왼쪽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치료기가 채워져 무거웠다. 치료기마다 차갑고 가느다란 관이 뱀처럼 뻗어 나와, 침대 왼쪽 약물 공급기에 연결되어 있었다. 공급기의 실린더 다섯 개에 각기 다른 색의 약물들이 가득 채워져 있거나, 절반쯤 비어 있거나, 혹은 아슬아슬하게 자박거렸다. 공급기 위에 유은우 이름이 붙은 차트가 올려져 있었다. 유은우는 차트를 향해 손을 뻗다가, 그 자세 그대로 전신이 얼어붙었다.

서너 걸음 간격을 두고 침대가 하나 더 있었다.

옅은 머리칼. 꼭 감긴 눈. 사지가 늘어져 있었다. 미약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이 아니었다면 시체로 착각할 만큼 숨이 가물가물했다.

정윤환.

치열하게 물고 뜯었던 싸움이 뇌리를 할퀴고 지나갔다. 유은우는 제 침대 옆 탁자를 돌아보았다. 가습기 뒤쪽의 무언가가 은색으로 반짝였다. 기계식 손목시계. 초침이 똑딱이고 있었다. 처음 찼을 때만 해도, 손목에 채우지 않으면 멈춰 있었는데.

기억은 드문드문 떠올랐다. 살아 있는 짐승처럼 거칠게 날뛰던 은색 부품. 그 위를 새까만 시계 침 세 개가 거대한 창처럼 가로질렀다.

유은우는 웬만하면 시계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김주완에게 시계 침이 두 동강 나고부터 시계는 사납다 못해 포악해졌기 때문이다. 괴물처럼 폭주하는 시계를 수족처럼 다룰 자신이 없어, 정윤환 앞에서 쓰면 도리어 약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윤환이 정말로 유은우를 패대기치고 총을 겨누었을 때는, 도리가 없었다. 그때가 최후였으니까. 유은우는 시계를 개방했고, 온디딤은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너무 잘 해내서, 시계를 다루는 유은우조차 그 힘에 압도되어 공포스러웠다. 죽음을 목전에 둔 고도의 집중력이 아니었다면, 발광하는 시계판에 하마터면 오른팔이 뜯겨 나갈 뻔했다.

정윤환의 허벅지를 찢었을 때는 거의 이겼다고 생각했다. 허벅지를 다치면 동작에 제약이 걸리니까. 그것은 유은우의 바람에 그쳤다. 그가 한쪽 다리로만 체중을 지탱할 수 있도록 따로 설계를 걸어 움직인다는 것은, 부상자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유려한 도약에서 알았다. 유은우가 다루는 온디딤을 파악하느라 간격이 늘어지긴 했으나 여전히 그의 공격은 날카로웠다. 유은우가 정윤환이 걷어찬 총을 다시 주워 홀스터에 꽂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윤환의 타격이 정교한 설계를 입고 호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직격으로 얻어맞고 다리가 부러졌다. 서재희가 오지 않았다면, 보나마나 유은우는 죽은 목숨이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정윤환을 끌어안고 같이 죽는 게 그 상황에서 최선이었다. 그나마 덜 억울할 테니까.

‘잘 가. 나의 죄.’

방아쇠에 감긴 그의 손가락이 설핏 떨리는 것을 똑똑히 봤다. 죄책감인가 후련함인가. 어느 쪽이라도 이해할 수 없었다. 잊어버린 내 죄라면 몰라도, 왜 너의 죄로 내가 죽어야 하는가.

유은우는 무의식중에 정윤환의 전신에 붙은 치료기의 개수를 세었다. 입과 코에 하나. 오른팔에 하나. 왼쪽 허벅지에 하나.

내가 이겼나. 난 치료기 두 개 달고 있으니까.

유치한 승리감이나마 만끽했다. 정윤환의 치료기와 연결된 공급기에는 무려 실린더가 여덟 개나 가동되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부글부글 끓기까지 했다.

문득, 정윤환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공급기의 약물들이 꿀렁거렸다. 치료기를 세 개나 매달고도 움직일 기운이 남아 있나 싶어, 유은우는 더욱 그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 바람에, 서재희에게 잡혀 주던 오른손이 살짝 흔들렸다.

서재희가 약하게 신음을 내어, 유은우는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서재희는 부스스한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화들짝 놀라며 유은우의 손을 놓았다. 옷매무새를 고치고 흐트러진 머리를 황급히 정돈했다. 잠에서 덜 깼는지 그답지 않게 허둥대 유은우는 웃음이 났다. 서재희가 비뚤어진 넥타이를 가볍게 고치고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리 기대 봐.”

서재희가 유은우를 부축해 등 뒤에 베개를 괴어 주었다. 덕분에 한결 편하게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

“몸은 좀 어때? 너 하루 내내 잤어. 부상은 걱정할 거 없어. 이렇게 빠른 회복은 다들 처음 본대. 아, 지금 시간이……, 새벽 2시네. 배고프지? 아니다. 의사가 바로 식사는 안 된다고 했어. 물 마실래? 물이…….”

서재희가 보온병을 열다가 뚜껑을 놓쳤다. 그는 당황하며 얼른 몸을 숙여 뚜껑을 찾아 쥐었다. 귀 뒤의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 있었다. 그가 컵을 꺼내더니 보온병을 기울였다. 옅은 색깔의 차가 졸졸 흘러나왔다. 김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뽀얗게 어지러운 물안개 너머로, 유은우는 서재희를 응시했다. 깊이.

옷차림이야 말끔했지만, 눈가가 푸석했다. 급하게 정돈한다고는 했지만, 머리끝이 뻗쳐 있었다. 컵에 차를 따르는 단순한 동작조차 광고 찍는 것처럼 세련되었으나, 오른쪽 뺨에 발갛게 눌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 사람, 나 걱정했구나. 그것도 아주 많이.

“고마워요.”

서재희가 멈칫하더니 유은우를 보았다. 유은우는 서재희의 손에서 컵을 받아 왔다. 손가락이 가볍게 스쳤다. 그저 손가락끼리 닿은 것뿐인데, 그의 손가락에 심장이 건드려진 것처럼 속이 아렸다.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야.”

서재희가 따뜻하게 말했다. 그는 이제 완전히 졸음기를 떨어내고 차분한 눈을 하고 있었다.

“마시고 푹 자. 일주일이면 퇴원할 거야. 회복 속도가 진짜 빠르대. 부러진 뼈 사이를 온이 메우고 있다는데. 살리려는 것처럼. 의사가 너무 흥분해서 내보내느라 진땀 뺐어. 간혹 온이 동조자의 자연 치유를 돕는 경우가 있긴 한데, 너처럼 확연한 건 드문 일인가 봐.”

“군에서도 그런 소리 많이 들었어요. 어디 한군데 부러져도 잘 붙는다고. 체질이 그런가 봐요.”

“체질이라.”

평소 자주 들었던 말이라 유은우는 가벼이 말했으나, 서재희는 어쩐지 마뜩찮아 보였다. 그는 습관처럼 손끝으로 유은우가 덮고 있는 이불의 주름을 차분히 폈다. 유은우는 차를 후후 불어 천천히 마셨다.

“정윤환이 너 죽이면서 자기도 같이 죽으려고 했나 봐.”

유은우는 컵을 놓쳤다. 서재희가 얼른 그것을 잡았다. 뜨거운 차가 그의 손으로 왈칵 쏟아졌다. 서재희는 순간적으로 눈을 찡그리면서도 유은우에게 차가 흐르지 않도록 그것을 전부 제 손바닥으로 받아 냈다. 유은우가 황급히 티슈를 뽑아다가 닦아 주려 했으나 서재희는 묵묵히 그것을 건네받아 제 손으로 정리했다. 손이 벌겠다.

“미, 미안해요.”

“괜찮아. 놀랄 만하지. 나도 놀랐으니까.”

왜 그렇게까지? 나야 임유현이 시켜서 죽이려고 했다지만, 본인까지 왜?

충격에 손이 떨려 침대보를 꽉 움켜쥐었다.

“온디딤에 변화가 있는 것 같던데.”

유은우는 침대 옆 탁자에서 시계를 집어 들었다. 부러져 잃은 줄 알았던 시계 침은 감쪽같이 붙어 째깍째깍 돌아가고 있었다. 차가웠다.

“한 번 부러지고 나니까 의지가 생긴 것 같아요. 다루기 까다로워졌어요.”

서재희가 손을 내밀었다. 유은우는 고리가 채워지지 않은 것을 거듭 확인하고 시계를 넘겨주었다. 서재희는 어린 짐승을 살피듯 부드러운 손길로 시계를 매만졌다.

“온디딤은 제국시대 때부터 이미 쇠락하고 있었어. 변수가 너무 많아 위험했기 때문이야. 설계처럼 불변의 공식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특히 온디딤은 감정과 의지에 많은 영향을 받아. 그리고 적지 않은 문헌에서, 온디딤을 사용하면 할수록 생명이 느껴진다고 서술해.”

서재희는 탁자에 시계를 내려놓았다. 그가 싱긋 웃었다.

“내 목마도 가끔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참 신기하지. 온디딤은 마법 같다는 표현이 참 그럴듯해. 강력하고, 위험하고,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나 많아.”

“갑자기 시계가 아주 무서운 괴물처럼 느껴졌어요. 내 마음대로 부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널 부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증명해야 할 것처럼. 까딱하다 밀리면 잡아먹힐 것 같아 너무 무서워서, 버팀목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유은우는 조심스레 서재희를 살폈다.

“……선배 생각 했어요.”

서재희가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내 생각? 내 무슨 생각?”

“마지막이 되어 버리면, 인사도 못 하고 헤어지는 거니까. 그러니까 선배가 나 살린 거예요. 내 의지가 강해서 그런 게 아니라, 선배가 날 잡아 줘서.”

서재희와 마주할 때면, 그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문득 숨을 막았다. 없는 기억 있다고 거짓말해서 페어를 받았고 덕분에 목숨을 유지했으니. 그리고 지금도, 서재희는 자신의 기억을 통해 무언가를 찾는 것에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털어놓을까.

사실 기억은 없다고. 자신도 떠올리지 못했고, 군도 찾아내지 못했다고. 그러니 당신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알면서도 내가 당신을 이용했다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처음 페어를 맺을 때만 해도 이리 죄책감에 사무칠 줄은 몰랐다. 서재희에게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신세를 지게 될 줄도 몰랐다. 그가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몰랐다. 목이 메었다. 기억이 없다고 하면 서재희는 제대로 배신감을 느끼겠지.

그리고 나를 미워할 거야.

눈가가 시큰했다. 손목이 쓰려 그런 것 같았다. 코를 조금 훌쩍였다.

“반창고 갈자.”

“……네?”

유은우는 멀거니 서재희를 보았다. 서재희는 유은우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탁자 서랍을 열었다. 야트막한 서랍은 칸막이가 두 개 있었다. 한쪽엔 유은우의 명찰과 1학년 다홍색 배지가 있었고, 다른 한쪽엔 병원 것으로 보이는 잡동사니가 있었다. 서재희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 각 맞춰 놓여 있었다. 병실에 있는 모든 세간을 서재희가 한 번씩 다 뒤집어엎어 정돈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서재희가 약과 가위와 반창고 따위를 골라잡았다.

“괜찮아요. 의료진이 해 주시겠죠.”

“오늘 아침에 간호사가 반창고 갈아 주기에 옆에서 보고 배웠어. 내가 해 주겠다고 했어.”

서재희가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유은우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선배, 잠깐만…….”

“응?”

서재희가 유은우의 손목에서 반창고를 막 뜯어내다가 멈추었다. 그가 유은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열 손가락은 유은우의 손을 깨질까 조심히 잡고 있었다. 차마 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유은우는 숨을 토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서재희가 빙그레 웃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반창고를 뜯어냈다. 드러난 상처는 생각보다 심했다. 시커멓게 굳은 피 위로 진물이 고여 있었다. 이렇게 심했나. 가슴이 덜컹했다.

서재희는 거즈에 소독약을 묻혀 유은우의 손목을 가만가만 눌렀다. 소스라칠 정도로 따가웠으나 서재희가 정성을 내리붓고 있어 미안해서라도 내색할 수 없었다. 입술을 물고 꾹 참았다. 이어 서재희는 겔 형태의 연고를 유은우의 손목에 펴 바른 뒤, 흡수되기를 기다리고 그 위에 덧바르기를 반복했다. 그는 보기 흉한 상처를 어린 식물 돌보듯 했다.

“쓰리지 않아?”

“괜찮아요. 시원해요.”

“은우 너 눈에 눈물 고였어.”

유은우는 머쓱하여 웃음이 났다.

서재희가 더없이 선한 낯으로 새 반창고를 뜯었다. 그가 몸을 기울여 왔다. 유은우는 뒤로 몸을 빼 보았으나 결국 서재희와 어깨를 맞부딪쳤다. 서재희는 반창고를 유은우의 손목에 닿지 않게 살짝 대어 크기를 가늠하더니 가위를 들었다. 가위가 반창고를 자르며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건조한 손가락. 차가운 가위 날. 턱으로 가만가만 끼치는 더운 숨. 오른쪽 어깨로 옅게 눌러 오는 그의 체중.

서재희는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까만 저녁처럼 내리깔린 속눈썹. 곧은 콧대와 살짝 벌어진 입술. 유은우는 못 본 척 눈을 감았다. 시각이 차단되니 촉감이 예민해졌다. 그가 내쉬는 숨이 결까지 느껴졌다. 유은우는 안절부절못하고 바짝 굳었다. 이젠 이상하게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삼키려다가, 꿀꺽 소리를 들킬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 여태 침은 어떻게 삼키고 살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모든 게 낯설었다.

반창고가 손목에 신중히 내려앉고 감싸졌다. 서재희가 솜털 같은 손길로 마무리하는 것이 느껴졌다.

반창고 가는 게 언제부터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아까 차를 한 잔이나 들이켰는데 그게 다 어디로 증발했는지, 자꾸만 목이 탔다.

“다 됐다.”

서재희가 떨어졌다. 그제야 숨이 트였다. 그가 웃음을 섞어 말했다.

“아, 긴장했다.”

“감사합니다.”

반사적으로 인사했다. 목부터 열이 올라와 더웠다. 서재희가 갸웃갸웃 유은우의 손목을 들여다보더니 만족스러운 얼굴로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가위와 약통을 서랍에 다시 넣는 동안, 유은우는 서재희가 붙여 준 반창고를 살살 쓸어 보았다. 벌써 다 나은 것 같았다.

서재희는 이제 반쯤 일어서 유은우의 이불을 정리하고 있었다. 반듯하게 펴서 삐죽 나와 있는 유은우의 발도 덮어 주고, 급기야 매의 눈으로 이불에 붙어 있는 먼지까지 귀신같이 잡아냈다. 유은우의 눈에는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서재희가 손을 댔다 하면 보송보송한 먼지가 잡혀 나왔다. 살짝 살피니, 그는 옅게 미소 짓고 있을 뿐 담담해 보였다. 반면에 유은우는 너무 어색해서 아무 말이나 해야 할 것 같았다.

“그, 선배는, 청소 좋아하나 봐요. 다 깔끔하게 정리하고.”

서재희가 잠깐 웃었다.

“아냐. 나 청소 별로 안 좋아해. 그냥 습관이 된 거야.”

“아아, 저는 그 습관이 잘 안 들여지더라고요.”

대화가 평범해지자 마음이 한결 놓였다. 동시에, 서재희와 이렇게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돌이켜 보면 언제나 서로 몸을 사리고 경계했었다. 그가 언제부터 마음을 열어 두었는지, 유은우 자신이 언제부터 그의 속을 기웃거렸는지 가늠이 어려웠다.

“해야 되는 일이면 하게 돼. 자꾸 의식해서 하다 보니 습관이 되었어. 남은 사람이 떠난 사람 흔적을 정리하는 건 꽤 번거롭거든. 남한테 폐 끼치기 싫어서 간편하게 살다 보니 나는 별로 짐도 없고, 그때그때 정리하는 편이야.”

서재희는 말끝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잠깐 손 좀 씻고 올게.”

그러더니 서재희는 성큼성큼 걸어 모퉁이를 돌았다. 문 열리고 닫히는 소리도 없는데 물 트는 소리가 나는 걸로 봐서, 병실 입구에 세면대가 놓여 있는 모양이었다.

왜 이렇게 더워.

유은우는 일단 서재희가 멀어지자마자 오른손으로 환자복 앞섶을 붙잡고 팔락거렸다. 그제야 열기가 좀 식었다. 심호흡도 하고, 그나마 멀쩡한 왼손으로 뺨과 목덜미를 햄스터처럼 마구마구 비볐다. 좀 정신이 드나 싶었는데 느닷없이 목구멍이 콱 틀어 막혔다.

‘남은 사람이 떠난 사람 흔적을 정리하는 건 꽤 번거롭거든.’

유은우는 목덜미를 문지르던 손을 천천히 떨어뜨렸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인데. 서재희의 뒷말이 스산하게 달라붙었다.

‘남한테 폐 끼치기 싫어서.’

유은우는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물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유은우는 통증을 참고 몸을 바깥쪽으로 힘껏 기울였다. 가까스로 모퉁이 너머 서재희가 보였다.

손 씻는다더니, 물만 세차게 틀어 놓고 그는 막상 물줄기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고, 바로 앞에 붙은 거울로도 반질반질한 까만 정수리만 비쳤다. 한쪽 손으로는 세면대를 꽉 잡고 있었다. 어찌나 힘을 주고 있는지 손등에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다른 한쪽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서서 그는 거의 미동도 않았다. 희고 단정한 셔츠 깃 위로 드러난 목덜미와 귓가, 뺨이 새빨갰다.

몇 초 후에야 그가 고개를 들었다. 역시 달아오른 뺨이, 붉은 눈가가 거울에 고스란히 비쳤다. 그가 넥타이를 당겨 느슨하게 했다. 끝까지 채워져 있던 셔츠 단추도 하나 풀었다. 그러더니 손부채질을 했다. 열기가 좀 가라앉자 그제야 손을 씻기 시작했다.

유은우는 기울였던 몸을 바로 했다. 시야에서 서재희가 사라졌다. 공급기에 부착된 스크린을 확인했다.

실내온도 21도.

그럼에도 유은우는 여전히 더웠다. 속에 난로라도 든 것 같았다. 그리고 서재희 또한 달아올라 있었다. 바깥 공기는 미지근한데 속이 이리 홧홧하다면…….

유은우는 손을 들어 명치를 꾹 눌러 짚었다.

……그건 내 문제지.

가슴이 세차게 뛰어 덜컥 겁이 났다. 아니야. 숨이 막혔다. 좋아하는 거 아니야. 좋아하는 거 아니라고.

멋대로 넘실거리는 마음은, 언젠가 군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리자마자 차갑게 가라앉았다.

‘야, 이제부터 우리도 정리 좀 하고 살자. 동료들 죽어나간 것도 좆같은데, 유품 정리까지 길어지면 컨디션 바닥 된다고. 다들 내일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방에 쓰레기 같은 거 늘어놓지 좀 말고 제때제때 치우란 말이야. 남은 사람들한테 폐 끼치는 짓이니까…….’

“어디 아파?”

유은우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서재희가 티슈로 손을 닦으면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열기가 가셔 단정한 낯에,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유은우는 필사적으로, 서재희가 자신의 옆에 붙어 있을 수 있는 공식적인 핑계를 끌어당겼다. 어차피 하나밖에 없었다.

“선배, 우리 기억 볼까요?”

불리할 때마다 없는 기억 팔아먹는 자신이 끔찍했으나 방법이 없었다. 서재희를 돌려보내야 했다. 그는 여기 있으면 안 되었다.

서재희는 ‘아,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선선히 대답했다.

“아니. 너 아프잖아. 다음에 보자.”

“그럼 선배 여기 왜 왔어요?”

서재희가 손을 딱 멈추었다. 반쯤 닦인 손끝에서 물방울이 똑 떨어졌다. 그는 잠시 그러고 있다가, 이내 손 안에서 티슈를 구기더니 휴지통으로 던져 넣었다.

“그렇지. 너 기억 볼 거 아니면 나는 여기 올 일 없는 거지. 그럼 나 거기 올라가도 돼?”

반창고 갈 때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손을 잡더니, 이젠 정중하게 묻고 있었다. 그만큼 거리가 멀어진 것에 안심했다. 유은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재희는 신발을 벗고 침대로 올라왔다. 치료기를 달고 있었기에 옆으로 누워 끌어안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재희는 유은우의 위로 올라왔다.

“무거워?”

유은우는 태연한 척 도리질을 했다. 그가 완전히 기대지 않아서 체중이 전부 실린 건 아니었다. 문제는 무겁고 가볍고를 떠나서, 다시 폭발하는 심장박동이었다.

“그럼 할게.”

서재희에게 완전히 끌어 안겼다. 이마에 그의 입술이 꼭 눌렸다. 허리 아래로 그의 손이 비집고 들어오자 둘 사이에 빈틈이 사라졌다. 통증이 뒤따랐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달 항아리를 가져왔으니…….”

서재희는 말을 마무리 짓지 않았다.

그가 가만히 몸을 움직였다. 마른 손가락이 머리칼을 훑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제 손으로 빗어 내리던 머리인데, 남이 살짝 흩뜨려 놓는 것만으로 현기증이 났다. 서재희의 손이 이어서 유은우의 얼굴에 붙었다. 엄지손가락이 눈썹을 한 번 더듬어 지나가고 감긴 눈꺼풀을 쓸어내렸다. 깨질까 소중하게.

이 사람, 날 좋아해서 어쩌려는 걸까.

가슴속 깊이 미안했다. 물러서야 했다. 그럼에도 유은우는 기억을 보자고 재촉하지 못했다. 너무 따뜻했다. 견딜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에게 정신없이 침몰하고 있었다. 다시 빠져나올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홀로 살던 견고한 성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한 번 무너지면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어떡할 건데.

서재희는 낙원의 이론을 부수겠다고 했다. 거대한 권력들이 얽힌 그 한복판에 들어갈 각오를 하고 있었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끝은 결국 죽음뿐이었다. 그래서 유품을 정리하듯 제 주변에 미련이 없었다. 오랫동안 자신의 끝을 준비하여, 청소가 습관이 되었을 것이다.

반면에 나는?

삶의 목표가 시민권을 획득하여 사람답게 사는 것이었다. 이를 악물고 살아남을 것이다. 복수는 사치였다.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과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이 만나 뭘 어떻게 하려고.

눈가가 뜨거워, 유은우는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서재희가 불어넣는 온기는 금세 남의 것이 되어 비껴갔다. 최대한 담담히 말했다.

“선배, 우리 기억 봐요.”

유은우의 뺨을 어루만지던 서재희의 손이 딱 멈췄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응. 미안해.”

미안한 건 난데. 나만 아니었으면, 서재희는 자신이 정해 놓은 길을 꿋꿋이 걸어갔겠지. 흔들리지도 않고 선택할 필요도 없이. 자칫하다간 내가 이 사람 인생을 망치고 말 거야.

“빨리 기억 보고 가요. 나 피곤해서.”

“……그래. 미안해.”

서재희가 약하게 심호흡했다.

“달 항아리를 가져왔으니 우물을 열어라. 내가 너를 길어 낼 것이다.”

놀랍게도, 그 어떤 전조도 없이 유은우는 바로 과거로 떨어졌다. 늘 따라붙던 현기증이나 구역감도 없었다. 물방울이 쏟아지고 책장이 넘어가는, 신비한 출입구도 없었다.

등에 닿은 바닥이 차가웠다. 유은우는 자신이 어딘가 딱딱하고 매끄러운 곳에 내팽개쳐져 있음을 알았다. 몸의 감각이 이상했다. 단지 추위에 얼어붙은 게 아니라, 오히려 둔감하게 느껴졌다. 오감에 전부 굳은살이 앉은 것처럼,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엄청난 추위도 정신 차리면 훨씬 또렷할 텐데 그러지 못해서 그나마 덜 고통스러운 듯했다.

누군가 근처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그림자가 유은우의 발을 덮었다가, 이어 쭉 올라와 머리로 드리웠다.

바닥이 둥둥 울렸다. 또 다른 누군가가 가까이 오고 있었다. 뺨으로 무언가 스치는 느낌이 났다. 이어 손목이 잡혔다. 맥을 잡는 듯, 손길이 제법 신중했다. 천장의 흰빛이 역광으로 드리워져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 눈에 안개가 낀 것처럼 시야가 탁했다. 주위에 두 사람이 있다는 것만 간신히 알았다.

유은우의 손목을 잡고 있던 이가 고개를 저었다. 가냘픈 목소리.

“난 은우를 갓난아이 때부터 키웠어. 내 딸이나 다름없어. 그런데 내 손으로 하라니.”

“연구관님, 이미 이야기가 다 끝난 걸로 압니다. 키우는 동안 정 들이지 않겠다고 자신한 건 연구관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유은우를 연구관님께 내어 드린 겁니다. 저희라고 마음이 안 아프겠습니까?”

“맹세했어. 딸을 지켜 주기로. 그런데 내 손으로 하라니. 도저히 못 하겠구나.”

“그럼 비키십시오. 제가 합니다.”

“잠깐, 김승훈!”

둘 사이에 잠깐 실랑이가 있었다. 그들이 몸싸움을 하느라 유은우가 놓여 있는 실험대를 밀치는 바람에 유은우는 조금 흔들렸다. 온몸이 경직되어 뻣뻣했다.

“연구관님께서 이가연과 돈독했던 거, 저도 알고 있습니다. 누가 그걸 모릅니까? 여기 모두가 다 압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잖습니까. 우린 차인호에게 유태헌만 잃은 게 아닙니다. 이가연을 비롯하여 수많은 동료가 죽거나 도시연합으로 넘어갔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건 유태헌과 이가연의 딸이 아니라, 동조율 100짜리 동조자입니다.”

“가연이가 부탁했어…….”

여자가 흐느꼈다. 유은우의 팔목으로 눈물이 점점이 떨어졌다. 그 감촉이 섬뜩했다.

“연구관님, 지금 이렇게 망설이신다면, 앞으로 이런 선택의 순간이 더욱 자주 닥칠 겁니다.”

“동조율이 100이야. 이제 여덟 살이니 총 감당할 수 있어. 쥐여 주고 본격적으로 가르치면 누구보다 뛰어날 거야.”

“여덟 살이 넘어가면 기계 삽입, 하고 싶어도 못 합니다. 예전에 아홉 살짜리에게 시도했다가 바로 사망했던 거 겪어서 아시잖습니까. 그리고 아무리 뛰어난 동조자라도 본인 의지가 있습니다. 공들여 가르쳤다가 배신이라도 하면요? 우리가 흰 칼날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이유가 뭡니까? 뛰어난 동조자가 아니라 탁월한 무기를 얻기 위함입니다.”

여자가 숨을 달싹였다. 남자가 날카롭게 말했다.

“연구관님은 유태헌과 다릅니다. 급하게 추대되어 기반이 없으며, 현재 반란군은 와해되기 직전입니다. 연구관님께서 중심을 잡아 기강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반란군 수장 간판만 달고 꼭두각시처럼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며 계속해서 원하지 않는 선택을 강요당할 겁니다.”

남자가 유은우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손에 차트를 들고 있었다. 차트 위쪽에 나란한 글자는, 처음에는 희미하여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가 유은우의 위로 몸을 굽히며 들고 있던 차트를 옆에 내려놓을 때, 그 문구가 유은우의 시야에 잠깐 가까워지며 선명해졌다.

흰 칼날 프로젝트.

남자가 유은우의 앞섶을 풀어헤쳤다. 드러난 가슴으로, 복부로 냉기가 스몄다. 유은우는 느리게 숨을 쉬었다. 코로 들어오는 공기마저 얼어붙어 새파랬다.

“이미 우리는 투표로 결정했습니다.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한때 사랑했던 강인한 두 분의 딸이 아니라, 동조율 100짜리 압도적인 자원으로 여기겠다고 합의했습니다. 차인호에게 처참히 짓밟히고 7년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쇠락할 수 없을 만큼 쇠락했습니다. 희망의 상징이 필요한 때입니다. 연구관님께서 결단을 내리지 않으시면 우리는 임유현에게까지 손을 벌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임유현이 용의 심장을 찾으면 자신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물자를 대 주겠다고 제안한 것, 수락하실 겁니까? 저는 죽어도 싫습니다.”

남자가 무언가를 가져왔다. 희끄무레한 시야로, 그의 손에 들린 희고 단단한 것만 기이하게 선명했다. 쇠 비린내가 났다.

“연구관님, 반란군을 일으키려면 강해지셔야 합니다. 지금의 작은 희생은 후에 반드시 큰 보상으로 돌아올 겁니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흰 것을 받아 들었다. 그녀가 유은우의 복부를 짚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명치와 복부와 옆구리를 몇 번 쓸어내렸다. 흰 것이 콱 메다 꽂혔다.

“아악!”

유은우는 현실로 돌아왔다. 온몸이 후들거렸다. 복부로 무언가가 관통한 끔찍한 느낌은 쉬 사라지지 않았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시원하게 비명도 더 못 지르고, 유은우는 서재희를 부서져라 껴안고 속으로 꺽꺽거렸다.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어 보고자 몸을 둥글게 말려고 했으나 무겁게 매달린 치료기 때문에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 과거야. 다 괜찮아. 지나갔어.”

서재희의 떨리는 목소리가 스몄다. 유은우는, 그의 젖은 목소리와 토닥이는 손길을 붙잡고 버텼다. 고통은 서서히 잦아들었으나, 유은우는 차마 제 복부를 더듬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대체 이게 뭐야. 군에서는 기억을 못 찾았다고 했어. 그런데 멀쩡하게 남아 있잖아.

가슴은 아직도 세차게 뛰고 있었다. 통증이 어느 정도 가시자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우리에게 남은 건 유태헌과 이가연의 딸이 아니라, 동조율 100짜리 동조자입니다.’

맙소사.

유은우는 숨을 쌕쌕거리며 눈을 굴려 옆을 보았다. 탁자에서 시계가 매끄럽게 빛을 반사했다. 유태헌.

눈을 질끈 감았다. 차단된 암흑 속에서, 전시실의 시계가 다시 폭발하며 펼쳐졌다. 마치 유은우를 알아본 것처럼. 유은우를 보호하듯이. 활짝 만개하여 견고하게 주위를 감쌌었다.

아버지 온디딤이야.

엄습하는 한기에 이가 달달 떨렸다.

그렇게 반란군과 마주하면서도 남의 얘기라 여겼다. 과거는 온통 깜깜하여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유은우는 자신이 유적지 출신이라고는, 심지어 전 반란군 수장의 딸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제1도시부터 제8도시까지 도시들의 주력 사업을 몇 번이고 살펴보고 각양각색의 직업을 뒤지며 평범한 부모를 상상하고 무난한 어린 시절을 그려 왔다니 얼마나 오만했는가. 인간은 도시 바깥에서도 살고 그들도 아이를 낳을 수 있는데.

“됐어. 기억은 이제 안 볼래. 다른 곳에서 찾을게. 너 이렇게 힘들 거면, 나도 이젠 못 하겠어. 그동안 정말 미안해.”

서재희가 꽉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유은우는 제 머리에 서재희가 뺨을 비비는 것을 느꼈다. 처음으로 목격한 과거에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유은우는 서재희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의 등을 쓸어 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다 지나갔어요. 이제 하나도 안 아파요.”

“미안해…….”

과거를 되짚을 여유도 없이 염려되는 것이 있었다. 그렇게 헤매며 엉뚱한 곳을 짚어 대던 처음과 달리, 너무나 쉽게 과거로, 그것도 서재희가 그토록 원했고 유은우는 없을 거라 믿었던 그 지점으로 정확히 진입했다.

‘온디딤은 감정과 의지에 많은 영향을 받아.’

혹시 우리 사이의 마음이 열려서, 빗장이 사라져서, 그래서 그 감정을 타고 온디딤이 제대로 발동되는 거라면.

불안에 손끝까지 식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마음이 깊어졌지? 아냐. 언제부터인지 따지는 것은 이제 무의미했다. 정말로 중요한 건, 알게 된 이상 끊어 내야 한다는 점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선배, 나 좀 쉬어도 돼요? 혼자 있고 싶어서. 그리고 나 괜찮으니까 이제 무리해서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리고 기억 보는 거 선배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참을 만해요.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고, 내가 몰랐던 사실들이니까.”

“하지만…….”

“나 진짜 괜찮아요. 그리고 선배, 나 봐요.”

서재희가 몸을 움직이더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얽혔다. 서재희는 핏기가 싹 빠져 하얗게 질려 있었다. 누가 보면 그가 고통을 겪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선배도 괜찮죠? 그동안 못 봤던 기억도 드디어 보고. 시계 주인이 누군지, 제 부모가 누군지도 알게 되었어요. 앞으로 더 깊이 볼 수 있을 거예요. 선배가 원하는 단서 찾을 수 있도록 제가 협조할게요. 다 잘 풀리고 있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그는 나를 정리할 것이다. 똑똑한 사람이니까. 옷을 다리고 방을 쓸고 물건을 버리면서, 끝을 준비해 왔으니까.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은우야.”

가슴이 덜컹했다. 냉정하게 성까지 붙여 부르던 호칭이 짧아졌다. 그가 거리를 좁힐까 두려웠다.

“선배, 저 좀 잘게요. 힘이 다 빠져서. 선배는 기숙사로 돌아갈래요? 옆에 누가 있으면 못 잘 것 같아서.”

그리 말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럼에도 서재희의 시선이 느껴졌다. 빛은 눈을 감아도 보이니까.

유은우, 정신 차려.

나는 살아남을 거야. 정부로부터 기필코 시민권을 받아 낼 거야. 사람답게 살 거야. 험난한 길이 되겠지만 나 혼자라 각오할 수 있었어. 지금 처지에서 누군가 좋아하게 되면 그건 내게도 상대에게도 짐이 될 거야. 그와 나 자신 사이에서 비등한 선택을 수없이 망설이고, 그리하여 결국엔 길을 잃을지도 몰라.

한참 만에 서재희는 몸을 일으켰다. 유은우의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않고 조심히. 신발을 신는 소리. 재킷을 챙기는 기척. 지친 듯 가느다란 한숨. 단정한 발소리가 멀어졌다. 문이 달칵 열리고, 달칵 닫혔다.

자꾸만 마음이 헐거워졌다. 유은우는 입술을 꽉 깨물고 울지 않았다.

촘촘하던 긴장이 풀어져 틈이 생기면 좋지 않았다. 그 사이로 빛과 바람이 들면 싹이 자랄 테니까. 나는 척박하여, 돌보지 못할 것이다. 그를 말라 죽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 또한.

우르르 콰광!

유은우는 창밖을 보았다.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빗방울이 얼마나 거세게 창문을 두들기는지,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았다. 그 광폭한 기세가, 방금 내리기 시작한 비는 아니었다. 선배는 우산 있을까?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난 왜 여태 비 오는 것도 몰랐을까. 그가 내 우산 같아서 그랬을까.

쾅!

다시 한번 번개가 내리쳤다. 번쩍, 하고 병실 전체에 명암이 극명해졌다. 거친 바람에 창틀이 달각달각 흔들렸다. 열린 틈으로 쉬이이 기괴한 소리가 스며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병실이 이렇게 을씨년스러운지 전혀 몰랐다. 오히려 더웠는데.

그만 생각해.

폭풍우가 몰아치는 망망대해에서 조각배로 홀로 떠돌다가, 이제야 야트막한 섬을 발견해서 잠깐 행복했을 뿐이야. 그러나 닻은 내릴 수 없어. 햇살로 따뜻한 섬은 보내 주자. 키를 잡고 방향을 돌려야 해. 그 사람 인생까지 걸고 움직이기엔 내가 너무 상황이 안 좋아.

유은우는 치료기를 단 채, 끙끙거리며 조심조심 침대에서 내려왔다. 슬리퍼도 신지 않고 맨발로 정윤환에게 다가갔다. 치료기에 연결된 긴 관들이 바닥을 쓸며 쌔액쌔액 차가운 소리를 냈다. 침대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정윤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생기라고는 없었다. 오만한 시선도 감겨 보이지 않았다. 눈 바로 밑으로는, 반투명한 치료기가 붙어 얼굴의 반이 가려져 있었다.

손을 뻗었다. 치료기의 잠금을 밀어서 열고 떼어 냈다. 매끈한 콧대와 하얗게 부풀어 터진 입술이 드러났다. 정윤환이 얼굴을 찡그렸다. 헉하고 숨을 들이켜더니 목에 핏대가 섰다. 공급기에서 삐삐삐 경고음이 났다. 유은우는 자신이 꼭 틀어쥐고 있는 치료기에서 그래프가 요동치는 것을 보았다.

그냥 이대로 죽게 놔둘까.

서재희와 봤던 과거가 떠올랐다. 유은우가 연구실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을 때, 정윤환이 와서 코드를 뽑았었다.

같은 개새끼가 될 수는 없지.

유은우는 거칠게 정윤환의 낯짝에 다시 호흡기를 붙였다. 친히 잠금까지 걸어 주었다. 공급기의 경고음이 멎었다. 펄떡대던 그래프가 안정적으로 돌아왔다. 정윤환의 널뛰던 호흡이 가라앉았다. 잔뜩 구겨졌던 얼굴이 천천히 편안해졌다.

“빨리 일어나. 우리 아직 할 얘기가 남았잖아.”

콰광!

천둥으로 귀가 먹먹했고, 섬광으로 시야가 아찔했다.

“나의 과거는 온통 캄캄해. 내 과거 어디쯤 네가 있었는지, 내가 왜 네 죄인지, 전부 들어야겠어.”

