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1. 폭우(1권) (1/15)

VOL. 1

001. 폭우

비가 칼처럼 쏟아졌다.

― 정윤환. 1구역부터 12구역. 전원 사살. 제5유적지 개발 보고서 포함 기밀문서 다량 확보.

왼쪽 귀에 부착한 인터컴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폭우 속에서도 선명했다.

― 소연주. 오염 방어벽부터 네 번째 철책. 전원 사살. 제4유적지 반란군 간부 명단 확보.

― 박민준. 13구역부터 27구역. 전원 사살. 12-A지구로 통하는 전기 차단.

― 강지원. 본부 및 연구소…….

그 뒤로도 보고가 이어졌으나 김서혁은 석연찮았다. 파견한 부하는 모두 열 명. 보고도 열 개가 들어와야 할 터. 그런데 아홉뿐이다.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23-F지구로 보낸 최성욱의 보고가 아직이다. 23-F지구는 제3유적지에서도 변두리. 기껏해야 피라미가 전부고 그마저도 이미 죽은 목숨일 터. 확인 사살만 하면 될 텐데 왜 이렇게 늦는…….

팟, 팟, 팟. 저만치서 무언가가 공중으로 세차게 튀었다가 착지하고 다시 튀어 오르는 소리가 났다. 순식간에 지척까지 다가들었다. 김서혁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반쯤 허물어졌지만 여전히 높다란 건물 꼭대기로부터 누군가 뛰어내린다 싶더니 곧 메다 꽂히듯 바닥으로 착지했다. 김서혁의 바로 옆이었다. 충격으로 도로 면이 박살 나며 빗물과 아스팔트 조각이 사정없이 튀어 올랐다.

폭우 속에서 남자가 굽혔던 몸을 느리게 펴며 일어섰다. 정윤환이었다. 빛의 속도로 이동하던 방금과는 정반대로, 비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우의의 후드를 뒤집어쓰는 품이 막 잠에서 깬 것처럼 굼떴다.

“임무 완료했습니다, 대장.”

정윤환이 우의를 살짝 젖혀 보이자 제복 깃에 매달린 작은 메모리가 반짝였다.

“수집한 데이터입니다. 지금 드려요?”

“대기해.”

정윤환은 묵례하고 물러섰다. 그의 군화가 바닥을 부주의하게 디디면서 아스팔트 파편이 튀어 올라 김서혁의 망토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평소의 정윤환이라면 절대 없을 실수였다. 태도는 오만해도 실력은 정교했으니. 김서혁은 반사적으로 정윤환의 낯을 살폈다. 그러나 정윤환이 어린아이처럼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고 있어 표정을 읽기 힘들었다. 다만 턱 끝의 생채기만 선명했다. 김서혁은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다. 그는 정윤환이 다친 모습을 여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부상 있나? 작더라도 보고해.”

정윤환은 어깨를 굳히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가 씩 웃어 보였다.

“부상이요? 제가요? 대장도 참,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턱.”

김서혁의 지적에 정윤환이 장갑 낀 손끝으로 제 턱을 더듬었다. 어린 장난기만 줄줄 흐르던 낯에 그제야 당혹감이 스쳤다. 정윤환이 어색하게 말했다.

“어디 스쳤나 보네. 저도 미처 몰랐네요.”

정윤환은 김서혁의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내가 제 상사인지 동기인지 헷갈릴 정도로 천연덕스레 잘만 쳐다보더니.

“체면이 말이 아닌데. 이거 티 많이 나나요?”

하등 쓸모없는 질문에 김서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정윤환의 전신을 다시금 날카로이 뜯어보았다. 폭우 속에서도 여전히 화려한 이목구비. 예민한 턱 끝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빗물. 그렇게 당부해도 제대로 갖춰 입는 법이 없어 중요한 상징이 죄 빠져 단출한 제복. 그 위로 몸에 딱 맞는 코트와 우의. 귀찮다는 이유로 손목 단추를 잠그지도 않은 장갑. 아예 단추가 떨어져 나간 셔츠 소매. 늘 그렇듯 서너 칸이 빈 약물 케이스. 핏기가 덜 빠진 총. 꽉 조인 군화 끈.

