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외전) (9/9)

#9. 외전 – 부산, 그리고 파리에서

태준과 연우는 모든 사태가 끝나고 부산의 제우스로 다시 향했다. 외국에 장기간 동안 나가있기라도 할 듯이 어마무시한 양의 캐리어들을 싣고 왔다.

제우스 펜트하우스 안.

태준과 연우는 제우스에서 바라다 보이는 해운대의 절경에 감탄하며 오션뷰를 담당하고 있는 거실의 통유리 곁으로 점차 빠져들 듯 다가섰다.

쏴아아, 쏴아아.

워낙 고층인지라 잘 들리지는 않지만, 저 멀리서부터 만들어져오는 파도가 육지로 다가와 치닫는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파도 소리를 연상해내는 둘이었다.

‘내 마음도 다 씻어가라, 파도야.’

연우는 저 멀리서부터 몸집을 키워나가는 파도와 육지에 닿아 부서지며 백사장의 모래알들을 다시 휩쓸고 바다로 들어가는 파도를 번갈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태준은 그렇게 파도를 감상하고 있는 연우를 잠시 바라봤다.

‘저번에 여기 함께 있을 때는 솔직히 행복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후련하달까.’

태준은 연우 또한 비슷한 감정이리라, 아니 자신보다 더한 후련함을 가지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쪽.

태준은 느닷없이 연우의 뺨에 뽀뽀했다. 연우는 태준을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야?”

‘이 사람은 설명 안 해주면 잘 모르는 것 같더라.’

태준은 늘 자신보단 감수성이 덜해 보이던 연우에게 앞으로 매번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잘 설명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고생 많았다고 뽀뽀해주는 거예요.”

연우는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와 비슷한 정도로 반짝이는 태준의 검은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고생이 많았다고 위로해주는 거야? 잘 이겨냈다고 칭찬해주는 건가?’

태준은 연우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연우가 별말 없이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으면 정서가 안정된 상태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사실 연우는 제 어미에게서도 받아보지 못한 드문 애정표현에 매번 행복한 물음표를 띄우며 고분고분해지는 것이었는데 말이었다.

“내 생모가 부산 분이셨나 봐.”

자신이 계획하지 않았던 스킨십에는 어떻게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를 몰랐던 연우는 다른 화제를 던지기로 했다.

“그러게요. 부산 분이셨나 봐요. 부산의 납골당에 안치시킨 걸 보니까.”

“너랑 가보고 싶어.”

“같이 가요. 당연히 내가 같이 가줘야죠. 지금 갈 거예요?”

“응, 지금 빨리 갔다 오자.”

“저 짐들은 그러면 갔다 와서 정리하는 걸로 해요.”

“응.”

태준은 연우의 손을 한번 꽉 잡아주고는 놓았다. 서두르자는 표시였다.

부산 영락공원 봉안당.

[고 예서화]

유골함이 보이지는 않지만, 태준의 엄마가 줬던 쪽지에 적힌 연우의 생모 성함이었다. 사물함같이 생긴 곳 밖으로는 동그랗고 작은 자주 빛의 조화 화환이 걸려 있었고, 고인의 위패도 걸려 있었다.

“어머니….”

연우는 고인의 이름을 한번 쓰다듬어봤다.

‘알지 못했다면 남의 유골인 줄로만 알고 평생을 지나치거나 방치해 버렸을 텐데. 그저 남들이 이렇게 관리하도록 만 놔뒀을 텐데. 이제야 왔습니다. 이제야 아들이 왔습니다. 이렇게 다 큰 모습으로 왔습니다.’

연우의 눈에서는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코와 입, 볼과 턱이 모두 흔들리면서 울음이 터졌다.

“엄마, 엄마.”

털썩 주저앉아 연우와 태준 뿐인 칸에서 마음 놓고 울기 시작했다.

까딱까딱.

‘와보세요.’

연우의 옆에서 우는 모습을 마음 아프게 보고 있던 태준은 쫓아온 납골당 관리자와 눈이 마주치고 관리자가 하는 손짓을 따라 관리자에게 다가갔다.