‘감정은 통제할 수 있어.’

서재희가 그리 말했다. 당시 유은우는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절실하게, 그가 옳고 내가 틀렸으면 했다.

하늘에서 땅으로 징벌처럼 내리치는 천둥번개에 시달리며, 유은우는 그날 새벽내내 끙끙 앓았다. 선잠을 자다 악몽에서 깨어나면 정윤환의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건너다보이곤 했다. 유은우는 어둠에 녹아 엷은 그를 바라보면서 그가 말한 죄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는 어떤 기준으로 죄를 정의할까. 그렇다면 나의 기준은. 내가 서재희를 좋아하는 것은 죄일까 아닐까. 들끓는 빗소리에 텅 빈 속이 부대꼈다.

다음 날 비가 그쳤다. 의료진이 들이닥쳤다. 유은우는 그들이 반강제적으로 들이미는 토분을 비몽사몽간에 끌어안고 치료기를 점검받았다. 완치 시점을 가늠할 간단한 테스트 동작 몇 가지도 했다. 간호사들은 공급기의 실린더를 딱 두 개만 가동시키고 전부 비웠다. 의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은우는 연구하고 싶을 만치 괴물 같은 회복력을 보이고 있었다. 그에겐 시시한 농담일지 몰라도, 유은우는 연구라는 단어만으로도 손끝까지 피가 식었다. 치료기와 공급기를 잇는 길고 가느다란 관들이 서로 부딪히며 쨍한 소리를 냈다.

그들은 정윤환까지 체크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상도 부상이지만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며, 상처를 따라 온이 깊이 스며 안으로 안으로 침잠하며 도통 아물지 않는다고 했다.

의료진이 나가자 이번엔 아침 식사가 들어왔다. 유은우는 식판을 꼭 쥐고 간이 안 되어 밍밍한 식사를 깔깔한 입 안으로 야무지게 밀어 넣었다. 함께 제공된 팩도 힘차게 뜯었다. 회색 에너지 덩어리가 들어 있었다. 먹고 싶지 않은 것을 넘어서서 그냥 보기에도 불쾌했다. 숨을 꾹 참고 재빨리 쭉 빨아 삼켰다.

병실 입구에 식판을 내어놓는 단순한 동작마저 쉽지 않았다. 거추장스러운 치료기를 두 개나 매달고 있는 데다가 무거운 공급기를 조심조심 밀면서 함께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양치질까지 마치자 그야말로 진이 다 빠져 버렸다. 낑낑거리면서 도로 침대로 올라가려는데 옆에 놓인 보조 의자가 눈에 걸렸다.

키에 맞지도 않는 의자에 불편하게 앉아 침대에 엎드려 잠들어 있던 서재희가 떠올랐다. 잠결에 자신의 손을 찾아 그러쥐던 그의 곧은 손가락들도.

그는 나를 정리할 테고, 나도 그를 정리해야 해.

유은우는 보조 의자를 접어서 벽에 기대 놓았다. 감정을 걷어 내자, 해야 할 일이 자명해졌다. 가습기 뒤에서 시계를 찾아서 손목에 찼다. 잘각거리며 들뜨기 시작하는 톱니바퀴들을 집중해서 도로 가라앉혔다.

모든 온디딤이 다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시계의 기본 성질은 팽창이었다. 마치 거대한 맹수를 사로잡아 작은 손목시계에 억지로 구겨 넣은 것 같았다. 조금만 방심해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폭발적으로 부풀어 올랐고, 또 맹렬한 속도로 부품끼리 뒤섞였다.

그러니 훈련의 방향은, 최대한 섬세하게 잡아야했다. 작은 크기와 느린 속도를 얼마나 정확하게 유지하느냐가 관건이었다.

똑딱이는 시계 침 세 개 중 그래도 가장 가볍게 느껴지는 하나를 골랐다. 초침이 포르르 날아오르며 반 뼘 길이로 자라났다. 유은우는 그것을 천장 높이 들어 올렸다. 공중에서 새까만 직선이 천천히 휘돌았다.

정윤환과 팽팽하게 맞붙었을 때보다 어째 조절이 더 힘들었다. 유은우는 그 이유를, 자신이 풀어졌기 때문으로 짐작했다. 침대에 편안하게 누워 시계를 다루니 절박함이 없어 온디딤이 자신을 우습게 보는지도 모른다고. 투명한 원리로 꽉 짜인 총과는 다르게, 온디딤은 야생 짐승을 길들일 때처럼 인내가 필요했다.

유은우의 의지에 따라 초침이 천천히 병실을 가로질렀다. 창가에 다다랐을 때쯤, 유은우는 그만 호흡을 놓쳤다. 초침이 희번덕거리며 뒤채었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공간을 찢고 확 뻗어 나가는 것을, 겨우 다잡아 다시 반 뼘 크기로 줄여 놓았다. 하마터면 창문이 죄 깨질 뻔했다. 창문뿐만 아니라, 창가 침대에 누워 있는 정윤환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뻔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미끄러졌다.

유은우는 초침을 도로 불러들였다. 손목 위에서 달각달각 부딪히는 톱니바퀴들 사이로 초침을 나붓이 안착시켰다. 이번엔 매끈하게 투명한 시계판을 띄워 올렸다. 천천히 크기를 줄였다가 늘렸다가 세웠다가 눕히면서, 유은우는 정윤환과의 전투를 복기했다.

정윤환의 새하얀 타격들이 어떤 설계를 입고 날아왔었는지 떠올리면 새삼 소름이 돋았다. 다시 붙는다 해도 꺾고 이길 자신은 없었다. 그러나 대등하게 버틸 수는 있어야 했다. 시계판을 손톱만큼 줄여 숨겼다가 정윤환의 타격이 날아오는 순간 폭발적으로 크기를 키워 막아 내거나. 혹은 시계 침으로 그의 설계를 찢어 놓거나. 유은우는 공중에서 팽그르르 돌아가는 시계판 위로, 묵직한 시침을 비스듬히 드리워 보았다. 최대한 찬찬히. 최대한 세밀하게.

하면 할수록 손에 익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었던 설계 공부에 비하면, 온디딤은 정성을 들인 만큼 눈에 띄는 결과로 돌아왔다. 유은우는 며칠간 잠도 줄여 가면서, 불시에 방문하는 의료진의 눈을 피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어스름한 새벽에 시계의 모든 부품들을 나란히 끄집어내어 공중에서 흩어 놓았다가, 차례차례 당겨 와 온전한 시계로 완성했을 때는 너무 기뻐서 눈물까지 나왔다. 드디어 내 한 몸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되었구나.

이제 서재희를 놔줄 수 있음에 안도했다.

유은우가 시계를 길들이는 며칠간, 서재희는 수시로 병실을 드나들었다.

유은우는 서재희가 올 때마다 고슴도치처럼 웅크렸다. 입 꼭 다물고 먼저 말을 걸지 않으려 조심했다. 서재희가 묻는 말에만 짧게 대답했으며, 그마저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기억 안 볼 거면 쓸데없이 왜 오냐는 투의 쌀쌀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유은우가 있는 힘껏 반복해서 선을 긋자, 서재희도 말수가 극히 줄어들었다. 그는 조용히 와서 조용히 기억을 보고 조용히 돌아갔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서재희는 이제 더 이상 온디딤을 사용하며 깊이 접촉할 필요가 없어졌음을 인지했다. 심지어 온디딤 사용 간격도 확연히 줄어들었는데, 일주일에서 사흘로 줄더니, 이틀로, 나중에는 하루에 두 번이나 가능해졌다. 그저 서로 손을 잡기만 하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처음에 그는 유은우의 손을 조심스레 붙들고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기도 했으나, 유은우가 빨리 끝내자고 요청한 뒤로는 그런 일도 깨끗하게 사라졌다.

서재희는 유은우의 과거 여기저기를 더듬어 내렸다. 감각이 온통 희끄무레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수집되는 소리에도 한계가 있었다. 반란군에 있었을 때 유은우는 거의 모든 면에서 둔감했던 것 같았다. 그나마 가까이서 이뤄지는 대화 정도만 드문드문 얻어 낼 수 있었다. 그 어렴풋하고 모호한 상황 속에서도, 서재희는 꿋꿋이 원하는 것을 건져 내었다. 그는 억양이나 발음, 간간이 흘려지는 신상에 주목했다.

유은우의 기억을 보고 나면, 서재희는 노트북을 꺼내 리스트에 많은 것들을 추가했다. 유은우가 흘깃 본 바로는, 뉴스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사들 옆에 빼곡한 메모들이 있었다. 어떤 것은 연도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유은우는 서재희가 이미 오랫동안 많은 것들을 모아 왔다고 느꼈다. 그렇지 않다면 단어 하나만 듣고도 저렇게 척척 끼워 맞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원하는 것은, 마지막 퍼즐 한 조각 정도라고 짐작되었다. 유은우는 자신의 기억이 서재희에게 결정적인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과거의 고통이 내리꽂히는 순간에도 이를 악물고 감내했다. 유은우가 힘들어하는 기색만 보여도, 서재희는 바로 온디딤을 거두곤 했기 때문에.

서재희는 더 과거로 진입하고 싶어 했다. 정확히는, 유은우에게 직접 기계를 삽입한 여자의 신상, 즉 현재 반란군 수장임이 유력하며 흰 칼날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던 연구관의 실명을 알아내고 싶어 했다.

더욱 깊은 과거로 들어가고 싶은 것은 유은우도 마찬가지였다. 정윤환이 말한 죄가 무엇인지 직접 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더 옛날로 가도 좋았다. 체념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갈증이 남아 있었다. 부모님이나 고향, 자신의 유년 따위에.

문제가 있었다.

연구관이 유은우의 복부에 희고 날카로운 것을 꽂아 넣는 기억은, 압도적으로 강렬한 고통이었다. 과거의 다른 구간에서 드문드문 겪는 고통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아주 깊은 구덩이와 같았다. 모든 것을 빨아들여 먹어 치우는 구덩이.

가까운 과거는 오래 머물 수 있었으나, 먼 과거로 진입하자마자 금방 그 구덩이 구간으로 휘말려 들었다. 시작은 매번 새로웠으나 끝은 언제나 같았다. 유은우는 신음을 참느라고 이를 악무는 바람에, 한번 그 구덩이에 빠졌다가 깨어나면 턱이 얼얼하여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하여 서재희의 온디딤은, 극심한 고통의 언저리만 뱅뱅 도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멀리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주 조금씩 진척이 있기는 했으나 안타까운 속도였다. 유은우가 극구 괜찮다며 더 봐도 된다고, 느리더라도 매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면 되지 않느냐고, 서재희를 안심시키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유은우가 아무리 비명을 속으로 삼켜도 전신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지는데, 예민한 서재희가 모를 리 없었다. 서재희가 괴로워하고 유은우가 강경히 밀어붙이며, 위태한 관계가 유지되었다.

매 순간 유은우는 자신을 칭찬했다. 잘하고 있어. 서재희 말이 맞아. 이것 봐. 얼마나 훌륭하게 감정을 잘 통제하는지…….

반면 서재희는 본인의 감정에 심히 충실해 보였다. 워낙 유은우가 대꾸를 하지 않아 그 또한 말수가 줄긴 했으나, 그럼에도 쓸데없는 방문은 여전했던 것이다.

그의 발소리는 티가 났다. 바닥을 질질 끄는 법 없이 뚜벅뚜벅 간결했고 그 간격이 일정했다. 교과서처럼 딱딱 떨어지는 인기척이 날 때마다, 유은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기억을 보기로 약속한 오후 2시와 4시가 아니면, 연습하던 시계를 빼서 아무 데나 던진 뒤에 황급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척을 했다. 그러면 서재희가 들어와 느린 손길로 이불을 걷어 내어 숨이 트이도록 하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하고, 구겨진 시트를 끝까지 반듯하게 펴고, 가습기의 물을 갈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시계를 주워 탁자에 올려놓고, 의자를 펴고 앉아 한참을 머무르다 가곤 했다. 불러서 깨우는 법은 없었다. 그는 항상 조심스러웠다. 깊이 잔잔했다.

한번은 그가 유은우의 식사 시간에 맞춰서 오기도 했다.

“병원밥 맛없지? 이거 먹을래? 간호사 보기 전에 얼른.”

서재희가 예쁘게 포장된 작은 상자를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았다. 내가 맨날 엎어져 자고 있으니 밥시간에 오면 얼굴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 유은우는 잔뜩 긴장하여 그만 사레가 걸리고 말았다. 숨넘어갈 듯 콜록대는 유은우를 보고, 서재희는 가지고 왔던 상자만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은우는 혼자서 밥을 꾸역꾸역 먹고 상자를 열다가, 회진을 돌던 의사에게 걸려서 맛은커녕 어떻게 생겼는지도 못 보고 그대로 뺏기고 말았다. 유은우는 그만 울 뻔했다.

애초에 받지 말걸.

그러다 문득 생각이 미쳤다. 서재희가 늘 와서 병실을 정돈하니까, 내가 미리 해 두면 좀 덜 오지 않을까?

유은우는 스스로 가습기 물을 갈고 이부자리도 반듯하게 정돈했다. 공급기를 질질 끌고 다니느라 번거로웠으나 힘들지는 않았다. 환기를 시킬 겸 창가로 갔을 때였다.

정윤환이 몸을 뒤척였다. 눈을 찡그리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호흡기에 김이 희게 서리다가 옅어졌다. 그가 천천히 눈을 뜨더니 잠시 깜박거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유은우는 쏜살같이 달려가서 정윤환의 침대로 훌쩍 뛰어올랐다. 뒤에서 공급기가 무겁게 딸려 오다가 급기야 호스가 뽑히며 바닥으로 쓰러지는 소리가 났으나 개의치 않았다. 힘이 절로 솟았다. 유은우는 정윤환 위에 올라타서 그의 멱살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환자복 실밥 뜯기는 소리가 우드득 났다. 정윤환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정신이 좀 드나 보지? 상황이 역전되니 기분이 어때?”

정윤환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유은우를 빤히 보더니, 이윽고 웃기 시작했다. 유은우는 치미는 분을 누르면서 그에게서 호흡기를 떼어 냈다. 하얗게 갈라진 입술이 드러나자 웃음소리가 한층 선명해졌다. 그가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기분? 내 기분이 어떠냐고?”

정윤환이 다시 한 차례 웃더니 이어 말했다. 목소리가 거칠게 긁혀 나왔다.

“하하. 내 기분? 씨발, 당장 안 내려가?”

“너 같으면 내려가겠냐?”

유은우는 가차 없이 정윤환의 목을 졸랐다.

“야, 이……!”

“개소리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네가 말하는 죄가 뭐야? 별 시답지도 않은 걸로 나 괴롭힌 거면 가만 안 둘 테니까, 지어내서라도 그럴듯하게 대답해야 할 거야.”

컥, 정윤환이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급격하게 그의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유은우는 깜짝 놀라 멱살을 틀어쥔 손에서 힘을 살짝 풀었다.

그때였다. 정윤환이 유은우를 밀쳤다. 아파서 드러누워 있는 주제에 이렇게까지 반격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에 유은우는 그대로 정윤환 위에 비스듬히 엎어졌다가 즉각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정윤환이 이를 악물고 침대 옆 서랍을 뒤지고 있었다. 뭘 찾는지 자명했다. 총. 머리로 피가 솟구쳤다.

“이 새끼가 진짜!”

유은우는 무릎으로 정윤환의 다리 사이를 걷어찼다. 억, 하고 정윤환이 몸을 굳혔다. 유은우는 이어서 팔꿈치로 그의 복부를 가격했다. 그동안의 모든 분을 담아 힘껏. 정윤환이 숨을 들이켜다가 툭 널브러졌다.

삐삐삐삐삐…….

정윤환과 연결된 공급기에서 요란한 경고음이 나기 시작했다.

“어?”

유은우는 멀거니 정윤환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안색이 새파랗고 호흡이 거의 없었다.

겨우 두 대 맞았다고 뻗은 거야? 두려울 정도로 강하거나, 추궁도 못 하도록 약하거나. 왜 중간이 없어. 사람 열 받게 왜 이렇게 극단적이냐고.

유은우는 불평을 쏟아 내면서 정윤환의 입에 다시 호흡기를 붙였다. 그럼에도 경고음은 멈추질 않았다. 유은우가 재빠르게 자신의 침대로 돌아와서 이불을 코끝까지 당기자마자, 병실 문이 벌컥 열리며 의료진이 들어왔다.

“어떻게 된 거야. 상태 왜 이래?”

“오전에 체크했을 때만 해도 아무 이상이…….”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상처가 다 터졌어요.”

“온 희석제 투약 중지하고 농도 4로 가지고 와!”

장장 한 시간에 걸쳐 소생술이 이어졌다. 중간에 의사가, 혹시 정윤환에게 무슨 이상한 징조가 있었냐고 유은우에게 묻기도 했다. 유은우는 눈만 이불 밖으로 내놓고, 나는 모른다 도리질만 반복했다. 정윤환의 새파란 낯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심란했다. 정윤환 저거 다시 팔팔해지면 또 나 죽이려고 달려들 텐데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캄캄하기도 했다. 또, 굳이 정윤환이 아니더라도, 임유현이 다른 방식으로 손길을 뻗쳐 올 것도 같았다. 날 가지려 하든, 죽이려 하든. 게다가 정윤환이 입 나불거리는 걸 보니, 몸이 아픈 지금 유은우가 기선을 제압하고 협박을 한다 해도, 뭐 하나 시원하게 털어놓을 것 같지도 않았다. 군에서 건너 들었던 다양한 고문들이 절로 떠올랐다.

정윤환의 호흡이 안정되자마자, 의료진들은 공급기 실린더 열 개를 약물로 꽉 채워 놓고는 지쳐 돌아갔다. 유은우는 발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지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정윤환의 서랍을 뒤졌다. 이때까지 아무 생각 없이 총을 그냥 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새벽에 자다가 봉변당하지 않으려면 진즉 빼앗아 두어야 했는데. 총을 찾아 쥐는데 작고 딱딱한 것들이 손끝에 걸렸다. 3학년 청록색 배지. 인터컴.

그때였다. 부웅, 진동이 울렸다. 유은우는 서랍 안쪽을 더듬었다. 이프가 나왔다. 배터리가 간당간당했다. 작게 떠오른 화면에 발신자가 반짝거렸다.

김서혁.

유은우는 정윤환을 바라보았다. 안색이 창백하여 꼴이 말이 아니었다. 유은우는 서랍에서 인터컴을 꺼내 귀에 꽂고, 정윤환의 손을 잡아 이프의 통화키를 눌렀다.

낮은 한숨이 먼저 흘러나왔다.

― 정윤환, 유은우 내 전리품인 거 알지. 네가 유은우에게 한 짓은 곧 내게 한 짓이다. 네가 버르장머리 없는 건 진즉 알았다만, 하극상을 범하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숨을 죽였다.

― 기물손괴죄로 징계 먹을 거다. 졸업 후에 다시 군으로 복귀할 땐 강등된 계급으로 시작할 거야. 네가 그렇게 치를 떠는 급 낮은 팀으로 배치…….

김서혁은 말을 다 맺지 않았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날카롭게 물었다.

― 누구야.

유은우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당신 전리품.”

― ……정윤환 바꿔.

“호흡기 끼고 빌빌대는데 바꿔 줄까? 숨소리라도 들을래?”

― 네가 먼저 회복했나? 둘이 비등하게 부상당했다고 보고받았는데.

“그냥 붙은 정도가 아냐. 정윤환이 나 죽이려고 했어. 대장도 구경하고 있었으니 알 거 아냐. 충격 흡수 시스템이 아예 나가 있었다고. 대장도 동의한 거야, 아니면 누군가의 단독 지시야?”

― 지금 나한테 해명을 요구하는 건가?

유은우는 숨을 가다듬었다.

“대장이 말했던 것 있지. 생경한 느낌. 군도 그렇더니 여기도 장난이 아니네. 상식 밖의 일들이 아주 밥 먹듯이 일어나서 학교 생활이 도무지 지루하지가 않아. 당신은 익숙해지지 않는 게 어렵다고 했지만, 그 말에 동의 못 해. 내 목숨이 걸려 있으니 도통 무뎌지지가 않네.”

인터컴 너머에서는 말이 없었다.

“이젠 내 말이 좀 귀에 들어오나 봐? 정윤환이 나한테 하는 거 봤지? 왜 상사의 전리품을 훼손하는 하극상을 저지르냐고? 그야 정윤환에게 상사는 대장이 아니기 때문이지. 정윤환은 임유현을 위해 움직여.”

― 소리 낮춰.

“대장도 내 출신 알고 있었지?”

이번엔 정적이 길었다.

― ……출신?

“유태헌과 이가연이 내 부모라는 거, 대장도 알고 있었지? 유은우. 내 이름. 날 군으로 데려와서 대장이 지었다며. 그거 내 본명이야. 알고 붙인 거 아냐? 설마 그냥 지었는데 알고 보니 내 본명이었다는 되도 않는 변명하는 건 아니겠지?”

― 잠깐. 유태헌? 전 반란군 수장?

김서혁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유은우는 미간을 좁히며 인터컴에 집중했다.

― 네가 다루었던 시계는 유태헌 것이 맞긴 하다. 하나 네가 유태헌의 딸이라는 건 처음 듣는 얘기인데. 출처가 어디지?

미심쩍었다. 김서혁은 확실히 당황하고 있었다. 정말 몰랐던 일이고 이름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였을까? 더 밀어붙이고 싶었으나, 서재희와 기억을 거슬러 오르다가 알게 되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어, 유은우는 듣기만 했다.

― 1009년 9월에 차인호는 사해에서 유태헌과 그의 처 이가연, 그리고 태어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딸까지 전부 살해했다. 유태헌의 딸 이름은 밝혀진 바가 없지만, 사망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야. 그리고 네 이름은, 됐다, 그 얘기는 그만둬. 온디딤을 다루던데 설계 난독증은 차도가 있나?

잠시 소강되었던 부아가 치밀었다.

“못 고쳤어.”

유은우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당신한테 그 정도야? 설계 난독증 고치면 쓸 만하고 못 고치면 그동안 들인 공이 아까운 거고? 대장이 제일 싫어. 제일 나빠. 차라리 처음부터 정윤환처럼 날 죽이려 하지 그랬어. 그냥 내버려두지 그랬어. 그러면 서로 기대 없이 편하고 좋잖아. 나도 감정 소모하고 싶지 않아. 쭉 기댔었는데. 옆에 있게 해 달라고 무릎 꿇고 빌 때는 면전에서 문을 닫더니, 뭘 또 묻는 거야. 사람 놀리는 것도 정도가 있지!”

― 유은우!

“버릴 거면 이름은 뭐 하러 지어 줬어! 그 시커먼 속에 양심 한 가닥이라도 남아 있으면 나한테 와서 직접 사과해!”

― 너…….

뚝. 거칠게 전화를 끊었다. 필사적으로 심호흡했다. 손 안에서 이프가 웅웅 다시 울렸다. 김서혁. 유은우는 이프의 배터리를 분리하고 서랍에 던져 넣었다. 온몸이 달달 떨렸다. 차게 식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 고개를 들었다.

서재희가 병실 입구에 서 있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단정했으나 눈이 붉었다. 서재희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가 유은우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팔을 뻗었다. 나 안아 주려 하는구나. 코가 시큰했다. 맘껏 기대고 싶다는 충동을 억눌렀다.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서재희의 새까만 동공이 잠깐 말개졌다. 그가 눈을 깜박거리더니 조용히 말했다.

“오늘만 보고 이제 안 볼게.”

유은우는 반사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오후 4시. 같이 기억을 보기로 약속한 시간이었다.

서재희는 유은우가 항상 접어 두는 간이 의자를 가져와 펴서 앉더니 탁자에 노트북을 열었다. 유은우는 황급히 얼굴을 문질러 울었던 흔적을 떨어내고 침대에 얌전히 걸터앉았다. 마우스를 움직이는 서재희를 가만히 훔쳐보았다. 그래도 뭐 하나라도 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대충 견적이 나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확인하면 될 것 같아. 손잡아도 돼?”

서재희가 예의 바르게 물었다. 유은우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그가 손을 뻗었다. 서늘한 손이 가볍게 유은우의 손등을 어루만졌다가 살며시 아래로 들어와 손가락 사이로 스몄다. 깍지를 끼자 손아귀가 빠듯했다.

“네 낙엽으로 길을 만들 것이다.”

이번엔 따뜻했다. 요 며칠간 언제나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에서 과거와 직면했는데, 이번엔 포근하여 유은우는 놀랐다. 둔한 감각으로도, 누군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정수리 위로 색색거리는 얕은 숨소리가 들렸다. 상대방이 뒤척일 때마다 품 안에 있는 유은우의 몸도 흔들렸다. 때때로 상대가 가볍게 허리를 잡아 고쳐 안는 느낌이 났다. 몇 분쯤 흘렀을까.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야, 야, 일어나 봐.”

다가온 사람이 유은우를 끌어안은 상대를 잡아 흔들었다. 잠에 취해 노곤한 목소리가 답했다.

“……아, 왜. 나 어제 늦게 잤어…….”

유은우는 제 귀를 의심했다. 아는 목소리였다.

“너 또 실험체 끌어안고 자냐. 그러지 말라니까.”

“그러면 난방 좀 해 주든가. 여기 너무 추워서 그러잖아.”

“핑계는. 추우면 이불을 덮어. 그거 안고 있지 말고.”

“닥쳐. 내 맘이야. 강진욱 넌 남의 연구실 들어오면서 노크도 안 하냐?”

“언제는 노크하면 열어 줬어? 비켜 봐. 그거 좀 데려가게.”

강진욱이 유은우의 팔을 잡고 당겼다. 즉각 다른 손이 날아와 탁, 하고 거칠게 뿌리쳤다.

“손대지 마. 얘 담당 나야.”

“연구관님이 데려오라시는데.”

“……연구관님이?”

“그래. 설계 난독증이라 인격만 삭제하면 오히려 프로그램 깔기가 더 쉽다며. 거기다 동조율 100. 하여간에 네놈 머리 비상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남들 다 손 뗀 쓰레기 재활용하는 역발상이 대단해. 연구관님이 네 의견 적극 수용하시겠대. 추진 불가로 무기한 중단되었던 흰 칼날 프로젝트, 이제 다시 시작할 거야. 그러니 이제 그거 네 담당도 아냐. 내 담당이지.”

“……설마 네가 갖다 줬어?”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는 게 아까워서 내가 직접 가져다 드렸다, 왜?”

유은우는 뒤로 훅 밀쳐졌다. 두 사람이 삽시간에 맞붙었다.

“그걸 왜 갖다 줘! 그걸 왜!”

“정윤환!”

“네가 뭔데 내가 버린 보고서를 남한테 가져다주고 지랄이야. 너 미쳤냐? 쥐새끼처럼 내 연구실 드나들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너 설마 나 감시했냐? 어?”

“너야말로 정신 차려! 너 대체 누구 편이야? 군에서 우리한테 넘어온 거 아니었어? 그런데 이제 와서 왜 흔들려?”

“내가 언제 흔들렸다고 그래? 박쥐처럼 왔다 갔다 이중 스파이 짓도 힘들어 죽겠는데 너까지 나한테 왜 이래?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다 완성해 놓은 보고서를 내 손으로 버렸으면 당연히 나한테도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 못 해? 대체 왜 그랬어, 왜!”

“이유? 그 이유가 뭔데. 들어나 보자.”

정윤환은 대답하지 못했다. 들뜬 숨뿐이었다.

“정윤환, 똑똑히 들어. 네 마음에 손을 얹고 양심에 물어봐. 보고서 완성시켜 놓고 왜 쓰레기통에 처박았어? 우리한테 마지막 한 수나 다름없는 걸 폐기시킨, 타당한 이유가 있기나 해? 너 다시 군으로 돌아가려고 그러지? 그 이유가 아니면 뭐야?”

“총 치워, 씨발 새끼야.”

“이번에야말로 네 대답 들어야겠어. 너 돌아갈 거야? 그럼 그렇게 말해. 내가 너 안 다치게 여기서 네 정보 다 삭제시키고 깨끗하게 군으로 돌려보내 줄게. 대신 다음에 유적지에서 만났을 때는 목숨 걸고 너랑 싸울 거야. 선택해. 도시연합군이야, 아님 우리야?”

“선택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군이든 반란군이든 저 꼭대기까지 더듬어 올라가 봐. 결국 최정점엔 딱 하나잖아. 임유현 총사령관. 너희야말로 총이며 폭약이며 도시연합에서 살살 얻어다 쓰는 주제에 정의 구현하는 척 행세하면서 네 편 내 편 가르는 게 부끄럽지도 않아?”

“임유현한테 물자 공급 못 받으면 우리 못 버텨. 임유현도 우리 덕 보고 있긴 마찬가지고. 정적이나 다름없는 김서혁한테 사해를 맡겨 놓고 혹시 용의 심장을 빼앗길까 무서워서 두 발 뻗고 잠이 오시겠어? 어차피 모두가 찾는 건 용의 심장이야. 우리가 먼저 찾아서 입 싹 닦으면 그만이라고.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지금, 특별히 우리만 욕을 먹어야 할 이유가 있나?”

“임유현이 여태 반란군에 들인 돈이 얼마고, 심어 놓은 첩자가 몇 명인데 잘도 용의 심장을 내어 주겠다. 그리고 사라진 지 1000년이 지났는데 심장이 아직 보존되어 있는지 어떤지 어떻게 알아? 어차피 뛰어 봤자 벼룩이야. 다 임유현이 짜 놓은 판이라고. 반란군은, 여덟 도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도시연합의 하청 업체나 다름없어. 어딜 가나 다 똑같은데 뭘 선택하고 어디에 마음을 두라는 거야?”

정윤환의 말끝에 울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잠겨 이어졌다.

“임유현 생각하면 할수록 치가 떨려서 요샌 잠도 잘 못 자. 그래도 얘 끌어안고 자면 그나마 좀 잠들 수 있는데. 아주 다 뺏어 가라, 다 뺏어 가. 처음부터 얘 필요 없다고 나한테 준 건 너희잖아!”

“어린애처럼 굴지 마. 재능은 탁월한데 감정에 흔들려서. 이 악물고 다듬어야 할 실험체에 애착을 형성하질 않나.”

“내가 언제…….”

“내가 언제? 정윤환 네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봐. 지금 네 태도가 정상이야? 그건 지금 기계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야. 애지중지 끌어안고 돌본다고 해서 그게 나중에 너한테 고마워할 것 같아? 정이 들어 쩔쩔매면 결국 네 손해야. 네가 지금 안팎으로 시달려서 혼란스러운 건 나도 알겠는데, 이제 정신 좀 차릴 때도 되지 않았어?”

“기계든 인간이든 상관없어. 내 거야. 분쇄기에 갈릴 뻔한 걸 내가 데려와서 살렸어. 유은우 절대 안 뺏겨.”

“구해 온 건 순전히 네 의지였지. 실험체가 너한테 살려 달라고 소리 지른 건 아니었어. 나 같으면 이런 취급당하느니 차라리 거기서 죽는 게 나았겠다. 소꿉장난은 이제 그만둬. 이제 너도 어른이 되어야지. 대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야. 그거 이리 내.”

다급한 손길이 유은우의 등과 허리로 들어왔다. 몸이 훅 들렸다. 품에 꼭 안겼다. 어렴풋이 달달한 딸기 냄새가 났다. 상대의 가슴이 쿵쿵 울리는 게 선연했다. 그는, 정윤환은 떨고 있었다.

“얘는 안 돼. 내가 다른 대안을 찾아볼게. 나 설계 잘하는 거 알잖아. 다른 애로 찾을게. 실험체 많잖아. 제발…….”

“말로 할 때 내놔. 네놈 감정 위한답시고 흰 칼날 프로젝트를 포기하라고? 네 손으로 유은우여야만 하는 보고서를 만들어 놓고 지금 와서 대안을 찾겠다? 그건 실험체야! 네 관상용 장식품이 아니라!”

“……제발 이거 하나만 부탁하자. 그게 그렇게 어려워? 어차피 너희가 필요 없다고 했잖아! 내 보고서 따위 잊어버리면 되잖아. 그거 안 봤어도 다들 적당히 잘살고 있었잖아. 왜 지금 와서 뭔가를 하려고 하는 거냐고! 너희가 언제부터 그렇게 성실했는데?”

“정윤환 네가 제일 처음 한세연 연구관님을 뵈었던 날, 네 입으로 뭐라고 했는지 잊었어?”

“……세상을 바꾸겠다고 했어. 지금은 후회해. 그런 희망 품었던 거. 어차피 어디에서도 이룰 수 없으니까. 연구관님도 반란군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따위는 전부 잊어버렸을걸. 적어도 최초에 결성되었을 때는, 도시연합 대신 심장을 찾으러 다니는 하수인 노릇을 하려던 건 아니었겠지!”

“우리의 진짜 목적이 뭔지 알고 싶어?”

“강진욱, 총 내려! ……내 총 어디 갔어?”

정윤환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유은우는 정윤환에게 깊이 파묻혔다. 그의 뜨거운 목덜미에서 쿵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알고 싶어? 알려 줘? 알려 줄 수 있어. 다만 듣는 순간…….”

강진욱이 속삭였다. 총이 철컥이는 소리가 났다.

“……너는 정말로 이쪽으로 붙는 거야. 이제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스파이 짓은 막을 내리고, 진짜 비밀을 공유하는 거야. 듣고 나서 두려워 발 빼겠다면 여기서 죽어서 시체로 나가게 될 거야. 각오한다면 알려 줄게.”

시야가 한 바퀴 휘돌며 장면이 바뀌었다. 차가운 실험대. 서늘한 그림자. 지긋지긋한 구덩이 구간이었다. 복부에 희고 날카로운 것이 꽂히는 충격을 마지막으로, 유은우는 현재로 돌아왔다.

이를 악물고 몸을 웅크려 참았다. 극렬한 고통이 전신을 무자비하게 관통했다. 간신히 참아 내니, 그제야 등을 도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서재희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앞으로 쏟아진 자신을 보듬고 있었다.

“많이 아프지?”

“괜찮아요,”

유은우는 반사적으로 서재희에게서 떨어져 침대에 걸터앉았다. 서재희의 손이 유은우가 멀어진 만큼 다가와, 흐트러진 머리칼을 걷어 귀 뒤로 넘겼다. 그의 눈가가 젖어 빨갰다. 시선으로 유은우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그의 눈동자가 찬찬히 움직였다.

“나는 이제 다 알아낸 것 같아. 이제 네 기억 안 봐도 되겠다. 그동안 너무 고생했어. 힘들었을 텐데 견뎌 줘서 정말 고마워.”

서재희의 곧은 손가락들이 가만히 유은우의 뺨으로 다가왔다가 닿지는 못하고 이내 멀어졌다. 서재희는 노트북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은우는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아주 약한 힘이었지만, 서재희는 즉각 다시 자리에 앉았다. 눈이 따뜻하게 유은우를 향했다.

“우리 며칠 사이에 많은 것을 봤죠. 정윤환……. 우리 부모님……. 선배는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 어떻게 된 건지 듣고 싶어요.”

서재희가 자신의 옷깃을 꼭 붙들고 있는 유은우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아 가볍게 쓸었다.

“나는 네가 몰랐으면 해. 알게 되면…….”

서재희가 옅게 미소 지었다.

“……네가 더 힘들어질 것 같아서. 우리가 평범하게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난 네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안정된 곳에 소속되어 잘살았으면 좋겠다. 행복하게. 선택의 고통 없이.”

서재희가 유은우의 손을 놓고 일어섰다.

“김서혁이 조만간 널 부를 거야. 내가 그라도 널 놓치지 않을 테니까. 이번에 돌아가면 자리 잘 잡고 버텨. 군의 핵심 전력이 될 수 있겠지. 잘할 거야. 여태 잘해 왔으니까.”

서재희는 재킷을 챙기고 노트북을 들더니,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유은우를 보았다.

“그동안 고마웠어.”

서재희가 돌아섰다. 뚜벅뚜벅 걸어서 병실을 나가는 그를, 유은우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탁, 하고 문이 정갈히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유은우는 무의식중에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흘렸던 땀이 식어 그런지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딱딱 떨리는 이를 악물었다. 황급히 슬리퍼를 발에 꿰고 복도로 뛰어나갔다. 유은우가 아무렇게나 손을 놓아 문이 쾅 닫히는 소리에, 서재희가 돌아보았다. 병실의 어두운 노란빛이 드리워져 꿈처럼 흐린 그를 보다가, 복도의 쨍한 빛 아래서 또렷이 마주하니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그가 눈을 크게 뜨고 유은우를 응시했다. 유은우는 달려가서 불쑥 오른손을 내밀었다.

“우리 악수해요. 처음 페어 맺을 때도 악수 했잖아요. 마무리 기념으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동그래졌던 서재희의 눈이 사륵 가라앉았다. 다른 학생들에게 짓던 부드러운 낯을 그대로 재현하고는, 노트북과 재킷을 왼쪽으로 몰아들더니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이 가볍게 잡히고 조금 힘이 더해진 뒤에 깨끗하게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돌아서서 가 버렸다.

그는 나를 정리했다. 나는 그를 정리하지 못했지만.

병실로 돌아오자 유예된 감각이 밀려들었다.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 늦은 오후의 가라앉은 빛. 정윤환의 서늘한 온도. 그리고 심장이 쿵쿵 손끝까지 울리는 소리.