평소와 다른 점은 없었다. 잠깐, 눈가가 조금 붉은 것 같기도…….

매서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김서혁은 다시 앞을 보았다. 소연주, 박민준, 강지원을 비롯해서 여덟 명의 부하가 속속 복귀하고 있었다. 소연주가 곧장 다가와 말했다.

“대장, 최성욱 보고가 늦습니다. 계속 통신을 시도했는데 응답도 없고, 지금 바로 가 봐야 할 것 같은…….”

그때였다. 모두의 인터컴에서 삐 소리가 났다. 최성욱의 보고가 이어지리라는 예상과 달리 차가운 기계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

― C-3과의 통신이 강제 종료됩니다.

김서혁은 반사적으로 홀스터에서 총을 뽑았다. 단단히 틀어쥐었다. 검게 빛나는 총신에 000 세 자리 붉은 숫자가 떠오르더니 상승했다. 동조율은 087에서 멈추었다. 김서혁은 총을 그대로 자신의 다리에 겨눠 번갈아 두 방을 쏘았다. 오른발을 가볍게 들었다가 아스팔트 바닥 위로 내리 그었다. 힘을 거의 주지 않았는데도 도로가 무시무시하게 할퀴어졌다. 온을 맞은 다리가 저릿저릿했다.

“23-F지구!”

연합군 제복 위로 검은 우의를 입은 열 명은 순식간에 바닥을 박차고 수직으로 날아올랐다. 건물과 건물의 꼭대기, 그 사이를 위태롭게 잇는 케이블 따위를 밟아 내며 그들은 맹수처럼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가공할 만한 속도로 질주하면서도 김서혁은 계속해서 최성욱과의 통신을 시도했다. 모두 실패. 인터컴이 사용자와 분리되었거나, 사용자의 심장박동이 멈췄거나. 전자든 후자든, 최성욱을 상대로 그런 짐작을 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낯설었다. 김서혁은 함대에 연락해 23-F지구로 구급선을 요청했다.

철골만 앙상하게 남은 빌딩을 밟고 튀어 올라 고가도로에 착지했다. 23-F지구. 고가도로 한가운데 최성욱이 새끼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피가 쏟아지는 한쪽 얼굴을 붙잡은 채 덜덜 떨고 있는 것을 보니 목숨이 끊어진 건 아니었다. 김서혁이 그를 살피려 몸을 낮추었을 때였다. 무릎에 물컹한 것이 닿았다.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왜 통신이 끊어졌는지 깨달았다. 인터컴이 부착된 귀 한쪽이 아스팔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끊어진 인공 신경 가닥들이 피 웅덩이에서 파드닥댔다.

김서혁은 최성욱의 검은 우의를 젖혔다. 두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소연주가 다가와 귀가 날아간 최성욱의 한쪽 얼굴을 압박했다.

“이게 대체…….”

“대장.”

최성욱이 질린 낯으로 김서혁의 팔을 틀어쥐었다. 단순히 부상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미, 믿기 힘드시겠지만, 대장도 소, 소, 소문 들으셨지요? 10대 후반, 어린애…….”

목이 쉬어 있었다.

“뭐?”

“며, 몇 달 전부터 괴상한, 괴상한 소문이 돌지 않았습니까. 흰 칼날 프로젝트. 반란군 놈들이 웬 어린애 하나를 살인병기로 키우고 있다는 소문 말입니다. 동조율이, 동조율이 100에 달한다는…….”

최성욱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봤습니다……. 제가, 봤어요. 총신에 100이 찍혀 있는 걸 제가 봤다고요!”

김서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몇 달 전, 그런 소문이 돌았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금방 사라졌다. 입에 올리기에는 말하는 이가 되레 민망하고, 가만히 듣기에는 듣는 이의 상식 수준을 얕보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비현실적인 낭설이었다.

반란군이 가능성이 엿보이는 어린애를 사로잡아 다듬어 전투력을 최대한까지 끌어올린 후, 인격을 삭제시키고 신체엔 명령 체계를 삽입해서 지휘부가 원하는 대로 조종한다는 소문이었다. 하지만 기계 삽입은 도시연합에서도 쉬이 건드리기 어려운,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금단의 영역이었다. 도시연합보다 기술력이 떨어지는 반란군이 시도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어려웠다.