“이거, 어제 신혼집 집사라고 하는 분이 주고 가셨어요. 저 유골함에 계신 분이 생전에 쓰셨던 편지라는데… 아들이 오게 되면 주라고 하더라고요.”

“네…. 감사합니다.”

관리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가슴이 먹먹해진 태준은 연우처럼 눈물이 방울방울 흘렀다.

‘오래전에 편지를 쓰고 가셨구나. 무슨 생각으로 남기고 가신 걸까. 갓난 아들을 두고. 그리고 우리 집 집사님도 이미 많이 알고 계셨구나.’

플로리스트 자격증이 있는 데다 태준의 사업을 맡아서 하고 계신 집사님을 잠시 떠올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울고 있는 연우에게 다가가서 편지를 들이밀었다.

“이게 뭔데?”

“고인이 남기신 편지래요. 30년 전쯤에 써 두신 건가 봐요. 우리 신혼집의 대장 집사님이 이걸 어제 여기로 가져오셨대요.”

툭, 툭, 툭.

연우는 편지를 열지도 않은 상태에서 편지를 쥐고 더 큰 눈물방울들을 떨어뜨렸다. 편지 봉투가 연우의 눈물방울들로 얼룩졌다. 연우는 위패에 적혀있는 자신의 생모 성함을 다시 한 번 더 올려다보고는 마음 굳게 먹고 편지를 뜯어봤다.

툭.

고인으로 추정되는 여자의 사진이 떨어졌다.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 연우처럼 길게 생긴 눈과 살짝 매부리인 듯 보이는 높은 코. 커 보이는 키에 롱코트를 입고 버킨 백을 든 채로 에펠 탑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찍힌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뒷면에 겹쳐져 있던 연우의 태아 사진이 보였다.

후두둑.

“엄마, 엄마.”

연우의 눈에서는 눈물이 또다시 많이 떨어지고 제 어미를 한참 동안 뚫어져라 감상했다.

‘예쁘네, 우리 엄마. 내가 엄마 배에 이렇게 있었구나.’

[사랑하는 나의 아들에게.

안녕 연우야. 나는 너를 낳아준 엄마란다.

어떻게 살고 있을 때 이 편지를 열어보게 될지는 모르겠구나.

아마도 그동안에 내가 너를 오랫동안 돌봐주지 못했을 거야.

누구의 손에서 어떻게 자라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먹고 사는 데 있어서는 큰 문제가 없이 건강하게 잘 자란 것이면 좋겠구나.

엄마가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주지는 못할 것 같아서 정말 미안하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엄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나의 아들아.’하고 잘 부르지도 못하겠어, 사실은.

엄마는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란다. 주로 유화로 꽃을 그리던 화가.

너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각자 수묵화를 그리고 시를 지으시던 예인들이셨다.

비록 엄마가 곁을 지켜주진 못할 것 같지만, 아름다운 세상을 많이 보고 살아갈 수 있게 되면 좋겠어.

아빠가 너무 안 좋게 너를 대한다면 최대한 빨리 인연을 끊어버리렴.

안 좋은 천륜은 거슬러도 되는 거란다. 너무 착하게만 살지 마.

예쁜 세상 보고 즐기다가 좋은 짝도 만날 수 있으면 만나고, 딱히 좋은 짝을 못 만난다면 그저 혼자서 자유로이 살아도 좋고.

멋있게 살고 싶으면 멋있게 살아도 좋고.

엄마 뱃속에서 누리던 너만의 좋은 세상을 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도

오롯이 누리며 살게 되면 참 좋겠다.

부디 행복하게 살다가 이 편지를 읽을 수 있게 되기를.

너의 생모, 예서화가.

추신, 첨부된 사진들은 각각 나의 모습과 너의 모습이 맞단다.]

연우는 편지를 읽는 내내 눈물을 많이 흘려 편지지가 많이 젖을 정도가 되었지만 편지의 말미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오래된 바람에 목이 메였다.