탁자에 머그컵이 놓여 있었다. 컵 바닥에 찻물이 옅게 남아 있었고, 한 번 더 우려먹으려 했는지 티백이 걸쳐져 있었다. 간이 의자에는 서재희의 담요가 반쯤 미끄러져 있었다. 유은우는 담요를 걷어 냈다. 온디딤에 관한 법조문이 있었다. 줄을 치고, 포스트잇을 붙이고, 모서리가 나달나달한. 의자 밑에는 서재희의 슬리퍼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제 끝이라고 해 놓고.

서재희는 늘 닦고 치워 댔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강박으로. 무언가를 마신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머그컵이나 반쯤 미끄러진 담요는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모든 일에 마침표를 찍었는데, 유은우의 주변에만 온통 쉼표를 뿌려 두었다.

침대 끝에서 서재희의 이름이 새겨진 인터컴까지 발견하자, 유은우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무거운 공급기를 끌고 나가면 놓칠 수도 있을 것 같아, 유은우는 치료기 두 개를 전부 떼어 냈다. 급한 대로 서재희의 인터컴만 챙겼다. 병실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다가 등줄기로 통증이 찌르르 내달려 잠시 멈춰 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막 로비로 나가려던 차였다.

다소 사람이 없어 그늘이 진 복도 한쪽에, 서재희가 서 있었다. 등지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유은우는 가까이 가지 못했다. 약간 숙인 뒷모습이, 아래로 드리운 그림자가 차고 쓸쓸했다. 유은우는 서재희의 인터컴을 꼭 쥔 채,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외면하고 돌아서지도 못한 채, 한참을 바보같이 그냥 서 있었다.

카트를 밀며 반대쪽을 지나던 간호사가 서재희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학생, 왜 이러고 서 있어요? 어디 아파요?”

서재희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유은우는 여전히 그의 뒤에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었으나, 그의 정면을 마주한 간호사는 놀라는 기색이었다.

“어머, 재희 학생 아니에요? 얼굴이 너무 안 좋은데. 괜찮아요?”

“아, 속이 조금…….”

“체했어요? 소화제라도 줄까요?”

“아뇨. 지금은 좀 힘든데, 괜찮아질 것 같아요. 그냥 참을게요. 제가 참는 걸 잘해서요.”

“많이 아파 보이는데…….”

“괜찮습니다. 감사해요.”

서재희가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유은우는 그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서재희는 낯이 창백해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그가 유은우를 보더니 즉각 세련된 미소를 지었다. 서재희가 뚜벅뚜벅 걸어와 유은우의 손에서 인터컴을 정중히 가져갔다.

“내가 이것저것 너무 늘어놨지? 내 자리도 아닌데. 내가 지금 약속이 있어서. 내일 올라가서 다 정리하고 치울게. 몸도 불편한데 여기까지 나오게 해서 미안해. 조심해서 올라가.”

유은우는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서재희는 다시 한번 매끄럽게 웃더니 성큼성큼 로비를 가로질렀다. 막 병원 입구를 나서려는 그를, 누군가 불러 세웠다.

“서재희!”

중년 남자였다. 정장을 차려입었으나 부스스한 머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묘한 기시감에, 유은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살폈다. 저 사람 누구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서재희가 회전문에 발을 들이다가 멈춰 섰다. 그가 낯을 굳혔다. 바로 예의 바른 미소가 덮어씌워졌다.

“백정명 의원님, 그렇지 않아도 뵈러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절 찾으셨다고요.”

백정명이 서재희의 팔을 움켜쥐고 매달리듯 고개를 숙였다. 낮은 신음에 말이 드문드문 섞여 나왔다.

“나는, 도저히……, 왜, 상태가, 왜 그렇게까지……. 게다가 다 있지도 않아. 일부가…….”

“의원님, 이리 앉으시고…….”

서재희가 백정명을 부축해 의자에 앉히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뒷말은 작아 들리지 않았다. 다만 지극히 공손한 자세로 조곤조곤 무언가 말하는 모습만 보였다. 백정명은 악마에 씌인 것처럼 텅 빈 눈을 하고 있었으나 서재희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이윽고 백정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의자 옆에 놓인 쇼핑백을 서재희에게 건넸다.

“가지고 돌아갈 수가 없어. 아내는 아직 몰라. 해독에 도움이 되는 약재인데 새벽 내내 달여서 날 주더라고. 자네가 먹든가 버리든가 알아서 해 주게.”

서재희는 백정명에게서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백정명은 몇 번이고 서재희를 돌아보며 병원을 나갔다. 서재희는 단정하게 배웅하고는 백정명이 앉았던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는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이마를 짚은 채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늘어뜨린 다른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이거 303호 학생 거죠?”

카운터에서 그 모양을 지켜보고 있던 간호사가 다가와 쇼핑백을 집어 들며 물었다. 서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가 쇼핑백을 가지고 카운터로 돌아갔다. 다른 간호사가 다가오더니 낮게 질책하는 소리를 내며 쇼핑백을 빼앗아 들었다. 그녀는 주위를 쓱 둘러보더니, 뒤쪽 쓰레기통에 쇼핑백을 넣고 보이지 않도록 꾹 눌렀다.

유은우는 속에서 뭔가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목이 멍울지듯이 꽉 메워졌다.

저도 모르게 몇 발짝 걸어갔다. 어두침침한 복도에서 밝은 로비로 들어서자 갑자기 눈이 부셨다.

“재희야!”

차예원이 입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서재희는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예원이 서재희의 한쪽 팔을 당겨 안았다.

“요새 왜 이렇게 병원에 자주 와? 이번 파견 말인데…….”

“내가 좀 피곤해서. 다음에 얘기해. 나가자. 나 지금 나가려고 했어.”

서재희가 차예원에게 잡힌 팔을 자연스럽게 비틀어 빼냈다. 차예원이 다시 그 팔을 잡아당기다가 유은우를 보았다. 그녀가 꽃이 만개하듯 활짝 웃었다.

“은우야!”

차예원이 손을 우아하게 흔들어 인사했다. 유은우는 어이가 없어 그 모양을 빤히 보기만 했다. 서재희가 흠칫하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저었다. ‘올라가.’라고 서재희가 입모양으로 말하는 것이 보였으나, 유은우는 손을 번쩍 들고 화답했다.

“안녕하세요!”

차예원의 웃음이 잠깐 그대로 굳었다가 다시 불이 켜지듯 환해졌다. 차예원이 서재희의 팔을 놓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서재희가 차분한 표정으로 뒤따라왔다.

“많이 다쳤다던데 다 나은 모양이네? 벌써 치료기도 다 떼고? 우리 팀 교체되고 나서 윤환이랑 한판 붙었다며? 걔도 널 어지간히 좋아하나 봐. 결국 져 준 걸 보면.”

“아무리 그래도 선배가 서재희 선배 좋아하는 것에 비하겠어요. 새 발의 피죠.”

유은우가 겸손하게 대꾸했다. 차예원이 예쁘게 웃으며 서재희의 팔을 잡아당겨 팔짱을 꼈다. 서재희는 그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 다만 단정한 얼굴로 유은우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서재희의 시선만이 아니라, 로비에 있는 간호사며 학생들이며 학부모며, 힐끗힐끗 보는 눈들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응. 너도 잘 아네. 내가 재희 많이 좋아해.”

“네, 전교생은 물론 지나가던 응용학교 학생들까지 서재희 선배를 많이 좋아하더라고요.”

유은우도 방긋 웃어 주었다.

“그럼 너도 재희 좋아해?”

……뭐? 유은우는 말문이 막혀 차예원을 빤히 보았다. 차예원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너도 재희 좋아해?”

“저는…….”

유은우는 저도 모르게 차예원 옆에 선 서재희를 올려다보았다. 즉각 시선이 공중에서 콱 얽혔다. 서재희가 미리 덫이라도 쳐 둔 것 같았다. 그는 유은우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숨도 쉬지 않고.

“은우야, 선배가 묻잖아.”

차예원이 낮춰 말했다. 유은우는 그제야 서재희에게서 시선을 떼고 차예원을 보았다.

“저는…….”

“그만해.”

서재희가 유은우의 말을 끊어 냈다. 그가 무감한 미소로 유은우와 차예원 사이를 가로막았다. 한 손으로는 부드럽게 유은우의 어깨를 잡고, 다른 손으로 차예원을 밀어냈다. 차예원이 날카롭게 서재희의 팔을 내쳤다.

“궁금해서 묻는 것뿐이야. 그것도 안 돼? 왜? 솔직히 재희 너도 궁금하지 않아? 왜 막아? 대답 듣는 게 두려워?”

“차예원, 그만해. 유치하게 이게 무슨 짓이야. 은우야, 올라가. 올라가서 쉬어.”

유은우는 서재희가 차예원에게 어떤 식으로 웃었는지 기억했다. 그가 왜 그랬는지는 자명했다. 서재희가 유은우보다 차예원을 더 좋아하거나, 혹은 그저 차예원이 필요해서. 전자가 아니라는 건 가슴으로 알았다. 서재희는 차예원에게 얻을 것이 있었다. 미소를 지어야 해서 지었다. 서재희가 해야만 했던 일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찾는 게 있어. 용의 심장. 심장 한가운데 칼을 박을 거야.’

깊이 품어 살피던 말을 꺼내던 그때, 서재희의 눈빛이 어땠는지 유은우는 기억했다.

명치가 꽉 막혀 왔다.

서재희가 유은우를 향해 고개를 살짝 저어 보였다.

“은우 올라가서 얼른 자.”

“나 아직 대답 못 들었어.”

차예원이 딱 잘라 말했다. 서재희의 낯에서 웃음이 완전히 가셨다.

“차예원, 그만해. 내가 너 좋아해. 그걸로 부족해? 아픈 애 그만 붙들어.”

말끝이 조용히, 그러나 사납게 갈라졌다. ‘내가 너 좋아해.’ 라고 했으나 누가 들어도 그건 반어법으로 들렸다. 서재희는 피로한, 더없이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상하게 다듬어진 차분함은 열기에 싹 증발하고 없었다.

유은우는 차예원을 보았다. 그녀는 한 마리 영양 같았다. 높이 올려 묶은 머리칼 아래 상아 같은 목에서 시작되는 우아한 선, 낭창한 목소리가 그랬다. 또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그 모든 것을 웃도는 출신이 그랬다. 앞이 훤히 밝아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차예원은 서재희의 약혼녀였고, 서재희를 좋아했다.

유은우는 지금이야말로, 삶의 궤도에서 이탈한 서재희를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보낼 기회라고 생각했다.

“저 서재희 선배랑 페어 해제한 거 아시죠?”

유은우가 또박또박 말했다.

“저 서재희 선배 안 좋아해요. 좋아했던 적도 없고, 좋아하게 될 리도 없어요. 저 혼자만으로도 정말 빠듯해서. 여유가 없어서요. 이제 이런 무례한 질문은 그만 받았으면 해요.”

차예원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을 응시하며 유은우가 다부지게 말을 맺었다.

“저랑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서요.”

그날 유은우는 저녁을 굶었다. 정확히 말하면, 간호사가 식사를 가지고 오긴 했는데 이불 속에 처박혀서 엉엉 통곡하느라 손도 대지 못했다. 한참을 울고 나자 힘이 다 빠져서 더 이상 눈물도 안 나왔다. 유은우는 데친 시금치처럼 침대에 늘어졌다. 오른쪽을 바라보고 누우면 서재희가 생각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왼쪽으로 누워 있었다. 자연히 옆 침대의 정윤환이 건너다보였다. 공급기의 약물 실린더는 이제 열 개 중 네 개만 가동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안색이 창백했다. 유은우는 베개를 끌어안고 코를 훌쩍이면서 과거의 파편을 곱씹었다.

‘분쇄기에 갈릴 뻔한 걸 내가 데려와서 살렸어.’

누가 날 그런 식으로 죽이려고 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서럽고 답답한 나머지 다시 눈물이 터져 나왔다. 마른 줄 알았던 눈물샘이 그새 찬 모양이었다. 그리 재차 울고 나자 두통이 오면서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 유은우는 정윤환을 안 보려고 낑낑대며 오른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러고 보니 또 서재희가 두고 간 컵이며 슬리퍼가 보였다.

‘난 네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안정된 곳에 소속되어 잘살았으면 좋겠다. 행복하게. 선택의 고통 없이.’

유은우는 이번엔 천장을 똑바로 보고 누웠다. 이불을 끌어당겨 젖은 얼굴을 힘차게 닦아 내고 나니 눈앞이 반짝거렸다. 오른손에 찬 시계에서 작은 태엽과 나사가 삐져나와 민들레 홀씨처럼 날고 있었다. 너무 예뻐서 또 눈물이 났다.

그리 울다 지쳐 잠들었을 때, 유은우는 꿈을 꾸었다.

끝도 없이 붉은 바다. 마찬가지로 한없이 연장된 흰 하늘. 세계가 깨끗한 직선으로 나뉘어 있었다.

유은우는 손을 뻗어 바람을 가늠했다. 공기의 흐름에서 실핏줄이 도드라졌다. 땅이 갈라지며 피가 왈칵왈칵 배어 나오더니, 고이고 차올라 발목까지 찰랑거렸다. 발가락 사이로 감기는 핏덩이가 뜨끈뜨끈했다.

꿈이구나.

늘 비슷하게 끔찍한 악몽. 유은우는 발을 한번 굴러 보았다. 피가 철썩 튀면서, 무릎을 덮은 하얀 원피스 끝자락이 붉게 젖었다.

꿈이라면 그 용도 있겠지.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새빨간 수평선 저만치, 무언가가 섬처럼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찰박찰박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녹색 연잎 위에 작고 까만 용이 나붓이 실려 있었다. 용은 몸을 둥글게 말고 있어, 마치 초록 쟁반에 담긴 못생긴 초코케이크 같았다.

유은우는 쪼그려 앉았다. 궁둥이가 피바다에 자박하게 잠겼으나 개의치 않았다. 찬찬히 살폈다. 용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파 보였다. 가르랑가르랑 힘겨운 숨소리를 따라, 야위어 뼈마디가 드러난 등줄기가 힘없이 오르락내리락했다. 텅 빈 눈구멍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나와 피바다로 스며들고 있었다. 가만가만 인사했다.

“안녕.”

유은우는 손을 뻗어 용의 날개를 어루만졌다. 어찌나 메말랐는지, 낡은 종이처럼 버석거렸다.

“어쩌다 이렇게 망가졌니?”

유은우는 용의 머리 양쪽에 솟은 두 개의 뿔을 만져 보았다. 딱딱하고 차가웠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유은우는 자신이 놓아주었던 어린 용을 생각했다. 서툴렀지만 얼마나 생동감에 넘쳤는지, 촘촘히 덮인 비늘이 얼마나 반짝였는지 기억했다. 그에 반해 지금 이 용은 어떤가. 차라리 목숨을 끊어 주고 싶을 만큼 앙상하여 안타까웠다. 유은우는 조용히 물었다.

“왜 자꾸 내 꿈에 나타나? 왜 죽여 달라고 애원했어? 너무 아파서? 어쩌다 이렇게 됐어? 혹시 너…….”

용의 까칠한 앞발을 어루만지는 유은우의 손등 위로, 용의 꺼질 듯한 숨이 닿았다.

“……도시를 지탱하고 있는 용의 혼이라든가 그런 거니?”

용이 느리게 자세를 고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엔 동굴 같은 구멍만 뚫려 있었지만, 유은우는 용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용이 천천히 말했다. 쇳소리가 났다.

“네 말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 나는 파편 중 하나야. 나는 도처에 쓰레기처럼 널려 있어. 진실이 그런 것처럼.”

유은우는 문득 명치에 서늘한 통증을 느꼈다. 더듬어 보았다.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힘을 주어 쑥 뽑아냈다. 희고 단단하고 날카로운, 칼의 형상을 한 기계 덩어리가 뱀처럼 줄줄이 뽑혀 나와 피 웅덩이로 첨벙첨벙 떨어졌다. 서재희와 함께 들여다본 과거가 뇌리를 스쳤다. 그 강렬한 고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반사적으로 식은땀이 솟았다.

“반란군이 내 몸에 기계를 삽입했어. 그런데 스스로는 기억이 안 나. 이상하지? 내게 일어난 일인데, 나의 과거인데, 내가 제일 모르고 있어. 너무 답답해.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아. 길도 안 보이고. 사방이 적이야. 과거를 알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내가 알았으면 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 줘.”

용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구겨진 날개를 활짝 펼치며 목을 꼿꼿이 세웠다. 그럼에도 여전히 초라해 보였다. 용이 말했다.

“가여운 것. 넌 내 그릇이야.”

우르릉, 바람이 몰아쳤다. 묵직하여 귀보다 피부로 먼저 닿았다. 유은우는 일어서서 새빨간 바다와 하얀 하늘이 맞닿은 지점을 응시했다. 거대한 기운이 빠르게 몰려오고 있었다. 발목에서 피바다가 거칠게 출렁거렸다. 용을 실은 연잎이 이리저리 나부꼈다. 연잎이 뒤집어지기 직전에, 유은우는 용을 껴안았다. 삐죽삐죽 고르지 못한 비늘에 피부가 쓸려 따가웠지만, 바람에 휩쓸려 가지 않도록 품속으로 단단히 감추었다. 용이 쏟는 피눈물로 가슴팍이 흥건해졌다. 용이 속삭였다.

“네 몸속으로 기계가 스미며 너무나 괴로웠기 때문에, 너는 절대로 스스로 과거를 떠올릴 수 없어. 기계를 제거한 지금도, 그 고통이 못처럼 네 기억을 관통하고 있으니. 넌 날 동정하지만 나 또한 널 동정해. 나는 알고 인내하지만, 너는 아는 것 없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구나.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치도록 기뻐. 나는 너무 오래 기다렸으니까. 이제 그만 끝내고 싶어.”

바람이 거세어졌다. 유은우는 몸을 낮추려다가 중심을 잃고 엎어졌다. 피바다가 출렁이며 유은우를 덮쳤다. 하늘로부터 거대한 두 손이 뻗어 내려오더니 품에서 용을 앗아 갔다. 유은우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앉아, 몰아치는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거대한 손이 용의 날개를 북 잡아 뜯는 것을 바라보았다. 뜯긴 날개 한 짝이 툭 떨어졌다. 날개는 피바다에 반쯤 잠겨 들다가 푸들푸들 떨며 그 속에서 작은 도시를 뿜어냈다. 회색 빌딩이 쭉쭉 솟아오르고 견고한 오염 철책이 뻗어 나왔다. 이어서 날개 한 짝이 마저 떨어졌다. 다리 네 짝, 뿔 두 개, 긴 꼬리, 붉은 자궁이 뚝뚝 떨어졌다. 그 사체를 둥지 삼아, 삽시간에 여덟 도시가 건설되었다. 거대한 두 손이 용의 몸통을 바스러뜨리고 발라낸 뼈들을 흩뿌렸다. 흰 뼈들이 늘어서며 도시와 도시를 잇는 철도가 되었다.

피바다가 증발하자 온통 붉은 안개로 축축했다. 유은우는 제 원피스를 당겨 보았다. 희고 깨끗했다

툭, 무언가가 발치로 뚝 떨어졌다. 작고 빨간 심장이 팔딱팔딱 뛰었다.

순간 머리 위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유은우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거대한 손 하나가 뻗어 오더니 삽시간에 유은우를 휘감아 쥐었다. 투박한 손가락이 유은우의 몸을 꽉 죄었다. 또 다른 손이 용의 심장을 집어 들고 눈앞으로 다가왔다.

“삼켜.”

유은우는 눈을 꼭 감았다. 뜨뜻미지근한 심장이 입술로 밀어 붙여졌으나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꼭꼭 씹어서 삼켜.”

유은우는 꿋꿋하게 버텼다. 그러나 참았던 숨을 토하는 순간, 벌어진 입 사이로 심장이 욱여넣어졌다. 들큼한 피비린내. 생생한 박동. 강제로 턱이 맞물리면서, 입 안에 가득 찬 용의 심장이 팍 터졌다.

소스라쳐 깨어났다. 몸이 속절없이 기울었다. 쿠당탕, 유은우는 침대에서 떨어져 굴렀다. 치료기와 연결된 공급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겨우 몸을 일으키는데 손이 달달 떨렸다. 온몸이 식은땀이었다. 익사하기 직전에 건져진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별거 아니야.

유은우는 쓰러진 공급기를 도로 세우고 다시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한기가 들어 이가 딱딱 부딪혔다.

몸이 약해져서 그래. 피곤해서 자꾸 악몽을 꾸는 거야.

유은우는 잡념을 없애기 위해 집중하여 시계를 움직였다. 작은 톱니바퀴 스물일곱 개를 허공에 일렬로 세우고 나니 이젠 꿈이고 용이고 지쳐 생각도 나지 않았다. 유은우는 다소 기분이 좋아져서, 전날 저녁 식사를 거른 것을 맹렬히 후회하며 늦은 점심을 배부르게 먹었다. 깨끗이 비운 식사를 정리하는데, 봉투에 502호라고 인쇄된 게 보였다. 유은우의 병실 호수였다.

‘이거 303호 환자 거죠?’

됐어. 신경 쓰지 마.

그러나 쉽게 잊히지 않았다. 혼자서 시계를 조물딱 다루었다가, 까무룩 잠들었다가, 간호사의 당부를 듣고 저녁을 먹는 내내 끊임없이 303호로 뇌가 근질거렸다. 결국 유은우는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고 정윤환의 서랍을 열었다. 유은우가 어제 팽개쳤던 이프와 배터리 사이에 파랗게 빛나는 동그라미가 있었다. 단순한 3학년 배지가 아니라, 학생회 권한도 같이 부여되어 있을 터였다. 손을 뻗어 그것을 그러쥐었다.

유은우는 이프를 확인했다. 오후 8시.

공급기와 연결되어 거추장스러운 치료기를 떼어 냈다. 오른쪽 정강이에 재활기를 달았다. 병실을 빠져나왔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복도엔 활기가 돌았다. 의료진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왜 안 자고 돌아다니냐는 질책에 유은우는 낮잠을 많이 자서 잠이 안 오니 빨리 낫고 싶어 재활을 하고 있다고 해맑게 대답했다. 걱정하는 간호사를 뒤에 두고 자못 태연하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갔다.

카운터 뒤쪽 벽면에 작은 칸들이 가득했다. 칸마다 병실 호수가 적혀 있었다. 유은우는 환자복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자판기 앞을 어슬렁거리면서 칸을 여러 번 훑어보았다. 오른쪽 구석에 303호가 있었고 백일서의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그 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새것처럼 깨끗했다. 바로 옆 301호와 302호 칸도 마찬가지로 말끔했다. 자주 열고 닫는지 손 탄 흔적이 확실하며, 입구로 약 봉투가 비어져 나오기까지 한 다른 칸과는 확연히 달랐다.

말만 병실이고, 실은 다른 용도로 쓰는 것 같은데.

검은 새벽, 백일서가 실려 나가는 걸 똑똑히 보았다. 그다음 날 백일서가 입원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유은우도 백일서가 살아 있을 가능성을 아예 배제한 건 아니었다. 피를 많이 흘렸다고 해서 꼭 죽는 건 아니니까. 그러나 그때 백일서의 몸뚱이를 짐짝처럼 다루던 직원들의 태도와 그 뒤에 이어진 임원들의 대화를 떠올리면, 백일서가 살아 있을 확률은 희박했다.

유은우가 로비에 머문 잠깐 사이에 2학년 학생 둘과 4학년 학생 하나가 차례로 카운터를 찾아와 백일서의 병문안을 요청했다. 약물 과다 남용으로 침식된 동조자의 근처에 가면 위험했기에 찾아온 학생들의 용기가 가상했으나, 간호사들은 매번 단호하게 거절했다.

백일서는 죽었어. 그럼 303호는 그저 비어 있는 건가, 아니면 비공식적인…….

유은우는 303호 칸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시체 안치실인가?

“유은우.”

누군가 속삭여 부르는 소리에, 유은우는 소스라쳐 뒤로 돌았다. 그 바람에 자판기에 팔꿈치를 쾅 부딪쳤다. 악, 소리와 함께 눈물이 찔끔 났다. 유은우는 주춤 뒤로 물러서다가 상대를 확인하고 안심했다.

“도연아.”

“미안.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손도연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 와 보길 잘했다. 계속 병문안 오고 싶었는데 안 된다고 하더라고. 여기서 만날 줄이야. 너 괜찮아? 너 정윤환 이겼다며? 진짜야?”

유은우는 헛웃음을 지었다.

“비겼어.”

“와.”

손도연이 짧게 감탄했다. 그러더니 힐끔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소 무던한 손도연이라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 낯설었다. 이어 손도연이 이프를 켜더니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유은우는 그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손도연이 심각한 표정으로 소곤거렸다.

“너 이거 봤어?”

손도연이 이프에서 화면 하나를 띄워 유은우에게 내밀었다. 신문 기사였다.

사해에서 ‘용’ 출현

* * *

용 연구소는 지난 17일 제5도시와 제7유적지 사이 오염 철책 21구역에 용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탐색 중 용 연구소 직원의 드론 촬영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크기는 1미터 20센티미터로 용 연구소의 성체 목표인 1미터를 훨씬 웃돌아 세간에 충격을 주고 있다. 용 연구소 관계자는 ‘사해에 용이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연구소에서 밀반출된 용이 부화하여 사해로 탈출해 그곳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이므로 모든 것이 연구소의 불찰이며 반드시 포획하여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밑거름이 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유은우는 기사에 딸린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새까만 비늘이 촘촘히 덮여 윤이 반질반질한 전신. 가느스름하게 찢어져 새빨간 눈. 날카로운 발톱. 분명 본 적이 있는, 그러나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네 배 가까이 커진 용이, 이따금 날개를 펄럭대면서 사해에 널브러져 있는 덤프트럭 밑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고 있었다.

“…….”

유은우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손도연을 보았다. 손도연이 속삭였다.

“이거 네 용 아니야?”

유은우는 말문이 막혀 다시 화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손도연이 재차 속삭였다.

“은우 네 용이 말이야…….”

“잠깐. 이게 진짜 내 용인지 확실한 건 아니잖아.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내 용이라고도 할 수 없지. 뭘 해 준 것도 없는데. 그냥 단순히 닮았을 수도 있고…….”

“아냐. 확실해. 왼쪽 뒷다리 첫 번째 발톱이 조금 휜 거랑 주둥이 끝에 비늘 세 개가 거꾸로 나 있는 것까지 완전 판박이야.”

유은우는 뜨악해져서 눈을 깜박였다.

“언제 그렇게 자세히 봤어?”

“네 용이 난리 쳐서 내 용 스트레스로 다 죽게 생겼을 때 하루 종일 가서 지켜봤지.”

“눈썰미가 대단하네.”

“태평하긴. 네 용 때문에 내 용 먹이 붙임 실패할 뻔한 거 생각하면 아직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남들 거저먹는 수업 나만 F 받아 봐. 예상 점수 계산해서 아슬아슬하게 괜찮길래 모의 전투 신청도 안 했는데. 아무튼.”

손도연이 이프를 눌렀다. 손도연이 링크해 둔 또 다른 창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내가 계속 검색해 봤거든? 용 연구소에서 포획을 계속 실패하고 있…….”

“실패?”

유은우는 뒷목을 꾹꾹 누르던 손을 멈췄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이렇게 작은 걸 왜 못 잡아? 기사가 잘못된 거 아냐?”

“기사가 아니야. 오히려 기사엔 별 정보가 없고. 처음에 용 발견되었다고 언론에 발표되자마자, 환경 보호 단체에서 바로 추적 드론 띄웠어. 도시연합 허가도 안 받고 불법으로. 일단 보호 단체 쪽에서는 드론을 띄운 이유가, 연구소에서 용을 포획할 때 비인간적인 방식을 쓰는지 감시한다는 명목인데, 뭐 뻔하지. 환경 보호 단체랑 용 연구소랑 사이 안 좋잖아. 아무튼, 인터넷 검색해서 들어가면 실시간으로 동영상 볼 수 있어. 도시연합에서 동영상 계속 막으려고 하는데, 정규망 안 쓰고 유적지 불법망 끌어다 쓰면 그깟 동영상 유포야 아무것도 아니거든. 사람들이 동영상 편집해서 글도 올리고 상황 정리도 막 하는데, 보고 있으면 좀 귀여워. 못생기긴 했는데, 뭐라고 해야 하나. 못생겨서 더 귀여워. 너도 볼래?”

손도연이 여러 화면 중 하나를 확대했다.

화질이 깨끗했다. 용의 비늘에 지저분하게 낀 하얀 모래알까지 세세하게 다 보였다. 용이 제 몸에 비해 커다란 날개를 바닥에 질질 끌면서 돌아다니다가 굴러다니는 쓰레기란 쓰레기마다 죄 앞발로 쿵쿵 때려 납작하게 만드는 것까지 보고, 유은우는 멍하니 손도연을 응시했다. 백번 양보해도 귀엽지는 않았다. 손도연은 고개를 기울여 동그란 안경 너머로 용을 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이 아주 따뜻했다. 유은우는 그런 표정을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가령 서재희가 자신을 볼 때라든가.

“너무 사랑스럽지 않아?”

유은우는 목을 가다듬었다.

“……왜 용을 못 잡고 있대?”

손도연이 눈을 번쩍거렸다.

“정말 정말 정말 빨라.”

유은우는 다시 화면을 보았다. 용은 이제 우람한 뒷발로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사해의 흰 모래와 자잘한 쓰레기가 용의 발길질에 맞춰 사정없이 튀어 올랐다. 신이 나는지 비늘로 까슬까슬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가끔 동작이 격해져 꼬리가 담벼락에 쾅쾅 닿을 때마다 벽에 우득우득 금이 갔다.

“빠르다고?”

“응.”

손도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한량처럼 건물 부수고 땅 파고 쓰레기에 코 박고 돌아다니니까 잡기 쉬워 보이는데, 막상 다가가서 잡으려고 하면 진짜 빠르게 도망쳐. 여기 동영상에 찍힌 게 있는데 화면에 제대로 안 잡힐 정도야. 연구소 포획팀에서 하늘에서 그물을 내리는 작전도 써 봤는데, 땅으로 쑥 파고들었다가 나중에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대.”

유은우는 화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여러 창 중 하나가 유독 지지직거렸다.

“이건 화질이 안 좋네.”

“아, 그거. 용이 지금 제5도시랑 제7유적지 사이를 배회하는데, 근처에 1급 보안지역이 있거든. 그쪽으로 다가가면 영상이 이렇게 찍혀.”

“1급 보안지역? 위치가 정확히 어디야? 위성 지도로 볼 수 있어?”

“나도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좌표 찍어 봤자 뭐 보이는 것도 없어. 도시연합에서 막아 놔서 그냥 가짜 평지만 나타나거든.”

“거기 대체 뭐가 있길래 막아 놨어?”

“나도 궁금해. 촬영만 안 될 뿐이지, 용이 거기도 왔다 갔다 잘 들락거리더라고. 그거 때문에 이번에 도시연합이랑 용 연구소랑 크게 부딪히기도 했어. 연구소에서는 용을 포획하는 게 더 급하니까 보안지역이라도 포획팀 진입을 허가해 달라고 하고, 도시연합에서는 절대 안 된다면서 용이 보안지역 외에 있을 때 무조건 사로잡으라고.”

“도연아, 있잖아.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도시 말이야. 여기도 용으로 건설되었잖아. 이렇게 빠른 용을, 옛날에 인간들은 어떻게 사로잡았을까?”

“글쎄…….”

유은우는 악몽을 곱씹었다. 천천히 이어 말했다.

“옛날에 용들은 뭘 먹고 살았을까? 말린 무당벌레가 자연에 흔할 리는 없잖아. 생각해 봐. 애초에 먹이 붙임이 왜 필요해? 자기가 알아서 찾아 먹는 거지. 왜 인간이 정해진 시기에 특정한 먹이로 용을 길들이냐는 말이야. 원래 야생의 용은 그렇게 안 자랐을 거 아니야.”

“먹이 붙임을 안 하면 죽어 버린다고 책에서…….”

“근데 내 용은 무당벌레 날개 쪼가리 하나 안 먹고도 멀쩡하게 살아 있잖아 .”

“어디 학교 구석구석 돌아다니다가 말린 무당벌레 부스러기 흘린 거 주워 먹었을지도 모르지.”

“설마.”

“근데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돼. 실제로 먹이 붙임 실패해서 용이 굶어 죽는 사례가 많아. 나 졸업하고 용 연구소에 취업하는 게 꿈인데, 같이 준비할래? 일주일에 두 번 스터디도 하는데.”

“난 지금 당장 알고 싶어. 어디 가면 알 수 있지? 용 연구소 연구원들은 알지 않을까? 거기 견학도 받나?”

“그냥 예약하고 가면 돼. 두 시간 정도 가이드가 안내해 줘. 되게 재밌는데. 난 기초학교 다닐 때 몇 번 다녀왔어. 제5도시에 맛집도 엄청 많은데. 용 모양 크림 카스텔라가 유명해.”

손도연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덧붙였다.

“근데 1학년은 외출 안 되는 거 알지? 아, 맞다. 넌 임원들이랑 친하니까 같이 가 달라고 하면 되겠구나. 사진 많이 찍어 와.”

손도연이 평온하게 말했으나, 유은우는 속이 편치 않았다. 서재희와는 거리를 두고 싶었고, 정윤환은 생각도 하기 싫었으며, 차예원과는 여러 번 부딪힌 전적이 있었고, 나머지 임원은 이름조차 가물가물했다.

유은우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손도연과 꼭 붙어서 용을 구경했다. 1000년 만에 나타난 용의 성체는 생각보다 작고 사나웠으며 조금은 모자라 보였다. 신성하다기보다 짐승에 가까운 그 까맣고 튼튼한 생물을 정신없이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해가 저물어 밖이 캄캄했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손도연을 병원 입구에서 배웅하고, 유은우는 한 차례 기지개를 켜며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이 가까웠다.

그러나 여전히 보는 눈이 많아, 유은우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3층에 올라갔다. 재활기는 빼서 계단 입구에 기대어 놓았다. 부산한 다른 층에 비해 3층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조용했다. 301호. 302호. 303호.

303호 문손잡이를 잡고 살짝 돌려 보았다. 턱 걸리는 느낌이 났다. 유은우는 잠시 주위를 살피다가 정윤환의 배지를 보안장치에 가져다 댔다. 삑. 손잡이가 매끄럽게 돌아갔다. 찰칵. 빠르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조심스레 문을 닫고 사위를 살폈다.

평범한 병실이었다. 침대 두 개가 텅 비어 있는 것만 빼면, 유은우가 머무는 병실과 같았다.

그리고 피비린내가 났다. 어찌나 짙은지 손으로 공중을 저으면 묻어날 것 같았다.

어디서 쏴아 물소리가 들렸다. 왼쪽 벽에 문이 하나 있었다. 유은우의 병실로 치면 화장실이 있는 위치였으나, 그보다 훨씬 견고해 보이는 문이었다. 게다가 보안장치까지 걸려 있었다. 화장실에 웬 보안장치. 그것도 안쪽이 아닌 바깥에. 유은우는 여차하면 도망갈 기세로 몸을 바짝 긴장시킨 채 정윤환의 배지를 가져다 댔다. 삑. 보안이 해제되었다. 살며시 문을 열었다. 고개만 쑥 집어넣었다.

피 냄새가 한층 짙어졌다.

조명이 희미하여 안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넓었다. 바로 옆 301호와 302호 병실까지 한꺼번에 터서 쓰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탁 트여 있었다. 유은우는 눈을 깜박여 어둠에 시야가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희끄무레하던 사위는 곧 선명해졌다. 그럼에도, 대체 이 장소의 용도는 무엇인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우선 한쪽에 세탁기가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무려 세 대나 있었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장치들이 대여섯 개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로 또 다른 문이 하나 있었다. 아무래도 저쪽이 진짜 화장실, 혹은 샤워실 같았다.

유은우는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눈만 도륵도륵 굴리며 안을 살폈다. 그도 그럴 것이, 샤워실에 누군가 있었다. 쏴아아 물소리가 났다.

한쪽 벽면에 원목 선반이 있었다. 수없이 많은 유리병이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유리병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까지는 어슴푸레하여 보이지 않았다. 유리병마다 라벨이 붙어 있었다. 집중하면 읽어 낼 수도 있었겠지만, 시간이 없는 관계로 유은우는 굳이 읽지 않고 넘어갔다.

너무 위험해. 그냥 가자. 사람도 있고, 피비린내도 심해. 저번처럼 발작이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내가 여기 왜 왔나 갑자기 회의감이 들었다. 유은우가 천천히 물러서려 할 때였다. 선반의 많은 유리병 중 하나가 시선을 갈퀴처럼 잡아챘다. 라벨에 적힌 익숙한 이름. 희미한 빛에도 선명하게 그것만 또렷이 보였다. 마치 그가 유은우를 여기까지 불러낸 것 같았다.

백일서.

유은우는 물리려던 몸을 딱 멈추었다. 힐끗 샤워실을 보았다. 쏴아아 물소리는 여전했다.

들어가지 마. 위험해. 너 분명 후회해.

이를 악물고 한 걸음 뒤로 몸을 뺐다. 문을 조심스레 밀었다. 그러나 완전히 닫지는 못했다. 문손잡이를 꾹 쥔 손아귀에 땀이 흥건했다.

얼른 보고 나오자.

유은우는 기민하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선반으로 다가갔다. 훑어보니 전부 사람 이름이었다. 일부러 자세히 살피지 않아도, 유리병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대강 짐작이 갔다. 뒷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손을 뻗어 백일서 라벨이 붙은 유리병을 꺼냈다. 맑은 액체가 찰랑이며 내용물이 흔들렸다. 붉고 넓적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유은우는 더 이상 자세히 보지 않고 눈을 감아 버렸다.