“대장! 제발, 정말입니다! 반란군 제복을 입지도 않았고 고난도 운용도 없었지만, 동조율이 분명히 100이었다고요! 분명히!”

김서혁은 눈가를 찡그렸다.

“페이크?”

“아닙니다! 가짜 동조율이 아니에요! 그런 속도에, 그런 출력에, 그 무엇보다 제가 당했잖습니까. 제가, 이렇게요! 그놈은 분명 여기서 제일 가까운 제5도시로 도주할 겁니다. 그런 괴물이 도시로 들어가기라도 하면……. 젠장! 어서 가서 붙잡아야 한다고요! 지금 당장!”

최성욱이 관제탑 쪽을 가리키며 죽어라 악을 써 댔다.

“대장도 생각해 보세요! 나이는 많아 봤자 10대 후반이고, 동조율은 100에…….”

목소리를 쥐어짜는 최성욱의 턱에서 피 섞인 빗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이건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오늘 제3유적지를 습격해서 반란군을 죄다 몰살할 동안, 살인병기가 탈출해서 도망치고 있는 상황 아닙니까!”

김서혁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최성욱의 말을 전부 신뢰하지는 못했으나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반란군이라면 왜 목이 아닌 귀를 뜯었으며, 반란군이 아니라면 왜 다리를 부러뜨려 추격을 막았는가. 어쨌든 뒤가 구린 것만은 분명했다.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도시연합 정예군 최성욱을 무력화시키고 도주했다.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소연주, 장현철. 여기 남아 최성욱을 구급선에 이송시키고 모함에 합류해. 나머진 나와 함께 적을 수색한다.”

김서혁을 선두로, 그들은 즉시 땅을 박차고 솟구쳤다. 방향은 최성욱이 지목한 관제탑. 폭우가 전신을 갈겼다. 김서혁이 외쳤다.

“정윤환! 추적선!”

전봇대 꼭대기를 박차고 앞으로 튀어 나가던 정윤환이 허리에서 총을 뽑아 전방을 겨누었다. 캉! 총구가 튀어 올랐다. 흰 섬광이 새카만 어둠을 콱 찢어발기며 뻗어 나갔다.

“추적 걸었습니다!”

정윤환이 총을 홀스터에 꽂았다. 흰 섬광이 관제탑 너머 한 방향을 가리켰다. 풀려난 맹수처럼 달리던 그들에게 가이드라인이 생긴 셈이다. 적이 누구든 다 잡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김서혁은 생각했다. 하지만 정윤환은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는 와중에 그가 폭우를 뚫고 고함을 질렀다.

“대장! 이 속도로는 안 돼요! 표적이, 미친 듯이 빨라! 이러다 놓칩니다!”

놓쳐? 우리가? 강화된 허벅지가 뻐근했다. 김서혁은 이를 악문 채 지시했다.

“박민준! 속도!”

박민준이 총을 뽑아 아래를 향해 쏘았다. 몇 초 뒤, 옅은 푸른색을 띤 거대한 원판이 대지로부터 빠르게 부상하더니 그들의 몸을 그대로 통과하고 사라졌다. 김서혁의 왼쪽 손목에 채워진 얇은 금속 링 이프가 진동하더니 빛을 쏘아 올렸다. 빛은 김서혁의 왼쪽 눈가 앞에서 한 뼘가량의 반투명한 홀로그램 스크린으로 펼쳐졌다. 김서혁은 스크린에서 박민준의 푸른 서명을 확인했다. 달리는 속도가 현저히 높아지면서 이제 서로 간의 육성 대화는 불가능했다. 김서혁은 인터컴에 집중했다. 정윤환의 외침이 선명했다.

― 표적이 방향을 틀고 있습니다, 관제탑 기준 1시 방향…….