‘태준이가 있어서 겨우 행복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전까진 불행했어요. 엄마의 바람과는 다르게.’

한동안 편지지를 손에 꼭 쥐고 눈물에 번진 글자 하나하나를 애처롭게 살펴보던 연우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젖은 편지지를 원상복구 해보려고 차가운 바닥에 대고 말려도 보고 다림질을 하듯이 살살 펴보기도 했다.

태준은 연우가 마음껏 울고 나서 정신 차릴 수 있도록 곁에서 지켜봐 주기만 했다. 연우가 우는 모습이 너무나도 마음 아파서 함께 울었을 뿐이었다. 최대한 연우보다는 덜 울려고 노력했다. 연우의 생모가 연우에게 뭐라고 해놨는지도 함께 읽지도 않았다.

‘엄마로서 아들한테만 하고 싶은 말들이 적혀있을 수도 있어.’

배우자로서 같이 읽어봐 줘야하나 싶은 마음도 조금은 들었지만, 고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진짜 읽어봐야 할 사람은 연우밖에 없었으니까.

‘마음껏 슬퍼하세요. 오롯이 고인과 당신만의 시간이에요.’

다음 날.

태준과 연우는 제우스에서 일찍 일어났다. 전날 진이 빠지도록 울었던 연우가 지쳐서 일찍 곯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산책가자.”

연우가 먼저 산책가자고 하는 요청에 태준은 잠시 의아했다.

‘슬픔을 이겨보려고 하는 건가? 한 일주일은 슬퍼해도 되는데.’

애도 기간을 넉넉잡아 한 일주일 정도로 생각해놨던 태준은 먼저 활동적으로 나서는 연우의 모습에 그냥 따라주기로 했다.

동백섬.

해가 뜨자마자 집을 나선 둘은 해무로 덮여진 동백섬의 산책로에서 각각 트레이닝 복과 편안한 원피스를 입고 산책했다.

‘이야, 자연 미스트 오랜만에 맞아보네.’

해무로 인해서 높다란 빌딩 숲도 잘 보이지 않을 지경. 태준은 몽환적인 분위기의 산책길을 보며 연우의 뒤에서 천천히 쫓아가고 있었다.

‘아직 슬프긴 슬픈 거겠지?’

함께 어딘가를 걷거나 뛰고 있으면 그래도 항상 말을 걸던 연우였는데 지금은 몇 분째 아무 말 없이 혼자서 앞만 보면서 천천히 뛰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듬직하게 잘 자랐어요, 어머님.’

태준은 뛰고 있는 연우의 큰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늘에 있을 연우의 생모에게 마음으로 알려줬다.

‘제가 더 행복하게 해줄게요.’

연우의 찰랑이는 머리칼을 바라보며 태준은 연우가 울고 있는 건 아닌지 문득 궁금했다. 연우의 곁으로 빨리 다가와서 연우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안 울고 있네?’

올려다본 연우의 얼굴에는 잘생긴 이목구비만 잘 배치되어있을 뿐이었다, 눈물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다행이다.”

“뭐가?”

태준의 난데없는 발언에 놀라며 내려다 봤다.

“안 울고 있어서 다행이다.”

연우는 걷는 속도를 태준과 함께 맞추기 위해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내가 우는 줄 알았어?”

“네, 근데 씩씩하네. 우리 남편.”

“울게 뭐가 있어.”

씩.

웃어주는 연우를 따라 함께 씩 웃어 보였다.

“내가 너랑 행복하면 된대.”

갑자기 멈춰서는 연우를 따라 멈춰섰다.

“응? 나랑 행복하면 된다고요? 미래의 며느리로 나를 점지해 두셨던 거예요?”

“훗.”

태준의 기막힌 상상력에 웃음이 다 났다.

“아니~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내 짝이랑 행복하게 살아주면 좋겠대.”

“오옹~ 그러면 나네!”

“맞아.”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요!”

쪽.

태준은 까치발을 들어 점프하면서 연우의 볼에 뽀뽀를 했다.