혀.

유리병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짧은 순간, 유은우는 수많은 갈등을 했다. 선반에 다시 올려놓을 것인가, 아니면 가져가 태워 줄 것인가. 설마 백일서가 자신의 혀를 뿌리까지 빼어다가 보관해 달라고 요청하진 않았겠지. 병문안을 왔다가 그냥 돌아간 그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젯밤 서재희에게 매달리다시피 하던 백정명이 떠올랐다.

‘게다가 다 있지도 않아. 일부가…….’

뒤가 서늘했다. 다 있지 않다는 건 시체가 온전하지 않았다는 걸까.

손이 떨렸다. 쥐고 있던 유리병도 흔들렸다. 안에 들어 있던 백일서의 일부가 느리게 부유했다.

가져가서 태워 주자.

결심은 빨랐다. 자꾸만 땀으로 미끄러지는 그것을 두 손으로 꼭 감쌌다. 가져가야겠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을 때였다. 문득 스산했다.

쭉 들리던 물소리가 없었다.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서재희가 샤워 가운을 걸치고 유은우를 빤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망연한 표정이었다. 그가 유은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제 젖은 머리에 얹은 하얀 수건을 한 손으로 천천히 잡아당겼다. 수건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의 흐트러진 머리끝에서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유은우는 그만 유리병을 놓치고 말았다.

쨍강!

발치에서 유리 조각이 산산이 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려 댔다.

― 303호 환자 긴급 상황입니다!

말이 환자 긴급 상황이지, 보나마나 침입자 경고음이었다. 유은우는 이를 악물고 문 쪽을 향해 뛰었다. 문을 확 열어젖히는데 서재희가 손을 내밀어 강하게 도로 닫았다.

“지금 나가면 안 돼.”

유은우는 서재희를 올려다보았다. 피비린내로 메스꺼운 곳에서 왜 그는 샤워를 하고 있었던 걸까. 유은우를 막고 선 서재희의 단정한 손끝이 붉었다. 정확히는 손톱 밑이. 미처 씻어 내지 못한 핏기가 남아 있었다.

“은우야.”

유은우의 시선을 알아챈 서재희의 목소리가 꽉 잠겼다. 그가 한 차례 침을 삼키더니 절박한 눈으로 유은우를 보았다.

“은우야, 믿어 줘. 제발. 지금 나가면 안 돼.”

서재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유은우는 잡고 있던 문손잡이를 놓았다. 서재희가 눈을 꾹 감고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가볍게 유은우를 안아 들고 빠르게 세탁기로 가서 문을 열었다.

“조금만 참아. 알았지?”

서재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유은우를 세탁기 안으로 훌쩍 집어넣었다. 유은우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꼭 웅크려 앉았다. 머리 위로 빨랫감이 다급히 쏟아졌다. 피 냄새가 밀려왔다. 서재희 명찰이 그대로 달린 교복 셔츠가 있었다. 온통 피로 붉었다. 세탁기 안에서, 푸릇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어슴푸레 감돌았다. 몸이 덜덜 떨렸다. 유은우는 무릎을 세워 끌어안은 뒤에 고개를 폭 파묻었다. 피 묻은 서재희의 교복을 보고 싶지 않아 눈을 꼭 감았다.

삽시간에 소란해졌다. 문이 열리는 소리.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소리. 그제야 요란하던 경보음이 그쳤다.

“서재희 학생, 이게 대체…….”

“죄송합니다. 제 부주의로 깼습니다.”

서재희가 침착하게 대답했으나 상대는 날카롭게 지시했다.

“보안 점검해! 누가 출입했는지 내역 다 뽑아!”

발소리. 기계가 웅웅 돌아가는 소리. 금속이 부딪혀 달칵이는 소리. 침묵보다 견고한 소음 사이로 누군가 말했다.

“정윤환 학생으로 나옵니다.”

“코드 다시 확인해. 아파서 드러누워 있는 학생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제가 좀 빌렸습니다. 들어올 때는 제 배지로 열고 들어왔는데 일하다 보니 어디로 갔는지 안 보여서요. 가서 정윤환 배지 가지고 오니까 문이 잠겨 있어서 다시 열고 들어왔습니다. 큰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만. 아마 제 이름으로 한 번, 정윤환 이름으로 한 번, 이렇게 두 번 보안 해제 찍혀 있을 겁니다.”

“잠깐 둘러봐도 되나?”

“물론이죠.”

“자넨 여기서 뭐 하고 있었나?”

“교장 선생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것이 있어 수행했습니다.”

“일정에 없는데.”

“제 말 못 믿으시겠다면 임유현 교장 선생님께 직접 여쭤 보십시오. 그럼 전 바빠서 제 일 마무리 짓겠습니다. 천천히 살펴보고 돌아가시죠.”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서재희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동시에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흰 가루가 사르륵 옷 사이로 스며들었다. 세제 가루였다. 세탁기 뚜껑이 닫히고, 삑삑 버튼 누르는 소리가 났다. 머리 위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콸콸 쏟아졌다.

물은 점점 차올랐다. 서재희의 옷에서 핏기가 배어 나와 물에 섞이며 안개처럼 떠돌았다. 유은우는 턱 끝까지 물이 채워졌을 때 힘껏 숨을 들이마신 다음,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꾹 참았다. 물이 귀까지 차오르자 이제 바깥 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웅웅거리는 세탁기 진동 소리만 온몸을 꽉 채웠다.

더 이상은 한계다 싶을 때, 쏟아지던 물이 뚝 멈췄다. 다급히 세탁기 문이 열렸다. 강한 힘으로, 빨랫감 사이에서 쑥 들어 올려졌다.

“미안해. 괜찮아?”

유은우는 서재희의 품에 안겨 정신없이 콜록거렸다. 서재희가 커다랗고 두툼한 수건으로 유은우를 통째로 감싸 물기를 닦아 주었다.

“괜찮아. 다 갔어. 많이 춥지. 머리 말려 줄게.”

너무 추워 이가 딱딱 부딪혔다. 유은우는 서재희가 하는 대로 달랑 안겨서 탈의실로 간 뒤에, 수건에 말린 번데기처럼 그의 품에 꼭 안긴 채로 뜨거운 드라이기 바람을 맞았다. 머리칼이 뽀송뽀송해지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서재희가 유은우의 목덜미에 남은 물기를 수건 끝자락으로 조심스레 닦아 냈다. 그가 까맣고 말간 눈으로 유은우를 들여다보았다.

“여기 왜 왔어?”

“그냥요. 어쩌다 보니…….”

“은우야, 나는 네가 아무것도 모르고 떠났으면 해. 이렇게 깊숙이 파고드는 건 좋지 않아.”

서재희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에도 그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그는 유은우가 체온을 되찾도록 연신 도닥이고 있었다. 유은우는 잠깐 기침을 했다.

“저도 이런 데인지 몰랐어요. 진짜예요. 뭔가 수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유은우는 저도 모르게 핏기가 남은 서재희의 손톱 밑을 바라보았다. 서재희가 즉각 그 시선을 알아채어, 유은우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유은우는 입을 꼭 다물고 어색하게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이제 춥지 않았다. 오히려 열기로 더웠다.

“내가 무섭지는 않아? 이런 곳에 이런 모습으로 있어서…….”

서재희가 가만히 묻기에 유은우는 고개를 저었다.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조금 벗어난 것이 무색하도록, 서재희가 눈을 질끈 감더니 유은우를 바싹 끌어안았다. 전신을 감싸고 있던 도톰한 수건이 흘러내렸다. 유은우는 얇은 환자복만 하나 걸치고 있었고, 서재희는 가운 사이로 단단한 가슴팍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쿵쿵 심장이 빨리 뛰었다. 널뛰는 심장박동이, 그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뒤섞여 알 수 없었다. 물기에 젖은 그의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더운 숨도. 유은우는 이러다가 심장마비로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세탁기에 숨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숨 막혔다.

“선배, 저 이만…….”

“은우야.”

서재희가 유은우를 살짝 놓아주었다. 딱 한 뼘만. 늘 깊이 잔잔하던 그의 새카만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난 네가 무사히 군으로 돌아가 온전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진심이야. 우리 앞으로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네.”

서재희의 시선이 유은우에게 못 박혀 떨어질 줄 몰랐다. 유은우는 자신의 등과 뒤통수를 안아 든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걸 느꼈다.

“딱 그동안만 내가 너 좋아해도 돼?”

서재희의 눈가가 붉어졌다.

“많이 안 좋아할게. 조금만 좋아할게. 너한테 이것저것 바라지 않을게. 그냥 예전처럼만 대해 주면 안 돼? 나도 너한테 더 이상 가까이 가지는 않을게. 밀어내지만 마. 응?”

반쯤 열린 창문으로 밤바람이 불어 들어와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흩뜨려 놓았다. 그의 눈빛도 흔들렸다. 그리고 나도.

“선배, 나는…….”

유은우는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미안해요.”

“은우야.”

손목이 잡혔다. 깨질까 조심스럽던 손길이 이번엔 단단했다.

“우리 첫 만남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 내가 미안해. 사과할게. 너를 조금만 더 일찍 좋아했다면 어땠을까. 그때는 미처 몰라서 그랬어. 내가 정말로…….”

“저도 선배 속였어요. 그때 전 기억이 없는 줄 알았는데, 선배 보호 설계 받으려고 있는 척 거짓말했어요. 선배 이용했어요. 사과하지 말아요. 우리 관계는 딱 그만큼이에요. 저는 선배에게 기억을 보여 줬고, 선배는 절 보호해 주셨어요. 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유은우는 서재희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다리의 힘이 풀려 이를 악물고 일어서려 했다. 서재희가 팔을 강하게 붙잡아 당기는 바람에 도로 주저앉았다.

“우리가 주는 만큼 받는 그런 관계라면…….”

서재희의 목소리는 거칠었고 눈은 절박했다.

“……그럼 나 너한테 보답 받아도 돼?”

한쪽 손이 유은우의 뒤통수를 단단하게 감싸 당겼다. 다른 쪽 손에 턱이 잡혔다. 그의 차가운 엄지손가락이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서재희의 입술이 다가왔다. 아주 조금의 틈만 남겨 두고, 젖은 눈으로 그가 애원했다.

“내가 방금 너 구해 줬잖아.”

그때 정윤환은 반쯤 졸고 있었다.

사람 드나드는 법 없는 창고였다. 바람에 빛이 찰랑거려 좋았고, 조용해서 좋았다. 1학년 때 처음 발견하자마자 마음에 쏙 들었다. 고양이가 너른 곳을 두고 굳이 틈새로 몸 비집고 들어가듯, 정윤환도 멀쩡한 1인실 기숙사를 두고 수시로 그 좁은 창고를 드나들었다. 한번 가면 몇 시간이고 죽치고 앉아 있었다. 창틀에 턱을 괴고 교정을 내려다보면 시간이 물처럼 흘렀다. 어디 돌부리에 걸리는 법 없이 술술 넘어가는 그 느낌이 좋았다. 사해에서는 모든 것이 더뎠으니까.

‘이번엔 서재희와 같이 다녀와. 기상이 좋지 않아. 시야 확보하려면 최소 둘은 있어야 할 거다.’

임유현의 판단이었다. 이상 기류로 사해에 모래 폭풍이 몰아친다는 예보가 있어, 한 명은 위험하다고 했다. 고로 서재희와 함께 다녀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임유현도 달리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정윤환 아니면 서재희, 항상 둘이서 번갈아 다녀왔으니. 어떻게 눈가림해 보아도 어쨌든 차예원은 자격 미달이었다.

갑작스레 자신까지 가게 되어 불평할 법도 한데, 서재희는 평소처럼 감정을 삼키고 그리하겠다고 깔끔히 대답했다. 그런 서재희가 정윤환은 그저 불편했다. 둘은 이미 한 번 뭉쳤던 전적이 있었다. 가까워지자마자 상극도 이런 상극이 없음을 깨닫고 치를 떨며 돌아서야 했지만. 서재희는 예민하게 신중했고, 정윤환은 불같이 밀어붙이니, 하나부터 열까지 사사건건 틀어지며 종국엔 남보다 더 못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이유만으로는 같이 걸을 수 없음을, 그때 뼈아프게 알게 되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어그러졌더라면. 그랬다면 수고스럽게 시간 낭비하지도 않았을 텐데. 미약하게나마 가졌던 희망도 돌이키면 아까웠다.

정윤환은 연합대회에서 서재희를 처음 만났다.

정윤환은 당시 열여섯 살, 응용학교 2학년이었다. 제1도시 대표 팀으로 뽑혀 출전하였으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성질이 더럽기로 유명하여 당연하게도 리더로 발탁되지는 못했다.

“아악, 짜증 나. 나도 리더 하고 싶다고! 왜 나는 안 돼? 내가 설계 싹 다 깔아 주면 다들 그 위에서 딱 그대로만 뛰면 되잖아. 그 쉬운 길이 있는데 왜 나는 리더 안 시켜 줘? 왜? 왜? 왜!”

연합대회장으로 가는 길, 정윤환은 차 뒷좌석에 길게 드러누워 떼를 썼다. 그가 제 분에 못 이겨 발로 차 문을 쾅쾅 걷어차자 운전을 하고 있던 아버지가 한숨을 쉬었다.

“환아, 똑바로 앉아.”

“나도 리더 시켜 줘! 나도!”

“아무리 내 아들이라지만 넌 리더감은 아니다.”

“내가 왜?”

“동조율이나 설계, 타격 같은 것은 인간이 가진 능력의 극히 일부일 뿐이야. 도시연합의 핵심 정치인들을 살펴봐. 비동조자도 상당히 많아. 통찰력과 배려심, 희생정신, 사회 구조에 대한 탁월한 이해도.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버릴 것과 취할 것을 가늠하는 데는 그런 것들이 필요해. 넌 그게 없어. 난 널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

“싸우는 데 그딴 게 뭐가 필요해?”

땅이 꺼져라 다시 한숨을 쉬는 아버지 옆에서 어머니가 뒤를 돌아보았다. 입이 삐죽 튀어나온 정윤환을 향해 어머니가 엄하게 말했다.

“환이 너 최근 들어 점점 심해지고 있어. 상대 팀도 모자라서 본인 팀까지 싹 다 발을 묶어 놓고 죄다 죽여 버리는, 그게 사람이 할 짓이니?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 너한테 당한 애들은? 너 지금 학교에서 뭐라고 불리는지 알고는 있니?”

“어차피 진짜로 죽는 것도 아닌데, 뭐. 너무 심심하단 말이야. 손 하나 까딱하면 그만인데 다들 헉헉거리며 뛰어다니는 게 웃기잖아.”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아버지가 차를 세우며 딱딱하게 말했다.

“긴말 안 한다. 이번 대회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하나만 봐. 서재희. 너보다 세 살 어리다고 하더라. 그 애가 어떻게 싸우는지 똑똑히 봐. 진짜 리더란 그 애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정윤환은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앞좌석에 바짝 몸을 붙이며 물었다.

“어디 출신? 이름이 뭐라고?”

“제8도시. 서재희.”

정윤환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뒷좌석에 몸을 기댔다. 팽개쳐 두었던 총을 쥐고 습관적으로 서너 바퀴 빙빙 돌렸다.

“전기도 안 들어가는 시골 촌구석에서 무슨…….”

무료했다. 고만고만한 동갑내기들이 다 그렇지. 도시연합 중앙학교로 진학한다 하여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았다. 지금 옆에 있는 놈들이 그대로 올라갈 테니까. 이 지루한 학교는 하루라도 빨리 접고 수준 맞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가령 도시연합군이라든가.

얼마 전에 김서혁이 직접 집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그는 정윤환을 군으로 데려가고 싶다는 의사를 분명히, 아주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응용학교 졸업도 전에 군으로 발탁됨은 전무후무한 사례였다. 아버지는, 눈을 빛내며 당장 따라가겠다는 정윤환을 방으로 몰아 가둬 놓고, 나이도 어리고 정신은 더 어리니 좀 더 지켜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정윤환은 이번 연합대회만큼은 재미를 포기하기로 했다. 아군도 적군도 모두 죽이고 혼자 살아남는 짜릿함은 접어 두고, 적당히 팀에 맞춰 뛰어 우승하면 아버지도 입대를 허락하시리라 믿었다.

정윤환은 인터컴 하나만 달랑 들고 외따로 앉아 스크린을 응시했다. 같은 팀원은 멀찍이 모여 있었다. 모여서 회의를 해도 정윤환이 듣는 둥 마는 둥 하니 그들은 이제 부르지도 않았다. 정윤환도 미리 말해 두었다.

‘너희는 너희끼리 알아서 싸워. 나는 적당히 맞춰 줄게. 미리 전략을 가르쳐 줄 필요 없어. 너희 하는 게 뻔하지. 너무 땀 빼지는 마. 어차피 내가 있어 이길 텐데, 뭐.’

돌려 말하기 귀찮아 솔직하게 말했더니 응용6학년 리더가 멱살을 잡으려 했다. 피하면서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그 뒤엔 서로 냉랭했다.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내가 싫으면 애초에 팀에 넣지 말지 그랬어. 나 싸가지 없기로 유명한 건 너희도 귀가 있으면 들었을 것이고, 팀원이 되었다는 것은 내 성질 감수하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한 것 아닌가.

― 제8도시 대기합니다. 리더 기초6학년 서재희. 팀원 응용6학년 류나영, 응용6학년 김인제, 기초6학년 박효진. 차단벽 해제까지 10, 9, 8…….

스크린에 학생 넷이 비춰 보였다. 명찰을 쓱 훑어보았다. 서재희. 또래보다 키가 훌쩍 크고, 눈이 유난히 새까맣고, 굉장히 침착해 보이는 남학생이 스타트 신호와 함께 총을 뽑았다.

정윤환은 왼쪽 귀에 인터컴을 장착하고, 제8도시 팀 청취로 맞추었다.

― 나영 누나, 적이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되니까 최대한 뒤로 돌아서 위협하면서 몰아 줘요. 인제 형, 효진 누나랑 너무 붙었어요. 간격 둬요.

6학년 상급생들을 먼저 내보내고 서재희는 뒤에 빠져 있었다. 그가 담담히 지시하면서 연사했다. 서재희가 땅으로 뿌려 대는 새파란 패턴들이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갔다. 고급 설계는 없었다. 기초학교 1학년도 구사할 줄 아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주로 온의 흐름을 끌어 잡아 돌리는 방향 설계였다. 잘 쓰면 상대방의 타격을 그대로 받아칠 수 있으나, 잘못 겹쳐 내면 미로처럼 엉켜 폭발할 터인데, 서재희는 딱히 아래를 보지도 않고 그냥 땅으로 총을 갈겨 대고 있었다. 시선은 앞서 달려 나가는 본인의 팀원들에게 박혀 있었다.

― 효진 누나, 잘하고 있어요. 쭉 들어가요. 맞아도 되니까 머뭇대지 마요. 경직이랑 추락만 피하면 되니까. 저한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줘요.

서재희가 앞서 보낸 박효진은 선두에서 적의 공격을 그대로 두드려 맞고 있었는데, 회피 속도가 실로 암담했다. 경직 설계나 포박 설계만 겨우겨우 피하고 있었지, 살짝만 몸을 틀어 피할 수 있는 공격도 고스란히 얻어맞아 안쓰럽기까지 했다. 스스로 건 보호 설계도 진작 깨져 맨몸이라, 자살 시도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맞아도 된다니? 정윤환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가늘게 떴다. 팀원 하나만 죽어도 급격히 승세가 기우는데, 서재희는 뭘 믿고 맞아도 된다고 하는 걸까.

― 좀 더 접근.

박효진은 서재희의 황당한 지시에 별다른 항변 없이, 상대 팀을 향해 직진에 직진이었다. 박효진의 뒤를 따라 적의 사정거리에 들어가자마자, 이젠 또 김인제가 추락 설계에 걸려들었다. 그 뒤가 가관이었다. 바로 매듭을 끊고 나와야 함에도 그는 그러지 못했다. 정윤환이 보기에, 김인제는 손 떨림이 심했다. 섬세한 조준이 거의 불가했다.

실력이 형편없네.

시골 촌구석이 그렇지, 뭐. 제8도시는 여태 쭉 하위권이었다. 땅에 붙어 있는 이끼 수준. 도시 순서가 곧 우승 순서였다. 정윤환은 아버지의 탁월한 안목에 혀를 찼다. 그럼에도 인터컴을 탈착하지는 못했다. 보기 드물게 엉성한 팀이라 당최 속셈이 궁금해서라도 끝까지 보고 싶었다.

서재희 팀의 구성원 넷 중, 하나는 체력이 절반이나 깎이고, 하나는 추락 설계에 걸려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서재희 팀과 맞붙은 제3도시 팀은 처음엔 냅다 돌진하는 박효진을 경계하며 주춤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폭탄이라도 이고 오는 것처럼 당당했으니까. 그러나 박효진이 적의 타격을 피하려 애쓰나 피하지 못하고, 뒤에 따라붙던 김인제마저 꼴사납게 추락 설계에 걸려드는 걸 보자, 제3도시 팀은 이제 둘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전투 시작 5분 경과 전에 상대 팀 과반수를 먼저 제거하게 되면 가산점을 얻으니 당연한 태도였다.

정윤환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저렇게 이를 악물고 적의 중심부까지 갈 필요가 없었으니까. 정윤환이 보기에 서재희 팀에서 그나마 쓸 만한 팀원은 류나영이었다. 사격도 깨끗하고, 동조율도 74로 그럭저럭 봐 줄 만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가장 빨리 적의 뒤편으로 날아가 적을 강력히 밀어붙여 가운데로 몰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서포트에 힘을 낭비하고 있었다. 아주 한가로운 태도로, 서재희에게 강화, 박효진에게 속도를 번갈아 걸어 주며 실력을 낭비하고 있었다. 이따금 총을 다른 곳으로 겨누기도 했으나, 땅바닥에 처박혀서 적의 타격을 골고루 얻어맞고 있는 김인제에게 선심 쓰듯 방패를 씌워 주는 게 다였다.

― 재희야, 나 갈고리 준비해도 돼?

김인제였다. 여태 이상할 정도로 서재희 외엔 죄다 침묵을 지키더니, 그제야 누군가 한마디 한 것이다. 땅바닥에 누워서 폭격에 얻어터지면서도 묘하게 즐거운 목소리였다.

― 그래. 이만 끝내자. 우리 이러다 지겠어.

류나영이 말했다. 팀의 자멸을 애도한다기엔 표정도 목소리도 사뭇 밝았다.

― 나 5초 안에 죽을 것 같은데 마무리하지요, 리더님?

사망 직전의 박효진이 장난스럽게 엄살을 부렸다. 서재희는 땅으로 휘갈기던 사격을 멈추고, 여유롭게 물러나며 말했다.

―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터졌다. 모든 설계와 타격이 빠르게 이어져, 마치 동시에 일어난 것 같았다. 김인제가 포획 설계를 이용해 서재희의 발밑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수십 개의 방향 설계 덩어리를 제 쪽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알코올중독자처럼 손을 덜덜 떨어 대던 김인제가 했다고는 믿기 힘들었으나 정윤환은 즉각 이해했다. 서재희가 워낙 두껍게 쌓아 올렸으니 세밀한 조준은 필요 없었다. 다만 순간적으로 강력히 당기는 힘이 필요했는데, 그게 바로 김인제의 장점이었다.

김인제가 서재희의 설계와 하나가 되자마자, 체력이 제로가 된 박효진이 그 위로 정확하게 떨어졌다. 류나영이 그 위로 힘껏 타격했다. 박효진의 시체가 촉매제가 되면서 서재희의 방향 설계가 연달아 터지며 넓은 범위를 불꽃으로 삼켰다. 고막을 뒤흔드는 폭음에 정윤환은 황급히 인터컴을 뺐다.

마지막에 살아남은 건, 줄곧 전투와 멀리 떨어져 있었던 서재희뿐이었다. 그는 이미 총을 홀스터에 꽂아 갈무리하고, 밖으로 나가려고 문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한바탕 전투를 치렀다기보다는, 학교 마치고 집에 가서 엄마한테 문 열어 달라는 모양처럼 한가로워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하긴, 남들 피 터지게 뛰어다닐 때 본인은 가만히 서서 기초 설계나 쌓아 댔으니 땀 한 방울이라도 흘렸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 제8도시 1승. 제3도시 1패. 전투를 종료합니다.

쭉정이 모아서 한 방을 만드셨네. 웃음이 터졌다. 같이 놀면 재밌겠다.

정윤환은 발로 바닥을 긁어 대며 부릉부릉 시동만 걸다가 서재희가 전투실에서 나오자마자 달려 나갔다. 손을 뻗어 서재희의 팔을 잡아챘다.

“야, 서재희!”

서재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선이 마주쳤다. 서재희의 뒤를 따라 나온 팀원 셋이 경계하듯 정윤환을 둘러쌌다. 연합대회 중에 서로 시비를 걸다 몸싸움으로 이어지는 사고는 빈번했다. 도시연합 중앙학교 진학이 걸려 있다 보니 감정이 쉽게 격해졌다.

서재희가 너 누구냐는 표정을 지어서 정윤환은 충격을 받았다.

“……나 몰라?”

그렇다고 나 정윤환이다, 대놓고 말하기가 묘하게 쑥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남에게 먼저 자신을 소개하는 일이 드물긴 했다. 보통은 남이 먼저 정윤환에게 자신을 소개하곤 했으니까.

서재희가 난처한 표정으로 제 팀원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정윤환이라고 작게 일러 주는 것이 들렸다. ‘아아.’ 서재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결 명료해진 눈빛으로 정윤환을 보았다. 정윤환은 그의 반응이 자신에 대한 감탄이기를 내심 바랐다. 서재희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아니, 인사를 하자는 게 아니고. 정윤환은 답답하여 서재희의 팔을 꽉 잡고 흔들어 댔다.

“나랑 너희 팀이랑 1대 다수로 연습 게임 한 번만 하자! 우리 아빠한테 말하면 빈 전투실 쓸 수 있어.”

“아니요. 선배하곤 안 할래요.”

서재희가 빙그레 웃었다. 제8도시의 촌스러운 사투리가 그대로 배어 나옴에도, 이상하게 분위기가 고상했다.

“저도 선배 영상 봤어요. 전 개싸움은 안 해요.”

예의 바르게 직구를 던지고, 서재희가 제 팔을 비틀어 빼냈다. 초면에 욕을 얻어먹어 정윤환은 어이가 없었으나 일단 마음이 급하여 해명은 미뤄 두기로 했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서재희의 팔을 잡아당겼다.

“룰 다 지킬게. 매너 없게 안 할게. 그냥 붙어 보고 싶어서 그래.”

“그래도 안 해요.”

“왜?”

“선배랑 하면 지니까. 전 지는 싸움은 안 해요.”

“어차피 우리 붙어. 대진표 보면 우리 팀이랑 너희 팀 모레 시합이야. 그 전에 나랑 연습 게임 한 번 해 보면 실제로 우리 팀이랑 맞붙을 때도 도움 되지 않겠어?”

이렇게 남에게 같이 연습 게임을 해 보자고 매달리기는 또 처음이라 정윤환은 당황스러웠다. 서재희는 정윤환이 쏟아 내는 말을 막지도 않고 가만히 듣더니 서글서글하게 대답했다.

“아, 그건 기권하려고요. 전 이기는 싸움만 할 거라서. 계산해 봤는데 선배가 있는 제1도시 팀한테는 계속 기권하고, 나머지 전투는 전부 다 오늘처럼 클리어하면 1등 할 수 있더라고요. 선배 팀 작년에 룰 위반으로 페널티 먹어서 점수 깎이고 들어왔잖아요.”

정윤환은 말문이 막혔다. 서재희는 고개를 갸웃 기울여 정윤환을 말끄러미 보다가, ‘그럼 가 보겠습니다.’ 하고 몸을 돌리려 했다. 정윤환은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다시 한번 서재희를 잡아당겼다. 초면인데 자꾸 잡아 세우는 것이 짜증 날 법도 하건만 서재희는 그저 잠자코 멈춰 서서, 정윤환이 무슨 말이든 뱉어 보려고 애쓰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그럼 너 중앙학교 입학할 거지? 너라면 합격할 테니까. 거기 들어가면 우리 꼭 같이 팀 먹자.”

“저 중앙학교 지원 안 해요.”

뭐? 그 실력으로? 왜? 너무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다. 정윤환의 멍한 시선에, 서재희가 덧붙였다.

“저는 기초랑 응용만 졸업하고 아버지 따라 농사지을 거예요.”

“미쳤냐?”

“아니요.”

그 대답을 하고 서재희는 배시시 웃었다. 아무래도 정윤환 같은 반응을 빈번하게 접한 모양이었다.

“……너 그럼 여긴 왜 나왔어?”

“재밌기도 하고. 형이랑 누나들이 나가자고 해서요. 부모님도 허락해 주셔서. 마을 입구에 플래카드도 걸어 준대요.”

서재희가 또박또박 정확하게 대답을 하는데도,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정윤환은 더는 뭐라 말도 못 하고 서재희를 놔주었다. 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닌가 의심하면서.

2주에 걸쳐 진행된 연합대회에서, 정윤환은 서재희와 종종 마주쳤다. 정윤환이 대놓고 제8도시 숙소 주변을 어슬렁거린 덕이 컸다. 왠지 지고 들어가는 기분을 한껏 느끼며 서재희를 찔러 보았으나 그는 친절하게 맹한 소리만 해댔다.

“싸우는 것도 재밌긴 한데 그래도 고향에서 농사짓는 게 더 재밌어요. 이건 그냥 마실 나온 건데. 근데 선배, 새벽에 우리 숙소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거 그만하면 안 돼요? 누나들이 좀 무섭대요. 미친 거 아니냐고.”

“어, 미안……. 아니, 그게 아니고, 너 근데 왜 저런 사람들이랑 해?”

“저런 사람들?”

“못하잖아.”

“그래야 재밌는데. 서로 보완하고 이끌어 주라고 팀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여기서 제일 부족한 건 저예요.”

겸손이 지나쳐 재수가 없었다. 차라리 나처럼 잘난 척을 하든가. 그러나 그리 대답하는 서재희의 얼굴이 깨끗하게 말개서, 그런 불평조차 하지 못했다. 정윤환은 얻어걸리라는 심정으로 아무 말이나 던져 보았다.

“그럼 나랑 팀 먹고 연습 게임 하면 안 돼? 나도 하자 있어.”

서재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하자?”

“성격.”

“……지금 저한테 장난치는 건가요?”

연합대회가 하루 이틀 지나면 지날수록, 서재희의 전투를 보면 볼수록, 정윤환은 안달이 났고 대회 끝물에 가서는 잠도 이루지 못할 만큼 초조해졌다. 미친놈 소리를 들어 가며 매일 구석진 제8도시 숙소를 찾아갔다. 그러나 무슨 말로 회유해도 서재희는 그저 담백하기만 했다. 이대로 대회가 끝나고 서재희가 제8도시로 돌아가게 되면 다시는 못 볼 가능성이 농후했다.

연합대회 마지막 결승전을 하루 앞두고 정윤환은 큰마음 먹고 서재희를 불러냈다. 서재희는 거의 보름간 정윤환에게 이리 불리고 저리 불렸으나 불평 한마디 없이 얌전하게 나왔다.

“우리 이제부터 친구야.”

정윤환은 한쪽 손을 들고 선언했다. 서재희는 반응이 없었다. 여태 서재희가 듣고도 대답을 하지 않는 건 또 처음이라, 정윤환은 꽤 민망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하듯 욕을 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연을 이어 가야 했다. 재차 힘주어 말했다.

“친구끼리는 연락을 하고 지내잖아.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제1도시와 제8도시는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뿐 아니라, 뿌리 깊은 심리적 거리가 더욱 컸다. 정윤환은 서재희 앞에서 제8도시를 빈민 소굴로 여기는 속내를 비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그러나 그리 잘 감춘 것 같지는 않았다.

서재희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너 집에 가서도 도시 연결 서비스 안 끊을 거지?”

“끊어야죠.”

비로소 서재희가 입을 열었으나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지금은 부모님이랑 전화해야 돼서 필요한데, 집에 가면 바로 끊을 거예요. 비싸서요.”

‘내가 대신 내줄게.’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서재희가 혹여 자존심이 상해 이나마 유지하고 있는 관계마저 틀어질까 정윤환은 바로 대안을 찾아보았다.

“그럼 메일. 집에 컴퓨터는 있지? 메일을 주고받는 거야. 어때?”

“인터넷이 잘 안 돼서 메일이 끊겨서 오기도 하고 아예 전송이 안 되기도 해요.”

아오, 이놈의 깡촌, 진짜! 정윤환은 팔자에도 없는 인내심을 발휘하느라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괜찮아. 내가 메일 하나 쓰면 열 번 반복해서 보낼게. 그중 하나는 가지 않겠어? 너도 나한테 답장 보낼 때 열 번 재발송해.”

서재희는 잠자코 눈을 내리깔았다. 정윤환은 숨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거 지금 싫다는 거지. 정윤환은 유독 이런 쪽으로 미숙한 뇌를 열심히 굴려 보았다. 친구라고 확실히 각인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너 그럼 나한테 반말 써도 돼.”

처음으로, 서재희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반말해, 반말. 막 불러. 윤환아 막 이렇게 불러. 이젠 친구니까.”

정윤환은 서재희를 열렬하게 바라보았다. 그 상태로 수 초가 흐르자, 서재희는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윤환은 이때다 싶어 냉큼 대답까지 강요했다. 그러자 서재희는 겨우 목소리를 냈는데, 고작 열세 살 주제에 백 세 먹은 노인처럼 희미해 잘 들리지도 않았다.

“……응.”

“좋아. 너 방금 반말한 거 맞지? 이제 친구니까 메일 주고받는 거야. 알았지? 어? 왜 대답이 없어? 지금 친구 말 무시하는 거야?”

연합대회에서 제8도시는 도시 건설 이후 처음으로 1등의 영광을 거머쥐었다. 우승팀을 이끈 리더의 우승 소감이 한동안 뉴스를 도배했다. 스크린에서 서재희는 희고 말끔한 얼굴로 사투리를 드문드문 섞어 가며, 익히 정윤환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개개인의 능력은 좀 떨어질지 몰라도 팀이 되어 서로를 보완하거나 단점을 드러내어 적에게 틈을 보이다가 역으로 치는 게 정말 재밌기도 하고,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는 형이랑 누나들이 같이 나가자고 하기에, 마침 방학이라 시간도 남고 부모님도 허락해 주셔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덟 도시의 전 시민이 주목하는 연합대회 우승자의 소감치고는 소박하여 풋내가 났다. 그래서 먹잇감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연합대회가 끝나고도 둘은 가끔 메일을 주고받았다. 처음에는 정윤환이 일방적으로 서재희에게 메일을 스팸 수준으로 날려 댔다. 정윤환은 설계나 타격에 대한 최신 정보와 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빽빽하게 적어 보낸 뒤, 제때 답장을 하지 않는다며 서재희를 들들 볶아 댔다. 정윤환의 무분별한 발송으로 메일함이 꽉 차기까지 하자, 서재희는 예의상 짤막하게 답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점차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오늘 눈이 많이 왔어. 비닐하우스가 무너져서 부모님이 걱정이 많으셔. 딸기들이 절뚝거리면서 전부 기어 나오기에 일단 창고에 넣어 두었어. 이럴 때면 식물에 기계 뿌리가 달려서 꼬물꼬물 움직이는 게 다행인 것 같아.

그놈의 딸기랑 고구마 얘기 좀 그만하면 안 돼? 야, 나 군에 들어가는 거 아빠한테 허락받았다? 학교에서 말썽 안 부리고 2년만 딱 더 다니면 보내 주시겠대! 부럽지? 너도 들어오면 안 돼? 거기서 흙이나 만지는 것보다 백배 재밌다니까. 너는 그 깡촌이 지루하지도 않아?

메일을 본격적으로 주고받게 된 어느 날, 서재희는 정윤환에게 이제 메일은 한 번만 보내도 된다고, 사실은 끊기거나 수신이 안 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실토했다. 정윤환은 쌍욕을 퍼붓고는, 그럼 초반에 보낸 메일들은 일부러 보지 않은 거냐고 추궁했다. 서재희는 정말 미안하다며 지금은 다 읽었다고 사과했고, 정윤환은 화를 버럭 냈지만 이미 다 풀려 있었다.

그러다 정윤환이 본격적인 입대 준비로 바빠지고, 서재희 또한 수해를 입어 집에 설치했던 인터넷망이 끊어지는 바람에 시내까지 나가야 답장을 보낼 수 있게 되어, 2년간 이어지던 연락은 자연스레 끊어졌다.

그로부터 다시 1년이 흘러, 정윤환은 응용학교 5학년 2학기를 맞이했다. 그는 당시 학교를 거의 나가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은 6학년에 올라갈 차례일 때, 정윤환은 입대가 확정되었다. 김서혁의 적극적인 협조로 모든 서류가 순식간에 갖춰졌다. 정윤환은 안 그래도 시시하던 학교에 더욱 드문드문 가게 되었다. 처음엔 이삼일에 한 번꼴로 가다가, 교사들이 달리 제지하지 않자 2주에 한 번꼴로 간격이 길어졌다.

하얗게 눈이 내리던 날, 정윤환은 모처럼 학교에 들렀다. 현관에서 우산을 접어 툭툭 털고, 하얀 목도리를 끌러 하아 숨을 뱉었다. 흩어지는 입김 사이로, 왠지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새까만 머리칼의 키가 훌쩍 큰 남자애가 하얀 코트에 까만 목도리를 돌돌 감고 시선을 아래로 한 채 타박타박 교정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코트 깃 사이로 익숙한 까만 교복이 보였다. 정윤환이 입고 있는 제1도시 응용학교 교복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정윤환은 우산을 팽개치고 뛰어갔다.