정윤환이 유지하고 있는 추적선이 한층 더 환하게 빛을 뿜었다. 그 끝에, 굉장히 안정적인 자세로 폐허 사이사이를 도약하는 인영이 보였다. 김서혁이 즉시 총을 겨냥했다. 캉! 총구가 튀며, 적이 막 디딤돌 삼아 도약했던 전봇대가 콱 비틀렸다. 그대로 총을 쥔 오른손을 강하게 위로 치켰다. 저 멀리서 전봇대가 땅에서 콰드득 뽑혀 나오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총을 강하게 휘둘렀다. 그 각도 그대로, 전봇대가 전선을 주렁주렁 매단 채 적이 막 착지한 건물 옥상으로 콱 메다 꽂혔다. 전선이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적의 다리를 휘감았다. 아니, 휘감으려고 했다.

― 피했어?

인터컴에서 박민준의 얼빠진 목소리가 들렸다.

적이 가뿐한 몸놀림으로 근처 건물 벽을 박차는 것이 보였다. 김서혁이 조준해서 수족처럼 휘두른 전선들은 그로부터 한참 아래, 애꿎은 안테나에 휘감겨 있었다. 김서혁은 숨을 누르며 다시 총을 들었다. 다른 표적을 설정했다. 도로에 뒤집어져 있는 거대한 덤프트럭이 제격으로 보였다. 캉! 덤프트럭에 온이 박히며 세차게 꿈틀했다. 김서혁이 총을 쥔 손을 수직으로 들어 올렸다가 가로로 세차게 휘둘렀다. 덤프트럭이 적이 막 착지하려는 고층건물에 그대로 돌진했다. 이미 반쯤 무너진 고층건물을 통째로 무너뜨려, 적이 추락할 시 포획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적이 고층건물이 아닌 덤프트럭 그 자체를 밟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시원하고 깨끗했다. 모든 동작에 낭비라고는 전혀 없었다.

“포위 사격!”

속으로 욕을 뱉으며 김서혁이 외쳤다. 정윤환과 박민준을 뺀 나머지가 일사불란하게 이동하며 사격했다. 몇몇은 허공에 거대한 덫을 깔고 지척의 빌딩을 무너뜨려 적의 퇴로를 위협적으로 막아섰다. 몇몇은 적이 위치한 바로 아래 지면을 사격했다. 대지로부터 거대한 손 네 개가 솟구쳐 올라 적을 덮쳤다. 적은 가공할 만한 속도로 세 번째 손까지는 수월하게 피했으나, 네 번째 손까지는 미처 피할 겨를이 없는지 드디어 홀스터에서 총을 뽑았다. 김서혁은 그 작은 손에, 그 까만 총신에 주목했다. 김서혁의 안구가 움직이는 방향을 수집한 이프가 스크린을 통해 적의 오른손을 확대하여 보여 주었다.

총을 잡은 모양이 딱 봐도 초보였다. 쏟아지는 장대비에 새파랗게 얼어붙은 손이 서툴게 총을 더듬어 방아쇠에 손가락 하나를 거는 게 똑똑히 보였다. 적은 심지어 총을 들어 어딘가를 겨누지도 않았다. 들고 있는 그대로 방아쇠만 잡아당겼다. 신중한 조준도, 계산의 여유도 없었다. 총신의 붉은 숫자 세 자리가 오르락내리락 미친 듯이 날뛰었다.

탕! 적의 총구로부터 푸른 섬광이 튀었다.

그것은 네 번째 손을 갈가리 찢는 것도 모자라, 사위를 두른 나머지 세 개의 손 모두를 파괴했다. 그 여파로 뒤편에서 적을 노리고 있던 트레일러 또한 그대로 폭발해 가루가 되었다.

감각을 의심하는 사이 김서혁은 중심을 잃었다. 주위에 단단하게 배치했던 온들이 삽시간에 무너져 흩어지고 있었다. 발을 헛디뎌 추락하기 직전에, 김서혁은 재빠르게 사격하여 간신히 철골 위로 발을 디디고 섰다.

― ……뭐야? 저 자식 지금 한 발 쏜 거 아니었어?

― 미친. 수천 발 같은 한 발이던데.

― 전체가 흔들렸어. 공간 전체가…….

― 최성욱이 동조율 100 어쩌고 한 거 진짜 아냐?