‘귀엽고 예쁜 아이.’

연우는 태준을 세상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우리 따뜻한 거 먹고 들어가자.”

“따뜻한 거요?”

“응, 우리 아기한테 이 날씨, 이 시간대, 이 차림새는 별로인 것 같아.”

연우는 태준의 원피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아나 보네요. 그래도 걸을 만은 하니까 나온 거 긴한데, 그래요. 주변에 미역국 맛집 있던데 거기 갔다가 집에 들어가요.”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일주일 뒤.

태준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는 연우가 어쩐지 어색했다. 지난번에도 이런 비슷한 시기는 있었지만, 그땐 회사의 직책이라도 달고 있을 때였다.

“있잖아요.”

거실의 안락의자에 앉아서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는 연우에게 다가가 태준이 물었다.

“응. 왜?”

“우리 돈 어떻게 해요?”

“뭐? 벌써부터 돈 걱정이야?”

“네. 여보가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잖아요. 회사도 부도났고.”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걱정될 만도 하지. 저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살고 있나 싶기도 하지?”

난생처음 돈으로 딴지 거는 태준의 모습에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 연우였다.

“솔직히 그래요.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어디 따로 모아둔 돈이 있어요?”

“응, 있어. 없었으면 우리 신혼집도 저당 잡혀서 매물로 나왔을 거야. 근데 그럴 일은 없어.”

“어떻게요?”

“예당이 가지고 있던 빚은 부도 처리되면서 실소유주인 아버지 몫으로 들어갔었는데, 아버지가 자살하시고 나서 아버지 개인 빚은 그냥 내가 파산 신청했어. 어차피 6개월 이상 같이 동거도 안 하고 있었고, 내가 다니고 있던 회사도 부도난 걸로 되어서 난 경제력이 현재는 거의 없는 상태로 되어 있잖아. 그 상태면 아버지 빚은 내가 안 갚아도 되는 거잖아? 그래서 나는 별로 걱정할 게 없어.”

“돌아가신 아버님 빚은 그렇다 치고, 그러면 생활비는요?”

“해놓은 투자가 얼마나 많은데. 다 타인 명의로 올려놔서 그렇지 실소유주는 나야. 아직 우리가 평생 먹고 살만큼의 자산이 있기는 있어.”

“그러면 그런 애들 처분해가면서 이렇게 살 거예요?”

안도감인지 한심함인지 정체를 오묘하게 알아들을 수 없게 하는 태준의 말에 연우는 조금 떨떠름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건 아니지. 재기해야지. 투자해둔 자산에는 많이 손 안대고 살 수 있도록. 계속해서 잘 살게 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아니요.”

단호하게 들리는 태준의 한 마디에 연우는 눈이 동그래졌다.

“뭐?”

“당신이 계속 일 안 하고 더 안정감 있게 살지 못하게 만든다면 나는 이혼하고 혼자서 여유 있고 멋있게 살 거예요. 당신 떠날 거예요.”

“진짜야?”

“네. 나는 아직 젊디젊은 나이라고요. 사업도 해봤고. 나 혼자서 애 부양하면서 못살 이유가 없어요.”

“그래도 나 없으면 애 키우면서 일하기 힘들 텐데.”

“백수 남편이랑 사느니 그게 나아요.”

바가지 긁기 시작하는 태준의 태도에 연우는 뭔가 모르게 살짝 불안해진다. 자존심도 나름대로 많이 상했다.

“한 반년만 쉴게.”

태준의 눈치를 본다.

“진짜? 반년 뒤에는 다시 열일할 거예요?”

“응. 당연하지. 내가 이렇게 바가지 긁히면서 살 수 있겠어?”

“좋아요! 생각해보면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반년 정도는 쉬는 거 허락해줄게요.”

‘허락이라.’

가정 내의 정치에서 밀려난 듯한 느낌을 받은 연우는 현실을 직시하게 됐다.