“야, 서재희! 진짜 반갑다. 너 어떻게 된 거야? 교복 뭐야? 이거 우리 교복인데? 언제 이사했냐? 딸기랑 고구마 열심히 키우더니 돈 좀 벌었나 봐. 8에서 1까지 신분 상승 축하한다. 나 지금 가슴이 벌렁거려서. 그런데 왜 나한테 연락도 없이, 아니다, 연락은 내가 먼저 안 했나? 미안, 내가 정말 너무 정신이 없어가지고. 와, 진짜 오늘 학교 오길 너무너무 잘했다…….”

공중으로 입김이 흩어지고, 흥분하여 높아졌던 목소리는 낮게 사그라졌다. 사방으로 눈 내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서재희는 서재희인데, 서재희 같지가 않았다. 물론 마지막으로 사진을 주고받은 지 1년이나 흘렀으니 그새 둘 다 키도 훌쩍 크고 선도 굵어져 있었다. 특히 서재희는 예전에도 고상한 편이었으나 이제는 완전히 촌티를 벗고 제법 귀티까지 났다. 하지만 정윤환이 직감한 것은 그런 외적인 것이 아니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속이 크게 비틀린 것 같은 위화감이 있었다.

정윤환은 잠시 말문이 막혀, 서재희의 서늘하게 가라앉은 새카만 동공을 마주 보았다. 서재희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제 입을 가리고 있던 까만 목도리를 잡아당겨 내렸다. 드러난 입매는 전처럼 단정했다. 그러나 그리 건조한 목소리는 생전 처음 들어 보았다. 예의상 하는 말에도 늘 온기가 돌던 서재희였는데, 이제 그런 것은 없었다. 없어진 지 오래인 것 같았다.

“고향에 폭격이 떨어졌어.”

감히 위로하지 못했다. 변명도 어려웠다. 나는 몰랐다고, 언론 어디서도 제8도시 폭격에 대한 기사는 보지 못했다고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대신 정윤환은 매일같이 학교에 출석 도장을 찍었다. 그래 봤자 고작 몇 주였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정윤환의 걱정과는 다르게, 서재희는 놀랍도록 제1도시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특유의 성숙하고도 유려한 분위기에 다른 학생들 또한 서재희에게 매료됨이 당연했다. 그에 반해 정윤환은 한 걸음씩 물러났다. 서재희는 여전히 통찰력 있게 팀을 구성하고 이끌었으나, 거기에 예전과 같은 즐거움은 없었다.

‘재밌기도 하고, 형이랑 누나들이 나가자고 해서요. 부모님도 허락해 주셔서. 마을 입구에 플래카드도 걸어 준대요.’

서재희가 밝게 말했던 우승 소감의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윤환은 텅 빈 서재희 옆에서 어쩔 줄을 몰라 주위만 뱅뱅 맴돌았다. 서재희가 견고한 가면을 쓰고 있다고 느꼈다. 더는 그의 재능이 빛나 보이지도 않았다. 따뜻함도 사라지고 없었다. 정윤환은 안타깝게 과거를 상기하기도 하고, 서재희를 이해해 보려고도, 하고 가끔 저도 모르게 불쑥 화를 내기도 했다. 서재희는 자신은 달라진 게 없다고 했다. 정윤환은 너는 다른 사람 같다고 했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말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고 멈출 수 있는 것도 없었는데.

그렇게 서툴게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정윤환은 도시연합군 소속이 되어 김서혁 밑으로 들어갔다. 서재희는 제1도시 응용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갈 생각이 없다던 도시연합 중앙학교 역시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서재희는 스물셋, 정윤환은 스물여섯이 되었다.

그런데 도시연합 중앙학교 모의 전투실에서 다시 보게 된 서재희는, 정윤환의 세계를 순식간에 뒤집어 놓았다. 당시 정윤환은 막 특례 입학하여 교복을 어색하게 꿰어 입은 지 일주일도 안 된 불량한 신입생이었고, 서재희는 정규 코스를 착실히 밟아 3학년 배지에 번듯한 학생회장 직함까지 달고 있었다.

정윤환이 군과 반란군 사이에서 박쥐 짓을 하며 속이 문드러지는 동안, 서재희는 어마어마하게 성장해 있었다. 그가 통솔하는 전투는, 이제 충격 그 자체였다. 서재희의 리드에는 기본적으로 따뜻한 인간미가 깔려 있었다. 이제 볼 수 없다고 체념했기에 더욱 반가웠다. 냉철한 판단이 승패를 가르는 전투에서, 서재희는 아주 드문 케이스였다.

따뜻하고 똑똑한 사람.

정윤환이 굶주렸던 인간상이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두 가지 중 하나만 겨우 충족시키거나, 아니면 하나의 반의반도 가지지 못했다. 따뜻함에 이끌려 다가가면 그 멍청함에 실망하기 마련이었고, 좀 똑똑하다 싶어 말을 걸었다가 차가운 속내에 움츠러들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찾아 헤맨 이유는, 타인에게서라도 형을 다시 마주하고 싶어서였다. 물론 그것은 쉽지 않았기에, 정윤환은 군에서 학교로 내려오며 그 모든 이상을 접어 두었다.

그랬는데. 서재희의 전투 스타일을 보자마자, 미뤄 두었던 꿈이 와르륵 쏟아졌다.

인간미와 재능을 두루 갖춘 사람은 귀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윤환은 그 자리에서, 서재희에게 구원받으리라 필연적으로 믿어 버렸다. 불행은 항상 얄팍한 행운을 뒤집어쓰고 찾아온다는 것을, 아무리 학습해도 자꾸만 잊는다는 게 문제였다.

서재희 팀의 턴이 끝나고, 그다음 팀이 전투실로 들어가려는 것을, 정윤환이 밀치고 들어가 먼저 총을 뽑았다. 팀전으로 세팅되어 있던 시스템을 개인전으로 바꾸지도 않고, 정윤환은 혼자서 신기록을 세우고 나왔다. 바로 서재희를 찾아 불렀다.

“우리 구면이지?”

바로 본론을 꺼냈다.

“나 네 팀에 들어갈래.”

서재희는 가만히 정윤환을 응시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때도 사양했던 걸로 아는데. 미안하지만, 안 돼.”

예상했던 거절이었다. 정윤환이 짐작한 대로, 서재희는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넌 완성되어 있잖아. 팀으로 뛰는 의미가 없어. 대신…….”

서재희가 빙긋이 웃었다.

“……학생회 들어올래?”

뜻밖의 제안이었으나, 정윤환은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선선히 승낙했다. 학교 분위기가 뒤숭숭한 것을 조금이나마 완화하기 위해 정윤환을 가까이 두고 살피려 한 서재희의 뻔뻔한 속내는 나중에 알았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유적지에 묻어 두고 온 것들을 서재희 앞에서 다시 펼쳐 놓을 수만 있다면.

한 학기를 서재희와 붙어 지냈다. 서재희는, 과거의 아픔을 딛고 단단해진 것 같았다. 보면 볼수록 사람이 괜찮았다. 가끔 벽이 느껴지기는 했으나, 그건 과거에 대해 함구하는 정윤환도 마찬가지였으니 흠이라 하기는 어려웠다. 정윤환은, 대체 언제쯤 서재희에게 말을 꺼내면 좋을까, 그가 나를 믿어 줄 것인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그를 제 잣대로 가늠했다.

“도시연합에서 배포한 사해 지도에 온 오염도 평균치가 나오잖아. 그런데 실제로 사해에 나가면 지도하고 안 맞을 때가 있어. 특히 제7유적지로 가면 지도에 표기된 것보다 온 오염도가 훨씬 떨어지는데, 그 낮은 수치를 따라가다 보면 1급 보안지역 경고가 뜨면서 진입할 수가 없거든. 이번에 대규모 파견팀을 꾸려서 일부러 낙오할 거야. 그리고 제7유적지부터 보안지역 경계까지 일직선으로 달리면서 오염도 수치를 우리 손으로 직접 측정하고 싶어. 그러면 도시연합이 온 오염도를 거짓 표기했다는 증거를 만들 수 있어. 운이 좋으면 보안지역 안에 들어가 볼 수 있을지도 몰라.”

정윤환은 서재희의 눈에서 정성민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다. 자각하기도 전에, 이미 입이 멋대로 말하고 있었다.

“내가 도와줄게.”

결과는 참담했다.

둘은 각자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낙원의 이론을 파헤쳤으나,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한가운데 들어와 있었다. 들어올 땐 마음대로라도 나갈 땐 목숨이 필요한, 그 끔찍한 거미줄의 바로 정중앙에.

항상 이게 문제였다.

선한 의도의 두 사람이 모여 파헤치는데 어째서 결론은 큰 도랑으로만 흘러가는가.

처음엔 서로를 원망했으나, 곧 스스로 그 가혹함을 소화했다. 정윤환은 체념하는 쪽을 택했다. 서재희는 더욱 말수가 적어졌으며, 그 무렵 표정이 한층 더 단순 깔끔해졌다. 서재희가 반듯이 그려 내는 미소를 보면서, 저놈도 제정신 잡고 있기 힘든 모양이구나 생각했다. 둘은 자연스레 데면데면해졌다. 정윤환은 서재희가 어떤 재목으로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 더는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가끔 건너다보면, 서재희는 정윤환의 조력 없이, 이제 혼자서 다른 것에 집중하는 듯했다. 물어볼 생각은 없었으나, 다만 판을 너무 흔들지는 않았으면 했다. 도시연합이 살벌한 숙청을 되풀이하는 것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으므로.

차인호가 도시연합장이 되고 난 다음 학기에, 서재희는 학생회장 직을 반납하고 파견부장을 맡았다. 그 무렵 둘은 용의 심장박동을 재러 주기적으로 번갈아 사해에 나가게 되었다. 어느 날, 유황 냄새를 풍기며 돌아온 서재희와 마주쳤다. 그냥 스쳐 지나가려다가, 무심코 물었다.

“이제 그만둘 거야?”

앞뒤 다 잘라먹은 질문도 서재희는 즉각 알아들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계속할 거야.”

“그러다 죽으면? 다른 애들처럼.”

“그럼 내가 걸어가던 방향으로 쓰러져 죽겠지.”

서재희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한세연 연구관이 그런 비슷한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밤바람에 여름이 묻어 더웠다. 정윤환은 바로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했다. 포기했어도 자꾸만 불쑥불쑥 다시 시작하는 것이 내 업보인가 보다 생각하면서.

“나 실은 말할 게 있는데.”

서재희가 가만히 정윤환을 보았다. 이제 그만 씻으러 들어가고 싶다거나, 피곤하니 내일 이야기하자는 등의 말은 역시 하지 않았다.

“나 사실 예전에…….”

“미안. 잠깐만.”

서재희가 진동이 울리는 인터컴을 꺼냈다. 그가 몇 걸음 떨어져서 전화를 받는 사이, 정윤환은 입 안으로 단어들을 고르고 굴려 보았다.

“……어디가 어떻게 미비하다는 말씀이신지. 인감까지 첨부했습니다. 동의서도요. 네. 네. 지금 말씀하시는 것까지 하면 이번이 열두 번째 반려입니다. 대체 무슨 말씀이신가요? 제가 가족입니다. 신청을 반려하는 법적 근거를 말씀해 주십시오. ……그게 말이 됩니까? 그는 단지 제 후원자일 뿐입니다. 제 진짜 가족은…….”

서재희가 통화하며 이마를 짚었다.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드문드문 이를 악무는지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길어질 것 같던 통화는 짤막하게 끝났다.

“미안해. 어디까지 얘기했지?”

서재희가 돌아섰다. 정윤환은 서재희의 이프에서 익숙한 번호가 통화 종료를 알리며 깜빡이는 것을 보았다. 준비했던 모든 말마디가 증발했다. 질문이 튀어 나갔다.

“무슨 일 있어?”

“별거 아냐.”

서재희가 매끄럽게 시선을 피했다. 정윤환은 한 걸음 다가섰다.

“그거 우리 아빠 번호인데. 무슨 통화야?”

서재희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정윤환을 보았다.

“중앙병원장이 너희 아버지라고?”

“어.”

“정선재 의원이 아니고?”

“그 사람은 우리 큰아버지. 사정이 있어서 큰아버지 밑으로 호적을 올렸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는 부탁은 생략했다. 서재희는 입단속이 필요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서재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정윤환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이윽고 서재희가 특유의 낮은 톤으로 차분히 말했다.

“안락사 신청했는데 자꾸 반려돼. 법적으로 문제 될 게 하나도 없는데, 병원 측에서 온갖 핑계를 대고 있어.”

정윤환은 멍하니 그를 마주 보았다. 이럴 때는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입만 벙긋거리다 조심스레 말했다.

“……너희 부모님?”

“응.”

“아까는 안 그만둔다며. 계속한다며. 부모님 복수하려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왜 갑자기 안락사야.”

“나 죽기 전에 부모님 먼저 보내 드리고 싶어. 남겨 두고 떠나면 우리 부모님 장례 치러 줄 사람이 없어.”

“네가 왜 죽어? 대의를 위해서 여태 그렇게 버틴 거 아니었어?”

“대의? 무슨 대의?”

서재희가 피식 웃었다. 정윤환은 서재희가 코웃음을 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난 그런 대단한 건 몰라. 난 그냥 복수할 거야. 다 무너뜨려 버리고 나도 죽을 거야. 그 뒤는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새로운 세상이라니 가당키나 해? 시스템은 무너져도 인간은 그대로야. 달라지는 건 없어. 그냥 지금이 무너지는 걸 보고 싶어. 그럼 억울한 게 좀 풀릴 것 같아서.”

“왜?”

“왜냐니. 그러고 싶으니까.”

“고작?”

“그래. 고작.”

“더 나은 세상이라든가 바라는 것 하나도 없어? 나는, 네가 개인적인 사정이 아니라, 조금 더. 뭐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게 있을 줄 알았어. 네가 팀을 이끌 때 한 수 두 수 멀리 앞을 내다보는 것처럼, 낙원의 이론을 추적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있을 거라고.”

“있어야 돼?”

정윤환은 자신이 나약하여 서재희에게 지나친 기대를 걸었음을 깨달았다. 아픔을 극복하고 예전으로 돌아온 줄 알았는데. 따뜻하고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너무 똑똑해서 따뜻함을 가장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노련하게.

어떻게 말해야 서재희가 반란군에 합류해 줄까, 팽팽하게 긴장하며 단어를 고르며 문장을 재배치한 자신이 우스웠다. 내가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네. 그래서 유은우를 감싸 안고, 서재희를 동경했다.

자신이 정윤환의 마지막 기대였음을 까맣게 모르는 서재희가 부드럽게 물어 왔다.

“그래서 할 말이라는 게 뭐야?”

“아니, 됐어. 들어가.”

“중요한 거 아니야?”

“아니. 하나도 안 중요해.”

정윤환은 자신을 질책하듯 덧붙였다.

“너무 사소한 거라 벌써 까먹었어.”

그래도 서재희라는 사람 자체만 놓고 보면 꽤 괜찮다는 건 정윤환도 인정했다. 아군이라기엔 가치관이 정반대고 적군이라기엔 처지가 비슷하여, 서재희는 언제나 정윤환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차렸다. 서재희 기준에서 최소한의 예의는, 남들 기준으로 최대한의 배려와 같았다.

둘은 서로를 본체만체하며 무려 보름에 걸쳐서 사해에 다녀왔다. 사해에서의 보름은, 아무리 노련한 동조자라 하더라도 버티기 고단했다. 그 황량하게 오염된 땅에서, 시간은 흐른다기보다 기어갔다. 서재희는 며칠간 칩을 물어 입 안이 엉망진창으로 헐어 버리자, 안 그래도 적은 말수를 더욱 아끼기 시작했다. 정윤환은 영양제와 시럽 따위로 대체하는 식사에 대해 가벼이 불평했지만, 내심 괴로운 것은 따로 있었다. 그는 제3유적지를 가로지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서재희가 최단 경로를 제안했을 때, 정윤환은 제3유적지를 빙 둘러서 가자고 말하지 못했다. 서재희가 이유를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었으니까.

사흘째 되던 날, 괴물 하나가 빠르게 철컥이며 다가왔을 때, 정윤환은 총을 뽑는 것을 잊었다. 철골로 이루어진 여덟 개의 다리가 흙바닥을 파헤치며 삽시간에 코앞까지 다가올 동안, 그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캉!

괴물은 지척에서 타격을 맞고 무너졌다. 기계 부스러기가 튀면서 녹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깔끔한 직선 설계에, 모자라거나 과하지도 않은 타격이 얹혀 정직했다. 기본 중의 기본으로, 제대로 급소를 쳤다. 서재희답다고 정윤환은 멍하니 생각했다.

“너 왜 그래?”

서재희가 총을 거두며 조용히 타박했다.

정윤환은 습관처럼 주머니를 뒤졌다. 손끝에 매끈한 케이스가 걸리자 안심했다. 막 꺼내는데, 서재희의 손이 다가왔다. 피하려다 서로의 손이 거칠게 부딪혔다. 신경안정제가 바닥에 떨어졌다. 서재희가 그것을 밟아 부수었다. 정윤환은 하마터면 서재희를 칠 뻔했다.

“열 받게 하네. 네가 내 엄마라도 되냐?”

“너 지금 반응 너무 느려. 신경안정제는 최대 이틀에 하나야. 너 오늘 대체 몇 개째야?”

“신경 꺼.”

“여기 제대로 된 동조자 한 사람만 더 있었어도 나 너 상관 안 해. 그런데 지금은 너랑 나 둘뿐이잖아. 난 신경 써야겠어.”

정윤환은 대답 대신 총을 뽑았다. 즉각 서재희 쪽으로 겨누고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고 서재희 뒤편에서 소리 없이 흔들거리던 길쭉한 괴물이 갈기갈기 찢겼다. 놀랄 만도 한데, 서재희는 뒤를 돌아보기는커녕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정윤환을 응시하고 있었다. 말은 반응이 느리니 어쩌니 해도 믿는다는 소리였다. 정윤환이 실수로라도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을 것을.

정말 사람 짜증 나게 했다. 사람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는 듯한 저 태도가 싫었다. 그래 봤자 너도 나도 결국 아무것도 아닌데.

“너나 잘해. 어디서 훈수질이야.”

“피차 서로 기분만 안 좋아지니 얼른 끝내고 돌아가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서재희가 마지막 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도 곧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죽어 가는 것 같아.”

서재희가 중얼거렸다. 사해의 온맥에 심장박동 측정기를 꽂고 가동한 지 30분이 지나 있었다. 정윤환은 말없이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옆에서 서재희가 재차 말했다.

“죽어가는 것 같아.”

“심장박동이 느려지고 있네.”

정윤환이 고쳐 말했다.

“그럼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용이 죽으면 도시가 무너져. 도시가 무너지면…….”

“상관없다며?”

정윤환이 서재희의 말을 잘라 내며 뱉었다. 서재희가 가라앉았던 눈을 들어 정윤환을 보았다. 정윤환은 서재희의 시선을 피하며 모니터를 응시했다. 날카롭게 말했다.

“세계가 무너지든 말든 그냥 다 부숴 버리고 너도 죽을 거라며. 그 뒤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며.”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냐. 정윤환은 자신에게 화가 났다. 치사하게 떠보기는. 맺고 끊는 것을 그리 못 해서야. 그러니 유은우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지. 그러면서도 서재희의 대답에 온통 신경이 쏠렸다.

서재희는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삐. 측정 완료 메시지가 떴다. 서재희는 무미건조하게 측정기에서 메모리를 뽑아냈다. 굽혔던 허리를 펴며 그가 지나가듯 말했다.

“그래. 상관없지. 가자.”

모래바람이 불어닥치는 사해에서 되돌아오면서, 둘은 더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서재희를 탓할 수 없었다. 변한 것은 서재희만이 아니다. 정윤환 자신도 변했다. 그때는 서재희가 고향을 잃은 아픔으로 달라졌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이유만이 아님을 알았다. 물밑에 깔린 많은 것들이 서재희의 재능을 보고 각다귀처럼 달려들어 저리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직접 겪어 보고 나서야, 정윤환 또한 그것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서재희 탓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래도 그만은 똑바로 서 있길 바랐었다. 혼자 싸우는 것은 힘들었으니까.

정윤환은 비로소 포기했다.

꿈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스러져 흔적만 남았다. 그 뒤는 색깔 없이 지루하고 때때로 피로했다. 정윤환은 창가에 오른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 햇살이 나른하여 졸음이 쏟아졌다. 오늘은 악몽을 꾸지 않았으면 했다.

달칵, 문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인기척도.

정윤환은 느리게 뒤를 돌아보았다. 눈을 찡그렸다.

“뭐야.”

작은 여자애가 이쪽을 말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늘 창백하던 낯이 혈색으로 싱그러웠다. 깜박이는 눈은 동그랬고, 속눈썹이 순하게 처져 있었다. 두 발로 똑바로 서 있었으며, 군인답게 자세가 바르고 곧았다. 키는 조금 큰 것 같았다. 살이 포동하게 오른 것 같기도 했다. 수많은 밤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잠들었으니 가늠할 수 있었다.

익히 아는 모습으로, 또는 너무나 낯선 모습으로 유은우가 거기 있었다. 살아서 거기 있었다. 평범한 여자애로 만났다면 어땠을까, 수십 번 그려 보던 모습으로.

그토록 보지 않으려 애썼는데.

“죄송합니다. 사람 있는 줄 몰랐어요.”

유은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긴 머리카락이 쏟아졌다가 유은우의 손길에 가볍게 뒤로 쓸려 넘어갔다. 유은우가 바로 뒤돌아섰다. 정윤환은 이미 그때 유은우의 지척으로 다가가 있었다. 동그스름한 어깨에서 가방이 툭 떨어졌다. 유은우가 지체 없이 가방을 주워 메며 일어섰다.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잠깐.”

유은우의 어깨 너머로 손을 훌쩍 뻗어, 문을 눌러 닫았다. 이어 달칵하고, 문을 잠갔다. 유은우는 몸을 굳히더니, 바로 문을 잡아 열려고 했다. 그녀의 어깨를 틀어잡아 돌려세웠다. 가방이 툭 떨어졌다. 가까이 붙었다. 유은우는 뒤로 몸을 물리려 하다가 문에 등이 닿아 막히자, 빠르게 홀스터로 오른손을 가져갔다. 거칠게 붙잡아 제지했다.

익숙한 온기. 수없이 덧그리던 동그랗게 예쁜 뺨의 선. 틈이 벌어진 입술.

나를 기억 못 하는 말간 눈.

떨지 마, 정윤환. 정신 똑바로 차려. 이번엔 할 수 있어.

총을 뽑았다.

스무 살 생일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군인으로 타고났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정윤환은 입대 3개월 만에 유례없는 특진으로 정예군에 합류했다. 넘치는 힘을 주체 못 하고 애꿎은 또래들 엿이나 먹이며 재능을 낭비하다가 비로소 딱 맞는 옷을 입었다.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정윤환의 부모는 양아치 같은 제 아들이 딱딱한 군에서 부적응자로 퇴출당할까 걱정을 거듭했으나 기우였다. 정윤환은 모든 동료에게 확실히 굽히고 들어갔으며, 때로는 애교 있게 제 입장을 관철했다. 정윤환보다 적게는 대여섯 살, 많게는 서른 살 차이 나는 동료들은 그를 유난히 예뻐했다. 김서혁이 직접 응용학교를 조기 졸업시키고 데려올 정도의 재능에, 언론에 오르내리는 대단한 집안에, 외모는 보는 이를 홀려 낼 만큼 화려했고, 나이는 딱 밉지 않을 만큼만 어렸으니.

“소원 빌어야지, 소원.”

박민준이 정윤환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정윤환은 그 손길을 장난스럽게 피하면서 숨을 한껏 들이쉬었다. 케이크에 꽂힌 초에서 작은 불꽃들이 팔랑거렸다. 소원은 미리 생각해 두었다. 올해는 김서혁 대장이 나한테 칭찬 한마디만 해 줬으면. 그 외에는 바랄 것이 없었다. 온통 넘치기만 하여 부족한 것을 찾기 힘들었다.

입을 모아 막 바람을 불려는데, 누군가 똑똑 노크를 했다. 정윤환은 엉뚱한 곳으로 숨을 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오가다 몇 번 본 적이 있는 여자가 열린 문에 노크했던 손을 거두고 있었다. 연합군 제복을 싹 갖춰 입었고, 왼손엔 아직 귀에 꽂기 전인 인터컴이 들려 있었다. 그러나 허벅지는 홀스터 없이 비어 있었다. 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동조자 군인이었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정윤환 주변에서 선물을 들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던 정예군 네다섯이 경계하며 일어섰다. 정윤환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의 명찰을 확인했다. 이수연.

“휴식 중에 죄송합니다. 푸른 테 제5팀 이수연입니다.”

이수연이 예를 갖추며 말을 이었다.

“지금 바로 출동 가능한 분 계십니까? 저희 팀 리더 자리가 비어 동조자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정예군 팀원을 임시 리더로 삼아 오늘 임무를 처리하라는 임유현 총사령관님의 지시입니다.”

정윤환 바로 왼쪽에 앉아 있던 소연주가 알록달록한 폭죽을 든 채 되물었다.

“정성민은 어쩌고?”

이수연은 잠시 눈을 깜박였다.

“자살했습니다.”

시신은 이미 거두어 가고 없었다. 언제나처럼 군은 모든 일을 신속하게 처리했다. 그러나 핏자국은 어슴푸레 남아 있었다. 정윤환은 그리 친하지도 그리 멀지도 않았던 사촌 형의 흔적을 눈으로 차근차근 더듬었다. 정성민이 제 목숨을 끊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으나, 불과 며칠 전 그의 불안한 눈과 마주했었다.

‘나한테 무슨 일 생기면, 이것 좀 전달해 줘.’

새벽에 전투를 마치고 온 정윤환을 불러내, 정성민이 당부에 당부를 거듭하며 쥐여 준 것은 작은 메모리였다. 당시엔 큰 의미가 없는 줄 알았다. 전투에 나갔다가 죽으면 가족들에게 전달해 달라며 군인들은 동료들에게 유품으로 남길 만한 것을 자주 부탁했다. 그런 흔한 일이라 여겼다. 그 대상이 하필 나라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만.

‘이수연. 푸른 테 제5팀. 우리 팀원이야. 부탁할게.’

‘형이 좋아하는 여자야?’

심드렁하게 물었다. 좋아하면 그냥 살아 있는 지금 고백해. 왜 남한테 맡겨, 귀찮게. 그런 말은 삼켰다. 정성민의 눈이 너무 절박해서. 정윤환은 투덜대며 그것을 받아 쥐었다. 속으로는 전달할 일 따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예군에 미치지는 못해도 푸른 테 또한 탁월한 부대였다. 팀이 위험해진다면 팀원인 이수연이 먼저 죽었으면 죽었지 리더인 정성민은 죽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새벽이라 감성에 취해 어린 사촌 동생에게 사랑 고백을 부탁하다니. 낯간지럽다고 생각했다. 그뿐이었다.

그런데 자살했다.

스산했다. 거대한 그림자의 끝에 스친 것처럼.

“누가 얘 데리고 왔나.”

질책이 낮게 날아왔다. 정윤환은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김서혁이 차가운 눈으로 정윤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옆에 선 소연주에게 지시했다.

“데리고 나가. 어린애를.”

소연주가 바로 정윤환에게 다가와 팔을 잡아끌었다. ‘가자.’ 하고 그녀가 속삭였으나 정윤환은 버티고 서서 김서혁에게 말했다.

“자살할 이유가 없습니다.”

“정예군이면 사건 현장에 함부로 드나들어도 되나? 나가.”

소연주에 박민준까지 달라붙어, 정윤환은 그대로 질질 끌려 나왔다. 죽은 형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처럼 발바닥이 끈적거려 걸음이 자꾸 느려졌다.

“이상한데. 자살할 사람이 아냐.”

박민준의 손을 뿌리치며 정윤환은 발칵 화를 냈다.

“성민이가 좀 심약하긴 했지. 다른 애들이랑 두루두루 상성이 맞고 온화한 편이라 그나마 리더로 있었던 거지, 강한 애는 아니었어. 위태롭다는 소문 자주 돌았어. 처음 군에 들어왔을 때 사람을 못 죽여서 엄청 고생하기도 했고. 내가 그 녀석 동기라서 잘 알아. 전투 다녀오면 밥도 못 먹고 그랬어, 걔가.”

박민준이 달래듯 말했다. 소연주가 덧붙였다.

“푸른 테 제5팀은 리더 정성민 말고 동조자가 단 한 명도 없어. 전원 비동조자로만 구성된 팀만 주야장천 배정받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입대하고부터 하급 팀만 담당하고 승진도 밀리고 스트레스 받을 만해. 자살 동기가 아예 없진 않다는 뜻이야.”

정윤환은 제복 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손끝에 차가운 메모리가 걸렸다.

“나 여기서 좀 기다렸다가 갈게. 이수연인가 그 여자한테 최근에 무슨 일 있었는지 물어봐야겠어.”

정윤환은 고집스럽게 복도 벽에 등을 딱 기대고 섰다. 박민준이 소연주와 난처한 시선을 교환했다. 소연주가 부드럽게 말했다.

“군에서 정식 발표할 때까지 외부에 유출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정성민 부모님은 물론이고 네 부모님한테도 말씀드리면 안 돼. 군에서 직접 유가족에게 연락을 취할 거야.”

“나도 알아.”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박민준과 소연주가 저만치 멀어지고 사방이 조용해졌을 때 정윤환은 반짝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없는 복도 그늘에 서서, 메모리를 꺼냈다. 오른쪽 손목의 이프를 실행시켰다. 메모리를 꽂아 넣었다.

동영상이 떠올랐다. 시야가 흔들렸고, 사위가 어두웠다. 정윤환은 오른쪽 손목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린 뒤, 화면에 코를 집어넣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 집중했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 촬영 시기가 적혀 있었다.

제8도시 1018년 12월 4일 03:00

4년 전이었다.

처음에는 산처럼 쌓인 빨래 더미인 줄 알았다. 켜켜이 쌓인 시체라는 것은, 손가락으로 확대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중엔 정윤환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아이도 있었다. 숨이 끊어져 낯이 창백한 다른 이들과 달리 야트막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고 눈이 감겼다가 가느다랗게 뜨이기도 했다. ‘살아 있어.’라고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잠시 뒤 ‘내가 할게, 카메라 좀 들어 줘.’라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스크린이 흔들리더니 갑자기 아래로 훅 꺼졌다. 이윽고 다시 들려 올라간 시야에, 초라한 어린아이를 엉킨 시체로부터 끌어내는 정성민이 있었다. 그는 땀과 오물에 찌든 더럽고 지친 몰골로, 기어코 아이를 건져 안았다. 정성민이 손을 들어 아이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에 흰 라벨이 붙어 있었다. 정윤환은 동영상을 멈춰 라벨을 확인했다.

유은우. 10세. 동조율 100.

동조율 100? 정윤환은 눈을 찡그렸다. 끔찍한 상황이 갑자기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비현실적인 수치였다. 멈췄던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 얘가 왜 여기 있지? 우리 실험체 아니었어? 설마 이제 필요 없어졌다고 연합군에 돈 받고 판 거야?

정성민이 화를 냈다. 그는 홀스터 바로 옆에 차고 있던 연속 주사기를 꺼내 아이의 팔뚝에 맞췄다. 아이 몸이 크게 흔들리고, 곧 숨이 트이는지 격렬하게 기침을 했다.

― 그 애 설계 난독증이라 흰 칼날 프로젝트에 안 맞는다던데.

카메라를 든 남자가 말을 이었다.

― 폐기 처분한다고 들었는데 역시 군에 갖다 팔았나 보네. 반란군의 의미가 퇴색되긴 했어. 이거 무슨 장사꾼도 아니고.

정성민이 아이를 안고 카메라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말했다.

― 우리가 데려가 살리자. 우리가 실험체로 쓰며 괴롭혔으니까, 우리에게 책임이 있어. 프로젝트에 부적합하다니 차라리 잘됐어. 김승훈 연구사님께 부탁해서 지금이라도 삽입된 기계를 빼면…….

― 넣었던 기계 다시 빼는 거 어려워. 그보다 윗분들이 받아 줄까? 자기들이 판 걸 다시 가져왔다고 뭐라고 할 것 같은데.

정성민이 아이를 단호하게 고쳐 안았다.

― 상관없잖아. 돈은 이미 두둑하게 받았을 테고 팔았던 실험체도 도로 데려가는 셈인데 설마 뭐라고 하시겠어. 난 얘 다시 데려갈래. 아직 살아 있고, 여기 방치되면 죽어. 더 이상 무슨 이유가 필요해.

정윤환은 이프에서 메모리를 뺐다. 속이 메슥거렸다. 고개를 들었다. 이수연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형이 전해 주라고 했어요.”

정윤환은 메모리를 내밀었다. 손끝이 약간 떨렸다. 이수연이 주위를 살피더니 그것을 받아 갔다. 정윤환은 괜한 호기심에 메모리를 실행시킨 것이 너무나 후회스러워서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안에 내용 어디까지 봤니?”

“멋대로 봐서 죄송해요. 못 본 걸로 하겠습니다.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성민 오빠 자살 아니야.”

정윤환은 뭐라 대꾸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도시연합의 치부가 담긴 영상을 정성민이 가지고 있었고, 그는 자살로 위장되었다. 여기서 그에게 동조하면 도시연합과 척을 진다. 정확히 말하면 반란군을 지지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정윤환은 반사적으로 CCTV의 위치를 확인하며 물러섰다.

“유감이네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단호하게 돌아섰으나, 이수연에게 팔을 잡혔다. 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정윤환은 그만 뒤로 자빠질 뻔했다. 그가 당황한 사이, 이수연이 정윤환의 귓가에 다급히 속삭였다.

“오빠가 정말 너한테 이것만 전달해 달라고 했어? 다른 말은 없었어? 우린 사람이 필요해. 그 사람이 널 데려오겠다고 했는데……!”

“미쳤어? 이거 놔! 난 아무 상관도 없어!”

이수연을 거칠게 뿌리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식은땀이 등골을 따라 줄줄 흘러내렸다. 샌님처럼 얌전하던 사촌 형의 사상이 그토록 불순할 줄은 짐작도 못 했다. 설마 이렇게 휘말리는 건 아니겠지. 소매로 거칠게 이마의 땀을 닦아 냈다. 가슴은 여전히 쿵쿵 뛰었다.

아직 어리던데.

정성민이 조심스레 안아 들던 아이의 얼굴이 선연했다. 다 죽어 썩기 시작하는 그 지옥에서 어떻게 혼자 숨을 붙들고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동조율이 100이라 그런가. 정윤환은 저도 모르게 마구 고개를 저었다. 동조율과 체력은 별개의 문제다. 설계와 지능이 상관관계가 없고 타격과 악력이 따로 놀듯. 무엇보다 동조율 100이 사실일 리도 없었다. 어쩌다 운이 좋아 살았겠지. 그것도 4년 전 일. 신경 꺼야 했다.

‘폐기 처분한다고 들었는데 역시 군에 갖다 팔았나 보네. 반란군의 의미가 퇴색되긴 했어. 이거 무슨 장사꾼도 아니고.’

죽은 사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듯 서둘러 걷던 걸음은 자꾸만 느려졌다. 정윤환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멈춰 섰다. 입술을 짓씹었다. 팔다니. 표현이 이상했다. 언제부터 반란군과 연합군이 무언가를 사고팔 정도로 사이가 돈독했나? 아니, 그보다 구도가 이상했다. 시체 더미에서 아이를 구출하는 것은 도시연합이 되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왜 그걸 반란군이 하고 있나.

됐어, 무슨 상관이야. 난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못 봤고, 아무것도 못 들었어. 할 수만 있다면 아무 생각 없이 메모리를 건네받았던 제 손을 잘라 내고 싶을 정도였다. 정윤환은 깔깔한 입 안으로 마른침을 간신히 삼키고 계단을 내려갔다.

형이 뭘 잘못했어. 죽어 가던 여자애 살린 것뿐인데.

발을 헛디뎠다. 난간을 잡아챈 덕분에 꼴사납게 구르지는 않았다. 대신 몸이 크게 휘청거리며 제복에 붙어 있던 기장이 떨어졌다. 정윤환은 그것을 향해 손을 뻗다 멈추었다. 반짝거리는 군화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이어 메마른 손이 넝쿨처럼 뻗어 내려오더니 떨어진 기장을 주워 들었다.

“잘 간수해야지. 첫 전투 공적으로 받은 기장이 아닌가.”

정윤환은 뻣뻣하게 굳어서, 임유현 총사령관이 주워 내미는 기장을 건네받았다. 임유현은 마른 가지처럼 앙상하여 군인이라기보다 학자처럼 보였다. 정윤환은 반듯하게 예를 취한 후 최대한 정중하게 임유현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임유현은,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간부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정윤환을 빤히 보았다.

“정성민과 사촌 지간 아니던가?”

망했다. 숨이 탁 막혔다. 정윤환이 대답하지 않자, 임유현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간부 중 하나가 그렇다고 대신 대답했다.

“상심이 크겠군.”