― 술 취했냐? 동조율 100이 어딨어? 촉진제를 수천 개 빨아도 그 수치는 못 나와!

― 그럼 저건 뭔데?

“조용!”

김서혁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적을 노려보았다. 이쪽은 현재 여덟. 그중 동조율 80을 넘기는 자는 김서혁 자신을 포함해 고작 셋. 그중 하나인 정윤환은 이미 추적선을 유지하고 있다. 대상에게 추적선을 걸었다가 해제하면 다시 걸기 힘들다. 적이 바보가 아닌 이상 두 번은 안 걸린다.

추적선을 포기하고 시야에 있을 때 한 방에 포획할 것인가. 아니면 만약을 위해 추적선을 유지할 것인가.

“정윤환, 추적선 빼.”

결단은 빨랐다. 지금 눈앞에 있는 자에게 단순 공격은 씨알도 안 먹힌다. 이곳 지리를 훤히 꿰뚫은 대담한 도주에, 치가 떨릴 정도로 사격이 깨끗했다. 눈앞의 적이 마음먹고 반격을 시도한다면 되레 이쪽에서 사상자가 나올 수도 있다는 직감이 기분 나쁜 농담처럼 등골을 타고 미끄러졌다.

― 네? 웬만하면 그냥 두는 게…….

“정윤환, 이선규, 나. 이렇게 셋이서 연합 사격한다. 나머진 뒤로 빠져.”

― 그러다 놓치면…….

“각자 위치로!”

흰 추적선이 뚝 끊기듯 사라졌다. 다음 순간, 동조율 80 아래인 다섯이 완만하게 뒤로 처졌다. 김서혁의 디스플레이에 떠 있는 박민준의 서명 아래로 네 개의 서명이 푸르게 추가되었다. 전투에서 빠지는 대신 서포트하여 공격진의 속도와 타격률을 높여 줄 터였다. 곧 정윤환과 이선규의 붉은 서명도 디스플레이에 떴다. 연합 사격을 위한 링크였다.

적을 바짝 포위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추격 인원은 셋으로 줄었지만 눈에 띄게 빨라진 이쪽을 경계하며 적이 방향을 크게 틀었다.

김서혁의 총이 적을 겨누었다. 정윤환과 이선규도 같은 지점을 사격하리라는 것은, 링크되어 좌표를 공유하는 이상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인터컴에 잡히는 호흡들이 긴장으로 팽팽했다. 김서혁이 속으로 타이밍을 맞췄다. 셋, 둘, 하나! 세 개의 총이 동시에 불을 뿜었다.

카앙! 굉음이 터지며 적의 지척에서 세 개의 불꽃이 맞붙었다. 쩍 하고 얼어붙는 소리가 뒤를 잇고, 수십 개의 빛 덩굴이 거미줄 퍼지듯 뒤엉키며 폭발했다. 적은 크게 도약하여 그 중심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빛 덩굴이 적을 거칠게 덮치고, 그대로 건물 옥상으로 사정없이 메다꽂았다. 적이 놓친 총이 날개 꺾인 까마귀처럼 추락했다.

됐어. 잡았다. 김서혁은 저도 모르게 안도하다가 그런 자신에게 놀랐다. 신경이 비늘처럼 일어서 진정될 줄 몰랐다.

― 이야. 연합 사격은 실전에서 처음 써 보는데, 이거 참. 우리 제법 손발이 잘 맞네요. 앞으로 자주 씁시다. 비주얼 한번 끝내주네…….

“정윤환, 인터컴에 대고 휘파람 불지 말라고 했지. 이선규, 속박은 네가 유지해. 링크, 서포트, 전부 해제한다.”

김서혁은 디스플레이에서 모두의 서명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총을 홀스터에 꽂았다.

이선규가 능숙하게 요령을 발휘했다. 빛 덩굴이 훅 줄어드는가 싶더니 적을 휘감아 단단히 포박했다.

김서혁이 가장 먼저 착지했다. 그 뒤로 여섯이 화살처럼 날아와 포로 주위를 두르며 봉쇄했다. 여전히 기세 좋게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그들은 형형한 눈빛으로 사로잡은 먹잇감을 응시했다.