‘내 지금 위치가 이렇구나. 더 이상 슬퍼하고만 있을 겨를이 없긴 없구나. 와이프부터가 이렇게 나를 긁어대고 있어. 나는 돈 많은 백수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살짝 자괴감에 빠졌지만 이내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이고 수긍했다.

끄덕끄덕.

태준에게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년 동안 어디 가 있을 거예요? 설마 부산에서만 있겠다는 건 아니겠지?”

“파리로 가자. 엄마 사진에 있던 파리.”

“좋아요. 저 짐이면 곧장 공항으로 가도 손색이 없겠다.”

며칠 뒤, 김해공항.

공항의 전광판에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

[태성그룹 회장, 대국민 사과문 발표]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께 대한민국 대기업의 대표 경영인으로서, 기득권을 대표하는 알파로서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최근까지 진행되고 있는 오메가 인권 운동의 발단에는 저희 태성그룹 또한 깊은 연관이 있었습니다. 정치권의 경제적 요구에 단호히 대응하지 못한 점, 그리고 기업인으로서 정경유착을 통해 이득을 취하려는 시도를 한 점에 대해서도 깊은 사과를 드립니다.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한 기업의 회장으로서 자식들과 타 경제인들에게 모범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메가의 인권을 가볍게 여기고 행하며 살아온 세월을 반성합니다. 최근까지 보도되고 있는 내용들과 관련하여 전국의 수많은 오메가 분들, 그리고 그들과 가족으로 있으신 알파 분들께도 말로 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겨드리게 되어 사과드립니다.”

계속 진행되는 제 아버지의 발표에 태준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원래 체면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던 양반은 아니었으니까. 돈이 더 중한 양반이었지. 그런 사람이 저렇게 사과를 해보면 뭐해. 사람은 바뀌는 게 아니야. 말로는 누가 저렇게 못해. 특히 돈 장사 해야 되는 기업인이.’

뾰로통해진 태준의 표정을 바라보는 연우였다. 연우는 뭔가 위로의 말을 건네려다가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기로 했다. 태준이는 계속 태성그룹 회장이 마음에 안드는 게 틀림없었으니까.

다음 날, 파리.

쌀쌀한 가을을 맞이하듯 알록달록 색이 들고 있는 단풍들은 저마다 사람들이 밑을 지나다닐 때마다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태준과 연우는 숙박 전문 어플로 예약해둔 샹젤리제 거리 근처의 앤틱한 숙소로 향했다. 도착한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뻗었다.

“우와, 짐이 너무 무거워서 죽을 뻔 했어요.”

물론 우버 택시로 숙소 앞까지 오기는 했지만 오래된 숙소라 4층까지의 계단은 짐들을 짊어지고 여러 번 오르락내리락 거려야만 했다.

숙소 안의 낡아 보이는 오션블루 색의 암막 커튼과 고풍스럽지만 어쩌면 살짝 조잡해 보이는 금색의 넝쿨 모양이 들어간 하얀 틀의 침대, 그 위의 푸른 빛 침구가 그들을 맞이했다. 비슷한 테마의 작은 원형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들이 보였고, 바닥에는 갈색 바탕에 금색 넝쿨무늬가 수놓아진 카펫이 깔려있었다. 침실 공간 곁으로는 갈색의 아일랜드 식탁 기준으로 그리 작지는 않은 하얀색의 주방이 보였다.

촤라락.

태준은 암막 커튼을 걷고 테라스로 향했다. 겨우 두어 사람만이 앉아서 즐길 수 있을 만한 나무로 된 간이 테이블과 간이 의자가 테라스에는 놓여있고,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이 그 어디서 보다 크게 보였다.

‘암막 커튼이 왜 있는지 알겠어. 에펠탑이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까.’

에펠탑의 전구들이 얼마나 빛이 나는지를 알고 있던 태준은 거의 완벽에 가깝게 빛을 차단하고 있던 암막 커튼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다른 곳 가지 말고 좀 자다가 저녁에 내가 예약해놓은 미슐랭 가자.”

“미슐랭 예약해놨어요?”