임유현의 손이 거미처럼 뻗어 오더니 정윤환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러고는 스쳐 지나갔다. 뚜벅뚜벅 군화 소리 사이로 따라붙는 서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김서혁은 임유현보다 나이는 한참 젊었지만 순식간에 성장하여 벌써 총사령관 자리를 위협하고 있었다. 김서혁이 아직도 임유현을 밀어내지 못한 이유는, 순전히 나이 말고는 이유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고로 김서혁이 직접 데려온, 그것도 유망한 기대주인 정윤환을 보는 임유현 측의 시선은 곱지 못했다.

생일 선물 한번 거하게 받네.

비단처럼 매끄럽게, 지루하도록 다디달게 넘어가던 인생에 처음으로 닥친 고난이었다. 여태 무탈하게 지내 왔던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유예된 불행이 집약된 아주 강력한 한 방이었다. 반란군과 엮이면 삼대가 무사치 못했다. 그 집 마당 풀 한 포기까지 박멸되었다.

다음 날, 푸른 테 제5팀은 해체되었다. 리더를 잃은 팀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다른 팀으로 흡수되었다. 그중 이수연은 본부에서 한참 떨어진 현장으로 배치되었으며, 야간 탐색 중 실종되었다.

정윤환은 제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운에 너무나 골몰한 나머지 탈모가 올 것 같았다. 정성민의 팔에 안겨 옅게 숨이 붙어 있던 작은 여자애가 잔상처럼 꿈에 나타나 잠도 깊이 들지 못했다. 그리 속으로 끙끙 앓자 훈련 성과도 크게 떨어졌다. 무슨 일 있냐는 물음에는 피곤하다고만 답했다. 어디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만한 주제도 아니었고, 늘 자신을 받아 주는 부모님께 어리광을 피울 수는 더욱 없었다. 게다가 부모님 또한 불안에 떨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식이 죽은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비리가 드러나면서 사회적으로 순식간에 매장당하는 형제를 목도하니 혹시 그게 본인들 차례가 될까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윤환은 차마, 사촌 형이 반란군이었다는 말을 뱉지 못했다.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되고 있었다. 다 잘될 거라는 말만 반복했다.

살얼음판처럼 며칠이 이어졌다. 정윤환은 집무실로 오라는 임유현의 전언을 받았다. 불안이 도를 넘자 오히려 초연해졌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었다.

“사촌이 아니더군.”

임유현의 첫마디였다. 정윤환은 발끝만 바라보던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거대한 의자에 파묻히듯 앉은 임유현은 역광에 드리워져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는 가벼웠다.

“너의 친형이던데.”

“……네?”

정윤환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임유현은 바싹 말라 마디가 불거진 손가락으로 톡톡 가볍게 책상을 내리쳤다.

“네가 친아버지라 믿고 있는, 정선재 의원 내외는 불임이지. 아이를 갖지 못해. 그에 반해 정언재 병원장에겐 아들이 둘 있었고. 형이 동생의 둘째를 맡아 기르기로 한 거지. 동조자를 낳으면 그 가정에 정부의 혜택이 상당하니까 나누어 가진 모양이야. 흔한 일이지. 본인만 모를 뿐.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가?”

시야가 어지러웠다. 정윤환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두통 탓인지, 바닥의 복잡한 문양들이 으스스하게 들고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정윤환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노력했다.

“메모리 봤나?”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정윤환은 어깨를 폈다. 상대는 정윤환이 모르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반면에 정윤환은 아는 것이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의 무지를 얼마나 확실히 설득시킬 것이냐.

“봤습니다.”

“어디서 어디까지?”

정윤환은 기억나는 전부를 말했다. 시체 더미. 작은 여자애. 라벨. 정성민이 다른 누군가와 주고받았던 대화. 자신의 짐작은 섞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덧붙였다. 내용에 대해 전혀 모르고 메모리만 전달받은 것이라고. 이수연의 그런 당혹스러운 행동에 그냥 돌아 나온 것은 복도의 CCTV를 살피면 알 수 있다고. 고로 나는 관계가 없다고.

임유현이 평온하게 말했다.

“명단에는 네 이름이 있던데.”

명단? 무슨 명단? 정윤환은 말문이 탁 막혔다. 작정하고 자신을 반란군으로 꾸며 내려는 세력이 있는지, 아니면 임유현이 자신을 그리 몰아가려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발끝만 잘못 디뎌도 바로 처형이었다. 이를 악물고 띄엄띄엄 말했다.

“저는, 정말로, 모르는 일…….”

“정말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네. 이 늙은이가 갈수록 눈이 어두워져 당최 알 수가 있어야지. 그렇다면 자네가 내게 보여 줘야 하지 않겠나. 그 모른다는 말만 반복할 것이 아니라.”

“제 속이라도 까뒤집어 보여 드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만…….”

“좋은 자세네. 그럼 흰 칼날 프로젝트의 핵심 설계를 자네가 빼 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무슨 프로젝트 말씀이십니까?”

“흰 칼날 프로젝트. 자넨 정말 모르는 척하는 데에 도가 텄어. 그렇지? 그렇기에 지금까지 모두를 속였겠지만.”

“아닙니다, 총사령관님. 저는 정말로…….”

“자네가 진짜 반란군이라면 흰 칼날 프로젝트에 당연히 참가했겠지? 그 대단한 설계 실력을 그놈들이 가만히 묵혔을 리가 없어. 또한, 설사 자네가 결백하여 충직한 도시연합군이라 하더라도, 자네 친형이 반란군이었음은 자네 또한 인정하지 않았는가. 죄를 저지른 정성민이 스스로 편해지고자 목숨을 끊어 버렸으니 남은 가족이 책임져야 하지 않겠나. 나는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어. 중앙병원장 자리에서 정언재를 완전히 내몰 것인가, 아니면 회생의 기회를 줄 것인가에 대해. 나이가 들면 깜박깜박하거든. 사리 판단도 흐리고 말이야. 자네가 분명히 해 주면 좋겠어. 젊고 유능한 자네가.”

임유현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책상에서 은색으로 반짝이는 작은 메모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버석거리는 낙엽처럼 다가왔다. 역광이 가시면서 그의 낯이 드러났다. 그는 자애롭게 웃고 있었다.

“이건 총사령관인 내가 직접 지시하는 임무이자, 누명을 벗을 기회 혹은 타락에서 구원받을 계기가 될 것이니…….”

정윤환은 손을 내밀었다. 임유현이 엄지와 검지로 정윤환의 손바닥에 메모리를 떨어뜨렸다. 메모리가 어찌나 차갑던지, 손바닥이 꿰뚫리는 것만 같았다. 어깨를 움찔했다.

“……여기에 잘 담아 오게. 기한은 따로 주지 않아. 자네 양심에 맡기겠네. 하지만 저대로 두면 자네 진짜 친부모는 완전히 밑바닥으로 내려앉을 거야. 그때는 아무리 나라도 손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르지. 자네 형이 그랬던 것처럼.”

남들 아등바등 살아갈 때 한가로이 뒷짐 지고 적당히 재미나 찾던 시절은 그 순간 끝이 났다. 정윤환은 메모리를 꾹 쥐고 그리하겠다고 분명히 대답했다. 최대한 빨리 흰 칼날 프로젝트를 찾아내어 임유현의 메마른 면상에 갖다 바치고, 반드시 그의 손아귀에서 풀려나리라고. 엉망으로 우습게 된 호적은 그때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임유현이 의심하는 것과는 달리, 정윤환은 반란군과 전혀 연이 없었으므로 직접 제 발로 찾아 들어가야 했다. 유일한 접점인 이수연이 실종되었으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해체되어 뿔뿔이 흩어진 푸른 테 제5팀의 팀원들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자연스레 말을 걸었다. 정성민에게 받을 것이 있는데 혹시 맡아 두었느냐고. 형이 죽기 전에 나에 대해 무슨 말을 전하지 않았느냐고. 다들 고개를 저어 당혹스러웠다. 어디 반란군 모집 공고라도 뜨면 당장에 들어갈 텐데. 마지막 팀원까지 허탕으로 끝나자 인생도 끝난 것 같았다.

그날 밤 잠이 오질 않았다. 어쩐지 말랑한 유년 시절을 거쳐 이목구비가 정착되고부터 유독 엄마가 세간의 이목에 예민하더라니. 정윤환이 유명 영화배우인 작은엄마와 판박이라며 주위에서 수군거릴 때마다, 피도 안 섞였는데 무슨 망발이냐며 얼굴이 벌겋던 엄마를 떠올리니 그제야 아귀가 맞았다. 입 딱 다물고 혈연관계를 감춘 부모님에 대한 배신감,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반란군에 몸을 담았는지는 몰라도 남은 사람 고단하게 만드는 형에 대한 분노, 잘나가다 말아먹은 내 인생 어디서부터 살려 나가나 싶은 암담함이 엉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정윤환은 뒤척이다 새벽에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입이 까끌까끌해 배급받은 식사를 그대로 버렸다. 사담을 나누는 동료들과 조금 떨어져서, 영양제만 하나 달랑 들고 쭉쭉 빨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왔다. 김승훈. 낯선 이름이었다. 홀스터 옆에 때 묻은 조종기가 걸쳐져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자판기에 꽂더니 버튼을 눌렀다.

정윤환은 입에 영양제를 문 채 그를 한번 쳐다보고 말았다. 그러다 다시 보았다. 김승훈이 자판기에서 떨어진 캔 음료를 주우면서 오른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수신호. 인터컴이 파괴되고 사방에 적이 있을 때 아군끼리 주고받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오늘. 사출구로부터 4시 방향. 사각지대. 무장해제.

긴장으로 가슴이 꼭 죄었다. 정윤환은 입에 물고 있던 영양제를 마지막으로 당겨 빨고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윤환아, 영양제 내 거 하나 더 먹을래? 딸기맛이라 싫다.”

소연주가 불쑥 다가와 제 영양제를 내밀었다. 정윤환은 그것을 받으며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오늘 임무 있나?”

“별건 아니고, 오후 2시에 제4유적지 정찰. 나랑 이선규랑 당번이야.”

“원래 내 차례 아냐? 나랑 가.”

“어? 됐어. 그냥 훈련실이나 다녀와. 너 요새 컨디션이…….”

“괜찮아. 간만에 몸 좀 풀려고. 너무 처져 있어서.”

정윤환은 본정찰기에 타기 전에 정찰자 명단을 확인했다. 부속 정찰기 조종사 김승훈. 사출구에서 강하하자마자, 정윤환은 인터컴으로 개인 정찰을 선언했다. 소연주는 조금 당황했으나 시간이 훨씬 단축될 거라는 정윤환의 강력한 주장에 그러라고 수락했다. 정윤환은 홀로 4시 방향으로 쭉 달렸다.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부수는 척하면서, 자신을 따라붙어 촬영하는 나노 드론을 파괴했다.

김승훈은 1인용 부속 정찰기를 착륙시켜 놓고, 판판한 날개 위에 앉아 있었다. 총은 정확히 정윤환의 가슴을 향했다.

“정성민이 그렇게 널 영입하겠다고 했는데. 그때는 꿈쩍도 않더니 이제 와서 들쑤시고 다니는 이유가 뭐야.”

김승훈이 차갑게 이어 말했다.

“민폐라는 것 모르나? 네가 남은 팀원들에게 접근해서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면 아무 죄도 없는 그들이 군으로부터 의심받을 수 있어.”

정윤환은 제 총을 멀찌감치 던지고 두 손을 든 채, 천천히 그에게 걸어갔다. 속이 착잡했다. 반란군은 끊임없이 정성민에게 정윤환을 꾀어내라고 압박을 넣었고, 정성민은 그리하겠다고 말만 해 놓고 정작 정윤환에게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어쨌거나 이렇게 제 발로 들어오게 되었네. 형이 보고 있다면 뭐라고 하려나. 정윤환은 해사한 미소를 지어 올렸다.

“제가 워낙 신중하게 고민하다 보니 반란군 가입 절차에 대해 형도 정확히 얘기해 주지를 않더라고요. 하지만 명단에는 들어가 있을 텐데요.”

지레짐작과 임유현에게 주워들은 부스러기를 마구 조합해서 던졌다. 저쪽에서 헛소리하지 말라고 하면, ‘제가 잘못 알았나 봅니다.’ 바로 꼬리를 내릴 작정이었으나, 김승훈은 정곡을 찔린 듯 눈을 찌푸렸다.

“대기 명단에는 들어 있더군. 하지만 네 의사 없이 간부 중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집어넣었다는 의견이 우세해서, 네가 직접 오기 전까진 보류하기로 했다. 그런데 네가 요령 없이 다른 무고한 사람들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것 같아 내가 먼저 접근한 거야.”

“까다로우셔라. 제가 어디 가서 찬밥 신세 당할 사람은 아니거든요. 물론 아시겠지만.”

“넌 임유현의 사람 아닌가?”

“씨……, 아니, 너무 화가 나서 욕이 다 나오려 하네. 섭섭한데요. 전 엄연히 김서혁 사람입니다. 대세를 알아보는 제 안목을 그렇게 무시하시나요.”

“김서혁 사람인 척하면서 임유현에게 정보를 물어다 주는 놈들이 많아. 너도 며칠 전에 임유현의 집무실에서 그와 일대일로 대면하지 않았나?”

“그럼 사촌이 반란군으로 찍혀 자살을 가장한 타살을 당했는데 혈육인 제가 안 불려 가고 남아나나요? 제 머리통이 아직도 붙어 있어 대화가 가능한 것에 감사하셔야 할 텐데요.”

“명단은 명단일 뿐이야. 높으셔서 현장을 모르는 간부들의 조언이지. 결정은 우리가 한다. 네 형이 살아 있을 때는 우릴 없는 사람 취급하더니 이제 와서 접근하는 이유가 뭐야? 네 첫 전투 때 우리 쪽이 얼마나 죽어 나갔는지 알아? 다 네가 죽인 것 아닌가?”

아차. 정윤환은 제 옷깃에 달린 기장을 당장에 떼어 내서 팽개치려다가 너무 과장하는 것 같아 그러지는 않기로 했다.

“말했잖아요. 신중하게 고민했다고. 형이 맡았던 자리에, 나 넣어 줘요.”

김승훈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가 차갑게 대꾸했다.

“정성민이 무슨 임무를 맡았는지는 알고 하는 소린가?”

“흰 칼날 프로젝트?”

무시무시한 침묵이 이어졌다. 김승훈의 서슬 퍼런 기색에 눌려 정윤환은 하마터면 시선을 피할 뻔했다.

“너 그게 뭔지나 알고…….”

“몰라요. 형이 맡았던 임무 아니었나? 자주 들어서 형이 진행하는 걸로 알고 있었네요. 뭐, 아니라도 상관없어요. 그냥 형이 맡았던 일이면 돼요. 나도 거기서 일하게 해 줘요.”

“갑자기 왜 심경의 변화가…….”

“갑자기. 그렇죠. 저도 후회합니다. 저도 형이 갑자기 그렇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요.”

정윤환은 해사하던 미소를 싹 지웠다. 연기할 필요는 없었다. 임유현의 그 뻔뻔한 낯짝을 떠올리기만 해도 충분했다. 정윤환의 표정이 삽시간에 뒤집히는 것을 목도한 김승훈은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네 형은 좋은 사람이었어.”

댁한테나 좋은 사람이었겠지. 정윤환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무리 친형이라 해도 엮인 인연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 데면데면했다. 1년에 한두 번 명절 때나 보았으며, 군에 들어와서도 드문드문 오다가다 눈인사 정도였다. 밥 한 끼 함께 먹자는 말은 언제나 빈말로 그쳤다. 그와 가장 길게 나눈 대화는 다름 아닌 그 빌어먹을 메모리를 전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였다. 그때만 떠올리면 치가 떨렸다. 잘살고 있던 나를 한순간에 지옥으로 끌어내렸으니. 반드시 재기하고 만다.

“이제 와서 이런 부탁 죄송합니다만, 저는 여태까지 반란군의 사상에는 관심 없었습니다. 흥미가 있었다면 진즉 들어왔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형이 하고 있던 일은 꼭 제 손으로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형이 목숨을 걸면서까지 했던 일이라면 분명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부터 배워 가고 싶습니다. 제게 남겨진 유산이라고 생각하면서요. 사실 집안 사정으로 형과는 대외적으로 친하게 지내지 못했지만, 사실, 아시지요? 저는 형이 정말로…….”

밑천이 떨어져 말끝을 뭉개 보았다. 시선을 자연스레 피하고 고개를 숙였더니, 김승훈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오늘 복귀하고 나면 지령이 하나 전달될 거다. 수행 실적을 보고 다음 주 정찰 때 다시 얘기해 보지.”

그 후로 거의 3개월을 꼬박 바쳤다. 위치는 계속 바뀌었다. 주로 제3유적지나 제4유적지 변두리였다. 정윤환은 신뢰를 얻기 위해 가타부타 불평 않고 사람 놀리듯 수시로 변경되는 좌표를 성실히 찍으며, 주어지는 간단한 일들을 수행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정성민은 반란군에서 그렇게 요직은 아니었다. 그가 맡은 일은 주로 도시연합군의 루트를 정리하여 다음 동료에게 전달하는 단순한 업무였다. 특별한 능력을 요한다거나, 철저한 기밀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많았기 때문이다. 정윤환은 의외로 상당한 숫자가 도시연합군에서 반란군으로, 혹은 그 반대로 정보를 나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조직적인지 마치 협력 업체 같았다.

어쨌든 정윤환은 모든 지령들을 수월하게 처리했다. 남는 시간에는 형이 남겨 두고 간 메모들을 뒤적였다. 처음에는 반란군들이 워낙 정윤환에 대한 불신의 눈초리를 드러냈기 때문에, 형과의 추억을 팔며 조금이라도 경계심을 늦추기 위해서 시작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정윤환이 그 노트에서 미처 몰랐던 형의 재능을 발견하며, 그 보여 주기 위한 행동들은 곧 습관이 되었다. 형은 글씨를 매우 아름답게 썼다. 어떤 것들은 너무나 정교하여 예술 작품 같았다. 그리고 자신만의 신념이 또렷했다. 그것은 도시연합에서 떠먹여 주는 사상만을 납죽납죽 받아먹으며 숙고라고는 한 톨도 없던 정윤환의 특징 없는 세계를 조금씩 허물었다.

……우리는 정보의 배분에서 일어나는 계획적인 차별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도시연합 중앙학교의 모의 전투실에서 구현되는 가상현실을 떠올려 보라. 동조자가 아닌 일반학교에서 이뤄지고 있는 수업에서는 그런 기술은 볼 수 없다. 동조자 출신의 한 일반학교 교사가 역사 수업을 할 때 가상현실을 구현하고 싶다고 모금 활동을 시작하자 도시연합은 그를 반란군으로 몰아 처형했다. 도시연합은 고급 기술을 손에 꽉 쥐고 동조자를 비롯한 사회 기득권에 한하여 집중적으로 풀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유적지에 묻힌 옛 기술을 발굴하러 가겠다고 시민들의 세금을 걷고 저임금 노동자들을 사해로 끌고 가나, 그곳에서 건져지는 고대의 아름다운 기술은 결국 어디에 쓰이고 있는가. 정보는 공유되지 못하고 고여 있다…….

정윤환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은 메모를 찢어 간직하였다가, 군의 기숙사에서 잠을 청할 때 여러 번 읽어 보곤 했다. 마지막엔 꼭 태워 없앴다. 어떤 글귀는 마음을 할퀴어 차마 태우기 아까울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암기했다. 여태 무언가를 이리 열심히 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용의 자궁은 늙어 가고 있다. 용 연구소에서 생산되는 알의 양은 매년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 도시연합에서 아무리 수치를 조작한다 하더라도, 용의 자궁으로 세워진 제5도시의 노동자들의 일감이 줄어드는 것이 그 증거다. 그렇다면 쇠락하는 것은 용의 자궁뿐인가. 도시연합은 용이 영원히 산다고 주장하나 정확한 과학적 근거는 없다. 용은 어쩌면 천천히 죽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용은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수명이 압도적으로 길 뿐이고, 이제 그 질긴 수명이 다하고 있으며, 도시연합이 용의 죽음으로 인한 인류의 종말을 함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새 용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도시연합이 제5도시를 통제하고 생산되는 모든 알을 기록 관리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새로운 시도가 있겠는가. 용 연구소의 많은 연구원이 새끼 용을 철저하게 관리하나 모두 성체가 되기 전에 죽어 버린다. 그 이유는 아직도 모른다. 제국시대에는 달랐다. 도시연합은 그 기록들이 거짓이라 주장하지만, 도시연합 초기만 하더라도 사해에는 용의 뼈나 무너진 둥지 등 많은 흔적이 실재했다. 도시연합에 의해 열람이 금지된 기록에 의하면 제국시대 말기에 성체가 된 용이 세 마리, 새끼 용은 두 마리였다. 이 희귀한 짐승은 아주 오래 살고 당연하게 죽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여덟 개로 찢기고 심장을 뺏긴 채 기계적으로 알만 낳는, 느리게 죽어 가는 검고 초라한 용 한 마리뿐이다. 그리고 아무런 근거 없이 도시가 영원히 건재할 것이라고 장담하는 도시연합이 있다…….

정윤환은 그 뒤부터, 모함을 타고 이동할 때 창가에 붙어 밖을 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예전 같으면 전투 영상을 돌려 보거나 낮잠을 잤겠지만, 이제 그럴 수가 없었다. 정윤환은 특히 부모님이 계시고, 본인이 나고 자랐으며, 도시연합과 도시연합군, 도시연합 중앙학교가 동시에 위치한 제1도시를 눈여겨보곤 했다.

까마득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제1도시는 황량한 사해에 박힌 은색 보석처럼 휘황하게 빛났다. 도시의 겉을 빙 두른 견고한 벽과 그 안에 계획적으로 설계된 건물과 도로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아름답게 역동했다. 도시는 건설되고 100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건재했다. 쇠락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만큼 아름다웠으나 어딘가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정찰은 왜 하는 거야? 아무것도 없는데.”

하루는 모함에서 총을 점검받고 있었는데, 불쑥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정윤환은 새까만 장갑을 끼고 단추를 잠그면서 중얼거렸다.

“반란군은 우리를 먼저 공격하지도 않는데 군인이 이렇게 많이 필요한가? 동조자들은 왜 다들 도시연합 중앙학교를 거쳐 군으로 오고 싶어 하는 거야?”

순간 묘한 침묵이 찾아와서 정윤환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거 너무 위험한 발언인가. 핏기가 싹 가시는데, 옆에서 이선규가 장난스럽게 정윤환의 등을 툭 치며 말했다.

“월급 많고 신분 보장되고. 일단 제복이 멋지잖아. 그거면 됐지. 여기보다 돈 많이 주는 데 아냐? 가르쳐 줘. 그럼 나도 거기로 갈란다.”

다들 피식 웃었다. 정윤환도 하하 웃었으나 목덜미가 차게 식어 있었다. 힐끗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김서혁과 마주쳤다. 그는 코트를 걸치면서 정윤환을 보고 있었다. 정윤환은 그때까지도 김서혁에게 이렇다 할 칭찬 한마디 못 들어 본 상태였다. 그렇게 군에 들어오라고 수시로 집을 드나들어 부모님을 설득하더니, 막상 군인이 되어 활약하는데도 김서혁은 정윤환을 본체만체했다. 김서혁을 리더로 두고 뛴다고는 하나 평소에는 눈도 잘 안 마주치는데, 하필이면 이런 헛소리를 할 때. 정윤환은 짐짓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고는 이를 악물었다. 미쳤어, 정윤환. 조심 좀 해라.

“야, 정윤환. 너 요새…….”

이선규는 더럽게 눈치가 빨랐다. 그의 기민한 상황 판단은 언제나 거기서 나오곤 했다. 정윤환은 방어하듯 이선규를 바라보았다. 이선규는 주위를 한 차례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상한 책 읽고 그러는 거 아니지?”

“이상한 책 뭐? 내가 형인 줄 알아?”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했다. 이선규는 주의 깊게 정윤환을 보았다. 표정이 진지했다.

“우리는 반란군과 최전선에서 맞붙으니까 그들의 사상이 많이 흘러들어 와. 나도 몇 번 접한 적이 있어. 막 솔깃할 때도 있지. 인정해. 그도 그런 것이 꽤 그럴듯하거든. 사람을 꾀어다가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당연히 말을 잘해야 하지 않겠냐? 그런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 해. 이게 진짜인가 가짜인가 고민하는 순간, 너는 중심을 잃어버려. 우린 매일 생사를 달리해. 사해는 위험해. 굳이 전투가 아니더라도 괴물이 있어. 멀쩡한 정신으로 있어도 목숨이 오락가락하는데, 구름처럼 붕 떠서 철학자 노릇 하면 너 저세상 가는 거 금방이야. 호기심에 발 담갔다가 큰일 난다. 중심 잘 잡아.”

“……하지만 진실은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정윤환의 대답에, 이선규는 정말로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상태가 심각하네.’ 하고 중얼거리더니, 정윤환의 팔을 우악스럽게 붙잡아 사출구에서 떨어졌다.

“정윤환, 중요한 건 진실을 밝히느냐 아니냐가 아니야. 정말로 중요한 건, 진실이든 거짓이든 네 자신과 네 주변이 감당할 수 있느냐, 그것뿐이야. 본인이 책임지지 못할 진실로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본다면 그게 옳은 거야? 어쨌든 지금은, 우리가 정의야. 그렇지? 너는 내 동료고. 우린 안정적인 직장이 있고, 많은 월급이 나오고, 남들은 만져 보지도 못하는 제복을 입어. 거짓이라 하더라도. 그게 네가 알아야 할 사실이야. 다른 것은 필요 없어. 아무것도. 내가 비겁해 보이겠지만…….”

이선규는 빠르게 말을 맺었다.

“……한번 그쪽 사상으로 넘어가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어. 경험자가 하는 말이니, 잘 들어.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이선규의 필사적인 조언은 정윤환에게 그대로 먹혔다. 정윤환은 그동안 형의 아름다운 메모들에 마음을 빼앗기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괴로웠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알게 되니 무엇 하나 마음 편한 것이 없었다. 거기다 본격적으로 정윤환을 신뢰하게 된 반란군의 태도 변화도 그의 부담에 크게 한몫하고 있었다. 이제 정윤환은 제3유적지 지하의 반란군 본부까지 드나드는 수준이었다. 연합군 제복을 입고 지하도를 걷고 있으면, 형이 정말 자살한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곤 했다. 도시연합에 발을 붙이면서도 마음은 반란군에 둔다는 것은 때때로 자해처럼 고통스러웠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이상을 기웃대는 자신이 끔찍했으므로.

그래서 정윤환은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마침 신이 도운 것인지, 그에게도 기회가 왔다.

유은우와의 첫 만남은, 아니다, 그것은 목격에 가까웠다.

“네가 그토록 바라던 흰 칼날 프로젝트.”

거대한 유리 기둥이었다. 공기 방울이 보글보글 떠도는 유리 기둥 속에 많아 봤자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희고 얇은 옷만 걸친 채 나붓이 떠 있었다. 두 눈은 잠긴 듯 감겨 있었고, 입은 조금 벌어져 있었다. 머리칼이 연약한 수중식물처럼 나부꼈다.

“흰 칼날 프로젝트는 이가연이 고안했어. 그녀는 전 반란군 수장 유태헌의 아내였는데, 난민들이 낳은 어린 동조자를 도시연합에 빼앗기느니 우리가 활용하자고 제안했지. 인격을 삭제시키고 전투력을 극대화해서 살아 있는 병기로 만드는 게 골자야. 여태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어. 늘 문턱까지 갔다가 엎어지곤 해. 이 실험체도 그 실패작 중 하나야.”

김승훈의 말에 정윤환은 멍하니 기억을 헤집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유은우……? 확실치 않았다. 그러나 나이만은 또렷하게 기억났다. 충격적으로 어렸으니까. 4년 전, 열 살이었으니까. 그럼 지금은 열넷. 그러고 보니 그때 동영상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자라 있었다.

“버리려던 실패작이긴 한데 너 시험 삼아 써 보라고 내가 일단 폐기 물품에서 빼놨어. 동조율은 100인데 설계 난독증이야. 프로그램은 돌아가는데 실전에서 버벅거려서 쓸 수가 없어. 그래도 가상으로는 돌아가니까 너 손도 풀 겸 한번 써 보고 그 뒤에 진짜 귀한 실험체 작업 들어가 보자.”

속에서 분이 치밀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형이 구해 온 애예요. 메모리에서 봤어요.”

김승훈이 미간을 좁혔다.

“메모리? 그 메모리는 지금 어디 있어?”

“이수연이라고 군인이 가져갔는데 그 사람 실종되었어요.”

김승훈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실험체가 실패하면 두 가지 경로로 처분해. 팔거나, 갈아서 원료로 쓰거나. 어쨌든 동조자는 귀한 자원이니까 땅에 그냥 묻지는 않아. 이 실험체는 그래도 겉은 꽤 멀쩡한 편이라 도시연합에 팔았었어. 그런데 하필 정성민 팀이 도시연합 인신매매 함선을 급습하는 바람에 일이 우습게 되어 버렸지. 도시연합이 어린 동조자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가스를 살포한 뒤 도주했는데, 그 속에서 얘만 간신히 숨이 붙어 있었던 모양이야. 정성민은 얘를 다시 데려와서 기계를 빼고 살려 보자고 제안했지만, 한번 삽입한 기계는 제거하기 어려워. 그런 정교한 작업은 제1도시 중앙병원 의료진이나 가능하겠지. 이미 삽입해 버린 거 어쩔 수 없어. 최대한 쓰다가 버리는 거지. 정성민만 헛수고했어. 원래 그런 놈이지만.”

“그럼 도시연합이랑 다를 게 뭡니까?”

김승훈의 눈에 광채가 돌았다.

“뭐가 다르냐고? 그걸 질문이라고 해? 목표가 달라. 도시연합은 우릴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아. 하지만 우리 반란군은 인류의 화합을 꿈꾼다. 도시연합은 용의 성체가 생기면 도시를 확장하는 데 쓰겠지만, 우리는 신도시를 건설해 난민을 수용할 거야.”

같은 길을 걸으면서 목표가 다르다고. 정윤환은 한숨을 삼켰다. 결국 말마디가 기어 나왔다. 어쩔 수 없이 날카로웠다.

“예전에 동영상에서 봤을 때보다 좀 더 자란 것처럼 보이는데…….”

“지금도 자라고 있지. 그러나 살아 있는 건 아니다. 거의 죽었다고 보면 돼. 시체나 다름없지. 오해는 말길 바란다.”

거의? 정윤환은 입술 안쪽 살을 자근자근 씹었다. 거의? 웃기지도 않았다. 이제야 이 지긋지긋한 반란군을 미련 없이 뜨겠구나.

“네가 할 일은 이 여자애한테 삽입된 기계를 구동시키는 거야. 설계 난독증이라 그런지 설계가 조금만 거칠어도 먹히지가 않아. 패턴들을 정교하게 쪼개서 피를 돌리듯 빠르게 집어넣어야 하는데 그게 너무 어려워. 그래도 넌 설계 꽤 하니까 연습차 한번 써 봐. 너덜해지면 폐기 처분실 직원 불러서 가져가라고 해. 새 실험체 줄게. 그리고 이거 금 갔어.”

김승훈이 턱짓으로 유리 기둥을 가리켰다. 아래쪽에 실금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다.

“지금 실험체가 워낙 많아서 기둥이 모자라 옮기질 못했어. 안 깨지게 조심하고. 이 연구실은 이제 네가 써도 좋아.”

“프로그램은요? 그래도 일단 기본으로 짜 둔 설계 틀은 있을 거잖아요.”

“이쪽 노트북에. 암호 알려 줄게, 이리 와서 앉아 봐. 오래 걸릴 테니까. 메모할래?”

정윤환은 눈에 불을 켜고 그 모든 과정을 완벽하게 숙지했다. 김승훈으로부터 모든 설명이 끝났을 때는 자정이 넘어 있었다. 이제 그만 숙소로 들어가 자라는 김승훈의 걱정에, 정윤환은 조금만 더 보고 가겠다고 넘치는 열정을 가장했다. 김승훈이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코트 주머니에서 메모리를 꺼냈다. 임유현으로부터 건네받은 지 무려 반년이 지나 있었다. 그동안 정윤환이 다른 정보들을 끊임없이 물어다 주지 않았다면 집안은 폭삭 망했을 게 분명했다.

설계 틀은 무거워서 메모리로 옮기기까지 두 시간이나 걸렸다. 정윤환은 지쳐 졸다가 완료되었다는 신호음에 겨우 깨어났다. 벗어 두었던 제복 코트를 집어 들어 걸쳤다. 메모리를 빼는데 손이 헛돌아 바닥으로 톡 떨어졌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윤환은 황급히 바닥으로 납작 엎드렸다. 책상 밑을 더듬는데 툭 하고 옆을 잘못 치는 바람에 책이 위태롭게 쌓여 있던 의자가 쓰러졌다. 그 바람에 가까이 있던 바퀴 달린 실험대가 훅 밀려 유리 기둥에 쾅 부딪혔다. 실금이 우두두둑 찢겨 올라가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어어, 메모리.

유리 기둥 앞에, 그리 찾아 헤매던 메모리가 반짝반짝 놓여 있었다. 정윤환이 정신없이 달려가 메모리를 움켜쥐는 것과 유리 기둥이 산산이 부서져 터지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정윤환은 바닥으로 넘어지면서도 왼손으로 메모리를 단단히 움켜쥐고 유리 기둥에서 쏟아져 나오는 끔찍한 액체가 닿지 않도록 손을 높이 쳐드는 데에 성공했다. 오른손으로는 유리 조각과 액체 세례를 피하고자 얼굴을 가렸지만 그리 효과는 없었다. 품으로 묵직한 것이 확 떨어져 내렸다. 역한 소독약 냄새가 치밀었다.

파지직, 전자기기들이 액체를 뒤집어쓰고 오작동을 일으키며 꺼졌다. 쏟아져 나온 푸르스름한 액체는 사방으로 번지다가 이내 멈춰 섰다. 정윤환은 왼손을 움직여 보았다. 손아귀 안은 건조했다. 다행스럽게도 메모리는 안전했다. 온몸은 홀딱 젖었지만.

정윤환은 메모리를 쥐지 않은 오른손 손가락을 하나만 펼쳐서, 자신의 몸 위에 겹쳐져 있는 유은우의 어깨를 쭉 밀어 보았다. 시체랑 포옹 비슷한 걸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다 돋았다.

아, 기분 잡치게.

그래도 메모리에 정보는 담았으니까. 좋은 일에는 마가 끼는 법.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썼으나, 의외로 시체는 잘 밀려나지 않았다. 정윤환은 손바닥으로 유은우의 어깨를 확 밀어붙였다.

콜록.

정윤환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했다.

죽었다며? 시체라며?

유은우가 한 차례 바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정윤환의 제복 코트 사이를 헤치며 가슴팍에 제 뺨을 꼭 가져다 대었다.

정윤환이 새파랗게 얼어붙어 있는 동안, 유은우는 얕은 기침을 몇 번 더 뱉고, 정윤환의 가슴 위로 뺨을 비볐다. 작은 새가 자기 전에 부리로 깃을 정리하듯 나름대로 열심이었다. 그리 한참을 사부작대더니, 유은우는 마침내 잠들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정윤환의 제복 코트 양 자락을 꼭 붙잡은 채였다.

정윤환은 꼼짝도 못했다.

어릴 때 아버지가 희고 작은 강아지를 한 마리 데려온 적이 있었다. 자연스레 들어서 안고 쓰다듬는 부모님과는 달리, 정윤환은 딱 한 번 시도만 해 보고 그 뒤로는 손도 못 대고 바라만 봤다. 막 태어나 하얗게 보송보송한 강아지는 손을 대자마자 심장이 팔딱팔딱 뛰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져 겁이 났다. 혹시나 잘못 잡았다가 터져서 죽어 버릴까 봐.

정윤환은 엉거주춤 메모리를 쥐고 있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위에서 새근새근 자는 여자애는 안쓰러울 정도로 가볍고, 따뜻했으며, 쌉쌀한 소독약 냄새가 났고, 살아 있었다.

맙소사. 이걸 어째.

“으아, 이게 다 뭐야.”

정윤환은 화들짝 깨어났다. 눈을 떴다가, 아침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바람에 다시 눈을 꾹 감았다. 반사적으로 유은우를 끌어당겨 안았다. 도톰한 담요로 돌돌 말아 놓은 작은 여자아이는 뜻 모를 말을 웅얼거리면서 필사적으로 정윤환에게 달라붙었다. 턱 아래로 파고드는 정수리가 생경하게 보드라워,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개판이네.”

정윤환은 튕기듯 일어났다. 그 바람에 유은우가 간이침대에서 가볍게 미끄러졌다. 황급히 끌어안아 당겼다. 유은우는 그 와중에도 정윤환의 제복 재킷을 생명줄처럼 꼭 붙들고 있었다. 정윤환은 새벽부터 수없이 반복한 짓을 재차 시도했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유은우의 손을 붙잡고 바깥으로 살짝 당겨 보았다. 떨어지기는커녕 유은우의 손아귀 힘만 더 강해지면서 제복이 아래로 꽉 당겨졌다. 정윤환은 차마 매몰차게 하지 못하고 고개만 들었다. 유은우에게 꼼짝없이 붙들려 허리를 굽힌 엉거주춤한 자세였지만, 눈빛은 사나웠다.

“죽었다며? 시체라며? 살아 있는 사람 가지고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지금 얘 상태 좀 봐. 사람한테 매달려서. 너희들이 도시연합 그 쓰레기들이랑 다를 게 뭐야?”