정신없이 방어와 도주를 겸하던 장본인치곤 추격한 쪽이 화가 치밀 정도로 말끔했다. 비에 쫄딱 젖어 있었지만 떨고 있지 않았고, 포박당했음에도 호흡이 지독히 안정적이었다.

“타인 동조율 측정 가능한 사람 있나?”

“제 총에 깔려 있습니다.”

박민준이 홀스터에서 총을 뽑았다. 김서혁이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았다. 꼼짝도 못하고 있는 포로의 팔뚝에 총구를 대고 꽉 눌렀다. 콰득, 하고 총구가 옷 아래 살갗을 파고들었다. 포로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피 빠는 소리가 났다.

총신에 붉게 빛나는 숫자 세 자리가 떠올랐다. 000부터 천천히 상승했다. 030이 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동요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050을 넘고 070에 다다르자 모두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085. 090. 097. 거기서 동조율은 잠깐 주춤했다. 갑자기 003까지 확 떨어졌다.

“그럼 그렇지.”

누군가 뇌까렸다. 그때였다. 돌연 총이 덜걱거렸다. 붉은 숫자가 식별하지도 못할 만큼 날뛰었다. 이윽고 삑, 하고 측정이 완료되었을 때 김서혁은 제 눈을 의심했다.

100. 측정기가 감당할 수 있는 동조율 최대 수치였다.

그들은 잠깐 침묵했다. 폭우가 지면을 때리는 소리만 요란했다. 이선규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날씨가 이래서 총이 미쳤나?”

비 오는 날 총이 고장 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도 없었지만 아무도 그 말을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그 어떤 헛소리를 지껄이더라도 동조율 100보다는 말이 될 것 같았다.

정윤환이 입술을 짓씹다가 고개를 홱 돌려 박민준을 보았다.

“이런 수치는 불가능해. 박민준, 프로그램 제대로 된 거 맞아? 어디서 호환도 안 되는 구버전 깔아 온 거 아냐?”

“내 총 못 믿겠으면 네 팔뚝에라도 꽂아 보든가.”

박민준이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개중에 성질 급한 누군가가 자신의 동조율을 측정해 보겠다고 앞으로 나섰으나 김서혁은 총을 건네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총의 측정을 리셋시키고 자신의 팔뚝에 직접 내리눌렀다. 수치가 상승하다가 어느 지점에서 딱 멈추었다. 087. 김서혁 본인의 동조율이자, 현 도시연합군 최고 수치였다.

확인 사살. 김서혁은 총을 박민준에게 던져 주었다. 이제 함부로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누군가는 잡아먹을 듯, 누군가는 흥미롭게, 누군가는 경악하여, 다만 포로를 응시했다.

김서혁은 자신의 총을 뽑고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가 총구로 포로의 관자놀이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이곳 제3유적지는 반란군의 본부다. 반란군에 협조할 뜻이 없는 시민이라면 다른 유적지로 이주하라고 다섯 시간 전부터 세 차례에 걸쳐 경고했다. 그런데도 여태 남아 있었던 것. 우리 도시연합군을 공격한 것. 지금 당장 사살해도 충분할 정도로 네 죄가 중하다는 것 알고 있나?”

포로는 대답이 없었다. 이선규가 유지하고 있는 팽팽한 푸른 포박 때문에 포로는 비로 들끓는 바닥에 꼼짝없이 이마를 붙이고 있었다. 젖어 달라붙은 머리칼 아래 이어지는 뺨과 턱의 선이 퍽 앳되었다. 김서혁은 겨누고 있던 총구를 미끄러뜨려 포로의 낯을 뒤덮은 머리칼을 걷어 올렸다.

누군가 탄식했다.

“허. 애잖아.”

김서혁도 놀라 말을 잃었다.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내리깔고 바닥만 노려보고 있는 포로는 고작해야 10대 후반, 많아도 스물은 넘지 않아 보였다.