“응. 우리 숙소에서 보이는 것처럼 에펠탑이 엄청 크게는 안 보이는데, 에펠탑이 한눈에 들어오고 암튼 엄청 예쁘게 들어오는 데가 있어. 거기 가자.”

“미슐랭 별 몇 갠데요?”

“쓰리 스타-.”

“오올~ 아쌰!”

일부러 귀엽게 환호성을 내지르는 태준의 표정을 보며 연우는 기분 좋게 웃으며 침대에 누워있었다.

“근데 원래 미슐랭은 그때그때 예약 못 하지 않아요? 보통 예약 한번 하면 엄청 기다려야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보통은 그렇지. 거기 VIP 손님들 중에 나랑 친분 있는 사람이 있어서. 지인 찬스로 예약 가능했지.”

“고마워요. 나 때문에 그런 번거로운 일도 다 하고.”

“아니야. 나를 위해서도 한두 번 그래봤었는데 뭐. 널 데리고 가는 건데 그렇게 못할까?”

태준은 연우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날 저녁.

보통 피곤한 게 아니었는지 꼭 껴안고 자던 평소 때와는 다르게 각자 널브러져서 자던 둘은 해가 지기 전에 일어나서 정장에 가까운 차림으로 갈아입고 노을이 질 즈음에 미슐랭 레스토랑으로 도착했다.

“What do you want to order?(뭐 주문하실래요?)”

“I’d like to oreder today’s menu for two.(오늘의 메뉴 2인분으로 부탁해요.)”

“What kind of wine do you want?(와인 종류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Chateau margaux, please.”

에피타이저로 미디움 굽기의 소고기가 올려져 있는 샐러드가 나왔다. 태준은 얇고 넓게 썰린 소고기로 야채를 쌈 싸 먹듯 먹었다.

저녁 8시.

에펠탑에는 노란 불이 켜지고 흰색 불들이 반짝반짝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며 화려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우와, 이쁘다.”

숙소에서보다 크게는 보이지 않는 에펠탑이지만 숙소에서 봤으면 너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곳, 에펠탑을 마주 보고 있는 위치에서의 레스토랑 뷰는 에펠탑이 명화의 중심에 그려진 피사체처럼 한눈에 보였다. 에펠탑이 반짝이는 정각 때마다 에펠탑은 이 레스토랑의 월세 값을 톡톡히 해줬다.

“미슐랭 스타를 매길 때 경치도 당연히 심사 요소에 들겠죠?”

“당연히 들겠지? 그런데 그렇게 높은 비중을 차지 할까는 싶어.”

“음식을 더 먹어봐야지 자릿값으로 매겨진 스타인지, 오로지 음식과 서비스로만 매겨진 스타인지를 알 수 있겠구만. 에펠탑이 워낙에 화려해서 말이에요. 별로 안 좋아하는 음식이 나와도 맛만 좋게 느껴지겠다.”

찰칵, 찰칵.

이 미슐랭에 와 있던 관광객들이나 현지 고객들은 에펠탑을 향해 열심히 사진을 찍어댔다.

띵.

태준도 따라서 동영상 녹화 버튼을 누르고 반짝이는 에펠탑을 예쁘게 담았다.

[메시지 전송]

띠링.

태준이 보낸 에펠탑 동영상이 연우에게 와 있었다.

“우리 다음에 탑 앞에 피크닉 가서도 둘이서 사진 찍자.”

‘생모가 에펠탑 앞에서 찍은 사진이 생각나서 그런 건가?’

편지 내용은 보지 않았지만, 생모의 사진만은 연우와 함께 봤던 태준이었다.

“그래요!”

쿨하게 웃으며 대답해주는 태준.

다음 날.

어제 밤에 기분 좋은 섹스를 나눈 둘은 몽마르트 언덕에 가보기로 했다.

“앞으로 몇 달은 있을 파리인데 파리 전경이 보이는 언덕에 일단 먼저 가 봐요. 우리!”