그러나 강진욱은 정윤환을 보고 있지 않았다. 정윤환이 반란군에서 말을 트고 지내는 유일한 또래인 그는, 팔짱을 낀 채 지저분하게 젖어 엉망인 연구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강진욱이 신경질적으로 실험대를 끌어당기더니 그 위를 손으로 대강 쓸어 냈다. 그러고는 스크린이 먹통이 된 설계 입력기, 전원이 나간 산소 공급기, 회생이 불가능해 보이는 노트북을 차례로 실었다.

“김승훈 연구사님이 너한테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어? 아아, 이거 다 어떡할 거야. 비싼 건데 다 망가졌어.”

“……지금 그게 중요해?”

정윤환이 멍하니 되물었다. 강진욱은 혀를 차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정윤환이 뭘 어떻게 할 새도 없이, 강진욱이 유은우의 손목을 잡고 거칠게 정윤환에게서 떼어 냈다. 유은우가 훅 떨어져 나가자 빈 품으로 서늘한 아침 공기가 들이쳐, 정윤환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강진욱은 유은우를 대충, 정말로 대충 틀어쥐고, 이미 기계들이 실린 실험대의 빈 공간에 팽개치듯 실었다.

“나도 처음에 실험체를 지정받았을 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어. 인간인지 아닌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숨을 쉬고 심장도 뛰고 가끔 눈도 뜨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새벽에 헛소리도 중얼거리니까 이거 살아 있는 건가 싶었어. 그런데 또 섭식이나 배설은 전혀 없고 하루 종일 잠만 자니까 죽은 건가 싶고. 당최 이런 상태의 무언가를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그러니까, 기계에 침식되었음에도 썩어 들어가지 않고 희박한 확률로 생이 유지되는 인간 말이야. 일종의 식물인간인데, 이게 또 겉으로는 너무 멀쩡해 보여서 다루는 연구원 미치게 만든단 말이지. 나는 그때 매일 울고, 밤마다 기도했어. 지금은 실험용 쥐 다루듯 아주 능숙하지만. 너 종교는 있냐? 가지는 게 좋아. 이 바닥에서 오래 버티려면.”

정윤환은 이불을 그러쥐었다. 자신의 온기인지 유은우의 온기인지, 아직 따뜻했다.

“악에는 악으로 맞선다. 선은 승자만이 누릴 수 있어. 우린 전쟁 중이야. 한가하게 평화주의자 노릇이나 하고 싶으면 번지수 잘못 찾았어. 하지만 여기 남고 싶다면 우리 방식에 따라. 우리는 반드시 이겨야만 해. 그래야 이 모든 죄가 정당해지니까. 감당 못 하겠으면 지금 나가. 처음에 우리는…….”

강진욱이 딱딱하게 말했다.

“……정말로 기대했어. 태어나자마자 동조율 100. 희망을 품고 돌봤어. 8년을 길렀어. 그런데 설계 난독증이라니 미칠 노릇이지. 우리 연구실 사람들, 이 실험체 얘기만 나와도 치를 떨어. 투자 대비 성과가 하나도 안 나왔어. 너 얘 쓸 거야, 안 쓸 거야?”

“뭐, 뭐라고?”

“너 못 쓰겠으면 원래 계획대로 폐기 처분하고, 쓰겠다면 튼튼한 표본 기둥 하나 주고.”

강진욱이 너무나 대수롭지 않아 보여서 정윤환은 도리어 자신이 이상한가 했다. 정윤환이 멀거니 강진욱을 쳐다만 보자, 강진욱이 설레설레 고개를 젓더니 실험대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연구사님이 워낙 네게 기대가 커서 맡겨 보려고 했는데. 역시 무리였나 보네. 됐어. 신경 쓰지 마. 넌 이 프로젝트에서 빠져. 내가 너 이 일에 안 맞는다고 말해 둘게.”

강진욱이 실험대를 밀었다. 묵직한 바퀴가 바닥에 널브러진 유리 조각을 산산이 부수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정윤환은 빛의 모래처럼 흩어지는 유리를 보면서 자신의 처지를 상기했다.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알량한 동정심을 발휘할 위치인지 아닌지. 답은 뻔했다.

정윤환은 코트 주머니 위로 손을 더듬었다. 딱딱한 메모리가 느껴졌다.

원하는 것은 얻었다. 이제 본래 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형의 메모는 아름다웠으나, 신념으로 삼기엔 위험했다. 그는 겁이 났고, 또 자신이 없었다. 언제나 이 모든 것을 알기 전으로 돌아가기를 맹렬히 기도했다. 임유현에게 이 메모리만 넘기면, 이제 다 끝날 것이다. 그러면 반란군과는 오직 전투에서만 맞붙을 터였다. 그러니 유은우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윤환은 힘주어 말했다.

“놓고 가.”

강진욱이 쭉 밀고 가던 실험대를 멈추었다. 정윤환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가 반문했다.

“뭘? 내가 지금 가져가려고 하는 게 네 가지나 되는데 이중에 뭘 두고 갈까?”

정윤환은 분이 치밀었다. 강진욱은 일부러, 자신은 유은우를 노트북이나 산소 공급기 정도로 생각한다는 것을 피력하고 있었다. 내 눈에는 이 네 가지가 동등하다. 그러니 너도 익숙해지라는.

“기분 좆같으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유은우 놓고 가라고.”

일부러 이름 석 자에 힘을 주었다. 강진욱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거 설마 얘 이름이냐? 가지가지 한다, 정말.”

“나한텐 형 유품이나 다름없어. 놓고 가.”

강진욱이 고개를 돌려 정윤환을 보았다. 시선이 측은했다.

“나는 너의 그 급조된 신념보다, 유약하게 타고난 성정이 염려돼. 우리가 실험체를 굳이 표본 기둥에 보관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 기계장치가 덜 부식된다는 장점도 있지만, 일단 그렇게 넣어 두면 덜 사람 같거든.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몰라도 본명은 잊어버려. 차라리 다른 호칭을 붙여. 나처럼 그냥 실험체 1, 2, 3이라고 부르든가.”

“사람 가르치려 들지 마. 그 빌어먹을 호칭이야 어쨌든, 두고 가. 어차피 버릴 거면 내가 쓰든 옆에 두든 끌어안고 자든 말든 상관없는 거 아냐?”

“겉으로만 뺀들뺀들하지, 성민이 형이랑 똑같네. 속은 유하게 물러 터져서. 그래도 성민이 형은 실험체 끌어안고 자지는 않았다. 변태 아냐?”

“씨발, 너 안 닥쳐?”

정윤환은 낯이 확 달아올랐다. 자신의 품으로 톡 떨어져 안긴 유은우는 너무 작았고, 여렸고, 그럼에도 살아 있었다. 정윤환은 도무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도 모른 채, 아주 조심스럽게 그 작은 생명을 담요로 감싸고 혹여나 체온이 떨어질까 꼭 안고 잤다. 유은우가 자신의 옷자락을 얼마나 필사적으로 잡고 버티는지, 그녀에게 자신이 전부 같았다. 강진욱처럼 무감하게 손을 쳐 낸다는 것은,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함부로 대했다가는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것 같아서.

정윤환은 간이침대에서 일어나, 벗어 뒀던 군화를 황급히 꿰어 신고 실험대로 다가갔다. 유은우는 실험대 위에 몸을 웅크리고 색색 가지런한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정윤환은 어색하게 유은우의 허리 아래로 손을 집어넣다가, 머리와 다리가 힘없이 처지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품에 머리를 꼭 기대 두고 어깨를 잡은 뒤에 무릎 뒤로 손을 넣었다. 엉거주춤 들었다. 유은우가 몸을 뒤척이며 또 옷을 꼭 잡아 왔다. 정윤환은 유은우의 머리가 젖혀져 꺾이지 않도록 조심조심 간이침대로 걸어갔다.

뒤통수에서 강진욱의 혀 차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너 사람 처음 안아 보지.”

집중하느라 욕으로 받아치지도 못하고 정윤환은 유은우를 침대에 조심스레 눕혀 보았다. 그러나 정윤환은 허리를 펴지 못했다. 유은우가 재킷을 꼭 붙들고 도무지 놔주질 않았다. 유은우가 이불에 뺨을 비비듯 몸을 한 차례 뒤척이더니 눈을 나붓이 떴다. 초점이 흐린 동공이 설핏 드러났다가 까무룩 도로 감겼다.

미치겠네.

정윤환은 궁색하게 쪼그려 앉은 뒤, 조심조심 재킷을 벗었다. 뒤에서 이 같잖은 꼴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을 강진욱이 신경 쓰였지만, 차마 조막만 한 손을 강제로 떼어 낼 수 없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렇게 아무나 꼭 붙잡고 놓지도 못하는지 안쓰러웠다. 정윤환은 누가 봐도 우스운 꼴로 겨우겨우 재킷을 벗는 데 성공했다.

“별 지랄을 다 한다.”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죽인다.”

“믿지도 않을걸.”

유황 냄새가 짙게 배고 드문드문 핏자국이 남았으며 사해의 모래가 희게 묻은 지저분한 제복을, 유은우는 제 품으로 꼭 끌어당기고는 아기 새처럼 고개를 파묻었다. 그리고는 깊은 잠으로 빠지듯 사지가 축 늘어졌다.

아오, 내 허리.

정윤환은 신음을 삼키며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뒤를 돌아보니 강진욱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 있었다.

“이름이 뭐라고? 유…….”

“은우.”

“아아. 네가 지었어?”

“미쳤냐. 형이 남긴 메모리에서 봤어.”

“아, 그거 알아. 나도 들었어. 이수연이 실종당하면서 잃어버리지만 않았어도 그걸로 도시연합 한 방 먹일 수 있었다던데. 진짜야?”

“나도 끝까지 안 봐서 몰라. 그런데 메모리로 봤을 땐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어. 난민들이 동조자를 낳는 경우가 많은가 봐? 기초학교 다닐 때는 난민들은 출산이 드문 데다 동조자는 아예 못 낳는다고 배웠는데. 비싼 보호칩을 살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정화 장치를 신체에 달아야 하고, 그러면 생식 능력이 퇴화된다고.”

강진욱은 실험복 주머니에서 약물 케이스를 꺼내며 어깨를 으쓱했다.

“학교 선생들은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만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지. 난민들도 임신하고 아이를 낳아. 동조자 출생 비율은 도시나 사해나 비슷하고. 내가 난민 출신이라 잘 아는데, 네가 배운 건 도시연합이 겁을 주려고 퍼뜨린 헛소문이야. 그들은 용으로 협소한 공간을 만들고 시민들을 가두어 통제하고 싶어 해. 많은 시민이 용의 그림자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와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지. 그나마 사해횡단철도로 이동할 때나 유리창 너머로 사해를 볼 수 있고, 그마저도…….”

“군에서 철저히 관리하고 있어. 이른바 정화 사업. 사해횡단철도 반경 5킬로미터까지 괴물을 제거하고, 기차에 들러붙어 도시로 진입하려는 난민을 막아.”

정윤환이 경험을 말했다. 강진욱이 약물 케이스를 이쪽으로 집어 던졌다. 정윤환은 그것을 가볍게 잡아챘다.

“가지고 있어. 한동안 약물 보기 힘들 거야. 김서혁 그 개새끼가 보급 경로를 다 끊어 놨어. 임유현이랑 따로 놀아서 정보도 잘 안 들어오고, 순식간에 치고 들어왔다가 빠지면서 중요한 맥만 싹 다 잘라 놓는다니까. 하여간에 골칫덩이야. 유명하신 네 상사 말이야.”

강진욱은 농담 반 진담 반이었지만 정윤환은 웃지 않았다. 속으로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그 임무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자신을 백번 칭찬했다. 정윤환은 약물 케이스를 도로 던졌다. 강진욱이 의아하게 그것을 낚아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넌 친정에서 가져오면 되겠구나. 거긴 넘쳐서 썩어 나지?”

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정윤환은 짜증을 섞어 대답했다.

“나 원래 약물 안 쓰는데. 몸이 둔해져서.”

강진욱이 눈을 크게 떴다.

“아예 안 써? 그럼 너 여기 지하 본부로는 어떻게 들어와? 게이트 보안 엄청나지 않아? 그래도 강화제 하나 정도는 빨아야 하는 거 아냐?”

“보호 설계 빽빽하게 입고 속도 높여 들어오면 문제없어.”

“말이야 쉽지. 새삼 대단하네.”

강진욱이 정윤환을 빤히 보았다. 그 경외에 찬 시선이 낯설었다. 한때는 당연한 축복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와 돌이켜 보니 저주나 다름없었다. 도시연합군의 다른 이들처럼 모든 것이 평범하게 적당했더라면.

그럼 임유현의 눈에 띄지 않았을 텐데.

“이게 아닌데…….”

임유현이 중얼거렸다. 정윤환은 발끝에 두고 있던 시선을 확 들어 올렸다. 임유현은 한 손으로는 턱을 괴고, 다른 손으로는 스크린을 툭툭 넘기고 있었다. 마뜩찮은 얼굴이었다. 뭐지? 뭐가 잘못됐나? 가슴이 쿵 차갑게 떨어졌다.

“그리 시간을 질질 끌더니 막상 가져온 것이 쭉정이라. 실망인데.”

그럴 리가 없는데. 정윤환은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최신 정보입니다.”

임유현은 대답 없이 스크린에서 메모리를 뺐다. 정윤환은, 자신이 몇 달 동안 피를 말려 가며 간신히 빼낸 정보가 책상 위로 툭 던져지는 것을 하릴없이 지켜보았다. 임유현이 여위어 마디가 굴곡진 두 손을 모았다. 손끝이 느리게 맞붙었다.

“이건 우리 기술인데.”

“네?”

“반란군은 하나도 발전한 게 없군. 분명히 소문에는…….”

임유현은 따분한 표정이었다.

“……명령 체계를 정교하게 완성했다고 하던데. 심장이 멈추고도 사지를 움직일 수 있게끔. 그게 가능하다고 했어. 호흡도 없고 심장박동도 없어야, 감시체계를 피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자네가 가져온 정보는 구닥다리구먼. 이 정도는 우리도 있어.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반란군에게 흘린 것이지. 완성되어 돌아올 줄 알았는데.”

마치 하청 업체를 부리는 듯한 말투였다. 정윤환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꾹 짓이겼다. 뭔가 크게 잘못 걸린 것 같다는 직감이 왔다. 어쩌면, 영원히 임유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알면서도, 정윤환은 마지막으로 발악하듯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다 쉬어 나왔다.

“그것이 반란군의 흰 칼날 프로젝트의 전부입니다. 제가 연구실에서 직접 빼 온 것입니다. 그 메모리에 나열된 설계와 연구실의 기기들은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총사령관님께서 보시기에 미완성이라 하신다면, 그것은 제가 정보의 일부를 빼돌렸거나 혹은 반란군이 제게 정보를 덜 푼 것이 아니라, 온전히 정말로 그것이 그들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톡 톡 톡. 임유현이 손톱 끝으로 책상을 가볍게 내리쳤다. 그가 냉담하게 말했다.

“시간이 얼마나 더 필요하지?”

“총사령관님, 그게 전부입니다.”

“자네는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 말할 수 있나? 내가 자네에게 내린 지시는 단순히 가져오라는 것이 아니었는데. 정말 사람 피곤하게 하는군. 나가 보게. 다음번엔 좋은 소식 기다리겠네.”

정윤환은 목구멍까지 짓쳐 오르는 불같은 욕설을 삼켰다. 집무실 문을 닫고 기계적으로 복도를 걸었다. 모퉁이를 돌아 벽에 등을 기댔다. 이선규에게 급하게 빌려 입은 제복 재킷은 품이 맞지 않아 어색했고, 유적지에서 군까지 이동하느라 물었던 칩으로 입 안이 헐어 따가웠으며, 시야는 어지러웠다.

‘흰 칼날 프로젝트의 핵심 설계를 자네가 빼 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뱃속 밑바닥부터 들끓었다. 날 이용했구나. 가져오라는 뜻이 아니라, 가서 완성해 오라고. 도시연합의 고귀한 손을 더럽히지 않고, 그러나 끔찍한 기술은 탐이 나서.

정윤환은 이마를 문질렀다. 저도 모르게 수식을 중얼거렸다. 손가락 끝이 움찔거렸다. 머릿속으로는 간밤에 김승훈으로부터 전해 들은 설계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어색하게 끊어진 매듭. 온이 스미기에 너무나 좁았던 공간. 쓸데없이 겹쳐진 설계. 지나치게 낭비되는 패턴.

정윤환의 판단에 더는 개선이 불가능한 프로젝트였다. 지금 임유현에게 넘겨주고 온 메모리가 최대치.

이미 너무나 많은 것들이 누더기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다양한 스타일의 설계자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완성해 나간 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크고 작은 결함을 일으키고 있었다. 차라리 전부 싹 지워 버리고 처음부터 세운다면…….

정윤환은 건조한 두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실험체로 쓰이는 동조자 자체도 문제였다. 설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실험체마다 다르면 수많은 변수가 생긴다. 다른 이가 집어넣은 설계를 자의적으로 속내에서 비틀지 않고 백지처럼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런 매개체만 존재한다면…….

퍼뜩 유은우가 떠올랐다. 설계 난독증. 유은우를 대상으로 설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나 혼자 짜면 어떨까.

……가능할 것 같았다. 틀을 심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정윤환은 숨을 참으며 집무실 문을 노려보았다. 임유현과의 관계를 하루라도 빨리 끊어 내야 했다. 그러니까 비인간적인 행위에 아주 살짝만 발을 담그는 것은, 정당방위다. 자유로워지기 위한. 임유현으로부터. 그리고 임유현만큼이나 감당하기 힘든, 형의 그림자로부터.

정윤환은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생각해, 정윤환. 내가 할 수 있을까?

현재 유은우의 몸에 삽입된 기계에 입력된 설계를 전부 삭제시키고 다시 처음부터 틀을 채워야 한다. 입력 과정에서 유은우는 잦은 발작을 겪을 것이다.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타인의 손을 빌릴 수도 없다. 그렇게 되면 또 실패작일 뿐일 테니까. 모든 과정을 나 혼자서 다 지켜봐야 해…….

유은우가, 내가, 버틸 수 있을까?

정윤환은 문득 피비린내를 느꼈다. 저도 모르게 입술 안쪽의 연한 살을 짓씹고 있었다.

이래도 되나?

안 되지, 당연히. 너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잖아. 끔찍한 죄가 될 거야. 결코 씻을 수 없는. 평생 네 뒤통수에 달라붙어, 새벽마다 네 영혼을 쥐어뜯을 거야.

어차피 죽었잖아. 숨만 쉬고 심장만 뛴다고, 내가 손대지 않는다고 해서 유은우가 회복될 것 같아? 아까 강진욱이 하는 말 들었지? 다들 그렇게 한다잖아. 쓰레기 재활용이야. 뭐 어때.

아까는 그렇게 비인간적이라고 반란군을 욕하더니. 정작 이제 와서 네게 유은우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니, 더한 짓을 저질러도 상관없어진 거지? 유은우라는 특정 실험체에만 듣는 설계를 짠다는 것은, 임유현에게 핵심 설계뿐만 아니라 유은우 그 자체도 고스란히 상납해야 한다는 뜻이야. 너 자신 있어? 아까는 형의 유품이니 어쩌니 저 혼자 잘나서 오만하게 떠들어 대더니.

그럼 어떡할래? 이미 임유현한테 딱 걸린 마당에 군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시골에나 내려갈래? 그럼 네 설계 실력이 가려질 것 같아? 서재희를 봐. 그들은 서재희를 취하듯이 너 또한 귀신같이 찾아낼 거야. 도망 못 가. 기권은 없어. 죽든가 굽히든가 둘 중 하나야.

나는 정말로 하고 싶지 않아. 용서받지 못할 거야.

눈 감고 귀 막고 딱 남들 하는 만큼만 해. 너도 목매달고 죽고 싶어?

벽에 기댄 채 주르륵 주저앉았다. 정윤환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호흡을 가누려 애썼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황급히 재킷 겉주머니를 뒤적였다. 이선규 이름이 쓰인 호흡기가 나왔다. 재킷 안쪽을 더듬었다. 손이 떨리는 바람에 매끄러운 약물 케이스 서너 개가 바닥으로 찰그랑 떨어졌다. 신경안정제를 골라 집었다. 어깨너머로 봐 왔던 대로 호흡기에 끼웠다. 너무나 쉽게 딸깍 소리가 났다.

깊이 빨아들였다. 알싸한 박하맛이 목구멍으로 제법 넘어가는 듯하다가 곧바로 역류했다. 거칠게 기침했다. 필요를 느끼지 못해 적응기를 가지지 않았으므로, 그 서툰 한 모금만으로도 몽롱해졌다. 일말의 양심도 함께 흐려졌다.

할 수 있어. 하자. 해야만 하니까.

돌이켜 보면 얼마나 자만했던가.

오직 유은우의 설계 난독증과 그녀의 몸에 삽입된 기계들, 그리고 정윤환 자신의 설계 실력만 차가운 이성으로 엮어,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

미처 몰랐다.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이후로 자신이 얼마나 수많은 밤을 유은우의 한결같은 온기에 위로받으며 잠들게 될지. 한낱 시체에 의지하게 된 나약한 자신을 깊이 혐오하게 되고, 어떤 미친 연구원이 버려진 실험체를 임신시켰다는 더러운 사건에 지레 겁을 먹고 제 연구실 문을 철저히 잠그게 되며, 유은우와 평범하게 만났으면 어땠을까 수없이 상상하는 치부를 들킬까 두려워 전전긍긍하면서도, 결국 다시 한번 버려진 유은우를 제 손으로 파헤쳐 건져 오리라고는. 그리고 내가 너만은 꼭 빼내 주겠다 맹세하고, 그 직후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되리라고는. 그런 것들은 채 계산하지 못했다.

유은우를 끌어안으면, 온 근육이 이완되어 새까만 세상에 둘만 있는 것 같았다. 부드럽게 잠에 삼켜지고, 악몽 없이 깨어났다.

그것은 너무나 생경한 감각이었기 때문에, 정윤환은 도시연합군과 반란군을 넘나들며 온갖 대화에서 그 목마른 따뜻함의 이름을 찾아야 했다. 하다못해 총도 매일매일 쥐면 손에 익는데, 사람 모양을 한 실험체가 신경 쓰이는 거야 당연하지 않냐. 그런 말을 들으면 안심했다. 아아, 호흡기 잃어버렸어. 기초학교 때부터 쓰던 거라 그거 아니면 싫은데. 정이 들어서. 그런 중얼거림을 들으며 위안 받았다. 이웃이 키우는 강아지를 잠시 맡아 주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되게 귀찮더라. 근데 한 일주일 머물다 돌려보냈는데 자꾸 생각나. 신경 쓰이고. 그새 정이 들었나. 그러면 정윤환은 안달하는 속을 감추고 묻곤 했다.

있잖아. 그런 게 사랑은 아니지?

그럼, 아니지. 사랑이랑은 다르지. 사랑은 두 사람이 대화를 통해 서로 알아 가며 이해하는 것이고, 이건 일방적으로 그냥 정을 주는 거지. 말도 안 통하는데. 대답을 듣고 안도했다.

정윤환에게 사랑이란, 거리마다 넘쳐 하수구로 흘러가는 유행가. 현실에선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사를 잘도 날리는 드라마. 기념일을 외치며 좌판에 널린 싸구려 초콜릿. 개나 소나 한다는 그 진부한 사랑 때문에, 내 결정이 이렇게 흔들릴 리가 없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어야만 한다. 반드시.

정윤환은 열에 들떠 깨어났다.

몸은 오랫동안 늘어져 있던 탓에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겨우 호흡기를 떼어 냈다. 병실의 서늘한 공기가 닿자 정신이 차츰 또렷해졌다.

벽시계는 새벽을 가리키고 있었다. 뻣뻣한 목을 돌려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침대는 헝클어져 비어 있었다. 전원이 꺼진 공급기에는 차트가 걸려 있었고, 유은우 이름이 쓰여 있었다.

정윤환은 손을 들어 나른히 눈가를 문질렀다. 그러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뼈마디와 근육이 굳어 있어 휘청거렸지만, 손으로 뒤를 짚으며 상반신을 지탱했다. 소스라쳐 일어나 앉아, 정윤환은 왼쪽을 보았다.

“……대장.”

김서혁이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는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었다. 도시연합군 제복 위로 드리워진 망토가 창의 커튼과 뒤섞여 푸르스름한 새벽이 미끄러졌다.

“이래서 널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게 무슨…….”

정윤환은 바싹 굳은 채 김서혁을 응시했다. 좋지 않았다. 그의 예감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평소에 자신을 쳐다도 안 보던 김서혁이었다. 그런데 왜? 병문안이라면 낮에 왔어야 했다.

“유은우를 해치려는 이유는 네가 제3유적지에서 빼돌린 그 잔챙이들 때문인가?”

숨이 탁 막혔다. 정윤환은 몸을 뒤로 주춤 물렸다. 머리로는 서랍의 총을 뺄 타이밍을 가늠했다.

김서혁이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이름이 뭐라더라? 한세연 연구관?”

“난 전혀…….”

“모르는 이름이라고? 너는 늘 거짓말에 서툴렀지. 감추는 것에도 소질이 없고. 그때 유은우 이름 지을 때도 넌 티가 났어.”

정윤환은 숨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불을 움켜쥔 손아귀에 땀이 배었다.

“꼬리가 너무 길었어. 넌 유은우에 한해 너무 갈팡질팡했다. 그런데도 여태 내 눈을 속인 걸 보니 임유현이 널 보호해 준 모양이지? 겉으론 내 라인을 타고, 뒤로는 임유현에게 정보를 나르고.”

언젠가 강진욱이 했던 말이 스쳐 갔다. 좋아하는데 좋아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하는 짓마다 일관성이 없어서 도리어 남의 눈에 띄는 거야.

“너는 유은우의 인큐베이터에서 코드도 한번 뽑았었지. 그래 놓고 복도를 서성이다가 다시 돌아가서 꽂은 전적이 있어. 유은우의 기억을 도무지 볼 수가 없어서 아무도 알아챌 수 없었던 것뿐이지, 그 애 기억 속에는 분명 네가 있을 거야. 내 말이 맞지?”

김서혁이 총을 뽑았다. 동시에 정윤환은 몸을 뒤로 빼며 서랍을 확 열어젖혔다. 총은 없었다. 배터리가 분리된 이프뿐이었다.

턱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김서혁의 총구가 정윤환의 턱을 매끄럽게 타고 올라갔다. 시선이 꼼짝없이 맞물렸다.

“그리고 또 하나. 이건 불과 몇 시간 전에 알게 된 건데. 유은우의 총에 혼동 설계를 걸자는 아이디어는 네 머릿속에서 나왔어. 그렇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4년에 걸쳐 나를 아주 감쪽같이 속이고…….”

차가운 총구가 부드럽게 턱 아래를 짓눌렀다.

“……내가 널 어떻게 할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유은우는 5층을 눌렀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벽에 기댔다. 맞은편 거울에 자신이 비춰 보였다.

뺨이, 눈가가, 목덜미가 붉었다. 머리칼 끝은 여전히 젖어 있었다. 덜 말라 축축한 환자복. 서재희 것이 아닌 피 냄새와, 서재희의 파란 냄새가 뒤섞여, 아직도 그와 입을 맞추는 것 같았다.

유은우는 천천히 제 입술을 만졌다. 손가락 끝이 떨렸다.

“내가 방금 너 구해 줬잖아.”

유은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딱 한숨만큼의 간격만 남겨 두고, 서재희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했다. 깊이 젖은, 유난히 까만 눈동자가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통수를 감싸 안은 그의 손아귀는 단단한 벽 같았고, 아랫입술을 스쳐 간 손가락은 이제 턱을 붙들어 고정하고 있었다.

늘 정중하던 서재희는 온데간데없었다. 완전히 삼킬 듯한 기세로 그의 품에 꼭 가두어져, 유은우는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

“싫으면 지금 말해. 계속 그렇게 아무 말도 안 하면…….”

둘은 젖어 있었고, 반쯤 열린 욕실 문 사이로 더운 김이 끼쳐 나왔으며, 창으로는 서늘한 바람이 스미고 있었다.

“……나 너한테 원하는 것 받을래.”

유은우는 가까스로 손을 들었다.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서재희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러나 서재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태 당기면 당기는 대로, 밀면 밀리는 대로, 잡으면 잡혀 주고, 놓으면 떨어졌던 것은, 내가 널 한참 봐준 거였다고 똑똑히 말하는 듯, 그는 유은우의 손길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선배, 나 좋아하지 마요.”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음에도 눈물이 나려 해서, 유은우는 잠시 말을 멈추어야 했다.

“누구 좋아하고 아끼고 그런 거 너무 힘들어서 안 한다면서요. 그런데 왜 나 좋아해요. 감정은 통제할 수 있다면서…….”

“불가능하다고 말한 건 너잖아.”

“선배가 나 좋아하면, 나는 선배 약점이 돼요. 그래도 좋아요? 사람들이 날 미끼로 선배를 마음대로 휘둘러도 좋아요? 왜 이득도 없이 모험하려고 해요. 선배답지 않게 왜 그래요. 왜…….”

“애들이 왜 하나같이 날 좋아하는지 알아? 내가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이야. 상대의 취약한 점을 알아내고 건드리면 알아서 내게 고백해. 네게도 그렇게 할 수 있었어. 네가 처한 상황 이용해서 계획적으로 접근한 뒤에 손쉽게 네 마음 가져올 수도 있었는데.”

서재희의 눈에서 눈물이 똑 떨어졌다. 마음 놓고 울어 본 적도 없는지, 마른 열매처럼 깨끗하게 떨어져, 유은우는 순간 잘못 봤나 했다. 그러나 서재희의 가슴을 필사적으로 밀고 있는 제 손등으로 따뜻하게 떨어져 미끄러지는 물기를 보자, 눈물은 진짜가 되었다.

“그런데도 내가 다 내려놓고 너한테 이렇게 빌고 있잖아. 내게 가장 불리한 방식으로 네게 고백하고 있어. 아무런 계산 없이. 너한테만은 솔직하고 싶어서.”

서재희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유은우는 눈을 감지 않았다. 서재희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차가운 코끝이 유은우의 콧잔등을 스치듯 미끄러졌다. 입술은 여전히 위태로운 틈만 두고 떨어져 있었다.

심장 뛰는 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유은우는 서재희의 가슴을 짚고 버텼다. 힘으로는 안 될 줄 알면서도, 늘 그랬듯이 서재희가 부드럽게 져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힘껏 밀어 보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밀리지 않고 단단했다.

“정리해요. 마음이 더 커져서 세상 사람들 다 알기 전에. 선배가 기껏 쌓아 올린 것들, 고작 나 하나 때문에 망가뜨리지 말고 제발 정신 차려요. 제발…….”

“그래. 네가 그렇게 강조하는, 계산이 소수점까지 딱딱 떨어지는 건조한 관계, 좋아. 나 너 구했어. 이번만 구한 것도 아니야. 예전에 백일서 죽은 날에도 내가 널 구했었지. 그것까지 이자 쳐서 다 받을까? 그걸 원해? 내가 못 할 것 같아?”

서재희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겹쳐졌다가 떨어지는 속눈썹에 눈물이 부서졌다.

“은우야.”

유은우는 턱에서 서재희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 안도했다. 다음 순간, 멀어질 줄 알았던 손이 훅 다가와 눈을 덮었다. 시야가 가려졌다. 사정없이 끌어 안겼다. 뒤통수가 바짝 당겨지며 몸이 기울었다. 유은우는 반사적으로 서재희의 가운을 움켜쥐었다. 둘 사이가 틈 없이 꼭 붙었다. 온통 습한 열기로 어지러웠다. 유은우는 다급히 물러나려 했다.

서재희의 입술이 꾹 눌러 왔다. 부드럽게 몇 차례 문지르더니, 곧 입을 열고 숨이 들어왔다. 유은우는 간신히 손을 들어 서재희의 양 뺨을 더듬어 밀어냈다. 입술이 떨어졌다. 눈을 가렸던 서재희의 큰 손이 유은우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시선이 마주쳤다. 반쯤 감긴 까만 눈이 유은우를 보고 있었다.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나랑 키스하는데도 아무 느낌 없어?”

서재희는 자신의 뺨을 붙잡은 유은우의 두 손을 차례로 걷어 내고 한꺼번에 움켜잡았다. 유은우의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지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내 서재희는 유은우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샤워 가운 사이로 드러난 자신의 명치를 꾹 짚어 보였다.

“여기 이쪽 아프거나 그러지 않아? 숨이 잘 안 쉬어진다거나. 전혀 없어? 나만 그런 거야?”

유은우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자신의 차갑게 식은 손아귀 위로 서재희의 손이 부드럽게 깍지를 껴 오고 있었다. 다시 서재희를 보았다. 그가 한 차례 침을 삼키더니 유은우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아주 조금의 기척이라도 건져 내려는 그 샅샅이 치밀한 시선에 유은우는 더욱 긴장했다.

“선배, 지금 이거 생각하고 하는 행동이에요?”

서재희가 눈을 꾹 감았다. 동공을 일렁이던 눈물들이 눈가로 내려앉고 뺨 위로 둥글게 흘러내렸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수백 번 생각해도 모르겠어.”

끌어 안겼다. 유은우의 어깨로 그가 고개를 파묻었다. 따뜻하게 거친 숨. 귓가로 그가 속삭였다.

“날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아주 싫은 건 아닌 거지?”

유은우는 눈을 감았다. 뭐라고 답하고 싶은지는 젖혀 두었다. 뭐라고 답해야만 할까. 서재희 본인도 감당 못 하는 감정을 내가 받아들인다면. 나는 그럼 학교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지금도 이렇게 함께 있고 싶은데.

심장엔 불이 붙어 마지막처럼 타고 있었고, 디디고 선 발아래는 살얼음판이었다.

유은우, 정신 똑바로 차려. 네가 흔들리는 순간 서재희까지 함께 침몰하는 거야. 저사람 눈빛 좀 봐. 스쳐 지나만 가도 저 사람이 날 좋아한다는 사실이 열병처럼 번져 나올 텐데.

“선배.”

버텨야 했다. 사랑으로부터.

“받을 거 받아 가요.”

유은우를 꼭 껴안은 서재희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전신에 힘만 꽉 들어갔다. 한참을 그렇게 있더니, 서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까만 눈.

그의 두 손이 다가와 뺨을 감쌌다. 유은우는 밀어내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감았다. 서재희가 유은우의 입술을 빨아 당겼다. 다시금 입 맞추고, 매끈하게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혀가 한 차례 감기었다가 빠져나갔다. 입술이 잠시 떨어졌다. 이마를 반듯하게 맞대고 서재희가 숨을 골랐다. 유은우는 살짝 눈을 떴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나붓이 처진 속눈썹 아래로 눈물 자국이 반짝였다. 유은우는 이를 악물고 다시 눈을 감았다.

서재희는 가만히 유은우를 붙들고만 있다가 다시 입술을 삼켰다. 그의 젖은 앞머리가 유은우의 머리카락과 섞여 흐트러지며 사락거렸다. 그의 혀끝이 입천장을 더듬어 올 때, 유은우는 저도 모르게 더운 숨이 터졌다. 서재희는 유은우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고, 가끔 뺨을 어루만지며 목덜미에 키스했다. 애원하던 말마디는 밀려났고, 호소하던 눈물은 말랐으며, 간절하던 눈빛은 감겨 있었다.

차갑게 식은 공간에서, 달뜬 숨만 흐드러졌다.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계절이 바뀌듯 이 순간도 착실히 지나가, 언젠가는 결국 빛이 바래지기를. 아주 오래 뒤에 간혹 스치듯 떠오르더라도, 꿈처럼 피어났다가 스러지는 한낱 봄꽃 같은 마음 때문에 길을 잃지는 않았으니 나 정말 대견하다고 그리 웃을 수 있었으면.

땡.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유은우는 재활기를 한 손으로 끌며 복도로 나왔다. 저 끝에서 의료진 몇이 바쁘게 오가는 것 외에는 한산했다.

눈물이 툭 떨어졌다.

유은우는 잠시 복도에 서서, 소매로 눈을 거칠게 문질러 닦았다. 코를 몇 번 훌쩍였다. 움직일 때마다 서재희의 푸릇한 냄새가 났다. 입술은 따갑게 부풀었고, 머리카락이며 옷깃이며 그가 쓰다듬은 대로 흐트러졌으며, 심장은 그 사람이 가져가고 없었다.

유은우는 복도의 쨍한 형광등 불빛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깜박거렸다. 눈물은 금방 말랐다. 두 손으로 뺨을 수차례 문지른 다음, 유은우는 병실 문을 열었다.

불이 꺼져 있어 어두웠다. 재활기를 입구에 던져두는데, 어딘가 스산했다. 어느새 익숙해진, 정윤환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없었다. 꽉 조인 공기. 방아쇠에 걸려 비틀리기 직전의 팽팽한 온. 정윤환 깨어났나? 가만. 한 명이 아니야. 두 명?

침착하게 벽을 더듬었다. 손끝에 스위치가 걸렸다.

찰칵.

불을 켜기가 무섭게 총성이 울렸다.

탕!

유은우는 곧바로 시계를 펼치며 그 뒤로 숨었다.

콰앙!

거대하게 펼친 시계판을 둔탁한 힘이 살벌하게 긁고 지나갔다. 유은우는 하마터면 뒤로 메다 꽂힐 뻔했다. 오른발을 뒤로 빼며 황급히 몸을 지탱했다. 이미 부러진 전적이 있는 정강이로부터 찌릿한 통증이 뻗어 올라왔다. 비명을 삼켰다. 역시 아직 덜 나았어…….