“난민보호법에 의하면, 시민권이 없는 자라도 동조자로 자각하는 즉시 도시연합 측으로 자진 신고하고 동조율 측정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나는 해마다 그 수치를 보고받고 있지. 하지만 동조율이 100으로 측정된 자가 있다는 보고는 받은 기억이 없다. 만약 네가 고의로 여태 동조율 측정을 받지 않았다면 그 또한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죄를 떼로 몰고 다니는군.”

김서혁은 포로의 관자놀이로 총구를 옮겼다.

“대답해. 왜 동조율 측정도 받지 않고 반란군 본부에 있는 거지?”

겨눈 총구에 힘을 더했다.

“반란군에게 사로잡혀 살인병기로 키워지고 있다는 동조율 100이 네놈인가?”

포로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김서혁의 눈짓에, 이선규가 줄곧 겨누고 있던 총을 빠르게 내쳤다. 총은 그저 허공을 잠깐 스쳤을 뿐이지만, 그와 동시에 포로는 포박 줄에 의해 잠깐 일으켜 세워지는 듯하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메다 꽂혔다. 어딘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포로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김서혁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살기 가득한 동공에 분노는 있으나 복종은 없었다.

찰나 김서혁은 몸을 바짝 굳혔다. 남보다 한 테 더 둘린 새까만 동공. 10대 후반. 동조율 100. 고난도 운용 불가. 속도나 출력 등 기본기 정점. 비정상적으로 안정적인 호흡. 그리고 여태까지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는 점.

같다. 그 말도 안 되는 괴상한 소문과 같다. 너무나 정확하게 일치해서 소름이 돋았다.

충격받은 이는 비단 김서혁만은 아니었다.

“하. 저 새끼 눈 좀 봐라. 동공이……, 저렇게 소름 끼치게 커져 있으면…….”

“맙소사, 그럼 그 소문이 진짜야? 살인병기 어쩌고 그게 사실이야?”

“개새끼들, 어린애 하나 잡아다가 이 무슨 미친 짓거리…….”

“야, 이선규! 정신 빼지 마! 이 자식 풀리면 우리 다 끝장이니까!”

“지금 죽일까? 죽여? 죽인다?”

“대장 지시 좀 기다려!”

“어떡할까요, 대장?”

“대장?”

어느새 전원 총을 겨누고 있었다. 김서혁이 눈만 깜빡여도 포로를 벌집으로 만들 기세였다. 그 긴장을 꾹 눌러 접듯 김서혁이 천천히 분명하게 말했다.

“강지원, 너 그때 기계 삽입 프로젝트 구상했다고 했지. 그 검토 보고서 일부가 반란군에게 넘어갔다고 들었다.”

“대장, 그 프로젝트는 이런 괴물을 만드는 게 아니라 상이군인의 재활을 목적으로 했습니다. 게다가 제대로 착수도 못 하고 무기한 유보되었습니다.”

“유능했던 군인을 유능한 무기로 바꾸는 프로젝트였다. 이론상 가능했지만, 가족 동의와 도덕적 정당성을 얻는 데 실패한 것이고.”

강지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매뉴얼은 있었을 거 아닌가.”

“인간에게 기계를 삽입할 경우 대부분은 침식 후 사망합니다. 짧게는 한두 시간, 길게는 며칠 만에. 그러나 도시연합이 주의하라고 한 독극물 몇 가지를 일정 비율로 섞어 정맥에 주사하면, 침식의 과정이 변질합니다. 가장 먼저 동공 확장, 언어 기능 마비, 절대적인 호흡의 안정, 무감정의 단계를 거칩니다. 마지막으로 기계가 신체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심장이 멈춥니다. 이때부터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머물게 됩니다.”

“자네가 보기에 지금 이 상태는 어떤가.”

강지원이 무표정하게 포로를 내려다보았다.

“기계가 삽입되었으나 미완성이라 판단됩니다.”

“근거는?”

“이곳 제3유적지의 반란군은 단 한 놈도 남겨 두지 않고 아군이 전부 소탕했습니다. 가능한 범위 내에 살인병기를 조종할 만한 자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고로 살인병기의 자체 판단에 의해 저희로부터 도주하고 있었다는 결론이 납니다. 더불어 최성욱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살인병기 본인에게 불리함에도 굳이 목격자를 살려 두었으니, 생존 본능뿐 아니라 인격도 남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애초에 살인병기로 완성되면 자의로 움직이는 것 자체가 불가합니다. 기관총은 혼자 걸어 다니지 못합니다.”