태준의 생각이었다.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길가에 있는 옷 가게, 신발 가게, 기념품 가게들을 구경하는 둘이었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이 보이고 진짜 푸른 몽마르트 언덕이 시작되자 태준은 들뜬 마음으로 한 걸음 두 걸음씩 폴짝거리며 올라가려고 했다.

찹.

그러는 태준의 손목을 끌어당기며 태준을 진정시키는 연우였다. 연우는 올라가기 전에 파리 전경부터 보자며 몽마르트 언덕의 펜스에 기대섰다.

“좋다. 파리가 다 보이네!”

내려다보이는 파리를 보며 환호성을 지르는 태준이었다. 맑은 날, 맑은 시간대에 와서 더 없이 평생 눈에 담으며 살아도 좋을 만한 파리의 모습이었다.

“여보는 임신했어도 이렇게 나다니는 게 안 힘들어요?”

“운동 되고 좋죠, 뭐. 운동 안 하면 애가 얼마나 안에서 돌아다니는데요. 어디 다니고 싶다고 난리에요.”

“임신할 때는 이렇게 많이 움직이는 거 별로 안 좋다던데. 에이, 다음에는 이렇게 힘든 데는 오지말자고 해야겠다.”

“아직은 괜찮아요.”

“조금만 더 있으면 조산할 수도 있는 달이잖아요. 그러고 보니까 지금도 그런데? 지금도 애가 만약에 나온다고 하면 팔삭둥이로 태어날 수도 있어요.”

태준은 문득 존댓말로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연우를 발견했다. 연우는 원래부터 태준에게 반존대를 잘 섞어가며 써오기는 했으나 좀 중요한 얘기일 때는 주로 존댓말을 해오는 것 같았다.

‘지금 저 사람 나름대로 중요한 얘기한다고 존댓말 하는 거지?’

“음, 그렇네요. 그러면 오늘 이후로 두 달 정도는 여기 오지 맙시다. 그러면 되죠? 그 안에는 애가 태어날 테니까.”

“말 잘 들어줘서 고마워요.”

태준과 민혁은 파리 전경을 담은 동영상도 파노라마로 한 번 찍고 나서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향해 천천히 올라갔다.

성당 안은 방문객들로 북적거렸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와중에도 매우 천천히 이동되는 행렬에 의해 태준은 성당 안의 천장이며 기둥이며 바닥이며 곳곳을 바쁜 눈으로 스캔을 해댔고, 연우는 잠시 혼자서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중앙 천장에 그려진 그리스도를 보며 사색에 빠졌다.

“우리 여기 잠시 앉아있자.”

수많은 의자 중 중간쯤에 자리한 둘은 각자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우와, 오랜 만에 와봐서 그런지 또 새로 보는 것 같아. 천장에서 빛이 저렇게 많이 들어오니까 진짜 신성한 장소 같아. 천사들의 조각상이 벽에 저렇게 크게 붙어있으니까 또 신성스럽네. 예수님이 우리 전부 다를 내려다보고 있어. 천주교니까 그리스도인가? 스테인드글라스 저렇게 큰 걸 실제로 이런 성당에서 보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작품인지를 몸소 느끼겠어!’

태준은 계속해서 이곳저곳을 뚫어져라 살펴봤다. 반면에 연우는 두 손을 깍지 끼고 눈을 감아 기도했다.

‘나보다 무조건 못한 이들이 오메가들이라고 단정 짓고 산 삶을 참회합니다. 나와 비슷한 알파들에게 내가 배반당했으며 그 후로 내게 남은 사람은 내가 열등하다고 봐온 오메가 하나뿐이었습니다. 끝까지 남은 사람이 다름 아닌 오메가였습니다. 그들의 배려심과 이해심을 열등함과 나약함으로 봐온 나를 부디 용서하소서.’

딩, 딩, 딩.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정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마치 연우의 사죄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성당을 나오고 나서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져있는 연우를 본 태준은 화들짝 놀랬다.

“히익, 설마 성당이 너무 아름다워서 울었어요?”