숨이 탁 막힐 정도로 강한 타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발밑으로 푸른 설계들이 파도처럼 빠르게 밀려와 바닥과 벽을 훑고 지나갔다. 유은우는 욕지기를 삼키며 곁눈질로 패턴을 빠르게 훑었다. 방음 설계. 선이 굵고 거칠었다. 정교하다기보다는 담대한 설계의 끝에서, 유은우는 익숙한 서명을 발견했다.

김서혁.

이를 악물었다. 굳게 닫힌 문에 등을 단단히 붙였다. 시계 침 세 개를 새까만 칼처럼 공중으로 뻗어 냈다.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앞을 봉쇄하던 시계판을 매끄럽게 옆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눈앞의 상황을 채 식별하기도 전에, 공간이 먼저 거칠게 찢어졌다. 유은우는 다급히 몸을 굴려 입구에서 벗어나 안으로 뛰어들었다. 김서혁의 타격은 유은우가 서 있던 자리를 험하게 긁어 놓고, 바로 방향을 바꾸며 매끄럽게 자취를 감추었다.

어디지?

소매가 말려 올라가 드러난 팔 위로 소름이 돋았다. 타격은 한 번 부딪히면 소멸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김서혁은 달랐다. 그는 유은우를 직접 훈련시킬 때, 총을 딱 한 번만 쏴 놓고, 유은우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그것을 완전히 부술 때까지 팔짱을 끼고 수 분간 기다리곤 했다.

머리 위가 서늘했다.

유은우는 시계판으로 안정적인 방어를 하는 대신, 시계 침을 부풀려 정수리 위로 내리꽂히는 공격의 핵을 단번에 부수어 놓았다. 김서혁의 타격이 산산조각 나면서 입고 있던 설계가 찰랑거리며 부서져 내렸다.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아윽, 어깨…….

아픈 내색은 하지 않았다. 시계판이 웅웅거리며 유은우의 왼쪽으로 다가붙었다. 창처럼 길쭉하고 날카로운 시계 침을 팽팽하게 앞으로 드리운 채, 유은우는 김서혁을 보았다.

김서혁의 총은 이미 홀스터에 꽂혀 있었다. 그는 미간을 좁히고 팔짱을 낀 채, 유은우를, 정확히는 유은우가 부리고 있는 온디딤을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그가 느리게 창가에 몸을 기댔다. 거추장스럽다며 보통은 걸치지 않던 망토까지 길게 드리운, 하나부터 열까지 갖춰 입은 차림이었다. 김서혁이 유은우에게서 시선을 떼고 정윤환을 보았다. 눈이 차가웠다.

“네가 왜 부상당했나 했더니. 저것 때문인가.”

정윤환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침대에서 반쯤 일어나 앉아 있었다. 한쪽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손 그늘 아래 드러난 턱은 꽉 악물려 있었고, 목선을 따라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김서혁은 정윤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왼손으로 오른손에 낀 장갑 단추를 똑 풀고 능숙하게 벗었다. 드러난 맨손을 가볍게 푸는 김서혁을 마주 보며, 유은우는 시계판을 제 앞으로 매끄럽게 이동시켰다. 장갑을 벗는 것은,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모함에서 사출할 때나 유은우의 훈련을 본격적으로 받아 줄 때 나오는 김서혁의 버릇이었다. 이선규는 ‘대장이 맨손으로 총을 잡는다는 건 이제 봐주지 않을 테니까 너희들 다 바짝 긴장하라는 뜻이지.’라고 자주 농담했었다.

김서혁이 유은우를 빤히 보면서 홀스터에서 총을 뽑았다. 유은우는 즉시 시계 침 하나를 손톱만큼 작게 벼렸다.

탕!

그의 총구가 거칠게 튀어 오름과 동시에, 유은우는 시계판만 그 자리에 펼쳐 두고 옆으로 빠르게 굴러 나왔다. 시야를 확보한 즉시, 작게 줄여 육안으로 식별이 어려운 시계 침을 김서혁 쪽으로 힘껏 날렸다. 시계 침은 김서혁의 총 가까이 붙기가 무섭게, 순식간에 한 뼘 정도 부풀어 오른 뒤, 괴물처럼 뻗어 나오며 그의 손을 거칠게 내리쳤다.

카가가가각!

김서혁의 보호 설계와 유은우의 시계 침이 끔찍한 소리를 내며 한바탕 뒤엉켰다. 이어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진 것은, 시계 침이었다. 그것은 힘을 잃고 바닥으로 나동그라진 후에, 비척거리며 유은우에게로 돌아왔다.

여전히 건재한 보호 설계를 두르고, 김서혁은 총을 홀스터에 꽂았다. 그의 시선은 유은우가 펼쳐 둔 시계판을 향해 있었다. 시계판 위로, 수많은 톱니바퀴가 발광하듯 튀어 오르고 팽팽 돌아가면서, 김서혁이 날렸던 타격을 와작와작 부숴 내고 있었다. 거대한 분쇄기처럼 맹렬하게 돌아가는 시계판을 보면서, 김서혁이 낮게 말했다.

“정윤환을 때려눕힐 만하군. 그래도…….”

시계판이 느리게 멈췄다. 미처 갉아 먹히지 않은 김서혁의 핵심 패턴들이, 시계 부품 사이에서 폭발할 듯 서서히 부푸는 것을 보며, 유은우는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 익숙하진 않은 모양인데.”

콰앙!

시계판 속에서 김서혁의 타격이 솟구쳐 나왔다. 푸른 설계를 입고 직격으로 날아들었다. 유은우는 힘을 잃고 무너지는 시계판을 일으켜 세워 간신히 그것을 막아 냈다. 그 뒤로 시계 침 세 개를 화살처럼 불러들여 연속으로 김서혁의 타격을 관통했다. 날카로운 뒤척임을 끝으로, 김서혁이 주름잡아 다루었던 온은 깨끗하게 풀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김서혁은 이프를 꾹 누르더니 중얼거렸다.

“1분 21초. 최단 기록. 2년 동안 그리 끼고 가르쳐도 2분 벽을 못 넘더니.”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유은우를 보았다.

“그건 어디서 났지?”

“무슨 상관이야. 대장이야말로 이 새벽에 여기 왜 왔어. 학교에 처박아 두더니, 이제 와서 나 훈련 상대나 해 주려고 온 건 아닐 테고…….”

그때였다. 문이 달칵 열렸다.

서재희였다. 그는 말끔하게 교복을 빼입고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바싹 말려 보송했다. 조금 전까지 열기로 흐트러졌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었으나, 원래 서재희는 저리 정갈했음을 새삼 깨달았다.

서재희가 막 병실로 들어오려다 말고 멈춰 섰다. 그는 사방 벽을 견고하게 둘러싼 방음 설계를 빠르게 훑어보더니, 벽의 모서리에서 황금색으로 작게 반짝이는 김서혁의 서명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서재희의 낯이 다소 굳어졌다. 그는, 반쯤 엎어졌다가 황급히 일어서는 유은우를 보고, 팔짱을 끼고 창가에 기대선 김서혁을 보고, 이마를 짚고 고개를 숙인 정윤환까지 차례로 본 다음, 다시 김서혁을 보았다. 깊이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했다.

“총사령관님, 안녕하십니까. 파견부장 서재희입니다.”

그리고 차분히 물었다.

“출입증 있으십니까?”

김서혁은 대답 없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 불쾌한 기색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서재희는 부드럽게 말을 더했다.

“도시연합 중앙학교는 외부인의 출입을 사전에, 최소 하루 전에 접수하고 허가를 내 드리고 있습니다. 허가를 받으셨다 하더라도 꼭두새벽의 병문안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싹싹하게 말을 잇는 서재희의 눈 안에서 새파란 것이 한번 뒤채었다.

“……학생에게 무기를 겨누는 것 또한 금지된 사항입니다. 총사령관께서도 졸업생이시니 잘 아실 텐데요. 특별한 사항이라도 있으십니까? 없으시다면 나가 주십시오. 학생 두 명이 환자로 머무는 병실입니다. 아시겠지만.”

김서혁은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재희를 응시했다. 그가 불쑥 말했다.

“온디딤 사용은 불법이다. 관리는 누가 하나?”

“제가 합니다.”

“본인은 법을 위반해 놓고 지금 나한테 고작 교칙을 어겼다고 훈수 두는 건가?”

“유은우의 온디딤 사용은 합법한 절차를 거쳐 승인받았습니다. 이 또한 아시겠지만.”

김서혁은 창가에 기대고 있던 몸을 천천히 바로 세웠다. 그가 창틀에 벗어 두었던 장갑을 집어 들더니 다시 오른손에 끼꼬는 손목의 단추를 채웠다. 딱 소리가 났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입술 안쪽 살을 짓씹는 듯 김서혁의 입매가 단단히 맞물렸다. 전투에서 자신이 놓친 것이 있나 필사적으로 되짚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한시 허가?”

“제가 직접 총사령관님께 용 사육 보고서와 함께 올렸습니다. 온디딤법 제12조. 온디딤의 한시 허가. 제1항 제5호 나목. 도시연합 중앙학교가 온디딤을 사용하여 특수 실험을 수행하거나 이와 관련된 교육 훈련을 진행할 경우. 동법 시행령 제14조. 온디딤의 한시 허가를 위한 승인 등. 제1항. 도시연합 중앙학교장은 법 제12조 제1항에 따른 온디딤의 한시 허가를 위한 승인을 받으려는 경우에는 신청서에 다음 각호의 서류를 첨부하여 도시연합장과 도시연합군 총사령관에게 제출하여야 한다. 온디딤 한시 허가 신청서, 실험 검토 보고서, 혹은 교육 훈련 진행 계획서, 과거 3년 동안의 관련 연구 실적, 온 과학원의 안전성 검토 확인서 등. 전부 총사령관님께서 직접 검토하시고 제 눈앞에서 결재해 주셨습니다.”

서재희가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도시연합에서는 동조자의 온디딤 사용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은우는 인간이 아닙니다. 인권도 시민권도 없는 총사령관님의 전리품일 뿐입니다. 유은우가 군에서 학교로 이관되면서 폐기 처분 권한도 학교로, 정확히 말하면 제 재량으로 넘어온 지 오래입니다. 전리품도 온디딤도 제 관리하에 있습니다. 유은우가 온디딤을 사용하는 것은, 법적으로 무기의 결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 효과를 검증하여 제 졸업논문으로 쓰려고 합니다. 승인도 받았습니다. 제가 놓친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서재희의 공손한 말마디를 끝으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김서혁이 짧게 웃었다.

“듣던 대로 아주 맹랑하군. 내 사람이었으면 좋았겠지만.”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저는 임유현 교장 선생님의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페어는 해제했나?”

“네.”

“확인 좀 할까.”

김서혁이 총을 뽑았다. 홀스터에서 뽑아내자마자 방아쇠를 당기고, 그대로 한 차례 휙 돌렸다. 시계를 원상태로 돌리느라 집중하고 있던 유은우는 그 설계를 직격으로 맞았다. 눈앞으로 거친 패턴이 그대로 스치고 지나갔다. 설계는 유은우를 지나 서재희까지 샅샅이 거치고 나서 김서혁의 이프로 흡수되었다. 유은우는 가까스로 벽을 짚었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패턴을 보는 바람에 속이 심하게 뒤집혔다. 서재희가 다가와 부축하려 하기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서재희는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 돌아섰다. 유은우를 등 뒤에 둔 채 그가 날카롭게 말했다.

“유은우는 아직 환자입니다. 제가 페어 해제했다고 방금 분명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굳이 설계로 확인 사살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상대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타인의 설계 현황을 열람하는 것은 불법입니다. 자꾸 이렇게 교칙을 넘어서서 법까지 위반하신다면, 저도 파견부장의 권한으로 강력히 대응하겠습니다. 여긴 도시연합 중앙학교로 도시연합군과 독립된 기관이며 제 관할입니다.”

“미안하게 됐군.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지라. 요즘따라 배신자가 속출하는 바람에 아무도 못 믿겠어서.”

김서혁의 말에, 여태 꼼짝도 않던 정윤환이 길게 숨을 뱉었다.

“깨끗하군.”

김서혁이 자신의 이프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프를 끄면서 서재희를 바라보았다. 눈이 차가웠다.

“청문회 소환 얘기가 있던데 위험하지 않나? 난데없이 내 전리품으로 졸업논문을 쓰겠다고 하기에는. 지나친 여유 아닌가?”

김서혁이 홀스터에 총을 꽂더니 뚜벅뚜벅 걸어 가까이 왔다.

“왜 아직도 관리자로 등록하지 않는 거지? 그 자리가 영원히 네 자리라고는 생각 안 하는 게 좋아. 상황은 바뀌고, 후보도 바뀐다. 우리 때도 그랬으니까.”

“조언은 감사합니다만, 제 일입니다. 교장 선생님과 상의하겠습니다.”

“임유현과 상의? 입바른 소리 하면서 뒤로 호박씨 깐다는 소문이 흉흉하여 청문회까지 언급되는 놈이 임유현과 상의한다고? 나도 귀가 있어. 네가 임유현과 그리 각별한 사이던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오히려 넌 지금…….”

김서혁이 서재희와 서너 걸음만 남기고 멈추어 섰다.

“유은우하고는 무슨 사이지?”

“선후배 사이.”

유은우는 즉각 팔팔하게 튀어 나가 김서혁과 서재희 사이를 가로막았다. 재차 강조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군 전리품이 손상될까 봐 서재희 선배가 학교 대표로 나 페어 걸어 준 거예요. 내가 다른 학생들이랑 너무 자주 부딪혀서…….”

김서혁이 유은우의 말을 잘랐다.

“켕기는 거 있을 때만 존댓말 쓰지.”

“……정윤환도 나 죽이려고 했어. 진심이었어. 대장도 알고 있었지? 서재희 선배는 어쩔 수 없이 나하고 페어 맺은 것뿐이야. 파견부장이라서 그 책임감 때문에. 이게 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날 학교로 내팽개친 대장 때문에 일어난 일 아니야? 대장이 상황을 이 꼴로 만들어 놓고 왜 남한테 페어를 맺었니, 안 맺었니 무슨 관계니 아니니 따질 자격이 있어? 온디딤 없었으면 나 진짜로 정윤환 손에 이미 세상을…….”

유은우는 손가락으로 정윤환을 가리키다가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정윤환이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미끄러뜨리더니 제 양쪽 손바닥으로 귀를 막았던 것이다. 그러더니 다친 새끼 짐승처럼 바짝 웅크렸다.

아니, 쟤 갑자기 왜 저래?

“지, 지금은 아파서 저렇게 힘이 없긴 한데. 내가 이렇게 다친 것도 전부…….”

“알고 있어. 네 총에 혼동 설계도 정윤환이 걸었지.”

유은우는 잠시 멈칫했다.

“뭐?”

“혼동 설계. 네가 군에서 학교로 오게 된 이유. 임무수행 전에 검사할 땐 아무 이상 없다가 출동하고 나서 혼동 설계 걸렸다고, 내부자 소행이라고 네가 그랬었지. 나 혼자 수습하기엔 사건이 컸어. 네 타격이 여러 갈래로 펼쳐지는 바람에 임무는 시작도 못 하고 부상자만 수습하고 복귀해야 했다. 위원회가 열리고 네 처분이 특례입학으로 결정 났을 때 나는 널 보호하지 못했어. 혼동 설계 하나 풀지 못하는 널 어떻게 변호하나. 이건 순전히 네 능력 문제로, 적이 역이용하기 쉽다는 점이 있었어.”

“그때 정윤환은 군에 없었잖아.”

“정확히는 정윤환 지시로. 그날 우리가 출동할 때 내부에서 누군가 정윤환의 지시를 수행한 거지. 그 끄나풀은 색출했으니 앞으로 그런 일 없을 거다. 내가 널 정윤환에게 위임했으니까.”

유은우가 뭐라 묻기도 전에 서재희가 먼저였다.

“위임이라뇨. 유은우는 제 소관입니다. 아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 부분은 서재희 네 마음대로 해도 좋아. 유은우가 온디딤을 잘 다루면 나야 나쁠 것 없다. 다만, 유은우에게 우리 군 예산도 책정되어 있으니 내 전리품이 완전히 네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 나는 군으로 돌아가야 하니, 유은우의 안위는 정윤환에게 맡기겠다. 정윤환, 대답해.”

정윤환은 거칠게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유은우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다른 곳에 잠시 두었다가 그를 다시 보아야 했다. 똑바로 보지 못할 정도로, 정윤환의 눈빛은 살벌했다. 정신을 잃고 하루 종일 잠만 자던 때보다 어째 낯이 더 창백했다.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고, 입술을 하얗게 갈라졌으며, 무엇보다 전신으로 섬뜩한 기운이 흘렀다. 지옥에서 그림자라도 끌어다 뒤집어쓴 것 같았다. 정윤환이 이를 꾹 악물다가 내뱉었다. 목소리가 탁했다.

“……사람 꺾어 놓느니 차라리 죽이고 가.”

“내가 널 왜 죽이나.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임무나 잘 수행해. 네가 인생 밑바닥까지 추락하면서 싸고돌던 그 시답잖은 무리 지키려면.”

김서혁이 제복 코트 안쪽에서 지갑을 꺼내 은색 카드를 뽑아냈다.

“써. 내 신용카드니까 분실하지 말고.”

그가 너무나 당연하게 내밀어서 유은우는 얼결에 그것을 받았다.

왠지 뒤가 서늘했다. 서재희가 법망을 교묘히 피해 승인까지 받아 가며 온디딤 사용을 합법화해 주었다. 김서혁은 신용카드를 내어 주며 다시 제 사람으로 들이겠다는 암시를 주었고, 이제 정윤환도 김서혁의 지시를 받았으니 유은우를 마음대로 해치지 못할 터였다. 모든 상황이 한결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한층 어두워진 것 같았다.

불안했다. 늘 여유가 넘쳐 나른하기까지 하던 정윤환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는 것도 그랬고, 김서혁과 서재희 사이에 빽빽한 적대감도 그랬고, 갑작스런 김서혁의 관심도 그랬다. 대화의 행간과 시선, 표정에서 느껴지는, 유은우가 미처 읽어 내지 못한 폭풍 전야의 적막이 곳곳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제 와서 날 신경 쓰는 이유가 뭐야?”

“이제야 네가 쓸 만해졌으니까. 더 설명이 필요한가?”

김서혁이 총을 뽑아 벽을 향해 쏘았다. 방음 설계가 깨끗이 걷혀 나갔다. 그는 뚜벅뚜벅 유은우를 스쳐 지나가 병실 문을 잡았다. 손잡이를 반쯤 돌리다가, 김서혁이 돌아섰다.

“한 번만 더 사람 말하는데 먼저 끊으면, 그땐 아주 혼날 줄 알아.”

김서혁이 단호한 눈을 하고,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삐삐삐삐삐…….

공급기에 불이 들어오면서 요란한 경고음이 울렸다. 정윤환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그가 거칠게 기침하면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창백한 손가락 사이로 핏기가 비치더니 곧 하얀 이불 위로 투두둑 쏟아졌다.

서재희가 달려가 벽에 있는 응급 호출을 눌렀다. 바로 공급기를 살피더니 실린더 몇 개를 빼면서 그가 다급히 말했다.

“치료기가 어디……. 은우야, 거기 반대편에 치료기 좀 주워 줘.”

유은우는 정윤환의 침대 옆에 떨어져 있는 치료기를 주워 건넸다. 서재희가 그것을 받아 정윤환의 팔을 붙들고 몸을 숙였다.

“……서재희, 잠시만.”

정윤환이 손을 들어 치료기를 밀어냈다. 거의 다 죽어 가는 상태에서도 눈빛이 선명해 손에 묻어날 것 같았다. 정윤환이 거칠게 입가를 닦아 냈다. 그러더니 필사적으로 서재희의 팔을 잡아 당겼다. 어찌나 힘이 센지, 서재희는 정윤환 위로 엎어지려다가 겨우 중심을 잡았다. 서재희가 당황하여 얼빠진 소리를 냈다.

“어?”

“작년 여름에 너 사해에서 돌아왔던 날, 내가 할 말이 있다고 했어.”

정윤환의 목소리가 긁혀 나왔다. 서재희가 치료기를 든 채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정윤환이 다급히 덧붙였다.

“내가, 내가 우리 친아버지에 대해 말한 날…….”

“기억나.”

“그때 말했어야 했어.”

정윤환이 고개를 숙였다. 그가 이마를 서재희의 팔에 기댔다. 정윤환이 꺼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좀 도와줘.”

쾅, 문이 열리면서 부스스한 몰골의 의사가 뛰어 들어오다가 병실 바닥이 엉망으로 부서진 것을 보고 흠칫했다. 간호사 몇이 뒤따라 들어오더니 정윤환 옆에 서 있던 유은우를 다급히 몰아냈다. 의사가 공급기를 보았다.

“실린더가…….”

“제가 뺐습니다. 환자가 심적 충격을 받아, 강한 농도를 못 이기고 각혈하는 것 같아서.”

서재희가 차분하게 말했다.

“상태가 왜…….”

“아마 충격 때문일 거예요.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약물 교체해 주시고 안정제 좀 놔 주십시오. 치료기도 한 번 더 점검해 주시고요. 제가 옆에 있겠습니다.”

공급기의 경고음이 너무 요란하여, 간호사가 아예 소리를 꺼 버렸다.

“아니, 옆에 있던 환자는 또 어디 갔어? 둘이 같이 실려 왔던 것 아니었나?”

의사가 소매로 땀이 솟은 이마를 훔쳤다. 옆에서 간호사가 차트를 보았다.

“두 학생이 싸우다가 부상을 입어 묶인 온이 풀리고 안정화될 때까지 한병실에 두라고 조치하셨었어요.”

“아아, 맞아. 그랬어. 다른 하나는 어디 있지?”

서재희가 바로 대답했다.

“저기 옆에 서 있습니다. 이제 둘이 같은 공간에 있을 필요는 없지요? 한쪽이 재활기 빼고 돌아다닐 정도면 온도 거의 풀어진 것 아닙니까? 이제 따로 재워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성별이 달라서.”

의사는 망설이는 기색이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 하나가 유은우에게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유은우는 간호사를 따라 병실을 나오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정윤환은 축 늘어져 거의 죽은 것처럼 보였다. 간호사들의 능숙한 손길에 공급기의 약물이 갈아 끼워지고, 의사의 지시로 치료기의 수치가 조정되었다. 피가 묻은 이불이 신속하게 벗겨지고 새 이불이 덮였다. 너무 창백하여 파랗게 보일 지경인 팔뚝에 주삿바늘이 꽂히는 것까지 보고, 유은우는 문을 닫았다.

간호사가 바로 맞은편에 1인실을 내어 주었다. 유은우가 침대로 기어 올라가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당기자, 간호사가 괜찮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유은우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간호사는 결국 신경안정제를 가루로 내어 물에 탄 후, 유은우가 큰 컵으로 꿀꺽꿀꺽 마시는 것을 보고야 안심하는 표정으로 나갔다. 불이 꺼진 캄캄한 병실에서, 유은우는 취한 듯 잠에 곯아떨어졌다.

이른 아침에 깨어났을 땐 모든 것이 꿈 같았다. 맞은편 병실로 찾아갔다. 손잡이를 돌리려다가, 먼저 노크를 했다. 응답이 없었다. 문에 귀를 바짝 붙이고 선 유은우를 지나가던 간호사가 발견하고는, 얼른 떨어져서 네 병실로 돌아가라고 잔소리를 했다.

“정윤환 학생 어제 새벽에 고비였어요. 지금은 무사히 넘기고 한숨 자는 중이에요. 서재희 학생도 옆에서 자고 있을 테고. 유은우 학생도 얼른 돌아가세요. 오전에 의료진이 회진하면서 재활 들어갈 겁니다. 치료기 아니면 재활기 둘 중 하나는 꼭 차고 있으세요.”

유은우는 일단 제 병실로 후퇴했다가, 문을 빠끔 열고 주위를 살펴본 다음 잽싸게 병원을 빠져나왔다.

오전의 교정은 쌀쌀했다.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날이 흐렸다.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새어 나오는 볕이 새파랬다. 유은우는 하늘색 환자복에 분홍색 병원 슬리퍼를 꿴 채 부지런히 타박타박 걸었다. 오가던 학생들의 시선이 흘끗흘끗 느껴졌다. 그중 몇몇은 유은우에게 다가오기도 했으나, 유은우가 걸음을 빨리하자 말을 걸지는 않았다.

남자 기숙사 입구는 조용했다.

아침을 함께 먹는다는 명목으로 드나드는 여학생 몇몇에 끼여서 유은우도 아무렇지도 않게 1층 입구로 들어갔다. 검색대에서 정윤환의 이름을 조회했다. 701호. 학생회 임원답게 역시 1인실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7층 복도에는 남학생 서넛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유은우는 복도를 이리저리 배회하며 사람이 없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재빨리 701호 문손잡이를 잡았다. 시험 삼아 돌리니 역시나 잠겨 있었다. 보안장치에 정윤환 배지를 가져다 댔다. 잠금이 해제되고, 달칵, 문이 열렸다.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무언가를 밟고 미끄러지면서 호되게 나동그라졌다. 뒤에서 철컥 하고 문이 절로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윽, 아파.

아직 다 아물지 않은 정강이가 특히 얼얼했다. 유은우는 몸을 둥글게 말고 정강이를 붙잡은 채 한참을 낑낑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든 순간,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했다.

방은 난장판이었다. 유은우는 태어나서 그렇게 복잡하고 너저분한 공간은 정말이지 처음 보았다. 오랜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는 모함 공동 휴게실도 이보다는 깨끗할 것 같았다. 도둑이 다녀갔다는 말로는 모자랐다. 이것은 마치, 어떤 거인이 남자 기숙사 건물에서 701호만 성냥갑처럼 쏙 뺀 뒤, 장난삼아 마구 흔들었다가 다시 7층 제자리에 톡 꽂아 넣은 것처럼, 철저하게 엉망진창이었다.

우선 바닥이 잘 안 보였다.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옷이 색색으로 널브러져 꽉 메우고 있었다. 걸어 다니려면 일일이 발로 옷을 밀어내거나 그냥 다 포기하고 밟고 다녀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옷장이란 옷장은 전부 열려 사계절 옷이 꽉꽉 들어차 있었고, 서랍이란 서랍은 죄다 바지며 양말을 한 짝씩 건들건들 혀처럼 빼물고 있었다. 한쪽 벽에는 뜯어 보지도 않은 화려한 박스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온갖 쇼핑백이 아슬아슬하게 도미노처럼 기대어져 있었다. 그리고 사방에 동전들이 많았다. 책상에 놓인 고급스러운 유리병에, 방 한쪽 구석에, 현관 옆 선반에, 동전들이 이곳저곳 소복소복 쌓여 있었다. 간혹 지폐도 구겨져 휴지처럼 돌아다녔다. 유은우는 책상 밑에 둘둘 말려 있는 양말 사이로, 얼핏 거액의 수표도 본 것 같았다.

모델하우스 같던 서재희의 방과는 다른 의미로, 정윤환 또한 물건에 애착이 없어 보였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힘들어, 방이라기보다 창고 같았다.

현관문에 쪽지가 한 장 붙어 있었다. 스프링 노트에서 대충 찢어 낸 듯 성의 없는 종이 위에, 휘갈겼으나 제법 유려한 글씨체로 몇 줄 적혀 있었다.

관리 직원 분께.

쓸고 닦아는 주시되,

물건의 위치는 절대 옮기지 말 것.

제 나름의 규칙★이 있습니다.

특히 침대★는 제가 직접 정리합니다.

손대지 마시고, 웬만하면 그냥 오지 마세요.

어머니께는 정기적으로 왔다 가신다고 말씀드릴게요.

‘절대’에 빨간 밑줄이 북북 그어져 있었고, ‘규칙’과 ‘침대’에 빨간 별표가 크게 그려져 있었다.

규칙? 무슨 규칙? 유은우는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넘어지는 바람에 병원 슬리퍼는 이미 벗겨지고 맨발이었다. 유은우가 밟고 미끄러진, 부들부들한 감색 니트는 하얀 스니커즈 위에 반쯤 걸쳐져 있었다. 신발 벗어 두는 현관에 왜 니트가 널려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규칙은 개뿔. 옷을 이렇게 아무 데나 벗어 놓고, 대체 어떻게 방 안을 돌아다니는 거야?

유은우는 괜히 심술이 나서 엎어진 그 자세로 발을 들어 니트를 힘껏 걷어찼다. 감색 니트는 기세 좋게 방 한쪽으로 날아가더니, 천장까지 높이 쌓인 책 기둥 한가운데를 정통으로 맞히고 말았다. 각양각색의 책들이 위태롭게 흔들리다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유은우는 질겁하며 몸을 굴렸지만 미처 피하지 못하고 두꺼운 양장본에 그만 등을 얻어맞고 말았다. 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다급히 등을 부여잡고는, 한참을 그리 꼼짝 않고 있었다. 이내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픈 것은 둘째 치더라도, 얼마나 어질러졌는지 사람 목숨까지 위협하는 방 꼬락서니에 어이가 없었다.

유은우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물건이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뒤져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일단 옷장이나 그에 딸린 서랍은 포기했다. 얼마나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지 어설프게 옷 하나 잡아 빼는 순간 가구 전체가 무너질 것 같아 두려웠다.

우선 책상 서랍부터 열어 보았다. 첫 번째 서랍에는 망가진 총 두 개가 있었고, 딸기맛 보호칩이 낱개로 수북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서랍에는 온통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과자, 사탕, 초콜릿과, 그것들의 일부로 보이는 자잘한 부스러기뿐이었다.

유은우는 이번엔 침대 쪽을 보았다. 폭풍우라도 휩쓸고 간 듯 어지러운 방에서, 침대와 그 옆에 붙은 작은 협탁만은 유독 깨끗하여 희한했다. 침대 머리맡에는 줄줄이 향초가 놓여 있었다. 향초 케이스마다, 숙면을 위한, 깊은 잠을 돕는, 잠이 솔솔, 코 잘 자요, 따위의 앙증맞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침대 이불을 훅 걷어 보았다. 잘 말라 보송보송한 냄새가 났다. 이불 안에 크기가 사람만 한 폭신폭신한 토끼 인형이 하나 놓여 있었다. 깨끗하게 세탁되었지만 제법 손이 탔는지 토끼 정수리 부분이 좀 나달나달해져 있었고, 전체적으로 색이 바래 있었다.

침대 옆 협탁 위엔 작은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라벨은 붙어 있지 않았다. 유리병을 들어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동그란 알약의 한쪽 면은 희었고, 다른 한쪽 면은 은색으로 코팅되어 예쁘게 반짝반짝 빛났다. 유은우는 유리병을 열고 조금 멀찍이 든 채 조심조심 냄새를 맡았다. 박하와 계피가 섞인 특유의 냄새가 났다.

수면제. 유은우도 익히 아는 수면제였다. 군에서 불면증을 겪는 군인 몇이 늘 가지고 다니곤 했다. 유은우도 긴장하여 잠을 잘 못 잘 때면 가끔 얻어먹곤 해서 잘 알았다. 하나로는 독했다. 유은우는 주로 알약을 곱게 가루로 빻아 손가락 끝으로 아주 소량만 톡 찍어 낸 뒤 물에 희석시켜 마시곤 했다. 그것만으로도 죽은 듯이 잘 수 있었다. 한 번에 다섯 알 이상을 삼키면 치사량이었다.

불면증이 심한가 보네. 하도 뺀질거려서 무신경한 줄 알았더니.

유은우는 유리병 뚜껑을 닫아 책상에 내려놓았다. 협탁 밑에 손을 넣어 더듬었다. 무언가 손잡이 같은 것이 걸렸으나 당겨도 반응이 없었다. 유은우는 몇 걸음 물러선 뒤에 시계를 움직였다. 시계판이 협탁을 단번에 갈라놓았다. 판판한 상판이 우지끈 부러지며 안쪽에 숨겨져 있던 서랍을 토해 냈다. 유은우는 부러진 상판을 걷어 냈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서랍엔, 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 집어 드니 꽤 묵직했다. 표지가 가죽으로 되어 있었고, 어찌나 많이 펼쳐 보았는지 모서리에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했다. 제목은 금박이 너덜너덜하게 떨어져 나가고 없어 눈으로는 확인이 어려웠다. 유은우는 손끝으로 제목을 더듬어 보았으나 매끈하게 닳아 읽을 수 없었다.

표지를 펼쳤다. 내지에 도시연합의 금서 마크가 찍혀 있었다. 유은우는 책을 휘리릭 훑어보았다. 특정 페이지에 붉은 책갈피가 끼워져 있었다. 낡아서 누렇게 뜬 페이지를 천천히 손으로 쓸어 보았다. 결이 고르지 못했다. 물방울이라도 여러 차례 떨어진 듯, 페이지가 온통 우글쭈글했다. 연필로 여러 번 그어진 문장이 있었다.

……용의 뼈는 녹슨 못과 같아, 한번 내리꽂으면 영원한 심연이 관통된다. 기억은 어둠속에 영원히 고일 것이며, 아무리 긴 두레박이라도 길어 올리지 못한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며, 용이되 용이 아니며, 인간의 삶을 살 수도 있고, 용의 수명을 가질 수도 있으나, 그것은 오로지 선택에 달려 있으며, 그러나 결코 선택할 수 없을 것이다…….

책을 앞뒤로 뒤적였으나 이해가 어려웠다. 책은 내려놓고 침대를 뒤졌다. 유일하게 정돈된 공간이라 필히 중요한 것이 숨겨져 있으리라 짐작했다. 매트리스를 들추어 보고 침대 밑을 살펴보았다. 여러 번 살핀 이불을 한 번 더 들추는데 토끼 인형이 굴러 떨어졌다. 주워서 주물럭거려 보았다. 어딘가 바스락거리는 느낌이 났다. 토끼 인형 봉제선을 더듬었다. 등 쪽에 틈이 있었다. 손가락을 넣어 보니 빵빵한 솜 사이로 종이가 걸렸다. 바로 빼내어 펼쳤다.

편지였다. 글씨체가 참으로 아름다워, 편지를 든 손을 멀리 뻗으면 정교한 펜화처럼 보였다.

한세연 연구관님께.

지난밤 조언을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개 변두리에서 잡일을 수행하고 있는 제게, 반란군 수장인 연구관님의 개인 호출은 굉장한 영광이었습니다. 연구관님의 지시를 기꺼이 수행할 것이나 일부 이견이 있음을 우선 밝힙니다. 대면하여 말씀드린다면 제 결심이 무너질 것을 염려하여 부득이 글로 남기니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돌아가신 이가연 연구사께서 흰 칼날 프로젝트를 고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난민 출신의 어린 동조자를 그 실험 대상으로 잡았다 하셨지요. 당시 이가연 연구사님은 갓 태어난 딸이 자신의 사후에 흰 칼날 프로젝트의 실험체가 될 것이라고는 결코 예상치 못했을 겁니다.

내부에서 유은우를 두고 어미의 자업자득이라고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프로젝트를 밀어붙이는 집단에 속하면서, 동시에 프로젝트 고안자를 단죄하는 일의 옳고 그름은 감히 제가 판단치 않겠습니다. 하나 죄가 대물림되느냐 물으신다면 결코 아니라 말씀드립니다.

유은우가 실험체로 쓰일 그 어떤 마땅한 이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작 유은우 하나라고 말씀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유은우에게 삽입된 기계를 제거하는 것이 반란군 쇄신의 시작이 되리라 믿습니다. 반란군이 흰 칼날 프로젝트에 실패하여 손을 떼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 반란군이 최초 결성되던 당시 어떤 신념이 있었는지 돌이켜 스스로 그만두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도시연합과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난민 차별을 철폐하고 도시와 사해의 화합을 위해서 싸웁니다.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고단함이, 괴물의 탈을 쓰고 쉬운 길을 가도 된다는 변명이 되지는 않습니다.

연구관님께서 마지막으로 부탁할 것이 있냐고 물으셨으니 첨언합니다.

제 사촌 동생인 정윤환이 대기 명단에 들어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윤환은 희대의 설계자입니다. 사방에서 탐을 내므로, 누가 추천했는지는 의미가 없겠지요.

우리는 때때로 천재를 만나면, 그에게 사회에 기여하라고 강요합니다. 조직의 수단이 되라고 강제합니다. 이는 명백한 폭력입니다.

그간 제가 충성을 다해 반란군을 위해 일한 것은 잘 아시리라 믿으며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대기 명단에서 정윤환을 제외해 주십시오. 여려서 버티지 못할 겁니다. 정의든 불의든 마찬가집니다.

감사했습니다.

1022년 늦가을.

정성민 드림.

유은우는 편지를 내려놓았다. 다시 토끼 인형 속에 손을 넣었다. 사람만 한 토끼 인형의 속을 휘저으니 푹신한 솜 사이로 또 무언가 매끄러운 것이 닿았다. 손끝으로 잡아 빼냈다.

그것은 사진이었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녀와 갓난아기였다. 남자는 강보에 싸인 아기를 안고, 여자는 흰 실험복을 입은 채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였다. 둘은 활짝 웃고 있었고 아이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기를 감싼 포대기를 조심스럽게 안은 남자의 손목에서 기계식 손목시계가 매끄럽게 빛났다.

유은우는 오른쪽 손목을 사진에 천천히 가져다 댔다. 사진 속 남자의 시계와 제 시계를 나란히 두었다. 은색의 부품이 오밀조밀한 가운데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까만 세 개의 침은, 판에 박은 듯 같았다.

<낙원의 이론>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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