“이의 제기합니다. 전부 다 죽였다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어디 쥐새끼라도 하나 남아서 이 괴물을 조종하고 있을지 누가 압니까? 포박 풀고 날뛰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정윤환이 이를 갈아붙였다. 시선도 총구도 정확히 포로의 미간을 향한 채였다. 김서혁이 왼손을 들어 저지했다.

“정윤환, 우리 도시연합이 여태 살인병기를 만들지 못한 이유가 뭐지?”

정윤환이 눈을 찡그렸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하지만 기술이 워낙 까다롭고……, 무엇보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지만 강력하다. 그에는 이의가 없지?”

“그야……. 네? 설마 이걸 데려가겠다는 건 아니시죠?”

“압도적인 전력이다. 마다할 이유가 있나. 우리 도시연합이 세간의 눈 때문에 할 수 없었던 비인간적인 행위를 반란군이 대신 뼈 빠지게 해서 우리 코앞에 갖다 바친 셈이 되는군.”

“대장!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반란군은 무조건 즉결처분…….”

“정확히 표현해. 반란군이 아니라 반란군의 살인병기다. 전리품을 가지는 게 뭐가 나쁘지.”

“이딴 걸 데리고 귀함했다간 징계 처분입니다!”

“구제할 가능성이 없다면 즉살이 맞다. 하지만 아직 인간이라면, 반란군에게 붙잡혀 희생당한 민간인이 아닌가. 그것도 동조율이 100에 달하는 민간인. 이런 인재를 즉살한다? 아까운 걸 넘어 막대한 손해다.”

정윤환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김서혁은 다시 포로를 응시했다.

“강지원, 아까 이놈은 최성욱의 두 다리를 부러뜨리고 인터컴이 붙은 한쪽 귀만 잘라 낸 뒤 도주했다. 원격으로 조종하는 자가 살인병기에게 그런 정교한 지시를 내리는 것이 가능한가?”

“거의 불가합니다. 살인병기는 강력하지만, 그 명령 체계는 지극히 단순합니다. 개에게 도둑을 물어 죽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도둑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귀를 자른 후 도망치라고 가르치기는 어렵습니다. 같은 이치입니다.”

강지원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하지만 대장, 인간에게 기계를 삽입해서 살인병기로 만든 사례는 여태 전무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그냥 이론일 뿐입니다. 만약 만들면 어떨까 하는 그런 탁상공론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변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상부로 데려가면 필히 골칫거리가 될 것이며, 그 책임은 우리가 져야 합니다. 즉살하자는 정윤환의 제안에 저 역시 찬성입니다. 미완성이라고 안전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감정한 살인병기치곤 너무 대놓고 화를 내는데.”

김서혁이 턱짓으로 포로의 눈을 가리켰다. 비정상적으로 둥그렇게 열린 동공이 새까맸다. 폭우가 지면을 때리며 일으킨 뿌연 물안개 속에서도 짐승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감정이 없기는커녕 분노에 점령당한 것 같았다.

“하지만…….”

강지원이 주저했다.

“이선규, 속박 제대로 유지해. 내가 확인한다.”

김서혁은 겨누고 있던 총을 내렸다. 여차하면 포로를 쏴 죽이고 대장을 보호하겠다는 듯, 뒤에서 정윤환이 성큼 다가붙었다. 김서혁은 망설임 없이 포로의 손목을 잡았다.

죽여야 할 괴물인지, 괴물이 되다 만 보물인지 눈으로는 알 수 없었다.

비를 오래 맞아 차가워진 손가락은 무뎌, 맥을 느낄 수 없었다. 손목은 포기하고, 김서혁은 포로의 멱살을 잡아당겨 그 가슴팍에 귀를 대었다. 다른 쪽 귀는 틀어막고 숨을 멈추었다. 온몸을 꽉 채우던 빗소리가 한결 수그러들었다. 그러자 들렸다.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것처럼 세차게, 심장이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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