태준은 자신이 관찰한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아름다운 면들을 연우도 함께 관찰해서 울었나 싶었다.

“아니, 나 계속 기도하고 있었는데.”

“어머니 생각했어요?”

“아니. 그것도 아니야. 그냥 내 삶을 반성했지. 후회되는 일들이 많아.”

태준은 굳이 더 이상 물어보고 싶지가 않았다.

“괜찮아요. 앞으로 후회될 일들은 안 만들면 되는 거예요. 행복해지면 되는 거예요!”

연우는 태준의 긍정적인 목소리를 듣고는 언덕을 내려가기 전에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다시 한 번 올려다봤다.

‘감사합니다. 이런 귀한 아이를 내 배우자로 선물해주셔서. 더 이상의 선물은 바라지도 않겠습니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은 또다시 그에 대답이라도 하듯, 잠시 동안의 구름을 걷은 햇빛이 성당을 비추며 한순간에 밝은 성당의 모습을 자랑했다.

연우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며 태준이 내려가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잘 잡아주며 몽마르트 언덕을 내려갔다.

두 달 뒤, 크리스마스이브.

태준에게 진통이 찾아왔다. 예상보다는 2-3주 정도 살짝 빠르게 태어나는 아이였다. 파리시립병원에서 태어난 아이의 국적은 여전히 한국이었지만 이 아이가 만 13세가 되었을 때 프랑스 국적을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은 게 태준과 연우의 마음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태어난 여자 아이, 임세은이었다.

2주 정도 아이의 경과를 살펴본 후 퇴원시켜도 좋다는 병원의 판단 하에 숙소로 데리고 와서 자고 있는 아기를 둘이 함께 관찰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를 많이 닮은 것 같아서 더 좋다.’

내심 민혁을 닮은 모습으로 태어날까 봐 조금은 마음이 불편했던 태준은 자신과 꼭 빼닮은 듯한 아이의 외모에 무척이나 만족했다. 이는 사실 연우가 더 만족했을 것 같았다.

“우리 이제 엄연히 자식도 있는 부부예요.”

연우의 말에 태준은 눈물을 글썽였다.

“이 아이의 아빠가 되어주겠다고 해서 정말 고마워요.”

저 마음 한쪽 구석에는 늘 연우에게 내심 미안한 마음도 있던 태준이었다. 막상 아이를 낳고 나서도 함께 좋아해 주고 사랑을 주고 싶어 하는 연우의 모습에 많은 감동을 받은 태준이었다.

“당연히. 우리 아이잖아요.”

연우는 태준에게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책상 옆 선반에 갈색 액자틀 속 에펠탑 앞에서 행복해 보이는 둘의 사진이 보였다.

세 달 뒤.

[파리에서도 오메가 인권 운동이 발발]

[파리, 오메가들을 타깃으로 한 테러 이후 인권 운동 시작되어]

[프랑스 법무부 장관, “우리도 한국처럼 인권법 개정해야”]

[한국의 촛불 오메가 운동이 현재 파리 인권 운동의 모티브]

연우와 태준이 한국으로 건너가고, 민주경 의원이 최종적으로 대통령 당선도 되고 난 3월이었다.

한국은 태준이 당했던 강간 사건을 가장 첫 발단으로 민준이 처벌을 받는 판례가 생기면서 오메가 강간에 대한 법률이 제정될 수 있었고, 알파보다는 상대적으로 오메가가 훨씬 많은 집단인 아티스트들을 감금해뒀던 예당 기업 관련 인물들도 처벌함으로써 그에 준하는 법률들이 또 제정될 수 있었다.

도화선이 된 예당 게이트는 전 국민적인 관심사가 되었고 이는 수많은 오메가들과 그 가족들이 촛불을 들고 시위할 수 있게 만들었다.

2021년, 오메가 인권법이 따로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이와 관련된 법안들을 입법하는 과정을 향후 5년간 할 것 임을 대한민국 정부가 밝혔다.

이 개혁은 파리를 시작으로 세계 각지의 오메가들의 인권운동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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